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전쟁에 돌입한 또 다른 인민의 벗인 크레벤코 선생을 만나보자.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나 유자코프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크레벤코, 「우리 문화 용병들, 1893, 12호」, 「여행 중에 보낸 편지, 1894, 1호」를 검토한다. 글들을 완전히 분석하는 건 첫째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한 그들의 반론과, 둘째로는 그들의 정치 경제 이론에서 실체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인민의 벗들의 사고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그들의 전술, 실질적인 목표, 정치 강령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들의 이론적인 견해를 밝힐 때,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그 강령을 일관성 있고, 완전하게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명 기고자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정도로, 의견 일치를 보인 한 잡지에서 많은 글들을 참조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크리벤코 글들을 우선적으로 살펴본다. 그 이유로는 크리벤코 글들에 많은 자료가 담겨 있는데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주의자고, 유자코프는 경제학자이듯이, 크리벤코는 해당 잡지에서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인물이자,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말 필수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여겨지는 이론적인 핵심이 한 가지 더 있다. 유자코프 선생은 인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인민들의 토지 임차에 대해 의미 없는 문구들을 늘어놓는 걸, 자신이 농민들의 경제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추고자, 의미 없는 문구들로 문제들을 눙치는 걸 지켜봐왔다. 유자코프는 수공업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았고, 대규모 공장 산업 발달에 관한 자료를 다루는 걸로만 국한시켰다. 그래 놓고는 수공업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문구들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유자코프는 '인민들의 산업', 곧 수공업을 자본주의적인 산업에 똑같이 대비시키면서, 인민들의 생산은 대부분의 경우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면에, 자본주의적인 산업은 흔히 인위적으로 창출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단락에서도 유자코프는 '소규모 인민 산업'을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과 대비시키면서, '여러분이 눈에 띄는 인민들의 산업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규모가 작고, 노동 도구들이 생산자와 결합된다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러나 경제 구조를 정의내리는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데다, 전혀 사실도 아니다. 크리벤코 선생은 소규모 인민 산업은 대규모 자본주의적인 산업보다 총생산량도 훨씬 많고, 더 많은 노동력을 고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크리벤코는 수공업자들의 숫자가 40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를 거론했었는데, 또 다른 자료에서는 7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공업을 지배하는 경제 형태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대부분 수공업자들은 생산에서 전혀 독립적이지 않고, 완전히 종속됐다는 점, 그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원료를 가공하는 게 아니라, 상인들이 대준 원료를 가공하고, 그 대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같은 형태가 지배적이라는 통계는 합법적인 출판물에서도 인용됐다.
유명한 통계학자인 S. 카리조메노프 글들 가운데,「법률 통신, 1883, 11호, 12호」에 실린 뛰어난 글을 인용해보자. 수공업이 가장 고도로 발달된 중부 지방 주들에서 수공업에 관한 기존에 발표된 통계를 요약하면서, 카리조메노프는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에서 절대적인 우위, 곧 의문의 여지 없이 자본주의 형태에 따른 산업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카리조메노프는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경제적인 역할을 규정할 때, 다음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스크바 주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86.5%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로부터 발생했고,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으로부터는 13.5%에 불과하다. 블라디미르 주에서 알렉산드로프와 포크로브 군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96%는 대규모 가내 생산과 제조업 체계 몫에 해당했고, 4%만이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런 점을 반박하려 하지 않았고,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점들을 무시한 채로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산업을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인민 산업이라 부를 수 있고, 진정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사실 관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딱 한 가지 설명만이 할 수 있다. 곧 국내 자유주의자들이 다 그렇듯이, 인민의 벗들 역시도 모두를 단지 평범한 결함들이라 치부하면서부터 국내 노동 인민 착취와 계급 적대를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으로는, 크리벤코는 파블로보 날붙이 사업을 절반은 장인 성격의 사업이라 부른 데서 드러난 바와 같이, 같은 주제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너무나 깊은 데서 비롯된다. 이렇듯이 인민의 벗들이 도달한 왜곡 깊이는 가히 놀랍다는 말밖에는 덧붙일 말이 없다. 같은 대목에서 어떻게 파블로보 칼 장수들이 장인의 성격을 띠고 있따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리벤코는 상인이 수공업자로부터 물건을 주문해서 니지니 노브고로드 장터로 보내는 체계를 장인 산업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너무나 우습게도 그렇다. 실제로 칼 제조는 외관 상 생산자들이 독립성을 지닌 소규모 수공업 형태로부터 파블로보의 다른 산업들과 비교해볼 때, 가장 동떨어져 있다. N.F. 안넨스키는 '요리용과 공업용 칼 생산은 이미 대부분 공장에 접근하고 있다거나, 더 정확히는 공장제 수공업 형태에 도달한다.' 말한다. 니지니 노브고로드 주에서 요리용 칼 제조에 종사하는 396명 수공업자들 가운데 단 62명, 16%만이 시장을 위해 일하고, 273명, 69%은 주인을 위해 일하며, 61명, 15%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고용주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은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칼 산업에서 다른 부문에 대해 같은 필자는 '주머니칼과 자물쇠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 같은 부문에서 수공업자들 대부분은 주인을 위해 노동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시장과 관계를 맺는 수 많은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여전히 아주 많다'고 말한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는 이런 종류의 칼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이 총 2,552명 있었는데, 그 중 1,236명, 48%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1,058명, 42%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258명, 10%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장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 또한 단지 겉으로만 독립적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구매자 자본에 덜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21,983명 노동 인민, 곧 노동하는 사람의 전체 84.5%가 공업에 종사하고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 고르바토프 군 전체 산업 통계를 불러온다면, 금속, 가죽 제품, 마구류, 털천, 삼 방적 등 산업에 종사하는 10,808명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산업 경제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곧 수공업자들의 35.6%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46.7%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17.7%는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우위에 있고, 노동이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관계가 지배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토록 자유롭게 이런 종류의 사실들을 무시한 또 다른 이유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자본가라는 거대한 기계 회사를 운영하고, 고용주라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어에서 과학적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거부한다. 앞 장에서 유자코프 선생은 자본주의 시작점을 정확히 기계 공업에서 시작하면서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을 생략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널리 만연하는 실수로, 부수적으로는 한 국가의 수공업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성이 무시된 결과를 생기도록 만들었다.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자본주읮거인 산업 형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이미 높은 발전 수준에 도달한 상품 경제, 생산 수단이 개인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상, 수중에 생산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해서, 자신의 노동을 타인 소유의 생산 수단으로 적용시키며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 대중 착취라는 모든 특징들이 담긴다. 분명 그러한 구성에 있어 수공업은 순전히 자본주의적이며, 주로 터무니 없이 낮은 임금 때문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며, 노동자들은 여전히 소규모 농지를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춰볼 때, 대규모 기계 공업과는 다르다. 소규모 농지에 있어 상황은 특히 인민의 벗들을 헷갈리도록 만들었는데, 그들은 진정한 형이상학자들이라는 성격에 걸맞게 노골적이고, 정반대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맞아. 아니, 아니, 악마에게서는 그게 뭐든 간에 이보다 더한 게 생겨나는 법이야.'
노동자들에게 토지가 없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토지가 있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며, 경제의 전반적인 사회적 구조를 보지도 않은 채, 그런 철학을 위안 삼아 자기 자신을 그 속에 가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뻔뻔한 농민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강탈 당한 끔찍한 가난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점마저 망각해버린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비교적 낮은 발전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디에서도 노동자를 토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 마르크스는 서구 유럽에서부터 오직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자를 영원히 착취한다는 법칙을 확립했다. 따라서 인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논법은 완전히 쓸모없다는 게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에 따른 자본주의는 노동자 토지로부터 완전한 분리와 어디에도 결부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자본주의이기를 멈춘 적도 없기 때문이다. 국내 대규모 기계 산업 형태는 산업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을 떠맡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삶의 모든 구체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어느 서구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토지와 사슬 고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걸 절대로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같은 점은 데멘티예프로부터 엄밀한 통계로 입증된 바 있으며, 데멘티예프는 마르크스와는 아주 별개로, 기계를 이용한 생산이 노동자에 따른 완전한 토지로부터 분리와 불가분으로 관련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같은 연구에서는 러시아도 자본주의 국가이며, 국내 노동자들에 따른 토지와 연관에 있어 아주 미약하고, 실재하지도 않는데다, 자산 소유자인 화폐 소유자, 구매자, 부농, 공장제 수공업자 등의 권력은 아주 굳건하게 확립됐고, 기술적인 진전이 한 차례 더 일어나게 되면, 오랫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왔던 농민은 그야말로 노동자로 변모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러나 한 나라 수공업에서 경제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인민의 벗들의 잘못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은 주인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 산업들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생각은 경작자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어쨌든 그들이 아는 거라고는 세상에는 노동하는 인민과 결합될 수 있는 생산 수단 같은 게 존재하고, 그게 아주 좋다는 반면에, 그들과 분리될 수도 있는 생산 수단은 아주 나쁜 거라는 점 말고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제넘게도 정치 경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의견이나 늘어놓는 신사양반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라는 점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화되는 산업과 그렇지 않은 소규모 생산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산업에 대해 말하면서, 크리벤코는 한 쪽으로 특정 분야들에서 기본적인 생산 비용이 얼마 안 되며, 따라서 소규모 생산을 할 수 있다고만 말한다. 크리벤코는 벽돌 산업을 거론하는데, 거기서는 비용이 벽돌 공장 연간 매출액에서 1/15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필자가 사실 관계를 언급한 거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민의 벗들이 현실에 대해 어떤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모스크바 젬스트보 경제 통계 보고서」에 대한 서술을 볼 수 있다. 해당 산업에서는 주로 보고로즈코예 군 세 개 읍에 집중됐는데, 233개 시설에서 1,402명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이 중에서 41%를 차지하는 567명은 가족 노동자들이다. 가족 노동자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주인 가족 가운데 노동에 참가하는 구성원을 뜻한다. 35만 7천 루블 가치에 해당하는 연간 총 생산량을 보유했다. 해당 산업은 오래된 산업이지만, 철도 건설로부터 판매가 대폭 촉진된 덕분에 지난 15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철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가족 생산 형태가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임금 노동자 착취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또한 해당 산업은 판매를 위해 소규모 업자들이 대규모 업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금 부족 때문에 소규모 업자는 대규모 업자에게 아주 형편없는 가격에다 그 자리에서 벽돌이나 미가공품을 내다 판다. 하지만 그러한 의존도와는 별개로 논문에 첨부된 노동자들 수와 각 시설 당 연간 총 생산량이 표시된 수공업자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해당 산업 구조 역시도 익히 알 수 있었다.
상품 경제가 곧 자본주의 경제라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상품 경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된다는 법칙이 해당 산업에서도 적용되는지를 확인하고자, 시설들의 규모를 비교해봐야만 한다. 문제는 정확히 생산량에서 역할과 임금 노동 착취에 따른 소규모와 대규모 시설들 사이에서 관계다. 노동자들의 숫자를 기초로 해서, 수공업자 시설들을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 1-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2. 6-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3. 1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다. 시설들의 규모, 노동자들의 전체 수, 각 집단 별 생산량에 따른 가치를 검토한 결과, 다음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수치들을 살펴보면, 부르주아 또는 그와 동일하고,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시설이 클수록 중간 집단은 예외지만, 노동 생산성은 더 높아지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더 심해지며, 생산 집중도 역시 더 커진다. 거의 전적으로 임금 노동에 기초한 세 번째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 수에서 10%를 차지하지만, 총 생산량은 44%에 달한다. 소수 손에 생산 수단이 이렇게 집중되는 현상, 다수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착취와 관련된 현상은 대규모 경영주들은 사실상 원청이기 때문에, 소생산자들에 따른 원청에 대한 의존과 해당 산업에서 노동 억압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노동 계급에 대한 강탈과 착취 원인이 생산 관계 자체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알다시피 국내 인민주의 경향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견해를 지녔었고, 수공업에서 노동 억압 원인이 생산 관계에서 그들은 생산 관계가 착취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칙에 기초한다고 선언했었지만, 거기에 있지도 않고, 다른 무언가, 곧 농업과 재정 정책 등에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런 견해를 굽히지도 않고, 이제 거의 편견에 따른 철옹성을 구축하게 된 근본 토대는 무엇이었으며,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수공업에서 생산 관계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사실 관계, 곧 경제 구조에 따른 실제 형태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묘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속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 과학에 따른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 곧 유물론적인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나이든 사회주의자들의 사고 경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공업에 관해서는, 그들은 착취 원인을 생산 관계 외부로 그 책임을 돌린다. 반면에, 대규모 공장 자본주의에 관해서는, 그들은 거기에서 착취 원인이 정확히 생산 관계에 있다는 걸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화였다. 수공업적인 생산 관계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규모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지를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공업과 자본주의적인 산업 사이에서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수공업에서는 인민 공업으로, 자본주의적으로는 인위적인 산업으로 대비시켰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발상이다. 같은 사고는 아주 폭 넓게 퍼져 있고, 니콜라이 온 선생에 따른 수정과 개선을 거쳐, 국내 대중들에게도 제시된 바 있다. 가히 경탄스러울 정도로 비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타성적으로 지속된다.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공장 자본주의는 실제 현실에 기초해서 판단되는 반면에, 수공업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기초해서 판단이 이뤄진다. 자본주의는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기초해서 판단되지만, 수공업에서는 생산 관계를 따로 검토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판단되며, 그러한 문제는 곧장 정치 영역으로 옮겨간다.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시선을 돌리기만 한다면, 인민 제도들이 아직 개발되지도 않고, 맹아적인 상태이기는 하나, 지극히 동일한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모든 수공업자들이 동등하다는 안일한 편견을 거부하고, 그들 사이에서 차이들을 정확히 제시하자면, 공장 자본가와 수공업자 사이에서 차이가 수공업자 서로 간 차이보다 작다는 게 때때로 증명된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자본주의는 인민 제도와 모순되는 게 아니라, 뒤를 잇는 직접적이고, 당면한 연속이자, 발전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바가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주어진 바에서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비율이 대체로 너무 높다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수공업자들이 드러내는 관계, 곧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는 본질적으로 부르우자적이고, 그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든, 약하게 드러나든 간에 그런 상태가 중단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약한 걸 골라볼 텐데, 모스크바 주 산업에 관한 이사예프에 따르면, 도자기 공업은 순수한 가내 공업이고, 당연히 소규모 농민 공업에서 대표 주자로 여겨진다. 기술이 지극히 단순하고, 장비는 아주 작으며, 생산된 물건들이 보편적이고, 필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세부 사항들을 제시하는 도자기 장인들에 대한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경제 구조도 연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따. 도자기 공업에서는 수 많은 국내 소규모 인민 공업으로 아주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수공업자들을,
1.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3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2. 4-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3. 5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 다음 동일한 계산을 실시한다. 명백하게도, 해당 공업 역시도 비슷한 사례들이 무수히 인용된다. 부르주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품 경제로부터 발생하는 동일한 분리, 특히 자본주의적인 분리가 발견되고, 맨 위 집단에서는 이미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임금 노동 착취로 이어진다. 맨 위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들에서 1/8을 차지하고, 전체 노동자에서 30%가 총 생산량에서 약 1/3을 생산하며, 노동 생산성은 평균보다 상당히 위에 있다. 생산 관계만으로도 원청 등장과 권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규모가 더 크고, 이윤이 더 많이 나는 시설들을 소유하고, 타인 노동으로부터 순이익을 얻는 맨 위 도공 집단에서는 사실상 평균 5.5명 임금 노동자들이 노동하며, 소수가 어떻게 절약된 돈을 축적하고, 왜 다수는 몰락하고 심지어 소장인들은 생계조자 이을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게 예속되는 건 확실한 사실이며, 필연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생산 관계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그렇다. 같은 관계들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 수중으로 넘어가서, 그들의 손에서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수단, 대중 착취로부터 개인적인 부를 쌓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관계다. 그리고 같은 종류에서 관계가 여전히 덜 발달됐기 때문에, 생산자들에 따른 몰락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자본 축적이 무시해도 될 정도이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이 보다 덜 뚜렷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오로지 노예의 형태를 띤 보다 더 조악한 착취로 이끌 뿐이다. 곧 아직은 노동자 노동력을 가치 그대로 구입하기에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종속시킬 수 없었던 자본이 노동자를 고리대금으로부터 착취에 따른 진정한 그물에 얽어넣고, 악랄한 방법으로 묶어놓으면서부터 초과 가치뿐만이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을 강탈해가고, 더 나아가 노동자로 하여금 주인을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부터 고통을 가하고, 자본이 노동자에게 일거리를 준다는 점을 혜택으로 강요하면서부터 노동자를 모욕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진정한 인민 산업이 존재한다면, 단 한 명의 노동자도 국내에서 독립적인 수공업자로서 지위를 그런 지위와 맞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국내 급진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치들은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와 자본에 대한 노예화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여전히 고립된 실험에만 머무르거나, 노동 인민에 따른 상태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주어진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세련되게, 다듬고 발전시키며, 강화시킬 뿐이라는 점도 명백하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전체적인 비참한 상태와 상대적으로 작은 시설, 극도로 낮은 노동 생산성, 원시적인 기술과 소수 임금 노동자들에도 불구하고, 농민 산업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인민들 사이에서 특정한 관계이고, 그러한 관계는 비교 대상 범주가 더 높은 수준에 있건, 더 낮은 발전 수준에 있건 간에 똑같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자본에서 그런 정의에 반대했다. 그래서 본인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시버의 책에 대한 글을「러시아 부」에서 기고하면서, '자본은 관계다.'라는 정의를 인용하며, 분개한 마음에 그 뒤에다 느낌표를 달아놓았다. 부르주아 체제에서 범주를 영원하고, 당연하다고 간주한다는 건, 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본에 대해서도 그들은 추가 생산을 위해 쓸모가 있는 축적된 노동이라는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을 인간 사회에서 영원한 범주로 묘사하고, 그런 행위에서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축적된 노동이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타인 노동의 착취를 위해 기여하는 역사적으로 명확하고, 특정한 경제 구성체에 따른 본질을 흐린다. 그리고 생산 관계에 따른 명확한 체계에 대한 분석과 연구 대신에, 그들이 어떤 체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련의 시시한 말 따위를 제시하고, 소부르주아 도덕에서 감상적인 어린애 장난 같이 뒤섞는다. 인민의 벗들은 해당 산업을 인민 공업이라 부르고, 자본주의 산업과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신사 양반들이 소부르주아 이념가들이며, 소생산자들이 상품경제 체제 아래에서 살고 활동하면서, 그들과 시장과 관계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들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놓는다는 점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이런 현실 구조를 연구하려 하지 않는가. 그랬더라면, 인민 산업들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결과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대신에,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어쨌든 발전을 이룬 수공업 분야가 국내에서도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로부터 생산 수단 독점, 다수로부터 소외, 임금 노동에 따른 착취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본질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으로부터 점유되는 개념에 필연적이고, 적당한 특징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자신의 역사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실제로 인민 수공업 구조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전체적인 역사에 있어 훌륭한 실례를 제공해준다. 분명히 단순 협업 형태에서, 도자기 공업에서 맨 위 집단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기원과 시작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상품 경제 덕분에 개별 개인들의 수중에 축적된 저축이 어떻게 자본이 되는지, 그래서 저축 소유자들만이 대규모 처분에 필요한 자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차적으로 판매를 독점하고, 그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시장에서 상품들이 팔려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하는지, 상인 자본이 생산자 대중을 어떻게 노예화하고, 자본주의 기계제 수공업, 곧 대규모 생산에 따른 자본주의 가내 체계를 조직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장 확대와 늘어나는 경쟁이 어떻게 개선된 기술로 이어지고, 상인 자본이 산업 자본이 되며, 대규모 기계제 생산을 조직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그래서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수백만 노동 인민과 지역 전체를 노예화한 자본이 공공연하고, 뻔뻔하게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부를 자신의 하인으로 변모시키는 순간, 천재적인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 이식과 인위적인 생성에 대해 비명을 질러댄다. 실로 적절한 발견이다.
그러므로 크리벤코 선생은 '인민의', '현실적인', '적합한' 따위에서 산업에 대해 말했을 때, 크리벤코는 단지 수공업이 많은 발전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점을 감추려고 애쓴다. 이미 유자코프 선생에게도 같은 식의 수법들을 익히 보았다. 유자코프는 농민 개혁을 연구하는 대신에 1861년 2월 19일, 농노제 폐지 선언에 따른 기념비적인 선언에서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공허한 문구들을 사용했었고, 토지 지대를 연구하는 대신에 인민 지대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국내 시장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위해 형성되는지를 연구하는 대신에, 시장 부족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등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은 바 있다. 같은 대목에서 인민의 벗 선생들이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가지를 더 검토해본다. 주관적인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정확한 언급 가운데 하나로, 곧 크리벤코 선생이 보로네시 농민들의 예산에 대해 1894년, 1호에서 언급했었던 부분을 무시하는 건, 불공평하다며 드물게 자세를 낮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이 선택한 통계를 기초로 삼아보면, 국내 급진주의자들과 인민의 벗들의 사고와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따른 사고 가운데 현실에서 어떤 생각이 더 정확한지를 확실히 할 수 있다.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학자인, 시체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군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전형적인 농가 24곳 예산 항목들을 덧붙이며, 본문에서도 분석했다. 크리벤코는 같은 분석을 재현하면서도, 방법론이 소농들의 경제를 알기 위한 목적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지 못하거나, 보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24곳의 예산은 크리벤코, 자신이 지적했듯이, 완전히 서로 다른 잘살거나, 중간이거나, 가난한 가구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시체르비나도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유형에서 가구들을 한 덩이로 묶어, 평균 수치들을 활용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 간 차이를 완전히 숨겼다. 그러나 소규모 생산자들 내부 분화는 아주 일반적이고, 주요한 사실이라서, 크리벤코가 선택한 빈약한 통계로부터 아주 뚜렷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농민들의 농업을 다룰 때, 그들을 농장 규모와 농업 유형에 따른 범주로 나누는 대신에, 시체르비나 선생이 그랬듯이 그들을 법적인 범주, 곧 과거 국유지 농민과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으로 구분하고, 자신의 모든 관심을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과 비교했을 때, 과거 국유지 농민의 번영에 돌리면서 같은 범주 내 농민들 간 차이가 범주 간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놓치고 만다. 이를 증명하고자, 24명 농민들을 세 개 집단으로 나눠,
a. 6명, 잘사는 농민들
b. 11명, 평균적인 농민들
c. 7명, 가난한 농민들
크리벤코 선생은 과거 국유지 농민의 농가 당 지출이 541.3루블이고, 예전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 지출은 417.7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농민들의 지출이 동등하다는 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 가운데 지출이 84.7루블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설령 1,456.2루블을 지출하는 독일 이주민을 제외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은 열 배에 해당하는 887.4루블이었다. 이를 한데 묶어놓는다면, 과연 평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제시하는 범주들로 분류할 경우, 잘사는 농민 농가 당 평균 지출은 855.86루블이고, 중간층 농민은 471.61루블, 가난한 농민은 223.78루블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비율은 대략 4:2:1이다. 계속 이어가서, 시체르비나 발자취를 따라 크리벤코는 많은 법적인 범주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필요에 따른 경비를 제시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이 연간 채소 음식에 지출하는 일인 당 경비는 13.4루블이고,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은 12.2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7루블
b). 14.5루블
c). 13.1루블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이 일인 당 고기와 유제품에 지출하는 경비는 5.2루블이고, 과거 국유지 농민들은 7.7루블이었다. 반면에,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각각 11.7루블, 5.8루블, 3.6루블이다. 따라서 법적인 범주에 따른 계산은 이러한 큰 차이를 덮어버리는 데 불과하다는 점이 명백하다. 정녕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소득이 예전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 소득보다 53.7%, 더 크다고 말한다. 24명 농민에서 전체적 평균은 539루블이고, 두 범주로 나누면, 각각 600루블 이상과 약 400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면, 소득은,
a). 1,053.2루블
b). 473.8루블
c). 202.4루블
최대 10:2 비율일 뿐, 3:2가 아니었다. 또한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농가 당 자본 가치는 1,060루블이고,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은 635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37.91루블
b). 786.42루블
c). 363,38루블
다시 최대 비율은 10:2이지, 3:2가 아니었다. 이렇게 농민을 법적인 범주로 구분하면서부터 이와 같은 농민 경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버렸다. 경제적 능력에 따른 많은 유형에서 농가들을 검토한다면, 잘사는 농가는 평균 1,053.2루블 소득을 올리고, 855.86루블 경비를 지출해, 197.34루블 순수익을 얻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에 비해 중간층 가구는 473.8루블 소득을 올리고, 471.46루블 경비를 지출해서, 농가 당 2.19루블 순수익을 거둔다. 신용 부채와 체납금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분명 생계를 잇기에는 부족한 금액으로, 농가 11곳 가운데 5곳이 적자였다. 반면에, 최하층 가난한 집단은 직접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소득이 202.4루블, 경비는 223.78루블로, 21.38루블 적자를 기록했다. 농가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전체적인 평균 순수익 44.11루블을 낸다면, 실제 그림은 명백하게 완전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순수익을 확보한 6명의 잘사는 농민들이 8명의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의 농업 성격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순수익을 거둬들여, 산업에 의존할 필요성을 사실상 덜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농들은 모두 합쳐 자신들 예산에서 6.5%만 산업으로 충당한다. 총 6,319.5루블 가운데 412루블로, 게다가 해당 산업들은 시체르비나가 언제나 말했듯이, 운반이나 심지어 양치기와 같은 유형으로, 의존과는 거리가 멀고 타인 착취를 미리 전제로 한다. 바로 축적된 저축은 상인 자본으로 전환된다. 농민들은 4개 산업 시설들을 소유하고, 거기서 320루블 소득, 전체 5%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중간층 농민들의 경제는 유형이 달랐다. 그들은 거의 생계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중산층 농민들이 농사만으로는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울 수 없어, 소득 19%를 이른바 산업으로부터 충당했다. 과연 어떤 종류 산업인지는 시체르비나 글에서 알 수 있는데, 7명 농민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독립적인 산업, 양복업과 숯 제조에 종사하고, 나머지 5명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있었다. 이들은 이미 반만 농민이고, 반은 노동자이다. 부업을 하면서 농사를 등한시할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자신의 농사가 약화된다. 가난한 농민들은 순전히 손해를 보면서 농사를 짓는다. 가계 예산에서는 산업의 중요성이 소득의 24%로 훨씬 더 컸고, 산업이란 거의 전적으로 농민 한 명만 제외하고, 노동력 판매였다. 빈농 가운데 2명은 산업에서 농장 노동으로부터 얻는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3/2를 차지했다. 소생자들에 따른 완전한 분화 과정이라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 소생자들 가운데 상위 집단은 부르주아로 변모했고, 하위 집단은 프롤레타리아가 됐다. 전체적인 평균을 택한다면, 당연히 거기에서는 무엇도 알 수 없고, 시골 지역에서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크리벤코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도록 만든 건, 오로지 그러한 허구 평균을 갖고 작업 했기 때문이다. 해당 군 전체에서 농민 농업에서 전형적인 농가들에 따른 지위를 측정하고자, 시체르비나 선생은 농민들을 분여지 크기에 따른 집단으로 나눴더니, 선택된 농가 24곳에서 전반적인 평균 번영 수준이 군 내 평균보다 약 3/1 가량 더 높다고 드러났다. 하지만 계산법에서는 불반족스러웠다. 왜냐하면 24명 농민들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존재하고, 분여지 크기에 따른 분류는 농민층 분화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여지가 번영에서 주요한 원인'이라는 크리벤코 이론은 완전히 틀렸다. 마을 공동체 내 토지를 '동등하게' 분배한다고 해서 말을 소유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토지를 포기한 채, 일자리를 찾아 떠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걸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 또는 다수 말을 소유한 구성원들이 거대한 땅을 임차해서, 또한 이윤이 발생하는 큰 농장을 운영하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농가 24곳 예산을 가지고 따져보면, 6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한 명 부농이 758.5루블의 총소득을 거둬들였고, 7.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중간층 농민은 391.5루블, 6.9데샤니타 분여지를 보유한 빈농은 109.5루블을 거둬들인다는 점을 알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집단 간 소득 비율로는 4:2:1인 반면에, 분여지 비율은 2.6:1:0.8:1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가구 당 22.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부농들은 각각 8.8데샤티나를 추가로 더 빌리는 반면에, 분여지를 더 적게 보유한 9.2데샤티나 가운데 중간층 농민들은 더 적은 규모에서 분여지 7.7데샤티나를 빌렸고, 훨씬 더 적은 분여지 8.4데샤티나를 보유한 빈농들은 불과 2.8데샤티나만 추가로 임차한다는 점이 발견됐다. 크리벤코는 '불행하게도 시체르비나 선생이 제시한 통계에서 주 단위는 말할 거도 없고, 군 단위에서조차 전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전체적인 평균으로 계산하는 잘못된 방법론에 의존하는 당신의 행동도 측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밖에는 없다. 일반적으로 시체르비나 통계는 아주 포괄적이고, 귀중해서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줬고, 크리벤코 선생이 그러지 못했다면 비난받을 대상은 시체르비나 선생이 아니다. 시체르비나는 농사용 가축에 따른 농민들 분류를 제시했을 뿐, 분여지에 따른 분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곧 법적인 부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구분에 따른 분류이다. 그리고 선택된 전형적인 24곳 농가에 따른 다양한 범주들 사이에서 비율이 해당 군을 통틀어 다양한 경제적 집단들 사이에서 비율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앞에서 볼 때, 전형적인 24곳 농가에서 전체적인 평균이 해당 군 농가보다 전반적으로 운영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허구 평균 대신에 경제적 범주를 택해보면,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농가들에서 노동하는 농장 노동자들이 농사용 가축을 갖고 있지 못한 농민들보다 다소 아래에 위치했지만, 농민들에게 매우 근접해간다는 점을 발견한게 된다. 그리고 빈농들은 농사용 가축을 한 마리 보유한 농민들에 아주 가깝게 다가선다. 중간층 농민은 농사용 가축을 두세 마리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위에 위치해 있다. 반면에, 부유한 농민들은 농사용 가축을 네 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상태에서, 네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에게 근접해간다. 따라서 군 전체에서 이윤이 나는 농사에 규칙적으로 종사하면서, 외부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농민들이 1/10을 넘어선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들의 소득은 화폐로 표기되고, 따라서 상업적인 성격에 따른 농업을 전제로 한다. 대체로 농민들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손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전체 가구에서 1/4 이상이 정규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일시저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가구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에, 군 내 농민에서 절반 이상은 가난하고, 무마 농민 26% + 일마 농민 31.3% = 57.3%로, 60%에 가깝게, 순전히 적자 상태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차 없는 강탈에 꾸준하게 시달린 끝에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는 없고, 농민들의 약 1/4는 이미 농업보다는 임금 노동에 더 많이 생계를 의존한다. 나머지 중간층 농민들은 어쨌든 정기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사를 짓는데, 외부 수입으로 보충하기 때문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
크리벤코가 제시한 그림이 실제 상태를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통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당연하게도 허구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거짓이었다. 전형적인 24가구 예산 가운데, 한 명의 잘사는 농민의 총소득 +197.34루블이 가난한 아홉 농가에서 적자를 메워주고, -21.38×9=192.42, 그래서 해당 군 내 10% 부농들이 57% 빈농들의 적자를 상쇄해줄 뿐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도 잉여를 산출해낸다는 점이다. 24곳 농가에서 평균 예산으로부터 44.14루블 잉여를 이끌어내고, 또는 신용 부채와 체납금 15.97루블을 차감한 크리벤코는 그저 중산층과 중하층 농민들의 쇠퇴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간층 농민들을 언급할 때만, 쇠퇴를 말할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농민 대중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수탈, 곧 상대적으로 크고, 튼튼하게 자리 잡은 농장을 소유한 소수 손에서 생산 수단이 집중된 결과로 인한 강탈을 목격한다. 직접적인 수탈을 무시했기 때문에 크리벤코는 농가 예산들에 따른 또 다른 아주 흥미로운 특징, 농민층 분화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을 마찬가지로 증명해준다는 걸 관찰하는 데 실패했다. 최상위에서 밑바닥까지 훑어보면, 산업, 곧 주로 노동력 판매로부터 얻는 소득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1. 부유한 농민: 6.5%
2. 중간층 농민: 18.8%
3. 가난한 농민: 23.6%
다른 한편으로, 맨 밑바닥에서 최상위 순서로 훑어보면, 농업에서 상품적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증가하고, 처분되는 농산품 비율이 늘어난다. 각 범주 별로 농업에서 거둬들이는 총 소득은
a. 3,861.7/1,774.4
b. 3,163.8/899.9
c. 689.9/175.24
분모는 소득 화폐 부문을 가리키며, 최상위 범주에서 맨 밑바닥으로 가면서, 각각 45.9%, 28.3%, 25.4%를 차지한다. 다시금 강탈 당한 농민들로부터 가져간 생산 수단이 어떻게 자본으로 변화하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크리벤코가 활용된 자료로부터 정확한 결론을 분명하게 이끌어낼 수는 없다. 철도와 같이 여행하는 그 지역 한 농민으로부터 들은 걸 기초로, 노브고로드 주 농민 농업에서 화폐적인 성격을 묘사한 뒤에야, 크리벤코에게는 저렴하게 풀을 베고, 좋은 가격에 팔고자, 특별한 능력들을 배양하고, 한 가지에 몰두하도록 만드는 환경, 곧 상품 경제라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상품 경제는 상업적인 재능을 일깨우고 세련되게 만드는 학교로 기능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소설 속 자본주의 고리대금업자 인물인, 콜파예프와 데루노프와 같이 그 외 다른 유형에서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이 되는 반면에, 우직하고, 둔한 사람들은 뒤처지고, 퇴화해서, 궁핍해진 끝에 농장 노동자 대열로 들어섰다.
전혀 다른 조건들이 지배적인 주 농업이 주 산업인 주, 보로네시 통계에서도 도달한 결론은 정확히 같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상품 경제 체제가 국가 전반에서 경제 생활에 따른 주된 배경이자, 특히 공동체 농민층에서 가장 큰 바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이 아주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품 경제만으로도 인민들과 농민층이 몰락해서 농장 노동자 대열에 들어선 프롤레타리아와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인 부르주아지로 분화됐다는, 곧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전환된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현실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감히 말하지도 못한다. 크리벤코는,
'일부 사람들은 같은 상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없는 임무라 여긴다. 문제를 다소 다르게 바라본다. 앞서 지적한대로, 자본주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역할이 모두를 아우르는데다,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그 외 다른 어떤 요인도 국민 경제에서 발생하는 변화에는 책임이 없고, 미래에 다른 어떤 해결책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현재 체계에 대한 정확하고, 직설적인 묘사 대신에, 농민층이 왜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로 갈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에, 크리벤코는 자본주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알맹이 없는 문장으로 문제를 일축시켜버렸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면 크리벤코는 다른 요인들이 결정적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적한 외에, 곧 착취자들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계급 투쟁 외에 다른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 문장을 두고 자신이 보여줬다고 여기는 걸까. 우스울지 몰라도, 인민의 벗들로부터 뭘 더 기대하겠는가.
'알다시피 맨 먼저 쇠락한 사람들은 토지가 빈약한 취약 농가들이다. 곧 5데샤티나 미만 분여지를 보유한 농가들을 말한다. 그러나 15.7데샤티나 분여지를 확보한 전형적인 국유지 농민 농장들은 안정성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그 정도 소득인 80루블 순수익을 확보하고자, 농가에서는 추가로 5데샤티나를 임차하지만, 그건 그저 농가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악명 높은 토지 빈곤을 자본주의와 결부시키는 그런 '수정주의 사고'는 과연 무엇에 해당하는가. 조금밖에 못 가진 사람들은 그마저도 잃어버리는 반면에, 각각 15.7데샤티나씩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얻게 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몰락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유해진다는 말을 아무 의미 없이 바꿔 말한 데 불과하다. 무엇도 해명해주지 못하는 토지 빈곤에 대한 의미 없는 말과 결별해야 할 가장 좋은 시점이 다가왔다. 단지 과정만을 묘사해줄 뿐이며, 더군다나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토지만을 가지고 말할 게 아니라, 생산 수단 전반에 대해 말해야만 하며, 농민들이 토지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토지로부터 분리됐고, 날로 발전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수탈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자신의 철학적인 담론을 마무리 지으며, 농업이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자연 발생성을 유지하며 제조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고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건, 인위적으로 분리된 산업을 창출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노동자를 토지와 생산 도굴부터 분리시키는 건 자본주의로부터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증진시키는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게 전부다.'
여기서 크리벤코는 다시, 노동자가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착취자 손아귀로 넘어간다면, 노동자가 가난하기 때문이며, 착취자가 토지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 심오한 사상을 높게 염두에 뒀다. 그리고 같은 부류의 철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결정적 요인으로 '편협하게' 간주해서 드러낸다고 비난을 해댄다. 농민과 수공업자 분화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한 번 더 고찰해봤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문제를 어떻게 묘사하고, 설명하는지를 분명하게 해둘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사회학자가 보기에 농민들은 가난해지는 반면에, 돈을 좇는 사람들과 착취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윤을 이끌어낸다는 걸 의미하는 사실 관계들이,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상품 생산 자체의 필요에 따른 상품 생산자들의 부르주아적인 분화를 의미한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자산 계급과 무산 계급 사이에서 투쟁이 공장에서 뿐만 아니라, 머나먼 오지 마을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논지, 모든 곳에서 같은 투쟁은 상품 경제 결과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투쟁이라는 논지 근거로 작용하는 사실 관계들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젬스트보 통계가 제공한 자료 덕분에 정확히 서술될 수 있었던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에 따른 해체와 탈농민화는 국내 현실을 바라보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인식, 다시 말해 농민과 수공업자가 그러한 단어에서 '단정적인' 의미에서 소생산자, 곧 소부르주아라는 인식에 따른 정확성에서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해준다. 같은 논지는 소생산자들이 살아가는 상품 경제 환경이나 그러한 환경 때문에 소생산자들이 자본주의적으로 분화되는 걸 이해하지 못한 옛 농민 사회주의에 맞서는 노동 계급 사회주의 이론에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지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자신의 주장을 여기에 집중시켜야 했을 뿐더러, 정치경제학 시각에서도 국내 상품 경제 체제가 아니며, 그래서 농민층 해체가 상품 경제 체제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닐 뿐 아니라, 인민 대중에 따른 강탈과 노동 인민에 다른 착취는 농민을 포함한 한 국가 사회 경제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조인 부르주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설명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게나, 신사 양반들.
사회민주주의 이론에서 실증적인 증거로 택하기를 선호한 건 농민과 수공업 경제에 대한 통계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민의 벗들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대조하는 데 그쳤더라면, 그건 유물론적인 방법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기에 덧붙여 인민주의적인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한 국가에서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현실에서 인민주의자들의 물질적인 토대를 증명해야만 한다. 한 국가에서 농민과 수공업자 경제 대한 예증과 사례들은 농민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인민의 벗들이 농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농촌 경제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해주고, 따라서 인민의 벗들을 소부르주아에 따른 이념가들로 분류하는 게 적합하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사상과 계획들이 소부르주아들의 이해 관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드러내준다. 인민의 벗들의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면, 훨씬 더 분명해지는 연관 관계는 도대체 급진적인 사상들이 왜 그토록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인민의 벗들의 정치적인 노예 근성과 기꺼이 타협할 준비가 된 태도 역시도 훌륭하게 설명해준다.
마막으로, 자본주의가 아직 채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와 같은 경제학적인 측면들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인민주의자들은 보통 자신들의 이론을 위한 자료를 끌어오곤 하는 그런 경제학에 대한 연구와 서술은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해 이곳 인민들 사이에 아주 만연한 반발 의식에 실질적으로 대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부터 더 나아가, 대규모 자본주의를 발전적으로 간주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도 같은 현 체제에 맞서 싸우는 토대로 삼곳 피어하는 건, 다름 아닌 대규모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한 국가의 급진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농민 대중의 이익을 무시한 채로 '모든 농민을 공장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바란다는' 등의 비난을 가한다. 모든 주장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실제 있는 그대로 판단하면서도, 시골 지역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놀라운만큼 비논리적이고, 이상한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는 실제 농촌과 그곳의 실제 경제 상태를 보여주기보다 더 좋은 답변을 있을 수 없다. 농촌에 따른 경제 환경을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내 농촌이 따로 떨어진 작은 지역들에서 사회적·경제적인 생활을 규정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 또는 중앙 시장에서 작은 부문들의 체계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각각의 지역에서 시장이 규제하는 사회적·경제적 구조에 대체로 특징적인 모든 현상을 찾을 수 있다. 한때 동등하고, 가부장적이었던 직접 생산자들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분화되는 걸 알아내며, 노동 인민 주위에 그물을 치고, 생명소를 빨아가는 자본, 특히 상인 자본에 따른 부상을 알게 된다. 급진주의자들이 제시한 농민 경제에 관한 묘사를 농촌에 따른 경제 생활에 대한 정확한 일차 자료와 대비해보면, 그들의 비판적 사고 체계에서는 각 지역 시장에서 떼 지어 모여 있는 장사치들과 행상, 흥정꾼들, 시장을 장악한 채 노동 인민들을 가차 없이 억압하는 소착취자 무리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대개 '더 이상 농민들은 없고, 장사치만 있다.'는 언급 정도만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 그 말은 아주 옳다.'
'더 이상 농민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인들 모두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집단, 곧 정확한 정치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영리 기업에 종사하고,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타인 노동을 점취하는 사람들과 취급하려고 시도해보기를 바란다. 해당 집단에서 경제적인 힘과 지역 전체에 따른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정확히 수치로 표기하려고 노력해보라. 그런 다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노동하기 때문에 더 이상 농민이 아니게 된 사람들을 정반대 집단으로 설정해보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지한 조사를 위한 기초적인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켜나가려 애쓰다 보면, 부르주아적인 분화라는 아주 생생한 그림을 얻게 될 테고, 더 이상 인민 제도라는 신화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테니 말이다. 소규모 시골 작취자들 무리는 끔찍한 세력을 대표한다. 특히 고립된 채 혼자 일하는 임금 노동자를 억압하고, 자신들에게 얽어매어 일말의 구제받을 희망조차 앗아가기 때문에 끔찍하다. 앞서 묘사된 체계의 특징인 낮은 노동 생산성과 의사 소통 수단에 따른 부재에서 기인한 시골에 따른 야만적인 환경으로 비춰볼 때도, 그들로부터 착취는 노동 강탈일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인간 존엄에 따른 아시아적인 침해에도 해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실제 시골을 자본주의와 비교해본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역할을 발전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을 전국적인 수준에서 단일 시장으로 한데 끌어모으고, 선의를 가진 소규모 착취자 무리를 대신해서, 한 줌 커다란 '조국의 대들보들'을 창조해내며, 노동을 사회화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한편, 지역 착취자들로부터 노동 인민에 따른 예속을 박살내고, 대규모 자본에 종속시킨다. 여기서 종속은 노동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야만성, 신체를 손상당한 여성과 아이들 등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과거 예속과 비교해볼 때 발전적이다. 그 이유는 노동 계급 의식을 각성시키고,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는 불만을 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키며, 뿔뿔이 흩어진 채 벌어지던 사소하고, 무분별한 반란을 모든 노동 인민 해방을 위한 조직화된 계급 투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같은 투쟁은 대규모 자본주의에 따른 존재라는 바로 그러한 조건 자체로부터 동력이 생겨나며, 따라서 의심할 나위 없이 일정한 성공을 확신한다.
농민 대중을 무시한다는 비난에 대한 응답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에 따른 다음과 같은 말들로부터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비판은 사슬을 장식하고 있던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렸는데, 인간의 상상 속 장식물이 벗겨진 족쇄를 그대로 차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슬을 벗어던져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향해 손을 뻗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촌을 장식한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리고, 이상화와 환상에 맞서 싸우며, 그걸 파괴하고자 작업을 수행해낸다. 농민 대중을 현재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노예화 상태에 머무리지 않도록 하고, 어디서나 노동 인민을 속박하는 사슬 정체가 무엇이며, 사슬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프롤레타리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그래서 떨쳐일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현실의 꽃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한다.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그토록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처한 위치 덕분에 스스로 계급 의식을 획득하고, 계급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노동 인민 대표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사상을 펼쳐놓는 순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을 공장의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원한다는 비난에 처한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정부와 사회, 곧 도처에서 노동 인민을 속박해온 부르주아 기관들에, 노동 인민의 해방을 향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고도 줏대 없는 인종들은 건방지게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등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
인민의 벗들의 이론적인 견해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슨 수로 자신들이 불을 끄겠다고 나서는 걸까. 인민의 벗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제안 대신에 어떤 화롤를 제시하고 있을까. 유자코프 선생은 「농업부, 러시아 부, 10호」에서,
'농민 은행 개편, 식민화 부서 설립, 인민 농업을 위한 국유지 토지 임대차 규제, 토지 임대에 따른 연구와 규제 등이 인민 농업을 회복시키고, 막 생겨나는 금권 정치에 따른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인민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
이라고 말한다.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점」이란 글에서는 '인민 농업 회복'을 위한 해당 계획들이 뒤이은 '최초로, 그러나 필수적인 조치들'로부터 보완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마을 공동체에 당장 지장을 주는 모든 규제 제거, 보호 감독에 따른 면제, 농업의 사회화에 따른 공동 경작의 채택, 땅에서 얻는 원료 공동체 가공 개발' 같은 조치들이다. 크리벤코 선생과 카리셰프 선생은 여기에다 '저금리 신용, 집단 농장 형태 농업, 보장된 시장, 고용주 이윤을 없앨 가망성', '값싼 엔진 기관을 비롯한 기술 혁신 창안', '박물관, 창고, 대리점'을 덧붙인다. 해당 강령을 검토해보면, 신사 양반들은 현대 사회 입장을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체제 입장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치고, 끼워맞춰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인민의 벗들이 내놓은 모든 발전적인 조치들, 저금리 신용, 기계 개량, 은행 등은 부르주아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현재 체계에서는 어떠한 개혁도 쓸모가 없고, 신용, 이민, 세금 개혁, 모든 토지에 따른 농민에게로 이전은 무엇 하나 눈에 띄게 바꾸지도 못하며, 오히려 반대로 과도하 보고 감독과 봉건적이 부과금 존속, 농민 토지 예속 등으로부터 지체된 자본주의 경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갈 거라던 니콜라이 온 말은 가장 귀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인민의 벗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건 지극히 옳았다. 니콜라이 온에게 인민의 벗은, 바실치코프 왕자같이 신용 확대, 발전을 소망하는 경제학자들로 부르주아 같은 자유주의적인 걸 바라면서, 자본주의 관계에 따른 발전과 강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민의 벗들은 농민층 내 생산 관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를 공개적인 장으로 끌어내려 애쓰거나, 적대로부터 예속화된 사람들 쪽에 합류해서, 투쟁에 나서는 걸 도우려 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조치들로부터 투쟁을 멈추게 하면서부터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를 꿈꾼다. 같은 모든 조치들에 다른 결과물은 당연히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신용, 개량, 은행, 비슷한 '발전적인' 조치들이 오로지 적절히 운영되고, 틀이 잡힌 농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확실한 저축을 보유한 사람들, 곧 극소수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면서, 앞서 제시된 분화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농민 은행과 유사 기관들을 아무리 개편하더라도, 그동안 빼앗겨왔고, 또 계속해서 빼앗기는 인민 대중 입장에서는 적절한 농업 수단은 물론이고, 생계를 이을 수단조차 부족하다는,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점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한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마찬가지다. 유자코프는 공동 경작을 가리켜, '농업에 따른 사회화'라고 불렀다. 매우 웃기는 말로, 사회화는 단일 마을 경제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생산이 조직되는 걸 요구하고, 생산 수단을 독점해서 현재 국내에서 사회 경제를 주도하는 착취자들에 따른 재산 몰수를 필요로 한다. 시시한 속물적인 훈계가 아닌, 거듭되는 투쟁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조치들이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반쪽짜리 조치들로 변모해서는, 인정 많고 관대한 부르주아에게 근근이 연명해가는 동안에, 피착취자들로부터 투쟁보다는 몇몇 개인들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개량 조치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신사 양반들은 러시아인 삶에서도 적대를 숨기고자, 얼마나 터무니 없는 시도를 하는지는 물론 현재 투쟁을 끝내려는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그럴 텐데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는 거나 다름 없다. 그리벤코 주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층이 공장주들의 기업을 지휘하자, 지식층은 대중 산업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지식층의 철학 전체는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만, 만약 착취자들이 없다면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징징댄다. 과연 크리벤코는 쓸데없는 문구로 무슨 뜻을 전달하려던 걸까. 해를 거듭할수록, 국내 대학과 기타 교육 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먹여 살려줄 누군가를 찾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지식인'이라는 상표를 찍어내고 있다는 말을 부인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국내에서 '지식인'을 지탱할 수단을 소유한 건, 오직 소수 부르주아뿐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인민의 벗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에, 국내 부르주아 지식계급이 사라지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 '만약' 부르주아 지식 게급이 아니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부르주아 지식 계급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국내에도 부르주아 계급도, 자본주의도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만약'과 '그리고'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데 만족한다. 더군다나 신사 양반들은 자본주의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태는 걸 거부할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잘못된 무언가를 들여다보기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일정한 결함들이 제거되면, 인민의 벗들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게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하다. 그렇다면 크리벤코의 다음 발언은 어떨까.
'자본주의 생산과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화는 공장제 수공업이 인민들로부터 오로지 결별만 하는 출구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인민들의 삶으로 들어와 농업과 원료 산업으로 더 가깝게 접근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사될 수 있고,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크리벤코는 미하일로프스키 선생과 비교해봤을 때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면 같은 수 많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제를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고, 꼼지락대기만 하다가, 부드럽고, 미려한 문장들로 지면을 채운다면, 사업가 개성으로 실용적인 인물인 크리벤코는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터무니없는 견해 일체를 거리낌도 없이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자본주의는 인민의 삶으로 들어올 수 없다.'
노동 인민이 생산 수단과 결별하지 않고서도 자본주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드는 상황이다. 적어도 인민의 벗들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주 명확해졌으니까 말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가 없는 상품 경제, 강탈도, 착취도 없이 인간적인 지주와 자유주의적인 관료들의 팔 아래서 평화롭게 무위도식하는 소부르주아 계급만이 있는 자본주의를 원한다. 국내에 혜택을 줄 의도를 지닌 부서 관료들의 진지한 태도에 힘입은 인민의 벗들은 늑대가 욕심을 감추고 양이 가죽을 감추듯이, 자신들의 속셈을 어떻게 감출지 궁리한다. 그래서 속셈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우리의 문화 용병들」 글로 눈을 돌려야 한다.크리벤코는 집단 농장과 국유 형태에 따른 산업은 현 상황에서도 그다지 품어볼 만한 상상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벤코에게는 구상은 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인상만 느껴진다. 크리벤코는 100루블이 넘지 않는 소액의 지분으로 한 합자 회사로부터 돈 강 지역을 기술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어느 기술자의 말을 꺼낸다. 크리벤코는 기술자에게 권유를 받는다.
"지분은 사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 소유가 됩니다. 회사에 고용된 마을 주민 일부는 통상적인 임금을 받고, 마을 공동체는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보장을 해줍니다."
정말로 경영의 귀재가 아닌가. 인민의 삶에 자본주의가 존경스럽도록 단순하고, 쉽게 도입되고, 파멸적인 특성들이 모두 제거되는 셈이니 말이다. 단지 요구되는 거라곤, 시골 부자들이 공동체로부터 지분을 사들이고, 기업으로부터 배당금을 받는 게 전부이며, 그 속에서 공동체 주민 일부는 일자리를 얻고, 토지와 유대 관계를 보장받는다. 그런 유대 관계는 토지로부터 생계를 유지받기에는 불충분하지만, 주민들을 지역에 묶어둔 채, 지역 자본주의 기업에 따른 노예로 만들고, 주민들을 주인도 바꾸지 못하기에는 충분하다. 여기서 주인이란, 곧 자본가를 말하며,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을 달리 부를 방도가 없기 때문에, 아주 타당한 표기이다. 독자들은 일고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는 헛소리에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한 본인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연구할 가치와 필요는 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 관계들을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한 국가에서도 아주 널리 퍼져 있는 사회 통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국내에서 봉건적인 생산 양식으로부터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 전환이 토지로부터 생계를 꾸려나가지도 못하고,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된 바로 이 순간까지도 농민은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으며, 농민으로 하여금 예전에 좋았던 시절에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었거나, 수레꾼 같은 독립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런 유형에 따른 고용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덕분에 상대적으로는 좋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노동이라 여겨졌던 외부 고용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고, 또 계속해서 초래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농민들은 오늘날과 비교해볼 때도, 일정 정도 안녕을 보장받았었다. 십만 명에 달하는 귀족 경찰들과 국내 토지를 끌어모으던 초창기 부르주아들의 보호 아래에서 평온하고도,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농노로서 안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그러한 체계의 그늘을 간단히 무시한 채로, 이상화하고, 환상을 품는다. 여기서 환상이라고 표현한 건, 그 체계가 오래전에 작동을 멈춰버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따른 대규모 재산 강탈을 불러온, 과거 고용을 족쇄에서 풀려난 일손들에 대한 착취로 변화시킨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파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과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그러한 연결 고리를 단독으로 보장해주는 농노제를 원하지는 않는다. 농노제는 그 연결 고리를 걸 수 없도록 만드는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붕괴됐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멀리 내쫓지 않은 외부 고용, 노동이 시장을 위해 이뤄지는 반면에, 경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자본을 창출하지 않으며 인민 대중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외부 고용을 바란다. 사회학에서 주관적인 방법론에나 들어맞을 법한 같은 주장에 대해,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여기저기서 좋은 것만 취하고 싶어한다. 물론 실제로는 유치한 바람은 오직 현실을 무시하는 반동적인 환상, 새로운 체계로부터 정말로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절반은 농노, 절반은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과거 훌륭한 체계, 곧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공포로 가득차고 벗어날 수 없는 체계를 영속화하려는 조치들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뿐이다. 반동들 사이에서 인민의 벗들을 구분해주는 같은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증명하고자, 두 가지를 인용해보자.
모스크바 젬스트보 통계에서 포돌스크 군에 사는 K 여사라는 사람의 농장에 대한 묘사를 읽을 수 있다. 묘사 자체가 아니라 농장이 모스크바 통계학자들과, V.V. 보론초프 선생 모두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V. 오를로프 선생은 유명한 K 여사 농장에 대해 '농업이 건강한 상태에 있고, 개인 토지 소유주들에 따른 농장들도 더 잘 운영되고 있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논지에서 확실한 실제 확인 사례로 여겨졌다. 여인의 농장에 대한 오를로프 주장에 비춰볼 때, 그녀는 겨울에 밀가루를 꿔주는 대가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지역 농민들의 노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인은 농민들에게 특히나 친절하게 굴며, 도움을 줬고, 그래서 농민들은 읍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할 뿐 아니라, 거의 새로운 추수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의문은 바로 해당 대목에서 고개를 든다. N. 카블루코프와 오를로프가 생각하듯이, 그런 방식이 농민과 지주 간 적대적인 이해 관계를 할 수 없도록 만들까.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K 여사는 농민들의 노동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는 전혀 사라지지도 않았다. K 여사는 착취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친절함 뒤에 감춰진 착취를 보지 못한 데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오를로프는 그렇지 않았다. 오를로프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보이는 친절함에 황홀해 하면서 공장 소유주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잡화점과 주거 등을 제공해주는 사례들을 열광적으로 들려주는 서구 박애주의자들과 정확히 같은 입장을 취한다. 적대적인 이해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사실들의 존재로부터, 결론을 끌어온다는 건,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바로 첫 핵심이다.
둘째 핵심은 오를로프 선생의 설명으로부터 K 여사의 농민들이 뛰어난 수확량 덕분에 가축을 확보했고, 유복한 농장을 소유하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유복한 농민들은 '거의'가 아니라, '완전히' 번창하게 됐고, '다수'가 아닌 '유복한 농민들' 모두가 새로운 추수가 거의 되돌아올 때까지가 아니라, 정확히 그 시기까지 충분한 곡식을 보유하게 됐다고 추정해보자. 농민들은 충분한 토지와 '목장 및 목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도 추정해보자.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농민들은 K 여사에게 토지를 임차한 뒤, 노동으로 그 대가를 지급한다. 그럴 경우에, 곧 농민 농업이 정말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경우, 오를로프는 정말로 농민들이 스스로 동의해서, 지금 하고 있듯이 K 여사의 사유지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철저히,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수행할 거라고 믿는 걸까. 또는 어쩌면 어머니 같은 보살핌으로, 농민들에게서 피땀을 뽑아내는 친절한 여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결국 목초지와 목장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절망적인 현재 상태보다 더 강력한 도기 부여가 된다고 믿는 걸까.
분명 인민의 벗들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진정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로 착취를 없애기보다는 완화시키기를 바라고, 결속보다는 회유를 원한다. 편협한 사회민주주의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된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에는 지주와 자본가들이 공정하게 대해주기만 한다면, '번영을 구가하는' 농민들이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거라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 더 들어보자. 유자코프는「러시아 인민의 토지 소유 할당량」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글에서, 인민들의 토지 소유, 곧 자유주의자들의 용어로는, 자본주의와 착취를 배제하는 토지 소유에 따른 규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었다. 크리벤코에 따른 탁월한 설명이 있는 뒤, 역시나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지주의 신분으로, 크리벤코는 분여지로부터 '식량과 지불금'을 충당하는 반면에, 나머지 일자리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크리벤코는 농민이 토지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부터, 한쪽으로는 분여지에서 지주로부터, 다른 쪽으로는 일자리에서 자본가로부터 중복된 착취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단지 운명이라고 체념해버리고 만다. 중복된 착취에 시달리는 소생산자들에 따른 같은 상태와 생활 조건은 더군다나 필연적으로 주눅 들고 짓밟힌 심리를 생기도록 만들어, 피억압 계급에 따른 승리는 고사하고, 투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절반만 중세적인 상황은 인민의 벗들의 전망과 이상의 극치이다. 그래서 국내 개혁 이후로,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옛날 국내를 떠받치던 기두으로, 가부장적인 절반 농노 상태에 따른 농민층을 뿌리째 뽑아, 절반 농노 상태에 농민층들을 중세와 절반은 봉건적인 상황에서 끌어내고, 현대 순수한 자본주의적인 환경에 가져다놓고는 농민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오랜 고향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국내 곳곳을 헤매다 노예 사슬을 끊고, 지역 일자리 제공자에게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들면서, 전체적인 계급 착취에 따른 토대가 독사 같이 특정 인물의 약탈과는 거리가 먼 계급 착취라는 점을 드러내고, 자본주의가 가축 수준으로 주눅들고, 굴복한 나머지 농민 인구를 한꺼번에 점점 더 복잡한 사회적·정치적인 삶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자, 소부르주아 기사님들은 옛 기둥들의 몰락과 파괴에 대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지금은 눈이 멀어, 새로운 삶에 대한 양식에서 혁명적인 측면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전 착취 체제에 전혀 묶여 있지도 않으면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위치에 있는 새로운 사회 세력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창출해내는지를 전혀 보지 못함에도, 예전의 좋았던 시절에 대해 울부짖는 모습을 여전히 계속해서 보여주고 만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현 체제에서도 어떠한 급진적인 변화도 바라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인민의 벗들은 현존하는 토대에서부터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에 전적으로 만족했으며, 실제로 크리벤코는 그런 조치들을 고안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토착 하급 관리 같은 행정 능력들을 과시했다. 크리벤코는,
'대체로 인민 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와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문제는 특별한 조사와 산업을 인민의 삶에 적용할 수 있거나, 적용 과정에서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칠 수 있다는 걸, 나누는 게 요구된다.'
크리벤코는 많은 산업들을 자본주의화되지 않거나, 이미 자본주의화가 발생하고, 대규모 산업과 생존을 놓고 경쟁할 수 있도록 나누면서, 그런 분할에 따른 사례를 직접 제시한다. 또한 이 행정가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경우에 소생산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변동으로 인해, 소생산자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지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역 시장에 따른 팽창과 보다 더 큰 시장으로 합병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술 발전으로부터도 그럴 수 있을까. 또는 기술 발전에 따라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일 필요는 없는 걸까. 마지막으로, 크리벤코는 대규모 생산 조직도 요구한다. 명백히 여기서 필요한 건, 대규모 생산 조직이고, 고정 자본과 유동 자본, 기계 등이나 또는 같은 조건과 균형을 맞출 다른 무언가, 곧 값싼 신용, 불필요한 중간 상인들의 제거, 집단 농장 형태에 따른 농업과 고용주들의 이윤을 처분할 여지, 시장 확보, 값싼 엔진 기관 개발, 그 외 기술적인 개선, 또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에 따른 일부 삭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종류의 논리는 말로는 드넓은 이상을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틀에 박힌 자유주의를 드러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주 특징적이다. 앞서 철학자는 고용주들에 따른 이윤을 처분할 여지와 대규모 농업에 따른 조직화를 다름 아닌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주 훌륭하다.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바라기도 하니까.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어떻게 달성하기를 원하는가. 고용주 없이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고자, 우선 사회적인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를 철폐하고, 공동체, 공산주의 구조로 대체하는 게 필요하다. 그 아래에서는 현재와 같이 생산이 시장으로부터 규율되는 게 아니라, 생산자 자신, 노동자 조직 자체로부터 규율되고, 생산 수단은 사적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부터 소유된다. 사적 전유로부터, 공동체적인 전유로 변화는 명백히 우선 생산 형태에 따른 변화를 필요로 하고, 소생산자들과 분리되어 있고, 규모가 작으며, 고립된 생산 과정이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합쳐지는 게 필요로 해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바로 그 물질적인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스스로 자본주의를 토대로 삼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인민의 벗들은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가. 인민의 벗들은 침묵한다. 인민의 벗들은 상품 경제에 따른 철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분명히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은 사회적 생산 체계에 따른 경계를 절대 넘어설 수도 없다. 더구나 고용주에 따른 이윤을 철페하고자,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윤을 획득하는 고용주들에게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을 떠받치는 기둥들을 빼앗아 오고자, 부르주아 체제에 맞선 대중적인 혁명 운동이 필요하다. 해당 체제와는 전혀 유대 관계가 없는 프롤레타리아 노동 계급만이 할 수 있는 운동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머릿 속에 투쟁을 전혀 그리고 있지도 않고, 고용주들 스스로 관리 기관들 말고도 다른 유형에서 공적인 인물들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점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분명 인민의 벗들은 고용주 이윤에 맞선 어떠한 진지한 조치들을 취할 의향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 크리벤코는 단지 자신의 혀가 자신을 압도하는 걸 허락했을 뿐이다. 그리고서 크리벤코는 곧장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고용주 이윤을 처분할 여지' 같은 다른 무언가, 곧 신용과 조직된 홍보, 기술적인 개선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모든 건 아주 만족스럽게 정리된다. 이윤을 얻을 신성한 권리를 철폐하는 대신에, 다시 말해 고용주 양반들을 아주 화나게 할 절차 대신에, 자본주의에 싸움을 위한 더 나은 무기를 제공하고, 인민의 소부르주아들을 강화하고, 굳건히 하며, 발전시킬 뿐인 아주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소부르주아만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의심을 전혀 남기지 않고자, 크리벤코는 인상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고용주 이윤 철폐는 임금의 삭감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
얼핏 듣기에는 완전히 횡설수설처럼 드린다. 그러나 아니다. 소부르주아 사상을 일관되게 적용한 표현이다. 크리벤코는 거대 자본과 소자본 사이에서 투쟁 같은 사실을 관찰하며, 진정한 인민의 벗으로 당연히 소자본가 쪽에 선다.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소자본가에 따른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임금 삭감이라는 점을 들은 바 있었다. 노동일 연장과 함께, 국내 수 많은 산업들에서 아주 정확하게 보여지고, 확인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소자본가들을 구하기를 바랐던 크리벤코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 일부 삭감을 제안한다. 고용주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윤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말이 들려온다. 고용주 양반들은 고용주들에 맞서 임금 삭감 투쟁을 계획하는 훌륭한 행정가를 기꺼이 재무 장관 자리에 앉히려 든다. 순수한 혈통에 따른 부르주아들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뤄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러시아 부」의 자비롭고, 자유주의적인 행정가들을 슬쩍 쳐다보는 사례 말고도, 더 있다. 「러시아 부, 12호」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독점 문제를 다룬 글이다. 글에서 크리벤코는 독점과 '신디케이트' 같은 발전된 산업 이상'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해당 제도들이 자본가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국내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 놀랍다고 표현했다.
'설탕이나, 석유 산업은 아직까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설탕과 등유 소비는 여전히 사실상 태동기에 머무르고 있고,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해당 상품들에 따른 일인 당 소비는 미미하다고 판단된다. 해당 산업 분야들은 발전할 여지가 여전히 아주 크고, 상당한 액수에서 자본을 흡수한다고 보인다.'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순간,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 위축에 대해「러시아 부」가 가장 선호하는 발상이 뭐였는지를 잊어버렸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이 여전히 상당한 발전 전망을 갖고 있고, 위축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크리벤코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소비 규모가 더 큰 서구와 비교했다. 이유는 뭘까. 서구 문화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서로 간 더욱 빈번한 교류로도 이끌고, 개별적인 지역들이 중세식으로 고립되어 있던 상황을 무너뜨린 자본주의 기술 발전, 상품 경제와 교환 발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해당 문화에 따른 물질적인 토대는 무엇일까. 절반인 중세적인 농민층에서는 아직 여전히 농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쪼개져 있지 않았던 대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문화는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크리벤코는 국내 생활상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했더라면, 크리벤코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지역에서 농민 인구가 필요로 하는 수준들이 순수한 농업 지역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의 삶 전체에서 산업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까지 발전한 국내 수공업을 연구했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거론하는 부분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하찮은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인민의 벗들에게 있어 해명이란 단지 문화나 전반적인 삶이 점점 복잡해진다든지 하는 일뿐이며, 해당 문화와 복잡한 물질적 토대에 대해서는 연구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이 적어도 농촌 경제 상태를 검토라도 해봤더라면,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게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농민층 분화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민의 벗들에게는 시장 발달이 결코 부르주아 계급 발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틀림없이 생각했다. 앞서「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글에서도, 계속해서 전반적으로 생산 발전 수준이 낮고, 진취성과 자발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독점은 국강 경쟁력 발전을 훨씬 더 지연시킨다고 주장했다. 이에 담배 독점을 거론하면서, 인민 유통 가운데 1억 5,400만 루블을 앗아간다고 추산했다. 경제 체제에 따른 토대가 상품 경제이고, 선도하는 세력은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듯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점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크리벤코는 글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이 독점 방해를 받고 있다는 말하는 대신에, '국가'를 거론하고, 상품과 부르주아 유통을 말하는 대신에, '인민' 유통을 들먹인다. 부르주아라면, 두 용어 사이에서 큰 차이를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그 차이란 정말로 얼마나 극명한지를 보여주고자, 인민의 벗들의 시각에서 권위 있는 잡지인,「조국 연보」에 실린,「금권 정치와 그 토대」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마를로에 따르면, 금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유주의적인 정부 형태에 대한 사랑, 아니면 취득의 자유라는 원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특징을 받아들여서, 8년 또는 10년 전 입장이 어땠는지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 측면에 있어서 엄청난 발걸음을 내디뎌왔다는 점을 발견한다. 어떤 신문이나, 잡지를 봐도, 그들 모두 일정 정도 민주주의 원칙을 대표한다고 느껴지고, 인민의 이익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적인 견해들과 나란히, 심지어 '의존해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간에, 누누이 금권 정치적인 야망들이 추구된다.'
여기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상인들이 재무 장관에게 했던 인사말을 인용하면서, 상인들은 금융에 관한 국내 입장을 사기업에 따른 아주 폭넓은 확대 여지에다 바탕을 두면서부터 좋은 결실을
맺게 된 데 대해 국내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장 신망 있는 조직이 보내는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금권주의 요소들과 성향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의 감동들이 여전히 생생하고, 머나먼 과거에서 여러분 선조들은 자신의 금권 정치, 곧 국내 사기업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진취성과 자발성'의 발달헤 힘입은 인민 유통과 국가 경쟁력 발전을 말하면서도, 왜 그러한 발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 진취성과 자발성에 따른 착취적인 성격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물론 독점이나 그와 비슷한 제도들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동 인민에 대한 상태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 인민은 모든 중세적인 속박 위에서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현대 부르주아적인 속박으로부터 족쇄가 채워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에 따른 폐지가 전체 인민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경제가 국가의 경제적인 삶의 토대가 된 상황에서 중세적인 제도에 따른 생존은 자본주의에 따른 비참한 현실에다 훨씬 더 가혹한 중세적인 고통을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히 폐지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더 빠르고, 더 급진적일수록 좋다는 건 분명하다. 부르주아 사회가 물려받은 절반은 봉건적인 속박들을 제거하면서부터 노동 계급의 손발을 풀어주고, 부르주아 계급에게 대항하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말이다. 사실을 숨김 없이 말하려면, 바로 이런 말을 꺼냈어야만 했다. 부르주아 체제에 맞서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독점과 그 밖에 모든 종류로 중세적인 제약들을 폐지하는 건, 절대적으로 필수적라고 말이다. 딱 거기까지다. 부르주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중세와 봉건 제도에 맞서 전체 인민들에 따른 이해 관계가 서로 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품을 수 없었고, 인민들 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깊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망각할 수 없었다.
인민의 벗들이 곤혹스러워 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민의 벗들은 농촌 요구에 대해 말을 끄집어냈는데, 특히 크리벤코는,
'몇 년 전 몇몇 신문들이 시골에서 필요로 하는 직업들과 지식인들 유형을 논하는 과정에서 목록이 아주 길고 다양하며, 남녀 의사들과, 보조 의사들, 변호사, 교사, 도서관 사서, 서점 주인, 농경 경제학자,
삼림 전문가, 농업 전문가, 아주 다양한 분야 기술자들, 신용 기관 모집인과 관리자, 창고지기 등 거의 모든 직업군을 포괄한다는 게 증명됐다.'
여기서 말을 멈추고, 활동이 경제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지식인들과 삼림 및 농업 전문가, 기술자 등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농촌에서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농촌이란 과연 어떤 농촌을 말하는가. 저축한 돈이 있어서, 크리벤코는 기꺼이 지식인들이라 부르는 전문가들 모두에게 각자 기여한 대가를 지부할 수 있는 지주들과 기업형 농민들에게 농촌을 말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농촌이란 실제로는 오랫동안 전문가들과 신용, 창고에 목말랐고, 한 국가에서 모든 경제 문헌에서도 그걸 증언해준다. 그러나 훨씬 더 방대한 또 다른 농촌이 존재하고, 그런 사실을 좀 더 자주 떠올려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농촌이란, 몰락하고, 갈취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농민들의 농촌이다. 저축한 돈이라고는 전혀 없어 지식인들의 노동에 대가를 지불할 수 없을 뿐더러, 굶어죽지 않을 만큼 빵조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이 창고를 지어서, 돕고자 하는 농촌은 바로 그런 곳이다. 말도 없고, 있어도 고작 한 마리뿐인 농민들이 거기에다 뭘 보관한다는 말인가. 과거 1891년에, 당신들에게는 빈농들이 인간미 넘치고, 자유주의적인 처방을 완수할 무렵, 집이나 여관, 가게에다 일상적인 창고를 설치했던 시골과 도시 부농들에게 말을 몽땅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이제 빈농들에게 남은 건 자신의 노동력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상품을 보관할 창고는 아직까지 국내 관료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진부한지에 대해서는, 농민층 내 기술적인 발전에 대한 감상적인 사고와 바로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착취에 눈을 감는 행위보다 더 두드러진 증거를 찾아보기란 어렵다.「러시아 부, 2호」에서 백치 자유주의자 열정을 지닌 카리셰프는 '아메리카' 귀리, 호밀, 말먹이 귀리 등 개량종 씨앗이 농장에서 확산된, 농민 농업에서 완벽하고, 개선을 이룬 사례들로 말한다. 이어서 일부 지역에서 농민들은 종자를 키울 특수한 땅을 별도로 떼어놓고, 조심스럽게 간 뒤, 거기에다 미리 선별한 곡물 표본들을 손으로 심는다. 그리고 경운기, 가벼운 쟁기, 탈곡기, 키질 기계, 종자 분류기 같은 개량 농기구와 기계 영역에서 많고 다양한 혁신들이 관찰된다. 카리셰프는 인산 비료, 아교 반죽, 비둘기 배설물 같은 '아주 다양한 종류의 비료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카리셰프는 지방 주재원들이 인산 비료 판매를 위해 마을에 젬스트보 상점들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V.V. 보론초프의「농민 농업에서 발전적 경향」에서 자료를 인용한, 카리셰프 글은 모든 감동적인 발전에 감화받은 나머지, 거의 열정 수준으로 치닫고 말았다.
'간략하게만 제시할 수 있었던 이런 보고서들은 용기를 주는 동시에 애처롭다고 느껴진다. 용기를 준다는 건, 사람들이 비록 가난하고, 빚에 시달리며, 상당 수는 말 한 마리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고, 절망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의 직업을 바꾸지 않은 채 여전히 땅에 대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적절히 일구는 일에 자신들의 미래와 힘과 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경작과 씨 뿌리기, 농기구, 비료 등에 있어 새로운 방식들을 연구하며, 자신들을 먹여 살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조만간 백 배 보상을 안겨줄, 모든 방안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리고 애처롭다는 건, 각성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학, 박물관, 창고, 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우리들이 농업을 개선하고자, 분투하는 농민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 농민이 마음대로 할용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물론 아주 초보적인 형태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발달은 몹시 느리다. 농민은 모범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가 실험용으로 조성한 밭과 모범 농장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농민은 활자로 된 지식을 갈구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우리 농경 문헌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농민은 비료와 농기구, 종자를 얻으려고 애쓰지만, 도매로 구입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야 할 우리 젬스트보 상점들은 어디에 있는가. 실무진들과 개인, 젬스트보,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서서 일을 하라, 오랫동안 무르익어왔던 그 시기가 다가왔다.'
인민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가,
당신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질지니.
이렇듯, 인민의 소부르주아 계급 벗들은 소부르주아 식 진보 잔치를 즐기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농촌 경제에 대한 분석과 완전히 동떨어진, 오늘날 경제학 역사에서 이토록 놀라운 사실,
곧 농민층의 엄청난 강탈과 농민 농업에서 전반적인 진보가 나란히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을 목격하는 동시에, 농민층을 조화롭고, 동질적인 하나의 전체로 묘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든 발전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납득하게 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여전히 모든 귀를 닫고 있다. 옛 국내에서도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에 따른 훌륭한 장점들을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인민주의의 커다란 실수 가운데 하나로, 곧 농민층 내 계급 적대를 이해하지 못한 실수를 절대 바로잡지 않고 있다. 호르비치는 1870년대, 인민주의자인 농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내 자연스레 존재하는 계급 적대를 몰랐기에, 착취자, 쿨라크 또는 기생자와 그 희생자인 공산주의 정신에 물든 농민 적대로만 국한해서 파악했다고 적절하게 말했다. 글레브 우스펜스키만이 회의주의적인 입장에서 역설적인 미소로, 보편적인 환상을 거부했다. 농민층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현상 본질 그 자체를 꿰뚫는 비범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우스펜스키는「판박이」라는 글에서, 개인주의가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 사이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농민들 사이에서도 경제적인 관계에서 기초가 됐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농촌 경제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자료가 아주 부족했고, 농민층 분화가 아직 그렇게까지 뚜렷하지 않았던,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그러한 환상에 굴복한 건 용서할 수 있고,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분화를 모른 체하려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야만 한다. 농민층 몰락이 정점에 달했고, 사방에서는 농민 농업에서 발전적인 경향에 대한 수 많은 말이 들려오는 최근에도 특히 더 그렇다. V.V. 보론초프도 전적으로 그 주제만을 다루는 책 한 권을 썼었는데, 사실 관계에 따른 부정확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비난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적인 측면, 농경법적인 측면에서, 농민층 발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농민이 스스로 먹여 살려줄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새로운 경작법을 간절하게, 찾아 헤맸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전의 이면으로, 곧 바로 그 농민이 땅으로부터 심하게 분리됐다는 점은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토지가 자본으로 전환되고, 국내 시장이 창출되는 과정 같은 눈 앞의 사실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다 머리를 묻는다.
한 국가 공동체 농민들 사이에서 실재하는 양 갈래에서 정반대 과정들을 부정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 말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보려고 애쓰더라도, 분명 쉽지는 않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인도주의적이고, 자비로운 문구들을 연호하는 건, 그들의 과학이자, 그들의 정치 활동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게다가 현질서에서 가장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땜질식 처방을 정규 철학으로까지 끌어올린다. 크리벤코는 심오한 어조를 띤 채로 이렇게 말한다.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활동을 한다는 건, 크게 일을 벌여놓고, 행동하지 않기보다는 훨씬 낫다.'
얼마나 참신하고, 영리한가.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사소한 활동이라는 게, 결코 목적이 사소하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사소한 활동이, 적절하고, 훌륭한 결과로 이어진 활동의 확장에 따른 사례로, 어느 부인이 학교를 세운 일, 농민들 사이에서 협잡꾼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피고에 자문을 해주고자 지방 순회 법원에 동행하기로 한 변호사 일화에서도, 앞서 젬스트보 노력과 결합되어 가장 번화한 중심징에서, 수공업자들의 창고를 설립한 경우들을 든다. 물론 모두 아주 숭고하고, 인간적이며, 자유주의적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적이란, 부르주아 경제 체제를 모든 중세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고, 따라서 노동자가 그런 조치들로부터 손상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 체제 자체와 맞서 싸우기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내 자유주의 출판물들로부터, 모든 주장들을 접해왔다. 「러시아 부」신사 양반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았더라면, 반대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선 자유주의의 온건한 출발을 알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선조들의 이상을 비난했따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나무랐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그런 온건하고, 세심한 자유주의적이고, 곧 부르주아에게 봉사하는 활동을 먼저 제안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에 기꺼이 호응했다. 선조들과 그들의 이상에 관한 말이 나왔으니, 자유주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은 그릇되며, 유토피아적인 낙원이었지만, 어쨌든 옛 국내 인민주의자들은 그러한 자유주의에서 온건한 출발을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하도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인지라, 인민의 벗들은 그런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인민의 벗들은 정치 제도에 대한 유물론적인 비판은 사라지고, 현대 국가에 있어 계급적인 성격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 유일하게 남은 수순은 정치적인 급진주의에서 기회주의로 옮겨갈 뿐이라는 점을 자신들의 전술로부터 분명히 입증했다. 여기에 그런 기회주의 몇 가지가 있다.
유자코프는 「러시아 부, 10호」에서, 국유재산부를 농업부로 전환하는 조치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관리들의 자리를 바꾸는 데 불과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결국 모든 건 요청 받는 존재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인민의 벗들이냐, 아니면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이냐가 문제지, 이해 관계 그 자체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같은 글에서,유자코프는 게속해서 경제적 강자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건, 국가 개입에서 첫 본연의 임무라고 말한다. 「러시아 부, 12호」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 또한 같은 표현을 사용해서, 유자코프 주장을 지원했다. 유자코프는 박애주의적인 헛소리에 대한 설명이 유자코프의 훌륭한 동료들인 서구 유럽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똑같다는 점에서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고자, 덧붙인다.
'영국 글랜드스톤 토지 법안들, 독일 비스마르크 노동자 보험과 공장 감독, 러시아 농민 은행 발상과 이주 조직화와 쿨라크 이익에 반하는 조치들, 모두는 동일하게 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고자, 국가 개입이라는 원칙을 적용한 시도들이다.'
그래도 솔직한 말이라는 미덕은 지녔다. 「국내 문제 연대기」의 필자는 글래드스톤과 비스마르크와 같이 자신도 현재 사회적 관계를 고수하기를 원하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부르주아 사회를 수습하고, 봉합하기를 바랄 뿐, 맞서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근본적인 이론적인 신념은 현재 사회에 기초해서, 지배 계급 이익을 보호해주는 기구, 곧 국가를 개혁 도구로 여긴다는 점과 완변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 우선하는 전지전능한 국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국가가 노동 계급을 지원해줄 뿐만 아니라, 크리벤코도 말했듯이, 현실적이고,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낼 거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골수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에게 기대할 건 무엇도 없다. 생산 조건 자체로부터 해체되고, 고립됐으며, 한정된 공간과 착취자에게 묶여 잇는 소생산자들은 간혹 프롤레타리아만큼이나 고통을 겪는 자신들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계급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소부르주아 계급의 근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동적인 계급으로 만드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국가 역시도 계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위대한 인민의 벗들이여, 그렇다면 왜 정부가 지금까지도 해방적인 개혁 이래로 특히 정력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만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또 창출했겠는가. 한 국가 안 살림살이가, 상품 경제와 상업, 공업 발전으로 특징짓는 역사적인 시기에, 절대적이고 이른바 초계급적인 정부가 그런 볼성사나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국가 안 살림살이에서 그러한 변화들이 워낙 사회 깊숙하게 정착되어, 정부는 그걸 인식조차 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무수한 장애물을 가져다 놓았다는 점, 바로 절대적인 정부가 내부적인 삶의 다른 조건에서는 또 다른 계급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창출해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정부 정책이 불러온 효과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민의 벗들은 그런 질문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다. 보다시피 모든 건, 유물론, 변증법, 헤겔주의, 신비주의, 형이상학이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게 친절해지라고, 겸손해지라고 간청만하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바로잡힐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겸손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러시아 부」를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실로 이 매체는 독립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국내 자유주의 언론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고 하겠다. 여러분이 직접 판단해보시라.
유자코프는 염세와 인두세 폐지, 토지 상환금에 따른 감축은 인민 농업에 상당한 위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염시를 폐지하는 대신에, 수 많은 간접세들을 새롭게 부과하고, 기존 세금들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인두세 폐지와 함께 예전 국유지 농민들을 회복시켜준다는 명분으로, 지급하는 대금을 인상시킨 건 어쩔텐가. 익히 알려진 상환금, 정부는 환수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지도 않았고, 감축이 이뤄진 뒤에 지불 대금과 토지로부터 얻는 수입 사이에서 불균형, 곧 봉건적인 면역 지대가 직접적으로 부활한 건 지금도 유효하지 않는가.
"그래도 괜찮아. 중요한 건, 첫걸음과 원칙이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간청하기만 하면 될 거야."
하지만 꽃에 불과할 뿐, 이제 과실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1880년대는 인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인민들이 철저히 몰락하지 않도록 구해줬다.'
부끄러울 줄 모르는 노예 근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고전적인 문구로, 앞서 여전히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주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국내 자유주의에 따른 진화에 대한 시체드린의 예리한 묘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다. 자유주의자인 시체드린은 정부 당국에게 가급적 개혁을 해달라고, 간청하도록 시작해서, 다음에는 적어도 뭐라도 달라고 구걸만 하다가,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아무거나 달라고 애원하는 지겹도록,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면서 마무리한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지겹도록,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점 말고는 달리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기근이 수백만 명 인민들을 막 덮쳤던 시기로, 정부 태도가 장사꾼 인색으로 시작해서, 소심하게 옮겨간 걸 알고도, 인민의 벗들은 정부가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줬다는 주장을 버젓이 활자로 옮겨 담을 수 있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농민층에 대한 강탈이 훨씬 더 가속화되고, 정부는 농업부를 창설한 데 이어, 한 두 가지 직접세를 폐지하는 대신에, 간접세 대 여섯 가지를 새롭게 부과하며, 그러면 기근은 4천 만 인민에게 영향을 끼칠 테고, 신사 양반들은 똑같이 낡은 방식으로 글을 써댄다. 굶주린 인구가 5천 만 명이 아니라, 4천 만 명에 불과한데, 정부가 인민 부담을 덜어주고,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덕분이라고, 정부가 인민의 벗들의 말을 경청하고, 농업부를 창설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 부, 2호」에서 러시아가 '다행히도' 후진국이며, 자신의 경제 제도를 연대 원칙에 기초할 수 있게끔 해준 요소들을 유지해왔다고 주장한,「국내 문제 연대기」필자는, 따라서 국내에서 국제 문제 있어서 경제적인 결속 주창자로 행동할 수 있고, 국내에서도 주어진 이런 기회는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인 힘으로부터 강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반동적인 행위에 대한 변치 않는 가장 확실한 방어벽이 바로 유럽 경찰관인 러시아였다. 국내 정부는 억압받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구 인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종사하는 치욕스러운 입장에 서도록 했다. 경제적 결속에 따른 주창자로 묘사된 경찰관의 본모습이다. 따라서 앞 주장은 실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민의 벗인 선생들은 어떤 자유주의자도 능가한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 간청하고, 정부를 칭송하고, 엄청난 존경과 열정을 다해 기도를 바친다. 머리를 조아리며, 판석 위에 이마를 찧는 소리는 지나가던 사람조차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여러분은 속물에 대한 독일식 정의를 기억하는가.
속물이란 무엇인가.
텅 빈 속을,
두려움과 신의 자비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채운 자여.
- 괴테
같은 식의 정의는 실정과는 맞지도 않다. 신은 부차적인 존재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다른 문제다. 위 정의에서 신이란 단어를, 정부 당국으로 대체한다면, 인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내 인민의 벗들의 이념적인 상투성과 도덕 수준, 시민으로 용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셈이 된다.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인민의 벗들은 이른바 지식층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크리벤코는 이렇게 적는다.
'문학은 현상들을 사회적인 의미에 따라 평가하고, 모든 능동적인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장려해야만 한다. 문학은 교사와 의사, 전문가가 부족하고, 인민들은 가난과 병마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발언해왔고, 발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탁자에 앉아 카드 놀이를 하거나, 연극 공연을 보러 다니거나, 귀족 대표가 주최한 모임에서 철갑 상어를 뜯는 게 지겨워진 사람들이 보기 드문 자기 희생 정신을 갖추고, 수 많은 장벽을 뚫으며, 앞으로 선뜻 나설 때, 문학은 그들을 환영해야만 한다.'
그리고 두 장을 넘어가서, 경험으로 지혜를 얻게 된 왕년 운동가는 짐짓 사무적인 어조를 띠며, 지방 감독관, 시장, 젬스트보 의장과 의원 같은 직위를 새로운 규정에 따라 받아들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시민들의 요구와 의무에 관한 의식이 발전된 사회에서 그런 망설이는 태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어떠한 필수적인 측면을 가진 개혁이라면, 완전히 소화해서, 그에 맞는 개혁의 측면들을 활용하고, 발전시키고,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들이 있다면, 사문화시키며, 개혁에 필수적인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기구는 완전히 소외된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도대체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한심하고, 하찮은 기회주의이자, 자화자찬에 빠진 소리란 말인가.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용 촌평거리들을 죄다 수집하고,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데 대해 정부에게 굽실거리며, 카드 놀이에 지겨워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지방 감독관 같은 자리를 꺼리지 말라고, 대중을 가르치는 게 문학의 임무라는 거다. 지금 「주간지」, 「새로운 시대」를 읽고 있는 건가. 이건 선진적인 국내 민주주의자들의 기관지「러시아 부」인데,
그러고도 신사 양반들은 선조들의 이상을 말하고,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쏟아붓자, 국내에서 사상을 흡수해 헤르첸과 체르니셰프스키 이론과 가르침을 생산해낼 당시 전통을 오직 자신들만이 수호하듯이 주장한다. 철저한 망신이며, 명백한 언어도단이자, 모욕이다. 비록「러시아 부」가별로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같은 유형의 잡지 시평에서 그런 식의 발언들이 큰 웃음이나 그 밖의 어떤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 실로 당신들은 그 이상들을 더럽히고 있다. 최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실제로 어떤 건지를 카우츠키가 했던 발언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묘사된다.
'그 시대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국내 공동체적인 생활 체계라는 특수한 사회 질서에 대한 믿음, 그로 인해 이어진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정부에 맞서는 영웅적인 투쟁 대열에 서도록 만들었다. 당신들은 그 시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엄청난 역사적인 헌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그들의 기억을 충심으로 존경하지 않았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묻는다. 그때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V.V. 보론초프는 작년 마을 공동체가 인민들에게 공동 노력을 연마시키고, 이타적인 감정의 중심이 된다는 등의 주장을 펼 당시에, 심지어 미하일로프스키는 양심에 찔리 나머지, 겸연쩍게 V.V. 보론초프를 훈계하며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어떤 연구도 마을 공동체와 이타주의 사이에서 관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신념을, 무조건적인 신념을 지녔던 시대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왜. 무슨 근거로.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농촌이 분화되면서부터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인민을 자기네 발치 아래 두는 한 줌 쿨라크로 형성됐다는 데 모든 양심적이 연구자들이 동의한다고 덧붙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번에도 옳았다. 농촌은 실제로도 분화되고 있었다. 농촌이 완전히 쪼개 진 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그리고 옛날 국내 농민 사회주의자도 그와 함께 쪼개지면서, 한편으로는 노동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물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같은 변화는 타락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농민 삶은 특수한 사회 질서이며, 우리나라는 예외적인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는 이론으로부터 희석된 절충주의도 등장했다. 절충주의는 상품 경제가 경제 발전 토대가 되고, 자본주의로 발전했다는 점은 더 이상 부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모든 생산 관계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있고, 그 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계급 투쟁이 일어난다는 점은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더불어 근대 사회 토대에 맞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농민들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정치 강령으로부터 근대 사회 토대를 보존하면서 농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수습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강령도 등장했다.
엄밀하게, 모두 이미 「러시아 부」의 신사 양반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착수하는 순간 예상됐던 종류로 비판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은 국내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구상을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설명하거나, 그 본질에 반대되는 주장을 편다든지, 거기에서 끌어온 실질적인 결론들에 대한 정확도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신사 양반들은 추상적인 도식과 그 도식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국가가 그와 같은 국면을 거쳐야 한다는 확신을 담은 가장 공허한 문구들과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충분하게 접한 바 있는 허튼소리에 스스로를 가두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종종 철저하게 왜곡된 말을 듣게 된다. 크리벤코에게 마르크스는,
'만약 우리가 소망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자본주의 부침을 피해 더 편리한 다른 경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기사님께서 그런 허튼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떤 건, 의도적인 왜곡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마르크스 편지, 법률 통신, 1888, 10호」에서 러시아가 자보눚의 체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체르니셰프스키는 칼 마르크스를 높이 평가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크리벤코는 마르크스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런 견해들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 존경할 만한 비평가는 적어도 내가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내가 문제에 대해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러시아 문인과 범슬라브주의자에 대한 내 비판으로부터도 내가 그 견해들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을 러시아 특수한 발전 노선이라는 사고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길 권리가 없고, 자신 또한 그런 사고를 지닌 사람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마르크스가 그런 특수한 발전 노선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그걸 잘못 해석했다. 그야말로 새빨간 왜곡이었다. 방금 마르크스 발언에는 크리벤코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피해 넘겼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두 가지 모순된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곧 미하일로프스키는 러시아 전반적인 정세에 관한 내 견해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바탕이 전혀 안됐다.'
이런 발언들이 잘못 해석될 여지를 없애고자, 마르크스는 같은 편지에서 자신의 이론이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답변에 대한 질문에 있어 대답 자체와 그 질문의 답을 결정할 수도 있는 러시아 통계 검토를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했다.
'러시아가 서구 유럽 국가들을 모범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도 수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던 최근으로 보인다면, 우선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해당 대목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 질문에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보이는가. 농민들의 몰락이 자본주의 체제, 곧 자본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 과정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정이지만, '만약' 러시아가 그런 경향을 보인다면,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될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특정 국가들에 따른 경제 체제의 진화를 연구하고, 또 설명했으며, 러시아에서 이론을 적용하는 건 오로지 유물론적인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에 따라 확립된 선례들을 활용해서, 러시아에 따른 생산 관계와 그 진화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의 정교한 완성은 사회 과학에서도 큰 발전이자, 사회주의를 향한 엄청난 진전이었다. 『자본』이 등장한 직후로, '국내 자본주의 운명'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주요한 이론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문제를 둘러싸고, 엄청나게 열띤 논쟁들이 펼쳐졌고, 강령 상 핵심 지점들도 따라서 결정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년 전, 국내 자본주의로 진화했는지를 놓고도, 어느 개별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이 국내 경제 현실에 대한 통계를 토대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을 때는, 거기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비판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똑같은 방법론적·이론적인 일반 원칙들을 받아들인 가운데서 통계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맞서 진정한 성전으로 돌입한 인민의 벗들 역시나, 사실 관계에 따른 검토로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는 법이 없었다. 첫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인민의 벗들은 여러 미사여구로, 문제를 처리한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합의나, 의견 일치 부족에 대해서도 자신의 재치를 드러낼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저명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는 말장난을 하고는,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완전한 일치가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을 잘못 전달했고, 둘째로, 현실은 국내 사회민주주의의 약점이 아닌, 강점과 생명력을 증명했다. 최근 시기, 특히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경로로부터, 사회민주주의적인 관점들에 도달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국내 봉토 제도로부터 발달한 부르주아 사회이고, 그 정치 형태는 계급 국가이며,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를 끝장낼 유일한 방안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라는 기본적이고, 주요한 논지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논쟁 방법과 국내 삶에서 여러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도, 특정한 수 많은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논지 한계 내에서, 농민 개혁이나, 농업과 수공업에 따른 경제적인 상태, 토지 임차 등 피상적인 어조로만 다뤄졌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부터 미리 미하일로프스키를 기쁘게 할 수도 있었다. 농민 개혁이란, 국내에도 올바른 발전을 위해 순탄한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자본가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의 벗들에게 국가 부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을 공동체가 농업과 제조업을 사회화해서, 수공업자로부터 대량 생산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인민 토지 임차가 인민 농업을 떠받치고 있다는 등, '숭고한 진리'들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합의에는, 국내에서 실제로 현재 경제 구조를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 해명하고, 실제로 경제적 발전이나, 정치를 비롯해서, 여타 모든 유형에서 상부 구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들 내 견해 차이로 대체됐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여서, 공동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 확실하게 관련되고, 따라서 그러한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이는 모두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를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게 되는 한편으로, 많은 해결책들이 열려 있는 수 많은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폭 넓은 의견 차이에 대한 여지들도 여전히 남겨놓는다면, 당연하게도, 국내 사회민주주의 힘과 생명력을 입증해주는 데 불과하다. 더군다나 같은 노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이뤄진다. 그 많은 측면들을 통합해줄 기관도 없거나, 있을 수도 없고, 오늘날에도 만연한 경찰 감시 상황에서도 볼 때, 개인적인 교류도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적절한 토론을 할 수도,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따라서 서로 의견이 상충된다는 건, 당연할 수밖에는 없다.
정말로 재미있지 않은가.
사회민주주의자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을 상대로도 한 반론에서, 크리벤코가 언급한 내용에는 일정 정도 당혹스럽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열과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방어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이론과 정책을 비판하거나, 다른 어떤 종류로 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 적도 없다. 진실은 크리벤코와 미하일로프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에서나 나눌 법한 촌평들에 귀를 기울여왔고, 자신들의 지각 없는 자유주의적인 언행을 감추고자, 마르크스주의를 들먹이는 여러 많은 자유주의자들을 주시했으며, 전매특허인 영리함을 갖춘 전술로부터 동원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작업에 착수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같은 비판이 일련의 일상적인, 부조리와 추잡한 공격들로 이뤄졌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도 않다. 크리벤코는 일관되게, 자본주의 산업 발전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제시해야만 하며,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이거나, 상점과 선술집을 여는 걸 꺼려서는 안 된다. 수 많은 여관 주인들은 국내 의회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이는 걸 기뻐하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업자들은 농민 곡식을 사들이는 걸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재미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의 벗에게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는 본질 상 자본주의적이며, 기업형 농민들과 유통업자들은 같은 정치·경제적인 특징들 때문에,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야만 하고, 그런 현실이 농민 분화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한다는 점을 일러두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비명을 지르며, 그건 서구 유럽 공식과 추상적인 방안들을 무차별적으로 빌려오는 행위이자, 터무니 없는 이단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러나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색이 입혀져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고귀한 과학과 순수한 이상은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농민 곡식과 땅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단순히 타인 물건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대표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또한 국내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생산 수단을 집중시키면서부터 이미 모든 영역에서, 인민 노동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따른 정책을 입안하고, 강요하며, 결정짓는다는 점을 저 인민의 벗에게 입증해서 보여주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버럭 화를 내며, 우리 정부의 전지전능함을 외치고는, 인민의 벗들이 아닌, 자본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들을 끌어들이는 행위가 치명적인 착오이자, 불행이라고, 인공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속으로 인민의 벗들은 국내 의회 내에서 여관 주인들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점. 곧 이른바 계급 꼭대기에 올라선 바로 정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신사 양반들, 국내 자본주의 이익이 오직 의회에서만, 그리고 여관 주인들로부터만 대표된다고 생각하시나.
추잡한 공격들과 관련해서는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사례들도 충분히 지켜봤고, 눈꼴 시린 사회민주주의를 전멸시키기 위한 열망 속에서
'일부는 자본주의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게 유일한 목적이라 주장하며, 물론 전문가나 사무직 노동자 같은 한직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도 공장으로 들어간다.'
라고 주장한 크리벤코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명백히 품위를 상실하고 만 발언들에 대해서는 매번 답변할 필요는 없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이고, 그만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아무튼 신사 양반들, 그런 정신 상태를 용감하게 계속해서 유지하시길. 당신들이 말한 대로, 이미 여러 조치들로부터 아무리 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해줬던 황실 정부는 앞으로도 아무런 결함 없이, 그렇게 해나가며, 그래서 당신들의 진부한 무지가 드러나는 걸 막아줄테니 말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교양 넘치는 상류 사회는 막간을 이용해서도,철갑 상어와 카드 놀이를 즐기면서, 기꺼이 형제를 들먹이고, 형제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자비로운 사업들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그 형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지방 감독관 같은 농민들의 주머니를 감독하는 자리들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시민적인 요구와 의무들에 대한 발달된 의식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을 당신네로부터 알게 되어 아주 기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을 아무렴 계속해서 이어가시길. 절대 방해받지 않을 뿐 아니라, 지지와 칭찬까지 받게 될 지도 모르니. 물론 부레닌과 그 지지자들의 입으로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