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2장이 소실된「인민의 벗」은 1895-1896년, 당시에 노동해방모임과 사회민주주의 조직, 그리고 지방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비공식적으로 발 빠르게 알려져갔다. 그들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와 같은「인민의 벗」은 사회민주주의 동지를 저버린 자들에게 전하는 적나라한 고백과도 같다. 그래서「인민의 벗」을 다듬을 때면, 최대한 문장을 수정해서 고치지 않고, 정정해서 바로잡는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편안하게 누워 한 문장을 그대로 읽을 수도 있지만, 기존에 있던 글을 조금씩 옮기면서부터, 문장이 어울리도록 쓴다. 전에는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세세하게만 신경썼다면, 지금은 말하듯이 쓰는 게 읽는 사람들에게도 더 낫다는 생각이다. 글도 닿는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한문을 우리말로 표기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자신의 이상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국어도 언어를 전달하는 한계가 분명 존재한다. 정작 우리말로 바꿔봤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에 대한 잘못된 오류는 충분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출판되는 수 많은 연구 서적들과 덧붙인 견해는 더군다나『자본』이라는 뼈대와 대단히 동 떨어지고 멀어져서 복잡하고, 또 어려워진다. 오히려 그런 책은 따로 분량을 정해놓고 읽는다.「인민의 벗」에서 그는 특히 미하일로프스키 선생이 선험적이고, 추상적인 연구에 있어 형이상학적으로만 마르크스를 다뤘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그의 설명 덕분에 사회구성체 연구가 무엇이고, 또 어떤 점에서 비판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인민의 벗」은 정치경제학 서적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있어서도 기존의 사회 과학에 대한 높은 수준의 비판에서 정수를 보여준다. 명민한 독자들이라면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인민파와 같은 주관적인 연구 방법에 매몰된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자신의 주된 시각에 대한 검증 없는 한계를 실감해본다. 개인의 견해를 존중하더라도, 그것이 꼭 사실에 입각하는지를 물어볼 때면 인지도와 전문성에 따른 권위의 문제로 갇혀버리고는 만다. 느낌은 언제든 표현하면 되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도, 특히 혹독하게 비판 당한 그들과과 같은 견해를 가진 기존의 연구자들은 현재에도 과연 없는지를 되묻고, 상대해보게 된다. '인민의 벗'은 얼마나 노동 대중에 대해서도 위선과 기만으로부터 눈가리고 아웅인 일이던가. 


충분한 해명이지만, 흔하게 복제되는 저작권을 염두하더라도, 단순한 인용문이 아니라 번역자의 노고에 대해서는 경의를 먼저 표해본다. 만료된 문서에 대한 시중에 유통되는 출판사에 있어서도 책을 옮기는 과정에서 뒷따르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혼란스럽고, 어지로운 글이라고 여겨졌던 논지를 잘 파악하고, 거듭 정리해보고자 노력하고 있는 독자이기 때문에 매우 필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전히 존경이란 없고, 소송만 남은 법률적인 사유 재산을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현사태를 보노라면, 가끔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란 자유이고, 또 연구란 공개인데, 모든 게 돈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도, 또 한 번 막혔을 출판사의 사정을 알게 된다. 물론 시시콜콜 참견하듯이 출판사의 경제적 사정과 어려움까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쪽이 낫겠다. 사회민주주의를 홍보하는 방식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비용적인 소모로나, 아무리 봐도 스스로 해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국내에서는 최초로 칼 리프크네히트,『군국주의와 반군국주의』를 정식 출판은 못했지만 비공식적으로 번역했었다. 물론 공장 번역기를 돌리면 그만이었다. 누구나 번역할 수 있는 분량을 한 글자 모두 신경써가면서 끝냈고, 얼마 없는 돈을 가지고 신뢰가는 인쇄소로 달려갔을 때는 지금도 놀랍고, 대단히 미친 짓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읽기만 했을 때는 몰랐다. 이제는 책 출판이 어렵지도 않고, 이런 일이라면 편집자들과 노동자들이 있다면 일도 아닐 정도로 훨씬 수월하게 작업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모르는 한 단어를 찾기 전까지도, 그에 맞는 글을 더 정확하게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수정해서 고친다는 마음보다 정정해서 바로 쓴다는 마음가짐이 더 들었다. 그들은 상업성을 위해서 더욱 재탕할 수 있고, 잘 팔리는 책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독자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닿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한에서도 번역에 있어 매우 아쉽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뒤로 하고서라도, 할 만큼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그러나 소위 작가라는 작자가 오히려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지금 이 기록을 쓴 사람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시중에 유통되는 요즘 작가들에게 향하는 말이다. 독자들은 훨씬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작가들이 쓴 작품보다 더 뛰어난 글을 여러 차례 읽고는 했다. 그들과 독자의 차이란 단지 알려졌느냐, 덜 알려졌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뒤늦은 독자로도 최선은 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태도가 생겨난다. 그래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다. 단지 정리이기 때문에『자본』으로 향하기 전에 아마 더 줄여나가야겠다. 작업 방식을 비밀로 하기보다는 공개하는 이유로는 그간의 성장통과 투쟁에 대한 공유를 혼자만 알면서 앓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자본』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도 아마 꾸준할 필요는 생긴다.   


투쟁이란 느슨하게 흐지부지하거나, 그저 번지르르한 말도 아니고, 정해진 구호가 없는 외침도 아니더라. 그들이 자주 말하는 투쟁 없는 대화와 타협이란 바로 이론과 학습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생략해버린, 또 자신의 반성 없는 자본을 위한 헛된 노동을 두고 밤샘이라고 우겨대더라. 재탕을 우려먹으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고 말았을 때는 이미 뒤늦은 법이다. 그런 논리가 지금 역사 유물론자들의 논쟁으로까지 발전했다. 더군다나 자유주의자와 페미니스트가 손을 맞잡으며 부질 없는 투쟁이라고 부채질하며 둘러댈 때는 둘 모두에게 사치일 뿐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부르주아적 민주주의라는 지배적인 역사 앞에 늘 숨어버리는 그들은 얼마나 또 비겁해지는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온데간데없이 자신들만의 전차 앞에서 재탕하는 '민주주의' 를 옹호하다가도, 애쓴 시위에 환호하는 시민들의 엉덩이 뒤에도 얌체 같이 숨으며 대의이든, 숙의이든 자신들의 머릿속을 헤매고 마는 해석의 변증법으로 갈리면서, 그들만의 혐오스러운 논쟁 아닌 섣부른 대화에 주궁장창이다. 실은 기껏해야 말빨로 자랑질하고, 하다못해 정치질은 또 수준급이라서, 입만 털면 혀가 긴 걸 보니, 여전히 그들에게 놓여진 심연이란 흐리터분한 인식처럼 더욱 어둡고도, 멀어질 뿐이다. 모두 때가 묻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린이도 배운 적 없는 패악질 속에 영원히 파묻혀 징징거리기 일쑤지만 한 두 번만 들어줄 수 있는 소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해서 배우지 않을 수 없겠는가. 


언젠가 그는 대중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이 지닌 힘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한 번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있어 권력이란 누구의 손에 있고 또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가담한 사람들은 실제로 바뀐 건 그 무엇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여전히 고칠 수 있다고만 믿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해 인민의 벗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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