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 마종기 시작詩作 에세이
마종기 지음 / 비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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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의 어느 저녁, 항구에서 노을을 보고 있던 한 소년의 찬란한 놀라움과 경외심에 찬 눈동자에 남았다가 그날 밤 소년의 꿈속에서 깨끗한 아름다움을 잠시 빛내고 사라져주기를 바란다.(아 그 가난하던 소년은 혹시 나였던가?)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시가 한국 문학사를 빛낸 걸작으로 거창하게 기억되는 것보다 시를 읽어 준 사람의 가슴에 오롯이 남기를 바란다는 마종기 시인은 정말 시인답다. 그리고 그는 소년임에 틀림없다. 이런 감수성을, 또 꿈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에 말이다. 그의 진가는 모 방송국 심야 낭송 프로그램인 <낭독의 발견>을 통해 진작 알아보았다. 그 전에도 시는 몇 편 접한 적이 있었지만 무덤덤했던 터였는데 그 날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읽던 시인이 내뿜는 아우라, 그 도도한 울림에 온 몸이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청년, 아니 소년의 수줍은 듯 순수한 성정이 배어나오는 외모에 온화한 음성으로 잔잔하게 낭송하는 것을 들으며 문학의 향기에 인간의 매력에 한껏 취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시의 울림에도 자연 공감이 되었던 것일 게다. 그때 나는 시적 화자인 마종기 시인이 된 듯, 혹은 아빠와 얘기를 나누는 딸아이인 것처럼 울렁거렸다. 

마종기 시인이 시작 에세이를 펴냈다. 남다른 인생 역정이었고 더구나 내밀한 감성의 촉수가 유난히도 발달했던 터이니 시에 배어 있는 사연도 각별할밖에.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된 시를 발표해 온 시인은 시종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지만 가슴 한켠 새겨진 옹이자국이 그대로 읽히는 듯했다. 더러는 눈물의 흔적이 선연히 어려 있기도 했다. 하니 사연은 담담한 듯 절절했고 무심한 듯하면서 진심을 담고 있었다. 그 중 누이동생에 대해 쓴 ‘연가 4’가 특히 아리게 다가왔다.

연가 4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젊은 들꽃이 되어
이 바다 앞에 서면

나는 긴 열병 끝에 온
어지러움을 일으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망각의 해변에
몸을 열어 눕히고
행복한 우리 누이여

쓸려간 인파는
아직도 외면하고 

사랑은 이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사연을 모른다면 일견 사랑을 노래한 관념적인 시라고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열편이 넘는 연가 시리즈가 하나 같이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노래한 것이고 그 중에서도 이 시는 바로 시인의 누이동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은 거라는 걸 알면 아! 하고 눈이 확 뜨일 것이다. 구절 하나하나에 박혀있는 생의 곡절이 선하게 그려지게 될 것이니 말이다. 누구보다 착하고 똑똑하고 예뻤던 시인의 누이가 여대 1학년 때 집안의 극력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더니 결국 남편에게 혼쭐이 나 이혼의 아픔을 겪은 다음 외국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하고 재혼에도 성공한 다음 이제 사회봉사에 매진하는 등 굴곡 많은 인생 유전을 거듭했는데, 그 과정과 고비마다의 아픔이, 그리고 이제 막 누리게 된 행복과 사랑이 이 시에 절절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면서 누이가 어릴 때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문학에 빠지는 등 감성이 풍부했었는데 세파에 찌들어선지 메마른 생활인이 되어버렸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하고 있기도 했다. 시인은 이처럼 시를 쓸 당시의 생각이나 주변 상황,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의 뿌리 같은 것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니 그의 시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오롯이 읽어낼 수 있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얘기를 듣자니 작가의 말에서 들었던 고백이 되살아났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그 누구도 아닌 외로웠던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음을 수줍게 밝힌 것 말이다. 고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나 가족 친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시를 쓴 게 실은 자신이 위로받고 또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거나 우아하게 포장하지 않고, 또 자기 연민에 빠져있지도 않다. 담담하게 사랑의 대상이었던 시에 대해, 자신과 주변인들의 삶과 생각에 대해 목소리를 낮추고 내밀하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힘을 지니고 있달 밖에. 하여 이 한권의 책으로 마종기 시인의 내면을, 그의 시의 속살을 상당 부분 읽을 수 있어서 유쾌했고 한편으론 아릿한 연민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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