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부」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는 조직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잡지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해서, 격렬한 비판을 펼치겠다고 예고했다. 그 뒤로 크리벤코 선생,「우리의 문화 용병들」과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문학과 삶」이 잇달아 발표됐다. 잡지에서는 국가 경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유자코프,「러시아 경제 발전의 문제점」들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잡지는 '인민의 벗들'이라는 견해와 전술을 제시한다고 일반적으로 내세웠고, 따라서 이 신사양반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최대 적들이다. 그러므로 인민의 벗들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그들의 사상과 전술 등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이론적 원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유물사관을 연구했다. 관련된 이론적 원칙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방대한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장광설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한 적은 있었던가라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 모든 경제 문헌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논리력과 결합시키는 작업의 전형을 보여줬다. 오랫동안 잊혔었거나, 오늘날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들을 발굴해냈고, 여러 많은 특별 위원회들로부터 제출된 공장 감독관들 보고서나, 전문가 증언에 따른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막대한 양의 사실 자료들을 검토했으며, 한 쪽으로는 자신의 경제 이론들에 대한 논거를 제공하고자, 다른 쪽으로는 명확하게 실증해보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냈다. 새로운 시각에서 인류의 지난 날 전체를 설명하고, 역사 철학에 대해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이론들을 요약했다. 마르크스의 열의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 알려진 모든 이론들을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세계사에서 수 많은 사실들을 연구했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통상적으로 다루는 다윈과 비교는 그런 믿음을 확인하는 데 훨씬 더 큰 기여를 한다. 그렇다면 다윈의 전체적인 연구는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확실한 사실에 입각한 자료에서 진정한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들을 일반화하는 데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윈에 충분히 비견될 만한 마르크스 연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로부터 그런 연구는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단하고, 폭 넓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전혀 찾아볼 수는 없다.'
장광설은 전반적으로 매우 독특하고,『자본』과 마르크스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얼마나 미흡한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장을 펼치는 마르크스 방식의 엄청난 설득력에 압도된 대중이 마르크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마르크스를 칭송하면서도, 이론의 기본적인 내용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주관적 사회학'이라는 낡은 노래들만 조용히 읊조린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가르침들에 대한 자신의 책 서두로 선택한 매우 적절한 문구를 떠올릴 수 있다.
클로프슈토크(Klopstock)를 칭송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그의 시를 읽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덜 칭송받더라도,
더 열심히 읽히기를 원한다.
정확히 그렇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을 줄이는 대신에, 마르크스의 책을 좀 더 부지런히 읽거나, 하다못해 자신이 읽은 내용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과 논리력을 결합시키는 작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문구로부터 미하일로프스키는 빛나는 문장이 부족한 본질과 어떻게 결합되는지 전형을 보여준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장했듯이 말이다. 그런 주장은 매우 정당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논리력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저 정광설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의 논리력이 매우 좁은 의미에서, 경제이론들에만 전적으로 집중됐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논리력을 드러낸 분야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걸 한층 강조하고자, 매우 세세한 부분과 철저함,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 등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이런 이론들을 구축하는 데 있어 본질적으로 새롭거나,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건 전혀 없고,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이뤘던 경제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나, 완전히 새로운 경제학 개념을 세우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는 듯이 들린다. 그러나 『자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16년 전, 미하일로프스키는 천벅한 부르주아, Y. 주코프스키(Zhukovsky) 선생과 논쟁을 벌일 당시에, 「조국 연보」에, 마르크스에 대해 썼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가 다르고, 정서도 더 신선했기 때문에, 어쨌든 당시에 미하일로프스키가 쓴 글의 어조와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현대 사회의 발전 법칙, 경제 작동 법칙을 밝혀내는 게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라고 말했었고, 그 방침을 엄격하게 고수하고 있다고 1877년에 말했었다. 그렇다면, 비판자인 그가 인정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고수했던 방침을 살펴보자. 현대 사회의 경제학적 발전 법칙을 밝혀내기 위한 방침 말이다.
서술에서는 설명이 요구되는 몇 가지 질문들에 맞닥뜨린다. 마르크스 이전 모든 경제학자들은 사회 일반에 대해 말하는데, 마르크스는 왜 근대 사회를 말할까. 마르크스는 '근대'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며, 근대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구분하는가. 더 나아가, 사회의 경제 작동 법칙으로부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가치의 생산만이 유일하게 경제학 법칙들의 대상이지만, 분배는 정치, 곧 정부와 지식인 등이 사회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말을, 「러시아의 부」에 속한 사회적 환경의 평론가들과 경제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발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경제학자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경제 작동 법칙을 말하고, 심지어 법칙을 가리켜, 자연 법칙이라고까지 말하는가. 우리나라에서 무수한 사회학자들은 사회 현상은 자연사 현상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며, 따라서 사회 현상들에 대한 연구는 완전히 별개의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을 활용해야 한다는 걸 입증하고자, 수 없이 많은 논문을 쏟아내고 있는 때에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당혹감은 생겨날 수밖에는 없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면,『자본』에 대해 말할 때, 결코 그런 당혹감을 피할 수는 없겠다. 같은 물음들을 자세히 해명하고자, 먼저『자본』의 서문에서 불과 두세 줄 아래에 나온 단락 하나를 더 인용해보자.
'내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 사회구성체 발전은 자연사적 과정이라 여겨진다.'
엄격한 일관성과 보기 드문 논리력을 보여준『자본』의 기본적인 발상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하는 건 방금 서문에서 인용한 두 단락들을 비교해본다면 충분하다. 먼저 모두에 관한 두 가지 상태들을 주목해보자. 마르크스는 하나의 '경제적 사회구성체 발전', 곧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만 말하며, 스스로도 다름 아닌 자본주의 형성의 발전 법칙만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바로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는 자신의 추론을 풀어나갈 때 활용했던 방법론에 대해서도 주목해보자. 방법론들은 조금 전 미하일로프스키도 말했지만,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기반을 둔다. 주관에 치우친 이 철학자가 그렇게도 노력하게 피해 가려 애썼던『자본』의 기본적인 발상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정확히 말해,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무엇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런 구성체 발전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연사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또 여겨져야만 하는가. 오늘날에도 직면한 물음이다. 오래된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관점에서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사회 일반을 말하고, 사회 일반 성격, 사회 일반 목적과 본질 등에 대해 스펜서 학파와 논쟁을 벌인다. 주관에 치우친 사회학자들은 사회 목적은 구성을 이롭게 하고, 정의는 이러저러한 조직체를 요구하고, 사회학은 일종의 유토피아 낙원에서 출발한다는, 주관적 방법론을 주장하던 필자 중 한 사람인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의 방법론의 핵심을 훌륭하게 보여주며, 이상적인 조직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체제는 비정상적이고, 파기해야만 한다는 논거에 따라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학의 본질적인 임무는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부분들을 충족시켜주는 사회적 조건을 규명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인간 본성을 충족시켜주는 사회일 뿐, 소수로부터 다수의 노예화와 같이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상에 기초한 어떤 이질적인 사회의 형성 과정이 절대 아니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사회의 발전을 자연사의 한 과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바람직하다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이려면, 그 사회학자는 바람직한 게 실현될 수 있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게 제거될 수 있는 조건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게 미하일로프스키 논리였다. 더군다나 발전에 관한 말조차 있을 수 없고, 바람직한 걸로는, 다양한 일탈들과 사람들이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결과로 역사에서 발생한 결함들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며,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거니와 그런 이성 체계의 실현을 위한 조건도 발견할 수가 없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따른 발전은 자연사 과정이라는 마르크스에 따른 기본적인 발상이 사회학이라는 제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유치한 도덕률에 따른 근본 자체를 잘라버린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떻게 이런 기본 발상에 이르렀는가. 사회적인 삶에 따른 많은 영역들로부터 경제 영역을 골라내고, 다른 모든 관계를 결정짓는 기본적이고, 주요한 관계로 생산 관계를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로부터 선별해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추론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엄습한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내가 착수한 최초 작업은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다. 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졌다. 국가 형태들뿐만 아니라, 벌률 관계들 또한 그 자체나 이른바 인간 정신의 일반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될 수는 없고, 오히려 헤겔은 18세기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선례로부터 시민 사회라는 이름 아래 묶어놓은 총합인 삶의 물질적인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시민 사회 분석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만 한다. 내가 도달한 대체적인 결론을 간략하게 표기하자면, 곧 인간은 그들 삶의 물질적인 생산력에서 일정한 발전 단계에 부합하는 생산 관계 말이다. 생산 관계에 따른 총합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법과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세워지고, 명확한 사회적인 의식 형태들이 그 토대에 부합된다. 물질적 삶에 따른 생산 양식은 사회적·정치적·정신적인 생활 과정 일체를 좌우한다. 인간의 의식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에 따른 물질적 생산력은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여태껏 그 안에서 생산력이 작동해왔던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생산력 발전 형태들에서 볼 때 이런 관계들은 족새로 변한다. 그러면 사회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토대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 구조 전체가 대략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그러한 변화를 고찰함에 있어 자연과학 측면에서 인정되는 생산 조건에 따른 물질적 변화와, 인간들이 갈등을 의식하고, 해결하고자 싸워나가는 틀인 법률적·정치적·종교적·미학적 또는 철학적 간단하게 말해서 이념적 형식들에 따른 변화를 언제나 구분해야만 한다. 한 개인으로 판단할 때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근거로 삼지는 않듯이, 그러한 변화 시기를 정반대로 물질적 삶의 모순,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 현존하는 갈등으로부터 그 의식을 설명해야만 한다. 대체로 사회에 따른 경제 구성체가 점차 발전해갔던 시대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 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들 수 있다.'
사회학에서 이런 유물론적 사고는 그 자체로도 천재적이다. 한동안 가설일 뿐이었지만, 역사와 사회 문제들을 엄격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최초로 열어주었다. 그때까지 사회학자들은 생산 관계 같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관계에서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로, 정치적·법적인 형태들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와 연구만을 수행해왔고, 그러한 형태들이 논의 대상 시기에 살았던 이류의 특정한 사고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을 우연하게 발견해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사회적 관계들이 인간으로부터 의식적으로 확립됐듯이 말이다. 그러나『사회계약론』이라는 사고에서 충분히 표현된, 공산적인 사회주의 전체 계통에서 그 자취가 뚜렷하게 드러난 결론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는 완전히 모순됐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맺는 사회적인 관계 총합을 어떤 법칙이 스며든 분명하고 완전한 무언가로 인식한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민 대중은 이런 관계들에 무의식적으로만 적응했을 뿐,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관계로부터 거의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맺어온 교환 관계에 대한 해명도 아주 최근에서야 이뤄졌을 뿐이다. 유물론은 인간 사회적 사고 자체 근원까지 깊숙하게 분석해내면서부터 모순을 제거했다. 그리고 사고의 경로가 물질의 경로에 달려 있다는 유물론 결론은 과학적 심리학과 유일하게 양립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측면에서, 가설은 최초로 사회학을 과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여태껏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현상들에 따른 복잡한 연결망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걸 구분하기 어렵다고 여겨왔고, 사회학에서 나타나는 주관론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런 구분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물론은 사회 구조로 생산 관계를 선별해내고, 주관론자들은 사회학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부인해오면서, 일반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을 이런 관계들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부터,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념적인 사회적 관계들, 곧 형성되기도 전에 인간의 의식을 거쳐가는 것 같고, 사회적 관계를 자각하는 데 있어 스스로를 가둬두는 한 주관론자들은 많은 국가들에서도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들에서 반복과 규칙성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었고, 그들의 학문은 기껏해야 그러한 현상들의 묘사, 원재료를 한데 묶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물질적 사회 관계, 곧 인간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형성된 관계들, 생산물을 교환할 때 인간은 사회적 생산 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생산 관계에 진입하는 분석은 반복과 규칙성을 관찰하고, 많은 국가들의 체제를 하나의 근본적인 개념, 곧 사회구성체로 일반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적인 현상들의 묘사에서, 이상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데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를 다른 국가와 따로 떼어내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연구하는 식의 엄밀한 과학적 분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일반화 덕분이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가설이 최초로 과학적 사회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오로지 사회적 관계를 생산 관계로 환원시키고, 생산 관계를 생산력 수준으로 환원시키면서부터 사회구성체 발전이 자연사 과정이라는 개념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해줬다는 점이다. 그런 견해가 없었다면 사회과학도 없었을 거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관론자들은 역사적인 현상들이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 진화를 자연사 과정으로 여기지는 못했는데, 엄밀하게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 사고와 목적 앞에서 멈춰버린 채 물질적인 사회 관계로 환원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40년대에 이 가설을 제시한 뒤로 마르크스는 사실에 유념한 자료 연구에도 착수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가운데 하나인 상품 생산 체계를 택해, 25년이 넘는 시간을 들인 방대한 양의 통계를 근거로 해서, 구성체 기능과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분석해냈다. 그 분석은 사회구성원들 간 생산관계에먄 국한됐다. 마르크스는 설명을 위해 이러한 생산 관계 영역 바깥 특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사회적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가 어떻게 발달하고, 자본주의 구조로 변형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서로 적대적인 생산 관계라는 경계 내에서 적대적인 계급들을 만들어내고, 어떻게 사회적인 노동에 따른 생산성을 발전시켜 자본주의 구조 자체의 토대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로『자본』뼈대다. 하지만 전체적인 핵심은 마르크스는 이런 뼈대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 이론에 스스로를 가두지도 않았고, 오로지 생산 관계로부터 특정한 사회구성체 발전과 구조를 해명한면서도, 이러한 생산 관계에 조응하는 상부 구조를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면밀하게 검토하면서부터 뼈대에 피와 살을 입혔다. 『자본』은 큰 성공을 거둔 이유로는 독일 경제학자가 쓴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일상적인 측면에서, 생산 관계에 고유하게 녹아 있는 계급 적대 관계에 따른 실제 사회적 징후와 자본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주는 부르주아 정치 상부 구조, 자유와 평등 같은 부르주아 사상들, 부르주아 가족 관계로부터, 살아 있는 생물체로 자본주의 사회에 따른 형성 과정 전체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윈과 비교하는 건 아주 적확하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자본』은 확실히 사실에 입각한 자료에 따른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들을 일반화하는 데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하겠다. 누군가 『자본』을 읽고도 이렇게 일반화된 사상들을 용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살망 이씨따면, 서문에서까지 이런 사상들을 지적했던 마르크스 잘못은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런 비교는 외부적인 측면에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특히 미하일로프스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측면에서도 정확해진다. 다윈이 동물과 식물종은 서로 단절됐고, 우발적이고, 신으로부터 창조된데다, 불변하다는 견해에 종지부를 찍고는, 변화할 수 있는 종의 세습을 확립하면서부터 생물학을 온전히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은 최초 인물인 것처럼 마르크스는 권력자들의 의지에 따르고, 또는 사회와 정부의 의지에 따른 모든 종류의 수정을 허락하고, 우연하게 등장했다고 변화하고, 개인들의 기계적 집합체가 곧 사회라는 견해에도 종지부를 찍고, 특정한 생산 관계에 따른 총합으로부터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그런 구성체 발전이 자연사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면서부터 사회학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은 최초 인물이다.
『자본』등장 이래로, 유물론 역사 개념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명제다. 특정한 사회구성체, 어떤 국가나 국민 또는 계급 등이 아닌 기능과 발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내놓는 또 다른 시도, 유물론만큼 해당 사실들에 질서를 도입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도, 엄격한 과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도 명확한 형성 과정에 따른 또렷한 그림을 제시할 수 있는 시도가 이뤄질 때까지, 사적 유물론 개념은 사회과학과 동의어이다. 유물론은 미하일로프스키가 생각하듯이, 대체로 과학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유일한 과학적인 역사관이기 때문이다.『자본』을 읽고도, 거기에서 어떠한 유물론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보다 더 웃긴 상황이 어디 있는가. 유물론이 어디에 있냐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짜로 당황해서 그렇게 묻는다. 미하일로프스키는『공산당 선언』을 읽고도, 근대 체제, 법률, 정치, 가족, 종교, 철학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설명이 유물론적인 설명이라는 점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조차도 여러 생산 관계에 그 뿌리를 두려 하고, 또 두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철학의 빈곤』을 읽고도, 프루동의 사회학에 대한 분석이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점과, 많은 역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프루동이 제기한 해결책에 대한 비판이 유물론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자료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에 대해 필자들 자신이 내놓은 말들이 모두 생산 관계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자본』을 읽고도, 하나의 가장 복잡한 사회구성체에 관한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 모형이 자신 앞에 놓여 있다는 점과, 누구나 그 모형을 인정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걸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에 앉아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던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에 자신의 뛰어난 머리를 쓰고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질문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던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제목 아래 역사에 관한 궤변을 쏟아냈던 카레예프(Kareyev)와 같은 사람이 그것들을 분류하고, 적절하게 색인을 달아줄 때에만 마르크스 유물론 연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건,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더러 역사적 과정에 대해 알려진 모든 이론들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정말로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이론들의 90%는 무엇으로 구성됐던가. 사회란 무엇이고, 발전이란 무엇인가 따위에 관한 순전히 선험적이고, 교조적이고, 추상적인 담론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런 이론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점과 그것들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인 방법론, 누그러들 줄 모르는 굳걷한 형이상학 때문에 말이다. 사회란 무엇이고, 발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는 건, 시작과 끝이 뒤바뀐다. 단일한 사회구성체를 특별히 연구하지도 않고, 갠며을 확립조차 할 수 없다면,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라 할 수 있는 진지한 사실 연구에도 접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전반적인 사회와 발전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과학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형이상학의 가장 명백한 증상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실에 대한 연구에 착수할지를 모를 경우에, 언제나 선험적인 일반 이론들을 만들어냈고, 그건 언제나 무익했다. 화학적 과정에 대해 사실에 기반을 둔 연구를 할 능력이 없는 형이상학적 화학자는 물리력으로 화학적 친화성에 대한 이론을 지어낸다. 형이상학적인 생물학자는 생명과 생명력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형이상학적인 심리학자는 영혼의 본질에 대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방법론이다. 물리적 과정을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영혼에 대한 주장을 꺼내놓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진보는 영혼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들과 철학적인 담론들을 포기하는 데 있고, 특정한 물리적 과정에 관한 사실 연구를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의 비난은 평생을 연구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 쏟아부은 다음, 과학적인 심리학자더러 영혼에 관한 모든 알려진 이론들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형이상적인 심리학자의 비난과 매우 비슷하다. 과학적 심리학자는 영혼에 관한 철학적인 이론들을 내다 버리고, 물리적인 현상들의 물질적인 근저인 신경 과정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에 착수해 한 가지 이상 심리학적인 과정에 대한 분석과 해명을 내놓은 사람이다.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그 업적에 관해 읽고 칭송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과정에 대한 서술과 사실 연구가 훌륭하다고 말하면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앞서 과학자가 내놓은 매우 새로운 심리학 개념과 과학적인 심리학의 특별한 방법론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는 몹시 흥분해서, 실례합니다라고만 외친다.
"실례합니다만, 이런 방법론이 형이상학적인 심리학의 연구에서 어디에 설명됐습니까. 그리고 그 연구에는 사실만 담겨 있잖아요. 영혼에 관한 모든 알려진 철학적인 이론들에 대한 검토는 찾아볼 수 없다고요. 전혀 적절치 못한 연구란 말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부짖는다. 물론 사회 본질에 대한 선험적인 주장들의 무익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런 방법론들은 문제의 연구와 해명에 기여하기보다는 영국임 상점 주인의 부르주아 사상들이나, 국내 민주주의자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이상들을 사회라는 개념에 넌지시 밀어넣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형이상학적인 사회학자에게『자본』은 전혀 적절치 못한 연구이다. 그 모든 역사 · 철학들이 생겨났다가도 기껏해야 그 시대 사회사상과 관계들의 징후 정도에만 머무른 채, 아주 조금이나마 진정한 사회적 관계들을 인간이 이해하는 데 머리카락만큼도 기여하지 못하고, 비누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가 내딛는 거대한 발걸음은 정확히 마르크스가 사회와 진보 전반에 관한 모든 주장들을 내다버리고, 하나의 사회와 하나의 발전, 곧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을 내놓았다는 데에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끝이 아닌 제대로 된 출발점에서 시작했다고, 최종적인 결론이 아닌 사실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했다고, 전반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일반 이론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결정된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비난을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적절한 연구가 어디에서 이뤄졌는가. 오. 자기 주관에 빠진 사회학자가 이토록 현명할 수 있다니.'
주관적인 철학자가 순전히 당혹감 속에서 유물론 연구의 어느 부분에서 입증됐는지에 대해서만 자신의 관심을 국한시켰다면, 그나마 봐줄 만 했다. 그러나 자신이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에 대한 입증은 커녕, 자세한 설명조차 제대로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제기된 적 없었던 교조적인 주장을 탓하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철학자는 마르크스가 역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주창했다는 취지에서 블로스(Blos)로부터 단락을 인용하며, 지체 없이 마르크스 이론은 인류에게 그 과거를 설명해줬고, 인류의 과거 전체를 해명해줬다고 주장하는 등의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완전한 거짓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해명한다고 주자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분석하고, 해명함에 있어 유물론을 적용함으로부터, 매우 빛나는 결과를 얻어냈다면, 역사 유물론은 단순한 가설이기를 멈추고, 과학적으로 확인된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그런 방법론에 대한 필요성이 특수한 사실 조사와 구체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은 다른 사회구성체들로 확장된다는 건 역시도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특정한 종의 동식물 진화를 매우 정확하게 확증하는 건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수 많은 사실들로 입증된 생물진화설은 생물학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생물진화설은 종의 변화라는 역사 전체를 해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설명에 있어 방법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하듯이, 역사 유물론도 모든 걸 해명하고 있다고 절대로 주장한 적이 없으며, 단지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 『자본』에 따르면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처음에 역사 유물론은 모든 걸 해명한다거나, 모든 역사적인 자물쇠 열쇠를 발견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편다는 식으로 마르크스 의도를 잘못 전달하고는, 자신이 지어낸 그와 같은 주장들에 인상을 찌푸린 다음에, 마침내 유물론자들이 이해한 대로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형성되어가는 중이며, 현재까지 소유한 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에서만 거의 한정됐다는 취지에서 엥겔스,『반뒤링론』사고를 정확하게 인용한 뒤, 이러한 말들이 경제적 유물론의 활동 분야를 매우 심하게 좁히고 있따는 결론에 다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동원한 논쟁 방법이 얼마나 기발하고, 진심 어리고,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속임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려면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단순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걸까. 가장 먼저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 뜻을 잘못 전달하고, 그런 뒤 자신이 했던 거짓말덩어리에 얼굴을 찌푸린 다음, 정확한 사고를 적절하게 인용해서, 그들이 경제적 유물론의 활동 분야를 좁히고 있다고 선언하는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만다.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왜곡이 어떤 식이고, 그 수준이 어쨌는지는 다음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는 그것들을 어디에서도 입증해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그것들은 경제적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들을 말한다. 그러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의 역사와 역사 철학을 다루는 저작을 집필할 생각이었고, 그런 글을 1845-1846년에 하나 쓰기도 했지만, 출판은 되지 않았고, 엥겔스는 이 저작 가운데 집필을 마친 부분은 사적 유물론의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됐으나, 경제사에 대한 당시의 지식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점만 입증해줬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경제적 유물론 이론에서 근본적인 핵심을 발견했고, 『공산당 선언』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는 필자 중 한 사람이 인정했듯이, 그들이 그런 작업에 필요한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정말 매력적인 비판 방식이 아닌가. 엥겔스는 경제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빈곤하고, 그런 이유로 철학사에 관한 전반적인 성격의 저작을 출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과학적인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핵심,『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제시한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을 제시하는 그런 저작을 집필하기에는 그들의 지식이 빈곤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두 가지 중 하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역사 철학 전반을 포괄하려는 시도와 부르주아 체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치경제학적인 비판을 하기에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상상만 하거나, 전자라면,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의 그런 부족함을 이해시킨다거나, 수정 또는 덧붙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매우 잔인한 행동이다. 철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을 출판하지 않고도 하나의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서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기로 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결정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과학적인 성실성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반면에 자신들의 견해를 정교하게 발전시키기에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백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두 사람에 대해 약간의 말을 덧붙여서 사실을 왜곡시킨 미하일로프스키의 결정은 지적 능력이나 품위가 결여된 논쟁 방법론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자아인 엥겔스는 역사 이론으로 경제적 유물론을 입증하고자, 더 많은 시도를 했다고 말한다. 엥겔스는 역사에 관한 특수한 저작인,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을 집필했다. 연결고리는 실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미국인인 모건 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제적 유물론 원리들을 발표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경제적 유물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엥겔스는 경제적 유물론자들은 이 책에 지지를 표하고 있다. 게다게 선사 시대에는 계급 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적인 가치의 생산에 더해서 인간 자신의 생산, 곧 노동생산성 발달이 여전히 매우 미성숙했던 원시 시대에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생식이 결정적인 요인임을 나타내주는 유물론 역사 개념 공식에 '수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모건의 커다란 공헌은 여태껏 풀 수 없었던 그리스와 로마, 게르만 고대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들을 푸는 열쇠를 성의 유대관계에 기초한 북미 인디언 집단들에서 발견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1840년대 말에 완전히 새롭고 유물론적이며, 진정으로 과학적인 역사 개념이 발견되고, 선포됐다. 그리고 그것은 다윈 이론이 현대 자연 과학에 기여했듯이, 역사학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 입증된 바가 없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번 더 되풀이한다.
"거대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실에 기초한 자료에서도 절대 확인된 적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자본』은 적절한 연구가 아니고, 단지 사실 관계와 공들여 진행한 연구들만 담겨 있을 뿐이며, 하다못해 역사 철학의 다른 체계들에 대한 비판과 배제조차 충분히 이유가 밝혀진 적이 없었다."
엥겔스 저서,『반뒤링론』에는 지나가는 김에 해본 재치 있는 시도들일 뿐이라며, 미하일로프스키는 저작에서 다뤄진 방대한 양의 본질적인 물음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재치 있는 시도들이란 게 유토피아 낙원으로 시작되는 사회학들이 얼마나 알맹이 없는지를 매우 재치 있게 보여주고 있고, 저작에서는「러시아 부」에 기고한 신사양반들이 그다지도 열성적으로 고백한, 정치와 법률 체계가 경제 체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실력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그 속에서 유물론으로 입증된 문제들 가운데 단 한 가지라도 진지하게 검토하기 보다는 저작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구 몇 개를 늘어놓는 쪽이 훨씬 더 쉽긴 하다. 그리고 검열관은 그 책의 번역을 절대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기도 하고, 그래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의 철학에서 주관적인 면모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책을 재치 있는 책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훨씬 더 특징적이고, 교훈적인 부분은 마르크스,『자본』에 대한 언급이다.
'『자본』에는 역사에 대한 눈부신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책의 목적 그 자체 때문에 이 책은 오로지 하나의 뚜렷한 역사적 시기에만 그 내용이 집중됐고,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은 채, 특정한 역사적인 현상들의 묶음의 경제적인 측면을 건드리기만 할 뿐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 연구에만 노력을 집중한『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와 그 상부 구조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을 제공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러한 분석을 무시하는 걸 선호한다. 『자본』은 오직 하나의 시기만을 다루고 있지만, 마하일로프스키 자신은 모든 시기를 포괄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그는 특정한 어떤 시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 어떤 시기도 실질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모든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눈부시고 공허한 상투어와 미사여구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누구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문제점들을 묵살하는 기술에서 미하일로프스키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르크스 연구들을 다룰 가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마르크스는 경제적 유물론에 따른 기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은 채 특정한 역사적 현상들에 따른 묶음으로부터 경제적인 측면을 건드리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오한 표현이던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건드리기만 할 뿐이라니.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쟁점을 흐리는 건 실로 얼마나 단순한 일인가. 마르크스는 상품 생산자들 간 관계 위에 시민 평등, 자유 계약을 비롯한 법치 국가에서 비슷한 원칙들이 기초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었음에도, 그는 그게 뭐인지, 유물론을 단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한 건지, 아니면 단지 건드리기만 할 뿐이라든지 말하고 있다.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부터 철학자 미하일로프스키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답하는 걸 삼가고, 멋진 말을 늘어놓았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재치 있는 시도로부터 직접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세계 역사를 해명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선포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 게르만 역사에서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수수께끼 열쇠는 첫째로 경제학 유물론 이론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거기에 대해 무엇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이고, 둘째로는 경제학적이지 않은 요인의 도움으로 제시됐다. 더욱 재밌는 건 인간 자신의 생산, 곧 생식이라는 단어로부터, 엥겔스는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공식과 최소한 언어적으로라도 연결을 유지하고자, 그 단어를 포착한다. 하지만 엥겔스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삶이 이 공식에 따라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논쟁 방법이 경이롭다. 마르크스 이론은 역사를 해명하려면 이념이 아니라, 물질적 사회 관계에서 그 토대를 찾아야만 한다. 사실에 기초한 자료 부족은 이런 방법론을 고대 유럽 역사에서도 특정한 아주 중요한 현상들, 씨족 구조라는 현상 분석에서 적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 결과적으로는 수수께끼로 남겨놓았다. 그렇지만 미국의 모건이 수집한 풍부한 자료는 씨족 구조의 본질을 분석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특히 법이나 종교에서 이념적 관계가 아니라, 물질 관계에서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분명 이러한 점은 유물론적인 방법론을 훌륭하고,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미하일로프스키의 경제적 유물론 이론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역사적 수수께끼에 관한 열쇠를 발견했다고 그 원리에 비난을 퍼붓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자신을 편들어주는 것과 심하게 혼내는 걸 얼머나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지에 그저 놀라워한다. 두 번째로 철학자 양반은 생식이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엥겔스 저작들에서 경제적 유물론에 대해 당연하게 말한 걸 읽어본 적은 있던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서술할 때, 단지 유물론이라 불렀을 뿐이다. 기본적인 발상은 사회적인 관계가 물질적이고, 이념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이었다. 이념적으로는 단지 물질에 있어 상부 구조를 구성하고, 물질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형태 결과로부터 인간의 의지와 의식과는 독립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 법률적 형태에 대한 설명은 삶의 물질적인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단락에서도 말한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생식 관계가 이념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미하일로프스키가 제시한 설명은 너무나도 독특해서 깊이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생식이라는 문제에 관해 아무리 창의력을 발휘해 최소한 구두로나마 경제적 유물론과 연관성을 규명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아무리 경제를 포함한 다른 현상들과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적 현상들에 뒤얽혀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뿌리를 갖는다. 그리고 경제적 유물론의 이론가들이 역사뿐만이 아니라, 심리학과의 관계도 청산하지 못했음을 상키시켜준다. 씨족 유대 관계가 문명국들의 역사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성이나 가족 간 유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렇다고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더욱 더 복잡해지는 삶의 압박을 받으면서 상당한 수정을 겪어 왔다. 그러나 일정 정도 변증법적 수완으로부터 법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관계 자체도 성과 가족 관계에 따른 상부 구조를 구성한다는 게 드러날 수 있다. 깊이 파고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상속 제도는 거론해볼 수 있다.'
운 좋게도 공허한 미아여구만을 늘어놓았던 철학자 양반은 마침내, 입증할 수 있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뚜렷한 사실들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상속 제도가 성과 가족 관계에서 상부 구조라는 걸 마르크스 비판가는 어떻게 드러내주는지를 살펴보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상속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생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속 제도 자체로는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이라는 점으로부터 결정된다. 그러나 맨 먼저, 비물질적인 가치들도 상속으로부터 전달된다.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아이들을 기르려는 마음에서도 표현된다.
"아 그럼, 아이들의 양육은 상속 제도의 일부라는 거구나."
첫째로, 러시아 민법에서는 '부모는 가정 교육으로부터 자녀들의 도덕을 훈련시키고, 정부의 목표를 더욱 더 발전시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다. 철학자가 상속 제도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둘째로, 경제적인 영역에만 국한시켜도 상속 제도는 상속으로부터 전달된 생산 산물에 동반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생식에 따른 산물과 직접적으로 수반되는 복잡하고, 치열한 심리 작용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상속이 생식 없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상속 제도가 가족과 성 관계 위에 있는 상부 구조라는 점이다. 정말로 아메리카 대륙 발건에 버금가는 발견이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은 음식을 섭취할 필요성이 재산 소유 제도를 설명해주지 못하듯이, 생식이 상속 제도를 설명해줄 수 없다고 믿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러시아에서도 봉토 제도가 번성 했던 시기에 토지가 상속으로부터 전달될 수 없다면 그것이 전부 재산일 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 구조의 특수성에서 해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아마도 그 시대 봉건 영지 소유자의 생식의 산물에 수반된 심리 작용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게 구별됐다는 걸 그저 문제의 해명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의 벗들을 한 꺼풀 벗기면, 부르주아가 나타난다. 정말로 상속 제도가 아이들을 양육하는 만큼이나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신성하다는 걸 제외하고는, 상속 제도와 아이들 양육, 생식에 따른 심리 작용 사이에서 연관성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고찰에 다른 무슨 의미를 덧붙일 수 있는가. 실제로 미하일로프스키는 상속 제도는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이라는 점으로부터 결정된다고 선언하면서부터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려고 애썼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회피하려는 시도, 헛된 시도였다. 상속이 어느 정도로 경쟁에 의존하는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채, 무엇이 경쟁과 상속 제도 사이에서 이런 연관성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전혀 아무런 해명도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주장을 고려해보란 말인가. 실제로 상속 제도는 사유 재산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사유 재산은 교환의 등장으로부터만 생겨난다. 그 토대는 이제 막 시작된 사회적 노동에 따른 분화와 시장에서 생산물 소외에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공동체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들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한, 사유 재산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업이 공동체를 장악하고,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한 가지 품목의 생산에 참가해서 시장에다 내다 팔 때, 상품 생산자들에 따른 이러한 물리적 고립이 사유 재산 제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유 재산과 상속은 둘 다 별도의 소가족들이 이미 생겨나고, 교환이 발달한 사회 질서의 범주들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가 입증하고자 했던 바와 정확히 정반대였다. 뿐만 아니라,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에 입각한 또 다른 언급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석과도 같다. 계속해서 유물론을 바로잡으며 말한다.
'씨족 유대 관계에 관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역사에서 생산 형태에 따른 영향 아래에서 부분적으로 무색해진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스스로의 연속성과 일반화를 거쳐, 민족적인 유대 관계 속에 녹아들여갔다.'
그래서 민족적인 유대 관계가 씨족 유대 관계에 따른 연장선이자, 일반화라는거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의 역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동화에서 빌려오는 게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역사는 먼저 모든 사회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그 다음에 그 가족이 부족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족은 국가로 확대된다. 이는 순전히 부르주아적인 발상이다. 독립된 소가족이 지배적이었던 건, 부르주아 체제에서만이었고, 인류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이런 가족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가 근엄한 태도로 이러한 헛소리를 되풀이하자면, 그저 러시아 역사가 걸어온 경로에 대해서조차 조금의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어떤 사람은 고대 러시아에서 토착민들의 삶을 말할지 몰라도, 모스크바 차르들의 시대인 중세 무렵이 되면, 씨족 유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씨족 연합체가 아니라, 지역적인 연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지주와 수도원들은 여러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을 확보해갔고, 그에 따라 형성된 사회는 순전히 영토 상 연관성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족적인 유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인 유대라고 할 수 없었다. 국가는 각각의 토지들로 갈라져 있었고, 때때로 예전에 누리던 자치의 강력한 흔저들, 행정적 특색, 때로는 군대, 관세, 국경 등을 그대로 유지한 공국들로 나뉘었다. 이런 모든 지역, 토지, 공국들은 하나의 통일체로 '융합된' 특징을 보인 건, 러시아 역사상 오직 현대 시기에 접어든 뒤, 대략 17세기부터였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와 같은 융합에는 씨족 유대로부터 일어난 게 아니며, 연속성과 일반화로부터 일어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지역 사이에서 교환이 증가하고, 상품 유통이 점차 늘어나며, 작은 지역 시장들이 단일한 러시아 시장으로 집중되면서부터 생겨난다. 이런 과정을 이끌고 지배한 사람들이 상인 자본가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적인 유대의 형성은 부르주아 유대의 형성에 지나지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장황한 말을 늘어놓다가도, 진부한 속물들의 사례들만 제시했다. 여기서 진부한다는 건, 그가 생식과 심리 작용으로부터 상속 제도를 설명하고, 씨족 유대로부터 민족성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물이라는 건, 그가 역사적으로 교환에 기초한 일정한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범주와 상부 구조를 아이들 양육과 직접적인 성적 유대 같은 일반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주 특징적인 점은 자신의 주관에 빠진 철학자가 미사여구에서 구체적인 사실들로 옮겨가려고 시도하자마자, 스스로 난처한 처지에 빠져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입장에 아주 안도하고 만다. 그 자리에 앉아서는 잔뜩 멋을 부리며, 자신의 주위에 온통 오물을 끼얹는다. 그는 역사가 계급 투쟁이라는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반박하고 싶은 나머지, 심오한 태도로 그 주장은 '극단적'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창설되고, 계급 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국제노동자협회는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들이 서로 목을 베고, 약탈하는 걸 막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사실에서 유물론이 민족적인 자만심과 민족 간 증오라는 악귀를 청산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고 단언한다. 주장에는 상공업 부르주아지에 따른 현실적인 이익이 그런 중오에서 중요한 토대를 구성하고, 민족 감정을 독립적인 요인이라고 말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만 할 뿐이라는 걸 비판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말 나온 김에, 이 철학자가 민족성을 심도 깊게 사고하지 못했음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인터내셔널을 언급할 때면, 언제나 부레닌 식의 반어법을 끄집어낸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수장이었다. 그 조직은 갈가리 쪼개진 게 사실이지만, 다시 부활하게 된다.'
물론 내정의 기록자로 부레닌이「러시아의 부」2호에서 속물 같은 진부한 문고로 상세하게 설명한 공정한 교환의 체제 내에서 국제 연대에 따른 최첨단 조직이 등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공정하건, 불공정하건,
교환이 언제나 부르주아지 규칙을 전제로 하고, 포함하며 국제적인 충돌의 중단은 교환에 기초한 경제구조가 파괴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인터내셔널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개별 국가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압제 계급에 맞서 투쟁하도록 조직하고, 단결시키도록, 그런 전국적인 노동 계급 조직들을 세계 자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단일한 국제 노동 계급 군대로 묶어내는 것 말고는 민족 간 증오에 맞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단순한 진리조차 파악하지 못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다. 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끼리 서로 목을 베는 걸 막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파리 코뮌 당시에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는 교전 중이던 지배 계급들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진실한 태도를 미하일로프스키에게 상기시켜준다면 충분하다. 마하일로프스키는 모든 격렬한 비판에서 특히 역겨운 부분은 그가 동원하는 방법론이다. 그가 인터내셔널 전술에 불만이 있다면, 유럽 노동자들이 결성한 조직 이름으로 된 사상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쨌든 유럽 노동자들을 직설적이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다록 내버려두고, 그 자신이 더 편리하다고 여기는 전술과 더 정확하다고 여기는 견해를 설명하게 허용하는 게 옳다. 그러나 명확하고, 뚜렷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엄청난 양의 공허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여기저기에다 무분별한 험담만 늘어놓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터내셔널 사상과 전술을 옹호하는 게 법적으로 금지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행위를 쓰레기라는 표현 말고 다른 어떤 말로 부를 수 있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주장을 펼 때 동원한 방법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비판을 위해 자신의 논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공들여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수고를 들이지 않은 채, 자신이 우연히 주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의 단편들에만 매달려, 그것들을 왜곡시키는 쪽을 선호한다. 다음의 말로부터 여러분들 스스로 판단해보시라.
'마르크스는 너무나 똑똑하고, 박식한 나머지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견해와 사회적인 현상들이 법칙에 부응한다는 사고를 발견한다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사다리에서 아래에서 계단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러한 진실을 확립하는 데 들인 수 세기에 걸친 지적 노력과 힘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해서는 왜곡하고, 조롱하고, 정복하려는 비판자의 목적이 쉽게 달성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방법론은 완전히 거짓이고, 사기라는 점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마르크스에 동의하지는 않을 수 있어도, 그가 예전에 사회주의자들과 비교해서 새로운 무언가로 여겨지는 견해들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해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무언가란, 예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현존 체제에서 대중들의 억압을 보여주고, 각자는 자신이 생산한 걸 받아가는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준 다음, 그런 이상적인 체제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라는 개념에서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으로 충분하게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회주의로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마르크스는 현존 체제를 묘사하고, 판단하며, 비난하는 데만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현존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을 제시했고, 여러 다양한 유럽과 비유럽 국가들에서도 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현존 체제를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사회의 기능 및 발전 법칙,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가 필연적이라는 공통적인 기반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위대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형편 없는 아류들인 주관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똑같은 방식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만이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펼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대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와 같은 객관적인 분석으로부터 마르크스는 체제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다는 걸 입증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필연성에 관한 언급의 기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 문제에 있어 동원한 왜곡은 명백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론의 전체적인 사실 관계와 본질을 생략하고, 전체 이론이 필연성이라는 한 단어에만 기대고 있듯이, 역사적인 필연성을 요구하는 게, 이것이다라는 게 이론의 증명이듯이 그 문제를 다뤘다. 달리 말해, 교리 내용에 대해서는 무엇도 말하지 않은 채, 오직 껍데기만 붙들고는 그저 닳아빠진 동전일 뿐이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것을 마르크스의 가르침으로 변형시키고자 갖은 애를 다 썼다. 물론 그의 우스갯짓을 따가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종류의 행동은 이미 충분히 봐왔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부레닌을 기쁘게 하려고, 또 만족시키고자 까불어대도 내버려두자.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뒤로, 구석에서 고함을 지르고, 그를 욕하도록 놔두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이 유토피아주의자들 및 이상주의자들과 벌인 마르크스 논쟁은 그 자체로 편파적이었다. 이런 식의 공격을 가리켜 고함지르고, 욕하는 거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미하일로프스키가 그러한 격렬한 비판에서 실제적이고, 명확하고, 진실한 반론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사회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이러한 논쟁이 극히 중요하다고 여겨, 아무리 주제를 기꺼이 논하려 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고함에 대답하기보다는, 단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코끼리를 향해 짖는 걸 보니, 애완용 강아지가 참 힘이 센가 보군!"
미하일로프스키가 역사적인 필연성에 대해 말했던 말은 흥미가 전혀 없지는 않다. 단지 부분적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저명한 사회학자, 교양 있는 모임의 자유주의 회원들 사이에서 V.V. 보론초프 선생이 그러하듯이, 마하일로프스키 선생도 이런 수식어를 좋아했다. 진정한 이념적인 상투성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발상과 개인의 활동의 중요성 사이에서 충돌, 사회적으로 활발한 인물들은 실제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때, 스스로를 활동적이라고 여기는 실수를 범하고,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내재적인 법칙들로부터 신비에 싸인 지하 조직으로부터 조종 당하는 꼭두각시들을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무익하고, 장황하다고 특징짓는, 그 사상으로부터 도출된 결론 역시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꼭두각시 운운하는 모든 헛소리를 어디에서 얻어왔는지를 아마도 모든 독자가 다 알지는 못한다. 핵심은 자기 주관에 빠진 철학자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결정론과 도덕성 사이에서 충돌, 역사적인 필연성과 개인의 중요성 사이에서 충돌 같은 사고 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 주제를 가지고, 엄청난 분량으로 종이를 채웠고, 도덕성과 개인의 역할 쪽에 서서, 이런 충돌을 해결하고자, 감상적이고, 속물 같은 헛소리를 수도 없이 지껄여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기에 충돌이란 전혀 없다. 그것은 결정론이 그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속물 같은 도덕성의 허를 찌를까 봐 두려워한 그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상정하고, 자유 의지에 대한 터무니 없는 말을 거부하는 결정론 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 또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파괴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바라는 모든 걸 자유 의지 덕분이라 말하기보다는 엄밀하고,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건 결정론적인 관점 밖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사고는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의심할 나위 없이, 능동적인 인물인 개인의 행동들로 구성됐다.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실제로 제기된 물음은 인간 행동에 따른 성공을 보장하는 건 어떤 조건에서이고, 이러한 행동들은 엄청난 양의 반대되는 행동들에 잠겨 고립된 행동으로 머무르지 않게 보장할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여타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은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낼 목적으로 하는 행동들은 진지한 결실을 맺고자, 대중들을 어떻게 글어들여야만 하는가. 분명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내 사회 세력 집단들과 국내의 현실에서 실체를 구성하는 계급 투쟁이라는 이해된 방식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것을 정확히 공식화하고, 해답을 내놓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내내 질문의 주변에서만 헤매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답은 알다시피 국내 경제 체제가 부르주아 사회로 구성됐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그 자체, 곧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에서 비롯된다는 견해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미하일로프스키의 진지한 비판에는 우리 체제가 부르주아 체제라는 견해나,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이라는 개념과 그 발전 법칙을 직접적으로 겨냥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지한 물음들을 다루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필연성이 너무 일반적인 범주라는 등 김빠진 미사여구로부터, 사안들을 처리하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 씨, 계란에서 알맹이를 빼서 던져버리고, 그 껍데기만 갖고 논다면, 어떤 사상이든 너무 일반적인 범주에 해당한다. 당대의 정말로 진지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바깥 껍데기 속에 숨겨두는 건, 미하일로프스키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고,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핵심을 강조한다.
'경제적 유물론은 영웅들과 군중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잘못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시대 러시아의 현실과 그 토대를 구성하는 계급 충돌이라는 문제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아마도 너무 일반적이어서, 미하일로프스가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 한편, 노동자건, 농민이건, 공장 소유주건, 지주건 간에 군중과 영웅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문제는 그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그러나 그 문제가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노동 계급의 해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유물론자들을 힐난하는 건, 속물적인 학문을 숭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 결론을 내리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들을 그릇되게 전달하려는 또 한 차례 시도를 하고, 또 한 번 조작을 한다. 공인된 경제학자들이 『자본』 유야무야 덮어버렸다는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견해에서 정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는 특정한 집단의 독자들인 노동자들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학자들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학자들에게 공정성이나, 과학적인 비판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자본』후기에서 그 점에 관해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독일 노동 계급이라는 폭 넓은 집단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찬사를 얻은 건 내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다. 경제 문제에 있어 부르주아 관점을 대변하는 마이어(Mayer) 씨는 보불 전쟁 가운데 출간된 소책자에서, 독일인들은 유전적으로 소유하다고 여겨졌던 탁월한 이론 수용 능력이 이른바 독일의 교육 받은 계급들 사이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노동 계급 사이에서는 부활하고 있다고 적절하게 언급한 바 있다.'
유물론에 관한 또 다른 조작은 첫 사례와 전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논지는 이랬다.
'유물론 이론은 절대로 과학적으로 구체화되고, 입증된 적이 없다.' 그 증거는, '엥겔스, 카우츠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저작에 담긴 역사적인 내용에 관한 훌륭한 각각의 쪽들은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딱지를 떼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음표가 화음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사회적인 삶의 총합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은 이랬다. 경제적 유물론은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걸 스스로 보여주지 못했다.'
정말로 낯익은 속임수다. 그 이론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우선 사회적 삶의 총합을 고려하지 않은 불합리한 의도를 그 이론 탓으로 돌림으로부터 사실을 왜곡시킨다. 사실은 정반대임에도 말이다. 유물론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삶의 모든 측면을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런 다음 미하일로프스키는 실제로 유물론자들이 사실상 경제학으로 사회적 삶의 종합을 설명했다고 선포한 뒤, 마지막으로 유물론은 타당하다는 걸 스스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당신의 조작이 스스로만 타당하다는 걸 보여주고 말았다. 이것이 마하일로프스키가 유물론에 대한 반박에서 전개한 논리의 전부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여기에는 어떠한 비판도 없으며, 공허하고, 가식적인 수다만 있을 뿐이다. 생산 관계가 다른 모든 토대를 이룬다는 관점에 대해 미하일로프스키가 제기한 반대 의견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유물론적인 방법을 활용해 설명한 사회구성체 개념의 정확성과 그 구성체의 자연적·역사적 발전의 정확성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까. 그리고 그가 언급한 필자들이 제시한 많은 역사적 문제들에 관한 유물론적인 설명의 오류를 어떻게 입증할까. 그에 대한 대답은 미하일로프스키는 아무런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떠한 반박도 전개하지 못했으며, 아무런 오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문제의 본질들을 미사여구로 감추려 애쓰면 그저 변죽만 올렸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보잘것없는 속임수들만 꾸며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박은「러시아의 부」2호에서도 계속 이어졌지만, 그에게 진지한 무언가를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조작의 영역에 있어서
그의 독창성이 벌써 바닥이 나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따는 점이다.
먼저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적 삶의 복잡성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갈바니즘조차 경제적 유물론과 연관됐다고 말하는데, 갈바니의 실험들은 헤겔에게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란다. 어쩜 이렇게 재치 있을 수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중국 황제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점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계속해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역사적 과정의 본질은 경제적 유물론 원리 또한 교묘하게 피해갔다. 분명 그것이 생산과 교환 형태의 결정적인 중요성의 발견과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존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그들의 사회학 이론들이 헤겔의 삼단논법에 기초하고 있따는 말인 셈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서 헤겔 변증법의 혐의를 씌우는 상투적인 수법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부르주아 학자들로부터 이미 충분히 너덜너덜해졌다고 여겨지는 비난이다. 그 원리에 반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주장도 내놓을 수 없었던 그 신사양반들은 마르크스의 표현 방법에만 매달려서 그 이론의 근원을 공격함으로부터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의 그런 방봅론에 기대는 걸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엥겔스의 『반뒤링론』에 등장하는 한 장을 핑곗거리로 이용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공격한 뒤링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삼단논법을 동원해서, 무언가를 입증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는 실제 과정을 연구하고 조사만 했을 뿐인데다, 마르크스가 인정한 이론의 유일한 기준은 현실과 일치였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때마침 어떤 특수한 사회 현상들의 전개가 헤겔의 법칙, 곧 정반합 이론과 딱 들어맞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현실적으로 전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놀라울 게 전혀 없다. 그리고 엥겔스는 더 나아가, 자연의 역사와 사회적인 영역으로부터 사례들을 인용한다. 맨 처음 원시 공산주의가 있었고, 그 다음 사유 재산, 그리고 그 다음에 자본주의 노동 분화가 있었다든지, 또는 맨 처음 초기 유물론, 그 다음 이상주의, 그리고 그 다음에 과학적인 유물론이 있었다는 등이다. 엥겔스는 핵심적으로 무게를 실어 펼친 주장으로는, 유물론자들은 정확하고, 올바르게 실제 역사 과정을 묘사해야만 하며, 삼단논법에 따른 올바름을 증명하고자, 변증법을 강조하는 건, 헤겔주의의 유산, 헤겔주의적인 표현 방식의 유산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삼단논법으로부터 무언가를 입증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누구도 그것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된 상황에서, 변증법적인 과정의 사례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단지 원리의 근원을 가리킬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근원을 들어 어떤 이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엥겔스 주장들에서 이론의 근원 그 이상의 것을 식별해내고자, 유물론자들은 관련된 사실에 힘입어서가 아니라, 삼단논법으로부터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역사적 문제를 해결했다는 증거가 명확히 제시되어야만 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걸 증명하려는 시도를 했을까. 전혀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공허한 변증법적인 공식을 사실에 기초한 내용들로 꽉꽉 채웠고, 그래서 어느 것도 바꾸지 않고도 그릇에서 뚜껑을 제거하듯이, 변증법을 내용물로부터 제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어느 것도 바뀌지 않은 뚜껑에 대해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유물론자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을까. 자신은 정작 이 뚜껑과 씨름하면서도,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른 기둥들 가운데 하나와 씨름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굳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삼단논법의 사례들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검토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반복하건대, 과학적 유물론이나, 국내 마르크스주의자와 어떤 관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은 있다. 무슨 까닭으로 미하일로프스키는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잗르의 태도를 그렇게 왜곡한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속담에서 말하듯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종소리를 들었지만,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2.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번 더 속임수를 쓴다.
1. 에서 마르크스 문헌을 읽으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과학에서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사회 문제 영역에서 변증법적인 사고 등에 관한 언급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됐다. 인간성이 단순한 그는 이러한 방법론이 헤겔의 삼단논법 법칙에 따라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다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런 생각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텐데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이라 부르는 건, 사회를 끊임없이 발전하는 그리고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별개의 사회적인 요소들에 따른 임의적인 결합을 일체 허락하는 무언가가 아닌 상태에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는 사회학에서 과학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유기체 연구는 특정 사회구성체와 그 기능 및 발전 법칙에 따른 연구로부터 이뤄진 생산 관계에 따른 객관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 추후에 미하일로프스키 자신의 주장들에 따른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형이상적인 방법론에서 사회학에 따른 주관적인 방법론도 틀림없이 여기에 속하는 개념 사이에서 관계를 실증하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당장은 엥겔스,『사회주의: 낙원과 과학』, 마르크스,『자본』과『철학의 빈곤』으로부터 주어진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따른 정의와 서술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기에서 헤겔의 삼단논법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사회 진화를 경제적인 사회구성체들에 따른 자연적인 역사 발전 과정으로 간주한다는 걸 목격한다. 이 점을 확인하고자, 1872년,「러시아의 부」5호에 제시된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서술을 상세하게 인용한다.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도『자본』2판 후기에서 인용한 바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이『자본』에서 활용한 방법론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으레 독일 비평들은 헤겔 식 궤변논법을 향해 악을 써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론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고자 언급된 글에서 제시된 방법론에 따른 묘사를 인용한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한 가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찾아내고, 특히나 중요한 점은 변화와 그런 현상들에 따른 발전 법칙, 한 가지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이행 법칙, 하나의 사회적인 관계 질서에서 또 다른 질서로 전환하는 법칙이었는데, 거기에는 그게 담겨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바로 엄격한 과학적인 연구로부터 사회적인 관계에 따른 특정한 질서에서 필연성을 보여주고, 그리고 마르크스가 보기에 근본적인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점들을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확립해간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사물들에 따른 현존 질서에서 필연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인간들이 그걸 믿든, 안 믿든, 그걸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상관 없이 이전의 질서로부터 필연적으로 성장해나와야 하는 또 다른 질서에 따른 필연성을 입증한다면 그것으로도 매우 충분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적인 운동을 인간의 의지와 의식, 의도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는 인간의 의지와 의식, 의도를 결정하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 자연사의 한 과정으로 여긴다. 의식적인 요소가 문명사에서 매우 종속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면, 문명을 주제로 한 비평은 의식의 어떠한 형태나, 결과도 전혀 그 기초로 삼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곧 사상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현상만이 출발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비판은 주어진 사실을 또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조하는 거고, 사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건 아니다.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제로는 두 가지 사실들 모두 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것들 서로에게 있어서 사실상 다른 발전 시기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일련의 알려진 현상들, 그것들의 연속성,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 사이에서 관계에 대해 똑같이 정확한 연구가 이뤄져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 생활 법칙들이 하나로 이뤄졌고, 과거나 현재나 똑같다는 바로 그 발상을 거부했다. 그와 반대로, 모든 역사적 시기는 스스로 법칙들을 지닌다. 경제적인 삶은 생물학에서 여타 분야들에 등장하는 진화의 역사와 비슷한 현상으로 구성됐다. 초기 경제학자들은 그것들을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에 비유하면서, 경제 법칙들에 따른 본질을 잘못 이해했다. 보다 철저한 분석은 사회적 유기체들이 식물이나,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같은 관점에 따라 자본주의적인 경제 유기체를 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르크스는 경제 생활에 대한 모든 정확한 연구가 가져야만 하는 목표를 엄격하게 과학적인 방식으로 공식화했다. 그런 조사에 따른 과학적인 가치는 특정 사회적 유기체에 따른 기원과 존재, 발전, 소멸과 또 다른 고등 유기체로부터 대체되는 과정을 통제하는 특수한 역사 법칙들을 드러내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다수의 잡지와 신문 비평에서도 찾아내서, 독일어로 번역한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서술이 그랬다. 그리고 마르크스 스스로도,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그러한 서술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물음이 생겨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다지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삼단논법, 삼분법, 변증법적 과정에 따른 명백성 같은 헛소리에 대해 그러한 서술에서 단 한 마리라도 입에 올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서술을 거론한 뒤, 자신의 방법론이 헤겔의 방법론과 정반대로 아무렇지 않은듯이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사상의 발전은 삼단논법의 변증법적인 법칙들과 일치해서 현실 세계의 발전을 결정짓는다. 물론 그런 그의 말이 맞을 경우에만 삼단논법의 중요성, 변증법적인 과정에 따른 명백성을 논할 수 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와 반대로 의식은 물질의 영향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전반적인 문제는 현존하는 사물의상태와 그 필연적인 발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오직 속물들만 관심을 갖는 뚜껑과 껍데기 역할 말고는, 삼단논법에서 그 어떤 다른 역할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에 따른 기둥들 가운데 하나, 곧 변증법에 대한 비판에 착수하고, 모든 종류의 사물들, 심지어 개구리와 나폴레옹에 대해서까지 말하면서도, 변증법이 무엇인지, 사회 발전은 정말로 자연사 과정인지, 특수한 사회적 유기체로부터 경제적인 사회 구성체에 관한 유물론적인 개념은 올바른지, 구성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 방법론들은 옳은지, 사회적 이념들은 정말로 사회 발전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결정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이 경우 단지 그저 이해가 부족했나 보군 하면서 넘어가줄 수 있는 걸까.
2. 에서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이뤄진 뒤, 미하일로프스키는 헤겔의 삼단논법을 동원해 사물을 입증하는 방법론들에 따른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전가시켰고, 물론 의기양양하게 싸운다. 그는 미래에 관해서 내재적인 사회 법칙들은 순전히 변증법에 기초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발전 법칙들에 따른 착취자들로부터 착취의 불가피성에 대한 마르크스 주장들은 순전히 변증법적이며,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라는 마르크스 이상은 그 불가피성과 확실성이라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헤겔에 따른 세 가지 용어 사슬의 끝에 기대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에는 온전히 뒤링으로부터 빌려왔으며, 뒤링은 자신의『국민 경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역사』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뒤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혼자 힘으로 마르크스를 왜곡하는 이런 방식에 도달했을까.
엥겔스는 뒤링에게 매우 훌륭한 답변을 보냈고, 그가 뒤링 비판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엥겔스 답변에만 논의를 국한해본다. 독자들은 미하일로프스키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뒤링은 말한다.
'역사적인 묘사에서는 마르크스 책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이지만, 학문적으로 변증법이라는 목발에 의존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 헤겔에게 있어 부정에 따른 부정이라는 법칙은 더 훌륭하고, 명확한 무언가가 없을 때는 사실상 과거라는 자궁으로부터, 미래를 낳는 걸 돕는 산파로 기능한다. 17세기 이래로 앞에서 지적한 방식으로부터 효과를 발휘해온 사유 재산 폐지는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에 따른 부정의 성격을 띠는 두 번째 부정이 뒤를 잇는데, 곧 사유 재산의 회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더 높은 형태에서 그것은 토지와 노동 수단들에 따른 공동 소유에 기초한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유 재산을 또한 사회적 재산이라 부르고 있고, 여기에서 헤겔에 따른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 등장한다. 거기는 모순이 지양되게 되며, 헤겔에 따른 언어 마술에 따르자면 극복되고, 보존된다.'
'여기에 따르면 착취자들로부터 착취의 불가피성은 물질적인 외부 관계에서 역사적인 현실에 따른 자동적인 결과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 부정에 따른 부정 같은 헤겔 언어 마술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에 따른 필연성을 납득시키기란 어렵다. 하지만 마르크스 개념들에 대한 모호한 이종교배는 과학적인 기초로부터 헤겔 변즙법에서 어떤 헛소리가 날조될 수 있는지, 또는 필연적으로 어떤 헛소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는다. 이런 계약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헤겔의 첫 부정은 타락에 대한 교리문답식 개념이고, 둘째 부정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라는 개념이라는 걸 분명하게 지적한다. 사실 증명에 있어 종교적인 영역에서 빌려온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추를 토대로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모호한 재산 세계에 기꺼이 머물러 있고, 심오한 변증법적인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 수 있는 자신의 숙달된 능력에 사실 증명을 맡겨둔다.'
엥겔스는 다음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부정에 따른 부정을 활용 외에는 사회 혁명과 토지에 따른 공동 소윶 확립,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생산되는 생산 수단의 필연성을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종교에서 빌려온 이런 헛소리 같은 비유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미래 사회에는 헤겔의 지양된 모순에 따라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로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 관계가 더 지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부정에 따른 부정을 잠시 놔두고,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 관계를 들여다보자. 뒤링은 모호한 세계라고 규정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이 점에 관해 정말로 옳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호한 세계에 있는 건 마르크스가 아니라 뒤링 자신이다. 뒤링은 마르스크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소유권에 따른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에게 전가시키면서부터 마르크스를 헤겔과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부정에 따른 부정이다. 생산자에게 사유 재산을 다시 확립해주는 게 아니라, 그에게 자본주의 시대에 따른 획득물, 곧 토지와 생산 수단에 따른 공동 소유와 공동 운영에 기초한 사유 재산을 부여한다. 개인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산발적인 사유 재산에 따른 자본주의 사유 재산으로 탈바꿈은 이미 실제적으로 사회화된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으로부터 사회화된 재산으로 탈바꿈보다 비할 데 없이 시간이 걸리고, 폭력적이며, 어려운 과정이라는 건 당연하다. 이게 전부다. 착취자들의 착취로부터 발생한 형국은 따라서 사유 재산을 다시 확립하면서부터 성격이 규정되지만, 노동 자체로부터 생산된 생산 수단과 토지에 따른 사회적인 소유 관계에 토대를 둔다. 독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소유 관계가 토지와 다른 생산 수단으로 확정되고, 개인적인 소유 관계는 생산품, 곧 소비 품목으로 확장된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여섯 살짜리 아이들까지도 문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자본』Ⅰ권, 56쪽에서 공동 생산 수단으로부터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모든 개인들에 따른 노동력이 공동체, 곧 사회주의 토대 아래에서 조직된 사회에서 결합된 노동력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적용된 자유로운 개인들에 따른 공동체를 상정한다. 이렇게도 말한다. 공동체에 따른 생산품 전체는 사회적인 산물이다. 생산품 일부는 새로운 생산 수단으로 기능하고, 그때에도 여전히 사회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부분으로는 생존 수단으로 구성원들로부터 소비된다. 따라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 부분을 분배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뒤링에게조차 충분히 명확하다.'
'계속해서 엥겔스는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 부정에 따른 부정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라고 말을 잇는다. 같은 책, 791쪽과 뒤이은 쪽에서도, 마르크스는 이른바 자본에 따른 본원적인 축적에 대한 경제적·역사적 연구를 담은 이전 쪽들에서 끌어온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가진 노동자의 사유 재산에 기초한 소규모 제조업이 존재했었다. 이른바 자본에 따른 본원적인 축적이란 이들 직접 생산자들에 따른 재산 박탈, 곧 노동 소유주에 따른 노동에 기초한 사유 재산 해체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소규모 제조업이 좁고, 원시적인 범위에서 생산 및 사회로만 양립할 수 있고, 특정 단계에서 스스로 소멸을 위한 물질적인 매개체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멸에 있어,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생산 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 수단으로 전환된다는 건, 자본주의에 따른 초기 단계를 구성한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노동 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스스로 제 발 일어서자마자, 노동에 따른 사회화는 심화됐고, 토지 및 다른 생산 수단은 한층 더 자본으로 전환됐고, 따라서 더 한층 심해진 개인 소유주들에 따른 재산 박탈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됐다. 남아 있는 박탈 대상은 스스로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박탈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따른 내재적인 법칙들에 따른 작용, 곧 자본의 집중으로부터 달성된다. 한 명의 자본가는 언제나 다수를 죽인다. 이런 집중과 나란히 해, 또는 소수로부터 다수 자본가들의 박탈과 나란히 해, 또는 소수로부터 다수 자본가들에 따른 박탈과 나란히 해 노동 과정에 따른 협동적인 형태, 과학에 따른 의식적인 기술과 적용, 토양에 따른 체계적인 경작이 훨씬 더 확대된 범위로 발전된다. 노동 도구들은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 도구들로 전화되고, 노동 도구들을 활용해서, 사회화된 노동이 결합된 생산 수단같이 모든 생산 수단에 따른 절약이 일어난다. 이런 변화 과정에 따른 모든 이점들을 강탈하고, 독점하는 거대 자본들은 꾸준히 소수에게 집중되면서부터, 곤궁, 억압, 노예화, 몰락, 착취가 대량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더불어 노동 계급 봉기도 증가한다.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 자체에서 원리로부터 언제나 수적으로 늘어나고, 훈련되고, 단결하고, 조직화된다. 자본은 함께, 그 아래에서 생겨나고, 발달해온 생산 양식에 따른 족쇄가 된다. 마침내 생산 수단에 따른 집중과 노동에 따른 분화는 자본주의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외피는 산산이 폭발해버린다.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의 조종이 울린다. 착취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한다.'
'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자. 변증법적인 장식과 수수께끼, 개념 상 포도당초 무늬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건 결국 하나고 똑같다는, 뒤섞이고 판단이 잘못된 사상들은 어디에 있는가. 독실한 추종자들을 위한 변증법적인 기적들은 어디에 있으며, 헤겔식 이성 원리에 따른 알 수 없는 변증법적인 헛소리와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는 또 어디에 있는가. 뒤링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 없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설명을 구체화시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는 과거 소규모 제조업이 그 자체의 발전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조건을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생산 양식도 소멸되는 물질적인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걸 역사에서 드러내주고, 요약된 형태로부터 여기에 명시한다. 그 과정은 역사적이며, 동시에 변증법적인 과정이라면 아무리 뒤링에게는 불쾌하더라도, 그건 마르크스 잘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 경제적 사실들에 기초해 자신의 증명을 마무리 지은 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따른 결과인 자본주의적인 착취 방식은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을 생기게 하는 결론으로 나아간 건 오로지 그런 관점에서였다. 소유주에 따른 노동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개인 사유 재산에 따른 첫 부정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따른 불변성을 내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은 스스로 부정을 생기게 만든다. 바로 부정에 따른 부정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가리켜 부정에 따른 부정이라 특징짓고, 그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이라는 걸 입증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건 아니다. 정반대로, 사실상 그 과정이 이미 부분적으로 발생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미래에 발생할 게 틀림없다는 걸 역사로부터 입증한 뒤에야 명확하게 변증법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과정으로 특징짓는다. 그게 전부다. 그러므로 뒤링은 부정에 따른 부정이 과거라는 자궁으로부터 미래를 낳는 산파로 기능해야 한다거나, 마르크스는 부정에 따른 부정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누구에게나 토지와 자본에 따른 공동 소유에 대한 필연성을 납득시키고 싶어한다고 선언한 건 완전한 사실 왜곡이다'
독자들은 뒤링에 대한 엥겔스의 뛰어난 반박이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안다. 미하일로프스키 역시나 마르크스에게 있어 미래는 오로지 헤겔의 사슬 끄트머리에 존재하고, 불가피성의 확신은 믿음을 토대로 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링과 미하일로프스키 선생 간 전반적인 차이는 두 가지 작은 지점들로 요약된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고는 마르크스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링은 자신이 쓴「역사」의 다음 대목에서, 마르크스는『자본』후기에서 헤겔주의라는 비난을 단호히 물리쳤다는 걸 언급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변증법적인 방법론이라 여겼던 부분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해명한 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째로, 미하일로프스키의 또 다른 독특한 구석은 시제 사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마르크스는 미래에 대해 말하면서 왜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가라고 의기양양하게 따지고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법이나, 가치 있는 비평을 들여다보더라도,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래는 불가피하고,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여겨질 때면, 미래 시제 대신에 현재 시제가 사용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왜 그렇고, 그게 확실해라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걱정스럽게 되묻는다. 왜곡까지도 정당화시켜줄 만큼, 자신의 아주 깊숙한 불안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도, 마르크스는 절대적으로 명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여러분은 그것이 불충분하다가, 잘못됐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 경우 여러분은 정확히 어떻게 틀렸고, 정확히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어야지, 헤겔주의 헛소리를 지껄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 자신도 그 답변이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까지 했던 시기가 있었다. 1877년,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코프스키 선생에게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 개념을 억측이라 여길 충분한 근거가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한 노동의 사회화라는 문제를 무시할 만한 도덕적인 권리가 없었다고 썼다. 당연하다. 1877년에 주코프스키는 문제를 회피할 도덕적인 권리가 없었지만, 1894년,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럴 권리를 갖고 있었다. 독수리가 해도 되는 일을 황소가 해서는 안 되는가 보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조국 연보」에서 언급된 바 있는 노동에 따른 사회화에 대한 이상한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다. 해당 잡지는 1883년에 발행된 7호에서 포스토로니라는 사람으로부터 온「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어 발행한 적이 있었다. 포스토로니는 미하일로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 개념을 억측이라고 여겼다. 포스토로니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자본주의에서 본 질적으로 노동에 따른 사회적 형태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하나의 지붕 아래서 갈고, 망치질 하고, 뒤집고, 올리고, 내리고, 당기는 등 수 많은 여러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해당한다. 해당 체제에서 전반적인 성격은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속담에 아주 잘 표현된다. 여기에서 노동의 사회적인 형태가 자리 잡을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들은 남자가 문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동의 사회적인 형태는 하나의 지붕 아래서 일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들을 현재까지는 국내 잡지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잡지에다 옮기면서 여전히 『자본』의 이론적인 부분이 대체로 과학적으로 인정된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싶어한다. 『자본』에 대해 약간이라도 진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기에, 대체로 인정되는 과학은 그 책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가장 초보적인 무지를 계속 드러냈으며, 경제 교과서에나 나오는 시시한 말들을 되풀이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습관적으로 완전히 지나쳐온 문제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문제를 어쨌든 꼼꼼하게 되짚어보아야만 한다. 자본주의 생산에 있어 노동 사회화는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노동에 따른 분화와 특정 산업 분야에서 자본가들 수 감소 및 독립된 산업 분야들에 따른 수적 증가와 수 많은 독립된 생산 과정들이 하나의 사회적인 생산 과정으로 통합되는 경향 증가를 동반한 자본 집중에 있다.
소규모 생산자들 스스로 실을 잣고, 옷감으로 만드는 수공업 직조 시대에는 제조업 분야가 방직과 직조는 합쳐진 몇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생산이 자본주의에 따라 사회화되면, 제조업 독립된 분야들에 따른 수가 증가한다. 면방적은 독립적으로 행해지고, 직조도 마찬가지다. 생산에 따른 바로 이런 분할과 집중은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킨다. 기계 제작, 석탈 채굴 등이 바로 그렇다. 더욱 더 특화된 제조업 각 분야에서, 자본가들 수는 꾸준하게 감소한다. 생산자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연결 고리는 더욱 더 튼튼해지고, 생산자들은 단일한 하나로 결합된다. 고립된 소생산자들은 각자 여러 개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따라서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 수공업자 자신이 아마 섬유를 짜고 잣고 만들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거의 독립적이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곧 무정부 상태에 따른 시장 변동을 뜻하는 속담이 정당화된다는 건, 바로 이러한 작고, 분산된 상품 생산자 체제에서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 사회화 아래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자는 면실 제조업자에게 의존한다.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 사회화에서는 면화를 키우는 자본주의 경작자와 기술 업무 소유자, 석탄 소유자 등에게 의존하는 식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본가도 서로가 없이는 헤쳐나갈 수가 없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속담은 그런 체제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각자는 모두를 위해 일하고, 모두는 각자를 위해 일한다. 체제에 따른 성격이 완전히 변한다. 작고 고립된 기업들 체제에서 작업이 그 중 하나에서 멈춰 있다면, 사회 몇몇 구성원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이며, 전체적인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고 따라서 전반적인 관심을 끌거나, 공공 개입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기업, 곧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 분야에 관련해서 거의 사회 전체를 위해 작업을 하고, 또 반대로 사회 전체에 의존하는 기업에서 작업이 차질을 빚으면, 작업은 사회에 따른 다른 모든 기업에서도 차질을 빚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업으로부터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얻을 수 있고, 기업의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어야지만 자신의 상품을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 과정들은 하나의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흡수되어 통합된다. 그러나 각 분야는 독립된 자본가로부터 굴러가고, 자본가에게 의존하며, 사회적인 생산품들은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 된다. 그렇다면 생산 형태가 점취 형태와는 해소할 수 없는 모순으로 향한다는 건 명확하지 않은가. 점취 형태가 생산 형태에 적응해야만 하고, 사회적이며, 사회주의적이 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국 연보」에 기고한 영리한 속물은 전체를 하나의 지붕 아래서 작업하는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보다 더 빗나간 주장이 어디 있을까. 과정에 있어 사회적인 측면, 곧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연합되며, 조직된다는 점에 대해서 여기서는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고, 오로지 물질적인 과정과 생산 관계에서 변화만 서술했을 때, 기초적으로는 국내 민주주의자들에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소부르주아 사상에 따른 진흙땅에 아주 깊이 빠져 있어서, 소부르주아 질서 말고는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미하일로프스키로 돌아가보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발전 법칙 자체로부터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기초로 삼은 사실과 주장들에 대해 미하일로프스키는 어떤 반론을 제시했는가. 사회적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에서는 실제로 사회적 노동 과정에서 분화가 증가하지 않고, 자본과 기업의 집중도 없으며, 노동 과정 전반에서 사회화도 없다는 걸 미하일로프스키는 보여줬는가. 아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런 식의 반박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노동 사회화와 양립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유한 특징이라는 명제를 뒤흔들어본 적도 있는가. 여기에서도 미하일로프스키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자본가들에 따른 노동 과정들이 단일한 사회적 노동 과정으로부터 '융합'된다는 건 사유 재산과 양립할 수 있다고, 또 모순에 대한 일정한 해결책일 수 있다고,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걸 미하일로프스키는 증명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의 비판은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가. 조작, 왜곡, 달그락거리는 소음에 불과한 일련의 말들이 바로 그렇다. 세 단계에 따른 연속적인 역사 발전에 대해 수 많은 헛소리를 늘어놓은 뒤, 마르크스에게 심각한 어조로, '그럼 다음은 뭐요'라고 따지는 비판자가 활용한 방법론들의 성격을 달리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가 설명한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자신의 학문과 혁명 활동 초기부터 마르크스는 사회학 이론이 현실 과정을 정확히 묘사해야만 한다고 매우 단호하게 요구했다는 점,『공산당 선언』에서 담긴 공산주의자들에 따른 이론 규범을 참조했을 때도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 이런 요구를 엄격하게 지켰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걸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구성체 발달이 실제로 여러 경향을 지니고 있고, 필연적으로 소멸해 또 다른 형태, 더 높은 단계에서 구성체로 변화한다는 점을 보여준 뒤에 거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 원리에 따른 전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눈을 돌린 채, '그래서 그 다음은 뭐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해댄다. 그러고는 심오한 말을 덧붙인다.
'엥겔스가 정확히 어떻게 답변할지 잘 모르겠따는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
미하일로프스키, 솔직히 고백해야겠네요. 당신의 그런 비판 정신과 방법론들이 어떤 지를 아주 잘 알겠다. 다음 주장에서는,
'중세 시대에 소유주들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마르크스 사유 재산 개념은 경제적 관계 영역에서조차 유일한 요인도, 지배적인 요인도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을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해석에서 변증법적인 방법론은 마르크스에게로 되돌아가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구상들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 비율에 대한 그림조차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단지 과거와 현재, 미래 상태에서 모든 대상을 생각하는 인간 정신의 경향을 충족시켜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 사안을 왜곡하는 당신의 방식은 구역질날 정도로, 단조롭고 변함없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우선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실제 과정만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는 게 자신의 계획이라는 마르크스 구상안에다 삼단논법으로부터 모든 걸 증명하겠다는 의도를 넌지시 끼워넣으며, 그 다음에는 마르크스 구상이 미하일로프스키 자신이 몰래 끼워놓은 구상, 세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모든 걸 생략한 채, 오직 첫 단계에서 한 측면만 회복시켜준다는 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가장 뻔뻔스러운 방식으로, 구상은 명백히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엥겔스가 뒤링에게 말했듯이, 예외적으로라도 정확한 인용을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물에게 무슨 진지한 비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잘못됐는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구상이 명백히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대중을 안심시키는 사람과 도대체 어떤 논쟁을 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 관점에 따른 실제적인 내용을 비판하는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범주 주제에다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한다. 뒤링에 따른 영원한 진리'에 맞서는 주장을 폈던 엥겔스는 설파된 도덕은 봉건 기독교적인 도덕과 부르주아 도덕, 프롤레타리아 도덕이라는 세 가지 수준에서 도덕이며,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세 가지 도덕에 각각 담겨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나는 역사를 시기 별로 세 가지로 분할하는 데 기초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범주가 자리 잡는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심오한가. 어떤 사회적인 현상을 그 발전 과정에 따라 검토할 경우, 과거의 유산, 현재의 토대, 미래의 기원이 언제가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엥겔스는 도덕 역사가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요인들에 한정되고, 봉건적인 도덕률 이전에 노예제 도덕률이 선행하지 않았으며, 노예제 도덕률 이전에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도덕률이 선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유물론적으로 해명하면서 도덕 사상에서 현대적인 경향을 자세하게 밝히려던 엥겔스 시도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가장 공허한 수사로 안내한다. 미하일로프스키가 동원한 비판, 곧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개념이 어떤 책에서 어디에서 설명됐는지를 모르겠다는 발언으로 시작되는 비판에 대해서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책들 가운데 하나를 알게 되고, 그걸 보다 정확하게 칭송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877년,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자본』에서 헤겔 변증법이라는 무겁고, 서툴고, 불필요한 뚜겅을 제거한다면, 논문의 다른 장점들을 제쳐두고서라도, 형태와 그 존재의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질문에 따른 해답을 놀랍도록 공들인 자료에서 목격하게 되며, 질문을 명확한 영역으로 멋지게 공식화할 수 있다.'
형태와 존재에 따른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라니. 사회적인 삶에서 다양한 측면들 간 상호 관계, 물질적인 관계에 기초한 이념적 · 사회적 관계에 따른 상부 구조라는 문제를 말한다. 문제에 따른 잘 알려진 해결책은 유물론 원리를 구성하는데, 계속 나아가 보자.
'사실 전체로『자본』은, 하나의 사회 형태가 생겨나자마자 어떻게 생산 방식과 새로운 시장과 과학에서 발견 및 발명, 개선된 부분을 스스로에게 종속시키고, 흡수해나가면서 발전해나가고, 전형적인 특징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지와 그런 부분들이 사회 형태를 위해 작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지, 그리고 마침내 주어진 사회 형태가 어떻게 물질적인 조건에서 더 이상 변화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기여한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1877년, 전체로서 『자본』이 특정한 사회 형태에 대한 유물론적인 물음에 기여했었지만, 1894년에는 유물론적인 설명을 어떤 책의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니 말이다. 1877년에는 『자본』이 특정한 형태가 물질적인 조건에서 더 이상 변화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었던 반면에, 1894년에는 어떠한 물음도 없고, 자본주의 형태가 생산력 발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전적으로 헤겔의 삼단논법 끝에 기대어 있다고 밝혀졌다니. 1877년,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어진 사회 형태와 존재에 따른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에 대한 분석은 필자의 논리력과 방대한 학식에 대한 기념비로 영원히 남게 될거라고 썼던 반면에, 1894년에는 유물론 원리가 어디에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증명된 적이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우선, 1870년대 국내 농민 사회주의에서 그 부르주아적인 특성 때문에 자유에 코웃음치고, 국내인들의 삶의 적대적인 본질을 열심히 은폐했던, 눈썹 깨끗한 자유주의자들과 싸웠으며, 꿈꾸었던 농민 혁명은 완전히 쇠락한 나머지, 자유주의가 농민층에 따른 대규모 착취를 동반한다는 점을 잊어버린 채, 저 저속하고, 속물적인 자유주의를 불러들였다. 그 자유주의자들은 농민 농업에서 진보적인 경향들에서 고무적인 인상을 확인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둘째로, 1877년,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감 넘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마르크스를 자유주의 비판가들로부터 방어하는 임무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마르크스 방법론과 자신의 방법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런 뒤, 변증법적 유물론과 주관적 사회학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엥겔스 글과 저작,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플레하노프의 여러 글들을 읽다보면, 미하일로프스키에 대한 아주 적절한 평을 가끔 마주치는데, 이를 접하게 되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지하게 안장서 문제 전체를 되짚어보는 대신에 단지 이를 악물고, 반항하는 쪽을 택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1872과 1877년에, 마르크스를 환영하는 대신에 의심스러운 칭찬 뒤에 숨어서 마르크스를 향해 짖어대고,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적 최약자들의 방어선, 창과 시골 지역 개선, 박물관과 수공업자들에 따른 협동조합, 마찬가지로 의도만큼은 선한 속물적인 진보 사상들에 만족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회 혁명을 옹호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로 남아 이 사회에서 진정한 혁명적 부류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조직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해 분노하고, 식식댄다.
머나먼 과거 영역으로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아마도 미하일로프스키가 마르크스 이론 비판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 비평가의 주장들을 종합하고, 요약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가 무너뜨리는 데 착수했던 원리는 첫째로,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 둘째로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기초한다.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에 있어서는, 어떤 책에서 유물론이 설명됐는지 모르겠다고 선언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그런 설명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유물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꾸며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유물론이 과도한 주장이라는 걸 이해시키고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인류 전체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해명했다는 주장을 편다는 말을 조작해냈으며, 뒤이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하나의 사회구성체만을 해명한다고 인식한다는 점이 그들의 진짜 주장들로부터 드러나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유물론의 범위를 좁히면서부터,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유물론이 작동되는 방법론들을 이해시키고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해명할 만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음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말을 지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지 경제사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1845-1846년에 고백한 게 전부이며, 출판된 논문에서도 자신들의 지식의 불충분함을 드러낸 적이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전주곡이 펼쳐지자, 곧바로 비판 자체가 뒤를 이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은 단지 하나의 시기만을 다뤘기 때문에 곧 소멸된 반면에, 자신은 모든 시기를 다루기를 원한다고 했다. 또한 『자본』은 경제적 유물론을 확인시켜준 게 아니라 단지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라고도 했다. 유물론이 절대 과학적으로 확증된 적이 없다는 인식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무게가 실린 진지한 주장들이었다. 뒤이어 완전히 다른 국가에서 역사 이전 시기를 연구한 결과 역시 유물론적인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인간은 전적으로 유물론과 무관하다는 점만이 인용됐다. 더욱이나 생식을 유물론으로 이끌고 가는 게 완전히 잘못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그리고 그건 언어적 기만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고자, 미하일로프스키는 경제적 관계가 성과 가족 관계에 기초한 상부 구조라는 걸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게감 있는 비평가가 유물론자들을 교환시켜주고자 쏟아낸 서술들은 생식이 없으면 상속할 수 없다는, 복잡한 심리 작용이 생식의 산물들을 '수반한다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길러진다는 심오한 진로로부터 풍부하게 해주었다. 지나가는 말로, 또한 민족이 씨독 유대의 연장이자, 일반화라는 점도 알게 됐다.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연구를 이어가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주장 가운데 상당수가 부르주아 체제 아래서 대중들에 따른 억압과 착취가 필연적이라는 주장과 그 체제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있다고 지적했고, 그런 다음에 서둘러 필연성은 너무 일반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신비주의자이자, 형이상학자라고 선언한다. 또한 미하일로프스키는 이상주의자들에 맞선 마르크스의 격렬한 비판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고 단정지었지만, 주관적 방법론에 대한 이상주의자들의 견해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마르크스,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두 번째 기둥인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대담한 비판가가 가한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공격은 방향을 아주 잘 잡았다. 무엇이든 삼단논법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들여, 고군분토했고, 변증법적인 방법론이 삼단논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사회학에 따른 이상주의와 주관적인 방법론에 대한 거부에 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해버렸다. 그런 다음 특별히 마르크스를 겨냥한 또 다른 공격이 이어졌다. 용감한 뒤링 선생의 도움을 받아,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삼단 논법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자본주의 파멸에 따른 필연성을 입증하려는, 놀랄 만큼 터무니 없는 시도를 했다고 뒤집어씌운 다음, 그런 터무니없는 시도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저명한 사회학자의 얼마나 멋진 승리의 서사시란 말이던가. 그리고 그런 승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건 또 얼마나 교훈적인가.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원리에 대한 비판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도 없지만, 저 비평가의 이상과 현실 인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특징적인 또 다른 상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로 서구 노동 계급 운동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태도다. 앞에서 유물론이 과학적으로 아마도 독일 인민의 벗들의 과학을 말한다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지 못했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주장을 앞서 인용한 바 있다. 그러나 유물론이 노동 계급 사이에서 정말로 아주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장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 점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경제적 유물론이 폭 넓게 누려온 이른바 성공과 비판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형태로 퍼져나가는 현상은 주로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확립된 일상의 관행 때문이지, 과학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확립된 관행이라는 터무니 없는 표현에는 곧 유물론이 확산된 이유가 현실을 정확히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멀어진 채 전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전망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인 독일 노동 계급이나, 이해 또는 비판적 사고의 노력 없이 미래에 대해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저 믿음을 요구할 뿐이다.
달리 말해,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 확산은 그 원리가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서구 노동 계급 운동 역사에 대해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갖고 있어도, 이런 설명에 따른 완전한 어리석음과 잘못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절대 미래를 향한 전망 같은 걸로 치장하지 않았으며, 현재 부르주아 체제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따른 발전 경향을 연구할 뿐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이미 시류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1843년 9월, 「A. 루게에게 쓴 편지」에서도 투쟁을 멈춰라, 당신들의 투쟁은 무의미하다는 시류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모든 역할은 진정한 투쟁 구호를 제공한다. 이 세계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의식이란 싫든, 좋든,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라고 자신의 구상을 마무리지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자세히 설명된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저작물인 『자본』은 미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암시에 스스로를 국한시켰으며, 단지 미래 체제가 발달하는 출발점인 현재 요소들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도 누구나 알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에 관한 한, 누구보다 미래 사회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사람들이 갈등 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사는 체제, 착취가 아닌 인간 본성 조건에 일치하는 사회적인 관계와 발전에 따른 참된 원칙에 기초한 체제를 표현해서 인류에게 영감을 불어넣고자 했던 이들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그러한 사상들을 상세하게 밝힌 건, 굉장히 재능 넘치는 사람들의 집단이자, 가장 굳건한 확신을 가진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들은 삶과 거리를 뒀고, 그들의 강령들은 대규모 기계 공업이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대중들을 정치적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길 때까지, 그리고 투쟁의 진정한 구호를 찾게될 때까지 민중들에 따른 정치적인 운동과 연결되지 않았다. 이 구호를 찾아낸 건 마르크스였다. 단순히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엄밀하고 또 건조하기까지 했던 과학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아주 오래 전인 1872년에 마르크스를 이렇게 불렀던, 그 마르크스 말이다. 그리고 전망이라는 수단으로부터 발견된게 아니라, 현재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부터 착취에 따른 필연성에 대한 해명, 발전 법칙에 따른 연구로부터 찾아냈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는 「러시아 부」 독자들에게 그러한 분석을 이해하고자, 요구되는 건 지식도, 사고의 노력도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이미 미하일로프스키가 미하일로프스키의 경제학 조력자인 유자코프의 경우 한층 더, 그러한 분석이 확립한 초보적인 진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켜봐왔기에, 그런 주장은 당연하게도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대규모 자본주의 기계 공업이 발전하는 곳을 따라, 노동 계급 운동이 확산되고, 발전한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 원리는 인간 본성에 일치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논쟁이 중단되고, 동시대 사회 관계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과 현재 착취 체제에 따른 필연성에 대한 해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꽃을 피운다.
이런 태도의 원리에다 진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방식으로, 전망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부터,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물론이 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를 외면하려고 애썼던 미하일로프스키는 서구 유럽 노동 계급 운동에서 사상과 전술에 대해 가장 저속하고, 속물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조롱을 가한다. 지켜봐왔듯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 사회화에 따른 결과로부터,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마르크스가 증명한 점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반박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주의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되찾을 준비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군대로부터, 모든 계급 갈등이 중단되고, 지상의 평화와 인간들 간 친선이 지배하게 된다는 발상을 가장 뻔뻔스러운 태도로 조롱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주의 달성이라는 길로 향하는 그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확실한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인민의 벗들은 바람직한 경제적 진화에 따른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러면 아마도 이들 인민의 벗들은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소환되기에, 노동자들이 인민의 벗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인민의 벗들에 의지해야지, 절대 정당하지 못한 자기 확신으로부터 착취자들에 맞선 독자적인 투쟁을 시작하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자기 확신에 빠진 죽음의 주먹을 날리기를 소망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주머니 사전에나 어룰릴 법한 과학에 노발대발해댄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주머니에나 들어가야 할 1페니짜리, 사회민주주의 소책자라니.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위해 독자적인 투쟁을 벌이라고 가르치는 과학, 계급 적대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가면서, 자신들에게 모든 일을 맡겨주기를 바라는 모든 인민의 벗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과학에 가치를 부여하고, 속물주의자들을 그렇게도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1페니짜리 출판물들에서 그 과학을 상세하ㅔ 설명한 사람들이 얼마나 확고한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는지는 이제 분명해진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인민의 벗들에 손에만 맡겨둔다면, 사정이 얼마나 달라질까. 그들은 노동자들에게도 진정으로 아주 방대한 지식과 속물 과학이 뭔지를 잘 보여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본성에 일치하는 사회구성체를 아주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소개시켜준다. 물론 노동 계급은 그들을 기다리는 데 동의만 하고, 정당하지도 못한 자기 확신으로 투쟁을 시작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2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전반적인 마르크스 이론이 아니라, 특별히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겨냥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비판 2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약간의 여담을 늘어놔보자.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 이론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왜곡하기만 했던 미하일로프스키는, 뻔뻔스럽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생각을 왜곡시켰다. 진실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초기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비교하기에는 아주 손쉬웠다. 1892년,「러시아 사상」6호에 실린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글로부터 초기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빌려올 텐데, 거기에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말했고,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또는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주의와 평생선을 긋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바 있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를 사회주의자들, 또는 국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류해놓음으로부터, 그리고 그들과 동경으로 놓음으로부터, 미하일로프스키를 화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논점의 방향이 양자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똑같고, 단지 단호하고, 직설적인 면, 그리고 확신의 일관성 정도에서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연보」 관점들을 서술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렇게 적는다.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하고, 생산자가 노동 수단을 소유하는 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으로 여겼다.'
보다시피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고, 가장 바람직한 소망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 여전히 존재하는 중세적인 노동 형태는 심각하게 흔들려왔지만, 자유주의든, 비자유주의든 어떤 교리를 위해서 완전히 종식시킬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참으로 이상한 주장이다. 분명 어떤 종류에 따른 노동 형태든, 그것이 다른 어떤 형태로부터 대체된다면 흔드릴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를 분석하고, 해명하거나, 왜 낡은 형태가 대체되는지 확인하고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형태를 종식시킬, 곧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생산 관계를 재구성할 어떤 수단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교리에 따라 이런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발상은 터무니 없지 않은가.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계속 귀 기울여보자.
'임무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문명을 민족적인 심연으로부터 우뚝 세우는 게 아니다. 갈가리 해체시키는 온갖 모순들과 더불어 서구 문명을 우리나라에 완전히 이식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좋은 걸 취해야만 한다. 우리 것이냐, 외국 것이냐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인 쪽의 문제다. 확실히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며, 이해하기 쉬워서 논의할 것조차 없다.'
정말로 이렇게 간단하다.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좋을 것을 취하자. 그러면 속임수가 완성된다. 중세적인 형태로부터 노동자의 생산 수단 소유를 취하고, 새로운 곧 자본주의 형태로부터 자유, 평등, 계몽, 문화를 취하라. 그러면 논의할 것조차 없다. 여기서 사회학에 따른 주관적인 방법론은 대낮만큼 명료하다. 사회학은 노동자 토지 소유라는 유토피아 낙원에서부터 출발해서, 여기저기서 좋은 것을 취하라는 소망을 실현시키는 조건을 알려준다. 철학자는 사회적 관계를 많은 제도에 따른 기계적인 단순한 총합, 곧 많은 현상들에 따른 기계적인 단순한 연속같이 보는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취한다. 이러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는 중세적인 형태로부터 토지 경작자 소유를 불쑥 꺼내들며, 하나의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벽돌을 옮겨놓듯, 다른 모든 형태에도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사회적인 관계를 연구하지 않은거고, 검토할 소재를 훼손시킨다. 실제로 당신이 받아들이듯이,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존재하는 토지 경작자 소유 따위는 없다. 당시에 존재하는 생산 관계에 따른 연결 고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 곧 지주들에게 토지를 분할해주면 그들은 농민을 착취하고자,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서 할당해 토지가 일종의 임금이 되는 구조일 뿐이다. 농민에게 필요한 생산품을 제공해주고, 덕분에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지주를 위해 초과 생산물을 생산한다. 또한 농민들이 지주에게 봉건적인 노역을 제공할 수단을 안겨준다. 필자는 왜 이러한 생산 관계 체계를 추적하지도 않고, 한 가지 현상만을 골라내어,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그걸 해석하는 함정에 스스로를 가두는 걸까. 바로 필자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당시에 존재하는 노동 형태를 설명하고, 명확한 사회구성체이자, 생산 관계 체계로 제시하는 일은 전혀 시작하지도 않고 있었다. 마르크스 표기에 따르면, 사회를 기능과 발전에 있어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기를 요구하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새로운 형태를 논하는 데 있어서도, 왜 노동에 따른 낡은 형태들이 새롭게 대체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 미하일로프스키가 보기엔 그러한 새로운 형태가 토지 경작자 소유를 뒤흔든다고 지적하고, 이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데만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다시 미하일로프스키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가지 현상인 토지 강탈을 골라놓고는, 상품 경제에 기초한 완전히 다른 생산 관계 체계의 한 요소로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다. 상품 경제는 필연적으로 상품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쟁과 불평등, 일부 몰락과 다른 사람의 부에 따른 축적을 생기도록 만든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대중 몰락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는 주목했지만, 소수로부터 부에 따른 축적이라는 다른 측면을 무시했으며, 미하일로프스키가 양쪽 모두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러시아의 부」, 1894년, 1호에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고 일컫는 방법론들은 실제로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현실을 해명하고, 정면으로 응시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미하일로프스키는 무산 계급을 상대로 한 유산 계급의 분투와 함께 이런 삶의 문제들로부터 도피해서는 순수한 유토피아 낙원의 영역으로 굴욕적으로 숨어들어간다.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뜨겁고도 복잡한 실제 현실을 이상적으로 다루면서부터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고 일컫는 이러한 행동에는 사실상 그가 실제 현실을 분석하고, 해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줄 뿐이다.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다양한 사회구성체들로부터 개별적인 요소들을 분별없이 뽑아내는, 곧 중세 형태에서 하나를 뽑아내고, 새로운 형태로부터 또 다른 걸 뽑아내는 식으로 유토피아 낙원을 제시했다. 여기에 기초한 이론에는 실제 사회 진화와는 완전히 상이할 수밖에는 없는 운명이다. 공상주의자들은 여기저기서 뽑아낸 요소들로부터 형성된 사회 관계 아래서 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농민과 쿨라크 간 관계, 수공업자와 구매자 간 관계, 노동자와 공장 소유주 간 관계를 결정짓는 사죄거 관계 아래서 살고 행동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그렇다. 이렇듯, 이해조차 하지 못한 관계를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서 다시 끼워맞추려는 시도와 노력들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아주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무대에 등장했을 당시에도, 사회주의라는 문제가 어떻게 러시아에서도 정립됐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착취에 따른 현실을 단지 지적하고, 비난하는 데서 만족하지도 못한 그들은 해명하기를 바랬다. 국내 개혁 이후로, 전반적인 역사가 대중 몰락과 소수 부의 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보편적인 기술 발전과 더불어 소수 생산자들로부터 막대한 부에 따른 독점을 주목했고, 그러한 양극화 경향이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증가한다는 점을 주목한 그들은 상품 경제가 발전하고, 공고화된 결과로부터 자신들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경제 조직과 맞닥뜨리며, 필연적으로 대중 착취와 억압을 발생시킨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런 확신에는 그들의 실질적인 계획을 직접적으로 결정짓는 구실을 했고, 따라서 그들은 저 멀리 떨어진 두메 마을에서부터 최신식 공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 국내 경제 현실에 따른 주요한 알맹이를 구성하는 자산 계급에 맞선 무산 계급 투쟁에 결합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럼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다시금 현실로부터 제시한다. 자본주의는 산업에 따른 주요 분야들을 대규모 기계 공업 단계로 이끌었다. 이처럼 생산을 사회화하면서부터 자본주의는 새로운 체제를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을 창출해냈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인 동력을 만들어냈다. 다름 아닌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그렇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착취에 종속된 경제적 본질에 있어 국내 노동 인구 전체가 착취에 종속된다.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아리아는 그러나, 해방에 있어 특수하고도, 우호적인 위치에 선다. 더 이상 완전한 착취에 기초한 낡은 사회와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갖지 않게 되고, 노동 조건 자체와 삶의 환경이 계급을 구성할 때로 하여금, 정치 투쟁이라는 장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하면서, 또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돌리고, 모든 희망을 이 계급에게 걸면서부터, 스스로 구상을 계급 의식 발전으로 치환할 수밖에 없고, 현 체제에 맞선 공장 노동 계급, 도시 무산 계급에 따른 직접적인 정치 투쟁을 돕고, 전체 국내 무산자를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방향으로부터 스스로 모든 활동들을 설정하게 된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싸우는 법
그럼 이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어떻게 싸우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 견해, 그들의 정치적·사회주의적인 활동에 대해 어떤 주장들을 내놓고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료 표현한다.
'진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선언한 바에 따르면, 역샂거인 필연성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국내 자체의 모든 고유한 모순들과 더불어 소수 자본가들이 막대한 몫을 빨아들이면서 스스로 자본주의 생산을 발전시킬거고, 그러는 사이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해서 통합되고, 사회화되며, 모자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에 씌어지는 마술이 일어나고, 인류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재가 아닌 오직 전망만을 취급하듯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만 다를 뿐 어쨌든 간에 현실 인식에 있어서는 놀랍게도 인민의 벗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미하일로프스키의 생각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예측에서 낙원적인 부분은 전혀 없고, 모든 건 엄밀한 과학 요구에 따라 저울질되고, 측정된다는 걸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믿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맞서 무엇도 구체적으로 내놓을 게 없는 사람들 모두가 오랫동안 동원해온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시시하고, 저속한 비난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주장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이고, 꾸며낸 말일 뿐이다. 서구에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자본주의가 존재해야 한다고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어디에서도 주장한 적은 없다.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역사에 대한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철학적 도식이라고, 특정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설명 그 이상이라고 간주한 적도 없다. 오직 주관적인 철학자, 미하일로프스키만이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 부족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며, 보편적인 철학 이론이라 주장했다며 마르크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답변으로 미하일로프스키가 엉뚱한 문을 두들기고 있다는 걸 아주 분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현실과 주어진 역사, 곧 국내 사회적·경제적 관계 외에 다른 걸 근거로 해서, 사회민주주의 견해를 품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려야 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직접 이론에 있어서 그런 요구 사항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한데다, 전체적인 이론에 따른 주춧돌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자신의 귀로 직접 추상적인 역사 도식에 관한 고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마음껏 이런 주장을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들로부터 그 모든 종류의 터무니 없는 헛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는 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나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 뭐가 그리도 중요할까. 그건 그저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이 대화할 사람들을 선택할 행운을 누렸다는 걸 보여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재치 넘치는 철학자의, 재치 넘치는 대화 상대자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등으로 불렀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악당들이 저마다 붉은 옷을 차려 입고 싶어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너무나 명민하 나머지, 그런 광대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구별하지 못했다면, 또는 마르크스를 너무나 심오하게 이해한 나머지,
마르크스가 아주 강력히 전개했던 이론 전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공식화의 기준을 알차리지 못했다면, 단지 미하일로프스키는 영리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해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해당 매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홀로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유지하고, 글자 그대로 대표해온 플레하노프와 노동해방단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단체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가 그렇게 했더라면, 품위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했어야 하는 행동이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저작인, 플레하노프, 「우리의 차이점들」을 참고 삼아 펴보기라도 했다면, 맨 처음 시작 부분에서 단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대신해서, 플레하노프가 단호하게 밝힌 다음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위대한 이름의 권위로부터 곧 마르크스 영향력으로부터, 강령을 잠시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 당신 러시아어 알아들 수 있을 거 아니오. 국내 정세를 판단할 때, 추상적인 도식들을 주장하는 거와 마르크스 영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 차이를, 이제 이해하겠소. 당신이 당신의 대화 상대에게 우연하게 들은 첫 견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의견이듯이 말하고, 전체 사회민주주의 모임을 대표해서, 핵심 구성원인 한 사람이 천명한 내용을 무시한 게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깨달았소. 그런 다음 플레하노프 선언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되풀이하건대, 가장 일관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내 현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정책에서는 이런 특정한 과학 이론을 아주 복잡하고, 서로 얽혀 있는 사회적 관계에 적용하려는 최초 시도'
라고 말한다. 과연 이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들은 마르크스 이론 가운데 매우 귀중한 방법론만을 주저 ㅇ벗이 빌려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적인 관계를 해명할 수는 없었겠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 기준을 추상적인 도식 같은 허튼소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정확도와 일치에서 찾았다.
여러분들은 이런 주장을 펼칠 때, 필자가 실제로 다른 무언가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상대했던 질문은 '국내에서 자본주의적인 발전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런 식의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공식에서는 전혀 제시된 적이 없었고, 당국 정책이나, 사회 활동, 인간 본성에 조응하는, 사회 이상 같은 헛소리에 그러한 해야만 하는 기준을 발견하는 여러 다양한 토박이 철학자들의 주관적인 방법론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도식을 믿는 인물이라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가를 묻는 쪽이 공정해진다. 그리고 분명 미하일로프스키는 변증법적인 과정에서 명백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전반적인 철학에서 중요도, 모든 국가가 그러한 단계를 거쳐야 할 필연성 등에 대해 말했었다. 그렇다면 플레하노프는 거기에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대답했다. 플레하노프는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제쳐두었다. 오직 주관론자들만 흥미를 느낄 법한, 쓸데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플레하노프는 오로지 현실 사회와 경제 관계와 실제적인 진화만을 다루었다. 플레하노프는 그런 잘못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기보다는, '국내는 이미 자본주의 길로 들어섰다'고 대답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미하일로프스키는 추상적인 역사 도식들에 대한 믿음에 대해, 내재적인 필연 법칙에 대해, 그리고 비슷한 믿기 힘든 험튼소리에 대해 전문가인 척 말한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룰 두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고 부른다. 이런 게 격렬한 비판이라면, 엉터리와 같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앞에서 인용된 미하일로프스키 주장과 관련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국내로는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발전시키게 되겠다.' 이 철학자의 견해로는 국내에서는 분명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확실히 러시아 자본주의가 150만 노동자들에게 국한된다는 의견을 공유한다. 나중에 뒷 부분에서, 인민의 벗들에서도 유치한 발상과 다시 마주친다. 맹세코 그들은 자유 노동에 따른 모든 다른 형태들을 다음 주제 아래로 분류한다. '국내는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그 고유한 모순들 속에서 발전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는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아직 고유한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는 단순히 말해서, 소수 자본가들로부터 다수 민중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인구 절대 다수는 몰락하는 가운데 소수만 배를 불리는 현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농민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없었다면, 국내 개혁 이후로 전체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비할 데 없는 강도로 전개될 수 있었을까. 실로 엄청난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고서야, 저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었겠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생성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주의를 다뤘지만, 아직 그것들을 창출해야만 한다.'
국내에서도 아직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해야만 한다고. 국내에서, 대중의 벗어날 길 없는 빈곤과 노동 인민에 대한 후안무치한 착취가 목격되는 유일한 국가인 러시아에서. 국내 빈곤층 조건은 아주 타당하게도, 잉글랜드와 비교되어왔다. 그리고 수백만 명은 영구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국가에서 곡물 수출에 따른 꾸준한 증가가 나란히 목격된다. 이런 러시아에서도 아직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미하일로프스키는 살아생전에 그런 빼어난 주장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이 나온 김에, 나중에 국내 노동 인민의 참을 수 없는 환경에 위선적으로 눈을 감고, 그런 환경을 단지 흔들린다는 표현으로만 묘사하면서부터, 모든 게 정상 궤도에 놓이려면 문명화된 사회와 정부 노력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인민의 벗들이 시종일관 끊임없이 사용해온 전술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 기사 양반들은 노동 인민들의 환경이 악화되는 게 단지 흔들려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후안무치한 소수 착취자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자신들이 눈을 감는다면, 그러한 착취자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 묻는다면, 착취자들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당면한 현실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건 부끄러운 겁쟁이 짓이라고 말할 때, 착취라는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인민 대중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분리시키는 국내 사회에서 부르주아 구조와 부르주아 지배 기구인 국내 국가에 따른 계급적인 성격에 있다고 말할 때,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에 있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말할 때,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쫓기를 원한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인민들의 경제 구조를 파괴하기를 바란다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모든 점잖지 못한 행동 가운데에서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가장 괘씸한 부분, 곧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격렬한 비판으로 말을 옮겨가보도록 하자. 사회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수행한 활동들은 합법적인 언론에서 정직하게 논의될 수 없고, 점잖게 검열을 거친 정기 간행물이 이와 관련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요령껏 침묵을 유지할 뿐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아주 초보적인 규칙을 망각했고, 독자 대중과 접촉면을 독점한 자신의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의 얼굴을 더럽히는 데 활용하는 데 전혀 양심의 거리낌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양심적인 비평가와 싸우는 수단들은 설사 합법적인 출판 영역 바깥이라고 할지라도, 곧 발견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순진한 척 가장하며 말한다.
'내가 알고 있기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방관자들, 소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적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이게 뭐지. 비평가 선생은 처한 환경에 따른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이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라는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은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점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어떻게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과 일종의 분별없는 속물들을 뒤섞을 수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무슨 권리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를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소신들조차 받아들이지 않은 게 분명한 사람들, 결코 눈에 띄는 집단으로 행동한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발표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허점을 남겼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상류 사회의 멋쟁이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마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고 농담을 내뱉는다. 대체 누가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건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모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살롱(응접실)에서, 사적인 편지에서, 좋다. 당신도 응접실이나, 편지로부터 그들과 실컷 이야기를 나눠보기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언론에다 대고 어디에서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마르크스주의 간판을 내건 사람들에게 맞서는 주장을 편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도 당신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오직 한 모임으로부터만 사용된다는 점과 그들을 다른 누구와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듯 미하일로프스키는 나쁜 짓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학생같이 사실을 비틀고, 왜곡시킨다.
'내가 여기서 비난을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독자들이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 애쓴다. 내 귀로 들었고, 내 눈으로 보았다.'
당신의 눈에는 속물들과 비열한 악당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기꺼이 믿어드리지요.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사회주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정직한 사회적인 활동이라면 '인민의 의지'(나로드볼리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심지어 입헌주의든 간에 일정한 간판 아래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든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 있는 현 시점에, 그 이름 아래 자신들의 자유주의적인 비겁함을 감추고, 미사여구나 늘여놓는 일부 사람들과 그에 빌붙어 자신의 둥지를 깃털로 감싸는 몇몇 철저한 악한들이 있다는 점을 누가 모를까. 온갖 종류의 쓰레기로부터 그 이름이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더럽혀진 점에 대한 책임을 앞에서 언급한 사상적인 경향들에 묻는 건, 오직 천박한 속물들만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 전체적인 주장은 일련의 왜곡, 곡필, 조작이다. 앞에서 미하일로프스키가 사회민주주의자의 출발점인 진실들을 왜곡시켰고,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부터 왜곡된 진실을 제시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가 국내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제적인 인식을 설명했더라면, 미하일로프스키는 오직 한 가지 방식, 곧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 발전을 돕고 현 체제에 맞선 정치 투쟁을 위해 조직하고, 단결하면서부터 같은 견해들을 따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또 다른 속임수 하나를 소매 속에 더 감추고 있었다. 상처 입은 무고한 피해자인 척 미하일로프스키는 위선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능글맞게 선언한다.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기쁘지만, 나는 당신이 반대하는 게 뭔지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소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내 논평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보시오. 그러면 내가 말한 바를 알게 될테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거요.'
물론 이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예전에도 썼던 형편 없는 속임수의 재탕에 불과하다. 부탁하건대, 자신이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선언하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넘어갔던 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지 누가 좀 알려주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기로, 인민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농민들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에 부응해서, 아내를 회초리로 구타하난 행위나, 인민 대처 방침이라 불려온 정부의 혐오스러운 태형 정책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일치시키면서부터 그것들을 촉진시켜나가는 일관성 있는 인민주의자, 일관성 있고 용감한 인민주의자로 변모시켜주는 언덕길이 있어 어쩌다 운 좋게 거기로 미끄러지지 않는 한 농민 의견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결사와 같은 방식으로부터 외국의 혁명 운동을 국내에 이식하려 애쓸 뿐 그에 반하는 목소리는 전혀 낼 줄 모르는 겁쟁이 인민주의자, 부농으로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진취적인 농민이라는 민중적인 이상향을 철저히 실행에 옮겨, 땅에 정착한 용감한 인민주의자 말이다.'
물론 자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저속한 조롱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설령 인민주의자들이 저런 주장에 대해 같은 지면에서 반박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인민주의 사상이 불법화됐던 탓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상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른 채, 단지 전해 들은 말만 쉽게 믿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런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같은 의견이다. 아마도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잘 알고 있으리라. 어쨌든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앞의 말과 비슷한 내용을 암시한 대목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글을 읽고, 여기저기에 흩어진 내용들을 끌어모은 다음, 그것들을 비교해서, 진지한 반박거리를 찾아내는 작업보다 더 피곤하고, 생색 안 나고,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 여기까지.
발행자 주석
앞서 독자들은 일부 질문들에 대해 추가로 검토했다는 언급들을 보았을 텐데, 실제로는 그런 검토가 이뤄지지는 않았따. 그 이유는 현재 글이「러시아 부」에 실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사들에 대한 답변의 1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시간 부족으로 인해, 글을 때맞춰 발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두 달이나 늦어버린 상태에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글 전체가 인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비판에 대한 고찰을 먼저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준비 중인 2, 3부에서 독자들은 1부에서 제시된 검토에 덧붙여, 국내 경제 상태에 대한 글과 뒤이어 나온「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전술」과 관련해 「러시아의 부」에서 다른 핵심 인물들인 유자코프와 크리벤코의 사회적·경제적 관점에 대해 검토한 글을 보게 된다.
현행 판에 대한 주석
현행 판은 초판을 정확히 복사했다. 본문을 편집할 때 전혀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수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출판에 관계된 일만 했다. 작업을 맡은 건, 소책자가 사회민주주의 정치 선전을 부흥시키는 데 있어 일정 정도 기여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신념에서 피할 수 없는 귀결 가운데 하나로는 그런 정치 선전을 촉진시킬 준비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소책자 저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론 특히 재발행으로부터도, 이 책자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모든 기관지들이 할 수 있는 한 널리 배포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를 호소한다. 지금이야말로 일을 하기에 특히 적당한 때다.「러시아 부」는 더욱 더 도발적인 논조를 취한다. 사회민주주의 사상이 사회에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부터, 잡지는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며, 대중 파멸만 초래한다고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감히 생각건대, 그런 방법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상처를 입히고, 우리 승리를 향한 길을 닦아줄 뿐이다. 하지만 중상모략꾼들이 자신들의 정치 선전 모략을 아주 널리 퍼뜨릴 모든 물질적인 수단을 장악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발행 부수가 수천 부에 달하는 잡지를 소유하고, 열람실과 도서관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특권적인 위치에서 이점을 갖고 있더라도, 언제나 성공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적들에게 증명하고자,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만 하며, 노력이 현실화되리라는 걸 전적으로 확신한다.
189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