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은행과 그것의 새로운 역할

 

 

은행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기능은 지불 과정을 중개하는 것이다. 은행은 활동하지 않는 화폐 자본을 활동적인 자본, 즉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으로 전환시키며, 온갖 종류의 화폐 소득을 모아서 자본가 계급의 관리에 맡긴다.

 

은행업이 발전하고 소수 업체로 집중됨에 따라, 은행은 중개인이라는 겸손한 역할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한 나라나 여러 나라의 자본가와 소자산가 전체가 가진 거의 모든 화폐 자본과 생산 수단과 원료 산지 대부분을 지배하는 막강한 독점가로 변모한다. 수많은 겸손한 중개인이 한 줌의 독점가로 변신하는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화하는 기본 과정 가운데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은행업의 집중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1907~8년 독일에서, 100만 마르크 이상의 자본을 보유한 주식 은행의 총예금액은 70억 마르크였다. 1912~3년에 이 총예금액은 이미 98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5년 사이에 40%가 증가한 셈이다. 그리고 증가한 금액인 28억 마르크 가운데 27억 5천만 마르크는 천만 마르크 이상의 자본금을 지닌 57개 은행의 예금이었다. 대은행과 소은행 사이의 예금액 분포는 다음과 같다.

 

예금총액의 백분율 <도표 참조>

 

소은행은 대은행에 밀려나고 있으며, 9개에 불과한 대은행에 총예금액의 거의 절반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아직 매우 많은 점, 예를 들어 많은 소은행이 사실상 대은행의 지점으로 변한 것 등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할 것이다.

 

1913년 말에 슐체-게베르니츠(Schulze-Gävernitz)는 총예금액 약 100억 마르크 가운데 베를린의 9개 대은행의 예금액이 51억 마르크라고 산정했다. 예금액뿐 아니라 모든 은행 자본을 고려하여 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09년 말, 베를린의 9대 대은행은 그들과 제휴하고 있는 은행들과 합쳐서 113억 마르크, 즉 독일 은행 자본 총액의 약 83%를 지배하고 있었다. 제휴 은행들과 합쳐서 약 30억 마르크라는 금액을 장악하고 있는 도이체방크는 프로이센 국유 철도 금고와 더불어 구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분산되어 있는 자본의 집약체다.

 

‘계열’ 은행이 언급된 부분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최근 자본주의적 집중의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기업, 특히 대은행은 자신보다 작은 회사를 직접 흡수하기도 하지만, 그 회사를 자신의 ‘계열’로 만들고 종속시켜 ‘자기’ 집단 또는 (전문 용어로는) ‘콘체른’에 포함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주식의 구매나 교환, 신용 체계 등을 이용해서 작은 회사의 자본에 출자하여 주식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리프만 교수는 현대의 ‘지주(holdings) 회사와 금융 회사’에 대해 기술하기 위해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노작’을 바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책은 제대로 해석되지도 못한 자료에 몹시 수상쩍은 ‘이론적’ 고찰을 덧붙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출자에 기반한 ‘지주’ 제도가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는, 그 자신도 은행가인 리서가 독일의 대은행에 대해 쓴 책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의 자료로 넘어가기 전에 ‘지주’ 제도의 구체적인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도이체방크 ‘집단’은 가장 크진 않더라도 가장 큰 은행 집단 가운데 하나다. 도이체방크 ‘집단’의 모든 은행을 한데 묶는 중요한 고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차, 2차, 3차의 지주 형태, 또는 결국 같은 말이지만 1차, 2차, 3차의 종속(도이체방크에 대한 군소 은행의 종속)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도표가 나온다.

 

<도표 참조>

 

도이체방크에 ‘간헐적으로’ 종속되는 ‘1차 종속’ 은행 여덟 개 중에는 외국 은행 세 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하나는 오스트리아 은행(빈의 은행 연합)이고 둘은 러시아 은행(시베리아상업 은행과 러시아 무역 은행)이다. 도이체방크 집단에는 모두 87개 은행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전체 자본(도이체방크가 직접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 도이체방크가 통제하는 모든 은행의 자본)은 약 20~30억 마르크로 추정된다.

 

이러한 집단의 전면에 있는, 국제 발행처럼 특별히 크고 수익성이 높은 금융 사업을 위해 자기보다 조금 규모가 작은 다른 은행 대여섯 개와 협약을 맺는 은행은 이미 ‘중개인’ 역할을 벗어나 한 줌의 독점가 연합으로 변모했음이 분명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에서 은행업의 집중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는 다음에 간략히 인용한 리서의 자료를 보고 알 수 있다.

 

<도표 참조>

 

우리는 전국을 아우르는 촘촘한 연결망이 얼마나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 이 연결망은 모든 자본과 화폐 소득을 집중시키고, 분산되어 있는 수천, 수만 개의 기업을 단일한 전국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나아가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킨다. 우리 시대의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을 대표해 슐체-게베르니츠가 앞에 나온 인용문에서 언급한 ‘분산화’란 실제로는 이전에 비교적 ‘독립적’이었거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부적(지역적)이고 폐쇄적이었던 경제 단위의 점점 더 많은 것이 단일한 중심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것은 집중이며, 다시 말해 거대 독점 조직의 역할과 중요성, 힘의 강화인 것이다.

 

보다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은행망’은 더욱 조밀하다. 1910년에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의 모든 은행의 지점 수는 7,151개로 집계되었다. 4개 대은행이 각각 400개 이상(447개에서 689개까지)의 지점을 갖고 있었으며, 그 다음 4개 은행은 각각 200개 이상의 지점을, 또 다른 11개 은행은 각각 100개 이상의 지점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큰 3대 은행인 크레디리오네, 파리국립할인은행, 소시에테제네랄은 다음과 같이 영업과 지점망을 확장했다.

 

<도표 참조>

 

현대 대은행의 ‘결속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리서는 독일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큰 은행 가운데 하나인 베를린할인은행(이 은행의 자본금은 1914년에 3억 마르크에 달했다)이 주고받은 서류의 분량을 자료로 제시했다.

 

파리의 대은행 크레디리오네의 거래 계좌 수는 1875년의 2만 8,535개에서 1912년에 63만 3,539개로 증가했다.

 

아마 장황한 논문보다 이러한 간단한 수치들이, 자본의 집중 및 은행 거래의 증가가 은행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흩어져 있던 자본가들은 하나의 집단적인 자본가가 되었다. 몇몇 자본가들을 위해 당좌 계정을 운영할 때 은행의 이 업무는 순전히 기술적이고 완전히 보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가 막대한 규모로 증대되면 한 줌의 독점가가 전체 자본주의 사회의 상공업 업무를 자신의 관할 아래 두게 된다. 이 독점가는 은행 거래 관계, 즉 당좌 계정 및 기타 금융 업무를 매개로(우선 개별 자본가의 재정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그들의 신용을 제한하거나 확장하거나 막거나 쉽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의 수익을 결정하고 그들로부터 자본을 빼앗거나 그들이 자본을 빠르게 또는 대규모로 증가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등) 그들의 처지를 전적으로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금 베를린할인은행의 자본금이 3억 마르크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베를린할인은행의 이러한 자본 증대는 베를린의 양대 은행인 도이체방크와 베를린할인은행 사이에 벌어진 주도권 다툼에서 생겨난 부수적인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1870년에 아직 신흥 업체였던 도이체방크의 자본금은 겨우 1,500만 마르크밖에 되지 않았다. 베를린할인은행의 자본금은 3천만 마르크였다. 그런데 1908년에는 도이체방크의 자본금이 2억 마르크, 베를린할인은행의 자본금이 1억 7천만 마르크였다. 1914년 도이체방크가 자본금을 2억 5천만 마르크까지 늘리자, 베를린할인은행은 또 다른 일급 대은행 샤프하우젠 은행 연합과 합병하여 자본금을 3억 마르크로 늘렸다. 물론 이러한 주도권 싸움은 두 은행들 사이의 ‘합의’가 점점 빈번해지고 공고해지는 것과 보조를 맞춘다. 이러한 발전 과정은, 가장 온건하고 가장 신중한 부르주아 개량주의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바라보는 은행업 전문가들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만든다.

 

독일 잡지 《디 방크》는 베를린할인은행의 자본금이 3억 마르크까지 증대된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다른 은행도 똑같은 길을 따를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금 독일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300명은 점점 50명, 25명 또는 그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최근의 집중 운동이 은행업에만 그칠 것이라고 예상해서는 안 된다. 개별 은행의 관계가 긴밀해지면, 자연스럽게 그 은행들이 후원하는 산업 신디케이트 간의 접근으로 이어질 것이다. …… 어느 날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눈앞에 오직 트러스트밖에 없는 것을 보고 눈을 비비며, 개인적 독점을 국가 독점으로 바꿔야 하는 불가피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태의 발전을, 주식 투기로 약간 촉진하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그냥 내버려두었다는 것 외에는 원칙적으로 비난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언론이 보여주는 무능함의 전형이다. 부르주아 언론과 부르주아 학문의 차이는,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으려는 데에서의 진지함과 열망의 정도 차이뿐이다. 집중의 결과에 ‘놀라워하는 것’, 자본주의적인 독일 정부나 자본주의적인 ‘사회’(‘우리 자신들’)를 ‘비난하는 것’, 독일의 ‘카르텔’ 전문가 치어슈키처럼 “카르텔은 트러스트처럼 기술과 경제의 발전을 지나치게 촉진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의 트러스트를 두려워하고 독일의 카르텔을 ‘더 선호하는 것’, 주식 제도의 도입으로 집중이 더 촉진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이것이 과연 무능함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일 뿐이다. 독일에는 트러스트가 없고 오직 카르텔만 있지만, 300명도 안 되는 대자본가가 그것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자본가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은행법은 나라마다 제각각이지만 자본주의 나라라면 어디에나 있는 은행이, 자본 집중과 독점 형성의 과정을 한층 심화하고 촉진한다.

 

“은행은 사회적 규모로, 그것이 단지 형태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일반적 부와 생산 수단의 일반적 분배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마르크스는 반세기 전 『자본』에 이렇게 썼다(러시아어 번역본, 3권, 2책, 144쪽). 앞에서 인용한 은행 자본의 성장, 가장 거대한 은행이 가진 지점 및 출장소의 수와 그 계좌 수의 증가 등에 관한 수치들은 우리에게 전체 자본가 계급의 “일반적 부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비단 자본가들의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은행은 일시적으로나마 소자영업자, 사무원, 극소수 상층 노동자의 것까지 모든 종류의 화폐 수입을 긁어모으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의 일반적 분배”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수십억의 돈을 관리하고 있는 현대의 은행(프랑스의 가장 큰 은행 3~6개와 독일에서 가장 큰 은행 6~8개)으로부터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생산 수단의 이러한 분배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고 사적인 것이다. 이러한 독점 자본은 주민 대중이 기아에 허덕이고, 농업 발전이 공업 발전에 절망적으로 뒤쳐지며, 공업 중에도 ‘중공업’이 나머지 모든 산업 분야로부터 조공을 뜯어가는 그러한 조건에서 활동하는 대자본, 특히 거대독점 자본의 이해와 부합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화와 관련하여, 저축 은행과 우체국이 은행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저축 은행과 우체국은 은행보다 ‘비집중화’되어 있어, 그 영향 범위에서 더 많은 지역을, 더 많은 시골을, 더 광범위한 주민 집단을 장악하고 있다. 다음 자료는 미국의 한 위원회가 은행과 저축 은행의 예금액 증가를 비교해 놓은 것이다.

 

<도표 참조>

 

저축 은행은 예금액에 대해 4%나 4.25%의 이자를 지불하기 때문에, “수익성 높은” 자본 투자처를 찾아야 하며 어음 업무나 담보 대출 업무 등도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은행과 저축 은행 사이의 구분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예를 들어 보훔과 에르푸르트의 상업 회의소는 저축 은행이 어음 할인 같은 “고유한” 은행 업무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우체국의 “은행 업무”를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은행업계의 거물은 국가 독점이 자신들에게 예기치 못한 결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우려는, 말하자면 한 사무실에 있는 두 계장이 서로가 갖는 경쟁 의식을 넘어서지 않는다. 한편으로 저축 은행의 수십억 자본을 실제로 좌우하는 것은 결국 바로 그 은행 자본의 거물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국가 독점이란 파산에 직면한 여러 공업 분야의 백만장자들에게 소득을 보장하고 늘려주는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 경쟁이 지배하던 옛 자본주의가 독점이 지배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것은 특히 증권 거래소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디 방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증권 거래소는 은행이 아직 발행된 증권의 많은 부분을 자기 고객에게 다 팔 수 없었던 과거에 꼭 필요했던 거래 중개인 역할을 오래전에 중단했다.”

 

“모든 은행이 증권 거래소가 된다는 말은 은행이 커지면 커질수록, 은행업의 집중이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더 많은 진실을 담게 된다.” “과거 1870년대에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했던 증권 거래소가”(1873년 증권 거래소의 파탄, 회사 창업 추문 등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독일의 산업화를 야기했다면 …… 지금은 은행과 산업이 ‘자신의 힘만으로 끌고 나갈’ 수 있다. 증권 거래소에 대한 우리나라 대은행의 지배는 …… 독일이라는 산업 국가가 빈틈없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저절로 작동하는 경제 법칙의 영역이 그로 인해 좁아지고, 은행을 매개로 한 의도적인 통제 영역이 크게 확대된다면 그 결과 소수의 수뇌부가 지는 국민 경제에 대한 책임은 한없이 증대한다.” 독일 제국주의의 옹호자이며 모든 국가의 제국주의자들에게 권위를 인정받는 독일 교수 슐체-게베르니츠는 이렇게 말하면서 ‘사소한 일’ 한 가지를 교묘히 넘기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은행을 앞세운 의도적인 통제란, 빈틈없이 조직된 한 줌의 독점가들이 대중을 약탈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부르주아 교수의 임무는 은행 독점 조직의 모든 역할을 밝히거나 그 모든 책략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미화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더욱 권위 있는 경제학자이자 ‘은행가’인 리서 역시 부정할 수 없는 그 사실들을 아무 의미 없는 공문구로 얼버무리고 있다. “이것은 증권 거래소가 전체 경제 및 유가 증권을 유통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했던 특성, 즉 자신에게 모여 드는 경제의 운동에 대한 가장 정밀한 측정기일 뿐만 아니라 거의 저절로 작동하는 조절자라는 특성을 점점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조절자로서 증권 거래소를 반드시 필요로 했던 옛 자본주의, 즉 자유 경쟁 자본주의는 과거의 것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 자유 경쟁과 독점이 뒤섞인, 분명히 이행적인 성격을 지닌 새로운 자본주의가 도래했다. 당연히 이 최신의 자본주의가 무엇으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지만,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30년 전에는 자유롭게 경쟁하는 경영자들이 ‘노동자들’의 손노동을 제외한 사업 활동의 90%를 수행했다. 지금은 고용된 사무직원들이 그러한 정신노동의 90%를 수행하고 있다. 은행 업무는 그러한 발전의 선두에 서 있다.” 이러한 슐체-게베르니츠의 고백은 또다시 최신의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가 무엇으로 이행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집중화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수뇌부에 서게 된 소수의 은행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독점적인 협정, 곧 은행 트러스트를 향한 움직임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거세지고 있다. 미국에는 아홉 개가 아니라 가장 큰 두 은행, 즉 억만장자 록펠러(Rockefeller)의 은행과 억만장자 모건(Morgan)의 은행이 110억 마르크의 자본을 지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증권 거래소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Frankfurter Zeitung)》이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를린할인은행의 샤프하우젠 은행 연합 인수 합병에 대해 지면에 다음과 같은 평가를 실었다.

 

“은행의 집중이 진행됨에 따라, 거액의 대출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의 범위는 갈수록 좁아지고, 그 결과 극소수의 은행 ‘콘체른’에 대한 대공업의 종속성이 증가한다. 이러한 산업과 금융의 유착으로 인해 은행 자본에 의존하는 산업 회사는 활동의 자유를 제약받게 된다. 때문에 대공업은 은행의 트러스트화(연합 또는 트러스트로 전환)가 강화되는 것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실제로 개개의 대은행 콘체른 사이에서 경쟁을 제한하기 위해 모종의 협정을 맺는 조짐이 이미 몇 차례 나타났다.”

 

또다시 은행업 발전의 마지막 단어는 독점인 것이다.

 

은행과 산업 사이의 긴밀한 유착에 대해 말하자면, 은행의 새로운 역할이 아마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은 바로 이 영역일 것이다. 은행이 사업가에게 어음을 할인해 주고 당좌 계정을 개설해주는 등의 경우, 이 업무를 개별적으로 보면 이 사업가가 가진 독립성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며 은행도 중개자라는 소박한 역할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가 점점 잦아져서 지속적인 것이 된다면, 은행의 수중에 막대한 자본이 ‘집결’된다면, 은행이 회사의 당좌 계정을 운영하면서 고객의 경제 상황을 점점 더 자세하고 완전하게 알 수 있게 된다면(이것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 결과 산업 자본가는 은행에 더욱 철저히 종속된다.

 

이와 동시에 은행과 가장 큰 상공업 기업 사이에 이른바 인적 결합, 즉 주식 소유를 바탕으로, 또 은행 이사가 상공업 기업의 감독 이사회(또는 경영 이사회)에 참여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매개로 양측의 결합이 발전한다. 독일 경제학자 아이델스는 이러한 자본과 기업의 집중 형태에 대해 매우 자세한 수치를 수집했다. 베를린의 6대 은행은 344개 공업 기업에서 이사를 매개로, 407개 공업 기업에서 중역의 참여로, 모두 751개 회사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이 은행은 289개 회사의 감독 이사회에서 각각 두 자리씩을 갖고 있거나 의장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공업 회사 속에서 각종 공업 분야와 보험업, 운수업, 식당, 극장, 예술 산업 등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6대 은행의 감독 이사회에는 (1910년 현재) 크루프 시나 대형 해운 회사 하파크(함부르크-아메리카 노선) 등의 이사를 비롯해 대산업의 실업가 51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1895년에서 1910년까지 6대 은행은 각기 수백 개, 즉 281개에서 419개에 이르는 회사를 위해 주식 및 채권 발행에 참가했다.

 

은행과 산업의 ‘인적 결합’은 그 양쪽과 정부의 ‘인적 결합’으로 보완된다. 아이델스는 이렇게 썼다. “감독 이사회의 이사직은 당국과의 관계에서 여러 가지 편의(!!!)를 줄 수 있는 명망가나 전직 정부 관리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가곤 한다. …… 대은행의 감독 이사회에서 국회 의원이나 베를린 시 의원을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거대 자본주의 독점 조직의 생성과 완성은, 말하자면 ‘자연적’이고 ‘인위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속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금융 재벌 수백 명 사이에서 일정한 분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대산업의 실업가 개인의 활동 영역이 (은행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 확대되고, 은행의 지부장들(Provinzdirektoren)이 특정한 공업 지대 한 곳을 전담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대은행의 경영자 사이에서도 [특정 분야에 대한] 일종의 전문화가 증가한다. 이는 오직 은행업 전체의 규모가 크고, 특히 산업과의 관계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을 때 성립하는 일이다. 이러한 분업은 두 방향으로 수행되는데, 한편으로는 그 산업과 모든 거래가 이사 한 명의 전문 영역으로 위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이사가 [감독 이사회의 참가자로서] 업종과 이해관계에 따라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비슷한 기업의 감시를 담당한다.”(자본주의는 이미 개별 기업을 조직적으로 감독하는 데까지 성장한 것이다.) “독일 내 산업, 때때로 독일 서부의 산업이”(독일 서부는 독일에서 가장 공업화된 지역이다.) “어떤 한 사람의 전담 업무가 되고, 외국의 정부 및 산업과의 관계, 인적 관계, 주식 거래 등이 다른 사람의 전문 업무가 된다. 그 외에도 각 은행 이사는 [감독 이사로서 발언권을 보유한] 고유한 담당 업종이나 담당 지역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주로 전력 회사의 감독 이사회에서, 어떤 사람은 화학 공장이나 양조 공장이나 제당 공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소수의 개별 제조업체와 [많은 경우] 보험 회사 (같은 비제조업 회사)의 감독 이사회에서 활동한다. …… 확실한 것은 대은행의 사업적 규모가 커지고 다양화가 증대함에 따라 은행 경영자 사이에서도 분업이 크게 증대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목적은 그들을 본연의 은행 업무에서 어느 정도 끌어올려, 산업의 일반적인 문제와 개별 업종의 특수한 문제에 관해 더 나은 판단력과 전문성을 갖추게 하고, 그리하여 은행이 영향을 미치는 산업 영역 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은행 제도는 산업 전문가, 특히 철도와 광업 분야에 종사하던 기업가나 전직 관료를 은행의 감독 이사회에 선출하려는 노력으로 보완된다.”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프랑스의 은행업에서도 동일한 제도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3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크레디리오네는 특수한 금융 조사국(service des études financières)을 설치했다. 여기서는 항상 50명 이상의 기사, 통계 전문가, 경제학자, 법률가가 일하고 있다. 이 기관은 매년 60만~70만 프랑의 경비를 쓰고 있다. 그것은 여덟 개 부서로 나뉘어 있는데, 한 부서는 전문적으로 산업 기업에 관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다른 부서는 전반적인 통계를 연구하며, 세 번째 부서는 철도 회사와 기선 회사를, 네 번째 부서는 유가 증권을, 다섯 번째 부서는 재정 보고서 등을 연구한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양측의 유착, 곧 N. I. 부하린(Bukharin)이 적절하게 서술한 대로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의 결합이 증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은행이 진정 ‘보편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전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장 탁월하게 연구한 저술가 아이델스가 정확하게 서술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산업과 맺는 관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한 결과로서, 산업에 작용하는 금융 기관의 보편적 성격이 드러난다. 다른 형태의 은행과 반대로, 때때로 문헌에서 제기하는 은행이 발전의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특정 지역이나 업종에 전문화되어야 한다는 요청과 반대로, 대은행은 되도록 여러 지역과 업종의 산업 기업과 결합을 추구하고, 개별 기업의 역사로 설명되는 지역적·산업적 (자본) 분포의 불균등을 점차 제거하려 한다.” “산업과 유착을 일반화하는 것이 하나의 경향이며, 그 유착을 영속적이고 강고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경향이다. 이 두 경향 모두 6대 은행에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상당히, 그리고 매우 비슷한 수준으로 실현되고 있다.”

 

상공업계에서는 은행의 ‘테러리즘’에 대한 불평이 자주 들려온다. 그리고 다음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대형 은행이 ‘호령하던’ 시절에 그러한 불평이 울려 퍼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01년 11월 19일에 베를린의 이른바 D은행(4개 최대 은행의 이름이 문자 D로 시작한다) 중 하나가 독일 중부 북서 시멘트 신디케이트 이사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귀사가 이달 18일 《제국신문》에 게재한 공고로 판단하건대, 당사는 이달 30일 귀사의 총회에서 귀사의 사업에 당사가 수용하기 어려운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결정이 채택될 여지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당사는 지금까지 귀사가 이용하던 신용을 정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언급된 총회에서 당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 내려지지 않고, 이 점과 관련하여 장래에도 그럴 것이라는 적당한 보장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기꺼이 새로운 신용 제공에 관한 교섭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그 불평은 대자본의 억압에 대해 소자본이 하는 불평과 본질상 동일하다. 다만 여기서는 커다란 신디케이트가 ‘소’자본 취급을 당하고 있을 뿐이다! 소자본과 대자본의 오랜 투쟁이 새로운, 아득히 더 높은 발전 단계에서 재개되고 있는 것이다. 수십억의 자본을 가진 대은행의 기업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단으로 기술 발전을 촉진할 수 있으리란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은행은 기술 연구를 위해 별도의 단체를 설립하는데, 그 성과는 물론 그들과 ‘긴밀한’ 산업 기업에만 돌아간다. 이러한 단체로는 전기 철도 문제 연구 협회나 중앙 과학 기술 연구소 등이 있다.

 

대은행의 경영자는 국민 경제의 새로운 조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아이델스는 이렇게 서술했다. “최근 몇 년간, 대은행의 경영진과 감독 이사회의 인사 변동을 살펴본 사람이라면, 산업의 전반적 발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대은행의 필수적이며 점점 더 긴급해지는 과제라고 여기는 사람이 점차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이로 인해 그들과 은행의 더 연배가 높은 경영진 사이에서 업무상뿐만 아니라 잦은 개인적 충돌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근본적인 문제는 은행이 산업의 생산 과정에 깊이 개입하는 것으로 인해 금융 기관으로서 본연의 사업에 해가 되지는 않는가, 또 신용의 증가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면서, 전보다 훨씬 더 산업 경기의 맹목적인 지배에 휘말리는 영역으로 은행을 끌어들이는 활동을 위해, 견실한 원칙과 안정적인 이윤이 희생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많은 고참 은행 경영진은 이렇게 주장한다. 반면 신진 경영진의 대다수는 현대의 대규모 산업 발전이 대은행과 오늘날의 산업적 은행 사업을 불러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다만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에 있어서 아직은 확고한 원칙도, 구체적인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양측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옛 자본주의는 수명을 다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무엇인가로 이행해 가는 과정이다. 독점과 자유 경쟁을 ‘타협’시키기 위한 ‘확고한 원칙과 구체적인 목적’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 가망 없는 일이다. 실무자의 증언은 ‘조직된’ 자본주의의 미덕을 상투적으로 예찬하는 슐체-게베르니츠, 리프만과 그 비슷한 ‘이론가’들 같은 자본주의 옹호자들과는 전혀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

 

대은행의 ‘새로운 활동’이 최종적으로 확립된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아이델스에게서 상당히 정확한 답을 얻는다.

 

“새로운 대상, 새로운 형태, 새로운 기관을 가진 산업 관계, 즉 중앙집권적인 동시에 분산적으로 조직된 대은행은 1890년대 이전에는 고유한 경제 현상으로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 출발점을, 대규모 ‘합병’과 함께 산업적 은행 정책에 기초한 분산적 조직이라는 새로운 형태가 처음 도입된 1897년으로까지 앞당겨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이 시점을 조금 더 뒤로 미룰 수도 있는데, [1900년의] 공황이 집중화 과정을 산업과 은행에서 크게 촉진하고 강화했고, 처음으로 산업과의 연계를 대은행의 실질적인 독점으로 전화시켰으며, 그것을 한층 더 긴밀하고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세기는 옛 자본주의에서 새로운 자본주의로의, 자본 일반의 지배에서 금융 자본의 지배로의 전환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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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생산의 집중과 독점

 

 

산업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점점 더 큰 기업들로 생산이 급속하게 집중되는 과정은 자본주의의 가장 고유한 특성들 중 하나다. 현대 산업 통계 조사는 이 과정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정확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예를 들면 독일에서 제조업체 천 개 중 대기업, 즉 노동자 5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업체는 1882년에는 3개, 1895년에는 6개, 1907년에는 9개였다. 그리고 노동자 100명당 이러한 대기업에 속한 비중도 각기 22명, 30명, 37명꼴로 늘어났다. 하지만 생산의 집중은 노동자의 집중보다 훨씬 더 두드러지는데, 이는 대기업에서의 노동이 훨씬 더 생산적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과 전동기에 대한 자료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독일에서 상업, 운송업 등을 포함해 넓은 의미에서 산업으로 불리는 것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전체 326만 5,623개 업체 중 대기업은 3만 588개로 겨우 0.9%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 1,440만 명 중 570만 명, 즉 39.4%, 증기력 880만 마력 중 660만 마력, 즉 75.3%, 전력 150만 킬로와트 중 120만 킬로와트, 즉 77.2%를 사용하고 있다.

 

전체의 100분의 1도 안 되는 수의 기업들이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4분의 3 이상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총 기업 수의 91%를 차지하는 (5명 이하의 노동자를 고용한) 소기업 297만 개에 대한 몫은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7%에 불과하다! 거대 기업 몇만 개가 모든 것이고, 수백만 개의 작은 기업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노동자 천 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은 독일의 경우 1907년에 586개였다. 이 기업들은 전체 노동자의 거의 10분의 1(138만 명)과 증기력·전력 총합의 거의 3분의 1(32%)을 사용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화폐 자본과 은행들은 한 줌에 불과한 거대 기업들의 이러한 우위를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만든다. 게다가 그것은 글자 그대로 압도적인 탓에, 실제로 중소 규모는 물론 몇몇 대규모 ‘소유주들’까지 포함된 수백만 명이 겨우 몇백 명의 백만장자 금융 자본가들에게 완전히 예속되어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선진국인 미국에서 생산의 집중은 훨씬 더 강하게 증대하고 있다. 미국의 통계는 좁은 의미의 산업만을 대상으로 연간 생산 가치의 규모에 따라 기업을 분류한다. 1904년에 생산고가 100만 달러 이상인 큰 대기업들은 1,900개(전체 21만 6,180개 중 0.9%)가 있었다. 이 기업들은 총 140만 명의 노동자(전체 550만 명 중 25.6%)를 고용하고 56억 달러(전체 148억 달러 중 38%)의 생산고를 기록했다. 5년 후인 1909년, 이 수치는 각기 3,060개 기업(전체 26만 8,491개 기업 중 1.1%), 200만 명의 노동자(660만 명 중 30.5%), 90억 달러(전체 270억 달러 중 43.8%)의 생산고를 기록했다.

 

이 나라 모든 기업의 총생산 가운데 거의 절반이 전체 기업 수의 100분의 1밖에 안 되는 기업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3천 개의 거대 기업들은 258개 산업 부문에 걸쳐 있다. 따라서 분명 집중이 일정 단계로 발전하면 저절로 독점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대 기업 수십 개가 자기들끼리 타협에 이르는 것은 쉬운 일인데다, 기업의 큰 규모 자체가 경쟁을 어렵게 만들고 독점으로 가는 경향을 낳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쟁이 독점으로 변화하는 것은 최근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아닐지라도, 매우 중요한 현상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룰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오해가 생길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미국의 통계는 250개 산업 부문에 3천 개의 거대 기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얼핏 각 부문마다 12개씩의 거대 기업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든 산업 부문에 대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고 단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매우 중요한 특성은 기업 결합, 즉 저마다 다른 산업 부문들이 하나의 기업으로 결합하는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료 가공의 연속적인 단계들(예를 들면 철광석에서 선철을 제련하고, 선철을 강철로 제강하고, 그 강철로 여러 가지 완제품을 생산하는 것)을 따라 일어날 수도 있고, 한 분야가 다른 분야에 보조적인 역할(예를 들면 폐기물이나 부산물의 가공, 포장재의 생산 등)을 할 때 나타나기도 한다.

 

힐퍼딩은 이렇게 쓴다. “기업 결합은 경기순환상의 변동을 제거해 좀 더 안정적인 이윤율을 보장한다. 둘째로 기업 결합은 중간 상인의 개입을 없앤다. 셋째로 그것은 기술적 발전을 촉진하고 따라서 단독 기업에 비해 초과 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로 그것은(원료 가격의 저하가 완성품 가격의 저하보다 급속하지 않은) 심각한 불황기 동안 단독 기업에 비해 결합 기업에게 경쟁상의 우위를 강화시켜준다.”

 

독일의 부르주아 경제학자 하이만은 독일 철강 산업에서의 ‘복합 기업’, 즉 결합 기업들에 대한 전문 서적을 저술했는데, 그 저서에서 그는 “순수 기업들은 낮은 완제품 가격에 비해 높은 원료 가격에 압박받아 파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광경이 그려진다.

 

“한편에는 석탄 신디케이트로 굳게 조직된 수백만 톤의 석탄을 채취하는 대규모 석탄 회사들이,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그것들과 밀접하게 결부된 강철 신디케이트를 지닌 대규모 제강 공장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거대 기업들, 즉 연간 40만 톤의 강철을 생산하고, 원광석과 석탄을 엄청나게 채취하며, 강철 완제품을 생산하고, 공장 지역의 숙소에 거주하는 1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때로는 철도나 항구까지 직접 소유하고 있는 이 기업들이 전형적인 독일 철강 산업체다. 이렇게 해서 집적은 더욱더 진전되고 있다. 개별 기업들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서로 다른 산업분야들에 속하는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거대한 기업들로 결합되며, 베를린의 여섯 개 대형 은행들이 이 과정을 지원하고 주도하고 있다. 독일의 광업은 집적에 관한 카를 마르크스의 학설이 옳다는 것을 정확하게 증명한다. 사실, 이것은 관세와 운임률로 산업을 보호하고 있는 나라에 관한 일이다. 독일 광업은 이제 수탈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

 

예외적으로 양심적인 이 부르주아 학자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높은 무역 장벽으로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독일을 특별하게 분류하는 것 같다는 점은 지적해 두어야겠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단지 집중 및 기업가들의 독점 연합, 카르텔, 신디케이트 등의 형성을 촉진시켰을 뿐이다. 비록 좀 더 느리고 아마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지만, 자유 무역 국가인 영국에서도 집중이 독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한 사실이다. 헤르만 레비 교수는 영국의 경제 발전 수치를 근거로 하여 ‘독점, 카르텔, 그리고 트러스트(Monopole, Kartelle und Trusts)’라는 전문 연구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 기업들의 큰 규모와 높은 기술 수준 자체가 독점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한편 집중은 기업으로 하여금 막대한 양의 자본을 사용하게 만든다. 때문에 새로운 기업은 필요한 자본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새로운 기업의 출현은 어려워진다. 다른 한편으로는(그리고 우리는 이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업들은 집중으로 형성된 거대 기업의 수준에 도달하려 하면서 저마다 엄청난 양의 과잉 생산물을 만들어낼 것이다. 예외적으로 수요가 증가할 경우에는 판매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 과잉 생산물들은 새로운 기업에게도, 기존의 독점 연합들에게도 모두 손해가 될 정도로 가격을 떨어뜨릴 것이다.” 보호 관세가 카르텔 형성을 용이하게 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영국에서 기업가들의 독점 연합과 카르텔, 트러스트는 대개 주요 경쟁 기업들의 수가 “20여 개”로 줄어들 경우에만 생겨난다. “대규모 산업에서 집중이 독점 형성에 미치는 영향은 여기에서 수정처럼 명백하게 드러난다.”

 

반세기 전 마르크스가 ‘자본’을 썼을 때, 압도적 다수의 경제학자들은 자유 경쟁을 ‘자연법칙’으로 여겼다. 자유 경쟁이 생산의 집중을 낳고, 집중이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독점으로 전화한다는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역사적 분석으로 논증한 마르크스의 저작은 당시 학문의 침묵 속에서 말살되려 했다. 그러나 이제 독점은 사실이 되었다. 경제학자들은 개별 독점 현상들을 기술하는 산더미 같은 책을 써대면서도 “마르크스주의는 논파됐다”라고 입을 모아 선언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속담에서 말하듯이 사실은 완고한 것이므로, 외면할 수는 없다. 사실이 보여주는 바, 예컨대 보호 무역이나 자유 무역이나와 같은 개개 자본주의 국가들의 차이는 독점이 취하는 형태나 출현 시기처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차이를 낳을 뿐이다. 생산의 집중으로 독점이 형성되는 것은 현 단계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적인 기본 법칙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새로운 자본주의가 옛 자본주의를 확실하게 대체한 시기를 꽤 정확하게 단정할 수 있다. 바로 20세기 초다. ‘독점 형성’의 역사를 개괄한 최근의 저작들 중 하나는 이렇게 쓰고 있다.

 

“1860년 이전의 시기에서도 몇 가지 자본주의적 독점의 사례들을 가져올 수 있다. 지금 매우 보편화된 형태의 맹아를 그 가운데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카르텔로 가는 전사(前史)일 것이다. 현대적인 독점의 진정한 출현은 가장 이르게 잡아도 1860년대에 시작되었다. 독점이 성장한 첫 번째 주요 시기는 1870년대의 국제적인 산업 불황에서 시작되어 1890년대 초까지 지속된다.” “이 문제를 유럽 관점에서 고찰하면 자유 경쟁의 발전이 1860년대와 7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시기 영국은 옛 형태의 자본주의 조직 건설을 완성했다. 독일에서는 이 조직이 수공업과 가내 공업과의 치열한 투쟁에 들어가 나름의 존재 형태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대변혁은 1873년의 파국에서,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을 뒤따른 불황에서 시작되었다. 1880년대 초 거의 알아보기 힘들었던 휴지기와 1889년에 보기 드물게 강력했으나 짧았던 호황기가 있긴 했지만, 이 불황은 이후 22년 동안 유럽 경제사를 장식했다.” “1889~90년의 짧은 호황기 동안 호황에 편승하려고 카르텔이 많이 활용되었다. 이러한 무분별한 행태는 카르텔이 없었을 경우보다 물가를 더 빠르고 더 높게 상승시켰고, 이 카르텔들은 거의 모두 파산이라는 무덤 속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다시 판매 부진과 물가 하락의 시기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산업계에서는 이제 옛날 분위기가 지배적이지 않았다. 불황은 더 이상 새로운 호경기 이전의 당연한 휴지기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카르텔 운동은 그 두 번째 시기에 들어갔다. 카르텔들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모든 경제 활동의 기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들은 원료 가공을 필두로 차례로 다른 산업 분야들을 장악하고 있다. 이미 1890년대 초에 카르텔들은 코크스 신디케이트를 조직했고, 그 형태를 본떠 석탄 신디케이트가 만들어졌지만 그러한 카르텔 조직 방법은 본질적으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19세기 끝무렵의 큰 호경기와 1900~3년의 공황은, 적어도 광업과 철강업에서는, 최초로 완전히 카르텔의 보호 아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것은 새로운 것으로 보였지만, 이제 경제 활동 대부분이 자유 경쟁에서 보통 벗어나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따라서 독점의 역사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860~70년대: 자유 경쟁의 발전이 정점에 도달한 단계. 독점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맹아에 불과하다. (2) 1873년 공황 이후: 카르텔들은 장기간 발전했지만 아직 예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아직 견고하지 못하며 일시적인 현상이다. (3) 19세기 끝무렵의 호경기와 1900~3년의 공황: 카르텔들은 모든 경제 활동의 기초 가운데 하나가 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

 

카르텔들은 판매 조건, 지불 기한 등에 대해 서로 협약을 맺는다. 판매 영역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제품의 생산량을 결정하며, 가격을 정하고, 개별 기업들에게 이윤을 분배하는 등.

 

독일에서 카르텔의 수는 1896년에 약 250개였고, 1905년에는 약 1만 2천 개 회사가 참가한 385개로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 수치들은 실제보다 낮춰 잡은 것임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1907년 독일 산업 통계 수치를 보면 이 1만 2천 개 거대 기업들에 증기력과 전력 총량의 절반 이상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미국에서 트러스트의 수는 1900년에 185개, 1907년에 250개로 집계되었다. 미국의 통계는 모든 제조업체를 개인 회사와 주식회사로 분류한다. 1904년에는 23.6%, 1909년에는 4분의 1이 넘는 25.9%의 업체가 후자에 속했다. 그 회사들에 속한 노동자들은 1904년에 70.6%, 1909년에 75.6%로 전체 노동자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생산 규모는 각각 109억 달러와 163억 달러, 즉 총생산액의 73.7%와 79.0%를 기록했다.

 

특정 산업 분야 총생산의 70~80%가 카르텔과 트러스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라인-베스트팔렌 석탄 신디케이트는 1893년 설립 당시 그 지역 전체 석탄 생산의 86.7%, 1910년에는 이미 95.4%의 집중을 이루었다. 이런 식으로 탄생한 독점은 막대한 수익을 보장하고, 거대한 규모의 기술적 생산 단위를 형성하게 된다. 미국의 유명 석유 트러스트인 스탠더드 석유 회사는 1900년에 설립되었다. “그 회사의 자본금은 1억 5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1억 달러 상당의 보통주와 1억 600만 달러 상당의 우선주가 발행되었다. 1900~7년 사이에 우선주에 지불된 이익 배당은 각기 48, 48, 45, 44, 36, 40, 40, 40%로, 그 총액은 3억 6,700만 달러였다. 1882년부터 1907년까지 8억 8,900만 달러의 순이익이 발생했으며, 그 중 6억 600만 달러가 이익 배당금으로 지급되었고, 나머지는 자본 준비금으로 적립되었다.” 1907년 “철강 트러스트(유나이티드스테이츠스틸)에 속한 업체들의 노동자와 사무원은 모두 합하면 21만 180명이나 되었다. 독일 광산업의 거대 기업인 겔젠키르헨 광산 회사에는 1908년 노동자와 사무원이 4만 6,048명이 있었다.” 이미 1902년에 그 철강 트러스트는 철강 900만 톤을 생산했다. 그 생산량은 1901년에 미국 철강 총생산량의 66.3%, 1908년에 56.1%를 차지했고, 각 해당 연도 철광석 채광량의 43.9%와 46.3%를 점유했다.

 

트러스트에 대한 미국 정부 위원회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쟁자들에 대한 트러스트들의 우위는 거대한 경영 규모와 뛰어난 설비 장치에 기초한다. 담배 트러스트는 설립 이래 손 작업을 기계 작업으로 대대적으로 교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담배 트러스트는 이 목적을 위해 담배 가공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특허라면 전부 사들였고, 거기에 막대한 금액을 지출했다. 많은 특허가 처음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트러스트에서 근무하는 기술자들이 개선해야 했다. 1906년 말에는 오직 특허 매점만을 위해 자회사 두 개를 설립했다. 역시 기계화를 목적으로 트러스트는 자체 주물 공장, 기계 공장, 수선 공장 등을 세웠다. 브루클린에 있는 이러한 시설 중 한 곳은 평균 3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여기서는 담배, 소형 시가, 코담배, 포장용 은박지, 담뱃감 등의 제조와 관련된 발명 실험을 한다. 그 발명품을 개선하는 일도 그곳에서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트러스트들은 이른바 기술 개발 기술자(developing engineer)들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들의 업무는 새로운 생산 방법을 고안해내고 기술 개선을 시험하는 것이다. 강철 트러스트는 자사의 기술자와 노동자들이 기술을 높이거나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발명을 할 경우 큰 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독일의 대공업, 예컨대 최근 몇십 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화학 공업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 개선 사업이 진행되었다. 화학 공업에서는 이미 1908년에 생산의 집중 과정이 두 개의 주요한 ‘연합체’을 탄생시켰는데, 이들 역시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독점으로 발전해갔다. 처음에 이 ‘연합체’들은 자본금 규모가 각기 2천만~2,100만 마르크에 이르는 대규모 공장들이 두 쌍으로 짝을 지은 ‘2자 연합’이었다. 즉 한쪽에는 회흐스트의 옛 마이스터 공장과 프랑크푸르트의 카셀라 공장이 연합했고, 다른 쪽에는 루드비히스하펜의 아닐린소다 공장과 엘베르펠트의 옛 바이어 공장이 연합했다. 이후 한쪽 연합체는 1905년에, 다른 쪽 연합체는 1908년에 다시 각기 다른 대공장과 협정에 들어갔다. 그 결과 자본금이 각각 4천만~5천만 마르크인 ‘3자 연합’이 두 개 생겨났고, 이 두 ‘연합’ 사이에서는 이미 ‘수렴’, 즉 가격 등에 관한 ‘협약’이 시작되고 있다.

 

경쟁은 독점으로 전화하고 있다. 그 결과 생산의 사회화가 막대한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기술을 발명하고 개선하는 과정도 사회화된다.

 

이는 미지의 시장에 팔기 위해 생산하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분산된 생산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이전의 자유 경쟁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집중은 한 나라뿐 아니라,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세계 전역의 많은 나라에 있는 모든 원료 산지(예를 들면 철광석 매장지)를 대략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러한 계산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 산지들은 거대한 독점 연합체들의 수중에 들어 있다. 시장의 규모에 대한 대략적인 계산이 이루어지고, 이 연합체들은 협약에 따라 그것을 자기들끼리 ‘분할한다’. 숙련 노동력을 독점하고, 최고의 기술자들을 고용하며, 운송로와 운송 수단(미국의 철도, 유럽과 미국의 선박 회사)을 장악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서 생산의 가장 광범위한 사회화에 바짝 다가간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본가들의 뜻이나 의식에 반하여 그들을 새로운 사회 질서, 즉 완전한 자유 경쟁에서 완전한 사회화로 가는 이행의 질서로 끌어들인다.

 

생산은 사회적인 것이 되고 있지만, 전유(專有)는 개인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사회적 생산 수단은 소수의 사적소유로 남아 있다. 형식적으로 인정되는 자유 경쟁의 전반적인 틀은 남아 있지만, 소수 독점가들의 나머지 주민들에 대한 억압은 백 배나 더 무거워지고, 더 부담스러워지고, 더 견디기 어려워진다.

 

독일 경제학자 케스트너는 ‘카르텔들과 국외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을 다룬 전문 저서를 한 권 썼는데, 여기서 국외자들이란 카르텔에 속하지 않은 기업가를 말한다. 케스트너는 이 책에 “강제적 조직화”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자본주의를 미화하지 않으려면 당연히 독점가 연합으로의 강제적 종속화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조직화’를 위해 독점가 연합들이 사용하고 있는 현대의 가장 새롭고 문명화된 투쟁 수단의 목록을 살펴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1) 원료 공급의 중단(‘카르텔 참가를 강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 (2) ‘담합’(즉 소속 노동자들이 카르텔에 속한 기업들에서만 일하기로 한 노동조합과 자본가 사이의 협정)으로 인한 노동력 공급 중단, (3) 운송 수단의 박탈, (4) 판로의 봉쇄, (5) 카르텔하고만 거래 관계를 맺기로 한 구매자와의 계약, (6) 조직적인 가격 인하 (‘국외자들’, 즉 독점가들에 종속되지 않은 기업들을 파산시키기 위해, 일정 기간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데에 수백만 마르크를 지출한다. 가솔린 산업에서는 40마르크에서 22마르크로, 즉 거의 절반으로 가격이 인하되었던 사례도 있었다!), (7) 신용 거래 중단, (8) 불매 운동.

 

우리 앞에 더 이상 소기업과 대기업, 기술적으로 뒤처진 기업과 앞선 기업 사이의 경쟁적인 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것은 독점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독점이 행하는 교살, 억압, 전횡이다. 이 과정은 어느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의식에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케스트너는 서술한다. “순수한 경제 활동의 영역에서도 종전 의미의 상업 활동에서 조직적·투기적 활동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결실을 누리고 있는 것은 자신의 기술적·상업적 실무를 토대로 구매자의 요구를 가장 잘 판단하여 잠재된 수요를 찾아낼 수 있는, 다시 말해 그것을 ‘열어놓을’ 수 있는 상인이 아니라 투기의 천재(?!)들이다. 개별 기업과 은행 사이의 조직적 발전, 일정한 관계가 맺어질 여지 등을 예측하거나 적어도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는……”

 

이것을 쉬운 말로 번역하면 이러한 뜻이 된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은, 상품 생산이 여전히 ‘지배적’이며 모든 경제의 기초로 간주되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파괴되었으며 주요 이윤은 금융 투기의 ‘천재’들에게 돌아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투기와 협잡의 토대는 당연히 생산의 사회화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화에까지 도달한 인류의 거대한 발전은 투기꾼만 이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뒤에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한 소시민적·반동적 비판자가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공정한’ 경쟁으로 되돌아가려고 꿈꾸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케스트너는 말한다. “카르텔 형성의 결과로서 나타난 지속적인 가격 상승은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생산 수단, 특히 석탄, 철, 칼륨에서만 확인되었고 제조 상품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격 상승과 관련된 이윤의 증가 역시 생산 수단을 제조하는 산업에 국한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지적에 다음과 같은 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카르텔 형성 덕분에 (반제품이 아닌) 원료를 가공하는 산업들은 완제품 산업을 희생시켜 높은 이윤을 얻었을 뿐 아니라, 그 산업들에 대한 자유 경쟁에서는 없었던 지배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앞에서 강조한 단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마지못해 극히 드물게 인정하는, 카를 카우츠키를 필두로 하는 현대의 기회주의 옹호자들이 어떻게는 발뺌하며 회피하려 애쓰는 사태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배와 그에 결부된 강압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것은 막강한 경제적 독점의 형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발생했다.

 

카르텔들이 이용하는 수단의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모든 원료 산지나 주요 원료 산지를 장악할 수 있는 곳에서 카르텔의 출현과 독점의 형성은 특히 용이하다. 그렇다고 원료 산지를 장악하는 것이 어려운 다른 산업 분야에서는 독점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시멘트 산업의 원료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독일에서 이 산업은 강력하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 공장들은 남독일 신디케이트, 라인-베스트팔렌 신디케이트 등 지역 신디케이트로 연합하였다. 가격은 독점으로 고정되어 있다. 화차 한 량당 제조비가 180마르크인데도 가격은 230~280마르크다! 기업들은 12%에서 16%의 이익 배당금을 주고 있다. 게다가 현대의 투기 ‘천재들’이 분배받은 배당금 외에도 거액의 수익을 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익성이 높은 산업에서 경쟁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독점가들은 간계를 부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업의 상황이 나쁘다는 거짓 소문을 유포하고, 신문에 “자본가들이여! 시멘트 사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삼가라”고 익명의 경고를 게재하며, 결국에는 ‘국외자들의’(즉 신디케이트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의) 회사를 매수하고 그들에게 6만~8만 마르크에서 15만 마르크에 이르는 ‘양도금’을 지불한다. 독점은 양도금을 지불하는 ‘온건한’ 방식에서 경쟁자들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는 미국식 방법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단을 다해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나간다.

 

카르텔이 공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든 자본주의를 미화하려고 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퍼뜨린 주장이다. 반대로 몇몇 산업 분야에서 형성된 독점은 자본주의 생산 전체에 고유한 무정부성을 강화하고 더욱 심화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징인 농업 발전과 공업 발전 사이의 격차도 더욱 확대된다. ‘독일 대은행과 산업의 관계’에 대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 가운데 하나를 쓴 아이델스(Otto Jeidels)가 인정한 바처럼, 카르텔화가 가장 고도로 진전된 이른바 중공업, 특히 석탄 산업과 철강 산업의 특권적인 위치는 나머지 산업 분야에서 “무계획성의 증가”를 불러오고 있다.

 

뻔뻔스럽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리프만은 이렇게 말한다. “국민 경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그것은 더욱 모험적인 기업들에게, 또는 외국 기업이나 발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기업들에게, 또는 마지막으로 단지 지역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하는 기업들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 결국 위험성이 커지는 것은 자본의 막대한 증대와 관련되어 있고, 자본의 증대는 말하자면 물이 넘쳐흐르듯이 자본이 해외로 흘러나가는 것이다. 동시에 급격한 기술 발전은 국민 경제의 여러 측면 사이에 더 많은 불균등, 무질서, 위기의 요인을 불러온다. 따라서 리프만도 이렇게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인류는 멀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국민 경제 조직에 영향을 미칠 기술 분야의 대변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전기와 항공 …… “대개 이러한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의 시기에는 격심한 투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공황(대부분 경제적인 것이지만 꼭 경제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 모든 종류의 공황)은 다시 집중으로, 독점으로 가는 경향을 막대한 정도로 강화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현대 독점의 역사에서 전환점 역할을 했던 1900년의 공황에 대한 아이델스의 고찰은 매우 유용하다.

 

“1900년 공황기에는 주요 산업 분야의 거대 기업은 물론, 지금의 개념으로는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던 기업이 여전히 많이 존재했다. 이들은 산업 호경기의 과도기를 타고 높이 오른 단독 기업(즉 결합되지 않은 기업)이었다. 가격 저하와 수요 감소는 거대 결합 기업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거나 아주 짧은 기간만 영향을 끼쳤지만, 이러한 순수 기업들을 비참한 상태에 빠뜨렸다. 그 결과 1900년의 공황은 1873년의 공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산업의 집중을 초래했다. 1873년의 공황도 좀 더 우수한 기업을 일정하게 선별하는 역할을 했지만,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그러한 선별의 결과로 공황을 극복한 기업이 독점으로 가는 것은 어려웠다. 이러한 지속적인 독점은 그 분야의 매우 정교한 기술, 방대한 조직과 자본력에 힘입어 오늘날의 철강과 전기 산업의 거대 기업에서나 매우 높은 수준으로 존재하며, 기계 산업과 일부 금속 분야, 운송 산업 등의 기업에는 좀 더 낮은 수준으로 존재하고 있다.”

 

독점. 이 말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를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어다. 하지만 우리가 은행들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독점이 가진 진정한 힘과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극히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며 빈약한 것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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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서문

 

 

이 소책자는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작성되었다. 당시 그곳에서 참고할 문헌, 특히 프랑스어·영어·러시아어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다룬 주요 영어 저작인 J. A. 흡슨 (Hobson)의 책을 주의 깊게 활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었다.

 

차르 체제의 검열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이 소책자는 오직 이론적 영역, 특히 사실에 대한 경제적 분석에만 논의를 국한해야 했다.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는 극히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르 체제하의 모든 혁명가들이 ‘합법적인’ 문헌을 작성할 때 사용하던 암시와 우회적 표현 (이슬식 언어)에 의존해야 했다.

 

이 소책자는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제국주의의 본질, 그리고 사회주의를 배신하고 부르주아지 편으로 전향한 사회배외주의 (말로만 사회주의를 외치고 실제로는 배외주의를 실천하는 태도)의 실상을 다룬다. 아울러 노동 계급 운동 내부의 이러한 분열이 제국주의라는 객관적 조건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검열의 눈을 피해 ‘노예의 언어’로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자유로운 시기에 검열로 왜곡되고 억압된 본문들을 다시 읽는 일은 고역에 가깝다. 해당 쟁점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1914년부터 1917년 사이에 해외에서 집필한 글들을 모아 조만간 출간될 신판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특히 본문의 119~120쪽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는 자본가들과 그 편에 가담한 사회배외주의자들이 (카우츠키 (Kautsky)는 일관성 없는 태도로 이들에 반대하고 있다) 자기 국가 자본가들의 영토 합병을 얼마나 파렴치하게 은폐하는지 검열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일본의 사례를 제시했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제시된 일본을 러시아로, 조선을 핀란드·폴란드·쿠를란드·우크라이나·히바·부하라·에스토니아 등 소수 민족 거주 지역으로 쉽게 적용하여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근본적인 경제 문제, 즉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 소책자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연구 없이는 현대의 전쟁과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서문

 

 

I

 

 

러시아어판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이 소책자는 1916년 차르 체제의 검열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본문을 전면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제1차 세계 제국주의 전쟁 전야인 20세기 초, 객관적이고 확실한 부르주아지 통계 자료와 학자들의 고백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총체적 구조를 밝혀내고자 한 이 책의 주된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차르 체제의 검열 속에서 집필된 이 소책자가 가진 사례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근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된 상황에서, 미국이나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미미한 합법성조차도 ‘세계 민주주의’를 가장한 사회평화주의의 편견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데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이 서문에서는 검열로 인해 원문에 직접 담지 못했던 핵심적인 내용들을 추가로 밝히고자 한다.

 

 

II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전개된 제1차 세계대전은 양 진영 모두에게 제국주의적 성격을 띤 침략적·약탈적 전쟁이었다. 이는 세계 재분할을 비롯해 식민지와 금융 자본의 ‘세력권’을 분할 및 재분할하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쟁의 진정한 사회적·계급적 성격은 외교사의 표면적 기록이 아니라 모든 교전국의 지배 계급이 처한 객관적인 이해관계와 상황을 분석하여 파악할 수 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일부 임의의 사례나 개별 수치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경제 활동의 토대와 모든 교전국의 종합적인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접근해야 한다.

 

1876년과 1914년의 세계 분할 (6장), 1890년과 1913년의 세계 철도 분할 (7장)을 서술하며 인용한 수치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총괄적 지표다. 자본주의 기간 산업인 석탄·철강 산업의 집약체인 철도는 세계 무역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문명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척도다. 철도가 대규모 생산, 독점, 신디케이트, 카르텔, 트러스트, 금융 과두제와 맺는 연관성은 앞선 장들에서 밝힌 바 있다. 철도망의 불균등한 분포와 발전은 현대 독점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 범위에서 초래한 결과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가 유지되는 한 이러한 경제 체제 아래서는 제국주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입증한다.

 

철도 건설 사업이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문명 보급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자본의 사적 소유 구조와 결합할 때 그 본질은 완전히 달라진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철도 부설은 거대 자본과 독점 체제가 전 세계 노동 민중과 식민지 주민들을 착취하고 예속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으로 기능한다.

 

소소유자의 노동에 기반을 둔 사적 소유, 자유 경쟁, 민주주의 등 자본가와 언론이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들은 이미 과거의 산물이 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소수의 ‘선진국’이 세계의 인구를 식민지적 방식으로 억압하고 지배하는 세계 체제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부와 지배권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소수의 거대 독점 국가들 사이에 분배되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 전 세계를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III

 

 

군주국 독일이 강요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그에 이은 ‘민주’공화국 미국·프랑스와 ‘자유’ 국가 영국이 강요한 훨씬 더 잔혹하고 비열한 베르사유 강화는 어떤 면에서 인류에게 극히 유익한 기여를 했는데, 평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윌슨주의’를 지지하고 제국주의 시대에 평화와 개량이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제국주의의 용병들과 반동적 속물들의 정체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독일 금융 강도 집단 중 누가 더 큰 몫을 차지하는가를 판가름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이 발생시킨 수천만 명의 시체와 불구자들과 더불어, 저 두 ‘평화 조약’은 그동안 부르주아지가 짓밟고, 억누르고, 기만하고, 우롱해온 수백, 수천만 민중을 전례 없이 빠르게 각성시키고 있다. 이렇게 하여 전쟁이 만들어 낸 전세계적인 폐허로부터 전 세계적인 혁명적 위기가 자라나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리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필경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그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바젤 선언, 1912년에 이미 전쟁 일반이 아니라 1914년에 발발한 바로 그 전쟁을 올바르게 예측했던 그 선언은 지금 제2인터내셔널 영웅들의 모든 치욕스러운 파산과 변절을 폭로하는 기념비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선언을 이 판의 부록으로 다시 수록하여, 제2인터내셔널의 영웅들이 당시 임박한 전쟁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사이의 연관성을 정확하고 분명하며 직설적으로 언급했던 이 선언의 문장들을 마치 도둑이 범행 장소를 피해 다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회피하고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거듭 상기시키고자 한다.

 

 

IV

 

 

이 소책자는 ‘카우츠키주의’ 비판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카우츠키주의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가들’,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우어 일파,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등, 프랑스의 알베르 토마 등), 그리고 수많은 사회주의자·개량주의자·평화주의자·부르주아민주주의자·목사들이 대표하는 세계 각국에 걸친 이념적 사조다.

 

이 이념적 사조는 한편으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와 부패의 산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반적인 생활방식상 부르주아적·민주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 이념의 불가피한 결과다.

 

카우츠키 및 그 동조자들의 견해는 그 저술가가 수십 년간, 특히 무엇보다 사회주의 내의 기회주의자들 (베른슈타인, 밀랑, 하인드먼, 곰퍼스 등)과 투쟁하면서 옹호해 온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원칙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카우츠키주의자들’이 지금 실제 정치 무대에서 (제2 또는 황색 인터내셔널을 경유하여) 최악의 기회주의자들과 단결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한 부르주아 연립 정부들을 매개로) 부르주아 정부와 힘을 합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운동 일반, 특히 공산주의 운동은 ‘카우츠키주의’의 이론적 오류에 대한 분석과 폭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지는 않지만 카우츠키나 그 일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모순의 심각성과 그것이 만들어낸 혁명적 위기의 필연성을 퇴색시키는 평화주의와 ‘민주주의’ 일반이 전 세계에 걸쳐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향들과 투쟁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의무다.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부르주아지에게 우롱당하고 있는 소소유자들과, 얼마간은 소부르주아적 생활 조건에 놓여 있는 수백만 근로 인민을 부르주아지에게서 되찾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V

 

 

제8장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해야겠다. 이 책의 본문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과거에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지금은 카우츠키의 전우이자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에서 부르주아적·개량주의적 정책을 펼치는 주요 대표자들 중 한 명인 힐퍼딩은 이 문제에 있어 노골적인 평화주의자이자 개량주의자인 영국인 홉슨보다 한 발 뒤처져 있다. 노동 운동 전체의 국제적 분열은 이제 완전히 드러났다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두 경향 사이의 무장 투쟁과 내전도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에 맞서 콜차크와 데니킨을 지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맞서 샤이데만주의자들과 노스케 일파가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았다. 핀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세계사적 현상의 경제적 토대는 과연 무엇인가?

 

그 토대는 바로 자본주의의 기생성과 부패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 소책자에서 증명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지금 전 세계를 약탈하는, 단지 ‘이자 놀이’만으로, 한 줌 (세계 인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아무리 ‘관대하게’ 부풀려 잡는다 해도 5분의 1도 안 되는) 극히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을 탄생시켰다. 전쟁 전 부르주아지의 통계에 따르면 그들은 자본 수출에서 전쟁 전의 가치로 연간 80~100억 프랑의 수입을 얻었다. 물론 지금은 훨씬 더 많다.

 

그러한 엄청난 초과 이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가들이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로부터 짜내는 이윤 이상으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으로 노동 계급 지도자들과 노동 귀족 상층을 매수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선진’ 국가 자본가들은 실제로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바, 수천 가지 다른 방법으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공공연하게나 암암리에 그들을 매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르주아화된 노동자 계급 내의 상층, 다시 말해 ‘노동 귀족’은 생활 양식에서, 임금 수준에서, 모든 세계관에서 전적으로 소시민적인데,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한 기둥이고 요즘은 (군사적으로는 아니라도) 부르주아지의 주요한 사회적 기둥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실질적으로 노동 계급 운동 내에서 숨어서 활동하는 부르주아지의 첩자이자 자본가 계급의 노동 관리인이며 실제로 개량주의와 배외주의를 전파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내전에서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편으로, ‘코뮌파’에 반대하는 ‘베르사유파’ 쪽으로 돌아선다. 이러한 현상의 경제적 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평가하지 못한다면, 공산주의 운동과 임박한 사회혁명의 실천적 과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혁명의 전야다. 이는 1917년 이래 전 세계적 규모에서 확인되었다.

 

1920년 7월 6일

 

N. 레닌

 

 

지난 15~20년간, 특히 스페인-미국 전쟁 (1898년)과 보어 전쟁 (1899~1902년) 이후, 구세계와 신세계의 경제·정치 문헌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기 위해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점점 더 빈번하게 다루고 있다. 1902년에는 영국 경제학자 홉슨의 저작 『제국주의론 (Imperialism)』이 런던과 뉴욕에서 출판되었다. 저자는, 과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카우츠키의 현재 입장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부르주아 사회개량주의와 평화주의 관점에 서 있기는 하지만,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정치적 특질들을 매우 훌륭하고 정확하게 기술했다. 1910년에는 빈에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인 루돌프 힐퍼딩의 저작 『금융자본 (Das Finanzkapital)』 (러시아어 번역판은 1912년에 모스크바에서 출간)이 출판되었다. 저자가 화폐 이론 문제에서 범한 오류와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와 절충시키려는 그 악명 높은 경향에도, 이 저작은 힐퍼딩이 이 책의 부제로 쓴 것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최근 단계”에 대한 매우 귀중한 이론적 분석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제국주의에 대해 언급된 것들은, 특히 이 문제에 대한 방대한 양의 신문·잡지 기사들과 결의안들, 예컨대 1912년 가을에 열렸던 켐니츠 대회와 바젤 대회의 것들이, 이 두 저자가 서술했거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합했던 논의들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차후에 우리는 제국주의의 기본적인 경제적 특징들의 연관과 상호관계에 대해 되도록 좀 더 알기 쉬운 형태로 간략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비경제적인 측면들을 고찰해 보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 모두가 관심을 갖지는 않을 인용 문헌과 여타 주들은 책자 말미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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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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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내 시장 형성

 

 

8-1. 상업 유통 발달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 국가 경제에서 많은 영역은 상호의존한다. 상품 유통은 상품 생산에서 선행하고, 상품 생산에서 유일한 조건은 아니지만, 발달 조건 가운데 하나로 구성된다.

 

상품 및 자본주의 생산에 대한 통계 검토에 국한하며, 따라서 개혁 이후 상품 유통 발달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국내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발달해갔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간략한 통계만으로도 충분하다.

 

러시아 철도 체계 길이

 

1865: 3,819km

1890: 29,063km

 

7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 철도 체계 길이

 

1845: 4,082km

1875: 26,819km

 

6배 증가했다.

 

 

독일 철도 체계 길이

 

1845: 2,143km

1875: 27,981km

 

12배 증가했다.

 

영국은 더 긴 기간 동안에, 독일은 더 짧은 기간 동안에, 비슷한 진전을 이뤘다. 매년 개통된 새 철도 길이는 기간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1868-1872년 5년 동안에는 8,806베르스트에 따른 새 철도가 개통됐지만, 1878-1882년 5년 동안에는 2,221베르스트만 개통됐다.

 

변동에 따른 범위로는, 자본주의가 확대시킨 실업 예비군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판단한다. 자본주의는 노동 수요를 축소시킨다.

 

러시아에서는 철도 개발에서도 두 번의 호황기가 있었다. 1860년대 말, 1870년대 초, 1890년대 후반이었다. 1865-1875년까지 러시아 철도 체계에 따른 연 평균 길이는 1,500km였고, 1893-1897년까지는 약 2,500km 증가했다.

 

철도 운송량

 

1868: 439,000,000푸드

1873: 1,117,000,000푸드

1881: 2,532,000,000푸드

1893: 4,846,000,000푸드

1896: 6,146,000,000푸드

1904: 11,000,000,000푸드

 

철도 여객 수송량

 

1868: 1,040,000명

1873: 2,270,000명

1881: 3,440,000명

1893: 4,940,000명

1896: 6,550,000명

1904: 123,600,000명

 

수상 운송 발전에서,

 

유럽 러시아 내륙 수로로 운송된 화물량

 

1881: 899,700,000푸드, 화물 가치: 186,500,000루블

1893: 1,181,500,000푸드, 화물 가치: 257,200,000루블

1896: 1,553,000,000푸드, 화물 가치: 290,000,000루블

 

러시아 상선은 14,3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51척 증기선, 41,8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700척 범선으로 구성됐고, 1896년에는 161,600척 돛대를 수용할 수 있는 522척 증기선으로 구성됐다. 외해 모든 항구에서 상선 발전은 1856-1860년까지 5년 동안 귀항선, 출항선 수는 평균 18,901척이었고, 총 수용량은 3,783,000톤이었다. 1886-1890년까지는 평균 23,201척(+23%)였다. 따라서 수용량은 3과 2/3배 증가했다.

 

1856-1894년까지 39년 동안 수용량은 5.5배로 늘어났고, 러시아 선박과 외국 선박을 따로 살펴보면, 39년 동안 러시 선박 수는 823-2,789척으로 3.4배 늘어났고, 수용량은 112,800-1,368,000톤으로 12.1배 늘어났다. 외국 선반 수는 18,284-21,160척으로 16% 늘어났고, 수용량은 3,448,000-18,267,000톤으로 5.3배 늘어났다.

 

귀국 및 출국 선박 용량도 1878년에는 1,300만 톤에서 1881년에는 860만 톤으로 해마다 상당히 변동했다. 변동으로부터, 비숙련 노동자, 부두 노동자 등에 대한 수요 변동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도 자본주의는 늘 일자리를 원했고, 아무리 우연한 일이더라도, 첫 번째 부름에 기꺼이 받아들 일 수 있는 대중 존재를 필요로 했다.

 

외국 무역 발전으로는, 은행 회전율과 자본 축적 규모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국립 은행 총 인출액

 

1860-1863: 113,000,000루블

1864-1868: 170,000,000루블

1884-1888: 620,000,000루블

 

당좌예금 총액

 

1864-1868: 335,00,000루블

1884-1888: 1,495,000,000루블

 

대출 및 저축 협회와 농촌 및 산업 은행 매출

 

1872: 2와 3/4 백만 루블

1875: 21,800,000루블

1892: 82,600,000루블

1903: 189,600,000루블

 

모기지는 1889-1894년 사이에 증가했다. 담보 토지 평가액은 1,395,000,000-1,827,000,000루블로 증가했고, 총 대출액은 791,000,000-1,044,000,000루블로 증가했다. 저축 은행 운영은 특히 1880-1890년대에 증가했다. 1880년에는 75개 저축 은행과 1897년에는 4,315개 가운데 3,454개 우체국 은행이 있었다.

 

1880년 예금은 4,400,000루블, 1897년에는 276,600,000루블이었다. 연말 계좌 잔액은 1880년애는 9,000,000루블, 1897년 494,300,000루블이었다. 연금 자본가 증가는 특히 기근이었던 1891-1892년 사이에 각각 52,900,000루블, 50,500,000루블과 이후 2년, 1896-1897년 51,600,000루블, 65,500,000루블로 두드러졌다. 따라서 통계에서는 저축 은행 발전이 더 컸다. 1894년 러시아 전역에서는 6,557개 저축 은행이 있었고, 예금자는 510만 명, 총 예금은 1,105,500,000루블이었다. 구 인민주의자와 사회주의 운동에 따른 신흥 기회주의자들 모두 저축은행 수 증가가 인민 복지 징조라고 말하곤 했으며, 매우 순진한 태도를 보였었다. 따라서 1904년 러시아 저축은행 예금 분포를 1900년 프랑스와 비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인민주의자, 수정주의자, 카데트 옹호론자들을 위한 자료는 또 얼마나 풍부하던지, 러시아에서는 예금지 직업과 전문 분야에 따라 예금이 12개 집단으로 구분된다. 가장 큰 예금은 228,500,000루블로, 농업과 농촌 산업 종사자들의 예금이었다. 예금은 특히 빠르게 증가해갔다. 마을은 문명화 됐고, 농민 폐허를 사업 원천으로 삼고는, 더욱 더 수익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통계에서는 상품 유통과 자본 축적에 따른 큰 발달을 시사했으며, 국민 경제에서도 모든 부문에서 자본 활용 장이 어떻게 형성됐고, 상인 자본이 어떻게 산업 자본으로 전환됐는지, 생산으로부터 유도된 생산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적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펴봤다.

 

 

상업 및 산업 인구 증가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산업 인구가 증가한다는 점은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필연적인 현상이다. 또한 산업과 농업 분리도 꾸준하다.

 

 

- 도시 발달

 

 

도시 발달에서는, 개혁 이후 유럽 러시아, 50개 지역에 따른 발달 자료도 있었다. 도시 인구 비율은 끊임없이 증가해갔다. 인구가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직종으로 전환됐다. 도시 인구는 나머지 국가 인구보다 두 배 빠르게 증가했다. 1863-1897년 사이에 총 인구는 53.3%, 농촌에서는 48.5%, 도시는 97% 증가했다. 1885-1897년, 11년 동안 '최소한 농촌 인구 도시 유입으로는, V. 미하일로프스키 추산에 따르면, 250만 명이었다. 곧 연간 20만 명이 넘었다.

 

중요한 산업 및 상업 중심지인 도시 인구는 일반적인 도시 인구보다도 훨신 더 빠르게 증가해갔다. 5만 명 이상 주민이 있는 도시 수는 1863-1897년 사이에 13-44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1863년에는 전체 도시 인구에서 약 610만 명 가운데 170만 명, 27%만이 대규모 중심지에 집중됐다. 1885년에는 990만 명 가운데 410만 명, 41%였고, 1897년에는 1,200만 명 가운데 640만 명, 이미 절반이 넘는 약 53%였다. 따라서 1860년대에는 작은 도시가 도시 인구에서도, 일반적인 규칙으로 제공했지만, 1890년대에는 대도시에 완전하게 밀렸다. 1863년, 당시로는 가장 큰 도시였던 14개 도시 인구는 170만 명에서, 430만 명으로, 153% 증가했지만, 전체 도시 인구는 97%만 증가했다. 따라서 대규모 산업 중심지에 따른 큰 발달과 새로운 중심지 출현은 개혁 이후 시대에서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 기생적인 식민지화

 

 

산업 인구로부터,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발달한다는 법칙은 산업에서 가변 자본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반면에, 여기에 대해 마르크스는 농업에서는 '특정 토지 착취에 필요한 가변 자본이 절대적으로 감소하면서부터, 새로운 토지가 경작되는 정도만큼 증가할 수는 있겠지만, 다시금 비농업 인구에 따른 훨씬 더 큰 발달을 전제로 삼는다'고 덧붙였다.

 

산업 인구에 따른 발전은 이미 모든 토지가 점유된 인구로부터 거주하는 영토가 주어졌을 때만, 분명한 형태로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영토로부터 주민들은 자본주의로부터도 농업에서 강제로 쫓겨나면서 산업 중심지나 다른 국가로부터 이주 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

 

그러나 모든 토지가 점유되지 않고, 아직 인구가 충분히 거주하지 않은 영토가 펼쳐졌을 때는 상태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농업으로부터 쫓겨난 주민들은 그러한 영토로부터, 인구가 없는 지역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땅을 경작해간다. 따라서 농업 인구는 증가하고, 한 동안은 산업 인구 증가보다도 적어도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다른 과정도 펼쳐진다.

 

1). 인구가 밀집된 기존 국가 또는 일부 지역에서 자본주의 발전

 

2). '새로운 토지'에서 자본주의 발전

 

첫 과정은 기존 자본주의적인 관계에 따른 심층적이고, 추가적인 발전이며, 두 번째는, 새로운 영토로부터 새로운 자본주의 관계 부상과 폭 넓은 발전을 말한다. 두 과정을 혼동한다면, 인구를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활동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혁 이후 러시아에서는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됐다. 개혁 이후 시기인 1860년대 초, 유럽 러시아에서는 남부와 동부 외곽 지역으로부터, 대부분 인구가 없었고, 중부 농업 지역에서는 큰 규모로 이주민이 유입됐다. 새로운 여토에서 새로운 농업 인구가 형성되면서부터,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가 전환되는 병행 과정이 가려졌다. 도시 인구 자료에서 나타난 특징으로는, 유럽 러시아 50개 주를 여러 집단으로 구분해서 명확하게 파악했다. 본 연구에서는 1863-1897년 유럽 러시아에서, 9개 지역 도시 인구 자료를 제시했다.

 

세 가지 영역으로 부여된다.

 

1). 비농업 산업 지역

 

다른 지역으로 이주가 매우 미미하다. 도시 인구 비율은 14.1%-21.1%로 빠르게 증가했으며, 농촌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전체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매우 미미했다. 반면에, 도시 인구 증가율은 평균, 97% 대비 105%를 크게 웃돌았다. 러시아를 서유럽 산업 국가들과 비교해봤을 때, 비농업 산업 지역만이 산업 자본주의 국가들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췄다.

 

2). 중앙 농업 지역

 

지역 이주가 상당히 많음, 일부는 이전 지역, 대부분은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 도시 인구 비율은 매우 낮고, 평균 이하 속도로 증가한다. 1863-1897년 사이 도시와 농촌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평균보다도 훨씬 낮았다. 해당 지역에서 국경 지역을 이주하는 인구가 크게 유입됐다. V. 미하일로프스키 계산에 따르면, 1885-1897년 사이에만 약 300만 명, 곧 인구 1/10 이상이 해당 지역을 떠났다.

 

3). 농업 외곽 지역

 

 

- 개혁 이후 식민화된 지역.

 

 

따라서 33개 시내권 도시 인구 비율은 유럽 러시아 전체 도시 인구 비율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곽 지역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이 평균보다 약간 낮은 증가세를 보였다. 11.2%-13.3%로, 비율로는 100:118이었지만, 평균은 9.94%-12.76%로, 비율로는 100:128이었다. 그러나 도시 인구에 따른 절대적 증가세로는 +130% 대비 +97%로, 평균보다 훨씬 더 높았다. 따라서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 전환이 매우 강렬했지만, 유입으로부터 농업 인구에 따른 큰 증가로 가려졌다. 해당 지역에서 농촌 인구는 87% 증가했고, 러시아에서는 평균 48.5%에 비해 증가했다. 특정 시내권에서, 인구 산업화 과정은 훨씬 더 모호해졌다. 타우리다 도시 인구 비율은 1897-1863년, 19.6%로 동일했지만, 헤르손에서는 25.9-25.4%로 오히려 감소했다. 두 시내권에서는 도시 인구 성장율은 대도시 인구 성장률에 비하면, +131%, +135%, 두 대도시 시내권에서는 +141%로, 크게 미지지는 못했다. 따라서 새로운 영토에 대한 새로운 농업 인구가 증가하면서부터, 비농업 인구도 훨씬 더 크게 증가해갔다.

 

 

- 공장과 상업 및 산업 도시와 마을 발전

 

 

도시 외 산업 중심지에서 중요한 지역으로는, 도시와 함께 계산되지 않고, 대도시 주변으로는 더욱 많은 지역으로 확산된 교외 지역과 공장 마을이다. 산업 중심지는 도시 인구 비율이 극히 낮은 산업 단지에 특히 많다. 도시 인구 지역 별 통계, 9개 산업 구역에서는, 1863년 비율은 7.3%, 1897년에는 8.6%였다. 시내 상업 및 산업 인구로는, 주로 도시가 아닌 산업 마을에 집중됐다.

 

블라디미르, 코스트로마, 니즈니노브고로드 및 기타 시내권에서, 도시 가운데 주민은 3,000, 2,000명 또는 1,000명 미만인 곳도 적지는 않았지만, 각 마을에서는 공장 노동자만 2,000명, 3,000명 또는 5,000명인 수 많은 마을도 있었다. 개혁 이후로는 도시가 더욱 빠르게 발전해갔고, 도시와 마을 중간에 새로운 유형으로는, 공장 중심지가 발달해갔다. 중심지에 따른 큰 발달과 그곳에 집중된 공장 노동자 수를 보여주는 통계도 있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산업 단지 뿐만이 아니라, 남부에서도 중심지가 꽤 많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우랄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은 가장 낮았다. 비야트카, 페름 주에서는 1863년, 3.2%, 1897년에는 4.7%였다. 그러나 도시 인구와 산업 인구에 따른 상대적 크기에 대해서는, 페름 주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 도시 인구는 1897년 6,400명으로, 1888-1891년, 젬스트보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당 산업 지역 인구는 84,700명이었다. 그 중 56,000명은 전혀 농업에 종사하지도 않았고, 5,600명만이 주로 농사로부터 생계를 유지했다.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에서 젬스트보 인구 조사에 따르면, 65,000명 주민이 토지가 없었고, 81,000명만이 목초지를 가졌다. 따라서 두 군도에서 산업 비도시 인구만으로도, 1897년에는 195,600명이었기 때문에, 시내권 전체 도시 인구보다도 더 많았다.

 

공장 정착지 외에도, 산업 중심지에 따른 중요한 대규모 수공예 지구는 선두에 있거나, 강둑, 기차역 인근 등에 위치해서, 개혁 이후 빠르게 발전한 무역 및 산업 마을에도 부여됐다. 마을 특성은 통계 표 예시에서도 잘 나오며, 도시와 마찬가지로, 농촌 인구를 유지하고 인구 문해율은 평균 이상이었다.

 

도시 및 비도시 산업 및 상업 중심지에 따른 상대적인 중요도로는, 보로네시 통계도 있다. 보로네시 종합 수입은 8개 군에 있는 마을을 분류하는 종합 표를 제공했다. 해당 군에서는 8개 도시가 있었으며, 인구는 1897년 기준으로 56,149명이었다. 반면에, 마을 가운데 4개는 9,376가구로, 53,732명 주민으로부터 두드러졌고, 도시보다도 훨씬 컸다.

 

5개 마을에서는 상업 시설, 240개, 산업 시설 404개가 있었다. 전체 가구 가운데 60%는 전혀 농사를 짓지 않았고, 21%는 이웃에게 빌리거나, 반모작으로 농사를 지었고, 71%는 가축이나, 농기구를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63%는 일년 내내 곡물을 구매했고, 86%는 산업에 종사했다. 중심지에 따른 전체 인구를 상업 및 산업 범주에 넣으면서부터, 상업 및 산업 규모를 과장한 게 아니라, 오히려 축소해버렸다. 왜냐하면, 8개 군에서는 총 21,956가구가 전혀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사한 농업 지역에서는, 도시 외곽 상업 및 산업 인구가 도시 내부 인구보다도 적지는 않았다.

 

 

- 비농업 외부 고용

 

 

도시 공장, 상업 및 산업 마을과 구역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러시아 전체 산업 인구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렵다. 이동 자유가 부족하고, 마을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촌 인구 상당 부분을 산업 인구에 포함해야만 했다. 산업 중심지에서 노동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일 년 가운데 일부를 이곳에서 보낸다. 소위 비농업 '외부 고용'에서도, 공식적으로, 산업가는 부수적 고용을 하는 소작농이고, 대다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지체 없이 이와 같은 관점을 택했다. 견해가 아무리 불합리하고, 또 많더라도 인구가 농업에서 상업 및 산업 직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도시에 따른 산업 인구 규모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얼마나 바꿨는지도 알 수 있었다.

 

칼루가에서는 도시 인구 비율은 러시아 평균 8.3%, 12.8%보다도, 훨씬 낮았다. 1896년 해당 구역은 여권 통계를 기반으로, 이주 노동자들이 자택을 비운 총 개월 수를 계산한다. 총계는 1,491,600개월이었고, 12로 나누면, 부재 인구로는, 124,300명으로, 전체 인구에서는 거의 11%에 해당했다. 숫자를 당시 1897년 도시 인구인 97,900명을 더하면, 산업 인구 비율도 상당했다. 비농업 이주 노동자 일부는 기존 도시 인구에 포함됐고, 산업 중심지 인구에도 포함됐다. 그러나 일부였다. 층위에 따른 이동성 때문에, 지역 인구 조사로는 모두 포괄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더욱이나, 인구 조사로는 대체로 겨울에 실시됐지만, 산업 노동자들은 대부분 봄에 자택을 떠났다.

 

비농업 이주 주요 지역으로는, 여권 발급 건수는 봄철에 최대치에 도달했다. 일시적으로 부재 중인 노동자 상당 수는 도시 인구 조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시 거주자는 농촌 인구보다는 도시 인구에 더 합법적으로 배정됐다. 일년 내내 또는 대부분 시간을 도시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족들은 생계를 제공하는 도시를 거주지졸 간주할 이유가, 가족 및 재정적인 유대 관계만 있는 마을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재정적 유대로부터,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는, 이주하는 코스트로마 사람들 사이에서, 농민이 세금 일부라도 토지로부터 대가를 받는다는 건 드물었고, 보통 소작인들이 토지를 사용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토지를 임대하고, 소유주가 직접 모든 세금을 냈다. 야로슬라블 조사에서도, 이주하는 산업 노동자들은 마을과 배정지에서 벗어나고자,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는 언급이 반복해서 나왔다.

 

그렇다면 비농업 인구는 몇 명이었을까.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모든 종류에서, 산업에 종사한 사람들 수로는, 500만-600만 명 이상이었다. 실제로 1884년, 유럽 러시아에서는 약 467만 개 여권과 신분증을 발급했고, 여권 수입은 1884-1894년 사이에, 1/3이상, 330만 루블에서 450만 루블로 증가했다. 1897년에는 러시아에서 발급된 여권과 신분증 총 수는 9,495,700개였다. 그 중에서 9,333,200개는 유럽 러시아 50개 지역에서 발급됐다. 1898년에는 9,259,900개였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7,809,600개였다.

 

S. 코롤렌코는 유럽 러시아에서 현지 수요에 비해 불필요한 노동자 수를 630만 명으로 추산했다. 11개 농업 지역에서 발급된 여권 수가 코렐렌코가 추산한 170만 명에 비해 200만 명을 초과했었다는 점을 보았다. 비농업 지역에서 6개에 대한 통계를 추가한다면, 코롤렌코는 지역에서 불필요한 노동자 수를 1,287,800명으로 설정했지만, 정작 발급된 여권 수는 1,298,600명이었다. 따라서 코를렌코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에서, 17개 지역, 흑토 11개 지역과 비흑토 6개 지역에서는 현지 수요에 비해 불필요한 노동자가 300만 명이었다.

 

그러나 1890년대, 17개 지역에서는 발급된 여권과 카드 수가 330만 장이었다. 1891년에는 해당 지역들이 전체 여권 수입에서 52.2%를 차지했다. 따라서 이주 노동자 수로는, 거의 600만 명을 넘어갔다. 구식 젬스트보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우바로프는, 코롤렌코 수치에 가까웠고, 500만 명이라는 이주 노동자 수치가 맞다고 결론을 내려버렸었다.

 

의문을 제기해보자면, 그렇다면 비농업 및 농업 이주 노동자 수는 얼마일까. 인민주의자들은 매우 대담하고도, 완전히 잘못된 주장을 폈다. 농민 외부 고용에 따른 압도적 다수가 농업이었다. 인민주의자가 인용한 차슬라브스키는 훨씬 더 신중하게 표기했다. 그는 통계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어떤 유형에서 노동자를 제공하는 지역 규모에 대한 일반적인 발전으로만, 제한시켰다. 반면에, 인민주의자들은 철도 여객 교통 통계에서도 무엇도 전혀 증명하지 못했었다. 비농업 노동자도 주로 봄에 집을 나서고, 게다가 농업 노동자보다 철도를 훨씬 더 많이 이용한다.

 

반대로는, 압도적 다수가 아니지만, 이주 노동자가 아마도 비농업 노동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는, 여권 수입 분배에 대한 통계, 브신(Vesin) 통계에 근거한다. 예전에 프롤레로프스키는 1862-1863년 1/3 이상 여권 발급에서 얻은 잡세로부터, 수입 분배를 보여준 보고서를 기초로 일자리를 찾는 농민에 따른 가장 큰 이동에는 대도시와 비농업 시내권에서 나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에서 결합한 11개 비농업 시내권을 단일 지역으로 취급하고, 비농업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떠난다면, 해당 시내권에서는, 1885년에 유럽 러시아 전체 인구로는 18.7%에 불과했지만, 1897년에는 18.3%로, 1885년에는 여권 수입에서 42.9%를 차지했다. 1891년에는 40.7%였다. 비농업 노동자는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공급됐으며, 농업 노동자는 전체 이주자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브신은 유럽 러시아에서, 출구 허가로는 90%를 차지하는, 38개 지역으로부터, 주요 이주 유형을 집단으로 나누었다. 따라서 해당 수치에서도,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산업이 첫 집단보다, 세 번째 집단에서 더 널리 퍼졌다. 해당 수치는 두 집단 차이에 상응하는 고용 확보를 위한 결근 기간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비농업 산업이 우세한 곳에서는 결근 기간은 훨신 더 길었다. 소비세 납부 업종 등에 대한 통계로부터, 유럽 러시아 50개 시내권 전체에서는 발급된 거주 허가를 분류했다. 브신 분류에 제시된 내용을 정정하자면, 1884년 자료에는 없는 12개 지역으로 다시 분배했다.

 

1898년 자료에 따르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노동 이주는 훨씬 더 흔했다는 점이다. 비농업 지역에서 인구 이동성은 농업 지역보다 훨씬 더 크다. 비농업 이주 노동자 수는 농업 지역보다 많아아먄 하며, 최소 300만 명은 되어야만 했다.

 

크고 끊임 없이 증가하는 이주 증가는 모든 출처에서도 확인된다. 여권 수입은 1868년 210만 루블, 1855년 175만 루블, 1893-1894년 450만 루블로, 두 배 이상 증가해갔다. 1877-1885년 사이 모스크바에서 발급된 여권과 신분증 수로는 남성 20%, 여성 53%로 증가했다. 트베리에서는 1893-1896년 사이에 5.6%, 칼루가에서는 1885-1895년 사이 23%, 부재 개월 수로는 26%로, 증가했다.

 

스몰렌스크에서는 1875년 10만 명, 1885년 11만 7천 명, 1895년 14만 명으로 증가했다. 프스코프 주에서는 1865-1875년 11,716에서 1876년 14,944명, 1896년 남성 기준으로 43,765명으로 증가해갔다. 코스트로마 주에서는 1868년 남성 100명 당 여권과 카드 수가 23.8명으로, 여성 100명 당 0.85명 발급됐고, 1880년에는 각각 33.1명과 2.2명으로 증가했다. 증가 추세는 꾸준했다.

 

 

 

인구가 농업에서 도시로 이동하듯이, 비농업 이주는 점진적인 현상이었다. 인구를 소홀히 대하고, 뒤떨어지진 역사가 잊혀진 외딴 지역에서도 끌어내어 현대 사회 생활에서도 소용돌이로 끌어들인다. 인구 문해율과 이해력을 높이고, 문명화된 습관과 요구 사항을 제공한다. 농민들은 더 높은 차원에서 동기를 가지고, 페테르부르크 사람들도 더 큰 총명함과 세련된 이주로부터 유도된다. 그들은 사물이 더 나은 곳을 찾는다. 사회적 편견에 비해, 미숙한 시골 사람들은 순수 농업 지역 사람들만큼 조금도 미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무의식적으로 삶의 형태와 외모나 습관을 모방하며, 대도시의 간접적인 삶들도 보여진다. 페테르부르크, 야로슬라블 시내에서도, 농업이나 수공예에 종사하는 사람을 평생 동안 시골 사람으로만 몰아간다. 심지어 결혼도 쉽지 않았다. 도시 이주로는 농민을 시민으로까지 격상시켜 놓고는, 농촌 지역에 깊이 뿌리박히 수 많은 자연적(가부장적)이고, 개인적인 의존 관계와 사회적 신분 구분에서도 벗어나게 했다.

 

이주를 촉진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때였다. 농노 의존으로부터, 해방과 농촌 인구 강누데 활동적인 층에서, 특히 도시 생활과 오랫동안 연관된 야로슬라블 농민에게는 오랫동안 자신들의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농촌 생활이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빈곤과 의존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나, 자급자족, 독립, 존중받는 상태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외부 수입으로 생활하는 농민은 다른 사회적 신분에 속한 사람들과 더 자유롭거나, 평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농촌 청년들은 더욱 도시로 가고 싶어했다.

 

도시 이주는 오래된 자연적인 가족 관계를 약화시켰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보다 독립적인 위치에 놓이도록 했다. 이주가 없는 지역 가족들과 비교해봤을 때도, 코스트로마에서 이주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던, 솔리갈리치와 후흘로마 가족들 사례에서도, 나이 든 사람의 가부장적인 권위 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 관계에서도, 훨씬 더 긴밀하고, 또 밀접했다. 물론 12세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진 아들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강한 애정과 본가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는 세계주의자가 되어, '잘 되는 곳이면, 어디든 내 나라다.'라는 생각을 품었다.

 

남편 권위와 도움 없이 살아가는 솔리갈리치 여성들은 농업 지대에서 억압 받는 농부 여성과도 전혀 달랐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이었다. 아내를 때리는 일도 여기서는 드문 예외였다. 일반적으로, 남녀 평등은 거의 모든 곳에서, 모든 일에서도 지켜져야만 했다.

 

비농업 이주로는 이주하는 임금 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임금도 높였다. 농업 지역보다도, 임금이 높은 비농업 지역에서 농업 지역 출신에 따른 농업 노동자를 유치한다는 일반적인 상태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칼루가 지역에서도,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해당 수치에서는 산업 분야에서 일자리를 위한 이주가 농업 임금 인상에도 도움을 주며, 인구로는 가장 우수한 인력을 끌어들인다는 현상을 충분히 보여준다. 단지 금전적인 임금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임금도 상승했다. 100명 노동자 가운데, 60명 이상이 이주한 군 단위 집단에서는, 연간 고용된 농장 노동자, 평균 임금은 69루블, 호밀 123푸드였다. 40-60% 이주하는 군에서는 64루블 또는 호밀 125푸드였다. 이주민 40% 미만을 공급하는 군에서는 59루블 또는 호밀 116루블이었다. 같은 군 단위 집단에서는 노동력 부족에 대한 불만 비율도 55%, 42%, 35%로, 꾸준히 감소해갔다. 제조업 임금은 농업보다 높았으며, 제조업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수요, 차, 옥양목, 신발, 시계 등을 창출했고,전반적인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임금 상승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견해로는, 노동력 부족은 늘 심각했고, 교외 주민들이 버릿 없이 자라거나, 철도 작업장에서 노동했기 때문이라고 봤으며, 칼루가와 시장이 가까우면 늘 주변 주민들도 모여 계란, 우유 등을 팔고는, 술집에서 난장판을 벌이곤 했다. 왜냐하면, 모두 최소한 노동으로부터 최고 급여를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농업 노동자가 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모두 도시로 떠나서 프롤레타리아와 찌질한 사람들을 놀리기만 해댔다. 반면에, 시골에서는 정작 유능하고, 건강한 노동자가 부족했다.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는 산업 평가를 인민주의자라고 부른다는 건 매우 정당하다. 지반코프(Zhbankov)는 이주하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필수적인 노동자이고, 또 그 자리를 농민들이 대신한다고 지적했었다. 또한 상도 대체는 매우 불리하다는 점은 명백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서, 수도에서 삶은 하층 계급으로부터도, 많은 문명화된 습관과 사치, 과시에 대한 성향만을 키우고는, 쓸모 없는 돈 낭비가 이어진다. 과시에 따른 지출 등은, 대체로 비생산적이다. 헤르첸슈타인은 가짜 문화, 방탕한 생활, 난잡한 흥청, 취기와 추잡한 방탕의 향연 등에 대해 극렬하게 비난했다. 모스트바 통계학자들은 대량 이주라는 점에서도, 이주 노동의 필요성을 줄일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농민 소유지를 가족들에 따른 주요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늘리면 국가 경제에 따른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었다. 그리고 이 평온한 신사 분께서는, 누구도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완전한 이동의 자유, 자신의 토지를 포기할 만큼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자유, 어떤 공동체에서든 퇴거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도, 정착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지를 못했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도, 농업 인구 이동은 일부 지역에서는 식민지화로부터 가려진 발달로 인한 도시, 교외, 공장 및 상업과 산업 마을과 동네, 비농업 이주로 표시된다. 개혁 이후 폭과 깊이 면에서도, 급속도록 발전해왔고, 지금도 발전하고 있을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며, 과거에 따른 삶의 형태와 비교해봤을 때도, 매우 '진보적'으로 발전했다.

 

 

임금 노동 고용 증가

 

 

자본주의 발전을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라면, 임금 노동 활용 정도이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 발전 단계 가운데 노동력 또한 상품이 되는 단계이다. 자본주의에서 주요한 경향은 국민 경제 내 노동력 총합을 고용주가 판매하고, 구매한 후에야 생산에 적용시킨다. 자본주의적 경향에서도 개혁 이후로는, 러시아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자세히 살펴봤다. 이제 필요한 결론을 도출하자면, 노동력 판매자 수에 대한 자료를 계산하고, 노동력 구매자에 대해 설명하겠다.

 

노동력 판매자는 물질적 가치 생산에 종사하는 국가 노동 인구로부터 제공된다. 해당 인구는 약 1,550만 명 성인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농민 최하층 농촌 무산층들이었다. 무산층이 노동력을 판매하는 형태도 검토해보겠다. 이전에 나열한 임금 노동자 범주를 결합했을 때, 모두 약 200만 명이었다.

 

1). 농업 임금 노동자,

2). 공장, 광산 및 철도 노동자,

3). 건설 노동자,

4). 미숙련 노동자(목재, 인부, 철도 건설, 화물 적재, 하역 등)

5). 제조업 노동자

 

총 약 천만 명 임금 노동자, 여성과 어린이를 1/4 정도 빼면, 750만 명은 성인 남성 임금 노동자다. 국가에서 물질적 가치 생산에 종사하는 전체 성인 남성 인구에서는 약 절반 가량이다. 광대한 임금 노동자 집단 가운데 일부는 토지와 완전하게 결별하고, 노동력 판매로만 생계를 유지한다. 대다수 공장 노동자 및 광산과 철도 노동자도 포함되고, 건설 및 조선 노동자 일부와 비숙련 노동자가 포함된다. 자본주의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와 자본가를 위해 가내 노동에 종사하는 비농업 중심지 주민들도 상당하다. 더 큰 규모 부문에서는 아직 토지와 분리되지는 않았고, 소규모 토지 경작으로부터 얻은 생산물로부터, 지출 일부를 충당해갔다. 따라서 토지 소유 임금 노동자 유형을 형성한다. 거대한 임금 노동자 집단은 주로 개혁 이후에 형성됐고, 계속해서 빠르게 성장해갔다.

 

자본주의가 생산해내는 상대적인 초과 인구 또는 실업 예비군에 대한 중요한 결론이 있다. 국민 경제 모든 부문에서, 임금 노동자 총 수에 대한 통계로는, 같은 지점에서, 인민주의자 경제학자들이 저지른 기본적인 오류에서도 매우 분명해진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해당 오류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수 없이 말했었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에 따른 초과 인구에서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조사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또한 국가에서 자본주의 존재와 발전 자체가, 엄청난 규모로 예비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는 점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했었다. 공장 노동자 수에 대한 빈약 문구, 이상한 계산으로부터, 그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기본 조건 가운데 하나를 자본주의는 불가능하고, 오류이며, 기초마저 없다는 등의 증거로 왜곡시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규모 생산자들에 따른 수탈로부터, 농업, 목재, 건설, 상업, 제조업, 광업, 운송업 등에서도 고용주들에 따른 최대 수요를 즉각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임금 노동자 군대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 자본주의도, 결코 현재 수준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최대 수요라고 언급한 이유는, 자본주의가 병적으로만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생산자 수는 늘 자본주의에 따른 평균 노동자 수요를 초과해버렸다. 따라서 많은 범주로부터 임금 노동자 총 수를 추산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모두에게 정규적인 고용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범주에서 임금 노동자를 택하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고용에 따른 규칙성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었다. 여러 이주 노동자와 상주 노동자 가운데, 특정층은 끊임 없이 실업 예비군에 속했고, 실업 예비군은 엄청난 규모로 불어나기 때문이다. 주로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거나, 특정 지역에 따른 특정 산업이 침체된다거나, 기계 생산이 특히 빠르게 확대되어, 노동자를 대체할 때이다. 그러나 최소한으로 줄어든 일부 산업과 지역 고용주들은 가끔 불평하곤 하는, 노동력 부족 현상을 초래한다.

 

신뢰할 만한 통계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평균적인 연도에 따른 실업자 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산업, 무역, 농업에 따른 큰 변동과 젬스트보 통계에 기록된 최하층 농민 예산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실업자 수가 매우 많다는 점은 당연했다. 산업 및 농촌 무산 계급으로 편입된 농민 수 증가와 임금 노동에 대한 수요 증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임금 노동 형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매우 많으며, 여전히 이전 자본주의 체제에 따른 잔재와 제도에 얽혀 있다. 단순히 많은 형태를 무시한다면 심각한 오류이고, 보론초프와 같이, '자본주의는 100만에서 150만 명 노동자로, 더욱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하고,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의 오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자본주의 대신 대규모 기계 산업을 본다. 그러나 나머지 50만 명 노동자들은 얼마나 자의적이고, 인위적으로, 임금 노동에 따른 나머지 영역과도 전혀 연결되지 않고는, 갇힌 구석에다 쳐박아 두는가.

 

밀접하게도, 경제 제도에 따른 두 가지 기본 특징이라면, 경제 제도는 화폐 경제에 기반한다. 화폐적 힘이란, 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완전하게 나타나며, 완전히 발전해서는, 자연적(가부장) 경제에 따른 잔재를 완전하게 제거하고, 몇몇 거대한 은행 기관에 집중시키며, 대규모 사회적 생산과 직접 연결되면서, 대규모 기계 산업 영역일 때 뿐이다. 경제 제도는 노동력 매매에도 기반한다. 농업이나 산업에서 가장 작은 생산자조차도 자신을 고용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사람은 예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계로부터 완전하게 발전해서, 대규모 기계 산업에서만 이전 경제 형태와는 완전하게 분리된다.

 

일부 인민주의자들에게는 매우 작아보였던 '구석'이란 실제로 현대 사회 관계에서도 진수를 구현하며, '구석' 인구,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문자 그대로 전체 노동 대중과도 착취 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선봉이자, 선발대이다. 따라서 구석부터 성장한 관계적인 관점에서도, 경제 제도 전체를 검토해야만, 생산에 참가하는 많은 집단 간 주요한 관계를 명확하게 알 수 있고, 따라서 체제 제도에 따른 주요 발전 추세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모퉁이'에 등을 돌리고는, 경제 현상을 소부장적인 생산 관점에서만 고찰한 사람은 역사적 흐름에 따라, 순진한 몽상가나, 소부르주아와 농민 이념가로만 전락하는 신세일 뿐이다.

 

 

8-2. 노동력에 따른 국내시장 형성

 

유럽 러시아 영토를 통과하는 노동자 이동 양상에 국한한다. 양상은 고용주 진술을 바탕으로, 농무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제시됐다. 노동자 이동 양상은 노동력 국내 시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따라서 농업 노동자와 비농업 노동자 이동을 구분했을 뿐이며, 자료에 첨부된 노동자 이동을 보여준 지도에서는 구분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

 

농업 노동자들의 주요 이동으로는,

 

1). 중앙 농업 지방에서 남부 및 동부 외곽 지역

2). 북부 흑토 지방에서 남부 흑토 지방

3). 중앙 농업 지방에서 산업 지방

4). 중부 및 남서부 농업 지방에서 사탕무 농장 지역

 

비농업 노동자 주요 이동으로는,

 

1). 비농업 주에서 대도시와 대도시로 이동 또는 상당 수 농업 주

2). 공업 지역,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블 및 같은 지역 다른 주 공장

3). 새로운 산업 중심지 또는 새로운 산업 분야, 비공장 산업 중심지 등

 

보다 구체적으로는,

 

a) 남서부 주 사탕무 설탕 정제소

b) 남부 광산 지역

c) 부두 일자리(오데사, 로스토프 온 돈, 리가 등)

d) 블라드미르 및 다른 주 이탄층

e) 우랄 광산 및 야금 지역

f) 어업(아스트라한, 흑해, 아조프해 등)

g) 조선, 선원 목재 및 목재 운반 일자리 등

h) 철도 일자리

 

고용주 증언에 따르면, 많은 지역에서 노동력 임대 조건에 대해 다소간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노동자들에 따른 주요 이동이다. 이동이 중요하기 때문에, 더욱 명확하게 하고자, 노동자들이 이주하는 많은 지역에서 임금 통계와도 비교해봤다. 유럽 러시아, 28개 주로 한정해서, 노동자 이동 성격에 따라, 6개 집단으로 구분해서 통계를 얻었다. 해당 표에서는 국내 시장에 따른 자본주의로부터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에 대한 기초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본주의적으로 가장 발달한 두 주요 지역에서는 큰 수로 노동자를 유치했다. 남부와 동부 외곽 지역과 같은 농업 자본주의 지역과 대도시와 산업 주와 같은 산업 자본주의 지역이었다. 임금은 출발지인 중앙 농업 주에서 가장 낮았다.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덜 발달한 곳이었다. 반면에, 유입 지역에서는 모든 유형 작업에 대한 임금이 상승하고, 총 임금에 대한 화폐 임금 비율도 상승했다. 따라서 화폐 경제는 자연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발전해갔다.

 

가장 큰 유입 지역과 가장 높은 임금, 가장 이탈 지역과 가장 낮은 임금 사이에서 중간 지역은 노동자에 따른 상호 교체를 보여준다. 노동자가 너무 많이 떠나기 때문에, 이탈 지역에서는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며, 임금이 낮은 지방에서 노동자가 유입된다.

 

본질적으로는, 표에 나타난 양면적인 과정으로부터, 농업에서 산업으로 인구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인구 산업화와 상업적이고, 산업적인 자본주의 농업 발전에 따른 농업 산업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내 시장 형성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모든 걸 요약한다. 자본주의 국내 시장은 농업과 산업에서 자본주의가 병행적으로 발전하면서부터, 농촌 및 산업 고용주 계급과 농촌 및 산업 임금 노동 계급이 형성되면서부터 창출된다.

 

노동 운동에서 주요한 흐름과 과정으로는, 주요한 형태를 보여주지만, 모든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과정에 따른 형태로는, 농민과 지주 농업, 상업 농업에 따른 많은 영역, 산업에서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 등에서도 서로 달랐다.

 

모든 과정에서 대표적인 인민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얼마나 왜곡되고, 혼란스럽게 묘사했던지, '사회적 생산력에 따른 재분배가 농업 인구에서 경제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으로 논문 제목을 정하기도 했었다.

 

'재분배'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생산력에 따른 모든 증가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만 하는 해당 수 노동자에 따른 해방을 수반한다. 그리고 모든 생산 부문에서 발생하며, 해방은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아직 박탈되지 않은 생산 수단, 토지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았기에, 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공장에서 일자리를 잃거나, 부수적인 가사 노동을 포기해야만 했을 때, 토지 착취를 확대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모든 젬스트보 통계 자료는 경작 면적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떤 경제학자들도 듣도 보도 못한 매우 특수한 종류의 자본주의를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인구를 농업에서 산업으로 전환하지 않았으며, 농부들은 반대 계급으로 나누지도 않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산업에서 '해방'시키고는, '그들에게는' 토지로 향하는 방법 외에는 무엇도 남지 않았다.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모든 과정을 시적인 무질서 속에서 재분배하는 이론의 근저에는, 이전에 자세하게 살펴본 모든 인민주의자들의 교묘한 술책들도 있었다. 농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아리아트를 한데 묶고는, 상업 농장에 따른 발달을 무시해버렸다. 산업에서도 자본주의에 따른 연속적인 형태와 많은 발현들을 분석하는 대신에, '민중'으로부터 '수공예 산업'이 '공장 산업'으로부터 고립됐다는 말만 지어냈다.

 

 

국경 지역 중요도: 국내 시장인가, 해외 시장인가.

 

 

앞서 자본주의 따른 해외 시장 문제를 생산물 실현 문제와 연결하는 이론의 잘못된 성격을 지적했다. 자본주의가 해외 시장을 필요로 한다는 건, 국내 시장에서 생산물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가 이전 규모에서 불변 조건 아래로부터 동일한 생산 과정을 반복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 필연적으로 이전 경제 단위에 대한 낡고 좁은 한계를 넘어선 무한한 생산 발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로부터 내재된 발전에 따른 불균등함으로 인해, 한 생산 부문은 다른 부문들을 앞지르고 기존 경제 관계 영역에 따른 경계를 '초월'해간다.

 

개혁 이후 초기 섬유 산업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기 때문에, 제조업은 공장 산업으로 전환되면서부터, 중부 시장을 완전하게 장악해갔다. 급속도로 발전한 대형 공장들은 더 이상 기존 시장 규모로만 만족할 수 없었다. 노보로시야, 남동부 트란스볼가, 북코카서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 등 새로운 인구를 식민화할 수 있는 더 먼 곳에 따른 시장을 모색해갔다. 대형 공장들에서는 기존 시장을 넘어 시장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기존 시장 역할을 했던 지역들이 일반적으로 섬유 산업 제품을 더 많이 소비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리고 산업 및 중부 농업 주들에서는 일반적으로 더 많은 양에서 상품을 흡수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농민층 분리, 농업 상업 발달, 산업 인구에 따른 증가가 기존 지역에서도 국내 시장으로 계속해서 확대해갔다. 국내 시장 확대는 농업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낡은 제도 유지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지연됐다. 공장주들은 국민 경제에서도 다른 부문들이 섬유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지도 않는다. 공장주들은 당장에, 시장을 요구하고, 국민 경제에서도 후진하는 다른 부문들로부터도, 기존 지역에서 시장은 제한되고, 다른 지역이나, 다른 국가, 또는 기존 국가에 따른 식민지에서 시장을 모색한다.

 

정치경제학적으로는 식민지란 과연 무엇인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식민지라는 개념에서는 주요한 특징이 있다.

 

1). 정착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미점유 자유 토지의 존재

2). 확립된 세계 노동 분업

 

세계 시장 존재 덕분에 식민지는 농산물에 따른 대량 생산에도 특화하기 때문에, 다른 상태로는 스스로 생산해야만 할 완제품을 대가로 받는다. 개혁 이후 정착된 유럽 러시아 남부 및 동부 국경 지역에서는 언급된 독특한 특징을 지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중부 유럽 러시아에서도 식민지를 구성한다는 점이다. 식민자라는 용어는 코카서스와 같은 다른 외곽 지역에서도 더욱 적용됐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경제적 '정복'이란, 정치적 정복보다도 훨씬 늦게 이뤄졌다. 현재까지도 경제적 정복은 완전히 완료되지 않았다. 개혁 이후 시기에는 코카서스가 집중적으로 식민지화됐고, 식민지 주민들은 밀, 담배 등을 판매하고자, 특히 북코카서스의 토지를 폭 넓게 경작해서, 러시아에서는 농촌 임금 노동자를 대량으로 유치했다.

 

또한 모스크바에서 생산된 제품과 경쟁으로부터 쇠퇴하는 오랫동안 토착된 수공예 산업은 사라져만 갔다. 수입 툴라 및 벨기에 제품과 경쟁으로 인해서도 고대 총포 제작 기술도 쇠퇴했고, 수입 러시아 제품과 경쟁으로부터도 수공예 철공은 쇠퇴해버렸고, 구리, 금, 은, 점토, 지방 및 기름(소다), 가죽 등 수공예 가공도 쇠퇴해갔다. 해당 제품은 코카서스에서 제품을 공급하는 러시아 공장에서 더 저렴하게 생산됐다. 조지아에서도 봉건 제도는 쇠퇴해갔으며, 기념할 잔치도 점차적으로 사라지면서부터, 술잔 제조가 감소했다. 아시아에서 의상은 유럽 의상으로 대체됐고, 모자 산업도 쇠퇴해갔다. 지역 와인을 위한 포도주 가죽 부대와 용기(투수) 생산도 감소했다. 통 제조 무역이 처음으로 판매되면서부터, 러시아 시장을 장악해갔다.

 

시장에 있어 러시아 자본주의는 코카서스를 세계 상품 유통 영역으로까지 끌어들이면서, 지역적 특수성, 고대 자연적인 고립에 따른 잔재를 말살시켰고, 공장 시장을 스스로 확보해갔다. 개혁 이후 초기에는 인구 밀도가 낮았거나, 세계 경제는 물론 역사 바깥에서 살아가는 산악인들로 가득했던 나라는 석유 산업가, 와인 상인, 대규모 밀 및 담배 재배 농가 토지로 변모했다.

 

자본가를 지칭하던 쿠폰(Mr. Coupon)은 자랑스러운 산악인에게 아름다운 민족 의상을 무자비하게 벗겨냈고, 유럽 하수인의 제복을 입혔다. 코카서스에 따른 급속한 식민지화와 농업 인구에 따른 급속한 증가로부터 가려진 인구 농업에서 산업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동반했다. 코카서스 도시 인구는 1863년 35만 명에서 1897년 약 90만 명으로 증가했다. 1851-1897년 사이에 총 인구는 95% 증가했다.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 등지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고, 또 계속됐다.

 

그렇다면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의 경계는 어디일까. 국가적, 정치적인 경계를 정하는 건 너무 기계적인 해결책이며, 과연 충분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중앙 아시아가 국내 시장이고 페르시아가 해외 시장이라면, 히바와 보카라는 어디에 속할까. 시베리아가 국내 시장이고 중국이 해외 시장이라면, 만주는 어디에 속할까.

 

이런 질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지배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새로운 국가들을 식민지화하고, 기존에 따른 비자본주의 국가들을 세계 경제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고,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특징은 개혁 이후 러시아에서도 큰 힘으로 드러났으며, 지금도 계속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 형성 과정은 두 가지다. 자본주의에 따른 심층적 발전으로, 주어진 확정적이고, 폐쇄적인 영토 내로부터 자본주의적 농업과 산업이 더욱 발달한다는 점과 자본주의에 따른 폭 넓은 발전으로부터, 자본주의 지배 영역을 확장시킨다. 본 연구 계획에 따라서도, 자본주의에 따른 심층적 발전에서 거의 전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따른 폭 넓은 발전도 중요해진다.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국경 지역에 따른 식민지화 과정과 러시아 영토 확장을 완전히 연구하려면, 별도 작업이 필요하다.

 

다만, 러시아는 국경 지역에 따른 식민지화로부터 이용할 수 있는 풍부한 자유 토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아시아 러시아는 두말 할 일도 없고, 유럽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도 있으며,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교통 수단도 열악해서, 중부 러시아와 경제적인 연결이 매우 취약했다.

 

특히 '극북'에 위치한 아르한겔(Archangel Gubernia)를 살펴보자면, 광활한 영토와 천연 자원은 여전히 미미하게 개발됐다. 주요 지역 생산물 가운데 하나로는 목재가 주로 영국으로 수출됐다. 따라서 유럽 러시아 지역은 국내 시장이 아닌 해외 시장이었다. 러시아 기업가들은 당연하게도 영국을 부러워했고, 아르한겔까지 철도가 연장되면서부터, 해당 지역에서도 많은 산업 분야에서, 고조된 분위기와 사업 활동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8-3. 자본주의 임무

 

 

문헌에서도 자본주의 '임무', 경제 발전에서도 자본주의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이라는 질문을 요약해야만 한다. 역할에 따른 발전(진보)를 인정한다는 건, 사실로부터 설명하는 모든 단계에서도 자세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자본주의에 따른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을 온전히 인정하고,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내재된 경제 제도에 따른 역사적으로는 일시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심오하고, 전면적인 사회적 모순을 인정하는 점과는 매우 양립한다.

 

역사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본질을 인정한다는 건, 자본주의에 대한 변명을 말한다고만 생각하는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 따른 가장 심각한 모순을 무시한다거나, 과소평가했으며, 농민층 분화, 농업 발전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성격, 농촌과 산업에 따른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에 따른 부상을 은폐하고는, 수공예 산업에서 가장 낮으며 최악의 자본주의 형태가 완전하게 우세한다는 점을 은폐하면서 잘못을 범해버렸다.

 

자본주의에 따른 점진적인 역사적인 역할로는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사회적 노동에 따른 생산력 증대와 노동에 따른 사회화다. 그러나 두 가지 점 모두 국민 경제로는 여러 부문에서도 매우 많은 과정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노동에 따른 생산력 발전은 대규모 기계 산업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두드러졌다. 자본주의 최고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수작업 생산과 원시 기술이 존재했고, 매우 자발적이고, 매우 느리게 발전했다. 개혁 이후 시대는 러시아 역사에서도 이전 시대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러시아는 나무 쟁기와 도리깨, 물레방아와 수동 베틀에서 철제 쟁기와 탈곡기, 증기 제분기와 동력 베틀로부터 급속하게 변모해갔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배하는 모든 국민 경제 부문에서도, 철저한 기술 변화가 목격됐다. 자본주의 본질로는 변화 과정으로부터도 불균형하고, 균등하지도 못한 많은 점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호황기와 불황기가 번갈아 나타나고, 한 산업 발전은 다른 산업에 따른 쇠티로 이어지며, 한 지역에서는 농업 부문이 발전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다른 부문이 발전하면서, 무역과 산업에 따른 발달이 농업에 따른 발달을 앞지르는 등으로 나타난다. 인민주의자들이 저지른 많은 오류에서 불균형적이고, 불규칙적이며, 열광적인 발전이 다가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노력에서도 비롯됐다.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란,

 

1). 상품 생산에 따른 발달 자체가 자연 경제 특징인 소규모 경제 단위에 따른 분산된 상태를 파괴하고, 소규모 지역 시장을 거대한 국가와 세게 시장으로 통합시킨다. 자신을 위한 생산에서 사회 전체를 위한 생산으로 전환된다.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할수록 생산에 따른 집단적인 성격과 전유에 따른 개인적 성격 사이에서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

 

2). 자본주의는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이전에 분산된 생산을 전례 없는 집중으로 대체해간다. 검토 중인 자본주의 특징에서도 매우 두드러지지만, 그렇다고 유일하지는 않다.

 

3). 자본주의 이전 경제 체제에서도 분리할 수 없는 개인적 종속 형태를 제거시킨다. 러시아에서도 발전(진보)적인 성격은 특히 두드러진다. 생산자에 따른 개인적인 종속은 농업만이 아니라, 제조업, 광업 및 야금업, 어업 등에서도 존재했고, 종속 농민이나, 노예 농민 노동과 비교해봤을 때도, 고용 노동자에 따른 노동은 국가 경제로부터 모든 부문에서도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4).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구 이동성을 창출한다. 이전 사회 경제 체제 및 제도에서는 요구되지 않으며, 제도 아래에서는 대규모로 실현될 수 없다.

 

5). 자본주의는 매우 후진적인 형태와 사회적, 경제적 관계가 늘 지배적인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며, 대규모 산업 중심지 수를 증가시킨다.

 

6).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구 결사와 조직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키고, 해당 조직에 따른 이전 시대와는 다른 특징을 부여한다. 자본주의는 중세 사회에서 좁고, 지역적인, 사회적인 신부 연합을 무너뜨리며, 치열한 경쟁을 생산하고, 사회 전체를 생산에서 서로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에 따른 대규모 집단으로 분할해서, 각 집단 내 조직에서는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한다.

 

7). 자본주의가 낡은 경제 체제 및 제도로부터 가져온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사고 방식에서도 변화를 초래한다. 경제 발전에 따른 병적인(발작적인) 특성, 생산 방식에 따른 급속한 변화와 생산에 따른 막대한 집중, 모든 형태에서 개인적인 의존과 자연적(가부장적) 관계의 소멸, 인구 이동성, 거대 산업 중심지에 따른 영향력 등, 모든 점은 생산자들 성격 자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당시에 러시아 연구자들로부터 비슷한 결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인민주의 경제학에서, 인민주의 대표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견해 차이를 요약했다. 인민주의자가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자본주의 이전 경제 관계 체계에 대해 가졌던 개념 자체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었다. 특히 농업과 산업 모두에서 농민 경제 구조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모순을 무시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속도에 있어 느린지, 빠른지는 전적으로, 해당 발전을 무엇과 비교하는가에 달려 있었고,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러시아에서도 이전 자본주의 시대를 자본주의 시대와 비교해봤을 때,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회 경제 발전은 매우 빨랐다. 그러나 발전 속도를 일반적인 기술과 문화 수준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속도와 비교해본다면, 러시아 자본주의에서도 발전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자본주의와 곧바로 양립할 수는 없으며 발전을 지연시키고, 자본주의 생산에 따른 발전 뿐만이 아니라, 고통 받는 생산자들에게도 불완전한 자본주의적인 발전과 그 상태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오래된 고대 제도들도 더욱 악화시켰다.

 

인민주의자들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는 아마도 사회 및 경제 과정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 차이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해 관계와 역사적인 역할을 가진 집단들 간 상호 관계에 따른 결과로도 사회 및 경제 관계에 대한 총체를 제시하지도 않았었다. 필자가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필요한 자료를 충분히 제공했더라면, 자신이 들인 노력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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