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에런 제임스Aaron James가 전문 용어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때때로 개자식 노릇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제목(개자식)을 가진 책에서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이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대인관계에서 특별한이점을 언제나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불평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남자, 그는 개자식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 P78

사이코패스는 도덕적 감정이 전혀 없는 반면에 개자식은 자신의 도덕적 권리를 아주 민감하게 의식한다. - P79

개자식이 사람들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은 "그가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도덕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남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개자식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의 존재, 생활, 계획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해서 상식적 예의를 제공하거나 인정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 P79

의무 사항이 있는 곳에는 부채가 있다. 부채가 있는 곳에서 그 부채를 갚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더 나아가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다. - P81

내가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 얼굴을 진정으로 바라보게 될 때, 나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공통성, 유대감, 동류의식(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땅히 완수해야 할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을 나와 함께 공유하는 인간이라는 점, 내가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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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람에게 소리칠 때 분노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의 얼굴은 뭉개진 것처럼 보인다. 자기만의 삶을 가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이름 없는 생소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분노의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특히 자신의 분노 그 자체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 P66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에게도 살아가야 할 삶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사람다운 삶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 P68

우리는저마다 살아가야 할 삶이 있다는 의미에서 별도의 자영업자이다. 우리 삶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 P70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표정을 마주하고, 또 인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상황들에서 우리가 다른 행동을 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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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개인으로 봤을 때 좋은일이 반드시 집단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 P36

우리가 엄격한 도덕에 대하여 펴고 있는 두 가지 반론은 결국 합쳐진다. 첫 번째 반론은 이런 것이다. 만약 남들에게 도움을 주는 목적이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을 돕는 데 있다면, 나 또한 나 자신을 위하여 유의미한 삶을 영위할 허가를 받은이다. 두 번째 반론은 만약 모든 사람이 엄격한 도덕에 따라 행동한다면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아주 의미 있는 삶을 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이 두 반론을 종합하면 피터 싱어와 다른 엄격한 도덕철학자들이 제안하는 행위와 도덕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된다. - P37

사실을 털어놓고 말해보자면, 보통 사람들 대부분은 싱어와 그 밖의 다른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종류의 엄격한 도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 설사 그런 도덕이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굶주림을 종식시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우리 자신을 극단적 형태의 이타주의에 전적으로 헌신시키는 것은 우리의 능력 범위 밖에 있는 것이다. 우리들 중에 도덕에 신경 쓰지 않는 자는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도덕과 무관한 일들에 너무나 강하게 몰두해 있으므로 도덕이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해도 포기할 수가 없다. - P37

우리 보통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결과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차선으로 만족하는 사람들 satisficers‘이다. - P43

물론 우리가 하루 24시간 정언명령을 지키며 살 수는 없다. 항상 정직하기, 모든 약속을 지키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우리의 능력껏 재능을 개발하기 등은 우리에게 과한 요구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언명령을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모범으로 받들 수 있고 최선을 다하여 그에 부합하도록 노력할수 있다. - P45

칸트의 의무론은 그 나름의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약속을 위반하면 커다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약속을 무조건 지켜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면 상대방의 기분을 아주 나쁘게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는가? 칸트의 의무론이 적절한 도덕적 지침이 되려면 그 의무론을 일상적 도덕 생활에 좀 더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와 같이 정언명령이 우리 경험의 지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경험이 정언명령을 결정해버릴 위험이 있다. - P45

품위 있는 도덕적 행위는 이 세상에는 살아가야 할 삶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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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이므로 합리성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배신하는 것이다. - P30

도덕적 요구 사항(결과론, 의무론, 덕 윤리 등 어느 도덕이든)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약속과 계획도 희생시켜야 한다는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일까? - P31

우리의 생활 중에는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측면들, 즉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측면들이 있다. 이런 측면들 중 하나가 사람들마다 다른 개성이다. - P31

사람들의 삶 속에는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다른 측면들이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측면들도 있다. - P32

직업은 전반적으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삶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다. - P32

만약 우리가 우리보다 행운을 덜 누리는 사람들의 삶에 기여해야한다는 요청을 받는다면, 그런 기여가 그들의 삶을 좀 더 살 만한, 즉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 P32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소중하게 여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인생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P33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의 핵심적 의미는 그들이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유의미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면 나 또한 그런 삶에 자격이 있다. 그런데 남들이 유의미한 삶을 추구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내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을 희생해야 한다면, 내 삶의 가치는 그들의 삶의 가치보다 떨어진다고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된다. 만약 우리가 심각한 곤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중요한 의무를 받아들였다면, 그 의무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측면을 희생시키지 않는 행위들로 국한되어야 한다. - P33

우리가 굶고 있는 사람들, 혹은 탄압받는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중요한 의무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핵심적 측면들을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반드시 승복해야 하는 도덕적 엄격함의 한계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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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가리켜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이라고 주장했다. 이 그리스어는 종종 ‘행복happiness‘이라 번역되는데 ‘번창하기 flourishing‘가 더 좋은 번역어이다.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선은 영혼이 덕에 일치하여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 P22

덕 윤리가 결과론, 의무론과 뚜렷하게 다른 점은 도덕적 관심이 행위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도덕적 상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론과 의무론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덕 윤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P22

잘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 절제, 지혜, 관대함 등의 여러 가지 덕목을 함양하고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양극단 사이의 중용을 취할 때 얻어지는덕목이다. - P23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결과론과 의무론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리고 이 세 이론은 올바른 도덕적 존재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준다. - P24

얕은 연못가를 지나가다가 연못에서 익사 직전의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나는 당연히 그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아이를 꺼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내 옷은 진흙투성이가 될 테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물에 빠져 죽는다면 너무나 슬프고 나쁜 일일 테니까 - P27

피터 싱어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연못에 빠진 이 아이를 구하려는 노력과 지구 반대편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구제하는 데 힘쓰는 구호 단체에 수표를 써서 기부하는 행위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어 피터 싱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연못에서 아이를 구하는 행위는 의무가 되고, 구호 기금을기부하는 것은 자발적 자선행위(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행위)가 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고 따진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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