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언어의 평등 사건

 

대회의 회의 순서로 되돌아가 보자.

 

방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한 바 있다. 즉,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심의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대회에는 매우 명확한 반『이스크라』 그룹(8표)이 분명히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이들 8표에 달하는 반『이스크라』 파를 지지하여 그 표수를 약 16 내지 18표로 늘려 줄 용의가 있는 중간적인 동요 분자들도 또한 분명하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대회에서 지나칠 정도로 극히 상세하게 토의되었던 당 내에서의 분트의 지위라는 문제는 원칙에 관한 결정의 문제가 되었고, 그 문제의 실질적 해결은 조직 문제가 심의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관련된 논점들에 대해서 대회 이전에 나온 문헌에서 상당량의 지면이 할애되었던 관계로 대회에서의 토론에서는 새로운 것들이라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라보체에 셀로』의 지지자들(마르티노프, 아키모르 그리고 브루케르)이 마르토프의 결의안 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그로부터 나오는 결 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서를 불렀다는 점이다(69, 73, 83, 86쪽).

 

분도의 지위를 심의한 후에 대회는 강령에 대한 문제로 넘어갔다. 이 토론은 주로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세부 사항의 수정에 집중되었다. 원칙 문 제에 관한 반『이스크라』파의 반대는 단지 자연발생성과 의식성이라는 유명한 문제 제기에 대해 마르티노프가 행한 공격으로서 나타났을 뿐이었다. 당연히 마르티노프는 분도파와 『라보체에 셀로』파 전원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의 반대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 사람은 바로 마르토프와 플레하노프였 다. 그런데 오늘날 『이스크라』편집국이(아마도 생각을 고쳐 먹고서) 마르티노 프 편으로 넘어가 대회에서의 자신들의 발언과는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 기봐야 할 것은? 아마도 이러한 행동은 저 유명한 ‘연속성’의 원칙과 일치 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남은 일이라고는 편집국이 이 의문을 완전하게 해명하여, 도대체 어느 정도로, 정확히 어떤 점에 관해, 또한 언제부터 마르티노프와 의견이 일치했는가!를 설명하기까지 기다리는 일뿐이다. 그 동안에 우리는 다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대회 이후에 대회에서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이야기하는, 그러한 편집국을 가진 당 기관지가 도대체 어디 있던 말인가?

 

『이스크라』를 중앙기관지로 승인하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다루었다)과 귀약에 대한 토론의 개시(이는 귀약에 관한 심의 전체와 관련하여 검토하는 것이 좀더 편리할 것이다) 부분을 건너뛰어, 이제 강령에 대한 토론 중에 나타났던 원칙상의 색채를 살펴보자. 먼저, 세부 사항이기는 하나 극히 특징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문제, 즉 비해 대표제에 대한 토론에 주목해 보자. 『유즈니 라보치』의 에고로프는 이 조항을 강령 속에 포함시키고 강령히 주장했는데, 그 주장하는 방식은 포사도프스키 동지(『이스크라』 소수파)의 ‘심각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는 발언이 당시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정도였다. 포사도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즉, 이러지러한 기본적인 민주적 원칙들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 우리의 장래 정책을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든 민주적 원칙들을 배타적으로 우리 당의 이해에 종속시켜야만 하는가? 나는 단호하게 후자를 지지한다.” 플레하노프도 포사도프스키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좀더 분명하고 강령한 어조로 “민주적 원칙들의 절대적 가치”에 반대하였으며, 그것들을 ‘추상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가설적으로는, 우리 사회민주주의자가 보통 선거권에 반대하는 경우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제공화국의 부르주아지는 귀족 출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 적이 있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상류계급이 오랫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류계급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 플레하노프의 연설은 박수와 함께 아유를 받았다. 그리고, ‘아유하지 말라’는 청중 속의 누군가의 외침을 제지하면서 플레하노프가 그들의 시위를 제지하지 말라고 동지들에게 말했을 때, 에고로프 동지는 일어나서 “그런 연설이 박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상 나는 아유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골드블라트 동지(분트 대표)와 함께 에고로프 동지는 포사도프스키와 플레하노프의 견해에 도전했다. 유감이지만, 토론은 끝났고 토론 속에서 노출되었던 이 문제도 큰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 마르토프 동지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부정하려고까지 하는 횟수고를 하고 있는 바, 그는 연맹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플레하노프의) 발언은 몇몇 대표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플레하노프 동지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출판의 자유와 같은 정치적 권리를 유린해야만 할 그러한 상황은 물론 상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면, 이 분노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플레하노프, ‘고맙소’)”(연맹 의사록, 58쪽). 이 해석은 ‘기본적 문제’에서의 ‘심각한 의견 차이’와 불일치에 대해 대회에서 포사도프스키가 행한 단정적 발언에 정면으로 모순된다. 이 기본적 문제에 대하여 대회에서 『이스크라』과 전원은 반『이스크라』적 ‘우파’의 대변자(골드블라트) 및 대회 ‘중간파’의 대변자(에고로프)에 반대하였다. 이는 사실인 바, 만약 ‘중간파’(이 단어가 온전함의 ‘공식적’ 지지자들에게는 어떤 말보다 충격을 덜 주라라 믿는다……)이 이 문제나 또는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에고로프 동지나 마흐프 동지의 입을 빌려) ‘거리없이’ 발언할 기회를 가졌더라면 심각한 의견 차이가 곧바로 나타났을 것이라고 주지 않아 단언할 수 있다.

 

의견의 차이는 ‘언어의 평등’이란 문제에서 좀더 명확히 드러났다(의사록 171쪽 이하). 이 문제에서는 토론보다도 투표의 횟수가 더 웅변적이다. 즉, 투표 횟수를 총계해 보면 16회라는 믿기 어려운 숫자를 얻는다! 무엇에 대해서 16회나 투표했던가? 성별 등등 및 언어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고 강령 속에 명문화하는 정도로 충분한가, 아니면 ‘언어의 자유’ 혹은 ‘언어의 평등’이라고 명문화하는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였다. 마르토프 동지는 연맹 대회에서 “대회의 반수가 강령위원회를 전부할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강령의 한 조항을 정식화하는 것에 대한 사소한 논쟁이 원칙상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이 에피소드를 상당히 정확하게 특징짓고 있다. 정확히 그러하였다. 충돌의 직접적인 원인은 정말로 사소했지만, 그것은 원칙의 문제가 되었고 결국은 가장 격렬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강령위원회를 ‘전 복하려고 기도한다든가, 대회를 오도하라 한다’고 의심한다든가(에고로프가 마 르토프를 의심했던 것처럼!), 또 매우…… 혹독한 인신 공격을 하는 데까지 이 르렀던 것이다(178쪽). 포포포즈자 세 차례의 회의(제16회, 제17회, 제18회) 내 내 지배적이었던 “그러한 분위기가 단지 시스한 것 때문에 야기된 사실에 유 감을 표했다”(나의 강조, 182쪽).

 

이 모든 언급들은 극히 중요한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단정적으로 나타내 고 있다. 그것은 ‘의심’의 분위기 또는 가장 격렬한 형태의 충돌(‘전복’)의 분 위기——나중에 연맹 대회에서는 이것에 대해 ‘이스크라, 다수파가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는 사실상 우리가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되기 힘썼 다. 현실적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하고도 근본 적인 사실인 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 연고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대회말에 생겨난 다수파는 인위적인 것이었다는 경험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대회 대표의 심층발구가 ‘이스크라,파였다고 단언하는 오늘날의 마르토프 동지의 관점에서 보면, ‘단지 시스한 것’ 또는 ‘하찮은’ 동기가 곧 ‘원칙의 문제’가 되 어 거의 대회 소위원회의 전복으로까지 나아갔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설명이 불가능하며 불합리한 것이다. 통지가 ‘해로웠다’고 탄 신하고 후회하면서 이 사실을 회피하려는 것이야말로 우스운 것이다. 어떠한 신발한 통지도 원칙적 의의를 갖는 충돌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오 로지 대회에서의 파벌 분립이 지닌 정치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충돌을 야 기했던 것은 신발한 비난이나 통지가 아니었다. 신발한 비난이나 통지는, 단 지 대회에서의 정치적 파벌 분립 그 자체에 ‘모순’이 있고 충돌의 모든 기초 가 있다는 사실, 또한 가장 작은 동기나 가장 시스한 일에서조차 내재적 힘 을 갖고 폭발해 나올 내재 이질성이 있다는 사실의 징후에 불과하였다.

 

이에 반하여, 내가 대회를 고찰하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설령 그 해석이 어떤 사람으로서는 모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할지라도 사건들에 대한 일정한 정치적 해석으로서 이러한 관점을 주장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 —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격렬하고도 침해한 원칙상의 충돌이 ‘사소한’ 동기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설명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다. 대회 기간 내내 『이스크라』파와 반『이스크라』파 간에 투쟁이 계속되었다. 양 진영 사이에 동요 분자가 있었으며 이 분자들이 반『이스크라』파와 함께 투표 수의 삼분의 일(8+10=18, 물론 나의 계산에 따른 근사치로 서 5표의 1/3)을 정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스크라』파로부터 아무리 작은 소수가 떨어져 나간다고 해도 반『이스크라』적 경향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따라서 ‘광포한’ 투쟁이 일어났던 것은 매우 명확하고도 당연한 바라 하겠다. 이것은 부적절하고 신발한 비난이나 공격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적 파별 대립의 결과였다. 신발한 비난이 정치적 충돌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반대 로 대회의 파별 분립 바로 그 속에 존재하는 정치적 충돌이 신발한 비난과 공격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이 대조되는 두 문구 속에, 대회의 정치적 의미와 결과를 평가하는 데서 마르토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원칙적 불일치가 잘 표현되고 있다.

 

대회 전기간을 통하여 『이스크라』파의 소수파가 그 다수파로부터 이탈한 경우는 크게 세 번 — 언어 평등의 문제, 규약 제1조, 그리고 선거 — 있었다. 세 경우 모두 격렬한 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이것이 오늘날 우리 당 내의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와 투쟁을 정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온당치 못한 중지나 어찌나 하고 떠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대회에 서 충돌했던 다양한 정치적 색채들간의 파별 분립을 고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언어의 평등’ 사건은 분열의 원인을 밝혀 내려는 한에서 흥미를 배가시킨 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마르토프는 (그때까지는) 『이스크라』파였으며, 반『이 스크라』파와 ‘중간파’에 대항하여 아마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열렬하게 써졌기 때문이다.

 

싸움은 마르토프 동지와 분트파의 지도자인 리베르 동지 사이의 논쟁으로 시작되었다(171~172쪽). 마르토프는 ‘시민의 평등’이라는 요구로 충분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언어의 자유’는 기각되었지만, 즉각 ‘언어의 평등’이 제기되었다. 싸움 중에 에고로프 동지가 리베르에게 가세했다. 마르토프는 “발언자들이 민족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불평등을 언어의 영역으로 전환시키려는 것은” 바로 물신승배이며, “이 문제는 정반대의 각도에서 고찰되어야만 한다. 즉, 민족간에 불평등이 존재하며, 어떤 민족에 속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은 이 불평등의 한 표현이다” 하고 주장했다 (172쪽). 이 점에서 마르토프는 절대적으로 옳았다. 리베르와 에고로프가 자신들의 정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편 우리가 민족 평등의 원칙을 관찰시키려 하지 않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한 것은 근거 없는 시도였으며, 사실상 일종의 물신승배라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물신승배자’와 마찬가지로 원칙이 아니라 말을 옹호하고 있었고, 원칙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행동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행동했던 것이다. 조직위원회 사건과 관련해서 이미 지적했던 바 있는 이런 견실하지 못한 심리(즉,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사면 어쩌지?)가 여기서 우리의 ‘중간파’ 전체에게 매우 분명하게 나타났다. 중간파의 또 다른 대표자로서 『유즈니 라보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광산 지역 대표 르포프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변방 지역에서 제기되어 온 언어의 박해 문제는 매우 중대한 것이다. 우리의 강령에 언어에 관한 조항을 포함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화의 경향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어떤 의구심도 완전히 일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중대하다’는 것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증이다. 매우 중대하다 — 변방 지역에서의 의구심을 일소해야 하기 때문에! 발언자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물신승배라는 비난에 대해 반박하기는 커녕 전적으로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의 논리를 전혀 내세우지 못한 채 단지 변방 지역에서 이러 콩저러콩 불평할지도 모른다며 얼버무리고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러 콩저 러콩할지도 모르는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라고 이 발언자에게 말해도, 그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토해 보지도 않고서 ‘그들이 의심할지 모른다’고 응 답하는 것이다.

 

문제가 중대하고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아울러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참으로 원칙적 쟁점을 내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리베르, 에고로 프, 르포프와 같은 자들이 거기서 구별해 내려 했던 그런 원칙은 결코 아니었 다. 그 원칙적 쟁점은 다음과 같다. 강령의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명제들을 특 수한 조건에 적용하며 또한 그런 적용을 위해 이 명제들을 발전시키는 임무를 당 조직 및 당원들에게 맡겨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의심발을까 두려워 강령을 사소한 세부 사항, 잡다한 지시, 중복, 결의론(決疑論)15)으로 략 채워야 하는가? 또한 다음과 같은 원칙 문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어찌하여 사회 민주주의자란 사람이 결의론과의 싸움을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할(즉 ‘의심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쯤에야 우리는 결의론에 대한 이러한 물신승배적 찬양과 최종적으로 결별하게 될 것인가? — 바로 이것이 ‘언어’를 둘러싸고 벌어진 투쟁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뇌리에 불현 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기명 투표가 여러 번 행해졌던 관계로 이 투쟁에서 대표들의 파별 분립은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제에 관해 모두 세 번의 기명 투표가 있었는데, 시종일판 반『이스크라』과 전원(8표) 및 극히 작은 변동이 있었지만 중간파 전체(마호프, 르포프, 에고로프, 이바노프, 케로프, 벨로프 — 단지 마지막 두 사람만이 초기에 동요하여 기권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투표하기도 했는데, 이들 이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결정한 것은 3차 투표에 와서였다)는 일치단결하여 『이스크라』과의 핵심에 반대하였다. 『이스크라』과 중에서 몇몇 — 주로 카프카즈 대표(3명으로서 6표를 가지고 있었다) — 이 이탈했고, 이 때문에 결국 ‘물신승배적’ 경향이 우세하게 되었다. 양 경향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태도를 가장 명확하게 밝힌 3차 투표에서, 도합 6표를 가진 3명의 카프카즈 대표가 『이스크라』 다수파에서 갈라져 나와 반대 진영으로 넘어갔으며 도합 2표를 가진 2명의 대표 — 포사도프스키와 코스티츠 — 가 『이스크라』 소수파를 이탈했다. 앞선 두 번의 투표 때에, 반대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기권했던 사람은 『이스크라』 다수파의 렌스키, 스테파노프, 고르스키 그리고 『이스크라』 소수파의 도이치였다. 『이스크라』과의 8표가 (총 33표로부터) 이탈한 것이 반『이스크라』과와 동요 분자들의 연합을 우세로 이끌었다. 정확히 이것이 규약 제1조에 대한 투표 및 선거에서 (단지 『이스크라』과의 다른 성원이 이탈한 채로) 되풀 이되었던 대화에서의 파별 분립의 기본적 실상이다. 선거에서 패배했던 자들 이 오늘날 그 패배의 정치적 원인에 대해, 또한 여러 섹체간 충돌 — 이 충돌은 정치적으로 무정전한 동요하는 분자들을 당 앞에 점점 확실하게 드러났으며 더욱더 가치없이 폭로하였다 — 의 출발점에 대해 애써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언어의 평등 사건은 이런 충돌을 좀더 명확히 보여주는 바, 당시에는 마르토프 동지도 아직 아키모프와 마호프의 칭찬과 찬동을 받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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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해체

 

조직위원회 문제에서 나타난 대의원들의 배열은 아마도 우연한 일로 보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틀린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적 순서 를 벗어나 이제 대회의 끝무렵에 일어난, 그러나 조금 전에 검토한 문제와 매 우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이란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해체 건이다. 여기서 『이스크라』의 조직 방침 — 당 내 세력들의 완전한 통합 및 이를 분열시키고 있는 흔한의 제거 — 은, 실질적 당이 없었을 때에는 유 익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제 활동이 중앙집권화됨에 따라 쌓은 없게 되어 버린 여러 그룹 가운데 하나의 이해관계와 충돌했던 것이다. 써클적 이해라는 관점 에서 볼 때, 『유즈니 라보치』 그룹은 『이스크라』의 구편집국12)만큼이나 ‘연속 성’과 불가침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당의 이익을 위해서, 이 그룹 은 자신의 세력을 ‘적절한 당 조직’에 이양하는 데 복종해야만 했다(313쪽, 대 회에서 채택된 결의의 말미). 써클적 이해관계와 ‘속물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크라』의 구편집국이 해체를 원하지 않았던 것과 동일하게 자신의 해체를 원하지 않았던 유익한 그룹의 해체는 ‘패나 까다로운 문제’(루소프와 도이치가 사용한 표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해체 곧 당으로의 ‘흡수’(구세프의 표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유즈니 라보치』 그룹은 자파의 해체를 선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통명스럽게 밝힌 뒤에, “대회가 자신의 의견을 명백하게 선언할” 것과 또한 그것을 “즉각, 예 혹은 아니오”로 선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유즈니 라보치』 그룹은 ‘연속성’ — 『이스크라』 구편집국이 그 해체 후에 …… 내세우기 시작했던 바로 그 연속성 — 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에고로프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하나의 당에 소속되지만 그럼에도 당은 역사적 실재로서 고려되어야만 하는 여러 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다. …… 만약 그런 조직이 당에 유해하지 않다면 그것을 해체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중요한 원칙 문제가 매우 명확히 제기되었고, 『이스크라』는 전원이 — 자기 자신의 써를적 이해가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 동요 분자들에 대해 명확히 반대 입장을 취했다(본토파와 2명의 『라보체에 젤로』과는 이미 대화에서 퇴장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들은 “역사적 실재를 고려해 낳는 것”에 전적으로 찬성했으리라). 투표 결과는 찬성 31표, 반대 5표, 그리고 기권 5표(『유즈니 라보치』 그룹 성원의 4표와 벨로프의 다른 1표 — 이는 이전의 그의 발언으로부터 판단하던데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308쪽)였다. 『이스크라』의 일관된 조직 계획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또한 당 정신에 반대하여 써를 근성을 옹호하려 한 10표에 달하는 그룹이 여기서 매우 정확하게 식별되고 있다. 토론에서 『이스크라』과는 이 문제를 정확하게 원칙적 관점에서 제기하였다(315쪽의 당개의 연설을 보라). 즉, 지방적 수공업성과 분산성에 반대하고, 개개 조직의 ‘공감’을 얻으며 애쓰는 것을 거부하면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유즈니 라보치』의 동지들이 좀더 일찍, 1, 2년 전에 좀더 확고하게 원칙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면, 당의 통일 및 여기서 우리가 비준한 강령 원칙의 승리는 좀더 빨리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오름로프, 구세프, 리아 도프, 무라비오프, 루소프, 파블로비치, 글레보프 그리고 고린은 모두 이런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여기서 『이스크라』 ‘소수파’는 대화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이러한 명확한 지적 — 『유즈니 라보치』와 마호프 및 다른 사람들의 정체화 ‘노선’에 원칙이 결핍되어 있다는 지적 — 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이 점에 대해 어떤 유보 조항도 달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도이치의 입을 빌려 이러한 지적에 단호하게 찬의를 표명하였고, ‘혼돈’을 비난하였으며, 루소프의 ‘솔직한 문제 제기’(315쪽)를 환영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루소프가 이 동일한 회의에서 대답하게도 — 아이고, 무서워라! — 구편집국의 문제 역시 순전히 당적 기반 위에서 ‘솔직하게 제기하였던’ 것이다(325쪽).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해체안은 이 그룹에 격렬한 분노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분노의 흔적을 의사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의사록은 단지 논쟁의 회미한 영상을 전해 줄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연설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극도로 축약된 요지와 발췌만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로프는, 단지 『유즈니 라보치』와 나란히 『라보차야 미출』13) 그룹의 이름을 들었을 뿐인 때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일관된 경제주의에 대하여 대화에서 어떤 때도가 지배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훨씬 뒤인 37회 회의에서조차 에고로프는 극도로 분노한 채 『유즈니 라보치』의 해체 건에 대해 발언하였다(356쪽). 이 때 그는 『유즈니 라보치』에 대한 토의시에, 출판 기금에 대해서도, 중앙기관지와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받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 그룹 성원에게 누구 하나 의논해 온 적이 없었음을 의사록에 기록하려고 요구했다. 『유즈니 라보치』에 대한 논쟁 중에 포포프는, 결속한 다수파가 있어 이 그룹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였다고 암시하였다. “구세프와 오름로프의 연설을 듣고 난 후인 지금, 모든 것은 분명하다”고 그는 말하였다(316쪽).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이스크라』파가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고 결의를 제출한 이상 모든 것은 명백해졌다는 것이다. 즉, 『유즈니 라보치』 그룹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해체될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즈니 라보치』의 대표자 스스로가 『이스크라』파와(더구나 구세프나 오름로프 같은 『이스크라』파와) 자신의 지지자들이 조직 정책상의 상이한 ‘노선’을 대표하고 있다고 구별지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스크라』가 『유즈니 라보치』 그룹을(그리고 아마 마호프까지도?) ‘전형적인 『이스크라』파’로 내세웠을 때, 이는 신편집국이 대화의 가장 중요한(이 그룹의 관점에서 보아) 사건을 잊고 있음을, 또한 어떤 분자들이 소위 ‘소수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를 없애려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데 불과하다.

 

유감스럽게도 대중적 정기 간행물의 문제는 대화에서 심의되지 않았다. 『이스크라』파 전원은 대화 전에 또 대화 중에도 회의 시간 외에 매우 활발하게 이 문제를 토의하였고, 그 결과 대중적 정기 간행물의 발행에 착수하거나 기존의 정기 간행물 가운데 하나를 그러한 간행물로 전환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당 생활의 현 시기에서 극히 불합리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반『이스크라』파는 대화에서 반대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유즈니 라보치』 그룹도 그들의 보고에서 동일한 생각을 표현했다. 따라서 이러한 취지의 결의안이 10인의 서명으로 제출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우연이거나 혹은 ‘가방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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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회의 개시 — 조직위원회 사건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다양한 정치적 세력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회에서의 토론과 표결을 분석하는 데 대회의 회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그러나 밀접히 관련된 문제들 혹은 유사한 파벌 분합을 함께 고찰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시간적 순서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공평을 기하기 위해서 중요한 투표 모두를 언급하도록 하겠다. 물론, 대회에서 시간을 엄청나게 차지한(부분적으로는 우리가 경험이 없었고 안건들을 본회의와 분과회의로 나누는 데 비능률적이었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의사진행 방해와 유사한 지체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소한 문제들에 대한 수많은 투표는 제외하겠다.

 

다양한 색채의 차이를 드러내기 시작한 논쟁을 야기했던 첫 번째 문제는 ‘당 내에서의 분트’의 지위라는 안건을 (대회의 ‘의사일정’에서) 첫머리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의사록 29~33쪽).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그리고 나 자신이 옹호한 『이스크라』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점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분트파가 당으로부터 퇴장한 사실은 우리의 견해가 옳았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만일 분트가 우리와 같이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당의 다수가 『이스크라』에 동조하여 지지하는 조직 원칙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믿게 만든’ 채로 단지 대회를 질질 끌게 되는 것은 (분트파가 실제로 대회를 질질 끌었던 것처럼)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미 문헌상에서 충분히 해명되어 있었고, 따라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당원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여 자치(같은 길을 걷는 것)나 연방(같아서는 것)이나를 솔직하고 성실하게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자신들의 정책 일반에서 애매한 분트파는 여기서도 역시 애매한 태도로 문제를 연기하려고 하였다. 이들에게 아키모프 동지가 가세했는데, 그는 명백히 『라보체에 젤로』의 모든 추종자들을 대표하여 조직 문제에 대한 『이스크라』와의 의견 차이를 문제로 들고 나왔다(의사록 31쪽). 분트와 『라보체에 젤로』파를 마흐프 동지가 지지했다(그는 니콜라에프 위원회의 2표를 대표하고 있었는데, 이 위원회는 조금 전까지도 『이스크라』와의 연대를 표명했다). 마흐프 동지에게도 역시 이 문제가 전혀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민주적 체제나, 아니면 반대로[이 점에 주의하라]! 중앙집권제나 하는 문제”가 또 하나의 ‘금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와 똑같이 현재 우리 ‘당’ 편집국의 대다수도 대회 때는 모르고 있다가 이제 이 ‘금소’를 깨달았다!

 

이리하여 『이스크라』파는 분트, 『라보체에 젤로』 그리고 마흐프의 반대를 받게 되었고, 이들은 합심하여 자신들이 갖고 있던 10표를 반대표로 던졌다 (의사록 33쪽). 30표가 찬성표였는데, 나중에 보게 되듯이 『이스크라』파의 표수는 이 숫자를 중심으로 자주 오르내렸다. 결국 11표가 기권이었는데, 이들은 투쟁 중인 ‘양 진영’의 어느 편에도 명백하게 가담하지 않았다. 분트의 규약 제2조)에 대한 투표를 했을 때(당에서 분트가 퇴장하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 제2조의 부결이었다)도 역시 찬성표와 기권표가 합하여 10표였다는 것과 또한 이 때의 기권자들이 3명의 『라보체에 젤로』파(브루케르, 마르티노프, 아키모프)와 마흐프 동지였다는 것은 흥미롭다(의사록 289쪽). 분트 문제를 의사일정에서 어느 순서에 들 것인가에 대한 표결에서 파벌 분립이 이루어진 것은 확실히 우연히 아니다. 명백히 이들 모든 동지들은 심의 순서라는 기술적인 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점에서도 『이스크라』와 달랐다. 『라보체에 젤로』의 경우에는 본질상의 이 차이는 누구에게나 분명하였다. 반면에 마흐프 동지는 분트의 퇴장에 대해 행한 연설에서(의사록 289~290쪽) 자신의 태도를 비할 때 없이 잘 표현하였는 바, 이 연설은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흐프 동지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연방제를 거부하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상,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의 분트의 지위 문제는 나에게 더 이상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발전한 민족 조직에 관련한 실천적 정책의 문제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여기서 나는 우리의 표결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모든 결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제2조 전체에 대해 찬성 투표를 하려 했다.” 마흐프 동지는 ‘실천적 정책’의 정신을 놀라우리만큼 잘 이해하고 있구나. 원칙적으로 이미 연방제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실천에서는 연방제를 의미하는 내용의 조항을 규약에 포함시키는 것에 찬성하려 했다. 그리고 이 ‘실천적’ 동지는 자신의 심오한 원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나 [저 유명한 쉬체드린의 ‘그러나’이다] 다른 모든 대회 참가자들이 거의 일치하여 투표한 이상, 내가 찬성 투표를 하는가 반대 투표를 하는가는 원칙[!!]상의 의의만을 가질 뿐 아무런 실천적 중요성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기권하는 것이 낫다고 여겼는데, 그것은 원칙적으로[신이여, 그러한 원칙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입장과 찬성 투표한 분트 대표들의 입장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거꾸로, 분트 대표들이 그들이 처음에 고집했던 대로 기권했다면 나는 찬성 투표를 했을 것이다.” 도대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원칙적인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아니오’ 하면 ‘예’ 하고 고함쳐 보았자 실천적으로 소용이 없기 때문에 기권한다는 것이다.

 

분트 문제의 의사일정에서의 위치에 대한 표결 이후에, 보르바 그룹[10)]에 대한 문제가 대회에 등장했다. 이것 역시 극히 흥미로운 파벌 분립을 가져왔는데, 이는 대회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즉 중앙기관들의 인선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대회의 구성을 결정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회[자격심사위원회 — 편집자]는, 조직위원회의 두 차례의 결정(의사록 383쪽과 375쪽을 참조)과 이 위원회에서 행해진 조직위원회 대표들의 보고에 따라서 보르바 그룹의 초청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조직위원회의 위원인 에고로프는 ‘보르바에 대한 문제’(보르바에 대한 것이지 그 그룹의 특별한 몇몇 성원에 대한 것이 아님을 주의하라)가 ‘그에게는 새로운 것’이라면서 휴회를 요구했다. 조직위원회가 두 차례나 결의했던 문제가 어떻게 해서 조직위원회 위원에게 새로운 것이었는지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휴회 중에 조직위원회는 모임을 가졌는데(의사록 40쪽), 이 모임에는 대회에 참가하고 있던 조직위원들만이 참석하였다(7)이스크라. 조직을 대표하였던 몇몇 조직위원회 위원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대회가 속개되고 — 편집자] 보르바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라보체에 켈로, 파는 찬성하는 발언을 하였고(마르티노프, 아키모프, 그리고 브루케르 — 36~38쪽), [『이스크라』파는(파블로비치[크라시코프의 가명 — 편집자], 소로킨[바우만의 가명 — 편집자]), 랑게[스토파니의 가명 — 편집자], 트로츠키, 마르토프 등등) 반대 발언을 했다. 또다시 대화는 이미 우리에게 낮은 분파로 나뉘어졌다. 보르바 문제를 들러낸 후쟁은 격렬하였으며, 마르토프 등지는 매우 상세하고도(38쪽) ‘전투적인’ 연설을 하였다. 거기서 그는 러시아 국내와 국외 그룹들의 ‘대표 선출권의 불평등’을 적절하게 지적하면서 국외 그룹에게 어떤 ‘특권’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좋지’ 못할 것이며(이는 대화 이후에 발언된 사건들을 볼 때 오늘날 특히 교훈적인 금언이다!), 또한 “어떠한 원칙적 고려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분열로 특정지어졌던 당 내의 조직적 흐린”을 고무해서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당 대화의 ‘소수파’에게 주는 일격이다!). 『라보체에 셀로』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발언 신청이 마감될 때까지 공공연하게 그리고 합리적 이유를 들어 보르바를 지지한 사람은 없었다(40쪽). 공정하게 말해서 아키모프와 그의 동료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노선을 일바퀴지거나 감추지 않고 공공연하게 웅호하였으며 그들이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했다.

 

발언 신청이 마감된 후에, 즉 이미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순서가 지나갔을 때 에고로프 등지는 “조직위원회에서 방금 채택된 결정을 청취할 것을 완정하게 요구했다.” 대표들이 이런 책동에 분노하고 또한 의장인 플레하노프가 “에고로프 등지가 자신의 요구를 고집하다니 놀랍다”고 당혹감을 표현한 것은 당연했다. 두 가지 중 하나여야 했을 것이다. 즉, 논쟁 중인 문제에 대해 대화 전체 성원 앞에서 공개적이고 확고한 입장을 취하든가, 혹은 일절 언급을 하지 않든가. 그러나 발언자를 마감할 것에 동의하고 나서 ‘논쟁에 대한 회담’인 것처럼 가정하여, 논쟁 중이었던 바로 그 주제에 대한 조직위원회의 새로운 결정을 대화에 제출하는 것은 배반 행위나 다름없었다!

 

식사 후에 대화가 속개되었을 때도 의장단은 여전히 당황해하고 있었고, 결국 ‘정규 절차’를 떠나 대화에서는 이례적인 경우에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 즉 ‘동지적 설명’(comradely explanation)이라는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직위원회의 대표인 포포프가 위원회의 결정을 알려 주었는데, 그 결정은 파블로비치 한 사람이 반대하고 다른 모든 위원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서(43쪽), 라이자노프를[개인 자격으로 — 편집자] 초청할 것을 대화에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파블로비치는 자신이 조직위원회 모임의 적법성을 부인했으며 계속 부인하고 있다고, 그리고 위원회의 새 결정은 “동 위원회의 이전 결정에 위배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대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조직위원회의 위원이자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일원인 에고로프 동지는 문제의 실질적인 요점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규율의 문제에 중점을 두려 하였다. 즉, 조직위원회가 파블로비치의 이의를 토론한 후 “대회에 파블로비치의 이견을 전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기 때문에 파블로비치 동지는 당의 규율을 위반하였다(!)는 것이다. 토론은 당 규율의 문제로 넘어갔다. 플레하노프는 대표들의 박수갑제를 받으며 “우리들 사이에 구속적 위임은 없다”고 에고로프 동지에게 깨우쳐 주었다(42쪽, 372쪽의 대회 규정 제7조: “대표들의 권한을 구속적 위임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하는 데 대표들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다”를 참조하라). “대회는 최고의 당 기관이다.” 그러므로 결국 당 활동에 관한 어떠한 문제라도 대표가 대회에 직접 제기하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제한하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당 규율과 대회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 논쟁점은 써를 근성이나 아니면 당 정신이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귀착 되었다. 다양한 협의체나 써를들의 가상의 권리 또는 규약 때문에 대표들의 권리가 대회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참된 당 공식 기구를 창립하는 마당에 대회의 면전에서 모든 하급 기관들과 낡은 그룹들이 완전히 — 명목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 헤산되어야 하는가? 여기서 독자들은 당을 실질적으로 복구한다는 목적을 가진 이번 대회의 바로 초기(제3회 회의)에서 벌어 진 이 논쟁이 원칙적 관점에서 얼마나 심대한 중요성을 갖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낡은 써를 및 소그룹들(『유즈니 라보치』 같은)과 재건되는 당 사이의 갈등이 이 논쟁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반『이스크라』 그룹들은 곧 그 정체를 드러냈다. 분트파의 아브람슨, 현 『이스크라』 편집국의 열렬한 동맹자인 마르티노프 동지, 그리고 우리의 절친한 마호프 동지는 모두, 파블로비치에 반대한 에고로프와 유즈니 그룹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늘날 조직에서의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마르토프와 악셀로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마르티노프는, …… 상급 기관에 올리는 호소가 하급 기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군대를 예로 들기조차 했다! 이렇게 ‘결속된’ 반『이스크라』적 반대파의 진정한 의도는, 대회에 참석하였거나 대회 이전의 당 내부 역사를 주의 깊게 추적해 온 모든 사람에게 매우 분명한 것이었다. 반대파의 임무(아마도 반대파의 모든 대표가 가 늘 이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때때로 타성의 힘에 의해 추구되었을 임무)는 협소한 소그룹의 독립성, 개별성, 분파적 이해가 『이스크라』의 원칙에 기초하여 건설되어 가는 광범위한 당 속에 흡수되어 버리지 않도록 수호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마르티노프와 손을 잡지 않았던 마르토프 동지도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각도에서 문제에 접근하였다. 마르토프 동지는 “혁명가에게 당규율은 자신이 소속한 하급의 개별 그룹에 대한 의무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정력적으로 또 매우 올바르게 써졌다. “하나의 통일된 당 내에서, 강제력을 갖는[마르토프의 강조] 그룹을 만드는 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 그는 써를 근성의 옹호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회 끝부터, 또한 그 이후의 자기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바로 이 말들에 의해 규탄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강제력을 갖는 그룹을 만드는 것이 조직위원회의 경우에는 허용될 수 없으나 편집국의 경우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마르토프는 자신이 중앙의 위치에서 바라볼 때에는 강제력을 갖는 그룹을 결연히 비난했지만, 중앙의 구성이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하게 되는 순간 거꾸로 그것을 옹호한다.

 

흥미를 끄는 것은, 마르토프 동지가 자신의 연설에서 애고로프 동지의 ‘심대한 오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조직위원회가 보여주었던 정치적 동요에 대해서도 특별히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위원회[자격심사위원회 — 편집자]의 보고서[참여한편 조직위원회 위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작성된 — 43쪽, 클로프의 언급] 및 조직위원회 자신의 이진 권고에 배치되는[나의 강조] 권고안이 조직위원회의 이름을 빌려 제출되었다”고 그는 정당한 분노를 표명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환’하기 전인 그 당시의 마르토프는 보르바를 리아자노프로 바쳤다고 해서 조직위원회의 행동이 보여준 전적인 모습과 비일관성이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당원들은 연맹 대회 의사록 57 쪽을 보면 마르토프가 전환한 후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마르토프는 규율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무독독하게 “변경[나의 강조]을 필요하게 만든 새로운 사정이 무엇이오?” 하고 조직위원회에게 물었다. 실제로 조직위원회는 스스로가 권고안을 써드린 서도 아키모르나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공공연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용기조차 없었다. [지금 — 편집자] 마르토프는 이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연맹 의사록 56쪽),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대회 의사록을 보는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이다. 포로프는 조직위원회의 권고안을 제출하면서도 그 제안 이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당 대회 의사록 41쪽). 에고로프는 문제를 규율의 문제로 바꾸었고, 본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전부였다. 즉 “조직위원회에 새로운 이유가 생겼을지도 모르며[그러나 그랬는지 어떻는지, 또 그 이유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혹은 조직위원회가 누군가를 추천하는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등[이 ‘등등’이란 표현은 이 발언자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왜냐하면 조직위원회가 자신이 대회 이전에 두 면, 위원회에서 한 번 토의했던 보르바 문제를 잊어버릴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위원회가 이 결정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보르바 그룹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당의 활동이 시작되는 초기에 당의 장래 중앙조직의 앞길에 놓여 있는 불필요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유를 회피하는 것이다. 성실한 사회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우리는 대회 참가자 누구에 대해서도 그 성실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이 장애물로 여기는 것을 제거하는 데, 또한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제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사물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명백하게 표현하고 해설하는 것이지 누구에게나 뻔한 사실을 주위성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보르바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이전의 상반된 결정에서 조직위원회는 바로 정반대의 것을 ‘암초’라 여기고 그것을 제거하는 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르토프는 이러한 논리가 ‘정점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시시한 변명’이라고 매우 신할하게 정면으로 공격하면서, 조직위원회에 대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무려워 말라”고 충고하였다. 이 말은 대회에서 매우 커다란 역할을 연출했던 정치적 색채——자주성의 결여, 소심성, 자기 노선의 부재,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 두려워하는 태도, 명백한 양 진영 사이에서 끊임없는 동요, 자신의 신조를 당당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태도, 즉 한 마디로 전형적인 ‘높지 근성’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색채——의 본질적 성격을 완벽하게 특정짓고 있다.

 

동요하는 그룹의 이러한 정치적 무정견 때문에 결국 분트파의 유인을 제외하고는(53쪽) 어느 누구도 보트바 그룹 가운데 한 사람[단, 개인 자격으로 -편집자]을 초청하자는 결의안을 대회에 제출하지 못하였다. 유인의 결의안은 5표를 얻었는데 분명히 모두 분트파였을 것이다. 동요 분자들은 또다시 편을 바꾸었다! 중간파의 표 수가 대략 어느 정도의 크기였는가, 이 문제에 대한 콜초프의 결의안[보트바 그룹의 대표를 초청하는 것에 반대한 자격심사위원회 다수파의 결의안 -편집자]과 유인의 결의안[보트바 그룹의 대표를 초청하는 것에 찬성한 자격심사위원회 내 소수파의 대항 결의안 -편집자]의 표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크라』과는 32표를 얻었고(47쪽), 분트파는 16표, 즉 반『이스크라』과의 8표에 마호프의 2표, 『유즈니 라보치』 그룹의 4표 그리고 다른 2표를 더한 표수를 얻었다(46쪽). 이러한 배분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음을 곧 증명해 보이겠다. 그러나 먼저 이 조직위원회 사건에 대한 마르토프의 현재 의견에 잠시 눈을 돌려 보자. 마르토프는 연맹에서, “파블로비치와 다른 사람들이 분노를 부재질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회 의사록을 참조하기만 해도 즉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보트바와 조직위원회에 반대해서 가장 길고 가장 열매게 그리고 가장 날카롭게 연설한 사람은 마르토프 자신이었다. 파블로비치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자신의 동요를 입증할 뿐이다. 마르토프는 대회 이전에는 다름아닌 파블로비치가 일곱 번째 편집국원으로 선출되게끔 조력하였으며, 대회에서는 에고로프에 반대하여 파블로비치와 완전히 손을 잡았다(44쪽). 그러나 나중에 파블로비치의 손에 패배를 당하고 나자 ‘분노를 부재질했다’고 파블로비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옷기는 일이다.

 

마르토프는 『이스크라』(56호)에서, 갑을 초청할 것인가 울을 초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중대한 의의가 부여되는 것에 대해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소는 또다시 마르토프에게로 되돌려진다. 왜냐하면 중앙위원회나 중앙기관지에 갑을 초청할 것인가 울을 초청할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돌려받는 것의 발달이 된 것은 바로 이 조직위원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자신이 소속한 ‘하급 그룹’(당에 대하여)에 관계되는가 다른 사람이 소속한 ‘하급 그룹’에 관계되는가에 따라서 다른 척도로 판단하는 것은 몰사나운 것이다. 이런 것이아말로 속물 근성이고 써클주의이지 당적 태도는 아니다. 마르토프가 연맹에서 한 연설(57쪽)과 대회에서 한 연설(44쪽)을 단순 비교하기만 해도 이 점은 충분히 입증된다. 마르토프는 연맹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스 로를 ‘이스크라’과 부르면서도 동시에 ‘이스크라’과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 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니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그는 ‘자처하는 바’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과의 차이, 즉 말과 행동의 차이를 기댐하게 몰이해하 고 있다. 마르토프 그 자신이 대회에서는 강제력을 갖는 파벌의 적대자임을 자처했지만, 대회 이후에는 실제 그 옹호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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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회에서의 다양한 파벌 분립의 의의

 

이처럼 대회는 가장 면밀하게 준비된 후에 가장 공정한 대표 선출 방식을 거쳐서 소집되었다. 대회의 구성이 정당했고 대회의 결정이 절대적 구속력을 갖는다는 점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대회가 성립된 이후의 의장의 성명(의사록 54쪽) 속에도 나타나 있다.

 

대회의 주요한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이스크라』가 제창하고 확립한 원칙과 조직 사상에 기초하여 실질적인 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대회가 반드시 이 방향성에 입각하여 작업해야 한다는 것은 『이스크라』의 3년 동안의 활동과 대다수 위원회가 『이스크라』를 승인한 사실로 미리 결정되어 있었다. 『이스크라』의 강령과 경향은 당의 강령과 경향이 되어야 했으며 『이스크라』의 조직 계획은 당의 조직 규약으로 구체화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이 뚜렷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표 선출 방식은 매우 공정했기 때문에, 대회에는 『이스크라』에 대항해 고집스럽게 싸워 온 조직들(분트와 『라보체에 젤로』)과 말로는 『이스크라』를 지도적 기관지로 인정하나 실제로는 독자 계획을 추진하며 원칙의 문제에서도 불안정한 조직들(『유즈니 라보치』 그룹과 이와 긴밀히 관계하고 있는 몇몇 위원회의 대표들)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대회는 『이스크라』 경향의 심리를 위한 투쟁의 무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가 실제로 그러한 무대로 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주의를 갖고서 의사록을 읽어 보면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대회에서 여러 가지 논점을 둘러싸고 나타났던 주요한 파벌 분립들을 세밀히 추적하고, 의사록의 정밀한 자료를 근거로 각 주요 그룹의 정치적 특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대회에서 『이스크라』의 지도 하에 단일의 당으로 통합되어야 했을 이들 그룹들과 그 경향 및 정치적 색채들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토론과 표결의 분석을 통해 밝혀야 할 내용이다. 이의 해명은,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데서도, 또한 그들 사이의 분열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연맹[러시아혁명적사회민주주의해외연맹 — 편집자] 대회에서 행한 나의 연설에서도, 또한 신『이스크라』 편집진에 보낸 나의 편지에서도 다양한 파벌 분립의 분석에 우선을 두었다. 나에 대해 적대적인 ‘소수파’들(마르토프를 필두로 하는)은 문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연맹 대회에서 그들은 기회주의로 들어갔다는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하여 자질구레한 것들을 수정하기만 했고, 대회에서의 파벌 분립에 대한 나의 그림에 대항할 만한 다른 어떤 그림도 제시하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마르토프는 『이스크라』(제56호)에서 대회의 다양한 정치적 그룹들을 명확히 경계지으려는 어떤 시도도 ‘써클적 정치 술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력한 말씀이군요, 마르토프 동지! 그러나 신『이스크라』의 이 강력한 말은 특이한 성질을 갖고 있다. 즉, 대회 이래의 모든 불일치의 추이를 정확히 재현해 보기만 하면, 이 강력한 말은 모두 원전히 그대로 또한 우선적으로 현재의 편집국에 적용될 것이다. 써클적 정치 술수에 대해 규탄하는 소위 ‘당’ 편집국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라!

 

지금 마르토프는 대회에서 우리가 투쟁한 것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고 있는 까닭에, 그 사실을 통제로 얼버무리려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스크라』파란, 대회에서 그리고 당 대회 이전에, 『이스크라』와의 완전한 연대를 표명하고 『이스크라』의 강령 및 조직상의 견해를 옹호하며 『이스크라』의 조직 정책을 지지한 사람이다. 대회에는 40명이 넘는 『이스크라』파가 있었으며, 이 수만큼 『이스크라』의 강령 및 『이스크라』를 중앙기관지로 승인하는 결의에 찬성표가 단계였다.” 대회 의사록(233쪽)을 펼쳐 보면, 기관한 아키모프를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강령이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마르토프는, 분트파와 브루케르 그리고 마르티노프가 『이스크라』와의 ‘완전한 연대’를 표명했으며 조직에 대한 『이스크라』의 견해를 옹호했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하고 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여기서 그는 대회 후에 참가자들 모두가 동등한 당원이 되었다(모두라고 말할 수도 없다. 분트파는 도중에 퇴장했기 때문이다)는 사실과 대회에서 투쟁을 야기한 파벌 분립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다. 대회 이후 ‘다수파’와 ‘소수파’가 각각 어떠한 분자들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은 채, ‘강령을 승인했다’는 형식적인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크라』를 중앙기관지로 승인하는 안건에 대한 투표를 살펴보자. 마르티노프——마르토프 동지가 이런 것에는 아까울 정도의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주장한 바에 따르자면 『이스크라』의 조직상의 견해와 조직 정책을 옹호했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바로 그 마르티노프——가 말로, 이 안건에 대한 결의 가운데 두 부분, 즉 『이스크라』를 중앙기관지로 단순히 승인하는 부분과 그것의 공로를 인정하는 부분을 분리시켜 표결하자고 주장한 장본인이었다. 결의의 전반 부분(『이스크라』의 공로를 인정하고 『이스크라』에 연대를 표명하는 것이) 투표에 부쳐졌을 때 단지 35표만이 찬성했다. 반대는 2표(아키모프와 브루케르), 기권은 11표(마르티노프 1, 분트 5, 그리고 편집국의 5——마르토프와 내가 각각 2, 플레하노프 1)였다. 결과적으로 반『이스크라』그룹(5명의 분트파와 3명의 ‘라보체에 젤로’파)은 마르토프 자신이 현재 자신의 견해에 가장 유리한 것으로 선택한 이 예에서조차 명백히 드러난다. 결의의 후반 부분 — 아무런 제안 설명이나 연대 표명 없이 ‘이스크라’를 중앙기관지로 승인하는 부분(의사록 147쪽) — 에 대한 투표에서는 오늘날의 마르토프가 ‘이스크라’파로 분류하고 있는 44표의 찬성표가 나왔다. 투표 총수는 51표였고, 편집진의 5표는 기권했으므로 46표가 남는다. 2표가 반대(아키모프, 브루케르)였으므로 결과적으로 나머지 44표에는 분트파 5명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회에서 분트는 “『이스크라』와의 완전한 연대를 표명했다” — 이것이 공식적인 ‘이스크라’가 공식적 역사를 쓰는 방식이다! 다소 앞질러, 이 공식적 진실을 떠벌리는 진짜 이유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즉 ‘이스크라’의 현 편집국은 만일 분트파와 ‘라보체에 젤로’파가 대회에서 퇴장하지만 않았다면, 실질적인(지금 같은 준당적인 것이 아닌) 당 편집국이 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현재 소위 당 편집국의 이들 성실한 수호자들이 왜 ‘이스크라’파로 분류되어야만 했는가의 진짜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선 후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보자. 대회가 ‘이스크라’파와 반‘이스크라’파의 투쟁이었다면 그 둘 사이에서 동요하던 불안정한 중간 분자는 없었는가? 우리 당의 사정과 보통 각종 대회에서 나타나는 양상에 대해 다만 얼마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러한 중간 분자가 있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토프는 지금 불안정한 분자들을 상기하기가 매우 역겨운지, ‘유즈니 라보치’ 그룹과 이 그룹에 쏠리고 있던 대표들을 전형적인 ‘이스크라’파로 간주하며 우리와 그 그룹과의 차이점을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앞에는 의사록 전문이 놓여 있으며, 문헌상의 증거에 입각하여, 이 문제에 — 물론 사실에 대한 문제에 — 대답할 수가 있다. 대회에서의 일반적인 파벌 분립에 대해 위에서 말하는 바가 그대로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자 했을 뿐이다.

 

정치적 파벌 분립에 관한 분석 없이는, 또한 각종의 정치적 색채 사이의 투쟁으로서 대회를 보는 시각 없이는 우리의 분열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마르토프가 분트파까지 ‘이스크라’파로 집어 넣어 서로 다른 정치적 색채를 어물쩍 넘기려고 하는 것은 단지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대회 전까지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역사에 기초하여 보면 (대회 이전에조차) 이미 세 개의 주요한 그룹이(이 뒤에 검증하고 상세히 연구할 것으로서) 드러난다. 즉 『이스크라』파, 반『이스크라』파, 그리고 불안정하고 무정견한 동요 분자가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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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 대회 준비

 

모든 사람은 24시간 동안은 자신의 재판권을 저주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격언이 있다. 어떤 당의 어떤 대회와도 마찬가지로 우리 당 대회도, 지도자의 지위를 요구했으나 폐배를 맛본 일단의 사람들에게는 재판권이었다. 오늘날 이들 ‘소수파’의 대표자들은 애처로운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그들의 재판권을 저주하고’ 대회를 헐뜯으며 대회의 의의와 권위를 실추시키려고 갖은 예를 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아마도 『이스크라』 57호에 실린 ‘실천적 활동가’라는 어느 기고자의 논문에서 가장 생생하게 표현되었는데, 이 ‘실천적 활동가’는 대회가 지고의 ‘신’이라는 생각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이는 신『이스크라』의 특징적인 경향이며 도저히 목과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이스크라』)편집진은 —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 —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당’ 편집국이라고 계속 부르고, 또 한편으로는 대회는 신이 아니라고 공언하는 자들을 두 팔을 벌려 받아들이고 있다. 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여러분, 확실히 대회는 신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회에서 폐배한 후에야 대회에 대해 ‘욕지거리를 퍼뜨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 줘야 할까?

 

실제로 대회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있었던 주요한 사실들을 상기해 보도록 하자.

 

『이스크라』는 애초부터, 즉 1900년의 발간 예고문에서, 우리가 통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스크라』는 1902년의 협의회를 당 대회가 아닌 비공식적 회합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이스크라』는 그 협의회에서 선출된 조직위원회를 190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재건할 때도 역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행동하였다. 우리 모두가 인정했다시피 마침내 경계를 굳는 작업은 완결되었고, 조직위원회는 1902년말에 구성되었다. 『이스크라』는 조직위원회의 견고한 수립을 촬영했고, 32호의 시설』에서 당 대회의 소집은 가장 긴급하고도 절박하게 요청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당 대회 소집을 급하게 서둘렀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극히 부당하다. 사실상 우리는 재단하기 전에 일곱 번 재어 보라는 격언에 따라 신중히 처신하였다. 우리는 동지들이 웃감이 재단된 뒤에 가서 불평을 하거나 다시 재어 보라는 등의 군소리를 늘어놓지 못하게 할 만큼의 모든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극히 세밀한(이것을 형식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무정전(political spinelessness)을 감추기 위해 그런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제2차 대회 규정을 작성하였고, 이를 모든 지방위원회에게 승인시킨 뒤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특히 대회 규정 제18조는 다음과 같다. “대회의 모든 결정과 대회에서 실행된 모든 선거는 당의 결정이므로 당의 모든 조직에 대해 의무적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이유로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오직 당의 차기 대회에서만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 있다.” 그 당시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이 조항은 당연히 아무런 허물도 없으나 오늘날 ‘소수파’에게는 파문과 같이 낮설게만 들리나 보다! 이 조항은 왜 만들었는가? 단지 형식으로서? 물론 아니다. 이 규정은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고, 참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은 당 대회를 부인할 수도 있을 수많은 분산되고 독립적인 그룹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규정은 사실상 모든 혁명가들의 지위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이 ‘자유’란 용어가 현재 ‘변리스럽다’는 형용사의 완곡한 표현처럼 흔히 남용되고 있는 것은 왜곡도 보통 왜곡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맹세한 서로의 명예를 건 서약과 같은 것이었으며, 대회를 위해 투여된 막대한 노력, 위험, 비용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대회가 어뢰광대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 대회의 결정과 선거를 승인하지 않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배신이라고 미리 규정한 것이었다.

 

대회는 신이 아니며 결정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라는 새로운 발견을 해 낸 신[1]이스크라, 는 도대체 누구를 비웃고 있는 것인가? 그 발견은 ‘조직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전해’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단지 옛 행적을 감추려는 새로운 시도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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