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17.


주입식 교육과 자본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은 국어부터 수학까지 고등 교육의 방대한 내용을 단 1시간, 실질적으로 50여 분 내에 40문항을 풀어내도록 요구하는 극한의 시간 제한 평가 방식이다. 이 시험은 학생에게 '가축 등급'과 같은 정량적 평균 등급을 부과하며, 90년대 도입 이후 대학 진학의 필수 조건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제도는 막대한 사교육 시장을 형성했으나, 최근 출산율 감소와 맞물려 그 인지도는 점차 하락하는 추세다. 수능의 특성상 내신과 정시, 문과와 이과 구분 없이 '제한된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 교육의 본질적 특성이자 난점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학생 수가 줄더라도, 학생들 간의 경쟁은 더더욱 심화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주어진 시간과 등급의 압박 속에서 청소년들이 겪는 고민과 심경은 단순히 사춘기로만 치부될 수 없다. 이는 어른들의 사정, 곧 자본의 논리가 나타나는 서술이다. 예전에, <크로우즈 제로>나 <배틀로얄>과 같은 일본 영화와 한국의 <여고 괴담>에서 묘사된 학교 내부의 문제가 결국 대학 입시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인식은 이제 쉽게 이해된다. 비록 수능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다소 개선되었으나, 한국 교육의 근본은 여전히 질문을 차단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수업 중 질문 행위는 종종 진행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구조는 성인이 된 후, 심지어 고등 교육을 마친 이들이 모인 군대에서도 위계 아래 복종하는 문화로 이어진다. 그 모순은 대학 강의실까지 이어져 자유로운 질문을 일제히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한국 교육에 오래도록 자리 잡은 모순으로, 대학 강의실에서 질문은 오직 교수와 강사만이 할 수 있는, 간부의 요구로부터만 움직이는 세상의 이치와 같다. '꼬우면 힘을 가지던가'라는 역학의 모순은, 바로 한국의 대학 입시 제도가 보여주는 가장 큰 구조적 문제다. 물론 여러 지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이러한 지적 또한 대학에 진학한 이들에게 새로운 발상을 제한하고, 현재의 방식이 가장 최선이라 여기기 쉽다. 

 

기록하고, 줄을 긋고, 암기하여 빠르고 직관적으로 숙달하는 학습의 결과는 곧 지식에 대한 책탑 자랑의 토대와 서열화를 이룬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친절한 설명 없이 학식만이 난무하는 어려운 지문 앞에서 학생들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이는 점차 생활력을 잃고 고립된 청년으로 변모하여 다시금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는 과정을 가속화한다. 단순히 구구단을 잊었다고 해서 수학의 원리를 모른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기계적 유물론의 모방을 넘어, 이제는 교육관 자체를 비평할 것이 아니라 재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노동 과정에서도 잘못된 교육관은 인간을 망칠 수도 있다. 준비 없는 출생의 과정 역시 이러한 순환의 반복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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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1. 17.


보스니아 내전과 인간 사냥터

 

최근 1992-1995년 사이에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과 관련하여 보도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보스니아와 연방 간에 일어난 이 전쟁은 민간인 학살 지역을 사업적으로 활용하는 ‘관광지’로 운영했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기밀로 유지되었으나, 이라크 파병(2003)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부르주아지들의 사냥터’가 존재했음이 드러난 전례가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영토 편입 문제에서 시작된 분쟁의 연장선에 있으며, 연방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연방의 독립을 요구한 사라예보 간의 포위전과 스레브네니차 학살 등 발칸 전쟁의 일부를 다룬다. 

 

유고슬라비아는 해체됐고, 그 과정에서 약 10만에서 11만 명이 사망했으며 22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지로 알려진 사라예보에 대한 혐의 고소장이 공개되었다. 조사 과정에 참여한 한 이탈리아 밀라노 검찰에 따르면,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서방 국가(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인간 사파리’를 목적으로 주말 저격을 위해 8만-10만 유로 사이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했으며,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사격을 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사업자 및 다른 도시 출신들도 가담했다는 전황이 포착됐다. 이 중에는 2021-2024년까지 사라예보 시장을 역임한 인물도 포함되었다. 당시 해당 범죄에 가담한 ‘관광객’은 100여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라예보 홀리데이 호텔의 인근은 ‘저격수 거리’로 유명했으며, 이 포위전의 결과로, 도시는 3년 동안 만성적인 물자 부족 · 정전 사태 · 상하 수도 마비 · 식량과 유류 부족 등의 전쟁 문제를 겪게 된다. 11,514명 정도가 저격수 폭격으로 사망했으며, 여기에는 노약자도 포함됐으며,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또한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었다. 부상자의 수는 5만 명이 넘었는데, 이 저격수의 선발 기준이 군대가 아닌 민간인이라는 점에서 시사점을 제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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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0. 26.

 

소문이 실화였던 시골 이야기, 외딴 섬에서 생활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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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30. 


장기수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고향으로 걷는 걸음을 아무도 막을 수는 없다.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말이다. 납북도 아니고, 미국에게 쉽게 원조하고, 여태껏 한 수령을 따른 사람에게 간첩의 적으로 쉽게 몰아간다는 건, 오히려 남한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비전향 장기수를 알기 전까지는 남한 사회는 그런 분들이 없이 깨끗한 줄로만 알았다. 아니. 기껏해야 시위로 인해 체포되고, 정치법을 위반해서 징역살이를 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장기수 중에서도 40년이 훌쩍 넘은 비전향 장기수에게는, 국가보안법에 따라 북한 체제에 동조하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그들에게는 독재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불명예를 남기고 말았다. 직접 두 발을 걸으며 북쪽으로 향하는 그 걸음에 어느 군대라도 막을 수 있을까. 아니다. 막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북쪽을 향할 수가 없다. 국가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언제나 갈라지고 마는 건, 서로 다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사상 하나 때문에 남북은 서로가 대립각을 세우고, 대치를 준비 중이다. 그의 한 걸음은 정말로 북한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북쪽을 걷고 싶다는 깊은 심정과 의도를 보여준다. 앞 세대는 언젠가 아이가 자라면 북쪽녘을 밟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세월은 묻고, 채비는 더욱 늦어진다.

 

아무리 협의를 하더라도 보내주는 게 맞다. 스스로 결정한 선택마저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는 대부분 전 생애를 남한에게 바쳤다. 그러나 또 얼마나 무의미해지는가. 사정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에게 적색 분자와 빨갱이라는 오명을 남겨줬다. 전향이라는 말조차 아까울 뿐이다. 자본주의에 눈이 멀어 목숨을 걸고,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에게 대의 정치를 바라는 이상적인 지도자를 더 간절하게 바라는 데 그친다. 정작 이마저도 자신은 없었다. 지도자는 한낱 모두의 공무원이지만, 어느덧 중심은 귀족이며, 왕이고, 우두머리일 뿐이다. 어디 북한이라고 다르던가. 김씨 일가는 여전히 자신의 권력이 무너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오로지 타인의 목숨과 희생을 쌓으면서 손 쉽게 전쟁 지원이라는 부를 축적한다. 자본주의 왕국들이 호시탐탐 공산 독재 국가의 붕괴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공산 독재 국가가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는가.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고, 여권이 있으면 언제든 해외 도피자가 되어 도망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이미 존재할 때조차. 정작 민주적이라는 착한 독재 앞에서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에 비전향 장기수에게는 선택할 수 없는 자유를 내던진다. 그들이 먼저 전향해버렸지만, 정작 의도는 남북한 앞에서 무너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언론에서는 국가의 안보에 있어 지도자의 칭찬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 속에도 조국은 없다. 아니 무산 계급에게 조국은 벌써 죽었다.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세상에서 너나 할 것 없는 자본의 깊은 뿌리 속에서 여전히 북한은 남한의 주적일 뿐이고, 생김새가 다른 짐승일 뿐이다. 아무도 자신의 짐승이 귀한 줄 모르고, 사람의 생김새를 말하고 언구럭하며 서로 비하해댄다. 자신의 모습은 더욱 풍만하거나, 비대해지고, 숱마저 망가진 남한 국가조차 그 누구도 장기수가 바라는 북한의 실상이 아니라 북쪽의 희망을 말해주지 않는다. 더군다나 남한의 실상이란 언제든 떠날 채비를 마친 이들이 수도권으로 모아진, 부풀어오른 풍선 같다. 아무리 해외에서 관심을 갖고 남한의 사정을 알아주더라도, 3·8선 앞에 자유는 없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와 통일은 튼튼한 군대와 국방이라는 무력을 내세우는 저 부르주아지를 지키고자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이다. 언젠가 북쪽 땅을 밟아보는 건 높은 하늘 아래 공허한 바램일 뿐이다. 북쪽의 자연 경관이 아니라 경제적 효과를 먼저 기대하고, 전쟁 속 내전이라는 침략과 압박에 대한 명분을 먼저 기대하는 한, 자본이라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무산자에게 녹슨 사슬을 푸는 해방이라는 쇳물은 더욱 머나먼 일이다.

 

양심수

 

활동을 하면서 감옥에 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길 때가 몇 번 있었다. 하나는 과격한 시위에 직접 몸 담아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을 때고, 둘째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할 만큼 '이적 표현'을 하거나 어겨서 누명과 조사 끝에 수감 생활을 하지 않을 때다.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더라도, 정부의 검열이 두렵지만 필요한 말도 함부로 꺼낼 수 없을 때, 정부에서는 범죄자가 아니라, 노조 사람을 수시로 잡아갔다. 간부들은 정부에게 간청하고, 일부 양심수들은 대체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기 때문에 경찰에게 수사를 받고, 법적인 비용을 청구 받고, 징역 살이를 하고 있다. 정치범 특혜 논란이 붉어졌을 때도, 천지개벽인 세상에서도 노동자는 붉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쉽게 정치몰이를 당하고 징역 살이를 한다. 물론 얼마나 노골적으로 이적 표현을 쓸 수 있으면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할 수 있을지 실감이 잘 가지는 않는다. 더불어 아무리 양심수라고 하더라도 단지 몸이 고생이라고 쓸 만큼, 그러한 편지가 도착하더라도, 그 의미가 충분히 닿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달랐다. 그리고 정말로 오래됐다. 단지 체제를 극단적으로 전복시킨다는 명분으로,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경찰에게 불려가 조사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도 늘 마음을 다잡아야만 하는 부분이 생긴다.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대체로는 사면 심사에서 탈락했음을 보여주는건가. 노동법을 위반해서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한낱 노조 위원장이 아니라, 범죄 이력이 더 많은 저기 서있는 자본가이다. 자본의 투기를 더욱 조장하고, 노동자를 개무시하고 말거나, 취약한 약자들만 더욱 잡아가는 공포 앞에서도 무력해진다. 그동안 함부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입만 앞서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위반해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정치범들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정치범이 아니라, 양심수라고 부르는 게 더 알맞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읽는 자유가 보장디면, 옥살이 중에는 신문 하나 겨우 펼칠 수가 없어서 세상의 소식과 차단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사면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시위에 매우 가담했거나, 이적 표현을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끌려갈 수는 없다. 법 앞에서가 아니라, 한 지도자 앞에서만 노동자는 탄원을 해야하고, 청을 들어줄지 말지가 결정된다는 건, 부르주아지의 국가가 바로 서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못됐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정치인 사면에 따른 특혜 논란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특혜만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 속에서 풀려난 자유와도 같다. 모조리 참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잡아갈 수 있고, 노동의 배신이라는 성과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바라는 단죄는 정작 자유인들이 사람들에게 거는 족쇄와도 같다. 무거운 사슬을 풀 수 있을 때, 활동가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해야만 했을 모욕들도,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잠재울 수 있는가. 또 다른 자본이라는 포화 속에서, 국가도, 국적도 심지어 가족조차 볼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는 정말로 무기력해진 세월을 아낄 수 없음을 말해준다. '국가보안법', 그 앞에서는 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마저 쓸 수 없게 만든다. 더 합법적인 운동에 대한 요구는 부르주아지의 더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고, 소시민이라는 이름으로도 충분히 호응을 얻고 말해진다. 모두 역사의 정의로운 심판이 아니라, 단죄 앞에 비겁한 죄인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일 뿐이다. 정상이라는 말은 그래서 무섭다. 꼭 필요한 이론도 먼지처럼 가루로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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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건강 보험료와 의료법 실태

 

한국에서는 노년의 인구 수가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부양 인구 수는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다. 총 인구 수를 고려한다면, 여성과 돌봄 연구로만 한정한 매우 미시적인 분석에만 열중한 결과는 아닐지 의문이 드는 통계이다. 노인 인구 대비 출생률로 파악한다면,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는 1990년대부터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세대가 끝나는 만큼 서막이라 믿었던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의료에서도 민영화를 추진했고, 병원 수는 늘어났지만, 정작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의사는 턱 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렇게 입시 제도로부터 정당한 시험이라 여겼던 의대 시험들도, 문턱 높은 전공의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를 제대로 돌볼 여건마저 있었는지는 자문 해보게 된다.

 

한 의사는 환자 수는 늘어나지만, 감당할 의사가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그러나 의료 보험이라는 혜택을 받으면서도 환자는 늘 대기한다. 더욱 급한 의사들은 더 쉬운 전공을 택하고자 마음을 돌리고, 힘든 전공을 기피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이후로도, 긴급 병원들에서는 의료법을 지키지도 않고, 불법 시술만 더 늘어나고 있다. 언젠가부터 건강이란 피부와 미용에만 해당하는 일이었고, 건강이란 신체 운동에만 해당하는 지키지도 못할 처방을 내려준다.

 

있는 사람들은 걱정 하나 없는 국민들이 납부할 세금만큼이나 부담해야 할 건강 보험료도 올랐다. 남들은 기나긴 토론을 해오는 국민 연금 제도를 보더라도, 앞으로는 연금 고갈을 먼저 우려하는 한국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먼저 재벌 자본가들의 배를 불러서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초과 생산으로 쥐어 짜내고, 노동 임금을 착취하면서 고작 심심풀이에 불과한 자신들의 연금을 땅콩으로 늘려왔는지를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전공의들이 의사가 될 때도 같은 고민을 할까. 같은 연유로 한 대학에서는 교수가 강사들을 부려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반도체 노동자가 숨졌음에도, 기업들은 모두 노동 시간을 줄일 노력은 하나도 없고, 더 정치적으로 근무 제도에만 기댄다. 모두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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