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5. 18.


5·18을 앞두고,

 


민주주의는 밥상에서 시작된다.

 

방금까지 5·18에 관한 글을 쓸지 고민했다. 이전 세대에게 이 사건은 가슴 뛰는 서사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지고의 가치를 헌법에 수록한 헌정사의 투쟁적 의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헌법이 지금까지도 공산주의자를 탄압하는 법률로 자리매김한 것도, 결국 법을 이용하는 인간의 문제에 더 가까울 수 있다. 지금 광주에서는 5·18을 기념하여 지방 시민들이 전야제를 열고 있다. 광주 시민들이 세운 민주 혁명은 그 역사적 의의도 유일무이할 만큼 중대한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그 가치를 값어치로 환산시킨 것도, 가장 어리석은 소수로 인해 자행되었을지언정 결국 국민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이다.

 

‘빽’이 좋다는 이유가 정신적 가치마저 오염시킬 때, 인간에게는 '사랑하기에는 고달프고, 자유롭기에는 촉박한' 가슴 아픈 시간이 주어진다. 너무 가까울수록 서로에게서 더욱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이번 5·18이 주는 교훈이다. 그러나 ‘산 자가 죽은 자 앞에서 말이 없다.’ 발포 사실을 여전히 부정하는 세력의 후손들은 친일 행각과 같이 숨으면서도, 자신들이야말로 ‘청산’을 대변한다며 민주 혁명이 주는 교훈을 도구로 이용해 왔다. 이제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은 유산 계급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은 다가올 선거에서도 시사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도 유공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공자라는 명분을 앞세워 또다시 지배 계급으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정당들은 이처럼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좌파 빨갱이’라는 낙인을 생산하며 스스로 적폐를 만들고, 정작 무고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자신들만의 공화국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니던가. 이 글을 쓰는 본인 정체성 역시 노동자이자, 한국의 도시민이기 이전에 무산 계급이다. 지배 계급은 온갖 교육적인 가치를 동원하여 5·18을 기념하려 할 것이며, 자신들이 발언할 수 있는 유공의 자격을 과시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가장 ‘선의의’ 권력자가 되었고,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지고한 가치 속에 숨어 자신들만의 ‘바쁜 여유’를 누리고 있다.

 

‘민주주의 만세’를 부를 때, 이제 안녕을 고한다. 타는 목마름으로도 그 민주주의를 부를 수 없게 될 때, 그것이 그들의 추도사와 기념식으로 거행될 때조차 우리는 늘 ‘민주주의’를 고민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민주 정부와 함께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들은 이제 ‘새마을’, ‘새시대’, 그리고 '지방 권력'까지 더하여 자신들만의 정의를 내세우고 여전히 노동자를 탄압하여 사냥하고 있다. 그만큼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그럴수록 위태로운 것도 더해지며, 유산 계급이 지배 계급으로서 오직 그들만의 정부로 군림하는 것이 당대의 마주한 현실이다.

 

필자 역시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아마 앞으로도 더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결국 생사이다. 지고한 가치가 떠나가고 절박한 동지마저 모두 죽을지라도, 이번 생을 사는 한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당면하여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일들이 존재한다.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 우리는 각자의 이익만이 남은 바쁜 시간 속에서 겨우 살아남아 숨을 쉰다. 그렇기에 지지세와 무관하게, 더 이상 현 정부의 체제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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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16.


'쌍팔년도식' 논변

 


민주 정부를 표방하는 현 정권이 새마을 운동을 경제 발전을 이룩한 진보적 업적으로 평가했다는 소식이다. 이는 현 집권 세력에게 ‘진보’란 결국 산업화 체제의 잔상에 불과함을 자인한 꼴이다.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광주 학살 이전에 쿠데타 희생자들을 기리던 모습과도 대조적으로, 유신 체제의 산물인 새마을 운동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논리적 비약이자 형용 모순이다. 제아무리 지지율 반등을 노린 정치적 행보라 할지라도, 농협 중앙회조차 씻어내지 못한 그 시대의 오명과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한 행태가 오히려 국가의 정당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현 정부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헌법 가치를 수호해야 할 정부가 유신 체제와 군사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박정희 체제를 비호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며, 지역 갈등을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뿐이다. 이른바 ‘산업화의 성과’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은 실상 지역 간 경제적 격차를 심화시키고 불평등을 고착화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그 허구적 실체임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라 명백한 규탄의 대상이다.

 

당시 산업화의 폐해를 증명하는 통계 자료가 산적해 있음에도 이 정부가 새마을 운동을 직접 언급하며 옹호하는 것은 과거 참여 정부 시절 전두환 정권을 방문해 큰 원성을 샀던 과오를 반복하는 처사이다. 청산해야 할 과거를 지역 갈등 회피라는 명목으로 호도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선열들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일부 학계 및 언론 논객 일각의 근거 없는 주장을 빌미로 차별과 억압은 은폐한 채 '산업 성취'만을 부각하는 모습은 주관을 객관으로 둔갑시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 오명으로 기록되어야 할 잔재를 청산하기는커녕, 특정 어용 집단의 일부와 함께하려는 정부의 태도는 정치적 타락을 의미한다. 선의를 자처하던 이들이 국민을 저버리고 권력 유지를 위해 지지율과 재개발 논리에 매몰된 현실 역시 참담하다. ‘사람이 먼저’라던 구호가 허울 좋은 수식어였으며, 결국 본질은 똑같은 경제 논리였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5·18 기념일과 6·3 지방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이러한 행보를 택한 것은 공존을 거부하는 파괴적 선택이며,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파쟁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전적으로 현 집권 세력 및 비호 세력들에 있는 것이다. 

 

- 추가로, 본고에서 전개하는 핵심 논지는 내부 투쟁 관점에 철저히 입각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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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16.


시진핑 체제의 불안전성



중국이 표방하는 ‘특색 사회주의’란 본질적으로 중앙 집권 국가 체제에 불과하며, 이를 공산당으로 통칭하는 것은 모순이다. 현재의 체제가 공고화될수록 중국은 공산주의의 본래 의미를 되짚기는커녕 이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이는 중국 체제 역시 내부적 교체기에 직면했음을 시사하며, 특색 사회주의라는 선동이 실제로는 청산되지 못한 봉건주의적 잔재의 연속이자 반동적 실체의 일부임이 드러났다. 미·중 갈등 역시 이념적 대립이 아닌 자본주의 경제 체제 내에서의 패권 경쟁일 뿐이며, 결국 문제의 핵심은 국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모순에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이들 지배 계급과 타협하거나 협상할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개인적으로 수행 중인 『공산당 선언』의 재검수 작업은 과거 식민지 국가들의 무산 계급 공산당 건설 운동과 무관하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은 불필요하다. 중국이 진정한 의미의 중앙 당국으로서 위상을 지닌 공산당이었다면, 이러한 사상적 과업에 대해서도 개인적 수준만 아니라, 별도의 혁명적 연대를 제공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방치하고 만 중국 당국에 대해서도, 그 책임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현재 진행 중인 미·중 협상 관계는 설령 절차적 동의가 허용되지 않더라도 파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중국 내부의 안정화에 전혀 기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정 인민을 위한 길도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만적인 구도에는 명백한 반대를 표한다. 이는 마르크스 관점에서도 명백한 ‘반동’으로 규정될 수 있다. 지금 시진핑 정권이 주력해야 할 과제는 미국과의 타협을 도모하는 협상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 내부의 누적된 폐해와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복구하는 일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기만적 구도에 전면적인 반대를 표명한다. 

 

- 아울러 본 입장은 한국 공산 정당을 지지하며, 북한 정권에 대해서는 일체의 지지 의사 역시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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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02.


'성과 노동’

 

 

부유한 여성이 젠더를 운운할 때면, 가난한 여성은 자신의 섹스에 대해 고민한다. '좋았어'라는 말만큼 가장 곤란한 말도 없다. 이들이 자신에 대해 당당하게 노동자로 밝히는 일은 드물다. 아마도 성과 노동은 젠더로 매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남성과는 달리 가난한 여성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글을 쓰는 일 또한 극히 드물다. 부유한 여성들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여성들을 포용하며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지만, 가난한 여성들은 그러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는 부실한 생계를 겨우 유지하며 제 자리를 지켜낼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무지개를 밝히며 다양성의 권리를 말할 때에도, 가난한 여성은 평생을 고민해 온 자신의 신체 그 자체를 부정하며 외형을 고쳐야 한다는 강박에 다시금 사로잡힌다. 여성들은 서로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노동자 여성에게 ‘자신을 꾸미는 일’조차 여전히 억압이다. 이들에게 가해지는 피상적인 위로가 오히려 이들을 더욱 소외시킨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물며 노동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여성은 전체 중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부르주아 여성의 서사를 성실히 뒤따르며 자리매김하는 동안에도, 일터의 여성들은 일부 남성들의 부당한 대우와 언행을 견디며 사회적 모욕을 감수하거나, 같은 여성 사이의 계급 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암묵적으로 겪게 된다. 그러나 일터의 여성들은 자신의 부당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유한 여성처럼 이 세계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오만 자체에 대응할 여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누구보다 가장 성실하게 일하며 또한 자본 노동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대가로 자신을 돌볼 시간마저 빼앗긴다. 부유한 여성들에 비하면 가난한 여성들은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지 못한 채 침묵하는 것, 이것이 여성의 주관성에 부여된 가장 악명 높은 굴레가 된다. 온갖 이론으로 무장한 성적 담론들이 일터에서조차 소외된 그녀들에 대해 오히려 옥죄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동등한 성적 권리를 말하면서도 그 대우가 노동자에게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가장 우월한 위치에 도취해 상대를 비하할 자격을 갖지만, 그 누구도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저 자신의 경제적 위치를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식만으로 스스로를 드높이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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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02.


노동절, 여전히 소외된 노동의 현주소

 


올해는 조금 특별한 날이다. 국가가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 대신 ‘노동절’로 공식 명칭을 공표하였기 때문이다. 그간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체적 존재가 아닌, 단순히 ‘성실히 일하는 사람’을 뜻하는 ‘근로자’라는 명칭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두어 왔다. 이번 명칭의 개정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비로소 자신을 ‘노동자’ 부를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확보하게 된 셈이다.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조차 국가와 법의 허락을 얻어야만 겨우 인정받을 수 있는 현실은, 노동자의 처우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자라는 본성을 지니는 순간, 가족의 안위는 물론 자신의 생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민주노총에서 활약했던 철도 노조원 출신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음에도, 노동절을 하루 앞두고 현장 노동자들에게 ‘책임 의식’만을 강조하고 나섰다. 화물 연대를 비롯한 전국 단위 노조들이 노동권 증진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를 ‘귀족 노조’나 ‘좌파적 요구’라는 형식에 가두며 이제는 정부가 노동자를 책망하고 있다. 노동자 내부의 갈등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부가 노동절 전날 공공연하게 노조를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교섭 과정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매일 노동 신문」 등의 보도에 따르면 사측 기업 대부분이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고 있음에도, 「노동자 연대」는 이러한 본질적 문제 전반을 강력히 제기하지 못한 채 정부의 입장에 끌려다니며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욱이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연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거듭 강조하지만, 이는 이미 부유한 정부의 입장에 순응하라는 ‘통합형 요구’이자 노동자의 목소리를 제한하려는 굴레에 불과하다. 그사이 언론의 외면 속에서 화물 노동자들은 불의의 사고로 산재를 당했다. 정부와 노동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며 침묵을 지켰다.

 

국민들의 개혁 기대감은 높지만, 그 자신의 실적과 지지율의 성과를 의식하며 내뱉는 정부의 ‘친절한’ 발언들은 노동자를 하대하는 태도와 맞물려 모순을 빚고 있다. 이는 투쟁하는 노동자를 회유하기 위해 벌이는 기업의 인질극과 닮아 있다. 성과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할 때에도 논쟁에서 중요한 점은 노동자가 정당한 몫의 임금을 요구하는 것임에도, 정부는 노동자의 처절한 현실 대신 겉으로 보이는 ‘그 사회의 정상성’에만 표면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생존에 위협받는 이들을 더 위험한 노동으로 내몰면서, 정작 복지를 수혜받는 사람들의 ‘투정’으로 치부한다. 사법 시험 합격과 출세주의를 훈장처럼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노력’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만의 우월한 오만에 대한 발로일 뿐이다. 그리고 그 자신들도 ‘근로’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번 정부의 발언은 여전히 노동자와 선을 긋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비약적인 자본의 축적과 주식 시장의 활황 속에서도 산재 노동자와 현장 노동자들은 스스로 정당한 몫을 요구하지 못한 채, ‘좌파적 요구’라는 제약 속에 갇혀 있다. 오늘 전태일 열사 동상을 자발적으로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반인들의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전태일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던 그 ‘청렴한’ 정부가 이제는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는 ‘불손한’ 정부라는 실체를 숨기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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