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1. 31.


토론: 검증된 논증의 성립 과정

 


민주주의에도 가치가 있다면 독단적인 결정 권한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논쟁을 기반으로 검증된 토론을 거치면서 이루어진다. 물론 실무적인 여러 정치적 현안이 주어짐에 따라 결정권이 행사되더라도, 결국에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 간에 기나긴 토의를 거친 안건들을 토대로 의원 간 치열한 내부 토론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논객 간 질의응답이 보장되는 자유 토론 형식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각 국가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법적인 협의가 보장되기 이전까지 합의될 수 없는 지점이 있더라도 치열한 토론을 전제한다. 단순히 자신의 사고방식만으로는 민주주의를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유산에 있어 계승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주어지게 된다. 단순히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여 행사할 수 있다는 자본의 논리로 대다수의 의원들을 설득하여 통합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주의는 비록 사상적이지만, 그 방향에 있어 기존의 민주주의와도 대치되는 입장이기에 필사적인 논의를 기반으로 독자적으로 전개된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는 마르크스가 부정한 마르크스주의의 본래 의미마저 희석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고유한 가치라면 단순히 협의에 의한 토의가 아니라, 치열한 논증을 전개하고 예상되는 답변에 부응하는 토론에서 출발한다. 지금도 국회에는 누적된 안건들이 여전히 누락된 상태에 있다. 이를 두고 단순히 국정 운영이란 행정·실무적인 판단하에 최종 권한의 허락만을 구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의회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이 한 발언에 대해 평생의 명예를 걸었으며 논증의 성립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이는 철학의 중심적 토대인 논리학의 시작을 계승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자신의 논증이 더 이상 갈피를 잡지 못하여 실제로 적용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논증에서 토론으로 발전할 수 없는 개인적 성찰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중요한 지점이다.  

 

지금도 정치에 불만을 가지는 대다수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절차적 토론 과정에서 중요한 일이란 현안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기 이전에 전제에 대해 질문하고, 어떠한 과정으로 전개되어 결과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상호 검토하는 진행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기본적인 정치적 현안조차 다각도에서 볼 수 없도록 통제한 측면이 존재한다. 이는 이전부터 주어진 사회적 관습 및 전통 방식으로 인해 형성된 기존의 사안들을 다만 반복하고 있었다. 

 

이조차, 일부 선조들만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토론과 논증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작 대다수 사람들은 실무적인 안건에서 이를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조차 개별적으로 배우지는 못하였다. 사회화의 형성 과정에서도 토론이란 단순히 무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여 이치가 그릇되지 않음을 요구하는 한 방식이다. 현대 사회가 과거 소피스트처럼 의회의 독점을 차지하려 들 때, 본래 의사 결정이란 협의 과정에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질 속에서 빚어지는 투쟁과 비판이 있을 때 계승되어 발전하며, 이러한 독점 권한을 가진 지배 계급이 차지한 의회 내 고질적인 모순임을 서서히 자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필자 역시 제안자로 한정했을 때, '제한된 토론이 주어진 상황에서는 어떻게 자신의 논리가 전개될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행방의 실마리를 위해 미리 결론을 내리자면, 지금은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현안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더 필요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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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20. 


한국 혁명



독재의 시간: 무산 계급에게 독재란 무엇인가.

 

통상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독재'라는 언어는 절대 권력을 한 개인에게 위임하는 전제 정치나 군주제와 동일시되며 무조건적인 부정의 대상으로만 인식된다. 사전적으로는 독재는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로 규정되며, 이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비판마저 결여된 모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공포는 타당하며, 선거마다 권리 행사의 부담을 감지하는 현대 시민들에게 독재와 민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점인 개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사회를 단일한 시민의 집합이 아닌 계급적 구도 및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면, 이러한 보편적 인식의 한계와 언젠가 마주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역시 똑같이 표방하는 민주주의가 과연 노동자 계급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동안 무산 계급은 민주적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한다는 착각 속에 머물렀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나 독립 투쟁의 성과를 기리는 행위가 국가적 수준에서는 유의미할지라도, 정작 그 주체였던 노동 계급이 마주한 실질적인 현실은 '민주'라는 개념이 지닌 고질적인 한계 역시 드러낸다.

 

레닌, 『국가와 혁명』에서 강조된 '독재'의 개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노동 계급에게 요구한 것은 단순한 지식 계급의 정권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동 계급이 비로소 정치적 주체로 실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이는 소수 독재자의 횡포가 아니라, 대의제라는 허울 뒤에 숨은 자본가 계급의 모순을 타파하고,『일보전진 이보후퇴』에서 설명된 기나긴 의회 투쟁의 시간 속에서 겨우 부상한 노동 계급의 직접 통치권을 주장한 바로 그 순간에 탄생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진정한 의미마저 단기간의 한계로만 평가하는 것 같다. 

 

당면한 현실이라면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 체제는 더 이상 '영원한 평화'마저 약속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논리와 정치적 수사 속에서 체제의 근본적인 이행마저 외면당하고 있으며, 인구 감소라는 통계 수치보다 더 시급한 노동자들의 죽음은 방치되고 있다. 이른바 독재자로 명명된 이들이 인민을 대변하지 못한 채 좌절하여 자본가에게 굴복하는 현상은 혁명의 조건이 상실된 시대의 비극을 온전히 보여준다. 1917년 볼셰비키가 역사적 무대에 등장한 이후로도 노동 계급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온전한 주체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운명을 수용할 노동자에게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내포한 정치적 본질,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갖는 기만을 폭로하고, 동시에 노동자의 직접 통치를 지향하는 그 가치는 시간만 바뀌었지 형태의 본질이 고스란히 유지되는 시대의 보수성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이 유효성 앞에서 그동안의『자본』읽기가 왜 실천적 실패로 귀결되었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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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16.


잠정적 경제 진단의 중단



잠재적 국가 부도 선언 및 체제 전환의 현실화 구도

 

당분간 작업상의 이유로, 사회·경제 문단의 진단에 대해서는 침묵하고자 한다. 이 침묵에 변별점을 약간 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내의 경제상 위기가 찾아오고 있다는 주장이 기정사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국내의 자본주의 체제는 여전히 1980년대 이전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다는 전망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물론 한국의 세계적인 인지도와 무관하게 발전한 부분이며, 여러 독립 변수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민주 정권의 수립 이후로 건전한 경제 생활 전반을 유지해 온 시민 사회의 기존 논리만으로는 이러한 체제 전반의 문제를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에 따라 경제 진단의 중단을 요청하는 바는, 현재 미국발 경제 부도의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기후 위기를 비롯한 산업 상의 투자 비용 대비 지출 낭비 역시 늘었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세계 국가 부도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음을 예증한다. 현재에도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는 여러 국가들 간의 분쟁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물론 언론 보도 분야에서는 경제상의 호황기로 표현될 것이기에, 그 실상은 사실상 국가 부도와 침체기를 향해 가는 중임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어떻게 이를 예방하고 맞설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까지 혁명적인 조직 역시 부재하고 있는 형편에서 단순히 혁명적 요인만으로는 경제 불황의 문제를 해소하거나, 장기화된 전쟁과 노동 생산성 및 기후 대책에 대한 위기 역시 다방면에서 노동자의 힘만으로 현안을 해소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민주 정책' (또는 공공 정책)만이 대안이라고 여기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물론 참고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효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기념'에 다름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은 여러 독재 정권을 힘겹게 거쳐왔기 때문에 이러한 민주 정권 수립에 대한 오랜 희망이 아직 남아 있으므로, 이를 노동자들이 직접 구현하는 형태로 타파하기까지에는 상당 부분 소요가 더욱 진행될 예정이다.

 

자본주의 경제 진단의 효력이 여러 가상화된 발전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민주주의 제도 아래에서 결합된 형태로는 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이유라면, 그것은 줄어드는 노동 생산력과 이에 맞는 자본 계급 간의 수지 타산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며, 산업적 향락 대비 낭비 요소의 비중이 더욱 증가했음을 파악하는 것은 통계 전반을 참고했을 때만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는 이러한 구체적인 통계상 부분은 생략하므로, 우선 경제 진단의 중단을 선언한 이상 두 국가 간의 직·간접적 충돌로 인한 체제 전환의 지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증명하는 바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라면 앞전 세대의 자본주의 경제 한계에 대한 논의 역시 부재함은 더욱 심각한 현안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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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07.


제국주의 전쟁의 가시화



사상 초유의 사태

 

주어진 기회를 놓치며 다만 믿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자국의 영토 속에서 국민들은 영토의 안전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대와 경찰의 치안 유지는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 이유는 이번 마두로 체포 과정에서 인근 쿠바 경호원 역시 사살되었다는 점이 보고되었다. 적어도, 『공산당 선언』을 세부 판단 없이 처음부터 읽어본 독자들에게 한해서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역시 반동적 사회주의의 모순 및 한계를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단계에서 계획 경제의 차이를 분간할 줄 아는 이들조차 더욱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윽고, 이번 사태로 명확해진 점은, 한국 정부가 정권 초창기에 곧바로 미국과의 (서류 절차에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협상에서 우호적인 시각을 내비쳤다는 점은 오히려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와의 암묵적인 합의로부터 양측 간의 제국주의 전쟁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또 한번 일어나게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 정부 및 서방 국가에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그들이 제국주의라는 용어 자체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셈이 된다. 그들은 단순히 독재자의 체포 소식에만 휘둘려 자유 국가의 위상을 보여주었음에 뜨겁게 환대하고 있다. 덕분에, 여러 사회주의 표방 국가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은 더욱 가시화된다. 그러한 우위가 여전히 미국에 압도적일 것이라는 일부 지식인들의 예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반대로, 분단의 실상은 지금 남한 정부 역시 두 국가론과 여론에 휩쓸려 고립된 길을 여전히 택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북한 정부는 그러한 구호의 손길을 똑같이 내밀고 있음에도, 각자의 영역이라 판단한 이번 정부 특유의 정책적 지연 전략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효력을 남기는 중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중국과의 협상까지 임한 이상,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숙명이 되었다. 그것은 냉전 시대의 '보이지 않는 전쟁'과도 같은 모습에서 그들이 협상에 임하며 화기애애한 모습과는 달리 특히 노동 계급은 이러한 위험 국면 속으로 내몰려 또다시 전쟁을 준비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하에서 파시스트나 극우의 부상은 더욱 거세어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 또한 통계 자료가 미미하더라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 정부의 고립된 평화주의 태도로 인해 자국의 국민들은 그들이 행하는 중상모략을 지켜보며 전쟁에 대한 불안과 생활고의 위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나 있을까. 이는 높은 수준의 경제적 사정과 반비례하여 한국 정부로부터 더욱 시달리고 있음을 되풀이하는 중이다. (물론 지금도 코스피는 예외적으로 폭등하겠지만)

 

그들은 취약한 민주주의로 쉽게 위장할 수 있으며 지금도 자국의 국민들을 회유하여 백색 테러를 준비하고, 군부 독재를 위한 계략과 모의를 준비할 수 있다. 스탈린이 언급한 대로, '사회민주주의자는 파시스트이다.'라는 지적 역시 현재에도 부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겨우 5년 임기 속에 대체되는 정치적 정세임을 파악하지 못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모든 지도자를 독재자로 모도하면서 정작 인민을 기만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부르주아지를 위해서만 소수 의견에 대한 발언권을 가지도록 독점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한패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도래할 전쟁을 준비하는 중이다. 그들이 바라던 삭발한 젊은이들이 징집이 되는 이 암물한 전망 앞에서 말이다. 군사 쿠데타를 겨우 막아낸 젊은이들이 과연 자신들에게 닥치는 징집에 대한 거부권 역시 행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양 진영 간 서서히 개막되는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그 실체가 비로소 내전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 역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제국주의 전범국이라는 또 다른 변모 과정을 보이는 중이다. 결국 이 실마리를 따라 자국의 독립적인 연대 단체가 아닌 그들조차 부정하고 싶은 각국의 공산당만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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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1. 07.


민주 진영의 난제



어느 자유 시민의 지배적 소견

 

본 논고는 기획된 초고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앞서 밝힌다. 본래는 소시민적 사고방식의 태생적 한계를 규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그러나 지면상의 이유로 간략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현재의 진영 논리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먼저 정치적 진영의 구분으로 분간하고자 한다. 더불어 논의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해당 진영의 중심이 되는 인물을 전제하였다. 이는 민주 진영 내 지식인 집단이 개인 간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인민들에게 잔존하는 계급적 지형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희석하는 경향이 존재함을 밝힌다. 여기서 전제되는 두 지식인이란 바로 유시민 씨와 조국 씨이다. 그들은 현재 부르주아적 사고방식을 재생산하는 핵심적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정치·사상적 영역의 전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실질적인 법·의회적 상부 구조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유시민 씨는 조국 씨보다 더욱 활발한 저술 활동을 개진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국가론』 (「민들레」언론사의 수필 형식)

 

2). 『정치경제학 소고』 (『경제 평론』)

 

3). 『사상계』 (『후불제 민주주의』 이후로 이어지는 담론 체계)

 

이 세 부분은 미국이 아닌 프랑스의 근대 시민 혁명의 여파를 국내에 수용하여 자유주의 (또는 개인주의) 계열 부르주아 사회의 존립을 뒷받침하는 논리적 방벽을 구축하며, 국가 기구를 민주 진영의 정치적 장치로 자유 진영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의 실상은 개별 주체의 주관적 인식 범위를 확장하는 수준의 평론적 일반화에 머물며, 이후로 그의 중심이었던 사상계는 『후불제 민주주의』 담론으로 이어지는 자유 계열의 핵심적인 부르주아 사회 전반을 지지하는 논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의 국가론 역시 기본적으로 민주 진영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긴밀한 정치적 장치를 토대로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나’로 서술되는 평론 방식의 일반화된 경향으로 노골적인 편견을 앞세우거나, 자료 조사를 실시함에 있어 추상화로부터 미흡한 통계적 실태를 상대주의로 보완하여 자본가들에게 자본 이윤의 창출에 몰두할 수 있는 방책과 술수를 더욱 모색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그의 사상의 전반은 기본적으로 제임스 밀과 존 스튜어트 밀을 닮아 그 사회적 영향력을 본받는 경향 역시 인민들에게 지배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대로 (그가 알고 있다면) 유흥 전반의 소비에 불과한 지식인 계급의 밑천을 번복할 뿐이다. 

 

현재의 진영 논리가 극심해지는 국면이 아닌 매우 선명하게 나타남에도, 그는 여전히 정치적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명목하에 계급적 구도를 의도적으로 희석하고 있다. 이는 민주 진영의 일부를 구성하도록 유도하여 지식인 계급의 반동적 이탈이나 오류조차 상대주의라는 미명 아래 정당화하는 오래된 논리 구조를 형성한다. 그들은 가히 교조주의와 다름없는 설득된 지지층들에게 여전히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난제이다. 그것은 곧 이들의 담론이 인민에게 해방적 사유를 제공하기보다, 부르주아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을 고착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는 지배 계급이 유산 계급과 결합하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부르주아 전반의 사회 구성원의 일부를 이루는 매우 ‘차별적인’ 사고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사고방식을 일반 인민이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실제로 이 작가는 조국 씨와 친분 역시 과시했기 때문에 결국 두 인물이 보여주는 의회 정치로의 경도와 발전사관적 개혁안은 민주 진영 내부에 뿌리 깊은 타협주의의 발현이다. 이는 민주 진영 전반에서 당연히 지지층들의 옹호가 밑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두 강대국 간의 패권 다툼 속에서 상대적 의존도를 유지해야만 경제 발전을 이룩한다는 군부 독재 시절의 국가주의적 질서를 온전히 청산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종국적으로, 인민의 근본적인 해방이 아니라 관념적 사상의 정립에 있으며, 지배 질서 내에 흡수되어 점진적 '조율 장치'로, 자본주의 질서의 바탕을 더욱 유지하기 위해 인민을 기만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래 위치해야 할 사상이 아닌 정치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결국 민주 진영은 이 두 지식인과 결코 단절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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