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의미가 있는 결론
결론으로 들어가서, 십중팔구 여러 명 독자가 이미 품어봤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건 의미가 있다. 왜 저런 신사 양반들과 긴 지면을 할애해서 논쟁했단 말인가. 그들이 기꺼이 반론이라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검열을 통과한 추잡한 주장들에 대한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또는 교양 있는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한 맹공격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격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 전체를 이뤄, 하나로 녹아들어갔던, 국내 사회 발전 시기가 아직은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지고,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 국내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상적으로도, 심오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오늘날 일부 국내 사회주의자로부터 여전히 고수되면서,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 가장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런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하며, 그래서 지금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때, 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이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할 때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상이 태동했던 시절에, 실제로 국내 민주주의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비교를 위한 충분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관련된 독일에서 한 출판물, 「중앙 사회 정책 신문,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관하여, 1893. 10. 2」에서 니콜라이 온 선생의 공상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폈었던, 스트루베 선생을 크리벤코 선생이 공격하고 나선 점은 아주 흥미롭다. 크리벤코 주장에 따르면,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들어, 스트루베에게 공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그러한 끔찍한 비난에 얼마나 격분했던지, 훌륭한 크리벤코는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다.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농민들을 위해 규제를 만들고, 공동체와 농민의 경제적인 독립을 개혁 기초로 삼은 사람들 아니던가. 역사 연구자들과 같은 시대 삶을 연구하던 사람들, 그리고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들 거의 대부분이 그런 원칙들을 지지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망상의 피해자들이란 말인가.'
인민의 벗은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지독한 비판에 겁먹은 나머지, 스트루베의 '하찮은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지도 않았다. 실제로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주의와 연관됐다고, 비난하는 행위는 실로 부당한 일이다. 도대체 거기에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알다시피, 사회주의란 노동 인민 착취에 맞선 저항과 투쟁, 착취에 따른 완전한 철폐를 위한 투쟁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에, 분여지를 옹호한다는 건, 한때 농민들이 마음대로 이용했었던 모든 토지에 대해 이제 상환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태를 지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토지 대금 상환이 아니라, 개혁 이전에 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의 무상 보유를 지지할지라도, 러시아에서처럼, 서구 전역에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가 됐던 게 다름 아닌, 봉건 시기에 차츰 진화했던, 농민 토지 소유권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마을 공동체를 옹호한다는 건, 곧 토지를 분배하는 관례적인 방식들에, 경찰이 개입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나선다는 점 역시도, 공동체 내에서는, 노동 인민의 착취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또 발생한다는 걸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까지 확대 과장했음에 불과하며, 그게 옳다면, 포베도노스체프 선생 또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스트루베는 그런 지독하고, 부당한 처사에는 잘못이 없다.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스트루베가 인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플레하노프, 「견해 차이」를 언급했다는 점으로부터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을 어떻게 분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플레하노프는 분명 사회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크리벤코는 인민주의자들을 겨냥한 비판을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으로 여길만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크리벤코가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사조에 대한 스트루베의 견해를 알고 싶어 안달이라면, 스트루베의 글에 나온 아래 단락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러시아 부」에다 번역해서 옮기지 않은 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해갈수록, 방금 서술한 인민주의 철학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짐이 목격된 타협할 수 잇고, 또 그걸 추구하는 무색무취 개혁적인 사조로 퇴조하든지, 실질적인 발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그 뒤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이론과 실질적인 결론에 도달하든지, 달리 말해, 더 이상 공상주의에 빠져 있지 않게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
크리벤코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타협할 수 있는 사조의 시작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면, 「러시아 부」의 이론적인 견해들을 흘끗 들여다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해당 잡지는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인식을 인민주의 교리 조각들로 짜맞추려는 한심한 시도를 대표하며, 정치 구상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해서 소생산자들의 살림살이를 개선하고, 회복시키는 걸 목표로 삼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는, 대략적으로, 인민주의가 소부르주아 기회주의로 타락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부」가 품은 구상에서 실체인 이민 규제, 토지 임차, 값싼 신용, 박물관, 창고, 기술 개선, 집단 농장, 공동 토지 경작, 나머지 모든 걸로부터, 봉건 지주들의 기관지도 아니고, 어용 신문에 속하지도 않는, 진지하고, 존경받는 자유주의 언론 진영 전반에서, 그런 견해가 참으로 널리 유통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그런 모든 조치들이 필요하고, 절실하고, 시급하며, 심지어 무해하다는 생각은 지식 계급 전체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또 아주 널리 퍼져 있다. 모든 지방 정부의 연구와 보고서들에서 나온 서술과 신문 등에서 그런 견해를 마주하게 된다. 이걸 인민주의라고 간주한다면, 그 성공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실로 엄청나고, 명백하다.
물론 과거 관례적인 의미에서, 인민주의가 전혀 아니지만, 성공과 엄청난 파급 효과에는 자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를 한껏 고양된 기회주의로 변형시키고, 자유주의와 통합시켜서, 오로지 소부르주아 이익만을 대변하도록 하면서, 인민주의 품격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로 얻어진다. 이런 점을 확인하고자, 앞서제시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분화라는 모습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결코 따로 떨어져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며, 단지 반대자들조차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던, 농촌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 무리를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표현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인민주의적인 조치들이 소부르주아를 강화시켜주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 다른 조치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그들 무리 자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도, 보잘 것 없는 임시 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유럽 전역에서도 아주 친절하게 일궈놓았던, 그런 유형에서 비참한 실험으로 그치게 될 운명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예르몰로프, 비테와 같은 제정 정부에 소속된 자들조차 그런 유의 발전에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지를 보낸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이 혁명적인 활동에서 손을 떼고, 계급 적대를 무마시키고자 화해와 통합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실험들을 위한 자금을 기꺼이 대준다. 그렇다면 인민주의를 타락으로 이끈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이론은 아주 탄탄했다. 인민의 삶에서 특수한 방식에 대한 관점에서 출발한 건, 공동체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을 믿었고, 그 이유로, 농민을 타고난 사회주의 전사로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내 생활 현실에 대한 정교환 이론과 확인 작업이 부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특질이라 여겨지는 걸 기초로 한 정치적 구상을 적용시키는 경험도 짧았다. 그래서 이론 발전은 이론적인, 실천적인 두 가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론적인 작업에서는 주로 토지 소유 형태를 연구하는 작업으로 집중됐는데, 인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공산주의에 따른 기초적인 모습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작업에서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방대한 사실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주로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와 관련된 그 자료들은 연구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농촌 경제 상태를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우선 생산 관계들을 추려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믿을만한 사회 과학 상 방법 이론이 부족했고, 다음으로는 수집된 사실 자료들이 농민 경제에 암울한 영향을 미치는 당면한 어려움들과 농민들에 따른 당면 요구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연구자들의 관심은 토지 빈곤, 높은 소작료, 권리 부족, 억압받고 짓밟힌 농민들의 상황 같은 어려움들을 연구하는 데 집중됐다. 모든 풍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고, 연구되고, 설명되어, 한 국가가 계급 국가가 아니라면, 정책이 지배 계급로부터 이해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민 요구에 대한 공정한 토론으로부터 결정된다면, 당연히 그런 어려움들을 제거할 필요성이 수천 번도 더 납득된다. 사회와 국가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걸 믿었던 순진무구한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구체적인 사실들에 완전히 매몰된 나머지, 당면한 어려움들로부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여 있던 경제의 주된 배경과 농촌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는 잊고 말았다. 자연스럽게도, 그 결과는 자신들의 손에 경제를 틀어쥔 계급, 주어진 경제 제도와 공동체 내 사회적·경제적 관계에서 유일하게 버틸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급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게, 곧 토지 빈곤 등으로부터 궤멸된 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거라는 결론이었다.
착취를 폐지하기 위한 토대와 버팀목이 되어 줄 제도를 연구할 방향으로 시작됐던, 이론 작업은 그러한 착취 제도로부터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소부르주아 계급 이익을 대변해 줄 계획을 고안해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동시에, 실천적인 혁명 활동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에 대한 믿음은 당연하게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고, 인민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수 많은 원기 왕성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은 같은 과정을 이행하는 데 착수했지만,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농민의 본성이 공산주의적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만 깨닫도록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농민이 아니라, 정부를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결정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활동은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됐고, 그 투쟁은 지식인들로부터만 진행됐다. 때때로 거기에 노동자들이 가담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투쟁은 사회주의 이름 아래 전개됐으며, 인민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고, 오로지 권력을 쟁취함으로부터만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혁명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는 이론을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론은 분명 완전히 신뢰를 잃어갔고, 정부에 맞선 '인민의 의지'의 투쟁은 정치적 자유를 위한 급진주의자들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그 활동 또한 출발점과는 정반대 결과들로 이어졌다. 경우에 있어서도, 급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해 관계만을 대변하는 강령이 나타났다. 엄밀하게 말해서, 과정은 아직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명확한 한계가 정해졌다. 인민주의가 이렇게 전개된 과정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강령이 순전히 농민 경제가 특수한 공동체적인 제도라는 그 신념은 사라져버렸고, 농민 사회주의는 소부르주아 농민의 급진적·민주적 표현으로 변해갔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자들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크리벤코는,
'어렴풋이, 무르익어가는 순수 국내산 해파리처럼, 훌륭한 정서들로만 가득 찬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희생이나, 삶에서 지속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만이 생겨났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런 훈계는 뛰어났지만, 어디에 적용되는지를 잘 살펴보자.
'지속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의 경우, 짜증나는 사례를 알고 있다. 러시아 남부에 형제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똘똘 뭉친, 몇몇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에게 지대한 관심과 존경을 보여줬고, 농민들을 귀한 손님처럼 여겨서, 과고와 과자를 가져다주고, 그들과 똑같은 접시에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으며, 돈을 빌려주거나, 사례금을 주거나,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돈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편 같은 지역에서는 슈미트라는 젊은 독일인도 살고 있었다. 토지 관리인이라고는 하나 그냥 정원사에 더 가까웠던 그 남자는 어떤 인문주의적인 사상도 지니지 않은 전형적인 쩨쩨한 독일인이었다. 3, 4년이 흐른 뒤, 그들은 갈라져서, 각자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또 20년이 지난 뒤, 그 지역을 다시 찾은 필자는 슈미트 씨가 농민들에게 포도 키우는 법을 가르쳐준 덕분에, 농민들은 연간 75-100루블에 이르는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두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유지하게 됐고, 반면에, 농민에게 친절한 감정만 갖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무엇도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 젊은이들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계산해보면, 앞에서 서술한 사례는 대략 1869-1870년으로, 곧 국내 인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유럽 제도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중요한 '인터내셔널'이라는 걸, 국내에 도입하려고 시도할 무렵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확실히 크리벤코 설명은 다소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줬고, 그래서인지, 크리벤코는 서둘러 유보적인 단서를 달아놓는다.
'물론 슈미트가 그 청년들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지역과 주민들에게 좀 더 오래도록, 지속적인 인상을 남겨준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슈미트가 중요한 무언가를 했다는 말도 아니다. 반대로, 슈미트의 행동은 아주 변변찮고,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 없는 우연적인 행동에 불과했지만, 모두에게 확실히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보다시피, 이런 유보적인 설명은 아주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핵심은 모호하다는 게 아니라, 필자가 그 두 활동 유형 사이에서 근본적인 성향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한쪽의 성과 없는 활동을 다른 쪽의 성공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 민주주의자 외관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아주 특징적으로 되게끔 해주는 중요한 핵심이다.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에 대한 말을 들려줬던 젊은이들은 분명 농민들에게 사회적인 삶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염원을 불어넣기를 바랬다. 그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휘저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생기도록 같은 시대 사회에 맞서 농민들이 사회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반면에, 슈미트는 전문가로 그저 타인 일처리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적이 정반대인 두 가지 활동 유형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건물을 무너뜨리려다, 실패한 사람을 그 건물을 보강하려는 한 사람을 비교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이치에 맞는 비교를 하려면, 인민 속으로 들어가 농민에게 혁명 기운을 북돋우려던 젊은 남녀들의 노력이 왜 그다지 성곡적이지 못했는지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농민층이 정말로 노동 인민과 착취 받는 주민들을 대표한다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농민층이 단일한 계급을 이루고 있지 않고, 내부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어서였는지를 조사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과거 사회주의 이론들과 그 이론들ㅇ 데해나 사회민주주의적인 비판을 검토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슈미트 노력이 확실히 필수적이었다고, 입증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인민의 벗에게 열린 자세를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누구든 의심을 품어보라는 거 아니던가. 포도밭에 투자해서 연간 75-100루블의 소득을 올리는 거 보다, 더 필수적인 게 뭘까.
크리벤코는 한 명의 농민이 포도밭에다 투자한다면, 고립된 활동에 불과하지만, 어려 명이 투자한다면 공동의 확산된 활동이고, 작은 일거리를 실질적이고, 적합한 노력으로 변화시키려는 활동이라는 걸 계속해서 설명한다. A.N. 엥겔하르트가 자신의 사유지에 인산 비료를 사용한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게 만들었듯이, 이런 민주주의자, 정말로 멋지지 않은가. 하나 더 들어보자. 농민 개혁에 대한 의견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분리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체르니셰프스키는 농민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렇지만, 체르니셰프스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대해 우회적인 표현을 한 바 있다.
'내가 여러분의 저녁 식사를 위한 식량을 보호하려는 조치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을 향한 내 친절한 마음 덕분에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한다면, 그런 내 열의는 식량이 여러분, 거고 그렇게 준비된 저녁 식사는 여러분에게 유익하고, 이롭다는 가정을 토대로 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식량이 여러분들 소유가 아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식사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초를 겪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 매겨졌다는 점을 내가 알게 됐을 때, 내 기분이 어떨지 상상해보시라. 내가 그런 불편한 사실들을 알게 됐을 때, 머릿 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효용성을 보장해줄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문제에 골머리를 썩인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일부 사람들이 유리한 조거능로, 소유권을 받게 됐을 되는 상황에서, 먼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들의 소유권 보유에 신경을 쓰겠는가. 식량이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피해만 줄 거라면, 식량을 전부 잃어버리는 게 훨씬 더 낫다. 그게 여러분을 몰락으로 이끌 뿐이라면, 일 전체를 그만두는 쪽이 훨씬 더 낫다.'
체르니셰프스키가 시대의 현실을 얼마나 깊이 있고, 훌륭하게 이해했고, 농민들이 지불해야 할 상환금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국내 사회 계급들 간 적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단락들을 별도로 강조했다. 검열에 노출된 언론에서 그런 순수하게, 혁명적인 생각들을 자세하게 설명할 줄 아는 능력에서도 역시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불법화된 저술들에서는 똑같은 내용으로, 글을 에두른 표현 없이 쓴 적이 있다. 특히「서문을 위한 서문」에서 볼긴 말을 빌려 말했다.
'지주들의 정당 손에 농민의 해방을 맡기시오. 그다지 별 차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주들의 정당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할당해주기를 반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차이가 엄청날 거라는 상대방의 언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차이는 별로 크지도 않고, 무의미할 정도이다.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차이는 엄청나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가져가는 거와 그의 수중에 그대로 둔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지만, 물건을 가져가면서 그 사람에게 대금을 치른다면 완전히 똑같은 셈이다. 지주 정당과 혁신주의자들의 구상 간 유일한 차이로는 지주 정당이 더 단순하고, 시간이 짧게 걸릴 뿐이다. 차라리 그 쪽이 훨씬 더 나은 이유도 있다. 불필요한 양식 행위가 줄어든다면, 대부분 농민들의 부담을 덜한다. 돈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사고, 돈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사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땅을 사라고 강요한다는 건, 농민들을 몰락시킬 뿐이다. 토지 상환금을 내라는 건, 사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농민 개혁이 막 도입되고 있던 시대에, 부르주아적인 본질을 이렇게도 명확하게 꿰뚫어본다는 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사람의 비범한 재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당시로는, 이미 국내 사회와 국가가 노동 인민과는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이었던, 사회 계급들로부터 지배되며, 통치되고 있다는 점과 농민층 몰락과 강탈은 사회 계급들로부터 명백하게 미리 결정됐다는 점을 이해하기에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체르니셰프스키는 사회적적인 적대 관계를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는 정부 존재가 노동 인민 조건을 훨씬 더 악화시키는 끔찍한 악마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긴은 계속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농민들은 토지 없이 해방되는 쪽이 더 나을 거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지주들이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거냐 하는 건 말할 거도 없고, 농민들이 해방됐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도 신이 나서 흥분할 만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내생각에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차라리 지주들이 솔직해지면 더 좋겠다.'
그리고 여기 '수신인 없는 편지'에서 가져온 단락도 있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라고 말한다. 그럴 만한 힘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힘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럴 만한 힘이 부족할 때, 일에 달려드는 건 소용없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뻔히 보인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글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달려들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스스로 판다해보기 바란다. 그저 일을 그르치고, 결과는 끔찍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국내 봉건 관료제 국가가 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점, 곧 봉건적인 농노 소유주들을 타도할 수 없다는 점과 끔찍한 무언가로부터,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의 이해 관계 사이에서 보잘것없는 타협만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협을 위해서는 안위와 자유라는 환상을 동원해서, 농민들을 기만하는 게 필요하며, 실제로는 농민들을 몰락으로 이끌어 지주들에게 완전히 팔아먹을 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체르니셰프스키는 개혁에 저항하고, 맹렬하게 비난해댔고, 그게 실패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정부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 사이에서 줄타기에 꽁꽁 묶여 추락하면서부터 국내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길로 올라서기를 바랬다. 그러나 체르니셰프스키의 훌륭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지난 30년 간 역사가 모든 경제적·정치적 환상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여준 오늘날에도, 현재 우리 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인민 생산에 대한 허가로부터 여기며, 거기에서 노동 인민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찾을 수 있는 증거를 끌어낼 궁리를 한다. 되풀이하지만, 농민 개혁을 향한 민주주의자들의 태도는 민주주의자들이 얼마나 뼛속 깊이 부르주아로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이다.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너무나 많은 걸 잊어버렸다. 대목에서 비교를 위해, 1872년,「조국 연보」를 들어볼까 한다. 앞서 이미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이 있은 뒤, 첫 10년 간 국내 사히가 이룩한 자유주의에 있어,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를 감춘 성공을 다룬,「금권 정치와 토대」의 몇몇 구절들을 인용한 바 있다.
같은 글에서 크리벤코는 예전에는 개혁에 관해서 징징거리고,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사람들을 가끔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쓴 적이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질서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거다. 그리고 필자는 계속해서 어떻게 문학 자체가 금권 정치의 기관이 되어, 민주주의를 빙자해서,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와 열망을 옹호하게 되는지를 보여줬다. 같은 주장을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도록 하자. 크리벤코는 개혁이 가져다준 새로운 질서에 모두가 기뻐한다는 점과 새로운 질서의 명백히 적대적인 부르주아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점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중은 자유주의가 단지 노동 인민 대중의 불리한 희생을 당연하게 대가로부터 한 취득의 자유를 가려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벤코는 반대하고 나섰다. 크리벤코의 주장에서 가치가 있는 건, 사회주의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반대한다'는 점 그 자체였다. 금권 정치가 민주주의로부터 가려진 데에 대한 반대가, 해당 잡지에서도 전반적인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 개혁 안에 부르주아적인 특성들과 요소, 이해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과 국내 지식 계급 및 국가의 계급적인 성격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은 국내 자본주의를 위한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집단의 존재를 느끼고,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내 사회 내의 적대를 감지한「조국 연보」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인민주의자들은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했던 대의명분 아래에서 투쟁을 벌인 셈이었다.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적대적인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적대적인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걸 만들어낸 사회 구조 자체와 싸우기를 바랬다. 그래서「조국 연보」는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시각에서 볼 때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를 망각해버렸고, 한 국가 신성 국내 순혈 부르주아들이 민주주의라는 외피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 대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오늘날 인민의 벗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관계에서도 반동적인 이유이다.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뿐만 아니라, 투쟁이 아닌 유화적인 고양 활동만을 말한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 1860년대, 민주주의자로 금권 정치를 대표했던 말끔한 눈썹으로, 국내 자유주의자가 1890년대로 접어들어, 자신의 눈썹이 시민들의 근심으로 뒤덮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가이기를 그만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현재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대규모 획득의 자유, 곧 거대한 신용과 거대한 자본, 거대한 기술 개선을 획득할 자유가 단지 소규모 신용과 소규모 자본, 소규모 기술 개선을 취득할 자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유주의적,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이기를 멈추었던가.
거듭 말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한 국가 질서에서 급진적인 변화나, 급진적인 시각 변화의 영향에 따라, 자신들의 견해를 바꾼 게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저 잊어버렸을 뿐이다.
한때는 자유주의자들의 선배들을 불건전하고, 순진무구한 이론, 현실에 대한 공상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으로 만들었던 유일한 특성마저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모든 시간 동안 배운 게 무엇도 없다. 국내 현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분석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30년 간, 국내 정치 역사는 그들에게 많은 걸 가르쳤어야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1860년대, 당시에 봉건 지주들의 권력은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지주들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주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그래서 슬그머니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고개를 쳐들었다. 발전, 과학, 우수성, 불의에 맞선 투쟁, 인민의 이익, 인민의 양심, 인민의 힘, 등등에 관해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들이 오늘날 특수한 불황의 시기에도 급진적인 불평불만꾼들과, 자유주의 입담꾼들이 사교 살롱과 기념일 만찬, 잡지와 신문에서 토해내고, 여기저기 넘쳐대는 미사여구가 바로 그렇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아니하더라도, 타당한 기준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걸 입증했다. 당시에도, 국내에서 공개적인 게급 투쟁에 따른 밝은 빛이 비춘 건 아니었으나, 빛은 조금보다는 더 밝아졌고, 그래서 계급 투쟁이라는 개념은 조금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현실을 해명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쪽을 택했던 노동 인민의 관념론자들조차도, 자유주의는 금권 정치가 두른 외피일 뿐이며, 새로운 질서는 곧 부르주아 질서라는 점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봉건 지주들이 무대에서 제거된 덕분에 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시에도, 여전한 단순 폐해들로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았고, 비교적 순수한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가 목격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민주주의자들은 금권주의적인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 구조 아래에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과거 봉토 제도와 비교해볼 때도, 새로운 삶의 체계가 갖는 발전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 체제가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인 역할 역시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와 사람됨의 체제에 코웃음을 치는 데 그쳤을 뿐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우연이라고 상상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적인 관계가 인민적인 제도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 기대했다. 그 뒤로, 역사는 민주주의들에게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을 보여줬다. 개혁으로부터 터무니 없는 이익이 손상됐을 뿐 완전히 궤멸되지 않은 봉건 지주들은 한동안 되살아나, 부르주아적인 사회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줬고, 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순진무구한 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진전시키고, 변형시키는 대신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허우적대다가 자유주의자들로 퇴보한 다음, 이제는 칭얼거리는 자신들로부터, 곧 자유주의자들의 이론과 강령들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 전체로부터 공유된다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점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하고, 악랄한 반동 형태로 보여줬다. 사람들에게도 아주 인상적인 교훈을 남겼고, 인민의 특수한 삶의 양식과 인민의 사회주의적인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우연적인 성격에 대한 옛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은 너무나 명백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 앞에서 펼쳐진 현실들을 똑바로 쳐다본 뒤, 국내에서는 부르주아와 소멸 직전의 봉건적인 관계 말고는 다른 어떤 사회 경제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노동 계급 운동을 거치지 말고는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순진한 환상은 소부르주아 발전으로 실질적인 온건한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오늘날에도, 노동 인민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처하고 나선,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은 분명 반동적이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현재 국내 사회적·경제적인 적대 관계를 모호하게 하고, 향상, 개량 등으로부터 모든 걸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치들로부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만, 그래서 화해와 통합을 이뤄낼 수 있듯이 주장한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국가를 초계급적이고, 착취 받는 인민에게도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그러히게 적합한 존재로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마지막으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 이론들은 단순히 투쟁의 필요성과 곧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 스스로 절박한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신들의 모든 걸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노동자들은 걱정할 필요도 없다.「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기술자 한 사람이 거기에서,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기 위한 계획을 거의 완벽하게 구상했나 보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소부르주아 사상 및 이론들과 단호하고, 완전하게 결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회주의 투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주요하고도, 쓸모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부르주아 사상과 단절을 주장했지, 인민의 벗들이나, 인민의 벗의 사상과는 단절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무언가와는 더욱이나 아예 단절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사상들, 낡은 국내 농민 사회주의 사상들과 전체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낡은 사상의 대리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성장에 겁먹은 나머지, 시작한 반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농민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 사상들을 유달리 풍부하고, 선명하게 표명하도록 유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상들을 동시대 사회주의 및 국내 실상과 비교해보면, 사상들이 얼마나 시대에 뒤처졌고, 그리고 완전한 이론적 토대의 흔적을 모조리 상실한 채로, 한심한 절충주의와 가장 평범한 기회주의적인 고양 강령 단계로까지 전락했는지를 놀랄 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그게 낡은 사회주의 사상 전반의 과실이 아니라, 누구도 사회주의자로 분류해주지 않는 문제의 신사 양반들의 잘못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상당히 불합리하다. 그런 낡은 이론들은 퇴화되는 게 불가피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써왔다. 특히 그런 신사 양반들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최대한으로 줄이고, 낡은 국내 사회주의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신조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공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런 신조들을 부정확하다거나, 부적절하게 규정한다든지 말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는 걸, 사회주의자들이 알아낸다면, 아주 겸손한 요청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신사 양반들, 부디 여러분이 직접 밝히고, 제대로 충분히 설명해주시오."
정말이지 사회주의자들과 논쟁할 기회를 갖는 건, 사회민주주의자들만큼 반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이 직접적으로, 끈질기며, 단호한 도전을 해오지 않는데도, 그들의 논박에 답하는 걸 기꺼워할 리가 있는가. 그렇다구 신물 나는 진부한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와 속물적인 훈계들을 읽고, 또 읽어, 억지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불필요하다고 봐야 할까. 확실히 오늘날 그런 사상들이 옳다는 걸 입증하고, 자세하게 설명할 임무가 오로지 신사 양반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이 우리 책임은 아니다. 또한 사회주의와 관련된 소부르주아 사상들과 단절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데에도 여러분이 주목해주기를 부탁드린다. 검토한 소부르주아 이론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한 무조건 반동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속에는 사회주의적인 부분도 전혀 없다는 걸, 곧 이론들은 모두 노동 인민 착취를 해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버렸고, 따라서 노동 인민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도 없으며, 사실상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 관계를 반영할 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향한 우리 태도는 달라야만 하고, 그래서 소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지들의 구상에 대한 노동 계급 태도는 어떠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해당 질문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적인 성격이 고려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보통의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내세우는 한, 다시 말해, 중세 시대와 농노제 존속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 있어서 발전적이다. 반면에, 또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싸우고, 한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으로부터, 부르주아 노선에 따라 지연시키고, 되돌리려 애쓴다는 점에서 가히 반동적이다. 농민들을 감독하고자, 여타 수 많은 기획들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분여지 양도 불가 같은 식으로, 반동적인 요구들은 노동 인민을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대개 가려졌지만, 실제로는 물론 노동 인민들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며, 해방을 향한 노동 인민 투쟁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소부르주아적인 구상의 두 가지 측면들은 서로 엄격한 구분이 이뤄져야만 하며, 소부르주아 이론들이 어쨌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반동적인 측면과 맞서 싸워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들이 가지는 민주적인 측면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긴 하지만, 소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의 구상 속에 민주주의를 포함시키기까지 막아서는 건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민주주의를 훨씬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론적인 상투적 요소들을 언제나 형성해온 세가지 주요한 논지들, 곧 토지 빈곤, 높은 지불금, 당국 폭정을 언급한 바 있다.
같은 악행들의 폐지 요구에는 사회주의적인 측면마저 전혀 없다. 그건 강탈과 착취를 조금도 해명해주지 못하며, 그런 악행들의 제거는 자본으로부터 노동 억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억압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세 찌꺼기를 없애주며, 자본을 상대로 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투쟁을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인해, 민주적인 요구로부터 노동자들의 가장 활발한 지지를 얻게 된다. 일반적으로, 지불금과 세금 문제는 소부르주아만이 특별한 중요도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농민들이 내는 지불금은 많은 측면에서 볼 때, 농노제 유물일 뿐이다. 토지 상환금은 즉시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어야만 한다. 농민들과 소도시 사람들만이 지불하고, 상류층에게는 면제되는 세금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제적·정치적인 침체를 야기하는 중세적인 관계에서 유물들을 폐지하라는 요구에 언제나 지지를 보낸다. 토지 빈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고 말이다. 관련해서, 그런 불평의 목소리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농민 개혁에 따른 토지 절취 허용은 분명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을 강탈하도록 하면서부터 엄청난 반동 세력인 지주들에게 직접적인 농민에게서 땅을 탈취하고, 간접적으로 분여지를 구분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이바지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서 빼앗아간 토지를 농민들에게 즉각 되돌려주고, 봉건 제도 및 전통 보루인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를 아주 필사적으로 주장한다. 토지 국유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는 이미 한 국가에서도 형성된 자본주의 농업 관계를 더욱 급속하고, 풍부하게 번창시킬 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인 측면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토지 귀족 힘을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조치로는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이 수탈되고, 착취 받는 원인으로는 농민들의 부족한 권리를 지목할 수 있는 건, 유자코프와 V.V. 보론초프를 따르는 자들만이 유일하다. 당국으로부터 농민 억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단순한 억압 이상이다. 농민들을 토지 귀족에게 복종하는 게 마땅한 천한 무리로 취급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시민으로 일반적인 권리는 토지 귀족에게 이주와 같은 특별한 호의로만 베풀어질 뿐이며, 농민들이 노역장 수용자들이라도 되는 양, 하급 관리조차 거드름을 피우며, 농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의 시민적인 권리에 따른 완전한 회복과 모든 귀족 특권으로부터 완전한 폐지, 농민에 대한 관리 감독 철폐, 스스로 일을 직접 알아서 할 수 있는 농민들의 권리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러야만 하며, 자신들의 활동에서 민주주의의 거대한 중요도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에서 중세적이고, 절반은 봉건제적인 유물들은 서구 유럽과도 비교해봤을 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들을 억압하는 멍에가 되어, 모든 계급의 정치 사상에 따른 성장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봉건제도들과 절대 왕정, 사회적인 신분제, 관료 체제에 맞서는 투쟁이 노동자들에게도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제도들이 얼마나 반동적인지, 자본으로부터 노동 탄압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노동 인민들에게 어떤 모멸적인 압력을 행사하는지, 어떻게 자본을 중세적인 형태로 계속 머무르게 만드는지, 노동 착취에 대한 한 현대 산업 형태에는 못 미치지만, 해방 투쟁에 지독한 난관을 심어놓는지를 노동자들에게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반동의 기둥들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성공적인 투쟁을 벌일 수는 아예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부르주아 계급들이 존재하는 한, 국내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언제까지나 짓밟히고, 주눅 든 존재로 영리하고, 끈기 있는 저항 대신에, 자포자기식으로 볼멘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남아, 노동 계급의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지지는 영원히 까마득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절대 왕정과 반동적인 사회 신분 및 제도들에 맞서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과 나란히 싸우는 게 노동 계급의 직접적인 의무인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런 의무를 명심시켜줘야만 하며, 그런 제도들 모두에 맞서 싸우는 게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한 투쟁을 촉진할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는 점을 노동 계급들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을 한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또한 노동 인민들의 주적, 곧 태생적으로는 순수하게 민주적이었으나, 특히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을 억누르고자, 반동들과 손 잡고, 노동 계급 운동 출현을 더욱 한층 방해하는 경향이 있는 자본을 상대로 한 승리 길을 열어주는 전면적인 민주적인 요구들의 성취가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인식도 심어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로한 내용들로부터, 절대 왕정과 정치적인 자유를 향한, 그리고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있는 정치적인 자유를 얻고자 모든 혁명 집단들의 연합과 동맹을 지향하는 경향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를 충분하게 정의내렸다. 경향은 다소 독특하고, 특징적이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건, 여러 점에서 일치하는 명확한 계획을 지닌 하나의 집단이나, 여러 집단들로부터 동맹을 위한 제안이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동맹 문제가 각각 따로 떨어진 경우에 맞게 연합한 집단들의 대표들로부터 해결되는 구체적인 문제가 됐고, 특수하게 연합하려는 경향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실제로 존재하고, 과거로부터 표류해서 아직 새로운 곳에 정박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 절대주의 체제에 맞선 전사들이 여태껏 토대로 삼아왔던 이론은 명백히 무너져내렸고, 투쟁에 필수적인 연대와 조직ㅇ르 위한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합 세력과 동맹 지지자들은 그런 이론을 창조해내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축소시키면서, 사회주의적인 문제와 비사회주의적인 문제를 포함한 다른 모든 문제들을 얼버무려 넘기는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통합을 향한 첫 시도에서, 그런 순진한 오류는 필시 밑바닥부터 뒤집히게 된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특징적인 점은 연합의 경향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가 정치적으로 봤을 때, 급진 민주주의로 전화하는 과정, 앞에서 개괄하려고 했던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된 기치 아래 모인 모든 비사회주의적인 혁명 집단들의 연합은 오직 국내 예외주의라는 낡은 편견을 끝장내고자 민주적인 요구들을 담은 지속할 수 있는 강령이 마련됐을 때만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런 민주적인 정당을 설립하는 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유용한 발걸음이 될 거라는 걸 믿는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인민주의 활동은 더욱 발전시켜, 모든 편견과 신화를 뿌리째 뽑고, 사회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묶어내어 다른 집단들로부터 민주적인 정당 설립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노동자들에 따른 독자적인 조직화로부터 별도 노동 정당을 세우는 게 필수적이라 여기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물론 그런 정당화 연합할 수는 없겠지만, 노동자들은 반동적인 제도들에 맞선 민주주의자들의 그 어떤 투쟁도 아주 강력하게 지지한다. 인민주의가 가장 평범한 소부르주아 급진 이론으로 타락한 인민의 벗들이 아주 두드러진 증거이다. 사실은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인 성격과 전체 노동 인구 해방을 위한 전사로부터 국내 노동자의 역사적인 임무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해명하지도 않고,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고만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시킨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 관념론자들까지 정치적인 자유에 호의적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덕분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 경제 이론을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국냉서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회적인 경제의 부르주아적인 구상으로부터 설명되지도 않고, 토지 빈곤, 상환금, 또는 당국 폭정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된다면, 가치 형태와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역할을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이론이 완전히 자리 잡은 공장 노동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인민 대중은 말할 거도 없고, 노동자와 교옹주 관계조차 설명해줄 수 없다면, 계급 투쟁 이론을 노동자에게 설명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국가 인민들이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매개체로부터 공산주의에 다다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마르크스 경제 이론과 당연한 귀결인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를 열어젖히는 사람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분명 그런 조건에서 노동자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하는 발전적인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불구덩이에서 밤톨을 끄집어내라고 요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자유가 주되게는 부르주아 계급 이익에 기여할 뿐, 노동자들 처지를 개선시켜주지 않을 거라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노동자 투쟁을 벌이기 위한 조건을 용이하게 해준다. 자신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혁명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확신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 내에서 계속해서 소요를 일으키는 데 대한 반대 수준에서도 일러둔다. 그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실천과도 모순되며, 사회주의 노동 정당을 조직할 과업으로부터 노동자들을 흩어놓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 계급 적대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고, 농노제로부터 억제된 시점에서도, 농노제가 지식 계급 전체 일치된 반대 투쟁을 불러오면서부터 지식 계급 내에서도 특수한 민주적인 측면이 있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서 간극은 전혀 깊지 않다는 환상을 빚어내는 시점에 떨쳐 일어난 건 당연히 잘못이었다. 이제 경제 발전이 상당히 진행된데다, 에전에는 국내 자본주의 토대를 부정했던 사람들조차도,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 진입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런 환상조차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지식 계급의 구성은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접어든 사회 구성만큼이나 아주 뚜렷한 윤곽을 취한다. 오늘날 사회는 자본가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반면에, 지식 계급 사이에서는 급속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는 출세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심부름꾼 무리가 방식을 정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식인 은 그저 자족하면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점들을 부인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걸 강하게 강조하고, 부도덕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비난을 가하고, 틀렸다는 걸 입증한 뒤에, 부숴 없애려고 애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자신이 부르주아적인 걸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순진한 노력은,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인민의 몰락과 빈곤, 실업, 대중 기아가 머지않았다는 말로부터, 부르주아들을 겁먹게 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어리석다.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이론가들의 같은 시도는 강물에 내던져진 형벌에 처한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도를 넘기 시작한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지식 계급은 발전이니, 과학이니, 진실이니, 인민이니, 하는 무수한 표현들을 쏟아냈고, 불협 화음, 우울, 낙담, 무관심이란 찾아볼 수 없이, 민주주의로 온 심장이 불타올랐던 1860년대가 지나가기를 비통해 한다.
그들의 단순한 특징이 된, 신사 양반들은 1860년대만 하더라도, 의견 일치가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당시에는 존재하다가, 이제는 사라져 되돌아올 수 없게 된 물질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때는 농노제가 모두를 똑같이 억눌렀고, 약간의 돈을 모아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농노 관리인이 있었으며, 지대를 받아내고, 일일이 간섭하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지주를 증오했던 기업형 농민이 있었다. 무산화한 장원 농노와 빈곤에 빠진 농민은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갔으며, 상인 제조업자와 노동자, 수공업자와 하청인에게 고통을 가져다줬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관련한 유일한 끈은 농노제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이었다. 와중에도 그러한 의견 일치 너머로 가장 날카로운 경제적인 적대가 시작됐다. 그 적대가 너무나 거대하게 발전한 오늘날에서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려면, 달콤한 환상에 얼마나 흠뻑 젖어 있어야만 하는 걸까. 상황이 투쟁을 요구하는 시대에도 의견 일치가 존재하던 지난 날로 돌아가고 싶어 눈물 흘리는 대신에, 기꺼이 또는 마지못해 부르주아 계급의 신하가 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서도록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러분이 인민 이익에 대해 그럴듯하게, 치장된 말을 믿기를 거부하고,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본다면, 다양하고, 순수한 발전적인 조치들로부터 인민들의 경제를 개선하고, 지원하고, 회복시키려는 꿈을 꾸는 철저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사람들은 지배적인 생산 관계 아래에서 그런 발전적인 조치들이 끼칠 수 있는 유일한 효과로는 대중 무산화를 더 한층 심화시킬뿐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계급적인 성격을 드러내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부터 한 국가 소생산자들 역시 소부르주아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고하게 해준 데 대해 인민의 벗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의 벗들은 오랫동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낡은 환상과 신화들의 소멸을 불가피하게 재촉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이 이론들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히고, 남용하고, 더럽힌 나머지, 그걸 간직해온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의 벗들을 수정하거나, 모두 포기하든지 아니면 신사 양반들이 독점해서 사용하게 내버려두든지, 선택해야 하는 가혹한 궁지에 처해 있다. 인민의 벗들은 부유한 농민들이 개선된 농기구를 구입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고, 근엄하게 전 세계에 선포하고, 카드 놀이에 싫증난 사람들을 따듯하게 맞아줘야 한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확언한다. 그리고 같은 어조로부터, 인민 제도와 지식 게급을 말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잘난 체하는 과장된 표현들로부터 드넓은 이상과 삶의 문제들에 따른 이상적인 치유를 입에 올린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환상을 포기하고, 희망으로 바라는 국내 발전이 아닌 실질적인 발전, 그리고 있음직한 사회 경제적인 관계가 아닌, 현실적인 관계 지지를 추구하기 시작할 때에만 내실 있는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의 이론적인 활동은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서 경제적인 적대와 연관되고, 연속적인 발전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로 향해야만 한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은 정치 역사와 법률 제도의 특성, 또는 기존에 확립된 이론적인 편견으로부터 언제나 감춰졌던 적대를 드러내주어야만 하며,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 현실을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나타내주고, 현 체제에서는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과 경제 발전으로 표현되는 현 체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내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에 기초해서, 같은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요구에 걸맞는 해답을 제공해주어야만 하며, 그게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저항적인 사고가 깨어날 때마다, 반드시 사회민주주의 바다로 인도하게 된다. 같은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어, 더 큰 진전이 이뤄질수록 사회민주주의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현 체제에서 가장 교활한 수호자들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상에서 각성을 막을 수는 없다. 현 체제 자체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생산자들의 가장 극심한 강탈과 프롤레타리아 및 예비군의 끊임없는 성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부에 따른 진척과 생산력에 따른 거대한 발달,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와 나란하게 병행된다. 해당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기까지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그걸 해내고야 만다. 모든 계획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과정에 따른 엄밀한 공식화를 요구하는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유물론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유물론 사상들을 채택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현실을 보장한다. 사회민주주의 성공은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을 마구 휘저어놓아,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했듯이, 그들이 펴내는 월간지들도 더 이상 따분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인 활동이 필요하고, 중요하면서도, 방대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사회민주주의 활동이 실천적인 활동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결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민주주의 이론들이 완성될 때까지 사회민주주의 활동을 연기해야 할 이유는 많지도 않다. 사회학의 주관적인 방법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공상적인 사회주의 추종자들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한 국가를 위해 현재 발전 경로와는 다른 경로를 추구한다고 여긴다면, 당연히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그 다른 경로를 알아내고, 갈리킬 때에만 실천 활동을 할 수 있고, 거꾸로 말하면, 경로가 포착되고, 표시되기만 하면, 실천 활동은 그냥 끝을 맺는다. 그때부터는 새롭게 알아낸 다른 경로를 따라 조국을 안내할 사람들의 역할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발전에서 실질적인 길을 가로막고서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적들에 맞서, 현실 투쟁을 벌이는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이념적인 지도부 역할이라고 할 때는,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은, 독일 연륜 있는 사회민주주의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로부터 적절하게 표현한 말로 수렴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앞서 말한대로, 이론적인 활동 없이는 사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듯이, 이론 활동을 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결과를 확산시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돕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라는 과업 제시는 사회주의자 집단들이 아주 흔히 겪는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최고 이론이자, 유일한 기준이 실제적인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과 일치하는 곳에서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있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조직화를 촉진하는 건, 임무가 되고, 따라서 지식 계급 내부에서 특정한 지도자들을 내오기를 불필요해질 때, 역시 종파주의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많은 이론적인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 활동 방식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집단이 생겨난 이래로 변함없이 유지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국내에서 노동 계급 운동 조직화와 발전을 촉진하고, 운동을 현재와 같이 지도 사상도 없이 간헐적으로, 시위, 봉기, 파업을 벌이는 수준에서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국내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투쟁과 착취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되찾아오는 활동, 노동 인민 억압에 기초한 사회 체제를 폐지하려는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또한 같은 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건, 국내 피착취 노동 인민의 유일하고도, 자연스러운 대표는 국내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통된 확신으로부터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건, 소멸 직전에 있는 농노 경제에 따른 자투리들을 무시한다면, 국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실상 어디에서나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생산 대중에 대한 착취는 소규모로 흩어졌고, 덜 발달됐지만,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대규모이며, 사회화됐고, 집중됐다. 생산자들이 받는 착취는 여전히 중세적인 형태와 많은 다양한 정치적·법적·관습적인 덫, 술수, 장치들에 얽혀있기 때문에, 노동 인민과 노동 인민의 사상가들이 노동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 본질을 파악하기를 방해하고, 체제에서 벗어날 방안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반대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전혀 혼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순수한 형태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완전히 발전해 있는 상태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억압 당하며,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직접적인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물질적인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계급에 맞선 전쟁,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짓밟는 계급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될 수밖에는 없다. 바로 공장 노동자가 착취받는 인민 대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인민 대표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서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고자, 관점들로부터 인민 대표를 열광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필요한 건, 인민 대표에게 자신의 위치를 이해시키고, 인민 대표를 억압하는 체제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와 억압하는 체제에서는 계급 적대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점을 이해시킬 뿐이다. 자본주의적인 관계에서 일반적인 체제서 공장 노동자의 같은 지위로는 공장 노동자를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한 전사로 만든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 따른 높은 발전 단계인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 계급 해방 투쟁에 필요한 물질적인 조건과 사회 세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형태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물질적인 조건이 부재한 다른 모든 부문에서는, 생산이 수천 개 조그마한 사업장들로 산재됐고, 대부분 착취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그마한 사업장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착취받는 사람들이 맞서 싸워야 할 바로 그 부르주아 체제에 묶여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 세력이 발전하는 걸 지연시키고, 방해한다. 흩어졌고, 개별적이며, 사소한 착취는 노동 인민을 하나의 지역에 묶어놓은 채로, 노동 인민을 분리시키고, 노동 인민들이 계급적인 연대에도 눈을 뜨는 걸 막으며, 억압이 몇몇 특정 개인이 아닌, 전체 경제 체제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이뤄지는 노동 인민의 단결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반대로, 대규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거 사회와 특정 지역 및 특정 착취자와 모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슬 고리를 끊어놓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노동자들을 사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이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관ㅅ미과 활동을 집중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노동 계급이다. 노동 계급에 따른 선진적인 대표자들이 과학적인 사회주의와 국내 노동자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에 통달할 때, 같은 사상들이 널리 확산될 때, 그리고 현재 드문드문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경제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전화시키도록 안정적인 조직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형성될 때, 바로 그때 모든 민주주의적인 분파들로부터 최선두에 선 국내 노동자들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열려 있는 정치 투쟁이라는 곧은 길을 따라,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하게 국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승리로 이끌게 된다.
1894년, 전반기
부록
추가 도표는 본문에서 언급한 24곳 농가 예산에 관한 통계를 담고 있다.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전형적인 농가 24곳 구성과 예산 요약
표에 대한 설명
1. 첫 번째 21개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22번 세로줄은 호밀, 밀, 귀리와 보리, 기장과 메밀, 기타 곡물, 감자, 채소, 건초에 관한「통계 초록」에 세로줄들을 합했다.
매조밋 겨와 짚을 제외한 곡물로 벌어들인 수입이 어떻게 산출됐는지는 본문에서 설명한 바 있다. 24번 세로줄은 말, 소, 양, 돼지, 가금류, 가죽과 양털, 등 지방과 고기, 유제품, 버터(우락)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25-29번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30-34번 세로줄은 호밀, 밀, 기장과 메밀, 감자, 채소, 소금, 버터, 지방과 고기, 생선, 유제품, 보드카(화주)와 차에 지출된 비용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35번 세로줄은 비누, 등유, 양초, 옷, 식기에 지출된 비용을 제시한「통계 초록」세로줄들을 합했다.
2. 8번 세로줄은 임차 토지와 분여지에서 경지 규모를 데샤티나로 합산해서 얻었다.
3. 수입원과 지출 분포에 관한 세로줄에서 맨 아래 줄 수치는 수입과 지출에 따른 금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25번에서 28번 세로줄, 그리고 37번에서 42번 세로줄에서는 소득 또는 지출이 완전히 화폐로 환산됐다. 금전적인 부분은 총소득에서 가구 별로 소비한 금액을 제하는 방식으로 산출됐다.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내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완전히 낯설다는 논지를 니콜라이 온에 대한 비판 기초로 삼았다. 아주 올바랐다. 크리벤코와 같이 한 편의 글을 스트루베의 사고 체계 판단 토대로 삼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는 않아서, 스트루베가 내놓은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며, 따라서 스트루베 글 전체가 아닌 일부 진술들만 지지할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부분은 어쨌든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니콜라이 온의 근본적인 오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오류를 수정한다는 건, 니콜라이 온의 이론적인 명제와 연구들로부터도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적인 결론을 충분하게 도출해낼 수 있도록 한다. 계급 투쟁을 간과한다는 건, 실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드러내며, 아주 열심히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신봉자 행세를 해왔다는 점에서, 니콜라이 온은 더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계급 투쟁 원칙이 니콜라이 온 사고 체계 전체에서도 중심축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니콜라이 온이 국내 역사와 현실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부분만을 예외로 한 채, 마르크스 이론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이 한 국가 체제를 설명해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이론을 수정해서, 적대적인 관계와 계급 투쟁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별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생각해내야만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과 자본주의는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어쨌든 니콜라이 온은 마르크스주의에서 A만 받아들이고, B는 거부하려면, 명확한 단서와 함께 그 이유를 설명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은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투쟁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로 인해, 사회에서 사회적·정치적 삶의 모든 실제 내용들을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걸 성취하려 할 때마다, 실현되기 힘든 소망들의 영역에서, 불가피하게 맴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는 없다. 따라서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 니콜라이 온을 가리켜서, 공상주의자라고 결론내린 건, 지극히 옳았다. 또한 사회와 국가, 곧 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호소한다는 건, 사회주의자들에게 혼란만 안겨주어, 그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최대 적들을 자신들의 동맹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해방을 위한 노동 투쟁을 강화하고, 명확하게 해서, 조직화하도록 돕기보다는 오로지 방해만 할 뿐이다. 따라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이기도 했다.
스트루베 글을 언급했으므로,「러시아 부, 6호」에 실린 니콜라이 온 답변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가 인구보다 느리게 증가하고 있다는 자료를 인용하면서, 다음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임무의 달성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 서구 유럽이 따랐고, 또 여전히 따르고 있는 거와는 구별되는 조국 발전 경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천 배 더 올바른 이유이다.' 그리고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역사적인 임무가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마을 공동체에 적대적인 경제 동향인 곧 자본주의가 통합의 의미가 아주 특징적인 서구 유럽이나, 특별한 영향력을 지니며 나타나기 시작한, 북아메리카와는 조금도 달리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 기반 자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서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저 유명한 V.V. 보론초프로부터 고안해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에서 아주 표준적인 형태였다. 인민의 삶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문제를 국가적인 사안으로 인식했던 정부 관리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그 임무를 달성하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라는 거다. 영리한 주장이 지닌 다른 모든 미덕들은 제쳐놓고서라도,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로부터 바로 그 임무를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 되는 거짓되고, 편협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니콜라이 온은 분명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신사 양반들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편협한 이해로부터, 합법적인 언로가 봉쇄된 죽은 사람처럼 중상모략에 시달리고만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지켜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은 노동을 사회화하는 같은 때에, 바로 그 과정이라는 기제로부터 노동 계급을 규율하고, 단련시키고, 조직화해냈다는 점에 있다. 곧 자본주의에 따른 작동은 투쟁을 위해서도 노동 계급을 훈련시키고, 노동 계급의 반란을 조직화냈고, 노동 계급을 단련시켜 빼앗은 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도로 되찾아오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며, 소수 강탈자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빼내와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도록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공식화한 방식은 바로 이랬다. 물론 여기서 공장 노동자들 숫자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 집중과 노동 사회화만을 말했고, 그런 기준들은 공장 노동자들 숫자와는 아무런 일맥상통하는 지점도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예외적으로 해석한 자들은 잘못 해석해서는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공장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하는 걸 가리키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도 그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곧 공장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공장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고, 감소한다면, 자신의 역사적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식 계급이 조국을 위한 다른 발전 경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내 지식 계급은 그렇게 다른 경로를 추구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식 계급은 수십 년 동안 그걸 찾아 헤매며, 자본주의는 실업과 위기로 이어질 뿐이기에, 잘못된 발전 노선이 라는 걸 입증하려 전력을 다해왔다. 지식 계급은 1880년에 위기를 맞이했고, 1893년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며, 만사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상 그 경로를 벗어날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크릴로프, 「고양이와 요리사」우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들은 체 만체 계속 먹기만 한다.' 물론 만사가 잘못 돌아가면 더 이상 엄청난 이윤을 거둘 수가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부르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자본에 힘입어 새로운 철도 건설에 정력적으로 매달린다. 반면에, '우리에게' 만사가 잘못 돌아가는 이유는, 예전의 위치에 있을 때, 우리가 이미 인민들을 감쪽같이 골라냈고, 이제는 상인 자본만큼 부유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산업 자본 영역으로 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백 퍼센트의 이윤을 생산해내는 본원적인 축적을 여전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농민들 가운데 부르주아로부터 분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유럽 러시아 동부와 북부 국경 지대로 달려가게 된다. 지식 계급은 모두를 감지하고, 우리가 다시 추락으로 향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협박한다. 그리고 새로운 추락이 실제로 우리를 덮친다. 무수히 많은 소자본가들이 대자본가들로부터 짓밟히고, 무수히 많은 농민들이 더욱 부르주아 계급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는 농업 바깥으로 내몰린다. 빈곤과 실업, 굶주림이라는 바다는 엄청나게 커져가고, 떳떳한 양심을 지닌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예언을 들먹이며, 해외 시장 부재를 자본주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로 들이대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들은 체 만체 계속해서 먹기만 한다.' 지식 계급이 새로운 경로를 찾아나서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식민지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거대한 계획들을 벌이고, 그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스스로 시장을 창출해, 부르주아 체제 매력을 신생국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이례적인 속도로 산업과 농업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해내며, 생산자 대중들을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실업자 대열로 내동댕이친다. 사회주의자들은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공장 노동자들 수가 느리게 증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불안정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데 스스로를 계속 가둬놓는건가. 유치한 생각에 대해 논하기 앞서, 니콜라이 온이 비판한 스트루베 글 가운데 일부 단락을 몹시 부정확하게 인용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니콜라이 온은 인구 직업 구성에 있어 러시아와 미국 차이를 지적했을 때, 러시아 경우 유급으로 고용된 인구 전체 80%가 농업에 관계된 일을 한다고 여겨지지만, 미국에서는 그 비율이 44%에 불과하다. 니콜라이 온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이 80%와 44% 사이 차이를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거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임무라는 단어는 아주 부적절하다. 그러나 스트루베 생각은 명확하다. 곧 국내 자본주의 발전이 농촌 인구를 감소시키겠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일반 법칙이라는 점을 니콜라이 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같은 이론에 반박하려면, 니콜라이 온은 첫째로, 자신이 자본주의의 그런 경향을 간과하지 않았다거나, 둘째로, 자본주의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신에 니콜라이 온의 추산에 따른 1%의 한 국가에서 공장 노동자 수에 관한 통계를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스트루베는 언제 공장 노동자를 말했었나. 그럼 국내 인구 20%와 미국 인구 56%가 공장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인가. 공장 노동자란 단어와 농업에 관계되지 않은 인구란 단어가 동일한 의미인가. 농업과 관련된 인구 비율이 국내에서도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를 지적하는 이유로는, 크리벤코가 이미 해당 잡지에서 그 단락을 왜곡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 게 더더욱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의 '자본주의가 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로 옮겨가보도록 하자.
첫째로, N.F. 다니엘손, 「개혁 이후 사회 경제에 관한 개요, 1893」에서 그랬듯이, 공장 노동자들 수를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대규모 기계 공업을 자본주의 첫 출발로 삼은 국내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그리고 심지어 심화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상인들로부터 통상적인 임금을 받으면서, 상인들의 재료를 가지고, 상인들을 위해 노동하는 수백만 명 국내 수공업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고정적인 농장 노동자들과 농업 분야에서 일용직 노동자들도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고, 초과 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건축 산업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착취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기타 등등도. 둘째로, 공장 노동자들의 숫자, 140만 명을 전체 인구와 비교하고, 비율을 백분율로 표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신체 건강한 인구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을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들과 비교하는 등과 같이 그저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을 비교하는 데 불과하다.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일정 숫자에 따른 가족 구성원들을 각각 부양하고 있지 않은가. 공장 노동자들과 상인 무리들은 제외하더라도, 수 많은 군인과 공무언, 그리고 비슷한 상류층들을 부양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당신네는 잡탕들을 공장 노동자와 대비시켜 농촌 인구에 포함시키고 있는 건가. 도대체 국내에서는 어업 같은 산업들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산업들을 공장 산업과 대비시켜, 농업과 결부시키는 건 얼마나 불합리한 짓인가. 당신들이 국내 인구에 따른 직업 구성을 알고자 한다면, 맨 먼저 물질적인 가치에 따른 생산에 관계된 인구, 비노동 인구와 군인, 공무원, 성직자 등을 제외한 인구를 특수한 집단으로 분류해낸 다음,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인구들을 국가 수준 노동에 따른 많은 분야 별로 나누려로는 시도를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통계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면, 인구 1%가 공장 산업에 관계됐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보다는, 그런 식의 계산 자체를 자제했어야만 했다. 셋째로, 바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을 가장 주되게, 그리고 터무니 없이 왜곡한 대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이라는 의미가 오직 공장 노동자들을 결속시켰다는 측면에서만 드러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당신들도 한 지붕 아래서 노동하는 걸, 그걸로 동일시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니콜라이 온을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한데, 왜냐하면 니콜라이 온이 「러시아 부, 6호」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자본으로부터 노동 사회하에 따른 두 가지 특징,
1. 사회 전체를 위해 노동한다.
2. 공동 노동에 따른 산물을 취득하고자 개별 노동자들 결합
두 가지 측면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임무를 공장 노동자 수에 따라 판단하는 이유는 뭔가. 전체적인 임무가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 사회화, 프롤레타리아의 전반적인 형성과 그 가운데에서도 공장 노동자들의 선봉적인 역할로부터 완수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말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은 노동자들 수와 그 집중, 발전 정도 등에 달려 있다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모든 건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를 공장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할 권리를 부여하는 건 전혀 아니다. 그런 행동은 마르크스 사상마저 극단적으로 좁히는 결과만 생기도록 만들 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주택 문제에 대하여』란 소책자에서 독일 산업을 언급했다. 땅뙈기나 텃밭을 소유한 임금 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엥겔스는 서구 유럽만을 거론한다고 말한다.
'텃밭이나 농업과 함께 이뤄지는 시골 가내 공업은 독일 신흥 대규모 공업에 따른 폭 넓은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가내 공업은 독일 소농들에 따른 가중되면서부터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점점 늘어났으나, 공업과 농업 결합은 가내 생산자인 수공업자의 안녕이 아니라 정반대로, 한층 더한 억압 토대로 작용한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묶여 있는 수공업자들은 어떤 가격이라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가내 대량 생산 체제가 폭 넓게 발달했던 국내와 마찬가지로,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까지도 자본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문제의 한 측면인 동시에, 반대 측면도 지니고 있다. 가내 공업이 확대되면서부터 소농 지역은 오늘날 산업 지형으로 차례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독일 산업 혁명이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토에 걸쳐서 확산된 건 바로 가내 공업으로부터 시골 지역에 따른 변혁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혁명적인 노동 계급 운동이 도시 중심지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지역에 걸쳐 엄청나게 확산된 이유와, 운동이 차분하면서도 조금씩 억누를 수 없는 전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독일 수도와 다른 대도시들에서 봉기가 성공하려면, 대다수 소도시들과 시골 지역 상당 수에서 혁명적인 변화 기운도 무르익었을 때에만 할 수 있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와 더불어 노동 계급 운동에 따른 성공 역시 공장 노동자들 숫자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들의 숫자에도 의존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국내 수공업 절대 다수가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예외론자들은 일종의 인민 산업으로부터 자본주의와 대비시키고, 공장 노동자들 숫자로부터 자본주의에 따른 직접적인 처분에 맡겨진 인구 비율로만 판단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으나, 전체 1억 인민들 가운데 백만 명에 불과했고, 사회에서 작은 한 귀퉁이만 차지할 뿐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념하는 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국한시키는 거와 마찬가지라던, 크리벤코 주장을 떠올리도록 한다. 공장과 제조소들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 같이 사회에 따른 작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니, 크리벤코 선생, 당신은 정말 대단한 천재인 것 같소. 정말로 부동산 기관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재화를 생산한다고. 그럼 부동산 기관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해명되겠군요. 노동 계급 해방에 따른 깃발을 들어올릴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 대표들도 분명 그곳에서 찾아야만 할 테고 말이오.
이류 부르주아 철학자들의 입방아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의 글에서, 그런 식의 주장을 읽어야 한다는 건 유감이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도 잉글랜드 인구 구성에 대한 수치들을 인용한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는 총 2천만 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160만 5,440명은 주요 공장 산업 부문에 종사했었다. 뿐만 아니라, 하인 계급 구성원들은 120만 8,648명으로, 2판 각주에서 마르크스는 하인 계급의 아주 급속한 성장을 거론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통합 의미를 판단하고자, 160만 명을 2천만 명으로 나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영국에 존재한다고 생각해보라. 결과는 1/12에 못 미치는 8%이다. 과연 인구 1/12조차 통합시키지 못하고, 더군다나 영국인들이 잘못된 경로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가 수준 노동의 순손실을 나타내는 가사 노예 계급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주의 임무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 경우에도, 조국을 위한 다른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경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확실하지 않는가.
그러나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또 다른 핵심이 존재한다. 니콜라이 온이 한 국가 자본주의는 서구 유럽에서 아주 특징적이고, 북아메리카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나타나기 시작한 통합적인 역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할 때는, 분명 노동 계급 운동을 거론했다. 말하자면, 한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경로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주장은, 미하일로프스키의 기대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 빈곤에서는 오직 빈곤밖에는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대답은 이랬다.
'이 언급은 늘 그렇듯이, 마르크스 말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그러나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빈곤은 말 그대로 빈곤에 불과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의 빈곤』에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빈곤에서 과거 사회를 전복할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 채로 그저 빈곤 자체만을 바라봤던 고루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분명 미하일로프스키는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로 노동 계급 운동이 발현할 징후가 전혀 없다는 걸 들고 있다. 같은 주장에 대해서, 먼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는 식의 사고에는 현실을 아주 피상적으로만 들여다봤을 때,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마르크스에 따른 공산주의 강령이 작성된 건, 1848년 이전 일이다. 그럼 당시 독일 노동 계급 운동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정치적 자유조차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비밀 단체로만 한정됐다. 자본주의에 따른 혁명적이고, 통합적인 역할을 모두에게 아주 분명하게 각인시켰던 사회민주주의 노동 운동이 시작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명확한 모양새를 갖추고, 대규모 공업이 보다 널리 확산되는 한편, 노동 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전파할 재능이 있고, 원기 왕성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건, 20년 뒤 일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잘못 전달하고, 노동 계급 운동에 의식과 조직화를 제공한 사회주의자들에 따른 방대한 활동을 망각한 데 더해, 철학자들은 가장 분별 없는 숙명론적인 관점을 마르크스에게 억지로 떠안겼다.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사회화는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목격하면서도, 노동 계급 운동은 보지 못한다면, 그건 자본주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노동자들 내에서 조직화와 선전을 여전히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확언한다. 예외론적인 철학자들의 소부르주아적인 술수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고, 만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든 활동과 마르크스주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행하는 모든 공개 연설로부터 잘못이 입증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카우츠키가 아주 타당하게 지적했었지만, 노동 계급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과업이 한 국가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고자, 사회주의자들은 최대한 정력을 다해 활동에 나서야만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내 역사와 현재 위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보다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국내에서 특히나 복잡하게 감춰진 모든 형태 계급 투쟁과 착취를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중화하고, 노동자에게 알려나가야만 하며,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을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흡수하고, 조건에 가장 적합한 조직화 형식을 강구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 계급 사상가로 같은 역할을 이미 완수하고, 이행했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들은 단지 막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지속적인 무언가를 창조해내고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언제나 강조해왔다. 또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불충분하고, 터무니 없이 편협한 개념 외에도 한 국가 자본주의에서 발전적인 역할이 부족하다는 통상적인 반대 의견은 인민 제도라는 가공의 어리석은 사고로부터 기초한다. 악명 높은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빈민과 부자, 프롤레타리아 대표와 자본 대표로 쪼개질 때, 반대 의견을 가진 인민주의자들은 초기 형태에서 중세 자본주의라는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시골 정치경제적인 구조를 애써 외면했다.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면서,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의 순수한 부르주아적인 분화가 평등한 마을 공동체 내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지 않은 듯이 농민 토지 소유권의 형식 상 변화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정작 경제 조직 형태와 혼동하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좁은 형태 중세 마을 자본주의를 탈피하고, 토지에 따른 봉건적인 힘을 박살내는 동시에, 오랫동안 발가벗겨지고, 굶주려왔던 농민으로 하여금 기세등등한 부농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토지를 공동체에 넘겨주고, 고향을 떠나 한동안 일자리도 없이 국내 전역을 떠돌아다니다가, 오늘은 지주, 내일은 철도업자, 다음 날은 도시 인부나 부유한 농민의 농장 노동자로 노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기에도 말이다. 오늘날 주인을 바꿔가며, 국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농민은 어디를 가든, 자신이 가장 추잡스럽게, 약탈 당하고 있으며, 다른 빈민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점을, 자신을 강탈하는 게 반드시 주인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돈주고 살 수 있는 자신의 농민 형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농민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도 지키려는 시도에서 벌인 농민 봉기를 번번이 진압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농민의 주인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며, 노동은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고, 부와 사치는 급속도로 증가하는 반면에, 국내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꾸준하게 악화되고, 강탈은 더욱 심해지며, 실업이 일상화되는 현실을 목격한다.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고,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공장 노동자들 수가 얼마나 천천히 증가하는지를 들여다보며,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을 인정할지, 말아야 할지,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역사적인 임무를 아주 잘못 완수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경로를 걷고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와 같은 심오한 문제를 숙고하는 데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참으로 고귀하고도, 자비로운 일 아니던가. 노동 인민에 있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국내 방방곡곡에도 존재하는 시점에서,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건, 곧 현실에서 도피해서 낙원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걸 의미한다고 말하는 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 얼마나 편협하고, 교조적이며, 사악하단 말인가.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는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차츰 희미해지는 국내 사회에서 적대적인 계급들 간 케케묵은 경제적인 투쟁을 꿈꾸는 건, 고골, 『죽은 혼』에 나오는 마닐로프주의와 같이 타락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투쟁에 있어 조직화와 암묵적인 합의를 보태고자, 사회민주주의적인 활동에 착수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끝내 거부하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끝으로, 「러시아 부, 6호」에서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에게 가한 또 다른 공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의 논쟁 방식에서 드러나는 어떤 특이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독일 잡지에 독일 대중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스트루베가 동원한 방식들은 완전히 부적절해 보인다. 독일뿐 아니라, 러시아 대중들, 역시도 이미 성숙기에 도달해서 스트로베 글에서 넘쳐나는 모든 근심거리들에 감탄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모든 시평에서 마추지게 되는 '유토피아 낙원', '반동적 구상' 같은 끔찍한 단어들은 오늘날, 스트루베는 분명 확신하는 효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과 스트루베 간 논쟁에서 과연 부적절한 방식이 동원됐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누구로부터였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글에서,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에 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려 했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방식들을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통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을 동원했다는 의미는 상대방이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고, 단순히 누군가를 욕하고, 나무라기 위한 욕망을 표현하고자, 심하게 반대하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자신의 심한 반감을 근심거리들로 바꾸어 표현하는 데는 그런 특징이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슬로님스키는 니콜라이 온에게 심한 말도 퍼부었지만, 현 질서의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평범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슬로님스키는 누구를 마음대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부적절한 방식들로 인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경탄스러운 주장을 아주 명시적으로 내놓았던 인물이었다. 니콜라이 온도 슬로님스키를 교화하고, 가르치는 수준에서 마르크스 말들을 인용하며, 슬로님스키가 원하던 소규모 수공업과 소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방어가 얼마나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슬로님스키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는, 슬로님스키를 가리켜 편협하고, 단순하다는 따위 비난을 가한 적이 있었다. 스트루베 글 못지않은 욕설들이 넘쳐나는 니콜라이 온의 글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부적절한 방식을 거론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개별적인 주장마다, 다 이유를 가지고 있고, 틀렸다고 하더라도, 글쓴이의 명확한 관점과 견해 체계에 따랐으며,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상대방이 단순하고, 편협하며, 반동적인 이상주의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문제 제기가 스트루베 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살펴보자. 니콜라이 온을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구상과 단순한 이상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이유들을 명확하게 제시했었는데, 첫째로는, 니콜라이 온이 '생산 사회화'를 염원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호소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해 마르크스 이론이 국내 정치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온에게는 완전히 생소하다는 점을 입증해주며, 국가는 지배 계급을 대표할 뿐이라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단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꼭 생겨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공 경제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와 대비시킨다면, 다시 말해, 자본주의 없는 생산 사회화를 원한다면, 순진한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고, 역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본주의 발전과 자연 경제 제거, 그리고 농촌 인구 감소와 더불어, 여전히 둘러싸고 있는 국내 가부장제 시대라는 땅거미 사이로 현대 국가가 등장해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 성큼 나아가고, 생산 사회화를 위해 다른 힘과 요인들을 찾아나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나마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니콜라이 온 사고에 대해 스트루베의 구체적인 언급에 담긴 진실을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니콜라이 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된 계급 투쟁을 정말로 감안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니콜라이 온은 사회와 국가를 말하고, 계급 투쟁을 망간한 채로, 도외시했다.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을 사회화하는 대신에, 자본주의를 지원했다고만 말한다. 분명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이래저래 행동할 수 있고, 따라서 계급 위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근심거리들에 의지한다고, 스트루베를 비난하는 건 그저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데 불과하다는 게 명확하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계급 국가라고 믿는 사람이 노동을 사회화하고자, 곧 지배 계급들을 없애고자, 국가에다 호소하는 사람을 순진하고, 반동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 게 확실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누군가 상대방을 근심거리들에 의존한다고 비난하면서도, 명확히 밝힌 견해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검열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에, 견해가 실릴 수도 없는 잡지에다 대고 그 사람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완전히 부적절한 방식이라고 평가해야만 하는 건 아닐까.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보자. 스트루베 두 번째 주장은 명확히 공식화된 대목이다. 자본주의와 동떨어진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가공 체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실은 니콜라이 온, 자신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었다. 곧 1861년 이전에는 생산 단위가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 구성됐고, 작고 흩어진, 자급자족형 생산은 상당한 수준으로까지는 발전할 수가 없어서, 아주 일상적인 본질과 낮은 생산성이 일반적이었고, 뒤이은 변화로는 노동에 따른 사회적 분업이 점점 더 깊어졌다는 걸 의미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가 예전 좁은 생산 단위 경계를 탈피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을 사회화했다는 점을 뜻한다. 곧 니콜라이 온, 선생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 노동을 사회화해온 자본주의가 아니라, 붕괴로부터 최초로 사회 전반적인 노동 사회화를 불러왔던 마을 공동체에 노동 사회화 근거를 두고자 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인 몽상가에 다름 아니었다. 바로 스트루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진실이냐, 거짓이냐 문제로 인식할지 모르나, 니콜라이 온에 대한 스트루베의 신랄한 논평이 같은 견해로부터 출발해서 논리적인 필연성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걸 가리켜 근심거리들이라 말하는 건 전혀 적절치 않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스트루베는 자신은 노동 사회화를 바라고, 자본주의로부터 이뤄지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표면적인 모습으로 드러낼 세력들에 스스로 기반을 두기를 염원한다고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기를 바란다고 탓하면서 논쟁을 마무리한, 니콜라인 온 태도는 진실과 정반대된다고 부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스트루베는 검열 때문에,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라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앞으로 나선 세력들에 대한 말을 해당 잡지에서 꺼낼 수조차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니콜라이 온 논쟁 방식이 전적으로 부적절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거론한 건, 마르크스주의자 자신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출판물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터무니 없이 편협하고, 왜곡됐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설명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혁명적인 이론이 검열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 강도의 침대에 걸맞게 마구 훼손된 꼴이라니. 평론가들은 참으로 속 편하게도, 그런 활동을 수행해나간다. 평론가들의 설명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소유주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유 재산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와 정반대로 변화해서 사회화되는지에 대한 원리로 사실상 축소됐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사회학적인 방법론에 따른 모든 구체적인 특성들은 무시한 채로, 전체적인 알맹이가 계급 투쟁 원리와 연구에 따른 직접적인 목적, 곧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폐지하도록 돕는 등 계획에 있다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추정한다. 따라서 너무나 하찮고, 제한적이라서 급진주의자들이 가련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애도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국내 절대주의와 반동 체제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하고, 완성된 설명을 제시하고, 거리낌 없이 반론을 내놓을 수 있다면, 맨 처음부터 절대주의와 반동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은 검열 당한 언론에서 왜곡한 사실을 부끄러워했을 테고 말이다. 어떤 한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들을 빼먹고 넘어간 데 대해 마음으로는 거리낌이라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 중에서는 극히 일부만 해명하고 난 뒤, 원리가 편협하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
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계급 투쟁도, 자본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적대도, 적대에 따른 성장도 모르는, 오로지 국내에서만 할 수 있다는 그런 불합리한 상황으로 그렇게 설명될 수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혁명적인 역할이라는 개념도 없고, 심지어 화폐 경제나, 필연성 같은 표현들을 담고 있는 한, 순전히 부르주아 기획일 수밖에는 없는 걸 내놓는, 그들이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려면, 미하일로프스키 같은 지적으로 심오함이 요구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지닌 총체적인 가치는,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혁명적이라는 특성은 마르크스주의에 참으로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내재됐다. 마르크스 이론은 현대 사회에도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하고, 진화를 추적하며, 일시적인 성격과도 다른 형태로 변화에 따른 불가피함을 실증하는 한편으로, 따라서 모든 착취를 할 수 있는 한 빠르고, 쉽게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무산 계급에게 종사한다는 임무를 스스로 직접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국가에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당기는 마르크스 이론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엄밀하고도, 비할 데 없이 과학적인 특성, 사회 과학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혁명적인 특성과 결합시키고 있으면서도, 결코 우연에 따름이 아니라는 점에 정확히 근거한다. 근거는 다름 아닌 원리 창시자가 개인적으로는 과학자이자, 혁명가로 자질을 겸비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두 가지 특질이 본질적이고, 불가분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이론 역할이나, 과학 목적이란 게 현실에서도 경제 투쟁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지원하는 게 아니었던가 말이다. 마르크스는 「루게에게 쓴 편지, 1843, 9월」에서 밝힌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투쟁을 멈춰라, 당신들의 투쟁은 전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할 일은 진정한 투쟁 구호를 세상에 제시하는 게 전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과학에서 직접적인 임무는 진정한 투쟁 구호를 제시하며, 다시 말해 지금 투쟁을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에 따른 산물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당면한 투쟁에서 불가피함과 내용, 발전 경로 및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분리된 형태에 따른 투쟁을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매 단계 투쟁이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이행되는 과정을 추적해 어떤 특정한 순간에서라도, 투쟁에 따른 일반적인 속성과 모든 착취 및 억압에 따른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철폐라는 총체적인 목표를 놓치지 않고, 상태를 제대로 규정해내지 못한다면, 투쟁 구호를 제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의 비판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뒤, 씨름했었던 따분하고, 쓰레기 같은 이론과 마르크스에게 있어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을 한 번 비교해보시라. 분명 스스로를 노동 인민 사상가라 여기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필수적인 부분들은 죄다 흔적을 지워 없애 버리면서, 이론을 '닳은 동전'으로 변형시키는 데 머무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노동 인민의 이념적인 대변자가 되고픈 소망에서 비롯된, 전체적으로는 경제 제도와 구체적으로는 농민들의 현 상태와 역사에 주력한 인민주의 문헌을 마르크스 이론 요구들과도 한 번 대조해보시라. 분명 고통을 연구하고, 묘사하며, 설교를 들어놓는 데 그친 이론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거기서 농노제는 여러 착취와 여러 적대적인 계급들과 특정한 정치적·법적인 체계 따위를 생기도록 만드는 명확한 형태에서 경제 구조가 아닌, 그저 지주들로부터 학대와 농민들에 대한 불의로만 그려진다. 농민 개혁 또한 뚜렷한 경제 형태들과 계급들 간 충돌이 아니라,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잘못된 경로를 선택한 정부 당국이 취한 조치로만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개혁 이후 국내는 특정한 발전에 따른 명확한 적대적인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가 아닌, 노동 인민 고통을 동반한 진정한 경로로부터 일탈로만 묘사된다. 하지만 인민주의 이론이 전혀 신뢰도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자들이 현재 지식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고는 어떤 혁명 이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더 빠르게 깨달을수록,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국내에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적용하고자 모든 노력을 더 빠르게 쏟아붓는다. 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움직임은 혁명 과업 성공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실질적이고, 제대로 된 산업을 창출해내고자, 인민들을 상대로 문화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등과 같은 지식 계급에 대한 인민의 벗들의 요구가 오늘날 빈약한 국내 사상 풍토를 얼마나 크게 변질시켰는지를 드러내줄 생생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확연하게 구별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인민의 의지'의 견해를 인용해볼 필요가 있다. 인민권리당이『시급한 쟁점, 1894』이라는 소책자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조건 아래에서조차 국내는 생산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노동 인민에게 보장해주는 경제 구조와 작별을 고해서는 안 된다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치 개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경제 개혁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인민주의자들을 멋지게 반박한 뒤, 나로드프랍치,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수호자가 아니요,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방 감독관들의 보호 아래에서 부르주아 계급 침범으로부터 계획적인 정치 개혁을 열심히 지켜내게 하느냐, 아니면 정치 정당에 기초한 부르주아 계급 자체 보호 아래에서, 다시 말해, 인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조직적으로 방어하는 걸, 보장하는 상황 아래에서 경제 개혁이냐를 놓고 선택하라는 얄궃은 운명이 인민들에게 주어진다면, 인민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하는 게 더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인민들에게서 거짓된 독립 경제 구조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정치 개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누구든 어디에서나 익숙하게 불리는 부르주아 정책만이 존재할 뿐이며, 인민 노동에 대한 가장 철저한 착취로도 표현된다. 폭 넓은 자유는커녕 좁은 의미에서 자유도 없으며, 입헌 국가들의 농경민과 자본가들은 더 이상 꿈도 꾸지 않는 계급에 따른 이익의 보호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부르주아 의회 제도란 게 없으며, 행정 기구에 따른 포탄 사정거리 안에서는 사회도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만리장성을 세워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나이데노프, 모로조프, 카지, 비엘로프 같은 신사 양반들이 있으며, 그들 옆에는 1데샤티나 당 거금 100루블씩 자신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기를 요구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른 충성스러운 귀족 대표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위원회 일원으로 초대되어, 공손하게 경청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말을 꺼내고, 한 국가 경제 생활에 영향을 끼칠 중차대한 사안들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는다. 그러나 인민의 이익을 지키고자 내세운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지방 감독관 아니었던가. 농업 근로대가 기획된 건, 인민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단, 뿐만 아니라 인민들에게 분여지를 부여했던 유일한 이유는 볼로그다 주지사는 자신의 회람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민들로부터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자, 거의 빈정거릴 정도로 가깝게 솔직히 막 공표되지는 않았나. 주지사는 전제 군주국, 아니 보다 정확히는 관료주의적인 절대주의 체제가 숙명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책을 단지 공식화하고, 소리 높여 표현했을 뿐이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대상인 인민과 노동 이해 관계를 보호해줄 믿을 만한 기관이라고 계속해서 여겨온 사회에 대한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의 개념이 모호하다고는 하나, 인민권리당의 창설이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에 대한 착각과 몽상을 완전히 버리고, 진정한 경로를 두려움 없이 인정하며, 혁명 투쟁을 위한 요소들의 기반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 거라는 점만큼은 누군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민주적인 정당을 건설하고자 분투를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분투'일 수밖에 없는 건, 불행하게도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논지를 일관되게 실행에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주의자들과 융합과 동맹을 말하고, 노동자들을 한낱 정치적인 급진주의로 끌어들이는 건, 지식 노동자들을 노동 대중으로부터 단졀시키는 걸 의미할 뿐임을 깨닫기를 거부하며, 노동 계급 운동에 무기력하다는 선고를 내린다. 노동 계급 운동은 전적으로 노동 계급 이익을 보호하고, 자본에 맞선 경제 투쟁을 벌일 때만 강해질 수 있으며, 경제 투쟁은 자본 하수인들에 맞선 정치 투쟁과도 불가분하게 묶여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혁명 분파들의 '융합'이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따른 독립된 조직과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두 정당의 공동 행동으로부터 훨씬 더 잘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당을「인민권리당 선언문, 1894, 2월 19일자」사회혁명당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짖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정치 개혁에만 국한시키고 '지긋지긋한' 사회주의적인 사안들은 아주 주도면밀하게 회피해버린다. 실로 착각에 맞선 투쟁을 열렬하게 촉구하는 정당이 타인에게 착각을 조장해서는 안 되는 법임에도, 그들은 선언문의 맨 첫 부분에서부터,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단지 입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그들이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민의 권리'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민의 권리'들은 오로지 정치 강령에 근거한, 사회주의와는 관계도 없이, 정치 투쟁만을 염두에 두면서 '인민의 의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진정으로 '인민의 권리'의 성공을 바라며, 그들의 정당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그래서 현재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를 편들고 마는, 따라서 반드시 그 체제를 거부하고, 맞서는 가차없는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 민주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일상의 이해 관계가 묶여 있는 사회 분파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관료 체제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면서, 정치 투쟁에 따른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노동 인민이 억압 받는 원인과 현재 벌어지는 계급 투쟁 성격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인민의 벗들이 타협적이고, 비겁하고, 감상적이고, 공상적인 인민주의는 정치적인 급진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양쪽으로부터 공격 당할 경우, 결코 오래 버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