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참, 들어보라고! 머리를 탁 때리는 생각이, 살아 있어서 이 얼마나 좋은가. 살아 있어서! 그러다 네게 말하고 싶어졌어. 무슨 말인지 알아?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브루노, 아름다운 것이자 영원한 기쁨이라고. - P118

세상이 더는 똑같이 보이지 않았다. 너는 바뀌고, 그러다 또 바뀌는구나. 개가 되고, 새가 되고, 항상 왼쪽으로 기우는 화초가 되는구나. 내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내가 얼마만큼 그애를 위해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는 것은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고, 책을 쓴 것도 읽을 수 있는 그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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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을 둘이 처음 만났던 여름만큼 생생하게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을 외면했다. 때로 엄마는 물과 공기만으로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알려진 고등 생명체 중 그렇게생존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로서, 엄마의 이름을 딴 생물종이 하나있어야 마땅하다. - P72

언젠가 줄리언 삼촌이 해준 얘기에 따르면,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머리 하나를 그리기 위해 때로는 몸 전체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뭇잎을 그리기 위해서는 전체 풍경을 희생해야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한계를 지우는 것 같을지 몰라도 시간이 좀 지나면, 하늘 전체를 다루는 척 할 때보다 무언가의 4분의 1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부분을 다룰 때, 우주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붙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
엄마는 나뭇잎이나 머리를 택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택했고, 어떤 느낌을 붙잡기 위해 세상을 희생했다. - P72

진화라는 개념은 너무 아름답고도 슬프다. 지구상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로 지금까지 오십억에서 오백억 정도의 생물종이 생겨났는데, 그중 겨우 오백만에서 오천만 종 정도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종의 구십구 퍼센트는 멸종한 것이다. - P81

내가 자라서 절대로 하지 않을 것 한 가지는 사랑에 빠져 대학을 중퇴하고 물과 공기로만 버티는 법을 배워서, 내 이름을 딴 종의 시조가 되어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 P85

소포를 보내야 한다는 것, 내가 맘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것,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드는 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당하지 않은 일이 아주 많다. - P94

나중에 아주 오랜 뒤에, 그는 두 가지 후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는데, 첫째는 그녀가 고개를 젖혔을 때 전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목에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이 잘못된 문장을 택했다는 것. - P98

그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또한 어둡고 육중한 차이가 둘 사이에 가로놓여 있어서, 로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쓰다보니 더욱 그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하지만 리트비노프는 자신의 과거나 잃어버린 모든 것에 관해 좀처럼 얘기하지 않았다. - P102

인간의 최초 언어는 손짓이었다. 사람들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언어는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으며, 손가락과 손목의 섬세한 뼈를 이용한 무한한 조합의 동작으로 현재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손짓 하나하나가 복잡하고 미묘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발휘되었던 섬세함은 그때 이후로는 완전히 상실되었다. - P111

언어의 손짓과 삶의 손짓에는 아무런 구분이 없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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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 P149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이미 초래된 결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보태려는 사람들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가보다. - P151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 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증오였다. - P154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 P154

금복은 역시 무언가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피어나는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엔 조금씩 생기가 돌고 부둣가 사내들을 안달나게 했던 그 향기도, 이전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풍겨나기 시작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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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여러 번, 우리의 만남을 상상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는 나의 아들로서 만나는 일을. 그렇긴 하지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객석의 한 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였다. - P45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날려가는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심장마비도 없었다. 문간에 서 있는 천사도 없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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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P10

나는 다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날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P11

오십 년이 넘도록 열쇠공 일을 했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상상했을 법한 삶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실은 그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혹은 안으로 들이면 안 되는 것들을 막아내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게 도왔다. - P12

바보라도 창가에 세워두면 스피노자가 된다. - P12

심근의 이십오 퍼센트가 죽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다시는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났다. 시간 그 자체를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게 되었다. - P12

삶은 새로운 언어를 요구했다. - P14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편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 P14

탁자를 쾅쾅 내리치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렇게 가려나보다. 발작적으로 웃다가, 더 나은 길이 뭐가 있을까, 웃으며 울고, 웃으며 노래하고, 웃으며 혼자라는 사실을, 인생이 끝났다는 사실을, 죽음이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보다.

때때로 나는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하나이며 똑같다고 믿었다. 책이 끝나면 나도 끝날 거라고, 큰바람이 방을 휩쓸어 원고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고, 허공에 펄럭이던 흰 종잇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방이 고요해질 거라고, 내가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빌 거라고. - P20

앞으로도 하나뿐인 사랑일 여자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어쨌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숨기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 P26

죽어 있는 나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 P29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에 닿는 바람과 빗방울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P29

어딘가에 말하고 싶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왔다고. 그렇긴 하지만. 살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때가, 아니 여러 해가 있었다.
추함이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원한을 품을 때 느끼는 어떤 만족감이 있었다. 원한을 자초했다. 바깥에 서 있는 그것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세상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세상도 내게 인상을썼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혐오의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P34

나는 바로 뒤에 사람이 오는데도 문을 쾅 닫아버리곤 했다.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었다. 계산원들이 동전을 가로챈다고, 그 동전을 손에 쥐고서, 욕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비둘기에게 독약이나 먹이는 부류의 얼간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날 피하려고 도로를 건너갔다. 나는 암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더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분노를 어딘가에 두고 왔다. 공원 벤치에 내려놓고 걸어나왔다. 그렇긴 하지만 너무 오래 그렇게 살아와서 다른 존재 방식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잠에서 깨어나 혼잣말을 했다. 아직 너무 늦진 않았어. 처음 며칠은 이상했다. 거울 앞에서 미소를 연습해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왔다. 마치 묵직한 추를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내가 내려놓았더니 무언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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