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 헌시 


마야코프스키

 

한 방울,

두 방울씩일지라도

그대들 정신이 세상에 스며들어

자라나게 하자.

혁명이라

불리는

노동자 공훈,

축하객들은

문을 쾅 닫아버리지 않는가

그들은

공포에 질려

눈앞이 캄캄할까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믿노니

우리는 100주년,

기념일을 맞을 거다.

 


1893-1898.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피체르(삐쩨르)로는 1893년에 왔다. 무척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잘 따르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볼가에서 왔다. 크룹스카야는 동지로부터 얻은 <이른바 시장 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기록물(노트)을 헤질 정도로 거듭 읽었다. 한 쪽에는 페테르부르크, 마르크스주의 공학자였던, 게르만 크라신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으며,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사상에 대해서, 다른 쪽에는 레닌은 견해, 반박을 고이 적었고, 수정한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초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에서 시장 문제, 관심사는 컸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모임으로부터 이미 특정한 경향도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사회 발전에 대한 과정을 기계적, 도식적인 무언가로만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오늘날 기계론에 대한 관점을 배격할 줄 알았지만, 당시에는 심하게 동요했었다. 왜냐하면 실력이 무척이나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알지는 못했으며, <공산주의 선언>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지 기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모순이라고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처음 레닌을 본 건, 새햇날이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오흐따), 기술자였던 크라신으로부터 볼가에서 온 새로운 사람과 회동하기로 했다. 크라신, 코롭코, 세레브로프스키, 라첸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포트레소프, 스트루베도 오기로 했으나, 안 왔다. 셰블랴긴도 있었으며, 모임에서는 주로 기초적인 문맹퇴치활동에 대한 교육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민 의지당이나, 노동해방단은 전제주의와도 싸우면서부터, 자유로운 협회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공감하다가, 와해된 뒤로는 이내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레닌은 크룹스카야에게, 체포된 형에 대해서도 말해줬으며, 지인들마저 가족들에게는 등 돌렸으며, 발길마저 끊겨서 아무도 방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레닌, 어머니는 수감된 형을 보고자, 페테르부르크로 가고자, 시즈란(씨즈란)까지 마차를 타기도 했다. 레닌은 주로 동행할 사람에 대한 심부름을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협회로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는 쓰라린 아픔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네바 강을 걸으면서 돌아가는 길에, 크룹스카야는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1887)에 가담했던, 인민 의지당 조직원으로는 성년도 채 되지 못한 차르, 구실아치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레닌, 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닌은 형을 무척이나 따랐으며, 주로 자연과학에 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이라 관심사는 비슷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형은 혁명가인 줄,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형이라면 깊은 영향마저 끼쳤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레닌은 <인민이라는 벗>(1894, 가을)이라는 노란 수첩에다 적은 글을 모임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모임에서는 투쟁에 대한 목적을 쉽게 제기했다. 저자 서명은 없었으나, 여러 손을 거쳤다. 봉건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젊은 사람들도, 많이도 읽었다. 사민주의 활동가, 루만체프도 <인민이라는 벗>을 두고는 훌륭하다고 평했다. 1894년부터 1895년 겨울 사이에, 레닌으로부터 가까워진 뒤로부터, 크룹스카야는 여러 지구에서 야학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바부슈킨, 브로프코프, 그리바킨, 보드로프 형제들(아르세니, 필립), 주코프, 등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스몰렌스크 학교는 600명이 다닌 매우 큰, 주로 밤에 배우는 노동 학교였다. 그러나 경찰은 학교를 단속하기도 했으며, 각종 질병을 가진 환자들도 읽거나,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야간 기술반에서는 목재를 다루기도 했다. 레닌도 학교를 방문하거나, 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계급들에 대한 관습, 생활, 사소한 삶들을 세세하고도, 깊게 보고자 했다. 그러나 지식계급들은 노동계급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따라서 주로 모임에서 강의를 했다. 이를테면, 대체로는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 기원>을 러시아로 번역한 필사본이나 훑어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 판으로 된 마르크스, <자본>을 직접 읽고는, 사람들에게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물어보거나, 노동계급들에 대한 삶, 사회 구조와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방법, 현존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레닌은 이론과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모임에서도 구성원들에게, 기존과는 다른 접근법을 적용해서, <선동에 대하여>라는 책자를 발간했으며, 파업으로 부흥하던 프랑스 노동조합을 보며, 단지 정치투쟁만이 아니라, 경제투쟁도 필요하다고 내세웠다. 경제주의에 대해서도, 레닌은 <공장, 작업장에서 노동계급들에게 징수하는 벌금법에 대한 해설>(1895),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레닌은 정치투쟁과 함께, 한 걸음씩 접근할 수 있도록 방법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지식인인들은 소책자를 지루했지만, 매우 쉽게 쓰여졌다. 그리고, <파업에 대하여>, <공업, 재판소에 대하여> 등에서도 연구에 대한 흔적도 드러났다. 레닌은 셀로(차르스코예)와 같은 여러 마을에서도 혁명 활동에서 적임할 사람들을 도처에서 찾아내서 치밀하게 연락망도 구축했다. 그리고 인민 의지당 조직원들과 압수되기도 했던 불법 소책자들에 대한 인쇄를 돕거나, 대량 문건들도 돌리기도록 지시했다. <벌금에 대하여>, <차르, 굶주림> 등에 대한 글들도 있었다. 조직원이었던, 미하일로브나도 고인이 됐지만, 여전히 공산당원으로 남고자 했다. 교사들도 있었고, 이를테면 스투르베, 선생이었던 자스티바도 있었다. <불꽃>에서 조직을 끝까지 도왔으며, 훗날까지 스트로베 파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자술리치도 미하일로브나를 만나거나, 노동해방단을 돕기도 했으며, <경제 발전에 대한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들>에 대한 저술집을 공동으로 출판했다.

 

레닌도 도왔지만,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불태워졌다. 레닌은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첫 전단도 작성했었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부터, <노동 대의>를 발간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합법적 인쇄소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검수원들도 당국에게 적발되어 추방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 대의>는 정작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레닌마저 체포되어 수감 생활 도중에도,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준비했다. 수감 중 알맞은 편지에다, 필요한 자료, 통게집들을 보내 달라고 적었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책 구하기도 어렵다고 불평마저 표했다. 심지어는 우유로 글쓰기를 하거나, 들키지 않고자, 레닌은 빵을 자그마한 우유 잉크병으로 만들어서, 감시관들이 드나들면, 입에다 넣곤 했다. 레닌은 수감된 가운데에서도, 절제력은 강했으며, 틀에서도 잘 적응했다. 전단을 배포하고 선전(선동)을 했으며, 덕분에 노동 운동들도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6, 여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3만명 운집한 노동계급들로부터 주도한 파업도 일어났으며, 사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받고는, 뒤흔들어 놓았다. 1897-1898년까지는 주로 스트루베와 자주 연락했으며, 조언을 구했다.

 

여러 지역에 걸쳐, 연락원들과 주고 받으면서, 폴란드에서는 무산계급 사건(1885)도 일어났다. 징역형을 선고 받거나, 감옥과 유형지를 드나들며, 많은 고초를 겪었던 폴란드, 동지였던 펠릭스 야코블레치 곤 동지들도 알았다. 비타협적이고, 나이 든 혁명가였기 때문에 여러 호감을 두루 받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셴스코예 지역 인근 마을에서 레닌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오두막 생활을 하면서, 사냥을 나가곤 했었다. 노동계급들도 있었지만, 얼마 못가 폴란드로 돌아가는 길에도 질병에는 쉽게 걸리거나 일찍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인근 지역 노동자들, 가난한 농민들과도, <공산당 선언>, <자본>을 같이 읽었다. 레닌은 시베리아 농촌 생활도 연구했으며, 소자산자들에 대한 잔혹함과 무고한 일꾼들에 대한 살인 사건들로부터도 무자비한 착취를 말해줬다. 마을 식구들도 늘어났으며, 스트루베로부터 받은 <영국 노동조합주의, 이론과 실천>을 번역해서 옮기기도 했다. 또한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박했던, <베른슈타인, 사민주의 강령, 반비판>을 포트레소프라는 동지로부터 받았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왔을 때는 문학을 읽기도 했는데,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건가> 등을 읽은 정도가 아니라, 몇 번 씩이나 또 읽었으며, 고전들도 매우 잘 알고 좋아했다. 훗날 레닌은 국가출판국에서, 고전을 저렴하게 재출간하라는 업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나, 체르니셰프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서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체스도 곧잘 뒀으며, 업무에도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라틴어 연구도 병행한 적도 있어서, 러시아 문학잡지였던 <레프>에서도 레닌에 대한 문체와 구조를 분석하거나, 연설 방식도 연구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인쇄소가 잘 없었으며, 분트로부터 출판사도 세우고자 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크레도><노동과 사상>, 같은 아류 이념까지도 받아들인 잡지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은 구체적인 조직안을 구상했을 때는, <불꽃>에서, <무엇을 할 건가>,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처음에는 마르토프, 포트레소프에게도 편지를 써서 같이 해외로 나가기로 합의를 보면서, 레닌은 유형 기간도 끝난 1900, 2, 처음으로 러시아를 떠났다. 동지였던 오스카 알렉산드로비치도 왔으며 칼 마르크스라고 쓰여진 치렛감(브로치)을 선물하기도 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크룹스카야는 노동계급들에 속하는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한 지역 노동자 가운데로는 옥살이를 해서 결국 감옥에서 미치고 만 사람도 있었다.

 


1901-1903.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는 해외로 나갔지만, 뮌헨에서는 동지 집에 묵으면서, 위조 여권, 가명을 사용하거나, 러시아인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다. 자술리치도 뮌헨에 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는 스위스 한 곳에서, <불꽃>이라는 신문 말고도, <여명>을 또 발행하고자 했다. 레닌은 노동해방전선(노동해방단)에도 각별한 마음도 있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전선에는 <불꽃>과 매우 가까웁던 베라 이바노브나도 있었다. 따라서 자국, 러시아에서도 노동 운동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동기였기 때문에, 막상 자국, 러시아와는 단절된 막막한 반동기를 거쳤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해외에서 지낼 수밖에는 없었다. 조직원들은 경찰 조직으로부터 미행을 받거나, 모든 조직원들은 외로운 생활도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베라 이바노브나는 타고난 살림 솜씨를 가졌음에도, 정작 아무 옷이나 입고는 담배를 피워대거나, 어지러운 방마저 잘 치우지는 않았으며, 밥 먹기도 괴팍했다고 한다. 이성이 그리워질 때는 글을 쓰거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진한 블랙커피만 마시면서 지냈다. 왜냐하면 러시아를 지독하게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1905, 베라 이바노브나는 러시아로 가서 남았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에는 반대했다. 플레하노프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현실로부터 단절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에서 세운 공로는 매우 위대했다. 여러 정당 대표들, 작가, 학생, 개별 노동자들까지도 만나 봤지만, 정작 러시아 노동 대중들은 잘 알지는 못했으며, 활동하지도 못했었다. 와중에, 레닌, 마르토프, 베라 이바노브나는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을 거듭 읽었다. 그러나 제2차 당대회 뒤로,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에 대해서 불신 찬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 크룹스카야는 화도 났으나, 멀리 러시아에서 떠났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플레하노프는 1900년대가 시작되자, 러시아를 체감할 수 없게 됐으므로, 1905년에는 러시아로 다시 가지 도 않았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악셀로트는 플레하노프, 자술리치에 비하면 훨씬 수준 높은 조직가였다. 그러나 필체는 엉망이었다. <불꽃>을 운반할 대는, 운송 수단이 없어서, 이중 바닥으로 된 여행 가방에다 넣어서 지정된 비밀 장소로 빼돌렸다. 이를테면 포스코프 지역에서, 레페신스키 동지, 집도 비밀 장소였으며,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따라서 여행 가방에다 문건을 꺼내서 조직에다 전달했다. 라트비아 출신 롤라우와 스쿠비트로부터 생각한 방법이었다. <불꽃>, 관계인들로는, 베를린, 파리,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01, 10월에는 <러시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연맹>이라는 연락 조직도 만들었다. 특히 페테르부르크 노동자였던 바부슈킨은 <불꽃>에서 매우 적극적인 통신원이었다. 오레호보주예보, 블라지미르, 구시흐루스탈니, 이바노보보조네센스크, 코흐마, 키네슈마 같은 지역에서도 방대한 통신들을 보내왔으며, 레닌은 지속적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우랄, 남부 지역에서는 편지들도 왔다. 북부 사민주의 조직 연합체였던 북부동맹와도 편지를 교환했다. 뮌헨에서는 스트루베도 와 있었으나, 레닌은 거절했다. 당시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쓸 때는 대개 방 안을 빠르게 오가며, 쓰려는 내용을 중얼거리는 버릇도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익숙했다. 글 쓸 때는 아무런 말도 걸지는 않았으며, 무엇도 묻지 않았다.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산책을 할 때는 어떤 생각을 하거나, 무엇을 쓰는지를 크룹스카야에게 말해주곤 했었다. 레닌에게는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마르토프도 오고 다른 동지들도 찾아와 편집 회의도 이뤄졌으며, 쉴 새 없이 말했는데, 늘 여러 주제로 왔다, 갔다 하는 버릇도 있었다. 책도 ㅁ낳이 읽었어서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를 사람이나 일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한 보따리씩이나 갖고 왔다. 레닌은 마르토프를 보며 전형적인 기자라고 하면서, 재능도 출중하고, 판단력은 뛰어나며, 감성마저 풍부하지만, 가볍게 대하는 경향은 있다고 말했었다. 마르토프는 <불꽃>에서는 알맞고도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매일 5-6시간 대화로 인해 몹시 지쳤으며, 토론도 끝나면 앓아눕기도 했으며, 능률도 떨어졌다. 마르토프는 대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레닌은 뮌헨 독일 사회민주주의 동지였던 베라 이바노브나, 짐까, 루멘펠트와 함께 카페로 나가서 죽치고 앉아만 있기도 했다. 10월에는 <노동 대의>를 통합하고자 뮌헨에서 취리히로 갔다. 통합은 이뤄지지는 않았다. <노동 대의>에 속했던 아키모프, 크리쳅스키, 다른 사람들도 엉뚱한 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레닌과 잘 지내지는 못하던 플레하노프마저 통합할 수 없다고 결정했으며, 마르토프, 레닌도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일화로는, 인근 카페 옆에는 체육관도 있었다. 가짜 칼을 휘두르며 펜싱 연습 중이었는데, 플레하노프는 미래 체제에서는 저런 식으로 싸운다고 말하자, 악셀로트는 미래 체제는 투쟁이 없을 테니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취리히에서 돌아 온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마무리했다. 멘셰비키는 그대로 공격했지만, 모든 활동가들과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모든 러시아 조직에 대한 뜨거운 호소였기 때문이다. <무얼 할 건가>에서는 전 국민적인 무장봉기를 준비해서,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할 준비를 늘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맞이했지만, <무엇을 할 건가>는 여전히 혁명에 대한 감격을 준다고 크룹스카야는 평가했다. <인민에게 벗이란 무엇인가>는 혁명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면, <무얼 할 건가>는 혁명 운동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고, 명확한 과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불꽃>도 전력을 다해 일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도 와서 맹렬한 토론을 했으며, 힘겨운 회의였다. 뮌헨 시절에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자술리치 등 사이에는 심각한 불화는 크게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신문 건설이라는 목표로부터, <불꽃>으로 전력을 집중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리에즈에서는 거대한 소요 사태도 일어났다.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군대는 총을 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도 동요하고 있었다. 인민회관을 보러 갔으며, 당 상층부가 모이지 못하도록, 모든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벨기에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한 쪽은 군중을 쏘거나, 한 쪽은 군중을 달래는 변명이나 해댔기 때문이다19024, 둘은 런던에 도착했다. 큰 런던을 보고 놀랐다. 맞이했던 첫 동지는 알렉세예프였다. 해외 생활에 익숙해서 런던에서도, 영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크룹스카야는 감옥에서 영어를 독학으로 배웠지만, 실전 영어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레닌도 열심히 영어 학습에 전념했다. 주로 하이드파크를 들렸으며, 연사들은 아일랜드 발음과 섞인 영어로 말했어서, 좀 더 알아듣기는 쉬웠고, 둘은 영어를 배우고자, 즐겨 듣곤 했었다.

 

레닌은 런던을 연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박물관에 구경하러 드나들지는 않았다레닌도 대영박물관에 자주 들렸다. 그러나 박물을 보려던게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서고, 연구 작업을 하기에도 편리한 시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 안 고대박물관에서 10분이 지나면 레닌도 완전히 지쳐버렸기 때문에 황급히 뛰쳐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딱 하나, 파리, 1848년 혁명 박물관에는 꼭 들려서, 물건 하나라도, 그림 하나라도, 꼼꼼하게 들여다봤었다. 레닌은 산 런던을 연구했었다. 사람들 무리에서, 이층 버스 위 칸에도 앉아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기도 좋아했었다. 글나 부랑자, 지저분한 룸펜, 런던 노동자들, 헤진 옷을 걸친 취한 여성들도 섞인 골목길, 런던을 보고는, ‘두 개의 국가라고 되뇌곤 했었다. 런던에서도 레닌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노동하는 사람들 무리로 들어가거나, 노동 군중들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었다. 당시 런던에서도 독서실도 많았는데, 한 짜리 방이었고, 들어가서 신문을 있거나, 독서대도 있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도 독서실을 만들기를 바라기도 했었다대중식당, 교회에도 갔었는데, 영국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면, 짤막한 강연, 토론도 이뤄졌고, 평범한 노동자들은 토론에 나서곤 해서 토론을 특히 즐겨 듣곤 했었다. 그리고 일반 노동계급들도 모여서 토론하는 노동계급 모임에도 찾아가곤 했었다. 레닌은 평범한 영국 노동계급에게 기대했었으며, 부르주아화로 된 노동귀족계급에 대한 상층부를 연구했었다. 그리고 영국 혁명에 대한 원동력도 찾아내고자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교회에서 방문해서 목회자를 만나고는 설교를 듣거나, 발언자로부터 자치제 사회주의는 기회주의 정수라는 말을 듣고는, 이내 영국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어서, 영국인은 폐쇄적인 민족이라고 봤다. 또한 한 영국 사회주의를 따르던 사람은 망명 생활을 하던 러시아인들을 순진하고도, 놀라운 시선으로 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갔다왔다는 걸 놀라워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찌들어진 소시민주의를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여러 유럽 지역을 돌아다녀봤었지만, 정작 화이트채플에서 열린 러시아 유대인들 거주 지역에는 한 번도 가본적도 없어서, 다른 삶을 보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레닌, 크룹스카야는 런던에서 프라임로즈힐을 자주 다녔다. 왜냐하면 당시 6펜스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으며, 안개 자욱한, 거대한 런던 전경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묻혀 있는 묘지는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도 자주 걸어가곤 했었다런던에서는 페테르부르크 모임에서 야쿠보바를 만났다. 매우 활동적인 노동가였다. 크룹스카야와는 자스타바 지구에서 일요야간 학교에서도 함께 일했었다. 되도록 이전에, <노동 사상>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르토프, 자술리치도 도착했으며, 알렉세예프와 생활했다. 레닌은 대영박물관에서 자리를 잡고는 작업을 했다. <불꽃> 조직원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불꽃>, <여명>, 여러 소책자들과 문건들을 다시 인쇄해서, 여러 위원회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으며, 모든 비합법적인 활동으로부터 통신문을 공급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일로 바빴다. <불꽃>에 관련된 모든 편지를 레닌은 죄다 읽곤 했다. 그래서 어떤 조직원들은 무엇을 하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모든 활동을 논의했다. 연락이 단절되면, 이어서, 여러 소식들을 알려 줬다. 니나라고도 불린 <불꽃>, 인쇄소는 아제르바이잔, 바꾸에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절박한 상태에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답했다. 엄격한 보안 속에서 계획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들도 필요하다고 모두들 절실하게 느꼈다. 1902, 6, 벨로스토크에서 분트로부터 조직한 회의도 열렸다. 페테르부르크 조직에서는 마냐라는 노동 위원회, 바냐라는 지식인 위원회로 나뉘었다. 노동 위원회에서는 경제 투쟁을 주로 벌였고, 지식인 위원회에서는 정티를 담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혁명 정치보다는 주로 자유주의 정치 쪽이었다. 경제주의도 마찬가지로, 원론적이었고, 지역에서도 공고했다. <불꽃>은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레닌도 조직에서 구조를 올바르게 세우고자 올바른 투쟁을 지도했다따라서 <노동자 대의>에서 내세웠던 노동가, 지식인 벽을 무너뜨렸다. 1902-1903년에는 겨울에는 노선 투쟁도 벌어졌고, <불꽃>파는 입지를 늘려갔다.

 

레닌은 여러 경향들과 싸워나갔고, <불꽃>파에서 투쟁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의>파에서 경제주의들은 영향력을 앗아갈까봐 두려운 나머지, 해외파 지령에도 분개했다. 플레하노프와도 페테르부르크 조직과 구조에 대한 같은 문제를 많이 나누었다. 19029월 초예카체리노슬라프 감옥에서 탈출한 바부슈킨도 동지들과 혁명가로 단련됐다. 런던에는 플레하노프도 방문했다. 바부슈킨과도 만나서 러시아 문제들을 같이 다뤘다. 바부슈킨은 러시아로 돌아갔고, 1906, 시베리아에서 무기를 수송하더 붙잡히고는 다른 동지들과 노상 묘지에서 총살당했다. 여러 <불꽃파> 동지들도 런던으로 왔다.

 

19028월 중순, 대중적인 비합법 노동 기관지이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조직 기관지였던 <남부 노동자>에서 편지도 왔다. 남부는 침탈당했고, 편집부로는 <불꽃> <여명> 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견해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불꽃>과 자유주의 간 논쟁에서 불만을 표했다190210월 초, 트로츠키도 런던을 방문했다. 트로츠키는 <불꽃>파였다. <불꽃>을 돕고자 파리에서 주로 자리를 잡았다. <인민 의지> 조직원이었던, 올레크마에서 유형을 살던, 예카체리나 미하일로브나, 알렉산드로바 자크도 왔다. 여러 노장 혁명가들도 만났고, <인민 의지> 조직원들도 존중했다. 레닌은 조직원들에게 친절했다. 보리스 골드만도 있다. 페체르부르크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지였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는 투쟁 동맹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훗날 미치고 말아서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비합법 생활이란 고달팠고 힘겨웠기 때문에 쉽게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치열했던 보리스 골드만도 이겨내지는 못했다.

 

대회 준비 작업은 강도 높았고, 190211, 조직 위원회를 구성했다. 분트는 위원회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여러 지역들에서 대회를 연계하고, 조직 위원회와도 연결하는 작업은 늘 레닌 몫이었다. 도왔던 포트레소프도 몸은 아팠다. 마르토프마저 런던 도시라는 숨 막히는 생활을 견디지는 못하다가 파리에서 머물었다. 플레하노프와 악셀로트마저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파리로 떠났다. 자술리치는 런던에는 머물렀으나, 정작 러시아와 연락을 취할 줄은 몰랐으므로, 모두 레닌 몫이었다. 러시아 편지 교환에서도 신경을 곤두 세울 수밖에는 없었다. 몇 주, 몇 달이나 답장을 기다리다가, 잘못된 일이나, 알 수 없는 상태에만 늘 놓였다.

 

레닌은 당을 창건하기를 바랬었고, 분트는 분트 투쟁에서도 <노동자 대의> 관점에만 여전히 머무르고만 있었다. 분트는 민족에 대한 자치권을 두고는 당과도 보조를 맞출 수 있다고 봤으나, 정작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하기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분투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는 독립해서 정치적인 당만 내세웠고, 연대 원칙으로만 당에서 가담하고자 동의했다. 그러나 전술로는 유대계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는 살인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독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어울릴 때만 비로소 세력일 수 있었다. 분트파는 알지 못했고, <불꽃>은 분트와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레닌은 분트파를 매우 열심히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를테면, 노동해방모임에서는 제네바로 이전하고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레닌만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짐을 꾸렸을 때는 등과 가슴으로부터 염증마저 생기는 신경 질환을 앓았고, 신경은 쇠약해졌다. 발진도 나타났다. ‘복행진이라는 피부병이었다. 요오드를 발랐을 때, 매우 아파했다. 진료비를 1기나 내야만 했고, 영국 의사에게 쉽게 부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료비가 비쌌고, 영국 노동자들은 민간 처방으로만 치료해야 했고, 제네바로 가는 길에도 레닌은 매우 뒤척이고는 괴로워하다가, 몸져눕고는 두 주일을 지내기도 했다.

 

그동안에도, 레닌은 <빈농에게>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1902, 농민 봉기를 보고는 쉽게 쓰여진 소책자를 쓰고자 했고, 노동가를 위한 당이란 무엇을 원하는지를 설명하고자, 빈농은 왜 노동가와 함께 가야만 하는지를 풀어썼다. 레닌은 농민에게 호소한 맨 처음 쓴 소책자였다.



1903-1905.

 

제네바.

 

19034, 제네바로 이주했다. 노동 마을 셴부제리로 자리를 잡았다. 여러 대의원들도 방문했다. 제멘치예프 부부는 레닌도 극찬한 운송 전문가였고, 라첸코, 마르토프 등 지역 대표들도 강령, 분트 문제를 논의했다. <남부 노동자>, <불꽃> 편집부 입장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의견 충돌도 일어났다. 따라서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한 쪽에는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 다른 쪽으로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도 있었다. 편집 위원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레닌은 삼두 체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같은 구성으로는 <불꽃> 편집부로도 이전과 같은 일을 처리해내기란 벅찼다.

 

2차 대회로는 브뤼셀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대회에 대한 보안 수준은 철저했다. 비밀 회담 장소로는 밀가루 창고에서 개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의결권으로는 43명 대의원, 심의권으로는 14명 대의원이 참석했다. 18981차 대회 때는, 겨우 9명만 참석했다. 레닌도 첫 당 대회였다. 그리고 당 강령, 전술 문제들을 전 당원들이 함께 논의하고자 몇 년이나 기다렸다. 비합법 대회를 소집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밀가루 창고에서 플레하노프로부터 개회한 당 대회는 창립 대회였다. 여태껏 당 강령마저 없었다.

 

분트를 둘러싼 문제를 주로 다뤘다. 분트로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 연대 관계만을 유지했고, 독립만을 강화하고자 내세웠다. 이면으로는, 분트는 유대인 지역 수공업자들 정서를 반영하고, 정치 투쟁보다는 경제 투쟁에 더 관심을 보였으므로, 경제주의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는 국제적인 단결을 옹호했다. 분트는 민족 간 우호적인 협약만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대회 구성 문제를 두고도 토론했다. 조직 위원회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을 지지하는 해외 거주 문필가 투쟁 모임과 대의원들에게 특수한 규율만 부여하고자 했고, 대회 자체가 아니라 모임으로 축소하고자 했다. 레닌은 격분했다. 조직 위원회는 해산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 조직 위원회, 지역 대의원들도 분트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트는 실패했다. 대회는 모두 37번 열렀다. 여러 중앙 위원, 후보들도 선출했다. 마르토프, 자술리치, 스타로베르, 악셀로트 등은 레닌, 플레하노프 감독을 두려워했다. 주로 삼두 체제로 구성했다.

 

긴장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도 잘 드러난다. 분트에 대한 당 안에서 지위, 강령, <불꽃> 노선에 대한 승인 문제 등도 압도적으로 다수 대의원들은 의견 분열마저 보였다. 견해는 달라서 플레하노프, 레닌에 대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파블로비치, 자술리치, 악셀로트, 트로츠키도 있었다. 그리고 선거 투쟁으로는 대의원들에 대한 도덕적인 결함도 지적했다대회는 막을 내렸고, 의결권을 가진 44명 가운데, 20명은 기권했다. 중앙 위원으로는 글레보프, 클레르, 구르츠, 3명을 선출했고, 중앙 기관지 편집부로는 플레하노프, 레닌, 마르토프를 선출했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정작 편집부를 거부했다자금, 비밀 회동 장소 등을 지원하던 사람들은 멘셰비키 선동으로 넘어가서는 지원을 중단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중앙 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편집부와 협력하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멘세비키 쪽에서는 거부했다. 마르토프와 같은 일로는 논의하고자 했지만, 일부 노선마저 달라갈라지고는 말아서, 멘셰비키와 투쟁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볼셰비키들은 정기적으로 모였다. 레닌은 연맹 대회를 너무나 생각하다가, 자전가를 타고 가다가 그만 전차와 부딪치고는 안구마저 파열할 뻔했다.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연맹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연맹 대회에서 멘셰비키로는 볼셰비키보다도 숫적으로는 우세했다. 플레하노프는 <불꽃> 편집부와 타협했다. 플레하노프는 멘셰비키에게 자리를 내주고자, 한 중앙 위원에게 협의회 사퇴를 요구했고, 레닌은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마르토프는 <포위 상태>라는 소책자에서 온갖 비난을 가했고, 트로츠키도 마르토프와 같은 태도로는, 플레하노프를 레닌 손바닥 안에 있다고 보고는,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라는 소책자를 냈었다. 따라서 레닌은 다시 반박하고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볼셰비키 대의원들과 지역 조직들은 멘셰비키에 대한 입장을 훨씬 이해할 수 없다고 봤다. 지역 조직들도 대회 결정에 대한 결의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역 위원회들도 볼셰비키 쪽으로 옮겨지고, 가담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주로 겉만 화려한 계획, 보고서에 대한 실상을 짚어냈다. 보그다노프도 나왔다. 비상 연락망이었다. 플레하노프와는 완전하게 결별할 무렵이었다. <인민 권리> 소속이었던 여러 나탄손과 같은 여러 혁명 조직가들도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타협 정치를 내세웠다면, 위원회들은 볼셰비키 쪽에서 지지했다. 결국 중앙 위원회는 <7월 선언>에서 레닌에게 연락 제공을 박탈하고는 말았고, 중앙 위원회를 탈퇴했다. 따라서 22인으로 이뤄진 볼셰비키 모임들은 제3차 당대회를 소집하고자 결의안을 채택했다.

 

레닌은 호텔보다는 주로 대중 식당에서 밥 먹기를 즐거워했다. 크룹스카야와 유럽에서는 배낭 여행을 했을 때는 무거운 프랑스어 사전도 들어있었다. 활기를 되찾은 레닌은 보그다노프 집에서 만났고, 제네바로 돌아올 때는 외곽 근교에서 도서관과 여러 발간하는 신문, 잡지들도 많이 구독했던 독서회로부터 연구를 전념했다. 같은 시기로는 러일 전쟁도 일어났고,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모든 부패마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전쟁에서도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 자유주의마저도 패배했다. 아래로부터는 인민 분노는 물결로부터 치솟아올랐다. 노동 운동도 경찰과 대치하는 대규모 인민 집회와 경찰과 노동자들 간 직접 충돌 소식들도 들려왔다. 따라서 모두들 페체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등에서부터 성장하는 노동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책임을 느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도 본모습을 드러냈고, 멘셰비키도 똑같았다.

 

그러나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본능, 창조하는 힘, 역사 사명에 대한 깊은 믿음을 지녔다. 갑자기 생겨난 믿음이 아닌, 마르크스 계급 투쟁에서 이론을 배우고, 깊이 생각했던 시절, 러시아 현실을 거듭 연구하고, 노장 혁명가들로부터 세계관과 투쟁하면서, 투사 개인에 대한 영웅주의를 계급 투쟁이라는 힘이라는 영웅 정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지 불가사의한 힘에 눈먼 믿음이 아니라, 깊은 신념과 사태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과 현실에 대한 성실한 연구로부터 입각한 신념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활동한 경험으로도, 노동 계급에 대한 역량과 믿음은 더욱 살아 숨 쉬었다190312월 말, 볼셰비키 기관지, <전진>을 발간했다. 덕분에 러시아로는 혁명 운동들도 성장해갔고, 편지 교류도 늘어났다. 한 달에는 300통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레닌은 노동가들은 편지를 보내왔고, 농민들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혁명도 무르익었고, 피 묻은 일요일로 잘 알려진 1905, 19일 사건 소식은 제네바로도 알려졌다. 마침 레닌은 도서관으로 가던 도중이었다. 루나차르스키 부부를 만나서 소식을 전달 받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큰 일도 일어났다고 보고 받았다. 레닌은 모든 생각을 러시아로 집중했다. 사건을 알고자, 제네바 지역 신문이나, 영국, <타임즈>를 구독했다. 레닌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모든 전망에 대해서는 더욱 명료하게 파악해갔다. 운동도 커가고, 혁명 인민들도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자, 노동 계급들은 모두 전제 정치와 싸우고자 돌진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승리하고자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무장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혁명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에게 실마리를 얻고는 말았다. 1905년 혁명에서 노동 계급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투쟁에 대한 준비는 꺾이지는 않았음에도, 노선을 두고는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만 했다는 말 밖에 할 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다. 노동 계급 전위로는 당에서 투쟁하고, 조직하고, 대중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끊임없이 촉구했다. 그리고 레닌은 <전진>에서도 같은 점을 잘 써놓았다.

 

레닌은 19052월 초, <우리가 혁명을 조직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기고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수 많은 혁명 잠재력,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도 결함을 190519일 드러내고는 말았다고 적었다.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로부터 기록한 혁명, 봉기에 대한 모든 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매우 치밀하게 글을 또 연구하고, 심사숙고했다. 전쟁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책들을 읽었고, 무장 봉기, 봉기를 조직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모든 면으로도,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여기로 할애했고, 유견전도 벌어질 때는, 공격조로는 5인조, 10인조에 대한 말들도, 깊이를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독서회 직원에 따르면, 레닌은 작업할 때는 바리케이드 전투, 공격 기술에 대한 책을 주로 읽으면서, 사전을 꺼내고는 용어를 찾고자 움직이다가, 깨알 같은 글씨로 쪽지에다, 무언가를 빠르게, 집중해서 쓰곤 했다고 한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로 무기를 보내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나, 페테르부르크 안에서 전투 위원회는 정작 매우 느렸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로도 적지 않은 일들도 해냈다. 매순간마다 목숨마저 걸 수 있었고, 영웅적인 실천들도 잘 보여줬다. 어리석었던 가폰 신부로부터 노동가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임무, 비합법 운송 일을 맡기도록 했다. 덕분에 레닌은 불법 여권, 연락망을 가지고, 페테르부르크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은밀하게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가폰 신부 같은 사람은 아니었고, 보다 혁명 열정에 불타오른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온갖 희생을 감수할 준비를 마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었다.

 

레닌은 또 다른 구호로는 농민들에 대한 토지 투쟁 지원이었다. 같은 지원으로부터 노동 계급들은 투쟁에서도 농민들과도 함께할 수 있었다. 2차 대회에서 당 강령으로는, 1861년 농노 개혁 때 지주들에 대한 절취지를 모두 반환하라는 구호를 제기했고, 또 강력하게 요구했다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로는, 뜨거울 찻물, 노동 시간 단축, 임금 지불 준수 투쟁으로 선동했다농민들 안에서도 폭 넓은 혁명 운동은 일어났다. 탐페레에서 열린 12월 협의회로는 레닌은 절취지에 대한 항목을 강력에서 모두 삭제해야만 한다고 제안했고. 지주 영지, 국유지, 교회령, 왕실령 등에 대한 완전한 몰수로부터 농민에게 혁명 방안들을 지원한다는 항목을 도입했다. 반면 카우츠키는 <신시대>에서, 도시 혁명 운동에서 농민과 지주에 대한 관계 문제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노동 대의를 배신했지만, 처음에는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였다. 베른슈타인은 189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와 투쟁하자는 깃발을 내걸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재검토하거나, 사회주의는 목표도 아니고, 운동만이 전부라고 내세웠을 때,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대하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더 옹호했었다. 같은 카우츠키 주장에도, 레닌은 농민에 의거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카우츠키 주장을 들었을 때,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한 마르크스 학설을 더욱 올바르게 검토하고자 했다. 따라서 레닌은 1848, 미국 농민 운동에서 마르크스 입장, 1885, 헨리 조지에 대한 엥겔스 입장을 경험에서 입각해서 연구했다. 19954, <미국판 흑토재분재에 대한 마르크스 견해>라는 기고문도 내놓았다. 그리고 레닌은 낡은 봉건 제도와 전제주의 노예 제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투쟁과 새로운 공화국 창설을 지지했다.

 

제네바는 볼셰비키들에게는 중앙이었고, <전진> 편집부, 배송부, 볼셰비키 식당도 있었다. 여러 동지들도 거주했다. 볼셰비키는 란돌트 카페에도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거나, 러시아에서도 일어난 삭너들을 논의하고, 계획을 수립하곤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제3차 당대회를 위한 선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수파 위원국도 구성했다. 멘셰비키도 있었지만, 중앙 위원회는 타협적인 입장만 취하고는 제3차 대회 소집에 대해서는 자주 제동을 걸었다. 대회는 런던에서 개최했다. 여러 대의원들과 당원들은 1905, 혁명 시기 크라신 전투원들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전투조 훈련을 지도하고, 비밀리에 막중한 대대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여러 러시아 대의원들도 대회에도 참석했고, 러시아에서 노동 운동도 고조했다. 무장 봉기, 임시혁명정부, 정부가 벌일 전술에 대한 태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공개 행동에 대한 문제, 농민 운동에 대한 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 사회민주주의 민족 조직들에 대한 태도, 선전과 선동, 당에서 분리파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레닌은 주로 농업 문제에 대해 보고했고, 절취지 항목에 따라 지주, 황실, 교회 등에서 소유한 토지 몰수 문제를 전면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노동가, 지식 계급 사이에서 관계 문제도 다뤘다. 2차 대회로는 많은 문필가들이나, 노동 활동가들은 결속력이 매우 약했지만, 3차 대회에서는 조직들도 이미 골격을 갖췄다. 그러나 조직들은 비합법 조직이었고, 어려운 보안 조건에서 활동했다. 레닌은 노동자들도 위원회로 가입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내세웠다. 여러 새로운 문제들도 제기했찌만, 그러한 문제들은 정작 비합법 조직 틀 안으로는 해결하기란 어려웠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일간지를 발행하고, 폭 넓게 합법으로도 출판물을 낼 때만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출판 자유를 쟁취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비합법 신문을 출판하고, 대중 신문 문제를 전담할 문필가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3차 대회는 올바른 투쟁 노선을 선정했고,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이라는 두 가지 전술>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출판 자유에 대한 조짐들도 여럿 보였다. 해외에서도, 중앙 위원회에서도 비합법 소책자들을 합법으로 출판해주겠다고,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중앙 위원회는 자체 출판사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플레하노프가 아닌 국제 사무국 대표로 다수파, 오를롭스키를 지명하고자 부탁했고 1905, 플레하노프는 러시아로 가지 않았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늘 기다리는 처지였다. 경찰 끄나풀도 뒤를 쫓기도 했다. 독일어를 쓰는 핀란드 행동당원과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닌은 남의 집에서 지내기를 매우 불편해했다. 따라서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빈 집을 둘러보던 가운데 문지기와도 대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체류를 위한 신분증을 발급받고자 애썼다. 러시아에서는 <신생활>도 발행했다. 여러 볼셰비키 모임들도 가담했다. 해당 일간 신문은 두마 회의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레닌은 선전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선동하는 일보다는 노동계급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를 더 바랬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라는 기고문도 당에서는 명확한 구호를 제시한 지침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과 함께 토지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및 농업 노동계급과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투쟁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도 볼셰비키 대표와 같은 관점을 표명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는 레닌은 해외에 머물고 있을 때, 1905, 1113일에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 전투 기관이었다. 자유경제연구회에서도 레닌은 농업 문제에 대해서 보고했고, 또 연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임시혁명정부는 혁명 운동이라는 불길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노동대표소비에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이윽고 서기국을 구성했고, 전투 조직을 꾸려서 주로 서기국과 관리가 아닌 기억에 의존해서 직접 실천해서 활동했다. 정부와 결전도 가까워졌으므로, 레닌은 군대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글을 <신생활>에서도 공개적으로 썼고, 전 인민에게 무장 봉기에 대한 글도 썼다. 19051126, 트로츠키는 체포된 동지에 대한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1905, 12월 중순에는 탐페레 회의를 개최했다. 볼셰비키는 비공식으로는 탐페레 회의에서 무장 봉기를 준비했고, 고조된 분위기에서, 휴식 시간에는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무장 봉기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핀란드 대중 횃불 집회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몇 사람은 침울한 상태에 빠지고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노동계급들마저 차르 전제 정치로부터 지쳐있는 상태였고, 결전을 수행하고자 빈약하게 무장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봉기는 투쟁으로 몸소 보였다.



1905-1907.

 

12월 봉기를 진압했고, 정부는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참혹하게 대했다. 레닌도 모스크바 패배를 받아들였다. 노동 무장도 빈약했고, 조직도 허약했고,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연대마저도 엉망이었다. 레닌은 1906년 봄, 농민에게 배웠고, 파업 투쟁으로 소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계급 당에서 임무를 보다 명확하게 제기하고, 입헌적인 환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력을 모으자고 일축했다. 따라서 전제 정부로부터 지하 투쟁을 잠입해서 감행했다. 러시아 각지에서도 동지들은 모였다. 여러 수행할 활동 노선을 합의해나갔다. 주선으로부터 여러 비밀 장소도 마련했다. 장소로는 서점, , 병원, 등이었고, 주로 비합법 선전물을 발행하거나, 보관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레닌에게 미행이 붙은 적도 있었다. 미행을 피해서 레닌은 19064, <입헌 민주주의 당에서 승리, 노동당에서 임무>라는 소책자를 썼다. 또한 통합 대회를 위한 여러 결의안들도 작성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 토론을 부치고는 고등학교로 사용하던 한 가족 집이나, 교실들 가운데 한 곳에서 토론을 했다. 볼셰비키는 매우 높은 결속력을 유지했다. 일시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꾸준한 신념으로 잘 뭉쳤다. 레닌은 페테르크부르크 노동계급들에 대한 한 보고서에서는, 대회는 농민에게 혁명 진격을 지원하고, 작은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비판해야함을 물론이고, 대회는 어디서는 선거를 참가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행동은 통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보고서는 같은 해, 5, <전진> 출판사에서 나왔다. 레닌은 1906, 59, 파니나 인민 회관에서 열린 경찰 없는 노동 강당에서 가명으로 러시아에서도 공개적으로 연설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레닌을 알아보았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모든 사람들도 끝을 보고야 말 다가오는 투쟁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붉은 옷을 찢고, 혁명가를 부르고 다들 지역으로 흩어졌다. 집회를 마치고 레닌은 레첸코 집에서 밤을 지냈지만, 혁명 기간 동안 레닌은 다시 대규모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연설하지는 못했다.

 

1906524, <물결>은 폐간됐다. 그러나 이틀 뒤로, 1906526, <전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했다. <전진>1906, 615일까지 있었다. 1906, 622, 볼셰비키 새로운 기관지 신문, <메아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메아리>1906, 77일까지 있었다.

78일에는 두마는 해산했다.

 

1906, 6월 말에는 막 바르샤바 감옥에서 출옥한 룩셈부르크도 페테르부르크로 왔다. 레닌, 볼셰비키 지도부에서는 룩셈부르크를 만나기도 했다. 파파 로제라는 노인으로부터 주선했고,

딸도 교사였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큰 빈 집을 만남 장소로 빌려줬다. 레닌은 1906, 5월에는 주로 두마에 대한 글로 꽉 채웠다. 당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로 강연하기도 했고, 그러나 정작 교사 모임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아닌, 사회혁명당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레닌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었다. 토지 문제에서 사회혁명당원들은 정작 관료, 자유주의 단결로 밝혀졌고, 동요하던 근로파는 노동계급 쪽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정부는 두마를 믿지 못했고, 평화 시위를 탄압하거나, 집회를 열던 건물을 불태우고는, 유대인을 괴멸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90678, 두마는 해산했고, 여러 사회민주주의 신문들도 폐간됐고,

각종 탄압, 체포를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스베아보르크에서 봉기도 일어났다. 볼셰비키 조직원들도 가담했다. 침탈도 일어나서 봉기 전보를 기다려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비합법 신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를 다시 발간했고, 멘셰비키는 또 뒷걸음질치고는 부르주아 언론에게 또 글이나 썼고, 무소속 노동 대회라는 뜬구름이나 잡는 구호나 내걸었다. 그러므로 당 청산을 뜻했다. 볼셰비키는 비상 당 대회를 요구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했다. 볼셰비키였던 한 가족에게 부탁해서 집 한 쪽 구석방을 빌렸고, 기고문, 소책자들을 썼다. 중앙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들,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 모두 집으로 레닌을 보러 왔다. 러시아 경찰은 핀란드까지 오지는 않았다. 여러 자료, 신문, 편지 등을 담당하는 사람은 매일 레닌에게로 왔다. 레닌은 보내온 모든 걸 검토해보고는 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글을 쓰거나, 가지고 온 사람 쪽으로 도로 보내주곤 했다. 레닌도 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가고자 늘 열망했고, 늘 최대한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음에도, 보그다노프와 카드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가을부터,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비보르크에서 발간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신문에다 많은 시간, 정성을 쏟았다. 연락은 주로 슐리흐체르 동지로부터 이뤄졌다.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페테르부르크로 반입해서 각 지방으로 배포했다. 지역 주민들은 모두 유능한 조수들이었고, 보안도 잘 지켰고, 운반과 배송을 잘 조직해서 는 문건을 전달할 주소를 미리 확보해뒀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호기심을 함부로 품지는 않았고, 무엇도 잘 묻지는 않았다.

 

1907220, 두 번째로 두마를 소집했다. 11월 협의회에서 레닌을 수장으로 두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대의원들을 포함한 14명 대의원들은 두마 선거에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입헌민주당과 멘셰비키로는 어떠한 연합도 하지 않았다. 같은 구호 아래로 두마 선거와 관련해서 볼셰비키 활동도 진행했다. 따라서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의석은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고는 말아서 패배했다. 선거는 거듭 지연됐다. 그러나 혁명 물결은 솟아올랐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의원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두마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볼셰비키 분파는 모두 늦은 밤까지 조성한 정세에 대해서 밤새워 논의했다. 레닌도 대회나 여러 일들로 늦게 돌아온 날이면, 극도로 지치거나, 신경마저 날카로워지고는 무엇도 먹지를 못하곤 했다. 레닌은 쉽게 지쳤고 또 쉬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를 듣거나 바닷가를 보러갔다.

 

동지들은 레닌을 핀란드 오지로 거처를 옮겼다. 레닌은 그간 겪은 경험을 세세하게 되새김질하고는 종일 농업 문제에서 <사회민주주의 농업 강령>에 대한 글을 썼다. 러시아 경찰은 레닌을 찾느라고, 핀란드 전역을 다 뒤지고 다녔다. 반동도 계속됐기 때문에, 다시금 스위스로 가야만 했다. 또한 핀란드에서도 <프롤레타리아>를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이든, 당원들도 등등 가릴 거 없이, 모두 러시아 사람들은 해외로 옮겼다. 1907, 베를린에 잠깐 들리기도 했다. 룩셈부르크를 만났고, 레닌은 전쟁 문제로 잠시 연대했었던, 슈투트가르트 대회 뒤로 매우 친해졌다. 대회에서 전쟁 반대 투쟁은 그저 평화를 위한 투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완전하게 대체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전쟁으로부터 촉발한 위기로는 반드시 부르주아지 타도를 촉진해야만 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굵직한 여러 문제들도 다뤘고,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기회주의 진영, 혁명 진영들은 서로 어떻게 대립하는가를 두고 혁명 마르크스주의 정신으로부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레닌도 함께였다. 레닌은 19071225-190817일 사이로 잠시 앓아누웠던 동안에는, 제네바로 몸을 옮기기도 했다. 레닌은 고리키에게 감기를 앓았다고 편지를 보냈다.



1907-1910.

 

반동기.

 

레닌도 크게 세 차례나 망명 시기를 거쳤다. 1908-1911, 반동기로는, 차르 정부는 혁명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감옥은 차고 넘쳤고, 극도로 견디기 힘든 징역살이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가했고, 사형 선고도 줄을 이었다. 따라서 비합법 조직들도 지하 깊숙하게 잠적해야만 했다. 그러나 잘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 구성원도 많이 바뀌었다. 차르 정부는 첩자들을 조직하는 데 돈을 많이 들였다. 당 중앙 기관들까지 요원들은 고안되어 들이닥치곤 했다. 정부 정보 수준도 모범이 될 만큼이었다. 모든 합법 단체들, 노동 조합, 언론 등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도 진행했다. 정부로는 노동 대중들로부터 쟁취한 집회 권리, 토론 권리, 스스로를 조직할 권리 등을 빼앗는 데 더욱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동 계급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같은 해로는 사회민주주의로는 극심한 이념적인 붕괴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매우 근본적인 내용에 대한 재검토도 생겨났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둔 유물론 세계관마저도 뒤흔들려는 철학적인 경향들도 생겨났다. 암울한 현실이었다. 종교로부터 해결책을 찾고자 했고, 종교로부터 부여하고자 철학적인 근거들도 생겨났다. 학파 수장으로는 보그다노프였으니, 온갖 구신론이니, 창신론이니에 따라 문호를 개방했다.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등도 같은 진영으로 합류했따. 마르크스는 철학으로부터, 또 관념론 투쟁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로 도달했다. 플레하노프는 유물론 세계관에 대한 기반을 닦고자 열중하기도 했다. 레닌은 여러 저작들을 학습했고,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으로 수정하려는 여러 함의나, 반동기로부터 갖는 비중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 그래서 레닌은 보그다노프와 학파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철학 전선만이 아니라, 주위로는 소환주의, 최후통첩파를 끌어모았다. 소환주의들로는 두마를 반동화했고,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을 두마로부터 소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최후통첩파는 주마를 제명하도록 만들 연설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 두마 연단에서 할 수 있도록 최후통첩을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본질로 보자면, 소환주의, 최후통첩파 사이로는 무엇도 다르지 않았다. 최후통첩파로는 알렌신스키, 마르트도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는 무조건 노동 조합이나, 합법 단체로부터 참여하기마저 반대했다. 단지 타협해서도 안 되고, 볼셰비키는 늘 굽히지도 말아야만 하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레닌은 같은 관점을 오류라고 봤다. 모든 실천 활동, 대중으로부터, 현실에서도 조직에 대해서 더욱 멀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로는 1905, 혁명 전 시기로도 모든 합법으로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활용할 줄 알았고, 힘겨운 조건에서도 대중들도 늘 끌어들일 줄 잘 알았다. 단지 차 마실 뜨거울 물을 확보하고자 벌인 투쟁, 환풍기 설치를 위한 투쟁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씩 차근차근 대중을 전 인민 무장 봉기로 이끌어냈다. 어려운 정세에서도 적응하면서도, 원칙으로는 일관성을 지키고, 혁명 입장을 양보하지도 않았다. 바로 레닌주의 전통이기도 했다. 소환주의들로는 볼셰비키 전통과도 결별했다. 소환주의에 대해서 벌인 투쟁이란 시련으로부터 단련한 볼셰비키, 레닌 전술을 지키고자 벌인 투쟁이었다.

 

따라서 1908, 1911년까지 몇 해 동안이나, 당을 지키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지키고자 격렬한 투쟁 기간도 있었다. 반동기로 접어들어, 쇠락한 분위기를 드러낸 조직으로는 멘셰비키 활동가들이었고, 늘 여러 경향에 따라서만 휩쓸려 다녔고, 혁명 구호를 축소하고자 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긴밀한 관계를 늘 유지했다. 따라서 쇠락하는 분위기로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도 멘셰비키는 당을 청산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청산주의들에게 비합법 당이란 탄압으로부터 괴멸만을 초래할 뿐이었고, 노동 운동 범위를 축소하도록 만든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합법 당을 청산한다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독립적인 정치를 포기하라는 말이었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도 혁명 정서를 폄하하도록 만들거나,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행동에 대한 통일을 가로막고, 약화하도록 했다. 플레하노프도 한때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기회주의 투쟁에서도 많은 일을 했었으며, 멘셰비키로는 청산주의 정서를 가진 채로 반동에 대한 일체를 모를 일도 없었고, 당 청산이라는 설교로는 마르크스주의 기초 자체로부터도 청산으로부터 발전해서는 무슨 일이든 자신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만 하거나, 자신들에게 이로운 모임, 곧 멘셰비키 당 유지파 모임을 이루고자 했다.

 

당을 지키고자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수 많은 조직 문제들도 분명하게 밝혔고, 폭 넓은 수로 당원들도 당 역할, 당원 의무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다. 유물론 세계관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 대중과 접촉을 위한 투쟁, 레닌 전술을 위한 투쟁, 당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은 망명으로부터 엄혹한 조건에서 벌어졌다. 차르 정부로부터 탄압을 피해서 사람들도 끊임없이 해외로 도망쳤으므로, 따라서 망명가 수도 무섭게 늘어났다. 심신마저 쇠약해졌고, 전망도, 한 푼돈도,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어떠한 도움이나 손길마저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투쟁을 더욱 힘겹게만 만들었다. 그래서 논쟁, 욕설마저 난무했다.

 

레닌 노선은 옳았음을 삶에서도 더욱 확실하도록 입증해 준 현재로는 투쟁에도 별 관심마저 없는 사람들도 많겠다. 그러나 투쟁은 없었더라면, 당은 신속하게 활동을 전개할 수조차 없었고, 승리를 향한 길 역시나 힘겹기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레닌 성격, 신랄한 태도, 괴팍한 성격 따위만 모든 사태 핵심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투쟁이란 당 존속, 흔들림 없는 노선, 올바른 당 전술 등을 위해서였다. 논쟁에서도 늘 날카로운 양상을 보이는 이유로도 여러 문제들도 혼란스럽게 얽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지조차 않으면, 문제에서 본질 자체마저 묻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8-1911년으로 이르는 몇 년은 단순하게 해외에서 그저 체류만 하던 시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전선으로는 사상 투쟁이라는 전선으로부터 긴장된 투쟁도 벌어졌던 시기였다.

 

1911-1914, 망명 기간으로는, 파업 투쟁을 성장하도록 했고, 노동 계급들도 단결해서는 1912, 4, 시베리아 레나 금광 사건, 노동 언론에 대한 발전, 두마 선거, 두마 안 사회민주주의 의원들 활동 등, 당 활동도 새로운 형태로 전개했다. 규모도 새로웠고, 노동 당원 수도 빠르게도 늘어났다. 당은 대중에게도 가까웠다. 러시아와 관계도 빠르게 강화했고, 러시아 활동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다. 19121, 프라하 당 협의히에서 청산주의들을 제명했고, 비합법 당 조직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볼셰비키와 함께하지는 않았다.

 

1912, 크라코프로 자리를 옮기고는, 당을 지키고, 당을 더욱 강화하고자 벌인 투쟁으로는 해외 모임 안에서만 진행할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러시아에서 레닌 전술은 옳았다고 입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레닌은 대중당에서 실천 활동이라는 문제로도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더 폭 넓게 전개했다. 때를 같이해서 국제 전선으로는 전쟁 냄새마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레닌은 전쟁은 발발해서, 내전으로 전화할 경우로는,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정립해야 할 상호 관계라는 문제를 새롭게 생각했다. 레닌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부터 민족 문제에 대한 관점을 가깝게 접하기도 했다. 또한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줄기차게 싸웠고, 더욱 정확하고, 명료하게,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정식화했다. 따라서 덕분에 볼셰비키로는 매우 중요한 속뜻을 지닌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할 수 있었다1914-1917, 망명 기간으로는 전쟁기를 아울렀고, 망명 생활 전반으로도 빠르게 바뀐 시기였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들은 결정하기로도 중요했고, 러시아 문제들도 오로지 국제 운동 관점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러시아 문제들은 이전과는 다른 토대로부터, 훨씬 더 폭 넓고, 국제 토대로부터 다뤄졌다. 중립국이었던 러시아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맞서는 투쟁을 선전하고,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도록 선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기반을 다지고자, 레닌도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주위로부터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서도 영향을 받았고, 하나로는 새로운 생각을 했다. 제국주의, 전쟁 성격,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승리한 직후로부터 이뤄질, 새로운 형태 국가 권력, 노동 계급 정책, 전술로부터 적용할 변증법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했다. 취리히에서는 일을 하기로는 매우 적합했고, 베른에서 취리히로도 거처를 자주 옮겼다. 덕분에 레닌은 집필에만 완전하게 몰두할 수 있었고, 마침 2월 혁명 소식도 와서는 러시아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까지는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1908, 제네바로 도착한 날에는 알렉신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두마 볼셰비키 의원이었고. 다른 볼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고는 해외로 망명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틀 뒤로는 고리키에게 답장했다. 고리키는 레닌에게 이탈리아, 카프리로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카프리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당 비합법 중앙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를 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중앙 기관지 제작은 체계적인 지도로부터 신속하게 확립하고자, 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닌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고리키와 나누고자 했었지만, 미룰 수밖에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를 제네바에서 발간할지를 두고는 미정했고, 다른 장소에서도 발간할 수 있을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아들러, 유제프 제르진스키에게도 편지를 썼다. 신문을 인쇄하는 쪽은 수송보다 더 쉬웠다. 1908, 2월에는 <프롤레타리아>를 만들고자 여러 동지들과 제네바로 모였다. 편집부 삼두 편성으로는 레닌, 보그다노프, 인노켄치였다. 비엔나에 있던 트로츠키에게도 편지를 보내고는 <프롤레타리아>로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거절했다. 볼셰비키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었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고, 바쁘다는 핑계만 댔다. <프롤레타리아> 수송 체계를 갖추고자 조치를 취했다. 여러 선원들, 노동가들로부터 오데사로 문건을 수송하는 방법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19077, 치플리스, 에리반 광장에서 강탈을 감행했다. 볼셰비키는 전제주의 전선과도 싸웠고, 차르 국고를 강탈하고자 수탈해갔다. 그리고 치플리스 강탈 사건으로부터 얻은 돈으로는 볼셰비키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모두 큰돈으로는 500루블짜리 지폐였고, 일련 번호를 갖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에서는 환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해외로 가서 환전할 수밖에는 없었다. 동지들은 해외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500루블짜리 지쳬를 환전했다. 한 사람은 경찰에게 밀고해서는 동지를 체포하기도 했다. 차르 정부로부터 혹사당하는 혁명가들을 위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해야만 했고, 운동을 위해서는 비합법 인쇄소마저 세워야 하는 등 할 일도 많았다.

 

스위스 당도 너무나 기회주의 분위기는 널려 있었으므로. 환전을 두고는 스위스 주민들은 러시아 강도들이라고 봤고, 매우 민주적인 나라에서 최고로 공정한 재판을 이뤄지기 때문에 자국 영토 안에서 재산에 대한 범죄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는 체포한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도 일에 개입할 태세였다. 멘셰비키로는 1905, 모스크 봉기를 비난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걸 반대했다. 혁명은 패배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지식 계급은 혁명에서 발 뺀 건, 계급 본성 때문이 아니라, 볼셰비키 투쟁 방법으로부터 위협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했다. 혁명 투쟁마저 고양할 때, 혁명 목적으로부터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 주장마저 신랄하게 비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맨셰비키 견해로는 볼셰비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셰비키와 투쟁은 피할 수 없다고 봤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투쟁에서 모든 수단을 다 쓰고자 허락까지 했다.

 

악셀로트는 1908226,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외국인들 눈 앞에서 볼셰비키 위신을 실추하도록 할 방법에 대한 계획을 설명해 놓고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사건 전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는 독일 당 지도부, 카우츠키, 아들러, 런던 국제사회주의사무국 등에다 보내기를 제안까지 했다. 1925년 출간한 악셀로트 편지에서도, 볼셰비키, 멘셰비키에게 길마저 서로 얼마나 멀었는지를 더할 수 없이 잘 보여준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체포된 세마슈코에게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대표로부터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에다 공식 성명서를 보냈다. 고리키에게도 편지를 썼고, 스위스 언론에다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그리고 세마슈코는 석방됐다. 레닌은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셋방은 저녁에 춥고 삭막했으므로, 주로 밖으로 나와 날마다 극장이나, 공연장으로 다니곤 했었다. 비록 끝까지 자리를 있지는 못했고, 중간쯤 일어나 나와서는 아무 곳이나, 주로 호숫가를 쏘다니곤 했다. 마침내 19082월에는 제네바에서 발간한 <프롤레타리아>, 21호는 나올 수 있었다같은 기고문에서 레닌은 혁명 부대 공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당을 만들 수 있었고,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도 얽어매지 않으면서도 사회주의로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약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레닌은 한 동지에게 190510월에 대해서는, 노동 무장, 전투부대 조직, 봉기 조직, 권력 획득이라는 문제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상세하게 회고록을 써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왜냐하면 레닌은 혁명 경험은 훗날 몫을 다할 수 있다고 봤고, 또 치밀하고도, 주의 깊게 연구해야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투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파악했고, 오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닌에게 노동 계급에게 주어진 과제로는 지식 계급, 소시민이 내팽개치고만 혁명 투쟁이라는 전통을 지키고, 같은 전통을 발전하도록 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폭 넓은 인민 대중이라는 의식 속에서 전통을 심어주고, 다음에 올 필연적인 민주화 운동 약진으로부터도 틀림 없이 굳게 지지할 수 있다고 봤다. 1905년이라는 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모범을 바로 보여줬다. 지식 계급, 소시민에게는 미친 해였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모범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혁명 경험을 연구하고, 몸소 비판할 수 있도록 투쟁 방법을 더욱 성공하고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10월 파업 투쟁, 12월 무장 투쟁도 더욱 폭 넓고, 더욱 집중하고, 계급 의식으로까지 만들기 위함이었다. 레닌은 다가올 몇 해를 두고는 새로운 진격을 위해 준비하기도 했다. 레닌은 반동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투쟁 노선을 정립해야만 했다. 당 활동을 지하로까지 옮겨 가면서도, 합법 공간을 쓰고자 두마 연단으로부터 폭 넓은 노동 계급, 대중에게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따져봤다. 레닌은 반동에서 활동 전개에서 어렵다고 도망치는 소환주의를 두고는 좌파 청산주의로 평가했다. 알렉신스키와 같은 분트파만이 아니라 볼셰비키 분파로는 보그다노프를 주축으로 이뤄진 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수보로프, 베르만, 유슈케비치, 겔폰트 등 기고문들로 이뤄진, <마르크스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을 발간했고, <논고>는 유물론 세계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마저 수정하고자 했다그리고 신비주의에게 문을 열어주고는 수정주의라는 반동으로부터 얼룩덜룩한 색채로 전개해갔고, 지식 계급 사이에서도 쇠락하는 분위기를 여러 모로 부추겼다. 따라서 레닌은 선을 그을 수밖에는 없었다. 레닌은 늘 철학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고, 헤겔, 포이어바흐, 칸트 등을 연구했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 때도 레닌은 칸트로부터 경도된 동지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같은 문제로는 <신시대>에도 실린 글들을 주시해서 읽었다. 그러므로 레닌은 충분하게 깊이마저 있는 철학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레닌은 1908, 225-310, 편지에서도,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그다노프, <자연에 대한 역사관 기초>를 읽었다. 레닌은 1903, 플레하노프는 보그다노프 철학 언명들을 여러 차례 비난하기도 했다. 1904, 보그다노프, <경험일원론>은 출간하자,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직설적이고, 플레하노프는 옳은 견해였고, 보그다노프는 아니라고 말했다. 보그다노프는 1906년 초, 감옥에서 <경험일원론> 저술을 끝마쳤다. 레닌은 격분했고, 고리키에게 <프롤레타리아>, 1호는 1908223, 해외에서 발간했을 때 레닌, 보그다노프 관계는 최악이었다. 볼셰비키 분파도 분열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조직들도 파괴되어만 갔다. 경찰들은 첩자 제보로부터 매우 뛰어난 활동가들도 적발했다. 대규모 집회, 회의를 열 수도 없었다. 레닌은 철학 책을 집필하다가 지침면 침대에 누워서 프랑스어 문법 책들, 프랑스어사 책들, 프랑스어 회화 특성을 연구한 책자들 등을 몇 시간이나 읽었고, 철학 논쟁 때문에 녹초 된 신경을 진정하곤 했다. 제네바에서 부르주아 학교라는 국민 학교 모습으로는 고상한 창문, 멋들어진 건물에서 노동 계급 아이들을 유순한 노예로만 길들였다. 교사는 아이들을 머리를 쥐어박고는 정작 부잣집 아이들은 그냥 냅두었다. 아이들에게 온갖 독자적인 생각들을 억누르고는 주입식으로 채워 넣고는 단계마다 아이들에게 권력, 부에 굴종하라고 가르쳤다. 민주 국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 망명 기간 동안 레닌은 매우 흥미를 보인 노동 운동, 노동 집회, 노동 시위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0, 러시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혁명 뒤로는 러시아에서도 노둥 운동은 늘어났고, 여러 당들도 투쟁을 겪었으며, 두마를 겪고, 노동대표소비에트 출범을 겪고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에 대한 실태와 속에서도 노동 대중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노동 계급들에게 영향력은 얼마나 있고, 다른 당들에 대한 영향력도 얼마나 있는지, 등등 더 큰 문제에도 특수하게 다뤘다.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은 당 강령에서 한 항목이었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이란 차르 전제 정치보다 훨씬 더 다듬어졌지만, 노동 대중을 노예화하는 도구임은 분명하다고 명확하게 알았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모든 사회 생활에서도 부르주아 정신을 베어들도록 정치 조직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을 겪지 않았다면, 그리고 망명 기간이 없었더라면, <국가와 혁명>이라는 책을 결코 쓸 수는 없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서둘러 출판해야만 했다. 제네바에서는 없는 자료들을 구해야만 했으므로 소소한 다툼마저 잦은 망명 기간에 대한 분위기로는 많은 방해만 됐다. 그래서 레닌은 런던으로 가서 대영 박물관에서 배우면서 집필을 마무리해갔다. 레닌은 1908824,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었다. 당 협의회를 조직하고자 인노켄치는 러시아로 갔고, 같은 무렵 러시아에서는 청산주의 노선을 이미 모습을 드러내서 폭 넓은 멘셰비키 층을 확보해갔다. 청산주의로는 당, 당에서 비합법 조직에게는 체포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반동으로부터 모든 혁명 활동을 포기하고, 지도를 거부하는 모든 입장으로 양보했다. 볼셰비키 대오에서 최후통첩파, 소환주의들로는 극단으로, 두마뿐만 아니라, 문화 및 교육 단체들, 모임, 학교, 합법 노동조합, 노동 상호 부금 등에 참여하기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중 속에서 폭 넓게 활동하기를 떨어져나갔고, 대중 지도를 포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5월이 되어서야 출간할 수 있었다.

 

반동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고, 러시아인 망명 생활 중심지에서도 당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다. 따라서 중심지를 파리로 정했고, 매우 혹독한 망명 생활을 겪었다. 레닌은 협의회를 골몰했고, 당 노선을 정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청산주의로부터 일격을 가했다. 파리에서는 살림도 정신 없었고, 또 일도 정신 없었다. 1908년 협의회 논쟁으로는 공동 노선을 모색해나갔고, <사회민주주의>로는 공동 당 기관지였다. 협의회 뒤로는 열린 전체 회의로부터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마르토프, 마르흘레프스키로부터 구성한 <사회민주주의> 새 편집부를 선출했다. 같은 해로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아홉 호를 발간했다. 마르토프는 편집부에서 고립해갔고, 멘셰비키를 잊곤 했다. 레닌은 마르토프와 일해서 즐겁다고 잠깐 드물게는 능력 있는 기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셰비키 분파 사정으로는 소환주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3년 간은 보그다노프, 추종자들과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 투쟁만으로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분파 안에서 격화된 투쟁에서 레닌은 소환주의와 치열하게 논쟁했다.

 

파리는 연구를 수행하기로는 매우 불편했다. 국립 도서관도 너무 멀었다. 레닌은 늘 긴장을 품었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면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필요한 책을 신청해도 관료주의에 따른 지연 처리를 뒤따라서 책을 신청하고는 하루, 이틀 지나서야만 필요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파리 국립 도서관에다 불평을 쏟아 내고는 파리도 욕하고 말았다. 다른 도서관들도 둘러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전가마저 도둑 맞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에도 치일 뻔했다.

 

레닌과 솔비체고츠크에서 탈출한 이노크와 플레하노프는 청산주의와 단호하게 거리를 뒀다는 사실을 듣고는 축하했다. 플레하노프로는 190812, 청산주의로부터 주도권을 잡았던 <사회민주주의 목소리>에서 편집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었고, 청산주의 관계마저 계속 악화했고, 1909,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기를 부인한 포트레소프 기고문도 실린 멘셰비키 저작집 1,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 운동>도 나오자플레하노프로는 1909525, 마침내 <목소리> 편집부에서도 완전하게 물러났다. 레닌, 이노크도 플레하노프와 함께 활동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플레하노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철학 전선 투쟁에서 레닌, 이노크는 큰 흥미를 보였다. 철학이란 투쟁 도구였고, 모든 현상을 변증법 유물론이라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문제, 모든 노선에서 실천 투쟁 문제와도 유기적이었다. 레닌은 누나였던 안나 일리니치나에게 책 출판을 서둘러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소환주의들과 최종 결별을 예상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를 소집했다.

 

19095,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도 나올 수 있었다. 모든 논쟁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레닌에게 철학 문제는 곧 종교 투쟁이라는 문제와도 같았다. 따라서 19095월에는, <종교와 노동당>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고, <프롤레타리아> 45호에는, <종교에 대한 노동당 입장>이라는 기고문, <사회민주주의> 6호로는, <종교와 교회에 대한 입장에서 본 계급과 당>을 썼다.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글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큰 속뜻을 지닌다. 같은 글로는 종교에서 지닌 계급 성격을 강조했고, 부르주아지 수중에 있는 종교도 대중에게 계급 투쟁을 격리하도록 만들고, 의식을 마비하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종교에서 뿌리를 파헤치고, 복잡한 사회로부터 온갖 문제를 제대로 끌어내야만 했다.

 

레닌은 종교에 대한 해악을 15살 소년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십자가를 벗어던지고는 교회에 다니기를 중단했다. 당시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닌은 눈 앞으로 던져진 많은 부조리들을 정제하고는, 노예 형식을 외관상으로도 제거한 세련된 종교야말로, 매우 해롭다고 봤다. 또한 세련된 종교로는 더욱 강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레닌에게 창신론도 바로 그러한 세련된 종교였다. 19096,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부터 참가할 대의원들도 모였다. 확대 회의로는 볼셰비키 중앙이었고, 전진파도 들어왔다. 여러 동지들과,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편집위원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보그다노프 등과 지역 볼셰비키 조직들 대표로는 페테르부르크: 톰스키, 모스크바: 슐라치코프, 우랄: 나코랴코프 등과

중앙 위원으로는 인노켄치, 리코프, 골젠베르크 타라투타, 샨체르 등도 참석했다. 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로는 스크리프니크, 류비모프, 폴레타예프, 다비도프 골룹코프 등도 있었다.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621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소환주의 최후통첩파에 대한 결의안, 당 단결을 위한 껼의안, 특수 볼셰비키 대회에 반대하는 결의안 등도 채택했다. 카프리 학교 문제를 제기했다.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분파로는 분열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사전에 미리 분파를 모으고는 조직했다. 보그다노프, 알렉신스키, 고리키, 루나차르스키는 노동계급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고급 선전 학교를 조직했다. 노동계급들은 논리적인 훈련에 대한 필요도 절감했다. 노동계급들은 배움을 위해 카프리 학교로 갔지만, 경험 있는 당 활동가라면, 카프리 학교란 새로운 분파를 이루고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에서는 새로운 분파 조직을 두고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회의 결정을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볼셰비키 분파에서도 제명됐다. 크라신은 보그다노프를 옹호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분파는 해체됐다.

 

가을에는 카프리 학교, 학생들은 레닌에게 강연을 부탁했지만, 레닌은 학교에 대한 분파적인 성격을 파악하고는 거절했다. 대신 파리로 오라고 했다. 카프리 학교 안에서도 분파 투쟁은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190911월 초에는 학교 조직가였던 빌로노프를 포함한 카프리 학교 열두 명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은 확고한 레닌주의를 따랐고, 곧 학교에서 제명됐다. 카프리 학교에 대한 분파 성격을 지적한 레닌은 옳았다. 제명된 학생들은 파리로 왔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 동지를 만나고는 고리키에게 편지를 썼다. 헤겔 말이 옳았고, 삶이란 모순으로부터 발전하고, 사람 머리로만 가리거나 잴 수 있기보다 훨신 더 많고, 매우 뜻 깊다고 적었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를 새 분파에서 중심지로 생각했지만 완전하지도 않고, 전체적인 진리를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봤다. 따라서 노동 계급들에게는 잡다하고, 많은 요소들을 재료로 당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편지에도 적어놨다. 노동계급 힘에 대한 믿음도 숨쉬었다. 파리로는 카프리 학교에 반감을 가진 미하일과 함께 카자네츠, 루슈빈, 코지레프, 우스치노프, 로마노프도 있었다. 레닌은 매우 열심히 이들에게 강의했다. 미하일은 결핵을 얻었고, 니콜라예프 부대 수용 도중에 모진 학댈를 당하다 병을 얻고는 말았다. 190151, 숨을 거두었다. 주로 시사적인 주제들이었고, 부유한 농민 쪽에 선 스톨리핀 개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선도적인 역할, 두마 의원 모임 등에 대해 말해줬다. 학생들 가운데로는 두마에 대한 활동을 두고는 군대 안에서 선동보다 더 중요하게만 여긴다고 비난하고자 애썼다. 레닌은 방긋 웃음을 짓고는 두마 활동은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다. 군대 안에서 활동도 느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은 조금도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비밀리에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이란 말 없이 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머릿 속으로는 러시아에서 살았으나, 프랑스 노동 운동도 주의 깊게 연구했다.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뼛속까지 기회주의 태도를 보였다. 1909년 봄, 우편 노동계급들도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다. 도시 전체는 소요 상태에 빠져있을 때도, 당은 한 쪽으로만 물러섰다. 노동 조합 일이지, 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만 발뺌하기만 했다. 정치 현안들을 둘러싼 토론마저 잘 이뤄지지도 않았다. 유세장들만 흥미로웠을 뿐이었다. 프랑스 선거 유세장도 민주공화국에서 선거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만 보여줬다. 일리치는 파리 도시 외곽, 극장을 다니면서 무리 지어 있는 노동계급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1909년에는 모르코 침략에 항의하고자 약 10만 명은 참가한 시위를 1909년 열었다. 붉은 목도리를 두른 사회주의당 당원들도 시위를 주도했다. 노동계급들은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부자들 거주 지역을 통과할 때는 주먹을 휘두르고는 위협했다. 황급히 창문에서 덧문을 내리기는 했었지만, 시위는 너무나 평화적으로만 끝났다. 조금도 항의 시위같지도 않았다.

레닌은 샤를 라포포르로부터, 마르크스 사위였던 라파르크와도 인연을 맺었다. 폴 라파르그는 노련한 투사였고, 레닌은 라파르그 의견을 소중하게 여겼다. 레닌은 라파르그 아내이자, 마르크스 딸이기도 했던 라우라와 함께 파리에서 20-25베르스타 거리에 있는 드라베이에서 살았다. 이미 직접적인 활동에서는 손은 뗐다. 한번은 레닌, 크룹스카야는 자전거를 타고 라파르그를 찾아갔다. 라파르그 부부는 무척이나 친절하게 맞이 했다. 레닌은 라파르그와 자신에 대한 철학 책 이야기를 나누었고, 크룹스카야는 라우라를 따라 공원을 산책했다.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딸도 바로 내 눈 앞에 있따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라우라 얼굴을 너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나도 모르게 속에서 마르크스 모습을 찾고는 말았다. 크룹스카야는 당황한 나머지 러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혁명 운동에서 여성은 참가하는 문제를 두고는 아는대로 횡성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라우라는 대답해주곤 했지만 대화 다운 대화는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라파르그와 레닌은 철학을 논했다. 라파르그는 레닌을 두고는 스스로에 대한 철학 신념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곧 증명할 거라고, 라우라는 라파르그를 보며 말했다. 묘한 웃음을 짓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말과 눈빛은 무슨 뜻인지를 훗날 알게 됐다무신론으로는 동반 자살했다. 늙어가는데, 투쟁에서 필요한 힘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910년은 중앙 위원회 전체 확대 회의를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당 단결을 위한 결의안, 볼셰비키 특별 대회 소집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지들 모임으로는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도 동일한 노선을 내세웠다. 반동기로는, 비록 지하 활동이더라도, 모든 진실을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당은 있어야만 한다는 건 매우 중요했다. 반동은 당을 파괴하고 있던 때이자, 기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당을 뒤흔들고 있던 때였고, 어떻게 해서든 당이라는 깃발을 움켜잡고자 했다. 청산주의들로는 러시아에서 자신들에게 보다 합법적이고, 강력한 기회주의 중앙을 가져갔다. 그러한 중앙에 맞서고자, 당은 꼭 필요했다. 카프리 학교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당시 노동계급들에게도 분파란 얼마나 상대적이고, 이상한가를 알게 됐다. 사회민주주의를 따르는 노동 대중을 모두 뭉치게할 수 있는 통일할 수 있는 당 중앙은 있어야만 했다. 1910년에는 당 존립 자체를 지키고자 벌인 투쟁, 당으로부터 노동 대중에게 영햐을 미치고자 투쟁도 이뤄졌다. 레닌은 당 안에서 볼셰비키는 다수파일 수 있고, 당은 볼셰비키 노선을 따르리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분파가 아니라 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 파리 근교로는 당 학교를 세웠다. 전진파, 멘셰비키 당원들까지도 참여했을 때도, 레닌은 같은 노선을 견지했다. 1912, 프라하 당 협의회에서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 노선을 수행하는 분파가 아닌 당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에서는 청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당은 투쟁하고자 여러 세력들도 모았다. 당 결정을 따르지 않을거라 미리 결심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마저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동지로는 당을 위한 투쟁을 타협하기를 넓히기만 하고는, 통합 목표마저 잃어버리고는 말았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조차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기만 하려는 방탕하기만 하듯이 갈피마저 잡지도 못했다. 레닌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인노켄치조차도, 근본적으로는 멘셰비키 당원들, 플레하노프주의와 통합한다고 생각한 결과로부터, 당 통합을 이루려는 열망만 강했고, 타협파 관점으로만 기울어졌다. 레닌은 바로 잡았다.

 

결의안들은 전반적으로는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레닌은 단지 타협주의들에게 찬성표를 던지고는 자신 입장을 양보했다고 생각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전체 회의는 3주간 지속했다. 레닌은 본질 입장마저 물러서지도 않았고, 조직 문제로는 최대한 양보해야만 한다고 봤다. 볼셰비키 분파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는 폐간됐다. 남아 있던 500루블짜리 지폐들도 소각했다. 볼셰비키 분파 자금줄로는 이른바 피신탁인이라고 불리는 독일 동지 세 명, 카우츠키, 메링, 제트킨에게 전달했다. 돈은 당 전체를 위해 사용할 때만 지급하도록 했다. 분열은 일어날 경우로는, 남아 있는 돈은 모두 볼셰비키에게로 반환했다. 카메네프는 비엔나로 파견해서, 트로츠키 신문, <진실>에서 볼셰비키 대표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상황은 엉망이었다. 전진파로는 조직화만 계속했다.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위험한 일탈을 제거하고, 청산주의, 소환주의를 제거하고, 당은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통합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했다고, 고리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1081, 포르니크에 왔고, 826일에는 이미 코펜하겐으로 먼저 갔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 인터내셔널 대회에도 참석하고자, 대회 활동을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수정주의들로부터 견해는 달랐지만, 수정주의들로는 독자적인 강령을 내거는 단계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수정주의와 투쟁은 미뤄졌고투쟁은 필연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으로는 스무 명으로 매우 대규모였다. 열 명은 사회민주주의였고, 일곱 명은 사회주주의 혁명가당 당원, 세 명으로는 노동 조합 대표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 모임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플레하노프, 바르스키, 마르토프, 마르티노프 등 모든 정파 대표들도 포함됐다.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로는 심의권만 가졌다. 많은 손님들도 대회를 찾았다. 대회 기간 동안에는 레닌, 플레하노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제3대 두마 의원으로는 폴레타예프, 보크롭스키도 참석한 협의회를 열었다. 협의회로는 해외에서 대중 신문, <노동자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플레하노프는 외교관 역할을 했을 뿐임에도, 신문 첫 호로는 <우리 입장>이라는 기고문을 썼다파리 대회에서 알게 된 루나차르스키는 <인민>에다 <우리 당 전술 경향>이라는 글을 실었고, 모든 문제들을 소환주의 관점으로 조명하는 글이었다. 레닌은 같은 글을 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는 글로 응수했다. 대회에도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글을 각자 논평했다. 인텨내셔널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전진>에서 익명으로 글을 실었고, 볼셰비키를 매번 공격했고, 비엔나 <진실>을 칭찬했다. 대회 대표로 참석했던, 플레하노프, 레닌, 바르스키는 <전진>에 글을 게재한 데 항의를 표했다. 플레하노프는 제2차 당대회도 있기 전, 트로츠키는 처음으로 해외에도 등장했던, 1903년부터 플레하노프에게 적대적이었다. 2차 당 대회를 앞두고는 대중 신문 문제를 놓고는 격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코펜하겐 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트로츠키 연설을 반대한다는 아무런 단서 없이 서명했고,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발행하기 시작한 <노동 신문>을 두고는 편협한 당파 기관지로 단언했고,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비엔나 모임에서도 같은 주제로 강연했다. 따라서 1월 전체 회의 뒤로는 <진실>에서 파견한 카메네프는 항의 표시로 편집부를 사퇴했다. 트로츠키 영향력 아래 있던 마크로부터 이끈 파리 타협주의 역시 파벌주의를 경계한다면서, <노동 신문> 반대 운동을 벌였다. 레닌은 투쟁을 고양한 시점에서 스스로 위치를 포기하는 무원칙한 타협주의, 누가 되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과 타협하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10, <신시대> 50호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발전 경향>이라는 트로츠키 기고문을 실렸고, 51호에는 <프러시아 논쟁과 러시아 경험>이라는 마르토프 기고문도 실렸다. 레닌은 <러시아 당내 투쟁이 갖는 역사 의의>라는 글로 답하고자 했으나, <신시대> 편집자였던 카우츠키 부름으로부터, 레닌 기고를 거부했다. 카르스키는 레닌과 사전 조율한 뒤로 트로츠키, 마르토프에게 답했다. 1910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브뤼셀에서 파리로 왔고, 그녀는 파리 모임에서도 적극적인 활동가이자 한 사람이었다. 세마슈코, 카자코프와 함께 간부 모임으로 들어가서 다른 해외 모임들과도 폭 넓게 서신을 교류했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매우 열성적인 볼셰비키였고, 그녀를 둘러싸고 파리 사람들도 빠르게 모여들 수 있었다.

 

파리 모임은 전반적으로 조금씩 강화해갔다. 이념 결속도 다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끔찍한 가난에 시달렸다. 노동계급들은 어떻게든 그럭저럭 자리르 잡았지만, 지식계급들은 상황은 매우 지독하게 힘겨웠다. 노동계급은 늘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명 기금으로 살아간다는 건, 망명 식당에서 외상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다는 건 매우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험난했던 일들도 많았다. 한 동지는 칠장이였지만, 기술을 가지지 못해서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다른 동지도 사기 그릇 색칠하는 일을 구했지만, 푼돈 밖에는 벌 수 없어서, 굶주림으로 주름살도 늘어나보였다. 매우 슬픈 경우로는 모스크바 봉기에 참가했던 프리가라 동지였다. 교외 노동 계급 밀집 지역에서 살았고, 동지들은 아는 바도 거의 없었다. 미치고는 말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해댔다.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만나고는 기아로부터 정신 착란이었고, 피해 망상으로 발전하면 자살할 수도 있으므로 주시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소조차 알지 못했고,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나섰지만 달아나고 말았다. 사람마저 실종됐으니 가시방석이었다. 시체는 센강에서 목과 다리에 돌로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됐다. 자살하고는 말았다.

 

소소한 다툼은 끊이질 않는 망명 생활이라는 분위기 속에서도 두 해 정도 더 살았더라면, 심신마저 다 지쳐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동기는 끝날 수 있었다. 톨스토이 죽음을 계기로부터 시위도 시작했고, <> 창간호도 발갱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볼셰비키, <사상>도 발행했다. 레닌은 기운을 되찾았고, 19101231일에 나온, <시위 시작>이라는 글로도 동지들에게 활동으로 나서자고, 모든 곳에서 조직을 건설하고, 사회민주주의당 노동계급 세포 조직도 만들어서, 강화하고, 정치 선동, 경제 선동을 발전하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러시아에서 최초 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자유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고, 따라서 두 번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을 승리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대중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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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의미가 있는 결론

 

결론으로 들어가서, 십중팔구 여러 명 독자가 이미 품어봤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건 의미가 있다. 왜 저런 신사 양반들과 긴 지면을 할애해서 논쟁했단 말인가. 그들이 기꺼이 반론이라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검열을 통과한 추잡한 주장들에 대한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또는 교양 있는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한 맹공격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격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 전체를 이뤄, 하나로 녹아들어갔던, 국내 사회 발전 시기가 아직은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지고,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 국내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상적으로도, 심오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오늘날 일부 국내 사회주의자로부터 여전히 고수되면서,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 가장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런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하며, 그래서 지금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때, 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이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할 때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상이 태동했던 시절에, 실제로 국내 민주주의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비교를 위한 충분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관련된 독일에서 한 출판물, 중앙 사회 정책 신문,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관하여, 1893. 10. 2에서 니콜라이 온 선생의 공상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폈었던, 스트루베 선생을 크리벤코 선생이 공격하고 나선 점은 아주 흥미롭다. 크리벤코 주장에 따르면,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들어, 스트루베에게 공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그러한 끔찍한 비난에 얼마나 격분했던지, 훌륭한 크리벤코는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다.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농민들을 위해 규제를 만들고, 공동체와 농민의 경제적인 독립을 개혁 기초로 삼은 사람들 아니던가. 역사 연구자들과 같은 시대 삶을 연구하던 사람들, 그리고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들 거의 대부분이 그런 원칙들을 지지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망상의 피해자들이란 말인가.'

 

인민의 벗은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지독한 비판에 겁먹은 나머지, 스트루베의 '하찮은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지도 않았다. 실제로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주의와 연관됐다고, 비난하는 행위는 실로 부당한 일이다. 도대체 거기에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알다시피, 사회주의란 노동 인민 착취에 맞선 저항과 투쟁, 착취에 따른 완전한 철폐를 위한 투쟁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에, 분여지를 옹호한다는 건, 한때 농민들이 마음대로 이용했었던 모든 토지에 대해 이제 상환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태를 지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토지 대금 상환이 아니라, 개혁 이전에 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의 무상 보유를 지지할지라도, 러시아에서처럼, 서구 전역에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가 됐던 게 다름 아닌, 봉건 시기에 차츰 진화했던, 농민 토지 소유권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마을 공동체를 옹호한다는 건, 곧 토지를 분배하는 관례적인 방식들에, 경찰이 개입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나선다는 점 역시도, 공동체 내에서는, 노동 인민의 착취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또 발생한다는 걸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까지 확대 과장했음에 불과하며, 그게 옳다면, 포베도노스체프 선생 또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스트루베는 그런 지독하고, 부당한 처사에는 잘못이 없다.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스트루베가 인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플레하노프, 견해 차이를 언급했다는 점으로부터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을 어떻게 분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플레하노프는 분명 사회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크리벤코는 인민주의자들을 겨냥한 비판을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으로 여길만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크리벤코가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사조에 대한 스트루베의 견해를 알고 싶어 안달이라면, 스트루베의 글에 나온 아래 단락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러시아 부에다 번역해서 옮기지 않은 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해갈수록, 방금 서술한 인민주의 철학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짐이 목격된 타협할 수 잇고, 또 그걸 추구하는 무색무취 개혁적인 사조로 퇴조하든지, 실질적인 발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그 뒤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이론과 실질적인 결론에 도달하든지, 달리 말해, 더 이상 공상주의에 빠져 있지 않게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

 

크리벤코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타협할 수 있는 사조의 시작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면, 러시아 부의 이론적인 견해들을 흘끗 들여다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해당 잡지는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인식을 인민주의 교리 조각들로 짜맞추려는 한심한 시도를 대표하며, 정치 구상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해서 소생산자들의 살림살이를 개선하고, 회복시키는 걸 목표로 삼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는, 대략적으로, 인민주의가 소부르주아 기회주의로 타락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부가 품은 구상에서 실체인 이민 규제, 토지 임차, 값싼 신용, 박물관, 창고, 기술 개선, 집단 농장, 공동 토지 경작, 나머지 모든 걸로부터, 봉건 지주들의 기관지도 아니고, 어용 신문에 속하지도 않는, 진지하고, 존경받는 자유주의 언론 진영 전반에서, 그런 견해가 참으로 널리 유통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그런 모든 조치들이 필요하고, 절실하고, 시급하며, 심지어 무해하다는 생각은 지식 계급 전체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또 아주 널리 퍼져 있다. 모든 지방 정부의 연구와 보고서들에서 나온 서술과 신문 등에서 그런 견해를 마주하게 된다. 이걸 인민주의라고 간주한다면, 그 성공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실로 엄청나고, 명백하다.

 

물론 과거 관례적인 의미에서, 인민주의가 전혀 아니지만, 성공과 엄청난 파급 효과에는 자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를 한껏 고양된 기회주의로 변형시키고, 자유주의와 통합시켜서, 오로지 소부르주아 이익만을 대변하도록 하면서, 인민주의 품격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로 얻어진다. 이런 점을 확인하고자, 앞서제시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분화라는 모습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결코 따로 떨어져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며, 단지 반대자들조차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던, 농촌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 무리를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표현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인민주의적인 조치들이 소부르주아를 강화시켜주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 다른 조치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그들 무리 자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도, 보잘 것 없는 임시 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유럽 전역에서도 아주 친절하게 일궈놓았던, 그런 유형에서 비참한 실험으로 그치게 될 운명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예르몰로프, 비테와 같은 제정 정부에 소속된 자들조차 그런 유의 발전에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지를 보낸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이 혁명적인 활동에서 손을 떼고, 계급 적대를 무마시키고자 화해와 통합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실험들을 위한 자금을 기꺼이 대준다. 그렇다면 인민주의를 타락으로 이끈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이론은 아주 탄탄했다. 인민의 삶에서 특수한 방식에 대한 관점에서 출발한 건, 공동체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을 믿었고, 그 이유로, 농민을 타고난 사회주의 전사로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내 생활 현실에 대한 정교환 이론과 확인 작업이 부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특질이라 여겨지는 걸 기초로 한 정치적 구상을 적용시키는 경험도 짧았다. 그래서 이론 발전은 이론적인, 실천적인 두 가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론적인 작업에서는 주로 토지 소유 형태를 연구하는 작업으로 집중됐는데, 인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공산주의에 따른 기초적인 모습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작업에서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방대한 사실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주로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와 관련된 그 자료들은 연구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농촌 경제 상태를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우선 생산 관계들을 추려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믿을만한 사회 과학 상 방법 이론이 부족했고, 다음으로는 수집된 사실 자료들이 농민 경제에 암울한 영향을 미치는 당면한 어려움들과 농민들에 따른 당면 요구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연구자들의 관심은 토지 빈곤, 높은 소작료, 권리 부족, 억압받고 짓밟힌 농민들의 상황 같은 어려움들을 연구하는 데 집중됐다. 모든 풍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고, 연구되고, 설명되어, 한 국가가 계급 국가가 아니라면, 정책이 지배 계급로부터 이해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민 요구에 대한 공정한 토론으로부터 결정된다면, 당연히 그런 어려움들을 제거할 필요성이 수천 번도 더 납득된다. 사회와 국가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걸 믿었던 순진무구한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구체적인 사실들에 완전히 매몰된 나머지, 당면한 어려움들로부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여 있던 경제의 주된 배경과 농촌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는 잊고 말았다. 자연스럽게도, 그 결과는 자신들의 손에 경제를 틀어쥔 계급, 주어진 경제 제도와 공동체 내 사회적·경제적 관계에서 유일하게 버틸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급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게, 곧 토지 빈곤 등으로부터 궤멸된 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거라는 결론이었다.

 

착취를 폐지하기 위한 토대와 버팀목이 되어 줄 제도를 연구할 방향으로 시작됐던, 이론 작업은 그러한 착취 제도로부터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소부르주아 계급 이익을 대변해 줄 계획을 고안해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동시에, 실천적인 혁명 활동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에 대한 믿음은 당연하게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고, 인민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수 많은 원기 왕성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은 같은 과정을 이행하는 데 착수했지만,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농민의 본성이 공산주의적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만 깨닫도록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농민이 아니라, 정부를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결정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활동은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됐고, 그 투쟁은 지식인들로부터만 진행됐다. 때때로 거기에 노동자들이 가담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투쟁은 사회주의 이름 아래 전개됐으며, 인민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고, 오로지 권력을 쟁취함으로부터만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혁명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는 이론을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론은 분명 완전히 신뢰를 잃어갔고, 정부에 맞선 '인민의 의지'의 투쟁은 정치적 자유를 위한 급진주의자들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그 활동 또한 출발점과는 정반대 결과들로 이어졌다. 경우에 있어서도, 급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해 관계만을 대변하는 강령이 나타났다. 엄밀하게 말해서, 과정은 아직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명확한 한계가 정해졌다. 인민주의가 이렇게 전개된 과정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강령이 순전히 농민 경제가 특수한 공동체적인 제도라는 그 신념은 사라져버렸고, 농민 사회주의는 소부르주아 농민의 급진적·민주적 표현으로 변해갔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자들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크리벤코는,

 

'어렴풋이, 무르익어가는 순수 국내산 해파리처럼, 훌륭한 정서들로만 가득 찬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희생이나, 삶에서 지속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만이 생겨났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런 훈계는 뛰어났지만, 어디에 적용되는지를 잘 살펴보자.

 

'지속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의 경우, 짜증나는 사례를 알고 있다. 러시아 남부에 형제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똘똘 뭉친, 몇몇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에게 지대한 관심과 존경을 보여줬고, 농민들을 귀한 손님처럼 여겨서, 과고와 과자를 가져다주고, 그들과 똑같은 접시에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으며, 돈을 빌려주거나, 사례금을 주거나,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돈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편 같은 지역에서는 슈미트라는 젊은 독일인도 살고 있었다. 토지 관리인이라고는 하나 그냥 정원사에 더 가까웠던 그 남자는 어떤 인문주의적인 사상도 지니지 않은 전형적인 쩨쩨한 독일인이었다. 3, 4년이 흐른 뒤, 그들은 갈라져서, 각자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또 20년이 지난 뒤, 그 지역을 다시 찾은 필자는 슈미트 씨가 농민들에게 포도 키우는 법을 가르쳐준 덕분에, 농민들은 연간 75-100루블에 이르는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두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유지하게 됐고, 반면에, 농민에게 친절한 감정만 갖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무엇도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 젊은이들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계산해보면, 앞에서 서술한 사례는 대략 1869-1870년으로, 곧 국내 인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유럽 제도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중요한 '인터내셔널'이라는 걸, 국내에 도입하려고 시도할 무렵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확실히 크리벤코 설명은 다소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줬고, 그래서인지, 크리벤코는 서둘러 유보적인 단서를 달아놓는다.

 

'물론 슈미트가 그 청년들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지역과 주민들에게 좀 더 오래도록, 지속적인 인상을 남겨준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슈미트가 중요한 무언가를 했다는 말도 아니다. 반대로, 슈미트의 행동은 아주 변변찮고,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 없는 우연적인 행동에 불과했지만, 모두에게 확실히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보다시피, 이런 유보적인 설명은 아주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핵심은 모호하다는 게 아니라, 필자가 그 두 활동 유형 사이에서 근본적인 성향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한쪽의 성과 없는 활동을 다른 쪽의 성공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 민주주의자 외관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아주 특징적으로 되게끔 해주는 중요한 핵심이다.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에 대한 말을 들려줬던 젊은이들은 분명 농민들에게 사회적인 삶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염원을 불어넣기를 바랬다. 그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휘저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생기도록 같은 시대 사회에 맞서 농민들이 사회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반면에, 슈미트는 전문가로 그저 타인 일처리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적이 정반대인 두 가지 활동 유형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건물을 무너뜨리려다, 실패한 사람을 그 건물을 보강하려는 한 사람을 비교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이치에 맞는 비교를 하려면, 인민 속으로 들어가 농민에게 혁명 기운을 북돋우려던 젊은 남녀들의 노력이 왜 그다지 성곡적이지 못했는지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농민층이 정말로 노동 인민과 착취 받는 주민들을 대표한다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농민층이 단일한 계급을 이루고 있지 않고, 내부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어서였는지를 조사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과거 사회주의 이론들과 그 이론들ㅇ 데해나 사회민주주의적인 비판을 검토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슈미트 노력이 확실히 필수적이었다고, 입증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인민의 벗에게 열린 자세를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누구든 의심을 품어보라는 거 아니던가. 포도밭에 투자해서 연간 75-100루블의 소득을 올리는 거 보다, 더 필수적인 게 뭘까.

 

크리벤코는 한 명의 농민이 포도밭에다 투자한다면, 고립된 활동에 불과하지만, 어려 명이 투자한다면 공동의 확산된 활동이고, 작은 일거리를 실질적이고, 적합한 노력으로 변화시키려는 활동이라는 걸 계속해서 설명한다. A.N. 엥겔하르트가 자신의 사유지에 인산 비료를 사용한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게 만들었듯이, 이런 민주주의자, 정말로 멋지지 않은가. 하나 더 들어보자. 농민 개혁에 대한 의견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분리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체르니셰프스키는 농민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렇지만, 체르니셰프스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대해 우회적인 표현을 한 바 있다.

 

'내가 여러분의 저녁 식사를 위한 식량을 보호하려는 조치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을 향한 내 친절한 마음 덕분에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한다면, 그런 내 열의는 식량이 여러분, 거고 그렇게 준비된 저녁 식사는 여러분에게 유익하고, 이롭다는 가정을 토대로 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식량이 여러분들 소유가 아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식사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초를 겪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 매겨졌다는 점을 내가 알게 됐을 때, 내 기분이 어떨지 상상해보시라. 내가 그런 불편한 사실들을 알게 됐을 때, 머릿 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효용성을 보장해줄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문제에 골머리를 썩인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일부 사람들이 유리한 조거능로, 소유권을 받게 됐을 되는 상황에서, 먼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들의 소유권 보유에 신경을 쓰겠는가. 식량이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피해만 줄 거라면, 식량을 전부 잃어버리는 게 훨씬 더 낫다. 그게 여러분을 몰락으로 이끌 뿐이라면, 일 전체를 그만두는 쪽이 훨씬 더 낫다.'

 

체르니셰프스키가 시대의 현실을 얼마나 깊이 있고, 훌륭하게 이해했고, 농민들이 지불해야 할 상환금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국내 사회 계급들 간 적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단락들을 별도로 강조했다. 검열에 노출된 언론에서 그런 순수하게, 혁명적인 생각들을 자세하게 설명할 줄 아는 능력에서도 역시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불법화된 저술들에서는 똑같은 내용으로, 글을 에두른 표현 없이 쓴 적이 있다. 특히서문을 위한 서문에서 볼긴 말을 빌려 말했다.

 

'지주들의 정당 손에 농민의 해방을 맡기시오. 그다지 별 차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주들의 정당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할당해주기를 반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차이가 엄청날 거라는 상대방의 언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차이는 별로 크지도 않고, 무의미할 정도이다.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차이는 엄청나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가져가는 거와 그의 수중에 그대로 둔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지만, 물건을 가져가면서 그 사람에게 대금을 치른다면 완전히 똑같은 셈이다. 지주 정당과 혁신주의자들의 구상 간 유일한 차이로는 지주 정당이 더 단순하고, 시간이 짧게 걸릴 뿐이다. 차라리 그 쪽이 훨씬 더 나은 이유도 있다. 불필요한 양식 행위가 줄어든다면, 대부분 농민들의 부담을 덜한다. 돈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사고, 돈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사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땅을 사라고 강요한다는 건, 농민들을 몰락시킬 뿐이다. 토지 상환금을 내라는 건, 사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농민 개혁이 막 도입되고 있던 시대에, 부르주아적인 본질을 이렇게도 명확하게 꿰뚫어본다는 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사람의 비범한 재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당시로는, 이미 국내 사회와 국가가 노동 인민과는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이었던, 사회 계급들로부터 지배되며, 통치되고 있다는 점과 농민층 몰락과 강탈은 사회 계급들로부터 명백하게 미리 결정됐다는 점을 이해하기에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체르니셰프스키는 사회적적인 적대 관계를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는 정부 존재가 노동 인민 조건을 훨씬 더 악화시키는 끔찍한 악마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긴은 계속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농민들은 토지 없이 해방되는 쪽이 더 나을 거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지주들이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거냐 하는 건 말할 거도 없고, 농민들이 해방됐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도 신이 나서 흥분할 만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내생각에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차라리 지주들이 솔직해지면 더 좋겠다.'

 

그리고 여기 '수신인 없는 편지'에서 가져온 단락도 있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라고 말한다. 그럴 만한 힘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힘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럴 만한 힘이 부족할 때, 일에 달려드는 건 소용없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뻔히 보인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글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달려들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스스로 판다해보기 바란다. 그저 일을 그르치고, 결과는 끔찍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국내 봉건 관료제 국가가 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점, 곧 봉건적인 농노 소유주들을 타도할 수 없다는 점과 끔찍한 무언가로부터,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의 이해 관계 사이에서 보잘것없는 타협만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협을 위해서는 안위와 자유라는 환상을 동원해서, 농민들을 기만하는 게 필요하며, 실제로는 농민들을 몰락으로 이끌어 지주들에게 완전히 팔아먹을 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체르니셰프스키는 개혁에 저항하고, 맹렬하게 비난해댔고, 그게 실패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정부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 사이에서 줄타기에 꽁꽁 묶여 추락하면서부터 국내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길로 올라서기를 바랬다. 그러나 체르니셰프스키의 훌륭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지난 30년 간 역사가 모든 경제적·정치적 환상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여준 오늘날에도, 현재 우리 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인민 생산에 대한 허가로부터 여기며, 거기에서 노동 인민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찾을 수 있는 증거를 끌어낼 궁리를 한다. 되풀이하지만, 농민 개혁을 향한 민주주의자들의 태도는 민주주의자들이 얼마나 뼛속 깊이 부르주아로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이다.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너무나 많은 걸 잊어버렸다. 대목에서 비교를 위해, 1872,조국 연보를 들어볼까 한다. 앞서 이미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이 있은 뒤, 10년 간 국내 사히가 이룩한 자유주의에 있어,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를 감춘 성공을 다룬,금권 정치와 토대의 몇몇 구절들을 인용한 바 있다.

 

같은 글에서 크리벤코는 예전에는 개혁에 관해서 징징거리고,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사람들을 가끔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쓴 적이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질서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거다. 그리고 필자는 계속해서 어떻게 문학 자체가 금권 정치의 기관이 되어, 민주주의를 빙자해서,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와 열망을 옹호하게 되는지를 보여줬다. 같은 주장을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도록 하자. 크리벤코는 개혁이 가져다준 새로운 질서에 모두가 기뻐한다는 점과 새로운 질서의 명백히 적대적인 부르주아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점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중은 자유주의가 단지 노동 인민 대중의 불리한 희생을 당연하게 대가로부터 한 취득의 자유를 가려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벤코는 반대하고 나섰다. 크리벤코의 주장에서 가치가 있는 건, 사회주의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반대한다'는 점 그 자체였다. 금권 정치가 민주주의로부터 가려진 데에 대한 반대가, 해당 잡지에서도 전반적인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 개혁 안에 부르주아적인 특성들과 요소, 이해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과 국내 지식 계급 및 국가의 계급적인 성격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은 국내 자본주의를 위한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집단의 존재를 느끼고,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내 사회 내의 적대를 감지한조국 연보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인민주의자들은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했던 대의명분 아래에서 투쟁을 벌인 셈이었다.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적대적인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적대적인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걸 만들어낸 사회 구조 자체와 싸우기를 바랬다. 그래서조국 연보는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시각에서 볼 때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를 망각해버렸고, 한 국가 신성 국내 순혈 부르주아들이 민주주의라는 외피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 대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오늘날 인민의 벗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관계에서도 반동적인 이유이다.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뿐만 아니라, 투쟁이 아닌 유화적인 고양 활동만을 말한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 1860년대, 민주주의자로 금권 정치를 대표했던 말끔한 눈썹으로, 국내 자유주의자가 1890년대로 접어들어, 자신의 눈썹이 시민들의 근심으로 뒤덮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가이기를 그만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현재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대규모 획득의 자유, 곧 거대한 신용과 거대한 자본, 거대한 기술 개선을 획득할 자유가 단지 소규모 신용과 소규모 자본, 소규모 기술 개선을 취득할 자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유주의적,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이기를 멈추었던가.

 

거듭 말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한 국가 질서에서 급진적인 변화나, 급진적인 시각 변화의 영향에 따라, 자신들의 견해를 바꾼 게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저 잊어버렸을 뿐이다.

한때는 자유주의자들의 선배들을 불건전하고, 순진무구한 이론, 현실에 대한 공상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으로 만들었던 유일한 특성마저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모든 시간 동안 배운 게 무엇도 없다. 국내 현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분석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30년 간, 국내 정치 역사는 그들에게 많은 걸 가르쳤어야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1860년대, 당시에 봉건 지주들의 권력은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지주들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주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그래서 슬그머니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고개를 쳐들었다. 발전, 과학, 우수성, 불의에 맞선 투쟁, 인민의 이익, 인민의 양심, 인민의 힘, 등등에 관해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들이 오늘날 특수한 불황의 시기에도 급진적인 불평불만꾼들과, 자유주의 입담꾼들이 사교 살롱과 기념일 만찬, 잡지와 신문에서 토해내고, 여기저기 넘쳐대는 미사여구가 바로 그렇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아니하더라도, 타당한 기준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걸 입증했다. 당시에도, 국내에서 공개적인 게급 투쟁에 따른 밝은 빛이 비춘 건 아니었으나, 빛은 조금보다는 더 밝아졌고, 그래서 계급 투쟁이라는 개념은 조금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현실을 해명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쪽을 택했던 노동 인민의 관념론자들조차도, 자유주의는 금권 정치가 두른 외피일 뿐이며, 새로운 질서는 곧 부르주아 질서라는 점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봉건 지주들이 무대에서 제거된 덕분에 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시에도, 여전한 단순 폐해들로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았고, 비교적 순수한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가 목격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민주주의자들은 금권주의적인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 구조 아래에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과거 봉토 제도와 비교해볼 때도, 새로운 삶의 체계가 갖는 발전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 체제가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인 역할 역시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와 사람됨의 체제에 코웃음을 치는 데 그쳤을 뿐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우연이라고 상상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적인 관계가 인민적인 제도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 기대했다. 그 뒤로, 역사는 민주주의들에게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을 보여줬다. 개혁으로부터 터무니 없는 이익이 손상됐을 뿐 완전히 궤멸되지 않은 봉건 지주들은 한동안 되살아나, 부르주아적인 사회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줬고, 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순진무구한 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진전시키고, 변형시키는 대신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허우적대다가 자유주의자들로 퇴보한 다음, 이제는 칭얼거리는 자신들로부터, 곧 자유주의자들의 이론과 강령들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 전체로부터 공유된다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점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하고, 악랄한 반동 형태로 보여줬다. 사람들에게도 아주 인상적인 교훈을 남겼고, 인민의 특수한 삶의 양식과 인민의 사회주의적인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우연적인 성격에 대한 옛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은 너무나 명백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 앞에서 펼쳐진 현실들을 똑바로 쳐다본 뒤, 국내에서는 부르주아와 소멸 직전의 봉건적인 관계 말고는 다른 어떤 사회 경제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노동 계급 운동을 거치지 말고는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순진한 환상은 소부르주아 발전으로 실질적인 온건한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오늘날에도, 노동 인민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처하고 나선,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은 분명 반동적이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현재 국내 사회적·경제적인 적대 관계를 모호하게 하고, 향상, 개량 등으로부터 모든 걸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치들로부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만, 그래서 화해와 통합을 이뤄낼 수 있듯이 주장한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국가를 초계급적이고, 착취 받는 인민에게도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그러히게 적합한 존재로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마지막으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 이론들은 단순히 투쟁의 필요성과 곧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 스스로 절박한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신들의 모든 걸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노동자들은 걱정할 필요도 없다.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기술자 한 사람이 거기에서,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기 위한 계획을 거의 완벽하게 구상했나 보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소부르주아 사상 및 이론들과 단호하고, 완전하게 결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회주의 투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주요하고도, 쓸모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부르주아 사상과 단절을 주장했지, 인민의 벗들이나, 인민의 벗의 사상과는 단절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무언가와는 더욱이나 아예 단절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사상들, 낡은 국내 농민 사회주의 사상들과 전체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낡은 사상의 대리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성장에 겁먹은 나머지, 시작한 반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농민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 사상들을 유달리 풍부하고, 선명하게 표명하도록 유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상들을 동시대 사회주의 및 국내 실상과 비교해보면, 사상들이 얼마나 시대에 뒤처졌고, 그리고 완전한 이론적 토대의 흔적을 모조리 상실한 채로, 한심한 절충주의와 가장 평범한 기회주의적인 고양 강령 단계로까지 전락했는지를 놀랄 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그게 낡은 사회주의 사상 전반의 과실이 아니라, 누구도 사회주의자로 분류해주지 않는 문제의 신사 양반들의 잘못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상당히 불합리하다. 그런 낡은 이론들은 퇴화되는 게 불가피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써왔다. 특히 그런 신사 양반들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최대한으로 줄이고, 낡은 국내 사회주의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신조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공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런 신조들을 부정확하다거나, 부적절하게 규정한다든지 말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는 걸, 사회주의자들이 알아낸다면, 아주 겸손한 요청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신사 양반들, 부디 여러분이 직접 밝히고, 제대로 충분히 설명해주시오."

 

정말이지 사회주의자들과 논쟁할 기회를 갖는 건, 사회민주주의자들만큼 반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이 직접적으로, 끈질기며, 단호한 도전을 해오지 않는데도, 그들의 논박에 답하는 걸 기꺼워할 리가 있는가. 그렇다구 신물 나는 진부한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와 속물적인 훈계들을 읽고, 또 읽어, 억지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불필요하다고 봐야 할까. 확실히 오늘날 그런 사상들이 옳다는 걸 입증하고, 자세하게 설명할 임무가 오로지 신사 양반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이 우리 책임은 아니다. 또한 사회주의와 관련된 소부르주아 사상들과 단절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데에도 여러분이 주목해주기를 부탁드린다. 검토한 소부르주아 이론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한 무조건 반동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속에는 사회주의적인 부분도 전혀 없다는 걸, 곧 이론들은 모두 노동 인민 착취를 해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버렸고, 따라서 노동 인민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도 없으며, 사실상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 관계를 반영할 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향한 우리 태도는 달라야만 하고, 그래서 소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지들의 구상에 대한 노동 계급 태도는 어떠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해당 질문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적인 성격이 고려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보통의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내세우는 한, 다시 말해, 중세 시대와 농노제 존속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 있어서 발전적이다. 반면에, 또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싸우고, 한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으로부터, 부르주아 노선에 따라 지연시키고, 되돌리려 애쓴다는 점에서 가히 반동적이다. 농민들을 감독하고자, 여타 수 많은 기획들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분여지 양도 불가 같은 식으로, 반동적인 요구들은 노동 인민을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대개 가려졌지만, 실제로는 물론 노동 인민들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며, 해방을 향한 노동 인민 투쟁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소부르주아적인 구상의 두 가지 측면들은 서로 엄격한 구분이 이뤄져야만 하며, 소부르주아 이론들이 어쨌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반동적인 측면과 맞서 싸워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들이 가지는 민주적인 측면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긴 하지만, 소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의 구상 속에 민주주의를 포함시키기까지 막아서는 건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민주주의를 훨씬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론적인 상투적 요소들을 언제나 형성해온 세가지 주요한 논지들, 곧 토지 빈곤, 높은 지불금, 당국 폭정을 언급한 바 있다.

 

 

같은 악행들의 폐지 요구에는 사회주의적인 측면마저 전혀 없다. 그건 강탈과 착취를 조금도 해명해주지 못하며, 그런 악행들의 제거는 자본으로부터 노동 억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억압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세 찌꺼기를 없애주며, 자본을 상대로 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투쟁을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인해, 민주적인 요구로부터 노동자들의 가장 활발한 지지를 얻게 된다. 일반적으로, 지불금과 세금 문제는 소부르주아만이 특별한 중요도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농민들이 내는 지불금은 많은 측면에서 볼 때, 농노제 유물일 뿐이다. 토지 상환금은 즉시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어야만 한다. 농민들과 소도시 사람들만이 지불하고, 상류층에게는 면제되는 세금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제적·정치적인 침체를 야기하는 중세적인 관계에서 유물들을 폐지하라는 요구에 언제나 지지를 보낸다. 토지 빈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고 말이다. 관련해서, 그런 불평의 목소리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농민 개혁에 따른 토지 절취 허용은 분명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을 강탈하도록 하면서부터 엄청난 반동 세력인 지주들에게 직접적인 농민에게서 땅을 탈취하고, 간접적으로 분여지를 구분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이바지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서 빼앗아간 토지를 농민들에게 즉각 되돌려주고, 봉건 제도 및 전통 보루인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를 아주 필사적으로 주장한다. 토지 국유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는 이미 한 국가에서도 형성된 자본주의 농업 관계를 더욱 급속하고, 풍부하게 번창시킬 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인 측면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토지 귀족 힘을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조치로는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이 수탈되고, 착취 받는 원인으로는 농민들의 부족한 권리를 지목할 수 있는 건, 유자코프와 V.V. 보론초프를 따르는 자들만이 유일하다. 당국으로부터 농민 억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단순한 억압 이상이다. 농민들을 토지 귀족에게 복종하는 게 마땅한 천한 무리로 취급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시민으로 일반적인 권리는 토지 귀족에게 이주와 같은 특별한 호의로만 베풀어질 뿐이며, 농민들이 노역장 수용자들이라도 되는 양, 하급 관리조차 거드름을 피우며, 농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의 시민적인 권리에 따른 완전한 회복과 모든 귀족 특권으로부터 완전한 폐지, 농민에 대한 관리 감독 철폐, 스스로 일을 직접 알아서 할 수 있는 농민들의 권리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러야만 하며, 자신들의 활동에서 민주주의의 거대한 중요도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에서 중세적이고, 절반은 봉건제적인 유물들은 서구 유럽과도 비교해봤을 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들을 억압하는 멍에가 되어, 모든 계급의 정치 사상에 따른 성장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봉건제도들과 절대 왕정, 사회적인 신분제, 관료 체제에 맞서는 투쟁이 노동자들에게도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제도들이 얼마나 반동적인지, 자본으로부터 노동 탄압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노동 인민들에게 어떤 모멸적인 압력을 행사하는지, 어떻게 자본을 중세적인 형태로 계속 머무르게 만드는지, 노동 착취에 대한 한 현대 산업 형태에는 못 미치지만, 해방 투쟁에 지독한 난관을 심어놓는지를 노동자들에게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반동의 기둥들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성공적인 투쟁을 벌일 수는 아예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부르주아 계급들이 존재하는 한, 국내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언제까지나 짓밟히고, 주눅 든 존재로 영리하고, 끈기 있는 저항 대신에, 자포자기식으로 볼멘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남아, 노동 계급의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지지는 영원히 까마득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절대 왕정과 반동적인 사회 신분 및 제도들에 맞서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과 나란히 싸우는 게 노동 계급의 직접적인 의무인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런 의무를 명심시켜줘야만 하며, 그런 제도들 모두에 맞서 싸우는 게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한 투쟁을 촉진할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는 점을 노동 계급들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을 한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또한 노동 인민들의 주적, 곧 태생적으로는 순수하게 민주적이었으나, 특히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을 억누르고자, 반동들과 손 잡고, 노동 계급 운동 출현을 더욱 한층 방해하는 경향이 있는 자본을 상대로 한 승리 길을 열어주는 전면적인 민주적인 요구들의 성취가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인식도 심어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로한 내용들로부터, 절대 왕정과 정치적인 자유를 향한, 그리고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있는 정치적인 자유를 얻고자 모든 혁명 집단들의 연합과 동맹을 지향하는 경향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를 충분하게 정의내렸다. 경향은 다소 독특하고, 특징적이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건, 여러 점에서 일치하는 명확한 계획을 지닌 하나의 집단이나, 여러 집단들로부터 동맹을 위한 제안이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동맹 문제가 각각 따로 떨어진 경우에 맞게 연합한 집단들의 대표들로부터 해결되는 구체적인 문제가 됐고, 특수하게 연합하려는 경향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실제로 존재하고, 과거로부터 표류해서 아직 새로운 곳에 정박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 절대주의 체제에 맞선 전사들이 여태껏 토대로 삼아왔던 이론은 명백히 무너져내렸고, 투쟁에 필수적인 연대와 조직ㅇ르 위한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합 세력과 동맹 지지자들은 그런 이론을 창조해내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축소시키면서, 사회주의적인 문제와 비사회주의적인 문제를 포함한 다른 모든 문제들을 얼버무려 넘기는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통합을 향한 첫 시도에서, 그런 순진한 오류는 필시 밑바닥부터 뒤집히게 된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특징적인 점은 연합의 경향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가 정치적으로 봤을 때, 급진 민주주의로 전화하는 과정, 앞에서 개괄하려고 했던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된 기치 아래 모인 모든 비사회주의적인 혁명 집단들의 연합은 오직 국내 예외주의라는 낡은 편견을 끝장내고자 민주적인 요구들을 담은 지속할 수 있는 강령이 마련됐을 때만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런 민주적인 정당을 설립하는 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유용한 발걸음이 될 거라는 걸 믿는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인민주의 활동은 더욱 발전시켜, 모든 편견과 신화를 뿌리째 뽑고, 사회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묶어내어 다른 집단들로부터 민주적인 정당 설립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노동자들에 따른 독자적인 조직화로부터 별도 노동 정당을 세우는 게 필수적이라 여기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물론 그런 정당화 연합할 수는 없겠지만, 노동자들은 반동적인 제도들에 맞선 민주주의자들의 그 어떤 투쟁도 아주 강력하게 지지한다. 인민주의가 가장 평범한 소부르주아 급진 이론으로 타락한 인민의 벗들이 아주 두드러진 증거이다. 사실은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인 성격과 전체 노동 인구 해방을 위한 전사로부터 국내 노동자의 역사적인 임무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해명하지도 않고,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고만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시킨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 관념론자들까지 정치적인 자유에 호의적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덕분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 경제 이론을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국냉서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회적인 경제의 부르주아적인 구상으로부터 설명되지도 않고, 토지 빈곤, 상환금, 또는 당국 폭정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된다면, 가치 형태와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역할을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이론이 완전히 자리 잡은 공장 노동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인민 대중은 말할 거도 없고, 노동자와 교옹주 관계조차 설명해줄 수 없다면, 계급 투쟁 이론을 노동자에게 설명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국가 인민들이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매개체로부터 공산주의에 다다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마르크스 경제 이론과 당연한 귀결인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를 열어젖히는 사람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분명 그런 조건에서 노동자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하는 발전적인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불구덩이에서 밤톨을 끄집어내라고 요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자유가 주되게는 부르주아 계급 이익에 기여할 뿐, 노동자들 처지를 개선시켜주지 않을 거라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노동자 투쟁을 벌이기 위한 조건을 용이하게 해준다. 자신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혁명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확신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 내에서 계속해서 소요를 일으키는 데 대한 반대 수준에서도 일러둔다. 그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실천과도 모순되며, 사회주의 노동 정당을 조직할 과업으로부터 노동자들을 흩어놓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 계급 적대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고, 농노제로부터 억제된 시점에서도, 농노제가 지식 계급 전체 일치된 반대 투쟁을 불러오면서부터 지식 계급 내에서도 특수한 민주적인 측면이 있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서 간극은 전혀 깊지 않다는 환상을 빚어내는 시점에 떨쳐 일어난 건 당연히 잘못이었다. 이제 경제 발전이 상당히 진행된데다, 에전에는 국내 자본주의 토대를 부정했던 사람들조차도,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 진입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런 환상조차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지식 계급의 구성은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접어든 사회 구성만큼이나 아주 뚜렷한 윤곽을 취한다. 오늘날 사회는 자본가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반면에, 지식 계급 사이에서는 급속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는 출세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심부름꾼 무리가 방식을 정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식인 은 그저 자족하면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점들을 부인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걸 강하게 강조하고, 부도덕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비난을 가하고, 틀렸다는 걸 입증한 뒤에, 부숴 없애려고 애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자신이 부르주아적인 걸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순진한 노력은,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인민의 몰락과 빈곤, 실업, 대중 기아가 머지않았다는 말로부터, 부르주아들을 겁먹게 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어리석다.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이론가들의 같은 시도는 강물에 내던져진 형벌에 처한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도를 넘기 시작한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지식 계급은 발전이니, 과학이니, 진실이니, 인민이니, 하는 무수한 표현들을 쏟아냈고, 불협 화음, 우울, 낙담, 무관심이란 찾아볼 수 없이, 민주주의로 온 심장이 불타올랐던 1860년대가 지나가기를 비통해 한다.

 

그들의 단순한 특징이 된, 신사 양반들은 1860년대만 하더라도, 의견 일치가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당시에는 존재하다가, 이제는 사라져 되돌아올 수 없게 된 물질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때는 농노제가 모두를 똑같이 억눌렀고, 약간의 돈을 모아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농노 관리인이 있었으며, 지대를 받아내고, 일일이 간섭하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지주를 증오했던 기업형 농민이 있었다. 무산화한 장원 농노와 빈곤에 빠진 농민은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갔으며, 상인 제조업자와 노동자, 수공업자와 하청인에게 고통을 가져다줬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관련한 유일한 끈은 농노제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이었다. 와중에도 그러한 의견 일치 너머로 가장 날카로운 경제적인 적대가 시작됐다. 그 적대가 너무나 거대하게 발전한 오늘날에서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려면, 달콤한 환상에 얼마나 흠뻑 젖어 있어야만 하는 걸까. 상황이 투쟁을 요구하는 시대에도 의견 일치가 존재하던 지난 날로 돌아가고 싶어 눈물 흘리는 대신에, 기꺼이 또는 마지못해 부르주아 계급의 신하가 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서도록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러분이 인민 이익에 대해 그럴듯하게, 치장된 말을 믿기를 거부하고,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본다면, 다양하고, 순수한 발전적인 조치들로부터 인민들의 경제를 개선하고, 지원하고, 회복시키려는 꿈을 꾸는 철저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사람들은 지배적인 생산 관계 아래에서 그런 발전적인 조치들이 끼칠 수 있는 유일한 효과로는 대중 무산화를 더 한층 심화시킬뿐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계급적인 성격을 드러내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부터 한 국가 소생산자들 역시 소부르주아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고하게 해준 데 대해 인민의 벗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의 벗들은 오랫동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낡은 환상과 신화들의 소멸을 불가피하게 재촉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이 이론들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히고, 남용하고, 더럽힌 나머지, 그걸 간직해온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의 벗들을 수정하거나, 모두 포기하든지 아니면 신사 양반들이 독점해서 사용하게 내버려두든지, 선택해야 하는 가혹한 궁지에 처해 있다. 인민의 벗들은 부유한 농민들이 개선된 농기구를 구입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고, 근엄하게 전 세계에 선포하고, 카드 놀이에 싫증난 사람들을 따듯하게 맞아줘야 한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확언한다. 그리고 같은 어조로부터, 인민 제도와 지식 게급을 말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잘난 체하는 과장된 표현들로부터 드넓은 이상과 삶의 문제들에 따른 이상적인 치유를 입에 올린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환상을 포기하고, 희망으로 바라는 국내 발전이 아닌 실질적인 발전, 그리고 있음직한 사회 경제적인 관계가 아닌, 현실적인 관계 지지를 추구하기 시작할 때에만 내실 있는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의 이론적인 활동은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서 경제적인 적대와 연관되고, 연속적인 발전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로 향해야만 한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은 정치 역사와 법률 제도의 특성, 또는 기존에 확립된 이론적인 편견으로부터 언제나 감춰졌던 적대를 드러내주어야만 하며,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 현실을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나타내주고, 현 체제에서는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과 경제 발전으로 표현되는 현 체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내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에 기초해서, 같은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요구에 걸맞는 해답을 제공해주어야만 하며, 그게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저항적인 사고가 깨어날 때마다, 반드시 사회민주주의 바다로 인도하게 된다. 같은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어, 더 큰 진전이 이뤄질수록 사회민주주의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현 체제에서 가장 교활한 수호자들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상에서 각성을 막을 수는 없다. 현 체제 자체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생산자들의 가장 극심한 강탈과 프롤레타리아 및 예비군의 끊임없는 성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부에 따른 진척과 생산력에 따른 거대한 발달,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와 나란하게 병행된다. 해당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기까지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그걸 해내고야 만다. 모든 계획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과정에 따른 엄밀한 공식화를 요구하는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유물론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유물론 사상들을 채택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현실을 보장한다. 사회민주주의 성공은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을 마구 휘저어놓아,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했듯이, 그들이 펴내는 월간지들도 더 이상 따분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인 활동이 필요하고, 중요하면서도, 방대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사회민주주의 활동이 실천적인 활동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결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민주주의 이론들이 완성될 때까지 사회민주주의 활동을 연기해야 할 이유는 많지도 않다. 사회학의 주관적인 방법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공상적인 사회주의 추종자들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한 국가를 위해 현재 발전 경로와는 다른 경로를 추구한다고 여긴다면, 당연히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그 다른 경로를 알아내고, 갈리킬 때에만 실천 활동을 할 수 있고, 거꾸로 말하면, 경로가 포착되고, 표시되기만 하면, 실천 활동은 그냥 끝을 맺는다. 그때부터는 새롭게 알아낸 다른 경로를 따라 조국을 안내할 사람들의 역할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발전에서 실질적인 길을 가로막고서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적들에 맞서, 현실 투쟁을 벌이는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이념적인 지도부 역할이라고 할 때는,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은, 독일 연륜 있는 사회민주주의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로부터 적절하게 표현한 말로 수렴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앞서 말한대로, 이론적인 활동 없이는 사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듯이, 이론 활동을 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결과를 확산시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돕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라는 과업 제시는 사회주의자 집단들이 아주 흔히 겪는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최고 이론이자, 유일한 기준이 실제적인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과 일치하는 곳에서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있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조직화를 촉진하는 건, 임무가 되고, 따라서 지식 계급 내부에서 특정한 지도자들을 내오기를 불필요해질 때, 역시 종파주의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많은 이론적인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 활동 방식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집단이 생겨난 이래로 변함없이 유지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국내에서 노동 계급 운동 조직화와 발전을 촉진하고, 운동을 현재와 같이 지도 사상도 없이 간헐적으로, 시위, 봉기, 파업을 벌이는 수준에서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국내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투쟁과 착취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되찾아오는 활동, 노동 인민 억압에 기초한 사회 체제를 폐지하려는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또한 같은 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건, 국내 피착취 노동 인민의 유일하고도, 자연스러운 대표는 국내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통된 확신으로부터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건, 소멸 직전에 있는 농노 경제에 따른 자투리들을 무시한다면, 국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실상 어디에서나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생산 대중에 대한 착취는 소규모로 흩어졌고, 덜 발달됐지만,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대규모이며, 사회화됐고, 집중됐다. 생산자들이 받는 착취는 여전히 중세적인 형태와 많은 다양한 정치적·법적·관습적인 덫, 술수, 장치들에 얽혀있기 때문에, 노동 인민과 노동 인민의 사상가들이 노동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 본질을 파악하기를 방해하고, 체제에서 벗어날 방안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반대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전혀 혼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순수한 형태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완전히 발전해 있는 상태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억압 당하며,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직접적인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물질적인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계급에 맞선 전쟁,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짓밟는 계급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될 수밖에는 없다. 바로 공장 노동자가 착취받는 인민 대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인민 대표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서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고자, 관점들로부터 인민 대표를 열광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필요한 건, 인민 대표에게 자신의 위치를 이해시키고, 인민 대표를 억압하는 체제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와 억압하는 체제에서는 계급 적대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점을 이해시킬 뿐이다. 자본주의적인 관계에서 일반적인 체제서 공장 노동자의 같은 지위로는 공장 노동자를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한 전사로 만든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 따른 높은 발전 단계인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 계급 해방 투쟁에 필요한 물질적인 조건과 사회 세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형태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물질적인 조건이 부재한 다른 모든 부문에서는, 생산이 수천 개 조그마한 사업장들로 산재됐고, 대부분 착취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그마한 사업장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착취받는 사람들이 맞서 싸워야 할 바로 그 부르주아 체제에 묶여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 세력이 발전하는 걸 지연시키고, 방해한다. 흩어졌고, 개별적이며, 사소한 착취는 노동 인민을 하나의 지역에 묶어놓은 채로, 노동 인민을 분리시키고, 노동 인민들이 계급적인 연대에도 눈을 뜨는 걸 막으며, 억압이 몇몇 특정 개인이 아닌, 전체 경제 체제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이뤄지는 노동 인민의 단결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반대로, 대규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거 사회와 특정 지역 및 특정 착취자와 모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슬 고리를 끊어놓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노동자들을 사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이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관ㅅ미과 활동을 집중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노동 계급이다. 노동 계급에 따른 선진적인 대표자들이 과학적인 사회주의와 국내 노동자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에 통달할 때, 같은 사상들이 널리 확산될 때, 그리고 현재 드문드문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경제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전화시키도록 안정적인 조직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형성될 때, 바로 그때 모든 민주주의적인 분파들로부터 최선두에 선 국내 노동자들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열려 있는 정치 투쟁이라는 곧은 길을 따라,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하게 국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승리로 이끌게 된다.

 

1894, 전반기

 

부록

 

추가 도표는 본문에서 언급한 24곳 농가 예산에 관한 통계를 담고 있다.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전형적인 농가 24곳 구성과 예산 요약

 

표에 대한 설명

 

1. 첫 번째 21개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22번 세로줄은 호밀, , 귀리와 보리, 기장과 메밀, 기타 곡물, 감자, 채소, 건초에 관한통계 초록에 세로줄들을 합했다.

매조밋 겨와 짚을 제외한 곡물로 벌어들인 수입이 어떻게 산출됐는지는 본문에서 설명한 바 있다. 24번 세로줄은 말, , , 돼지, 가금류, 가죽과 양털, 등 지방과 고기, 유제품, 버터(우락)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25-29번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30-34번 세로줄은 호밀, , 기장과 메밀, 감자, 채소, 소금, 버터, 지방과 고기, 생선, 유제품, 보드카(화주)와 차에 지출된 비용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35번 세로줄은 비누, 등유, 양초, , 식기에 지출된 비용을 제시한통계 초록세로줄들을 합했다.

 

2. 8번 세로줄은 임차 토지와 분여지에서 경지 규모를 데샤티나로 합산해서 얻었다.

 

3. 수입원과 지출 분포에 관한 세로줄에서 맨 아래 줄 수치는 수입과 지출에 따른 금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25번에서 28번 세로줄, 그리고 37번에서 42번 세로줄에서는 소득 또는 지출이 완전히 화폐로 환산됐다. 금전적인 부분은 총소득에서 가구 별로 소비한 금액을 제하는 방식으로 산출됐다.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내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완전히 낯설다는 논지를 니콜라이 온에 대한 비판 기초로 삼았다. 아주 올바랐다. 크리벤코와 같이 한 편의 글을 스트루베의 사고 체계 판단 토대로 삼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는 않아서, 스트루베가 내놓은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며, 따라서 스트루베 글 전체가 아닌 일부 진술들만 지지할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부분은 어쨌든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니콜라이 온의 근본적인 오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오류를 수정한다는 건, 니콜라이 온의 이론적인 명제와 연구들로부터도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적인 결론을 충분하게 도출해낼 수 있도록 한다. 계급 투쟁을 간과한다는 건, 실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드러내며, 아주 열심히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신봉자 행세를 해왔다는 점에서, 니콜라이 온은 더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계급 투쟁 원칙이 니콜라이 온 사고 체계 전체에서도 중심축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니콜라이 온이 국내 역사와 현실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부분만을 예외로 한 채, 마르크스 이론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이 한 국가 체제를 설명해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이론을 수정해서, 적대적인 관계와 계급 투쟁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별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생각해내야만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과 자본주의는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어쨌든 니콜라이 온은 마르크스주의에서 A만 받아들이고, B는 거부하려면, 명확한 단서와 함께 그 이유를 설명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은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투쟁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로 인해, 사회에서 사회적·정치적 삶의 모든 실제 내용들을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걸 성취하려 할 때마다, 실현되기 힘든 소망들의 영역에서, 불가피하게 맴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는 없다. 따라서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 니콜라이 온을 가리켜서, 공상주의자라고 결론내린 건, 지극히 옳았다. 또한 사회와 국가, 곧 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호소한다는 건, 사회주의자들에게 혼란만 안겨주어, 그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최대 적들을 자신들의 동맹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해방을 위한 노동 투쟁을 강화하고, 명확하게 해서, 조직화하도록 돕기보다는 오로지 방해만 할 뿐이다. 따라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이기도 했다.

 

스트루베 글을 언급했으므로,러시아 부, 6에 실린 니콜라이 온 답변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가 인구보다 느리게 증가하고 있다는 자료를 인용하면서, 다음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임무의 달성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 서구 유럽이 따랐고, 또 여전히 따르고 있는 거와는 구별되는 조국 발전 경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천 배 더 올바른 이유이다.' 그리고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역사적인 임무가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마을 공동체에 적대적인 경제 동향인 곧 자본주의가 통합의 의미가 아주 특징적인 서구 유럽이나, 특별한 영향력을 지니며 나타나기 시작한, 북아메리카와는 조금도 달리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 기반 자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서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저 유명한 V.V. 보론초프로부터 고안해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에서 아주 표준적인 형태였다. 인민의 삶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문제를 국가적인 사안으로 인식했던 정부 관리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그 임무를 달성하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라는 거다. 영리한 주장이 지닌 다른 모든 미덕들은 제쳐놓고서라도,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로부터 바로 그 임무를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 되는 거짓되고, 편협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니콜라이 온은 분명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신사 양반들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편협한 이해로부터, 합법적인 언로가 봉쇄된 죽은 사람처럼 중상모략에 시달리고만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지켜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은 노동을 사회화하는 같은 때에, 바로 그 과정이라는 기제로부터 노동 계급을 규율하고, 단련시키고, 조직화해냈다는 점에 있다. 곧 자본주의에 따른 작동은 투쟁을 위해서도 노동 계급을 훈련시키고, 노동 계급의 반란을 조직화냈고, 노동 계급을 단련시켜 빼앗은 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도로 되찾아오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며, 소수 강탈자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빼내와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도록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공식화한 방식은 바로 이랬다. 물론 여기서 공장 노동자들 숫자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 집중과 노동 사회화만을 말했고, 그런 기준들은 공장 노동자들 숫자와는 아무런 일맥상통하는 지점도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예외적으로 해석한 자들은 잘못 해석해서는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공장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하는 걸 가리키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도 그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곧 공장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공장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고, 감소한다면, 자신의 역사적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식 계급이 조국을 위한 다른 발전 경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내 지식 계급은 그렇게 다른 경로를 추구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식 계급은 수십 년 동안 그걸 찾아 헤매며, 자본주의는 실업과 위기로 이어질 뿐이기에, 잘못된 발전 노선이 라는 걸 입증하려 전력을 다해왔다. 지식 계급은 1880년에 위기를 맞이했고, 1893년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며, 만사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상 그 경로를 벗어날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크릴로프, 고양이와 요리사우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들은 체 만체 계속 먹기만 한다.' 물론 만사가 잘못 돌아가면 더 이상 엄청난 이윤을 거둘 수가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부르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자본에 힘입어 새로운 철도 건설에 정력적으로 매달린다. 반면에, '우리에게' 만사가 잘못 돌아가는 이유는, 예전의 위치에 있을 때, 우리가 이미 인민들을 감쪽같이 골라냈고, 이제는 상인 자본만큼 부유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산업 자본 영역으로 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백 퍼센트의 이윤을 생산해내는 본원적인 축적을 여전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농민들 가운데 부르주아로부터 분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유럽 러시아 동부와 북부 국경 지대로 달려가게 된다. 지식 계급은 모두를 감지하고, 우리가 다시 추락으로 향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협박한다. 그리고 새로운 추락이 실제로 우리를 덮친다. 무수히 많은 소자본가들이 대자본가들로부터 짓밟히고, 무수히 많은 농민들이 더욱 부르주아 계급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는 농업 바깥으로 내몰린다. 빈곤과 실업, 굶주림이라는 바다는 엄청나게 커져가고, 떳떳한 양심을 지닌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예언을 들먹이며, 해외 시장 부재를 자본주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로 들이대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들은 체 만체 계속해서 먹기만 한다.' 지식 계급이 새로운 경로를 찾아나서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식민지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거대한 계획들을 벌이고, 그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스스로 시장을 창출해, 부르주아 체제 매력을 신생국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이례적인 속도로 산업과 농업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해내며, 생산자 대중들을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실업자 대열로 내동댕이친다. 사회주의자들은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공장 노동자들 수가 느리게 증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불안정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데 스스로를 계속 가둬놓는건가. 유치한 생각에 대해 논하기 앞서, 니콜라이 온이 비판한 스트루베 글 가운데 일부 단락을 몹시 부정확하게 인용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니콜라이 온은 인구 직업 구성에 있어 러시아와 미국 차이를 지적했을 때, 러시아 경우 유급으로 고용된 인구 전체 80%가 농업에 관계된 일을 한다고 여겨지지만, 미국에서는 그 비율이 44%에 불과하다. 니콜라이 온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이 80%44% 사이 차이를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거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임무라는 단어는 아주 부적절하다. 그러나 스트루베 생각은 명확하다. 곧 국내 자본주의 발전이 농촌 인구를 감소시키겠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일반 법칙이라는 점을 니콜라이 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같은 이론에 반박하려면, 니콜라이 온은 첫째로, 자신이 자본주의의 그런 경향을 간과하지 않았다거나, 둘째로, 자본주의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신에 니콜라이 온의 추산에 따른 1%의 한 국가에서 공장 노동자 수에 관한 통계를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스트루베는 언제 공장 노동자를 말했었나. 그럼 국내 인구 20%와 미국 인구 56%가 공장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인가. 공장 노동자란 단어와 농업에 관계되지 않은 인구란 단어가 동일한 의미인가. 농업과 관련된 인구 비율이 국내에서도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를 지적하는 이유로는, 크리벤코가 이미 해당 잡지에서 그 단락을 왜곡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 게 더더욱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의 '자본주의가 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로 옮겨가보도록 하자.

 

첫째로, N.F. 다니엘손, 개혁 이후 사회 경제에 관한 개요, 1893에서 그랬듯이, 공장 노동자들 수를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대규모 기계 공업을 자본주의 첫 출발로 삼은 국내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그리고 심지어 심화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상인들로부터 통상적인 임금을 받으면서, 상인들의 재료를 가지고, 상인들을 위해 노동하는 수백만 명 국내 수공업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고정적인 농장 노동자들과 농업 분야에서 일용직 노동자들도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고, 초과 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건축 산업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착취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기타 등등도. 둘째로, 공장 노동자들의 숫자, 140만 명을 전체 인구와 비교하고, 비율을 백분율로 표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신체 건강한 인구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을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들과 비교하는 등과 같이 그저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을 비교하는 데 불과하다.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일정 숫자에 따른 가족 구성원들을 각각 부양하고 있지 않은가. 공장 노동자들과 상인 무리들은 제외하더라도, 수 많은 군인과 공무언, 그리고 비슷한 상류층들을 부양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당신네는 잡탕들을 공장 노동자와 대비시켜 농촌 인구에 포함시키고 있는 건가. 도대체 국내에서는 어업 같은 산업들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산업들을 공장 산업과 대비시켜, 농업과 결부시키는 건 얼마나 불합리한 짓인가. 당신들이 국내 인구에 따른 직업 구성을 알고자 한다면, 맨 먼저 물질적인 가치에 따른 생산에 관계된 인구, 비노동 인구와 군인, 공무원, 성직자 등을 제외한 인구를 특수한 집단으로 분류해낸 다음,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인구들을 국가 수준 노동에 따른 많은 분야 별로 나누려로는 시도를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통계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면, 인구 1%가 공장 산업에 관계됐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보다는, 그런 식의 계산 자체를 자제했어야만 했다. 셋째로, 바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을 가장 주되게, 그리고 터무니 없이 왜곡한 대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이라는 의미가 오직 공장 노동자들을 결속시켰다는 측면에서만 드러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당신들도 한 지붕 아래서 노동하는 걸, 그걸로 동일시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니콜라이 온을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한데, 왜냐하면 니콜라이 온이 러시아 부, 6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자본으로부터 노동 사회하에 따른 두 가지 특징,

 

1. 사회 전체를 위해 노동한다.

 

2. 공동 노동에 따른 산물을 취득하고자 개별 노동자들 결합

 

두 가지 측면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임무를 공장 노동자 수에 따라 판단하는 이유는 뭔가. 전체적인 임무가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 사회화, 프롤레타리아의 전반적인 형성과 그 가운데에서도 공장 노동자들의 선봉적인 역할로부터 완수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말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은 노동자들 수와 그 집중, 발전 정도 등에 달려 있다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모든 건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를 공장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할 권리를 부여하는 건 전혀 아니다. 그런 행동은 마르크스 사상마저 극단적으로 좁히는 결과만 생기도록 만들 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주택 문제에 대하여란 소책자에서 독일 산업을 언급했다. 땅뙈기나 텃밭을 소유한 임금 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엥겔스는 서구 유럽만을 거론한다고 말한다.

 

'텃밭이나 농업과 함께 이뤄지는 시골 가내 공업은 독일 신흥 대규모 공업에 따른 폭 넓은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가내 공업은 독일 소농들에 따른 가중되면서부터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점점 늘어났으나, 공업과 농업 결합은 가내 생산자인 수공업자의 안녕이 아니라 정반대로, 한층 더한 억압 토대로 작용한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묶여 있는 수공업자들은 어떤 가격이라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가내 대량 생산 체제가 폭 넓게 발달했던 국내와 마찬가지로,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까지도 자본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문제의 한 측면인 동시에, 반대 측면도 지니고 있다. 가내 공업이 확대되면서부터 소농 지역은 오늘날 산업 지형으로 차례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독일 산업 혁명이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토에 걸쳐서 확산된 건 바로 가내 공업으로부터 시골 지역에 따른 변혁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혁명적인 노동 계급 운동이 도시 중심지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지역에 걸쳐 엄청나게 확산된 이유와, 운동이 차분하면서도 조금씩 억누를 수 없는 전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독일 수도와 다른 대도시들에서 봉기가 성공하려면, 대다수 소도시들과 시골 지역 상당 수에서 혁명적인 변화 기운도 무르익었을 때에만 할 수 있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와 더불어 노동 계급 운동에 따른 성공 역시 공장 노동자들 숫자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들의 숫자에도 의존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국내 수공업 절대 다수가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예외론자들은 일종의 인민 산업으로부터 자본주의와 대비시키고, 공장 노동자들 숫자로부터 자본주의에 따른 직접적인 처분에 맡겨진 인구 비율로만 판단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으나, 전체 1억 인민들 가운데 백만 명에 불과했고, 사회에서 작은 한 귀퉁이만 차지할 뿐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념하는 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국한시키는 거와 마찬가지라던, 크리벤코 주장을 떠올리도록 한다. 공장과 제조소들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 같이 사회에 따른 작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니, 크리벤코 선생, 당신은 정말 대단한 천재인 것 같소. 정말로 부동산 기관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재화를 생산한다고. 그럼 부동산 기관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해명되겠군요. 노동 계급 해방에 따른 깃발을 들어올릴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 대표들도 분명 그곳에서 찾아야만 할 테고 말이오.

 

이류 부르주아 철학자들의 입방아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의 글에서, 그런 식의 주장을 읽어야 한다는 건 유감이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도 잉글랜드 인구 구성에 대한 수치들을 인용한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는 총 2천만 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1605,440명은 주요 공장 산업 부문에 종사했었다. 뿐만 아니라, 하인 계급 구성원들은 1208,648명으로, 2판 각주에서 마르크스는 하인 계급의 아주 급속한 성장을 거론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통합 의미를 판단하고자, 160만 명을 2천만 명으로 나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영국에 존재한다고 생각해보라. 결과는 1/12에 못 미치는 8%이다. 과연 인구 1/12조차 통합시키지 못하고, 더군다나 영국인들이 잘못된 경로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가 수준 노동의 순손실을 나타내는 가사 노예 계급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주의 임무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 경우에도, 조국을 위한 다른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경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확실하지 않는가.

 

그러나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또 다른 핵심이 존재한다. 니콜라이 온이 한 국가 자본주의는 서구 유럽에서 아주 특징적이고, 북아메리카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나타나기 시작한 통합적인 역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할 때는, 분명 노동 계급 운동을 거론했다. 말하자면, 한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경로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주장은, 미하일로프스키의 기대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 빈곤에서는 오직 빈곤밖에는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대답은 이랬다.

 

'이 언급은 늘 그렇듯이, 마르크스 말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그러나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빈곤은 말 그대로 빈곤에 불과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의 빈곤에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빈곤에서 과거 사회를 전복할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 채로 그저 빈곤 자체만을 바라봤던 고루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분명 미하일로프스키는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로 노동 계급 운동이 발현할 징후가 전혀 없다는 걸 들고 있다. 같은 주장에 대해서, 먼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는 식의 사고에는 현실을 아주 피상적으로만 들여다봤을 때,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마르크스에 따른 공산주의 강령이 작성된 건, 1848년 이전 일이다. 그럼 당시 독일 노동 계급 운동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정치적 자유조차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비밀 단체로만 한정됐다. 자본주의에 따른 혁명적이고, 통합적인 역할을 모두에게 아주 분명하게 각인시켰던 사회민주주의 노동 운동이 시작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명확한 모양새를 갖추고, 대규모 공업이 보다 널리 확산되는 한편, 노동 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전파할 재능이 있고, 원기 왕성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건, 20년 뒤 일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잘못 전달하고, 노동 계급 운동에 의식과 조직화를 제공한 사회주의자들에 따른 방대한 활동을 망각한 데 더해, 철학자들은 가장 분별 없는 숙명론적인 관점을 마르크스에게 억지로 떠안겼다.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사회화는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목격하면서도, 노동 계급 운동은 보지 못한다면, 그건 자본주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노동자들 내에서 조직화와 선전을 여전히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확언한다. 예외론적인 철학자들의 소부르주아적인 술수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고, 만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든 활동과 마르크스주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행하는 모든 공개 연설로부터 잘못이 입증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카우츠키가 아주 타당하게 지적했었지만, 노동 계급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과업이 한 국가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고자, 사회주의자들은 최대한 정력을 다해 활동에 나서야만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내 역사와 현재 위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보다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국내에서 특히나 복잡하게 감춰진 모든 형태 계급 투쟁과 착취를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중화하고, 노동자에게 알려나가야만 하며,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을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흡수하고, 조건에 가장 적합한 조직화 형식을 강구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 계급 사상가로 같은 역할을 이미 완수하고, 이행했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들은 단지 막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지속적인 무언가를 창조해내고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언제나 강조해왔다. 또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불충분하고, 터무니 없이 편협한 개념 외에도 한 국가 자본주의에서 발전적인 역할이 부족하다는 통상적인 반대 의견은 인민 제도라는 가공의 어리석은 사고로부터 기초한다. 악명 높은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빈민과 부자, 프롤레타리아 대표와 자본 대표로 쪼개질 때, 반대 의견을 가진 인민주의자들은 초기 형태에서 중세 자본주의라는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시골 정치경제적인 구조를 애써 외면했다.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면서,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의 순수한 부르주아적인 분화가 평등한 마을 공동체 내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지 않은 듯이 농민 토지 소유권의 형식 상 변화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정작 경제 조직 형태와 혼동하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좁은 형태 중세 마을 자본주의를 탈피하고, 토지에 따른 봉건적인 힘을 박살내는 동시에, 오랫동안 발가벗겨지고, 굶주려왔던 농민으로 하여금 기세등등한 부농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토지를 공동체에 넘겨주고, 고향을 떠나 한동안 일자리도 없이 국내 전역을 떠돌아다니다가, 오늘은 지주, 내일은 철도업자, 다음 날은 도시 인부나 부유한 농민의 농장 노동자로 노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기에도 말이다. 오늘날 주인을 바꿔가며, 국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농민은 어디를 가든, 자신이 가장 추잡스럽게, 약탈 당하고 있으며, 다른 빈민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점을, 자신을 강탈하는 게 반드시 주인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돈주고 살 수 있는 자신의 농민 형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농민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도 지키려는 시도에서 벌인 농민 봉기를 번번이 진압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농민의 주인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며, 노동은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고, 부와 사치는 급속도로 증가하는 반면에, 국내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꾸준하게 악화되고, 강탈은 더욱 심해지며, 실업이 일상화되는 현실을 목격한다.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고,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공장 노동자들 수가 얼마나 천천히 증가하는지를 들여다보며,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을 인정할지, 말아야 할지,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역사적인 임무를 아주 잘못 완수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경로를 걷고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와 같은 심오한 문제를 숙고하는 데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참으로 고귀하고도, 자비로운 일 아니던가. 노동 인민에 있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국내 방방곡곡에도 존재하는 시점에서,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건, 곧 현실에서 도피해서 낙원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걸 의미한다고 말하는 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 얼마나 편협하고, 교조적이며, 사악하단 말인가.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는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차츰 희미해지는 국내 사회에서 적대적인 계급들 간 케케묵은 경제적인 투쟁을 꿈꾸는 건, 고골, 죽은 혼에 나오는 마닐로프주의와 같이 타락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투쟁에 있어 조직화와 암묵적인 합의를 보태고자, 사회민주주의적인 활동에 착수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끝내 거부하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끝으로, 러시아 부, 6에서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에게 가한 또 다른 공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의 논쟁 방식에서 드러나는 어떤 특이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독일 잡지에 독일 대중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스트루베가 동원한 방식들은 완전히 부적절해 보인다. 독일뿐 아니라, 러시아 대중들, 역시도 이미 성숙기에 도달해서 스트로베 글에서 넘쳐나는 모든 근심거리들에 감탄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모든 시평에서 마추지게 되는 '유토피아 낙원', '반동적 구상' 같은 끔찍한 단어들은 오늘날, 스트루베는 분명 확신하는 효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과 스트루베 간 논쟁에서 과연 부적절한 방식이 동원됐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누구로부터였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글에서,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에 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려 했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방식들을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통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을 동원했다는 의미는 상대방이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고, 단순히 누군가를 욕하고, 나무라기 위한 욕망을 표현하고자, 심하게 반대하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자신의 심한 반감을 근심거리들로 바꾸어 표현하는 데는 그런 특징이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슬로님스키는 니콜라이 온에게 심한 말도 퍼부었지만, 현 질서의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평범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슬로님스키는 누구를 마음대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부적절한 방식들로 인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경탄스러운 주장을 아주 명시적으로 내놓았던 인물이었다. 니콜라이 온도 슬로님스키를 교화하고, 가르치는 수준에서 마르크스 말들을 인용하며, 슬로님스키가 원하던 소규모 수공업과 소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방어가 얼마나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슬로님스키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는, 슬로님스키를 가리켜 편협하고, 단순하다는 따위 비난을 가한 적이 있었다. 스트루베 글 못지않은 욕설들이 넘쳐나는 니콜라이 온의 글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부적절한 방식을 거론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개별적인 주장마다, 다 이유를 가지고 있고, 틀렸다고 하더라도, 글쓴이의 명확한 관점과 견해 체계에 따랐으며,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상대방이 단순하고, 편협하며, 반동적인 이상주의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문제 제기가 스트루베 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살펴보자. 니콜라이 온을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구상과 단순한 이상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이유들을 명확하게 제시했었는데, 첫째로는, 니콜라이 온이 '생산 사회화'를 염원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호소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해 마르크스 이론이 국내 정치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온에게는 완전히 생소하다는 점을 입증해주며, 국가는 지배 계급을 대표할 뿐이라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단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꼭 생겨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공 경제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와 대비시킨다면, 다시 말해, 자본주의 없는 생산 사회화를 원한다면, 순진한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고, 역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본주의 발전과 자연 경제 제거, 그리고 농촌 인구 감소와 더불어, 여전히 둘러싸고 있는 국내 가부장제 시대라는 땅거미 사이로 현대 국가가 등장해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 성큼 나아가고, 생산 사회화를 위해 다른 힘과 요인들을 찾아나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나마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니콜라이 온 사고에 대해 스트루베의 구체적인 언급에 담긴 진실을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니콜라이 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된 계급 투쟁을 정말로 감안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니콜라이 온은 사회와 국가를 말하고, 계급 투쟁을 망간한 채로, 도외시했다.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을 사회화하는 대신에, 자본주의를 지원했다고만 말한다. 분명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이래저래 행동할 수 있고, 따라서 계급 위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근심거리들에 의지한다고, 스트루베를 비난하는 건 그저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데 불과하다는 게 명확하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계급 국가라고 믿는 사람이 노동을 사회화하고자, 곧 지배 계급들을 없애고자, 국가에다 호소하는 사람을 순진하고, 반동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 게 확실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누군가 상대방을 근심거리들에 의존한다고 비난하면서도, 명확히 밝힌 견해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검열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에, 견해가 실릴 수도 없는 잡지에다 대고 그 사람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완전히 부적절한 방식이라고 평가해야만 하는 건 아닐까.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보자. 스트루베 두 번째 주장은 명확히 공식화된 대목이다. 자본주의와 동떨어진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가공 체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실은 니콜라이 온, 자신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었다. 1861년 이전에는 생산 단위가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 구성됐고, 작고 흩어진, 자급자족형 생산은 상당한 수준으로까지는 발전할 수가 없어서, 아주 일상적인 본질과 낮은 생산성이 일반적이었고, 뒤이은 변화로는 노동에 따른 사회적 분업이 점점 더 깊어졌다는 걸 의미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가 예전 좁은 생산 단위 경계를 탈피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을 사회화했다는 점을 뜻한다. 곧 니콜라이 온, 선생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 노동을 사회화해온 자본주의가 아니라, 붕괴로부터 최초로 사회 전반적인 노동 사회화를 불러왔던 마을 공동체에 노동 사회화 근거를 두고자 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인 몽상가에 다름 아니었다. 바로 스트루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진실이냐, 거짓이냐 문제로 인식할지 모르나, 니콜라이 온에 대한 스트루베의 신랄한 논평이 같은 견해로부터 출발해서 논리적인 필연성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걸 가리켜 근심거리들이라 말하는 건 전혀 적절치 않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스트루베는 자신은 노동 사회화를 바라고, 자본주의로부터 이뤄지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표면적인 모습으로 드러낼 세력들에 스스로 기반을 두기를 염원한다고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기를 바란다고 탓하면서 논쟁을 마무리한, 니콜라인 온 태도는 진실과 정반대된다고 부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스트루베는 검열 때문에,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라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앞으로 나선 세력들에 대한 말을 해당 잡지에서 꺼낼 수조차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니콜라이 온 논쟁 방식이 전적으로 부적절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거론한 건, 마르크스주의자 자신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출판물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터무니 없이 편협하고, 왜곡됐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설명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혁명적인 이론이 검열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 강도의 침대에 걸맞게 마구 훼손된 꼴이라니. 평론가들은 참으로 속 편하게도, 그런 활동을 수행해나간다. 평론가들의 설명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소유주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유 재산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와 정반대로 변화해서 사회화되는지에 대한 원리로 사실상 축소됐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사회학적인 방법론에 따른 모든 구체적인 특성들은 무시한 채로, 전체적인 알맹이가 계급 투쟁 원리와 연구에 따른 직접적인 목적, 곧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폐지하도록 돕는 등 계획에 있다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추정한다. 따라서 너무나 하찮고, 제한적이라서 급진주의자들이 가련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애도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국내 절대주의와 반동 체제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하고, 완성된 설명을 제시하고, 거리낌 없이 반론을 내놓을 수 있다면, 맨 처음부터 절대주의와 반동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은 검열 당한 언론에서 왜곡한 사실을 부끄러워했을 테고 말이다. 어떤 한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들을 빼먹고 넘어간 데 대해 마음으로는 거리낌이라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 중에서는 극히 일부만 해명하고 난 뒤, 원리가 편협하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

 

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계급 투쟁도, 자본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적대도, 적대에 따른 성장도 모르는, 오로지 국내에서만 할 수 있다는 그런 불합리한 상황으로 그렇게 설명될 수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혁명적인 역할이라는 개념도 없고, 심지어 화폐 경제나, 필연성 같은 표현들을 담고 있는 한, 순전히 부르주아 기획일 수밖에는 없는 걸 내놓는, 그들이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려면, 미하일로프스키 같은 지적으로 심오함이 요구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지닌 총체적인 가치는,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혁명적이라는 특성은 마르크스주의에 참으로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내재됐다. 마르크스 이론은 현대 사회에도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하고, 진화를 추적하며, 일시적인 성격과도 다른 형태로 변화에 따른 불가피함을 실증하는 한편으로, 따라서 모든 착취를 할 수 있는 한 빠르고, 쉽게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무산 계급에게 종사한다는 임무를 스스로 직접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국가에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당기는 마르크스 이론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엄밀하고도, 비할 데 없이 과학적인 특성, 사회 과학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혁명적인 특성과 결합시키고 있으면서도, 결코 우연에 따름이 아니라는 점에 정확히 근거한다. 근거는 다름 아닌 원리 창시자가 개인적으로는 과학자이자, 혁명가로 자질을 겸비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두 가지 특질이 본질적이고, 불가분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이론 역할이나, 과학 목적이란 게 현실에서도 경제 투쟁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지원하는 게 아니었던가 말이다. 마르크스는 루게에게 쓴 편지, 1843, 9에서 밝힌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투쟁을 멈춰라, 당신들의 투쟁은 전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할 일은 진정한 투쟁 구호를 세상에 제시하는 게 전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과학에서 직접적인 임무는 진정한 투쟁 구호를 제시하며, 다시 말해 지금 투쟁을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에 따른 산물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당면한 투쟁에서 불가피함과 내용, 발전 경로 및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분리된 형태에 따른 투쟁을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매 단계 투쟁이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이행되는 과정을 추적해 어떤 특정한 순간에서라도, 투쟁에 따른 일반적인 속성과 모든 착취 및 억압에 따른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철폐라는 총체적인 목표를 놓치지 않고, 상태를 제대로 규정해내지 못한다면, 투쟁 구호를 제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의 비판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뒤, 씨름했었던 따분하고, 쓰레기 같은 이론과 마르크스에게 있어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을 한 번 비교해보시라. 분명 스스로를 노동 인민 사상가라 여기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필수적인 부분들은 죄다 흔적을 지워 없애 버리면서, 이론을 '닳은 동전'으로 변형시키는 데 머무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노동 인민의 이념적인 대변자가 되고픈 소망에서 비롯된, 전체적으로는 경제 제도와 구체적으로는 농민들의 현 상태와 역사에 주력한 인민주의 문헌을 마르크스 이론 요구들과도 한 번 대조해보시라. 분명 고통을 연구하고, 묘사하며, 설교를 들어놓는 데 그친 이론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거기서 농노제는 여러 착취와 여러 적대적인 계급들과 특정한 정치적·법적인 체계 따위를 생기도록 만드는 명확한 형태에서 경제 구조가 아닌, 그저 지주들로부터 학대와 농민들에 대한 불의로만 그려진다. 농민 개혁 또한 뚜렷한 경제 형태들과 계급들 간 충돌이 아니라,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잘못된 경로를 선택한 정부 당국이 취한 조치로만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개혁 이후 국내는 특정한 발전에 따른 명확한 적대적인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가 아닌, 노동 인민 고통을 동반한 진정한 경로로부터 일탈로만 묘사된다. 하지만 인민주의 이론이 전혀 신뢰도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자들이 현재 지식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고는 어떤 혁명 이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더 빠르게 깨달을수록,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국내에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적용하고자 모든 노력을 더 빠르게 쏟아붓는다. 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움직임은 혁명 과업 성공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실질적이고, 제대로 된 산업을 창출해내고자, 인민들을 상대로 문화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등과 같은 지식 계급에 대한 인민의 벗들의 요구가 오늘날 빈약한 국내 사상 풍토를 얼마나 크게 변질시켰는지를 드러내줄 생생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확연하게 구별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인민의 의지'의 견해를 인용해볼 필요가 있다. 인민권리당이시급한 쟁점, 1894이라는 소책자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조건 아래에서조차 국내는 생산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노동 인민에게 보장해주는 경제 구조와 작별을 고해서는 안 된다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치 개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경제 개혁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인민주의자들을 멋지게 반박한 뒤, 나로드프랍치,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수호자가 아니요,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방 감독관들의 보호 아래에서 부르주아 계급 침범으로부터 계획적인 정치 개혁을 열심히 지켜내게 하느냐, 아니면 정치 정당에 기초한 부르주아 계급 자체 보호 아래에서, 다시 말해, 인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조직적으로 방어하는 걸, 보장하는 상황 아래에서 경제 개혁이냐를 놓고 선택하라는 얄궃은 운명이 인민들에게 주어진다면, 인민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하는 게 더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인민들에게서 거짓된 독립 경제 구조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정치 개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누구든 어디에서나 익숙하게 불리는 부르주아 정책만이 존재할 뿐이며, 인민 노동에 대한 가장 철저한 착취로도 표현된다. 폭 넓은 자유는커녕 좁은 의미에서 자유도 없으며, 입헌 국가들의 농경민과 자본가들은 더 이상 꿈도 꾸지 않는 계급에 따른 이익의 보호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부르주아 의회 제도란 게 없으며, 행정 기구에 따른 포탄 사정거리 안에서는 사회도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만리장성을 세워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나이데노프, 모로조프, 카지, 비엘로프 같은 신사 양반들이 있으며, 그들 옆에는 1데샤티나 당 거금 100루블씩 자신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기를 요구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른 충성스러운 귀족 대표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위원회 일원으로 초대되어, 공손하게 경청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말을 꺼내고, 한 국가 경제 생활에 영향을 끼칠 중차대한 사안들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는다. 그러나 인민의 이익을 지키고자 내세운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지방 감독관 아니었던가. 농업 근로대가 기획된 건, 인민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단, 뿐만 아니라 인민들에게 분여지를 부여했던 유일한 이유는 볼로그다 주지사는 자신의 회람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민들로부터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자, 거의 빈정거릴 정도로 가깝게 솔직히 막 공표되지는 않았나. 주지사는 전제 군주국, 아니 보다 정확히는 관료주의적인 절대주의 체제가 숙명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책을 단지 공식화하고, 소리 높여 표현했을 뿐이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대상인 인민과 노동 이해 관계를 보호해줄 믿을 만한 기관이라고 계속해서 여겨온 사회에 대한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의 개념이 모호하다고는 하나, 인민권리당의 창설이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에 대한 착각과 몽상을 완전히 버리고, 진정한 경로를 두려움 없이 인정하며, 혁명 투쟁을 위한 요소들의 기반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 거라는 점만큼은 누군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민주적인 정당을 건설하고자 분투를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분투'일 수밖에 없는 건, 불행하게도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논지를 일관되게 실행에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주의자들과 융합과 동맹을 말하고, 노동자들을 한낱 정치적인 급진주의로 끌어들이는 건, 지식 노동자들을 노동 대중으로부터 단졀시키는 걸 의미할 뿐임을 깨닫기를 거부하며, 노동 계급 운동에 무기력하다는 선고를 내린다. 노동 계급 운동은 전적으로 노동 계급 이익을 보호하고, 자본에 맞선 경제 투쟁을 벌일 때만 강해질 수 있으며, 경제 투쟁은 자본 하수인들에 맞선 정치 투쟁과도 불가분하게 묶여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혁명 분파들의 '융합'이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따른 독립된 조직과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두 정당의 공동 행동으로부터 훨씬 더 잘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당을인민권리당 선언문, 1894, 219일자사회혁명당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짖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정치 개혁에만 국한시키고 '지긋지긋한' 사회주의적인 사안들은 아주 주도면밀하게 회피해버린다. 실로 착각에 맞선 투쟁을 열렬하게 촉구하는 정당이 타인에게 착각을 조장해서는 안 되는 법임에도, 그들은 선언문의 맨 첫 부분에서부터,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단지 입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그들이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민의 권리'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민의 권리'들은 오로지 정치 강령에 근거한, 사회주의와는 관계도 없이, 정치 투쟁만을 염두에 두면서 '인민의 의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진정으로 '인민의 권리'의 성공을 바라며, 그들의 정당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그래서 현재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를 편들고 마는, 따라서 반드시 그 체제를 거부하고, 맞서는 가차없는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 민주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일상의 이해 관계가 묶여 있는 사회 분파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관료 체제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면서, 정치 투쟁에 따른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노동 인민이 억압 받는 원인과 현재 벌어지는 계급 투쟁 성격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인민의 벗들이 타협적이고, 비겁하고, 감상적이고, 공상적인 인민주의는 정치적인 급진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양쪽으로부터 공격 당할 경우, 결코 오래 버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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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전쟁에 돌입한 또 다른 인민의 벗인 크레벤코 선생을 만나보자.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나 유자코프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크레벤코, 우리 문화 용병들, 1893, 12, 여행 중에 보낸 편지, 1894, 1를 검토한다. 글들을 완전히 분석하는 건 첫째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한 그들의 반론과, 둘째로는 그들의 정치 경제 이론에서 실체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인민의 벗들의 사고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그들의 전술, 실질적인 목표, 정치 강령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들의 이론적인 견해를 밝힐 때,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그 강령을 일관성 있고, 완전하게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명 기고자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정도로, 의견 일치를 보인 한 잡지에서 많은 글들을 참조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크리벤코 글들을 우선적으로 살펴본다. 그 이유로는 크리벤코 글들에 많은 자료가 담겨 있는데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주의자고, 유자코프는 경제학자이듯이, 크리벤코는 해당 잡지에서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인물이자,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말 필수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여겨지는 이론적인 핵심이 한 가지 더 있다. 유자코프 선생은 인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인민들의 토지 임차에 대해 의미 없는 문구들을 늘어놓는 걸, 자신이 농민들의 경제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추고자, 의미 없는 문구들로 문제들을 눙치는 걸 지켜봐왔다. 유자코프는 수공업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았고, 대규모 공장 산업 발달에 관한 자료를 다루는 걸로만 국한시켰다. 그래 놓고는 수공업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문구들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유자코프는 '인민들의 산업', 곧 수공업을 자본주의적인 산업에 똑같이 대비시키면서, 인민들의 생산은 대부분의 경우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면에, 자본주의적인 산업은 흔히 인위적으로 창출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단락에서도 유자코프는 '소규모 인민 산업'을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과 대비시키면서, '여러분이 눈에 띄는 인민들의 산업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규모가 작고, 노동 도구들이 생산자와 결합된다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러나 경제 구조를 정의내리는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데다, 전혀 사실도 아니다. 크리벤코 선생은 소규모 인민 산업은 대규모 자본주의적인 산업보다 총생산량도 훨씬 많고, 더 많은 노동력을 고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크리벤코는 수공업자들의 숫자가 40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를 거론했었는데, 또 다른 자료에서는 7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공업을 지배하는 경제 형태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대부분 수공업자들은 생산에서 전혀 독립적이지 않고, 완전히 종속됐다는 점, 그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원료를 가공하는 게 아니라, 상인들이 대준 원료를 가공하고, 그 대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같은 형태가 지배적이라는 통계는 합법적인 출판물에서도 인용됐다.

 

유명한 통계학자인 S. 카리조메노프 글들 가운데,법률 통신, 1883, 11, 12에 실린 뛰어난 글을 인용해보자. 수공업이 가장 고도로 발달된 중부 지방 주들에서 수공업에 관한 기존에 발표된 통계를 요약하면서, 카리조메노프는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에서 절대적인 우위, 곧 의문의 여지 없이 자본주의 형태에 따른 산업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카리조메노프는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경제적인 역할을 규정할 때, 다음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스크바 주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86.5%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로부터 발생했고,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으로부터는 13.5%에 불과하다. 블라디미르 주에서 알렉산드로프와 포크로브 군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96%는 대규모 가내 생산과 제조업 체계 몫에 해당했고, 4%만이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런 점을 반박하려 하지 않았고,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점들을 무시한 채로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산업을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인민 산업이라 부를 수 있고, 진정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사실 관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딱 한 가지 설명만이 할 수 있다. 곧 국내 자유주의자들이 다 그렇듯이, 인민의 벗들 역시도 모두를 단지 평범한 결함들이라 치부하면서부터 국내 노동 인민 착취와 계급 적대를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으로는, 크리벤코는 파블로보 날붙이 사업을 절반은 장인 성격의 사업이라 부른 데서 드러난 바와 같이, 같은 주제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너무나 깊은 데서 비롯된다. 이렇듯이 인민의 벗들이 도달한 왜곡 깊이는 가히 놀랍다는 말밖에는 덧붙일 말이 없다. 같은 대목에서 어떻게 파블로보 칼 장수들이 장인의 성격을 띠고 있따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리벤코는 상인이 수공업자로부터 물건을 주문해서 니지니 노브고로드 장터로 보내는 체계를 장인 산업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너무나 우습게도 그렇다. 실제로 칼 제조는 외관 상 생산자들이 독립성을 지닌 소규모 수공업 형태로부터 파블로보의 다른 산업들과 비교해볼 때, 가장 동떨어져 있다. N.F. 안넨스키는 '요리용과 공업용 칼 생산은 이미 대부분 공장에 접근하고 있다거나, 더 정확히는 공장제 수공업 형태에 도달한다.' 말한다. 니지니 노브고로드 주에서 요리용 칼 제조에 종사하는 396명 수공업자들 가운데 단 62, 16%만이 시장을 위해 일하고, 273, 69%은 주인을 위해 일하며, 61, 15%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고용주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은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칼 산업에서 다른 부문에 대해 같은 필자는 '주머니칼과 자물쇠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 같은 부문에서 수공업자들 대부분은 주인을 위해 노동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시장과 관계를 맺는 수 많은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여전히 아주 많다'고 말한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는 이런 종류의 칼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이 총 2,552명 있었는데, 그 중 1,236, 48%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1,058, 42%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258, 10%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장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 또한 단지 겉으로만 독립적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구매자 자본에 덜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21,983명 노동 인민, 곧 노동하는 사람의 전체 84.5%가 공업에 종사하고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 고르바토프 군 전체 산업 통계를 불러온다면, 금속, 가죽 제품, 마구류, 털천, 삼 방적 등 산업에 종사하는 10,808명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산업 경제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곧 수공업자들의 35.6%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46.7%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17.7%는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우위에 있고, 노동이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관계가 지배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토록 자유롭게 이런 종류의 사실들을 무시한 또 다른 이유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자본가라는 거대한 기계 회사를 운영하고, 고용주라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어에서 과학적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거부한다. 앞 장에서 유자코프 선생은 자본주의 시작점을 정확히 기계 공업에서 시작하면서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을 생략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널리 만연하는 실수로, 부수적으로는 한 국가의 수공업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성이 무시된 결과를 생기도록 만들었다.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자본주읮거인 산업 형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이미 높은 발전 수준에 도달한 상품 경제, 생산 수단이 개인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상, 수중에 생산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해서, 자신의 노동을 타인 소유의 생산 수단으로 적용시키며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 대중 착취라는 모든 특징들이 담긴다. 분명 그러한 구성에 있어 수공업은 순전히 자본주의적이며, 주로 터무니 없이 낮은 임금 때문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며, 노동자들은 여전히 소규모 농지를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춰볼 때, 대규모 기계 공업과는 다르다. 소규모 농지에 있어 상황은 특히 인민의 벗들을 헷갈리도록 만들었는데, 그들은 진정한 형이상학자들이라는 성격에 걸맞게 노골적이고, 정반대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맞아. 아니, 아니, 악마에게서는 그게 뭐든 간에 이보다 더한 게 생겨나는 법이야.'

 

노동자들에게 토지가 없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토지가 있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며, 경제의 전반적인 사회적 구조를 보지도 않은 채, 그런 철학을 위안 삼아 자기 자신을 그 속에 가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뻔뻔한 농민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강탈 당한 끔찍한 가난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점마저 망각해버린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비교적 낮은 발전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디에서도 노동자를 토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 마르크스는 서구 유럽에서부터 오직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자를 영원히 착취한다는 법칙을 확립했다. 따라서 인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논법은 완전히 쓸모없다는 게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에 따른 자본주의는 노동자 토지로부터 완전한 분리와 어디에도 결부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자본주의이기를 멈춘 적도 없기 때문이다. 국내 대규모 기계 산업 형태는 산업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을 떠맡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삶의 모든 구체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어느 서구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토지와 사슬 고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걸 절대로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같은 점은 데멘티예프로부터 엄밀한 통계로 입증된 바 있으며, 데멘티예프는 마르크스와는 아주 별개로, 기계를 이용한 생산이 노동자에 따른 완전한 토지로부터 분리와 불가분으로 관련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같은 연구에서는 러시아도 자본주의 국가이며, 국내 노동자들에 따른 토지와 연관에 있어 아주 미약하고, 실재하지도 않는데다, 자산 소유자인 화폐 소유자, 구매자, 부농, 공장제 수공업자 등의 권력은 아주 굳건하게 확립됐고, 기술적인 진전이 한 차례 더 일어나게 되면, 오랫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왔던 농민은 그야말로 노동자로 변모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러나 한 나라 수공업에서 경제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인민의 벗들의 잘못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은 주인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 산업들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생각은 경작자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어쨌든 그들이 아는 거라고는 세상에는 노동하는 인민과 결합될 수 있는 생산 수단 같은 게 존재하고, 그게 아주 좋다는 반면에, 그들과 분리될 수도 있는 생산 수단은 아주 나쁜 거라는 점 말고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제넘게도 정치 경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의견이나 늘어놓는 신사양반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라는 점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화되는 산업과 그렇지 않은 소규모 생산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산업에 대해 말하면서, 크리벤코는 한 쪽으로 특정 분야들에서 기본적인 생산 비용이 얼마 안 되며, 따라서 소규모 생산을 할 수 있다고만 말한다. 크리벤코는 벽돌 산업을 거론하는데, 거기서는 비용이 벽돌 공장 연간 매출액에서 1/15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필자가 사실 관계를 언급한 거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민의 벗들이 현실에 대해 어떤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모스크바 젬스트보 경제 통계 보고서에 대한 서술을 볼 수 있다. 해당 산업에서는 주로 보고로즈코예 군 세 개 읍에 집중됐는데, 233개 시설에서 1,402명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이 중에서 41%를 차지하는 567명은 가족 노동자들이다. 가족 노동자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주인 가족 가운데 노동에 참가하는 구성원을 뜻한다. 357천 루블 가치에 해당하는 연간 총 생산량을 보유했다. 해당 산업은 오래된 산업이지만, 철도 건설로부터 판매가 대폭 촉진된 덕분에 지난 15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철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가족 생산 형태가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임금 노동자 착취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또한 해당 산업은 판매를 위해 소규모 업자들이 대규모 업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금 부족 때문에 소규모 업자는 대규모 업자에게 아주 형편없는 가격에다 그 자리에서 벽돌이나 미가공품을 내다 판다. 하지만 그러한 의존도와는 별개로 논문에 첨부된 노동자들 수와 각 시설 당 연간 총 생산량이 표시된 수공업자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해당 산업 구조 역시도 익히 알 수 있었다.

 

상품 경제가 곧 자본주의 경제라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상품 경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된다는 법칙이 해당 산업에서도 적용되는지를 확인하고자, 시설들의 규모를 비교해봐야만 한다. 문제는 정확히 생산량에서 역할과 임금 노동 착취에 따른 소규모와 대규모 시설들 사이에서 관계다. 노동자들의 숫자를 기초로 해서, 수공업자 시설들을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 1-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2. 6-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3. 1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다. 시설들의 규모, 노동자들의 전체 수, 각 집단 별 생산량에 따른 가치를 검토한 결과, 다음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수치들을 살펴보면, 부르주아 또는 그와 동일하고,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시설이 클수록 중간 집단은 예외지만, 노동 생산성은 더 높아지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더 심해지며, 생산 집중도 역시 더 커진다. 거의 전적으로 임금 노동에 기초한 세 번째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 수에서 10%를 차지하지만, 총 생산량은 44%에 달한다. 소수 손에 생산 수단이 이렇게 집중되는 현상, 다수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착취와 관련된 현상은 대규모 경영주들은 사실상 원청이기 때문에, 소생산자들에 따른 원청에 대한 의존과 해당 산업에서 노동 억압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노동 계급에 대한 강탈과 착취 원인이 생산 관계 자체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알다시피 국내 인민주의 경향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견해를 지녔었고, 수공업에서 노동 억압 원인이 생산 관계에서 그들은 생산 관계가 착취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칙에 기초한다고 선언했었지만, 거기에 있지도 않고, 다른 무언가, 곧 농업과 재정 정책 등에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런 견해를 굽히지도 않고, 이제 거의 편견에 따른 철옹성을 구축하게 된 근본 토대는 무엇이었으며,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수공업에서 생산 관계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사실 관계, 곧 경제 구조에 따른 실제 형태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묘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속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 과학에 따른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 곧 유물론적인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나이든 사회주의자들의 사고 경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공업에 관해서는, 그들은 착취 원인을 생산 관계 외부로 그 책임을 돌린다. 반면에, 대규모 공장 자본주의에 관해서는, 그들은 거기에서 착취 원인이 정확히 생산 관계에 있다는 걸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화였다. 수공업적인 생산 관계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규모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지를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공업과 자본주의적인 산업 사이에서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수공업에서는 인민 공업으로, 자본주의적으로는 인위적인 산업으로 대비시켰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발상이다. 같은 사고는 아주 폭 넓게 퍼져 있고, 니콜라이 온 선생에 따른 수정과 개선을 거쳐, 국내 대중들에게도 제시된 바 있다. 가히 경탄스러울 정도로 비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타성적으로 지속된다.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공장 자본주의는 실제 현실에 기초해서 판단되는 반면에, 수공업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기초해서 판단이 이뤄진다. 자본주의는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기초해서 판단되지만, 수공업에서는 생산 관계를 따로 검토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판단되며, 그러한 문제는 곧장 정치 영역으로 옮겨간다.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시선을 돌리기만 한다면, 인민 제도들이 아직 개발되지도 않고, 맹아적인 상태이기는 하나, 지극히 동일한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모든 수공업자들이 동등하다는 안일한 편견을 거부하고, 그들 사이에서 차이들을 정확히 제시하자면, 공장 자본가와 수공업자 사이에서 차이가 수공업자 서로 간 차이보다 작다는 게 때때로 증명된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자본주의는 인민 제도와 모순되는 게 아니라, 뒤를 잇는 직접적이고, 당면한 연속이자, 발전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바가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주어진 바에서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비율이 대체로 너무 높다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수공업자들이 드러내는 관계, 곧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는 본질적으로 부르우자적이고, 그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든, 약하게 드러나든 간에 그런 상태가 중단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약한 걸 골라볼 텐데, 모스크바 주 산업에 관한 이사예프에 따르면, 도자기 공업은 순수한 가내 공업이고, 당연히 소규모 농민 공업에서 대표 주자로 여겨진다. 기술이 지극히 단순하고, 장비는 아주 작으며, 생산된 물건들이 보편적이고, 필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세부 사항들을 제시하는 도자기 장인들에 대한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경제 구조도 연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따. 도자기 공업에서는 수 많은 국내 소규모 인민 공업으로 아주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수공업자들을,

 

1.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3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2. 4-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3. 5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 다음 동일한 계산을 실시한다. 명백하게도, 해당 공업 역시도 비슷한 사례들이 무수히 인용된다. 부르주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품 경제로부터 발생하는 동일한 분리, 특히 자본주의적인 분리가 발견되고, 맨 위 집단에서는 이미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임금 노동 착취로 이어진다. 맨 위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들에서 1/8을 차지하고, 전체 노동자에서 30%가 총 생산량에서 약 1/3을 생산하며, 노동 생산성은 평균보다 상당히 위에 있다. 생산 관계만으로도 원청 등장과 권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규모가 더 크고, 이윤이 더 많이 나는 시설들을 소유하고, 타인 노동으로부터 순이익을 얻는 맨 위 도공 집단에서는 사실상 평균 5.5명 임금 노동자들이 노동하며, 소수가 어떻게 절약된 돈을 축적하고, 왜 다수는 몰락하고 심지어 소장인들은 생계조자 이을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게 예속되는 건 확실한 사실이며, 필연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생산 관계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그렇다. 같은 관계들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 수중으로 넘어가서, 그들의 손에서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수단, 대중 착취로부터 개인적인 부를 쌓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관계다. 그리고 같은 종류에서 관계가 여전히 덜 발달됐기 때문에, 생산자들에 따른 몰락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자본 축적이 무시해도 될 정도이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이 보다 덜 뚜렷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오로지 노예의 형태를 띤 보다 더 조악한 착취로 이끌 뿐이다. 곧 아직은 노동자 노동력을 가치 그대로 구입하기에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종속시킬 수 없었던 자본이 노동자를 고리대금으로부터 착취에 따른 진정한 그물에 얽어넣고, 악랄한 방법으로 묶어놓으면서부터 초과 가치뿐만이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을 강탈해가고, 더 나아가 노동자로 하여금 주인을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부터 고통을 가하고, 자본이 노동자에게 일거리를 준다는 점을 혜택으로 강요하면서부터 노동자를 모욕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진정한 인민 산업이 존재한다면, 단 한 명의 노동자도 국내에서 독립적인 수공업자로서 지위를 그런 지위와 맞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국내 급진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치들은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와 자본에 대한 노예화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여전히 고립된 실험에만 머무르거나, 노동 인민에 따른 상태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주어진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세련되게, 다듬고 발전시키며, 강화시킬 뿐이라는 점도 명백하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전체적인 비참한 상태와 상대적으로 작은 시설, 극도로 낮은 노동 생산성, 원시적인 기술과 소수 임금 노동자들에도 불구하고, 농민 산업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인민들 사이에서 특정한 관계이고, 그러한 관계는 비교 대상 범주가 더 높은 수준에 있건, 더 낮은 발전 수준에 있건 간에 똑같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자본에서 그런 정의에 반대했다. 그래서 본인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시버의 책에 대한 글을러시아 부에서 기고하면서, '자본은 관계다.'라는 정의를 인용하며, 분개한 마음에 그 뒤에다 느낌표를 달아놓았다. 부르주아 체제에서 범주를 영원하고, 당연하다고 간주한다는 건, 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본에 대해서도 그들은 추가 생산을 위해 쓸모가 있는 축적된 노동이라는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을 인간 사회에서 영원한 범주로 묘사하고, 그런 행위에서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축적된 노동이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타인 노동의 착취를 위해 기여하는 역사적으로 명확하고, 특정한 경제 구성체에 따른 본질을 흐린다. 그리고 생산 관계에 따른 명확한 체계에 대한 분석과 연구 대신에, 그들이 어떤 체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련의 시시한 말 따위를 제시하고, 소부르주아 도덕에서 감상적인 어린애 장난 같이 뒤섞는다. 인민의 벗들은 해당 산업을 인민 공업이라 부르고, 자본주의 산업과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신사 양반들이 소부르주아 이념가들이며, 소생산자들이 상품경제 체제 아래에서 살고 활동하면서, 그들과 시장과 관계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들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놓는다는 점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이런 현실 구조를 연구하려 하지 않는가. 그랬더라면, 인민 산업들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결과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대신에,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어쨌든 발전을 이룬 수공업 분야가 국내에서도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로부터 생산 수단 독점, 다수로부터 소외, 임금 노동에 따른 착취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본질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으로부터 점유되는 개념에 필연적이고, 적당한 특징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자신의 역사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실제로 인민 수공업 구조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전체적인 역사에 있어 훌륭한 실례를 제공해준다. 분명히 단순 협업 형태에서, 도자기 공업에서 맨 위 집단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기원과 시작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상품 경제 덕분에 개별 개인들의 수중에 축적된 저축이 어떻게 자본이 되는지, 그래서 저축 소유자들만이 대규모 처분에 필요한 자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차적으로 판매를 독점하고, 그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시장에서 상품들이 팔려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하는지, 상인 자본이 생산자 대중을 어떻게 노예화하고, 자본주의 기계제 수공업, 곧 대규모 생산에 따른 자본주의 가내 체계를 조직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장 확대와 늘어나는 경쟁이 어떻게 개선된 기술로 이어지고, 상인 자본이 산업 자본이 되며, 대규모 기계제 생산을 조직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그래서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수백만 노동 인민과 지역 전체를 노예화한 자본이 공공연하고, 뻔뻔하게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부를 자신의 하인으로 변모시키는 순간, 천재적인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 이식과 인위적인 생성에 대해 비명을 질러댄다. 실로 적절한 발견이다.

 

그러므로 크리벤코 선생은 '인민의', '현실적인', '적합한' 따위에서 산업에 대해 말했을 때, 크리벤코는 단지 수공업이 많은 발전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점을 감추려고 애쓴다. 이미 유자코프 선생에게도 같은 식의 수법들을 익히 보았다. 유자코프는 농민 개혁을 연구하는 대신에 1861219, 농노제 폐지 선언에 따른 기념비적인 선언에서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공허한 문구들을 사용했었고, 토지 지대를 연구하는 대신에 인민 지대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국내 시장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위해 형성되는지를 연구하는 대신에, 시장 부족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등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은 바 있다. 같은 대목에서 인민의 벗 선생들이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가지를 더 검토해본다. 주관적인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정확한 언급 가운데 하나로, 곧 크리벤코 선생이 보로네시 농민들의 예산에 대해 1894, 1호에서 언급했었던 부분을 무시하는 건, 불공평하다며 드물게 자세를 낮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이 선택한 통계를 기초로 삼아보면, 국내 급진주의자들과 인민의 벗들의 사고와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따른 사고 가운데 현실에서 어떤 생각이 더 정확한지를 확실히 할 수 있다.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학자인, 시체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군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전형적인 농가 24곳 예산 항목들을 덧붙이며, 본문에서도 분석했다. 크리벤코는 같은 분석을 재현하면서도, 방법론이 소농들의 경제를 알기 위한 목적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지 못하거나, 보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24곳의 예산은 크리벤코, 자신이 지적했듯이, 완전히 서로 다른 잘살거나, 중간이거나, 가난한 가구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시체르비나도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유형에서 가구들을 한 덩이로 묶어, 평균 수치들을 활용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 간 차이를 완전히 숨겼다. 그러나 소규모 생산자들 내부 분화는 아주 일반적이고, 주요한 사실이라서, 크리벤코가 선택한 빈약한 통계로부터 아주 뚜렷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농민들의 농업을 다룰 때, 그들을 농장 규모와 농업 유형에 따른 범주로 나누는 대신에, 시체르비나 선생이 그랬듯이 그들을 법적인 범주, 곧 과거 국유지 농민과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으로 구분하고, 자신의 모든 관심을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과 비교했을 때, 과거 국유지 농민의 번영에 돌리면서 같은 범주 내 농민들 간 차이가 범주 간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놓치고 만다. 이를 증명하고자, 24명 농민들을 세 개 집단으로 나눠,

 

a. 6, 잘사는 농민들

 

b. 11, 평균적인 농민들

 

c. 7, 가난한 농민들

 

크리벤코 선생은 과거 국유지 농민의 농가 당 지출이 541.3루블이고, 예전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 지출은 417.7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농민들의 지출이 동등하다는 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 가운데 지출이 84.7루블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설령 1,456.2루블을 지출하는 독일 이주민을 제외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은 열 배에 해당하는 887.4루블이었다. 이를 한데 묶어놓는다면, 과연 평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제시하는 범주들로 분류할 경우, 잘사는 농민 농가 당 평균 지출은 855.86루블이고, 중간층 농민은 471.61루블, 가난한 농민은 223.78루블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비율은 대략 4:2:1이다. 계속 이어가서, 시체르비나 발자취를 따라 크리벤코는 많은 법적인 범주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필요에 따른 경비를 제시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이 연간 채소 음식에 지출하는 일인 당 경비는 13.4루블이고,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은 12.2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7루블

 

b). 14.5루블

 

c). 13.1루블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이 일인 당 고기와 유제품에 지출하는 경비는 5.2루블이고, 과거 국유지 농민들은 7.7루블이었다. 반면에,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각각 11.7루블, 5.8루블, 3.6루블이다. 따라서 법적인 범주에 따른 계산은 이러한 큰 차이를 덮어버리는 데 불과하다는 점이 명백하다. 정녕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소득이 예전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 소득보다 53.7%, 더 크다고 말한다. 24명 농민에서 전체적 평균은 539루블이고, 두 범주로 나누면, 각각 600루블 이상과 약 400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면, 소득은,

 

a). 1,053.2루블

 

b). 473.8루블

 

c). 202.4루블

 

최대 10:2 비율일 뿐, 3:2가 아니었다. 또한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농가 당 자본 가치는 1,060루블이고,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은 635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37.91루블

 

b). 786.42루블

 

c). 363,38루블

 

다시 최대 비율은 10:2이지, 3:2가 아니었다. 이렇게 농민을 법적인 범주로 구분하면서부터 이와 같은 농민 경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버렸다. 경제적 능력에 따른 많은 유형에서 농가들을 검토한다면, 잘사는 농가는 평균 1,053.2루블 소득을 올리고, 855.86루블 경비를 지출해, 197.34루블 순수익을 얻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에 비해 중간층 가구는 473.8루블 소득을 올리고, 471.46루블 경비를 지출해서, 농가 당 2.19루블 순수익을 거둔다. 신용 부채와 체납금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분명 생계를 잇기에는 부족한 금액으로, 농가 11곳 가운데 5곳이 적자였다. 반면에, 최하층 가난한 집단은 직접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소득이 202.4루블, 경비는 223.78루블로, 21.38루블 적자를 기록했다. 농가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전체적인 평균 순수익 44.11루블을 낸다면, 실제 그림은 명백하게 완전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순수익을 확보한 6명의 잘사는 농민들이 8명의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의 농업 성격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순수익을 거둬들여, 산업에 의존할 필요성을 사실상 덜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농들은 모두 합쳐 자신들 예산에서 6.5%만 산업으로 충당한다. 6,319.5루블 가운데 412루블로, 게다가 해당 산업들은 시체르비나가 언제나 말했듯이, 운반이나 심지어 양치기와 같은 유형으로, 의존과는 거리가 멀고 타인 착취를 미리 전제로 한다. 바로 축적된 저축은 상인 자본으로 전환된다. 농민들은 4개 산업 시설들을 소유하고, 거기서 320루블 소득, 전체 5%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중간층 농민들의 경제는 유형이 달랐다. 그들은 거의 생계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중산층 농민들이 농사만으로는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울 수 없어, 소득 19%를 이른바 산업으로부터 충당했다. 과연 어떤 종류 산업인지는 시체르비나 글에서 알 수 있는데, 7명 농민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독립적인 산업, 양복업과 숯 제조에 종사하고, 나머지 5명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있었다. 이들은 이미 반만 농민이고, 반은 노동자이다. 부업을 하면서 농사를 등한시할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자신의 농사가 약화된다. 가난한 농민들은 순전히 손해를 보면서 농사를 짓는다. 가계 예산에서는 산업의 중요성이 소득의 24%로 훨씬 더 컸고, 산업이란 거의 전적으로 농민 한 명만 제외하고, 노동력 판매였다. 빈농 가운데 2명은 산업에서 농장 노동으로부터 얻는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3/2를 차지했다. 소생자들에 따른 완전한 분화 과정이라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 소생자들 가운데 상위 집단은 부르주아로 변모했고, 하위 집단은 프롤레타리아가 됐다. 전체적인 평균을 택한다면, 당연히 거기에서는 무엇도 알 수 없고, 시골 지역에서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크리벤코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도록 만든 건, 오로지 그러한 허구 평균을 갖고 작업 했기 때문이다. 해당 군 전체에서 농민 농업에서 전형적인 농가들에 따른 지위를 측정하고자, 시체르비나 선생은 농민들을 분여지 크기에 따른 집단으로 나눴더니, 선택된 농가 24곳에서 전반적인 평균 번영 수준이 군 내 평균보다 약 3/1 가량 더 높다고 드러났다. 하지만 계산법에서는 불반족스러웠다. 왜냐하면 24명 농민들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존재하고, 분여지 크기에 따른 분류는 농민층 분화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여지가 번영에서 주요한 원인'이라는 크리벤코 이론은 완전히 틀렸다. 마을 공동체 내 토지를 '동등하게' 분배한다고 해서 말을 소유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토지를 포기한 채, 일자리를 찾아 떠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걸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 또는 다수 말을 소유한 구성원들이 거대한 땅을 임차해서, 또한 이윤이 발생하는 큰 농장을 운영하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농가 24곳 예산을 가지고 따져보면, 6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한 명 부농이 758.5루블의 총소득을 거둬들였고, 7.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중간층 농민은 391.5루블, 6.9데샤니타 분여지를 보유한 빈농은 109.5루블을 거둬들인다는 점을 알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집단 간 소득 비율로는 4:2:1인 반면에, 분여지 비율은 2.6:1:0.8:1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가구 당 22.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부농들은 각각 8.8데샤티나를 추가로 더 빌리는 반면에, 분여지를 더 적게 보유한 9.2데샤티나 가운데 중간층 농민들은 더 적은 규모에서 분여지 7.7데샤티나를 빌렸고, 훨씬 더 적은 분여지 8.4데샤티나를 보유한 빈농들은 불과 2.8데샤티나만 추가로 임차한다는 점이 발견됐다. 크리벤코는 '불행하게도 시체르비나 선생이 제시한 통계에서 주 단위는 말할 거도 없고, 군 단위에서조차 전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전체적인 평균으로 계산하는 잘못된 방법론에 의존하는 당신의 행동도 측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밖에는 없다. 일반적으로 시체르비나 통계는 아주 포괄적이고, 귀중해서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줬고, 크리벤코 선생이 그러지 못했다면 비난받을 대상은 시체르비나 선생이 아니다. 시체르비나는 농사용 가축에 따른 농민들 분류를 제시했을 뿐, 분여지에 따른 분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곧 법적인 부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구분에 따른 분류이다. 그리고 선택된 전형적인 24곳 농가에 따른 다양한 범주들 사이에서 비율이 해당 군을 통틀어 다양한 경제적 집단들 사이에서 비율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앞에서 볼 때, 전형적인 24곳 농가에서 전체적인 평균이 해당 군 농가보다 전반적으로 운영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허구 평균 대신에 경제적 범주를 택해보면,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농가들에서 노동하는 농장 노동자들이 농사용 가축을 갖고 있지 못한 농민들보다 다소 아래에 위치했지만, 농민들에게 매우 근접해간다는 점을 발견한게 된다. 그리고 빈농들은 농사용 가축을 한 마리 보유한 농민들에 아주 가깝게 다가선다. 중간층 농민은 농사용 가축을 두세 마리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위에 위치해 있다. 반면에, 부유한 농민들은 농사용 가축을 네 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상태에서, 네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에게 근접해간다. 따라서 군 전체에서 이윤이 나는 농사에 규칙적으로 종사하면서, 외부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농민들이 1/10을 넘어선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들의 소득은 화폐로 표기되고, 따라서 상업적인 성격에 따른 농업을 전제로 한다. 대체로 농민들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손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전체 가구에서 1/4 이상이 정규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일시저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가구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에, 군 내 농민에서 절반 이상은 가난하고, 무마 농민 26% + 일마 농민 31.3% = 57.3%, 60%에 가깝게, 순전히 적자 상태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차 없는 강탈에 꾸준하게 시달린 끝에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는 없고, 농민들의 약 1/4는 이미 농업보다는 임금 노동에 더 많이 생계를 의존한다. 나머지 중간층 농민들은 어쨌든 정기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사를 짓는데, 외부 수입으로 보충하기 때문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

 

크리벤코가 제시한 그림이 실제 상태를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통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당연하게도 허구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거짓이었다. 전형적인 24가구 예산 가운데, 한 명의 잘사는 농민의 총소득 +197.34루블이 가난한 아홉 농가에서 적자를 메워주고, -21.38×9=192.42, 그래서 해당 군 내 10% 부농들이 57% 빈농들의 적자를 상쇄해줄 뿐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도 잉여를 산출해낸다는 점이다. 24곳 농가에서 평균 예산으로부터 44.14루블 잉여를 이끌어내고, 또는 신용 부채와 체납금 15.97루블을 차감한 크리벤코는 그저 중산층과 중하층 농민들의 쇠퇴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간층 농민들을 언급할 때만, 쇠퇴를 말할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농민 대중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수탈, 곧 상대적으로 크고, 튼튼하게 자리 잡은 농장을 소유한 소수 손에서 생산 수단이 집중된 결과로 인한 강탈을 목격한다. 직접적인 수탈을 무시했기 때문에 크리벤코는 농가 예산들에 따른 또 다른 아주 흥미로운 특징, 농민층 분화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을 마찬가지로 증명해준다는 걸 관찰하는 데 실패했다. 최상위에서 밑바닥까지 훑어보면, 산업, 곧 주로 노동력 판매로부터 얻는 소득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1. 부유한 농민: 6.5%

 

2. 중간층 농민: 18.8%

 

3. 가난한 농민: 23.6%

 

다른 한편으로, 맨 밑바닥에서 최상위 순서로 훑어보면, 농업에서 상품적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증가하고, 처분되는 농산품 비율이 늘어난다. 각 범주 별로 농업에서 거둬들이는 총 소득은

 

a. 3,861.7/1,774.4

 

b. 3,163.8/899.9

 

c. 689.9/175.24

 

분모는 소득 화폐 부문을 가리키며, 최상위 범주에서 맨 밑바닥으로 가면서, 각각 45.9%, 28.3%, 25.4%를 차지한다. 다시금 강탈 당한 농민들로부터 가져간 생산 수단이 어떻게 자본으로 변화하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크리벤코가 활용된 자료로부터 정확한 결론을 분명하게 이끌어낼 수는 없다. 철도와 같이 여행하는 그 지역 한 농민으로부터 들은 걸 기초로, 노브고로드 주 농민 농업에서 화폐적인 성격을 묘사한 뒤에야, 크리벤코에게는 저렴하게 풀을 베고, 좋은 가격에 팔고자, 특별한 능력들을 배양하고, 한 가지에 몰두하도록 만드는 환경, 곧 상품 경제라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상품 경제는 상업적인 재능을 일깨우고 세련되게 만드는 학교로 기능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소설 속 자본주의 고리대금업자 인물인, 콜파예프와 데루노프와 같이 그 외 다른 유형에서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이 되는 반면에, 우직하고, 둔한 사람들은 뒤처지고, 퇴화해서, 궁핍해진 끝에 농장 노동자 대열로 들어섰다.

 

전혀 다른 조건들이 지배적인 주 농업이 주 산업인 주, 보로네시 통계에서도 도달한 결론은 정확히 같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상품 경제 체제가 국가 전반에서 경제 생활에 따른 주된 배경이자, 특히 공동체 농민층에서 가장 큰 바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이 아주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품 경제만으로도 인민들과 농민층이 몰락해서 농장 노동자 대열에 들어선 프롤레타리아와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인 부르주아지로 분화됐다는, 곧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전환된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현실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감히 말하지도 못한다. 크리벤코는,

 

'일부 사람들은 같은 상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없는 임무라 여긴다. 문제를 다소 다르게 바라본다. 앞서 지적한대로, 자본주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역할이 모두를 아우르는데다,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그 외 다른 어떤 요인도 국민 경제에서 발생하는 변화에는 책임이 없고, 미래에 다른 어떤 해결책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현재 체계에 대한 정확하고, 직설적인 묘사 대신에, 농민층이 왜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로 갈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에, 크리벤코는 자본주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알맹이 없는 문장으로 문제를 일축시켜버렸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면 크리벤코는 다른 요인들이 결정적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적한 외에, 곧 착취자들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계급 투쟁 외에 다른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 문장을 두고 자신이 보여줬다고 여기는 걸까. 우스울지 몰라도, 인민의 벗들로부터 뭘 더 기대하겠는가.

 

'알다시피 맨 먼저 쇠락한 사람들은 토지가 빈약한 취약 농가들이다. 5데샤티나 미만 분여지를 보유한 농가들을 말한다. 그러나 15.7데샤티나 분여지를 확보한 전형적인 국유지 농민 농장들은 안정성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그 정도 소득인 80루블 순수익을 확보하고자, 농가에서는 추가로 5데샤티나를 임차하지만, 그건 그저 농가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악명 높은 토지 빈곤을 자본주의와 결부시키는 그런 '수정주의 사고'는 과연 무엇에 해당하는가. 조금밖에 못 가진 사람들은 그마저도 잃어버리는 반면에, 각각 15.7데샤티나씩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얻게 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몰락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유해진다는 말을 아무 의미 없이 바꿔 말한 데 불과하다. 무엇도 해명해주지 못하는 토지 빈곤에 대한 의미 없는 말과 결별해야 할 가장 좋은 시점이 다가왔다. 단지 과정만을 묘사해줄 뿐이며, 더군다나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토지만을 가지고 말할 게 아니라, 생산 수단 전반에 대해 말해야만 하며, 농민들이 토지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토지로부터 분리됐고, 날로 발전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수탈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자신의 철학적인 담론을 마무리 지으며, 농업이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자연 발생성을 유지하며 제조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고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건, 인위적으로 분리된 산업을 창출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노동자를 토지와 생산 도굴부터 분리시키는 건 자본주의로부터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증진시키는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게 전부다.'

 

여기서 크리벤코는 다시, 노동자가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착취자 손아귀로 넘어간다면, 노동자가 가난하기 때문이며, 착취자가 토지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 심오한 사상을 높게 염두에 뒀다. 그리고 같은 부류의 철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결정적 요인으로 '편협하게' 간주해서 드러낸다고 비난을 해댄다. 농민과 수공업자 분화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한 번 더 고찰해봤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문제를 어떻게 묘사하고, 설명하는지를 분명하게 해둘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사회학자가 보기에 농민들은 가난해지는 반면에, 돈을 좇는 사람들과 착취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윤을 이끌어낸다는 걸 의미하는 사실 관계들이,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상품 생산 자체의 필요에 따른 상품 생산자들의 부르주아적인 분화를 의미한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자산 계급과 무산 계급 사이에서 투쟁이 공장에서 뿐만 아니라, 머나먼 오지 마을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논지, 모든 곳에서 같은 투쟁은 상품 경제 결과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투쟁이라는 논지 근거로 작용하는 사실 관계들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젬스트보 통계가 제공한 자료 덕분에 정확히 서술될 수 있었던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에 따른 해체와 탈농민화는 국내 현실을 바라보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인식, 다시 말해 농민과 수공업자가 그러한 단어에서 '단정적인' 의미에서 소생산자, 곧 소부르주아라는 인식에 따른 정확성에서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해준다. 같은 논지는 소생산자들이 살아가는 상품 경제 환경이나 그러한 환경 때문에 소생산자들이 자본주의적으로 분화되는 걸 이해하지 못한 옛 농민 사회주의에 맞서는 노동 계급 사회주의 이론에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지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자신의 주장을 여기에 집중시켜야 했을 뿐더러, 정치경제학 시각에서도 국내 상품 경제 체제가 아니며, 그래서 농민층 해체가 상품 경제 체제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닐 뿐 아니라, 인민 대중에 따른 강탈과 노동 인민에 다른 착취는 농민을 포함한 한 국가 사회 경제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조인 부르주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설명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게나, 신사 양반들.

 

사회민주주의 이론에서 실증적인 증거로 택하기를 선호한 건 농민과 수공업 경제에 대한 통계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민의 벗들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대조하는 데 그쳤더라면, 그건 유물론적인 방법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기에 덧붙여 인민주의적인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한 국가에서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현실에서 인민주의자들의 물질적인 토대를 증명해야만 한다. 한 국가에서 농민과 수공업자 경제 대한 예증과 사례들은 농민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인민의 벗들이 농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농촌 경제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해주고, 따라서 인민의 벗들을 소부르주아에 따른 이념가들로 분류하는 게 적합하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사상과 계획들이 소부르주아들의 이해 관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드러내준다. 인민의 벗들의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면, 훨씬 더 분명해지는 연관 관계는 도대체 급진적인 사상들이 왜 그토록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인민의 벗들의 정치적인 노예 근성과 기꺼이 타협할 준비가 된 태도 역시도 훌륭하게 설명해준다.

 

마막으로, 자본주의가 아직 채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와 같은 경제학적인 측면들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인민주의자들은 보통 자신들의 이론을 위한 자료를 끌어오곤 하는 그런 경제학에 대한 연구와 서술은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해 이곳 인민들 사이에 아주 만연한 반발 의식에 실질적으로 대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부터 더 나아가, 대규모 자본주의를 발전적으로 간주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도 같은 현 체제에 맞서 싸우는 토대로 삼곳 피어하는 건, 다름 아닌 대규모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한 국가의 급진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농민 대중의 이익을 무시한 채로 '모든 농민을 공장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바란다는' 등의 비난을 가한다. 모든 주장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실제 있는 그대로 판단하면서도, 시골 지역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놀라운만큼 비논리적이고, 이상한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는 실제 농촌과 그곳의 실제 경제 상태를 보여주기보다 더 좋은 답변을 있을 수 없다. 농촌에 따른 경제 환경을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내 농촌이 따로 떨어진 작은 지역들에서 사회적·경제적인 생활을 규정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 또는 중앙 시장에서 작은 부문들의 체계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각각의 지역에서 시장이 규제하는 사회적·경제적 구조에 대체로 특징적인 모든 현상을 찾을 수 있다. 한때 동등하고, 가부장적이었던 직접 생산자들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분화되는 걸 알아내며, 노동 인민 주위에 그물을 치고, 생명소를 빨아가는 자본, 특히 상인 자본에 따른 부상을 알게 된다. 급진주의자들이 제시한 농민 경제에 관한 묘사를 농촌에 따른 경제 생활에 대한 정확한 일차 자료와 대비해보면, 그들의 비판적 사고 체계에서는 각 지역 시장에서 떼 지어 모여 있는 장사치들과 행상, 흥정꾼들, 시장을 장악한 채 노동 인민들을 가차 없이 억압하는 소착취자 무리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대개 '더 이상 농민들은 없고, 장사치만 있다.'는 언급 정도만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 그 말은 아주 옳다.'

 

'더 이상 농민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인들 모두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집단, 곧 정확한 정치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영리 기업에 종사하고,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타인 노동을 점취하는 사람들과 취급하려고 시도해보기를 바란다. 해당 집단에서 경제적인 힘과 지역 전체에 따른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정확히 수치로 표기하려고 노력해보라. 그런 다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노동하기 때문에 더 이상 농민이 아니게 된 사람들을 정반대 집단으로 설정해보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지한 조사를 위한 기초적인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켜나가려 애쓰다 보면, 부르주아적인 분화라는 아주 생생한 그림을 얻게 될 테고, 더 이상 인민 제도라는 신화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테니 말이다. 소규모 시골 작취자들 무리는 끔찍한 세력을 대표한다. 특히 고립된 채 혼자 일하는 임금 노동자를 억압하고, 자신들에게 얽어매어 일말의 구제받을 희망조차 앗아가기 때문에 끔찍하다. 앞서 묘사된 체계의 특징인 낮은 노동 생산성과 의사 소통 수단에 따른 부재에서 기인한 시골에 따른 야만적인 환경으로 비춰볼 때도, 그들로부터 착취는 노동 강탈일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인간 존엄에 따른 아시아적인 침해에도 해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실제 시골을 자본주의와 비교해본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역할을 발전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을 전국적인 수준에서 단일 시장으로 한데 끌어모으고, 선의를 가진 소규모 착취자 무리를 대신해서, 한 줌 커다란 '조국의 대들보들'을 창조해내며, 노동을 사회화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한편, 지역 착취자들로부터 노동 인민에 따른 예속을 박살내고, 대규모 자본에 종속시킨다. 여기서 종속은 노동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야만성, 신체를 손상당한 여성과 아이들 등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과거 예속과 비교해볼 때 발전적이다. 그 이유는 노동 계급 의식을 각성시키고,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는 불만을 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키며, 뿔뿔이 흩어진 채 벌어지던 사소하고, 무분별한 반란을 모든 노동 인민 해방을 위한 조직화된 계급 투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같은 투쟁은 대규모 자본주의에 따른 존재라는 바로 그러한 조건 자체로부터 동력이 생겨나며, 따라서 의심할 나위 없이 일정한 성공을 확신한다.

 

농민 대중을 무시한다는 비난에 대한 응답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에 따른 다음과 같은 말들로부터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비판은 사슬을 장식하고 있던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렸는데, 인간의 상상 속 장식물이 벗겨진 족쇄를 그대로 차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슬을 벗어던져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향해 손을 뻗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촌을 장식한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리고, 이상화와 환상에 맞서 싸우며, 그걸 파괴하고자 작업을 수행해낸다. 농민 대중을 현재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노예화 상태에 머무리지 않도록 하고, 어디서나 노동 인민을 속박하는 사슬 정체가 무엇이며, 사슬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프롤레타리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그래서 떨쳐일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현실의 꽃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한다.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그토록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처한 위치 덕분에 스스로 계급 의식을 획득하고, 계급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노동 인민 대표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사상을 펼쳐놓는 순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을 공장의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원한다는 비난에 처한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정부와 사회, 곧 도처에서 노동 인민을 속박해온 부르주아 기관들에, 노동 인민의 해방을 향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고도 줏대 없는 인종들은 건방지게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등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

 

인민의 벗들의 이론적인 견해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슨 수로 자신들이 불을 끄겠다고 나서는 걸까. 인민의 벗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제안 대신에 어떤 화롤를 제시하고 있을까. 유자코프 선생은 농업부, 러시아 부, 10에서,

 

 

'농민 은행 개편, 식민화 부서 설립, 인민 농업을 위한 국유지 토지 임대차 규제, 토지 임대에 따른 연구와 규제 등이 인민 농업을 회복시키고, 막 생겨나는 금권 정치에 따른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인민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

 

이라고 말한다.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점이란 글에서는 '인민 농업 회복'을 위한 해당 계획들이 뒤이은 '최초로, 그러나 필수적인 조치들'로부터 보완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마을 공동체에 당장 지장을 주는 모든 규제 제거, 보호 감독에 따른 면제, 농업의 사회화에 따른 공동 경작의 채택, 땅에서 얻는 원료 공동체 가공 개발' 같은 조치들이다. 크리벤코 선생과 카리셰프 선생은 여기에다 '저금리 신용, 집단 농장 형태 농업, 보장된 시장, 고용주 이윤을 없앨 가망성', '값싼 엔진 기관을 비롯한 기술 혁신 창안', '박물관, 창고, 대리점'을 덧붙인다. 해당 강령을 검토해보면, 신사 양반들은 현대 사회 입장을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체제 입장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치고, 끼워맞춰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인민의 벗들이 내놓은 모든 발전적인 조치들, 저금리 신용, 기계 개량, 은행 등은 부르주아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현재 체계에서는 어떠한 개혁도 쓸모가 없고, 신용, 이민, 세금 개혁, 모든 토지에 따른 농민에게로 이전은 무엇 하나 눈에 띄게 바꾸지도 못하며, 오히려 반대로 과도하 보고 감독과 봉건적이 부과금 존속, 농민 토지 예속 등으로부터 지체된 자본주의 경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갈 거라던 니콜라이 온 말은 가장 귀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인민의 벗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건 지극히 옳았다. 니콜라이 온에게 인민의 벗은, 바실치코프 왕자같이 신용 확대, 발전을 소망하는 경제학자들로 부르주아 같은 자유주의적인 걸 바라면서, 자본주의 관계에 따른 발전과 강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민의 벗들은 농민층 내 생산 관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를 공개적인 장으로 끌어내려 애쓰거나, 적대로부터 예속화된 사람들 쪽에 합류해서, 투쟁에 나서는 걸 도우려 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조치들로부터 투쟁을 멈추게 하면서부터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를 꿈꾼다. 같은 모든 조치들에 다른 결과물은 당연히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신용, 개량, 은행, 비슷한 '발전적인' 조치들이 오로지 적절히 운영되고, 틀이 잡힌 농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확실한 저축을 보유한 사람들, 곧 극소수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면서, 앞서 제시된 분화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농민 은행과 유사 기관들을 아무리 개편하더라도, 그동안 빼앗겨왔고, 또 계속해서 빼앗기는 인민 대중 입장에서는 적절한 농업 수단은 물론이고, 생계를 이을 수단조차 부족하다는,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점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한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마찬가지다. 유자코프는 공동 경작을 가리켜, '농업에 따른 사회화'라고 불렀다. 매우 웃기는 말로, 사회화는 단일 마을 경제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생산이 조직되는 걸 요구하고, 생산 수단을 독점해서 현재 국내에서 사회 경제를 주도하는 착취자들에 따른 재산 몰수를 필요로 한다. 시시한 속물적인 훈계가 아닌, 거듭되는 투쟁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조치들이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반쪽짜리 조치들로 변모해서는, 인정 많고 관대한 부르주아에게 근근이 연명해가는 동안에, 피착취자들로부터 투쟁보다는 몇몇 개인들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개량 조치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신사 양반들은 러시아인 삶에서도 적대를 숨기고자, 얼마나 터무니 없는 시도를 하는지는 물론 현재 투쟁을 끝내려는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그럴 텐데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는 거나 다름 없다. 그리벤코 주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층이 공장주들의 기업을 지휘하자, 지식층은 대중 산업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지식층의 철학 전체는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만, 만약 착취자들이 없다면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징징댄다. 과연 크리벤코는 쓸데없는 문구로 무슨 뜻을 전달하려던 걸까. 해를 거듭할수록, 국내 대학과 기타 교육 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먹여 살려줄 누군가를 찾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지식인'이라는 상표를 찍어내고 있다는 말을 부인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국내에서 '지식인'을 지탱할 수단을 소유한 건, 오직 소수 부르주아뿐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인민의 벗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에, 국내 부르주아 지식계급이 사라지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 '만약' 부르주아 지식 게급이 아니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부르주아 지식 계급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국내에도 부르주아 계급도, 자본주의도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만약''그리고'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데 만족한다. 더군다나 신사 양반들은 자본주의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태는 걸 거부할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잘못된 무언가를 들여다보기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일정한 결함들이 제거되면, 인민의 벗들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게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하다. 그렇다면 크리벤코의 다음 발언은 어떨까.

 

'자본주의 생산과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화는 공장제 수공업이 인민들로부터 오로지 결별만 하는 출구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인민들의 삶으로 들어와 농업과 원료 산업으로 더 가깝게 접근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사될 수 있고,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크리벤코는 미하일로프스키 선생과 비교해봤을 때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면 같은 수 많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제를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고, 꼼지락대기만 하다가, 부드럽고, 미려한 문장들로 지면을 채운다면, 사업가 개성으로 실용적인 인물인 크리벤코는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터무니없는 견해 일체를 거리낌도 없이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자본주의는 인민의 삶으로 들어올 수 없다.'

 

노동 인민이 생산 수단과 결별하지 않고서도 자본주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드는 상황이다. 적어도 인민의 벗들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주 명확해졌으니까 말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가 없는 상품 경제, 강탈도, 착취도 없이 인간적인 지주와 자유주의적인 관료들의 팔 아래서 평화롭게 무위도식하는 소부르주아 계급만이 있는 자본주의를 원한다. 국내에 혜택을 줄 의도를 지닌 부서 관료들의 진지한 태도에 힘입은 인민의 벗들은 늑대가 욕심을 감추고 양이 가죽을 감추듯이, 자신들의 속셈을 어떻게 감출지 궁리한다. 그래서 속셈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우리의 문화 용병들글로 눈을 돌려야 한다.크리벤코는 집단 농장과 국유 형태에 따른 산업은 현 상황에서도 그다지 품어볼 만한 상상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벤코에게는 구상은 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인상만 느껴진다. 크리벤코는 100루블이 넘지 않는 소액의 지분으로 한 합자 회사로부터 돈 강 지역을 기술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어느 기술자의 말을 꺼낸다. 크리벤코는 기술자에게 권유를 받는다.

 

"지분은 사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 소유가 됩니다. 회사에 고용된 마을 주민 일부는 통상적인 임금을 받고, 마을 공동체는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보장을 해줍니다."

 

정말로 경영의 귀재가 아닌가. 인민의 삶에 자본주의가 존경스럽도록 단순하고, 쉽게 도입되고, 파멸적인 특성들이 모두 제거되는 셈이니 말이다. 단지 요구되는 거라곤, 시골 부자들이 공동체로부터 지분을 사들이고, 기업으로부터 배당금을 받는 게 전부이며, 그 속에서 공동체 주민 일부는 일자리를 얻고, 토지와 유대 관계를 보장받는다. 그런 유대 관계는 토지로부터 생계를 유지받기에는 불충분하지만, 주민들을 지역에 묶어둔 채, 지역 자본주의 기업에 따른 노예로 만들고, 주민들을 주인도 바꾸지 못하기에는 충분하다. 여기서 주인이란, 곧 자본가를 말하며,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을 달리 부를 방도가 없기 때문에, 아주 타당한 표기이다. 독자들은 일고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는 헛소리에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한 본인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연구할 가치와 필요는 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 관계들을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한 국가에서도 아주 널리 퍼져 있는 사회 통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국내에서 봉건적인 생산 양식으로부터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 전환이 토지로부터 생계를 꾸려나가지도 못하고,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된 바로 이 순간까지도 농민은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으며, 농민으로 하여금 예전에 좋았던 시절에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었거나, 수레꾼 같은 독립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런 유형에 따른 고용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덕분에 상대적으로는 좋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노동이라 여겨졌던 외부 고용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고, 또 계속해서 초래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농민들은 오늘날과 비교해볼 때도, 일정 정도 안녕을 보장받았었다. 십만 명에 달하는 귀족 경찰들과 국내 토지를 끌어모으던 초창기 부르주아들의 보호 아래에서 평온하고도,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농노로서 안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그러한 체계의 그늘을 간단히 무시한 채로, 이상화하고, 환상을 품는다. 여기서 환상이라고 표현한 건, 그 체계가 오래전에 작동을 멈춰버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따른 대규모 재산 강탈을 불러온, 과거 고용을 족쇄에서 풀려난 일손들에 대한 착취로 변화시킨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파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과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그러한 연결 고리를 단독으로 보장해주는 농노제를 원하지는 않는다. 농노제는 그 연결 고리를 걸 수 없도록 만드는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붕괴됐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멀리 내쫓지 않은 외부 고용, 노동이 시장을 위해 이뤄지는 반면에, 경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자본을 창출하지 않으며 인민 대중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외부 고용을 바란다. 사회학에서 주관적인 방법론에나 들어맞을 법한 같은 주장에 대해,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여기저기서 좋은 것만 취하고 싶어한다. 물론 실제로는 유치한 바람은 오직 현실을 무시하는 반동적인 환상, 새로운 체계로부터 정말로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절반은 농노, 절반은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과거 훌륭한 체계, 곧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공포로 가득차고 벗어날 수 없는 체계를 영속화하려는 조치들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뿐이다. 반동들 사이에서 인민의 벗들을 구분해주는 같은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증명하고자, 두 가지를 인용해보자.

 

모스크바 젬스트보 통계에서 포돌스크 군에 사는 K 여사라는 사람의 농장에 대한 묘사를 읽을 수 있다. 묘사 자체가 아니라 농장이 모스크바 통계학자들과, V.V. 보론초프 선생 모두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V. 오를로프 선생은 유명한 K 여사 농장에 대해 '농업이 건강한 상태에 있고, 개인 토지 소유주들에 따른 농장들도 더 잘 운영되고 있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논지에서 확실한 실제 확인 사례로 여겨졌다. 여인의 농장에 대한 오를로프 주장에 비춰볼 때, 그녀는 겨울에 밀가루를 꿔주는 대가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지역 농민들의 노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인은 농민들에게 특히나 친절하게 굴며, 도움을 줬고, 그래서 농민들은 읍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할 뿐 아니라, 거의 새로운 추수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의문은 바로 해당 대목에서 고개를 든다. N. 카블루코프와 오를로프가 생각하듯이, 그런 방식이 농민과 지주 간 적대적인 이해 관계를 할 수 없도록 만들까.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K 여사는 농민들의 노동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는 전혀 사라지지도 않았다. K 여사는 착취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친절함 뒤에 감춰진 착취를 보지 못한 데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오를로프는 그렇지 않았다. 오를로프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보이는 친절함에 황홀해 하면서 공장 소유주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잡화점과 주거 등을 제공해주는 사례들을 열광적으로 들려주는 서구 박애주의자들과 정확히 같은 입장을 취한다. 적대적인 이해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사실들의 존재로부터, 결론을 끌어온다는 건,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바로 첫 핵심이다.

 

둘째 핵심은 오를로프 선생의 설명으로부터 K 여사의 농민들이 뛰어난 수확량 덕분에 가축을 확보했고, 유복한 농장을 소유하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유복한 농민들은 '거의'가 아니라, '완전히' 번창하게 됐고, '다수'가 아닌 '유복한 농민들' 모두가 새로운 추수가 거의 되돌아올 때까지가 아니라, 정확히 그 시기까지 충분한 곡식을 보유하게 됐다고 추정해보자. 농민들은 충분한 토지와 '목장 및 목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도 추정해보자.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농민들은 K 여사에게 토지를 임차한 뒤, 노동으로 그 대가를 지급한다. 그럴 경우에, 곧 농민 농업이 정말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경우, 오를로프는 정말로 농민들이 스스로 동의해서, 지금 하고 있듯이 K 여사의 사유지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철저히,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수행할 거라고 믿는 걸까. 또는 어쩌면 어머니 같은 보살핌으로, 농민들에게서 피땀을 뽑아내는 친절한 여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결국 목초지와 목장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절망적인 현재 상태보다 더 강력한 도기 부여가 된다고 믿는 걸까.

 

분명 인민의 벗들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진정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로 착취를 없애기보다는 완화시키기를 바라고, 결속보다는 회유를 원한다. 편협한 사회민주주의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된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에는 지주와 자본가들이 공정하게 대해주기만 한다면, '번영을 구가하는' 농민들이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거라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 더 들어보자. 유자코프는러시아 인민의 토지 소유 할당량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글에서, 인민들의 토지 소유, 곧 자유주의자들의 용어로는, 자본주의와 착취를 배제하는 토지 소유에 따른 규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었다. 크리벤코에 따른 탁월한 설명이 있는 뒤, 역시나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지주의 신분으로, 크리벤코는 분여지로부터 '식량과 지불금'을 충당하는 반면에, 나머지 일자리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크리벤코는 농민이 토지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부터, 한쪽으로는 분여지에서 지주로부터, 다른 쪽으로는 일자리에서 자본가로부터 중복된 착취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단지 운명이라고 체념해버리고 만다. 중복된 착취에 시달리는 소생산자들에 따른 같은 상태와 생활 조건은 더군다나 필연적으로 주눅 들고 짓밟힌 심리를 생기도록 만들어, 피억압 계급에 따른 승리는 고사하고, 투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절반만 중세적인 상황은 인민의 벗들의 전망과 이상의 극치이다. 그래서 국내 개혁 이후로,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옛날 국내를 떠받치던 기두으로, 가부장적인 절반 농노 상태에 따른 농민층을 뿌리째 뽑아, 절반 농노 상태에 농민층들을 중세와 절반은 봉건적인 상황에서 끌어내고, 현대 순수한 자본주의적인 환경에 가져다놓고는 농민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오랜 고향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국내 곳곳을 헤매다 노예 사슬을 끊고, 지역 일자리 제공자에게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들면서, 전체적인 계급 착취에 따른 토대가 독사 같이 특정 인물의 약탈과는 거리가 먼 계급 착취라는 점을 드러내고, 자본주의가 가축 수준으로 주눅들고, 굴복한 나머지 농민 인구를 한꺼번에 점점 더 복잡한 사회적·정치적인 삶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자, 소부르주아 기사님들은 옛 기둥들의 몰락과 파괴에 대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지금은 눈이 멀어, 새로운 삶에 대한 양식에서 혁명적인 측면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전 착취 체제에 전혀 묶여 있지도 않으면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위치에 있는 새로운 사회 세력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창출해내는지를 전혀 보지 못함에도, 예전의 좋았던 시절에 대해 울부짖는 모습을 여전히 계속해서 보여주고 만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현 체제에서도 어떠한 급진적인 변화도 바라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인민의 벗들은 현존하는 토대에서부터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에 전적으로 만족했으며, 실제로 크리벤코는 그런 조치들을 고안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토착 하급 관리 같은 행정 능력들을 과시했다. 크리벤코는,

 

'대체로 인민 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와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문제는 특별한 조사와 산업을 인민의 삶에 적용할 수 있거나, 적용 과정에서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칠 수 있다는 걸, 나누는 게 요구된다.'

 

크리벤코는 많은 산업들을 자본주의화되지 않거나, 이미 자본주의화가 발생하고, 대규모 산업과 생존을 놓고 경쟁할 수 있도록 나누면서, 그런 분할에 따른 사례를 직접 제시한다. 또한 이 행정가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경우에 소생산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변동으로 인해, 소생산자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지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역 시장에 따른 팽창과 보다 더 큰 시장으로 합병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술 발전으로부터도 그럴 수 있을까. 또는 기술 발전에 따라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일 필요는 없는 걸까. 마지막으로, 크리벤코는 대규모 생산 조직도 요구한다. 명백히 여기서 필요한 건, 대규모 생산 조직이고, 고정 자본과 유동 자본, 기계 등이나 또는 같은 조건과 균형을 맞출 다른 무언가, 곧 값싼 신용, 불필요한 중간 상인들의 제거, 집단 농장 형태에 따른 농업과 고용주들의 이윤을 처분할 여지, 시장 확보, 값싼 엔진 기관 개발, 그 외 기술적인 개선, 또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에 따른 일부 삭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종류의 논리는 말로는 드넓은 이상을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틀에 박힌 자유주의를 드러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주 특징적이다. 앞서 철학자는 고용주들에 따른 이윤을 처분할 여지와 대규모 농업에 따른 조직화를 다름 아닌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주 훌륭하다.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바라기도 하니까.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어떻게 달성하기를 원하는가. 고용주 없이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고자, 우선 사회적인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를 철폐하고, 공동체, 공산주의 구조로 대체하는 게 필요하다. 그 아래에서는 현재와 같이 생산이 시장으로부터 규율되는 게 아니라, 생산자 자신, 노동자 조직 자체로부터 규율되고, 생산 수단은 사적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부터 소유된다. 사적 전유로부터, 공동체적인 전유로 변화는 명백히 우선 생산 형태에 따른 변화를 필요로 하고, 소생산자들과 분리되어 있고, 규모가 작으며, 고립된 생산 과정이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합쳐지는 게 필요로 해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바로 그 물질적인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스스로 자본주의를 토대로 삼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인민의 벗들은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가. 인민의 벗들은 침묵한다. 인민의 벗들은 상품 경제에 따른 철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분명히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은 사회적 생산 체계에 따른 경계를 절대 넘어설 수도 없다. 더구나 고용주에 따른 이윤을 철페하고자,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윤을 획득하는 고용주들에게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을 떠받치는 기둥들을 빼앗아 오고자, 부르주아 체제에 맞선 대중적인 혁명 운동이 필요하다. 해당 체제와는 전혀 유대 관계가 없는 프롤레타리아 노동 계급만이 할 수 있는 운동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머릿 속에 투쟁을 전혀 그리고 있지도 않고, 고용주들 스스로 관리 기관들 말고도 다른 유형에서 공적인 인물들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점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분명 인민의 벗들은 고용주 이윤에 맞선 어떠한 진지한 조치들을 취할 의향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 크리벤코는 단지 자신의 혀가 자신을 압도하는 걸 허락했을 뿐이다. 그리고서 크리벤코는 곧장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고용주 이윤을 처분할 여지' 같은 다른 무언가, 곧 신용과 조직된 홍보, 기술적인 개선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모든 건 아주 만족스럽게 정리된다. 이윤을 얻을 신성한 권리를 철폐하는 대신에, 다시 말해 고용주 양반들을 아주 화나게 할 절차 대신에, 자본주의에 싸움을 위한 더 나은 무기를 제공하고, 인민의 소부르주아들을 강화하고, 굳건히 하며, 발전시킬 뿐인 아주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소부르주아만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의심을 전혀 남기지 않고자, 크리벤코는 인상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고용주 이윤 철폐는 임금의 삭감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

 

얼핏 듣기에는 완전히 횡설수설처럼 드린다. 그러나 아니다. 소부르주아 사상을 일관되게 적용한 표현이다. 크리벤코는 거대 자본과 소자본 사이에서 투쟁 같은 사실을 관찰하며, 진정한 인민의 벗으로 당연히 소자본가 쪽에 선다.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소자본가에 따른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임금 삭감이라는 점을 들은 바 있었다. 노동일 연장과 함께, 국내 수 많은 산업들에서 아주 정확하게 보여지고, 확인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소자본가들을 구하기를 바랐던 크리벤코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 일부 삭감을 제안한다. 고용주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윤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말이 들려온다. 고용주 양반들은 고용주들에 맞서 임금 삭감 투쟁을 계획하는 훌륭한 행정가를 기꺼이 재무 장관 자리에 앉히려 든다. 순수한 혈통에 따른 부르주아들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뤄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러시아 부의 자비롭고, 자유주의적인 행정가들을 슬쩍 쳐다보는 사례 말고도, 더 있다. 러시아 부, 12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독점 문제를 다룬 글이다. 글에서 크리벤코는 독점과 '신디케이트' 같은 발전된 산업 이상'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해당 제도들이 자본가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국내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 놀랍다고 표현했다.

 

'설탕이나, 석유 산업은 아직까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설탕과 등유 소비는 여전히 사실상 태동기에 머무르고 있고,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해당 상품들에 따른 일인 당 소비는 미미하다고 판단된다. 해당 산업 분야들은 발전할 여지가 여전히 아주 크고, 상당한 액수에서 자본을 흡수한다고 보인다.'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순간,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 위축에 대해러시아 부가 가장 선호하는 발상이 뭐였는지를 잊어버렸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이 여전히 상당한 발전 전망을 갖고 있고, 위축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크리벤코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소비 규모가 더 큰 서구와 비교했다. 이유는 뭘까. 서구 문화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서로 간 더욱 빈번한 교류로도 이끌고, 개별적인 지역들이 중세식으로 고립되어 있던 상황을 무너뜨린 자본주의 기술 발전, 상품 경제와 교환 발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해당 문화에 따른 물질적인 토대는 무엇일까. 절반인 중세적인 농민층에서는 아직 여전히 농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쪼개져 있지 않았던 대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문화는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크리벤코는 국내 생활상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했더라면, 크리벤코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지역에서 농민 인구가 필요로 하는 수준들이 순수한 농업 지역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의 삶 전체에서 산업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까지 발전한 국내 수공업을 연구했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거론하는 부분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하찮은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인민의 벗들에게 있어 해명이란 단지 문화나 전반적인 삶이 점점 복잡해진다든지 하는 일뿐이며, 해당 문화와 복잡한 물질적 토대에 대해서는 연구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이 적어도 농촌 경제 상태를 검토라도 해봤더라면,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게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농민층 분화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민의 벗들에게는 시장 발달이 결코 부르주아 계급 발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틀림없이 생각했다. 앞서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글에서도, 계속해서 전반적으로 생산 발전 수준이 낮고, 진취성과 자발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독점은 국강 경쟁력 발전을 훨씬 더 지연시킨다고 주장했다. 이에 담배 독점을 거론하면서, 인민 유통 가운데 15,400만 루블을 앗아간다고 추산했다. 경제 체제에 따른 토대가 상품 경제이고, 선도하는 세력은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듯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점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크리벤코는 글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이 독점 방해를 받고 있다는 말하는 대신에, '국가'를 거론하고, 상품과 부르주아 유통을 말하는 대신에, '인민' 유통을 들먹인다. 부르주아라면, 두 용어 사이에서 큰 차이를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그 차이란 정말로 얼마나 극명한지를 보여주고자, 인민의 벗들의 시각에서 권위 있는 잡지인,조국 연보에 실린,금권 정치와 그 토대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마를로에 따르면, 금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유주의적인 정부 형태에 대한 사랑, 아니면 취득의 자유라는 원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특징을 받아들여서, 8년 또는 10년 전 입장이 어땠는지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 측면에 있어서 엄청난 발걸음을 내디뎌왔다는 점을 발견한다. 어떤 신문이나, 잡지를 봐도, 그들 모두 일정 정도 민주주의 원칙을 대표한다고 느껴지고, 인민의 이익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적인 견해들과 나란히, 심지어 '의존해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간에, 누누이 금권 정치적인 야망들이 추구된다.'

 

여기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상인들이 재무 장관에게 했던 인사말을 인용하면서, 상인들은 금융에 관한 국내 입장을 사기업에 따른 아주 폭넓은 확대 여지에다 바탕을 두면서부터 좋은 결실을

맺게 된 데 대해 국내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장 신망 있는 조직이 보내는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금권주의 요소들과 성향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의 감동들이 여전히 생생하고, 머나먼 과거에서 여러분 선조들은 자신의 금권 정치, 곧 국내 사기업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진취성과 자발성'의 발달헤 힘입은 인민 유통과 국가 경쟁력 발전을 말하면서도, 왜 그러한 발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 진취성과 자발성에 따른 착취적인 성격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물론 독점이나 그와 비슷한 제도들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동 인민에 대한 상태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 인민은 모든 중세적인 속박 위에서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현대 부르주아적인 속박으로부터 족쇄가 채워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에 따른 폐지가 전체 인민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경제가 국가의 경제적인 삶의 토대가 된 상황에서 중세적인 제도에 따른 생존은 자본주의에 따른 비참한 현실에다 훨씬 더 가혹한 중세적인 고통을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히 폐지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더 빠르고, 더 급진적일수록 좋다는 건 분명하다. 부르주아 사회가 물려받은 절반은 봉건적인 속박들을 제거하면서부터 노동 계급의 손발을 풀어주고, 부르주아 계급에게 대항하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말이다. 사실을 숨김 없이 말하려면, 바로 이런 말을 꺼냈어야만 했다. 부르주아 체제에 맞서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독점과 그 밖에 모든 종류로 중세적인 제약들을 폐지하는 건, 절대적으로 필수적라고 말이다. 딱 거기까지다. 부르주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중세와 봉건 제도에 맞서 전체 인민들에 따른 이해 관계가 서로 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품을 수 없었고, 인민들 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깊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망각할 수 없었다.

 

인민의 벗들이 곤혹스러워 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민의 벗들은 농촌 요구에 대해 말을 끄집어냈는데, 특히 크리벤코는,

 

'몇 년 전 몇몇 신문들이 시골에서 필요로 하는 직업들과 지식인들 유형을 논하는 과정에서 목록이 아주 길고 다양하며, 남녀 의사들과, 보조 의사들, 변호사, 교사, 도서관 사서, 서점 주인, 농경 경제학자,

삼림 전문가, 농업 전문가, 아주 다양한 분야 기술자들, 신용 기관 모집인과 관리자, 창고지기 등 거의 모든 직업군을 포괄한다는 게 증명됐다.'

 

여기서 말을 멈추고, 활동이 경제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지식인들과 삼림 및 농업 전문가, 기술자 등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농촌에서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농촌이란 과연 어떤 농촌을 말하는가. 저축한 돈이 있어서, 크리벤코는 기꺼이 지식인들이라 부르는 전문가들 모두에게 각자 기여한 대가를 지부할 수 있는 지주들과 기업형 농민들에게 농촌을 말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농촌이란 실제로는 오랫동안 전문가들과 신용, 창고에 목말랐고, 한 국가에서 모든 경제 문헌에서도 그걸 증언해준다. 그러나 훨씬 더 방대한 또 다른 농촌이 존재하고, 그런 사실을 좀 더 자주 떠올려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농촌이란, 몰락하고, 갈취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농민들의 농촌이다. 저축한 돈이라고는 전혀 없어 지식인들의 노동에 대가를 지불할 수 없을 뿐더러, 굶어죽지 않을 만큼 빵조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이 창고를 지어서, 돕고자 하는 농촌은 바로 그런 곳이다. 말도 없고, 있어도 고작 한 마리뿐인 농민들이 거기에다 뭘 보관한다는 말인가. 과거 1891년에, 당신들에게는 빈농들이 인간미 넘치고, 자유주의적인 처방을 완수할 무렵, 집이나 여관, 가게에다 일상적인 창고를 설치했던 시골과 도시 부농들에게 말을 몽땅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이제 빈농들에게 남은 건 자신의 노동력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상품을 보관할 창고는 아직까지 국내 관료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진부한지에 대해서는, 농민층 내 기술적인 발전에 대한 감상적인 사고와 바로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착취에 눈을 감는 행위보다 더 두드러진 증거를 찾아보기란 어렵다.러시아 부, 2에서 백치 자유주의자 열정을 지닌 카리셰프는 '아메리카' 귀리, 호밀, 말먹이 귀리 등 개량종 씨앗이 농장에서 확산된, 농민 농업에서 완벽하고, 개선을 이룬 사례들로 말한다. 이어서 일부 지역에서 농민들은 종자를 키울 특수한 땅을 별도로 떼어놓고, 조심스럽게 간 뒤, 거기에다 미리 선별한 곡물 표본들을 손으로 심는다. 그리고 경운기, 가벼운 쟁기, 탈곡기, 키질 기계, 종자 분류기 같은 개량 농기구와 기계 영역에서 많고 다양한 혁신들이 관찰된다. 카리셰프는 인산 비료, 아교 반죽, 비둘기 배설물 같은 '아주 다양한 종류의 비료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카리셰프는 지방 주재원들이 인산 비료 판매를 위해 마을에 젬스트보 상점들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V.V. 보론초프의농민 농업에서 발전적 경향에서 자료를 인용한, 카리셰프 글은 모든 감동적인 발전에 감화받은 나머지, 거의 열정 수준으로 치닫고 말았다.

 

'간략하게만 제시할 수 있었던 이런 보고서들은 용기를 주는 동시에 애처롭다고 느껴진다. 용기를 준다는 건, 사람들이 비록 가난하고, 빚에 시달리며, 상당 수는 말 한 마리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고, 절망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의 직업을 바꾸지 않은 채 여전히 땅에 대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적절히 일구는 일에 자신들의 미래와 힘과 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경작과 씨 뿌리기, 농기구, 비료 등에 있어 새로운 방식들을 연구하며, 자신들을 먹여 살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조만간 백 배 보상을 안겨줄, 모든 방안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리고 애처롭다는 건, 각성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학, 박물관, 창고, 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우리들이 농업을 개선하고자, 분투하는 농민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 농민이 마음대로 할용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물론 아주 초보적인 형태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발달은 몹시 느리다. 농민은 모범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가 실험용으로 조성한 밭과 모범 농장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농민은 활자로 된 지식을 갈구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우리 농경 문헌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농민은 비료와 농기구, 종자를 얻으려고 애쓰지만, 도매로 구입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야 할 우리 젬스트보 상점들은 어디에 있는가. 실무진들과 개인, 젬스트보,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서서 일을 하라, 오랫동안 무르익어왔던 그 시기가 다가왔다.'

 

인민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가,

당신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질지니.

 

이렇듯, 인민의 소부르주아 계급 벗들은 소부르주아 식 진보 잔치를 즐기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농촌 경제에 대한 분석과 완전히 동떨어진, 오늘날 경제학 역사에서 이토록 놀라운 사실,

곧 농민층의 엄청난 강탈과 농민 농업에서 전반적인 진보가 나란히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을 목격하는 동시에, 농민층을 조화롭고, 동질적인 하나의 전체로 묘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든 발전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납득하게 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여전히 모든 귀를 닫고 있다. 옛 국내에서도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에 따른 훌륭한 장점들을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인민주의의 커다란 실수 가운데 하나로, 곧 농민층 내 계급 적대를 이해하지 못한 실수를 절대 바로잡지 않고 있다. 호르비치는 1870년대, 인민주의자인 농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내 자연스레 존재하는 계급 적대를 몰랐기에, 착취자, 쿨라크 또는 기생자와 그 희생자인 공산주의 정신에 물든 농민 적대로만 국한해서 파악했다고 적절하게 말했다. 글레브 우스펜스키만이 회의주의적인 입장에서 역설적인 미소로, 보편적인 환상을 거부했다. 농민층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현상 본질 그 자체를 꿰뚫는 비범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우스펜스키는판박이라는 글에서, 개인주의가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 사이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농민들 사이에서도 경제적인 관계에서 기초가 됐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농촌 경제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자료가 아주 부족했고, 농민층 분화가 아직 그렇게까지 뚜렷하지 않았던,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그러한 환상에 굴복한 건 용서할 수 있고,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분화를 모른 체하려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야만 한다. 농민층 몰락이 정점에 달했고, 사방에서는 농민 농업에서 발전적인 경향에 대한 수 많은 말이 들려오는 최근에도 특히 더 그렇다. V.V. 보론초프도 전적으로 그 주제만을 다루는 책 한 권을 썼었는데, 사실 관계에 따른 부정확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비난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적인 측면, 농경법적인 측면에서, 농민층 발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농민이 스스로 먹여 살려줄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새로운 경작법을 간절하게, 찾아 헤맸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전의 이면으로, 곧 바로 그 농민이 땅으로부터 심하게 분리됐다는 점은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토지가 자본으로 전환되고, 국내 시장이 창출되는 과정 같은 눈 앞의 사실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다 머리를 묻는다.

 

한 국가 공동체 농민들 사이에서 실재하는 양 갈래에서 정반대 과정들을 부정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 말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보려고 애쓰더라도, 분명 쉽지는 않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인도주의적이고, 자비로운 문구들을 연호하는 건, 그들의 과학이자, 그들의 정치 활동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게다가 현질서에서 가장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땜질식 처방을 정규 철학으로까지 끌어올린다. 크리벤코는 심오한 어조를 띤 채로 이렇게 말한다.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활동을 한다는 건, 크게 일을 벌여놓고, 행동하지 않기보다는 훨씬 낫다.'

 

얼마나 참신하고, 영리한가.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사소한 활동이라는 게, 결코 목적이 사소하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사소한 활동이, 적절하고, 훌륭한 결과로 이어진 활동의 확장에 따른 사례로, 어느 부인이 학교를 세운 일, 농민들 사이에서 협잡꾼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피고에 자문을 해주고자 지방 순회 법원에 동행하기로 한 변호사 일화에서도, 앞서 젬스트보 노력과 결합되어 가장 번화한 중심징에서, 수공업자들의 창고를 설립한 경우들을 든다. 물론 모두 아주 숭고하고, 인간적이며, 자유주의적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적이란, 부르주아 경제 체제를 모든 중세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고, 따라서 노동자가 그런 조치들로부터 손상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 체제 자체와 맞서 싸우기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내 자유주의 출판물들로부터, 모든 주장들을 접해왔다. 러시아 부신사 양반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았더라면, 반대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선 자유주의의 온건한 출발을 알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선조들의 이상을 비난했따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나무랐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그런 온건하고, 세심한 자유주의적이고, 곧 부르주아에게 봉사하는 활동을 먼저 제안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에 기꺼이 호응했다. 선조들과 그들의 이상에 관한 말이 나왔으니, 자유주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은 그릇되며, 유토피아적인 낙원이었지만, 어쨌든 옛 국내 인민주의자들은 그러한 자유주의에서 온건한 출발을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하도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인지라, 인민의 벗들은 그런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인민의 벗들은 정치 제도에 대한 유물론적인 비판은 사라지고, 현대 국가에 있어 계급적인 성격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 유일하게 남은 수순은 정치적인 급진주의에서 기회주의로 옮겨갈 뿐이라는 점을 자신들의 전술로부터 분명히 입증했다. 여기에 그런 기회주의 몇 가지가 있다.

 

유자코프는 러시아 부, 10에서, 국유재산부를 농업부로 전환하는 조치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관리들의 자리를 바꾸는 데 불과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결국 모든 건 요청 받는 존재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인민의 벗들이냐, 아니면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이냐가 문제지, 이해 관계 그 자체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같은 글에서,유자코프는 게속해서 경제적 강자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건, 국가 개입에서 첫 본연의 임무라고 말한다. 러시아 부, 12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또한 같은 표현을 사용해서, 유자코프 주장을 지원했다. 유자코프는 박애주의적인 헛소리에 대한 설명이 유자코프의 훌륭한 동료들인 서구 유럽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똑같다는 점에서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고자, 덧붙인다.

 

'영국 글랜드스톤 토지 법안들, 독일 비스마르크 노동자 보험과 공장 감독, 러시아 농민 은행 발상과 이주 조직화와 쿨라크 이익에 반하는 조치들, 모두는 동일하게 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고자, 국가 개입이라는 원칙을 적용한 시도들이다.'

 

그래도 솔직한 말이라는 미덕은 지녔다. 국내 문제 연대기의 필자는 글래드스톤과 비스마르크와 같이 자신도 현재 사회적 관계를 고수하기를 원하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부르주아 사회를 수습하고, 봉합하기를 바랄 뿐, 맞서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근본적인 이론적인 신념은 현재 사회에 기초해서, 지배 계급 이익을 보호해주는 기구, 곧 국가를 개혁 도구로 여긴다는 점과 완변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 우선하는 전지전능한 국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국가가 노동 계급을 지원해줄 뿐만 아니라, 크리벤코도 말했듯이, 현실적이고,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낼 거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골수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에게 기대할 건 무엇도 없다. 생산 조건 자체로부터 해체되고, 고립됐으며, 한정된 공간과 착취자에게 묶여 잇는 소생산자들은 간혹 프롤레타리아만큼이나 고통을 겪는 자신들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계급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소부르주아 계급의 근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동적인 계급으로 만드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국가 역시도 계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위대한 인민의 벗들이여, 그렇다면 왜 정부가 지금까지도 해방적인 개혁 이래로 특히 정력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만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또 창출했겠는가. 한 국가 안 살림살이가, 상품 경제와 상업, 공업 발전으로 특징짓는 역사적인 시기에, 절대적이고 이른바 초계급적인 정부가 그런 볼성사나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국가 안 살림살이에서 그러한 변화들이 워낙 사회 깊숙하게 정착되어, 정부는 그걸 인식조차 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무수한 장애물을 가져다 놓았다는 점, 바로 절대적인 정부가 내부적인 삶의 다른 조건에서는 또 다른 계급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창출해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정부 정책이 불러온 효과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민의 벗들은 그런 질문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다. 보다시피 모든 건, 유물론, 변증법, 헤겔주의, 신비주의, 형이상학이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게 친절해지라고, 겸손해지라고 간청만하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바로잡힐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겸손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러시아 부를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실로 이 매체는 독립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국내 자유주의 언론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고 하겠다. 여러분이 직접 판단해보시라.

 

유자코프는 염세와 인두세 폐지, 토지 상환금에 따른 감축은 인민 농업에 상당한 위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염시를 폐지하는 대신에, 수 많은 간접세들을 새롭게 부과하고, 기존 세금들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인두세 폐지와 함께 예전 국유지 농민들을 회복시켜준다는 명분으로, 지급하는 대금을 인상시킨 건 어쩔텐가. 익히 알려진 상환금, 정부는 환수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지도 않았고, 감축이 이뤄진 뒤에 지불 대금과 토지로부터 얻는 수입 사이에서 불균형, 곧 봉건적인 면역 지대가 직접적으로 부활한 건 지금도 유효하지 않는가.

 

"그래도 괜찮아. 중요한 건, 첫걸음과 원칙이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간청하기만 하면 될 거야."

 

하지만 꽃에 불과할 뿐, 이제 과실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1880년대는 인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인민들이 철저히 몰락하지 않도록 구해줬다.'

 

부끄러울 줄 모르는 노예 근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고전적인 문구로, 앞서 여전히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주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국내 자유주의에 따른 진화에 대한 시체드린의 예리한 묘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다. 자유주의자인 시체드린은 정부 당국에게 가급적 개혁을 해달라고, 간청하도록 시작해서, 다음에는 적어도 뭐라도 달라고 구걸만 하다가,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아무거나 달라고 애원하는 지겹도록,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면서 마무리한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지겹도록,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점 말고는 달리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기근이 수백만 명 인민들을 막 덮쳤던 시기로, 정부 태도가 장사꾼 인색으로 시작해서, 소심하게 옮겨간 걸 알고도, 인민의 벗들은 정부가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줬다는 주장을 버젓이 활자로 옮겨 담을 수 있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농민층에 대한 강탈이 훨씬 더 가속화되고, 정부는 농업부를 창설한 데 이어, 한 두 가지 직접세를 폐지하는 대신에, 간접세 대 여섯 가지를 새롭게 부과하며, 그러면 기근은 4천 만 인민에게 영향을 끼칠 테고, 신사 양반들은 똑같이 낡은 방식으로 글을 써댄다. 굶주린 인구가 5천 만 명이 아니라, 4천 만 명에 불과한데, 정부가 인민 부담을 덜어주고,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덕분이라고, 정부가 인민의 벗들의 말을 경청하고, 농업부를 창설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 부, 2에서 러시아가 '다행히도' 후진국이며, 자신의 경제 제도를 연대 원칙에 기초할 수 있게끔 해준 요소들을 유지해왔다고 주장한,국내 문제 연대기필자는, 따라서 국내에서 국제 문제 있어서 경제적인 결속 주창자로 행동할 수 있고, 국내에서도 주어진 이런 기회는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인 힘으로부터 강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반동적인 행위에 대한 변치 않는 가장 확실한 방어벽이 바로 유럽 경찰관인 러시아였다. 국내 정부는 억압받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구 인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종사하는 치욕스러운 입장에 서도록 했다. 경제적 결속에 따른 주창자로 묘사된 경찰관의 본모습이다. 따라서 앞 주장은 실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민의 벗인 선생들은 어떤 자유주의자도 능가한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 간청하고, 정부를 칭송하고, 엄청난 존경과 열정을 다해 기도를 바친다. 머리를 조아리며, 판석 위에 이마를 찧는 소리는 지나가던 사람조차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여러분은 속물에 대한 독일식 정의를 기억하는가.

 

속물이란 무엇인가.

텅 빈 속을,

두려움과 신의 자비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채운 자여.

 

- 괴테

 

같은 식의 정의는 실정과는 맞지도 않다. 신은 부차적인 존재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다른 문제다. 위 정의에서 신이란 단어를, 정부 당국으로 대체한다면, 인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내 인민의 벗들의 이념적인 상투성과 도덕 수준, 시민으로 용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셈이 된다.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인민의 벗들은 이른바 지식층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크리벤코는 이렇게 적는다.

 

'문학은 현상들을 사회적인 의미에 따라 평가하고, 모든 능동적인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장려해야만 한다. 문학은 교사와 의사, 전문가가 부족하고, 인민들은 가난과 병마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발언해왔고, 발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탁자에 앉아 카드 놀이를 하거나, 연극 공연을 보러 다니거나, 귀족 대표가 주최한 모임에서 철갑 상어를 뜯는 게 지겨워진 사람들이 보기 드문 자기 희생 정신을 갖추고, 수 많은 장벽을 뚫으며, 앞으로 선뜻 나설 때, 문학은 그들을 환영해야만 한다.'

 

그리고 두 장을 넘어가서, 경험으로 지혜를 얻게 된 왕년 운동가는 짐짓 사무적인 어조를 띠며, 지방 감독관, 시장, 젬스트보 의장과 의원 같은 직위를 새로운 규정에 따라 받아들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시민들의 요구와 의무에 관한 의식이 발전된 사회에서 그런 망설이는 태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어떠한 필수적인 측면을 가진 개혁이라면, 완전히 소화해서, 그에 맞는 개혁의 측면들을 활용하고, 발전시키고,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들이 있다면, 사문화시키며, 개혁에 필수적인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기구는 완전히 소외된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도대체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한심하고, 하찮은 기회주의이자, 자화자찬에 빠진 소리란 말인가.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용 촌평거리들을 죄다 수집하고,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데 대해 정부에게 굽실거리며, 카드 놀이에 지겨워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지방 감독관 같은 자리를 꺼리지 말라고, 대중을 가르치는 게 문학의 임무라는 거다. 지금 주간지, 새로운 시대를 읽고 있는 건가. 이건 선진적인 국내 민주주의자들의 기관지러시아 부인데,

 

그러고도 신사 양반들은 선조들의 이상을 말하고,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쏟아붓자, 국내에서 사상을 흡수해 헤르첸과 체르니셰프스키 이론과 가르침을 생산해낼 당시 전통을 오직 자신들만이 수호하듯이 주장한다. 철저한 망신이며, 명백한 언어도단이자, 모욕이다. 비록러시아 부가별로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같은 유형의 잡지 시평에서 그런 식의 발언들이 큰 웃음이나 그 밖의 어떤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 실로 당신들은 그 이상들을 더럽히고 있다. 최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실제로 어떤 건지를 카우츠키가 했던 발언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묘사된다.

 

'그 시대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국내 공동체적인 생활 체계라는 특수한 사회 질서에 대한 믿음, 그로 인해 이어진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정부에 맞서는 영웅적인 투쟁 대열에 서도록 만들었다. 당신들은 그 시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엄청난 역사적인 헌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그들의 기억을 충심으로 존경하지 않았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묻는다. 그때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V.V. 보론초프는 작년 마을 공동체가 인민들에게 공동 노력을 연마시키고, 이타적인 감정의 중심이 된다는 등의 주장을 펼 당시에, 심지어 미하일로프스키는 양심에 찔리 나머지, 겸연쩍게 V.V. 보론초프를 훈계하며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어떤 연구도 마을 공동체와 이타주의 사이에서 관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신념을, 무조건적인 신념을 지녔던 시대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 무슨 근거로.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농촌이 분화되면서부터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인민을 자기네 발치 아래 두는 한 줌 쿨라크로 형성됐다는 데 모든 양심적이 연구자들이 동의한다고 덧붙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번에도 옳았다. 농촌은 실제로도 분화되고 있었다. 농촌이 완전히 쪼개 진 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그리고 옛날 국내 농민 사회주의자도 그와 함께 쪼개지면서, 한편으로는 노동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물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같은 변화는 타락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농민 삶은 특수한 사회 질서이며, 우리나라는 예외적인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는 이론으로부터 희석된 절충주의도 등장했다. 절충주의는 상품 경제가 경제 발전 토대가 되고, 자본주의로 발전했다는 점은 더 이상 부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모든 생산 관계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있고, 그 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계급 투쟁이 일어난다는 점은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더불어 근대 사회 토대에 맞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농민들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정치 강령으로부터 근대 사회 토대를 보존하면서 농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수습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강령도 등장했다.

 

엄밀하게, 모두 이미 러시아 부의 신사 양반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착수하는 순간 예상됐던 종류로 비판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은 국내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구상을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설명하거나, 그 본질에 반대되는 주장을 편다든지, 거기에서 끌어온 실질적인 결론들에 대한 정확도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신사 양반들은 추상적인 도식과 그 도식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국가가 그와 같은 국면을 거쳐야 한다는 확신을 담은 가장 공허한 문구들과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충분하게 접한 바 있는 허튼소리에 스스로를 가두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종종 철저하게 왜곡된 말을 듣게 된다. 크리벤코에게 마르크스는,

 

'만약 우리가 소망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자본주의 부침을 피해 더 편리한 다른 경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기사님께서 그런 허튼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떤 건, 의도적인 왜곡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마르크스 편지, 법률 통신, 1888, 10에서 러시아가 자보눚의 체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체르니셰프스키는 칼 마르크스를 높이 평가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크리벤코는 마르크스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런 견해들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 존경할 만한 비평가는 적어도 내가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내가 문제에 대해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러시아 문인과 범슬라브주의자에 대한 내 비판으로부터도 내가 그 견해들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을 러시아 특수한 발전 노선이라는 사고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길 권리가 없고, 자신 또한 그런 사고를 지닌 사람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마르크스가 그런 특수한 발전 노선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그걸 잘못 해석했다. 그야말로 새빨간 왜곡이었다. 방금 마르크스 발언에는 크리벤코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피해 넘겼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두 가지 모순된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곧 미하일로프스키는 러시아 전반적인 정세에 관한 내 견해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바탕이 전혀 안됐다.'

 

이런 발언들이 잘못 해석될 여지를 없애고자, 마르크스는 같은 편지에서 자신의 이론이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답변에 대한 질문에 있어 대답 자체와 그 질문의 답을 결정할 수도 있는 러시아 통계 검토를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했다.

 

'러시아가 서구 유럽 국가들을 모범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도 수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던 최근으로 보인다면, 우선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해당 대목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 질문에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보이는가. 농민들의 몰락이 자본주의 체제, 곧 자본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 과정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정이지만, '만약' 러시아가 그런 경향을 보인다면,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될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특정 국가들에 따른 경제 체제의 진화를 연구하고, 또 설명했으며, 러시아에서 이론을 적용하는 건 오로지 유물론적인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에 따라 확립된 선례들을 활용해서, 러시아에 따른 생산 관계와 그 진화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의 정교한 완성은 사회 과학에서도 큰 발전이자, 사회주의를 향한 엄청난 진전이었다. 자본이 등장한 직후로, '국내 자본주의 운명'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주요한 이론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문제를 둘러싸고, 엄청나게 열띤 논쟁들이 펼쳐졌고, 강령 상 핵심 지점들도 따라서 결정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년 전, 국내 자본주의로 진화했는지를 놓고도, 어느 개별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이 국내 경제 현실에 대한 통계를 토대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을 때는, 거기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비판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똑같은 방법론적·이론적인 일반 원칙들을 받아들인 가운데서 통계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맞서 진정한 성전으로 돌입한 인민의 벗들 역시나, 사실 관계에 따른 검토로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는 법이 없었다. 첫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인민의 벗들은 여러 미사여구로, 문제를 처리한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합의나, 의견 일치 부족에 대해서도 자신의 재치를 드러낼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저명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는 말장난을 하고는,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완전한 일치가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을 잘못 전달했고, 둘째로, 현실은 국내 사회민주주의의 약점이 아닌, 강점과 생명력을 증명했다. 최근 시기, 특히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경로로부터, 사회민주주의적인 관점들에 도달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국내 봉토 제도로부터 발달한 부르주아 사회이고, 그 정치 형태는 계급 국가이며,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를 끝장낼 유일한 방안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라는 기본적이고, 주요한 논지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논쟁 방법과 국내 삶에서 여러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도, 특정한 수 많은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논지 한계 내에서, 농민 개혁이나, 농업과 수공업에 따른 경제적인 상태, 토지 임차 등 피상적인 어조로만 다뤄졌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부터 미리 미하일로프스키를 기쁘게 할 수도 있었다. 농민 개혁이란, 국내에도 올바른 발전을 위해 순탄한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자본가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의 벗들에게 국가 부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을 공동체가 농업과 제조업을 사회화해서, 수공업자로부터 대량 생산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인민 토지 임차가 인민 농업을 떠받치고 있다는 등, '숭고한 진리'들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합의에는, 국내에서 실제로 현재 경제 구조를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 해명하고, 실제로 경제적 발전이나, 정치를 비롯해서, 여타 모든 유형에서 상부 구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들 내 견해 차이로 대체됐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여서, 공동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 확실하게 관련되고, 따라서 그러한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이는 모두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를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게 되는 한편으로, 많은 해결책들이 열려 있는 수 많은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폭 넓은 의견 차이에 대한 여지들도 여전히 남겨놓는다면, 당연하게도, 국내 사회민주주의 힘과 생명력을 입증해주는 데 불과하다. 더군다나 같은 노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이뤄진다. 그 많은 측면들을 통합해줄 기관도 없거나, 있을 수도 없고, 오늘날에도 만연한 경찰 감시 상황에서도 볼 때, 개인적인 교류도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적절한 토론을 할 수도,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따라서 서로 의견이 상충된다는 건, 당연할 수밖에는 없다.

 

정말로 재미있지 않은가.

 

사회민주주의자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을 상대로도 한 반론에서, 크리벤코가 언급한 내용에는 일정 정도 당혹스럽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열과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방어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이론과 정책을 비판하거나, 다른 어떤 종류로 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 적도 없다. 진실은 크리벤코와 미하일로프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에서나 나눌 법한 촌평들에 귀를 기울여왔고, 자신들의 지각 없는 자유주의적인 언행을 감추고자, 마르크스주의를 들먹이는 여러 많은 자유주의자들을 주시했으며, 전매특허인 영리함을 갖춘 전술로부터 동원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작업에 착수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같은 비판이 일련의 일상적인, 부조리와 추잡한 공격들로 이뤄졌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도 않다. 크리벤코는 일관되게, 자본주의 산업 발전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제시해야만 하며,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이거나, 상점과 선술집을 여는 걸 꺼려서는 안 된다. 수 많은 여관 주인들은 국내 의회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이는 걸 기뻐하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업자들은 농민 곡식을 사들이는 걸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재미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의 벗에게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는 본질 상 자본주의적이며, 기업형 농민들과 유통업자들은 같은 정치·경제적인 특징들 때문에,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야만 하고, 그런 현실이 농민 분화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한다는 점을 일러두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비명을 지르며, 그건 서구 유럽 공식과 추상적인 방안들을 무차별적으로 빌려오는 행위이자, 터무니 없는 이단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러나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색이 입혀져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고귀한 과학과 순수한 이상은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농민 곡식과 땅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단순히 타인 물건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대표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또한 국내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생산 수단을 집중시키면서부터 이미 모든 영역에서, 인민 노동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따른 정책을 입안하고, 강요하며, 결정짓는다는 점을 저 인민의 벗에게 입증해서 보여주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버럭 화를 내며, 우리 정부의 전지전능함을 외치고는, 인민의 벗들이 아닌, 자본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들을 끌어들이는 행위가 치명적인 착오이자, 불행이라고, 인공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속으로 인민의 벗들은 국내 의회 내에서 여관 주인들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점. 곧 이른바 계급 꼭대기에 올라선 바로 정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신사 양반들, 국내 자본주의 이익이 오직 의회에서만, 그리고 여관 주인들로부터만 대표된다고 생각하시나.

 

추잡한 공격들과 관련해서는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사례들도 충분히 지켜봤고, 눈꼴 시린 사회민주주의를 전멸시키기 위한 열망 속에서

 

'일부는 자본주의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게 유일한 목적이라 주장하며, 물론 전문가나 사무직 노동자 같은 한직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도 공장으로 들어간다.'

 

라고 주장한 크리벤코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명백히 품위를 상실하고 만 발언들에 대해서는 매번 답변할 필요는 없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이고, 그만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아무튼 신사 양반들, 그런 정신 상태를 용감하게 계속해서 유지하시길. 당신들이 말한 대로, 이미 여러 조치들로부터 아무리 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해줬던 황실 정부는 앞으로도 아무런 결함 없이, 그렇게 해나가며, 그래서 당신들의 진부한 무지가 드러나는 걸 막아줄테니 말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교양 넘치는 상류 사회는 막간을 이용해서도,철갑 상어와 카드 놀이를 즐기면서, 기꺼이 형제를 들먹이고, 형제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자비로운 사업들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그 형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지방 감독관 같은 농민들의 주머니를 감독하는 자리들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시민적인 요구와 의무들에 대한 발달된 의식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을 당신네로부터 알게 되어 아주 기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을 아무렴 계속해서 이어가시길. 절대 방해받지 않을 뿐 아니라, 지지와 칭찬까지 받게 될 지도 모르니. 물론 부레닌과 그 지지자들의 입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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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부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는 조직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잡지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해서, 격렬한 비판을 펼치겠다고 예고했다. 그 뒤로 크리벤코 선생,우리의 문화 용병들과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문학과 삶이 잇달아 발표됐다. 잡지에서는 국가 경제 현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유자코프,러시아 경제 발전의 문제점들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잡지는 '인민의 벗들'이라는 견해와 전술을 제시한다고 일반적으로 내세웠고, 따라서 이 신사양반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최대 적들이다. 그러므로 인민의 벗들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그들의 사상과 전술 등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이론적 원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유물사관을 연구했다. 관련된 이론적 원칙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방대한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장광설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한 적은 있었던가라는 의문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 모든 경제 문헌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논리력과 결합시키는 작업의 전형을 보여줬다. 오랫동안 잊혔었거나, 오늘날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들을 발굴해냈고, 여러 많은 특별 위원회들로부터 제출된 공장 감독관들 보고서나, 전문가 증언에 따른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막대한 양의 사실 자료들을 검토했으며, 한 쪽으로는 자신의 경제 이론들에 대한 논거를 제공하고자, 다른 쪽으로는 명확하게 실증해보였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창출해냈다. 새로운 시각에서 인류의 지난 날 전체를 설명하고, 역사 철학에 대해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이론들을 요약했다. 마르크스의 열의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 알려진 모든 이론들을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세계사에서 수 많은 사실들을 연구했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통상적으로 다루는 다윈과 비교는 그런 믿음을 확인하는 데 훨씬 더 큰 기여를 한다. 그렇다면 다윈의 전체적인 연구는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확실한 사실에 입각한 자료에서 진정한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들을 일반화하는 데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윈에 충분히 비견될 만한 마르크스 연구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로부터 그런 연구는 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단하고, 폭 넓은 특징에도 불구하고, 모든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전혀 찾아볼 수는 없다.'

 

장광설은 전반적으로 매우 독특하고,자본과 마르크스에 대한 대중적 이해가 얼마나 미흡한지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장을 펼치는 마르크스 방식의 엄청난 설득력에 압도된 대중이 마르크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마르크스를 칭송하면서도, 이론의 기본적인 내용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주관적 사회학'이라는 낡은 노래들만 조용히 읊조린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가르침들에 대한 자신의 책 서두로 선택한 매우 적절한 문구를 떠올릴 수 있다.

 

클로프슈토크(Klopstock)를 칭송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모두가 그의 시를 읽을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덜 칭송받더라도,

더 열심히 읽히기를 원한다.

 

정확히 그렇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을 줄이는 대신에, 마르크스의 책을 좀 더 부지런히 읽거나, 하다못해 자신이 읽은 내용을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만 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과 논리력을 결합시키는 작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문구로부터 미하일로프스키는 빛나는 문장이 부족한 본질과 어떻게 결합되는지 전형을 보여준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장했듯이 말이다. 그런 주장은 매우 정당했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논리력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저 정광설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의 논리력이 매우 좁은 의미에서, 경제이론들에만 전적으로 집중됐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논리력을 드러낸 분야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걸 한층 강조하고자, 매우 세세한 부분과 철저함,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 등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이런 이론들을 구축하는 데 있어 본질적으로 새롭거나,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한 건 전혀 없고,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이뤘던 경제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이나, 완전히 새로운 경제학 개념을 세우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는 듯이 들린다. 그러나 자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16년 전, 미하일로프스키는 천벅한 부르주아, Y. 주코프스키(Zhukovsky) 선생과 논쟁을 벌일 당시에, 조국 연보, 마르크스에 대해 썼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가 다르고, 정서도 더 신선했기 때문에, 어쨌든 당시에 미하일로프스키가 쓴 글의 어조와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현대 사회의 발전 법칙, 경제 작동 법칙을 밝혀내는 게 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라고 말했었고, 그 방침을 엄격하게 고수하고 있다고 1877년에 말했었다. 그렇다면, 비판자인 그가 인정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고수했던 방침을 살펴보자. 현대 사회의 경제학적 발전 법칙을 밝혀내기 위한 방침 말이다.

 

서술에서는 설명이 요구되는 몇 가지 질문들에 맞닥뜨린다. 마르크스 이전 모든 경제학자들은 사회 일반에 대해 말하는데, 마르크스는 왜 근대 사회를 말할까. 마르크스는 '근대'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며, 근대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구분하는가. 더 나아가, 사회의 경제 작동 법칙으로부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가치의 생산만이 유일하게 경제학 법칙들의 대상이지만, 분배는 정치, 곧 정부와 지식인 등이 사회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말을, 러시아의 부에 속한 사회적 환경의 평론가들과 경제학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발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경제학자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경제 작동 법칙을 말하고, 심지어 법칙을 가리켜, 자연 법칙이라고까지 말하는가. 우리나라에서 무수한 사회학자들은 사회 현상은 자연사 현상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며, 따라서 사회 현상들에 대한 연구는 완전히 별개의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을 활용해야 한다는 걸 입증하고자, 수 없이 많은 논문을 쏟아내고 있는 때에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당혹감은 생겨날 수밖에는 없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면,자본에 대해 말할 때, 결코 그런 당혹감을 피할 수는 없겠다. 같은 물음들을 자세히 해명하고자, 먼저자본의 서문에서 불과 두세 줄 아래에 나온 단락 하나를 더 인용해보자.

 

'내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 사회구성체 발전은 자연사적 과정이라 여겨진다.'

 

엄격한 일관성과 보기 드문 논리력을 보여준자본의 기본적인 발상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하는 건 방금 서문에서 인용한 두 단락들을 비교해본다면 충분하다. 먼저 모두에 관한 두 가지 상태들을 주목해보자. 마르크스는 하나의 '경제적 사회구성체 발전', 곧 자본주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만 말하며, 스스로도 다름 아닌 자본주의 형성의 발전 법칙만을 연구했다고 말한다. 바로 첫 번째다.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는 자신의 추론을 풀어나갈 때 활용했던 방법론에 대해서도 주목해보자. 방법론들은 조금 전 미하일로프스키도 말했지만,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기반을 둔다. 주관에 치우친 이 철학자가 그렇게도 노력하게 피해 가려 애썼던자본의 기본적인 발상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정확히 말해,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은 무엇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런 구성체 발전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연사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또 여겨져야만 하는가. 오늘날에도 직면한 물음이다. 오래된 경제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관점에서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사회 일반을 말하고, 사회 일반 성격, 사회 일반 목적과 본질 등에 대해 스펜서 학파와 논쟁을 벌인다. 주관에 치우친 사회학자들은 사회 목적은 구성을 이롭게 하고, 정의는 이러저러한 조직체를 요구하고, 사회학은 일종의 유토피아 낙원에서 출발한다는, 주관적 방법론을 주장하던 필자 중 한 사람인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의 방법론의 핵심을 훌륭하게 보여주며, 이상적인 조직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체제는 비정상적이고, 파기해야만 한다는 논거에 따라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학의 본질적인 임무는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어떤 특정한 부분들을 충족시켜주는 사회적 조건을 규명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건, 인간 본성을 충족시켜주는 사회일 뿐, 소수로부터 다수의 노예화와 같이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상에 기초한 어떤 이질적인 사회의 형성 과정이 절대 아니다.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사회의 발전을 자연사의 한 과정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바람직하다거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이려면, 그 사회학자는 바람직한 게 실현될 수 있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게 제거될 수 있는 조건을 발견해야만 한다는 게 미하일로프스키 논리였다. 더군다나 발전에 관한 말조차 있을 수 없고, 바람직한 걸로는, 다양한 일탈들과 사람들이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결과로 역사에서 발생한 결함들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며,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거니와 그런 이성 체계의 실현을 위한 조건도 발견할 수가 없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따른 발전은 자연사 과정이라는 마르크스에 따른 기본적인 발상이 사회학이라는 제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유치한 도덕률에 따른 근본 자체를 잘라버린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떻게 이런 기본 발상에 이르렀는가. 사회적인 삶에 따른 많은 영역들로부터 경제 영역을 골라내고, 다른 모든 관계를 결정짓는 기본적이고, 주요한 관계로 생산 관계를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로부터 선별해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추론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엄습한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내가 착수한 최초 작업은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다. 내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어졌다. 국가 형태들뿐만 아니라, 벌률 관계들 또한 그 자체나 이른바 인간 정신의 일반적 발전으로부터 파악될 수는 없고, 오히려 헤겔은 18세기 영국인들과 프랑스인들의 선례로부터 시민 사회라는 이름 아래 묶어놓은 총합인 삶의 물질적인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시민 사회 분석은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만 한다. 내가 도달한 대체적인 결론을 간략하게 표기하자면, 곧 인간은 그들 삶의 물질적인 생산력에서 일정한 발전 단계에 부합하는 생산 관계 말이다. 생산 관계에 따른 총합은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법과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세워지고, 명확한 사회적인 의식 형태들이 그 토대에 부합된다. 물질적 삶에 따른 생산 양식은 사회적·정치적·정신적인 생활 과정 일체를 좌우한다. 인간의 의식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에 따른 물질적 생산력은 어떤 발전 단계에 이르면, 여태껏 그 안에서 생산력이 작동해왔던 기존의 생산 관계, 또는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 관계와 모순에 빠진다. 생산력 발전 형태들에서 볼 때 이런 관계들은 족새로 변한다. 그러면 사회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경제적 토대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 구조 전체가 대략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그러한 변화를 고찰함에 있어 자연과학 측면에서 인정되는 생산 조건에 따른 물질적 변화와, 인간들이 갈등을 의식하고, 해결하고자 싸워나가는 틀인 법률적·정치적·종교적·미학적 또는 철학적 간단하게 말해서 이념적 형식들에 따른 변화를 언제나 구분해야만 한다. 한 개인으로 판단할 때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근거로 삼지는 않듯이, 그러한 변화 시기를 정반대로 물질적 삶의 모순,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 관계 사이에 현존하는 갈등으로부터 그 의식을 설명해야만 한다. 대체로 사회에 따른 경제 구성체가 점차 발전해갔던 시대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 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을 들 수 있다.'

 

사회학에서 이런 유물론적 사고는 그 자체로도 천재적이다. 한동안 가설일 뿐이었지만, 역사와 사회 문제들을 엄격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최초로 열어주었다. 그때까지 사회학자들은 생산 관계 같은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관계에서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로, 정치적·법적인 형태들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와 연구만을 수행해왔고, 그러한 형태들이 논의 대상 시기에 살았던 이류의 특정한 사고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을 우연하게 발견해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멈춰버렸다. 사회적 관계들이 인간으로부터 의식적으로 확립됐듯이 말이다. 그러나사회계약론이라는 사고에서 충분히 표현된, 공산적인 사회주의 전체 계통에서 그 자취가 뚜렷하게 드러난 결론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는 완전히 모순됐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살면서 맺는 사회적인 관계 총합을 어떤 법칙이 스며든 분명하고 완전한 무언가로 인식한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로 인민 대중은 이런 관계들에 무의식적으로만 적응했을 뿐,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관계로부터 거의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맺어온 교환 관계에 대한 해명도 아주 최근에서야 이뤄졌을 뿐이다. 유물론은 인간 사회적 사고 자체 근원까지 깊숙하게 분석해내면서부터 모순을 제거했다. 그리고 사고의 경로가 물질의 경로에 달려 있다는 유물론 결론은 과학적 심리학과 유일하게 양립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또 다른 측면에서, 가설은 최초로 사회학을 과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여태껏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현상들에 따른 복잡한 연결망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걸 구분하기 어렵다고 여겨왔고, 사회학에서 나타나는 주관론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런 구분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물론은 사회 구조로 생산 관계를 선별해내고, 주관론자들은 사회학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부인해오면서, 일반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을 이런 관계들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부터, 완전히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이념적인 사회적 관계들, 곧 형성되기도 전에 인간의 의식을 거쳐가는 것 같고, 사회적 관계를 자각하는 데 있어 스스로를 가둬두는 한 주관론자들은 많은 국가들에서도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들에서 반복과 규칙성을 제대로 관찰할 수도 없었고, 그들의 학문은 기껏해야 그러한 현상들의 묘사, 원재료를 한데 묶어 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물질적 사회 관계, 곧 인간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형성된 관계들, 생산물을 교환할 때 인간은 사회적 생산 관계가 존재한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생산 관계에 진입하는 분석은 반복과 규칙성을 관찰하고, 많은 국가들의 체제를 하나의 근본적인 개념, 곧 사회구성체로 일반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회적인 현상들의 묘사에서, 이상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데에서 벗어나, 하나의 자본주의 국가를 다른 국가와 따로 떼어내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연구하는 식의 엄밀한 과학적 분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일반화 덕분이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이런 가설이 최초로 과학적 사회학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오로지 사회적 관계를 생산 관계로 환원시키고, 생산 관계를 생산력 수준으로 환원시키면서부터 사회구성체 발전이 자연사 과정이라는 개념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해줬다는 점이다. 그런 견해가 없었다면 사회과학도 없었을 거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주관론자들은 역사적인 현상들이 법칙을 따른다는 점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 진화를 자연사 과정으로 여기지는 못했는데, 엄밀하게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 사고와 목적 앞에서 멈춰버린 채 물질적인 사회 관계로 환원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40년대에 이 가설을 제시한 뒤로 마르크스는 사실에 유념한 자료 연구에도 착수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가운데 하나인 상품 생산 체계를 택해, 25년이 넘는 시간을 들인 방대한 양의 통계를 근거로 해서, 구성체 기능과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분석해냈다. 그 분석은 사회구성원들 간 생산관계에먄 국한됐다. 마르크스는 설명을 위해 이러한 생산 관계 영역 바깥 특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사회적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가 어떻게 발달하고, 자본주의 구조로 변형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서로 적대적인 생산 관계라는 경계 내에서 적대적인 계급들을 만들어내고, 어떻게 사회적인 노동에 따른 생산성을 발전시켜 자본주의 구조 자체의 토대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요소를 도입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바로자본뼈대다. 하지만 전체적인 핵심은 마르크스는 이런 뼈대에 만족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 이론에 스스로를 가두지도 않았고, 오로지 생산 관계로부터 특정한 사회구성체 발전과 구조를 해명한면서도, 이러한 생산 관계에 조응하는 상부 구조를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면밀하게 검토하면서부터 뼈대에 피와 살을 입혔다. 자본은 큰 성공을 거둔 이유로는 독일 경제학자가 쓴 이 책이 독자들에게 일상적인 측면에서, 생산 관계에 고유하게 녹아 있는 계급 적대 관계에 따른 실제 사회적 징후와 자본 계급의 지배를 보호해주는 부르주아 정치 상부 구조, 자유와 평등 같은 부르주아 사상들, 부르주아 가족 관계로부터, 살아 있는 생물체로 자본주의 사회에 따른 형성 과정 전체를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윈과 비교하는 건 아주 적확하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자본은 확실히 사실에 입각한 자료에 따른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들을 일반화하는 데 어느 정도 근접했다고 하겠다. 누군가 자본을 읽고도 이렇게 일반화된 사상들을 용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살망 이씨따면, 서문에서까지 이런 사상들을 지적했던 마르크스 잘못은 아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런 비교는 외부적인 측면에서, 어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특히 미하일로프스키의 관심을 끌었을 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측면에서도 정확해진다. 다윈이 동물과 식물종은 서로 단절됐고, 우발적이고, 신으로부터 창조된데다, 불변하다는 견해에 종지부를 찍고는, 변화할 수 있는 종의 세습을 확립하면서부터 생물학을 온전히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은 최초 인물인 것처럼 마르크스는 권력자들의 의지에 따르고, 또는 사회와 정부의 의지에 따른 모든 종류의 수정을 허락하고, 우연하게 등장했다고 변화하고, 개인들의 기계적 집합체가 곧 사회라는 견해에도 종지부를 찍고, 특정한 생산 관계에 따른 총합으로부터 경제적 사회구성체라는 개념을 확립하고, 그런 구성체 발전이 자연사 과정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주면서부터 사회학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은 최초 인물이다.

 

자본등장 이래로, 유물론 역사 개념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명제다. 특정한 사회구성체, 어떤 국가나 국민 또는 계급 등이 아닌 기능과 발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내놓는 또 다른 시도, 유물론만큼 해당 사실들에 질서를 도입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도, 엄격한 과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도 명확한 형성 과정에 따른 또렷한 그림을 제시할 수 있는 시도가 이뤄질 때까지, 사적 유물론 개념은 사회과학과 동의어이다. 유물론은 미하일로프스키가 생각하듯이, 대체로 과학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유일한 과학적인 역사관이기 때문이다.자본을 읽고도, 거기에서 어떠한 유물론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보다 더 웃긴 상황이 어디 있는가. 유물론이 어디에 있냐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짜로 당황해서 그렇게 묻는다. 미하일로프스키는공산당 선언을 읽고도, 근대 체제, 법률, 정치, 가족, 종교, 철학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 설명이 유물론적인 설명이라는 점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조차도 여러 생산 관계에 그 뿌리를 두려 하고, 또 두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철학의 빈곤을 읽고도, 프루동의 사회학에 대한 분석이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점과, 많은 역사적인 문제들에 대해 프루동이 제기한 해결책에 대한 비판이 유물론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한 자료를 어디에서 구해야 할지에 대해 필자들 자신이 내놓은 말들이 모두 생산 관계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자본을 읽고도, 하나의 가장 복잡한 사회구성체에 관한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 모형이 자신 앞에 놓여 있다는 점과, 누구나 그 모형을 인정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걸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에 앉아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었던가와 같은 심오한 질문에 자신의 뛰어난 머리를 쓰고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질문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던가라고 말이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제목 아래 역사에 관한 궤변을 쏟아냈던 카레예프(Kareyev)와 같은 사람이 그것들을 분류하고, 적절하게 색인을 달아줄 때에만 마르크스 유물론 연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웃기는 건,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더러 역사적 과정에 대해 알려진 모든 이론들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정말로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러한 이론들의 90%는 무엇으로 구성됐던가. 사회란 무엇이고, 발전이란 무엇인가 따위에 관한 순전히 선험적이고, 교조적이고, 추상적인 담론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런 이론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점과 그것들이 채택하고 있는 기본적인 방법론, 누그러들 줄 모르는 굳걷한 형이상학 때문에 말이다. 사회란 무엇이고, 발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는 건, 시작과 끝이 뒤바뀐다. 단일한 사회구성체를 특별히 연구하지도 않고, 갠며을 확립조차 할 수 없다면,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라 할 수 있는 진지한 사실 연구에도 접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전반적인 사회와 발전 개념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과학이 출발점으로 삼았던, 형이상학의 가장 명백한 증상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사실에 대한 연구에 착수할지를 모를 경우에, 언제나 선험적인 일반 이론들을 만들어냈고, 그건 언제나 무익했다. 화학적 과정에 대해 사실에 기반을 둔 연구를 할 능력이 없는 형이상학적 화학자는 물리력으로 화학적 친화성에 대한 이론을 지어낸다. 형이상학적인 생물학자는 생명과 생명력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형이상학적인 심리학자는 영혼의 본질에 대한 주장을 늘어놓는다.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방법론이다. 물리적 과정을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영혼에 대한 주장을 꺼내놓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진보는 영혼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들과 철학적인 담론들을 포기하는 데 있고, 특정한 물리적 과정에 관한 사실 연구를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의 비난은 평생을 연구의 본질에 대한 연구에 쏟아부은 다음, 과학적인 심리학자더러 영혼에 관한 모든 알려진 이론들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형이상적인 심리학자의 비난과 매우 비슷하다. 과학적 심리학자는 영혼에 관한 철학적인 이론들을 내다 버리고, 물리적인 현상들의 물질적인 근저인 신경 과정에 관한 직접적인 연구에 착수해 한 가지 이상 심리학적인 과정에 대한 분석과 해명을 내놓은 사람이다.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그 업적에 관해 읽고 칭송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과정에 대한 서술과 사실 연구가 훌륭하다고 말하면서도 거기에 만족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심리학자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이 앞서 과학자가 내놓은 매우 새로운 심리학 개념과 과학적인 심리학의 특별한 방법론에 대해 말하는 걸 듣고는 몹시 흥분해서, 실례합니다라고만 외친다.

 

"실례합니다만, 이런 방법론이 형이상학적인 심리학의 연구에서 어디에 설명됐습니까. 그리고 그 연구에는 사실만 담겨 있잖아요. 영혼에 관한 모든 알려진 철학적인 이론들에 대한 검토는 찾아볼 수 없다고요. 전혀 적절치 못한 연구란 말입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울부짖는다. 물론 사회 본질에 대한 선험적인 주장들의 무익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런 방법론들은 문제의 연구와 해명에 기여하기보다는 영국임 상점 주인의 부르주아 사상들이나, 국내 민주주의자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이상들을 사회라는 개념에 넌지시 밀어넣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형이상학적인 사회학자에게자본은 전혀 적절치 못한 연구이다. 그 모든 역사 · 철학들이 생겨났다가도 기껏해야 그 시대 사회사상과 관계들의 징후 정도에만 머무른 채, 아주 조금이나마 진정한 사회적 관계들을 인간이 이해하는 데 머리카락만큼도 기여하지 못하고, 비누거품처럼 사라져버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가 내딛는 거대한 발걸음은 정확히 마르크스가 사회와 진보 전반에 관한 모든 주장들을 내다버리고, 하나의 사회와 하나의 발전, 곧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을 내놓았다는 데에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끝이 아닌 제대로 된 출발점에서 시작했다고, 최종적인 결론이 아닌 사실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했다고, 전반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일반 이론들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결정된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비난을 쏟아붓는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적절한 연구가 어디에서 이뤄졌는가. . 자기 주관에 빠진 사회학자가 이토록 현명할 수 있다니.'

 

주관적인 철학자가 순전히 당혹감 속에서 유물론 연구의 어느 부분에서 입증됐는지에 대해서만 자신의 관심을 국한시켰다면, 그나마 봐줄 만 했다. 그러나 자신이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에 대한 입증은 커녕, 자세한 설명조차 제대로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결코 제기된 적 없었던 교조적인 주장을 탓하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철학자는 마르크스가 역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주창했다는 취지에서 블로스(Blos)로부터 단락을 인용하며, 지체 없이 마르크스 이론은 인류에게 그 과거를 설명해줬고, 인류의 과거 전체를 해명해줬다고 주장하는 등의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완전한 거짓이다. 마르크스 이론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해명한다고 주자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구성체를 분석하고, 해명함에 있어 유물론을 적용함으로부터, 매우 빛나는 결과를 얻어냈다면, 역사 유물론은 단순한 가설이기를 멈추고, 과학적으로 확인된 이론으로 자리 잡게 된다는 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그런 방법론에 대한 필요성이 특수한 사실 조사와 구체적인 분석을 거치지 않은 다른 사회구성체들로 확장된다는 건 역시도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특정한 종의 동식물 진화를 매우 정확하게 확증하는 건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수 많은 사실들로 입증된 생물진화설은 생물학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생물진화설은 종의 변화라는 역사 전체를 해명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그 설명에 있어 방법론을 과학적인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하듯이, 역사 유물론도 모든 걸 해명하고 있다고 절대로 주장한 적이 없으며, 단지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마르크스, 자본에 따르면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을 보여준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은 처음에 역사 유물론은 모든 걸 해명한다거나, 모든 역사적인 자물쇠 열쇠를 발견했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편다는 식으로 마르크스 의도를 잘못 전달하고는, 자신이 지어낸 그와 같은 주장들에 인상을 찌푸린 다음에, 마침내 유물론자들이 이해한 대로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형성되어가는 중이며, 현재까지 소유한 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에서만 거의 한정됐다는 취지에서 엥겔스,반뒤링론사고를 정확하게 인용한 뒤, 이러한 말들이 경제적 유물론의 활동 분야를 매우 심하게 좁히고 있따는 결론에 다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동원한 논쟁 방법이 얼마나 기발하고, 진심 어리고, 적절한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런 속임수를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치려면 인간이 얼마나 한없이 단순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어야만 하는 걸까. 가장 먼저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 뜻을 잘못 전달하고, 그런 뒤 자신이 했던 거짓말덩어리에 얼굴을 찌푸린 다음, 정확한 사고를 적절하게 인용해서, 그들이 경제적 유물론의 활동 분야를 좁히고 있다고 선언하는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만다.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왜곡이 어떤 식이고, 그 수준이 어쨌는지는 다음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는 그것들을 어디에서도 입증해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가리키는 그것들은 경제적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들을 말한다. 그러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의 역사와 역사 철학을 다루는 저작을 집필할 생각이었고, 그런 글을 1845-1846년에 하나 쓰기도 했지만, 출판은 되지 않았고, 엥겔스는 이 저작 가운데 집필을 마친 부분은 사적 유물론의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됐으나, 경제사에 대한 당시의 지식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점만 입증해줬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과학적 사회주의와 경제적 유물론 이론에서 근본적인 핵심을 발견했고, 공산당 선언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는 필자 중 한 사람이 인정했듯이, 그들이 그런 작업에 필요한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정말 매력적인 비판 방식이 아닌가. 엥겔스는 경제 역사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빈곤하고, 그런 이유로 철학사에 관한 전반적인 성격의 저작을 출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것을 잘못 이해해서, 과학적인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핵심,공산당 선언에서 이미 제시한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을 제시하는 그런 저작을 집필하기에는 그들의 지식이 빈곤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두 가지 중 하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역사 철학 전반을 포괄하려는 시도와 부르주아 체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치경제학적인 비판을 하기에는, 충분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고 상상만 하거나, 전자라면,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의 그런 부족함을 이해시킨다거나, 수정 또는 덧붙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매우 잔인한 행동이다. 철학의 역사에 관한 저작을 출판하지 않고도 하나의 사회구조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에서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기로 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결정은 아주 높은 수준에서 과학적인 성실성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반면에 자신들의 견해를 정교하게 발전시키기에는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백하면서도, 그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한 두 사람에 대해 약간의 말을 덧붙여서 사실을 왜곡시킨 미하일로프스키의 결정은 지적 능력이나 품위가 결여된 논쟁 방법론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자아인 엥겔스는 역사 이론으로 경제적 유물론을 입증하고자, 더 많은 시도를 했다고 말한다. 엥겔스는 역사에 관한 특수한 저작인, 가족, 사적소유, 국가의 기원을 집필했다. 연결고리는 실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미국인인 모건 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제적 유물론 원리들을 발표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경제적 유물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엥겔스는 경제적 유물론자들은 이 책에 지지를 표하고 있다. 게다게 선사 시대에는 계급 투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적인 가치의 생산에 더해서 인간 자신의 생산, 곧 노동생산성 발달이 여전히 매우 미성숙했던 원시 시대에 주된 역할을 담당했던 생식이 결정적인 요인임을 나타내주는 유물론 역사 개념 공식에 '수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모건의 커다란 공헌은 여태껏 풀 수 없었던 그리스와 로마, 게르만 고대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들을 푸는 열쇠를 성의 유대관계에 기초한 북미 인디언 집단들에서 발견했다는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1840년대 말에 완전히 새롭고 유물론적이며, 진정으로 과학적인 역사 개념이 발견되고, 선포됐다. 그리고 그것은 다윈 이론이 현대 자연 과학에 기여했듯이, 역사학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과학적으로 절대 입증된 바가 없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번 더 되풀이한다.

 

"거대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실에 기초한 자료에서도 절대 확인된 적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자본은 적절한 연구가 아니고, 단지 사실 관계와 공들여 진행한 연구들만 담겨 있을 뿐이며, 하다못해 역사 철학의 다른 체계들에 대한 비판과 배제조차 충분히 이유가 밝혀진 적이 없었다."

 

엥겔스 저서,반뒤링론에는 지나가는 김에 해본 재치 있는 시도들일 뿐이라며, 미하일로프스키는 저작에서 다뤄진 방대한 양의 본질적인 물음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긴다. 재치 있는 시도들이란 게 유토피아 낙원으로 시작되는 사회학들이 얼마나 알맹이 없는지를 매우 재치 있게 보여주고 있고, 저작에서는러시아 부에 기고한 신사양반들이 그다지도 열성적으로 고백한, 정치와 법률 체계가 경제 체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실력설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그 속에서 유물론으로 입증된 문제들 가운데 단 한 가지라도 진지하게 검토하기 보다는 저작에 대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문구 몇 개를 늘어놓는 쪽이 훨씬 더 쉽긴 하다. 그리고 검열관은 그 책의 번역을 절대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기도 하고, 그래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의 철학에서 주관적인 면모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책을 재치 있는 책이라고 부른다. 그보다 훨씬 더 특징적이고, 교훈적인 부분은 마르크스,자본에 대한 언급이다.

 

'자본에는 역사에 대한 눈부신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책의 목적 그 자체 때문에 이 책은 오로지 하나의 뚜렷한 역사적 시기에만 그 내용이 집중됐고,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은 채, 특정한 역사적인 현상들의 묶음의 경제적인 측면을 건드리기만 할 뿐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 사회 연구에만 노력을 집중한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와 그 상부 구조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을 제공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러한 분석을 무시하는 걸 선호한다. 자본은 오직 하나의 시기만을 다루고 있지만, 마하일로프스키 자신은 모든 시기를 포괄하기를 원하는데, 그래서 그는 특정한 어떤 시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그 어떤 시기도 실질적으로 다루지 않으면서 모든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눈부시고 공허한 상투어와 미사여구들을 늘어놓는다. 그러면 누구도 미사여구를 동원해 문제점들을 묵살하는 기술에서 미하일로프스키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마르크스 연구들을 다룰 가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마르크스는 경제적 유물론에 따른 기본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은 채 특정한 역사적 현상들에 따른 묶음으로부터 경제적인 측면을 건드리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오한 표현이던가.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건드리기만 할 뿐이라니.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쟁점을 흐리는 건 실로 얼마나 단순한 일인가. 마르크스는 상품 생산자들 간 관계 위에 시민 평등, 자유 계약을 비롯한 법치 국가에서 비슷한 원칙들이 기초하고 있다는 걸 그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었음에도, 그는 그게 뭐인지, 유물론을 단적으로 서술하고 있기는 한 건지, 아니면 단지 건드리기만 할 뿐이라든지 말하고 있다.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부터 철학자 미하일로프스키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답하는 걸 삼가고, 멋진 말을 늘어놓았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재치 있는 시도로부터 직접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세계 역사를 해명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선포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 게르만 역사에서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점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수수께끼 열쇠는 첫째로 경제학 유물론 이론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고, 거기에 대해 무엇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이고, 둘째로는 경제학적이지 않은 요인의 도움으로 제시됐다. 더욱 재밌는 건 인간 자신의 생산, 곧 생식이라는 단어로부터, 엥겔스는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공식과 최소한 언어적으로라도 연결을 유지하고자, 그 단어를 포착한다. 하지만 엥겔스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삶이 이 공식에 따라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논쟁 방법이 경이롭다. 마르크스 이론은 역사를 해명하려면 이념이 아니라, 물질적 사회 관계에서 그 토대를 찾아야만 한다. 사실에 기초한 자료 부족은 이런 방법론을 고대 유럽 역사에서도 특정한 아주 중요한 현상들, 씨족 구조라는 현상 분석에서 적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 결과적으로는 수수께끼로 남겨놓았다. 그렇지만 미국의 모건이 수집한 풍부한 자료는 씨족 구조의 본질을 분석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특히 법이나 종교에서 이념적 관계가 아니라, 물질 관계에서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분명 이러한 점은 유물론적인 방법론을 훌륭하고,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미하일로프스키의 경제적 유물론 이론과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아주 어려운 역사적 수수께끼에 관한 열쇠를 발견했다고 그 원리에 비난을 퍼붓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자신을 편들어주는 것과 심하게 혼내는 걸 얼머나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지에 그저 놀라워한다. 두 번째로 철학자 양반은 생식이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엥겔스 저작들에서 경제적 유물론에 대해 당연하게 말한 걸 읽어본 적은 있던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서술할 때, 단지 유물론이라 불렀을 뿐이다. 기본적인 발상은 사회적인 관계가 물질적이고, 이념적으로 구분된다는 점이었다. 이념적으로는 단지 물질에 있어 상부 구조를 구성하고, 물질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형태 결과로부터 인간의 의지와 의식과는 독립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 법률적 형태에 대한 설명은 삶의 물질적인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단락에서도 말한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생식 관계가 이념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미하일로프스키가 제시한 설명은 너무나도 독특해서 깊이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생식이라는 문제에 관해 아무리 창의력을 발휘해 최소한 구두로나마 경제적 유물론과 연관성을 규명하려고 애쓴다 할지라도, 아무리 경제를 포함한 다른 현상들과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적 현상들에 뒤얽혀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의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뿌리를 갖는다. 그리고 경제적 유물론의 이론가들이 역사뿐만이 아니라, 심리학과의 관계도 청산하지 못했음을 상키시켜준다. 씨족 유대 관계가 문명국들의 역사에서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장 성이나 가족 간 유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그렇다고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전체적으로 더욱 더 복잡해지는 삶의 압박을 받으면서 상당한 수정을 겪어 왔다. 그러나 일정 정도 변증법적 수완으로부터 법적인 관계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관계 자체도 성과 가족 관계에 따른 상부 구조를 구성한다는 게 드러날 수 있다. 깊이 파고들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상속 제도는 거론해볼 수 있다.'

 

운 좋게도 공허한 미아여구만을 늘어놓았던 철학자 양반은 마침내, 입증할 수 있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뚜렷한 사실들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상속 제도가 성과 가족 관계에서 상부 구조라는 걸 마르크스 비판가는 어떻게 드러내주는지를 살펴보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상속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적 생산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속 제도 자체로는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이라는 점으로부터 결정된다. 그러나 맨 먼저, 비물질적인 가치들도 상속으로부터 전달된다.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아이들을 기르려는 마음에서도 표현된다.

 

"아 그럼, 아이들의 양육은 상속 제도의 일부라는 거구나."

 

첫째로, 러시아 민법에서는 '부모는 가정 교육으로부터 자녀들의 도덕을 훈련시키고, 정부의 목표를 더욱 더 발전시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는 조항이 있다. 철학자가 상속 제도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런 건가. 둘째로, 경제적인 영역에만 국한시켜도 상속 제도는 상속으로부터 전달된 생산 산물에 동반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생식에 따른 산물과 직접적으로 수반되는 복잡하고, 치열한 심리 작용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상속이 생식 없다는 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상속 제도가 가족과 성 관계 위에 있는 상부 구조라는 점이다. 정말로 아메리카 대륙 발건에 버금가는 발견이다. 이제까지 모든 사람들은 음식을 섭취할 필요성이 재산 소유 제도를 설명해주지 못하듯이, 생식이 상속 제도를 설명해줄 수 없다고 믿었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러시아에서도 봉토 제도가 번성 했던 시기에 토지가 상속으로부터 전달될 수 없다면 그것이 전부 재산일 뿐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 구조의 특수성에서 해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아마도 그 시대 봉건 영지 소유자의 생식의 산물에 수반된 심리 작용이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게 구별됐다는 걸 그저 문제의 해명이라고 생각한다.

 

인민의 벗들을 한 꺼풀 벗기면, 부르주아가 나타난다. 정말로 상속 제도가 아이들을 양육하는 만큼이나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신성하다는 걸 제외하고는, 상속 제도와 아이들 양육, 생식에 따른 심리 작용 사이에서 연관성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고찰에 다른 무슨 의미를 덧붙일 수 있는가. 실제로 미하일로프스키는 상속 제도는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이라는 점으로부터 결정된다고 선언하면서부터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두려고 애썼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회피하려는 시도, 헛된 시도였다. 상속이 어느 정도로 경쟁에 의존하는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한 채, 무엇이 경쟁과 상속 제도 사이에서 이런 연관성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전혀 아무런 해명도 제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주장을 고려해보란 말인가. 실제로 상속 제도는 사유 재산의 존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사유 재산은 교환의 등장으로부터만 생겨난다. 그 토대는 이제 막 시작된 사회적 노동에 따른 분화와 시장에서 생산물 소외에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 공동체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들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한, 사유 재산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업이 공동체를 장악하고, 구성원들은 개별적으로 한 가지 품목의 생산에 참가해서 시장에다 내다 팔 때, 상품 생산자들에 따른 이러한 물리적 고립이 사유 재산 제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유 재산과 상속은 둘 다 별도의 소가족들이 이미 생겨나고, 교환이 발달한 사회 질서의 범주들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가 입증하고자 했던 바와 정확히 정반대였다. 뿐만 아니라,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에 입각한 또 다른 언급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석과도 같다. 계속해서 유물론을 바로잡으며 말한다.

 

'씨족 유대 관계에 관해, 문명화된 사람들의 역사에서 생산 형태에 따른 영향 아래에서 부분적으로 무색해진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스스로의 연속성과 일반화를 거쳐, 민족적인 유대 관계 속에 녹아들여갔다.'

 

그래서 민족적인 유대 관계가 씨족 유대 관계에 따른 연장선이자, 일반화라는거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의 역사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동화에서 빌려오는 게 분명하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역사는 먼저 모든 사회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이 있고, 그 다음에 그 가족이 부족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족은 국가로 확대된다. 이는 순전히 부르주아적인 발상이다. 독립된 소가족이 지배적이었던 건, 부르주아 체제에서만이었고, 인류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이런 가족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가 근엄한 태도로 이러한 헛소리를 되풀이하자면, 그저 러시아 역사가 걸어온 경로에 대해서조차 조금의 개념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어떤 사람은 고대 러시아에서 토착민들의 삶을 말할지 몰라도, 모스크바 차르들의 시대인 중세 무렵이 되면, 씨족 유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국가는 씨족 연합체가 아니라, 지역적인 연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지주와 수도원들은 여러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을 확보해갔고, 그에 따라 형성된 사회는 순전히 영토 상 연관성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의 민족적인 유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적인 유대라고 할 수 없었다. 국가는 각각의 토지들로 갈라져 있었고, 때때로 예전에 누리던 자치의 강력한 흔저들, 행정적 특색, 때로는 군대, 관세, 국경 등을 그대로 유지한 공국들로 나뉘었다. 이런 모든 지역, 토지, 공국들은 하나의 통일체로 '융합된' 특징을 보인 건, 러시아 역사상 오직 현대 시기에 접어든 뒤, 대략 17세기부터였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와 같은 융합에는 씨족 유대로부터 일어난 게 아니며, 연속성과 일반화로부터 일어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지역 사이에서 교환이 증가하고, 상품 유통이 점차 늘어나며, 작은 지역 시장들이 단일한 러시아 시장으로 집중되면서부터 생겨난다. 이런 과정을 이끌고 지배한 사람들이 상인 자본가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적인 유대의 형성은 부르주아 유대의 형성에 지나지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장황한 말을 늘어놓다가도, 진부한 속물들의 사례들만 제시했다. 여기서 진부한다는 건, 그가 생식과 심리 작용으로부터 상속 제도를 설명하고, 씨족 유대로부터 민족성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속물이라는 건, 그가 역사적으로 교환에 기초한 일정한 하나의 사회구성체의 범주와 상부 구조를 아이들 양육과 직접적인 성적 유대 같은 일반적이고, 영원한 범주와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주 특징적인 점은 자신의 주관에 빠진 철학자가 미사여구에서 구체적인 사실들로 옮겨가려고 시도하자마자, 스스로 난처한 처지에 빠져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는 깨끗이 정리되지 않은 입장에 아주 안도하고 만다. 그 자리에 앉아서는 잔뜩 멋을 부리며, 자신의 주위에 온통 오물을 끼얹는다. 그는 역사가 계급 투쟁이라는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이론을 반박하고 싶은 나머지, 심오한 태도로 그 주장은 '극단적'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마르크스로부터 창설되고, 계급 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국제노동자협회는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들이 서로 목을 베고, 약탈하는 걸 막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이 사실에서 유물론이 민족적인 자만심과 민족 간 증오라는 악귀를 청산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고 단언한다. 주장에는 상공업 부르주아지에 따른 현실적인 이익이 그런 중오에서 중요한 토대를 구성하고, 민족 감정을 독립적인 요인이라고 말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만 할 뿐이라는 걸 비판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준다. 말 나온 김에, 이 철학자가 민족성을 심도 깊게 사고하지 못했음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인터내셔널을 언급할 때면, 언제나 부레닌 식의 반어법을 끄집어낸다.

 

'마르크스는 국제노동자협회 수장이었다. 그 조직은 갈가리 쪼개진 게 사실이지만, 다시 부활하게 된다.'

 

물론 내정의 기록자로 부레닌이러시아의 부2호에서 속물 같은 진부한 문고로 상세하게 설명한 공정한 교환의 체제 내에서 국제 연대에 따른 최첨단 조직이 등장할 수 있다면, 그리고 공정하건, 불공정하건,

교환이 언제나 부르주아지 규칙을 전제로 하고, 포함하며 국제적인 충돌의 중단은 교환에 기초한 경제구조가 파괴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인터내셔널을 비웃을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개별 국가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압제 계급에 맞서 투쟁하도록 조직하고, 단결시키도록, 그런 전국적인 노동 계급 조직들을 세계 자본과 맞서 싸울 수 있는 단일한 국제 노동 계급 군대로 묶어내는 것 말고는 민족 간 증오에 맞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단순한 진리조차 파악하지 못한다는 걸 이해할 수 있겠다. 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끼리 서로 목을 베는 걸 막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파리 코뮌 당시에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는 교전 중이던 지배 계급들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진실한 태도를 미하일로프스키에게 상기시켜준다면 충분하다. 마하일로프스키는 모든 격렬한 비판에서 특히 역겨운 부분은 그가 동원하는 방법론이다. 그가 인터내셔널 전술에 불만이 있다면, 유럽 노동자들이 결성한 조직 이름으로 된 사상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쨌든 유럽 노동자들을 직설적이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다록 내버려두고, 그 자신이 더 편리하다고 여기는 전술과 더 정확하다고 여기는 견해를 설명하게 허용하는 게 옳다. 그러나 명확하고, 뚜렷한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으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엄청난 양의 공허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여기저기에다 무분별한 험담만 늘어놓고 있다. 국내에서도 인터내셔널 사상과 전술을 옹호하는 게 법적으로 금지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행위를 쓰레기라는 표현 말고 다른 어떤 말로 부를 수 있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주장을 펼 때 동원한 방법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비판을 위해 자신의 논지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공들여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수고를 들이지 않은 채, 자신이 우연히 주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의 단편들에만 매달려, 그것들을 왜곡시키는 쪽을 선호한다. 다음의 말로부터 여러분들 스스로 판단해보시라.

 

'마르크스는 너무나 똑똑하고, 박식한 나머지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견해와 사회적인 현상들이 법칙에 부응한다는 사고를 발견한다는 게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사다리에서 아래에서 계단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러한 진실을 확립하는 데 들인 수 세기에 걸친 지적 노력과 힘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주장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해서는 왜곡하고, 조롱하고, 정복하려는 비판자의 목적이 쉽게 달성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방법론은 완전히 거짓이고, 사기라는 점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마르크스에 동의하지는 않을 수 있어도, 그가 예전에 사회주의자들과 비교해서 새로운 무언가로 여겨지는 견해들을 매우 정확하게 표현해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무언가란, 예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현존 체제에서 대중들의 억압을 보여주고, 각자는 자신이 생산한 걸 받아가는 체제의 우월성을 보여준 다음, 그런 이상적인 체제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라는 개념에서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으로 충분하게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회주의로 만족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마르크스는 현존 체제를 묘사하고, 판단하며, 비난하는 데만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현존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을 제시했고, 여러 다양한 유럽과 비유럽 국가들에서도 각각 모습을 달리하는 현존 체제를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사회의 기능 및 발전 법칙,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가 필연적이라는 공통적인 기반으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위대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형편 없는 아류들인 주관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똑같은 방식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만이 인간 본성과 조화를 이룬다는 주장을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펼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대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이와 같은 객관적인 분석으로부터 마르크스는 체제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다는 걸 입증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필연성에 관한 언급의 기원은 바로 거기에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 문제에 있어 동원한 왜곡은 명백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론의 전체적인 사실 관계와 본질을 생략하고, 전체 이론이 필연성이라는 한 단어에만 기대고 있듯이, 역사적인 필연성을 요구하는 게, 이것이다라는 게 이론의 증명이듯이 그 문제를 다뤘다. 달리 말해, 교리 내용에 대해서는 무엇도 말하지 않은 채, 오직 껍데기만 붙들고는 그저 닳아빠진 동전일 뿐이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것을 마르크스의 가르침으로 변형시키고자 갖은 애를 다 썼다. 물론 그의 우스갯짓을 따가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종류의 행동은 이미 충분히 봐왔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부레닌을 기쁘게 하려고, 또 만족시키고자 까불어대도 내버려두자.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뒤로, 구석에서 고함을 지르고, 그를 욕하도록 놔두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런 주장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이 유토피아주의자들 및 이상주의자들과 벌인 마르크스 논쟁은 그 자체로 편파적이었다. 이런 식의 공격을 가리켜 고함지르고, 욕하는 거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미하일로프스키가 그러한 격렬한 비판에서 실제적이고, 명확하고, 진실한 반론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사회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이러한 논쟁이 극히 중요하다고 여겨, 아무리 주제를 기꺼이 논하려 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고함에 대답하기보다는, 단지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코끼리를 향해 짖는 걸 보니, 애완용 강아지가 참 힘이 센가 보군!"

 

미하일로프스키가 역사적인 필연성에 대해 말했던 말은 흥미가 전혀 없지는 않다. 단지 부분적이라도 그것이 우리의 저명한 사회학자, 교양 있는 모임의 자유주의 회원들 사이에서 V.V. 보론초프 선생이 그러하듯이, 마하일로프스키 선생도 이런 수식어를 좋아했다. 진정한 이념적인 상투성을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발상과 개인의 활동의 중요성 사이에서 충돌, 사회적으로 활발한 인물들은 실제로 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할 때, 스스로를 활동적이라고 여기는 실수를 범하고,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내재적인 법칙들로부터 신비에 싸인 지하 조직으로부터 조종 당하는 꼭두각시들을 말한다. 따라서 자신이 무익하고, 장황하다고 특징짓는, 그 사상으로부터 도출된 결론 역시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꼭두각시 운운하는 모든 헛소리를 어디에서 얻어왔는지를 아마도 모든 독자가 다 알지는 못한다. 핵심은 자기 주관에 빠진 철학자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결정론과 도덕성 사이에서 충돌, 역사적인 필연성과 개인의 중요성 사이에서 충돌 같은 사고 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 주제를 가지고, 엄청난 분량으로 종이를 채웠고, 도덕성과 개인의 역할 쪽에 서서, 이런 충돌을 해결하고자, 감상적이고, 속물 같은 헛소리를 수도 없이 지껄여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기에 충돌이란 전혀 없다. 그것은 결정론이 그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속물 같은 도덕성의 허를 찌를까 봐 두려워한 그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상정하고, 자유 의지에 대한 터무니 없는 말을 거부하는 결정론 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양심, 또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파괴하는 일은 절대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바라는 모든 걸 자유 의지 덕분이라 말하기보다는 엄밀하고,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해주는 건 결정론적인 관점 밖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필연성이라는 사고는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의심할 나위 없이, 능동적인 인물인 개인의 행동들로 구성됐다.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 실제로 제기된 물음은 인간 행동에 따른 성공을 보장하는 건 어떤 조건에서이고, 이러한 행동들은 엄청난 양의 반대되는 행동들에 잠겨 고립된 행동으로 머무르지 않게 보장할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여타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은 질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낼 목적으로 하는 행동들은 진지한 결실을 맺고자, 대중들을 어떻게 글어들여야만 하는가. 분명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국내 사회 세력 집단들과 국내의 현실에서 실체를 구성하는 계급 투쟁이라는 이해된 방식에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것을 정확히 공식화하고, 해답을 내놓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내내 질문의 주변에서만 헤매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답은 알다시피 국내 경제 체제가 부르주아 사회로 구성됐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단 하나뿐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그 자체, 곧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에서 비롯된다는 견해에 기반을 둔다. 여기서 미하일로프스키의 진지한 비판에는 우리 체제가 부르주아 체제라는 견해나,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이라는 개념과 그 발전 법칙을 직접적으로 겨냥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지한 물음들을 다루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필연성이 너무 일반적인 범주라는 등 김빠진 미사여구로부터, 사안들을 처리하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 씨, 계란에서 알맹이를 빼서 던져버리고, 그 껍데기만 갖고 논다면, 어떤 사상이든 너무 일반적인 범주에 해당한다. 당대의 정말로 진지하고, 시급한 문제들을 바깥 껍데기 속에 숨겨두는 건, 미하일로프스키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고,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핵심을 강조한다.

 

'경제적 유물론은 영웅들과 군중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잘못 설명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시대 러시아의 현실과 그 토대를 구성하는 계급 충돌이라는 문제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아마도 너무 일반적이어서, 미하일로프스가 그것을 회피하고 있다. 한편, 노동자건, 농민이건, 공장 소유주건, 지주건 간에 군중과 영웅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 문제는 그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그러나 그 문제가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노동 계급의 해방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유물론자들을 힐난하는 건, 속물적인 학문을 숭배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비판 결론을 내리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들을 그릇되게 전달하려는 또 한 차례 시도를 하고, 또 한 번 조작을 한다. 공인된 경제학자들이 자본유야무야 덮어버렸다는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견해에서 정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마르크스는 특정한 집단의 독자들인 노동자들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학자들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학자들에게 공정성이나, 과학적인 비판을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자본후기에서 그 점에 관해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은 독일 노동 계급이라는 폭 넓은 집단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찬사를 얻은 건 내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다. 경제 문제에 있어 부르주아 관점을 대변하는 마이어(Mayer) 씨는 보불 전쟁 가운데 출간된 소책자에서, 독일인들은 유전적으로 소유하다고 여겨졌던 탁월한 이론 수용 능력이 이른바 독일의 교육 받은 계급들 사이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지만, 노동 계급 사이에서는 부활하고 있다고 적절하게 언급한 바 있다.'

 

유물론에 관한 또 다른 조작은 첫 사례와 전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논지는 이랬다.

 

'유물론 이론은 절대로 과학적으로 구체화되고, 입증된 적이 없다.' 그 증거는, '엥겔스, 카우츠키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저작에 담긴 역사적인 내용에 관한 훌륭한 각각의 쪽들은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딱지를 떼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음표가 화음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실상 사회적인 삶의 총합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은 이랬다. 경제적 유물론은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걸 스스로 보여주지 못했다.'

 

정말로 낯익은 속임수다. 그 이론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우선 사회적 삶의 총합을 고려하지 않은 불합리한 의도를 그 이론 탓으로 돌림으로부터 사실을 왜곡시킨다. 사실은 정반대임에도 말이다. 유물론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삶의 모든 측면을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런 다음 미하일로프스키는 실제로 유물론자들이 사실상 경제학으로 사회적 삶의 종합을 설명했다고 선포한 뒤, 마지막으로 유물론은 타당하다는 걸 스스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당신의 조작이 스스로만 타당하다는 걸 보여주고 말았다. 이것이 마하일로프스키가 유물론에 대한 반박에서 전개한 논리의 전부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여기에는 어떠한 비판도 없으며, 공허하고, 가식적인 수다만 있을 뿐이다. 생산 관계가 다른 모든 토대를 이룬다는 관점에 대해 미하일로프스키가 제기한 반대 의견이 무엇인지를 물어본다면,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유물론적인 방법을 활용해 설명한 사회구성체 개념의 정확성과 그 구성체의 자연적·역사적 발전의 정확성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까. 그리고 그가 언급한 필자들이 제시한 많은 역사적 문제들에 관한 유물론적인 설명의 오류를 어떻게 입증할까. 그에 대한 대답은 미하일로프스키는 아무런 반대 의견도 제시하지 못했고, 어떠한 반박도 전개하지 못했으며, 아무런 오류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문제의 본질들을 미사여구로 감추려 애쓰면 그저 변죽만 올렸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보잘것없는 속임수들만 꾸며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박은러시아의 부2호에서도 계속 이어졌지만, 그에게 진지한 무언가를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지 조작의 영역에 있어서

그의 독창성이 벌써 바닥이 나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기 시작했따는 점이다.

 

먼저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적 삶의 복잡성에 대한 의견을 늘어놓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갈바니즘조차 경제적 유물론과 연관됐다고 말하는데, 갈바니의 실험들은 헤겔에게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란다. 어쩜 이렇게 재치 있을 수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중국 황제도 쉽게 연결시킬 수 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점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계속해서,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역사적 과정의 본질은 경제적 유물론 원리 또한 교묘하게 피해갔다. 분명 그것이 생산과 교환 형태의 결정적인 중요성의 발견과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이라는 두 개의 기둥에 의존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해, 그들의 사회학 이론들이 헤겔의 삼단논법에 기초하고 있따는 말인 셈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에서 헤겔 변증법의 혐의를 씌우는 상투적인 수법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부르주아 학자들로부터 이미 충분히 너덜너덜해졌다고 여겨지는 비난이다. 그 원리에 반하는 어떠한 근본적인 주장도 내놓을 수 없었던 그 신사양반들은 마르크스의 표현 방법에만 매달려서 그 이론의 근원을 공격함으로부터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의 그런 방봅론에 기대는 걸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는 엥겔스의 반뒤링론에 등장하는 한 장을 핑곗거리로 이용한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공격한 뒤링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삼단논법을 동원해서, 무언가를 입증할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는 실제 과정을 연구하고 조사만 했을 뿐인데다, 마르크스가 인정한 이론의 유일한 기준은 현실과 일치였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때마침 어떤 특수한 사회 현상들의 전개가 헤겔의 법칙, 곧 정반합 이론과 딱 들어맞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현실적으로 전혀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놀라울 게 전혀 없다. 그리고 엥겔스는 더 나아가, 자연의 역사와 사회적인 영역으로부터 사례들을 인용한다. 맨 처음 원시 공산주의가 있었고, 그 다음 사유 재산, 그리고 그 다음에 자본주의 노동 분화가 있었다든지, 또는 맨 처음 초기 유물론, 그 다음 이상주의, 그리고 그 다음에 과학적인 유물론이 있었다는 등이다. 엥겔스는 핵심적으로 무게를 실어 펼친 주장으로는, 유물론자들은 정확하고, 올바르게 실제 역사 과정을 묘사해야만 하며, 삼단논법에 따른 올바름을 증명하고자, 변증법을 강조하는 건, 헤겔주의의 유산, 헤겔주의적인 표현 방식의 유산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삼단논법으로부터 무언가를 입증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누구도 그것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언된 상황에서, 변증법적인 과정의 사례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단지 원리의 근원을 가리킬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건 명백하다. 근원을 들어 어떤 이론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자신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엥겔스 주장들에서 이론의 근원 그 이상의 것을 식별해내고자, 유물론자들은 관련된 사실에 힘입어서가 아니라, 삼단논법으로부터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역사적 문제를 해결했다는 증거가 명확히 제시되어야만 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걸 증명하려는 시도를 했을까. 전혀 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마르크스는 공허한 변증법적인 공식을 사실에 기초한 내용들로 꽉꽉 채웠고, 그래서 어느 것도 바꾸지 않고도 그릇에서 뚜껑을 제거하듯이, 변증법을 내용물로부터 제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어느 것도 바뀌지 않은 뚜껑에 대해 그토록 야단법석을 떨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유물론자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인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을까. 자신은 정작 이 뚜껑과 씨름하면서도,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른 기둥들 가운데 하나와 씨름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굳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삼단논법의 사례들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를 검토하지 않을 거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반복하건대, 과학적 유물론이나, 국내 마르크스주의자와 어떤 관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은 있다. 무슨 까닭으로 미하일로프스키는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잗르의 태도를 그렇게 왜곡한걸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속담에서 말하듯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종소리를 들었지만, 어디서 들려오는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2.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번 더 속임수를 쓴다.

 

1. 에서 마르크스 문헌을 읽으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과학에서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사회 문제 영역에서 변증법적인 사고 등에 관한 언급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됐다. 인간성이 단순한 그는 이러한 방법론이 헤겔의 삼단논법 법칙에 따라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다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런 생각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텐데 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이라 부르는 건, 사회를 끊임없이 발전하는 그리고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별개의 사회적인 요소들에 따른 임의적인 결합을 일체 허락하는 무언가가 아닌 상태에 있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는 사회학에서 과학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유기체 연구는 특정 사회구성체와 그 기능 및 발전 법칙에 따른 연구로부터 이뤄진 생산 관계에 따른 객관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 추후에 미하일로프스키 자신의 주장들에 따른 변증법적인 방법론과 형이상적인 방법론에서 사회학에 따른 주관적인 방법론도 틀림없이 여기에 속하는 개념 사이에서 관계를 실증하고자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당장은 엥겔스,사회주의: 낙원과 과학, 마르크스,자본철학의 빈곤으로부터 주어진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따른 정의와 서술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기에서 헤겔의 삼단논법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사회 진화를 경제적인 사회구성체들에 따른 자연적인 역사 발전 과정으로 간주한다는 걸 목격한다. 이 점을 확인하고자, 1872,러시아의 부5호에 제시된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서술을 상세하게 인용한다.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도자본2판 후기에서 인용한 바 있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이자본에서 활용한 방법론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으레 독일 비평들은 헤겔 식 궤변논법을 향해 악을 써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는 마르크스는 자신의 방법론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고자 언급된 글에서 제시된 방법론에 따른 묘사를 인용한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한 가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찾아내고, 특히나 중요한 점은 변화와 그런 현상들에 따른 발전 법칙, 한 가지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이행 법칙, 하나의 사회적인 관계 질서에서 또 다른 질서로 전환하는 법칙이었는데, 거기에는 그게 담겨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바로 엄격한 과학적인 연구로부터 사회적인 관계에 따른 특정한 질서에서 필연성을 보여주고, 그리고 마르크스가 보기에 근본적인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점들을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확립해간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사물들에 따른 현존 질서에서 필연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인간들이 그걸 믿든, 안 믿든, 그걸 의식하든, 안 하든 간에 상관 없이 이전의 질서로부터 필연적으로 성장해나와야 하는 또 다른 질서에 따른 필연성을 입증한다면 그것으로도 매우 충분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적인 운동을 인간의 의지와 의식, 의도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는 인간의 의지와 의식, 의도를 결정하는 법칙들의 지배를 받는 자연사의 한 과정으로 여긴다. 의식적인 요소가 문명사에서 매우 종속적인 역할을 담당한다면, 문명을 주제로 한 비평은 의식의 어떠한 형태나, 결과도 전혀 그 기초로 삼을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곧 사상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객관적인 현상만이 출발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비판은 주어진 사실을 또 다른 사실과 비교하고, 대조하는 거고, 사상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건 아니다.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문제로는 두 가지 사실들 모두 할 수 있는 한 정확하게 연구되어야 한다는 점과 그것들 서로에게 있어서 사실상 다른 발전 시기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일련의 알려진 현상들, 그것들의 연속성,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 사이에서 관계에 대해 똑같이 정확한 연구가 이뤄져야만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 생활 법칙들이 하나로 이뤄졌고, 과거나 현재나 똑같다는 바로 그 발상을 거부했다. 그와 반대로, 모든 역사적 시기는 스스로 법칙들을 지닌다. 경제적인 삶은 생물학에서 여타 분야들에 등장하는 진화의 역사와 비슷한 현상으로 구성됐다. 초기 경제학자들은 그것들을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들에 비유하면서, 경제 법칙들에 따른 본질을 잘못 이해했다. 보다 철저한 분석은 사회적 유기체들이 식물이나, 동물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같은 관점에 따라 자본주의적인 경제 유기체를 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마르크스는 경제 생활에 대한 모든 정확한 연구가 가져야만 하는 목표를 엄격하게 과학적인 방식으로 공식화했다. 그런 조사에 따른 과학적인 가치는 특정 사회적 유기체에 따른 기원과 존재, 발전, 소멸과 또 다른 고등 유기체로부터 대체되는 과정을 통제하는 특수한 역사 법칙들을 드러내준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대한 다수의 잡지와 신문 비평에서도 찾아내서, 독일어로 번역한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서술이 그랬다. 그리고 마르크스 스스로도,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한 그러한 서술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물음이 생겨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다지도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삼단논법, 삼분법, 변증법적 과정에 따른 명백성 같은 헛소리에 대해 그러한 서술에서 단 한 마리라도 입에 올리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그러한 서술을 거론한 뒤, 자신의 방법론이 헤겔의 방법론과 정반대로 아무렇지 않은듯이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사상의 발전은 삼단논법의 변증법적인 법칙들과 일치해서 현실 세계의 발전을 결정짓는다. 물론 그런 그의 말이 맞을 경우에만 삼단논법의 중요성, 변증법적인 과정에 따른 명백성을 논할 수 있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와 반대로 의식은 물질의 영향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전반적인 문제는 현존하는 사물의상태와 그 필연적인 발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있다. 오직 속물들만 관심을 갖는 뚜껑과 껍데기 역할 말고는, 삼단논법에서 그 어떤 다른 역할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과학적 유물론에 따른 기둥들 가운데 하나, 곧 변증법에 대한 비판에 착수하고, 모든 종류의 사물들, 심지어 개구리와 나폴레옹에 대해서까지 말하면서도, 변증법이 무엇인지, 사회 발전은 정말로 자연사 과정인지, 특수한 사회적 유기체로부터 경제적인 사회 구성체에 관한 유물론적인 개념은 올바른지, 구성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 방법론들은 옳은지, 사회적 이념들은 정말로 사회 발전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결정되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이 경우 단지 그저 이해가 부족했나 보군 하면서 넘어가줄 수 있는 걸까.

 

2. 에서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이뤄진 뒤, 미하일로프스키는 헤겔의 삼단논법을 동원해 사물을 입증하는 방법론들에 따른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전가시켰고, 물론 의기양양하게 싸운다. 그는 미래에 관해서 내재적인 사회 법칙들은 순전히 변증법에 기초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발전 법칙들에 따른 착취자들로부터 착취의 불가피성에 대한 마르크스 주장들은 순전히 변증법적이며,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라는 마르크스 이상은 그 불가피성과 확실성이라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헤겔에 따른 세 가지 용어 사슬의 끝에 기대었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에는 온전히 뒤링으로부터 빌려왔으며, 뒤링은 자신의국민 경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역사에서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뒤링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혼자 힘으로 마르크스를 왜곡하는 이런 방식에 도달했을까.

 

엥겔스는 뒤링에게 매우 훌륭한 답변을 보냈고, 그가 뒤링 비판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엥겔스 답변에만 논의를 국한해본다. 독자들은 미하일로프스키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뒤링은 말한다.

 

'역사적인 묘사에서는 마르크스 책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이지만, 학문적으로 변증법이라는 목발에 의존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겠다. 헤겔에게 있어 부정에 따른 부정이라는 법칙은 더 훌륭하고, 명확한 무언가가 없을 때는 사실상 과거라는 자궁으로부터, 미래를 낳는 걸 돕는 산파로 기능한다. 17세기 이래로 앞에서 지적한 방식으로부터 효과를 발휘해온 사유 재산 폐지는 첫 번째 부정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에 따른 부정의 성격을 띠는 두 번째 부정이 뒤를 잇는데, 곧 사유 재산의 회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더 높은 형태에서 그것은 토지와 노동 수단들에 따른 공동 소유에 기초한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유 재산을 또한 사회적 재산이라 부르고 있고, 여기에서 헤겔에 따른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 등장한다. 거기는 모순이 지양되게 되며, 헤겔에 따른 언어 마술에 따르자면 극복되고, 보존된다.'

 

'여기에 따르면 착취자들로부터 착취의 불가피성은 물질적인 외부 관계에서 역사적인 현실에 따른 자동적인 결과이다.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 부정에 따른 부정 같은 헤겔 언어 마술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에 따른 필연성을 납득시키기란 어렵다. 하지만 마르크스 개념들에 대한 모호한 이종교배는 과학적인 기초로부터 헤겔 변즙법에서 어떤 헛소리가 날조될 수 있는지, 또는 필연적으로 어떤 헛소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지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는다. 이런 계약들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헤겔의 첫 부정은 타락에 대한 교리문답식 개념이고, 둘째 부정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라는 개념이라는 걸 분명하게 지적한다. 사실 증명에 있어 종교적인 영역에서 빌려온 이런 말도 안 되는 유추를 토대로 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모호한 재산 세계에 기꺼이 머물러 있고, 심오한 변증법적인 수수께끼를 스스로 풀 수 있는 자신의 숙달된 능력에 사실 증명을 맡겨둔다.'

 

엥겔스는 다음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부정에 따른 부정을 활용 외에는 사회 혁명과 토지에 따른 공동 소윶 확립, 그리고 노동으로부터 생산되는 생산 수단의 필연성을 입증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종교에서 빌려온 이런 헛소리 같은 비유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미래 사회에는 헤겔의 지양된 모순에 따라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로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 관계가 더 지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나 부정에 따른 부정을 잠시 놔두고,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 관계를 들여다보자. 뒤링은 모호한 세계라고 규정했고, 정말 신기하게도 이 점에 관해 정말로 옳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호한 세계에 있는 건 마르크스가 아니라 뒤링 자신이다. 뒤링은 마르스크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소유권에 따른 더 높은 단계로부터 통일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에게 전가시키면서부터 마르크스를 헤겔과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부정에 따른 부정이다. 생산자에게 사유 재산을 다시 확립해주는 게 아니라, 그에게 자본주의 시대에 따른 획득물, 곧 토지와 생산 수단에 따른 공동 소유와 공동 운영에 기초한 사유 재산을 부여한다. 개인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산발적인 사유 재산에 따른 자본주의 사유 재산으로 탈바꿈은 이미 실제적으로 사회화된 생산에 의존하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으로부터 사회화된 재산으로 탈바꿈보다 비할 데 없이 시간이 걸리고, 폭력적이며, 어려운 과정이라는 건 당연하다. 이게 전부다. 착취자들의 착취로부터 발생한 형국은 따라서 사유 재산을 다시 확립하면서부터 성격이 규정되지만, 노동 자체로부터 생산된 생산 수단과 토지에 따른 사회적인 소유 관계에 토대를 둔다. 독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적 소유 관계가 토지와 다른 생산 수단으로 확정되고, 개인적인 소유 관계는 생산품, 곧 소비 품목으로 확장된다는 걸 뜻한다. 그리고 여섯 살짜리 아이들까지도 문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는자본』Ⅰ, 56쪽에서 공동 생산 수단으로부터 작업을 하고, 서로 다른 모든 개인들에 따른 노동력이 공동체, 곧 사회주의 토대 아래에서 조직된 사회에서 결합된 노동력으로부터 의식적으로 적용된 자유로운 개인들에 따른 공동체를 상정한다. 이렇게도 말한다. 공동체에 따른 생산품 전체는 사회적인 산물이다. 생산품 일부는 새로운 생산 수단으로 기능하고, 그때에도 여전히 사회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부분으로는 생존 수단으로 구성원들로부터 소비된다. 따라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 부분을 분배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뒤링에게조차 충분히 명확하다.'

 

'계속해서 엥겔스는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 부정에 따른 부정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라고 말을 잇는다. 같은 책, 791쪽과 뒤이은 쪽에서도, 마르크스는 이른바 자본에 따른 본원적인 축적에 대한 경제적·역사적 연구를 담은 이전 쪽들에서 끌어온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가진 노동자의 사유 재산에 기초한 소규모 제조업이 존재했었다. 이른바 자본에 따른 본원적인 축적이란 이들 직접 생산자들에 따른 재산 박탈, 곧 노동 소유주에 따른 노동에 기초한 사유 재산 해체에 있다. 앞에서 언급한 소규모 제조업이 좁고, 원시적인 범위에서 생산 및 사회로만 양립할 수 있고, 특정 단계에서 스스로 소멸을 위한 물질적인 매개체를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소멸에 있어, 개인적이고, 산발적인 생산 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 수단으로 전환된다는 건, 자본주의에 따른 초기 단계를 구성한다.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노동 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스스로 제 발 일어서자마자, 노동에 따른 사회화는 심화됐고, 토지 및 다른 생산 수단은 한층 더 자본으로 전환됐고, 따라서 더 한층 심해진 개인 소유주들에 따른 재산 박탈은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됐다. 남아 있는 박탈 대상은 스스로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자본가였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박탈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에 따른 내재적인 법칙들에 따른 작용, 곧 자본의 집중으로부터 달성된다. 한 명의 자본가는 언제나 다수를 죽인다. 이런 집중과 나란히 해, 또는 소수로부터 다수 자본가들의 박탈과 나란히 해, 또는 소수로부터 다수 자본가들에 따른 박탈과 나란히 해 노동 과정에 따른 협동적인 형태, 과학에 따른 의식적인 기술과 적용, 토양에 따른 체계적인 경작이 훨씬 더 확대된 범위로 발전된다. 노동 도구들은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 도구들로 전화되고, 노동 도구들을 활용해서, 사회화된 노동이 결합된 생산 수단같이 모든 생산 수단에 따른 절약이 일어난다. 이런 변화 과정에 따른 모든 이점들을 강탈하고, 독점하는 거대 자본들은 꾸준히 소수에게 집중되면서부터, 곤궁, 억압, 노예화, 몰락, 착취가 대량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더불어 노동 계급 봉기도 증가한다. 노동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 과정 자체에서 원리로부터 언제나 수적으로 늘어나고, 훈련되고, 단결하고, 조직화된다. 자본은 함께, 그 아래에서 생겨나고, 발달해온 생산 양식에 따른 족쇄가 된다. 마침내 생산 수단에 따른 집중과 노동에 따른 분화는 자본주의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외피는 산산이 폭발해버린다.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의 조종이 울린다. 착취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한다.'

 

'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자. 변증법적인 장식과 수수께끼, 개념 상 포도당초 무늬는 어디에 있는가. 모든 건 결국 하나고 똑같다는, 뒤섞이고 판단이 잘못된 사상들은 어디에 있는가. 독실한 추종자들을 위한 변증법적인 기적들은 어디에 있으며, 헤겔식 이성 원리에 따른 알 수 없는 변증법적인 헛소리와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는 또 어디에 있는가. 뒤링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 없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설명을 구체화시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는 과거 소규모 제조업이 그 자체의 발전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스스로 소멸하는 조건을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생산 양식도 소멸되는 물질적인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왔다는 걸 역사에서 드러내주고, 요약된 형태로부터 여기에 명시한다. 그 과정은 역사적이며, 동시에 변증법적인 과정이라면 아무리 뒤링에게는 불쾌하더라도, 그건 마르크스 잘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 경제적 사실들에 기초해 자신의 증명을 마무리 지은 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따른 결과인 자본주의적인 착취 방식은 자본주의적인 사유 재산을 생기게 하는 결론으로 나아간 건 오로지 그런 관점에서였다. 소유주에 따른 노동을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개인 사유 재산에 따른 첫 부정이다. 그러나 자연 법칙에 따른 불변성을 내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은 스스로 부정을 생기게 만든다. 바로 부정에 따른 부정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그 과정을 가리켜 부정에 따른 부정이라 특징짓고, 그 과정이 역사적으로 필연이라는 걸 입증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건 아니다. 정반대로, 사실상 그 과정이 이미 부분적으로 발생했고, 또 부분적으로는 미래에 발생할 게 틀림없다는 걸 역사로부터 입증한 뒤에야 명확하게 변증법적인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과정으로 특징짓는다. 그게 전부다. 그러므로 뒤링은 부정에 따른 부정이 과거라는 자궁으로부터 미래를 낳는 산파로 기능해야 한다거나, 마르크스는 부정에 따른 부정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누구에게나 토지와 자본에 따른 공동 소유에 대한 필연성을 납득시키고 싶어한다고 선언한 건 완전한 사실 왜곡이다'

 

독자들은 뒤링에 대한 엥겔스의 뛰어난 반박이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을 안다. 미하일로프스키 역시나 마르크스에게 있어 미래는 오로지 헤겔의 사슬 끄트머리에 존재하고, 불가피성의 확신은 믿음을 토대로 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링과 미하일로프스키 선생 간 전반적인 차이는 두 가지 작은 지점들로 요약된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고는 마르크스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링은 자신이 쓴역사의 다음 대목에서, 마르크스는자본후기에서 헤겔주의라는 비난을 단호히 물리쳤다는 걸 언급하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변증법적인 방법론이라 여겼던 부분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해명한 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째로, 미하일로프스키의 또 다른 독특한 구석은 시제 사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마르크스는 미래에 대해 말하면서 왜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가라고 의기양양하게 따지고 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법이나, 가치 있는 비평을 들여다보더라도,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미래는 불가피하고,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여겨질 때면, 미래 시제 대신에 현재 시제가 사용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왜 그렇고, 그게 확실해라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걱정스럽게 되묻는다. 왜곡까지도 정당화시켜줄 만큼, 자신의 아주 깊숙한 불안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도, 마르크스는 절대적으로 명확한 답변을 내놓았다. 여러분은 그것이 불충분하다가, 잘못됐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 경우 여러분은 정확히 어떻게 틀렸고, 정확히 왜 틀렸는지를 보여주어야지, 헤겔주의 헛소리를 지껄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 자신도 그 답변이 무엇인지를 알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까지 했던 시기가 있었다. 1877,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코프스키 선생에게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 개념을 억측이라 여길 충분한 근거가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한 노동의 사회화라는 문제를 무시할 만한 도덕적인 권리가 없었다고 썼다. 당연하다. 1877년에 주코프스키는 문제를 회피할 도덕적인 권리가 없었지만, 1894,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럴 권리를 갖고 있었다. 독수리가 해도 되는 일을 황소가 해서는 안 되는가 보다. 이 대목에서 예전에조국 연보에서 언급된 바 있는 노동에 따른 사회화에 대한 이상한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다. 해당 잡지는 1883년에 발행된 7호에서 포스토로니라는 사람으로부터 온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어 발행한 적이 있었다. 포스토로니는 미하일로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 개념을 억측이라고 여겼다. 포스토로니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자본주의에서 본 질적으로 노동에 따른 사회적 형태는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하나의 지붕 아래서 갈고, 망치질 하고, 뒤집고, 올리고, 내리고, 당기는 등 수 많은 여러 작업들을 수행하는 데 해당한다. 해당 체제에서 전반적인 성격은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속담에 아주 잘 표현된다. 여기에서 노동의 사회적인 형태가 자리 잡을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들은 남자가 문제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노동의 사회적인 형태는 하나의 지붕 아래서 일하는 것에 해당한다는 말도 안 되는 발상들을 현재까지는 국내 잡지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잡지에다 옮기면서 여전히 자본의 이론적인 부분이 대체로 과학적으로 인정된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싶어한다. 자본에 대해 약간이라도 진지한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기에, 대체로 인정되는 과학은 그 책에 머리를 조아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가장 초보적인 무지를 계속 드러냈으며, 경제 교과서에나 나오는 시시한 말들을 되풀이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습관적으로 완전히 지나쳐온 문제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문제를 어쨌든 꼼꼼하게 되짚어보아야만 한다. 자본주의 생산에 있어 노동 사회화는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노동에 따른 분화와 특정 산업 분야에서 자본가들 수 감소 및 독립된 산업 분야들에 따른 수적 증가와 수 많은 독립된 생산 과정들이 하나의 사회적인 생산 과정으로 통합되는 경향 증가를 동반한 자본 집중에 있다.

 

소규모 생산자들 스스로 실을 잣고, 옷감으로 만드는 수공업 직조 시대에는 제조업 분야가 방직과 직조는 합쳐진 몇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생산이 자본주의에 따라 사회화되면, 제조업 독립된 분야들에 따른 수가 증가한다. 면방적은 독립적으로 행해지고, 직조도 마찬가지다. 생산에 따른 바로 이런 분할과 집중은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킨다. 기계 제작, 석탈 채굴 등이 바로 그렇다. 더욱 더 특화된 제조업 각 분야에서, 자본가들 수는 꾸준하게 감소한다. 생산자들 사이에서 사회적인 연결 고리는 더욱 더 튼튼해지고, 생산자들은 단일한 하나로 결합된다. 고립된 소생산자들은 각자 여러 개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따라서 서로에 대해 상대적으로는 독립적이었다. 수공업자 자신이 아마 섬유를 짜고 잣고 만들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거의 독립적이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곧 무정부 상태에 따른 시장 변동을 뜻하는 속담이 정당화된다는 건, 바로 이러한 작고, 분산된 상품 생산자 체제에서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 사회화 아래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자는 면실 제조업자에게 의존한다.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 사회화에서는 면화를 키우는 자본주의 경작자와 기술 업무 소유자, 석탄 소유자 등에게 의존하는 식이다. 따라서 어떠한 자본가도 서로가 없이는 헤쳐나갈 수가 없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속담은 그런 체제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각자는 모두를 위해 일하고, 모두는 각자를 위해 일한다. 체제에 따른 성격이 완전히 변한다. 작고 고립된 기업들 체제에서 작업이 그 중 하나에서 멈춰 있다면, 사회 몇몇 구성원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이며, 전체적인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고 따라서 전반적인 관심을 끌거나, 공공 개입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기업, 곧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 분야에 관련해서 거의 사회 전체를 위해 작업을 하고, 또 반대로 사회 전체에 의존하는 기업에서 작업이 차질을 빚으면, 작업은 사회에 따른 다른 모든 기업에서도 차질을 빚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업으로부터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을 얻을 수 있고, 기업의 상품들에 접근할 수 있어야지만 자신의 상품을 처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 과정들은 하나의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흡수되어 통합된다. 그러나 각 분야는 독립된 자본가로부터 굴러가고, 자본가에게 의존하며, 사회적인 생산품들은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 된다. 그렇다면 생산 형태가 점취 형태와는 해소할 수 없는 모순으로 향한다는 건 명확하지 않은가. 점취 형태가 생산 형태에 적응해야만 하고, 사회적이며, 사회주의적이 되어야 한다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조국 연보에 기고한 영리한 속물은 전체를 하나의 지붕 아래서 작업하는 문제로 환원시킨다. 이보다 더 빗나간 주장이 어디 있을까. 과정에 있어 사회적인 측면, 곧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연합되며, 조직된다는 점에 대해서 여기서는 파생적이고, 부차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고, 오로지 물질적인 과정과 생산 관계에서 변화만 서술했을 때, 기초적으로는 국내 민주주의자들에게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소부르주아 사상에 따른 진흙땅에 아주 깊이 빠져 있어서, 소부르주아 질서 말고는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미하일로프스키로 돌아가보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발전 법칙 자체로부터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기초로 삼은 사실과 주장들에 대해 미하일로프스키는 어떤 반론을 제시했는가. 사회적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에서는 실제로 사회적 노동 과정에서 분화가 증가하지 않고, 자본과 기업의 집중도 없으며, 노동 과정 전반에서 사회화도 없다는 걸 미하일로프스키는 보여줬는가. 아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런 식의 반박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노동 사회화와 양립할 수 없는 무정부 상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유한 특징이라는 명제를 뒤흔들어본 적도 있는가. 여기에서도 미하일로프스키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든 자본가들에 따른 노동 과정들이 단일한 사회적 노동 과정으로부터 '융합'된다는 건 사유 재산과 양립할 수 있다고, 또 모순에 대한 일정한 해결책일 수 있다고,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 말고는 다른 해결책을 떠올려 볼 수 있다는 걸 미하일로프스키는 증명한 적이 있는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하일로프스키의 비판은 어디에 의존하고 있는가. 조작, 왜곡, 달그락거리는 소음에 불과한 일련의 말들이 바로 그렇다. 세 단계에 따른 연속적인 역사 발전에 대해 수 많은 헛소리를 늘어놓은 뒤, 마르크스에게 심각한 어조로, '그럼 다음은 뭐요'라고 따지는 비판자가 활용한 방법론들의 성격을 달리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가 설명한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자신의 학문과 혁명 활동 초기부터 마르크스는 사회학 이론이 현실 과정을 정확히 묘사해야만 한다고 매우 단호하게 요구했다는 점,공산당 선언에서 담긴 공산주의자들에 따른 이론 규범을 참조했을 때도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 이런 요구를 엄격하게 지켰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을 제시하는 걸 자신의 임무로 삼았고, 눈 앞에서 벌어지는 구성체 발달이 실제로 여러 경향을 지니고 있고, 필연적으로 소멸해 또 다른 형태, 더 높은 단계에서 구성체로 변화한다는 점을 보여준 뒤에 거기에서 멈췄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 원리에 따른 전체적인 실체에 대해서는 눈을 돌린 채, '그래서 그 다음은 뭐요'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해댄다. 그러고는 심오한 말을 덧붙인다.

 

'엥겔스가 정확히 어떻게 답변할지 잘 모르겠따는 점을 솔직히 고백한다.'

 

미하일로프스키, 솔직히 고백해야겠네요. 당신의 그런 비판 정신과 방법론들이 어떤 지를 아주 잘 알겠다. 다음 주장에서는,

 

'중세 시대에 소유주들은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마르크스 사유 재산 개념은 경제적 관계 영역에서조차 유일한 요인도, 지배적인 요인도 아니었다. 훨씬 더 많을 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해석에서 변증법적인 방법론은 마르크스에게로 되돌아가는 걸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구상들은 역사적 현실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그 비율에 대한 그림조차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해진다. 단지 과거와 현재, 미래 상태에서 모든 대상을 생각하는 인간 정신의 경향을 충족시켜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 사안을 왜곡하는 당신의 방식은 구역질날 정도로, 단조롭고 변함없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우선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실제 과정만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는 게 자신의 계획이라는 마르크스 구상안에다 삼단논법으로부터 모든 걸 증명하겠다는 의도를 넌지시 끼워넣으며, 그 다음에는 마르크스 구상이 미하일로프스키 자신이 몰래 끼워놓은 구상, 세 번째 단계에서는 다른 모든 걸 생략한 채, 오직 첫 단계에서 한 측면만 회복시켜준다는 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가장 뻔뻔스러운 방식으로, 구상은 명백히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그림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말았다. 엥겔스가 뒤링에게 말했듯이, 예외적으로라도 정확한 인용을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인물에게 무슨 진지한 비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잘못됐는지를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구상이 명백히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대중을 안심시키는 사람과 도대체 어떤 논쟁을 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 관점에 따른 실제적인 내용을 비판하는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범주 주제에다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한다. 뒤링에 따른 영원한 진리'에 맞서는 주장을 폈던 엥겔스는 설파된 도덕은 봉건 기독교적인 도덕과 부르주아 도덕, 프롤레타리아 도덕이라는 세 가지 수준에서 도덕이며,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세 가지 도덕에 각각 담겨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나는 역사를 시기 별로 세 가지로 분할하는 데 기초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범주가 자리 잡는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심오한가. 어떤 사회적인 현상을 그 발전 과정에 따라 검토할 경우, 과거의 유산, 현재의 토대, 미래의 기원이 언제가 그 안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엥겔스는 도덕 역사가 앞에서 언급된 세 가지 요인들에 한정되고, 봉건적인 도덕률 이전에 노예제 도덕률이 선행하지 않았으며, 노예제 도덕률 이전에 원시 공산주의 사회에서 도덕률이 선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었던가. 그럼에도 유물론적으로 해명하면서 도덕 사상에서 현대적인 경향을 자세하게 밝히려던 엥겔스 시도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가장 공허한 수사로 안내한다. 미하일로프스키가 동원한 비판, 곧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개념이 어떤 책에서 어디에서 설명됐는지를 모르겠다는 발언으로 시작되는 비판에 대해서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책들 가운데 하나를 알게 되고, 그걸 보다 정확하게 칭송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877,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자본에서 헤겔 변증법이라는 무겁고, 서툴고, 불필요한 뚜겅을 제거한다면, 논문의 다른 장점들을 제쳐두고서라도, 형태와 그 존재의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에 대해 일반적인 질문에 따른 해답을 놀랍도록 공들인 자료에서 목격하게 되며, 질문을 명확한 영역으로 멋지게 공식화할 수 있다.'

 

형태와 존재에 따른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라니. 사회적인 삶에서 다양한 측면들 간 상호 관계, 물질적인 관계에 기초한 이념적 · 사회적 관계에 따른 상부 구조라는 문제를 말한다. 문제에 따른 잘 알려진 해결책은 유물론 원리를 구성하는데, 계속 나아가 보자.

 

'사실 전체로자본, 하나의 사회 형태가 생겨나자마자 어떻게 생산 방식과 새로운 시장과 과학에서 발견 및 발명, 개선된 부분을 스스로에게 종속시키고, 흡수해나가면서 발전해나가고, 전형적인 특징들을 두드러지게 만드는지와 그런 부분들이 사회 형태를 위해 작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지, 그리고 마침내 주어진 사회 형태가 어떻게 물질적인 조건에서 더 이상 변화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에 기여한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1877, 전체로서 자본이 특정한 사회 형태에 대한 유물론적인 물음에 기여했었지만, 1894년에는 유물론적인 설명을 어떤 책의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니 말이다. 1877년에는 자본이 특정한 형태가 물질적인 조건에서 더 이상 변화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었던 반면에, 1894년에는 어떠한 물음도 없고, 자본주의 형태가 생산력 발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전적으로 헤겔의 삼단논법 끝에 기대어 있다고 밝혀졌다니. 1877,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어진 사회 형태와 존재에 따른 물질적인 조건 간 관계에 대한 분석은 필자의 논리력과 방대한 학식에 대한 기념비로 영원히 남게 될거라고 썼던 반면에, 1894년에는 유물론 원리가 어디에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증명된 적이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참으로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우선, 1870년대 국내 농민 사회주의에서 그 부르주아적인 특성 때문에 자유에 코웃음치고, 국내인들의 삶의 적대적인 본질을 열심히 은폐했던, 눈썹 깨끗한 자유주의자들과 싸웠으며, 꿈꾸었던 농민 혁명은 완전히 쇠락한 나머지, 자유주의가 농민층에 따른 대규모 착취를 동반한다는 점을 잊어버린 채, 저 저속하고, 속물적인 자유주의를 불러들였다. 그 자유주의자들은 농민 농업에서 진보적인 경향들에서 고무적인 인상을 확인했다는 이유에서 말이다. 둘째로, 1877,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감 넘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마르크스를 자유주의 비판가들로부터 방어하는 임무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마르크스 방법론과 자신의 방법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런 뒤, 변증법적 유물론과 주관적 사회학 사이에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엥겔스 글과 저작,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플레하노프의 여러 글들을 읽다보면, 미하일로프스키에 대한 아주 적절한 평을 가끔 마주치는데, 이를 접하게 되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진지하게 안장서 문제 전체를 되짚어보는 대신에 단지 이를 악물고, 반항하는 쪽을 택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18721877년에, 마르크스를 환영하는 대신에 의심스러운 칭찬 뒤에 숨어서 마르크스를 향해 짖어대고,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적 최약자들의 방어선, 창과 시골 지역 개선, 박물관과 수공업자들에 따른 협동조합, 마찬가지로 의도만큼은 선한 속물적인 진보 사상들에 만족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사회 혁명을 옹호하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로 남아 이 사회에서 진정한 혁명적 부류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고, 조직하기를 원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해 분노하고, 식식댄다.

 

머나먼 과거 영역으로 짧은 여행을 마치고 나면, 여러분은 아마도 미하일로프스키가 마르크스 이론 비판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 비평가의 주장들을 종합하고, 요약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가 무너뜨리는 데 착수했던 원리는 첫째로,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 둘째로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기초한다.

 

유물론적인 역사 개념에 있어서는, 어떤 책에서 유물론이 설명됐는지 모르겠다고 선언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그런 설명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 유물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꾸며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유물론이 과도한 주장이라는 걸 이해시키고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인류 전체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해명했다는 주장을 편다는 말을 조작해냈으며, 뒤이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하나의 사회구성체만을 해명한다고 인식한다는 점이 그들의 진짜 주장들로부터 드러나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유물론의 범위를 좁히면서부터,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유물론이 작동되는 방법론들을 이해시키고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해명할 만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음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말을 지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지 경제사 전반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1845-1846년에 고백한 게 전부이며, 출판된 논문에서도 자신들의 지식의 불충분함을 드러낸 적이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전주곡이 펼쳐지자, 곧바로 비판 자체가 뒤를 이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은 단지 하나의 시기만을 다뤘기 때문에 곧 소멸된 반면에, 자신은 모든 시기를 다루기를 원한다고 했다. 또한 자본은 경제적 유물론을 확인시켜준 게 아니라 단지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라고도 했다. 유물론이 절대 과학적으로 확증된 적이 없다는 인식을 자아낼 만큼 충분히 무게가 실린 진지한 주장들이었다. 뒤이어 완전히 다른 국가에서 역사 이전 시기를 연구한 결과 역시 유물론적인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인간은 전적으로 유물론과 무관하다는 점만이 인용됐다. 더욱이나 생식을 유물론으로 이끌고 가는 게 완전히 잘못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그리고 그건 언어적 기만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고자, 미하일로프스키는 경제적 관계가 성과 가족 관계에 기초한 상부 구조라는 걸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무게감 있는 비평가가 유물론자들을 교환시켜주고자 쏟아낸 서술들은 생식이 없으면 상속할 수 없다는, 복잡한 심리 작용이 생식의 산물들을 '수반한다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길러진다는 심오한 진로로부터 풍부하게 해주었다. 지나가는 말로, 또한 민족이 씨독 유대의 연장이자, 일반화라는 점도 알게 됐다.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이론적 연구를 이어가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주장 가운데 상당수가 부르주아 체제 아래서 대중들에 따른 억압과 착취가 필연적이라는 주장과 그 체제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있다고 지적했고, 그런 다음에 서둘러 필연성은 너무 일반적인 개념이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신비주의자이자, 형이상학자라고 선언한다. 또한 미하일로프스키는 이상주의자들에 맞선 마르크스의 격렬한 비판이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고 단정지었지만, 주관적 방법론에 대한 이상주의자들의 견해와 이상주의자에 대한 마르크스, 변증법적 유물론과 관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두 번째 기둥인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대해서는, 대담한 비판가가 가한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공격은 방향을 아주 잘 잡았다. 무엇이든 삼단논법으로부터 증명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반박하고자, 엄청난 노력을 들여, 고군분토했고, 변증법적인 방법론이 삼단논법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사회학에 따른 이상주의와 주관적인 방법론에 대한 거부에 있다는 점을 애써 무시해버렸다. 그런 다음 특별히 마르크스를 겨냥한 또 다른 공격이 이어졌다. 용감한 뒤링 선생의 도움을 받아,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가 삼단 논법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자본주의 파멸에 따른 필연성을 입증하려는, 놀랄 만큼 터무니 없는 시도를 했다고 뒤집어씌운 다음, 그런 터무니없는 시도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저명한 사회학자의 얼마나 멋진 승리의 서사시란 말이던가. 그리고 그런 승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건 또 얼마나 교훈적인가.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원리에 대한 비판과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도 없지만, 저 비평가의 이상과 현실 인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특징적인 또 다른 상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로 서구 노동 계급 운동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태도다. 앞에서 유물론이 과학적으로 아마도 독일 인민의 벗들의 과학을 말한다면, 스스로를 정당화시키지 못했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주장을 앞서 인용한 바 있다. 그러나 유물론이 노동 계급 사이에서 정말로 아주 급속하게 퍼지고 있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장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 점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경제적 유물론이 폭 넓게 누려온 이른바 성공과 비판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형태로 퍼져나가는 현상은 주로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확립된 일상의 관행 때문이지, 과학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확립된 관행이라는 터무니 없는 표현에는 곧 유물론이 확산된 이유가 현실을 정확히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멀어진 채 전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전망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인 독일 노동 계급이나, 이해 또는 비판적 사고의 노력 없이 미래에 대해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저 믿음을 요구할 뿐이다.

 

달리 말해,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 확산은 그 원리가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서구 노동 계급 운동 역사에 대해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 갖고 있어도, 이런 설명에 따른 완전한 어리석음과 잘못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하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절대 미래를 향한 전망 같은 걸로 치장하지 않았으며, 현재 부르주아 체제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 따른 발전 경향을 연구할 뿐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이미 시류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18439, A. 루게에게 쓴 편지에서도 투쟁을 멈춰라, 당신들의 투쟁은 무의미하다는 시류에 대응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모든 역할은 진정한 투쟁 구호를 제공한다. 이 세계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의식이란 싫든, 좋든,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라고 자신의 구상을 마무리지었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자세히 설명된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저작물인 자본은 미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암시에 스스로를 국한시켰으며, 단지 미래 체제가 발달하는 출발점인 현재 요소들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도 누구나 알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에 관한 한, 누구보다 미래 사회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사람들이 갈등 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사는 체제, 착취가 아닌 인간 본성 조건에 일치하는 사회적인 관계와 발전에 따른 참된 원칙에 기초한 체제를 표현해서 인류에게 영감을 불어넣고자 했던 이들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그러한 사상들을 상세하게 밝힌 건, 굉장히 재능 넘치는 사람들의 집단이자, 가장 굳건한 확신을 가진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들은 삶과 거리를 뒀고, 그들의 강령들은 대규모 기계 공업이 프롤레타리아 노동자 대중들을 정치적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길 때까지, 그리고 투쟁의 진정한 구호를 찾게될 때까지 민중들에 따른 정치적인 운동과 연결되지 않았다. 이 구호를 찾아낸 건 마르크스였다. 단순히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엄밀하고 또 건조하기까지 했던 과학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아주 오래 전인 1872년에 마르크스를 이렇게 불렀던, 그 마르크스 말이다. 그리고 전망이라는 수단으로부터 발견된게 아니라, 현재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부터 착취에 따른 필연성에 대한 해명, 발전 법칙에 따른 연구로부터 찾아냈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는 러시아 부독자들에게 그러한 분석을 이해하고자, 요구되는 건 지식도, 사고의 노력도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이미 미하일로프스키가 미하일로프스키의 경제학 조력자인 유자코프의 경우 한층 더, 그러한 분석이 확립한 초보적인 진실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켜봐왔기에, 그런 주장은 당연하게도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대규모 자본주의 기계 공업이 발전하는 곳을 따라, 노동 계급 운동이 확산되고, 발전한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 원리는 인간 본성에 일치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논쟁이 중단되고, 동시대 사회 관계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과 현재 착취 체제에 따른 필연성에 대한 해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꽃을 피운다.

 

이런 태도의 원리에다 진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방식으로, 전망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부터,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물론이 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를 외면하려고 애썼던 미하일로프스키는 서구 유럽 노동 계급 운동에서 사상과 전술에 대해 가장 저속하고, 속물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조롱을 가한다. 지켜봐왔듯이,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 사회화에 따른 결과로부터,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마르크스가 증명한 점에 대해 단 한 마디의 반박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자본주의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되찾을 준비를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군대로부터, 모든 계급 갈등이 중단되고, 지상의 평화와 인간들 간 친선이 지배하게 된다는 발상을 가장 뻔뻔스러운 태도로 조롱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주의 달성이라는 길로 향하는 그보다 훨씬 더 간단하고, 확실한 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인민의 벗들은 바람직한 경제적 진화에 따른 분명하고, 되돌릴 수 없는 길을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러면 아마도 이들 인민의 벗들은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소환되기에, 노동자들이 인민의 벗들을 기다리는 동안에 인민의 벗들에 의지해야지, 절대 정당하지 못한 자기 확신으로부터 착취자들에 맞선 독자적인 투쟁을 시작하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한 정당하지 못한 자기 확신에 빠진 죽음의 주먹을 날리기를 소망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주머니 사전에나 어룰릴 법한 과학에 노발대발해댄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주머니에나 들어가야 할 1페니짜리, 사회민주주의 소책자라니.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해방을 위해 독자적인 투쟁을 벌이라고 가르치는 과학, 계급 적대에 대해서는 얼버무리고 넘어가면서, 자신들에게 모든 일을 맡겨주기를 바라는 모든 인민의 벗들을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과학에 가치를 부여하고, 속물주의자들을 그렇게도 커다란 충격에 빠뜨린 1페니짜리 출판물들에서 그 과학을 상세하ㅔ 설명한 사람들이 얼마나 확고한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는지는 이제 분명해진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인민의 벗들에 손에만 맡겨둔다면, 사정이 얼마나 달라질까. 그들은 노동자들에게도 진정으로 아주 방대한 지식과 속물 과학이 뭔지를 잘 보여줄 텐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본성에 일치하는 사회구성체를 아주 구체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소개시켜준다. 물론 노동 계급은 그들을 기다리는 데 동의만 하고, 정당하지도 못한 자기 확신으로 투쟁을 시작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2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전반적인 마르크스 이론이 아니라, 특별히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겨냥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비판 2부로 넘어가기에 앞서, 약간의 여담을 늘어놔보자.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도 마르크스 이론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도 않고, 심각하게 왜곡하기만 했던 미하일로프스키는, 뻔뻔스럽게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생각을 왜곡시켰다. 진실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초기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비교하기에는 아주 손쉬웠다. 1892,러시아 사상6호에 실린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글로부터 초기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빌려올 텐데, 거기에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말했고,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또는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마르크스주의와 평생선을 긋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바 있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를 사회주의자들, 또는 국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분류해놓음으로부터, 그리고 그들과 동경으로 놓음으로부터, 미하일로프스키를 화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그러나 논점의 방향이 양자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똑같고, 단지 단호하고, 직설적인 면, 그리고 확신의 일관성 정도에서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조국 연보관점들을 서술하면서,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렇게 적는다.

 

'경작하는 사람이 땅을 소유하고, 생산자가 노동 수단을 소유하는 건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으로 여겼다.'

 

보다시피 시작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고, 가장 바람직한 소망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 여전히 존재하는 중세적인 노동 형태는 심각하게 흔들려왔지만, 자유주의든, 비자유주의든 어떤 교리를 위해서 완전히 종식시킬 이유를 전혀 찾지 못했다.'

 

참으로 이상한 주장이다. 분명 어떤 종류에 따른 노동 형태든, 그것이 다른 어떤 형태로부터 대체된다면 흔드릴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를 분석하고, 해명하거나, 왜 낡은 형태가 대체되는지 확인하고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자들이 노동 형태를 종식시킬, 곧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현존하는 생산 관계를 재구성할 어떤 수단을 소유하고 있단 말인가. 교리에 따라 이런 관계를 재구성한다는 발상은 터무니 없지 않은가.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계속 귀 기울여보자.

 

'임무는 원래부터 존재하던 문명을 민족적인 심연으로부터 우뚝 세우는 게 아니다. 갈가리 해체시키는 온갖 모순들과 더불어 서구 문명을 우리나라에 완전히 이식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좋은 걸 취해야만 한다. 우리 것이냐, 외국 것이냐는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실용적인 쪽의 문제다. 확실히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며, 이해하기 쉬워서 논의할 것조차 없다.'

 

정말로 이렇게 간단하다. 어디에서 온 것이든 간에 좋을 것을 취하자. 그러면 속임수가 완성된다. 중세적인 형태로부터 노동자의 생산 수단 소유를 취하고, 새로운 곧 자본주의 형태로부터 자유, 평등, 계몽, 문화를 취하라. 그러면 논의할 것조차 없다. 여기서 사회학에 따른 주관적인 방법론은 대낮만큼 명료하다. 사회학은 노동자 토지 소유라는 유토피아 낙원에서부터 출발해서, 여기저기서 좋은 것을 취하라는 소망을 실현시키는 조건을 알려준다. 철학자는 사회적 관계를 많은 제도에 따른 기계적인 단순한 총합, 곧 많은 현상들에 따른 기계적인 단순한 연속같이 보는 형이상학적인 견해를 취한다. 이러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는 중세적인 형태로부터 토지 경작자 소유를 불쑥 꺼내들며, 하나의 건물에서 다른 건물로 벽돌을 옮겨놓듯, 다른 모든 형태에도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사회적인 관계를 연구하지 않은거고, 검토할 소재를 훼손시킨다. 실제로 당신이 받아들이듯이,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존재하는 토지 경작자 소유 따위는 없다. 당시에 존재하는 생산 관계에 따른 연결 고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 곧 지주들에게 토지를 분할해주면 그들은 농민을 착취하고자, 그 토지를 농민들에게서 할당해 토지가 일종의 임금이 되는 구조일 뿐이다. 농민에게 필요한 생산품을 제공해주고, 덕분에 대규모 토지 소유주들은 지주를 위해 초과 생산물을 생산한다. 또한 농민들이 지주에게 봉건적인 노역을 제공할 수단을 안겨준다. 필자는 왜 이러한 생산 관계 체계를 추적하지도 않고, 한 가지 현상만을 골라내어, 완전히 잘못된 방식으로, 그걸 해석하는 함정에 스스로를 가두는 걸까. 바로 필자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당시에 존재하는 노동 형태를 설명하고, 명확한 사회구성체이자, 생산 관계 체계로 제시하는 일은 전혀 시작하지도 않고 있었다. 마르크스 표기에 따르면, 사회를 기능과 발전에 있어 살아있는 유기체로 간주하기를 요구하는 변증법적인 방법론을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새로운 형태를 논하는 데 있어서도, 왜 노동에 따른 낡은 형태들이 새롭게 대체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정확히 같은 잘못을 반복했다. 미하일로프스키가 보기엔 그러한 새로운 형태가 토지 경작자 소유를 뒤흔든다고 지적하고, 이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데만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다시 미하일로프스키 주장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한 가지 현상인 토지 강탈을 골라놓고는, 상품 경제에 기초한 완전히 다른 생산 관계 체계의 한 요소로 제시하려는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다. 상품 경제는 필연적으로 상품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쟁과 불평등, 일부 몰락과 다른 사람의 부에 따른 축적을 생기도록 만든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대중 몰락이라는 한 가지 사실에는 주목했지만, 소수로부터 부에 따른 축적이라는 다른 측면을 무시했으며, 미하일로프스키가 양쪽 모두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러시아의 부, 1894, 1호에서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고 일컫는 방법론들은 실제로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현실을 해명하고, 정면으로 응시할 능력도, 의지도 없던, 미하일로프스키는 무산 계급을 상대로 한 유산 계급의 분투와 함께 이런 삶의 문제들로부터 도피해서는 순수한 유토피아 낙원의 영역으로 굴욕적으로 숨어들어간다.

 

미하일로프스키에게는 뜨겁고도 복잡한 실제 현실을 이상적으로 다루면서부터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추구한다고 일컫는 이러한 행동에는 사실상 그가 실제 현실을 분석하고, 해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줄 뿐이다. 대신에 미하일로프스키는 다양한 사회구성체들로부터 개별적인 요소들을 분별없이 뽑아내는, 곧 중세 형태에서 하나를 뽑아내고, 새로운 형태로부터 또 다른 걸 뽑아내는 식으로 유토피아 낙원을 제시했다. 여기에 기초한 이론에는 실제 사회 진화와는 완전히 상이할 수밖에는 없는 운명이다. 공상주의자들은 여기저기서 뽑아낸 요소들로부터 형성된 사회 관계 아래서 살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농민과 쿨라크 간 관계, 수공업자와 구매자 간 관계, 노동자와 공장 소유주 간 관계를 결정짓는 사죄거 관계 아래서 살고 행동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그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도 그렇다. 이렇듯, 이해조차 하지 못한 관계를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서 다시 끼워맞추려는 시도와 노력들은 결국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아주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무대에 등장했을 당시에도, 사회주의라는 문제가 어떻게 러시아에서도 정립됐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주관적인 방법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착취에 따른 현실을 단지 지적하고, 비난하는 데서 만족하지도 못한 그들은 해명하기를 바랬다. 국내 개혁 이후로, 전반적인 역사가 대중 몰락과 소수 부의 축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보편적인 기술 발전과 더불어 소수 생산자들로부터 막대한 부에 따른 독점을 주목했고, 그러한 양극화 경향이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증가한다는 점을 주목한 그들은 상품 경제가 발전하고, 공고화된 결과로부터 자신들이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경제 조직과 맞닥뜨리며, 필연적으로 대중 착취와 억압을 발생시킨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런 확신에는 그들의 실질적인 계획을 직접적으로 결정짓는 구실을 했고, 따라서 그들은 저 멀리 떨어진 두메 마을에서부터 최신식 공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 국내 경제 현실에 따른 주요한 알맹이를 구성하는 자산 계급에 맞선 무산 계급 투쟁에 결합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럼 어떻게 그걸 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다시금 현실로부터 제시한다. 자본주의는 산업에 따른 주요 분야들을 대규모 기계 공업 단계로 이끌었다. 이처럼 생산을 사회화하면서부터 자본주의는 새로운 체제를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을 창출해냈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인 동력을 만들어냈다. 다름 아닌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바로 그렇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착취에 종속된 경제적 본질에 있어 국내 노동 인구 전체가 착취에 종속된다.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아리아는 그러나, 해방에 있어 특수하고도, 우호적인 위치에 선다. 더 이상 완전한 착취에 기초한 낡은 사회와 어떠한 연결 고리도 갖지 않게 되고, 노동 조건 자체와 삶의 환경이 계급을 구성할 때로 하여금, 정치 투쟁이라는 장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도록 하면서, 또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공장 노동 계급, 도시 프롤레타리아에게로 돌리고, 모든 희망을 이 계급에게 걸면서부터, 스스로 구상을 계급 의식 발전으로 치환할 수밖에 없고, 현 체제에 맞선 공장 노동 계급, 도시 무산 계급에 따른 직접적인 정치 투쟁을 돕고, 전체 국내 무산자를 투쟁으로 이끌어내는 방향으로부터 스스로 모든 활동들을 설정하게 된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싸우는 법

 

그럼 이제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어떻게 싸우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 견해, 그들의 정치적·사회주의적인 활동에 대해 어떤 주장들을 내놓고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적인 견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료 표현한다.

 

'진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선언한 바에 따르면, 역샂거인 필연성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국내 자체의 모든 고유한 모순들과 더불어 소수 자본가들이 막대한 몫을 빨아들이면서 스스로 자본주의 생산을 발전시킬거고, 그러는 사이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로 변모해서 통합되고, 사회화되며, 모자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에 씌어지는 마술이 일어나고, 인류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재가 아닌 오직 전망만을 취급하듯이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만 다를 뿐 어쨌든 간에 현실 인식에 있어서는 놀랍게도 인민의 벗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미하일로프스키의 생각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예측에서 낙원적인 부분은 전혀 없고, 모든 건 엄밀한 과학 요구에 따라 저울질되고, 측정된다는 걸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믿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맞서 무엇도 구체적으로 내놓을 게 없는 사람들 모두가 오랫동안 동원해온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시시하고, 저속한 비난을 눈 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주장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이고, 꾸며낸 말일 뿐이다. 서구에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자본주의가 존재해야 한다고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어디에서도 주장한 적은 없다.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역사에 대한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철학적 도식이라고, 특정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설명 그 이상이라고 간주한 적도 없다. 오직 주관적인 철학자, 미하일로프스키만이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 부족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며, 보편적인 철학 이론이라 주장했다며 마르크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답변으로 미하일로프스키가 엉뚱한 문을 두들기고 있다는 걸 아주 분명하게 해명해주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현실과 주어진 역사, 곧 국내 사회적·경제적 관계 외에 다른 걸 근거로 해서, 사회민주주의 견해를 품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려야 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직접 이론에 있어서 그런 요구 사항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한데다, 전체적인 이론에 따른 주춧돌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자신의 귀로 직접 추상적인 역사 도식에 관한 고백을 들었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마음껏 이런 주장을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하일로프스키는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들로부터 그 모든 종류의 터무니 없는 헛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는 점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나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 뭐가 그리도 중요할까. 그건 그저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이 대화할 사람들을 선택할 행운을 누렸다는 걸 보여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재치 넘치는 철학자의, 재치 넘치는 대화 상대자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등으로 불렀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은 악당들이 저마다 붉은 옷을 차려 입고 싶어한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너무나 명민하 나머지, 그런 광대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구별하지 못했다면, 또는 마르크스를 너무나 심오하게 이해한 나머지,

마르크스가 아주 강력히 전개했던 이론 전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공식화의 기준을 알차리지 못했다면, 단지 미하일로프스키는 영리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해줄 뿐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해당 매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홀로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유지하고, 글자 그대로 대표해온 플레하노프와 노동해방단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단체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가 그렇게 했더라면, 품위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했어야 하는 행동이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저작인, 플레하노프, 우리의 차이점들을 참고 삼아 펴보기라도 했다면, 맨 처음 시작 부분에서 단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대신해서, 플레하노프가 단호하게 밝힌 다음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위대한 이름의 권위로부터 곧 마르크스 영향력으로부터, 강령을 잠시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미하일로프스키, 당신 러시아어 알아들 수 있을 거 아니오. 국내 정세를 판단할 때, 추상적인 도식들을 주장하는 거와 마르크스 영향력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 차이를, 이제 이해하겠소. 당신이 당신의 대화 상대에게 우연하게 들은 첫 견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의견이듯이 말하고, 전체 사회민주주의 모임을 대표해서, 핵심 구성원인 한 사람이 천명한 내용을 무시한 게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깨달았소. 그런 다음 플레하노프 선언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되풀이하건대, 가장 일관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내 현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정책에서는 이런 특정한 과학 이론을 아주 복잡하고, 서로 얽혀 있는 사회적 관계에 적용하려는 최초 시도'

 

라고 말한다. 과연 이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들은 마르크스 이론 가운데 매우 귀중한 방법론만을 주저 ㅇ벗이 빌려왔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적인 관계를 해명할 수는 없었겠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 기준을 추상적인 도식 같은 허튼소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정확도와 일치에서 찾았다.

 

여러분들은 이런 주장을 펼칠 때, 필자가 실제로 다른 무언가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상대했던 질문은 '국내에서 자본주의적인 발전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가'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런 식의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공식에서는 전혀 제시된 적이 없었고, 당국 정책이나, 사회 활동, 인간 본성에 조응하는, 사회 이상 같은 헛소리에 그러한 해야만 하는 기준을 발견하는 여러 다양한 토박이 철학자들의 주관적인 방법론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도식을 믿는 인물이라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가를 묻는 쪽이 공정해진다. 그리고 분명 미하일로프스키는 변증법적인 과정에서 명백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전반적인 철학에서 중요도, 모든 국가가 그러한 단계를 거쳐야 할 필연성 등에 대해 말했었다. 그렇다면 플레하노프는 거기에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대답했다. 플레하노프는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제쳐두었다. 오직 주관론자들만 흥미를 느낄 법한, 쓸데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플레하노프는 오로지 현실 사회와 경제 관계와 실제적인 진화만을 다루었다. 플레하노프는 그런 잘못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기보다는, '국내는 이미 자본주의 길로 들어섰다'고 대답한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미하일로프스키는 추상적인 역사 도식들에 대한 믿음에 대해, 내재적인 필연 법칙에 대해, 그리고 비슷한 믿기 힘든 험튼소리에 대해 전문가인 척 말한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룰 두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고 부른다. 이런 게 격렬한 비판이라면, 엉터리와 같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앞에서 인용된 미하일로프스키 주장과 관련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국내로는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발전시키게 되겠다.' 이 철학자의 견해로는 국내에서는 분명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다. 미하일로프스키는 확실히 러시아 자본주의가 150만 노동자들에게 국한된다는 의견을 공유한다. 나중에 뒷 부분에서, 인민의 벗들에서도 유치한 발상과 다시 마주친다. 맹세코 그들은 자유 노동에 따른 모든 다른 형태들을 다음 주제 아래로 분류한다. '국내는 스스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그 고유한 모순들 속에서 발전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다.'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는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 오늘날 러시아에서는 아직 고유한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는 단순히 말해서, 소수 자본가들로부터 다수 민중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인구 절대 다수는 몰락하는 가운데 소수만 배를 불리는 현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농민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없었다면, 국내 개혁 이후로 전체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비할 데 없는 강도로 전개될 수 있었을까. 실로 엄청난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고서야, 저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었겠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생성된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주의를 다뤘지만, 아직 그것들을 창출해야만 한다.'

 

국내에서도 아직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해야만 한다고. 국내에서, 대중의 벗어날 길 없는 빈곤과 노동 인민에 대한 후안무치한 착취가 목격되는 유일한 국가인 러시아에서. 국내 빈곤층 조건은 아주 타당하게도, 잉글랜드와 비교되어왔다. 그리고 수백만 명은 영구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국가에서 곡물 수출에 따른 꾸준한 증가가 나란히 목격된다. 이런 러시아에서도 아직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미하일로프스키는 살아생전에 그런 빼어난 주장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이 나온 김에, 나중에 국내 노동 인민의 참을 수 없는 환경에 위선적으로 눈을 감고, 그런 환경을 단지 흔들린다는 표현으로만 묘사하면서부터, 모든 게 정상 궤도에 놓이려면 문명화된 사회와 정부 노력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인민의 벗들이 시종일관 끊임없이 사용해온 전술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들 기사 양반들은 노동 인민들의 환경이 악화되는 게 단지 흔들려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후안무치한 소수 착취자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자신들이 눈을 감는다면, 그러한 착취자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 묻는다면, 착취자들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런 그들을 향해 당면한 현실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건 부끄러운 겁쟁이 짓이라고 말할 때, 착취라는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인민 대중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분리시키는 국내 사회에서 부르주아 구조와 부르주아 지배 기구인 국내 국가에 따른 계급적인 성격에 있다고 말할 때,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에 있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말할 때,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쫓기를 원한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인민들의 경제 구조를 파괴하기를 바란다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모든 점잖지 못한 행동 가운데에서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가장 괘씸한 부분, 곧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미하일로프스키의 격렬한 비판으로 말을 옮겨가보도록 하자. 사회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수행한 활동들은 합법적인 언론에서 정직하게 논의될 수 없고, 점잖게 검열을 거친 정기 간행물이 이와 관련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요령껏 침묵을 유지할 뿐이라는 점은 모두 알고 있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아주 초보적인 규칙을 망각했고, 독자 대중과 접촉면을 독점한 자신의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의 얼굴을 더럽히는 데 활용하는 데 전혀 양심의 거리낌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양심적인 비평가와 싸우는 수단들은 설사 합법적인 출판 영역 바깥이라고 할지라도, 곧 발견된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순진한 척 가장하며 말한다.

 

'내가 알고 있기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방관자들, 소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적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이게 뭐지. 비평가 선생은 처한 환경에 따른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이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라는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은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점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어떻게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들과 일종의 분별없는 속물들을 뒤섞을 수가 있을까. 미하일로프스키는 무슨 권리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를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장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소신들조차 받아들이지 않은 게 분명한 사람들, 결코 눈에 띄는 집단으로 행동한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발표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가. 미하일로프스키는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허점을 남겼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상류 사회의 멋쟁이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마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 하다고 농담을 내뱉는다. 대체 누가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건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모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살롱(응접실)에서, 사적인 편지에서, 좋다. 당신도 응접실이나, 편지로부터 그들과 실컷 이야기를 나눠보기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언론에다 대고 어디에서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마르크스주의 간판을 내건 사람들에게 맞서는 주장을 편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도 당신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오직 한 모임으로부터만 사용된다는 점과 그들을 다른 누구와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렇듯 미하일로프스키는 나쁜 짓을 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학생같이 사실을 비틀고, 왜곡시킨다.

 

'내가 여기서 비난을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독자들이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 애쓴다. 내 귀로 들었고, 내 눈으로 보았다.'

 

당신의 눈에는 속물들과 비열한 악당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기꺼이 믿어드리지요.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사회주의 활동뿐만이 아니라, 독립적이고, 정직한 사회적인 활동이라면 '인민의 의지'(나로드볼리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 심지어 입헌주의든 간에 일정한 간판 아래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든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 있는 현 시점에, 그 이름 아래 자신들의 자유주의적인 비겁함을 감추고, 미사여구나 늘여놓는 일부 사람들과 그에 빌붙어 자신의 둥지를 깃털로 감싸는 몇몇 철저한 악한들이 있다는 점을 누가 모를까. 온갖 종류의 쓰레기로부터 그 이름이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더럽혀진 점에 대한 책임을 앞에서 언급한 사상적인 경향들에 묻는 건, 오직 천박한 속물들만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 전체적인 주장은 일련의 왜곡, 곡필, 조작이다. 앞에서 미하일로프스키가 사회민주주의자의 출발점인 진실들을 왜곡시켰고, 언제 어디에서든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부터 왜곡된 진실을 제시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리고 미하일로프스키가 국내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제적인 인식을 설명했더라면, 미하일로프스키는 오직 한 가지 방식, 곧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 발전을 돕고 현 체제에 맞선 정치 투쟁을 위해 조직하고, 단결하면서부터 같은 견해들을 따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는 또 다른 속임수 하나를 소매 속에 더 감추고 있었다. 상처 입은 무고한 피해자인 척 미하일로프스키는 위선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능글맞게 선언한다.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기쁘지만, 나는 당신이 반대하는 게 뭔지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소극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내 논평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보시오. 그러면 내가 말한 바를 알게 될테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거요.'

 

물론 이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예전에도 썼던 형편 없는 속임수의 재탕에 불과하다. 부탁하건대, 자신이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선언하고는 다음과 같은 말로 넘어갔던 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을지 누가 좀 알려주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기로, 인민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농민들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에 부응해서, 아내를 회초리로 구타하난 행위나, 인민 대처 방침이라 불려온 정부의 혐오스러운 태형 정책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일치시키면서부터 그것들을 촉진시켜나가는 일관성 있는 인민주의자, 일관성 있고 용감한 인민주의자로 변모시켜주는 언덕길이 있어 어쩌다 운 좋게 거기로 미끄러지지 않는 한 농민 의견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결사와 같은 방식으로부터 외국의 혁명 운동을 국내에 이식하려 애쓸 뿐 그에 반하는 목소리는 전혀 낼 줄 모르는 겁쟁이 인민주의자, 부농으로 정직하게 살아가고자, 진취적인 농민이라는 민중적인 이상향을 철저히 실행에 옮겨, 땅에 정착한 용감한 인민주의자 말이다.'

 

물론 자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저속한 조롱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설령 인민주의자들이 저런 주장에 대해 같은 지면에서 반박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태까지 인민주의 사상이 불법화됐던 탓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사상이 정확히 어떤 건지도 모른 채, 단지 전해 들은 말만 쉽게 믿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런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같은 의견이다. 아마도 미하일로프스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잘 알고 있으리라. 어쨌든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앞의 말과 비슷한 내용을 암시한 대목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글을 읽고, 여기저기에 흩어진 내용들을 끌어모은 다음, 그것들을 비교해서, 진지한 반박거리를 찾아내는 작업보다 더 피곤하고, 생색 안 나고,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 여기까지.

 

 

발행자 주석

 

앞서 독자들은 일부 질문들에 대해 추가로 검토했다는 언급들을 보았을 텐데, 실제로는 그런 검토가 이뤄지지는 않았따. 그 이유는 현재 글이러시아 부에 실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사들에 대한 답변의 1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시간 부족으로 인해, 글을 때맞춰 발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미 두 달이나 늦어버린 상태에서,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고 판단을 내렸고, 그래서 글 전체가 인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의 비판에 대한 고찰을 먼저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준비 중인 2, 3부에서 독자들은 1부에서 제시된 검토에 덧붙여, 국내 경제 상태에 대한 글과 뒤이어 나온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전술과 관련해 러시아의 부에서 다른 핵심 인물들인 유자코프와 크리벤코의 사회적·경제적 관점에 대해 검토한 글을 보게 된다.

 


현행 판에 대한 주석

 

현행 판은 초판을 정확히 복사했다. 본문을 편집할 때 전혀 참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수정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출판에 관계된 일만 했다. 작업을 맡은 건, 소책자가 사회민주주의 정치 선전을 부흥시키는 데 있어 일정 정도 기여할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신념에서 피할 수 없는 귀결 가운데 하나로는 그런 정치 선전을 촉진시킬 준비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소책자 저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론 특히 재발행으로부터도, 이 책자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모든 기관지들이 할 수 있는 한 널리 배포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를 호소한다지금이야말로 일을 하기에 특히 적당한 때다.러시아 부는 더욱 더 도발적인 논조를 취한다. 사회민주주의 사상이 사회에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부터, 잡지는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며, 대중 파멸만 초래한다고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감히 생각건대, 그런 방법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상처를 입히고, 우리 승리를 향한 길을 닦아줄 뿐이다. 하지만 중상모략꾼들이 자신들의 정치 선전 모략을 아주 널리 퍼뜨릴 모든 물질적인 수단을 장악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발행 부수가 수천 부에 달하는 잡지를 소유하고, 열람실과 도서관을 마음껏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특권적인 위치에서 이점을 갖고 있더라도, 언제나 성공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라는 점을 적들에게 증명하고자,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만 하며, 노력이 현실화되리라는 걸 전적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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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장이 소실된「인민의 벗」은 1895-1896년, 당시에 노동해방모임과 사회민주주의 조직, 그리고 지방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비공식적으로 발 빠르게 알려져갔다.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와 같은「인민의 벗」은 사회민주주의 동지를 저버린 자들에게 전하는 적나라한 고백과도 같다. 그래서「인민의 벗」을 다듬을 때면, 최대한 문장을 수정해서 고치지 않고, 정정해서 바로잡는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편안하게 누워 한 문장을 그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기존에 있던 글을 조금씩 옮기면서부터, 문장이 어울리도록 쓴다. 전에는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세세하게만 신경썼다면, 지금은 말하듯이 쓰는 게 읽는 사람들에게도 더 낫다는 생각이다. 글도 닿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한문을 우리말로 표기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자신의 이상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국어도 언어를 전달하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정작 우리말로 바꿔봤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에 대한 잘못된 오류는 충분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출판되는 수 많은 연구 서적들과 덧붙인 견해는 더군다나『자본』이라는 뼈대와 대단히 동 떨어지고 멀어져서 복잡하고, 또 어려워진다. 오히려 그런 책은 따로 분량을 정해놓고 읽는다.「인민의 벗」에서 그는 특히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선험적이고, 추상적인 연구에 있어 형이상학적으로만 마르크스를 다뤘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의 설명 덕분에 사회구성체 연구가 무엇이고, 또 어떤 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인민의 벗」은 정치경제학 서적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있어서도 기존의 사회 과학에 대한 높은 수준의 비판에서 정수를 보여준다. 명민한 독자들이라면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인민파와 같은 주관적인 연구 방법에 매몰된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자신의 주된 시각에 대한 검증 없는 한계를 실감해본다. 개인의 견해를 존중하더라도, 그것이 꼭 사실에 입각하는지를 물어볼 때면 인지도와 전문성에 따른 권위의 문제로 갇혀버리고는 만다. 느낌은 언제든 표현하면 되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특히 혹독하게 비판 당한 그들과과 같은 견해를 가진 기존의 연구자들은 현재에도 과연 없는지를 되묻고, 상대해보게 된다. '인민의 벗'은 얼마나 노동 대중에 대해서도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눈가리고 아웅인 일이던가. 


충분한 해명이지만, 흔하게 복제되는 저작권을 염두하더라도, 단순한 인용문이 아니라 번역자의 노고에 대해서는 경의를 먼저 표해본다. 만료된 문서에 대한 시중에 유통되는 출판사에 있어서도 책을 옮기는 과정에서 뒷따르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혼란스럽고, 어지로운 글이라고 여겨졌던 논지를 잘 파악하고, 거듭 정리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독자이기 때문에 매우 필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전히 존경이란 없고, 소송만 남은 법률적인 사유 재산을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현사태를 보노라면, 가끔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란 자유이고, 또 연구란 공개인데, 모든 게 돈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도, 또 한 번 막혔을 출판사의 사정을 알게 된다. 물론 시시콜콜 참견하듯이 출판사의 경제적 사정과 어려움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쪽이 낫겠다. 사회민주주의를 홍보하는 방식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인 소모로나, 아무리 봐도 스스로 해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칼 리프크네히트,『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정식 출판은 못했지만 비공식적으로 번역했었다. 물론 공장 번역기를 돌리면 그만이었다.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분량을 한 글자 모두 신경써가면서 끝냈고, 얼마 없는 돈을 가지고 신뢰가는 인쇄소로 달려갔을 때는 지금도 놀랍고, 대단히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읽기만 했을 때는 몰랐다. 이제는 책 출판이 어렵지도 않고, 이런 일이라면 편집자들과 노동자들이 있다면 일도 아닐 정도로 훨씬 수월하게 작업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모르는 한 단어를 찾기 전까지도, 그에 맞는 글을 더 정확하게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수정해서 고친다는 마음보다 정정해서 바로 쓴다는 마음가짐이 더 들었다. 그들은 상업성을 위해서 더욱 재탕할 수 있고, 잘 팔리는 책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독자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닿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한에서도 번역에 있어 매우 아쉽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하고서라도, 할 만큼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소위 작가라는 작자가 오히려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지금 이 기록을 쓴 사람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시중에 유통되는 요즘 작가들에게 향하는 말이다. 독자들은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작가들이 쓴 작품보다 더 뛰어난 글을 여러 차례 읽고는 했다. 그들과 독자의 차이란 단지 알려졌느냐, 덜 알려졌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뒤늦은 독자로도 최선은 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태도가 생겨난다.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다. 단지 정리이기 때문에『자본』으로 향하기 전에 아마 더 줄여나가야겠다. 작업 방식을 비밀로 하기보다는 공개하는 이유로는 그간의 성장통과 투쟁에 대한 공유를 혼자만 알면서 앓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자본』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도 아마 꾸준할 필요는 생긴다.   


투쟁이란 느슨하게 흐지부지하거나, 그저 번지르르한 말도 아니고, 정해진 구호가 없는 외침도 아니더라. 그들이 자주 말하는 투쟁 없는 대화와 타협이란 바로 이론과 학습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생략해버린, 또 자신의 반성 없는 자본을 위한 헛된 노동을 두고 밤샘이라고 우겨대더라. 재탕을 우려먹으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고 말았을 때는 이미 뒤늦은 법이다. 그런 논리가 지금 역사 유물론자들의 논쟁으로까지 발전했다. 더군다나 자유주의자와 페미니스트가 손을 맞잡으며 부질 없는 투쟁이라고 부채질하며 둘러댈 때는 둘 모두에게 사치일 뿐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라는 지배적인 역사 앞에 늘 숨어버리는 그들은 얼마나 또 비겁해지는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온데간데없이 자신들만의 전차 앞에서 재탕하는 '민주주의' 를 옹호하다가도, 애쓴 시위에 환호하는 시민들의 엉덩이 뒤에도 얌체 같이 숨으며 대의이든, 숙의이든 자신들의 머릿속을 헤매고 마는 해석의 변증법으로 갈리면서, 그들만의 혐오스러운 논쟁 아닌 섣부른 대화에 주궁장창이다. 실은 기껏해야 말빨로 자랑질하고, 하다못해 정치질은 또 수준급이라서, 입만 털면 혀가 긴 걸 보니, 여전히 그들에게 놓여진 심연이란 흐리터분한 인식처럼 더욱 어둡고도, 멀어질 뿐이다. 모두 때가 묻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린이도 배운 적 없는 패악질 속에 영원히 파묻혀 징징거리기 일쑤지만 한 두 번만 들어줄 수 있는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해서 배우지 않을 수 없겠는가. 


언젠가 그는 대중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이 지닌 힘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한 번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있어 권력이란 누구의 손에 있고 또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가담한 사람들은 실제로 바뀐 건 그 무엇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고칠 수 있다고만 믿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해 인민의 벗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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