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 들어간 춘희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와 부조리로 가득찬 낯선 세계였으며 끔찍한 증오와 광포함이 넘치는 야만의 세계였다. 사람이 과연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고립되어 산다는 게 가능한 걸까? 춘희는 자신의 남은 생을 통해 그 한 예를 보여주었다. - P357

처음에 춘희는 벽돌이 찍혀나오는 것이 신기해 놀이 삼아 끼어들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점차 그 행위에 놀이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文은 언제나 말하곤 했다.
춘희야, 둥글다고 다 시루가 아니듯 네모나다고 해서 다 벽돌은 아니란다. - P359

진흙을 다시 만지는 순간, 춘희는 처음 그것을 만졌을 때 느꼈던 운명적인 일체감을 단숨에 회복했다. - P361

그녀에게 벽돌은 떠나간 사람들을 향한 비밀스런 신호이자 잃어버린 과거를 불러오는 영험한 주술이었던 것이다. - P362

춘희는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벽돌을 만들었다. 벽돌을 만드는 중에 그녀는 문득문득 공장으로 들어오는 진입로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녀는 자신이 기다리는 것이 공장을 떠나간 일꾼들이 아니라 바로 그 트럭 운전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동안 세상에 대해 굳게 문을 걸어잠갔던 춘희로서는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쌍둥이자매나 文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굳게 닫아걸었던 문에 일단 틈이 벌어지자 거대한 파도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 P379

아이를 내려다보던 그녀에게 문득 해일처럼 거대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한꺼번에 목울대를 밀고 터져나왔다. 춘희는 울었다.
절망적으로 슬프게, 숨이 막힐 만큼 필사적으로 울었다. 태양은 점점 더 높이 솟아올랐다. 하얀 눈밭에 춘희는 하나의 점으로 남아 울었다. - P391

그간의 기나긴 외로움과 고통을 모두 담아내 울었다. 온몸을 떨며 격렬하게 울었다. 가슴이 터질 만큼 우렁차게, 목이 찢어질 만큼 처절하게...... 울었다. - P392

자연스럽되 거칠지 않고 아름답되 요란스럽지 않으며 실용적이되천박하지 않고 조화롭되 인공적이지 않은 건물을 짓는 것이 바로 그의 건축학의 모토였다. 그것은 매우 엄격한 통제력과 뛰어난 예술적 영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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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나 부모님이 죽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엄마였다. 세상은 엄마라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평생을 공상에 잠겨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인정사정없는 이성의 추진력으로 우주를 헤쳐나갔다. 엄마는 우리가 벌이는 모든 싸움의 재판관이었다. 엄마의 꾸짖는 말 한마디면, 우리는 구석으로 가 숨어 울면서 순교자의 고난을 겪는 자신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엄마의 입맞춤 한 번이면 우리는 다시 왕자가 되었다. 엄마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혼란 속에서 분해되고 말 터였다. - P193

그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내 집착은 막을 내렸다.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앨마를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에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벽을 세워 그런 생각을 차단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하나하나 그 벽을 이루는 돌이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음을 이해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벽은 또한 유년기의 고통스러운 생생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목덜미에 죽음의 숨결을 느끼며 숲속에, 굴에,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진실을,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심장마비를 겪고나서야, 나를 유년기에서 분리해준 벽의 돌들이 마침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서야, 죽음의 공포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 어느 때 못지않게 무서웠다. - P199

도서관을 나왔다. 도로를 건너며 무자비한 외로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어둡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버려진 채, 간과된 채, 잊힌 채, 보도에 서 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먼지만 모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지나쳐 갔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모두 나보다 행복했다. 해묵은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쳤을 것이다. - P200

세상의 문들이 제아무리 꽉 닫혀 있어도 내게는 진정으로 잠긴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외로움 속에서도 위안을 느꼈다. - P204

결국, 내 친척이 이 기술을 가르쳐준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내가 영원히 투명인간으로 남을 수 없음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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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 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 P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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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 P301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 P310

재판정은 그저 피고의 운을 시험하는 무대였을 뿐 정의와는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장군의 시대는 대개 그런 식이었다. - P311

벽돌을 만지는 동안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으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없는 상실감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 P330

그는 결국 세상에는 비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비밀은 오직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비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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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사람 본인 외에는 그누구의 것도 아닌데. - P178

같은 주제에 각자 얼마나 다르게 접근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친구는 망설임을, 블랙홀을, 말과 말 사이의 가능성이 펼쳐진 들판을 보았다. 친구는 어룽거리는 빛, 비상의 희열, 중력의 슬픔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평범한 참새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았다. 리트비노프의 삶은 실재하는 것들의 무게를 느끼며 기뻐하는 것이었으나, 친구의 삶은 지척거리는 무거운 사실들로 무장한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 P179

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항상 노력해왔다. 그게 내 묘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오 거스키.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P185

묘사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나는 고집스러운 노새처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 P186

내 인생의 이야기. 나는 열쇠공이었다. 이 도시의 어떤 자물쇠라도 열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열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열지 못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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