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문득, 혹은 자주 글을 남깁니다. 마치 생전에 제대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처럼 무심결에, 어쩌면 어렴풋이 어울리는 만남이겠지요. 인생사가 유독 불우한 이들에게는 밤이 더 자주 깊어지나 봅니다

 

저는 이제 사업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에서 생계 노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업을 정리하면서 사진과 연락처도 정리했습니다. 답장 없는 편지를 쓰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한 이름처럼 부득이하게 본명을 남깁니다. 제가 기억하는 순간은 아주 짧은 한때였고, 지금쯤 당신은 대학을 졸업해 어엿한 성인으로 살아가고 있겠지요. 각자가 1인분을 해내기 위해,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 속에서 당신과의 인연 역시 좋은 기억으로 남음과 동시에 조금씩 멀어지고 있습니다.

 

제 과거를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당신이라는 이름은 늘 마음 한 켠에 남아있지만, 저라는 존재는 가장 가까이 있던 지영 씨가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유쾌한 사람이면 좋았을 텐데, 제 열정이 너무 과해 오히려 지영 씨에게 부담만 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제 아버지를 기억해 주시는 당신이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더 조용한 곳에서 따로 만났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고, 이미 지나간 일들을 돌아보거나 숨을 고를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젠 동료들과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중입니다. 서슬 퍼런 살기도 꺾이는 순간이 오더군요. 예전처럼 몸이 제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예비군도 끝나고 지긋지긋한 빚도 탕감하여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주변 지인들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정신을 다잡으며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중입니다

 

지영 씨도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소식을 조금 보텁니다. 여름의 온기 탓인지 피부가 진물러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최근 한강 공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손을 잡고 재미나게 담소를 나누는 연인들이 보이더군요. 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저렇게 희희덕거릴까 싶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자가용이 있던 시절, 누군가를 바래다주던 길에서 소소한 즐거움이 떠오릅니다. 조금 더 잘 알려지지 않는 장소를 찾아가거나, 여유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지영 씨 얼굴이 발개지도록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겠지요.

 

이제는 제법 상관없는 일입니다. 계절의 봄은 매번 찾아오지만, 마음에도 봄이 올까 싶을 때가 많습니다. 외출할 일도 별로 없는 저는 그저 일에 묻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요. 겨울이 오더라도 환절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전공과 관련해, 가방 속에 손목이 편한 마우스를 볼 때면 아직도 넌지시 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2026. 0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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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 공산당』에 나타난 시이 가즈오 연설문의 사상적 특징

 


· 의회주의적 사회 변혁론과 민주주의 혁명 지향

 

시이 가즈오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단번에 이루어지는 혁명적 변혁이 아니라, 다수의 합의에 기반하여 계단을 오르는 단계적 과정으로 규정한다. 현시점 일본 사회에 필요한 변혁은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대미 종속과 대기업 중심주의를 타파하는 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틀 내의 민주적 개혁임을 명확히 한다. 또한 과거 소련 방식의 억압적 체제를 배격하고 의회 선거와 다수파 획득에 따른 평화적·민주적 변혁을 지향한다.

 

· 자주 독립 노선과 패권주의 및 교조주의 비판

 

당의 운동 노선을 결정함에 있어 외부 강대국의 지시나 간섭을 배제하는 자주 독립 태도를 견지한다. 과거 소련 및 중국의 간섭을 배격하고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폭거로 비판했으며, 소련 공산당 붕괴 당시에도 패권주의의 해악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이를 환영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기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 교조주의 및 패권주의와 선을 긋는 대목이다.

 

· 반제국주의·반전 평화주의 및 역사 의식

 

태평양 전쟁 이전 전전 (前戰) 시기부터 천황제 전제 정치 아래서 일관되게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반대해 온 역사를 강조한다. 헌법 9조 개악 저지와 평화 수호를 핵심 과제로 제시하며, 일본군 위안부문제 등 과거사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근본적 청산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와 한일 우호가 성립한다는 확고한 반제국주의 및 반전 평화주의 입장을 보인다.

 

· 대중적 기반에 입각한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의 정통성과 동력의 원천을 의회 내 의석수뿐만 아니라 당원, 지역·직장 지부,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 독자층, 기업 및 국가 보조금을 받지 않는 재정적 독립성 등 민중 삶 속의 풀뿌리 조직력에서 찾는다.

 

· 역사적 연속성과 과학적 성찰에 따른 당위성 확보

 

창당 이후 당명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정당성을 침략 전쟁 반대라는 일관된 투쟁 역사에서 찾는다. 동시에 당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완고함을 배격하고, 과거의 오류나 역사적 제약을 공식 문서 일본 공산당 80에서 인정하고 반성하는 과학적·성찰적 태도를 취한다.


· 한일 관계 및 식민지 지배 책임에 대한 구조적·역사적 시각

 

시이 가즈오는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의 부실성을 지적하며 1910·일 병합이 무력을 동원한 위협과 부력 행시로 이루어진 불법·부당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한반도 분단과 한국 내 군사 독재 정권의 장기화 문제까지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연관하여 파악한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근대 사회로 진입한 한반도 주민들로부터 민주주의적 정치 경험과 훈련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분단의 소지와 독재의 역사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민주적 발전을 위한 국제적 환경 조성에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시이 가즈오와 풀뿌리 민주주의


 

현장 (풀뿌리 운동)과 의회 정치의 결합에 따라 정치 변혁과 대중적 요구의 실현은 의회 내부의 활동만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현장에서 나오는 고발 및 시민 운동과 의회 질의가 결합할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기업의 불법 초과 근무 (서비스 잔업) 추궁, 대부업체 고금리 (그레이 존 금리) 철폐, 중고 가전 PSE 마크 강제 규제 철회, ‘애국심 통지표문제 시정 등의 사례를 들어, 현장의 구체적 고발과 대중 운동을 바탕으로 의회에서 총리나 정부 부처를 추궁해 현실을 바꾸는 방식을 핵심적인 정당 활동 모델로 제시한다.

 

기념비적이고 거대한 정강 정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중 채무·파산 등 시민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문제 해결을 정당의 본분으로 삼는다. 그는 20년 이상 쌓아온 생활 상담 활동과 지역 지부의 밀착 대응을 공산당 특유의 강점으로 내세우며, 민중의 실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본 내 자민당, 공명당, 민주당 등이 기득권 세력이나 대부업체 등 이익 단체의 후원금 및 헌금에 얽매여 대기업과 금융업계의 불법·폭리를 묵인할 때, 공산당은 기업 기부금이나 국가 정당 보조금을 받지 않기에 타협 없이 강력한 추궁을 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당시 전국 24,000여 개 지부, 3,385명의 지방 의원, 130만 명의 신문 아카히타독자 등 풀뿌리 네트워크를 당의 최대 자산으로 여긴다. 나가사키, 미야자키, 훗카이도 등 농촌 지역에서 지방 의원 수와 점유율을 늘려가는 성과를 제시하며, 지역 주민과 밀착하여 성실히 일하는 의정 활동이 정당 신뢰의 근간이라고 판단한다.


 

시이 가즈오의 연설문에 나타난 일본 공산당의 특징


 

일본 공산당은 주민 이익에 밀착한 실천적 지방 의정 활동을 중요시한다. 의원의 자격은 당파가 아니라 주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발언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렸다고 본다. 나가사키현 코야기초나 이바라키현 쿠즈우마치 사례처럼, 지방 합병으로 소외된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는 의정 활동이야말로 보수 성향 주민들의 지지까지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라 평가한다.

 

시이 가즈오가 내린 일본 공산당의 가장 큰 자산은 현장 지강과 지역에 뿌리내린 풀뿌리 조직이다. 과거부터 이어진 부당한 차별과 반공 공격 속에서도 노동자와 시민의 이익을 지켜온 단련된 조직력을 당의 힘으로 본다. 서유럽과 달리 일본 내에 잔존하는 공산당에 대한 편견과 공격에 굴하지 않고,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조직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 공산당이 84년간 당명을 바꾸지 않고 유지해 온 근거는 과거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목숨을 걸고 반대해 온 일관된 역사에 있다. 전쟁 직전 당을 해산하거나 재편하여 전후 이름을 바꾼 타 정당들과 달리, 침략에 맞선 도덕적 자부심이 있기에 당명을 고수할 수 있으며, 이 역사가 동아시아 국가들과 신뢰를 형성하는 핵심 기초가 된다고 판단한다.

 

자민당과 민주당 내 우익 세력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이 추진하는 교육기본법 개악교육칙어 찬양, 야스쿠니 신사 참배 정례화 등을 강력히 비판한다.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고 전전(前戰)의 제국 의회 시절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해외에서 전쟁을 수항하는 나라를 만들고 평화헌법 9조를 파괴하는 행위이므로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따라 우익 개헌파의 역사 왜곡과 군국주의 회귀를 비판한다.

 

시이 가즈오는 민주당을 비롯한 여타 야당들은 자민당 출신 인사들이나 과거 연립 정부에 참여했던 세력들이 합류하여 만든 집단에 불과하여 자민당 정치의 가담자이자 패배의 역사를 공유한다고 본다. 전후 정치사에서 자민당 정치에 맞서 일관되게 대립각을 세우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온 정당은 일본 공산당뿐이라고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및 혁명적 정당론의 비판

 

 

시이 가즈오의 주된 논지는 계급 투쟁이나 자본주의 생산 양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아닌, ‘주민의 이익 대변’, ‘의회에서의 적극적인 발언’, ‘역사 인식 (식민지 지배 및 침략 전쟁 반대)’ 수준에 그친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강조하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 프롤레타리아 독재, 자본주의 체제 폐지와 같은 변혁적 사상 체계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글의 전반도 자본주의 내 개량 및 민주주의적 가치로 수렴되며, 핵심 가치는 평화헌법 수호’, ‘교육기본법 개악 저지’, ‘의회 민주주의 내 정당한 의정 활동등 거대 정당들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적·헌법적 가치의 원상 복원에 가까운 개념들이다. 사상적 기반이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이나 경제학 비판에 기초하기보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및 개혁적 민주주의 범주 내에 머물러 있다.

 

 

실천적 행보에서 배제되어 있는 지향점

 

 

시즈 가즈오가 강조하는 현장과 풀뿌리 조직의 역량은 결국 의회에서의 추궁과 발언’, ‘선거에서의 승리’, ‘지방 의석 확보라는 의회 정치적 결과물로 수렴된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이나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노동 운동 등 의회 제도의 틀에 국한된 것이 아닌 실천적 총파업·대중 투쟁 노선이 실질적으로 배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자민당·민주당 등 기존 정치 세력의 도덕적 타락과 우경화, 개헌 시도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지만, 국가 기구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배제되어 있어 현대 자본주의 국가 기구 (의회, 법원, 행정 조직) 자체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의회라는 기존의 제도적 틀 내부에서 더 정직하고 깨끗하며 주민을 위해 일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회주의적 개량주의에 실천에 방점이 찍혀 있다.

 

국제주의적 단결 및 생산 현장 중심 투쟁의 한계도 보인다.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 기준 역시 과거 침략 전쟁에 반대했던 역사적 도덕성신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단결이나,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자치·통제와 같은 노동 중심적 실천 지향은 담론에서 제외되어 있다.

 

 

시이 가즈오와 일본공산당의 소련 비판 및 그 역사적 한계

 


시이 가즈오와 일본공산당이 보인 소련 비판은 전후 일본이라는 정치·지형학적 조건 속에서 자당의 생존과 대중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전략적 선택의 성격이 짙다. 이러한 방식의 소련 비판과 정세 대응이 지닌 역사적 한계는 분명하다.

 

일본공산당의 소련 비판은 관료주의화된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에서 발생시킨 생산관계의 왜곡이나 계급적 한계를 구조적으로 규명하는 데로 깊이 나아가지 못했다. 대신 소련의 일국패권주의, 인권 억압, 독재적 통치 스타일 등을 비판하며 우리는 저들과 다른 성숙한 민주주의 정당임을 증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자본주의 세력의 반공 공세를 방어하는 데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사회적 생산 양식과 사회 모델을 제시하는 사상적 심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시이 가즈오는 과학적·체제론적 비판이 아닌 도덕적·자유주의적선 긋기의 한계를 보인다.

 

소련 및 서기장파와의 대립 (1960년대 50년 문제 및 중·소 분쟁 등) 과정에서 형성된 일본공산당의 자주 독립 노선, 의회주의적 자당 방어를 위한 정략적·사후적 정당화의 한계를 보이며 냉전기 일본 내에서 스탈린주의의 하수인이라는 공격을 피하고 의회 내 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선거 공학적 목적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정치적·지형학적 압박에 대응해 사후적으로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패권주의로 규정하여 단절을 선언하는 방식은, 마르크스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일관된 정세 분석이라기보다 의회 내 입지 강화를 위한 정세 추종적 탈색에 가깝다는 한계를 지닌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단결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 체제를 단순히 거부하고 단절해야 할 대상을 넘어선 타자로 규정하고 자국 내 선거와 평화헌법 수호라는 일국적 과제에 집중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세계 수준의 반자본주의 연대 전선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냉전 이후에도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서는 국제적 노동자 투쟁의 축을 구축하지 못하고, 일본 내부의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적 개량 정당과 유사한 지위에 머물게 된 원인이 되었다.

 

소련의 실패와 거리를 두기 위해 자유’, ‘민주주의’, ‘의회 절차’, ‘헌법 수호를 과도하게 강조한 결과, 일본 공산당의 노선은 체제 내화에 따른 변혁적 동력을 상실하고, 자본주의 국가 기구와 법질서 자체를 승인하는 틀 안에 갇히게 되었다. 소련식 독재를 경계하는 과정에서 체제 자체를 흔드는 혁명적·변혁적 실천 지향까지 함께 탈색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민당 정권이 구축한 전후 체제 내부에서 가장 깨끗하고 성실한 야당이라는 제약된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는 역사적 한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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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의 그늘: 우크라이나군의 동원 규모

 

우크라이나 정부 및 군 당국의 동원 계획 기준, 월 약 2~3만 명 수준의 충원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연간 단위로는 약 20~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새로 충원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여 법 개정 및 단속을 강화해 왔다. 장기전 속에서 우크라이나 군의 총 상비군 규모는 약 80~90만 명선, 예비역을 포함하면 100만 명 이상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나, 전선 손실 및 순환 근무 수요로 인해 끊임없는 신규 인력 충원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강제 동원방식과 사회적 마찰 (부시피카치야)

 

우크라이나 현지 및 국제 사회에서는 승합차를 이용한 강제 연행식 징집인 이른바 부시피카치야라 불리는 과격한 단속 방식이 주요 논란으로 부상했다. 징집 연령 기준을 기존 27세에서 25세로 하향 조정하고, 전자 등록 체계를 도입해 모바일 및 길거리 단속을 결합하고 있다. 병력 채우기 목표에 직면한 지역징집센터(TCC) 관계자들이 쇼핑몰, 대중교통, 거리 등에서 남성들을 강제로 승합차에 태우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되었으며, 인권 위원회 (Lubinets)에 접수된 TCC 관련 인권 침해 민원 건수가 2022년 수십 건에서 최근 연간 수천 건 단위로 급증했다.

 

동원 거부·탈영·유출 규모

 

강제 동원이 가속화되면서 부작용 또한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사법 당국 통계에 따르면, 전쟁 개발 이후 누적 무단 이탈 (AWOL) 수사 건수는 20만 건을 넘어섰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최근 1~2년 사이에 집중 발생했다. 탈영 입건 건수 역시 5만 건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징집 대상 연령대 남성 수만 명이 국경을 불법으로 넘거나, 해외 보호 신청으로 체류를 연장하는 등 징집 회피 현상이 본격화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 등록 통계 기준, 징집 연령대 남성 중 약 400만 명 이상이 아직 군에 복무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국가의 동원 압박과 민간의 회피 간 갈등이 지속되는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징집 체계는 3만 명 안팎, 연간 20~30만 명 규모의 병력 충원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입대 지원자의 고갈과 과격한 길거리 단속 방식이 맞물려 심각한 사회적 갈등, 탈영 급증, 인권 침해 논란이라는 그늘을 겪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 및 군 당국이 밝힌 공식 수치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는 월 평균 3만 명에서 34천 명 안팎의 인원을 지속적으로 동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및 군 수뇌부는 현재 전선의 방어선을 유지하고 인력 손실을 메우기 위해 최소 월 3만 명 이상의 충원이 불가피한 최저선이라고 설명한다. 징집을 담당하는 지역 징집 센터 (TCC)의 강제/경찰력 동원이 전체 신규 충원 인원의 약 90%를 차지한다. 군 부대 직접 모집 및 자발적 계약직 입대장의 비중은 10% 안팎에 불과하여, 사실상 월 3만 명 대부분이 국가의 강제적 단속과 행정 명령에 따라 군에 배치되는 구조이다. 3만 명 동원에 따른 전선에서의 사상자 발생의 빈자리를 채우는 한편, 장기간 전투로 지친 기존 장병들의 순환 근무 및 휴가를 위해 지속적인 인력 투입이 요구된다. 우크라이나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의 월 동원 규모는 우크라이나보다 약 1만 명 이상 많은 월 4~45천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숫자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동원 압박을 완화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024년 중반 징집 연령 하향 (2725) 및 전자 등록제 도입 직후에는 월 3만 명 목표치를 상회하기도 했으나, 징집 대상 인원 고갈과 회피 현상 심화로 인해 실질 충원율이 다시 저하되거나 과격한 현장 단속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3만 여 명 규모로 동원되는 인력은 통상 1~2개월 안팎의 기초 군사 훈련만 거친 뒤 전선 부대에 배치되고 있어, 숙련도 부족 및 조기 손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연간 동원 목표치 및 인원의 세부 구성 요소의 한계

 

2023년 말~2024년 초 군 수뇌부 (당시 발레리 잘루즈니 총사령관 등)는 전선에서의 심각한 인력 부족과 장기전 대처를 위해 추가로 45~50만 명 규모의 대규모 연간 동원이 필요하다고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50만 명 동원에 필요한 조세·재정 부담, 경제 파급력, 사회적 반발을 고려해 대통령과 정부는 해당 수치를 재검토했다. 이후 연간 최소 2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 수준의 현실적 목표치로 하향 조정하여 충원 절차를 진행해 왔다.

 

연간 20~30만 명이라는 목표 수치는 단순히 전선 인원을 늘리기 위한 목적에 그치지 않으며, 크게 세 가지 수요로 분할된다.

 

1. 전사상자 손실 보충: 연간 목표치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최전선에서 발생하는 전선·전상자 및 질병·부상으로 인한 임무 불가 인원을 메우기 위한 즉각적인 대체 인력이다.

 

2. 복무 장기화에 따른 순환 배치: 2~3년 이상 전선에 고립되어 싸워온 장기 복무자들의 교체 및 휴가 제공, 후방 재편성을 위한 예비역 교체 수요이다.

   

3. 신규 여단 창설 및 예비 전력 확보: 서방에서 지원되는 신규 무기 및 장비를 운용할 신규 여단을 편제하고, 적의 대규모 공세에 대응할 전략 예비대를 구성하기 위한 인력이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연간 목표 달성이 차질을 빚자 2024년 중반부터 강력한 법적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시행했다. 기존 27세였던 최소 징집 연령을 25세로 전격 하향 조정하여 청년층 대상 인력 풀을 확충했다. 기존의 면제 사유 (건강 상태, 다자녀 가구, 간병인 지정 등)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병역 의무를 완화해 주던 행정적 허점을 차단했다. 모든 징집 대상 남성이 모바일 및 전자 체계에 따른 자신의 개인정보와 거주지를 정해진 기한 내에 최신화하도록 법제화했다. 미등록 시 금융 거래 제한, 운전면허 정지, 과태료 부과 등의 불이익을 적용했다.

 

강화된 법안 도입 초기에는 동원 수치가 일시적으로 반등했으나, 징집 회피 현상 심화 및 대상 인원 고갈로 인해 연간 목표치를 안정적으로 채우는 데 지속적인 난항을 겪었다. 군인 1명을 동원하여 훈련하고 무장시키는 데 연간 수십만 흐리우냐 이상의 예산이 소요되며, 이는 경제 활동 인구의 직장 이탈로 이어져 국가 세수 감소라는 중복 악재를 초래했다. 연간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한 현장 TCC (지역징집센터)의 실적 압박이 강해지면서, 길거리 강제 연행 및 인권 침해 사례가 상시화되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상비군 및 예비군 체급

 

개전 전 약 20만 명 수준이던 우크라이나 상비군 전력은 전면전 개시 및 국가총동원령 발령 이후 약 4~5배 이상 급증하여 현재 8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육군 상비군의 중추로 약 50~60만 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핵심 전투 여단 (기계화·보병·포병 등)을 형성한다.

 

국토 방위군은 개전 초기 자발적 민병대로 출발했으나 현재는 군 정규 체계로 편입되어 지역 방어 및 후방 경계, 전선 보충 전력으로 약 10~15만 명 규모를 구성한다.

 

공군·해군·특수작전군 (SOF)·공중강습군 및 드론전력군은 항공, 해안 방어, 특수작전 및 2024년 신설된 드론 전담 부대 등에 약 15~20만 명이 배치되어 있다.

 

내무부 산하 국가친위대 및 국경검문단은 준군사조직 성격으로 약 10~25만 명이 전선 지원 및 치안·국경 경무를 담당한다.

 

공식적·행정적 예비군 수치는 매우 거대하지만, 실제 전투 가용 인원 간에는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

 

1차 예비역으로는 군 복무 경험이 있거나 2014년 이후 동부 전선 (ATO) 실전 경험을 가진 핵심 예비역으로, 개전 초기에 이미 대부분 현역 부대로 편입되어 소모된 상태이다.

 

명부상 예비군 (전체 등록 자원)은 우크라이나 행정 등록 통계 및 세계 군사 통계에 따르면, 과거 군 복무 이력자 및 동원 대상자를 포함한 예비역 명부 체급은 약 90만 명에서 최대 400만 명에 달한다.

 

실질 가용 자원 (300~400만 명 중 일부)은 징집 연령대 (25~60) 남성 중 군에 복무하지 않은 인원이 수백만 명 존재하지만, 국외 유출, 국경 이탈, 건강상 부적격, 국가 필수 산업 종사 (유예자) 등을 제외하면 현장에 즉시 투입 가용 실질 자원은 크게 제한되어 있다.

 

상비군 체급 유지의 한계와 병목 현상도 심화되었다. 100만 명 규모의 대대적인 상비군을 전선에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달 발생하는 전사, 전상, 질병, 탈영 인원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월 3만 명 규모의 신규 징집이 이루어져야만 체급이 유지되는 구조이다.

 

대규모 징집을 거치며 현역 장병의 평균 연령이 40세 안팎으로 높아졌다. 청년층 보호를 위해 징집 연령 하한선 (25)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체력적 소모가 심한 최전선 전투력 유지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100만 명의 상비군에게 월급, 식량, 군복, 무기, 탄약을 제공하는 비용은 우크라이나 국가 재정 (GDP 및 정부 지출의 상당 부분)과 서방의 군사 지원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우크라이나는 상비군 80~100만 명, 준군사조직 10~25만 명을 합쳐 세계 최고 수준의 대규모 군사 체급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를 유지하기 위한 지속적인 인력 소모와 인력 풀의 고갈로 인해 강제 징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청년층 인구 감소와 경제 허리층 보호를 위해 최저 징집 연령을 27세로 유지해 왔으나, 최전선 인력 고갈로 인해 법안을 전격 개정했다 (법안 제3127-IX). 25세 이상~60세 이하의 남성이 즉시 강제 동원 대상 (의무 복무 대상자)으로 편입되었다. 징집 연령 미만인 18~24세 남성에게는 기존의 입대 의무 대신 3~5개월간의 기초 군사 훈련 및 의무 교육 과정을 거치도록 개편했다. 훈련을 마친 인원은 25세 도달 시 즉시 현역으로 차출될 수 있는 자원으로 분류된다.

 

징집 대상을 추적하고 거주지 불명 등으로 인한 회피를 차단하기 위해 행정 및 디지털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18~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은 거주지, 전화번호, 이메일 등의 최신 정보를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의무적으로 최신화해야 했다. 모바일 앱을 출시하여 비대면으로 군적을 등록하고 전자 군사 ID를 발급받도록 유도했다. 외출 시 신분증과 함께 군적 증명서를 상시 지참해야 하며, 경찰, 국경경비대, TCC (지역징집센터) 직원이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상시 검문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기존 법의 허점을 이용한 징집 회피를 막기 위해 예외 조항을 엄격하게 재편했다. 기존에 부분적 건강 이상으로 현역 입대가 면제되었던 등급을 전면 폐지했다. 해당 판정을 받았던 인원들은 일정 기간 내 재검진 (MMC)을 받아 적합또는 완전 부적합으로 재분류되도록 강제하여 동원 자원으로 끌어들였다. 학업을 이유로 한 징집 유예는 이전 학위보다 더 높은 단계의 정규 학위 과정을 밟는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인정하여, 징집을 피하기 위한 반복적인 대학 재입학이나 동일 학위 재등록을 차단했다. 다자녀 가구라도 양육비 체납 이력이 있거나, 장애인 가족 간병을 이유로 유예를 신청할 경우 실질적인 대체 간병인이 없는지 엄격히 검증하도록 바꿨다.

 

징집 명령이나 정보 최신화 요구에 응하지 않는 남성들에 대해 행정적·경제적 불이익 조치를 명시했다. TCC의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법원 판결로 운전면허를 일시 정지할 수 있도록 했다. 군적 등록 및 동원법 위반 시 부과되는 벌금을 종전 대비 수배 이상 인상 (최대 25,500 흐리우냐 수준)했다. 해외에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 남성이 여권 재발급이나 영사 업무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전자 등록으로 군적을 최신화했음을 증명해야 하도록 제한 조치를 내렸다.

 

강화된 동원법 개정안의 초안에는 ‘36개월 이상 복무한 장장기 복무자의 제대 기준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군 수뇌부 (올렉산드르 시르스키 총사령관 등)의 요쳥으로 제대 관련 조항이 최종안에서 삭제되었다. 2022년 개전 초기 자발적으로 입대한 장병들과 그 가족들 사이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기한 복무에 갇혔다는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전선 복무자의 제대가 어려워지면서 신규 인력 충원 요구는 더 가혹해졌고, 이는 현장의 강제 연행식 징집과 탈영/복무 이탈 급증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부시피카치야의 구체적 단속 양상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부시피카치야라는 신조어로 불리는 현장 강제 연행 방식은 대표적인 과잉 단속 사례다. TCC 직원들은 경찰과 합동으로 대중교통 승강장, 지하철역, 지하철 입구, 쇼핑몰, 체육관, 공연장 주변 등을 기습적으로 통제한다. 2024년 말 키이우 스포츠 궁전에서 열린 대형 콘서트장 입구를 수백 명의 TCC와 경찰이 봉쇄하고 남성들의 신원 증명서를 일제히 검문해 즉석 연행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신분증이나 군적 증명서를 지참하지 않았거나 등록 정보가 부실한 남성을 사전 서면 통지 없이 현장에서 즉시 무력으로 압송한다. 사복이나 군복을 입은 단속원들이 대상자를 승합차에 강제로 밀어 넣는 영상이 SNS로 지속해서 유포되고 있다. 연행 직후 TCC 시설에 기습 구금하여 외부 (가족, 변호사)와의 연락을 차단한 채, 수 시간 내에 신체검사 절차를 속성으로 끝내고 바로 훈련소로 이송하는 사례가 다수 보고되었다.

 

할당된 동원 실적을 채우기 위한 TCC 단속원들의 폭력과 부주의로 인해 치명적인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단속에 저항하거나 연행을 거부하는 민간인을 향해 최루가스를 분사하거나, 길거리에서 폭행 및 구타를 가하는 행위가 문제시되었다. UN 우크라이나 인권감시단 (HRMMU) 및 현지 사법 당국 보고에 따르면, 징집센터로 끌려간 인원이 체포 및 조사 과정에서 머리 등에 치명적인 타박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된 후 사망하거나 구금 시설 내에서 숨진 사건이 확인되었다. TCC 측은 지병으로 인한 심장마비의식 불명으로 인한 낙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유가족과 인권단체는 과도한 폭력 및 치료 방치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중증 지병이나 신체 장애가 있는 인원임에도, 군의무위원회 (MMC)가 형식적인 검진만 거쳐 복무 적합판정을 내린 후 전선에 배치하는 의료 방임·불법 판정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과잉 단속 및 인권 침해 양상은 국가 기관과 국제 기구의 공식 통계로도 확인된다.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옴부즈맨 (드미트로 루비네츠)에 접수된 TCC 관련 인권 침해 및 불법 연행 민원 건수는 전쟁 초기 수십 건에 불과했으나, 최근 연간 수천 건 단위 (6,000건 이상)로 폭증했다. 옴부즈맨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TCC의 불법 강제 징집과 관련한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럽연합 인권담당관과 UN 인권고등판무관실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전달한 보고서에서 강제 연행, 폭행, 변호인 접견권 박탈, 장애인에 대한 무차별 동원 등 체계적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공식 지적하며 독립적인 감시 기구 신설을 촉구했다.

 

TCC의 무력 동원이 일상화되면서 민간인과의 유혈 충돌 및 법 집행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시민들이 단속 중인 TCC 차량을 둘러싸고 물리적으로 연행을 막아서거나 징집관과 몸싸움을 벌이는 일이 빈번해졌다. 심지어 분노한 시민이 TCC 직원을 향해 흉기를 휘둘러 징집관이 사망하거나 TCC 건물에 화염병을 투척하는 폭력 사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징집 연령대 남성들이 TCC 단속을 피해 직장을 그만두고 외출을 완전히 삼가는 은둔 생활을 선택함에 따라 자영업, 건설, 물류 등 민간 경제 현장의 인력난이 가중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단 이탈 (AWOL, 부대 무단 이탈) 및 탈영 수치의 세부적인 현황으로는 우크라이나 형법은 단순 복무 이탈 (407)과 복무 의무를 완전히 버릴 목적으로 이탈하는 탈영 (408)을 구별하여 사법 처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실과 현지 사법 당국 통계에 따르면, 개전 (20222) 이후 누적 입건된 이탈·탈영 사건은 총 25만 건 이상에 달한다.

 

무단 이탈 (AWOL) 입건 수치

 

2022: 6,988

 

2023: 17,658

 

2024: 67,840(전년 대비 약 4배 급증)

 

2025(1~7): 110,511(불과 7개월 만에 과거 3년 누적치를 상회)

 

탈영(Desertion) 입건 수치

 

2022~2025년 중반 기준 50,000건 이상

 

전쟁 장기화로 복무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강제 동원 (부시피카치야)이 가속화된 2024~2025년 기간에 이탈 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공식 허가 없이 복무지나 부대를 이탈한 병력의 실질적 누적 규모를 약 20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체 상비군 전력 (80~100만 명)의 약 20%에 해당하는 거대한 수치다. 부대 이탈자 외에도 TCC (지역징집센터)의 징집 통지서 수령을 거부하거나 신원 등록을 하지 않아 경찰 과 사법 당국에 병역 기피자로 수배 및 추적 명부에 오른 인원은 2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개별적인 무단 이탈 외에도, 전선 소모전 속에서 중대·대대급 집단 이탈 사례가 잇따라 발생했다. 2024년 말 우흘레다르 방어전 당시 제123국토방우여단 소속 수백 명의 장병이 압도적인 화력 차이와 병력 부족, 지휘관과의 갈등을 이유로 진지를 버리고 단체로 이탈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방 국가 (독일, 영국 등)로 신규 장비 운용 및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파견된 이탈자도 속출했다. 독일 주간지 등 외신에 따르면, 독일 군사훈련장에서 훈련을 받던 우크라이나 군인 수십 명 이상이 현지에서 무단 이탈하여 자취를 감추는 사례가 보고되었다.

 

탈영 건수가 폭증하자 우크라이나 사법 당국 및 국방부는 다음과 같은 현실적 한계와 비상 조치에 직면했다. 무단 이탈 발생 건수가 전 사법 기관의 수사 역량을 초과함에 따라, 실제 수사를 거쳐 정식 기소되거나 재판에 넘겨진 비율은 전체 사건의 7% 안팎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탈자들을 형사 처벌하는 것보다 전선으로 북귀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최초 이탈자에 한해 자발적으로 부대로 복귀할 경우 형사 처벌을 면제하고 급여와 복지 혜택을 재개한다는 법안을 승인 및 시행했다. 이 조치 등으로 보름~수개월 사이 약 3만 명 안팎의 이탈 장병이 전선 부대로 자진 복귀하기도 했으나, 이탈의 근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아 재이탈률 또한 지속해서 발생하는 실정이다.

 

복무 기한 (36개월 제대안) 조항이 전면 삭제되면서 부상을 입거나 전사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이탈로 이어졌다. ‘부시피카치야로 인해 길거리에서 강제로 끌려온 인원의 경우, 자발적 입대자에 비해 복무 의지와 충성도가 극히 낮아 배치 직후 이탈할 확률이 매우 높다. 최소한의 순환 배치 없이 장기간 최전선에 고립되면서 극심한 전투 피로와 PTSD를 겪은 장병들의 무단 이탈이 상시화되었다.

 

국경 탈출 및 적발 수치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 (SBSU) 및 의회 보고서, 외신 통계에 따르면 징집을 피해 국경을 넘으려다 적발되거나 성공한 인원은 수만 명 단위에 달한다. 개전 이후 국경 검문소나 산악·강경계 지역에서 불법 탈출을 시도하다 우크라이나 국경경비대에 적발된 징집 대상 남성은 누적 45,000~5만 명 이상으로 집계된다. 루마니아, 몰도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인접국 정부 통계에 따르면, 국경을 넘은 뒤 현지 당국에 난민 또는 보호 신청을 내며 체류를 인정받는 징집 대상 남성은 최소 2~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산악 지대 (카르파티아 산맥)를 도보로 넘거나 티사 강을 헤엄쳐 건너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이 과정에서 익사하거나 익사체로 발견되는 남성이 수십 명 이상 발생해 현지에서 죽음의 강으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 EU 국경 단속이 강화되자 상대적으로 단속이 허술한 국경이나 벨라루스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비율이 이전 대비 대폭 증가했다.

 

국경 통제가 엄격해짐에 따라 징집 회피를 돕는 조직적인 범죄 브로커 네트워크가 텔레그램 등을 중심으로 거대 암시장을 형성했다.

 

밀탈출 비용 (1인당 5,000 ~ 15,000달러)

 

위험 경로 (산악·강 도보 통과)1인당 약 5,000 ~ 8,000달러 선으로, 국경경비대의 순찰 사건을 피해 감시망을 우회하는 국경 접근 지지도 및 도보 가이드를 제공한다.

 

안전 경로는 1인당 10,000 ~ 15,000달러 이상으로, 단속 초소를 우회하는 전용 차량 운격 지원 및 국경 인근 브로커 조력망이 결합된 형태다.

 

허위 문서 및 체계 조작 암거래는 의료진 및 병역판정위원회 (MMC)에 뇌물을 주고 허위 장애 판정이나 복무 불인정 진단서를 발급받는 비용이 수천 달러에 거래된다.

 

슐라흐 (Shlyakh)’ 인도적 운송 체계 악용으로 구호물자 운송 기사나 인도적 지원 활동가 명목으로 출국 허가를 받아낸 뒤 해외로 나간 후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이 체계로 탈출한 인원만 수만 명에 달한다.

 

해외로 피신해 체류 중인 남성들의 문제가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 국가 간의 외교적·사회적 이슈로 확대되었다. 유로스탯 (Eurostat) 통계에 따르면, EU 국가 내에서 임시 보호 지위를 얻어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인 약 400만여 명 중 20% 이상 (80~90만 명)이 징집 대상 연령대의 성인 남성이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해외 체류 남성들의 귀국 및 징집 등록을 강제하기 위해, 전자 군적 (Reserve +) 등록을 완료하지 않은 해외 남성에 대해 여권 재발급 및 영사 업무 제공을 전면 중단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EU 인접국들에 병역 기피자들의 강제 송환을 요청했으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인권법 및 자국 난민 보호 법적 절차를 이유로 단순 병역 기피자를 강제로 우크라이나로 송환하는 것에 불응하거나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경을 넘지 못한 우크라이나 남성들 사이에서도 징집을 피하기 위한 생활 방식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TCC (지역징집센터)의 단속을 피하기 위해 공식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현금 결제 위주의 비공식 노동에 종사하거나, 거주지를 등록하지 않은 친인척 집으로 옮겨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남성들이 늘어났다. 지역별로 TCC 단속원과 승합차가 어디에서 검문을 진행 중인지 실시간으로 제보하고 공유하는 텔레그램 단체방 (회원 수 수십만 명 규모)이 활발하게 운용되고 있으며, 당국은 이를 채널의 운영자를 처벌하거나 차단하는 조치를 지속하고 있다. 징집 유예 조건을 얻기 위해 연령대가 높은 대학/대학원 과정에 형식적으로 재입학하거나, 장애인과의 허위 혼인, 다자녀 가구로의 명의 변경 등 행정적 허점을 이용한 회피 기법이 성행했다.

 

우크라이나 의회 경제개발위원회 및 국가 등록 통계에 따르면, 개전 후 징집 연령대에 해당하는 25~59세 남성 인구는 총 약 1,110만 명 (1,1106,000여 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이는 1,110만 명 전체가 즉시 현장에 투입 가용 자원은 아니며, 법적·물리적 사유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부 분류된다.

 

1,100만 명 중 군 복무에 직접 동원할 수 없는 인원은 전체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개전 후 불법/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었거나 전쟁 전부터 해외에 거주하던 징집 대상 남성이다. 유럽연합 (EU) 국가 내 임시 보호 지위를 신청한 우크라이나 성인 남성만 약 80~90만 명에 달하며, 전체 해외 체류자는 수백만 명 규모다.

 

· 장애 및 건강 이상 판정자 (15만 명): 신체적·정신적 장애나 중증 지병으로 인해 법적으로 복무가 불가용한 인원이다.

 

· 국가 필수 산업 지정 및 유예자 (60~100만 명): 방위 산업, 에너지, 수송, 공공 행정 등 국가 기능 유지 및 필수 경제 활동을 위해 법적으로 징집이 유예 (예약)된 남성들이다.

 

이미 복무 중인 전력 (100만 명): 상비군, 국토방위군, 경찰, 국경경비대 등 이미 군에 편입되어 복무 중인 인원이다.

 

위의 유예·장애·해외 체류 및 기존 복무자를 제외하고 국내에 체류하면서 복무 경험이 없는 실진 동원 가용 자원은 약 300~4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미등록 및 음지체류자 (150~200만 명)은 전자 등록제 (Reserve+)나 징집센터 (TCC)에 자신의 최신 거주지 및 신원 정보를 최신화하지 않고 추적을 피해 경제 활동을 대면/현금화하거나 은둔 생활을 하는 남성들이다. 사법 당국의 추적 대상자 (200만 명)은 우크라이나 국방부 및 사법 당국 발표에 따르면, 징집 통지서 수령 거부, 군적 미등록, 검진 기피 등으로 인해 병역 기피 수배 명부 및 신원 추적 데이터베이스에 오른 남성이 약 200만 명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징집 연령 하한선을 25세 미만으로 쉽게 내리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구 구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2000년 대 초반 극심한 저출생을 겪어, 현재 18~24세 연령대 나성 인구는 약 150만 명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30~40대 연령군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장 작은 인구 집단이다. 1824세 청년층을 대규모로 전선에 동원하여 손실될 경우, 전쟁 이후 국가 재건과 인구 재생산 (출산율)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하여 해당 연령대는 자발적 계약 입대 (특례 프로그램) 외의 강제 징집을 유예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서류상 1,110만 명이라는 거대한 남성 인구 자원을 가지고 있으나, 해외 유출, 장애/건강 부적격, 경제 필수 인력 유예, 그리고 200만 명에 달하는 미등록·기피자로 인해 현장에서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인력 풀은 고갈 상태에 직면해 있다. 이 때문에 국가가 남은 자원을 끌어모으기 위해 과격한 현장 단속과 법적 압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강제 징집 동원의 사회·경제적 결론

 

징집 연령대 (25~59) 남성은 공장, 건설, 물류, IT, 자영업 등 민간 경제의 핵심 생산 축이다. 이들의 대규모 동원과 단속을 피하기 위한 은둔형 경제 활동 (음지화)으로 인해 산업 현장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다. 국제노동기구 (ILO)는 우크라이나 노동 시장에 심각한 공백이 발생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미등록 남성들의 비공식 현금 노동 선호로 인해 근로소득세와 기업 세수가 대폭 감소했다. 반면, 100만 명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한 식량, 무기, 월급 등 군사 지출은 지속 증가하여 서방의 재정 지원 없이는 자체 유지가 어려운 구조적 적자에 직면해 있다. 징집 면제 진단서 거래, 해외 도피 브로커 네트워크, TCC 단속 회피 암거래 등에 수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며 거대 지하 경제가 형성되었고, 이는 국가 부패지수를 악화시키고 경제 순환을 교란하고 있다.

 

재력이나 권력이 있는 기득권층은 뇌물, 유학, 해외 피신 등으로 징집을 피하고, 농촌 지역 남성들이 집중적으로 길거리 강제 연행 (부시피카치야)의 대상이 된다는 박탈감이 극에 달했다. 전선에서 생사를 넘어 돌아온 참전 용사들 (부상자, 제대자)과 후방에서 징집을 회피하며 일상을 유지하던 민간인 간의 상호 불신 및 도덕적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이는 향후 전후 사회에 거대한 장벽이 될 것으로 평가된다. 지역징집센터 (TCC)가 방어의 주체가 아니라 인민을 사냥하는 압제 기관으로 여겨지면서, 인민들이 징집관을 습격하거나 화염병을 던지는 등 법 집행 기관에 대한 저항 행위와 사회적 파편화가 상시화되었다.

 

강제 징집은 당장의 전선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생존 수단이지만, “국가를 지키기 위해 강제력을 동원할수록, 그 국가 내부의 사회적 합의와 자립적 경제 기반이 파괴되는 모순을 만들고 있다. 강제 징집 체제의 폭력성은 우크라이나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하고 지배 체제와 인민 대중 간의 균열을 돌이킬 수 없이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전후 자본주의적 통치 질서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타격하는 결정적 계급적 모순으로 작용한다.




<'가혹 징집' 논란 기사, 2025. 08.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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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혁명에 맞추어, 


프랑스에서는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사건'을 기점으로, 1792년 9월 제1공화국이 성립되며 왕정이 폐지되었다. 이후 1793-1794년 공포 정치가 전개되었고,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 쿠데타가 공포 정치 이후의 혼란기를 종식하며 프랑스 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이 시민 혁명이 막을 내린 지 어느덧 200여 년이 흘렀다. 이 부르주아 혁명의 유산은, 서구 시민 혁명의 역사가 군주제라는 암흑기로 시작해 다시 군주제로 귀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반동 세력의 집요한 도전에 맞서지 못하고 패배한 결과였다. 


그러나 우리의 핏줄에는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 혁명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부르주아의 유산이 통령 정부라는 실권 아래 다시 권력을 장악하려 할 때도, 전 세계의 노동 계급은 그 유산을 뒤집어엎고 모든 권력을 본래의 주인인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돌려놓았다.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부르주아 국가의 지배 계급은 혁명의 유산이 이제 종말을 고했으며, 1990년대 이후로 더 이상의 혁명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자본가 계급이 구축한 부르주아 독재는 수 세기 동안 방치된 채 인민 국가의 소박한 사회주의적 요구마저 무시해 왔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노동자의 당연한 희생으로 정당화해 왔다. 노동자들의 계급 투쟁 의식에 결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겼다. 산업 혁명 이후 점차 개인화된 희생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유산이 곧 부르주아와의 철저한 단절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46년에는 중국 혁명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1953년에는 쿠바 혁명의 포성이 울렸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부르주아 국가의 인민들은 혁명에 대한 정보조차 통제당한 채, 혁명의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차단된 정보 속에서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노동자 인민을 저버렸다. '부의 축적'을 위한 사유 재산권이야말로 모두가 누릴 자유라 기만하면서, 타국 무고한 인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통령 권력의 주인을 자처하고 있다. 미래의 고도화된 기술을 둘러싸고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정작 이 혁명의 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망각하고 말았다. 이는 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지금까지 걸어온 결론이자, 보나파르트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나 부르주아 국가 간 전쟁이 인민 학살의 원천이 되던 시절에도 변함없는 결론이었다. 대혁명의 거대한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일생은 보잘것없이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생애가 모여 방대한 투쟁의 역사를 이룬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리는 지금,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평화의 구호가 아닌 계급적 적대와 투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 분열의 현실 앞에서, 이러한 혁명의 주체는 시민권을 독점한 자본가가 아닌 오직 노동자뿐임을 역사는 증명한다. 혁명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수많은 혁명가들의 피와 노력이 이 길에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민의 승리는 단순한 혁명의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혁명에 맞선 장기간의 투쟁끝에 완성되는 법이다. 이들의 노고와 함께 우리는 계속 전진할 것이다. 착취의 사슬을 끊어내는 것은 우리의 관념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존재 자체이다. 



В преддверии надвигающейся революции,

 

Во Франции, начиная с «Взятия Бастилии» 14 июля 1789 года, через провозглашение Первой республики в сентябре 1792 года была упразднена монархия. Вслед за этим, в 17931794 годах, развернулся Великий террор, а 9 ноября 1799 года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переворот Наполеона положил конец периоду хаоса, последовавшему за террором, и тем самым Французская революция завершилась. С момента окончания этой буржуазной революции прошло уже более 200 лет. Наследие этой буржуазной революции показывает, что история западных гражданских революций началась с мрачной эпохи монархии и в конечном счете снова вернулась к монархии. Это стало результатом неспособности противостоять упорным вызовам реакционных сил и последующего поражения.

 

Однако в нашей крови течет история двух русских революций: Февральской и Октябрьской. Когда буржуазное наследие пыталось вновь захватить власть под реальным прикрытием правительства Консулата, рабочий класс всего мира ниспроверг это наследие и вернул всю власть ее законному хозяину — пролетариату. Прошло уже более 100 лет. Правящий класс буржуазных государств утверждал, будто наследие революции подошло к концу и после 1990-х годов никаких революций больше не будет. Но это ложь. Диктатура буржуазии, выстроенная классами капиталистов, оставалась безнадзорной на протяжении веков, игнорируя даже скромные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е требования народн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и оправдывала собственные интересы закономерными жертвами рабочих. Это оставило неизгладимый след в сознании классовой борьбы трудящихся. Именно поэтому мы не должны забывать, что даже в условиях жертв, становившихся всё более индивидуализированными со времен промышленной революции, наследием пролетарской революции является полный и решительный разрыв с буржуазией.

 

В 1946 году были заложены основы Китайской революции, а в 1953 году прозвучали выстрелы Кубинской революции. Даже во время свершения революций народы буржуазных государств подвергались информационной блокаде, не зная о приближении революционной эпохи и будучи вынужденными продолжать борьбу в условиях изоляции от информации. Это то, что продолжается и в современности.

 

Они предали трудящийся народ. Обманывая всех тем, что право частной собственности ради «накопления богатства» якобы и есть свобода для каждого, они провозглашают себя хозяевами власти Консулата ценой жертв невиновных народов других стран. Вокруг будущих высокоразвитых технологий сталкиваются самые разные мнения, однако все забыли о том, что наследие этой революции всё еще живо. Это вывод, к которому до сих пор шел европейский класс буржуазии, и вывод, который оставался неизменным как во времена буйства Бонапарта, так и в эпохи, когда войны между буржуазными государствами становились источником геноцида народов. По сравнению с величественной историей Великой революции человеческая жизнь незначительна и коротка. Однако эта история доказывает, что именно слияние этих коротких жизней образует грандиозную историю борьбы.

 

Сегодня, когда по всему миру гремят канонады войн, мы не должны забывать: то, чего мы должны требовать — это не лозунги о мире, а классовая вражда и борьба. Перед лицом реальности классового раскола история доказывает, что субъектом такой революции являются не капиталисты, монополизировавшие гражданские права, а исключительно рабочие. Революция не осталась в прошлом — она продолжается прямо в эту минуту. Нельзя забывать, что в этот путь вложены кровь и усилия бесчисленных революционеров. Победа народа не ограничивается лишь моментом революции; она достигается в ходе длительной борьбы против контрреволюции. Вместе с их трудом мы будем непрестанно двигаться вперед. Разрыв цепей эксплуатации — это не наша абстрактная идея, а само наше существование.

 

 

在即将到来的革命面前

 

在法国1789714日的攻占巴士底狱为起点随着17929月法兰西第一共和国的成立君主制被废除随后在1793年至1794年间展开了恐怖统治1799119日拿破仑的政变结束了恐怖统治后的混乱时期法国大革命由此落下帷幕自这场资产阶级革命落幕以来不知不觉已过去了200多年这场资产阶级革命的遗产表明西方公民革命的历史始于君主制这一黑暗时期最终又回归于君主制这是未能抵御反动势力执着挑战而导致失败的结果

 

然而我们的血管里淌着两次俄罗斯革命的历史那便是二月革命和十月革命当资产阶级的遗产试图在执政政府的实权掩护下再次夺取政权时全世界的工人阶级推翻了那一遗产将一切权力交还给了它的真正主人——无产阶级100多年过去了资产阶级国家的统治阶级断言革命的遗产如今已告终结1990年代以后将不再有革命但那是谎言资本家阶级构建的资产阶级专制数个世纪以来听之任之甚至无视人民国家朴素的社会主义要求将自身的利益正当化为工人理所应当的牺牲这在工人们的阶级斗争意识中留下了永不磨灭的创伤这正是在工业革命后逐渐个人化的牺牲中我们绝不能忘记无产阶级革命的遗产就是与资产阶级彻底决裂的原因

 

1946中国革命奠定了基础1953古巴革命打响了枪声在革命进行期间资产阶级国家的人民甚至连革命的信息都受到管制在无法得知革命时代即将到来被封锁的信息中继续斗争这种情况在现代依然在发生

 

他们抛弃了劳动人民他们将为了积累财富的私有财产权诓骗为所有人享有的自由以他国无辜人民的牺牲为代价自诩为执政权力的主人围绕未来高度发达的技术虽然存在着各种对立意见但大家却都忘记了这场革命的遗产依然活着这一事实这是欧洲资产阶级至今走来的结论也是在波拿巴猖獗的时代或是资产阶级国家之间的战争成为屠杀人民源泉的时代里始终未变的结论与大革命的宏伟历史相比人的一生渺小而短暂然而历史证明正是这短暂的一生汇聚在一起构成了庞大的斗争史

 

在全世界炮火连天战火纷飞的当下我们绝不能忘记我们应该要求的不是和平的口号而是阶级敌对与斗争在严峻存在的阶级分裂现实面前历史证明这场革命的主体绝不是垄断了公民权的资本家而唯有工人革命并没有停留在过去此时此刻也正在进行中切不可忘记无数革命者的鲜血与努力凝结在这条道路上人民的胜利绝不仅仅止于革命的瞬间而是在同反革命进行长期斗争后方能完成伴随着他们的辛劳我们将继续前行斩断剥削的锁链靠的不是我们的观念而是我们存在本身

 

 

Ante la revolución que se avecina,

 

En Francia, comenzando con la «Toma de la Bastilla» el 14 de julio de 1789, la monarquía fue abolida con la proclamación de la Primera República en septiembre de 1792. Posteriormente, entre 1793 y 1794 se desató el Terror, y el 9 de noviembre de 1799, el golpe de Estado de Napoleón puso fin al período de caos posterior al Terror, concluyendo así la Revolución Francesa. Han pasado más de 200 años desde que concluyó esta revolución burguesa. El legado de esta revolución burguesa demuestra que la historia de las revoluciones ciudadanas occidentales comenzó con la oscura era de la monarquía y culminó, en última instancia, regresando a la monarquía. Este fue el resultado de no haber podido resistir los tenaces desafíos de las fuerzas reaccionarias y sufrir una derrota.

 

Sin embargo, por nuestras venas corre la historia de dos revoluciones rusas: la Revolución de Febrero y la Revolución de Octubre. Incluso cuando el legado burgués intentó apoderarse nuevamente del poder bajo el dominio real del Gobierno del Consulado, la clase obrera de todo el mundo derrocó ese legado y devolvió todo el poder a su verdadero dueño: el proletariado. Han pasado más de 100 años. La clase dominante de los Estados burgueses afirmó que el legado de la revolución había llegado a su fin y que, después de la década de 1990, no habría más revoluciones. Pero eso es una mentira. La dictadura burguesa construida por la clase capitalista ha permanecido desatendida durante siglos, ignorando incluso las modestas demandas socialistas del Estado popular, y ha justificado sus propios intereses a costa del inevitable sacrificio de los trabajadores. Esto dejó una herida imborrable en la conciencia de la lucha de clases de los trabajadores. Esta es la razón por la que, incluso en medio de sacrificios cada vez más individualizados desde la Revolución Industrial, no debemos olvidar que el legado de la revolución proletaria es una ruptura radical e intransigente con la burguesía.

 

En 1946 se sentaron las bases de la Revolución China, y en 1953 resonaron los disparos de la Revolución Cubana. Incluso mientras las revoluciones estaban en curso, los pueblos de los Estados burgueses vieron censurada la información sobre la revolución y se vieron obligados a continuar su lucha en medio del aislamiento, sin saber que la era de la revolución estaba llegando. Esto es algo que sigue ocurriendo hoy en día.

 

Ellos traicionaron al pueblo trabajador. Engañando a todos con que el derecho a la propiedad privada para la «acumulación de riqueza» es la libertad que todos disfrutan, se proclaman dueños del poder del Consulado a costa del sacrificio de pueblos inocentes de otros países. Aunque existen opiniones encontradas sobre las futuras tecnologías avanzadas, todos han olvidado el hecho de que el legado de esta revolución sigue vivo. Esta es la conclusión a la que ha llegado la clase burguesa europea hasta el día de hoy, y una conclusión que permaneció inalterada tanto en la época en que Bonaparte hacía de las suyas como en las eras en que las guerras entre Estados burgueses se convertían en la fuente del genocidio de los pueblos. En comparación con la monumental historia de la Gran Revolución, la vida humana es insignificante y corta. Sin embargo, la historia demuestra que son precisamente esas vidas cortas las que se unen para formar una vasta historia de lucha.

 

Hoy, cuando el estruendo de la guerra resuena en todo el mundo, no debemos olvidar que lo que debemos exigir no son proclamas de paz, sino la hostilidad de clase y la lucha. Ante la cruda realidad de la división de clases, la historia demuestra que el sujeto de tal revolución no es el capitalista que monopolizó los derechos civiles, sino únicamente el trabajador. La revolución no ha quedado en el pasado; continúa en este preciso momento. No debemos olvidar que la sangre y el esfuerzo de innumerables revolucionarios están impregnados en este camino. La victoria del pueblo no se limita al mero momento de la revolución; se alcanza tras una larga lucha contra la contrarrevolución. Junto con su abnegado trabajo, seguiremos avanzando. Romper las cadenas de la explotación no es una mera idea nuestra, sino nuestra propia existencia.

 


In the face of the impending revolution,

 

In France, starting with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on July 14, 1789, the monarchy was abolished as the First Republic was established in September 1792. Thereafter, the Reign of Terror unfolded between 1793 and 1794, and Napoleon's coup d'état on November 9, 1799, brought an end to the period of chaos following the Reign of Terror, drawing the French Revolution to a close. Over 200 years have passed since this bourgeois revolution came to an end. The legacy of this bourgeois revolution shows that the history of Western civil revolutions began with the dark era of monarchy and ultimately reverted back to monarchy. This was the result of failing to stand against the persistent challenges of reactionary forces and suffering defeat.

 

However, the history of two Russian Revolutions flows through our veins: the February Revolution and the October Revolution. Even when the bourgeois legacy attempted to seize power once more under the actual authority of the Consulate government, the working class of the entire world overturned that legacy and restored all power to its rightful ownerthe proletariat. Over 100 years have passed. The ruling class of bourgeois states asserted that the legacy of the revolution had come to an end and that there would be no more revolutions after the 1990s. But that is a lie. The bourgeois dictatorship constructed by the capitalist class has been left neglected for centuries, ignoring even the modest socialist demands of the people's state, and justifying its own interests through the inevitable sacrifice of the workers. This left an indelible wound on the class struggle consciousness of the workers. This is precisely why, even amidst sacrifices that have become increasingly individualized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we must never forget that the legacy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s a thorough and resolute break from the bourgeoisie.

 

In 1946, the foundation of the Chinese Revolution was laid, and in 1953, the gunshots of the Cuban Revolution rang out. Even while the revolutions were underway, the people of bourgeois states were subject to information control, forced to carry on their struggle in isolation without even knowing that the era of revolution was arriving. This is something that continues even in modern times.

 

They abandoned the working people. Deceiving everyone into believing that the right to private property for the 'accumulation of wealth' is the freedom enjoyed by all, they claim ownership of the Consulate power at the expense of the sacrifice of innocent people from other nations. While conflicting opinions surround future advanced technologies, everyone has forgotten the fact that the legacy of this revolution is still alive and breathing. This is the conclusion that the European bourgeois class has arrived at to this day, and a conclusion that remained unchanged both during the times when Bonaparte ran rampant and in the eras when wars between bourgeois states became the source of genocide against the people. Compared to the grand history of the Great Revolution, a human life is insignificantly short. However, history proves that it is precisely the gathering of these short lives that forms a vast history of struggle.

 

Today, as the sound of gunfire resounds around the world, we must not forget that what we must demand is not slogans of peace, but class hostility and struggle. In the face of the stark reality of class division, history proves that the subject of such a revolution is not the capitalist who monopolized citizenship, but the worker alone. Revolution does not remain in the past; it is ongoing at this very moment. We must not forget that the blood and efforts of countless revolutionaries are embedded in this path. The victory of the people is not limited to the mere moment of revolution; it is accomplished through a long-term struggle against counter-revolution. Together with their toil, we will continue to forge ahead. Breaking the chains of exploitation is not our mere concept, but our very existence.

 

 

À l'approche de la révolution à venir,

 

En France, à partir de la « Prise de la Bastille » le 14 juillet 1789, la monarchie a été abolie avec la proclamation de la Première République en septembre 1792. Par la suite, la Terreur s'est développée en 1793-1794, et le coup d'État de Napoléon le 9 novembre 1799 a mis fin à la période de chaos consécutive à la Terreur, mettant ainsi un terme à la Révolution française. Plus de 200 ans se sont écoulés depuis la fin de cette révolution bourgeoise. L'héritage de cette révolution bourgeoise montre que l'histoire des révolutions citoyennes occidentales a commencé par l'ère sombre de la monarchie pour finalement revenir à la monarchie. Ce fut le résultat de l'incapacité à résister aux défis obstinés des forces réactionnaires et de la défaite qui en a découlé.

 

Cependant, l'histoire des deux révolutions russes coule dans nos veines : la Révolution de Février et la Révolution d'Octobre. Même lorsque l'héritage bourgeois a tenté de s'emparer à nouveau du pouvoir sous l'autorité réelle du gouvernement du Consulat, la classe ouvrière du monde entier a renversé cet héritage et a restitué tout le pouvoir à son véritable propriétaire : le prolétariat. Plus de 100 ans ont passé. La classe dirigeante des États bourgeois affirmait que l'héritage de la révolution était désormais révolu et qu'il n'y aurait plus de révolution après les années 1990. Mais c'est un mensonge. La dictature bourgeoise construite par la classe capitaliste a été laissée à l'abandon pendant des siècles, ignorant jusqu'aux modestes revendications socialistes de l'État populaire, et justifiant ses propres intérêts par le sacrifice légitime des travailleurs. Cela a laissé une blessure indélébile dans la conscience de la lutte des classes des travailleurs. C'est précisément pourquoi, même au milieu des sacrifices de plus en plus individualisés depuis la révolution industrielle, nous ne devons pas oublier que l'héritage de la révolution prolétarienne est une rupture totale et irrévocable avec la bourgeoisie.

 

En 1946, les bases de la Révolution chinoise ont été posées, et en 1953, les coups de feu de la Révolution cubaine ont retenti. Même pendant le déroulement des révolutions, les peuples des États bourgeois ont vu l'information sur la révolution contrôlée, contraints de poursuivre leur lutte dans l'isolement sans même savoir que l'ère de la révolution approchait. C'est une situation qui se perpétue encore aujourd'hui.

 

Ils ont abandonné le peuple travailleur. Trompant tout le monde en prétendant que le droit de propriété privée destiné à « l'accumulation des richesses » est la liberté dont tous jouissent, ils se proclament maîtres du pouvoir du Consulat au prix du sacrifice de peuples innocents d'autres nations. Alors que divers avis s'affrontent autour des technologies avancées du futur, tous ont oublié le fait que l'héritage de cette révolution est toujours vivant. C'est la conclusion à laquelle la classe bourgeoise européenne est parvenue jusqu'à aujourd'hui, et une conclusion qui est restée inchangée aussi bien à l'époque où Bonaparte sévissait qu'aux ères où les guerres entre États bourgeois devenaient la source du génocide des peuples. En comparaison avec la grande histoire de la Grande Révolution, la vie humaine est insignifiante et courte. Cependant, l'histoire prouve que c'est précisément le rassemblement de ces vies courtes qui forme une vaste histoire de lutte.

 

Aujourd'hui, alors que le bruit des canons de la guerre résonne dans le monde entier, nous ne devons pas oublier que ce que nous devons exiger, ce ne sont pas des slogans de paix, mais l'hostilité de classe et la lutte. Face à la réalité flagrante de la division des classes, l'histoire prouve que le sujet d'une telle révolution n'est pas le capitaliste qui monopolise la citoyenneté, mais uniquement le travailleur. La révolution n'est pas restée dans le passé ; elle se poursuit en ce moment même. Il ne faut pas oublier que le sang et les efforts de innombrables révolutionnaires sont imprégnés dans cette voie. La victoire du peuple ne se limite pas au simple moment de la révolution ; elle s'accomplit au terme d'une longue lutte contre la contre-révolution. Avec leur labeur, nous continuerons d'avancer. Briser les chaînes de l'exploitation n'est pas notre simple idée, c'est notre existence même.

 

 

Angesichts der bevorstehenden Revolution,

 

In Frankreich wurde, beginnend mit dem „Sturm auf die Bastille“ am 14. Juli 1789, die Monarchie mit der Ausrufung der Ersten Republik im September 1792 abgeschafft. In der Folge entfaltete sich von 1793 bis 1794 die Schreckensherrschaft, und Napoleons Staatsstreich am 9. November 1799 beendete die Periode des Chaos nach der Schreckensherrschaft, womit die Französische Revolution ihren Abschluss fand. Seit dem Ende dieser bürgerlichen Revolution sind nun mehr als 200 Jahre vergehen. Das Erbe dieser bürgerlichen Revolution zeigt, dass die Geschichte der westlichen bürgerlichen Revolutionen mit dem dunklen Zeitalter der Monarchie begann und letztlich wieder in der Monarchie mündete. Dies war das Ergebnis des Unvermögens, den hartnäckigen Herausforderungen der reaktionären Kräfte zu trotzen, und der daraus folgenden Niederlage.

 

In unseren Adern fließt jedoch die Geschichte zweier russischer Revolutionen: die der Februarrevolution und der Oktoberrevolution. Selbst als das bürgerliche Erbe versuchte, unter der realen Macht der Konsulatsregierung erneut die Macht zu ergreifen, stürzte die Arbeiterklasse der ganzen Welt dieses Erbe um und gab alle Macht an ihren rechtmäßigen Eigentümer zurück das Proletariat. Mehr als 100 Jahre sind vergangen. Die herrschende Klasse der bürgerlichen Staaten behauptete, das Erbe der Revolution sei nun zu Ende und nach den 1990er Jahren werde es keine Revolutionen mehr geben. Doch das ist eine Lüge. Die von der Kapitalistenklasse errichtete bürgerliche Diktatur blieb jahrhundertelang sich selbst überlassen, ignorierte selbst die bescheidenen sozialistischen Forderungen des Volksstaates und rechtfertigte ihre eigenen Interessen durch das selbstverständliche Opfer der Arbeiter. Dies hinterließ eine unauslöschliche Wunde im Klassenkampfbewusstsein der Arbeiter. Genau das ist der Grund, warum wir selbst inmitten der seit der Industriellen Revolution zunehmend individualisierten Opfer nie vergessen dürfen, dass das Erbe der proletarischen Revolution der konsequente und entschlossene Bruch mit der Bourgeoisie ist.

 

1946 wurde das Fundament der Chinesischen Revolution gelegt, und 1953 ertönten die Schüsse der Kubanischen Revolution. Selbst während die Revolutionen im Gange waren, wurde den Völkern der bürgerlichen Staaten selbst die Information über die Revolution vorenthalten, sodass sie ihren Kampf in der Isolation fortsetzen mussten, ohne zu wissen, dass das Zeitalter der Revolution anbrach. Dies geschieht auch in der Gegenwart noch immer.

 

Sie haben das arbeitende Volk im Stich gelassen. Indem sie alle mit der Behauptung täuschten, das Recht auf Privateigentum zur „Akkumulation von Wohlstand“ sei die Freiheit, die alle genießen, erheben sie sich auf Kosten des Opfers unschuldiger Völker anderer Nationen zu Herren der Konsulatsmacht. Während über die hoch-entwickelten Technologien der Zukunft verschiedene Meinungen aufeinanderprallen, haben alle die Tatsache vergessen, dass das Erbe dieser Revolution noch immer lebendig ist. Dies ist der Schluss, zu dem die europäische Bourgeoisie bis heute gelangt ist, und ein Schluss, der sowohl in den Zeiten, als Bonaparte sein Unwesen trieb, als auch in den Epochen, in denen Kriege zwischen bürgerlichen Staaten zur Quelle des Völkermords wurden, unverändert blieb. Im Vergleich zur gewaltigen Geschichte der Großen Revolution ist ein Menschenleben unbedeutend und kurz. Doch die Geschichte beweist, dass erst das Zusammentreffen dieser kurzen Leben eine gewaltige Geschichte des Kampfes bildet.

 

Heute, da der Donner der Kanonen weltweit ertönt, dürfen wir nicht vergessen: Was wir fordern müssen, sind nicht Parolen des Friedens, sondern klassenmäßige Feindschaft und Kampf. Angesichts der unerbittlichen Realität der Klassenspaltung beweist die Geschichte, dass das Subjekt einer solchen Revolution nicht der Kapitalist ist, der die Bürgerrechte monopolisiert hat, sondern einzig und allein der Arbeiter. Die Revolution ist nicht in der Vergangenheit stehen geblieben; sie geht in diesem momentanen Augenblick weiter. Wir dürfen nicht vergessen, dass das Blut und die Anstrengungen unzähliger Revolutionäre auf diesem Weg ruhen. Der Sieg des Volkes beschränkt sich nicht auf den bloßen Moment der Revolution; er wird im langwierigen Kampf gegen die Konterrevolution vollendet. Zusammen mit ihren Mühen werden wir weiter voranschreiten. Das Sprengen der Ketten der Ausbeutung ist nicht bloß unsere Vorstellung, sondern unsere bloße Existenz.


 


<혁명 연설문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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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은 가상 공간이 아닌 거리에서 먼저 폭발할 것이다.'


- 생산 수단의 몰수와 재산권의 완전한 해체 


· 토지 및 부동산 몰수 


· 자본 및 금융 자산의 국유화 


· 계급의 소멸


- 정치·사법적 결말


· 지배 권력의 박탈 


· 과거 행적에 대한 사법적 단죄 


· 시민권 제한


- 물리적·사회적 결말 


· 해외 망명 및 자본 유출 시도 


· 혁명 반동 행위자에 대한 처벌 


· 재교육과 노동자로의 재사회화 


- 한국의 특수성 


· 재벌 가문 집중 타격


· 지정학적 위기와 한반도 정세 


· 디지털·금융화된 자산 파악 


- 군사적 변혁 


· 기존의 경찰과 군대 해산 및 노동자 적위대 재편 등


· 억압 기구 (군경)의 임계점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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