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02. 


'가난한 인민일수록 자신의 생활 전반에서 더 누릴 수 있어야 하지만, 지도부의 일원일수록 그래서는 안 된다.' 

 

요즘 지도부 일원의 전반을 보면 이를 반대로 행하고 있다. 정치적 주체도 아닌 낭비적 주체 같다. 인민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음에도, 지도부는 자국의 멸망을 독촉하거나 인민의 의지를 저버리고 만다. 지도부가 투명해야 할 때, 저 아메리카의 공교육마저 무너진 시점에서, 정치인들은 과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자녀까지 보호하고자 서로를 죽이도록 만들고 있다. 

 

사실 진정한 금욕의 의미는 높은 자리의 정치인들에게 강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들에게 재분배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본래 기초였다. 그러나 모든 체제는 소수의 사람들로 인해 변질되기 마련이다. 단순히 그들은 소수자임에도 자본가들과 더불어 지분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거론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비록 출마 선언을 한 미국의 뉴욕 시장인 맘다니 역시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대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내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한다. 

그저 읽고 넘어가시길. 

 

지금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소속된 도시민의 일원이지만, 가끔 나 역시 이르고 정당하게 선출된 지도부의 일원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잠시 눈을 감고 들으면 그 목소리는 꼭 지나간 인민들의 부름 같다. 그런 점에서 모든 정책은 단순히 실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민의 삶이요, 곧 실천해야 할 제도인 것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어떤 도로에 눈이 쌓여 길이 막혀 다같이 치우기로 약속했다면, 각자가 전담하여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눈을 치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하지 않고, 눈길을 내버려두고 단순히 재산이 많다거나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꾀를 부릴 수 있다면 그 역시 남은 사람들이 눈길을 치울 수밖에 없다. 새치기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행위들이 모인다면 눈길은 방치되고 결국 도로는 정체된다. 

 

지금의 사회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개인만이 남으면 그렇게 된다. 몸이 불편하거나 힘이 든다면 쉬고 나중에 다시 일하면 된다. 하지만 꾀를 부리는 사람들로 인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정작 쉬지도 못하고 남은 일을 마저 한다. 이것이 곧 사회의 모순이라 부를 수 있다면, 사회적 실험을 하지 않더라도, 어느 집단이든 이러한 사례는 많다. 다만 눈치채고 있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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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9. 01. 

 

어느덧, 「이른바 시장 문제에 대하여」라는 소논문도 마지막 장을 향해간다. 스탈린과 비슷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예전부터 늘 정돈되지 않은 자료를 읽을 때면 아무리 흥미가 생기더라도,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읽기가 참 힘들었다. 어려운 용어라면 차라리 사전을 찾으면 되지만, 오히려 독해력과 추론력 같은 독자 능력을 따지기 전에, 과연 독자들에게 얼마나 전달할 만큼 개념을 잘 정의했고, 용어 사용을 하고 있는지를 고려한 경우가 다른 책에서도 매우 드물다. 번거롭더라도, 글을 요약하거나, 정리해보면 번역의 중요성을 실감하기도 하고, 기존의 필기 교육이 그대로 답습만 한 것은 아닌지, 또는 겉으로 훑어보기만 해서 대략적으로 이해한 것도 아닌지,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만든다. 따라서 독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필자의 전달 방식에도 있었다는 걸 새로이 알게 된다. 대체로 시중에 출판되는 책들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 그 가치도 생각해보게 됐으니까 말이다.

 

개념은 많은 의미를 생략할 수 있다. '착취'라는 개념에서도, 그 속에는 수 많은 역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래 전 서적이더라도 잘못된 번역이나, 오역을 고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건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해당한다. 보다 중요한 건, 화자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필자일수록, 그것을 갖추지 못한 독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자본』같은 경우에도, 번역한 사람들은 그 자신이 매우 어수선하거나, 대단한 전문가라도 정작 때로는 전문적인 개념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실감한다. 덕분에 기초 교양 수준보다 못한 이론들도 우후준숙으로 생겨난다. 아무리 말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그걸 납득할 수 있는 건 본인 몫이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설득조차 안 된다면, 그건 다른 문제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말은 실제로는 어려운 말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박노자 씨의 인터뷰를 봤다. 그가 자신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의외로 놀랐고, 그의 저작들을 되돌아봤을 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게 무엇도 없었다는 점에 더욱 감탄한다. 또 최근에 역사적으로는 조선 공산당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한 박노해 씨에게도 해당된다. 예전에 그는 '한국의 레닌'이라 불리우던 김문수 씨와 더불어 제법 이론에도 빠삭할 만큼 운동권에서도 강력한 입지를 가진 인물이었지만, 지금은 노동 운동의 수준을 천박하게 더 낮추고 말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옆 동네『자본』을 번역하고 계신 채만수 씨도, 한때는 제법 걸출한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논란이 많은 번역을 제공해서 할 말을 더욱 잃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국내에서도 예전부터 필요한 게 오히려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위한, 치밀한 전문적인 통계와 분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운동권 학자들은 오히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박노자 씨는 구 소련 국가에서 거주해본 이력이 있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운동권 세대가 자신 있게 그들의 저작을 읽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합리적인' 의문을 표해보는 바이다.

 

아무리 훑어보고, 밑줄을 긋고, 인용을 하더라도, 역시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교훈을 삼아본다. 아무리 교과서와 같은 책 한 권이라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건, 꾸준하게 저자가 말한 바를 읽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비판으로 따져볼 줄 안다는 말이겠다. 그런 점에서, 시험한다는 건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지, 남을 위한 게 아니다. 무작정 남이 만들어 준 규범이나 규칙을 따른다고 해서 또는 자신의 주장을 가늠해보지도 않고 섣부르게 행동으로 옮긴다는 건, 오히려 약이 아니라 독이 될 뿐이라는 점을 실감하는 날이다. 『자본』으로 바로 넘어가고 싶지만, 이전에 「가난한 농민에게」와 「인민의 벗」은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두 저작을 먼저 다루고 특히「인민의 벗」은 2장이 소실된 관계로, 1장과 3장으로 크게 나누어서 2장으로 정리해서 옮기겠다. 한 가지 생각은 분명해진다.

 

'이론은 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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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27.


계급 역사 철학에 기반함. 


『세계철학사』

 

· 아메리카 철학

- 미국 철학

- 라틴아메리카 철학

- 캐나다 철학


· 아시아 철학

 

· 중국 철학


- 인도 철학

- 한국 철학

- 일본 철학

- 베트남 철학

- 아프리카 철학

 

· 오세아니아 철학

 

- 뉴질랜드 철학

- 호주 철학

 

· 유럽 철학

 

-  러시아 철학

-  동유럽 철학

-  프랑스 철학

-  독일 철학

-  북유럽(스칸디나비아) 철학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  영국 철학

-  이탈리아 및 스페인 철학

-  오스트리아 철학

-  벨기에, 네덜란드 철학


· 중동(지중해) 철학

 

- 이집트 철학

- 바빌로니아 철학

- 그리스·로마 철학(아리스토텔레스·헬레니즘)

 

헤겔, 『세계사 강의』(1822-1823)

 

· 동방 세계


- 중국

- 인도

- 페르시아

- 이집트


· 그리스


· 로마


· 게르만

 

레닌, 『철학사』 정리

 

Ⅰ권

 

· 이오니아 학파

· 피타고라스 학파

· 엘레아 학파

· 헤라클레이토스 학파

· 로이키프 학파

· 데모크리토스 학파

· 아낙사고라스 학파

 

Ⅱ권

 

· 소피스트 학파

· 소크라테스 학파

· 플라톤 학파

·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 스토아 학파

· 에피쿠로스 학파

· 회의 학파

 

Ⅲ권

 

· 헤겔, 플라톤 『대화록』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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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27. 


비판 연구에서 한 논리를 읽고자 할 때는 모든 주장에 동의하기 보단, 먼저 의문을 많이 던져봐야만 한다. 시대적 한계에 봉착한 사람들에게, 헤겔을 기념해서 되짚어 본다. 북한에서도 헤겔을 관념론이라 비판하지만, 정작 헤겔 논리학을 잘 다루지는 못했다.

북한 역시나 과도한 사상에 대한 몰두로부터 철학에 대한 역사와 부르주아지만을 위한 교양 철학으로 변증법을 다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도 학습 추천으로 헤겔 저작을 따로 추천했었다. <논리학>은 강의에 대한 소론이나, 의의로나 변증법에서 생겨난 모순이라는 개념만이 아니라 모순이라는 운동에서 꼭 해소(해결)만을 과제로 삼지는 않는다. 부정에 대한 부정(부정의 부정)이라는 관계 정립(정리)과 개념, 특수한 문제에 대한 보편적 성과와 개념의 종합에서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여지를 헤겔 연구로부터 비판적 사고만이 아니라 사고적 비판에서도 유물론에 대한 본질로도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와 같은 접근으로는 부르주아지 논리학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변증법을 철저하게 의존하더라도 관념적인 특수성을 버리고, 유물론에 대한 논리로, 그리고 현실로도 적용한다면 훨씬 타당하기 때문이다.

 

단지 발전하는 단계만이 아니라 투쟁(운동)에 대한 전통으로부터, <논리학>에서 드러나는 변증법과 시대적 문제를 혁명 운동으로 볼 수 있다. <논리학>을 심화된 과학에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따라서 교육 성과와 철학적 논의까지 이어갈 수 있는지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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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프랑스 혁명

 

지금까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은 아니었다. 한 사상은 잘 다듬어지고 거듭 숙고한 결과로부터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아주 깊은 고민을 가졌다. 『프랑스 내전』을 읽어본다면, 엥겔스 서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도 특히 엥겔스는 공산주의가 자유 공화주의와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서술하기도 했다.

 

매우 기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그러나 오늘날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공화주의란, 진보적인 자유주의와도 매우 다르다. 보수주의에 대한 뿌리는 프랑스에서 잘 알려진 당파 논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로비에스피에르와 자코뱅을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테오르미도르 반동으로 잘 알려진 국민 의회로부터 매수된 선거를 치른 뒤로, 당시로는 귀족이던 부르주아 정치는 막을 내렸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에서 과연 오늘날에도 배울 점은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로비에스피에르는 여러 혁명가들에게도 귀감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로는 프랑스 인민들에게도 도덕에 대한 평가를 선두적으로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화주의를 그저 내세우기만 하거나, 매우 기회주의적인 경향들 조차도, 그러한 공화주의 시각에 대한 논쟁을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매우 민주적이었다는 오해를 삼기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새로운 공화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반대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주장들마저도, 부르주아 정치의 한 형태라는 공화 정치에 대한 민주주의를 말해왔지, 정작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당파 논쟁과 분파로부터 제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현대 프랑스 공산당마저도, 19세기부터는 매우 반동적인 행태를 부려왔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내전

 

따라서 오늘날에도 우리는 레닌에게 또 배울 수밖에는 없다. 아니 확실하다. 우리는 빈약한 사상과, 논고만 드러내고 마는 처음부터 일찍 멘셰비키주의에도 가담한 트로츠키주의나 소비에트를 반동기로 이끈 스탈린주의로부터도 아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레닌은 죽은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우리로는 마르크스와 같이 깊이 배워야 할 유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직 프랑스 혁명에 대한 깊은 숙고와, 같이 일어난 내전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부터도, 그리고 여러 공산당들에 대한 공화주의 혼돈에 대한 경향과 과오로부터도, 단지 호소 시위나 연대 행진에만 그치고마는 매우 '일반적인' 투쟁 형태를 보아도, 오늘날은 레닌에 대한 지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해야만 하는 이유와, 혁명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한계와, 또 현대에서도 드러난 반동 정부들에 대한 '현실'에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혁명 시기, 사회민주주의당 두 가지 전술』에서도, 명쾌하게 구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란 국가로도, 일터에서도 어떠한 점에서 달랐는지를, 더욱 확실한 방향과 목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사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공산주의란 단지 이상이 아니라, 실현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걸, 겉으로 드러나기만 하는 현상이 아니라, 입증해야만 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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