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작품을 이제 4권 읽었다. 지난 날 독서 기록을 찾아보니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2016년에 읽었다. 그 이후에 ‘흰‘이라는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아 미뤄두다가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다. 한강 작가의 ‘흰‘을 읽으며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분이 안 된다. 장르가 뭐 중요한가, 작품 속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가 뭔지 파악하는게 중요하지. 어쨌든.‘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난 그저 ‘흰‘이라고 하면 그저 순결함, 깨끗함, 고결함, 순수함 정도만 떠올렸는데......흰 것에 대한 목록 속에 ‘하얗게 웃다‘가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웃는다는 건 어떻게 웃는 것일까. 그건 어떤 웃음일까. 아이들의 환한 웃음일까.그런데 작가는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이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졌다.
그들 자체가 사랑이었다. - P326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 P133
윌리엄이 그녀의 한 사람이었다. 실비의 심장이었다. 그가 그녀 안의 모든 분자를 바꾸어놓았다. 실비는 사랑이 해일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꿈꾸었고,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사랑이 불가능할 줄은, 막다른 골목일 줄은, 말할 수 없는 것일 줄은 몰랐다. - P296
윌리엄은 아버지가 아이의 인생에 존재하면서도,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알았다. 소리 없이 계곡을 떠내려가는 빙하 같은 부모님의 슬픔이 그를 형성했다. - P303
"하지만 깨달은 게 있어요. 내가 낭만적이라서, 대단한 삶을 살 운명이라서 그런 꿈을 꾸는 거라고 늘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진짜 인생이 두려워서 그런 꿈을 꾸었고, 너무 엄청난 꿈이라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난 그런 사랑을 직접 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서로 사랑했지만 슬프게도 불행했어요. 우리 동네에 사는 다른 부부들도 다 그랬고요. 당신은 그런 사랑을 정말로 본 적 있어요?" - P314
한 단어씩 적어갈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책을 꼭 완성하고 싶다고, 이것을 쓰는 과정이 무엇인가를 변화시켜줄 것 같다고 느꼈다.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거즈 같은 무엇인가가 필요했다고. - P10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 P10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 P11
거리를 걸을 때 내 어깨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말, 스쳐지나가는 표지판들에 적힌 거의 모든 단어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 P23
서리가 내린 흙을 밟을 때, 반쯤 얼어 있는 땅의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과해 발바닥에 느껴지는 순간을 그녀는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흘러나온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돌이나 건물 같은 단단한 사물들은 미묘하게 더 무거워 보인다. 외투를 꺼내 입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뒷모습에, 무엇인가 견디기 시작한 사람들의 묵묵한 예감이 배어 있다. - P48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 P55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 P59
하얗게 웃는다. 라는 표현은 (아마) 그녀의 모국어에만 있다. 아득하게, 쓸쓸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너는 하얗게 웃었지.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그는 하얗게 웃었어.이렇게 쓰면 (아마) 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 P78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 P81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