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1. 


여성 노동 보고서

 

일자리 통계에 따르면 여성의 고용률이 60%지만, 정작 무직율은 30%를 넘어간다고 한다.

 

'일자리 없음' 만큼이나 불안한 쉴 수 없음으로부터, 청년 백수들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임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 학위를 딴 박사들은 룸펜 생활을 청산하지도 못하고, 아직도 경제적 낭만을 품는다.

 

우리는 「수정주의 비판」에 관해서 다뤘던, 여러 수정주의 흐름에 대한 견해를 먼저 보고했다. 앞선 기회주의가 가진 오류를 안고, 신자유주의로 편승된 부르주아 담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무마시키고, 오히려 성별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도 자주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보고가, 이와 같은 임금 생산으로부터 복무해야만 하는 직업군들로 살펴 볼 때도, 치명적일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우기는 꼴이 된 현대 소부르주아지들의 논리적 단면을 매우 잘 보여준다는 점도 들 수 있다. 더불어 소부르주아지들의 중립적 태도에 대한 수 많은 비판에도 가세했다.

 

부르주아지들은 일부 여성 노동자들과도 무관한 ‘성별 갈등’을 꺼내어 시민 사회론의 일부로만 국한시켰다. 탁상공론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틀 안에서도 다루고자, 허기를 고심하던 시민 사회 운동이 보여준 결과를 장담할 수 있는가. 계급 투쟁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존재를 무시한 권리 장전의 부가물일 뿐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여전히 자신의 사적 소유가 시장 경제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는 안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자본가들의 또 다른 밑거름이 되어, 여전히 소유 재산을 옹호한 결과만 빛내주고 만다.

 

여성 노동에서 임금 착취를 판가름하기 이전에도, 성별과 세대 갈등을 더욱 부추기거나, 부르주아지들이 심어놓은 끄나풀들은 이전부터 투쟁을 헷갈리게 만들거나, 어렵게 조장해왔다. 특히나 사회주의 운동을 한답시고, 그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어떠한 자본주의적 장치도 없다는 극단적인 의제를 내세운다는 점에서도, 우리에게 노동 현장이란 시민 사회, 연대 운동에만 기댄 호소로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콜론타이, 체트킨의 영향력 아래에서 아직까지도 부르주아지들도 내거는 경제 성장이라는 동기가 성정치가 되어 그대로 답습할 정도니까.

 

서로에게 맞장구나 치는 '아리따운' 사람들이여, 소부르주아지들이 펼치는 양비론에 숨어, 똑같은 양시론만큼, 우리의 팔랑귀들이 펼치는 논리적 어리석음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적들에게 평화를 외치는’ 타협주의자들이 어떻게 사회배외주의를 지지해서, 부르주아지들의 반동론을 더욱 지지하는지를 우리는 늙어가는 개들로부터 목도하고 있다. 좌익 수정주의가 우리를 얼마나 감시하려 들고, 더욱 설득시키고자 하는지를. 여러분의 친애하는 동지가 때로는 적이 될 수 있기에, 이 또한 얼마나 모함을 자초하는가!

 

"계급 없는 사회에서 성별 없는 사회를 꿈꾸는 자들이여, 성별 없는 사회를 빌미로,

계급 투쟁을 삭제하는 자들에게는 또 얼마나 관대하던가.


성산업과 여성의 권리: 자본주의와 여성 무산자


90년대 일본 페미니즘의 쇠퇴와 성 산업의 결합

 

이 글은 1990년대 일본 사회에서 여성 인권 증진 운동과 그 결과로 나타난 성 산업의 발달에 대한 역설적 관계를 탐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폐된 여성 노동과 성별 고정 관념의 문제를 고찰한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인권 측면에서 과거보다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열악한 노동 환경이라는 자본주의적 한계 속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이는 높은 자살률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여성의 교육은 종종 학창 시절부터 활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인 형태 (주로 앉아서 하는 학습)을 취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 여성이 가정을 중심으로 집안일을 담당했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교육적 경험이 후에 노동 시장에서 강력한 정신적 발달 조건이 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단순히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기보다는, 노동 조건이라는 현실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일본은 이러한 견해가 확장된 국가로 볼 수 있다. 여성의 권리 증진이 절실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세계 최대 성 산업 발달지 중 하나라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다. 통계적으로, 한국보다 일본의 성 산업 종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현상은, 단순히 인구 감소에 따른 보수적 기조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90년대에, 일본에서는 성적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 인권 장려 인식이 풍부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장려가 실제로는 성적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기괴한 역설은, 페미니즘적 이념이 현실 자본주의 체제와 결합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보수적 기조의 위험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본래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정권과 인권을 장려하기 위해 발생했지만, 여성 노동의 문제에 있어 단순히 남성과의 대립만을 전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성별 고정관념의 기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시각은 일부 매력적인 여성들에게 성 산업 종사의 기회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의 경우, 성 산업은 빠르게 탄력적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하며, 일부 여성 노동자, 곧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갈 여지가 있다. 이는 일본의 수공업적 경제 관념과 결합하여, 성 산업이 '합법적인 매춘'이라는 암묵적 비밀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 산업은 겉보기에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듯 보일 수 있으나, 선진국 문화라는 이유로, 비판 없이 수용될 수는 없다. 이는 오히려 성 산업 자체의 폐쇄성이나 도덕적 문제를 감추지 못하며, 적어도 한국에서는 엄연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성의 이념적 해방에 대한 논의와 보급은 오히려 그러한 이념이 취약하거나 왜곡될 위험이 있는 국가와 계급에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시민 의식과 여성관


유산 계급 여성관의 추상적 관념성

 

기존의 여성관이 점차 일반적인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분야에 소속된 노동자의 진행으로 볼 때는 아니다. 특히 부르주아 사회일수록, 한 문제를 추상적 · 관념적 현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특히 여러 정치적 사안 중에서도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현대의 여성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개선된 것을 두고 지금껏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나 권리 증진에 대한 투쟁의 결과 때문이라는 일부 시각이 존재한다. 이 시각에 대비한 비판적 지적들을 비교했을 때는, 이와 연관된 정치적 투쟁의 형태는 관념적 정치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시민 사회의 일부로 여성의 존재를 한정하고 일면적인 결론을 내린다. 

 

전체 사회를 놓고 보았을 때는, 실제로는 사회적 자본의 노동이 변화했기 때문에 시민 의식이 뒤따른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인 즉슨, 고도화된 자본주의는 또 다른 사회적 통제를 부른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실무적인 현장에서 직장 내 불거진 상사로 인한 개인적 폭로나 노동법 위반 사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는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치안 집단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개인적인 변화에 대비해 그 사회 역시 변화했다고 체감할 수는 있으나, 전체 사회로는 정반대일 수 있다. 그 근거로는, 직장 내 여성 노동의 작업 비중과 피로도는 늘어났으며, 가사 노동과 육아 양육에 따른 휴직의 비중이 증가했다는 분석과 통계가 있다. 이것이 여성만을 위한 한정된 시각에 머물면서 해석된다면 앞서 고찰한 대로, 주관적 성격인 추상적 · 관념적 현상의 부분적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다시 말해, 여성관에 대한 여러 지적에 비해 실질적인 자본의 분배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은 다르더라도, 부르주아의 몫에 대한 비중만 넓힌 결과로 해석되며, 잉여 가치의 창출을 위한 존재의 비중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극단적인 경우로는, 미취학 아동 노동도 허용된다. 따라서 노동자일수록 자본주의의 경제·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상당히 중요해진다. 

 

또 다른 예로는, 여성의 사회적 노동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실질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만큼 종사하는 자본 영역의 범위가 확대될수록, 여성의 사회적 진출 요구 역시 상승하므로, 역효과로 인해 착취의 요소인 매춘과 유흥 접대와 연관되거나 또는 그 이외의 육체적 차이로 발생하는 종사하기 어려운 분야의 한계를 딛더라도, 계급적 평등의 시각으로 일소될 뿐이다. 이 원인의 추측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놓치고, 일부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한계에 대한 소모적인 진단만을 사실로 간주한 결과일 수 있다. 이 추측이 사실일 경우, 여성의 사회적 논의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정치경제학 논의로 편입된 경제적 관념만큼 지금의 비판적 논의와 무관하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논의에 대한 일부 한계와 파생되는 시민적 수용(민주적)의 부르주아적 특성에 대한 논의 역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6. 05. 22. 


가난이란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난이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배고프고, 굶주리고, 또 가난하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러한 부당한 경험들을 겪고 있다면 또 물을 수 밖에는 없다. 생존 위기를 심화하고. 같은 지경까지 모는 무고한 죽음을 두고 희생으로만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냐고.

 

권리는 경제 앞에 또 무너지고는 말았다. 권리는 배 부른 사람들을 위한 특권만 됐다. 사람들은 가난을 알아도.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해 말하고 또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드물어졌다. 가난을 느끼고 참으로 겪는 사람들로는 말할 수 없이 괴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말해 자본주의에서 불황기로부터 생겨나는 기아와 빈궁에 대한 현실 문제와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정작 자본주의를 지적하지도 말하지도 않는. 가진 사람들이 입버릇으로 말하는 경제적 불평등으로만 치부하기 때문에서도 아니다. 그들은 경제 문제를 호황기로만 말해왔으므로, 거짓말만 또 해댄다. 자본주의 체제들로부터 추락하는 계속되는 불황기 앞에서는 더욱 솟아날 방도가 없다는 점을 받아들일 줄 안다면.

 

그러한 문제들이 닥치고 또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또 지겹도록 똑같은 자본주의를 더욱 깊게 연구하고 또 지적할 수밖에는 없다. 또한 가난에 대해 나눌 수 없는 사회는 넉넉한 세상도, 그저 꿈만 꾸는 환상 세계도 아니고, 바로 처절하게 느끼고, 괴로운 삶이라고 아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이론과 연구들은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같은 문제들이 여전하고 또 엄연하게 있어왔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하고, 또 여러 모순을 해결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한 이유다.

 

 

우리로는 넉넉한 삶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또 당연하게도 그래서 가난에 대해 다시 또 묻는다. 단지 지겹도록, 굶주리고 싶어서도 아니고 모두는 고루 가난할 수 있는 삶으로 반드시 나눠줘야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해고된 사람들.

 

나도 즐겁고, 보람 있는 일.

 

힘겨운 입시 제도를 끝내고, 졸업을 앞둔 사람들로는 늘 축하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는 싶다. 청소년이라는 울타리를 끝마쳤다. 그리고 사회로 힘겹게 들어온 셈이다. 보람을 잘 느끼지 못했다면, 억지로 좋아하는 일만 해왔을 수도 있다. 어른도 때로는 아이보다 더 어릴 때도 있기 때문에, 이른바 철든 어른을 만나기란 하늘에 별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람을 곁에 둔다는 건, 그리고 자신에게도 성장하는 데 더욱 도움을 준 사람을 만난다는 건 뜻 밖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사람들이 없다는 건 매우 독립을 준비하는 사람들로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이라는 동기보다는 의무감, 책임감이라는 반복되고, 따분한 동기를 자발적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가정 형편이나 생계라는 문제마저 관련된다면, 자신은 무엇을 잘 할 수 있거나, 또는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고민해볼 시간마저 부족해진다. 일에서 늦은 건 없음에도, 사회는 세월을 생각하다가, 사람들을 쉽게 해고하고는 만다. 그리고 해고된 사람들 가운데로는, 정작 해고하지 말았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섞여있었다. 부당 해고라고 불리는 직장 생활에서는 그러한 경험을 겪어봤다면, 앞날에 대한 불안이나 막막함은 묻어 나온다. 그리고 정작 해고를 한 당사자는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거나, 인식하지는 못한다. 직장에서 신뢰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착각이나, 각종 질투, 오만이라는 감정들에 빠져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적된 습관, 도덕적인 의무마저 우리를 얼마나 옥죄던가.


사회 생활에 대해서 우리 공산당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여러분들, 모두 체제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저마다 삶을 만들어가고자 애쓴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단지 돈 때문이라는 이유이거나, 그저 좋아하기 때문도 아니고. 일이란 참으로 많기도 하고, 누구나 그리고 저마다 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한 가지라도 있다.

 

골고루 가난한 삶.

 

마르크스도 청년 시절, <직업 선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졌다. 스스로 삶을 만들고자, 그리고 더욱 매진했다. <자본론>만큼이나, 직장을 잃거나 맞는 취업 및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하고, 해고된 사람들을 보노라면, 겉으로도 보인 직장이라고 해서 꼭 안정적이지도 않고, 가정을 이룬다고 해서 꼭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는 듯 하다. 우리는 각자 선택을 존중하기도 하지만,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일과 함께 보람을 찾고, 쟁취하는 사람들이다. 사익을 내세우고는 엄격한 조건만 따지던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우리 공산당은 늘 이와 같은 사람들을 지지해왔고, 가난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욱 아낌없이 지원해주고는 싶다. 그러나 힘도 뭣도 없는 우리들로는 참 힘든 일이다. 심지어 꾸준한 동지들도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부디 개인적인 자유로부터 혼자만의 생각에만 꿍하게 갇혀 있던 오래된 지난 날에서, 해방된 자유로부터 고된 부담과 시름을 덜어내고자 노력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부도 지난 해부터 되돌아보자. 검찰 수사로부터 매진한 나머지.

 

정작 실행하고 옮긴 정책들이 얼마나 있던가. 미안하지만.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4. 09. 30.


혁명 경제학 연구

 

1989년, 현실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1998, IMF 외환공황도 일어났다. 1980년대는 한국사회에서 변혁운동이 주도됐다. 1990년대는 개인주의였고, ‘후기 현대’였다.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의 쟁점들>

 

이 책은 2001년에 나왔다. 논문집보다, 학부용 교재였다. 김수행은, 서울대 경제학부에서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이란 과목을 맡았었다.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교재에서는 집필 팀들이 구성됐다. 개인적으로 사정으로 책에 싣지 못한 주제로는, 제3세계이론, 노동운동, 시민운동, 페미니즘, 생태주의, 한국 자본주의 현 단계, 등이다. 평이하고, 심화학습용 문헌하고자 부탁하셨다.

1989년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한 건, 1987년, 6월 시민항쟁에 대한 음덕이다. 서울대에서는 분단 뒤로부터, 제도권 학계에서 줄곧 배제됐던,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해 학문적 시민권을 공인받았다.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긴장도 있었으며, 혁명적인 이념이었다. 경제학부 교수 사회 내부에서는 학문적 고립감도 느꼈다. 소련,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 붕괴도 부담이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김수행에 대한 업적으로는,

 

1. 마르크스 경제이론을 대중화한, 번역 · 소개 작업이 있다. <자본론> 완역..

 

2. 한국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이론적 정교화를 위한 연구다.

 

3. 마르크스 경제학 동향 소개.

 

4. 자본운동 세계화,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

 

5.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 입장들 분석.

 

신정완

 

마르크스 사후 120년 간, 마르크스 경제학 발전은 마르크스, 개인이라는 성취한 업적 무게에 도 중점을 두며, 미치지는 못한다. 소련, 동구권 사회주의 체제는 붕괴됐으므로,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감당할 짐들도 더욱 무거워졌다. 마르크스 이론 가운데, 계승 · 발전, 수정 · 기각해야 할 부분을 판단하거나, 방향을 보여주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작업들도 시도됐으나, 정작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 영역인 경제이론 영역에서는 계승 · 수정 · 기각 · 재구성 등 논의는 충분하게 심도 있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런 작업들은 대체로는 고도의 지적 능력, 끈질긴 노력들을 요구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모든 연구자들에게는 공동 과제이다. 1980년대에는 사회구성체 논쟁도 진행했었으며, 후반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사회운동 쪽에서도 관심은 매우 높았다. 


현재는 그렇지도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로 대학, 학부에서도 아카데믹한 논의에만 머물렀으며, 긴급한 사회 현안들에 대한 분석, 처방들을 순발력 있게 내놓지는 못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이론적 발전 · 혁신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어떤 메시지를 가지거나,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소통할지에 대한 문제들도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자들은 해결해야만 한다. 김수행은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총장이었으며, 노동자 교육에도 힘을 쏟으면서, 열정으로, 헌신했다. 마르크스 경제학은 우리 사회 사이에서 생산적 소통양식 개척에도 앞장서주기를 기대된다.


김수행

 

김수행은 생산적인 사업을 하고자 했었다. 우선 경제학 대중화를 위해 책을 쓰고자 했다.

 

대중화의 단계가 아닌, 심화 단계의 필요성.

 

김수행은 대중화에 대한 서적을 쓰고자 노력했으며, 그래서 <알기 쉬운 정치경제학>(2001, 6월), <자본론의 현대적 해석>(2002, 2월)을 출간했다. 남은 건, <현대 마르크스경제학 쟁점들> 뿐이었다. 김수행은 서울대에서, 전공선택과목으로,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을 7년 동안이나 강의했었다. 좋은 교과서는 없어서 매우 흠딜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문헌들도 부족했으며, 한글로 되지도 않았다. 학생들도 공부하기 어려웠고, 강의 범위를 넓히거나, 속도를 원하는 만큼 높일 수도 없었다. 책 범위는 강의를 상당하게 초과했지만, 내용은 김수행 생각과도 같다. 각 집필자들에게, “내용은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마르크스 경제학을 연구하는 학도, 분석방법이나 실천적 대응에는 큰 차이는 나지 않았다.

 

정성진은 제2인터내셔널, 이론과 실천에 대해 마르크스 원칙에도 근거해서, 근본적으로 비판한다.

 

안현효는 제주, 탐라대학 소속이기도 했으며, 현재 불화지폐, 신용경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마르크스 화폐이론을 발전하도록 한 여러 가지 시도를 고찰한다. 금융 세계화, 금융, 실물 부분에서 괴리현상을 설명하고자, 새로운 관점이 매우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김수행은 독점, 제국주의에 대한 학설로부터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으며, 현재 다국적인 기업들과, 세계화를 독점하거나, 제국주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김윤자는 한신대 소속이기도 했으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는 어떤 실천적인 과제를 중심으로 형성됐으며, 왜 그리고, 어떻게 변질됐는가를 밝힌다.

 

- 단지 토지 면적과 인구 수가 크다고 해서, 경제력이 강하지는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5. 27.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무국적자로 망명생활을 했다. 1818년 5월 5일에 태어나, 1883년 3월 14일에 영국에서 사망했다. 트리어는 천주교가 깊은 도시로 가난했다. 마르크스는 트리어 지방에서 소수 유대인 가족으로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1835년에 김나지움 졸업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김나지움이라는 수업과 자유롭고, 인본적인 교육은 마르크스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하인리히 변호사 수입으로도 부족했으므로 하인리에 지참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었다. 마르크스는 부친과도 친분이 있었던 폰 베스트팔렌 백작을 만났고, 백작 딸이던 예니와 마르크스는 혼인한다. 그러나 뒤로는 트리어로 거의 오지는 않았다. 1835년에 대학 심사에 통과했다. 부모는 법률가를 권했다. 프로이센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등록했고, 대학시절 동안, 예니와 약혼했다. 베를린 학부에서 철학적 논쟁에도 참가했다.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본과 베를린에서 철학을 배웠다.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대학에서는 마르크스를 거부했다. 철학을 수료한 뒤로 쾰른 언론사에서 일했다. 쾰른에서 자유신문이던 “라인신문”에서도 마르크스는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843년 쓴 기사들에 대한 발행은 당국에서는 금지됐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불만들도 붙였기 때문이다. 쓴 기사들은 프로이센 당국과도 분쟁했다.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한 적도 있었고, 마르크스와 가족들도 유럽 망명지였던 벨기에 브뤼셀로 옮기면서부터 망명생활은 시작됐다.

 

1848년 혁명기와 『공산당 선언』

 

1848년 혁명기 동안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당국과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감시를 받았다. 국가 감시로부터 마르크스는 결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난민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공산당 선언』을 작성했다. 1848년, 유럽에서는 혁명에 대한 격변이 발발했다. 1849년, 마르크스와 가족들은 런던에서 생활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만난 뒤로 생활에 도움을 주고 마르크스와 가족들에게 생계 지원도 해줬다. 당시 난민이던 마르크스와 가족들은 수많은 서유럽 도시들에서 이민을 다니며 생활했다. 철학을 배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게 <기독교와 본질>을 읽었다. 기자로 활동했던 당시에도 마르크스는 시사에서도 폭 넓게 논평했으며, 산업혁명 시기에 인쇄기와 전보는 일반 매체로도 발명했기에, 이를 활용하면서 조직원들과 통신할 수 있었다. 『공산당 선언』 초판은 1848년 2월에 출간했다. 마르크스는 찰스 다윈의 진화 법칙을 조사했고 사회 구조를 파악할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생활 조건들도 보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자취는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들로 모여진다.”고 언급했다. ‘계급’이란 사회와 경제에서도 나뉘며 한 계급은 다른 계급을 착취한다. 사회, 정치, 경제 영역에서는 주로 가난이라는 원인을 만드는 사유 재산에 대해 고발하고, 무산 계급들은 폭력 혁명을 달성할 때만 비로소 해소할 수 있다. 

 

『자본』 집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등을 집필했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때를 보고 미래를 앞서 봤다. 20세기에는 정치적 행동에서도, 지식인들도 마르크스를 알릴 수 있도록 했지만, 자신들에 목적에 부합해서 마르크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주로 정치적인 표식이다. 마르크스는 경제를 배운 사람이기도 했다. 1840년에는 경제를 배웠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세계적으로 사회와 정치라는 구조를 경제 체제로 지배한다. 그리고 첫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에 대한 분석을 서두로 자본주의를 분석한다. 마르크스는 20년 동안 경제 문제를 착수했다. 이윽고 『자본』은 1867년 독일에서 첫판으로 출판했다. 엥겔스는 1885년, 1894년에 나머지 『자본』도 출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들로만 경제 발전과 부라는 명분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임금을 착취한다.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들을 희생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책을 자주 읽으며 기록했고, 발췌했고, 인용했고, 논평했다. 편지들도 썼고, 엥겔스 뿐만 아니라 예니와 딸들도 마르크스를 지원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을 미작했다. 엥겔스는 엘레노어와 그의 유종을 지켜봤고 서류를 정리했다. 마르크스는 의자에 앉아서 자주 작업했다. 마르크스는 의자에 앉아 읽거나 자주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했다. 훗날 마르크스 후손이던 장 룽게는 마르크스 조각상을 만들었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내건 노동자 단체는 19세기에 최초로 유럽에서 출현했다.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수공예를 다루던 장인들이나, 기계공들로 주축을 이뤘고, 독일에서도 대중 운동들로도 변모했다. 마르크스는 1899년, 최초로 국제사회주의를 따르는 국제노동자단체도 설립했다.

   

노동 운동

 

마르크스는 여러 노동 운동에도 도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노동 운동들도 통일되지는 못하고 진영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평의회를 지지하고 끝까지 정당 규칙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는 진영이고, 다른 하나는 의회 민주주의 아래의 한에서 사회주의를 평화롭게 구현하기를 바라는 진영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19세기 후반에 마르크스를 분석하고자 만들어진 용어이다. 마르크스도 ‘마르크스주의’를 부르진 않았지만 아직도 유럽에서 많은 노동당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해석에만 따른다. 마르크스 사후로 아직도 마르크스를 ‘교리’로만 여긴다. 여러 학자들도 마르크스가 제기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여러 비판이나 분석마저 포괄적이고, 불완전하고, 모순들이 많다고 했다. 1949년 이후로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에 동조하는 국가들도 늘어났다. 서독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는 사회주의 정당이나 운동들도 지지했다. 1989-1990년대는 존재하던 세계 질서는 무너졌다. 자본주의는 우세했고, 세계화는 촉진됐고, 경제 발전은 사회와 정치 분야에서도 이뤄졌다. 중국이나 쿠바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에 의존한다. 2007년, 미국에서는 주택 거품도 일어났다. 국제 은행, 금융 체계는 오히려 경제 위기에 빠졌다. 각국 정부들의 비상 구제에도,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도 위험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재 내 사회에서도 『자본』 판매는 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