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생산의 집중과 독점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점점 더 큰 기업들로 생산이 급속하게 집중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의 가장 고유한 특성들 중 하나다. 현대 산업통계 조사는 이 과정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정확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제조업체 천 개 중 대기업, 즉 노동자 5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는 1882년에는 3개, 1895년에는 6개, 1907년에는 9개였다. 그리고 노동자 100명당 이런 대기업에 속한 비중도 각기 22명, 30명, 37명꼴로 늘어났다. 하지만 생산의 집중은 노동자의 집중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는데, 이는 대기업에서의 노동이 훨씬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과 전동기에 대한 자료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에서 상업, 운송업 등을 포함해 넓은 의미에서 산업으로 불리는 것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체 326만 5,623개 업체 중 대기업은 3만 588개로 겨우 0.9퍼센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1,440만 명 중 570만 명, 즉 39.4퍼센트, 증기력 880만 마력 중 660만 마력, 즉 75.3퍼센트, 전력 150만 킬로와트 중 120만 킬로와트, 즉 77.2퍼센트를 사용하고 있다.

 

전체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수의 기업들이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4분의 3 이상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총 기업수의 91퍼센트를 차지하는 (5명 이하의 노동자들을 고용한) 소기업 297만 개에 대한 몫은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7퍼센트에 불과하다! 거대기업 몇만 개가 모든 것이고, 수백만 개의 작은 기업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노동자 천 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은 독일의 경우 1907년에 586개였다. 이 기업들은 전체 노동자의 거의 10분의 1(138만 명)과 증기력·전력 총합의 거의 3분의 1(32퍼센트)을 사용했다.²⁶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화폐자본과 은행들은 한 줌에 불과한 거대기업들의 이런 우월성을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압도적인 탓에, 실제로 중소 규모는 물론 몇몇 대규모 '소유주들'까지 포함된 수백만 명이 겨우 몇백 명의 백만장자 금융자본가들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선진국인 미국에서 생산의 집중은 훨씬 더 강하게 증대하고 있다. 미국의 통계는 좁은 의미의 산업만을 대상으로 연간 생산가치의 규모에 따라 기업을 분류한다. 1904년에 생산고가 100만 달러 이상인 큰 대기업들은 1,900개(전체 21만 6,180개 중 0.9퍼센트)가 있었다. 이 기업들은 총 140만 명의 노동자(전체 550만 명 중 25.6퍼센트)를 고용하고 56억 달러(전체 148억 달러 중 38퍼센트)의 생산고를 기록했다. 5년 후인 1909년, 이 수치는 각기 3,060개 기업(전체 26만 8,491개 기업 중 1.1퍼센트), 200만 명의 노동자(660만 명 중 30.5퍼센트), 90억 달러(전체 270억 달러 중 43.8퍼센트)의 생산고가 되었다.²⁷

 

이 나라 모든 기업의 총생산 가운데 거의 절반이 전체 숫자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기업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3천 개의 거대기업들은 258개 산업부문을 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분명 집중이 일정 단계로 발전하면 저절로 독점에 접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대기업들 수십 개가 자기들끼리 타협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인데다, 기업의 큰 규모 자체가 경쟁을 어렵게 만들고 독점으로 가는 경향을 낳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쟁이 독점으로 변화하는 것은 최근 자본주의 경제의—가장 중요한 현상은 아닐지라도—매우 중요한 현상들 중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오해가 생길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미국의 통계는 250개 산업부문에 3천 개의 거대기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얼핏 각 부문마다 12개씩의 거대기업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산업부문에 대기업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 단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굉장히 중요한 특성은 기업결합, 즉 저마다 다른 산업부문들이 하나의 기업으로 결합하는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료 가공의 연속적인 단계들(예를 들면 철광석에서 선철을 제련하고, 선철을 강철로 제강하고, 그 강철로 여러 가지 완제품들을 생산하는 것)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고, 한 분야가 다른 분야에 보조적인 역할(예를 들면 폐기물이나 부산물의 가공, 포장재의 생산 등)을 할 때 나타나기도 한다.

 

힐퍼딩은 이렇게 쓴다. "기업결합은 경기순환상의 변동을 제거해 좀 더 안정적인 이윤율을 보장한다. 둘째로 기업결합은 중간상인의 개입을 없앤다. 셋째로 그것은 기술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단독 기업에 비해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 그것은 (원료 가격의 저하가 완성품 가격의 저하보다 급속하지 않은) 심각한 불황기 동안 단독 기업에 비해 결합 기업에게 경쟁상의 우위를 강화시켜준다."²⁸

 

독일의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이만(Heymann)은 독일 철강 산업에서의 '혼합 기업', 즉 결합 기업들에 대한 전문서적을 저술했는데, 거기에서 그는 "순수 기업들은 낮은 완제품 가격에 비해 높은 원료 가격에 압박받아 파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광경이 그려진다.

 

"한편에는 석탄 신디케이트로 굳게 조직된 수백만 톤의 석탄을 채취하는 대규모 석탄회사들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강철 신디케이트를 지닌 대규모 제강공장들이 존재한다. 이런 거대기업들, 즉 연간 40만 톤의 강철을 생산하고, 원광석과 석탄을 엄청나게 채취하며, 강철 완제품들을 생산하고, 공장 지역의 숙소에 거주하는 1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때로는 철도나 항구까지 직접 소유하고 있는 이 기업들이 전형적인 독일 철강산업체다. 이렇게 해서 집적은 더욱더 진전되고 있다. 개별 기업들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하나의 산업분야에 속하는 서로 다른 산업분야들에 속하는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거대한 기업들로 결합되며, 베를린의 여섯 개 대형 은행들이 이 과정을 지원하고 주재하고 있다. 독일의 광업은 집적에 대한 카를 마르크스의 학설이 옳다는 것을 정확하게 증명한다. 사실, 이것은 관세와 운임률로 산업을 보호하고 있는 나라에 관한 일이다. 독일 광업은 이제 수탈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²⁹

 

예외적으로 양심적인 이 부르주아 학자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높은 무역장벽으로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사람이 독일을 특별하게 분류하는 것 같다는 점은 지적해뒤야겠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단지 집중 및 기업가들의 독점연합, 카르텔, 신디케이트 등의 형성을 촉진시켰을 뿐이다. 비록 좀 더 느리고 아마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자유무역 국가인 영국에서도 역시 집중이 독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한 사실이다. 헤르만 레비(Hermann Levy)³⁰ 교수는 영국의 경제 발전 수치들을 근거로 하여 '독점, 카르텔, 그리고 트러스트Monopole, Kartelle und Trusts'라는 전문 연구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 기업들의 큰 규모와 높은 기술 수준 자체가 독점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한편 집중은 기업에게 엄청난 양의 자본을 사용하게 만든다. 때문에 새로운 기업은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점점 더 많이 요구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새로운 기업의 출현은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그리고 우리는 이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새로운 기업들은 집중으로 형성된 거대기업의 수준에 도달하려 하면서 저마다 엄청난 양의 과잉 생산물을 생산해낼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수요가 증가할 경우에는 판매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 과잉 생산물들은 새로운 기업에게도, 기존의 독점연합들에게도 모두 손해가 되는 수준으로 가격을 떨어뜨릴 것이다." 보호관세가 카르텔 형성을 용이하게 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영국에서 기업가들의 독점연합과 카르텔, 트러스트는 대개 주요 경쟁 기업들의 수가 "20여 개"로 줄어들 경우에만 생겨난다. "대규모 산업에서 집중이 독점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여기에서 수정처럼 명백하게 드러난다."³¹

 

반세기 전 마르크스가 '자본'을 썼을 때,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자유경쟁을 '자연법칙'으로 여겼다. 자유경쟁이 생산의 집중을 낳고 집중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독점으로 전화한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분석을 논증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이용 학문은 침묵이라는 슬쩍으로 말살려져 했다. 그러나 이제 독점은 사실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개개의 독점 현상들을 기술하는 산더미 같은 책들을 써대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논파됐다"라고 입을 모아 선언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속담에서 말하듯이 사실은 완고한 것이고, 좋은 삶은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이 보여주는 바, 예컨대 보호무역이나 자유무역이나 같은 개개 자본주의 국가들의 차이는 독점이 취하는 형태나 출현 시기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차이들을 낳을 뿐이다. 생산의 집중에 의해 독점이 형성되는 것은 현 단계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인 기본법칙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남은 자본주의를 확실하게 대체한 시기를 꽤 정확하게 단정할 수 있다. 바로 20세기 기초다. '독점 형성'의 역사를 개괄한 최근의 저작들 중 하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60년 이전의 시기에서도 몇 가지 자본주의적 독점의 사례들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매우 보편화된 형태들의 맹아를 그 중에서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카르텔로 가는 전사(前史)일 것이다. 현대적인 독점의 진정한 출현은 가장 이르게 잡아도 1860년대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독점이 성장한 첫 번째 주요한 시기는 1870년대의 국제적인 산업 불황에서 시작되어 1890년대 초까지 지속된다." "만약 이 문제를 유럽 차원에서 고찰한다면 자유경쟁 발전은 1860년대와 7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시기 영국은 남은 형태의 자본주의 조직의 건설을 완성했다. 독일에서는 이 조직이 수공업 및 가내공업과의 결연한 투쟁에 들어가 그 자신의 존재 형태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대변혁은 1873년의 파국에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뒤따른 불황에서 시작되었다. 1880년대 초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던 휴지기와 1889년에 보기 드물게 강력하나 짧았던 호황기가 있긴 했지만 이 불황은 향후 유럽 경제사를 22년이나 장식했다." "1889~90년의 짧은 호황기 동안 이에 편승하기 위해 카르텔들이 많이 활용되었다. 이런 무분별한 노선은 카르텔이 없었을 경우보다 물가를 더 빠르고 더 높게 상승시켰고, 이 카르텔들은 거의 모두 파산이라는 무덤 속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다시 판매부진과 물가하락의 시기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산업계는 이제 옛날 분위기가 지배적이지 않았다. 불황은 더 이상 당연한 것, 즉 새로운 호경기 이전의 휴지기로만 보이던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카르텔 운동은 그 두 번째 시기에 들어갔다. 카르텔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것들은 원료가공을 필두로 차례로 다른 산업분야들을 장악하고 있다. 이미 1890년대 초에 카르텔들은 코크스 신디케이트를 조직하고, 그 형태를 본따 석탄 신디케이트가 만들어졌지만 그런 카르텔 조직 방법은 본질적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19세기 끝무렵의 큰 호경기와 1900~3년의 공황은—적어도 광업과 철강업에서는—최초로 완전하게 카르텔의 보호 아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은 아직 새로운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 경제활동 대부분이 자유경쟁에서 통상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식에서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독점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70년대: 자유경쟁의 발전이 가장 높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 독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들은 장기간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이다. 그것들은 아직 견고하지 않으며, 일시적 현상이다. (3) 19세기 끝무렵의 호경기 및 1900~3년의 공황: 카르텔들은 모든 경제활동의 기초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

 

카르텔들은 판매조건, 지불기한 등에 대해 서로 협약을 맺는다. 판매영역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제품의 생산량을 결정하며, 가격을 정하고, 개별 기업들에게 이윤을 분배하는 등.

 

독일에서 카르텔의 수는 1896년에 약 250개, 1905년에는 약 1만 2천 개 회사가 참가한 385개로 집계되었다.³⁴ 하지만 이 수치들은 실제보다 낮춰 잡은 것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1907년 독일 산업통계 수치를 보면 이 1만 2천 개 거대기업들에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미합중국에서 트러스트의 수는 1900년에 185개, 1907년에 250개로 집계되었다. 미국의 통계는 모든 제조업체들을 개인회사와 주식회사로 분류한다. 1904년에는 23.6퍼센트, 1909년에는 4분의 1이 넘는 25.9퍼센트의 업체들이 후자에 속했다. 그 회사들에 속한 노동자들은 1904년에 70.6퍼센트, 1909년에 75.6퍼센트로 전체 노동자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생산규모는 각각 109억 달러와 163억 달러, 즉 총생산액의 73.7퍼센트와 79.0퍼센트를 기록했다.

 

특정 산업분야 총생산의 7, 8할이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1893년 설립 당시 그 지역 전체 석탄 생산의 86.7퍼센트, 1910년에는 이미 95.4퍼센트의 집중을 이루었다.³⁵ 이런 식으로 탄생된 독점은 엄청난 수익을 보장하고, 막대한 규모의 기술적 생산단위들을 형성하게 된다. 미국의 유명 석유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석유회사³⁶는 1900년에 설립되었다. "그 회사의 자본금은 1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1억 달러 상당의 보통주와 1억 600만 달러 상당의 우선주가 발행되었다. 1900~7년 사이에 우선주에 지불된 이익배당은 각기 48, 48, 45, 44, 36, 40, 40, 40퍼센트로, 그 총액은 3억 6,700만 달러였다. 1882년부터 1907년까지 8억 8,900만 달러의 순이익이 났으며, 그 중 6억 600만 달러가 이익배당금으로 지급되었고, 나머지는 자본준비금으로 적립되었다.³⁷ 1907년 "철강 트러스트(유나이티드스테이츠스틸³⁸)에 속한 업체들의 노동자와 사무원들은 모두 합하면 21만 180명이나 되었다. 독일 광산업의 거대기업인 겔젠키르헨 광산회사에는 1908년 노동자와 사무원이 4만 6,048명이 있었다.³⁹ 이미 1902년에 그 철강 트러스트는 철강 900만 톤을 생산했다.⁴⁰ 그 생산량은 1901년에 미국 철강 총생산량의 66.3퍼센트, 1908년에 56.1퍼센트를 차지했고⁴¹, 각 해당 연도 철광석 채광량의 43.9퍼센트와 46.3퍼센트를 점유했다.

 

트러스트에 대한 미국 정부위원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쟁자들에 대해 트러스트들이 갖는 우월성은 거대한 경영 규모와 우수한 설비장치에 기초한다. 담배 트러스트는 설립 이래 손작업을 기계작업으로 대대적으로 교체하기 위해 모든 곳에서 모든 노력을 다했다. 담배 트러스트는 이 목적을 위해 담배 가공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특허라면 전부 다 사들였고, 거기에 엄청난 금액을 지출했다. 많은 특허들이 처음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트러스트에서 근무하는 기술자들에 의해 개선되어야 했다. 1906년 말에는 오직 특허 매점만을 위해 자회사 두 개를 만들었다. 역시 기계화를 목적으로 트러스트는 자체 주물공장, 기계공장, 수선공장 등을 세웠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런 시설 중 한 곳은 평균 300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담배, 소형 시가, 코담배, 포장용 은박지, 담뱃감 등의 제조에 관련된 발명 실험들을 한다. 그 발명품들을 개선하는 일도 그곳에서 하고 있다."⁴² "그리고 다른 트러스트들은 이른바 기술개발 기술자(developing engineer)들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들의 업무는 새로운 생산 방법을 고안해내고 기술개선을 시험하는 것이다. 강철 트러스트는 자사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기술을 높이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발명을 할 경우 큰 상금을 지급하고 있다."⁴³

 

독일의 대공업, 예컨대 최근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화학공업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개선 사업이 진행되었다. 화학공업에서는 이미 1908년에 생산의 집중 과정이 두 개의 주요한 '그룹'을 탄생시켰는데, 이들 역시도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독점으로 발전해갔다. 처음에 이 '그룹'들은 자본금 규모가 각기 2천만~2,100만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들이 두 쌍으로 짝을 이룬 '2자 연합'이었다. 즉 한쪽에는 회히스트의 옛 마이스터 공장과 프랑크푸르트의 카셀라 공장이 연합했고, 다른 쪽에는 루드비히스하펜의 아닐린소다 공장과 엘베르펠트의 옛 바이어 공장이 연합했다. 이후 한쪽 그룹은 1905년에, 다른 쪽 그룹은 1908년에 다시 각기 다른 대공장과 협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자본금이 각각 4천만에서 5천만 마르크인 '3자 연합'이 두 개 생겨났고, 이 두 '연합' 사이에서는 이미 '수렴', 즉 가격 등에 대한 '협약'이 시작되고 있다.

 

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기술을 발명하고 개선하는 과정도 사회화된다.

 

이는 미지의 시장에 팔기 위해 생산하는,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분산된 생산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전의 자유경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집중은 한 나라뿐 아니라,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세계 전역의 많은 나라들에 있는 모든 원료 산지(예를 들면 철광석 매장지)를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런 계산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 산지들은 거대한 독점연합체들의 수중에 장악돼 있다. 시장의 규모에 대한 대략적인 계산이 이루어지고, 이 연합체들은 협약에 따라 그것을 자기들끼리 '분할한다.' 숙련노동력을 독점하고, 최고의 기술자들을 고용하며, 운송로 및 운송수단—미국의 철도, 유럽과 미국의 선박회사—들을 장악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서 생산의 가장 광범위한 사회화에 바짝 다가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본가들의 의지나 의식에 반하여 그들을 어떤 새로운 사회 질서, 완전한 자유경쟁에서 완전한 사회화로 가는 이행의 질서로 끌어들인다.

 

생산은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지만, 전유(專有)는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사회적 생산수단들은 소수의 사적소유로 남아 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되는 자유경쟁의 전반적인 틀은 남아 있지만, 소수 독점가들의 나머지 주민들에 대한 억압은 백배나 더 무거워지고, 더 부담스러워지고, 더 견디기 어려워진다.

 

독일 경제학자 케스트너는 '카르텔들과 국외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을 다룬 전문적인 저서를 한 권 썼는데, 여기서 국외자들이란 카르텔에 속하지 않은 기업가들을 말한다. 케스트너는 이 책에 "강제적 조직화"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자본주의를 미화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독점가 연합으로의 강제적 종속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직화'를 위해 독점가 연합들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의 가장 새롭고 문명화된 투쟁수단들의 목록을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1) 원료 공급의 중단('카르텔 참가를 강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들 중 하나'), (2) '담합'(즉 소속 노동자들이 카르텔에 속한 기업들에서만 일하기로 한 노동조합들과 자본가들 사이의 협정)에 의한 노동력 공급 중단, (3) 운송수단의 박탈, (4) 판로의 봉쇄, (5) 카르텔들하고만 거래관계를 맺기로 한 구매자들과 계약, (6) 조직적인 가격인하 ('국외자들', 즉 독점가들에 종속되지 않은 기업들을 파산시키기 위해, 일정 기간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데에 수백만을 지출한다. 가솔린산업에서는 40마르크에서 22마르크로, 즉 거의 절반으로 가격이 인하되었던 사례도 있었다!) (7) 신용거래 중단, (8) 불매운동.

 

우리 앞에 더 이상 소기업과 대기업의, 기술적으로 뒤처진 기업과 기술적으로 앞선 기업의 경쟁적인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은 독점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대해 독점이 행하는 교살, 억압, 전횡이다. 이 과정은 어느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의식에 이렇게 반영되고 있다.

 

케스트너는 서술한다. "순수한 경제활동의 영역에서도 종전 의미의 상업 활동에서 조직적·투기적 활동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성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기술적·상업적 경험을 토대로 구매자들의 요구를 가장 잘 판단하여 잠재 상태에 있는 수요를 발견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그것을 '열어놓을' 수 있는 상인이 아니라 투기의 천재(?!)들이 다. 개별 기업들과 은행들 사이의 조직적인 발전, 일정한 관계 가 맺어질 가능성 등을 예측하거나 적어도 예감 정도는 할 수 있는……"

 

이것을 일상적인 말로 번역하면 이러한 뜻이 된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품생산이 여전히 '지배적이고' 모든 경제의 기초로 간주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주요한 이윤은 금융 조작의 '천재'들에게 돌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조작과 협잡의 토대는 당연히 생산의 사회화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화에까지 도달한 인류의 거대한 진보는 투기꾼들만 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뒤에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소시민적·반동적 비판자들이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공정한' 경쟁으로 되돌아가려고 꿈꾸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케스트너는 말한다. "카르텔 형성의 결과로서 나타난 지속적인 가격상승은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특히 석탄, 철, 칼륨에서만 관찰되었고 제조상품에서는 관찰되지 않았다. 가격상승과 관련된 이윤의 증가 역시 생산수단을 제조하는 산업에 국한되었다. 우리는 이 관찰에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카르텔 형성 덕분에 (반제품이 아닌) 원료를 가공하는 산업들은 완제품 산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높은 형태로의 이익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 산업들에 대해 자유경쟁에서는 없었던 지배적 위치를 얻게 되었다."⁴⁵

 

앞에서 강조 표시를 한 단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마지못해 아주 드물게 인정하는, 카를 카우츠키를 필두로 하는 현대의 기회주의 옹호자들이 어떻게는 발뺌하며 회피하려 해 쓰는 사태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배와 그에 결부된 강압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것은 전능한 경제적 독점의 형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발생했다.

 

카르텔들이 이용하는 수단의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모든 원료산지들이나 주요 원료산지들을 장악할 수 있는 곳에서 카르텔의 출현과 독점의 형성은 특히 용이하다. 그렇다고 원료산지를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다른 산업분야에서는 독점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시멘트산업의 원료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 산업은 강력하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공장들은 남독일 신디케이트, 라인-베스트팔렌 신디케이트 등 지역 신디케이트로 연합하였다. 가격은 독점으로 고정되어 있다. 화차 한 량분당 제조비가 180마르크인데도 가격은 230~280마르크다! 기업들은 12퍼센트에서 16퍼센트의 이익배당금을 주고 있다. 게다가 현대의 투기 '천재들'이 분배받은 배당금 외에도 거액의 수익을 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익이 높은 산업에서 경쟁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독점가들은 간계를 부리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산업의 상황이 나쁘다는 거짓 소문을 유포하고, 신문에 "자본가들이여! 시멘트사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삼가라"고 익명의 경고를 게재하며, 종내에는 '국외자들의'(즉 신디케이트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의) 회사들을 매수하고 그들에게 6만~8만에서 15만 마르크에 이르는 '양도금'을 지불한다.⁴⁶ 독점은 어디에서나 양도금을 지불하는 '온건한' 방식에서 경쟁자들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미국식 방법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온갖 수단을 다해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나간다.

 

카르텔이 공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자본주의를 미화하려고 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이야기다. 반대로 몇몇 산업분야에서 형성된 독점은 자본주의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더욱 침해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인 농업 발전과 공업 발전 간의 불균형도 더욱 확대된다. '독일 대은행들과 산업의 관계'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저작들 중 하나를 쓴 아이델스(Otto Jeidels)⁴⁷가 인정한 바처럼, 카르텔화가 가장 고도로 진전된 이른바 중공업, 특히 석탄산업과 철강산업의 특권적인 위치는 나머지 산업분야들에서 "무계획성의 증가"⁴⁸를 불러오고 있다.

 

뻔뻔스럽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리프만⁴⁹은 이렇게 말한다. "국민경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욱 모험적인 기업들에게, 또는 외국기업들이나 발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업들에게, 또는 마지막으로 단지 지역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는 기업들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⁵⁰ 결국 위험성이 커지는 것은 자본의 엄청난 증대와 관련되어 있고, 자본의 증대는 말하자면 물이 쥐에서 흘러넘치듯이 자본이 해외로 흘러가는 것이다. 동시에 급격한 기술발전은 국민경제의 다양한 측면들 사이에 더 많은 불균형, 혼란, 위기의 요인들을 불러온다. 따라서 리프만도 이렇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인류는 멀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국민 경제조직에 영향을 미칠 기술분야의 대변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전기와 항공 …… "보통 일반적으로 이런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의 시기에는 격심한 투기가 일어난다."⁵¹

 

그런데 공황—대부분 경제적인 것이지만 꼭 경제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 모든 종류의 공황—은 다시 집중으로, 독점으로 가는 경향을 엄청난 정도로 강화시킨다. 1900년의 공황, 우리가 알다시피 현대 독점의 역사에서 전환점 역할을 했던 그 공황의 중요성에 대한 아이델스의 고찰은 매우 유용하다.

 

"1900년 공황기에는 주요 산업분야의 거대기업들은 물론, 지금의 개념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던 기업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했다. 이들은 산업 호경기의 과도기를 타고 높이 오른 순수 기업(즉 결합되지 않은 기업)들이었다. 가격 저하와 수요 감소는 거대 결합 기업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거나 아주 짧은 기간만 영향을 끼쳤지만, 이런 순수 기업들은 비참한 상태에 빠뜨렸다. 그 결과 1900년의 공황은 1873년의 공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산업의 집중을 초래했다. 1873년의 공황도 좀 더 우수한 기업들을 일정하게 선별하는 역할을 했지만,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런 선별의 결과로 공황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 기업들이 독점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지속적인 독점은 그 분야의 매우 복잡한 기술, 방대한 조직과 자본력에 힘입어 오늘날의 철강 및 전기산업의 거대기업들에서나 매우 높은 수준으로 존재하며, 기계산업과 일부 금속 분야, 운송산업 등의 기업들에는 좀 더 낮은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다."⁵²

 

독점. 이 말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어다. 하지만 우리가 은행들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독점들이 가진 진정한 힘과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극히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며 빈약한 것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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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서문

 

지금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이 소책자는 내가 1916년 봄에 취리히에서 쓴 것이다. 그곳에서 집필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프랑스어와 영어 문헌, 특히 러시아어 문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하지만 제국주의에 관한 주요한 영어 저작인 J. A. 흡슨(Hobson)의 책을 주의 깊게 활용할 수 있었고, 내 생각에 그 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차르 체제의 검열을 염두에 두고 이 소책자를 썼다. 그래서 오직 이론적인 부분으로, 특히 사실에 대한 경제적인 분석으로 작업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문제를 언급할 때는 극히 조심해서, 차르 체제의 모든 혁명가들이 '합법적인' 글을 쓰려고 펜을 잡을 때마다 의존해야 하는 암시나 이슬 식의-빌어먹을 이슬 식의-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시기에, 검열 때문에 쇠 집게로 찌그러뜨려놓은 것처럼 뒤틀고 억누른 이 소책자의 곳곳을 다시 읽자니 고역스럽다.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는 것, 사회배외주의(발로는 사회주의, 행동으로는 배외주의)는 사회주의를 완전히 배신하고 부르주아지 편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이라는 사실, 노동계급 운동 내의 이러한 분열은 제국주의의 객관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 등에 대해 나는 '노예'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내가 1914~7년에 해외에서 썼던 글들을 모아 곧 출간할 새로운 판본을 참조하고자 권하고 싶다.⁴ 이 책의 119~120쪽 부분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나는 자본가와 그들 편으로 넘어간 사회배외주의자(카우츠키(Kautsky)는 일관성 없는 태도로 그들을 반대하고 있다)가 이 얼마나 파렴치하게 자기 나라 자본가들의 영토 합병을 은폐하고 있는지를 검열을 통과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본의 예를 들어야 했다! 사려 깊은 독자들이라면 일본을 러시아로, 조선을 핀란드·폴란드·쿠를란드·우크라이나·히바·부하라·에스토니아 또는 대리시아인이 아닌 다른 민족⁴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쉽게 바꾸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근본적인 경제 문제, 즉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을 이해하는 데 이 소책자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것을 연구하지 않고서 현대의 전쟁과 현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자

 

페트로그라드에서, 1917년 4월 26일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서문

 

I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말했듯이 나는 1916년에, 차르 체제가 검열할 것에 눈치를 보면서 이 소책자를 썼다. 그렇다고 지금 이 책의 전문을 고쳐 쓰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합당한 일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주된 목적은 반박의 여지가 전혀 없는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 통계자료와 부르주아 학자들의 고백에 기초하여 1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전야인 20세기 초의 국제관계 속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합적인 상(相)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차르 검열관이 보기에 합법적이었던 이 소책자의 예는, 최근 거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된 후 미국이나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남아 있는 실낱같은 합법성도 '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평화주의의 편견과 희망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으며 마땅히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데 있어서도 유용하다. 나는 검열을 통과한 이 소책자에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될 아주 중요한 내용을 이 서문에서 밝히려 한다.

 

II

 

이 소책자는 1914~8년 전쟁이 양 진영 모두에게 제국주의 전쟁(즉 침략적이고 약탈적이고 강도 같은 전쟁)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전쟁은 세계를 나눠 먹기 위한 전쟁,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하고 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그것의 진정한 계급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관한 증거는 당연히 전쟁의 외교사가 아니라 모든 교전국들의 지배계급들이 처한 객관적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이런 객관적인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례들이나 개별적 통계수치(사회 생활의 현상들은 엄청나게 복잡하기 때문에 특정한 사례나 개별적 수치를 임의로 추출하여 어떤 명제를 입증하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다)가 아니라, 반드시 모든 교전국들과 전세계 경제활동의 토대에 관한 모든 수치를 제시해야만 한다.

 

나는 1876년과 1914년의 세계 분할(6장), 1890년과 1913년의 세계 철도 분할(7장)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런 이론의 여지가 없는 총괄적인 수치들을 인용했다. 철도는 자본주의 기간 산업, 즉 석탄산업과 철강산업의 총화이며 세계무역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문명의 발전 정도를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지표다. 철도가 대규모 생산과 독점, 신디케이트, 카르텔, 트러스트, 금융과두제와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는 이 책의 앞부분 몇 장(chapter)에 걸쳐 서술되어 있다. 철도망의 불균등한 분포와 불균등한 발전은 전세계적 차원의 현대 독점자본주의의 결과가 압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 결과들은 이러한 경제체제에서는, 즉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유지되는 한은 제국주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임을 보여준다.

 

철도 부설은 겉보기에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민주주의적이고, 문화적이며, 문명을 보급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미화하는 대가로 보수를 받는 부르주아 교수들과 소부르주아적인 속물들의 눈에는 분명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본주의의 끈들, 즉 그런 사업을 생산 수단 일반에 대한 사적소유와 이어주고 있는 수천 가닥의 연결망들이 철도 부설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심역⁷ 민중들과 '문명'국들의 임금노예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바꾸고 있다.

 

소소유자의 노동에 기초한 사적소유·자유경쟁·민주주의 등, 자본가와 언론들이 노동자와 농민들을 기만하는 데에 사용한 이 모든 슬로건들은 먼 과거의 것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한 줌의 '선진' 국가들이 세계 인구의 엄청난 다수를 식민지적으로 억압하고 금융적으로 교살하는 하나의 세계체제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약탈품'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장한 두 세 개의 강력한 세계적 약탈자들(미국, 영국, 일본) 사이에서 분배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약탈품을 분배하기 위한 자신들의 전쟁에 전세계를 끌어들이고 있다.

 

III

 

군주국 독일이 강요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⁸, 그에 이은 '민주'공화국 미국·프랑스와 '자유' 국가 영국이 강요한 훨씬 더 잔혹하고 비열한 베르사유 강화⁹는 어떤 면에서 인류에게 극히 유익한 기여를 했는데,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윌슨주의'¹⁰를 찬양하고 제국주의 시대에 평화와 개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제국주의가 고용한 날품팔이꾼들과 반동적 속물들의 정체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독일 금융 강도 집단 중 누가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나를 판가름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 발생시킨 수천만의 시체들과 불구자들과 더불어 저 두 '평화조약'은 그 동안 부르주아지가 짓밟고, 억누르고, 기만하고, 우롱해온 수백, 수천만 민중들을 전례 없이 빠르게 각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만들어낸 전세계적인 폐허로부터 전세계적인 혁명적 위기가 자라나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리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치지만 필경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그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바젤 선언, 1912년에 이미 전쟁 일반(전쟁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혁명 전쟁도 있다)이 아니라 1914년에 발발한 바로 그 전쟁을 올바르게 예견했던 그 선언은 지금 제2인터내셔널 영웅들의 모든 치욕스런 파산과 변절을 폭로하는 기념비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선언을 이 판의 부록으로 다시 수록하여,¹¹ 제2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당시 임박한 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사이의 연관성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직설적으로 언급했던 이 선언의 문장들을 마치 도둑이 범행 장소를 피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회피하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거듭 상기시키고자 한다.

 

IV

 

이 소책자는 '카우츠키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카우츠키주의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오스트리아의 오토 바우어(Otto Bauer) 일파,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 등, 프랑스의 알베르 토마(Albert Thomas) 등)과 수많은 사회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 평화주의자들, 부르주아민주주의자들, 목사들이 대표하고 있는 국제적인 이데올로기 조류다.

 

이 이데올로기 조류는 한편으로는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와 부패의 산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반적인 생활방식상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불가피한 결과다.

 

카우츠키 및 그 유사 부류들의 견해들은 그 저술가¹²가 수십 년간, 특히 무엇보다 사회주의 내의 기회주의자들(베른슈타인(Bernstein), 밀랑(Millerand), 하인드면(Hyndman), 곰퍼스(Gompers) 등)과 투쟁하면서 옹호해온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원칙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세계의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지금 실제 정치무대에서 (제2 또는 황색 인터내셔널¹³을 통해) 최악의 기회주의자들과 단결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부르주아 연립정부들을 통해) 부르주아 정부와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운동 일반, 특히 공산주의 운동은 '카우츠키주의'의 이론적 오류에 대한 분석과 폭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지는 않지만 카우츠키나 그 일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모순의 심각성과 그것이 만들어낸 혁명적 위기의 필연성을 퇴색시키는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일반이 전세계에 걸쳐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경향들과 투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의무다. 프롤레타리아 당은 부르주아지에게 우롱당하고 있는 소소유자들과, 얼마간은 소부르주아적 생활조건들에 놓여 있는 수백만 근로인민을 부르주아지에게서 되찾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V

 

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해야겠다. 이 책의 본문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과거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카우츠키의 전우이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¹⁴에서 부르주아적·개량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주요 대표자들 중 한 명인 힐퍼딩(Hilferding)은 이 문제에 있어 노골적인 평화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인 영국인 홉슨보다 한 발 뒤처져 있다. 노동운동 전체의 국제적인 분열은 이제 완연히 드러났다(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¹⁵). 두 경향 사이의 무장투쟁과 내전도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¹⁶이 볼셰비키에 맞서 콜차크(Kolchak)와 데니킨(Denikin)¹⁷을 지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¹⁸에 맞서 샤이데만(Scheidemann)주의자들과 노스케(Noske) 일파¹⁹가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았다.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런 세계사적 현상의 경제적 토대는 과연 무엇인가?

 

그 토대는 바로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 소책자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금 전세계를 약탈하는—단지 '이자놀이'²⁰만으로—한 줄(세계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아무리 '관대하게' 부풀려 잡는다 해도 5분의 1도 안 되는) 극히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다. 전쟁 전의 부르주아지의 통계에 따르면 그들은 자본수출을 통해 전쟁 전의 가치로 연간 80~100억 프랑의 수입을 얻었다. 물론 지금은 훨씬 더 많다.

 

그런 엄청난 초과이윤(왜냐하면 그것은 자본가들이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로부터 짜내는 이윤 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에)으로 노동계급 지도자들과 노동귀족 상층을 매수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선진' 국가 자본가들은 실제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바, 수천 가지 다른 방법으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공공연하게나 암암리에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주아화된 노동자 계층, 다시 말해 '노동귀족'은 생활양식에서, 임금 수준에서, 모든 세계관에서 전적으로 소시민적인데,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기둥이고 요즘은 (군사적으로는 아니라도)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 기둥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질적으로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암약하는 부르주아지의 첩자이자, 자본가계급의 노동 관리인들이며 실제로 개량주의와 배외주의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내전에서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편으로, '코뮌파'에 반대하는 '베르사유파' 쪽으로 넘어진다.²¹ 이러한 현상의 경제적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공산주의 운동과 임박한 사회혁명의 실천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혁명의 전야이다. 이것은 1917년 이래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확인되었다.

 

1920년 7월 6일

 

N. 레닌

 

지난 15~20년간, 특히 스페인-미국 전쟁(1898년)과 보어 전쟁(1899~1902년)²² 이후, 구세계와 신세계의 경제나 정치 문헌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를 특징짓기 위해 '제국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점점 더 빈번하게 기술하고 있다. 1902년에는 영국 경제학자 홉슨의 저작 『제국주의론Imperialism』이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과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카우츠키의 현재 입장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부르주아 사회개량주의와 평화주의 관점에서 있기는 하지만,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정치적 특질들을 매우 훌륭하고 정확하게 묘사했다. 1910년에는 빈에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루돌프 힐퍼딩²³의 저작 『금융자본Das Finanzkapital』(러시아어 번역판은 1912년에 모스크바에서 출간)이 출판되었다. 저자가 화폐 이론 문제에서 범한 오류와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와 절충시키려는 그 악명 높은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은—힐퍼딩이 이 책의 부제로 쓴 것처럼—"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이론적 분석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제국주의에 대해 언급된 것들은—특히 이 주제에 대한 엄청난 양의 신문·잡지 기사들과 결의안들, 예컨대 1912년 가을에 열렸던 켐니츠 대회와 바젤 대회²⁴의 것들—이 두 저자가 서술했거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총괄했던 생각들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차후에 우리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특징들의 연관과 상호관계에 대해 가능한 한 좀 더 대중적인 형태로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비경제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고찰해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 모두가 흥미를 갖진 않을 인용 문헌과 여타 주들은 책자 말미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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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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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내 시장 형성

 

 

8-1. 상업 유통 발달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 국가 경제에서 많은 영역은 상호의존한다. 상품 유통은 상품 생산에서 선행하고, 상품 생산에서 유일한 조건은 아니지만, 발달 조건 가운데 하나로 구성된다.

 

상품 및 자본주의 생산에 대한 통계 검토에 국한하며, 따라서 개혁 이후 상품 유통 발달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국내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발달해갔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간략한 통계만으로도 충분하다.

 

러시아 철도 체계 길이

 

1865: 3,819km

1890: 29,063km

 

7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 철도 체계 길이

 

1845: 4,082km

1875: 26,819km

 

6배 증가했다.

 

 

독일 철도 체계 길이

 

1845: 2,143km

1875: 27,981km

 

12배 증가했다.

 

영국은 더 긴 기간 동안에, 독일은 더 짧은 기간 동안에, 비슷한 진전을 이뤘다. 매년 개통된 새 철도 길이는 기간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1868-1872년 5년 동안에는 8,806베르스트에 따른 새 철도가 개통됐지만, 1878-1882년 5년 동안에는 2,221베르스트만 개통됐다.

 

변동에 따른 범위로는, 자본주의가 확대시킨 실업 예비군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판단한다. 자본주의는 노동 수요를 축소시킨다.

 

러시아에서는 철도 개발에서도 두 번의 호황기가 있었다. 1860년대 말, 1870년대 초, 1890년대 후반이었다. 1865-1875년까지 러시아 철도 체계에 따른 연 평균 길이는 1,500km였고, 1893-1897년까지는 약 2,500km 증가했다.

 

철도 운송량

 

1868: 439,000,000푸드

1873: 1,117,000,000푸드

1881: 2,532,000,000푸드

1893: 4,846,000,000푸드

1896: 6,146,000,000푸드

1904: 11,000,000,000푸드

 

철도 여객 수송량

 

1868: 1,040,000명

1873: 2,270,000명

1881: 3,440,000명

1893: 4,940,000명

1896: 6,550,000명

1904: 123,600,000명

 

수상 운송 발전에서,

 

유럽 러시아 내륙 수로로 운송된 화물량

 

1881: 899,700,000푸드, 화물 가치: 186,500,000루블

1893: 1,181,500,000푸드, 화물 가치: 257,200,000루블

1896: 1,553,000,000푸드, 화물 가치: 290,000,000루블

 

러시아 상선은 14,3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51척 증기선, 41,8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700척 범선으로 구성됐고, 1896년에는 161,6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522척 증기선으로 구성됐다. 외해 모든 항구에서 상선 발전은 1856-1860년까지 5년 동안 귀항선, 출항선 수는 평균 18,901척이었고, 총 수용량은 3,783,000톤이었다. 1886-1890년까지는 평균 23,201척(+23%)였다. 따라서 수용량은 3과 2/3배 증가했다.

 

1856-1894년까지 39년 동안 수용량은 5.5배로 늘어났고, 러시아 선박과 외국 선박을 따로 살펴보면, 39년 동안 러시 선박 수는 823-2,789척으로 3.4배 늘어났고, 수용량은 112,800-1,368,000톤으로 12.1배 늘어났다. 외국 선반 수는 18,284-21,160척으로 16% 늘어났고, 수용량은 3,448,000-18,267,000톤으로 5.3배 늘어났다.

 

귀국 및 출국 선박 용량도 1878년에는 1,300만 톤에서 1881년에는 860만 톤으로 해마다 상당히 변동했다. 변동으로부터, 비숙련 노동자, 부두 노동자 등에 대한 수요 변동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자본주의는 늘 일자리를 원했고, 아무리 우연한 일이더라도, 첫 번째 부름에 기꺼이 받아들 일 수 있는 대중 존재를 필요로 했다.

 

외국 무역 발전으로는, 은행 회전율과 자본 축적 규모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국립 은행 총 인출액

 

1860-1863: 113,000,000루블

1864-1868: 170,000,000루블

1884-1888: 620,000,000루블

 

당좌예금 총액

 

1864-1868: 335,00,000루블

1884-1888: 1,495,000,000루블

 

대출 및 저축 협회와 농촌 및 산업 은행 매출

 

1872: 2와 3/4 백만 루블

1875: 21,800,000루블

1892: 82,600,000루블

1903: 189,600,000루블

 

모기지는 1889-1894년 사이에 증가했다. 담보 토지 평가액은 1,395,000,000-1,827,000,000루블로 증가했고, 총 대출액은 791,000,000-1,044,000,000루블로 증가했다. 저축 은행 운영은 특히 1880-1890년대에 증가했다. 1880년에는 75개 저축 은행과 1897년에는 4,315개 가운데 3,454개 우체국 은행이 있었다.

 

1880년 예금은 4,400,000루블, 1897년에는 276,600,000루블이었다. 연말 계좌 잔액은 1880년애는 9,000,000루블, 1897년 494,300,000루블이었다. 연금 자본가 증가는 특히 기근이었던 1891-1892년 사이에 각각 52,900,000루블, 50,500,000루블과 이후 2년, 1896-1897년 51,600,000루블, 65,500,000루블로 두드러졌다. 따라서 통계에서는 저축 은행 발전이 더 컸다. 1894년 러시아 전역에서는 6,557개 저축 은행이 있었고, 예금자는 510만 명, 총 예금은 1,105,500,000루블이었다. 구 인민주의자와 사회주의 운동에 따른 신흥 기회주의자들 모두 저축은행 수 증가가 인민 복지 징조라고 말하곤 했으며, 매우 순진한 태도를 보였었다. 따라서 1904년 러시아 저축은행 예금 분포를 1900년 프랑스와 비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인민주의자, 수정주의자, 카데트 옹호론자들을 위한 자료는 또 얼마나 풍부하던지, 러시아에서는 예금지 직업과 전문 분야에 따라 예금이 12개 집단으로 구분된다. 가장 큰 예금은 228,500,000루블로, 농업과 농촌 산업 종사자들의 예금이었다. 예금은 특히 빠르게 증가해갔다. 마을은 문명화 됐고, 농민 폐허를 사업 원천으로 삼고는, 더욱 더 수익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통계에서는 상품 유통과 자본 축적에 따른 큰 발달을 시사했으며, 국민 경제에서도 모든 부문에서 자본 활용 장이 어떻게 형성됐고, 상인 자본이 어떻게 산업 자본으로 전환됐는지, 생산으로부터 유도된 생산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봤다.

 

 

상업 및 산업 인구 증가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산업 인구가 증가한다는 점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또한 산업과 농업 분리도 꾸준하다.

 

 

- 도시 발달

 

 

도시 발달에서는, 개혁 이후 유럽 러시아, 50개 지역에 따른 발달 자료도 있었다. 도시 인구 비율은 끊임없이 증가해갔다. 인구가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직종으로 전환됐다. 도시 인구는 나머지 국가 인구보다 두 배 빠르게 증가했다. 1863-1897년 사이에 총 인구는 53.3%, 농촌에서는 48.5%, 도시는 97% 증가했다. 1885-1897년, 11년 동안 '최소한 농촌 인구 도시 유입으로는, V. 미하일로프스키 추산에 따르면, 250만 명이었다. 곧 연간 20만 명이 넘었다.

 

중요한 산업 및 상업 중심지인 도시 인구는 일반적인 도시 인구보다도 훨신 더 빠르게 증가해갔다. 5만 명 이상 주민이 있는 도시 수는 1863-1897년 사이에 13-44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1863년에는 전체 도시 인구에서 약 610만 명 가운데 170만 명, 27%만이 대규모 중심지에 집중됐다. 1885년에는 990만 명 가운데 410만 명, 41%였고, 1897년에는 1,200만 명 가운데 640만 명, 이미 절반이 넘는 약 53%였다. 따라서 1860년대에는 작은 도시가 도시 인구에서도, 일반적인 규칙으로 제공했지만, 1890년대에는 대도시에 완전하게 밀렸다. 1863년, 당시로는 가장 큰 도시였던 14개 도시 인구는 170만 명에서, 430만 명으로, 153% 증가했지만, 전체 도시 인구는 97%만 증가했다. 따라서 대규모 산업 중심지에 따른 큰 발달과 새로운 중심지 출현은 개혁 이후 시대에서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 기생적인 식민지화

 

 

산업 인구로부터,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발달한다는 법칙은 산업에서 가변 자본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반면에,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농업에서는 '특정 토지 착취에 필요한 가변 자본이 절대적으로 감소하면서부터, 새로운 토지가 경작되는 정도만큼 증가할 수는 있겠지만, 다시금 비농업 인구에 따른 훨씬 더 큰 발달을 전제로 삼는다'고 덧붙였다.

 

산업 인구에 따른 발전은 이미 모든 토지가 점유된 인구로부터 거주하는 영토가 주어졌을 때만, 분명한 형태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영토로부터 주민들은 자본주의로부터도 농업에서 강제로 쫓겨나면서 산업 중심지나 다른 국가로부터 이주 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

 

그러나 모든 토지가 점유되지 않고, 아직 인구가 충분히 거주하지 않은 영토가 펼쳐졌을 때는 상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농업으로부터 쫓겨난 주민들은 그러한 영토로부터, 인구가 없는 지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땅을 경작해간다. 따라서 농업 인구는 증가하고, 한 동안은 산업 인구 증가보다도 적어도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다른 과정도 펼쳐진다.

 

1). 인구가 밀집된 기존 국가 또는 일부 지역에서 자본주의 발전

 

2). '새로운 토지'에서 자본주의 발전

 

첫 과정은 기존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따른 심층적이고, 추가적인 발전이며, 두 번째는, 새로운 영토로부터 새로운 자본주의 관계 부상과 폭 넓은 발전을 말한다. 두 과정을 혼동한다면, 인구를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혁 이후 러시아에서는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됐다. 개혁 이후 시기인 1860년대 초, 유럽 러시아에서는 남부와 동부 외곽 지역으로부터, 대부분 인구가 없었고, 중부 농업 지역에서는 큰 규모로 이주민이 유입됐다. 새로운 여토에서 새로운 농업 인구가 형성되면서부터,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가 전환되는 병행 과정이 가려졌다. 도시 인구 자료에서 나타난 특징으로는, 유럽 러시아 50개 주를 여러 집단으로 구분해서 명확하게 파악했다. 본 연구에서는 1863-1897년 유럽 러시아에서, 9개 지역 도시 인구 자료를 제시했다.

 

세 가지 영역으로 부여된다.

 

1). 비농업 산업 지역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매우 미미하다. 도시 인구 비율은 14.1%-21.1%로 빠르게 증가했으며, 농촌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전체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매우 미미했다. 반면에, 도시 인구 증가율은 평균, 97% 대비 105%를 크게 웃돌았다. 러시아를 서유럽 산업 국가들과 비교해봤을 때, 비농업 산업 지역만이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췄다.

 

2). 중앙 농업 지역

 

지역 이주가 상당히 많음, 일부는 이전 지역, 대부분은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 도시 인구 비율은 매우 낮고, 평균 이하 속도로 증가한다. 1863-1897년 사이 도시와 농촌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평균보다도 훨씬 낮았다. 해당 지역에서 국경 지역을 이주하는 인구가 크게 유입됐다. V. 미하일로프스키 계산에 따르면, 1885-1897년 사이에만 약 300만 명, 곧 인구 1/10 이상이 해당 지역을 떠났다.

 

3). 농업 외곽 지역

 

 

- 개혁 이후 식민화된 지역.

 

 

따라서 33개 시내권 도시 인구 비율은 유럽 러시아 전체 도시 인구 비율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곽 지역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이 평균보다 약간 낮은 증가세를 보였다. 11.2%-13.3%로, 비율로는 100:118이었지만, 평균은 9.94%-12.76%로, 비율로는 100:128이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에 따른 절대적 증가세로는 +130% 대비 +97%로, 평균보다 훨씬 더 높았다. 따라서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 전환이 매우 강렬했지만, 유입으로부터 농업 인구에 따른 큰 증가로 가려졌다. 해당 지역에서 농촌 인구는 87% 증가했고, 러시아에서는 평균 48.5%에 비해 증가했다. 특정 시내권에서, 인구 산업화 과정은 훨씬 더 모호해졌다. 타우리다 도시 인구 비율은 1897-1863년, 19.6%로 동일했지만, 헤르손에서는 25.9-25.4%로 오히려 감소했다. 두 시내권에서는 도시 인구 성장율은 대도시 인구 성장률에 비하면, +131%, +135%, 두 대도시 시내권에서는 +141%로, 크게 미지지는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영토에 대한 새로운 농업 인구가 증가하면서부터, 비농업 인구도 훨씬 더 크게 증가해갔다.

 

 

- 공장과 상업 및 산업 도시와 마을 발전

 

 

도시 외 산업 중심지에서 중요한 지역으로는, 도시와 함께 계산되지 않고, 대도시 주변으로는 더욱 많은 지역으로 확산된 교외 지역과 공장 마을이다. 산업 중심지는 도시 인구 비율이 극히 낮은 산업 단지에 특히 많다. 도시 인구 지역 별 통계, 9개 산업 구역에서는, 1863년 비율은 7.3%, 1897년에는 8.6%였다. 시내 상업 및 산업 인구로는, 주로 도시가 아닌 산업 마을에 집중됐다.

 

블라디미르, 코스트로마, 니즈니노브고로드 및 기타 시내권에서, 도시 가운데 주민은 3,000, 2,000명 또는 1,000명 미만인 곳도 적지는 않았지만, 각 마을에서는 공장 노동자만 2,000명, 3,000명 또는 5,000명인 수 많은 마을도 있었다. 개혁 이후로는 도시가 더욱 빠르게 발전해갔고, 도시와 마을 중간에 새로운 유형으로는, 공장 중심지가 발달해갔다. 중심지에 따른 큰 발달과 그곳에 집중된 공장 노동자 수를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산업 단지 뿐만이 아니라, 남부에서도 중심지가 꽤 많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우랄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은 가장 낮았다. 비야트카, 페름 주에서는 1863년, 3.2%, 1897년에는 4.7%였다. 그러나 도시 인구와 산업 인구에 따른 상대적 크기에 대해서는, 페름 주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 도시 인구는 1897년 6,400명으로, 1888-1891년, 젬스트보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산업 지역 인구는 84,700명이었다. 그 중 56,000명은 전혀 농업에 종사하지도 않았고, 5,600명만이 주로 농사로부터 생계를 유지했다.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에서 젬스트보 인구 조사에 따르면, 65,000명 주민이 토지가 없었고, 81,000명만이 목초지를 가졌다. 따라서 두 군도에서 산업 비도시 인구만으로도, 1897년에는 195,600명이었기 때문에, 시내권 전체 도시 인구보다도 더 많았다.

 

공장 정착지 외에도, 산업 중심지에 따른 중요한 대규모 수공예 지구는 선두에 있거나, 강둑, 기차역 인근 등에 위치해서, 개혁 이후 빠르게 발전한 무역 및 산업 마을에도 부여됐다. 마을 특성은 통계 표 예시에서도 잘 나오며, 도시와 마찬가지로, 농촌 인구를 유지하고 인구 문해율은 평균 이상이었다.

 

도시 및 비도시 산업 및 상업 중심지에 따른 상대적인 중요도로는, 보로네시 통계도 있다. 보로네시 종합 수입은 8개 군에 있는 마을을 분류하는 종합 표를 제공했다. 해당 군에서는 8개 도시가 있었으며, 인구는 1897년 기준으로 56,149명이었다. 반면에, 마을 가운데 4개는 9,376가구로, 53,732명 주민으로부터 두드러졌고, 도시보다도 훨씬 컸다.

 

5개 마을에서는 상업 시설, 240개, 산업 시설 404개가 있었다. 전체 가구 가운데 60%는 전혀 농사를 짓지 않았고, 21%는 이웃에게 빌리거나, 반모작으로 농사를 지었고, 71%는 가축이나, 농기구를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63%는 일년 내내 곡물을 구매했고, 86%는 산업에 종사했다. 중심지에 따른 전체 인구를 상업 및 산업 범주에 넣으면서부터, 상업 및 산업 규모를 과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축소해버렸다. 왜냐하면, 8개 군에서는 총 21,956가구가 전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사한 농업 지역에서는, 도시 외곽 상업 및 산업 인구가 도시 내부 인구보다도 적지는 않았다.

 

 

- 비농업 외부 고용

 

 

도시 공장, 상업 및 산업 마을과 구역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 전체 산업 인구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렵다. 이동 자유가 부족하고, 마을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 인구 상당 부분을 산업 인구에 포함해야만 했다. 산업 중심지에서 노동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일 년 가운데 일부를 이곳에서 보낸다. 소위 비농업 '외부 고용'에서도, 공식적으로, 산업가는 부수적 고용을 하는 소작농이고, 대다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지체 없이 이와 같은 관점을 택했다. 견해가 아무리 불합리하고, 또 많더라도 인구가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직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도시에 따른 산업 인구 규모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얼마나 바꿨는지도 알 수 있었다.

 

칼루가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은 러시아 평균 8.3%, 12.8%보다도, 훨씬 낮았다. 1896년 해당 구역은 여권 통계를 기반으로, 이주 노동자들이 자택을 비운 총 개월 수를 계산한다. 총계는 1,491,600개월이었고, 12로 나누면, 부재 인구로는, 124,300명으로, 전체 인구에서는 거의 11%에 해당했다. 숫자를 당시 1897년 도시 인구인 97,900명을 더하면, 산업 인구 비율도 상당했다. 비농업 이주 노동자 일부는 기존 도시 인구에 포함됐고, 산업 중심지 인구에도 포함됐다. 그러나 일부였다. 층위에 따른 이동성 때문에, 지역 인구 조사로는 모두 포괄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더욱이나, 인구 조사로는 대체로 겨울에 실시됐지만, 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봄에 자택을 떠났다.

 

비농업 이주 주요 지역으로는, 여권 발급 건수는 봄철에 최대치에 도달했다. 일시적으로 부재 중인 노동자 상당 수는 도시 인구 조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시 거주자는 농촌 인구보다는 도시 인구에 더 합법적으로 배정됐다. 일년 내내 또는 대부분 시간을 도시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족들은 생계를 제공하는 도시를 거주지졸 간주할 이유가, 가족 및 재정적인 유대 관계만 있는 마을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재정적 유대로부터,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는, 이주하는 코스트로마 사람들 사이에서, 농민이 세금 일부라도 토지로부터 대가를 받는다는 건 드물었고, 보통 소작인들이 토지를 사용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토지를 임대하고, 소유주가 직접 모든 세금을 냈다. 야로슬라블 조사에서도, 이주하는 산업 노동자들은 마을과 배정지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는 언급이 반복해서 나왔다.

 

그렇다면 비농업 인구는 몇 명이었을까.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모든 종류에서, 산업에 종사한 사람들 수로는, 500만-600만 명 이상이었다. 실제로 1884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약 467만 개 여권과 신분증을 발급했고, 여권 수입은 1884-1894년 사이에, 1/3이상, 330만 루블에서 450만 루블로 증가했다. 1897년에는 러시아에서 발급된 여권과 신분증 총 수는 9,495,700개였다. 그 중에서 9,333,200개는 유럽 러시아 50개 지역에서 발급됐다. 1898년에는 9,259,900개였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7,809,600개였다.

 

S. 코롤렌코는 유럽 러시아에서 현지 수요에 비해 불필요한 노동자 수를 630만 명으로 추산했다. 11개 농업 지역에서 발급된 여권 수가 코렐렌코가 추산한 170만 명에 비해 200만 명을 초과했었다는 점을 보았다. 비농업 지역에서 6개에 대한 통계를 추가한다면, 코롤렌코는 지역에서 불필요한 노동자 수를 1,287,800명으로 설정했지만, 정작 발급된 여권 수는 1,298,600명이었다. 따라서 코를렌코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에서, 17개 지역, 흑토 11개 지역과 비흑토 6개 지역에서는 현지 수요에 비해 불필요한 노동자가 300만 명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17개 지역에서는 발급된 여권과 카드 수가 330만 장이었다. 1891년에는 해당 지역들이 전체 여권 수입에서 52.2%를 차지했다. 따라서 이주 노동자 수로는, 거의 600만 명을 넘어갔다. 구식 젬스트보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우바로프는, 코롤렌코 수치에 가까웠고, 500만 명이라는 이주 노동자 수치가 맞다고 결론을 내려버렸었다.

 

의문을 제기해보자면, 그렇다면 비농업 및 농업 이주 노동자 수는 얼마일까. 인민주의자들은 매우 대담하고도, 완전히 잘못된 주장을 폈다. 농민 외부 고용에 따른 압도적 다수가 농업이었다. 인민주의자가 인용한 차슬라브스키는 훨씬 더 신중하게 표기했다. 그는 통계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어떤 유형에서 노동자를 제공하는 지역 규모에 대한 일반적인 발전으로만, 제한시켰다. 반면에, 인민주의자들은 철도 여객 교통 통계에서도 무엇도 전혀 증명하지 못했었다. 비농업 노동자도 주로 봄에 집을 나서고, 게다가 농업 노동자보다 철도를 훨씬 더 많이 이용한다.

 

반대로는, 압도적 다수가 아니지만, 이주 노동자가 아마도 비농업 노동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는, 여권 수입 분배에 대한 통계, 브신(Vesin) 통계에 근거한다. 예전에 프롤레로프스키는 1862-1863년 1/3 이상 여권 발급에서 얻은 잡세로부터, 수입 분배를 보여준 보고서를 기초로 일자리를 찾는 농민에 따른 가장 큰 이동에는 대도시와 비농업 시내권에서 나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에서 결합한 11개 비농업 시내권을 단일 지역으로 취급하고, 비농업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떠난다면, 해당 시내권에서는, 1885년에 유럽 러시아 전체 인구로는 18.7%에 불과했지만, 1897년에는 18.3%로, 1885년에는 여권 수입에서 42.9%를 차지했다. 1891년에는 40.7%였다. 비농업 노동자는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공급됐으며, 농업 노동자는 전체 이주자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브신은 유럽 러시아에서, 출구 허가로는 90%를 차지하는, 38개 지역으로부터, 주요 이주 유형을 집단으로 나누었다. 따라서 해당 수치에서도,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산업이 첫 집단보다, 세 번째 집단에서 더 널리 퍼졌다. 해당 수치는 두 집단 차이에 상응하는 고용 확보를 위한 결근 기간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비농업 산업이 우세한 곳에서는 결근 기간은 훨신 더 길었다. 소비세 납부 업종 등에 대한 통계로부터, 유럽 러시아 50개 시내권 전체에서는 발급된 거주 허가를 분류했다. 브신 분류에 제시된 내용을 정정하자면, 1884년 자료에는 없는 12개 지역으로 다시 분배했다.

 

1898년 자료에 따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노동 이주는 훨씬 더 흔했다는 점이다. 비농업 지역에서 인구 이동성은 농업 지역보다 훨씬 더 크다. 비농업 이주 노동자 수는 농업 지역보다 많아아먄 하며, 최소 300만 명은 되어야만 했다.

 

크고 끊임 없이 증가하는 이주 증가는 모든 출처에서도 확인된다. 여권 수입은 1868년 210만 루블, 1855년 175만 루블, 1893-1894년 450만 루블로, 두 배 이상 증가해갔다. 1877-1885년 사이 모스크바에서 발급된 여권과 신분증 수로는 남성 20%, 여성 53%로 증가했다. 트베리에서는 1893-1896년 사이에 5.6%, 칼루가에서는 1885-1895년 사이 23%, 부재 개월 수로는 26%로, 증가했다.

 

스몰렌스크에서는 1875년 10만 명, 1885년 11만 7천 명, 1895년 14만 명으로 증가했다. 프스코프 주에서는 1865-1875년 11,716에서 1876년 14,944명, 1896년 남성 기준으로 43,765명으로 증가해갔다. 코스트로마 주에서는 1868년 남성 100명 당 여권과 카드 수가 23.8명으로, 여성 100명 당 0.85명 발급됐고, 1880년에는 각각 33.1명과 2.2명으로 증가했다. 증가 추세는 꾸준했다.

 

 

 

인구가 농업에서 도시로 이동하듯이, 비농업 이주는 점진적인 현상이었다. 인구를 소홀히 대하고, 뒤떨어지진 역사가 잊혀진 외딴 지역에서도 끌어내어 현대 사회 생활에서도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인구 문해율과 이해력을 높이고, 문명화된 습관과 요구 사항을 제공한다. 농민들은 더 높은 차원에서 동기를 가지고, 페테르부르크 사람들도 더 큰 총명함과 세련된 이주로부터 유도된다. 그들은 사물이 더 나은 곳을 찾는다. 사회적 편견에 비해, 미숙한 시골 사람들은 순수 농업 지역 사람들만큼 조금도 미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무의식적으로 삶의 형태와 외모나 습관을 모방하며, 대도시의 간접적인 삶들도 보여진다. 페테르부르크, 야로슬라블 시내에서도, 농업이나 수공예에 종사하는 사람을 평생 동안 시골 사람으로만 몰아간다. 심지어 결혼도 쉽지 않았다. 도시 이주로는 농민을 시민으로까지 격상시켜 놓고는, 농촌 지역에 깊이 뿌리박히 수 많은 자연적(가부장적)이고, 개인적인 의존 관계와 사회적 신분 구분에서도 벗어나게 했다.

 

이주를 촉진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때였다. 농노 의존으로부터, 해방과 농촌 인구 강누데 활동적인 층에서, 특히 도시 생활과 오랫동안 연관된 야로슬라블 농민에게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농촌 생활이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빈곤과 의존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나, 자급자족, 독립, 존중받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외부 수입으로 생활하는 농민은 다른 사회적 신분에 속한 사람들과 더 자유롭거나, 평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농촌 청년들은 더욱 도시로 가고 싶어했다.

 

도시 이주는 오래된 자연적인 가족 관계를 약화시켰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보다 독립적인 위치에 놓이도록 했다. 이주가 없는 지역 가족들과 비교해봤을 때도, 코스트로마에서 이주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던, 솔리갈리치와 후흘로마 가족들 사례에서도, 나이 든 사람의 가부장적인 권위 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 관계에서도, 훨씬 더 긴밀하고, 또 밀접했다. 물론 12세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진 아들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강한 애정과 본가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는 세계주의자가 되어, '잘 되는 곳이면, 어디든 내 나라다.'라는 생각을 품었다.

 

남편 권위와 도움 없이 살아가는 솔리갈리치 여성들은 농업 지대에서 억압 받는 농부 여성과도 전혀 달랐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었다. 아내를 때리는 일도 여기서는 드문 예외였다. 일반적으로, 남녀 평등은 거의 모든 곳에서, 모든 일에서도 지켜져야만 했다.

 

비농업 이주로는 이주하는 임금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임금도 높였다. 농업 지역보다도, 임금이 높은 비농업 지역에서 농업 지역 출신에 따른 농업 노동자를 유치한다는 일반적인 상태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칼루가 지역에서도,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해당 수치에서는 산업 분야에서 일자리를 위한 이주가 농업 임금 인상에도 도움을 주며, 인구로는 가장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인다는 현상을 충분히 보여준다. 단지 금전적인 임금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임금도 상승했다. 100명 노동자 가운데, 60명 이상이 이주한 군 단위 집단에서는, 연간 고용된 농장 노동자, 평균 임금은 69루블, 호밀 123푸드였다. 40-60% 이주하는 군에서는 64루블 또는 호밀 125푸드였다. 이주민 40% 미만을 공급하는 군에서는 59루블 또는 호밀 116루블이었다. 같은 군 단위 집단에서는 노동력 부족에 대한 불만 비율도 55%, 42%, 35%로, 꾸준히 감소해갔다. 제조업 임금은 농업보다 높았으며, 제조업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수요, 차, 옥양목, 신발, 시계 등을 창출했고,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임금 상승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견해로는, 노동력 부족은 늘 심각했고, 교외 주민들이 버릿 없이 자라거나, 철도 작업장에서 노동했기 때문이라고 봤으며, 칼루가와 시장이 가까우면 늘 주변 주민들도 모여 계란, 우유 등을 팔고는, 술집에서 난장판을 벌이곤 했다. 왜냐하면, 모두 최소한 노동으로부터 최고 급여를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농업 노동자가 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모두 도시로 떠나서 프롤레타리아와 찌질한 사람들을 놀리기만 해댔다. 반면에, 시골에서는 정작 유능하고, 건강한 노동자가 부족했다.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는 산업 평가를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는 건 매우 정당하다. 지반코프(Zhbankov)는 이주하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필수적인 노동자이고, 또 그 자리를 농민들이 대신한다고 지적했었다. 또한 상도 대체는 매우 불리하다는 점은 명백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서, 수도에서 삶은 하층 계급으로부터도, 많은 문명화된 습관과 사치, 과시에 대한 성향만을 키우고는, 쓸모 없는 돈 낭비가 이어진다. 과시에 따른 지출 등은, 대체로 비생산적이다. 헤르첸슈타인은 가짜 문화, 방탕한 생활, 난잡한 흥청, 취기와 추잡한 방탕의 향연 등에 대해 극렬하게 비난했다. 모스트바 통계학자들은 대량 이주라는 점에서도, 이주 노동의 필요성을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농민 소유지를 가족들에 따른 주요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늘리면 국가 경제에 따른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었다. 그리고 이 평온한 신사 분께서는, 누구도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완전한 이동의 자유, 자신의 토지를 포기할 만큼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자유, 어떤 공동체에서든 퇴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정착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지를 못했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도, 농업 인구 이동은 일부 지역에서는 식민지화로부터 가려진 발달로 인한 도시, 교외, 공장 및 상업과 산업 마을과 동네, 비농업 이주로 표시된다. 개혁 이후 폭과 깊이 면에서도, 급속도록 발전해왔고, 지금도 발전하고 있을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며, 과거에 따른 삶의 형태와 비교해봤을 때도, 매우 '진보적'으로 발전했다.

 

 

임금 노동 고용 증가

 

 

자본주의 발전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임금 노동 활용 정도이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 발전 단계 가운데 노동력 또한 상품이 되는 단계이다.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경향은 국민 경제 내 노동력 총합을 고용주가 판매하고, 구매한 후에야 생산에 적용시킨다. 자본주의적 경향에서도 개혁 이후로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자세히 살펴봤다. 이제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자면, 노동력 판매자 수에 대한 자료를 계산하고, 노동력 구매자에 대해 설명하겠다.

 

노동력 판매자는 물질적 가치 생산에 종사하는 국가 노동 인구로부터 제공된다. 해당 인구는 약 1,550만 명 성인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농민 최하층 농촌 무산층들이었다. 무산층이 노동력을 판매하는 형태도 검토해보겠다. 이전에 나열한 임금 노동자 범주를 결합했을 때, 모두 약 200만 명이었다.

 

1). 농업 임금 노동자,

2). 공장, 광산 및 철도 노동자,

3). 건설 노동자,

4). 미숙련 노동자(목재, 인부, 철도 건설, 화물 적재, 하역 등)

5). 제조업 노동자

 

총 약 천만 명 임금 노동자, 여성과 어린이를 1/4 정도 빼면, 750만 명은 성인 남성 임금 노동자다. 국가에서 물질적 가치 생산에 종사하는 전체 성인 남성 인구에서는 약 절반 가량이다. 광대한 임금 노동자 집단 가운데 일부는 토지와 완전하게 결별하고, 노동력 판매로만 생계를 유지한다. 대다수 공장 노동자 및 광산과 철도 노동자도 포함되고, 건설 및 조선 노동자 일부와 비숙련 노동자가 포함된다. 자본주의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와 자본가를 위해 가내 노동에 종사하는 비농업 중심지 주민들도 상당하다. 더 큰 규모 부문에서는 아직 토지와 분리되지는 않았고, 소규모 토지 경작으로부터 얻은 생산물로부터, 지출 일부를 충당해갔다. 따라서 토지 소유 임금 노동자 유형을 형성한다. 거대한 임금 노동자 집단은 주로 개혁 이후에 형성됐고, 계속해서 빠르게 성장해갔다.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상대적인 초과 인구 또는 실업 예비군에 대한 중요한 결론이 있다. 국민 경제 모든 부문에서, 임금 노동자 총 수에 대한 통계로는, 같은 지점에서, 인민주의자 경제학자들이 저지른 기본적인 오류에서도 매우 분명해진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해당 오류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수 없이 말했었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에 따른 초과 인구에서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조사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또한 국가에서 자본주의 존재와 발전 자체가, 엄청난 규모로 예비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다. 공장 노동자 수에 대한 빈약 문구, 이상한 계산으로부터, 그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기본 조건 가운데 하나를 자본주의는 불가능하고, 오류이며, 기초마저 없다는 등의 증거로 왜곡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규모 생산자들에 따른 수탈로부터, 농업, 목재, 건설, 상업, 제조업, 광업, 운송업 등에서도 고용주들에 따른 최대 수요를 즉각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임금 노동자 군대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 자본주의도, 결코 현재 수준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최대 수요라고 언급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병적으로만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생산자 수는 늘 자본주의에 따른 평균 노동자 수요를 초과해버렸다. 따라서 많은 범주로부터 임금 노동자 총 수를 추산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정규적인 고용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범주에서 임금 노동자를 택하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고용에 따른 규칙성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다. 여러 이주 노동자와 상주 노동자 가운데, 특정층은 끊임 없이 실업 예비군에 속했고, 실업 예비군은 엄청난 규모로 불어나기 때문이다. 주로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거나, 특정 지역에 따른 특정 산업이 침체된다거나, 기계 생산이 특히 빠르게 확대되어, 노동자를 대체할 때이다. 그러나 최소한으로 줄어든 일부 산업과 지역 고용주들은 가끔 불평하곤 하는,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한다.

 

신뢰할 만한 통계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평균적인 연도에 따른 실업자 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산업, 무역, 농업에 따른 큰 변동과 젬스트보 통계에 기록된 최하층 농민 예산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실업자 수가 매우 많다는 점은 당연했다. 산업 및 농촌 무산 계급으로 편입된 농민 수 증가와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 증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임금 노동 형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매우 많으며, 여전히 이전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잔재와 제도에 얽혀 있다. 단순히 많은 형태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오류이고, 보론초프와 같이, '자본주의는 100만에서 150만 명 노동자로, 더욱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의 오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자본주의 대신 대규모 기계 산업을 본다. 그러나 나머지 50만 명 노동자들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인위적으로, 임금 노동에 따른 나머지 영역과도 전혀 연결되지 않고는, 갇힌 구석에다 쳐박아 두는가.

 

밀접하게도, 경제 제도에 따른 두 가지 기본 특징이라면, 경제 제도는 화폐 경제에 기반한다. 화폐적 힘이란,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완전하게 나타나며, 완전히 발전해서는, 자연적(가부장) 경제에 따른 잔재를 완전하게 제거하고, 몇몇 거대한 은행 기관에 집중시키며, 대규모 사회적 생산과 직접 연결되면서, 대규모 기계 산업 영역일 때 뿐이다. 경제 제도는 노동력 매매에도 기반한다. 농업이나 산업에서 가장 작은 생산자조차도 자신을 고용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사람은 예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로부터 완전하게 발전해서, 대규모 기계 산업에서만 이전 경제 형태와는 완전하게 분리된다.

 

일부 인민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작아보였던 '구석'이란 실제로 현대 사회 관계에서도 진수를 구현하며, '구석' 인구,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문자 그대로 전체 노동 대중과도 착취 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선봉이자, 선발대이다. 따라서 구석부터 성장한 관계적인 관점에서도, 경제 제도 전체를 검토해야만, 생산에 참가하는 많은 집단 간 주요한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있고, 따라서 체제 제도에 따른 주요 발전 추세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모퉁이'에 등을 돌리고는, 경제 현상을 소부장적인 생산 관점에서만 고찰한 사람은 역사적 흐름에 따라, 순진한 몽상가나, 소부르주아와 농민 이념가로만 전락하는 신세일 뿐이다.

 

 

8-2. 노동력에 따른 국내시장 형성

 

유럽 러시아 영토를 통과하는 노동자 이동 양상에 국한한다. 양상은 고용주 진술을 바탕으로, 농무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제시됐다. 노동자 이동 양상은 노동력 국내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따라서 농업 노동자와 비농업 노동자 이동을 구분했을 뿐이며, 자료에 첨부된 노동자 이동을 보여준 지도에서는 구분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농업 노동자들의 주요 이동으로는,

 

1). 중앙 농업 지방에서 남부 및 동부 외곽 지역

2). 북부 흑토 지방에서 남부 흑토 지방

3). 중앙 농업 지방에서 산업 지방

4). 중부 및 남서부 농업 지방에서 사탕무 농장 지역

 

비농업 노동자 주요 이동으로는,

 

1). 비농업 주에서 대도시와 대도시로 이동 또는 상당 수 농업 주

2). 공업 지역,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블 및 같은 지역 다른 주 공장

3). 새로운 산업 중심지 또는 새로운 산업 분야, 비공장 산업 중심지 등

 

보다 구체적으로는,

 

a) 남서부 주 사탕무 설탕 정제소

b) 남부 광산 지역

c) 부두 일자리(오데사, 로스토프 온 돈, 리가 등)

d) 블라드미르 및 다른 주 이탄층

e) 우랄 광산 및 야금 지역

f) 어업(아스트라한, 흑해, 아조프해 등)

g) 조선, 선원 목재 및 목재 운반 일자리 등

h) 철도 일자리

 

고용주 증언에 따르면, 많은 지역에서 노동력 임대 조건에 대해 다소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노동자들에 따른 주요 이동이다. 이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욱 명확하게 하고자,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많은 지역에서 임금 통계와도 비교해봤다. 유럽 러시아, 28개 주로 한정해서, 노동자 이동 성격에 따라, 6개 집단으로 구분해서 통계를 얻었다. 해당 표에서는 국내 시장에 따른 자본주의로부터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에 대한 기초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적으로 가장 발달한 두 주요 지역에서는 큰 수로 노동자를 유치했다. 남부와 동부 외곽 지역과 같은 농업 자본주의 지역과 대도시와 산업 주와 같은 산업 자본주의 지역이었다. 임금은 출발지인 중앙 농업 주에서 가장 낮았다.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덜 발달한 곳이었다. 반면에, 유입 지역에서는 모든 유형 작업에 대한 임금이 상승하고, 총 임금에 대한 화폐 임금 비율도 상승했다. 따라서 화폐 경제는 자연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발전해갔다.

 

가장 큰 유입 지역과 가장 높은 임금, 가장 이탈 지역과 가장 낮은 임금 사이에서 중간 지역은 노동자에 따른 상호 교체를 보여준다. 노동자가 너무 많이 떠나기 때문에, 이탈 지역에서는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며, 임금이 낮은 지방에서 노동자가 유입된다.

 

본질적으로는, 표에 나타난 양면적인 과정으로부터,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인구 산업화와 상업적이고, 산업적인 자본주의 농업 발전에 따른 농업 산업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내 시장 형성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모든 걸 요약한다. 자본주의 국내 시장은 농업과 산업에서 자본주의가 병행적으로 발전하면서부터, 농촌 및 산업 고용주 계급과 농촌 및 산업 임금 노동 계급이 형성되면서부터 창출된다.

 

노동 운동에서 주요한 흐름과 과정으로는, 주요한 형태를 보여주지만, 모든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과정에 따른 형태로는, 농민과 지주 농업, 상업 농업에 따른 많은 영역, 산업에서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 등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든 과정에서 대표적인 인민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얼마나 왜곡되고, 혼란스럽게 묘사했던지, '사회적 생산력에 따른 재분배가 농업 인구에서 경제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으로 논문 제목을 정하기도 했었다.

 

'재분배'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생산력에 따른 모든 증가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만 하는 해당 수 노동자에 따른 해방을 수반한다. 그리고 모든 생산 부문에서 발생하며, 해방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아직 박탈되지 않은 생산 수단, 토지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았기에, 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공장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부수적인 가사 노동을 포기해야만 했을 때, 토지 착취를 확대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모든 젬스트보 통계 자료는 경작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경제학자들도 듣도 보도 못한 매우 특수한 종류의 자본주의를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구를 농업에서 산업으로 전환하지 않았으며, 농부들은 반대 계급으로 나누지도 않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산업에서 '해방'시키고는, '그들에게는' 토지로 향하는 방법 외에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모든 과정을 시적인 무질서 속에서 재분배하는 이론의 근저에는, 이전에 자세하게 살펴본 모든 인민주의자들의 교묘한 술책들도 있었다. 농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아리아트를 한데 묶고는, 상업 농장에 따른 발달을 무시해버렸다. 산업에서도 자본주의에 따른 연속적인 형태와 많은 발현들을 분석하는 대신에, '민중'으로부터 '수공예 산업'이 '공장 산업'으로부터 고립됐다는 말만 지어냈다.

 

 

국경 지역 중요도: 국내 시장인가, 해외 시장인가.

 

 

앞서 자본주의 따른 해외 시장 문제를 생산물 실현 문제와 연결하는 이론의 잘못된 성격을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해외 시장을 필요로 한다는 건, 국내 시장에서 생산물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이전 규모에서 불변 조건 아래로부터 동일한 생산 과정을 반복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필연적으로 이전 경제 단위에 대한 낡고 좁은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생산 발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부터 내재된 발전에 따른 불균등함으로 인해, 한 생산 부문은 다른 부문들을 앞지르고 기존 경제 관계 영역에 따른 경계를 '초월'해간다.

 

개혁 이후 초기 섬유 산업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기 때문에, 제조업은 공장 산업으로 전환되면서부터, 중부 시장을 완전하게 장악해갔다. 급속도로 발전한 대형 공장들은 더 이상 기존 시장 규모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노보로시야, 남동부 트란스볼가, 북코카서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 등 새로운 인구를 식민화할 수 있는 더 먼 곳에 따른 시장을 모색해갔다. 대형 공장들에서는 기존 시장을 넘어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기존 시장 역할을 했던 지역들이 일반적으로 섬유 산업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리고 산업 및 중부 농업 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양에서 상품을 흡수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농민층 분리, 농업 상업 발달, 산업 인구에 따른 증가가 기존 지역에서도 국내 시장으로 계속해서 확대해갔다. 국내 시장 확대는 농업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낡은 제도 유지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지연됐다. 공장주들은 국민 경제에서도 다른 부문들이 섬유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공장주들은 당장에, 시장을 요구하고, 국민 경제에서도 후진하는 다른 부문들로부터도, 기존 지역에서 시장은 제한되고, 다른 지역이나, 다른 국가, 또는 기존 국가에 따른 식민지에서 시장을 모색한다.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식민지란 과연 무엇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식민지라는 개념에서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

 

1). 정착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점유 자유 토지의 존재

2). 확립된 세계 노동 분업

 

세계 시장 존재 덕분에 식민지는 농산물에 따른 대량 생산에도 특화하기 때문에, 다른 상태로는 스스로 생산해야만 할 완제품을 대가로 받는다. 개혁 이후 정착된 유럽 러시아 남부 및 동부 국경 지역에서는 언급된 독특한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중부 유럽 러시아에서도 식민지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식민자라는 용어는 코카서스와 같은 다른 외곽 지역에서도 더욱 적용됐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경제적 '정복'이란, 정치적 정복보다도 훨씬 늦게 이뤄졌다. 현재까지도 경제적 정복은 완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개혁 이후 시기에는 코카서스가 집중적으로 식민지화됐고, 식민지 주민들은 밀, 담배 등을 판매하고자, 특히 북코카서스의 토지를 폭 넓게 경작해서, 러시아에서는 농촌 임금 노동자를 대량으로 유치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생산된 제품과 경쟁으로부터 쇠퇴하는 오랫동안 토착된 수공예 산업은 사라져만 갔다. 수입 툴라 및 벨기에 제품과 경쟁으로 인해서도 고대 총포 제작 기술도 쇠퇴했고, 수입 러시아 제품과 경쟁으로부터도 수공예 철공은 쇠퇴해버렸고, 구리, 금, 은, 점토, 지방 및 기름(소다), 가죽 등 수공예 가공도 쇠퇴해갔다. 해당 제품은 코카서스에서 제품을 공급하는 러시아 공장에서 더 저렴하게 생산됐다. 조지아에서도 봉건 제도는 쇠퇴해갔으며, 기념할 잔치도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부터, 술잔 제조가 감소했다. 아시아에서 의상은 유럽 의상으로 대체됐고, 모자 산업도 쇠퇴해갔다. 지역 와인을 위한 포도주 가죽 부대와 용기(투수) 생산도 감소했다. 통 제조 무역이 처음으로 판매되면서부터, 러시아 시장을 장악해갔다.

 

시장에 있어 러시아 자본주의는 코카서스를 세계 상품 유통 영역으로까지 끌어들이면서, 지역적 특수성, 고대 자연적인 고립에 따른 잔재를 말살시켰고, 공장 시장을 스스로 확보해갔다. 개혁 이후 초기에는 인구 밀도가 낮았거나, 세계 경제는 물론 역사 바깥에서 살아가는 산악인들로 가득했던 나라는 석유 산업가, 와인 상인, 대규모 밀 및 담배 재배 농가 토지로 변모했다.

 

자본가를 지칭하던 쿠폰(Mr. Coupon)은 자랑스러운 산악인에게 아름다운 민족 의상을 무자비하게 벗겨냈고, 유럽 하수인의 제복을 입혔다. 코카서스에 따른 급속한 식민지화와 농업 인구에 따른 급속한 증가로부터 가려진 인구 농업에서 산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동반했다. 코카서스 도시 인구는 1863년 35만 명에서 1897년 약 90만 명으로 증가했다. 1851-1897년 사이에 총 인구는 95% 증가했다.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고, 또 계속됐다.

 

그렇다면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의 경계는 어디일까. 국가적, 정치적인 경계를 정하는 건 너무 기계적인 해결책이며, 과연 충분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중앙 아시아가 국내 시장이고 페르시아가 해외 시장이라면, 히바와 보카라는 어디에 속할까. 시베리아가 국내 시장이고 중국이 해외 시장이라면, 만주는 어디에 속할까.

 

이런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지배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새로운 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기존에 따른 비자본주의 국가들을 세계 경제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특징은 개혁 이후 러시아에서도 큰 힘으로 드러났으며, 지금도 계속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 형성 과정은 두 가지다. 자본주의에 따른 심층적 발전으로, 주어진 확정적이고, 폐쇄적인 영토 내로부터 자본주의적 농업과 산업이 더욱 발달한다는 점과 자본주의에 따른 폭 넓은 발전으로부터, 자본주의 지배 영역을 확장시킨다. 본 연구 계획에 따라서도, 자본주의에 따른 심층적 발전에서 거의 전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따른 폭 넓은 발전도 중요해진다.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국경 지역에 따른 식민지화 과정과 러시아 영토 확장을 완전히 연구하려면, 별도 작업이 필요하다.

 

다만, 러시아는 국경 지역에 따른 식민지화로부터 이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자유 토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아시아 러시아는 두말 할 일도 없고, 유럽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도 있으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교통 수단도 열악해서, 중부 러시아와 경제적인 연결이 매우 취약했다.

 

특히 '극북'에 위치한 아르한겔(Archangel Gubernia)를 살펴보자면, 광활한 영토와 천연 자원은 여전히 미미하게 개발됐다. 주요 지역 생산물 가운데 하나로는 목재가 주로 영국으로 수출됐다. 따라서 유럽 러시아 지역은 국내 시장이 아닌 해외 시장이었다. 러시아 기업가들은 당연하게도 영국을 부러워했고, 아르한겔까지 철도가 연장되면서부터, 해당 지역에서도 많은 산업 분야에서, 고조된 분위기와 사업 활동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8-3. 자본주의 임무

 

 

문헌에서도 자본주의 '임무', 경제 발전에서도 자본주의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이라는 질문을 요약해야만 한다. 역할에 따른 발전(진보)를 인정한다는 건, 사실로부터 설명하는 모든 단계에서도 자세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자본주의에 따른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을 온전히 인정하고,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내재된 경제 제도에 따른 역사적으로는 일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심오하고, 전면적인 사회적 모순을 인정하는 점과는 매우 양립한다.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본질을 인정한다는 건, 자본주의에 대한 변명을 말한다고만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따른 가장 심각한 모순을 무시한다거나, 과소평가했으며, 농민층 분화, 농업 발전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성격, 농촌과 산업에 따른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에 따른 부상을 은폐하고는, 수공예 산업에서 가장 낮으며 최악의 자본주의 형태가 완전하게 우세한다는 점을 은폐하면서 잘못을 범해버렸다.

 

자본주의에 따른 점진적인 역사적인 역할로는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사회적 노동에 따른 생산력 증대와 노동에 따른 사회화다. 그러나 두 가지 점 모두 국민 경제로는 여러 부문에서도 매우 많은 과정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노동에 따른 생산력 발전은 대규모 기계 산업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졌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수작업 생산과 원시 기술이 존재했고, 매우 자발적이고, 매우 느리게 발전했다. 개혁 이후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서도 이전 시대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러시아는 나무 쟁기와 도리깨, 물레방아와 수동 베틀에서 철제 쟁기와 탈곡기, 증기 제분기와 동력 베틀로부터 급속하게 변모해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배하는 모든 국민 경제 부문에서도, 철저한 기술 변화가 목격됐다. 자본주의 본질로는 변화 과정으로부터도 불균형하고, 균등하지도 못한 많은 점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호황기와 불황기가 번갈아 나타나고, 한 산업 발전은 다른 산업에 따른 쇠티로 이어지며, 한 지역에서는 농업 부문이 발전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부문이 발전하면서, 무역과 산업에 따른 발달이 농업에 따른 발달을 앞지르는 등으로 나타난다. 인민주의자들이 저지른 많은 오류에서 불균형적이고, 불규칙적이며, 열광적인 발전이 다가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노력에서도 비롯됐다.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란,

 

1). 상품 생산에 따른 발달 자체가 자연 경제 특징인 소규모 경제 단위에 따른 분산된 상태를 파괴하고, 소규모 지역 시장을 거대한 국가와 세게 시장으로 통합시킨다. 자신을 위한 생산에서 사회 전체를 위한 생산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수록 생산에 따른 집단적인 성격과 전유에 따른 개인적 성격 사이에서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

 

2). 자본주의는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이전에 분산된 생산을 전례 없는 집중으로 대체해간다. 검토 중인 자본주의 특징에서도 매우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유일하지는 않다.

 

3). 자본주의 이전 경제 체제에서도 분리할 수 없는 개인적 종속 형태를 제거시킨다. 러시아에서도 발전(진보)적인 성격은 특히 두드러진다. 생산자에 따른 개인적인 종속은 농업만이 아니라, 제조업, 광업 및 야금업, 어업 등에서도 존재했고, 종속 농민이나, 노예 농민 노동과 비교해봤을 때도, 고용 노동자에 따른 노동은 국가 경제로부터 모든 부문에서도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4).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구 이동성을 창출한다. 이전 사회 경제 체제 및 제도에서는 요구되지 않으며, 제도 아래에서는 대규모로 실현될 수 없다.

 

5). 자본주의는 매우 후진적인 형태와 사회적, 경제적 관계가 늘 지배적인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며, 대규모 산업 중심지 수를 증가시킨다.

 

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구 결사와 조직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키고, 해당 조직에 따른 이전 시대와는 다른 특징을 부여한다. 자본주의는 중세 사회에서 좁고, 지역적인, 사회적인 신부 연합을 무너뜨리며, 치열한 경쟁을 생산하고, 사회 전체를 생산에서 서로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에 따른 대규모 집단으로 분할해서, 각 집단 내 조직에서는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한다.

 

7). 자본주의가 낡은 경제 체제 및 제도로부터 가져온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사고 방식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경제 발전에 따른 병적인(발작적인) 특성, 생산 방식에 따른 급속한 변화와 생산에 따른 막대한 집중, 모든 형태에서 개인적인 의존과 자연적(가부장적) 관계의 소멸, 인구 이동성, 거대 산업 중심지에 따른 영향력 등, 모든 점은 생산자들 성격 자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당시에 러시아 연구자들로부터 비슷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인민주의 경제학에서, 인민주의 대표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견해 차이를 요약했다. 인민주의자가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자본주의 이전 경제 관계 체계에 대해 가졌던 개념 자체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었다. 특히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농민 경제 구조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모순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속도에 있어 느린지, 빠른지는 전적으로, 해당 발전을 무엇과 비교하는가에 달려 있었고,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러시아에서도 이전 자본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와 비교해봤을 때,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회 경제 발전은 매우 빨랐다. 그러나 발전 속도를 일반적인 기술과 문화 수준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속도와 비교해본다면, 러시아 자본주의에서도 발전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와 곧바로 양립할 수는 없으며 발전을 지연시키고, 자본주의 생산에 따른 발전 뿐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생산자들에게도 불완전한 자본주의적인 발전과 그 상태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오래된 고대 제도들도 더욱 악화시켰다.

 

인민주의자들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는 아마도 사회 및 경제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와 역사적인 역할을 가진 집단들 간 상호 관계에 따른 결과로도 사회 및 경제 관계에 대한 총체를 제시하지도 않았었다. 필자가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제공했더라면, 자신이 들인 노력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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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규모 기계공업 발전

 

 

7-1. 공장 통계 검토

 

 

대규모 기계 공업의 발전

 

 

공장에 대한 과학적 개념과 공장 통계에서 중요함

 

 

대규모 기계 공장 산업을 다루기 전에, 대규모 기계 공장 산업은 과학적 개념이 일반적인 의미와는 불일치한다는 점이다. 공식 통계와 일반적인 문헌에 따른 공장에서는 다소 상당 수의 임금 노동자를 보유한 제법 규모가 큰 산업 시설을 말한다. 마르크스도 지적했지만, 대규모 기계 공장 산업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특정 단계, 곧 가장 높은 단계에서만 적용된다.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특징은 생산을 위한 기계 체계의 도입이다.

 

공장제 수공업에서 공장으로의 전환에는 완전한 기술 혁명을 의미한다. 수 세기 동안 습득해 온 장인의 수작업 기술을 없애버렸으며, 기술 혁명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생산 관계에 따른 가장 철저한 파괴와 생산에 참가하는 많은 집단 간의 최종적인 분열,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 자본주의의 모든 어두운 측면의 강화 및 확장, 자본주의로부터 이뤄지는 노동의 대량 사회화를 수반시킨다.

 

따라서 대규모 기계 산업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말이며, 사회적 발전의 요소와 퇴보라는 마지막 말이다.

 

공장제 수공업에서 공장으로의 전환에는 자본주의 발전을 다룰 때도 특히 중요해진다. 두 단계를 혼동하는 사람은 자본주의에 있어 변혁적이고, 발전적인 역할도 알 수 있다는 점을 스스로 박탈시킬 뿐이다. 바로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이 저지른 실수였다. 순진하게 자본주의를 공장 산업과 동일시했었으며, 자본주의의 사명과 통합적인 의미의 문제를 단순히 공장 통계만을 언급해서 해결하려고만 들었다. 공장 통계 문제에서도 놀랍도록 무지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한 놀랍도록 고정관념적이고, 편혐한 이해로부터, 더욱 심각한 오류를 범해버렸다.

 

먼저 대규모 기계 산업 발전 문제를 단순한 공장 통계로 축소시켰다는 점도 어리석었다. 단순히 통계 문제가 아니었으며, 고려 중인 국가 산업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이 과연 어떤 형태를 취하고, 어떤 단계를 거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이에 따른 형태의 본질과 특징이 명확해진 이유에야, 제대로 정리된 통계로부터, 특정 형태의 발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계에 대해서만 국한시킨다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가장 많은 형태의 자본주의를 아예 하나로 묶어버린다거나, 나무만 보고는 숲을 보지 못하게 된다.

 

미하일로프스키가 자본주의로부터 도대체 노동의 사회화에 대해 사람들이 왜 말하는지에 대해 놀라워했었을 때와 같이, 자본주의에 따른 모든 사명을 공장 노동자 수를 늘리는 것으로 축소한다는 건 일노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저버리는 짓이었다. 미하일로프에게 사회화란 수 많은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보고, 자르고, 대패질하는 등에 불과하다고 단언해버렸기 때문이다.

 

 

공장 통계

 

 

공장 통계에 따른 주요 출처로는 공장 및 사업장 소유주가 금세기 초에 통과된 법률에 따라 매년 상무제조업부에 제출하는 보고서이다. 공장 소유주의 정보 제출에 대한 법률의 매우 상세한 규정까지는 경건한 바람이었으며, 공장 통계는 순전히 구식이고, 개혁 이전의 제도에 따라 구성됐고, 단지 주지사 보고서 부록에 불과했다. 아직은 '공장 및 사업장'이라는 용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州)와 군(郡) 당국조차도, 매우 많은 방식으로만 용어를 사용해댔다. 보고서에 따른 적절하고, 통일된 수집 및 검증을 지휘하는 중앙 기관이 아예 없었다. 그리고 산업 시설도 광업, 상무제조업부, 잡세국 등, 여러 부서로 분산됐기 때문에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1863-1879년 공장 산업 통계」, 「1885-1891년 공장 산업 통계」를 주로 인용했다. 통계에서는 소비세가 부과되지 않는 업종만 해당했다. 더군다나 각 기간 별로 거래 건 수도 서로 달랐다. 따라서 해당 통계로부터, 22년 간의 통계가 있는 34개 업종을 선정했다.

 

이 통계의 가치를 판단하고자, 먼저 공장 통계에 대한 1860년대부터 중요한 간행물들을 살펴봤다.

 

1860년대 공장 통계 편찬자들은 자신들이 처리했던 반품에 있어 불만족스러운 실상을 충분히 인지했다. 만장일치로 공장 주 보고서에 따른 노동자 수와 총 생산량이 상당히 축소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간주할 통일된 정의가 여러 구에서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많은 구에서는 공장과 공장 총 수에 대한 비교 자료조차 무의미했다. 여기에 대한 비판들도 날카로워서 공장 노동자 가운데, 자택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일부 공장 주인이 공장 부지에 살던 노동자에게만 수익을 제공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 통계학자는 '제조업과 공장 산업에 대한 정확한 공식 통계는 없었다고' 발표했으며, 일차 자료를 수집하는 주요한 원칙이 바뀔 때까지는 통계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많은 무역에 대한 공장과 작업장 표에서는 숱한 오해로 인해, 공장이나 작업장 성격이 전혀 없는 순수한 장인들과 수공예 시설들이 많이 포함됐다. 이를 고려해봤을 때도 연감 편집자들은 인쇄된 통계를 요약하는 것조차 거부했었다. 단지 '대중들에게 잘못되고, 명백히 과장된 수치를 전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자들에게는 명백하게 과장됐을 정도였으며, 보다 정확한 생각을 제공하고자, 연감에 제공된 통계를 살펴봤다. 통계에서는 다른 모든 출처와 유리하게 달랐으며, 1,000루블을 초과한 생산량을 가진 공장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1885년 이후로는 총 생산량이 더 적은 시설은 공장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연감에 따르면, 소규모 시설에 대한 추산에 따른 일반 공장 목록으로는 2,366개가 포함됐고, 7,327명을 고용했었고, 생산량은 987,000루블에 달했다. 따라서 소규모 사업체에서는 전체 사업체 수 34.3%, 전체 노동자 수 2.1%, 전체 생산량에서 0.3%를 차지했다. 사업체 당 평균 노동자가 3명이 조금 넘고, 생산량이 500루블 미만의 소규모 사업체를 공장으로 간주한다는 건 터무니 없었고, 완전히 등록하는 것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소규모 사업체에서는 통계에 따라 공장으로 분류됐을 뿐만이 아니라, 수 많은 수공예인을 매우 인위적이고, 임의적으로 공장으로 결합시킨 경우들도 있었다. 연감에서는 니즈니노브고로드, 고르바토프 지역에서 이츠빌레츠 지구의 밧줄 제조 산업에 대해서는 '이츠빌레츠 지구에서 농민들의 공장, 노동자 수로는 929명, 방적기 308대, 생산량은 100,400루블'이라고만 언급했다. 같은 지역 보르스마 마을에서는 '셰레메테프 백작의 임시 농민들과 대장간 100개, 가정용 목수 작업대, 수동 숫돌 20대, 노동자 902명, 생산량 6,610루블'이라고 언급했다. 다음 통계 수치에서도 얼마나 실제 상태를 형편 없게 보여줬는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었다.

 

1860년대 공장 통계 출처 가운데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 군사 통계 초록에 따르면, 광산과 소비세 납수 시설을 포함한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모든 공장과 사업장에 대한 통계를 제공했으며, 1866년에 유럽 러시아에서는 공장이 70,631개, 노동자가 829,573명, 총 생산량은 5억 8,331만 7,000루블에 달했다. 수치에서 첫째로는, 재무부 보고서가 아니라, 통계 위원회에 따른 특수 보고서에서 발췌했다. 둘째로는, 군사 통계 초록의 편찬자들은 아주 작은 시설조차도 공장으로 분류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기본 반환에다 다른 자료를 더 추가했다. 상무부 및 제조부의 반환, 인민위원회의 반환, 군수 빛 해군부의 반환, 가장 많은 빈도 수에 따른 출처의 반환이었다.

 

카리셰프(Karyshev), 카블루코프(Kablukov), 인민주의자들은 현대 통계와 비교하고자, 군사 통계를 사용하면서도, 정작 공장 통계에 대한 주요한 출처조차도 전혀 알지도 못했었고, 통계에 대해서도 전혀 비판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였었다. 특히 자유경제학회에서 군사 통계 초록 수치가 완전히 잘못됐다는 점을 지적했던, 투간 바라노프스키가 읽은 논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발표자들은 노동자 수에 오류가 있더라도, 10-15%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라고 단언했었다. V.V. 보론초프도 똑같았었다. 여기에는 V. 포크로프스키도 동조했으며, 지지자들은 공장 통계에서 많은 출처에 대한 비판적 검토조차도 시도하지 않았으며, 공장 통계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본질로부터, 최근 들어 통계가 더 정확해졌다고만 일반적으로 말해왔을 뿐이었다.

 

주요한 문제였던 인민주의자들과 카리셰프는 조잡하게도, P.B. 스트루베(Struve)가 정확하게 지적했었지만 간가됐다. 출처를 주의 깊게 다룬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렸어야 할, 군사 통계 초록에서는 과정된 부분을 계산하는 게 차라리 더 가치 있었다. 71개 거래에 대해, 재무부와 출처를 알 수 없는 1866년 병영 통계도 있었다. 거래에 대해 야금업을 제외하고는, 군사 통계 초록은 유럽 러시아의 공장과 작업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를 50,000명이나 과장시켰다. 또한 연감에서는 제국 총액 수치만을 제공했고, 명백하게 과장됐다는 이유로부터 자세한 분석마저 거부한 거래의 경우에도, 군사 통계 초록은 수치 외에도 95,000명의 노동자를 제공했다. 벽돌 제조의 경우 노동자 수는 최소 10,000명 과장됐다.

 

이를 비교하려면, 「군사 통계 초록」 뿐만이 아니라,「재무부 수익 및 자제」에 있는 통계를 비교해야만 했다. 야금 거래에서는 군사 통계 초록과 연감을 비교해봤을 때, 노동자 수를 86,000명 가량을 과장시켰다. 분명 일부 광부들을 수치에다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비세 납부 업종의 경우로는, 군사 통계 초록은 4만 명이나 과장시켰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28만 명이 과장됐으며, 최소 수치이며, 또 불완전한 수치였다. 모든 업종에 대한 군사 통계 초록를 검증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들과 카리셰프의 오류가 사소하다는 주장에는 주제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

 

1870년대는 1860년대보다, 공장 통계를 결합하고, 분석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재무부 연감에는 1867-1879년 40개 업종에 대한 통계들만 수록됐다. 다른 업종이 제외된 것은, 농업 생활과 밀접하거나, 장인 및 수공예 산업의 부속물인 산업의 재료적 특성이 매우 불만적스러웠기 때문이다.

 

1870년대에는 P. 오롤로브(Orlov)의「공장 및 작업장 목록」이었다. 해당 출판물은 2,000루블 이상의 산출량을 가진 모든 시설을 나열했다. 나머지는 규모가 작았고, 수공예 시설과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항목에서 제공한 요약된 통계에 포함됐다. 20,000루블 이상 산출량을 가진 시설에 대한 별도 합계가 제공되지는 않았으므로, 항목의 일반 데이터는 이전 출판물에 따른 통계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시설과 대규모 시설을 결합했다. 다른 무역 및 다른 주베르니아에 대한 통계에서 동일한 수의 소규모 시설도 포함됐다.

 

농업과 관련된 무역 항목에서는 연감의 유보를 반복했고, 통계적 부정확성과 불완전성 때문에 대략적인 합계에 대한 제공을 거부해버렸다. 특히 신뢰할 수 없는 수치들과 견해들은 모두 명부에 따른 일반 합계에다 모두 포함시켜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고, 따라서 해당 수치들은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수치들과 함께 묶어버렸다. 유럽 러시아에 대한 명부 총계 수치에서는 이전 수치와 다르게 소비세 납부 업종도 포함됐다.

 

1879년 자료에 나타난 공장 수 감소는 허구였을 뿐이었다. 요점은 시기에 따라 소규모 사업체 수가 공장으로 분류됐다. 따라서 생산량은 1,000루블을 초과하는 사업체 수가 1884년에는 19,277개, 1890년에는 21,124개로 추산됐다. 생산량이 2,000루블 이상인 사업체 수로는 1884년에는 11,509개, 1890년에는 17,642개였다.

 

1889년 상무부와 제조부에서는 「러시아 공장 산업에 대한 자료집」을 별도 판으로 발행했었다. 공장주 보고서를 기반으로, 처리 방식은 매끄럽지 못했고, 1860년대 위에 언급된 출판물보다도 열등했다. 유일한 개선점으로는 1,000루블 미만의 생산량을 가진 소규모 사업장이 공장 및 작업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자료가 업종 별로도 분배되지 않고, 별도로 제공됐다. 물론 공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부적절한 기준이었다. 자료 수집 체계 아래에서는 생산량이 1,000루블을 초과하는 사업장을 완전히 등록할 수도 없었다. 농업 거래에서는 공장의 분리가 매우 무질서했다. 일부 시내권(구베르니아)와 연도에서는 수차와 풍차가 공장으로 분류됐지만, 다른 시내권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러시아 공장 산업의 주요 결과, 1885-1887년」저자는 다른 시내권에 대한 통계가 다르고,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무시했으며, 반복적으로 오류를 범해버렸다. 자료집에 대한 특성화에 따라, 1891년까지는 소비세가 부과되지 않은 거래만을 다뤘지만, 1892년 이후로는 광업과 소비세 납부를 포함한 모든 거래를 다뤘다. 이전에 제시된 다른 자료와 비교해볼 만한 자료에 대한 특수한 언급도 없었고, 공장과 작업장 총 수에 따른 제철소를 포함시킨 방법에 대한 설명마저 전혀 없었다.

 

1880년대 공장 산업에 대한 또 다른 통계원도 있었다. 부정적인 특성과 카리셰프가 출처 통계를 사용했기 때문에 주목할 만은 했었다. 「러시아 회고록, 1884-1885년」으로, 표 가운데 하나로는 '1885년, 유럽 러시아에서 공장 산업 생산량 합계'가 나와있다. 공장과 노동자 수는 시내권(주베르니아)에 따라 분포되지는 않았고, 러시아 전체에 대해서만 제공했다. 통계원은 주지사 보고 통계였다.

 

통계에서는 소비세 납부와 광업을 포함한 모든 업종을 포괄했고, 모든 업종에 대해 유럽 러시아 전체에 따른 공장 당 평균 노동자 수와 생산량으로 나왔다. 카리셰프는 '평균' 분석에 착수했었다.

 

가치를 판단하고자, '반환' 통계를 자료집에 있는 통계와 비교했을 때, 유럽 러시아에 대한 53개 거래가 남았다. 따라서 주지사 보고서에서는 공장 가운데 수만 개의 소규모 농업 및 수공예 시설이 포함됐다. 물론 시설에서는 많은 무역과 시내권(구베르니아) 및 군 단위(위예즈드)를 위해 공장에 우연하게 포함시켰다.

 

러시아 무역에서 '반환 및 징수'에 따른 작업 수

 

모피: 1,205 및 259개,

가죽: 4,097 및 2,026개,

담요(매트) 및 가방: 562 및 55개,

전분 및 당밀: 1,228 및 184개,

밀가루: 17,765 및 3,940개,

착유: 9,341개 및 574개,

역청(타르) 증류: 3,366 및 328개,

벽돌 제조: 5,067 및 1,488개,

도자기와 유약 판(타일): 2,573 및 147개,

 

이와 같은 공장을 계산하는 방법에 근거해서, '평균 수치'를 취했을 때 공장 산업에 따른 '시설 규모'를 추산해본다면, 어떤 종류의 통계가 나올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위에서 언급했던 공장 당 노동자 '평균 수'가 100명이 넘는 업종만을 대상으로 대규모 산업으로 분류하고 추산해버렸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계 내에서 알 수 있는 대규모 산업은 총 생산량의 1/4만을 제공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더 나아가,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은 실제로 공장 산업 총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덧붙여, 지방 주 통계 위원회 자료는 '공장 및 작업장'이라는 용어를 매우 모호하게 만들었고, 소규모 사업장도 등록해버렸다. 1893-1894년 사이 스몰렌스크 주에서 일부 군에서는 등록된 수십 개 소규모 석유 압차기를 공장으로 간주해버렸지만, 정작 다른 군에서는 전혀 공장으로 간주하지도 않았었다. 시내권에서 역청 공장 수는 152개로 기록됐고, 많은 군 단위 등에서도 동일한 임시 등록이 이뤄졌다. 야로슬라블에서는 1890년대 지역 통계학자에 따르면, 공장 수를 3,376개로 기록했고, 일부 군 단위의 경우로는, 수백 개의 제분소, 대장간, 소규모 감자 가공 공장 등도 포함됐다.

 

공장 통계에서는 자료 수집 계획을 변경해버렸고, '공장 및 작업장'이라는 용어의 의미마저 변경하는 개혁을 거쳐버렸다. 또한 자료 수집 및 검증 작업에 따른 공장 검사관을 배치했다. 연구 논문과 해당 기사를 참조해봤을 때도, 「새로운 계획에 따라 편찬된 공장 및 작업장 목록」을 자세하게 검토했으며, 개혁에도 불구하고, 정작 공장 통계 개선은 눈에 띄지도 않았으며, '공장 및 작업장'이라는 용어를 여전히 매우 모호하게 사용했고, 통계는 매우 무질서한 경우도 많아서, 매우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유럽식으로 조직된 적절한 산업 인구 조사만이 산업 통계를 그나마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공장 통계를 검토해봤을 때, 여기에 포함된 통계는 대부분 특수한 처리를 거치지 않고는 사용할 수조차 없었고, 처리에 따른 주요한 목적은 비교적 유용하거나, 전혀 쓸모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 있었다.

 

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거래에 대한 통계를 살펴보겠다. 공장 수가 증가한다거나, 아니면 감소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질문에 답하는 가장 큰 어려운 점은 공장 통계에서 공장이라는 용어가 매우 혼란스럽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공장 통계를 기반으로,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은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먼저 공장이라는 용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확립해야만 한다. 그러한 조건 없이는, 많은 시기에 따른 보다 많은 수의 소규모 제분소, 착유기, 벽돌 창고 등이 포함된 시설에 대한 통계로부터 대규모 기계 산업 발전을 설명한다는 건 터무니 없는 일일 뿐이다.

 

시설에서 16명 이상 노동자가 고용된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1866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산업 시설 수가 최대 2,500-3,000개였고, 1879년에는 약 4,500개, 1890년에는 약 6,000개, 1894-1895년에는 약 6,400개, 1903년에는 약 9,000개였다. 따라서 개혁 이후로도 공장 수는 증가해갔으며, 매우 빠르게 증가해갔다.

 

 

대규모 산업 발전에 따른 역사 통계 자료 검토

 

 

제조업 주요 분야

 

 

- 섬유 무역

 

 

양모 무역 선두에는 천 생산이 있었다. 1890년에는 생산량이 3,500만 루블을 넘었고, 45,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다. 무역에 대한 역사 통계 자료에서는 노동자 수가 상당히 감소했다. 1866년 72,638명에서, 1890년 46,740명으로 감소했다.

 

다음과 같은 현상을 평가하려면, 1860년대까지 부직포(펠트) 천 생산이 특정하고, 독창적인 노선에 따라 조직됐다. 비교적 대규모 시설에 집중됐으며, 농노나 일시적으로 묶인 농민 노동에 기반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적인 공장 산업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1860년대, 공장 산업 조사에서 천 공장은 지주나 귀족이 소유한 공장, 상인 소유한 공장으로 구분됐다. 지주나 귀족이 소유한 공장에서는 주로 군용 천을 생산했고, 정부 계약에서는 기계 수에 비례해서, 공장에 균등하게 분배됐다. 강제 노동은 시설의 기술적 후진성과 고용 노동력에 기반한 상인 공장보다도 훨신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 원인이었다.

 

부직포 천 생산에 종사하던 노동자 수의 주요한 감소로는, 지주 공장이 있던 시내권에서 주로 발생했다. 따라서 13개 시내권에서, 노동자 수는 32,921에서 1866년 및 1890년에 14,549명으로 감소했고, 상인 공장이 있는 5개 시내권, 모스크바, 그로드노, 리플란디아, 체르니고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31,291명에서 28,257명으로 감소했다.

 

따라서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을 찾을 수 있었으며, 두 경향들 모두 자본주의 발전을 시사했는 데, 장원 소유적인 성격의 지주 시설의 쇠퇴과 상인 시설에서 순수한 자본주의적 공장으로 발전해갔다. 1860년대 부직포 직물 생산에 고용된 노동자 가운데 상당 수는 엄밀하게는 공장 노동자도 아니었다. 지주를 위해 노동하던 종속 농민들이었다. 직물 생산은 역사적으로도 특정한 현상, 곧 산업에서 농노 노동을 고용한 예시였을 뿐이었다.

 

개혁 이후 시기만을 다뤘으며, 다음과 같은 현상이 공장 통계에서도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충분하게 보여줬다. 증기 기관 통계에서도 추출한 수치를 인용하자면, 산업에 따른, 대규모 기계 생산 발전을 추산해보겠다. 1875년에서 1878년 사이 유럽 러시아에서는 양모 방적 및 직물 산업에는 총 4,632마력의 증기 기관 209대를 사용하는 기계화 시설들이 167개가 있었고, 1890년에는 총 6,602마력의 증기 기관 341대를 사용하던 시설들이 197개가 있었다. 따라서 증기 동력 사용은 그닥 빠르게 진전을 이루지는 못했었다. 부분적으로는 지주 공장의 전통과 부직포 천이 값싼 방모 직물 원사와 혼방 직물로 대체됐다. 1875-1878년에는 총 303마력의 증기 기관 20대를 사용하는 기계화 시설 7개가 있었고, 1890년에는 총 1,375마력의 증기 기관 61대를 사용하는 기계화 시설이 28개가 있었다.

 

모직물 산업에서는 부직포 제조를 주목해보자. 부직포 제조는 특히 시대 별로 공장 통계가 현저하게 비교해볼 수가 없었다. 1866년에는 77개 공장에 총 295명의 노동자가 있었지만, 1890년에는 57개 공장에 1,217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1866년 공장들에서는 2,000루블 미만 생산량을 기록한 137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60개의 소규모 사업장이 포함됐고, 1890년에는 4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사업장이 포함됐다. 1866년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세묘노프 지역에서 39개의 소규모 사업장이 기록됐다. 해당 지역에서 부직포 제조는 매우 발전했었다. 수공예 산업으로 간주됐지만, 공장 산업까지는 아니었다.

 

또한, 섬유 산업에서 특히 중요한 위치로는 면화 가공업이 있었으며,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했다. 여기에서 공장 통계의 가장 큰 오류 가운데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공장 노동자와 자본주의에 종사하는 가내 노동자를 결합시켰다는 점이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가내 노동자를 공장으로 끌어들여서 발전시켰다. 작업을 분배하는 사무실과 작업실을 '공장'으로 분류해버리고는 가내 노동자를 공장 노동자와 함께 묶어버렸기 때문에, 얼마나 왜곡됐는지는 자명했다.

 

1866년 연감 자료에 따르면, 최대 22,000명의 가내 노동자가 공장 노동자에 포함됐다. 1890년 총람에서는 그러한 노동자가 약 9,000명만 있었다. 1866년 면직물 공장 노동자 59,000명과 1890년 75,000명에서도 분명하게 공장 통계로 나와 있는 수치로부터 실제로 발생한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가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이었다.

 

많은 시기 동안에 면직물 공장으로 분류된 시설을 보여주는 통계 자료도 있다. 다음 통계에서 나타난 공장 수 감소는 실제로 공장에서 사무실과 작업실을 분산시켰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산업 분야에서 대규모 기계 생산에 따른 발전을 평가하고자, 동력직기 수를 나타낸 통게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1860년대에는 동력직기가 약 11,000대였고, 1890년대에는 약 87,000대였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갔다. 면방적 및 직조 분야에서는 1875년부터 1878년까지 총 148개의 기계화 시설에 따른 481대의 증기 발전기(엔진)가 설치되어, 총 20,504마력을 기록했으며, 1890년에는 168개의 기계화 시설에 따른 554대의 증기 발전기가 설치되어 총 38,750마력을 기록했다.

 

정확히 동일한 실수로는, 아마포(린넨) 생산과 밀접한 통계로부터 발생해서, 공장 노동자 수가 감소됐다고 1866년 17,171명, 1890년 15,497명으로 잘못 표기해버렸다. 실제로는 1866년에 아마포 공장 소유주가 소유한 직기 16,900대 가운데 4,749대만 시설에 보관됐고, 나머지 12,151대는 작업실 소유주가 소유했었다. 따라서 1866년 공장 노동자 수로는, 가내 노동자가 약 12,000명 포함됐고, 1890년에는 약 3,000명만 포함됐다. 그러나 동력 직기 수로는 1866년 2,263대에서 1890년 4,041대로 늘어났고, 방추는 95,495대에서 218,012대로 더 늘어났다. 1875-1878년 아마 방적 및 아마포 직조로는 총 1,604마력의 증기 기관 47대를 갖춘 기계화 시설이 28개가 있었고, 1890년에는 총 5,027마력의 증기 기관 83대를 갖춘 기계화 시설 48개가 있었다.

 

섬유업 가운데 염색, 인쇄, 마무리 작업에서는 해당 업종에 따른 공장 통게는 공장과 노동자가 한 두명에 불과했고, 생산량이 수백 루블에 불과한 매우 작은 수공예 시설까지 합산했다. 당연하게도 적지 않은 혼란을 야기했고,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급속한 발전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1875년에서 1878년 사이에 양모 세척, 염색, 표백, 마무리 작업에서는 총 2,634마력의 증기 발전기 225대를 갖춘 기계화 시설이 80개 있었다. 1890년에는 총 9,100마력의 증기 발전기 858대를 갖춘 기계화 시설이 189개 있었다.

 

 

- 목공 산업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통계로는 제재소에 대한 통계였지만, 과거에는 소규모 시설도 포함됐다. 개혁 이후 시기 동안에는 해당 무역이 1866년 400만 루블에서 1890년 1,900만 루블로 크게 발전했고, 노동자 수로는 4,000명에서 15,000명으로 증기 기관 시설 수는 26개에서 430개로 상당히 증가해갔다. 목재 산업 발전에 있어서도 뚜렷한 증거를 제공했다.

 

제재소는 목재 산업에서 작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초기 단계에서 필요한 수반 작업이었다.

 

 

- 화학 축산 제품 및 도자기 산업

 

 

화학 산업 자체에 대한 통계를 비교해봤을 때는 신뢰할 만 했다. 그 증가세도 잘 보여준다. 1857년 화학 제품 소비량은 총 1,400만 루블로, 국내 생산 340만 루블, 수입 1,060만 루블이었다. 1880년에는 총 3,650만 루블이었으며, 국내 생산 750만 루블, 수입 28과 3/4루블에 달했고, 1890년에는 총 4,270만 루블로 국내 생산 1,610만 루블, 수입 2,660만 루블에 달했다.

 

다음 통계는 화학 산업이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보조 재료, 개인적 소비가 아닌, 생산적 소비재 생산자로는 매우 중요하다. 칼륨과 질산칼륨 생산과 관련해서, 제시된 공장 수로는 소규모 사업장까지 포함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점에는 유의해야만 했다.

 

지방(탤로우) 무역은 개혁 이후로는 감소했다. 지방 양초와 지방 정제 무역의 생산량은 1866-1868년 사이에 1,360만 루블로 추산됐고, 1890년에는 500만 루블로 추산됐다. 감소는 조명용 광유 사용이 증가하면서부터, 기존의 지방 양초가 대체됐기 때문이다.

 

가죽 생산에 있어 1866년, 11,463명 노동자를 둔 2,308개 시설, 총 1,460만 루블과 1890년, 15,546명의 노동자를 둔 1,621개 시설, 총 2,670만 루블의 생산량에 대한 통계로는 공장과 소뮤고 시설을 하나로 묶어놨다. 높은 총 생산량을 설명하는 원자재에 따른 비교적 높은 비용과 무역이 필요한 노동자가 매우 적다는 점은 수공예 시설과 공장을 구분하는 데 있어 특히 어려웠다.

 

1890년 총 공장 수 1,621개 가운데 생산량이 2,000루블 미만인 곳은 불과 103개였고, 1879년에는 총 3,320개 가운데 2,008개가 있었다. 1866년에는 2,308개 공장 가운데, 1,042개가 1,000루블 미만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해당 1,042개 공장에서는 2,059명 노동자를 고용했고, 총 생산량은 474,000루블이었다. 따라서 공장 수는 증가했었지만, 공장 통계로는 감소했다.

 

소규모 가죽 공장에서도 여전히 그 수가 매우 많았다. 재무부에서 발행했던 「러시아의 공장 산업 무역」에 따르면, 총 9,500개 수공예 공장과 21,000명의 노동자, 1,200만 루블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수공예 공장은 1860년대에 '공장 및 작업장'에 포함됐던 공장보다도 훨씬 더 컸다. 소규모 공장은 주마다, 연도마다, '공장 및 작업장'에 포함되는 수가 달랐기 때문에, 무역에 대한 통계들도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만 했다.

 

1875-1878년 증기 기관 통계에서는 해당 산업에 대해 33개의 증기 기관을 갖춘 28개의 기계화 시설로부터 총 488마력이었고, 1890년에는 82개의 증기 기관을 갖춘, 66개의 기계화 시설이 총 1,112마력이었다. 66개 공장에서는 5,522명의 노동자 전체 1/3이 집중됐고, 총 생산량은 1,230만 루블로 전체 46%에 해당했다. 따라서 생산 집중도는 매우 상당했고, 대규모 시설에 따른 노동 생산성으로는 평균을 훨씬 넘어섰다.

 

도자기 무역은 공장 통계 특성에 따라 두 가지 범주로 구분됐다. 일부에서는 소규모 생산과 대규모 생산이 결합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통계를 신뢰할 수 있었다. 유리, 도자기, 석고 및 시멘트 산업 에서도 적용됐다. 주목할 점으로는 마지막으로 언급된 무역의 급속한 발달로, 건설 산업의 발전을 증명했다. 1866년 총 생산량은 53만 루블로 추산됐고, 1890년에는 3,826,000루블이었다. 1875-1878년에는 동력 사업체 수가 8개였고, 1890년에는 39개였다.

 

반면에 도자기 및 벽돌 무역에서는 소규모 사업체가 엄청나게 포함됐지만, 공장 통계는 매우 불만스러웠고, 특히 1860년대와 1870년대가 과장됐다. 따라서 1879년 도자기 사업에서는 552개 사업체가 있었고, 노동자는 1,900명으로, 총 생산량은 538,000루블이었다. 1890년에는 158개 사업체가 있었고, 노동자는 1,978명, 총 생산량은 919,000루블이었다. 소규모 사업체에서 2,000루블 미만을 감산했을 때, 1879년에는 70개 사업체가 있었으며, 노동자는 840명, 총 생산량은 505,000루블이었다. 1890년에는 143개 사업체가 있었고, 노동자는 1,859명, 총 생산량은 857,000루블이었다. 곧 통계에서 나타난 공장 수의 감소와 노동자의 수에 따른 정체 대신에, 실제로는 둘 다 매우 증가했다.

 

벽돌 제조에 대한 1879년 공식 자료로는 2,627개 사업체와 28,800명의 노동자, 총 6,963,000루블의 생산량으로 나타났다. 1890년에는 1,292 사업체와 24,334명의 노동자, 총 7,249,000루블의 생산량을 나타냈다. 2,000루블 미만의 생산량을 가진 소규모 사업체를 제외하면, 1879년에는 518개 사업체와 19,057명의 노동자, 총 5,625,000루블의 생산량을 나타냈다. 1890년에는 1,086개 사업체와 23,222명의 노동자, 총 7,240,000루블의 생산량을 나타냈다.

 

 

- 야금 산업

 

 

야금 산업에 따른 공장 통계에서 발생하는 혼란의 원인으로는, 1860년대, 1870년대에서만 해당하는 소규모 사업장이 포함됐고, 주로 야금 공장이 상무제조부의 관할권이 아니라, 광산부의 관활권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재무부 보고서에서는 일반 '원칙적으로는' 철공소를 생략했지만, 철공소를 다른 작업장에서 분리하는 데 대한 통일됐거나, 불변적인 규칙마저 없었다. 그래서 재무부에서 발행하는 공장 통계에서는 늘 어느 정도 철공소가 포함됐지만, 실제로 포함되는 정도로는 주마다, 연도마다도 달랐다.

 

개혁 이후 야금 산업에서 증기 기관 사용이 증가했다는 건, 일반적인 통계에서 광업 및 야금 산업을 다룰 때 제공됐다.

 

 

- 식품 산업

 

 

공장 통계에 따른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해당 산업들은 공장 산업 전체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따라서 1890년, 명부에 따르면 해당 산업들은 7,095개 공장, 45,000명의 노동자, 총 1억 7,400루블에 달하는 생산량을 차지했고, 유럽 러시아 전체로는 21,124개 공장, 875,764명의 노동자, 총 15억 100만 루블의 생산량 가운데 일부였다.

 

사실 이 집단의 주요한 사업이었던 밀가루 제분, 곡물 제분, 기름 짜기는, 농산물 가공으로 구성됐다. 모든 시내권에서 해당 가공에 종사하는 수 많은 소규모 사업장들이 있었고, 특히 '공장 및 작업장'을 택하는 일반적인 규칙은 없었기 때문에, 통계에서는 해당 소규모 사업장을 매우 우연하게 택했다.

 

따라서 연도와 시내마다, '공장 및 작업장' 수도 크게 변동해갔다. 많은 출처로부터 가져온 많은 연도에 따른 밀가루 제분업 수치다.

 

제분소

 

1865: 857개

1866: 2,176개(연감), 18,426개(군사 통계 초록)

1885: 2,308개(목록), 17,756(수집)

1889: 5,605개(수집),

1890: 5,605개(수집),

1891: 5,201개(수집),

1894-1895: 2,308개(목록),

1892: 5,041개(수집)

 

나열된 수치 가운데 특히 1892년 5,041개 제분소 가운데 803개는 증기 기관, 2,907개는 수력 기관, 1,323개는 풍력 기관, 8개는 가축 기관이었다. 일부 주에서는 증기 제분소만 집계했고, 다른 주에서는 수차(1-425개)를 포함했다. 또 다른 소수 주에서는 풍차(1-530개)와 마차 제분소도 포함했다. 통계 자료를 제공하는 근거로부터 맹목적인 추론 가치로는 충분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의 발전을 판단하라면, 먼저 '공장'이라는 용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확립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기준으로부터 증기 기관의 사용도 고려해보자. 증기 제분소는 대규모 기계 산업 시대에서는 특징적인 수반물이었다.

 

그러나 착유업 통계도 불만족스러웠다. 1879년에는 2,450개 공장에 7,207명의 노동자가 있었고, 총 6,486,000루블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1890년에는 383개 공장에 4,746명의 노동자가 있엇고, 총 12,232,000루블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그러나 공장 수와 노동자 수의 감소는 단지 눈에 띄는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1879년, 1890년 통계를 비교하자면, 곧 2,000루블 미만 생산량을 기록한 사업체를 제외하면, 1879년에는 272개 사업체에서 2,941명의 노동자가 노동했었고, 총 5,771,000루블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1890년에는 379개 사업체에서 4,741명의 노동자가 노동했고, 총 12,232,000루블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해당 분야에서는 대규모 기계 산업이 제분업 못지 않게 빠르게 발전했음을 증기 기관 통계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1875-1878년까지는 521마력 증기 기관 28대를 갖춘 증기 동력 사업체 27개가 있었지만, 1890년에는 1,886마력 증기 기관 116대를 갖춘 기계화 사업체 113개가 있었다.

 

해당 집단의 다른 거래는 비교적 규모가 작았다. 겨자와 생선 제품 거래에서는 1860년대 통계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고, 공장으로 분류되지 않는 수백 개의 소규모 사업장이 포함됐다. 여러 해 동안 공장 통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밀가루 제분을 제외하고, 1879년 항목에서는 15,313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총 3,555개의 사업장과 1890년에는 19,159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1,842개의 사업장이 있었다. 7개 거래 목록에 따른 산출액이 2,000루블 미만인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1879년에 5,176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2,487개의 사업장, 총 916,000루블의 산출량을 기록했고, 1890년에는 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7개의 사업장, 총 2,000루블의 산출량을 기록했다. 통계를 제대로 비교하려면, 한 경우로는 노동자 5,000명을 감산했고, 다른 경우로는 10명을 감산해야만 했다.

 

 

- 소비세: 지불 및 기타 거래

 

 

일부 소비세 납부 업종에서는 1860년대와 비교했을 때, 공장 노동자 수가 감소했다는 점을 볼 수 있었지만, 그 감소는 인쇄된 모든 수치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인민주의자들의 주장만큼 크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 소비세 납부 업종에 대한 유일한 자료 출처로는 군사 통계 초록인데, 공장 통계 총계를 엄청나게 과장시켰다. 그러나 초록 통계를 검증할 자료가 거의 없었다.

 

증류에서 군사 통계 초록은 1866년에 52,660명의 노동자를 둔 3,836개 증류소, 1890년에는 16,20개, 노동자 26,102명을 계산했지만, 증류수 수는 재무부 통계와도 불일치했다. 재무부에서는 1865-1866년에 2,947개의 가동 중인 증류소를 계산했고, 1866-1867년에는 3,386개로 계산했다. 따라서 노동자 수로는 약 5,000-9,000명 정도 과장됐다.

 

보드카 증류에서 군사 통계 초록으로는 8,326명의 노동자를 둔 4,841개의 증류소, 1890년에는 242개의 증류소, 노동자 5,266명으로 계산했다. 이 중에 베사라비아에서는 6,873명의 노동자를 둔 3,207개의 증류소가 있었다. 수치에 따른 부조리함은 너무나 명백했다. 재무부에서 발행한 자료에 따르면 베사라비아에서 보드카 양조장 실제 수는 10-12개였고, 유럽 러시아 전체로는 1,157개였다. 따라서 노동자 수도 최소 6,000명이 과장됐다. 과장의 원인은 베사라비아 통계학자가 양조장 소유자 가운데 담배 제조를 참조해봤을 때, 포도원 소유자를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맥주와 밀주 양조에서 군사 통계 초록에 따르면, 2,374개의 양조장과 6,825명의 노동자, 1890년에는 918개 양조장, 8,364명의 노동자를 집계했지만, 재무부 연감에서는 1866년 유럽 러시아에 총 2,087개의 양조장이 있다고 추산해버렸다. 여기서도 노동자 수는 과장됐다. 사탕무 설탕 및 설탕 정제업에서는 군 통계 초록은 노동자 수를 1만 1천 명을 더 불려서, 9만 2,126명으로 집계했고, 재무 연감(1890년, 노동자 7만 7,875명) 자료에 따른 8만 919명보다도 더 많은 수치였다.

 

담배 제조업에서 군 통계 초록은 5,327개 농장과 26,116명의 노동자, 1890년에는 281개 공장 26,270명의 노동자를 제공했다. 4,993개 공장과 20,038명의 노동자가 베사라비아에 있었다. 실제로는 1866년 담배 공장 수는 343개였고, 베사라비아에서는 13개가 있었다. 노동자 수도 약 2만 명이나 과장됐고, 군사 통계 초록 편집자조차도 베사라비아에 표시된 공장은 담배 농장에 불과하다고만, 지적했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한 통계 간행물을 훑어보는 걸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오류를 알아차리지도 못했었고, 담배 공장 노동자 수의 소폭 증가라는 매우 심각한 어조로만 논파해버렸다. 인민주의자들은 단순하게 1890년 군사 통계 초록과 통첩으로부터, 소비세 납부 직종에 따른 총 노동자 수 각 186,053명과 144,322명을 어디선가 가져와, 감소율로 계산해버렸다. 25년 동안 고용된 노동자 수도 22.4%로 상당히 감소했다. 소비세 납부 업종에서는 증가 조짐도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명백한 점으로는 노동자 수가 이전 규모에 비해 1/4로 감소했었다. 가까운 백분율로 계산해봤을 때조차, 군사 통계 초록에서 제시된 수치에서는 노동자 수를 약 4만 명이나 과장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1). 러시아 공장 수는 개혁 이후로 빠르게 증가해갔다. 공장 통계에서 도출된 정반대의 결론을 잘못됐다. 얻어낸 공장 수치에 따르면 소규모 장인, 수공예, 농업 시설이 포함 됐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공장 수에 포함된 소규모 시설 수는 더 많아진다는 점이었다.

 

2). 이전 통계에서 공장 노동자 수와 공장 및 작업장 생산량은 과장됐다. 이전에는 더 많은 소규모 사업장이 포함됐기 때문에, 수공예와 결합된 산업 통계는 특히나 신뢰할 수 없었다. 또한 이전에는 현재보다 더 많은 자본주의적 고용에 따른 가내 노동자가, 공장 노동자로 분류됐다.

 

3). 서로 다른 시기와 여러 주에 대한 공장 통계에 따른 모든 비교로는 반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는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해야만 한다. 공식 공장 통계에서도 수치를 발췌하는 경우, 같은 출처로부터 발췌한 다른 수치와도 충분히 비교할 수 있다고 간주되어야만 하며, 반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져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부터 언급한 내용들은 정반대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광업의 발전

 

 

개혁 이후로 발전 초기에, 광석 채굴에서 주요한 중심지로는 우랄 산맥이었다. 최근까지도 중앙 러시아와 뚜렷하게 분리되어, 단일한 지역을 구성했었지만, 독창적인 산업 구조도 가졌었다. 오랜 세월 우랄 산맥에서는 노동 조직의 기반은 농노제였고, 19세기 말까지도, 광산 지역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옛날에는 농노제가 우랄 산맥의 가장 큰 번영과 러시아뿐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유럽에서도 지배적인 지위에 따른 기반이었다. 18세기, 철은 러시아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1782년에는 약 380만 푸드 철이 수출됐다. 1800년-1815년에는 200만-150만 푸드, 1815-1838년에는 약 150만 푸드가 수출됐다. 이미 19세기, 1820년대 러시아에서는 프랑스보다 1.5배, 독일 프로이센 보다 4.5배, 벨기에보다도 3배나 많은 선철을 생산했다.

 

그러나 유럽 자본주의 초기 실제로 우랄 산맥은 그토록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던 농노제가 자본주의 전성기 시절에는 우랄 산맥의 쇠퇴를 초래한 원인이었다.

 

우랄 산맥에서 철 산업은 매우 느리게 발전했다. 1718년 러시아에서 선철 생산량은 약 650만 푸드였고, 1767년에는 약 950만 푸드였으며, 1806년에는 1,200만 푸드였다. 1830년대에는 900-1,100만 푸드, 1840년대에는 1,100만-1,300만 푸드, 1850년대에는 1,200만-1,600만 푸드, 1860년대에는 1,300만-1,800만 푸드, 1867년에는 1,750만 푸드로 줄어들었다. 100년 동안 생산량은 두 배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러시아는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부터 야금술이 발전했떤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도 크게 뒤쳐졌다.

 

우랄 침체의 원인은 농노제였다. 철광업자들은 봉건적 지주이자 산업가였고, 그들의 권력은 자본 경쟁이 아닌 독점과 소유권에 기반을 뒀다.

 

우랄 철광업자들은 여전히 대지주였다. 1890년에 제국 262개 철공소에서는 1,140만 데시아틴에 이르는 토지(870만 데시아틴의 산림 포함)를 소유했고, 그 중에 1,020만 데시아틴은 11개 우랄 철공소(산림, 770만 데시아틴)에 속했었다. 따라서 평균적으로 각 우랄 공장은 수십 만 데이사틴에 달하는 광대한 대토지 제도를(라티푼디움) 소유했다. 영지로부터 농민에게 토지를 할당하는 일이 계속됐다.

 

우랄에서는 고용뿐만이 아니라, 노무 제공으로부터도, 노동력을 얻어갔다. 페름,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 젬스트보 통계에 다르면, 공장 소유 토지, 목초지, 산림 등을 무상 또는 저렴한 임대료로 이용할 수 있는 농가는 수천 개에 달했다. 무상 토지 이용은 임금을 매우 낮은 수준으로까지 현저하게 떨어뜨렸기 때문에,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매우 높은 비용을 초래했다.

 

제철소에서는 자체적으로, 자사 노동자들을 고용했고, 공장에 묶여 저렴한 임금을 받았다. V.D. 벨로프도 이에 대해 한 마디 거들었다.

 

'우랄 산맥에서는 원래 역사로부터 노동자들이 형성됐다는 이점이 있었다. 다른 공장, 해외 공장, 심지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은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장이 돌아가는 동안에는 노동하지만, 이익이 다시 손실로 바뀌면, 배낭을 메고 쉽고 빠르게 떠나간다. 고용주와는 영원한 적이다. 그러나 우랄 노동자들은 완전히 다른 상태였다. 지역 토박이들이었고, 공장 근처에 토지와 농장, 가족들이 있었다. 우랄 노동자들의 복지는 공장의 복지와 밀접하고, 또 불가분했다. 공장이 잘 되면, 우랄 노동자들도 잘 됐고, 잘 안되면 단순하게 해로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장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배낭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했다. 반값이나 이상의 임금이나 받으면서, 몇 년씩이나 버틸 준비가 됐다. 같은 것을, 다른 지역 노동자들이 빵 한 조각이라도 벌도록, 노동 시간의 절반을 실업 상태로 남겨뒀다. 간단히 말해서, 우랄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제시한 어떤 조건에서든,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고용주를 받아들일 뿐이었다. 따라서 우랄 노동자들과, 작업장 사이에서도 뗄 수 없는 유대감이 생겨났다. 농노 종속에서 해방되기 전까지도 똑같았다. 단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이전의 농노제 원칙은 상호 이익이라는 고귀한 원칙으로만 대체했을 뿐이다.'

 

따라서 상호 이익에 따른 고상한 원칙에는 주로 임금을 매우 낮추는 데서 드러난다. 특히 남부에서는 우랄 지역 노동자 한 명당 비용이 우랄 지역의 두 배, 심지어 세 배에 달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삼은 자료에 따르면, 노동자 한 명 당, 연간 450루블이었지만, 우랄 노동자는 177루블이었다. 남부 지역에서는 자신의 고향 마을이나, 다른 곳에서 적정 임금을 받을 기회가 생기면, 노동자들은 제철소, 석탄, 광석 광신을 떠나갔다. 그러나 우랄 지역에서는 적정 임금은 바램이었을 뿐이었다.

 

자연스럽게도, 우랄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노예적 지위 상태는 우랄이 기술적으로 후진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 괴철은 주로 나무 연료를 사용해서, 차갑거나 약간은 가열된 바람을 사용한 구식 용광로에서 제련됐다. 1893년, 우랄 냉풍로 수는 110개 가운데 37개였고, 남부에서는 18개 가운데 3개였다. 광물 연료 용광로는 연 평균 140만 푸드를 생산했었지만, 나무 연료 용광로는 217,000푸드를 생산했다.

 

1890년 케펜도 기록했었다. '괴철 제련에 따른 정제 공정은 우랄 제철소에서 여전히 확고하게 확립됐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선철 제련 공정(퍼들링 공정)으로, 대부분 대체해갔다. 증기 발전기는 남부보다 우랄에서 훨신 덜 사용됐다.

 

우랄 산맥의 고립, 러시아 중심부와 매우 떨어진 거리와 철도 부재로부터 고립됐다는 점이다. 우랄 산맥 생산물들은 주로 일 년에 한 번 강으로부터, '떠다니는' 원시적인 방식으로만 모스크바로 운송됐다.

 

따라서 개혁 이전 체제로부터 가장 직접적인 잔재, 관행적인 폭 넓은 노동 제공, 노동자들의 구속된 조건들, 낮은 노동 생산성, 기술적 낙후, 낮은 임금, 만연한 수작업 생산, 천연 자원 지역에 대한 원시적, 탐욕적 착취, 독점과 경쟁에 따른 장애물들은 일반적인 상업 및 산업 흐름에서도, 고립을 초래했고, 오히려 우랄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남부 광산 지역은 여러 면에서 우랄과 정반대였다. 남부는 형성기였고, 우랄이 오래되고, 거기에서 지배적인 제도는 '신성한 시간'만큼이나 젊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남부에서 발생한 순수 자본주의적 산업은 전통, 사회적 신분, 국가적 구분, 특정 인구층에 따른 고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 자본, 기술자(엔지니어) 및 노동자가 남부로 대량 유입됐고, 1898년 호황기에는 미국에서 전체 공장도 남부로 옮겨져갔다. 국제 자본은 관세 장벽 안에 정착했고, 외국 토지가 자리 잡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남부로부터 우랄을 대체하는 통계에서도, 어떤 기술 혁명이 일어나고,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이 생산력 발전을 위해 얼마만큼 엄청난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랄 산맥의 우세는 농노 노동의 우세, 기술적인 후진, 침체를 의미했다.

 

반대로, 러시아에서는 야금 산업에 따른 발전이 서유럽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됐고, 어떤 면에서는 미국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됐다. 1870년 러시아는 세계 괴철 생산량의 2.9%(7억 4,500만 푸드 가운데 2,200만 푸드)를 생산했었고, 1894년에는 5.1%(1,584.2만 푸드 가운데 8,130만 푸드)를 생산했었다.

 

지난 1886-1896년, 10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괴철 생산량을 3,250만 푸드에서 9,650만 푸드로 세 배 가량 늘렸다. 반면에 프랑스에서는 이미 목표를 달성하는 데 1852-1880년 28년이 걸렸고, 미국은 1845-1868년 23년, 영국은 1824-1846년 22년, 독일은 1859-1871년 12년이 걸렸다.

 

신생국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은 국구의 모범과 지원으로부터, 크게 가속화되어 갔다. 물론 지난 1888-1898년, 10년 간은 예외적인 호황기였고, 모든 자본주의적인 번영과 필연적으로 위기로 이어졌다. 자본주의적 발전은 빠르게 증가해갔다.

  

생산 기계가 도입되면서부터, 노동자 수가 늘어나는 속도도 우랄보다 남부에서 훨씬 더 빨랐다. 우랄에서 증기 동력 사용 증가가 약 2와 1/2배에 불과했지만, 남부에서는 6배였고, 우랄에서 노동자 수 증가로는 1과 2/3배였으며, 남부에서는 거의 4배 가량이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대규모 산업이 노동자 수를 급격하게 증가시켰으며, 노동 생산성도 크게 증가시켰다.

 

남부 지역과 더불어 코카서스 지역에서는, 개혁 이후로 광산업이 놀랍게 발전해갔다. 1860년대에는 100만 푸드, 1865년에는 55만 7천 푸드에도 미치지 못했었던 석유 생산량은 1870년에는 170만 푸드, 1875년에는 520만 푸드, 1880년에는 2,150만 푸드, 1885년에는 1억 1,600만 푸드, 1890년에는 2억 4,290만 푸드, 1895년에는 3만 8천 푸드, 1902년에는 6억 3,770만 푸드로 증가해갔다. 석유의 대부분은 바쿠에서 생산됐고, 바쿠는 은 마을에서부터 시작해서, 11만 2천 명의 주민을 거느린, 최고의 산업 중심지로 발달해갔다.

 

석유 수출 및 가공에 따른 큰 발전으로부터, 등유 소비도 크게 늘어났고, 미국산 제품을 완전하게 대체해갔으며, 공장 가공으로부터 제품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개인 소비도 늘어났다. 공장, 작업장, 철도 연료로부터 석유 부산물을 더욱 많이 소비했으므로, 생산적 소비도 늘어났다. 코카서스 광업 종사자 수도 매우 빠르게 증가했다. 1877년 3,431명에서 1890년 17,603명으로 5배나 늘어났다.

 

남부 지역에 따른 산업 구조를 설명하려면, 다른 지벽보다 평균적으로 광산 규모가 작은 지역인 도네츠 분지에서 석탄 산업 통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용된 노동자 수에 따른 광산을 분류한 통계도 얻을 수 있었다.

 

도네츠 분지에서는 극히 소규모 농민 광산이 있었고, 그 수가 매우 많았음에도, 총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미미했다. 104개 소규모 광산에서 총 석탄 생산량의 2%에 불과했다. 더불어 노동 생산성도 매우 낮았다.

 

반면에, 가장 큰 광산 37곳은 전체 노동자 대부분을 고용했으며, 총 석탄 생산량에서 70% 이상을 생산했다. 노동 생산성은 광산 규모가 커지면서 증가해갔고, 기계 사용 여부와도 무관했다.

 

도네츠 분지에서, 생산 집중도는 꾸준하게 증가해갔다. 1882-1886년까지, 4년 동안 512명의 석탄 위탁업체 가운데, 21명은 5,000대로 300만 푸드 이상의 화차를 운송해서, 총 480,800대 가운데 229,700대를 운송했다. 전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891-1895년까지, 4년 동안 872개의 위탁업체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 55명은 5,000대 이상의 화차를 운송해서, 총 1,178,000대 가운데 925,400대를 운송했다. 전체 8/10을 넘는 수치였다.

 

광산업 발전에 대한 앞선 자료에서는 국민 경제에 따른 모든 영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관계 변화에서 본질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줬으며, 발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생산 수단, 개인적 소비가 아닌 생산적 소비를 위한 물품을 생산하는 산업 부문이 특히 빠르게 발전했다는 명제를 잘 보여준다.

 

한 형태에 따른 사회 경제가 다른 형태로 대체되는 현상에는 광산업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두 형태에 따른 전형적인 대표자들에게는 뚜렷한 영역이었다. 한 영역에서는 원시적이고, 일반적인 기술, 거주지에 얽매인 인구의 개인적인 종속, 확고한 사회적 신분 전통, 그리고 독점 등을 바탕으로 한 구식적인 이전 자본주의 세계였다. 다른 영역에서는 모든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 기술 혁명, 그리고 순수한 자본주의적 기계 산업으로부터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인 오류도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러시아 자본주의에서 발전에 따른 본질마저 부정했으며, 농업에서는 기업가들이 노동 용역으로부터, 공업에서는 가내 노동 배분에, 광업에서는 노동자를 구속하고, 소규모 사업체의 경쟁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등의 행위를 자행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같은 주장들도 비논리적이고, 역사적 관점에서도 노골적인 왜곡은 더욱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기업가들이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이점을 활용하려는 노력을 자본주의에게 돌려야 할까, 아니면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많은 경우 법적인 힘으로부터 보존된 이전의 유물에게 돌려야 할까. 남부 광산 소유주들은 노동자들을 묶어두고는, 소규모 사업체로부터 경쟁을 법적으로 금지하려고 애쓴다는 점을 보고 더 놀랄 수나 있을까. 다른 광산 지역에서는 그러한 묶어두기와 금지가 오래 전부터 행해졌고, 다른 지역에서는 제철소 주인들이 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더 저렴하고, 순종적인 노동력을 고용하면서 노력 없이도 괴철에서도 코펙 당 1.5코펙 이상의 이익을 더 얻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와 같은 상태 아래에서도, 이전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이상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고,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쓸모 없는 제도를 폐지해야만 한다는 매우 시급함에도, 절실한 필요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놀라지 않을 수나 있을까.

 

반면에, 광업 발달에 대한 통계에서는 생산적 소비 품목 때문에, 개인 소비 품목보다도, 자본주의와 국내 시장이 더 빠르게 발전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들은 광업 제품에 대한 전체 국내 수요 충족으로부터, '아마도 곧 일어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도, 상태를 무시해버렸었다. 인구 당 금속, 석탄 등 소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고정되지도 않았고, 필연적으로 증가해갔다.

 

농촌 부르주아가 철도 마일 단위, 새로운 작업장, 철제 쟁기를 획득할 때마다, 광석 채굴 제품에 대한 수요도 증가해갔다.

 

1851-1897년 사이에, 러시아 괴철 소비량은 1인 당 14파운드에서, 1과 1/3푸드로 늘어났지만, 소비량도 선진국 괴철 수요 규모에 접근하려면 상당히 늘어나야만 했다. 당시에 벨기에와 영국에서는 1인 당 괴철 소비량이 6푸드가 넘었기 때문이다.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에서 노동자 수는 증가하는가

 

 

공장 및 광산업 통계를 검토했다. 인민주의자 경제학자들의 흥미를 크게 끌었었던 질문에 대해 답해보겠다. 그들은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답했었다.

 

먼저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상업 및 산업 인구가 증가하는지, 아니면 대규모 기계 산업에 고용된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지가 문제였다. 발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규모 산업 시설이나, 제조 공장 노동자 수가 반드시 증가해야만 한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었다. 공장은 끊임 없이 더욱 원시적인 형태를 띠는 산업을 제거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 통계에서는 늘 과학적인 의미에서 정작 '공장'을 지칭하지도 않았다. 제대로 통계를 검토하려면, 모든 부분에 따른, 수익률과 두 번째로 장기간 수익률을 취해야만 한다. 이에 따라 통계가 어느 정도 비교할 수 있다는 보장이 생긴다.

 

개혁 이후로 25년 동안, 1865, 1890년을 살펴보겠다. 공장 통계는 1865년에 가장 완전한 통게를 제공했다. 유럽 러시아 경우 증류, 양조, 사탕무 설탕 및 담배를 제외한 모든 무역에서도 380,638명의 공장 노동자가 있었다. 무역 노동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통계인 군사 통계 초록 통계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통계를 정정해야만 했다.

 

언급된 무역에서, 127,935명에 따른 노동자를 추가하자면, 1865년, 소비세 납부 및 비납부 무역에 따른 유럽 러시아 공장 노동자 총 수는 508,573명이었다. 1890년 경우 해당 수치는 839,730명이었다. 증가율은 65%로, 인구 증가율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증가율에 따른 수치보다도 더욱 컸다는 점이다. 1860년대 공장 통계에서는 소규모 수공예 장인 및 농업 시설과 가내 노동자를 포함했기 때문에 과장됐다는 점이다. 특히 대규모 공장에 따른 노동자 수에 대한 보다 정확한 통계는 부분적으로 정정하지 않았다.

 

광업 및 야금 부문에서, 1865년에는 구리 및 철 거래와 금 및 백금 광산에 대한 광부 수만 주어졌고, 유럽 러시아에서는 133,176명이었다. 1890년에는 같은 거래로부터 274,748명이 있었으며, 2배 이상이었다. 1890년 수치에서는 유럽 러시아 총 광부 수에서 80.6%를 차지했다. 1865년에 언급된 거래에서는 총 광부 수가 80.6%를 차지해봤을 때, 1865년 총 광부 수로는 165,230명, 1890년에는 340,912명이었다. 107% 정도 증가했다.

 

또한 철도 노동자는 대자본주의 기업에서 노동자 범주에 속했다. 1890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폴란드와 코카서스를 합쳤을 때, 252,415명이었다.

 

1865년 수치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철도 1베르스트 당 고용된 철도 노동자 수가 약간 변동했기 때문에, 충분한 근사치를 사용했다. 1베르스트 당 9명의 노동자를 계산했을 때, 1865년 철도 노동자 총 수로는 32,076명이었다.

 

따라서 25년 만에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 노동자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일반 인구보다도 훨씬 빠르게 증가했으며, 도시 인구보다도 더 빠르게 증가했다. 농업과 소규모 산업에서 대규모 산업 기업으로 노동자가 꾸준하게 증가해갔다.

 

인민주의자들이 자주 의지하고, 남용했었던 통계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통계 남용의 정점은 경이로운 장치에 따라, 전체 인구에 대한 공장 노동자 비율로 계산했고, 약 1%의 도출된 수치를 기반으로 삼아, 소수 노동자가 얼마나 미미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카블루코프는 단순히 공장 노동자와 제조업 종사 노동자가 매우 달랐음에도, 인구에 대한 공장 노동자 비율로 계산한 뒤에, '서방에서는 제조업에 종사한 노동자 수는 인구에서도 상당히 다른 비율을 구성했다고' 언급했었다. 영국에서는 53%였지만, 프랑스에서는 23%였고, 각 국가마다 공장 노동층 비율의 차이도 너무 컸지만, 발전 방향을 서유럽과 동일시해버렸었다.

 

따라서 공장 노동자는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대체됐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로까지 대체됐다. 같은 범주에 대한 의미를 학식 있는 통계학자들에게 설명해보자.

 

프랑스에서는 189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에 종사한 노동자는 330만 명으로, 전체 인구에서 1/10도 미치지 못했다. 직업 별로는 분류된 3,680만 명, 직엽 별로 분류되지 않은 130만 명이었고, 공장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 시설과 기업에서 고용된 노동자였다. 그러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인구로는 950만 명으로, 전체 인구에서 약 26%였다. 여기에 고용주 등 100만 명을 더하면, 사무원 등은 20만 명, 가사 종업자는 480만 명, 하인은 20만 명이었다.

 

해당 비율로 설명하고자, 특정 중심지를 예시로 들어야만 한다. 전체 인구 직업을 보여주는 통계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 중심지와 농촌 중심지를 예시로 들자면, 18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통계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 수는 통계국 자료에 따라, 51,760명이었지만, 1890년 12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구 조사에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남녀 인구로는 341,991명이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 고르바토프 지역, 보고로드스코예 마을(단일 제혁소)에서는 1890년 지침서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가 392명이었고, 「젬스트보 인구 조사, 1889」에서는 산업 종사자가 총 인구는 9,241명으로, 가구 9/10 이상으로, 거의 8,000명에 달했다. 해당 수치는 인민주의자들과, 카블루코프와 일당들에게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교훈을 안겨준다.

 

「전국 인구 조사, 1897」에서도 전체 인구 직업에 대한 통계가 나왔다. 해당 자료에서는 공장 노동자 수를 전체 인구와 비교하는 인민주의자들의 장치적 부조리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다.

 

러시아 전체 인구 분포에 대한 통계를 분류했다. 따라서 러시아에 따른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 전체로부터 기반이 된 사회 노동 분업을 보여줄 수 있었다. 전체 인구로는 세 가지 주요 하위 분류로 또 구분됐다.

 

1). 농업

 

2). 상업 및 공업

 

3). 비생산적인 경제 활동 또는 비참가

 

a)-i)까지 제시된 아홉 집단 가운데 세 가지 주요 하위 분류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도 직접적으로나, 완전하게 속할 수 없는 집단은, g) 집단이었고, 개인적 용역, 가사 도우미, 일용직 노동자였다. 해당 집단은 대략 상업 및 공업 인구와 농업 인구 사이에 분포해야만 했다. 도시에 거주한다고 표시된 집단 일부, 250만 명을 상업 및 공업 인구에, 농촌에 거주한다고 표시된 일부, 330만 명을 농업 인구로 할당했다. 그러면 러시아 전체 인구 분포도가 나왔다.

 

상품 유통, 상품 생산이 러시아에서도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러시아 경제 발전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여전히 매우 뒤떨어졌다.

 

러시아 전체 인구에 따른 직업 통계는 러시아 전체 인구가 계급적 지위, 곧 사회 생산 체계 내에서 지위에 따른, 어떤 주요한 범주로 구분되고, 대략적으로라도 사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 범주에 따른 결정은 대략적이다. 농민 구분되는 주요한 경제 집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농업 인구 전체 대중은 농민으로 간주된다. 총 계에서 지주 수는 무시할 수 있으며, 게다가 상당 수 지주는 임대인, 공무원, 고위급 인사 등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9,700만 명의 농민 대중 가운데 세 가지 주요 집단으로 구분해야만 했다. 하위 집단에서 인구 무산층 및 준무산층, 중간 집단에서 소규모 빈농, 상위 집단에서 유복한 부농으로부터, 세 그룹에 따른 주요한 경제적 특징을 별개로부터 계급 요소로 분석했다.

 

하위 집단에서는 재산이 없는 인구로, 주로 절반을 노동력 판매로부터 생계를 유지해갔다. 중간층은 빈농으로 구성됐다. 중농은 호황일 때에도 간신히 생게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해당 층에서 주요한 생계 수단은 독립적인 소규모 농업이었다. 상층에서는 부농으로 구성됐으며, 상당 수 텃밭을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모든 종류의 임금 노동자를 착취해갔다.

 

해당 집단들은 각각 전체 약 50%, 30%, 20%를 차지했다. 각 집단에 따른 전체 가구 또는 농장 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늘 고려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 변화로는, 하위 집단 증가와 상위 집단 감소를 초래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난 변화와도 일치했고, 가축(말) 소유율 감소, 농민 몰락, 농촌 지역 빈곤과 실업 증가 등으로부터 명백하게 입증됐다. 농업 인구 가운데, 약 4,850만 명의 무산층과 반무산층, 약 2,910만 명의 소규모 빈농과 가족들, 약 1,940만 명의 인구가 소규모 부농들로 종사했다.

 

문제는 상업 및 산업 인구와 비생산층을 어떻게 분배할지이다. 비생산층에서는 명백히 대부르주아지에 속하는 층이 포함됐다. 모든 토지업자(렌티어), 다음으로는 일부 부르주아 지식인, 고위직 군 및 공무원 등이 포함됐다. 이들의 수를 모두 합쳤을 때 약 150만 명에 달했다.

 

비생산적인 인구 집단 반대쪽에는 육군, 해군, 헌병, 경찰에 따른 하급 계급 약 130만 명, 하인 약 50만 명, 거지 및 부랑자 등 거의 50만 명이 있었다.

 

여기서는 주요 경제 유형에 가장 가까운 집단만 대략적으로 분포했다. 약 200만 명은 무산층과 준무산층 인구(룸펜 포함), 약 190만 명은 가난한 소규모 자영농, 약 150만 명은 사무원, 관리직, 부르주아 지식인 등을 포함한 부유한 소규모 자영농에게로 돌아갔다.

 

상업 및 산업 인구 가운데 가장 큰 비중으로는, 무산층이었고, 무산층과 대부유층 사이의 격차도 가장 컸다. 그러나 인구조사 결과에서는 이 층에 따른 고용주, 1인 생산자, 노동자 등의 분포도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생산 지위에 따라 분류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산업 인구에 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삼는 점 외에는 다른 대책도 없었다. 해당 자료를 바탕으로 삼아, 대략적으로 대부르주아지 약 7%, 부유한 소부르주아지 10%, 가난한 소자본가 22%, 프롤레타리아트 61%를 차지했다.

 

러시아 전체에서도 소규모 산업 생산은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도, 훨씬 더 끈질기게 유지됐지만, 그렇다고 절반의 프롤레아리아트 인구에서 가내 수공업을 담당하는 1인 생산자와 수공업자 집단을 포함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추정된 비율로는 실제 크기와도 매우 다르지는 않았다.

 

상업 및 산업 인구는 약 150만 명에 달하는 대부르주아, 약 220만 명의 부유층, 약 480만 명의 궁핍한 소규모 생산자, 약 1,320만 명의 프롤레타리아 및 준프롤레타리아층으로 구성된다. 인구에 따른 농업, 상업, 산업, 비생산적층을 합치면 러시아 전체 인구에 따른 계급적 지위에 따른 대략적인 분포도도 알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카데트 및 준카데트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은 러시아 경제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개념에 대해 분노의 목소리를 높였다. 상세한 분석으로부터, 심오한 경제적 모순을 얼버무리면서, 모순 전체에 대한 조잡한 사회주의 관점에 대해 불평한다는 건 매우 편리하고, 유리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도달한 결론에 대한 비판은 물론 과학적 가치마저 없었다.

 

물론 많은 수치로부터, 근사치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었다. 해당 관점에서, 로시츠키(Lositsky),「1897년, 인구 조사를 바탕으로 실시한 러시아 인구 연구」저서는 주목할 만한다.

 

로시츠키는 노동자와 하인 수에 대한 단순 인구 조사 수치를 취했으며, 러시아에서 무산층 인구를 2,200만 명, 농민과 토지 소유자 인구를 8,000만 명,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는 고용주와 사무원을 약 1,200만 명, 공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를 약 1,2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수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인구는 도출한 수치와도 매우 가까웠다.

 

'고용'에 의존하는 빈농, 수공업자 등 사이에 방대한 규모로부터 절반 가량의 프롤레타리아 인구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한다는 건, 러시아 경제에 대한 모든 통계를 비웃는 일이었다.

 

유럽 러시아에서만, 350만 가구의 무마 가구, 340만 가구의 일마 가구, 임대 토지, 고용, 예상 등에 대한 젬스토보 통계 합계를 떠올려봤을 때도, 절반 가량의 프롤레타리아 인구에 따른 큰 규모는 사실이었다. 농업 인구를 제외하고는, 프롤레타리아와 절반 가량의 프롤레타리아는 분명하게 훨씬 더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더 나아가, 사소한 세부 사항으로부터도 전체 경제 상태를 대체하지 않으려면, 부유한 소기업주들 사이에서, 상당 수 상업 및 산업 관리직, 사무원, 부르주아 지식인, 공무원 등도 포함해야만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신중했고, 집단 수를 너무 높게 설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난한 소기업주들을 더 높게, 부유층을 충분히 더 낫게 설정했어야만 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구분에서도, 통계적으로 절대적으로 정확하다는 점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통계에서는 전면적인 분석으로부터 확립된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보여주어야만 하며, 더 이상은 통계 그 자체로 끝나서도 안 된다.

 

러시아 인구 가운데에서도, 소부르주아층이 더 많다는 점에서도 간과할 수 있는 점으로는 실제 경제 상태를 왜곡한다는 점에 불과하다.

 

 

증기 기관 통계

 

 

생산에 증기 기관 사용은 대규모 기계 산업에서는 가장 특징점이다.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통계를 먼저 분석한다. 1875-1878년까지 증기 기관 수는 「러시아 제국, 증기 기관 통계 자료」에서 제공했다. 1892년에는 모든 공장 및 광업을 포괄한 공장 산업 자료 수집에 따른 수치도 있었다.

 

16년 동안, 증기 기관 총 마력 용량은 3배로 늘어났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2와 1/2배가 늘어났다. 증기 기관 수로는 약간 늘어났지만, 기관 당 평균 용량은 상당히 증가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18마력-24마력으로, 폴란드 왕국에서는 18-41마력으로 증가해갔다. 따라서 해당 기간 동안 대규모 기계 산업도 매우 빠르게 발전했다.

 

증기 동력 용량에서는 1875-1878년, 상트페테르부르크(17,808마력), 모스크바(13,668마력), 키예프(8,363마력), 페름(7,348마력), 블라디미르(5,684마력)였다. 5개 총 마력 수는 52,871마력으로, 유럽 러시아 총 마력에서 약 3/5였다. 다음으로는 포돌스크(5,480마력), 페트로코프(5,071마력), 바르샤바(4,760마력)였다.

 

1892년에는 순서가 바뀌어, 페트로포크(59,063마력), 상트페테르부르크(43,961마력), 예카테리노슬라프(27,839마력), 모스크바(24,704마력), 블라디미르(15,857마력), 키예프(14,211) 순이었다. 마지막 5개 총 마력은 126,572마력으로, 유럽 러시아 전체 마력에서 거의 절반에 해당했다. 다음으로는 바르샤바(11,310마력), 페름(11,245마력)이었다.

 

해당 수치는 폴란드와 남부에서 새로운 산업 중심지가 형성됐다. 페트로포크에서는 총 용량이 11.6배 증가했고, 예카테리노슬라프와 돈 지방이 합쳐져서, 2,834-30,932마력으로, 10.9배 증가했다. 급속도로 발달한 산업 가운데 심지는 하위에서 상위로 올라갔고, 기존의 산업 중심지를 대체해갔다.

 

해당 통계에서도, 생산적 소비 품목을 생산하는 산업, 광업과 야금 산업에 따른 특히 빠른 발전을 볼 수 있었다. 1875-1878년에 해당 산업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총 22,966마력의 증기 기관 1,040대를 사용했고, 1890년에는 총 74,204마력의 증기 기관, 1,960대를 사용했다.

 

14년 만에 증가했고, 산업 전체로는 증기 기관 총 수가 16년 만에 증가한 수치보다도 더 컸다. 생산 수단을 생산한 산업은 전체 산업에서도 끊임 없이 발전하는 부분을 구성한다.

 

 

7-2. 대규모 산업 분포도

 

 

공장 통계에 따른 불만족스러운 특성 때문에 개혁 이후 대규모 기계 산업 발전을 파악하고자, 더 복잡한 계산에 의존했다. 1866, 1879, 1890, 1894-1895년 통계를 택했으며, 시설 당 노동자가 100명 이상인 가장 큰 공장에 대해서였다.

 

특히 외부 노동자는 1894-1895년 목록 통계에서만 엄격하게 구분했다. 따라서 각주에서 언급된 정정 사항에도 불구하고, 1866-1879년 이전 연도 통계는 여전히 다소 과장됐다.

 

1866, 1879, 1890년 통계에 따른 표 분석으로는, 해당 기간 동안 대형 공장 총 수는 644개, 852개, 951개였다. 비율로는, 100개, 132개, 147개로 변동했다. 24년 동안 대형 공장 수는 거의 50% 증가했다.

 

많은 유형에서도 대형 공장 통계를 살펴보면, 공장 규모가 클수록, 그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해갔으며, 생산 집중도도 더 높아졌다.

 

기계화 시설에 따른 수는 전체 공장 수보다도 더 빠르게 증가했다. 더욱 많은 대형 공장들이 증기 기관을 도입해갔다. 공장이 클수록 기계화 시설 수도 더 많아졌다.

 

주어진 범주에 속한 전체 공장 수에 대한 시설 비율을 계산했을 때도, 증기 기관 사용은 생산량 증가 및 생산 협력 확대와도 밀접했다.

 

모든 대형 공장 노동자 수는 백분율로 변경됐다. 24년 동안 노동자 수도 두 배로 증가해갔으며, 공장 노동자 총 수에 따른 증가를 초과해버렸다. 대형 공장 당 평균 노동자 수도 대형 공장에 집중됐다.

 

특히 1866년, 노동자가 1,000명 이상인 공장에서는 대형 공장 총 노동자 수에서 27%를 고용했지만, 1879년에는 40%, 1890년에는 46%였다.

 

모든 대형 공장에 따른 생산량 변화를 백분율과 범주율로 표기했을 때도 모든 대형 공장 생산량은 거의 3배로 증가해갔고, 공장이 클수록 증가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나 각 범주에 따른 개별 연도로부터 노동 생산성을 비교해보면, 다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잇었다. 모든 대형 공장 노동자 1인 당, 평균 생산량은 866루블로, 하위층에서 상위층으로 이동함에 따라, 각 연도 별로 노동자 1인 당 생산량 증가는 보이지 않았다.

 

많은 층 간에 서로 다른 가치에 따른 원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노동자 1인 당 연간 생산량은 서로 다른 산업에 따른 공장들로부터 불균등한 비율로 포함됐다.

 

1879-1890년, 1879-1890-1894-1895년 통계를 동일하고, 세부적으로 조사한다는 건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모든 내용을 다소 다른 백분율로 반복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공장 감독관 보고서 모음집」에서는 고용된 노동자 수에 따른 공장 및 작업장을 집단으로 분류한 자료를 제공했다. 러시아 자료들을 앞서 언급한 자료와도 비교해보면, 부정확한 부분도 있었다.

 

99명 이상 또는 1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공장, 곧 대규모 공장 수와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가 빠르게 증가해갔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대규모 공장 가운데 가장 큰 공장에서는 노동자 집중도와 생산량 또한 증가해갔다.

 

공식 통계로부터 제공한 모든 '공장 및 작업장'에 대한 통계와 대형 공장에 대한 통계를 비교해보자면, 1879년에, 대형 공장은 모든 '공장 및 작업장'에서 4.4%를 구성했고, 전체 공장 노동자 수에서, 66.8%와 총 생산량에서 54.8%를 집중시켰다.

 

1890년에는 전체 '공장 및 작업장'에서 6.7%를 구성했고, 전체 공장 노동자에서 71.1%와 총 생산량에서는 57.2%를 집중시켰다.

 

1894-1895년에는 전체 '공장 및 작업장'에서, 10.1%를 구성하고, 전체 공장 노동자에서 74%와 총 생산량에서 70.8%를 집중시켰다.

 

1903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형 공장은 전체 공장 및 작업장에서 17%를 구성한 전체 공장 노동자 수에서 76.6%를 집중시켰다.

 

따라서 규모가 크고 대부분 증기 기관을 사용하는 공장들은 그 수가 적었음에도, 모든 공장 및 작업장에 따른 노동자와 생산량에서도 압도적이고, 끊임 없이 증가하는 비중을 차지했다. 개혁 이후 대규모 공장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는지는 이니 언급했다.

 

광업 분야에서도, 규모가 비슷한 기업들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자.

 

광업에서는 대기업에서 노동자가 집중되는 현상이 여전히 더 컸다. 305,000명 가운데 258,000명으로, 84.5%가 1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 집중됐다.

 

광부 노동자 거의 절반 가량 305,000명 가운데 145,000명은 각각 1,0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는 몇몇 대규모 사업장에 고용됐다.

 

유럽 러시아 공장 및 광산 노동자 총 수 1890년, 1,180,000명 가운데 3/4, 74.6%는 1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 집중됐다.

 

거의 절반 가량 1,180,000명 가운데 570,000명은 각각 5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 집중됐다.

 

따라서 1865-1880년과 비교해봤을 때, 1880-1890년 기간 동안에 자본주의 발전과 '공장 인구' 발달이 둔화됐다는 인민주의자들이 제기한 질문을 다루고자 한다.

 

독창적인 논리로부터, 묘사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특정 한계에 도달한 뒤로 자체적으로 국내 시장 축소를 초래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증가율 둔화가 국내 시장 축소를 나타낸다는 점은 터무니가 없으며, 공장 노동자 수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면, 인구가 농업에서 전환됐고, 국내 시장이 개인 소비재에 대해서도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백분율로 표기된 '둔화'에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특정 발전 단계에서는 늘 발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작은 규모는 늘 큰 규모보다 백분율로 더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초기 단계가 특히 빠르다는 점에서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추론으로는, 신생 국가가, 오래된 국가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초기 기간에 따른 백분율 증가를 후속 기간 기준으로 삼은 건 잘못됐다.

 

'둔화'라는 점은 인민주의자들이 취했었던 기간을 비교해봤을 때도 전혀 증명되지가 않았다. 자본주의 산업에 따른 발전은 순환적으로만 진행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다른 기간을 비교하려면, 전체 연도에 따른 통계를 더 가져와야만 했다. 그래야만 특히 번영했던 호황기와 불황기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이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또 심각한 오류에 빠져들었다.

 

인민주의자들은 1880년이 고도 호황기였다는 점을 간과해버렸다. 게다가 반대 주장까지 조작해버렸다. 인민주의자들은 1865-1890년 사이에서도 1880년은 흉작의 해였기 때문에, 그 해에 등록된 노동자 수가 일반적으로 적었다는 점만 내세웠다.

 

오히려 1880년은 특히 가축 및 기계 제작 분야에서, 산업에 따른 급발전을 기록한 해였다. 전쟁 이후로는 상품 수요 증가와 정부 주문 증가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급발전에 따른 정도를 온전하게 파악하려면, 1879년 항목을 살펴보면 충분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낭만적인 이론에 맞춰 알맞게도 사실마저 완전히 왜곡시켜버렸다.

 

 

대규모 산업 분포

 

 

대규모 시설에서 생산이 집중된다는 점 외에도, 여러 공장 산업 중심지에서 생산이 집중된다는 점은, 많은 유형에 따른 공장 중심지 또한 대규모 기계 산업 특징을 파악하는 데 중요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장 통계에서는 불만스럽고, 비교할 수 없는 자료만 제공했으며, 적절하지도 못한 방식으로 처리해서 정리해버렸다. 현대 출판물에서는 산업 분포를 구베르니아 단위로만 표시했다.

 

대규모 산업 분포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개별 중심지, 서로 인접한 개별 도시, 산업 정착지 또는 집단에 대한 통계를 수집해야만 했다. 구베르니아, 위예즈드는 영토 단위로는 너무 컸기 때문이다.

 

1879년, 1890년, 명부 자료를 바탕으로, 공장 산업에서 주요 중심지로부터 집중된 정도를 계산해야만 했다. 부록에는 유럽 러시아 103개 공장 중심지에 대한 자료가 있으며, 중심지에는 전체 공장 노동자 수에서 약 절반이 집중됐다.

 

표에서는 세 가지 주요 공장 중심지 유형을 보여준다.

 

1). 도시: 도시에서는 노동자와 사업체 모두 가장 높은 밀도를 보이기로 유명하며, 1위를 차지한다. 특히 두드러진 곳은 대도시이다. 교외를 포함한 대도시에서는 약 7만 명의 공장 노동자가 집중됐다.

  

1890년 기준 리가에서는 1만 6천 명,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에서는 1만 5천 명, 보고로드스크에서는 1만 명이었다. 다른 도시들은 모두 1만 명 미만이었다.

 

여러 대도시 공장 노동자에 대한 공식 통계에서도 수치가 터무니 없이 낮았다. 제시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례는 중심지에 따른 정확한 산업 노동자 수를 계산하고자, 수치들을 몇 배나 곱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뿐만이 아니라, 교외 지역도 명시해야만 한다. 대도시 교외 지역은 대개 대규모 산업 중심지였지만, 보유한 통계로는 그러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만을 분리할 수 있었다. 바로 1890년 노동자 수가 18,900명이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 지역이었다. 모스크바 군에서 여러 정착지 역시나 실제로는 교외 지역이었다.

 

2). 공장 마을: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코스트로마에서 특히 많이 있었다. 중심지에서는 오레호보 주예보 마을 지역이 주도했다. 노동자 수에서는 1890년 기준 26,800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표시된 구역과 야로슬라블, 트베리에서 대부분 농촌 공장 중심지는 거대한 방식 공장으로 형성됐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거의 늘 일자리 분배 사무소, 자본주의적 제조업의 중심지가 있었고,인근 수공 노동자들을 지배했다.

 

통계 상 가내 노동자, 공장 노동자가 혼동되지 않은 경우, 중심지 발전에 대한 통계로는 주변 지역에서 수천 명의 농민을 끌어들여, 공장 노동자로 전환시키는 대규모 기계 산업의 발달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상당 수로는 농촌 공장 중심지가, 대규모 광산 및 야금 공장(보브로보 마을에서 콜롬나 공장, 유조프카 공장, 브랸스크 공장 등)으로 구성됐다. 대부분은 광업으로 분류됐으며, 본 표에서는 포함되지는 않았다.

 

남서부 마을과 읍에 위치한 사탕무 설탕 정제소 또한 상당 수 마을 공장 중심지를 형성해갔다. 키이우에서는 스멜라 읍을 가장 큰 규모로 꼽았다.

 

3). 수공예 마을: 가장 큰 규모 시설들은 '공장 및 작업장'으로 분류됐다. 파블로보, 보르스마, 보고로드스코예, 두보프카 마을이 중심지였다. 보고로드스코예 마을 중심에 따른 공장 노동자와 전체 산업 인구를 비교해봤다.

 

그리고 표에 나와 있는 중심지들을 각 중심지에 따른 노동자 수와 도시 또는 마을 유형에 따라 집단화한 통계도 얻을 수 있었다.

 

표에 따르면, 1879년에는 103개 중심지에서, 전체 752,000명 가운데 356,000명의 노동자가 집중됐지만, 1890년에는 전체 876,000명 가운데 451,000명이 집중됐다.

 

노동자 수는 26.8% 증가했었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자 100명 이상인 대규모 공장에서는 증가율이 22.2%에 불과했고, 같은 기간 동안 총 노동자 수로는 16.5% 증가했다. 따라서 노동자는 가장 큰 중심지에 집중됐다.

 

1879년에는 노동자가 5,000명 이상인 중심지가 11곳에 불과했지만, 1890년에는 21곳이었다. 특히 노동자가 5,000명에서 10,000명으로 늘어난 중심지가 눈에 띄었다. 다음과 같은 현상에는 두 가지 이유에서 발생했다.

 

1). 오데사, 로스토프 온 도누 등과 같은 남부에서 공장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했다.

 

2). 중부에서 공장 마을이 성장했다.

 

도시와 농촌 중심지를 비교했을 때, 1890년 농촌 중심지는 주요 중심지 전체 노동자 수에서 약 1/3으로, 45만 1천 명 가운데 15만 2천 명을 차지했다. 러시아 전체로 봤을 때는, 비율이 더 높아야만 했다. 공장 노동자에서 1/3은 도시 외곽에 거주했다.

 

실제로 해당 표에서는 모든 주요 도시 중심지가 포함됐지만, 언급한 지역을 제외하고는,수백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농촌 중심지는 매우 많았다. 광업 노동자 또한 주로 도시 외곽에 있었다.

 

유럽 러시아 공장 및 광산 노동자 총 수에서 절반 이상은 도시 외곽에 거주했다. 따라서 산업 인구가 도시 인구를 크게 초과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도 공장 산업이 발전하는 속도를 살펴보면, 농촌 지역이 더 빨랐다. 해당 기간 동안에 1,0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는 도시 지역 수는 매우 32-33개로 소폭으로만 증가했지만, 범주에 속하는 농촌 지역 수는 38-53개로 매우 크게 증가했다.

 

40개 도시 지역 노동자 수는 257,000-299,000명으로 16.1%만 증가했지만, 63개 농촌 지역 노동자 수로는 98,500-152,500명으로, 54.7% 증가했다. 도시 지역 당 평균 노동자 수는 6,400-7,500명으로 증가했지만, 농촌 지역 당 평균 노동자 수로는 1,500-2,400명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공장 산업은 도시 외곽으로까지 특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새로운 공장 중심지를 만들었고, 도시 중심지보다도 더 빠르게 발전시켰고, 거대 자본주의 기업에 따른 세계와 고립된 외딴 농촌 지역까지 깊숙하게 침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극히 중요한 상태로는, 대규모 기계 산업이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얼마나 빠르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을, 이제는 10년 남짓 만에 모습으로 단축시켰다.

 

보고로드스코예, 파블로보, 킴리, 호테이치, 빌리코예 등 수공예 마을과 같은 비농업 중심지에 따른 형성 과정을 현대 공장이 새로운 중심지를 건설하는 과정과 비교해봤을 때, 수천 명의 농촌 인구를 산업 정착지로 즉시 끌어들였다. 사회적 분업은 큰 추진력을 얻었다. 인구 이동성은 경제 생활에서도 필수적인 조건이었고, 이전의 부동성과 고립을 대체해갔다.

 

공장에서는 농촌 지역으로 이전되면서부터, 자본주의가 농민 공동체에 따른 사회적 신분 고립을 야기하는 장애물들을 극복시켰으며, 심지어 고립으로부터 이득을 얻어갔다. 농촌에서는 공장을 건설하는 데 상당한 불편함도 따랐지만, 값싼 노동력 공급을 보장했다.

 

농민은 공장에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공장은 농민에게 돌아갔다. 농민은 집단 책임 제도와 공동체를 떠나는 데 따르는 장애물 때문에, 가장 큰 이익을 주는 고용주를 찾을 완전한 자유가 부족했었다. 하지만 고용주는 가장 저렴한 노동자를 완벽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공장 산업에 따른 분포 특성은 그 영향력에서도 매우 폭 넓었고, 공장 내부에서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장 산업에 따른 분포 특성으로는, 대규모 기계 산업이 고용 인구에 미치는 변화적인 영향력을 일시적으로는 지연시킬 수 밖에 없었다.

 

시골 농민을 단번에, 공장 노동자로 전환시키고는, 공장을 일시적으로 가장 저렴하고, 가장 덜 발달됐고, 가장 덜 까다로운 '일꾼'을 스스로 확보해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연도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고, 대규모 기계 산업에 영향을 받는 지역이 더욱 확장되는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목재 건설 및 산업 발전

 

 

대규모 기계 산업 발달에 필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로는 연료 및 건축 자재 공급 산업과 건설 산업에 따른 발전이다. 목재 산업부터 보자면,

 

나무를 벌복해서, 필요한 대로, 예비적으로 다듬는 작업은 태곳적부터, 농민 직업이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경운기 일과로 포함된다. 그러나 여기서 목재 산업이란, 판매를 위한 목재 가공이다. 개혁 이후 시기 특징은, 산업에 따른 급속한 발전이다.

 

목재 수요는 개인적 소비(도시 발달, 마을 내 비농업 인구 증가, 농민 해방으로부터 산림 손실)와 특히 생산적 소비 모두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상업, 산업, 도시 생활, 군사적 수요, 철도 등의 발전도 인간이 아닌 자본이 사용한 목재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가시켜갔다.

 

산업 지역에서는 목재 연료 가격이 빠르게 상승했다. 1881년까지 지난 5년 동안에, 목재 연료 가격도 두 배 이상 올랐다. 당시에 목재 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에, 코스트로마에서는 공장에서 목재 연료를 엄청나게 소비하면서부터, 지난 7년 동안 가격이 두 배로 올라갔다.

 

목채 수출은 1856년 5,947,000루블, 1881년 30,153,000루블, 1894년 39,200,000루블로 증가해갔다. 비율로는 100: 507: 659였다.

 

1866-1868년 유럽 러시아 내륙 수로를 따라, 운송된 건축용 목재와 목재 연료 양은 연 평균 1억 5,600만 푸드였다. 1888-1890년에는 연 평균 7억 100만 푸드였다. 곧 4배 이상 증가했다.

 

1888-1890년 철도로 운송된 목재 양은 평균 2억 9천만 푸드였지만, 1866-1868년에는 7천 만 푸드를 넘지 않았었다. 1860년대 목재 총 운송량은 약 2억 2천 6백만 푸드였고, 1888-1890년에는 9억 9천 1백만 푸드로, 4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개혁 이후 목재 산업도 크게 발달했다.

 

그렇다면 산업은 어떻게 조직됐을까. 순전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됐다. 산림은 토지 소유자로부터, 기업가인 '목재 산업가'가 매입했다. 노동자를 고용해서, 목재를 벌목하고, 톱질하고,띄우는 등의 작업을 했다.

 

모스크바 젬스트보 통계에서는 목재 산업에 종사하는 24,000명 농민 가운데 목재 산업가 337명만 나열했다. 슬로보츠코이, 비야트카 지역에서는 목재 산업가가 123명이었고, 소규모 기업은 대부분 대규모 기업에 따른 하청업체였으며, 대규모 기업은 10명 뿐으로, 나열됐고, 목재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로는 18,865명으로, 노동자 1인 당 평균 소득은 19.5루블이었다.

 

S. 코롤렌코는 유럽 러시아 전체에서, 최대 200만 명의 농민이 목재업에 종사했다고 추산했다. 비야트카 11개 군 가운데 9개 군에서는 약 56,430명의 목재 노동자가 있엇고, 코스트로마 전체에서는 약 47,000명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수치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목재업은 최저 임금을 받는 직업 군이었고, 위생 조건은 끔찍했고, 노동자들의 건강도 심각하게 위협받았다. 외딴 숲 속에서 고된 노동에 내몰린 노동자들은 완전히 무방시 상태에 놓였고, 산업 분야에서도, 노예 제도, 운반(트럭) 체계, 자연적(가부장적) 농민 산업과 비슷한 요소들도 만연했다.

 

설명을 뒷받침하고자, 지역 조사관들의 견해를 살펴보자면, 특히 모스크바 통계학자들은 목재 노동자 소득을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식량 강제 구매'를 언급하기도 했었다.

 

코스트로마 목재상들은 '숲 속에서 모임을 이뤄, 난로가 없거나, 있더라도 열린 난로로 난방을 하는, 급하게 지은 허름한 판잣집에서 살았으며, 형편 없는 수프와 주말이 되면 굳어버린 빵, 악취나는 공기, 축축한 옷, 모든 것은 목재 산업 종사자들의 건강에 치명적일 뿐이었다.' 따라서 외부 노동이 주를 이루는 지역과 같은 산업 지역보다, 목재 지구(Volosts)에서 훨씬 더 더럽고, 가혹한 환경에서 살았다.

 

티흐빈 군, 노브고로드 시에 관해서는, '농업은 보조적인 소득원이지만, 모든 공식적인 통계에서는 사람들이 농사에 종사했다. 농민이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얻는 모든 건, 목재 산업가를 위한 벌목이었고, 떠다니는 목재로부터 얻어냈다. 그러나 곧 위기가 닥쳐왔다. 약 5년 또는 10년 안에 숲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목재 기지(캠프)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은 뱃사공과 비슷했다. 숲으로 둘러싸인 목재 기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는 집에서 일하는 습관을 잃어갔으며, 목재를 떠다니는 일에 더 끌려갔다. 수확과 건초 제작만이 집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목재 산업가에게도 '영원한 속박'을 받았다.

 

뱌트카(Vyatka) 조사관들은 목재 작업 고용 계절(시즌)마다, 일반적으로 세금 납부 기간과 일치하도록 조정됐고, 고용주로부터는 식량을 구매하면, 수입이 크게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또한 '나무를 베는 사람과 나무를 자르는 사람 모두 여름 철 하루 약 17코펙을 받았으며, 자신의 가축(말)과 함께 노동할 때는, 하루에 약 33코펙을 받았다. 빈약한 급여에는 노동에 대한 부적절한 보수가 있엇고, 극도로 비위생적인 환경을 고려했을 때도, 그러했다.‘

 

목재 노동자들은 농촌 프롤레아리아트에서 큰 부분을 구성한다. 아주 작은 토지를 소유하며, 가장 불리한 조건으로 노동력을 판매한다. 직업은 극도로 불규칙적이고, 임시적이다.

 

목재 노동자들은 이론 상으로도, 잠재적으로 묘사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따른 상대적 초과 인구로부터 예비군의 형태로 나타난다. 농촌 인구에서 특정 부분은 늘 그러한 작업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야만 하며, 그것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존재와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목재 산업가들의 약탈적인 방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숲이 파괴된 정도에 따라서도, 나무를 석탄으로 대체해 갈 필요도 더욱 커지고,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견고한 기반이 되는 유일한 석탄 산업은 더욱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

 

언제든, 또 얼마든지, 일정하고, 거의 변동이 없는 가격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연료가 바로 현대 공장에 따른 수요로부터 나타나게 된다. 목재 사업은 이와 같은 수요를 충족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 따라서 연료 공급원으로 석탄 산업에 대한 목재 산업의 우세는 낮은 수준에 따른 자본주의 발전과 상응한다.

 

생산에 있어 사회적 관계와 관련해서는, 목재 산업과 석탄 산업 간 관계는 자본주의적 공장제 제조업(수공업)과 대규모 기계 산업 간 관계와 거의 같다. 목재 산업은 원시적인 방법으로부터, 천연 자원을 착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다. 석탄 산업은 기술 혁명과 기계에 따른 폭 넓은 사용을 초래한다.

 

목재 산업은 생산자를 농민으로 남겨두며, 석탄 산업으로부터 생산자를 공장 노동자로 변모시킨다. 목재 산업은 모든 자연적인(가부장적인) 삶의 방식을 그대로 사실상 남겨두고는, 외딴 숲 속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내버려진 노동자들을 최악의 속박으로 얽매어, 무지와 무방비 상태, 고립을 이용해간다.

 

석탄 산업은 인구 이동성을 창출하며, 대규모 산업 중심지를 형성하고,필연적으로 생산에 대한 공적 통제에 따른 도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앞서 언급된 변화로부터, 공장제 수공업이 점진적으로 공장으로 대체해간다.

 

건축은 원래 농민에게는 가내 노동 일부였다. 준자연적인 농민 경제가 보존된 곳이라면 현재까지 그러하다, 이후 발전으로부터 건설 노동자들은 고객 주문에 따라 노동하는 전문 장인으로 변모해갔다.

 

마을과 소도시에 따른 건설 산업은 현재까지도 대체로 같은 방식으로 조직된다. 장인은 대개 토지와 관계를 유지하고, 매우 좁은 범위에서는 소규모 고객을 위해 노동한다. 자본주의 발전으로부터 산업 제도를 유지할 수는 없다.

 

무역, 공장, 도시, 철도에 따른 발달로부터 자연적인 시대에서 오래된 건물과는 건축학적, 차원적으로 다른 유형에 따른 건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게 된다. 새 건물일수록 매우 많고 또 고가 재료, 가장 많은 전문 분야에서 노동자 대중과 협력, 그리고 완공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새 건물에 따른 분포도는 전통적인 인구 분포도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대도시나 교외,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건설 중인 철도변 등에 건설된다.

 

지역 장인은 이주 노동자로 변해서, 기업가적 계약자에게 고용되며, 점차적으로 구매자와 생산자 사이에 끼어들어 진정한 자본가로 거듭난다.

 

자본주의 경제에 다른 병적인 발전, 장기간 불황과 1898년과 같은 '건설 호황'도 번걸아 나타나는 현상은 건설 산업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 확장과 심화를 크게 가속화시킨다.

 

경제 문헌 자료에 따르면, 검토 중인 산업 개혁 이후 진화에 따라, 노동에서 영토적 분업, 곧 노동 인구가 특정 건설 분야를 전문직으로 하는 대규모 지역에 따른 형성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 지역에 따른 전문화는 건설 작업에 대한 대규모 시장 형성과 자본주의적 관계가 부상한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블라디미르, 포크로프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목수로 유명했었다. 이미 세기 초에 전체 인구 절반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개혁 이후 목공업은 꾸준하게 확산됐다.

 

목수 구역에서 계약자는 하청업체 및 공장 소유주와 비슷했다. 목수 협동조합(아르텔)로부터, 가장 진취적인 구성원 중에서 선발됐다. 계약자들은 10년 만에 5만-6만 루블, 그리고 그 이상의 순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일부 계약자들은 300-500명 목수를 고용하고는, 진정한 자본가로 거듭났다.

 

지역 농민들은 '목수 장사만큼 돈이 안 되는 것도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목공은 지역 농민들의 삶 전체에서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농민 목수는 농업에 더욱 더 적은 시간을 투자하다가, 결국 완전하게 포기해버렸다.

 

도시 생활은 목수에게는 문화적 영향도 미쳤다. 목수는 주변 농민들보다도, 훨씬 깨끗한 삶을 살았고, '교양 있는 외모'와 '비교적 높은 정신적 발달'로부터 눈에 띄었다.

 

유럽 러시아에서 총 건설 노동자 수로는 단편적인 자료로부터 판단할 때도 상당히 많았다. 칼루가에서는 1896년, 건설 노동자 수로는 현지인과 이주 노동자를 합쳐 39,860명이었다.

 

야로슬라블에서는 공식 자료에 따르면, 1894-1895년, 사이에 이주 노동자로는 20,170명이었다. 코스트로마에서는 약 39,500명, 이주 노동자가 있었다. 뱌트카에서는 11개 지역 가운데 9개 지역, 1880년대, 약 30,500명, 이주 노동자가 있었다.

 

티에르에서는 12개 지역 가운데 4개 지역에서는 현지인과 이주 노동자를 합쳐 15,585명이 있었다. 니즈니노브고로드, 고르바토프 지역에서는 현지인과 이주 노동자를 합쳐 2,221명이었다. 1875, 1876년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매년 랴잔을 떠나 다른 지구에서 노동하는 목수만 20,000명 이상이었다. 오렐 지역에서는 건설 노동자가 2,000명 있었다. 폴타바에서는 15개 구 가운데 3개 구에서 1,440명이 있었다. 사마라, 니콜라예프스크 지역에서는 1,339명이 있었다.

 

다음 수치로 판단했을 때도, 유럽 러시아 건설 노동자 수로는 최소 100만 명이었다. 해당 수치는 최소한으로 간주한다. 모든 출처에서도 건설 노동자 수는 개혁 이후 급격하게 증가해갔다.

 

건설 노동자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로 발달해갔으며, 토지와 관계 면에서도, 매년마다 매우 미약해졌다. 건설 노동자 조건은 목재 노동자 조건과도 매우 달랐으며, 공장 노동자 조건과 더 비슷했다. 앞서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에서 노동했고,문화적 수준도 상당하게 높았다.

 

쇠퇴하는 목재 산업으로부터, 여전히 자연적인(가부장적인) 삶의 방식을 용인시키는 저개발 자본주의에 따른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발전하는 건설 산업은 더 높은 단계에 따른 자본주의를 대표하며, 새로운 산업 노동층을 형성해가고, 기존 농민층에 따른 근본적인 분리를 보여준다.

 

 

공장 부속물

 

 

공장에 부속된 존재는 공장과도 직접 연결된 임금 노동과 소규모 형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부분적으로 목재 및 건축 노동자가 포함되며, 어떤 경우로는 공장 중심지에 따른 산업 인구에서 일부를 직접 구성하거나, 다른 경우로는 주변 마을 인구에 속한다.

 

이탄 습지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는 마부(카터), 농사꾼 기사(로더), 포장공 및 일반적으로는 소위 노동자가 포함되며,늘 산업 중심지 인구에 따른 상당한 부분을 구성해간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890년, 12/15,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일용 노동자 및 노동자' 집단에서 남녀 모두 44,814명이 등록됐다. 운반 산업(카팅)에 종사하는 남녀로는 51,000명이었고, 그 중에 9,500명은 무겁고 많은 짐을 옮기는 데 특수하게 종사했다.

 

일부 보조 작업으로는 소규모 독립 산업가들로부터, 공장에서 수행됐다. 공장 중심지 또는 주변으로부터, 기름 공장과 증류소를 위한 통 제조, 유리 제품 포장을 위한 바구니 제조, 철물용 포장 상자 제조, 목수 및 설치자 도구용 나무 손잡이 제조, 신발 공장을 위한 상표 제조, 신발 고정 못 제조, 가죽 공장을 위한 무두질, 공장 제품 포장을 위한 인피 요(매트) 직조, 철물용 포장 상자 제조, 담배 공장을 위한 골판지 상자 제조, 식초 공장을 위한 목재 가루 제조, 대형 공장 수요로부터 발전한 소규모 방적 창고(로츠)에서 폐사 방적 기술 등이었다.

 

임금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소규모 산업가들은 공장 중심지에서 산업 인구이거나, 주변 마을로부터 준농업 인구에 속했다.

 

공장에 따른 작업은 준제품 생산에 국한될 때, 더욱 심도 깊게 다루는 소규모 산업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기계 방적은 수공예 직조에 활력을 불어넣었고,금속 제품 수공예 생산자들은 철공소 주변에 모여 있다. 자본주의적인 가내 공업은 가끔 공장 부속물이었다.

 

대규모 기계 공업 시대에는 모든 국가에서 기성복과 같은 분야에서도 자본주의적인 가내 공업이 폭 넓게 발전했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공업에 따른 폭 넓은 범위와 고유 조건, 공장제 수공업에 대해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하다.

 

공장 부속물에 대한 설명으로는 인구 직업에 대한 완전한 통계 자료, 공장 중심지, 주변 지역에서 전체 경제 활동에 대한 단행본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편적인 자료조차도 공장 산업이 다른 형태 산업으로부터 고립됐고, 공장 인구가 공장에 고용되지 않은 인구로부터도 고립됐기 때문에, 널리 퍼진 견해는 틀렸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회 관계 일반에서도 산업 형태에 따른 발전은 서로 맞물리기도 하고, 과도기적인 형태와 과거로부터 회귀로 보이는 양상들 사이에서도 매우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소규모 산업에 따른 발전은 자본주의적인 공장 제조업에 따른 발전으로 나타난다. 공장 또한 가끔 소규모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구매자를 위한 노동 또한 모든 공장제 수공업과 공장 부속물이다.

 

현상에 따른 중요도를 제대로 평가한다면, 특정 발전 단계에 따른 산업 전체 구조와 발전에 따른 주요한 추세와 함께 생겨나는 현상들을 고찰해야만 한다.

 

 

7-3. 산업 자본주의 발전 단계

 

 

산업과 농업에서 완전한 분리

 

 

산업과 농업에 따른 완전한 분리는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부터 이뤄진다. 『자본』,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이미 확립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이 무시하는 명제를 충분히 확인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산업과 농업 분리에 대해 계절이 바뀌어도 언급했지만, 정확한 통계를 기반으로부터 어떤 과정이 실제로는 어떻게 일어나며, 어떤 다른 형태를 띠는지를 조사하는 수고로움을 들이지 않았다.

 

특히 V. V. 보론초프는 산업 노동자와 제조업에서 토지 연결을 지적했었다. 보론초프는 자본주의에서 많은 단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물론 자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고만 내세웠다. 『자본주의 운명』에서도, 자본주의 산업이 노동자 농부 등으로부터 의존하고 있다고만 선언했다.

 

보론초프는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서구 모든 지역에서도 자본주의가 대규모 기계 산업이 확립되기 이전에, 노동자와 토지를 완전히 분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듣지도 못했었거나, 잊은 듯이 보였다.

 

카블루코프는 최근 학생들에게도 놀라운 사실을 왜곡시켰다. '서구에서는 공장 노동이 노동자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지만, 러시아에서는 비교적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노동자가 공장 노동을 부수적인 직업으로 여기고는, 토지에 더 끌린다고' 했었다.

 

문제에 대한 사실적 분석에서는 모스크바 위생 통계에 있는 '공장 노동자와 농업 관계'에 대한 데멘티예프 수필에서 이뤄졌다. 약 2만 명 노동자를 포함하는 체계적으로 정리된 통계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 14.1%만이, 농업 일자리로 이직했다. 작업에서도 자세하게 증명된 중요한 점으로는, 바로 기계 생산이 노동자를 토지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점이었다.

 

표를 보완하고자, 8개 업종을 수작업과 기계 작업으로 구분했다. 아홉 번째에서는 면직물(펠트) 생산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수작업과 기계 작업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유의했다. 수직기 공장 직공 가운데 약 63%가 현장 직업으로 이직했었지만, 동력 직기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한 명도 이직하지 않았다. 기계화된 직물 공장 부서 별 노동자 가운데 3.3%만이 이직했다.

 

따라서 공장 노동자들이 토지와 관계를 끊는 가장 큰 이유로는 수작업에서 기계 작업으로 전환이다. 수작업 공장 수는 비교적 여전히 많았지만, 기계 작업 공장 노동자 수에 비하면 현장 작업으로 이직하는 노동자 수는 매우 적었다. 따라서 현상 작업으로 이직하는 사람 가운데 성인 노동자 전체 14.1%, 농민 사회층에만 속하는 성인 노동자 15.4%에 불과했다.

 

모스크바 공장 위생 검사 결과에서는 기계 공장은 증기 기관을 사용하는 18.4%를 포함해서, 22.6%로, 전체 노동자 수에서 80.7%가 집중됐다. 수동 노동 공장은 69.2%를 차지했고, 전체 노동자 수에서 16.2%만 고용했다.

 

244개 기계 공장에서는 공장 92,302명으로, 공장 당 노동자는 378명이었지만, 747개 수동 노동 공장에서는 노동자가 18,520명으로 공장 당 노동자 25명이었다. 공장 노동자가 대부분 기계화된 가장 큰 기업에 상당히 집중됐다. 기업은 평균적으로 기업 당 노동자가 488명 이상이었다.

 

데멘티예프는 노동자들의 출생지가 토지로부터 분리에 미치는 영향, 현지에서 태어난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간 차이, 사회적 지위 차이 등을 자세하게 연구했고, 모든 차이에서 주요한 요인, 수동 생산에서 기계 생산으로 전환되는 영향력으로부터 가려진다는 점을 찾아냈다.

 

어떤 이유로, 전직 농부가 공장 노동자로 전락하든, 특수 노동자들은 이미 존재했다. 단지 농민으로 간주됐을 뿐, 마을과 유일한 연결 고리로는 여권을 갱신했을 때 내는 세금이었다. 마을에서는 농장도 없고, 대개 팔려 나간 집조차 없었다. 토지에 대한 권리조차 법적으로만 보유했고, 1885-1886년 사이에 여러 공장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에서도, 노동자들은 마을에서도 완전하게 소외감을 느끼고는 말았다. 농민들이 동료 마을 사람들 후손을 이방인으로 여기듯이 말이다.

 

따라서 집도 없고, 재산도 없는, 아무런 얽매임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미 굳어진 노동층에게 직면했다. 기원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공장 계보를 가졌고, 상당 수는 이미 3세대에 접어들었다.

 

최신 공장 통계에서는 공장과 농업 분리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공장 및 작업 목록, 1894-1895」에서는 각 공장이 운영되는 연중 일수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 카스페로프는 '평균적으로 러시아 공장은 연간 165일을 가동하고, 공장에서 35%는 연간 200일 미만을 가동한다'고 계산했다. 카스페로프도 인민주의 이론을 뒷받침하고자, 통계를 서둘러 사용했다. '공장'이라는 용어가 모호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는, 전반적인 수치는 실질적으로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연중 특정 일수 동안에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고용됐는지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공장 노동자 수에서 약 3/4를 고용하는 100명 이상의 대규모 공장에 대한 목록에서도,적절한 수치를 계산했다. 많은 범주에서도, 연간 평균 노동일 수는

 

A) 242일,

B) 235일,

C) 273일,

 

모든 대형 공장에서는 244일이었다. 노동자 1인 당 평균 노동일 수를 계산해본다면, 대형 공장 노동자 1인 당 평균 노동일 수는 연간 253일이다. 모곩에서도 많은 거래로부터 구분된 12개 범주 가운데, 하위 범주에서 평균 근무일 수가 200일 미만인 '식품' 범주에 있었다. 다른 공장에서는,

 

A) 189일,

B) 148일,

C) 280일,

 

A), B)에 따른 공장 구간에서는 110,588명 노동자가 고용됐고, 655,670명에 따른 총 노동자 수에서 16.2%였다. 구간은 사탕무와 설탕 및 담배, 증류 및 제분 등 매우 많은 업종이 결합됐다. 나머지 구간에서 공장 당 평균 근무일 수로는,

 

A) 259일,

B) 271일,

C) 272일,

 

따라서 공장이 클수록 연중 가동되는 일수가 더 많았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모든 대규모 공장에 대한 일반적인 통계로는 모스크바 위생 통계 보고서에 따른 결론을 뒷받침하고, 해당 공장이 정규직 공장 노동층을 형성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러시아 공장 노동자에 대한 자료에서는 대규모 기계 산업이 산업 인구 생활 조건에서도 완전하고, 명확하게, 혁명을 일으켜 농업 및 관련된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자연적(가부장적) 삶의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다는, 자본론을 완전히 뒷받침한다.

 

그러나 대규모 기계 산업은 가부장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관계를 파괴하면서부터, 농업과 공업에 따른 임금 노동자를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는 조건을 조성한다. 그러므로 비농업 중심지에서 처음 생겨난, 상업 및 산업적 생활 방식을 농촌 지역에서도 전반적을 도입하며, 인구 이동성과 농업 및 공업 노동자 고용을 위한 거대한 시장을 창출하고, 농업에 기계를 도입해서, 대규모 기계 산업은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진 숙련된 공업 노동자를 농촌 지역으로 유입시킨다.

 

 

산업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세 단계

 

 

발전에서는 세 가지 주요한 단계가 있다. 소규모 상품 생산(소규모 농민 산업), 자본주의적인 공장제 수공업, 대규모 공장 및 기계 산업이다. 널리 퍼진 공장 산업과 수공예 산업이 서로 분리됐다는 견해를 반박한다. 그러한 구분은 순전히 인위적이다. 산업 형태들 사이에서 연관성과 연속성은 가장 직접적이고, 내밀한 형태다. 소규모 상품 생산에서 주요한 추세로는, 자본주의 발전, 특히 공장제 수공업에 따른 발달로 분명하게 향하고 있다. 그리고 공장제 수공업은 눈 앞에서 빠른 속도로 대규모 기계 산업으로 발전해갔다.

 

연속적인 산업 형태들 사이에서도, 밀접하고, 직접적인 연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대규모 공장주, 심지어 큰 공장주들조차도, 한때는 가장 작은 규모의 소규모 산업가였고, 민중 생산에서 자본주의로 이어진, 모든 단계를 거쳐갔다는 점이다. 사바 모로조프(Savva Morozov)는 농노, 소몰이, 짐꾼, 노동자 직조공, 수공예 직조공이었다. 이윽고, 그는 작은 사업장, 업무 분배 사무소, 공장 소유주가 됐다. 1862년에 사망했을 때, 그와 그 자녀들은 두 개의 큰 공장을 소유했다. 1890년에 후손들이 소유한 4개 공장은 39,000명 노동자를 고용했고, 3,500만 루블 상당 상품을 생산했다.

 

블라비미르 견직물(비단) 산업에서 많은 대규모 공장 소유주는 예전에는 노동자 직조공이거나, 수공예 직조공이었다. 이바노보 보즈네센스크에서 가장 큰 공장 소유주, 쿠바예프, 포킨, 주브코프, 코쿠시킨, 보브포프 등은 예전에는 수공예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브로케이드 공장은 모든 수공예 작업장에서부터 발달했다. 파블로보 지역에서 공장주 자뱌로프는 1864년, 장인 하바로프에게 평범한 직원이던 시절을 기억했다. 공장주였던 바리파예프는 예전에는 소규모 수공예인이었다. 콘드라로프는 가방에 상품을 담아 파블로보까지 걸어갔던 수공예인이었다. 방직공 아스몰로프는 행상인 말 몰이꾼이었고, 다음에는 소규모 상인이었고, 작은 담배 작업장 주인이 됐고, 마침내 수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공장 주인이 됐다. 늘 이런 식이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같은 사례와 비슷한 사례에서도, '인위적인'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민중 산업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를, 어떻게 판단할지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세 가지 주요 산업 형태에서도, 무엇보다 기술 체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소규모 상품 생산은 태곳적부터, 거의 변하지도 않은 완전히 원시적인 수작업 기술이 특징이다. 산업에서 소규모 생산자는 원자재 가공 방식에서도, 전통을 따르는 농민으로 남는다.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분업을 도입해서, 기술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며, 농민을 하나의 세부 작업을 수행하는 노동자인, 공장 노동자로 변모시킨다. 그러나 수작업 생산은 여전히 잔존하며, 기반으로부터 생산 방식 발전은 불가피하게 매우 느리다. 분업은 농민 노동과 자연발생적으로, 전통으로부터 전승된다.

 

대규모 기계 산업만으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수작업 기술을 압도해서, 보다 새롭고,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생산을 전환하고, 과학을 생산에 체계적으로 적용시킨다. 러시아 자본주의도 대규모 기계 산업을 조직하지 않았던 한에서, 아직은 조직하지도 않은 산업들에서는 기술이 대부분 완전히 정체된 상태를 목격하게 된다. 수 세기 전부터 생산에 사용됐던, 동일한 수동 베틀, 수차, 풍차가 사용된다. 반면에, 공장에 종속된 산업들에서는 완전한 기술 혁명과 기계 생산 방식에 따른 극히 빠른 발전을 목격한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여러 단계가 서로 다른 기술 체계와 연결됐음을 알 수 있다. 소규모 상품 생산과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소규모 사업체가 우세하며, 그 중에서도 소수 대규모 사업체만 생겨난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소규모 사업체를 완전하게 제거해간다. 소규모 산업에서도 자본주의적인 관계,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작업장과 상인 자본 형태로 나타나지만, 관계 면으로는, 아직은 미흡하고, 생산에 참가하는 집단 간 날카로운 대립으로 구체화되지도 않는다. 대자본이나 폭 넓은 프롤레아리타층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대자본가와 프롤레아리아가 모두 부상한다.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노동 사이에 따른 간극은 매우 커진다. 부유한 산업 정착지도 생겨나며, 주민 대부분은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원자재를 구매하고, 완제품을 파는 막대한 사업을 하는 소수 상인과 하루벌이로 사는 수 많은 세부 노동자, 바로 공장제 수공업에서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소규모 사업체 증가, 토지와 유대감 유지, 생산 방식 전반에 걸친 전통 고수로는 모든 게 제조업에서는 양극단 사이에서 수 많은 중간 요소들을 형성해가며, 양극단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대규모 기계 산업에서는 모든 저해 요인이 사라지며, 사회적 모순에 따른 심각함은 극에 달한다. 자본주의에 따른 모든 어두운 면이 응축됐다. 알다시피, 기계는 노동 시간을 최대한 연장하려고 하며,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하고, 여성과 어린이들마저 산업으로 끌어들인다. 실업자 예비군이 형성되는 등, 그러나 공장으로부터 대규모로 이뤄진 노동에 따른 사회화와 그것이 고용한 사람들에 대한 감정과 개념 변화, 특히 자연적(가부장적), 소부르주아적 전통 파괴를 일으키는 반동이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이전 단계들과는 다르게, 생산에 따른 계획적 규제와 공적 통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며, 공적 통제가 바로 경향 표기로는 공장법이다.

 

생산 발전에 따른 본질로는 자본주의에서도 여러 단계에 따라 변화해간다. 소규모 산업에서 발전은 농민 경제 발전에 따라 이뤄진다. 시장은 매우 좁고, 생산자와 구매자 사이 거리는 짧고, 생산 규모도 미미해서, 지역 수요에 따른 미세한 변동에도 쉽게 적응해간다. 따라서 해당 단계 산업은 가장 큰 안정도를 지니지만, 안정도 때문에 기술 정체와 중세 전통에 따른 온갖 잔재와도 얽힌 자연적인 사회 관계 유지를 의미하게 된다.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거대한 시장, 때로는 전국을 대상으로 운영되기에, 생산은 자본주의 특유한 불안정함을 띠며, 불안정하기 때문에, 공장 생산에서도 가장 극심해진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나타난 시기에서만 급발전한다. 소규모 생산자에 따른 몰락에는 공장에 따른 불규칙적인 발달로부터, 크게 가속화된다.

 

노동자들은 호황기에 공장으로 몰려들었다가, 다시 쫓겨난다. 어떤 종류 작업이든, 수행할 준비가 된 대규모 실업 예비군 형성은 대규모 기계 산업 존재와 발전을 위한 조건이다. 노동 예비군은 어떤 농민층에서 모집되는지 살펴보았으며, 자본으로부터 노동 예비군을 준비하는 주요한 직업 유형도 제시했다.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불안정함은, 소생산자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불안정함으로부터, 이전 침체를 생산 방식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따른 급속한 변화로 대체한 점임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도 반동적인 불평을 늘 불러일으키며, 지금도 여전하다.

 

변화에 따른 한 양상으로는, 공업과 농업 분리, 농업을 짓누른 봉건적, 가부장적 체제에 따른 전통으로부터, 공업 내 사회 관계는 해방된다. 소규모 상품 생산에서 산업가는 아직은 농민이라는 껍질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여전히 농부로 남으며, 소규모 공업과 농업으로부터, 연관도 매우 심오해지며, 공업과 농업에서 소규모 생산자가 평행하게 분리되는, 법칙도 생겨난다. 소부르주아와 임금 노동자에 따른 형성은 국민 경제에서도 두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산업가가 농업과 단절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공장제 수공업 산업에서 단절은 이미 매우 상당하다.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수 많은 산업 중심지가 생겨난다. 산업 주요 대표자는 더 이상 농민이 아니라, 상인과 공장제 수공업 소유주로, 수공업자들이다. 산업과 세계 다른 지역과 비교적 발달된 상업 교류로는 국민 생활 수준과 문화도 향상시켰지만, 농민은 이제 공장제 수공업 노동자들에게 경멸의 대상으로 자리잡는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변화를 완성해가며, 산업과 농업을 완전히 분리시키고는, 기존 농민과 완전히 다른, 생활 방식, 가족 관계,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요구에서 더 높은 기준에서도 차이를 보이는 특수층을 형성해간다. 소규모 산업과 제조업에서는 자연적인 관계와 많은 형태에서도, 개인적인 의존이 늘 잔존하게 되며, 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전반적인 상태에서 노동자 상태를 극도로 악화시키고는, 타락시키고, 또 부패시킨다. 전국 각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밀집한 대규모 기계 산업은 자연주의(가부장주의)와 개인적 의존에 따른 잔존을 절대로 용납하지도 않으며, 과거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마저 보인다. 낡은 전통과 단절로부터, 생산을 규제하고, 공적 통제를 하고, 그 필요성까지 불러일으키는, 실질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공장이 주민 생활 조건에서 가져온 변화에 대해서 언급할 때, 여성과 청소년 생산 참가가 근본적으로 진보적으로 여기기 때문에,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한다. 자본주의 공장이 노동 인구층을 특히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만들고, 노동일을 규제하고, 단축하며, 위생적인 노동 환경을 보장이 특히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성과 청소년에게는 산업 현장 노동을 완전히 금지하거나, 그러한 노동을 배제하는 자연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반동적이고, 이상적일 뿐이다. 이전에는 가정과 가족 관계라는, 좁은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었던 층에서는, 가부장적인 고립을 파괴하고, 사회적 생산에 직접 참가시키면서부터, 대규모 기계 산업은 그들의 발전을 더욱 촉진시켰고, 또 독립성만 증대시켜간다. 자본주의 이전 관계에서 가부장적인 부동성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한 삶의 조건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인구에 따른 정착된 특성은 산업 발전에서는 처음 두 단계를 대표한다. 소농으로 남은 소규모 산업가는 농장으로부터 마을과 밀접하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장인은 대체로 제조업으로부터 형성된 작고, 고립된 산업 지역에 매여 있다. 산업 발전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에서 산업 체계 자체로는, 생산자로부터 정착되고, 고립된 상태를 방해할 만한 건 없다. 많은 산업 지역 간 교류도 드물다. 산업이 다른 지역으로 이전된다는 건, 개별 소규모 생산자들로부터 이주이며, 국토 외곽 지역에서는 새로운 소규모 산업을 설립한다.

 

반면에, 대규모 기계 산업은 필연적으로, 인구 이동성을 창출한다. 여러 지역 간 상업 교류가 크게 증가하며, 철도는 이동을 용이하게 한다. 노동 수요는 전반적으로 증가한다. 호황기에는 증가하고, 공황기에는 감소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으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대규모 기계 산업은 수 많은 새로운 산업 중심지를 창출하며, 중심지들은 전례 없는 속도로부터, 때로는 인구가 없는 곳에서도 발달해간다. 노동자들의 대량 이주 없이는 할 수 없었다. 이어서 소위 외부 비농업 산업 규모와 중요도에서는, 모스크바 젬스트보 위생 통계에 따르면, 103,175명, 공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전체 51.6%인 53,238명이 노동 지역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거의 절반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노동자 수로는 66,038명으로, 64%였다. 노동자 1/3이상이 다른 지역 출신들이었다.

 

여러 군을 비교해봤을 때, 산업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된 군 단위일수록, 현지 출신 노동자 비율은 가장 낮았다. 산업화가 저조했던 모자이스크, 볼로콜람스크 군에서는, 공장 노동자 92-93%가 해당 군 출신이었다. 반면에, 산업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된 모스크바, 콜롬나, 보고로드스크 군에서는, 현지 출신 노동자 비율이 각각 24%, 40%, 50%로 감소했다. 연구진은 '지역 내 공장 생산에서 상당한 발전은 외부 요인에 따른 유입을 촉진한다고' 도출했다. 덧붙여서, 산업 노동자 이동은 농업 노동자 이동에서도 볼 수 있는, 동일한 특징이다. 산업 노동자 역시 노동력은 초과로 공급된 지역 뿐만이 아니라, 노동력이 부족한 지역에서도 이주한다. 브로니치 지역에서 모스크바 구에서 다른 지역과 다른 구로부터, 1,125명 노동자를 유치하는 동시에, 산업화가 더 진행된 모스크바와 보고로드스크 지역에서는 1,246명 노동자를 공급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주한다는 건, 단순히 근처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일 뿐만이 아니라, 더 나은 조건에 따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기초적이라도,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상기시켜 줄 가치는 있다. 지역 일자리를 미화하고, 산업 지구 이주를 비난하고는, 자본주의가 창출한 인구 이동에 따른 점진적인 중요도를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대규모 기계 산업을 이전 형태 산업과 구분하는 특징들로는, '노동 사회화'로 요약된다. 실제로는, 거대한 국내 및 국제 시장을 대상으로 한 생산, 원자재 및 보조재 구매를 위한 전국 각지 및 여러 국가와 긴밀한 무역 관계 발전, 엄청난 기술 발전, 거대 기업으로부터 생산 및 인구 집중, 낡은 자연적인(가부장적인) 삶의 전통에 따른 해체, 인구 이동성 창출, 노동자 요구 수준 및 발전 수준 향상 등 모두 국내 생산과 더불어 생산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더욱 더 사회화시키는 자본주의적인 과정 요소들이다.

 

대규모 기계 산업과 자본주의 국내 시장에 따른 관계 문제에서도, 공장 산업에 따른 급속한 발전은 건축 자재, 연료, 금속 등 생산 수단에 대한 거대하고도, 끊임 없는 발달로부터, 시장을 창출하며, 개인 소비가 아닌 생산적 소비재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 비중도 특히 빠르게 증가해간다. 그러나 개인 소비재 시장 또한 대규모 기계 산업에 따른 발달로부터, 급속하게 발전해가며, 따라서 인구 상당 수는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분야로 전환해간다. 공장 생산품에 따른 국내 시장에 대해서는, 그 시장 형성 과정으로 자세하게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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