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03. 


결혼이라는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전쟁과 평화』를 애독할 때마다, 극 중 볼콘스키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된다. 두 남자를 사이에 둔 여인의 구도만큼 비극적인 서사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참전 용사로, 자신의 온갖 감정을 전장에서 치렀다. 결말부는 베주코프와 로스토바가 맺어지지만, 이러한 구도는『안나 카레니나』에서 두 인물 사이의 갈등이 초래하는 자살과는 또 다른 비극적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경쟁은 비단 이성 간의 관계를 넘어선 전기·화학적 현상처럼 다가온다. 서로가 같은 사람에게 매력을 느낄 때, 동시에 감정에 빠지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특히 나타샤 로스토바나 안나 카레니나처럼 매력적인 인물이라면 그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인간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필자 또한 마음속으로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었지만, 어떠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연애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러한 매력을 넘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생긴다면, 그것은 서로에 대한 서약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교훈적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진정한 신랑과 같은 인물은 볼콘스키처럼 용기 있는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그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 희생이 단지 국가나 연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의 시도는 두 번 이상 있을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은 단 한 번 주어진다. 그렇기에 '다음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부의 세계가 갈증과 갈등을 안고 있을 때, 아주 드물게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준다. 이는 오직 여성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너무 쉬운 허락이 요구하는 연락 두절을 뜻한다. 필자는 밤에 죽음이 가까워짐을 느끼고는 한다. 그래서 그 시간대는 작업에 집중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대체로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작업의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언젠가 분명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필자는 기대를 저버린 말과 함께 더 독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은 그 전에 남기는 자신과의 서약이 아닐까. 그래서 신부의 세계는, 때로는 잔인하다. 도무지 애증을 느낄 수조차 없는 한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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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9. 09. 


가설이지만, 언어란 지배 수단으로는 매우 효과적이다. 국내에서도 문자에 대한 연구는 많아도, 정작 계급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고 지적한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우리말 연구는 많아졌다. 바깥에서는 외래어가 아닌 우리말 쓰자는 움직임들도 더 세졌다. 그러면서 세종 한글이나 창제했다고 기원이나 떠들고는 초기 집현전, 근대 말모이 같은 여러 언어 운동들은 정작 빼버린다. 언어로도 선구적인 사람을 강조하지, 모여서 조직한 집단을 잘 기리지는 않는다.

 

주로 한자어로 풀이해보자면, 한자어나 영문 표기를 쓰지 말자고 내세워도, 표기를 대체할 언어는 부족하다. 그러나 쉽게 만들어 볼 수도 있다. 자주 드는 예시로는 페미니즘이 있다. 여성주의로 바꾸기만 한다면 끝날 언어일까. 다음으로는 우리말로 새롭게 바꿔야만 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者), 곧 놈이라는 말은 주로 사내에게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여성주의자라고 한다면, 뜻을 퇴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도 같다. 성전환이라는 표기가 그대로 있음에도, 용어를 잘 쓰지는 않는다. 주로 외래 언어를 더 많이 쓰는 형국인지라, 주로 용어들이 생겨난 원인을 두고 딸을 위한, 딸에 대한 말이기 때문이라는 배짱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언어를 영문과 한문으로만 고치고는 난해한 언어만 골라 쓰는 아주 '괴랄한' 철학자들도 있다. 번역에 대한 언어를 계급 수단으로 특히 지배계급도 쓸 수 있다고 못 보거나, 그저 손 맞잡는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추종하는 일부 여성주의 운동가들도 타협주의와 지배계급적인 시각도 밝혀지겠지만,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 까닭이다. 비슷한 예시로는 공산주의 운동을 공산주의'자' 운동으로 표기하는 경우다.

 

쓰는 말에서도, 우리말을 강조하는 다른 글들을 읽어봐도 말바꿈들은 나름대로 참신하긴 하다. 그러나 모든 교과목으로는 학습이 아닌 단지 시험을 위한 용도로만 제작했고, 어려운 말들을 풀어내지도 못한다. 도대체 시험을 수단으로 사교육 시장은 넓어지는데, 정작 혁명에 대한 흥미는 잃어가는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던가. 바로 언어를 만들어봐도, 지배계급들은 언어를 자본화된 생산 수단으로 이용하고는 꾀를 부리고, 사람들에게 쉽게 타협하기만 하고, 혀만 나불거리는 언어를 홍보하거나 팔도록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라는 말 대신에 일꾼이라는 말도 있음에도 잘 쓰지는 않는다. 아직은 우리말로 바꾸는 번역들이나 움직임은 매우 어색하거나 적다. 그리고 국어가 바로 우리말이라고 예찬하는 국문학자, 문학가들은 한자어만 골라 쓴 행태를 부려왔음에도, 정작 글에 대해서는 거리낌마저 없다. 심지어 외래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얼마나 더할까.

 

우리말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는 노동자를 들고 싶다. 세상에는 남성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 일꾼으로 나온다면 좋겠지만, 현실이란 또 다른 싸워내야 할 일이다. 그래서 노동자도 노동자지만, 노동계급, 노동가로 주로 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저 주어진 일을 하는 노동자들보다는, 더욱 무산 독재를 요구하고, 계급으로 싸워낼 줄 아는 노동가들도 더욱 많아져야만 한다. 두서 없겠지만, 노동자든, 노동가든, 노동계급이든, 일꾼이든, 부질 없는 노력이더라도, 자본가들만 판 치는 국내를 보노라면, 그들에게도 맞서 참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프롤레타리아트, 무산계급이라는 많은 이름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있어 번역 연구는 참 어렵다. 매일 같이 들인 노력에 비하면, 문학과 비평은 자유도라도 높지만 실질적인 통계에 기반한 논문이나 서적이라면 번역에 공을 들이기가 어지간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중에 유통이 되는 자료를 수집할 때마다, 가장 큰 문제로는 바로 번역 문제를 꼽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주어와 서술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논리적으로 비약된 문장과 비문의 사용, 외래어에 대한 대체어도 없는 개념의 모호한 정의, '의', '가', '것'과 같은 수식어를 포장하는 조사의 빈번한 사용, 그리고 '표준' 국어에 따른 맞춤법과 띄어쓰기와 같은 선택이 아닌 필수 규정을 들 수 있다.

 

언어란 말을 먼저 배우고 지식을 습득하지만 그러한 규정은 참고할 뿐이다. '표준'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언어를 남용하자는 말도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전문 용어에 대한 정의와 제시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가 특히 독자들에게 충분히 잘 옮겨졌을 때는 매우 올바르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거꾸로 이전의 서적이나 문서에서 나오는 글쓰기의 방식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을 반증하기도 한다.

 

문학이라면 좋은 글과 나쁜 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연구에서는 다르다. 밝히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이고, 사실에 대한 통계를 어떻게 제시할지 충분히 보여 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전체 본문과 결론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갈피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문제를 도통 알 수 없을 때 수정이 요구된다. 특히 언론 보도에서 보이는 글쓰기의 방식은 처참할 뿐인데, 기자가 평론으로 쓴 글에서도 여전히 위와 같은 문법을 지키지 않아서 전달이 명확하지 않는 경우도 여럿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언어 작업은 기술하는 부분에서도 신중을 요하므로, 오히려 인공 지능 검사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더 알맞기도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문장을 기술하는 노력에서 본인은 쉼표를 빈번하게 쓰는 습관이 있지만, 지금은 이를 정정하면서 문장의 간격이 현저하게 줄기도 했다.

 

아무리 난해한 문장이라도 많은 개념들이 내포하고 있다. 물론 본인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석하지 못한 본인의 책임이라고 내세울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까다로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그러한 자신의 생각마저 아무리 단편적인 글에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풀어내서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더욱 축약된 언어 생활과 헷갈리는 단어만 인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언어 생활에서 순수한 우리말의 변환은 좋은 시도일지라도, 그 한계는 연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말은 과학이다. 최소한 우리말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나 문헌학자가 아니더라도, 구체적으로 글쓰기가 자유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표기에 대한 문제라는 관심을 유도할 수는 있어야 하지는 않을까. 국어 '표준'에 대한 정의가 다만 시험을 위해 어려운 문장을 더욱 어렵게 쓰고자 모국어가 있지 않다. 국어 사용이 체계적이었다면 오히려 선택의 비중도 분명 이렇게 비좁지는 않다. 아무래도 읽기에 대한 답을 고르는 해석만 배우고, 작문 쓰기가 소홀한 우리 국어 생활의 실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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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9. 12.


‘박경리는 <시장과 전장>을 쓰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남몰래 울었다. 전쟁에 대한 상처가 생각나서 괴로웠기 때문이다. 만드는 건 새로운 일이었다. 만들 때, 음향, 색채, 모양은 결정된다. 시간은 작품에다 멎는다. 작가는 혼자만 영광을 안아본다. 세상이 생겨도 생활만 있었는데, 소설가로 태어나 글을 쓸까를 생각하면 절망했다. 비록 슬픈 이야기라도,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고, 적으면서 박경리는 시와 같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문자에 대해서 언어와 글은 사랑, 외로움, 예술, 모든 걸 생겨나게 했었고, 언어 장벽에도 갇혀 서로를 알아가지도, 알지도 못하고, 그리워만 하다가 그림자만 밟고 간다. 따라서 언어와 글자는 진실은 아니다. 자뭇 예술가란 언어라는 길을 캐려다 창조자에게 가까워지려는 염원만 남기고 가는 사람이다. 육이오라는 작품 배경 속에서, 사실에 대해서는 상상이라는 재표현으로 다시 글로 표현하고자 했다. 박경리는 여태까지 주로 부정적인 인물 밖에는 그릴 수 없다가도, 이기화를 그리면서, 긍정했다.’

 

씨름장 

 

‘문학을 처음 읽을 때는 먼저 해석들을 참조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맛을 알아가지 못한다면 문학에 대한 정보를 담은 해석들도 무용지물이다. 문학에서 해석한 글들은 사람들이 주로 생각하는 작품에 대한 인상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이란 늘 시대를 염두해두기 때문에 적어도 좋은 작품을 잘 읽는다는 건, 어쩌면 맛을 알아가고, 작품을 이해하고자, 해석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아닐까. 그렇다. 문학이란 독자라는 우리들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과 씨름하면서도, 스스로, 작품에 대한 언어에 대한 해석들을 늘려가는 배움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문학은 실천이고, 배움으로, 모여진 또한 이론이다.’

 

북한 삼팔도

 

지영은 기석을 만났다. 지영의 개 이름은 미미다. 기석은 안경을 꼈다. 지영은 선생이고 늘 어디로 자주 간다. 용산역, 개성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연안행에서 기동차를 타고 떠났다.

 

지령

 

여자를 어디를 가다가 쓰러졌고, 기훈을 만나서, 차 안에서 의사를 불러서 빈혈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여자는 남자를 매우 싫어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도, 썩어빠진 남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곰보 사나이는 문둥이에 판다는 놀림거리라는 상처가 있었다. 기훈이 만난 여자는 여자도 남자를 닮은 사람은 싫어한다.

 

푸른 보리

 

지영은 힐끗 쳐다보는 남자를 지나, 초라한 양옥집 앞으로 간다. 교장선생을 만난다. 지영은 하숙집 구할 때까지 기숙사에서 신세 지기로 하고,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 달구지: 짐수레.


지영 성씨는 남씨다. 정순이도 같이 부임했다. 정혜숙은 교감이다.

 

밀짚모자와 나비

 

K다방에서 하기훈은 신흥상사 오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접견한다. 하기훈이 만난 전에 만난 사람은 이가화다. 18호실 아파트 색시이고,

 

행복의 이야기

 

지영은 김인자에게 보고를 받고, 기석을 만났다. 이 선생은 정순이 남편이다. 지영은 김인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친구의 염세자살을 듣는다.

 

“그럭저럭 십여 년 전의 일이구먼, 동경서 함께 공부할 때 일이었으니까. 나하구 함께 하숙을 했는데, 아주 총명하고 얼굴도 예뻤어요. 그 애가 자살을 했거든. 바로 나하구 함께 자면서 말예요. 그런데 그 애가 노상 하는 말이 이 세상에는 누구나 바라는 그 파랑새가 없다는 거예요. 치루치루 미치루는 산을 넘어 파랑새를 찾아갔다가 못 찾고 집에 와서 파랑새를 보았다 하지만 그건 바보였을 거라는 거예요. 제일 바보들이 회색새를 파랑새라 믿고 살고, 그 다음 바보들이 때때로 회색 새로 보면서 파랑새로 볼려고 애를 쓰고, 그 다음 눈이 바로 박힌 사람들이 제대로 회색을 본다는 거예요. 제일 바보가 인생을 속아 살아서 병신이지만 저 자신은 좋고, 다음은 비겁하고 미련스런 인생을 살고, 세 번째는 숫제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진리는 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애는 세 번째에 속하니 자기는 아무래도 죽을 수밖에는 없다는 거죠.” … “아니, 그렇게 말한 게 아니오. 살아갈수록 그 애 한 말이 생각이 난단 말이에요. 아무튼 우리는 그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에든 속하지 않겠냐 그 말이오. 그러니까 눈이 푹푹 쏟아지는 밤이었구먼. 요나카 소바의 그 구슬픈 가락도 들려오지 않고 마냥 눈만 쏟아지더군. 그날 밤 잠은 안 오고 해서 우린 눈길을 헤치고 행길로 나갔어요. 겨우 군밤을 사갖고 와서 먹었는데 그 애는 자꾸, 혼자서 웃지 않겠어요? 하도 이상하여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행복은 없어도 그걸 안다는 게 멋이 있어 웃는다는 거예요. 그러다간 인생이 멋 없어 못 살겠다 하곤 또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튿날 그 애는 병원에서 죽었어요. 약을 먹었지 뭐예요?”

 

남지영, 김인자, 정혜숙, 정순이, 모두 염세자살 이야기를 듣는다. 김인자도 자신의 이모부가 해방 이후 사업에서 큰 돈을 벌었지만, 고독하다는 이유로, 자살을 해버렸다.

 

이후 석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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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16. 

 

‘무정부주의자’만큼 가장 지독한 말도 없다. 무정부주의자는 그 자신을 지칭하는 모든 언어적 정의를 거부하며, 종국에는 소속된 집단마저 부정하는 극단적 결론에 도달한다. 그들은 무산 계급의 논리에서 공산주의자의 일원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국가의 존립 근거 자체를 부정하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며 운동의 결을 달리했다. 이러한 부정의 정치는 모순적으로, 그들이 무산 계급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산 계급 및 소유 계급의 논리를 따른다. 그들이 유산 계급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적 현상이다.

 

그들은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는 구도자를 자처하나, 노동 운동의 실천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은 그들의 사상적 한계 역시 여실히 드러낸다. 모든 투쟁의 형식을 거부하며 유창한 지적 유희를 누리던 푸르동의 후예들은 ‘국가’와 ‘소유 재산’에 대한 정의조차 불분명하게 방치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소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하위 세력으로 전락했으며, 그것이 ‘가장 반란적인 세력’이라는 수식어는 그들의 사상적 극단성이 맺은 오명이 되었다.

 

독립 국가의 건설 과정에서도 예찬받던 그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이 정작 노동 해방의 국면에서는 국가 체제 내 유공자로 흡수되는 양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이 공산주의자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던 원인은 오히려 국가가 그러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소시민적 성격을 체제 안정의 요소로 포섭했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무정부주의자들은 지역적으로 도처에 존재했으나, 결정적인 계급 투쟁의 순간에는 체제에 안주하는 폐쇄적 태도를 보인다. 이는 그들이 발전적이라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모순을 은폐하려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개인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로 변모하기가 더 쉬운 이유는 그 논리가 명료해서가 아니라, 다분히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언어 뒤로 비무장한 가장 취약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 발전에 맞서며 무산 계급의 실천적 요구마저 외면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른바 선구안이 아닌, 반대로 유산 계급의 일부로 극찬되기도 하며, 그것이 결국 유산 계급 자신의 논리에 맞춘 '모험적' 시도들로 인해 비롯되기도 한다. 그들이 시장 경제의 '교환', '노동', '가치' 등을 논변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낡은 정치경제학의 유산을 철폐하지도 못하는 한, 무정부주의는 체제주의를 보완하는 수사에 머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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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5. 13. 


감언이설은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이로운 조건을 꾀는 말을 뜻한다. 이 말을 김어준, 유시민, 조국과 같은 인물들이 자유 언론에 기대어 온갖 음모론과 터무니도 없는 설전을 벌이며 정치에 대해 친근하게 발언한다. 그들은 가끔 자신의 서적을 출판하여 '고전'을 강조하고, 자신들이 새로운 사상의 주역인 양 떠들어대는 꼴을 보게 된다. 사탕발림같은 소리와 더불어 오늘도 정부 예찬과 약간의 책동을 말하며 계급적 희롱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친분이 두터운 서평가들을 인질로 그러한 '감칠맛'으로 포장한다. 

 

14시간 이상 자본가들과 협상을 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고 말하는 주요 언론사들이 여전히 없는 체를 하며, 노동자들이야말로 소유자라는 '기가 막힌' 논변을 내리며 그들의 이익을 강변하고 있다. 고작 소수인 한 인간 때문에 지금도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사이에도, 일부 국민들은 주가 안정에 대한 방어와 깊은 안도에 안주하며, 전 세계의 전쟁을 볼모로 자신의 생계 노동을 대신할 조그마한 불로 소득을 챙기고자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것이 일종의 재미가 되고, 자신이 자본의 투자자가 될 수 있다 위안 삼으며, 사람들은 경제학을 공부하고, 경영학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가 주입하는 국민에 대한 또 다른 아편에 불과하다. 특히 연령대와 무관하게 이 취약한 국민들은 그러한 주식이라는 아편에서 약간의 수익을 얻거나, 자신의 주린 배를 조금은 채울 수 있는 방식을 터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제한적이고 한정적이다. 

 

아무도, 정부가 유도하는 주식의 가치와 그것의 한계를 여전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놀랍게도, 어떠한 신문 논설에서도 그러한 말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이 정부가 주는 아편에 심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들에게는 투쟁에 대해 잊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바로 자본을 주는 것임을 터득한 정부가, 이번에는 국민들을 우롱하기 시작한다. 불과 선거를 치른 국민들은 다음 정부에 대해 비난을 가하면서도 정작 소득 분배에 따른 국가가 주는 보조금에 감사해 하며 힘찬 보도에 속아 또다시 안도한다. 평화·안녕·행복 등 혀가 긴 가치를 나열하고,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그다음에도, 정부는 국민들에게 또다시 감사하다 말하며, 선거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뒤에서는 노동자들을 희롱할 수 있는 가장 극악무도한 방식을 수단으로 가족의 해체와 온갖 사상을 주입시킬 수 있다. 그것은 기술의 발달 덕분에 자신들의 소유 전반으로 가로채 그것을 이용하고자 시도한다.

 

아, 인간이여, 언제까지 어리석은가. 그리고 독서의 편식도 이제는 주식에 '몰빵한' 빈 잔고와 함께 애꿎은 책만 나무라며, 자신들은 나약하다고 여기며 자책만 하고 있는 꼴을 보면서 똑같이 우스워하고만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저들은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며, 국가의 정상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발판을 찾아 갖은 애를 쓰고 있다. 두 체제가 똑같이 지배자의 국가를 경영하고, 운영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이에도 두 사람은 마치 이산가족처럼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미련만 남은 운명을 사랑이라 여기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애틋한 것만이 우정으로 남았고, 결국, 처벌 수위도 낮은, 심지어 마땅한 형벌도 없는, '쿠데타를 모의한 자'들에게는 자유라는 '빨간줄'만 그어졌다.  

 

그들의 사탕발림은 시대를 막론한다. 시간이 흘러도, 그렇게도 뻔뻔하고, 비열한 장난을 치며 국민 정책을 우롱한다. 다음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그나마 차지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끝까지 두 체제가 부패할 수 있다는 점을 더욱 자처하기 위하여, 그것을 은폐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자부가 그 극단에 치달을 때조차도, 우리는 차분하게 그러한 미친 광경을 또다시 목도하고 있다.  

 

좌파라 자칭하던 반동 분자들이 이제는 '가족 파괴범'이 되어 '보수주의자'라 떠벌린다. 그 피해자란 또다시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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