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국가와 혁명: 1848~1851년의 경험

 

1. 혁명의 전야

 

성숙한 마르크스주의의 최초 저작들인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선언』은 1848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쓰였다. 그런 까닭에 이 저작들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기초에 대한 서술 외에 당시의 혁명 상황이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저작의 필자들이 1848~1851년의 경험으로부터 자신들의 결론을 끌어내기 바로 직전에 국가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계급은 발전 과정에서 낡은 부르주아사회를 계급과 계급 대립이 없는 협동체로 대체할 것이다. 그때에는 본래적 의미의 정치권력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이란 부르주아사회 내 계급 대립의 공식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1885년 독일어판, 182쪽)¹¹

 

계급이 폐지되면 국가가 소멸한다는 사상을 보여주는 이 일반적 서술과 몇 달 뒤인 1847년 1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에 나오는 설명을 대조해보면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국면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소간 감추어진 기존 사회 내의 내란을 추적하여 이 내란이 공개적 혁명으로 터져 나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폭력적으로 전복함으로써 자신의 지배권을 정초하는 지점에까지 이르렀다. (……)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았다. (……)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점차 탈취하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생산력의 양을 될 수 있는 대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할 것이다. (1906년 독일어 제7판, 31쪽과 37쪽)

 

여기에서 우리는 국가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가장 중요한 이념 중의 하나인 ‘프롤레타리아독재’(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코뮌 이후에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였다)의 정식화와 더불어 국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정의를 볼 수 있다.

물론 국가에 대한 이 정의는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잊힌 어구’에 속한다.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에 대한 이 정의는 공식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지배적인 선전·선동 문헌에서 결코 설명된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예 잊혀버렸다. 왜냐하면 이 정의는 개량주의와는 전혀 양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평화적 발전’에 대한 항간의 기회주의적 편견과 프티부르주아적 환상을 정면에서 공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모든 기회주의자와 사회배외주의자 그리고 카우츠키파는 이렇게 되며 이것이 마르크스 이론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들은 첫째,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오직 사멸하는 국가, 즉 곧바로 사멸하기 시작하며 또한 반드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상태의 국가만을 필요로 하고 둘째, 노동자들은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덧붙이는 것을 잊고 있다.

 

국가는 특수한 권력조직이며 어떤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조직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계급을 억압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은 착취계급, 즉 부르주아지이다. 노동자들은 오직 착취자의 반항을 억누르기 위해서만 국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억압을 지도하고 실현하는 일은 끝까지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과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노동자와 피착취자를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할 수 있다.

 

착취계급은 착취를 유지하기 위해, 즉 인민의 압도적 다수에 반하는 극소수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 정치적 지배가 필요하다. 그러나 피착취계급은 모든 착취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즉 현대의 노예소유자인 극소수의 지주들과 자본가들에게 반하여 압도적 다수의 인민을 위해 정치적 지배가 필요하다.

 

계급투쟁을 계급 간의 조화라는 환상으로 대체해버린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이나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변혁도 환상적으로, 즉 착취계급의 지배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를 의식하게 된 다수에게 소수를 복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초계급적 국가에 대한 인정과 불가분적으로 결합된 이 프티부르주아적 유토피아는 실천 과정에서 노동 계급의 이익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1848년과 1871년의 프랑스혁명의 역사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등 여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현재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에 의해 부활되고 있는 이러한 프티부르주아적 사회주의와 일생 동안 투쟁하였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에 관한 이론을 일관되게 정치권력 및 국가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뒤엎는 일은 특수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경제적 존재조건은 이 계급에게 그 일을 위한 준비를 하게 하고 그 일을 수행할 가능성과 힘을 준다. 부르주아지는 농민과 모든 프티부르주아 계층을 분열시키고 분산시키는 반면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결합시키고 단결시키고 조직한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 대규모 생산에서 그들이 담당하는 경제적 역할로 인해 - 모든 노동하는 피착취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이들 피착취대중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대개 프롤레타리아트만큼,아니 그들보다 더 심하게 착취당하고 구속받고 억압당하지만 자신들의 해방을 위하여 자립적으로 투쟁할 능력은 없다.

 

마르크스가 국가와 사회주의혁명 문제에 적용한 계급투쟁 이론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와 프롤레타리아독재, 즉 누구에게도 분할되지 않고 대중의 무장력에 직접

의거하는 권력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간다. 부르주아지를 전복하는 일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불가피하고 필사적인 저항을 제압하고 새로운 경제 질서를 위하여 모든 노동하는 피착취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지배계급의 자리에 올라설 경우에만 실현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착취자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도, 또한 사회주의적 경제를 ‘운영하고자’ 농민·프티부르주아·반부르주아적·반프롤레타리아 등의 방대한 주민대중을 지도하기 위해서도, 국가권력, 집중화된 권력조직, 폭력조직이 필요하다.

 

노동자당을 교육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대, 즉 권력을 장악하고 인민 전체를 사회주의로 인도하며 새로운 질서를 지도·조직하고 모든 노동자와 피착취자가 부르주아지 없이 부르주아지에 반하여 사회생활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교사·지도자·인도자가 될 수 있는 전위대를 길러낸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에 지배적인 기회주의는 노동자당 내부에 대중에게서 멀어졌고 자본주의하에서 상당히 ‘잘 지낼’ 줄 알며 콩 요리 한 접시에 자신의 장자상속권을 팔아먹는 자들, 즉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인민의 혁명적 지도자 역할을 포기하는 고급 노동자들의 대변자들을 길러낸다.

 

“국가,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 마르크스의 이 이론은 역사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담당하는 혁명적 역할에 관한 그의 이론 전체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역할의 완성은 프롤레타리아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특수한 폭력 조직으로서 국가를 필요로 한다면,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국가기구를 청산하거나 파괴하지 않고 그러한 조직의 창출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된다. 바로 이것이 『공산당선언』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되는 문제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서 1851년까지의 혁명 경험을 총괄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2. 혁명의 총괄

 

우리의 흥미를 끄는 국가문제에 관하여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Der achtzehnte des Louis Bonaparte에서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혁명을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철저한 것이다. 그것은 아직 연육을 지나가고 있다. 혁명은 일정한 방식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1851년 12월 2일(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감행한 날)까지 혁명은 준비 작업의 반을 마쳤으며, 이제 나머지 반을 완성해가고 있다. 혁명은 의회권력을 뒤엎을 수 있기 위해 제일 먼저 의회권력을 완성시켰다. 그 목적을 달성한 지금, 혁명은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행정권력에 집중하기 위해 행정권력을 완성해가고 있고 가장 순수한 모습으로 환원시키고 있고 고립시키고 있고 자신의 유일한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하여 혁명이 준비 작업의 나머지 절반을 완료할 때, 유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렇게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잘 파냈도다, 늙은 두더지를!

 

거대한 관료조직과 군사조직, 복잡하고 정교한 국가기구, 50만의 군대에다 또 50만에 이르는 엄청난 수의 관료 집단을 거느린 이 행정권력, 프랑스 사회의 몸동아리를 마치 그물처럼 엄어매고 모든 숨구명을 막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기생충적 조직체는 절대왕정 시대, 즉 봉건제도의 몰락기에 생겨나 봉건제도 붕괴를 촉진하였다. 제1차 프랑스혁명은 중앙집권화를 발전시켰고……그와 동시에 통치권력의 범위와 속성 및 하수인들을 확대하였다. 나폴레옹은 이 국가기구를 완성하였다. 정통왕정과 7월왕정은 분업을 더욱 확대하였을 뿐 여기에 덧붙인 것은 없다. (……)

 

끝으로 의회제 공화국은 혁명에 반대하는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탄압 조치와 더불어 통치권의 수단과 집중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혁명은 이 기구들을 파괴하는 대신에 오히려 완성하였다. 번갈아가며 지배권을 놓고 경쟁하는 정당들은 이 거대한 국가조직을 승자의 주요 전리품으로 간주하였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4판, 함부르크, 1907, 98~99쪽, 강조는 필자)14

 

이 탁월한 논의를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산당선언』에서 더 나아가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산당선언』에서는 국가문제가 아직 매우 추상적으로, 아주 일반적인 개념과 표현들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국가문제가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매우 정확하고 분명하고 실천적으로 파악 가능한 결론, 즉 종래의 모든 혁명은 국가기구를 완성하였으나 이제는 그것을 분쇄하고 파괴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있다.

 

이 결론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서 주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기본적인 것이 지배적인 공식 사회민주당들에 의하여 완전히 망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인 카우츠키에 의하여 (뒤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노골적으로 왜곡되고 있다.

 

『공산당선언』은 역사의 일반적 결과를 총괄해 제시한다. 그 내용에 따르면 우리는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고는, 즉 정치적 지배권을 획득하고 국가를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로 바꾸어놓지 않고는 부르주아지를 전복할 수 없으며, 계급대립이 없는 사회에서는 국가가 불필요할뿐더러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프롤레타리아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이후에는 즉시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불가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 역사적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 프롤레타리아국가에 의한 부르주아국가의 대체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제기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마르크스는 1852년에 제기하였고 또한 해결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에 걸맞게 1848~1851년 대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기초로 삼았다. 언

제나 그렇듯 이 경우에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심오한 철학적 세계관과 풍부한 역사지식이 삼투된 경험의 총괄이다.

 

국가문제는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부르주아국가,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필요한 국가기구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부르주아혁명 과정에서, 또 피억압 계급의 독자적 행동에 직면하여,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어떤 식으로 바뀌었으며 어떤 것으로 진화했는가? 이 국가기구와 관련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무엇인가?

 

부르주아사회에 특유한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은 절대주의의 몰락기에 출현했다. 이 국가기구에 가장 특징적인 것은 관료제와 상비군이라는 두 제도이다. 이 제도들이 수천 갈래의 끈에 의해 어떻게 부르주아지와 연결되었는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각 노동자들의 경험은 이러한 연관을 아주 분명하고도 인상 깊게 예증한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이러한 연관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이 연관의 불가피성에 관한 과학을 그토록 쉽게 터득하며 또 그토록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 과학을 무지와 경솔로 인해 부인하거나 보다 경박스럽게 '일반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실천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망각한다.

 

관료제와 상비군은 부르주아사회의 몸통이에 붙어 있는 '기생충', 이 사회를 분열시키는 내부 모순에서 생겨난 기생충, 그러나 그 사회의 숨구멍을 막고 있는 기생충이다. 오늘날 공식적 사회민주당 내에서 지배적인 카우츠키류의 기회주의는 국가를 기생적 조직이라고 보는 견해를 무정부주의만의 특수한 속성으로 간주한다. 물론 제국주의 전쟁에 '조국 수호'라는 개념을 적용해 그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함으로써 사회주의에 유례없는 모욕을 준 프티부르주아들로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왜곡이 매우 마음에 들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됐건 이것은 명백한 왜곡이다.

 

이 관료기구 및 군사기구는 봉건제의 몰락 이래 유럽이 무수히 체험한 모든 부르주아혁명을 통해 발전·완성·강화된다. 특히 프티부르주아지는 바로 이 기구를 통해 대부르주아지 편으로 끌려가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복종하게 된다. 이 기구는 농민, 소규모 수공업자, 상인 중에서 상위에 있는 계층에게 비교적 편하고 안정되고 명예스러운 자리를 마련해주어 그 자리에 오른 자들이 인민 위에 서게 한다.

 

1917년 2월 27일 이후 반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이전에는 흑백단원(黑百團員)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되던 관료직이 카데트, 멘세비키, 사회혁명당원들의 노획 대상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어떠한 진지한 개혁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한 개혁을 '헌법제정회의가 열릴 때까지' 연기하려고 하였다 — 헌법제정회의 소집마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물어물 넘기려고 하였다! 그에 반해 노획물의 분배나 장관, 차관, 총독 등 등의 자리를 차지하는 따위의 일에서는 머뭇거림이 없었으며 헌법제정회의가 열릴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았다! 정부를 구성하는 조각(組閣)의 유희는 근본적으로 전국의 중앙관청과 지방관청에서 위아래 할 것 없이 실행되고 있는 이 '노획물'의 분배와 재분배의 단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1917년 2월 27일부터 8월 27일까지 반년 동안 나타난 분명한 객관적 결과는 개혁이 연기되고 관직이 분배되었으며 관직 분배의 '잘못'이 약간의 재분배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기구의 자리가 여러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 정당(러시아를 예로 든다면 카데트, 사회혁명당원, 멘세비키)에 더욱 많이 '재분배'되면 될수록, 피억압계급과 그들의 정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는 전체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화해불가능한 적대성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르주아 정당, 심지어 '혁명적 민주주의' 정당을 포함한 가장 민주적인 정당조차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바로 그 억압장치인 국가기구를 강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는 탓에 혁명은 국가권력을 향해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하고, 국가기구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절멸하는 것을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과제가 이런 식으로 제시되도록 만든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태의 실질적 발전, 즉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생생한 경험이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사실에 얼마나 철저히 의거하는가는 그가 절멸되는 국가기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1852년에는 아직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경험은 당시에는 아직 이 문제를 다룰 기반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실제적인 과제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71년이었다. 1852년에 자연사적 관찰의 정확성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혁명이 국가권력 쪽으로 '자신의 모든 파괴력을 집중'하고 국가기구를 '분쇄'해야 한다는 과제에 이르렀다는 것뿐이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경험과 관찰과 결론을 일반화하는 것이 옳은가, 다시 말해 그것들을 1848년에서 1851년에 이르는 3년간의 프랑스 역사보다 더 광범위한 영역에 전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하여 먼저 엥겔스의 말부터 살펴보고, 그런 뒤 사실 문제를 다루어보자.

 

엥겔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3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랑스는 역사적 계급투쟁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매 번 결정적인 데까지 나아갔던 나라이며, 따라서 계급 투쟁이 진행되고 그 결과가 총괄되는 변전하는 정치 형태들이 가장 뚜렷한 모습을 드러낸 나라이기도 하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중심지였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신분제 군주국의 전형이었던 프랑스는 대혁명을 통해 봉건제를 분쇄하고 부르주아지의 순수한 지배를 유럽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전형적 형태로 수립하였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상승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부르주아지에 대해 벌이는 투쟁도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침예한 형태를 띤다.(1907년 판, 4쪽)15

 

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1871년 이래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이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소강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가오는 사회주의혁명에서 프랑스가 계급투쟁을 결정적 지점까지 밀고 나갈 전형적인 나라로 등장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선진국들의 역사를 일반적으로 살펴보면, 동일한 과정이 보다 완만하게 보다 다양한 형태로 훨씬 넓은 무대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공화국(프랑스, 미국, 스위스)이나 군주국(영국,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제국 그리고 어느 정도는 독일도 포함)에서 '의회 정권'이 설립되는 과정이 그려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적 질서의 토대를 그대로 둔 채 '노획물'인 관직을 분배하고 재분배한 여러 부르주아 당들과 프티부르주아 당들 간의 권력투쟁 과정이 그려졌으며, 마지막으로 '행정권'과 그 관료 및 군사기구를 완성하고 공고히 하는 과정이 그려졌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 일반의 최근 발전에서 드러난 일반적 특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특유한 바로 그 발전 과정을 1848년에서 1851년에 이르는 3년 동안 급속하고 뚜렷하며 집중된 형태로 보여주었다.

 

특히 제국주의는, 다시 말해 은행자본의 시대, 거대한 자본주의적 독점의 시대,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하는 시대는 군주국만이 아니라 가장 자유로운 공화국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억압의 강화와 관련하여 '국가기구'가 매우 강화되고 있고 관료기구와 군사기구가 전래 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세계 역사는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데 사회주의혁명의 '모든 역량을', 1852년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엄청난 정도로 '집중'하도록 만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기구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파리코뮌이 매우 교훈적인 자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3. 1852년 마르크스의 문제 설정

 

1907년 메링 Mehring은 잡지『신시대』Neue Zeit¹⁷(제25권, 2호, 164쪽)에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에르 Weydemeyer에게 보낸 1852년 3월 5일자 편지를 발췌하여 실었다. 이 편지에는 특히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고찰이 들어 있다.

 

나의 공적은 근대사회에서 계급의 존재나 그들 상호 간의 투쟁을 발견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훨씬 전에 이러한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하였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내 공적의 새로운 점은 ①계급의 존재는 다만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단계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 ②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독재로 나아간다는 것, ③ 이러한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을 지양하고 무계급사회로 나아가는 과도기일 뿐임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18

 

이 몇 마디 말을 통해 마르크스는 첫째, 자신의 이론이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가장 깊이 있는 사상가들의 이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을, 둘째, 국가에 관한 자신의 이론이 지닌 본질을 놀라울 정도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마르크스 이론에서 본질은 계급투쟁이다. 아주 흔히 이렇게 말하고 쓴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이러한 옳지 못한 생각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적으로 왜곡하고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변조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투쟁 이론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 이전에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낸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해 부르주아지가 용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9 단지 계급투쟁만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아직 부르주아적 사상과 부르주아적 정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계급투쟁 이론에 국한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이며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데서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독재까지 인정하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와 보통의 프티부르주아(또한 대부르주아)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이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유럽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이 실천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모든 기회주의자와 개량주의자뿐 아니라 '카우츠키파'(개량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자들)까지도 하나같이 프롤레타리아독재를 거부하는 가련한 속물이나 프티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18년 8월, 즉 이 책의 초판이 출판된 뒤에 나온 카우츠키의 소책자『프롤레타리아독재』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프티부르주아적 왜곡의 표본이자, 말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비열하게 거부하는 표본이다(나의 소책자『사회주의혁명과 변절자 카우츠키』, 페트로그라드 및 모스크바, 1918년 판을 보라).

 

이전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카우츠키를 주요 대표자로 삼는 오늘날의 기회주의는 앞의 인용문에서 마르크스가 묘사한 부르주아적 태도와 완전히 부합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회주의는 계급투쟁을 인정하지만 그 영역을 부르주아적 관계에 국한하기 때문이다(그런데 교양 있는 자유주의자치고 이 영역 내부, 이 영역의 테두리 안에서 계급투쟁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회주의자가 계급투쟁을 인정하기를 그치는 것은 중요한 사태의 직전, 즉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 부르주아지가 전복되고 완전히 절멸되는 시기를 바로 앞두었을 때이다. 현실적으로 이 시기는 전례 없이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이자 이 투쟁이 일찍이 보지 못한 첨예한 형태를 드러내는 시기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국가 역시 불가피하게 새로운 종류의 민주적(프롤레타리아트와 무산자 일반을 위한) 국가이자 새로운 종류의 독재적(부르주아지에 대한) 국가여야 한다.

 

더 나아가 한 계급의 독재는 각각의 계급사회에만 필요하거나 부르주아지를 전복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무계급사회' 사이의 역사적 시기 전체에도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한 사람만이 마르크스 국가론의 본질을 포착한 사람이다. 부르주아적 국가 형태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이 국가들은 이러저러한 형태를 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이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때에도 그 정치적 형태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때도 그 본질은 반드시 하나, 즉 프롤레타리아독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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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계급 사회와 국가

 

1. 국가: 화해 불가능한 계급대립의 산물

 

현재 마르크스의 이론을 두고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피억업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해온 혁명적 사상가들과 지도자들의 이론을 두고 역사 속에서 이미 다반사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위대한 혁명가들은 살아생전 억압계급에게 끊임없는 탄압을 받았다. 억압계급은 위대한 혁명가들의 이론을 가장 야만적인 적의와 가장 광적인 증오로 대했으며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허위와 중상모락을 퍼부었다. 위대한 혁명가들이 죽은 뒤에는 그들을 무해한 우상으로 변질시키려는 시도, 말하자면 그들을 성인 명부에 올려놓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들의 이름에는 피억업계급을 ‘위안’하고 기만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명성이 부여되지만, 그들의 혁명 이론은 내용을 박탈당하고 혁명적 예리함을 잃은 채 속류화되고 만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은 힘을 합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각색’을 행하고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측면과 혁명적 정신을 누락시키고 밀어내버리며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만한 부분이나 그렇게 보이는 부분만을 전면에 내세우고 찬양한다. 오늘날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전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이렇게 심한 농담을!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 근절의 전문가였던 독일 부르주아 학자들이 오늘은 마르크스를 ‘애국적인 독일인’이라고 말하는 일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약탈전쟁을 위해 매우 잘 조직된 노동단체들을 길러낸 이가 바로 마르크스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이토록 전례 없이 광범위하게 왜곡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마르크스의 국가론을 원상복구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에서 많은 부분을 길게 인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서술이 매끄럽지 못하고 대중들이 이해하는 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인용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 가운데 국가문제에 관한 구절은 가능한 한 모두, 아니 적어도 핵심 구절만은 모두 인용하여, 독자들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이 두 사람의 전체적 견해와 그 견해의 발전을 판단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또 그럼으로써 현재 횡행하는 ‘카우츠키류’에 의한 왜곡을 실증적으로 검증하고 폭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894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이미 6판이 간행된 엥겔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부터 시작하자. 이 저작의 러시아어 번역판은 많지만 대부분 번역이 불완전하거나 매우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독일어 원본을 직접 번역하여 인용하고자 한다. 엥겔스는 역사적 분석을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결코 외부에서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헤겔의 주장과 달리 ‘인류적 이념의 현실태’, ‘이성의 형상이나 현실태’가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른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라는 존재는 그러한 사회가 해결 불가능한 자기모순에 봉착했고 도저히 멀쳐버릴 수 없는 화해 불가능한 대립물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립물들, 즉 경제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지닌 계급들이 무의한 투쟁을 통해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않게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 즉 갈등을 완화하고 ‘질서’의 한계 내에서 제어할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에서 생겨났지만 사회 위에 서서 사회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어가는 이러한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독일어 제6판, 177~178쪽)³

 

이 인용문에는 국가의 의미와 역사적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사상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국가는 계급대립에 따른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이자 표현이다. 국가는 계급대립이 객관적으로 화해될 수 없는 곳에서, 객관적으로 화해될 수 없는 때에, 객관적으로 화해될 수 없는 한에서 생겨난다. 바꿔 말해 국가의 출현은 계급대립이 화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은 주로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데, 두 가지 모두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이 점을 왜곡하며 시작한다.

 

한편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의 압력에 떠밀린 나머지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국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부르주아, 특히 프티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있다. 이들은 국가가 계급화해의 기관이라는 식으로 마르크스를 ‘교정’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 간의 화해가 가능했다면 국가는 생겨날 수도 없었고 존속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프티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교수들과 평론가들은 — 친절하게도 마르크스를 자주 인용해가면서! — 국가가 계급들을 화해시킨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지배의 기관이자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관이며 계급 간의 갈등을 완화해 그러한 억압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반면에 프티부르주아 정치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질서란 계급들 사이의 화해이지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억압이 아니다. 즉 갈등의 완화는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지 억압자들을 타도하기 위한 일정한 투쟁수단과 투쟁방법을 피억압계급들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17년 러시아 혁명 동안 국가의 의미와 역할 문제가 즉각적 행위 문제로, 그것도 대중의 행위 문제로 실천적 중요성을 띠고 전면에 부각된 적이 있었다. 당시 모든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는 ‘국가’가 계급들을 ‘화해’시킨다는 프티부르주아 이론으로 단번에 빠져들었다. 이 두 당파의 정치가들이 내놓은 수많은 결의안과 글은 프티부르주아적이고 속물적인 ‘화해’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해’ 이론에 완전히 물든 것이었다.) 국가가 대처자(적대계급)와 화해할 수 없는 특정한 계급의 지배기구라는 점을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국가문제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사회혁명당원과 맨세비키가 전혀 사회주의자가 아니며 (우리 불세비키는 언제나 이 점을 지적해왔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말투를 쓰는 프티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하나이다.

 

다른 한편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훨씬 교활한 형태의 ‘카우츠키류’의 왜곡이 있다. 이들은 국가가 계급지배의 도구이며 계급대립들이 결코 화해될 수 없다는 점을 ‘이론상으로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만일 국가가 화해 불가능한 계급 대립의 산물이고 사회 위에 서서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점점 더 소외시켜가는’ 권력이라면 피역압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 없이는, 나아가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이러한 ‘소외’를 구현하는 국가권력기구의 파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얼버무리고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마르크스는 혁명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적 분석을 바탕으로 이처럼 이론적으로 자명한 결론을 아주 분명하게 도출해냈다. 그리고 뒤에서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바로 이러한 결론을 카우츠키는 ‘망각’하고 왜곡했다.

 

2. 군대, 감옥 등등의 특수기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전의 씨족조직과 비교해볼 때, 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영토를 기준으로 국민을 구분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분은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씨족과 부족 단위의 조직에 대한 기나긴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

 

두 번째 특징은 스스로를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더는 곧바로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 창설이다. 이 특수한 공권력이 필요해진 것은 계급들로 분열된 후에는 주민의 자발적인 무장조직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공권력은 어느 국가에나 존재한다. 이 공권력은 단지 무장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과 온갖 종류의 강제기관들처럼 씨족사회는 전혀 알지 못했던 물적 부속물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엥겔스는 국가라고 불리는 ‘권력’, 사회로부터 생겨났으나 사회 위에 서서 스스로를 점점 사회로부터 소외시켜가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은 주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은 감옥 같은 것들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라는 표현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모든 국가의 속성인 공권력은 무장한 주민이나 그들의 ‘자발적인 무장조직’과 ‘더는 곧바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적 사상가처럼 엥겔스도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의 주의를 지배적인 속물들이 보기에는 거의 주목할 만한 가치도 없고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이는 것,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화석화되었다 할 수 있는 편견들로 인해 신성시되고 있는 것 쪽으로 돌리려고 하였다. 상비군과 경찰은 국가권력 행사의 주요 도구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 수 있겠는가?

 

엥겔스가 언급한 19세기 말의 대다수 유럽인들, 즉 위대한 혁명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거나 가까이서 관찰한 적이 없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주민의 자발적인 무장조직’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사회 위에 서서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소외시켜가는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 (경찰, 상비군)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부딪혔을 때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들은 스펜서 Spencer나 미하일롭스키 Michailowski의 몇몇 문장을 인용하며 공공생활이 복잡해지고 기능이 분화된다는 등의 사실을 지적하곤 한다.

 

이러한 지적은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사회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은폐하여 일반 사람들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잠재운다.

 

만일 그러한 분열이 없다면 그 복잡성이나 높은 기술 수준 등등에 따라 나무막대기로 무장한 원숭이 조직이라든가 원시인 조직 또는 씨족사회로 결합된 인간 조직 같은 원시적 조직과는 다르더라도 어쨌든 ‘주민의 자발적인 무장조직’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문명화된 사회는 ‘자발적’ 무장이 허용되면 서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될 적대적 계급들, 그것도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 계급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

문이다. 국가가 형성되면 하나의 특수한 권력,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들이 생겨난다.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모든 혁명은 지배계급이 자신들에게 봉사하는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들을 어떻게 재건하려고 하는지, 피억압계급이 착취자가 아닌 피착취자에게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조직을 만들어내려고 어떻게 노력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앞의 인용문에서 엥겔스는 모든 위대한 혁명이 실천 속에서 그것도 대중행동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제기한 바 있는 문제, 즉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조직체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무장조직’ 간의 관계 문제를 이론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예증되는지를 유럽과 러시아의 혁명 경험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엥겔스의 설명으로 되돌아가보자.

 

엥겔스는 이러한 공권력은 예컨대 북아메리카의 어떤 지역에서 그러했듯 때로 약화되기도 하지만(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예외적 사례, 즉 제국주의 이전 시대에 자유로운 이 주민이 지배했던 북아메리카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점점 강화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공권력은 — 글쓴이) 국가 내부의 계급 대립들이 격화되고 인접 국가들이 더 비대해지고 인구 수가 늘어남에 따라 강화된다. 오늘날의 유럽만 보더라도 계급투쟁과 정복경쟁으로 말미암아 공권력은 사회 전체와 국가 자체까지 집어삼킬 지경에 이르렀다.

 

엥겔스가 가장 나중에 작성한 서문의 날짜가 1891년 6월 16일인 것으로 볼 때, 이 글은 아무리 늦게 잡아도 1890년대 초에 작성되었다. 당시는 제국주의 — 트러스트 trust의 완전한 지배, 거대 은행들의 무한한 힘, 대규모 식민 정책 등 — 로의 전환이 프랑스에서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독일에서는 그보다는 미약하였다. 그 이후 ‘정복경쟁’이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고, 1910년대 초에 이르러 세계는 이러한 ‘경쟁적 정복자들’, 즉 약탈에 눈이 먼 강대국들에 의하여 완전히 분할되었다. 또한 그 이후 육군과 해군의 군비가 엄청나게 증강되었고, 식민지 분할과 영국과 독일 간의 세계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침략전쟁(1914~1917)은 약탈적 국가권력이 완전한 파국에 가까울 정도로 사회의 모든 힘을 ‘집어삼키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일찍이 1891년에 ‘정복경쟁’이 열강들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반면에 몇 배로 과열된 이러한 경쟁이 초래한 1914~1917년의 제국주의 전쟁 동안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조국의 수호’나 ‘공화국과 혁명의 수호’니 하는 따위의 구호로 ‘자기네’ 부르주아지의 약탈적 이익에 대한 옹호를 은폐하고 있다.

 

3. 국가: 피억압계급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

 

사회 위에 서는 특별한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세와 국채가 필요하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권력과 조세징수권을 가짐으로써 관리들은 이제 사회의 기관으로서 사회 위에 군림한다. 그들은 씨족 제도 속에서 기관들이 받던 자유롭고 자발적인 존경에 — 설사 그들이 그러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해도 — 만족하지 않는다. (……) 관리를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만드는 예외적 법규가 제정된다. 아무리 하찮은 경찰 판도 (……) 씨족사회의 모든 기관을 모아놓은 것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문명사회의 제아무리 힘 있는 군주나 위대한 정치가, 군사령관이더라도 가장 하찮은 씨족의 우두머리가 받는 비강제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존경이 부러울 것이다.

 

여기에서는 국가권력 기관으로서 관리의 특권적 지위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무엇이 그들을 사회 위에 있게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가 근본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1871년의 파리코뮌이 이론적 문제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며, 1912년에 카우츠키가 이 문제를 반동적 입장에서 어떻게 모호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국가는 계급 간의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생겨났지만 동시에 계급 간의 충돌 가운데서 생겨났기 때문에, 그 국가는 일반적으로 가장 힘 있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려 정치적으로도 지배적인 계급이 되며, 그러하여 피억압 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고대국가와 봉건국가가 노예와 농노를 착취하기 위한 기관이었듯이 근대의 대의제 국가 역시 자본에 의한 임노동 착취의 도구이다. 하지만 투쟁하는 계급들이 서로 균형점에 접근하여 국가권력이 외견상의 조정자로서 두 계급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립성을 한동안 획득하는 예외적 시기가 있다.

 

17~18세기의 절대군주제, 프랑스 제1제정과 제2제정의 보나파르트주의, 그리고 독일의 비스마르크 시대가 그런 경우다.

 

공화국 러시아의 케렌스키 Kerenski 정부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기 시작한 이후의 한 시기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때는 소비에트가 프티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이 이끄

는 바람에 이미 무력해졌으나 부르주아지가 아직은 소비에트를 당장 해산시킬 만큼 강하지 못하던 시기이다.

 

이어서 엥겔스는 민주공화국에서 “부”는 자신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한층 더 확실히 행사한다”라고 적고 있다. 한편으로는 “관리들을 직접 매수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경우),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 방식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

 

오늘날 제국주의와 은행의 지배는 모든 민주공화국에서 부의 전능함을 유지하고 실현하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특별한 기술의 경지로까지 ‘발전’시켰다. 예컨대 러시아 민주주의 공화국의 처음 몇 개월 동안, 즉 ‘사회주의자들’ — 사회혁명당원과 멘세비키 — 과 부르주아지의 이른바 밀월관계 동안, 연립정부 내에서 팔친스키 Paltschinski 씨는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약탈행위 및 군수품 보급을 빌미로 한 국고횡령을 제어하기 위한 모든 수단의 행사를 방해해왔는데, 그후 내각에서 사임한 팔친스키 씨 (물론 그 자리에는 또 다른 팔친스키가 들어왔다)가 자본가들로부터 연봉 12만 루블의 자리를 ‘보상’으로 받았다면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접적 매수인가 아니면 간접적 매수인가? 정부와 신디케이트의 동맹인가 아니면 ‘단지’ 우호적 관계일 뿐인가? 체르노프나 체레텔리, 아브크센치예프 Awksenjew, 스코벨레프 Skobelew 같은 자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국고를 횡령하는 백만장자들의 ‘직접적’ 동맹자인가 아니면 단지 간접적 동맹자일 뿐인가?

 

‘부’의 전능함이 민주공화국에서 더 확실한 이유는 그 전능함이 정치적 메커니즘의 개별적 결함이나 자본주의의 열악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로서는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외피이다. 따라서 자본은 이 최선의 외피를 (팔친스키나 체르노프, 체레텔리 등을 통하여) 획득하고 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인물이나 제도나 정당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아무런 동요도 없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권력을 확립한다.

 

또 한 가지 강조해야 할 것은 엥겔스가 보통선거권을 아주 단호하게 부르주아지의 지배도구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엥겔스는 분명히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장구한 경험을 고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다. 오늘날의 국가에서 보통선거권은 보통선거권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원과 멘세비키 같은 프티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친형제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의 모든 사회배외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보통선거권에서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한다. 그들은 ‘오늘날의 국가에서’ 보통선거권을 통해 다수 근로자들의 의사가 정말로 표출될 수 있고 확실히 실현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생각을 인민들에게 불어넣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과 엥겔스의 아주 명백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인 설명이 ‘공식적’(즉 기회주의적) 사회주의 정당들의 선전과 선동에서 매번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만을 지적해둔다. 엥겔스가 여기서 배척하고 있는 생각이 어떤 점에서 완전히 잘못된 것인지는 ‘오늘날의’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보다 상세하게 다룰 때 설명하겠다.

 

엥겔스는 가장 널리 보급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총괄하고 있다.

 

요컨대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도 사회는 존재했으며,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개념이 없었던 사회도 있었다. 사회가 계급들로 분열되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경제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로 말미암아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계급들의 존재가 필연적이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계급들의 현존이 생산에 직접적 장애가 되는 생산 발전 단계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계급의 발생이 불가피했듯이 계급의 소멸도 불가피하다. 그리고 계급이 소멸하면 국가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는 모든 국가기구를 응당가야 할 곳으로, 즉 물레와 청동도끼가 진열되어 있는 고대 박물관으로 보낼 것이다.

 

오늘날 사회민주당의 선전·선동 문헌에서 이 인용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설사 눈에 띄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국가기구를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심각한 혁명의 도약을 전제하는가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마치 성상 앞에 배례하듯 엥겔스에게 공식적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인용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엥겔스가 무엇을 국가기구라고 부르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4. 국가의 ‘사멸’과 폭력혁명

 

엥겔스가 국가의 ‘사멸’에 관해 한 말들은 널리 알려져 있고 자주 인용되며, 통상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로 변조하는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뚜렷이 보여주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말들이 나오는 대목 전체를 인용해보자.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제일 먼저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모든 계급차이와 계급대립을 지양하며 국가로서의 국가도 지양Aufhebung한다. 계급대립 속에서 움직이던 지금까지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필요했다. 즉 생산의 외적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착취계급의 조직, 따라서 특히 기존의 생산양식을 통하여 주어진 압박조건(노예제, 농노제, 임노동) 속에 피착취계급을 강제로 눌러두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 대표였고 가시적인 단체의 형태로 사회 전체를 총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가 그 시대에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의 국가인 한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즉 국가는 고대에는 노예 소유자인 공민 Staatsbürger들의 국가였고, 중세에는 봉건 귀족들의 국가였으며, 오늘날에는 부르주아지의 국가다. 마침내 국가가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가 되면 그때 국가는 도리어 필요 없는 것이 된다. 억압당해야 할 어떠한 사회계급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계급지배가 사라지면서 이제까지의 무정부적 생산에 기반을 둔 개체의 생존투쟁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러한 투쟁에서 생겨나는 충돌과 폭행이 사라지자마자 억압되어야 할 어떤 것도, 즉 특수한 억압권력인 국가를 필요로 하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국가가 진실로 사회 전체의 대표로 나서는 최초의 행위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것 — 는 동시에 국가가 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행하는 마지막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 한 영역에서 차츰 불필요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는 스스로 조락한다. 인간에 대한 통치 대신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 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한다. 국가는 ‘폐지’Aufhebung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사멸한다. ‘자유인민국가’라는 문구는 이 점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즉 그 문구는 일시적 선동의 측면에서는 정당성이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결국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국가가 하루아침에 폐지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 역시 이 점과 관련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반뒤링론, 오이겐 뒤링씨가 일으킨 변혁』Anti-Dühring, Herren Eugen Dührings Umwälzung der Wissenschaft, 독일어 제3판, 301~303쪽)⁴(MEW, 제20권, pp. 261~262).

 

오늘날의 사회주의 당들은 매우 풍부한 사상을 담고 있는 엥겔스의 이러한 고찰 중에서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무정부주의 이론과는 달리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사멸’한다는 점만을 사회주의 사상의 현실적 공유재산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단순화는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로 격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해석’은 아무런 비약이나 격동도 없고 어떠한 혁명도 없는 지루하고 평탄하고 점진적인 변화의 모호한 관념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항간에 널리 유포된 —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 의미에서 국가의 ‘사멸’이란 의심할 바 없이 혁명을 —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 은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해석’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조야한 왜곡으로서 부르주아지에게만 유리할 뿐이다.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왜곡은 앞서 길게 인용한 바 있는 엥겔스의

‘총괄적’ 고찰만으로도 이미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상황과 논거를 도외시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첫째, 인용문의 첫머리에서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를 지양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말은 대개 완전히 무시되거나 엥겔스의 ‘헤겔주의적 약점’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사실 이 말 속에는 가장 위대한 사회주의혁명 중 하나인 1871년 파리코뮌의 경험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경험에 대해서는 적절한 자리에서 상세히 언급하겠다. 사실 엥겔스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혁명에 의한 부르주아국가의 ‘폐지’이다. 반면에 사멸이라는 말은 사회주의혁명 이후의 프롤레타리아적 국가조직의 잔재와 관련되어 있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국가는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폐지’된다. 이 혁명 후에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국가 또는 반국가이다.

 

둘째, 국가는 ‘특수한 억압권력’이다. 엥겔스는 여기에서 이 홀륭하고 지극히 심오한 정의를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

주아지의 ‘특수한 억압권력’, 수백만 노동자에 대한 한줌밖에 안되는 부유한 자들의 ‘특수한 억압권력’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억압’(프롤레타리아독재)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로서의 국가의 지양’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장악하는 ‘행위’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하나의 ‘특수한 권력’(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다른 하나의 ‘특수한 권력’(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건 ‘사멸’이라는 형태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일이다.

 

셋째, 엥겔스가 ‘사멸’ 또는 이보다 구상적 具象的인 표현인 ‘조락’ Einschlafen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이것을 아주 분명히 “국가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국가 소유로 장악”한 이후의 시기, 즉 사회주의혁명 이후의 시기와 관련짓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기에 국가의 정치적 형태는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파헤치게 왜곡하고 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엥겔스가 이 점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조락’과 ‘사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물론 언뜻 보기에 이는 매우 이상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민주주의 역시 일종의 국가이며 따라서 국가가 사라지는 즉시 민주주의도 사라진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사람만이 이것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부르주아국가는 혁명에 의해서만 ‘폐지’될 수 있다. 이와 달리 국가 일반, 다시 말해 완전한 민주주의는 오직 ‘사멸’할 수 있을 뿐이다.

 

넷째, 엥겔스는 “국가는 사멸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기하고 나서 끝으로 이 명제가 기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도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런데 이때 엥겔스는 “국가는 사멸한다”라는 명제로부터 나오는 결론 가운데 기회주의자들을 겨냥한 것부터 먼저 제시한다.

 

장담하건대 국가의 ‘사멸’에 대해 들었거나 읽은 사람이 1만 명이라면 그 가운데 9,990명은 엥겔스가 이 명제에서 이끌어 낸 결론을 통해 무정부주의자들만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머지 열에 아홉은 ‘자유인민국가’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서 이 구호에 대한 공격이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 되는지를 잘 알지 못한다. 역사는 이렇게 쓰인다! 이런 방식으로 위대한 혁명적 이론이 지배적인 속물근성에 어울리는 것으로 슬그머니 변조된다. 무정부주의자들을 겨냥한 결론은 수천 번 반복되고 비속화되고 가장 조야한 형태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서 완고한 편견이 되어버린 반면 기회주의자들을 겨냥한 결론은 은폐되고 ‘망각’되었다!

 

‘자유인민국가’는 1870년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적 요구이자 일반적 구호였다. 이 구호는 민주주의 개념의 프티부르주아적 과장일 뿐 아무런 정치적 내용도 없다. 이 구호가

합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민주공화국을 암시하는 한에서는, 엥겔스는 이 구호의 ‘정당성’을 선동적 견지에서 ‘일시적으로는’ 인정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구호는 기회주의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미화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 일반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물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좋은 국가형태는 민주공화제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에서도 임금노예제가 인민의 운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모든 국가는 피억압계급에 대한 ‘특수한 억압권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국가도 자유롭지 않으며 인민의 국가가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0년대에 자신들의 당 동지들에게 이 점을 되풀이해서 설명하였다.⁵

 

다섯째,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국가 사멸에 관한 고찰이 담겨 있는 엥겔스의 저작에는 폭력혁명의 의미에 관한 논의도 들어 있다. 폭력혁명의 역할에 대한 엥겔스의 역사적 평가는 폭력 혁명에 대한 진정한 찬사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정당들에서는 폭력혁명의 의미에 대한 언급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고려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사상은 대중 속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선전과 선동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은 국가의 ‘사멸’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고 있다. 엥겔스의 논의는 다음과 같다.

 

폭력은 역사에서 (악의 수행자라는 역할 이외에) 혁명적 역할이라는 또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폭력은 새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남은 사회의 산파이자 수명이 다해 굳어버린 정치적 형태를 파괴하는 사회운동의 도구라는 것 — 뒤링 씨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착취경제를 전복하는 데 혹시 폭력이 필요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탄식과 신음 속에 용인할 뿐이다 — 유감스럽게도 모든 폭력 행사는 그것을 사용하는 자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승리한 모든 혁명은 고도의 도덕적·정신적 양양을 가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독일에서는 인민에게

강요될 수도 있는 폭력적 충돌이 30년전쟁⁶의 굴욕 때문에 민족의식 속에 스며든 노예근성을 뽑아버린다는 이점이라도 있을 텐데 말이다. 이렇듯 흐리멍텅하고 맥없고 무기력한 설교조의 사고방식을 역사상 유례없이 가장 혁명적인 당에 감히 밀어넣으려 드는 것인가?(독일어 제3판, 제2편 4장 끝)⁷

 

엥겔스가 1878년부터 죽기 직전인 1894년까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끈질기게 제시한 폭력혁명에 대한 이러한 찬사가 어떻게 국가 ‘사멸’에 관한 이론과 결합해 하나의 이론을 이루는가?

 

보통 이 두 가지는 절충주의적으로 결합된다. 즉 때로는 폭력혁명이 때로는 사멸이 아무런 원칙 없이 혹은 궤변적으로 제멋대로(또는 권력자의 마음에 들게끔) 선택되는 식으로 결합된다. 이때 적어도 100번에 99번은 ‘사멸’을 전면에 내세운다. 변증법이 절충주의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오늘날의 공식 사회민주주의 문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물론 이런 식의 바꿔치기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런 예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로 변조할 때 변증법을 절충주의로 바꿔치는 것은 대중을 기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것은 그럴듯한 만족을 주며, 마치 과정의 모든 측면, 모든 발전 경향, 모든 모순적 영향 등등을 고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사회의 발전 과정에 대한 통일적이고 혁명적인 이해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폭력혁명 불가피성에 대한 이론이 부르주아국가를 겨냥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뒤에 가서 더욱 상세히 살펴보겠다. 부르주아국가가 프롤레타

리아국가(프롤레타리아독재)로 대체되는 것은 ‘사멸’이라는 방식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엥겔스의 폭력혁명에 대한 찬사는 마르크스의 여러 언급과 완전히 부합하는데(『철학의 빈곤』Das Elend der Philosophie의 끝부분과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의 끝부분에 있는 폭력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한 당당하고 공공연한 설명을 생각해보라. 또 그로부터 약 30년 뒤인 1875년의 『고타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¹⁰에서 마르크스가 고타강령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무자비하게 질타한 것도 생각해보라) 이 찬사는 결코 단순한 ‘열광’이나 선언 또는 논쟁적 공격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이론 전체의 밑바탕에는 폭력혁명에 대한 이러한, 바로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대중을 체계적으로 이끄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오늘날 지배적인 사회배외주의적 조류나 카우츠키적 조류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양자 모두 이러한 선전과 선동을 무시해온 사실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프롤레타리아국가에 의한 부르주아국가의 대체는 폭력혁명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국가의 폐지, 다시 말해 모든 국가의 폐지는 ‘사멸’ 이외의 방식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혁명적 상황들과 혁명 경험의 교훈을 낱낱이 연구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상세하게 또 구체적 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면 이제 그들의 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으로 넘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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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본문 제4장 3절은 1918년 12월 17일 이전에 쓰임.

페트로그라드에서 ‘삶과 앎’ 출판사가

단행본으로 1918년 출판.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에서 ‘코뮌’ 출판사가

1919년 출판한 책을 참고하여 1917년에 쓰인 초고에 따라 번역.

 

초판 서문

 

국가문제는 현재 이론적인 면만이 아니라 실천적·정치적인 면에서도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제국주의 전쟁은 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을 극도로 가속화하고 강화하였다. 국가는 막강한 자본가 동맹들과 갈수록 더 긴밀히 결합하여 근로대중에게 점점 더 엄청난 압제를 가하고 있다. 선진국들 — 그 전선(戰線)이 아니라 후방 — 은 노동자들을 가두어놓는 군사감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가져온 전대미문의 공포와 참혹함으로 인해 인민들의 처지는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가 완연히 무르익고 있다. 이 점에서 국가와 혁명의 관계 문제가 실천적 중요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간 비교적 평화로운 발전기를 거치면서 축적되어 온 기회주의 요소들은 전 세계의 공식적 사회주의 정당들 내에 사회배외주의(Sozialchauvinismus)라는 지배적 조류를 탄생시켰다. 말로는 사회주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배외주의인 이러한 조류(러시아의 플레하노프 Plechanov, 포트레소프 Pottressow, 브레스콥스카아 Breschkowskaja, 루바노비치 Rubanowitsch, 그리고 다소 베일에 싸인 체레틸리 Zereteli와 체르노프 Tschernow 씨 및 그 일파, 독일의 사이데만 Scheidemann, 레긴 Legien, 다비트 David 및 여타 인물들, 프랑스와 벨기에의 르노텔 Renaudel, 게드 Guesde, 반데르벨드 Vandervelde, 영국의 헌드만 Hyndman과 페비안주의자[2] 등등)의 특징은 소위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자기네’ 나라 부르주아지의 이익뿐만 아니라 특히 ‘자기네’ 국가의 이익에 노예처럼 비열하게 순응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순응의 배경은 이른바 열강들 대다수가 오랫동안 모든 약소민족을 착취하고 억압해왔다는 데 있다. 제국주의 전쟁은 이 같은 약탈품 분할이나 재분할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이다. 부르주아지의 영향, 그 가운데 특히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근로대중의 투쟁은 ‘국가’에 관한 기회주의적 편견에 맞선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는 먼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살펴보고 그중 특히 망각되었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왜곡된 측면들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 다음 이 왜곡의 주요한 대표자, 즉 제2인터내셔널(1889~1914)의 가장 잘 알려진 지도자이자 현 전쟁 기간 중에 비참한 파산을 맞이한 인물인 카를 카우츠키 Karl Kautsky를 특별히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1905년과 특히 1917년의 러시아 혁명 경험이 남긴 주요한 결과를 총괄해보겠다. 1917년의 혁명은 현재(1917년 8월 초) 그 첫 번째 발전 국면을 끝맺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혁명 전체는 제국주의 전쟁이 야기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사슬의 한 고리로 파악될 때에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과 국가의 관계 문제는 실천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족쇄에서 해방되기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대중에게 설명해주는 문제라는 점에서 매우 급박한 중요성을 갖는다.

 

1917년 8월

레닌

 

2판 서문

 

이 2판은 거의 아무런 수정 없이 출판되었다. 단지 제2장 3절이 덧붙여졌을 뿐이다.

 

1918년 12월 17일

모스크바에서 레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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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이후의 불꽃


레닌, 『국가와 혁명』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읽고 있다. 1991년에 소비에트가 붕괴되었음에도, 그 대의와 의의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스크라』의 집필진들의 노력과 사회민주노동당, 그리고 공산당의 주역들이 현재까지 감행하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폐지는,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강조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주는 진정한 의미, 계엄 상태로 인한 파괴된 국가 기구를 지난 이후에, 프롤레타리아트 국가가 형성된 이후의 사멸되는 국가 체제에 대한 정당성에 힘을 실어준다. 


획기적이면서도, 이 유효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다. 감추고 싶던 '혁명적 열망'이 가장 논증으로 전개된 저작이 바로 『국가와 혁명』이라는 점은 곧 제시할 본문을 참고한다면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만큼 수준이 매우 높기도 하지만, 가장 명료하게 서술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기초인 이유일 것이다. 결국, 이들은 부르주아 국가 기구의 한계를 앞서 파악하였고, 레닌과 볼셰비키는 이를 해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대러시아, 아니 소비에트가 모든 나라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력은 아무리 부정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고도의 경지와 같다.


노동 해방과 당에 대한 의견들도 종합해볼 수 있는 시간이다. 최종적인 지점에 서있지만, 각국의 진행 상황이 매우 엄청난 잠재력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될 때조차, 이 국가와 혁명의 관계성은 우연적으로 시작하더라도, 결국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국가 권력의 탄생 이후로, 무산 계급 출신의 노동자가 전개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표현이자 현존하는 가장 큰 대항력, 그리고 그 유효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국가의 사멸이 비록 저절로 주어지지 않더라도, 혁명 조직은 더욱 기층부터 넓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단순히 민주적 요구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아니, 도약을 위한 실패까지 예상한 일이다. 


인간사의 기나긴 어두운 공백기를 지나 우리가 혁명을 움켜쥐려 했다면, 역사는 국가와 혁명이 우리에게 지금도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그 잠재적 부활에 첫 걸음을 알리게 되어 큰 영광이다. 아무리 생애가 노동으로 점칠되었다고 할지라도, 『이스크라』의 불꽃은 광야의 불씨가 되어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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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Ⅸ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1)

 

- 레닌이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보내는 회답 -

 

『노이에 짜이트』 제42호, 43호에 게재된 로자 특설부르크 동지의 논문(「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은 우리 당 내의 위기에 관한 나의 러시아어 로 써어진 저서(「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비판한 것이다. 나는 독일 동지들이 우리 당의 문헌에 주의를 기울인 것과 그것을 독일 사회민주당에 소개하려고 시도한 것에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노이에 짜이트』에 실린 로자 특설부르크의 논문이 내 저서와는 무관한 어떤 별개의 것을 독자에게 소개 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이는 다음과 같은 예에서 명백히 보인다. 예를 들어, 특설부르크 동지는 내 저서에 ‘비타협적인 중앙집권주의’의 관점이 명백하고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특설부르크 동지는 내가 어떤 조직 체계에 대항하여 뭔가 다른 조직 체계를 주장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 저서 전체를 통하여 내가 옹호한 것은 어떠한 당 조직의 어떠한 체계에도 적합한 초보적인 원칙이다. 내 저서는 어떤 조직 체계와 다른 조직 체계 사이의 차이를 검토한 것이 아니고, 당의 사상을 견지하면서 임의의 체계가 유지되고 비판되고 교정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검토한 것이다. 또 특설부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레닌의 개념에 따르면, 중앙위원회에 당의 모든 지방위원회를 조직할 전권이 부여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는 내가 제출된 당 조직 규약 초안으로 문헌상 증명할 수 있다. 이 초안에는 지방위원회를 조직할 권리에 관해서 한 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당 규약을 작성하기 위해 당 대회에서 선출된 소위원회가 이 권리를 당 규약 속에 삽입하였으며, 당 대회가 소위원회의 초안을 채택하였다. 이 소위원회에는 나와 당 대회 다수파의 지지자인 다른 한 명 외에, 당 대회 소수파의 대표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중앙위원회에 지방위원회를 조직할 권리를 부여한 이 소위원회는 나의 반대파에 의해 지배 되고 있었다. 록셉부르크 동지는 두 개의 상이한 사실을 혼동하고 있다. 첫째 로, 그녀는 나의 조직 초안을, 한편으로는 소위원회의 수정 초안과, 다른 한편 으로는 당 대회가 실제로 채택한 조직 규약과 혼동하였다. 둘째로, 그녀는 규 약의 특정한 조항의 특정한 요소에 대한 용호(이를 용호하는 데 내가 비타협 적이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나는 소위원회가 가한 수정에 대해 전체 회의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와, 당 대회가 채택한 규약은 차기 대회에서 변경될 때까지는 실행되어야 한다는 명제(정말로 ‘초중 압집권주의적인’ 명제 아닌가?)에 대한 용호를 혼동하였다. 실제로 나는 이 명 제(독자가 쉽게 알아챈 수 있듯이 ‘순불량주의적인’)를 내 저서에서 아주 ‘비 타협적으로’ 용호하였다. 록셉부르크 동지는 내가 “중앙위원회가 당의 유일한 실질적 중해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결코 이러한 의견을 용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반대파(제2차 당 대회의 소수파)는 그들의 인쇄물을 통해, 내가 중앙위원회의 독립성, 자주 성을 충분히 주장하지 않았고 중앙위원회를 해외에 있는 중앙기관지 편집국과 당 평의회에 너무 종속시켰다고 나를 비난하였다. 나는 이 비난에 대해 나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즉, 당의 다수파가 당 평의회에서 우세했을 때에 당 평의회는 전혀 중앙위원회의 자주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행하지 않았지만, 당 평의회가 소수파에 의해 장악되어 그들의 무기가 되어 버리자 즉 시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답하였다. 록셉부르크 동지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에서 통합된 당의 필요성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논쟁은 중앙집권회의 크기라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약 록셉부르크 동지가 다수파를 형성한 당의 여러 지방위원회의 결의안을 조사하려고 노력했다면, 그녀는 우리 사이의 논쟁이 주로 중앙위원회와 중앙기관지가 당 대회의 다수파의 경향을 대표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져 온 것임을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이것도 나의 저서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다). 이 ‘초중앙집권주의적인’, ‘순불량 키주의적인’ 요구에 관해서 경애하는 동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부분이 전체에 기계적으로 복종한다든가, 노예적인 순종이라는, 맹복적인 복 종이라는 동등과 같은 여타의 허가비들이 대해 비난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는 노예적인 순종이 당에 아주 해롭다는 심오한 사상을 설명해 준 것에 대해 록셈부르크 동지에게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다음의 사항을 알고 싶다. 즉, 당 중앙기관 내에서 당 대회의 소수파가 우세를 점하려고 한 것을 동지는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 그녀는 이 같은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 그러한 것을 어떠한 당에서도 본 적이 있는가? 록셈부르크 동지는, 내가 러시아에서는 극단적으로 중앙집권화된 커다란 노동자당을 조직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양 말하였다. 역시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나는 나의 저서 어디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옹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러한 생각을 서술한 적도 없다. 내가 내세운 명제는 다른 것을 표현했으며, 현재도 그러하다. 즉, 나는 당 대회의 결정들이 지켜지기 위한 모든 조건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당 기관이 사적인 써클의 음모에 의해 교체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우리 당 내의 몇몇 학자가 자신들의 비철저성, 동요성을 적나러하게 드러냈다는 것,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무규율성에 대한 책임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탓으로 들릴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러시아 노동자는 다양한 기회를 통해 당 대회의 결정들을 준수하려는 의지를 이미 여러 번 표명해 왔다. 록셈부르크 동지가 이러한 의견을 ‘납관적인 것’(오히려 ‘비관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이라 선언하면서도, 나의 명제가 사실상 기초하고 있는 근거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봉스러운 일이다. 록셈부르크 동지는 내가 공장의 교육적 의의를 찬미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내가 당을 공장과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나의 반대파였다. 나는 그를 몹시 조소하였으며, 그 자신의 말로써 그가 공장 규율의 상이한 두 가지 측면을 혼동하고 있음을 증명했던 것인 바, 유감스럽게도 록셈부르크 동지 역시 이러한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록셈부르크 동지는, 내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란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 조직과 결합된 자코뱅주의자라고 규정함으로써 나의 반대파 중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지에 찬 방법으로 나의 관점을 특징지었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자코뱅주의를 처음으로 운운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악별로드었다. 악별로드가 최초로 우리 당의 경향성을 프랑스 대형명 때의 경향성과 비교했다. 나는, 이러한 비교는 현금의 사회민주주의를 혁명파와 기획주의과로 구분하는 것이 산악파와 자동드파의 구분과 어느 정도 대응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고 했을 뿐이다. 이러한 비교는 당 대회에 의해 승인된 구"이스크라"가 자주 인용했다. 구"이스크라"는 바로 이러한 구분을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 당의 기획주의적 진영, 즉 구"라보체에 젤로"의 경향과 투쟁할 수 있었다. 이 경우 특별부르크는, 18세기나 20세기의 두 가지 혁명적 유과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과 이를 유래를 동일시한다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움프라우에 대한 사이테그(스위스의 산 이름 — 옮긴이)의 관계는 마치 사증집에 대한 이충집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사증집과 움프라우를 동일시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별부르크 동지의 사이에는 우리 당의 서로 다른 여러 경향에 대한 실제적 분석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명백히 우리 당 대회의 의사록에 기초하여 이러한 분석을 행하는 일에 나의 저서의 대반을 할애하였으며, 서문에서 이에 대해 각 별한 주의를 촉구하였다. 특별부르크는 우리 당의 현상에 대해 서술하려고 하면서도 우리 당 대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당 대회야말로 우리 당의 진정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별부르크의 행동은 분별없는 것이라 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내가 나의 저서에서, 나의 반대파들은 우리 당 대회를 무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의 모든 주장은 사실적 근거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고 수백 번이나 지적하고 있기에 특히 그러하다.

 

바로 이와 동일한 근본적 오류를 특별부르크 동지도 저지르고 있다. 그녀는 그 구체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완전한 헛소리를 반복할 뿐이다. 그녀는 논쟁의 현실적인 논거를 연구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허가비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녀는, 내가 진부한 말, 모두가 익히 이는 원칙 및 개념과 당연한 진리를 주장했다고 하면서, 완전히 구체적인 사실들에 기초한 상대적 진리 — 나는 이러한 상대적 진리만을 다루고 있었다 — 에 관해서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녀는 내가 판에 박혔다는 불평을 하면서, 그 근거로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나 존경하는 이 동지의 논문이야말로 머리로만 생각해 낸 판에 박한 것에 불과하며, 변증법의 가나다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이 가나다는, 추상적인 진리라는 것은 조금도 없으며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라고 주장한다. 록셉부르크 동 지는 우리 당 내 투쟁의 구체적인 사실들은 거만하게 무시하면서, 진지하게 논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판대하게 열번을 토하고 있다. 록셉부르크 동 지의 두 번째 논문에서 마지막 일해 하나를 들어 보겠다. 그녀는 조직 규약의 이러지러한 정식은 기회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예리한 투쟁의 무기가 될 것이 라는 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내가 나의 저서에서 주장했고, 또 우리 모두가 당 대회에서 토론했던 것은 어떠한 정식화에 대해서였던가에 관해 록셉부르크 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어떠한 논쟁이 당 대회에서 행해졌는가? 누구에게 반대하여 나의 명제를 밑고 나아갔는가? 이러한 것에 대해 이 동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녀는 의회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의 …… 기회주 의에 대한 하나의 완전한 강연을 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모든 특수하고 독특한 변종에 대해서, 또 이곳에서 이 기회주의가 취하고 있 는 ─ 나의 저서에서 논하고 있는 ─ 다양한 색채에 대해서는 그녀의 논문 속 에서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이상의 모든 극히 기지에 찬 논의의 결론은 다 음과 같다. 즉, “당 규약은 그 자체로는”(??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사람이 있는가) 기회주의에 반격을 가하기 위한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라, 다만 실제로 존재하는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당 내 다수파의 지도 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외적 수단으로만 될 수 있다. 완전히 옳다. 그러나 우리 당의 실제로 존재하는 다수파는 어떻게 하여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록셉 부르크는 일을 다룰고 있으며, 반대로 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나의 저서 에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나와 플레하노르가 이 외적 수단의 도움을 빌 려 어떠한 영향력을 수호했는가에 대해서도 그녀는 일을 다룰고 있다. 나는 나 스스로 전혀 어디에서도, 그런 무의미한 말, 즉 당 규약은 ‘그 자체’로 무기 라는 난센스를 말한 적이 없다고 천연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나의 견해의 이러한 해석법에 대한 가장 올바른 담은 우리 당 내 투쟁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서술하는 것이라. 그렇게 하면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록셉부르크 동지의 진부한 말과 란에 박한 추상론이 얼마나 해로운가가 누구에게라도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당은 1898년 봄 러시아에서 개최된, 몇몇 국내 조직의 대표자 대회 에서 창립되었다. 당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라고 명명되었다. 『라브차야 가제 타』가 중앙기관지가 되었고, 러시아사회민주주의자해외동맹이 당의 해외 대표가 되었다. 대회 후 곧 당 중앙위원회가 체포되었다. 『라보차야 가제타』는 제2호 이후 발행을 정지해야만 했다. 이들 지방위원회 사이의 유일한 결함은 사상적인, 순전히 정신적인 결함이었다. 의견의 불일치, 동요, 분열의 시기가 또다시 도래했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유럽의 당들에 비해 우리 당내에 훨씬 커다란 비율을 점하고 있던 인텔리젠자는 최신 유행품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유행은 한편으로는 부르주야적 마르크스 비판에 대한 노예적인 숭배, 다른 한편으로는 순전히 조합주의적인 노동운동(파업주의 - 경제주의)에 매우 급속히 자리를 넘겨주었다. 인텔리젠자적 - 기회주의 적 경향과 프롤레타리아적 - 혁명적 경향 간의 의견 차이는 해외동맹의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신문 『라보차야 미술』과 해외 잠지 『라보체에 젤로』(후자는 조금 덜했다)는 경제주의의 대표자가 되어 정치투쟁의 중요성을 격하시키고, 러시아에서의 부르주야 민주주의적 요소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스트루베 씨, 루칸 바라노프스키 씨, 불가코프 씨, 베르자에프 씨 기타 동등의 ‘합법적’ 마르크스 비판가는 모든 것을 우경화시켰다.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 러시아의 경우처럼 베른슈타인주의가 아주 급속하게 그 논리적 규격로서 자유주의적 분파의 형성에 도달한 경우를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스트루베 씨가 베른슈타인주의의 이름으로 ‘비판’에서 시작하여, 유럽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적인 자유주의 잠지』(오스보보즈제니에)를 창간하기에 이르렀다. 해외동맹에서 탈퇴한 플레하노프와 그의 동지들은 『이스크라』와 『자리아』의 창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 두 개의 정기 간행물(이에 대해서는 특별 부르크 동지도 얼마간 들은 바 있다)은 당의 기회주의적 진영에 대해 ‘3년간 에 걸친 영웅적인 전투’, 사회민주주의적 ‘지통드파’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신약파’(이들 표현은 구』이스크라』가 사용한 것이다)의 투쟁, 『라보체에 젤로』(크리체프스키 동지, 아키모프 동지, 마르티노프 동지 등) 및 유대인 분트와 그리고 이 경향을 열렬히 신봉하는 국내 조직들에 대한(특히, 페테르스부르그 의 사이비 ‘노동자 조직’과 보로네즈 위원회에 대한) 투쟁을 수행하였다.

 

위원회들 사이의 순수한 사상적 결합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점차 명료하게 되어 있다. 진실로 결속된 당을 형성할 필요, 즉 1898년에는 단지 정후 만을 보였을 뿐이었던 작업을 수행할 필요를 점점 더 통감하게 되었다. 마침 내 1902년말에 제2차 당 대회를 소집할 임무를 띤 조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주로 『이스크라』의 국내 조직에 의해 결성된 이 조직위원회에는 유대인 분트의 대표 역시 참가하였다. 1903년 가을 드디어 제2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한편으로는 당의 형식상의 통합,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파’와 ‘소수파’로의 분열로 끝났다. 이러한 구분은 당 대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 대회에서 일어난 투쟁의 상세한 분석만이 분열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소수파의 지지자(록셈부르크 동지를 포함한)는 이 분석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

 

록셈부르크 동지가 이상과 같은 독특한 방식으로 독일의 독자에게 소개한 나의 저서는 100페이지 이상을 대회 의사록(약 400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의 자세한 고찰에 할애하고 있다. 이 분석의 결과 나는 대표, 엄밀하게 말하자면 표를(우리 중에는 1표를 가진 대표와 2표를 가진 대표가 있었다) 다음의 네 가지 기본적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즉, 1) 『이스크라』 다수파(구』이스크라』 경향의 지지자) - 24표, 2) 『이스크라』 소수파 - 9표, 3) 중앙파(조소하는 의미로 ‘놀지’파라고도 불린다) - 10표, 4) 반』이스크라』 파 - 8표, 합계 51표이다. 나는 당 대회에서 행해진 모든 표결에서 이들 그룹의 역할을 분석하여, (경향, 전술, 조직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당 대회는 『이스크라』 파와 반』이 스크라』 파의 투쟁의 무대였다는 것, 그 속에서 ‘놀지’파는 많은 동요를 일으켰다는 것을 입증했다. 조금이라도 우리 당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수밖에 없었음을 반드시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수파의 지지자는 모두 (록셈부르크 동지도 포함하여) 이 투쟁에 대해 적당히 눈을 감아 버린다. 왜? 이 투쟁이야말로 소수파가 현재 갖고 있는 정치적 입장의 허위성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수십 가지의 문제에 관한, 수십 번의 표결이 행해질 때마다 당 대회에서 일어난 이 투쟁을 통하여, 『이스크라』 파는 끊임없이 반』이스크라』 파와 ‘놀지’파에 대하여 투쟁하였다. ‘놀지’파는 심의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되면 될수록, 이 문제가 사회민주주의적 활동의 기본적인 의미를 적극적으로 규정하면 할수록, 또 그것이 구』이스크라』 파의 확고부동한 계획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 이로우면 이로울수록 점점 더 단호하게 반』이스크라』 파의 편에 있다. 반』이스크라』 파(특히 아키모프 동지와 항상 그에 동조하였던 페테르스부르그 ‘노동자 조직’의 대표인 브루케르 동지 및 거의 늘상 동조하였던 마르티 노르 동지와 유대인 분트의 5명의 대표)는 구』이스크라』 파의 경향을 승인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종래의 사적 조직을 옹호하였으며, 그것을 당에 종속시키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고, 당과 그것들을 융합시키는 것에 반대표를 던졌다(조직위원회 사건, ‘높지’파의 가장 중요한 그룹인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해산 등등). 그들은 중앙집권주의의 취지로 작성된 조직 규약에 대항하여 투 쟁했는데(대회의 제14회 회의), 그때 그들은 ‘조직원 불신’, ‘비상 입법’, 그리고 그 밖의 위협적인 조치를 실시하고 싶어한다고 『이스크라』파 전원을 비난하였 다. 『이스크라』파 전원은 당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를 조소하였다. 록셉부르 크 동자가 현재, 이러한 날조된 비난을 진실로 수강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 한 일이다. 대회 초반에 『이스크라』파는 압도적인 다수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들은 대회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술한 숫자를 보면 명백히 판 명된다. 그러나 대회의 후반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원칙적인 문제들을 결정 할 때 반『이스크라』파가 승리하였다——약간의 『이스크라』파가 그들에게 동조 하여 투표했다. 예를 들어 우리의 강령 중 모든 언어의 평등이라는 문제에 대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다. 이 문제에서 반『이스크라』파는 강령위원회를 패 배시키고 자신의 정식을 통과시키는 것에 거의 성공하였다. 규약 제1조의 문 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서, 반『이스크라』파는 ‘높지’파와 함께 마르 토프의 정식을 통과시켰다. 이 정식에 따르면 조직의 소속원만이 당원으로 간 주되는 것(나와 플레하노프는 이러한 정식을 옹호하였다)이 아니라, 당 조직의 통제 하에 활동하는 모든 사람이 당원으로 간주된다.*

 

중앙위원회와 중앙기관지 편집국의 선거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한 현상이 일어났다. 24명의 『이스크라』파는 결속된 다수파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편집국 을 쇄신하려는 훨씬 전부터 준비해 왔던 계획을 통과시켰다. 그러하여 6명의 구편집국원 중에서 3명이 선출되었다. 소수파가 된 것은 9명의 『이스크라』파, ‘중간’파의 10명, 1명의 반『이스크라』파(그 밖의 반『이스크라』파——유태인 분 트와 『라보체에 젤로』의 대표인 7명의 반『이스크라』파——는 이미 그 이전에 대회에서 퇴장하였다)였다. 이 소수파는 그 밖의 선거에 참가하는 것을 거부 한다고 결의했을 정도로 이 선거에 불만스러워했다. 카우츠키 동지가 편집국 쇄신 (해산)을 이후 투쟁의 주요 원인으로 말한 것은 매우 올바르다. 그러나 내가(원문 그대로!) 3인의 동지를 편집국에서 ‘축출’하였다는 그의 견해는 그가 우리 대회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는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첫째, 선출하지 않는 것은 축출한다는 것과 전혀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물론 나는 누구도 축출할 권리를 대회에서 가지고 있지 못했다. 둘째, 카우츠키 동지는, 반『이스크라』과, ‘중간’과 및 약간의 『이스크라』 지지자가 연합했다는 사실 또한 정치적 암시를 지니며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대회에서 일어난 일을 고의적으로 외면하려고 하지 않는 한, 다수파와 소수파라는 우리의 새로운 구분이 프롤레타리아적 - 혁명적 진영과 인텔리겐차적 - 기회주의적 진영으로의 우리 당의 종래의 구분의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해석으로도 어떠한 조소로도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감스럽게도 대회 후에 이 분열에 관계된 원칙들은, 충원 문제에 관한 알렉 때문에 모호하게 되어 버렸다. 즉, 소수파는 세 명의 구편집국원이 다시 충원되지 않는다면 중앙기관의 통제 하에 활동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투쟁은 2개월간 계속되었다. 투쟁 수단이 된 것은 보이콧과 당의 교란이었다. 12개의 위원회(이것에 대하여 의견을 나타낸 14개의 위원회 중)는 이 투쟁 방법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소수파는, 자신들의 입장을 『이스크라』 지상에서 제기하라는 우리의(나와 플레하노프가 제기한) 제안까지도 거절하였다. 해외연맹 대회에서 사태는 중앙기관의 성원들이 개인적인 모욕과 매도(전제군주, 관료주의 자, 헌병, 거짓말쟁이 등등)를 뒤집어놓고 정도로까지 되었다. 그들은 개개의 발의를 억압했으며 노예적 순종과 맹목적 복종을 실시하려고 확대하였다는 등으로 비난받았다. 소수파의 이러한 투쟁 방법을 무정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지 어려고 한 플레하노프의 시도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대회 후, 플레하노프는 나에게 예봉을 돌려 획기적인 논문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이스 크라』 제52호에 게재)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정주의와의 투쟁이 반드시 수정주의자에 대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 말이 우리의 소수파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명백하게 보였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의 혁명가 속에 극히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와는 경우에 따라서는 투쟁하지 않아야 하며, 어느 정도의 양보를 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이 개인주의를 가라앉혀 분열을 피하는 최상의 수단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이러한 전해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편집국에서 탈퇴하였다. 그리고 소수파의 편집국원이 충원되었다. 그 후 중앙위원회에 대한 충원을 들려낸 투쟁이 이어졌다. 중앙기관지를 소수파의 손에 남겨 두고, 중앙위원회는 다수파의 손에 남겨 두자는 조건으로 화해하려고 한 나의 제안은 거부되었다. 투쟁은 계속되어 그들은 판료주의, 초중앙집권주의, 형식주의, 자코뱅주의, 슈바이처주의(바로 내가 러시아의 슈바이처로 불렀다), 그 밖의 허케비들에 대해 ‘원칙적으로’ 투쟁했다. 나는 나의 저서에서 이러한 비난 모두를 조소하며, 이것은 단순한 충원상의 알렉이든가, 아니면(이것을 조건부로 ‘원칙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기회주의적, 지통드주의적인 빈발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현재의 소수파는 우리 대회에서 아키모프 동지와 그 밖에 자라가 공인하는 기회주의자들이, 구』이스크라』의 지지자 전원이 옹호한 중앙집권주의에 반대하여 주장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국내의 위원회들은 중앙기관지가 사적 써클의 기관, 충원상의 알렉과 당에 대한 협당의 기관으로 변한 것에 분기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비난을 표현한 많은 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미 상술한 페테르스부르그 ‘노동자 조직’과 보로네즈 위원회(이 두 조직 모두는 아키모프 동지 경향의 지지자이다)만이 신』이스크라』의 경향에 대해 원칙적으로 만족의 뜻을 표명하였다. 제3차 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우리의 당 내 투쟁의 기초 자료를 연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독자라면, ‘초중앙집권주의’에 관한, 그리고 점진적인 중앙집권회의 필요성 등에 관한 록셉부르크 동지의 의견은 구체적, 실천적으로는 우리 대회에 대한 조소이며 또 주상적, 이론적으로는(만일 여기에서 이론 운율할 수 있다면) 마르크 스주의의 명백한 속류화이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왜곡이라는 것 등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우리 당 내 투쟁의 최근 국면은, 다수파의 성원들이 일부는 중앙위원회에서 배제되었고, 일부는 체포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의해 특정지어진다(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던 것은 중앙위원회의 구성상의 변동4)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 평의회(구편집국원이 충원된 후에는 역시 소수파의 수중에 떨어졌다)와 현 중앙위원회는 제3차 대회 소집을 위한 모든 선동을 비난하며, 몇 명의 소수파 위원과의 개인적 협정과 교섭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대회 소집을 위한 선동이라는 범죄를 감히 저지른 — 예를 들어 중앙위원회의 수임자(위임대표)단과 같은 — 조직은 해산되었다.5) 당 평의회와 신중양위원회의 제3차 대회 소집 반대투쟁은 모든 전선에 걸쳐 선언되었다. 다수파는 이에 대해 ‘보나파르트주의를 타도하자!’(이것은 다수파를 대표하여 발언하고 있는 갈로르키6) 동지의 소책자 제목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대응하였다. 대회의 소집에 반대하는 투쟁을 행하고 있는 당 기관들을 반당적이고 보나파르트주의 적이라고 선언한 결의의 수는 점점 더 증가해 가고 있다. 초중앙집권주의 반대, 자치제 찬성이라는 소수파의 모든 논의가 얼마나 위선적인가는 나와 한 동지가 계획한 다수파의 새로운 출판소7(상술한 갈로르키 동지의 소책자와 그 밖의 약간의 소책자가 이 곳에서 인쇄되었다)가 당의 밖에 있는 것으로 선언된 것에서 명백히 판명된다. 새로운 출판소는 다수파에게 자신의 견해를 선전할 유일할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이스크라』의 지면은 다수파에게는 거의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에도 불구하고, 더욱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때문에, 당 평의회는 우리의 출판소가 어떤 당 조직에 의해서도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순전히 형식적인 이유로 위와 같은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제2차 대회의 모든 결정, 모든 선거가 휴지조각으로 되어 버렸기 때문에, 또 당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당 기관들이 행하고 있는, 제3차 대회 소집에 반대하는 투쟁의 결과로서 적극적 활동이 얼마나 많이 중도에서 내방개척했는 가, 사회민주당의 위신이 얼마나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가, 전당의 사기가 얼마나 저하되고 있는가는 거의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이다.

 

1904년 9월 하순에 집필.

1930년『레닌 전집』15권에 처음 발표.

독일어에서 러시아어로 번역.

원고에 따라 인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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