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보면 모두 똑같아 보이는 동물 무리-풀을 뜯는 임팔라 무리, 고등어 떼, 비둘기 떼-안에는 각자 다른 역사와 다른 잠재력을 지닌 수많은 개체가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화를 배척하는 일, 저런 동물 무리를 보는 순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제한하는 일일 것이다. - P67

이 탄피들은 나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는 정서에 관해, 이렇게 외딴곳에 있는 황량하고 사실상 아무도 점유하지 않는 땅을 식민지화하려는 현대 국가의 집요함에 관해, 인류가 정치적 신념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일에 보이는 열성에 관해 도발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P73

근처 수역에 살던 대왕고래, 남방참고래, 보리고래 같은 큰고래 개체군들은 한때 어마어마한 개체 수를 자랑했지만, 20세기 들어서까지 계속된 남획 탓에 아직 그 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인간의 또 다른 집요한 욕망이 불러온 결과인데, 그것은 바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무엇이든 새로운 곳에서 발견한 것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려는 욕망이다. - P73

자기 가족에게 먹을 것을 제공한다는 것은, 그 먹을 것이 물범 고기든 자루에 든 곡식이든 아보카도 과육이든, 죽음이 생명을 공급하는 방식에 관한 불편한 질문과 다시 마주하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이 범하는 죄를 직시하는 일, 자신의 일족이 계속 생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다른 생명을 빼앗기를 선택하는 일이다. - P75

이것은 나에게 인간의 삶에서 상징적인 것이 지닌 중요성, 그리고 부양의 결과와 부양의 의무 둘 다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 P76

그것은 내게 과거와 현재에 인간이 겪고 있는 파국적 고통에 대한 세계적인 무관심을, 내가 살아오는 동안에는 시베리아와 캄보디아에서, 샤 치하의 이란과 찰스 테일러 재임기의 라이베리아에서,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에서 일어난 것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학살을 겪어온 인류의 운명에 대한 전 세계의 무관심을 상기시키는 물건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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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이 준 자극은-지리, 예술, 음식, 상인들과 나눈 대화-나를 들뜨게 했다. 나는 이 자극이 어떻게든 내가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식의 틀이 되기를 원했다. - P44

그 무렵 나에게 대학의 삶은 대체로 가정적 안락함을, 그리고 평범하게 일하며 사는 세계에 대한 의도치 않은 무관심을 의미하게 되었다. 강의실의 삶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은둔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곳의 광범위하고 학식 있는 대화에서 줄곧 받았던 강렬한 자극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계속 머물기에는 안전하지 않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 P45

처음에는 내가 저널리스트로서 여행하고 있다고, 더 특권 있는 세계에서 바깥으로 나가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당시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작가로서 내게 미학적 의무뿐 아니라 윤리적 의무도 있다고 확신했다. 그 의무란 세계를 집중하여 경험하고 그런 다음 내가 본 것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언어로 옮기는 것이었다. - P46

아무리 여러 차원에서 엄밀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그곳을 아무리 여러 번 여행한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한 장소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장소 자체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장소는 그 깊은 본성상 투명하지 않고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 P49

인류학자 칼 슈스터는 문화적 인식론, 즉 사람들이 인식하는 방식을 비교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이 세상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아주 어렴풋이라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은 누구든 사람들이 가정하는 것과는 이 세상이 무척 다르다는 것이다." - P49

모래 한 알 속에 우리를 위한 온 세상이 갖춰져 있다는 불멸의 은유 - P55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떠나는 일의 곤란-떠나고 싶은 너무나 강력한 욕망, 그러나 동시에 어떤 틈이 벌어지고 결속이 단절된다는 느낌, 그리고 그 틈과 단절은 오직 돌아오는 것으로만 복구될 수 있다는 느낌-속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 P58

인간에게 무관심한 자연의 세계가 우리를 덮쳐오는가운데, 우리가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인류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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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이 내 안의 뭔가를 달래준다는 걸 알았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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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살갗을 바꾸는 일이다." - P7

나는 아이에게 우리 인간들은 때때로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서로를 해하는 짓을 한다고 설명해준다. - P14

아이는 호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볼 순 없지만, 어떤 나무들은 처음 살던 나라에서 다른 장소로 실려 와서도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 P25

물론 그 누구의 인생도 이렇게 기억의 구슬들을 꿰어놓은 것처럼 깔끔하고 명료하게,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긴 인생이란 불완전하게 기억된 결심들이 연거푸 쏟아져 내리는 일종의 폭포로 이해할 수도 있다. 초기에 품었던 결심 중 어떤 것들은 희미하게 지워진다. 잃어버린 기억과 배신, 믿음의 상실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우회로를 거치고도 이어지는 결심들도 있다. 또 어떤 결심들은 세월이 흘러도 약간만 변형된 채 계속 유지된다. 예상치 못한 트라우마와 상처를 만나면 차는 언제든 도로 밖으로 탈선할 수 있고, 그러면 그 사람은 영원히 목적지를 상실할 수도 있다. - P34

하지만 이를테면 불타오르듯 뜨거운 얼굴에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것과 같은 의도치 않은 순간에 솟아나는 가늠할 수 없는 숭고함이 계속하겠다는 결심을 되살릴 수도 있으며, 최소한 일시적으로라도 자기 회의와 후회가 주는 삶의 무게를 줄여줄 수도 있다. 혹은 휘청거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아름다움 앞에 선 한순간이 한때 그 사람이 품었던 큰 의미를 지닌 삶을 살겠다던,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는 삶을 살겠다던 결심에 다시금 불을 당길 수도 있다. - P34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더블클러치로 변속하는 그의 민첩한 발동작을 바라보던 나는, 그가 자기 세상의 본능적 경험 속으로 나를 초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P38

내가 탐닉했던 비행의 아름다움은 대학교 1학년 때 알루미늄의 인장력에 대한 수업과 풍동 시험을 분석하는 수학, 항공공학의 경험주의와 충돌했다. 열대의 푸른 캘리포니아 하늘과 겹겹의 구름을 향해 텀블러비둘기들을 날려보낼 때마다, 혹은 유칼립투스에 앉아 있던 그 새들 사오십 마리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신호에 촉발되어 별안간 박차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던 심장의 빠른 박동은 화학에서도 물리학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별들이 보석처럼 박힌 밤하늘 아래 사하라 서부의 모래언덕들 위를 스치듯 날아가던 생텍쥐페리의 저돌적인 정신은 미적분학 강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물리학 세미나에서도 이카로스의 도전적이고 무모한 허세에 담긴 의미는 다루지 않았다. - P43

열일곱 살의 나는 세상과 직접 맞닿는 경험을 갈망했다. 하지만 내 충동 대부분은 형태도 목표도 없는 순전히 은유적인 충동이었다. 나는 미성숙한 수많은 남자아이가 그렇듯 모종의 지위를 성취하려는 필사적인 마음에 허둥대기만 할 뿐, 그 갈망을 명확히 구현하지는 못했고 자의식만 가득했으며 방어적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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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는 ‘재일코리안‘, ‘오키나와인‘, ‘장애인‘, ‘게이‘라는 식으로 언제나 손가락질당하고, 딱지가 붙여지고, 지목 당한다. 그러나 다수자(majority)는 ‘일본인‘, ‘내지인‘, ‘건강한 사람‘, ‘이성애자‘라고 손가락질당하고, 딱지가 붙여지고, 지목 당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재일코리안‘의 상대어라고 하면 편의적으로 ‘일본인‘이라는 말이 끌려 나오지만, 애초부터 이 두 단어는 같은 평면 위에 나란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쪽은 색깔에 물들어 있다. 이에 반해 다른 쪽은 다른 색깔에 물들어 있지 않다. 이쪽에는 애당초 ‘색깔이란 것이 없는‘ 것이다. - P166

한쪽에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다른 한쪽에 ‘일본인이라는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쪽에는 ‘재일 코리안이라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애초에 민족이라는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있을 따름이다. - P166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이다.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바로 평범한 보통 사람이다. - P166

난 이것이야말로 평범함이라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수하게 티셔츠만 걸쳐도 여자로 있을 수 있다는 것. 물론 우리 남자는 더 나아가 ‘어느 쪽에 속하는 성(性)인가?‘를 생각하는 과제조차 면제받고 있다. 남자는 마음껏 ‘개인‘으로서 행동하고 있지만, 우리 곁에서 여성들은 ‘여자로 있다‘ - P167

누구도,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세계, 자기가 누구인가를 완전히 망각한 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 그것은 우리 사회가 꾸는 꿈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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