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앞으로 흘러가는 한, 그녀에게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두려운 건 과거였다. 칼자국이 작살에 배가 꿰뚫린 채 물 속으로 잠겨들던 시간이었으며 폭풍우 몰아치던 밤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운 건 가슴을 풀어헤친 채 미친년처럼 바닷가를 허우적거리던 순간이었으며, 시간이 거꾸로 흘러 그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이 들면 꿈을 꾸고 꿈을 꾸면 어김없이 칼자국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P128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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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허상을 좇는 동안 나오꼬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청춘도 이미 모두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희롱한 신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맹세로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잘랐다. - P96

살다보면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엉뚱한 미망이나 부조리한 집착에사로잡힐 때가 있게 마련이다. - P106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있는 것일까? - P117

평생을 하역부로 일한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나르게 된 짐은 바로 그 어떤 짐보다도 무거운 제 자신의 몸뚱이였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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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갑자기 그 놀라운 세계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금복은 뭔가 속은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오르가슴을 향해 솟아오르다 추락한 것 같은 허망함과 아쉬움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그 순간 그녀는 방금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신기한 세계가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길 간절히 원했다. 그리고 만일 누군가 그렇게 해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과 맞바꾸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8

극장에 들어가 한 짓이라곤 겨우 영화 한 편 본 것뿐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뭔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녀는 그날의 사건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놓을지 짐작하지 못했다. - P79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 P82

그날 걱정은 짧은 한 순간에 영웅적인 용기와 어리석은 만용을 순서대로 모두 보여주었다. - P85

-나는, 이번에도, 내가, 그걸 다시,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것은 무지의 법칙이었다. 금복은 비로소 충만한 기쁨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육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단순함의 비극적 측면이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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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야, 너의 이 굵은 다리로는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진흙을 이길 수 있고 이 두꺼운 팔로는 누구보다도 벽돌을 많이 들어옮길 수 있으니 그게 다 너의 복이란다. - P19

그리고 바다를 보았다. 갑자기 세상이 모두 끝나고 눈앞엔 아득한고요가 펼쳐져 있었다. 곧 울음이 쏟아질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 P49

그녀는 언젠가 다시 고향에 돌아간다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물고기와 마을의 저수지보다 수십 배 더 넓고 거대한 바다에 대해 얘기를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소망을 이루기란 어려운 법, 그녀의 인생에서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았다. - P50

그녀는 이제 자신이 어디론가 다른 세계로 건너왔으며, 따라서 앞으로 펼쳐질 인생도 이전과는 다를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 P55

그것은 그녀가 이제 막 건너온 세상의 법칙이었다. - P56

어린 나이답지 않게 금복에겐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 가운데 하나였다. - P58

그러나 물화(物貨)의 덧없음이여! 생선장수가 그 모든 것이 한낱 허상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게 마련이다. - P60

몸길이만도 이십여 장(丈)에 가까운 고래는 등에 붙어 있는 숨구멍으로 힘차게 물을 뿜어냈다. 분수처럼 뿜어올려진 물은 달빛 속에서 은빛으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그녀의 배 한복판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거대한 생명체가 주는 원초적 감동이었다. - P65

걱정은 뭐든지 쉽게 생각했으며 바로 다음날 닥쳐올 일조차 걱정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은 그를 매우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P71

금복은 세상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 P71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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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 P10

‘죽음이란 건 별게 아니라 그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은 일일 뿐 - P11

멀리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극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고래가 깊은 바다 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막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다. - P16

날 때부터 그저 목구멍에 풀칠하는 것을 오로지하여 살아온 그들이었으니 따로 인정이나 동정심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 P29

그들은 노파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지킬 만한 것이 세상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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