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독일군 진격, 프스코프 함락으로부터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정부로는 큰 위험에도 빠져들었다핀란드에서는 내전도 일어났다. 모스크바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조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다. 311, 소비에트 정부로는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정부 중심부였던 모스크바로 이전했다. 모스크바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졌다. 모스크바로 이전하던 날, 311, 레닌은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기고문을 작성했다. 312일 자, <진실>에 게재한 기고문으로는 강령 성격을 띠고 있었다. 레닌은 글에서 짤막하고, 압축한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모든 의의를 말했었고, 브레스트 강화 협정에서 온갖 모멸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레닌은 19171025일부터 방어론이라고 썼고, 조국 수호를 지지한다고 했다. 조국 전쟁이란 사회주의 조국 전쟁이고, 조국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 전 세계 사회주의 군대에 대한 분견대로 소비에트 공화국 전쟁이라고 봤다레닌,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글에서는 분명한 목표를 제기했다. 318, 400-500여명 수병들로 이뤄진 영국 해병대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차르 정부 때 협약으로부터 만들어진 군사 시설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상륙 부대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정부 기관들과 주요 인사들은 크레믈린에서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붉은 군대는 처음 얼마 동안이지만 보통 군대와도 매우 달랐다. 열정으로 들끓었지만 겉으로는 원시적이었다. 붉은 군대로는 정해진 복장은 없었다. 각자 자기 맞는 옷을 입었고, 엄격한 규정, 정해진 규칙도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 적들은 붉은 군대를 비웃기도 했다. 볼셰비키로는 강하고, 굳센 군대를 창설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주민들은 무슨 약탈로 생각하고는 붉은 군대를 두려워했다. 크레믈린을 지키고 있던 붉은 군대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정작 어디에서나 정해진 형태 행동이 없었던 수비대 모습을 보이고는 외국인들도 특히 놀라워했다. 7차 당대회 191836-8, 독일 평화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결정은 치열한 투쟁 끝에 채택했다독일과 강화조약 비준 문제, 중앙 위원회 저치 보고를 한꺼번에 다룬 보고처로는 레닌은 연설했고, 좌익 공산주의 모임을 대표하는 공동 보고처로는 부하린이었다. 모든 문제들은 매우 날카롭게 제기했다. 대회로는 30만 당원들을 대표해서 의결권을 가진 46명은 참석했다. 당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통일 단결은 아직은 없는 상태였다. 46명 대회 참석 가운데 30명은 브레스트 강화 협정 비준에 찬성했고, 12명은 반대했고, 4명은 기권했다. 대략 1/3 대의원들은 중앙 위원회 노선, 레닌 노선에 반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뛰어난 볼셰비키였다. 223, 6명은 소비에트 당 직위에서 물러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 안팎에서 선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 받았다. 224,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중앙 위원회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오스트리아 독일과 강화 조약 이행 조건들과 관련한 중앙 위원회 결정에 불복종했고, 결의안에 첨부한 해명서로는 장래 당 분열은 해소되지 않을거라고 천명했다.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1918년 초, 전 러시아로부터 좌익 공산주의 조직 중앙 역할을 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에 맞섰다. 혁명 미사여구에도 맞서, 열심히 연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918221, <진실>에서도 썼다.

 

레닌도 대중은 좌익 공산주의가 아닌 레닌을 따를거라 알고 있었다. 4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비상 대회로는 강화 조약을 비준해야만 했다.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잃을 수 있을거라 각오까지 했었다. 224일 자 성명에서도, 국제 혁명을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 권력을 잃는 게 합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레닌은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312, 모스크바 노동농민붉은군대대표소비에트에서 대중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뜨겁고, 사력을 다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을 앞서 언급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 혁명과 매우 다르게 이뤘다고 말했다. 314-16일까지 열린 제4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비상대회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대중 앞에 연설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충심으로, 진솔하게 문구 하나 무심코 대충 말하지도 않았다. 혁명가이자, 투사였던 특징이기도 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724명 찬성, 276명 반대로, 강화 조약을 비준했다. 118명은 기권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볼셰비키만이 아니었다. 멘세비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화 협정 조인을 반대했다. 대표들은 223,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평화 협정이라는 독일 쪽 조건에다 서명하기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따라서 역관계로는 724명은 찬성했고, 276명은 반대했다. 따라서 레닌 노선은 중차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과 조약 문제를 마무리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 활동을 보다 폭 넓게 전개해갈 수 있도록 활용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라는 소책자 집필에도 들어갔다. 레닌은 집필할 때, 스베르들로프로는 속기사를 쓰라고도 설득했었지만, 오랫동안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미하일로비치로부터 끝끝내 설득한 끝에 훌륭한 속기사를 보냈음에도, 레닌은 같은 작업 방식을 고집했다. 먼저 두 쪽 정도 글을 쓴다. 다음, 좀 더 잘 쓸 수 있을 거리도 있는지 한참 생각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있으니 잘 되지는 않았다. 병이 이미 위중했을 때 스스로 글 쓸 수 없었던 1923년에 와서야 비로소 글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쓰도록 허락했다. 그래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포치예바, 글랴세르, 마누차리얀츠, 볼로지체바 등 동지들은 글을 받아적기도 했었다. 서기국에서도 이미 오랫동안 레닌 곁에서도 일해 온 사람들이라서 꺼려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집무실에서는 당혹스러운 소리도 가끔 들려오곤 했다.

 

1918, 3월 말-4월 사이로, 레닌은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를 열심히 집필했다. 글로는 428, <소식>에서도 게재했고, 뒤로는 오랜 세월 동안 볼셰비키 행동 지침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건설로 갖는 주요한 난제에 대해 레닌은 소책자로부터 간단하고, 명백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밝힌 글은 어디에도 없었다. 러시아는 10월로는 소농민 나라였다. 수백만 농민들은 소자산가 심리로 속속들이 젖어 들었다. 모두들 자기 자신, 생계, 땅 조각만 생각학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로 농민들은 자기 자신이나, 신의 가호만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소자산가 심리와 해악에 대해서도 수십 차례 글을 쓴 바 있다. 제헌 의회는 해산하고 나서야 권력 문제로는 최종 결정이 났을 때, 브레스트 강화 협정이라는 일정 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을 재교육하고, 새로운 심리, 집단을 중시하는 심리를 교육하도록 할 방법 문제를 전면에서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지주, 자본가들을 쓸어버렸고 소부르주아 세계에다 빗장을 열었다. 지주 부를 분배하면서 빼앗은 재산에 대한 투기도 벌어졌다. 소부르주아 세계를 장악하고, 대중을 재교육하고자,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를 창출하고, 행정을 조직할 수 있을지, 레닌으로는 1918, 3-4월에도 모든 관심을 쏟아냈다. 전 인민 회계, 관리를 조직하고, 노동 생산을 높이고,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회 활동에서 대중을 끌어들이고, 의식을 높이고, 노동과 노동 규육을 새롭게 조직할지에 대해서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로부터 레닌은 써놓았다. 소책자에서 사회주의 경쟁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경쟁도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다들 간과하곤 했다. 내전도 부분적으로 일조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경쟁은 대규모로 폭 넓게 적용할 수 있었다. 15개년 계획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던 1928년에 이르러서도, 레닌은 글 쓴 지 10년 뒤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책자로는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특수한 장도 있다. 언제나 레닌은 한 문제를 두고 모든 연관, 매개 관계 속에서 포착했고, 다른 기본 문제들과 일일이 연결해서 다루었다. 따라서 레닌은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문제도 경쟁 문제와도 연관할 수 있었다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노동 생산을 높이는 과제로는 장기적이라고 지적했다. 1936년 초, 스타하노프 운동을 체험했고, 15개년 계획, 25개년 계획으로부터 조성한 새로운 기술 기반 아래로부터 노동층에서도 노동 생산 제고를 위한 운동도 드높아졌다. 그리고 노동 생산도 매우 높았고,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라는 글도 새롭게 조명됐다. 글에서 제시한 레닌 기본 방침들도 매우 중요했다. 레닌은 노동, 농민들과 무척 많이 대화했다. 일할 능력이 결여됐음을 목격했고, 단지 일할 능력이 결여됐을 뿐만 아니라, 수 세기로 거친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유산으로 노동을 저주스럽고, 최소해야 할 무엇으로도 대하고 있었다. 혁명 노동계급들을 늘 재촉하고, 욕하고, 주먹질을 대 해던 십장, 중간 감독들을 일소했다. 노동 계급들로는 아무도 재촉하지 않을 수 있었고, 덕분에 피곤하면 앉아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수 있어서 기뻐했다. 초창기 공장 조직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많은 회합을 가도록 공장에서도 쉽게 내보내줬다. 한 노동 계급은 투표를 하기도 했고, 공장에서 저녁 회합 모임, 집안일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18년 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착취 주인들, 충실한 하인들, 재촉하며 채근하던 사람들도 몰아냈다. 공장은 사회 소유였고, 사회 소유로부터 보호받았고, 노동 생산을 꼭 강화하고 높여야만 한다는 의식도 잘 없었다. 따라서 레닌은 같은 측면을 그토록 강조했다. 레닌은 진실을 직실할 줄 알았다. 노동 의식, 노동에 대한 의식 태도로부터 북돋고자 했고, 노동 전반, 삶에서도 전체를 실용해서 조직하고자 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특히 신랄하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부르주아지 대표라고,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활동 전반에 대한 중요함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용주의나 단계주의로만 취급하면서, 혁명 전쟁이나 꿈꾸는 사람, 등등이라고 규정했다. 레닌은 지도역량을 믿었던 계급으로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글은 428일자, <소식>에도 게재했고, 429,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도 연설했다. 모스크바 노동 열심 활동가들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 대한 레닌 보고를 들을 수 있도록 종합기술박물관에서도 보고를 이뤄지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로부터 혁명 특징, 승리 원인, 소부르주아 국가라는 환경에서 사회주의 건설 어려움 등과, 부르주아지 성격, 약점을 규정했고, 서구와 미국 부르주아지로부터, 트러스트를 조직한 사람들에게 생산을 조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소부르주아 세계를 대표하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비난했고, 영향력에 굴복한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했고, 프롤레타리아트 역할, 소부르주아 세계 영향력, 사회주의 조직 의미,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게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롭게 조직할 때만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모든 노동 대중들을 규합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대공장에서 규율을 익힌 프롤레타리아트와 현 시기 과제로 볼 때, 중앙 위원회로부터 노동절에 제기한 자본을 물리칠 수 있는 조직과 철도에 대한 중요함도 함께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329, 4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난 뒤 러시아 공산당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을 수반으로 한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여전히 주간지, <공산주의>를 발행하고는 자신들만의 견해를 고수하기로 결정했었다. 420, 발행한 창간호에서 좌익 공산주의들은 편집부 이름으로, <현 시국에 대한 테제>를 실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해한 레닌 연설은 대부분 개진한 견해에 대한 답변들이었다. 또한 레닌으로는 <좌익 공산주의라는 유치한 단계>, <소부르주아지 근성>이라는 기고문에서 그들 견해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했다. 글들로는 191859-11일자 <진실>에다 게재했다. 기고문으로는 사회하 부분으로는 특히 흥미로웠다. 국유화 몰수라는 문제에서 결단력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위대한 결단력이더라도, 국유화와 몰수로부터 사회화로 이행하고자 충분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시국과 국유화에서 사회화라는 이행 본질 자체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제기한 좌익 문제로는 순진하고, 어리석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 시국 핵심은 바로 단지 몰수로부터 결단력 하나가 아니라, 사회화로부터 계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 농장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게재한 좌익 공산주의 자료를 분석해봐도, 신랄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몰계급적이고, 소부르주아 지식 계급 근성이 뼛속까지 물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로는 6월에 마지막 호는 나옴으로부터 겨우 네 번 나왔다. 레닌 노선에 맞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매우 투쟁했었다.

 

191852-3,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볼셰비키에게 스피리도노바, 카렐린을 수반으로 하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내어주기를 요구했다. 게다가 문제를 최후통첩으로 제시했다. 레닌으로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볼셰비키, 메셰랴코프, 세레다 등과 협의했었고, 볼셰비키 분파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당 중앙 위원회도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 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농업 최고인민위원회 회의에 대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영향력은 약화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촌 계급 분화 노선을 취했었다522,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경제 문제로는 빵과 기타 식료품들을 둘러싸고는 투기가 횡행했다. 기근에 대한 원인으로는 단지 러시아 곡물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라, 부르주아지, 부유층 전체가 노동하는 사람들 지배, 노동 소비에트 권력 지배에도 맞서 매우 심각한 문제인 곡물 문제를 두고 최후 결전을 벌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지적했다. 농촌 부자 쿨라크를 포함한 모든 부유층, 부르주아지로는 국가 곡물 분배를 파괴하고 있고, 부르주아지로는 고정 가격을 뒤흔들고 있고, 곡물을 투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1푸드, 16.38kg마다 100루블, 200루블, 또는 이상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독점을 파괴하고, 뇌물 매수 온갖 책동을 파괴하는 건 사회주의 시작이자, 기본이고, 또 근원 원천이자 원칙으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여, 먹지도 말라라는 원칙을 성공하고 또 실현하고 있는 노동 권력을 죽이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실제로도 모스크바에서는 곡물 투기를 도처에서 이뤄졌다. 부농이자 소자산가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고자 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도, 부자·쿨라크·소자산가 심리, 낮은 생산, 무지, 경제 후진 따위와 싸워나가고자, ,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길도 매우 험난했다. 5월 말,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혁명 조직 작업에 대해서도 썼다. 국가를 방어하고자 조직화, 발발한 내전에 대한 지도와 대처를 사회주의 건설로부터 덧붙여 엄청난 작업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산업 국유화 법령 단행, 국영 기업 노동 지침 작성, 노동 조합 대회, 전러시아인민경제최고회의, 인민경제평의회 제1차 대회 등에서 보고, 노동최고인민위원회 대회, 공장 단위 대표 회합, 공장 위원회 협의회 등에서 연설했다. 또 페테르부르크, 옐레츠 등에서 온 노동 계급과 면담, 전선으로 동원한 공산주의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계엄령 공표 직전, 매우 날카로웠던 시기로는 525, 최고인민위원회에다 사회주의사회과학아카데미에 대한 법령 초안도 제출했다. 65일로는 국제주의 교사들 앞에서 연설했다. 610일에는 체코슬라바키아 반혁명 반란에 대한 격문을 작성했고, 같은 날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기술가들을 활동으로 합류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부상 입기 이틀 전, 교육 대회에서도 연설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대의에서 학교로부터 갖는 의의를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매주 여러 지구로 가서 연설했고, 하루에도 수 차례씩이나 연설하는 일도 잦았다. 대중 사이에서 작업, 기본 작업도 헛되지 않았고, 작업들도 승리를 돕기도 했다. 1918년 봄과 여름에도,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살면서도 말 그대로 온몸을 바치면서 일했다. 중농은 소비에트 권력에도 공감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력은 평화를 위해 싸웠고, 지주에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동들은 소비에트 권력은 안전하다고 아직 믿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농민들도 더 이상 자신들의 소자산가적인 중립을 지킬 수는 없게 됐다. 5월 중순부터 계급 투쟁은 도처에서도 불붙었다. 1918년 여름은 몹시 힘들기도 했다. 레닌으로는 부상을 입어 무엇도 쓰지 못했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모든 잃어버린 부르주아지로는 외국 도움을 강구했다. 연합국에게 반란을 조직할 자금을 받아오거나, 주민들을 약탈에 내맡긴 채로 독일군 지원에다 호소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독일로는 핀란드 백위군을 지원하거나, 우크라이나를 점령했고, 터키로는 아제르바이잔 무사바트 민족주의들과 그루지야 멘셰비키를 지원하러 나섰다. 독일은 크림을 차지했고, 영국은 무르만을 차지했고, 연합국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시베리아를 중앙 지역으로 차단하고자 도왔다. 우크라이나, 시베리아에서는 곡물 수송을 중단했고, 수도 두 곳이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는 기근에도 시달렸다. 전선 포위망도 좁아졌다따라서 레닌은 520,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전신을 보냈다. 연이어 반혁명 반란으로는 쿨라크를 일으키고, 그들을 조직했다. 쿨라크로는 곡식을 숨겨뒀다. 기아 투쟁과 반혁명에도 맞서는 투쟁도 함께 이뤄졌다. 레닌은 빈민 위원회를 조직하자고 내세웠고, 노동 계급들로는 식량 파견대로 들어가서 농촌에서 혁명 경험을 쌓아야만 한다고 열심히 선동했다. 레닌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현 시기 곡물 투쟁이란 사회주의 투쟁이라고도 말했었다. 선진 노동 계급이란 빈민 지도가이자, 농촌 노동 대중이라는 지도가로, 노동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으로, 인민에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고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썼다. 투쟁 속에서도 중요한 건 단련할 수 있고, 또 노련한 노동 계급이라는 혁명 전위라고 썼다. 놀랍게도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로는 레닌 호소에도 부응했다. 곡식 투기꾼·쿨라크·조직 파괴가·뇌물 수수가 등에 맞선 십자군을 조직했다. 빈민들도 소비에트 권력 주위로 더욱 결합해갔다. 그리고 611,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빈민 위원회 조직에 대한 법령을 승인할 수 있었다. 레닌도 빈민을 배려했고, 빈민들도 레닌을 배려했다.

 

독일로는 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는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는 중단했지만, 러시아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아직 브레스트에서 협상 진행 시기에도 독일 정부로는 우크라이나 의회와 협정을 맺고는, 볼셰비키로부터 맞서는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았다. 독일로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는 소비에트 군력을 전복하도록 한 뒤로, 의회를 함부로 해산하고는, 차르 장군이던 스코로바츠키를 우크라이나 통치가이자, 수장 자리로 앉혀놨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로는 사실상 독일 식민지로 나떨어지고는 말았다. 곡물, 가축, 설탕, 원료 등도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대량 반출됐다. 독일 제국주의들은 갖은 수를 써내서라도, 내전 도화선을 앞당기고자 했었다. 돈스카야 지방으로 도망간 돈스카야 대장이기도 했던 크라스노프로는 독일에다 지원을 호소했었고, 독일로는 크라스노프로부터 카자크 백위군 부대들을 통합하기를 도왔었다. 독일로는 핀란드에서 백위군이 혁명을 진압하고, 핀란드 혁명가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도록 돕기도 했다. 독일만 공격해오지도 않았다. 4월 초에는 일본, 영국은 블라지보스토크에도 상륙했다.

 

따라서 4월로는, 이미 상당 수로 반소비에트 당들은 부흥 동맹으로 연합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입헌민주당, 인민사회주의, 멘셰비키, 단결 모임 등도 들어가 있었다. 부흥 동맹은 협상국과 남몰래 협정을 체결하고는, 볼셰비키에 맞서는 협상국 군대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하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도록 하는 반란을 조직하고자 체코 군단을 활용했다. 케렌스키 정부 때 체코 군단 수로는 42천여 명에 달했다. 러시아 검은 백인조 장군들, 장교들 상당 수도 가담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중앙 위원들, 시베리아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도 프랑스 군사 사절과 반란 계획을 논의했다. 극동 지역으로 철수했던 체코슬라바키아 군대로는 우랄, 시베리아, 우수리 등 철도에 있던 주요 기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5월 말, 체코 군단은 첼랴빈스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타이가, 톰스크 등 역을 점령했고, 6월 초로는 옴스크, 사마라를 점령했다. 5월 말, 모스크바로는 자유조국수호동맹이 주도한 백위군 근위대 음모를 적발했었고, 크림에서는 반혁명을 진격했고, 발틱 함대에서 반란을 기도했다. 64, 크림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를 수립했었고, 619일로는 이르쿠츠크에서 반혁명 반란도 일어났다. 620일에는 코즐로프, 예카체린부르크에서, 629일에는 코스트로마에서 군주주의 음모를 적발했다. 630일에는 시베리아 지역 두마에서 부르주아 정부 권력을 선포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부르주아지와 손을 맞잡았다. 68, 체코슬라바키아로는 사마라를 함락한 뒤로부터, 그곳에다 제헌 의회 위원회를 결성했었고, 619일에는 땀보프스카야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볼로다르스키 동지는 그들로부터 살해됐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역시나 반혁명 길로 나섰다.

 

624, 그들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소비에트 권력에도 반대하는 무장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627, 영국 상륙 부대로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7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사절단 지도로부터 결성된 백위군 근위대를 적발해서 체포했다. 74,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를 열었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블에서 폭동을 조직했다. 75, 이미 레닌은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에게 우유부단함, 공황 상태 조장, 사태에 대한 몰이해 등을 일일이 비판했다. 그들로는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폭동도 일어났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블륨킨, 안드레예프로는 제네주니 거리에 있던 독일 대사관 건물로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독일 대사였던 미르바흐 백작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그에게 폭탄을 투척하고는 죽인 다음, 전러시아비상위원회였던 체카 분실로 몸을 숨겼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포포프는 지휘하던 곳에서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로 있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 전체는 임시로 이전했던 상태였다. 살인가를 체포하고자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장 제르진스키는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포포프로부터 자악한 분실로는 인근 거리마다 순찰병을 파견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스마도비치, 체신 최고인민위원 포드벨스키,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 라치스 등을 체포하고는, 우체국, 전화국을 장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로는 모스크바에서 반란 소식을 러시아 전역, 체코슬로바키아 전서에다 보내고는 독일과 전쟁을 촉구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부터 획책한 군사 행동에도 대응하고자 최고인민위원회로는 2천 명 보병, 8문 대포, 1대 장갑차를 가지고, 포포프 분실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78일 아침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를 사방으로 포위하고는 포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으로는 크메믈린 사격에 대응하고자 크레믈린 마당에다 몇 차례 대포를 명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포프 분실은 얼마 저항하지도 못했고, 블라지미르스코예 대로로 퇴각해서 도주했다가 곧 이내 산산이 흩어졌다. 300명 포로를 붙잡았다.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을 괴멸한 뒤로 레닌은 반란을 일으킨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가옥을 보고자 방문했다. 포위됐을 때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문서들을 모두 다 찢어버렸다. 78, 5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67-8일 폭동에 동조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비에트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710일 대회는 소비에트 헌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활동을 종결했다. 7월도 극도로 어려웠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싸웠던 군대 지휘관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무라비요프였다. 10월 혁명 뒤로 소비에트 권력 쪽에 가담해서, 케렌스키, 크라스노프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를 맞서 싸웠고, 중부 지역 의회들에도 맞서 싸웠으며, 루마니아 전선에서도 싸웠다. 그러나 76-7일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개시하자 무라비요프로는 그들 쪽으로 이내 돌아서고는 군대를 모스크바로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무라비요프에게 의존했던 사람들로는 지지하지는 않았다. 무라비요프로는 심비르스크 소비에트에 의존했으나 소비에트에서도 무라비요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라비요프를 체포했으면 했으나, 저항하자 죽였다. 심비르스크는 곧 체코슬라바키아로부터 함락됐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니콜라이 2세를 구금했던 예카체린부르크로 접근해갔다. 716,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총살했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니콜라이 2세를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723일이 되어서야 예카체린부르크를 함락했다.

 

북부로는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무스만스크 철도 일부를 장악했다. 바쿠 멘셰비키로는 영국군을 불러들였다. 백위군 의용군은 치호레츠크 역, 아르마비르 역을 차지했다. 독일은 대사관을 경호하고자, 일개 보병 대대를 모스크바로 진입해주기를 요구했다. 힘겨웠지만, 그래도 레닌은 실망하지는 않았다. 심정이 묻어난 글로는, 726, 제트킨에게 쓴 핀지에도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당을 지지했고, 또 응원했다. 그러나 반혁명 반란은 계속해서 몰아쳤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카잔을 점령했고,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했었다. 북부 지역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조직했고, 이제프스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군대로는 사라풀을 점령했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치타를 포기하고 떠났고, 반혁명 부대 의용군은 예카체린부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반란도 실패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대오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새 전력을 갖추고자, 독일과 연합국들 간에도 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러시아에서도 개입할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에 관심을 잃었다. 116,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벨라야 강에서 패배했다. 따라서 모든 무장 병력을 통합하고자 했다. 일련으로 중요한 조직 대책들을 마련했었고, 노동 조직은 곡물 징수에도 참가하고, 추수 부대, 암거래 저지 부대를 조직하고자 법령을 공표했다. 곡식 사정은 조금 개선할 수 있었고, 부르주아 신문들도 폐간해서 사람들을 도발하는 행위도 중단했다. 외국인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개입에 반대하는 선동도 강화해갔다. 89, 외교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연합국 평화 협정을 제안하라고 미국 정부에다 호소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자신들의 기반이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부터 레닌을 비롯한 여러 볼셰비키 지도가들을 대거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830, 오전 10, 레닌그라드 비상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우리츠키 동지는 살해됐다는 소식을 레닌도 받았다. 밤에 레닌은 모스크바 위원회 동원령과 관련해서 바스만니 지구,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에서 연설하기로 했다. 부하린도 말렸으나, 레닌은 집회로 갔다. 2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인민 교육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레닌은 자리에서 이틀 전 연설도 했었다. 집으로 갈 채비를 마치고는, 크레믈린 광장으로 지인 교사를 마중하고, 운전수로는 레닌을 미헬손 공장으로 태우고 가던 도중에, 한 사람은 레닌에게 총을 쏘아서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서둘러 병상으로 옮기고는 스베르들로프도 엄숙한 상태였다. 루나차르스키도 놀랐다고 한다. 여러 동지들도 걱정했다. 스탈린은 전선으로 나간 상태였다. 레닌 부상으로 모든 당 조직들뿐만 아니라 폭 넓은 노동 계급, 농민, 붉은 군대 대중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동요하는 모든 신문들도 용태와 상태 보고를 주시했다. 830일 저녁, 스베르들로프로부터 서명한 레닌 암살 기도에 대한 당 입장을 발표했다. 노동 계급은 지도가를 향한 암살 기도에 대해서는 더욱 큰 단결로 답하고, 모든 혁명 적들에 대해서는 맞서고자 가차 없는 대중 테러로 답하겠다고 밝혔다. 암살 기도는 노동 계급을 더욱 집결하도록 했고, 더욱 단결하고자 긴장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붕괴했다.

 

 

레닌은 부상을 당한 다음 날, 신문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은 암살 기도와 무관하다는 당 입장을 모스크바 사무국 발표로부터 게재했다. 7월 폭동 뒤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에서 이탈해갔다. 특히 노동 계급들은 더욱 그러했다. 콜레가예프, 피첸코, 우스치노프 등은 주도하고, 인민주의 공산주의라고 칭한 분파도 당에서 분리됐다.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무력으로 결렬하도록, 테러 행위도, 공산당과 적긎거인 투쟁도 모두 허용하지 않았다. 남은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더욱 우경화되어 쿨라크 반란을 지지했으나, 영향력은 약화해갔다. 레닌 암살 기도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붕괴 과정을 강화하도록 했고, 대중 속에서도 영향력을 더욱 지리멸렬하게 했다. 레닌은 살아남았다. 하루라도 업무로 복귀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910, 레닌 병세를 묻는 전화로부터 의사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말기를 바란다는 당부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는 <진실>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로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비록 화는 났었지만, 업무로 다시 복귀할 수 있어 기뻐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했다.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간부 회의에다 보내는 환영사를 썼다. 해당 협의회로는 영향력도 무척이나 컸었다. 그러나 해당 조직은 인민 의식 증대, 노동 계급 전진, 소비에트 국가 행정이라는 대의 종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는 별로 돕지는 못했다고 결함을 생각하기도 했다. 레닌은 협의회에다 환영사를 보냈고, 앞으로 제기하는 정치 임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틀 정도 기간에 또 다른 기고문도 썼다. <러시아 신문들 성격에 대하여>였다. 레닌은 신문들이 주위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노동, 농민 대중으로부터 생활로 가까이, 또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야만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업무로도 다시 복귀하자, 식량 문제에 대한 심원한 지점도 파고들었고, 농촌 고용주들에게 현물세를 부과하는 법령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도 참가했다. 주로 소박한 집에서 지내왔고, 값 싼 방, 값 싼 해외 하숙집에 얹혀 사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라인 보트 집으로 이사갔을 때는 제일 작은 방을 골랐었고, 또한 거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여섯 해 뒤로는 레닌으로는 숨을 거둔 곳이기도 했다. 아무튼 전선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93, 카잔에서는 노동 계급들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권력,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에도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7월 카잔을 점령했다. 12월로는 볼스크, 심비르스크, 17일로는 흐발린스크, 20일로는 치스토폴, 107일로는 사마라를 점령했다. 99일에는 소비에트 군대로는 그로즈니, 우랄스크를 점령했다. 국면을 전환했다. 소비에트 권력 일주년을 맞이했을 때, 레닌은 연설로부터 산개했던 붉은 호위병은 강력한 붉은 군대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독일로는 무르익어 갔던 혁명 소식도 고르키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101, 레닌은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조합, 기타 등등 합동 회의를 소집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도 혁명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주로 보급을 위한 식량 확보, 군 입대를 더욱 늘릴 수 있고, 국제 노동 혁명을 도울 수 있는, 3백만 군대도 모으고자 했다. 그리고 비록 동의를 얻지는 못했었지만. 결의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합동 회합으로는 목요일 3일이었고, 수요일 2일에, 레닌은 회합에다 보내는 편지를 썼다. 합동 회합에서는 레닌 편지를 경청했고, 바랬던 기조로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결의안으로는 모든 나라,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전역으로도 타진했다. 다음 날 <전진>에도 게재할 수 있었다. 독일 노동 계급들도 동요는 심해졌다. 이론 투쟁에서는 분명한 이론 입장에다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한때 마르크스 학설을 대중화하고자 일련 저서를 썼던 베른슈타인과 기회주의 언명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카우츠키로는 독일 이론가로는 어떠한 권위를 누렸는지를 잘 알았고, 따라서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해 특히 분개했다. 920일자로, <진실>에다 게재한 볼셰비키주의에 반대하는 카우츠키 기고문에서 발췌 부분을 보고는 매우 격분했다. 곧바로 스위스에서 살았고,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대표이기도 했던 보로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트킨, 메링, 다른 사람들도 카우츠키 독재 문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진부한 베른슈타인주의를 퍼뜨리고 있었다는 원칙적인 이론 성명을 언론에도 발표해야만 한다고 했다. 레닌은 카우츠키 수정주의 입장을 분석한 소책자, <국가와 혁명>을 조속하게 독일어로 번역해야만 한다고 썼었고, 카우츠키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출판하는 대로 보내주기를, 그리고 볼세비키주의에 대한 카우츠키 모든 기고문들을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고르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레닌은 카우츠키를 폭로하는 데 착수했다. 따라서 소책자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집필했다. 마지막 몇 줄은 191810월 쓰여졌다. 1018, 레닌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1023, 베를린 주재 대사에게 서한을 보냈다1023, 칼 리프크네히트는 석방됐다. 독일 노동 계급들은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918115, 독일 정부로는 베를린 주재 소비에트 대표부는 독일 혁명 운동에도 개입했다고 비난하고는 소비에트 대사 이오페를 수반으로 한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외교관들, 영사관 대표들에게도 곧바로 독일을 떠나기를 요구했었다. 119, 베를린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는 대사관 직원들과 러시아로 향하던 이오페를 혁명 베를린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일주년 기념식도 열었다. 10월 말, 레닌은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노동 계급들에게 보낼 호소문, 초안 작성에도 참가했다. 113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혁명을 기념해서 열린 시위대 앞에서 연설했다. 10월 혁명 기념 기간 동안에는 제6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16일에 대회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념일을 맞이해서>라는 레닌 연설을 시작으로 개회했다. 같은 날,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조합평의회 승리 기념 회의,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저녁 모임에서도 연설했다. 7일 레닌은 10월 혁명 투사 기념 현판, 제막식에도 참석해서 연설했다. 7일에는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기념비를 제막할 수 있었고, 학설 의의에 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선견지명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118, 9, 10, 11, 레닌도 독일 혁명에 대한 소식에 완전하게 몰두했다. 또한 쉬지 않고 연설했다. 118일에는 모스크바 지역 농촌빈민협의회에서도 연설했다. 레닌은 장기 활동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또한 빈농은 쿨라크와도 투쟁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대책으로는 토지 사회 경작, 코뮌, 협동 경작, 농민 조합 등을 내놓기도 했고, 소규모 농업 취약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쿨라크 추종가, 착취가를 비판했다. 19181116, 1차 전 러시아 여성 노동 대회를 열었다. 대회로는 여성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선전, 선동을 주제로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로부터 소집했다. 이네사, 사모일로바, 콜론타이, 스탈, 칼라니나 등 동지로는 대회 조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1,147명 대표들도 대회에 참석했다. 여성 노동 대회였으므로, 여성 농민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소수 민족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문제 역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레닌은 쏠려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많이 말하기도 했다. 농촌에 대해서였고, 여성은 예전 처지를 사회주의 아래로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소규모 경제에서 공동 경제로, 토지 공동 경작으로도 이행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여성은 완전하게 해방할 수 있고, 또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도 말했다. 레닌으로는 빈민 위원회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강화할 수 있도록 호소했다. 레닌은 어느 곳에서 연설하더라도, 농민에 대해서, 또 토지 사회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자주 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1856년 편지를 떠올리곤 했었다. 레닌은 1918, 1211, 1차 전러시아토지국 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1919년은 치열한 내전 해였다. 콜차크, 제니킨, 유제니치와 투쟁한 해이기도 했다. 기아, 경제 붕괴로부터 벌어졌다. 공장, 제작소 가동은 중지됐다. 운송은 완전 붕괴됐다. 붉은 군대도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고, 무장 수준도 형편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권력도 예정대로 모든 곳에서 조직되지는 못했었고, 아직은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지도 않았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적대적인 당, 구 권력 아래에서 호강과 호의호식하며 살던 모든 사람들, 곧 지주, 자본가, 하수인들, 쿨라크, 상인 등은 볼셰비키에도 반대하는 선정적인 선동을 벌여나갔고, 폭 넓은 농촌 대중 무지, 정보 부족을 이용해서 온갖 유언비어만 퍼뜨리고 다녔었다.

 

그러나 레닌은 지주와 자본가에도 맞섰다. 그리고 토지와 평화 쪽에 섰다. 비록 전투나 전선으로 나가지는 않았어도, 늘 노동, 농민, 붉은 군대와도, 대열로도 함께하고자 했다.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이기도 했고, 활동도 많았다. 활동은 주로 내전 문제들,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 문제들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어려운 난관들에도, 소비에트 권력은 정책으로도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다. 사회주의 건설 핵심으로는 조직에 있다고 레닌은 늘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그리고 노동 계급, 조직 관록, 노동 농민과 친밀하도록 하고, 또 이전 군대, 전문가들로부터도 조직 경험에 대한 일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과학과 지식으로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봉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19279, 1차 미국 노동 사절단 대담에서 스탈린은 전쟁에서 운명이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로는 적들이 콜차크, 제니킨에게 풍부하게 공급하는 장비들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 수백만 국민 대중 공감, 지지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19년 소비에트 권력 정책은 주로 대중 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이었지만, 레닌은 공산주의 당을 말했고, 외적인 장애물도 종식하고자 노력하고, 구체제를 분쇄할 때,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조직 문제를 맞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7, 10월 열린 제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 핵심은 조직에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17개월 뒤로는 1919, 3월에는 소비에트 권력은 이미 스스로, 발로도 설 수 있으면서, 조직 문제도 떠올랐다. 레닌은 제8차 당 대회에서도 다뤘던 모든 문제들을 조직 문제와도 긴밀하게 묶었다. 기구, 관료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문화 부재는 사회주의 건설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폭 넓은 대중 유입은 저해할 수 있고, 과거 잔재와도 투쟁을 방해하고,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방해하고 있는지도 말했었다.

 

농촌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 노동 계급들과, 빈민에게도 미치는 영향력, 폭 넓은 계층에서는 농민들, 노동력 착취로부터가 아닌 노동으로 살아가는 중간층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강화하고자 말했었고, 또한 농민 계급을 소비에트 권력 기둥으로 만들고자 배급 문제에 대한 봉사와 협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반면교사를 배워서, 남은 공산주의를 건설해야만 한다고도 말했었다. 공산주의 힘만이 아니라, 구 체제 전문가들과 과학, 또한 부르주아 건설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경험 일체를 활용해서 필요하기를 취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고 말했었다. 대회를 열기 이틀 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스베르들로프는 사망했다. 레닌도 장례식에 참석했었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도덕 권위, 타고난 조직 능력으로부터, 폭 넓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조직가로도 잘 활용하고, 또 활동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중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했었다.

 

레닌은 조직 사회주의 노동 운동과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모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5,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참석할 때, 레닌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서도 탁월하게 무정부주의 특징을 보여줬다. 19195월 제1차 전 러시아 교회 교육 대회에서도 레닌은 대회에서 환영사를 했고, 대회로는 800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 건설에서도 무정부주의 정서와 투쟁해야 한다면, 붉은 군대에게도 투쟁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무정부주의 정서로는 게릴라, 유격 활동 방식도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내전 경험도 붉은 군대 조직에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곤 했다. 레닌은 191974,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농민대표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조합소비에트, 모스크바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에서도 연설하기도 했었고, 분견대를 꾸준하게 없애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조직적, 게릴라식 활동 및 혼란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도 재앙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농업 분야에서 소농 경제 특수한 분산으로부터 지닌 해악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집단 경영 형태로 이행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고, 토지 사회 경작을 담당할 수 있는 대규모 집단 조합, 농업 코뮌, 협동 조합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도시, 농촌 노동 계급들로부터 사업 주도가이자, 노동 계급들에 대한 모든 독창과 창발을 지지했다. 1918년 봄에도, 농업 협동 조합을 조직하고자,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로 간 오부호프, 세먀니코프 노동 계급들에 대한 독창과 창발을 많이 지지했다. 또한 토지 집단 경작 노선에서 소박한 유형이지만 여러 조치들도 모두 지지했다. 레닌에게 농촌 환상 따위는 없었다. 1919년 봄, 레닌은 거주했던 고르키 노동 계급들 앞에서 새로운 유형으로, 집단 경제를 조직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여러 농업을 연구하기도 하던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농업으로는 채소 협동 조합으로부터, 붉은 군대에도 납품하도록 계약을 체결했고, 품질 좋은 배추들도 재배하기도 했다. 비료, 신품종, 파종범도 시험했다. 덕분에 채소 수확량도 늘었고, 45가구에 대해서는 노동 가족은 일 년 내내 건강한 채소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18318-23, 8차 당대회 때 중농에 대한 태도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레닌은 검증된 중농으로부터는 강제력이 아닌 동지로부터 함께 기본 규칙, 지침들을 요구하고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924, 1, 채택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새 헌법에서도 노동, 농민 선거권은 평등하고 나올 수 있었다. 1919330,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은 고인이던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할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가이자, 트베르스카야도 농민 출신이었던, 칼리닌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안건으로부터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로, 레닌은 교외 교육 대회에서 대의원들도 전선으로 나가, 붉은 군대도 읽고 쓰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소비에트 교육으로는 지식에 대한 갈망, 교육 성과는 무엇보다 주로 교외 교육으로부터 이뤄진 경우는 더 많았다. 노동 대중 교육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교육원들이었던, 세르기에프스카야, 라고진스키도 전선을 순방했다. 그리고 수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소비에트 교외 사업국으로는 농촌용 대중 신문을 만드는 문제를 고심하기도 했고, 19181212, 이미 최고인민위원회로는 <글을 깨친 사람들에 대한 동원, 소비에트 체제 선전에서 조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 바도 있었다법령은 노동 거주 지역 조직과 농촌 법령, 신문 기사들, 소책자들을 강독할 조직도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촌 활동을 관장하는 분과도 있어서, 8차 당대회 때 만들어졌다. 분과를 대표해서, 레닌은 보고했다. 분과로는 66명 대의원들도 들어갔다. 세레다, 루나차르스키, 미트로파노프, 밀류친, 이바노프, 파호모프, 쿠라예프, 바레이키스, 보리소바 등 테제를 기초할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레닌은 모든 당,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농촌 지역들에도 신문, , 책방들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농촌 노동, 농민, 문맹에 대한 지침으로는 사후 1928년에서야 발표한 <소비에트 기관 운영 규칙 초안>에서 기술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80%는 문맹이었다고 보고하기도 했고, 또 문맹을 줄이고자 했다. 1919년은 도서관들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또 민원 활동 분야에서도, 소비에트 권력 선전 및 여러 법령들에 대한 선전도 실천해서 옮길 수 있었다.

 

레닌은 민원실 뿐만이 아니라, 1919412, 칼리닌, 레닌, 스탈린으로부터 서명한 국가 감독에 대한 재조직 법령을 공표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으로 있었다. 그리고 재조직 법령으로는 낡은 관료주의를 분쇄하고자 했고, 관료들에 대한 보수성, 꾸물거림, 주인 의식 결여, 해이함을 비판했고,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관료주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단호한 조치로부터 소비에트 기관에서도 근절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폭 넓은 노동, 농민도 국가 행정에도 참가할 수 있고, 또 행정 기관들을 폭 넓게 감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도에 대한 불충분함을 해소하고, 관료주의와 부조리부터 근절해갈 수 있다고 공표했다. 191954,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회로는 산하에다 중앙 민원실도 설치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524일에도, 중앙 민원실 지방 지국들을 설치하는 법령도 발표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기구 안에서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투쟁하기를 촉구했고, 또 요구했다. 러시아로는 1860년대부터 문학 작품들에서도 관료주의에 대한 온갖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1859년 창간해서, 1973년 폐간된 혁명 민주주의 잡지였던, <불꽃> 시인들, 첼르니셰프스키파 시인들도 그러했다. 쿠로치킨, 줄레프 등등과 같은 <불꽃> 시인들도 관료주의, 일 지체, 뇌물 수수 등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저주를 퍼부었고, 또 거부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내온 편지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으로 대했고, <레닌 저작선> 24권에 수록된 문서는, 예시로도 같은 점을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진정서들도 레닌에게 들어왔고, 직접 답장을 보내곤 했다. 레닌 연구소 문서 보관국 사례들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문서들도 많았다. 국가 기부 안에서도 온갖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활동가 한 사람마다 주의 깊은 태도를 보이고자 했고, 자기 부서 사람들을 잘 알고, 업무로나, 알맞은 업무 환경 조성으로나, 나서서 돕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부서 직원들을 하대하지도 않았고, 더욱 친절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고, 증거로도 짤막한 기록들도 상당수 보관됐다. 이를테면, 38,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회의로부터 중앙 통계청 직원이던 흐랴쇼바는 먼 곳에서 살았고, 걸어서 출근해야만 했다. 그래서 통계 일이 없을 경우 흐랴쇼바에게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하거나, 바쁘면 꼭 굳이 아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비서에게 요령껏 설명해달라고 글을 써주기도 했다그리고 넉넉하지 않는 생활과 활동을 수행해야만 했던 여러 동지이자 동료들에 대한 물질적인 처우나 처지들도 특히 염려했다. 운송 최고인민위원회의 추루파, 마르코프 등 동지들은 굶주리는 생활을 했다고 드러났을 때도, 중앙집행위원회 동료 직원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상시적으로 할동할 수 있는 수당을 꼭 지급하라고 당부하고 또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194월 말부터는 동부 전선에서도 사태는 전환됐고,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백위군에게서 우핌스카야와 일련 다른 도시들도 탈환해냈다. 그러나 1919년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훨씬 열악했다. 9, 10, 11월 초는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내전도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콜차크는 패했지만, 백위군은 소비에트 권력 심장부였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를 차지하고자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니킨은 우크라이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남쪽에서부터 진격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는 유제니치는 움직이고자 개시하고 있었고,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접근한 상태였다. 백위군 승리는 숨어 있떤 적들도 기운을 북돋도록 만들었다. 11월 말, 페트로그라드에서 유제니치와 연계했고, 협상국 지원을 받던 반혁명 조직들도 적발했다.

 

제니킨, 유제니치는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도 내내 레닌 앞으로는 온갖 욕설, 협박, 조롱으로 가득찬 수 많은 익명 편지들도 왔다. 지식 계급은 동요했었고,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치미랴제프를 위시한, 선진 부분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들에게 지원을 받은 무정부주의들도 925, 레온치예프스키 거리에 있는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모스크바 위원회 건물에다 폭탄을 터뜨리고는 수 많은 동지들도 목숨을 잃었다. 기아와 빈곤도 내내 기승을 부렸다. 따라서 붉은 군대를 강화하고, 후방 노동 중심 지역들에도 식량을 공급했다. 그리고 선동과 해명 활동들도 폭 넓게 전개해야만 했다. 대체로 레닌은 집무실에서 여러 보낼 전보들을 보내거나,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다. 주로 매우 날카롭던 문제로는 곡물 문제였다. 소규모 농민 경제는 붕괴됐고, 광적인 투기마저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19117, 추루바를 식량 최고 인민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불꽃>에다 글을 쓰기도 했다. 1919729-30, 모스크바 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 조합 평의회로는 공장 위원회들, 모스크바 중앙노동협동조합, 협동조합 평의회 위임을 받은 노동 조합 대표들 등, 협의회를 소집하고는 모스크바 단일 소비 조합을 구성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협의회로는 멘셰비키, 독립 협동 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레닌으로는 730, 협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협의회로는 잘 활동하기를 바랬지만, 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협동 조합에서 올바른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로부터는 혁명으로부터 더욱 새롭게 개혁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도 강조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 레닌은 개별 경제에서, 집단 경제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기아와 착취, 다른 사람에게 얻은 부를 축적하는 일은 근절해야만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최후 결전으로는 사회주의로부터 실현할 수 있고, 또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레닌은 어떤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파괴 분자들, 노동하는 사람들로는 적들인, 지주, 자본가, 파괴 분자들, 백위군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권력으로는 해악을 끼칠 수 있고, 또 가차 없는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1919, 모든 사람들은 고등교육기관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일련 법령들도 도입했고, 노동 단과 대학들도 조직했고, 노동 강좌도 개설했다. 최초 소비에트 당 학교도 1919년에 조직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810-17일까지 당 주간을 열었고, 8차 당 대회 결정에도 따라 9월 말까지 당원 재등록 기간도 지속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는 108-15일까지 당 주간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1011, 레닌은 <노동 국가와 당 주간>이라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 글로는 당에 대한 레닌 견해, 새로운 소비에트 기구에 대한 설명, 노동 계급들과 노동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역량을 기구에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견해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노동 계급, 농민들에게도, 전위에도 공감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알리고자 노력했다. 정치교육국원들은 주로 제1기 소비에트 당 학교 일에도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닌은 정치 교육원들에게도 연설하기도 했고, 곧 지침에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

 

덕분에 소비에트 권력 2주년 기념식을 승리로 맞이할 수 있었다. 제니킨은 오룔까지 접근해 온 10월 초순에 당 중앙 위원회로는 스탈린을 혁명군사평의회 의원 자격으로 남부 전선으로 파견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진격 계획을 제출했고, 중앙 위원회는 승인했다. 레닌은 전적으로 지지했다. 남부 전선에서는 빠르게 국면도 전환됐다. 1019, 군대는 보로네슈 근방에서 슈쿠로 장군, 마몬토프 장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1020, 오룔을 탈환했고, 1021, 풀코프 전투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진격했던 유제니치도 패배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뜨거운 축하 인사를 쓰고는, <진실>로는, <소비에트 권력, 여성 지위>를 실었고, <빈곤>에도 실을 농민을 위한 기고문, <소비에트 권력 2>을 작성했다. 117,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소비에트, 전러시아중앙노동조합평의회,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로부터, <소비에트 권력 2>을 연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기념식에서 연설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회합 연설은 선동 성격이 아니라 단순 사무였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지난 2년 동안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이룩한 여러 중요한 성과와 업적 가운데로는 노동 권력 건설이란느 교훈, 국가와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노동 계급들은 참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1919년 노동 대표들도 차지하는 비율로는 30%-80%로 증가할 수 있었다. 당 주간 동안 모스크바에서 입당한 당원만 하더라도, 14,000명은 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농민, 예비대를 편성함으로부터,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실천 투쟁 속에서도 단련됐다. 그러나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자, 매우 중요한 수백만 농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는 일, 농민들에게 폭 넓은 선전 활동들도 꼭 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내전으로부터도 농민 사태에서 진실로 잘 볼 줄 알았다. 레닌은 늘 조용하게 말했지만, 모두들 북돋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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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2.

 

1910년 말에도 이미 혁명은 북돋는 징조를 보였다. 1911-1914년까지 시기, 전쟁은 시작되기 전, 19148월까지로는, 매달 노동 운동도 성장했다. 1905년에 앞선 노동 운동 성장과는 다른 조건과, 1905년 혁명으로부터 운동 성장은 이뤄질 수 있었다. 프롤레타리아트도 많은 일들을 겪었다. 파업, 무장 봉기, 대중 운동, 패배 등 몇 년이나 겪었다. 모든 면에서 같은 점으로도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레닌도 프롤레타리아트 성장을 온몸으로 느꼈다.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전체 상황 또한 옛날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지식 계급도 이미 달라졌다1905년에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 지식 계급은 노동계급을 지원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행할 수 있는 투쟁 성격은 이미 명백했다. 투쟁은 타협 없이 냉혹했고,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부르주아지로부터 원했던 제한된 헌법으로부터 얻고자 벌인 투쟁으로 빌려주지는 않았다. 노동 계급은 부르주아지 개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계급은 이끌어갔고, 끌려가지도 않았다. 더욱이나 투쟁 조건도 매우 달라졌다. 차르 정부에서도 1905년 혁명 경험도 생겼다. 정부는 모든 노동 조직들에다 첩자를 심어 놓았다. 그들은 그저 불쑥 나타나서 몸 숨길 기회를 주던 작자들이 아니라, 말리노프스키, 로마노프, 브렌진스키, 체르노마조프 등과 같이 당에서 중책을 맡고는, 정부 미행과 체포, 또 첩자들도 엄밀하게 계획해서는 진행했다. 그래서 기회주의들은 판을 쳤다. 노동계급 전위이자, 지도부로는 당을 청산하려는 청산주의 노선은 폭 넓은 지식인층 지지를 받았다. 청산주의들로는 좌우 양측에서도 커갔기 때문이다.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저마다 비합법 당을 향해 침을 뱉었다. 투쟁 조건마저 평등하지도 않았다. 청산주의들로는 기회주의였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강력한 합법 중앙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 속에서 폭 넓은 청산주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볼셰비키는 무엇 하나라도 쟁취하고자, 지하 활동이라는 힘들기 짝 없는 조건에서도 투쟁해야만 했다.

 

검열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강화하고자 벌인 과감한 투쟁은 1911년부터 시작했다. 19101,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로부터 설립한 해외 연합 안에서부터 시작했으나, 곧 틀을 넘어서 터져나왔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 모스크바에서는 <사상>을 발간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발간한 비합법 신문들은 러시아로 들어가기로는 1905년 이전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러시아와 해외 모두 첩자들은 넘쳐 났고, 일 망치는 건 다반사였다. 따라서 볼셰비키로는 기고할 수 있는 합법 신문, 잡지로부터 러시아에서도 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레닌은 기뻐했다.

 

<> 편집부로는 볼셰비키파, 플레하노프파, 두마 파견원들로 구성했다. <> 신문은 두마 파견대 대변지였다. 창간호로는 플레하노프 사설도 실렸다. 레닌은 창간호를 썩 달가워하지도 않았다. 색채는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사상> 1호를 보고는 매우 흡족했다. 레닌은 <>, <사상>에다 글도 열심히 썼다. 모스크바 1910, 2월에는 여러 동지들도 체포됐다. 4월에는 <사상>은 폐간됐고, 6월에는 두마 파견대, <>25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지했다. 복간은 11월이었다. <>은 이미 볼셰비키 신문이었다. 바쿠에서도 볼셰비키 신문으로는 <현대 생활>도 발행했다. 7월에는 한 동지와 협의 끝에, 페테르부르크에서 <계몽>이라는 합법 잡지를 출판했다. 잡지는 1911년 말에 이르러서야 발간할 수 있었다. 레닌은 출판문들에 대한 경과를 잘 지켜보고, 실을 글들을 썼다. 볼로냐 학생들은 카프리 학생들과 같은 방법으로 수업 경험을 하고자 했지만, 정작 아무런 소득은 없이 끝나기만 했다소환주의들로는 191011, 이미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은 단, 플레하노프, 레닌을 비롯해서 여러 강사들을 초청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닌은 부탁을 거절했고, 파리로 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카프리 사태를 겪은 바 있어서, 전진파는 일을 꼬왔고, 멘셰비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공식 초청을 요구했다. 그리고 레닌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함께 파리로 와서는 자율권을 요구했다. 수업은 성사하지 못했고,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으로는 학생들을 러시아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1911년 봄, 마침내 볼셰비키로는 파리 근교에서도 당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학교에는 노동계급들, 멘셰비키 당 유지파, 전진파 소환주의 노동 계급들도 참여는 했지만 두 집단으로는 모두 매우 적은 수에만 불과했다.

 

레닌도 여러 노동 계급들과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독일에서 임시 일자리를 마련해주거나, 파리에서는 롱주모 마을에다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먼저 학생들은 방을 세냈고, 이네사 아르망은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렸고, 집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식당을 마련했다. 지노비예프 가족도 롱주모로 옮겼다. 따라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마르토프도 투르한스크에서 유형을 살기도 했고, 나중에는 비합법 활동을 했던 동지는 살림을 맡았다. 이네사 아르망은 빌린 집에서 여러 수강생들도 파리에서 묵을 수 있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파, 청산주의파, 전진파 등에 대해 취할 노선을 밝히고자, 서신을 자세하게 밝혔다. 주로 카프카스 볼셰비키와 우호해서 서신을 교류했다.

 

이네사 아르망 집에는 온갖 볼셰비키 사람들은 다 모여 살 수 있었다. 마을 다른 쪽 끝에 살고는 있었지만 공동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학생들과 잡담을 나누고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질문할 수 있었고, 정기적으로는 시사 문제를 토론할 수도 있었다. 가죽 노동가로부터 세를 낸 방 두 개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규모 공장에서 노동계급 생활을 잘 살펴볼 수도 있었다. 집 주변에는 정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힙겹고, 암담하기만 한 삶이었다. 고된 일에만 시달리다가, 일요일에는 성당에 다디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사회 체제를 변화하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아무도 해보지도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볼셰비키를 잘 알지는 못했다. 동지들 가운데로는 프라하 당 협의회에 참석한 사람도 있었고, 볼셰비키 대열에서 오랫동안 싸우다가 백위군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백위군에게 피살된 26명 바쿠 인민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첩자가 된 사람으로는 10루블이라는 푼돈을 받고, 쥐꼬리만한 임금에 의존하면서 살다가, 롱주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학기 중간에는 레닌은 수업을 매우 규칙적으로 진행했다. 레닌은 정치경제학(30), 농업 문제(10),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5)을 강의했다. 정치경제학 토론회로는 이네사 아르망으로부터 지도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당 역사를 강의했고, 세마슈코도 강좌 두 개를 맡았다. 다른 강사들 가운데로는 랴자노프는 서유럽 노동 운동 역사를, 샤를 라포포르는 프랑스 운동을, 스체클로프, 핀예노타예프스키는 각각 공법, 재정학을, 루나차르스키는 문학, 스타니슬라프 볼스키는 신문 인쇄술을 가르쳤다. 학생들도 많은 시간을 두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저녁 때는 가끔씩 들판으로 나가 노래를 불렀고, 건초 더미 아래로 누워 도란도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레닌도 가끔씩 함께 다녔다.

 

카메네프는 롱주모에서 살지는 않았고, 가끔 강의할 때만 왔다. <두 개 당>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 문제를 두고 레닌하고 논의하곤 했다. 마을 너퍼 골짜기 풀숲에서 레닌은 생각을 카메네프에게 들려주곤 했다. 책 서문도 써줬다. 1910, 8월 중순에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19101월에 공들였던 모든 분파 통합마저 빠르게 붕괴해갔다. 러시아에서도 실천 활동 과제마저 제기함에 따라, 공동 활동마저 할 수 없다고 더욱 분명해져만 갔기 때문이었다. 실천 활동을 요구하자, 당 소속에서 멘셰비키 본색마저 드러났다.

 

충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이래로 청산주의들, 전진파를 통합하고자 했던 트로츠키 충성에 대한 본질도 무엇인지를 드러내고는 말았고, 러시아에서 활동마저 좀 더 원활하게 조직해야 할 필요를 감지했다. 모든 통합은 인위적이었다고 드러났다. 1910년 말로는 이미,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에서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해외에서 소집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제출했다. 한 달여 시간은 지나서야 성명서에 대한 답변을 받았다. 멘셰비키 노선으로는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은 제안을 거부했다. 문제를 둘러싼 협상으로는 19115월 말까지 질질 끌어만 갔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과는 이야기해봐야 아무런 소용마저 없었다. 중앙위원회 해외 사무국이었던 볼셰비키 대표로는 세마슈코 동지는 사퇴했고, 볼셰비키로는 해외에 있던 중앙 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따라서 19116월 중앙 위원은 아홉 명이었다. 멘셰비키와 분프나느 도중에 회의장을 나가 버렸고, 나머지 살마들은 매우 시급한 문제부터 논의하고, 당 협의회 소집 문제를 논의해서, 러시아에서 당 협의회 소집을 위한 러시아 조직 위원회를 만들고자 결정했다. 여러 동지들도 지역으로 파견됐다. 라이프치히에서 브렌진스키라는 한 운반책은 첩자이기도 했다. 협의회는 바쿠에서 소집했다. 여러 활동가들도 체포됐다. 다섯 개 조직에서 대표는 참석했고, 협의회로는 볼셰비키와 플레하노프파로 대변했다. 훗날 첩자로 밝혀진 체르노마조프 역시나 협의회로 참석했다. 러시아조직위원회로는 몫을 다 해낸 끝에서야 19121월에서야 당 협의회는 소집할 수 있었다.

 

1911년 파리에서 볼셰비키 모임은 대단히 강력한 조직이었다. 세마슈코, 블라지미르스키, 안토노프, 쿠즈네조프, 벨렌키 형제, 이네사 아르망, 스탈, 나타샤 고프네르, 고틀랴렌코, 체르노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릴리나, 타라투타, 류비모프, 블라지미로프 등 동지들도 속했다. 모두 합해서 40명은 넘었다. 러시아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었고, 혁명 경험도 풍부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등등 사람들과 투쟁으로부터 모임은 더욱 강인하게 단련했다.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 수 많은 망명한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는 망명객들도 무척 많았다. 스탈 동지와 크룹스카야는 꽤 오랫동안 모자 믹공, 재봉사 등 여성 망명 노동 대중 속에서 활동을 수행하고자 했었다. 수 차례 회합을 가졌으나 활동을 과소평가했고, 일은 잘 풀리지는 않았다. 회합을 할 때면, 꼭 누군가 분란을 일으키는 질문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주로 무엇 때문에 꼭 여성들에게 회합을 소집해야만 하는가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유용한 성과는 있었으나, 일은 시들해져만 갔다. 레닌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19119월 말,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이라는 인터내셔널 사무국 회의를 참석하고자 취리히로 다녀왔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에서 보낸 몰켄부르크 편지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편지는 선거와 관련해서, 모로코 사태로부터 식민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위축해서는 안 된다고 내세웠다. 룩셈부르크도 편지를 출판했다. 베벨은 일에 분개하기만 했다. 레닌은 룩셈부르크를 옹호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에서 기회주의 정책으로는 회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여행 기간 동안 스위스에서 여러 차례 강연했다. 1911, 10, 라파르그 부부는 자살했다. 레닌은 죽음에 대해 심한 충격을 받았다. 몸소 방문했던 일도 떠올랐다. “당을 위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면 라파르그 부부와 같이 진실을 직시할 줄 알고, 그렇게 죽어야만 한다고.” 레닌은 말했다. 라파르그 시신을 앞에 두고 활동마저 헛되지 않았고, 폴 라파르그, 라우라 라파르그로부터 그토록 긴밀하게 시작했던 마르크스라는 대의로부터 폭 넓게 성장할 수 있었고, 또한 아시아로까지 번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국에서는 대중 혁명 운동이던 신해 혁명도 일어났다. 레닌은 조사를 썼고, 이네사 아르망은 번역했다.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이름으로 장례식에서 죽음 사람에 대한 조사를 낭독했을 때 크룹스카야는 가슴마저 뭉클했다고 한다. 1912년을 앞두고, 볼셰비키로는 볼셰비키해외모임에서 회의를 열었다. 망명 생활로부터 모두들 지독하게 신경마저 날카로워졌지만, 그러나 분위기로는 활기로웠다.

 

협의회 준비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레닌은 국제사회주의사무국에서 체코 사회민주주의 대표였던 네메츠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협의회 개최 문제를 결정했다. 프라하에서 협의회를 개최하고자 했다. 플레하노프는 협의회로 오지 않았다. 대신 플레하노프는 답신으로는 협의회 구성은 너무 동질이 강해서 나는 참여하지 않는 쪽이 당 통일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답했다. 협의회에서는 첩자는 주로 참석하지 못하도록 잘 막아냈고, 프라하 협의회로는 러시아 활동가들은 1908년 뒤로 청므으로 개최해냈던 당 협의회였다. 협의회에서는 러시아 활동과도 관련한 문제들을 실무로도 논의했고, 정확한 활동 노선을 마련하고자 했다. 현 시기 당 임무, 4대 두마 선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 분파, 당 활동 성격과 조직 형태, 기아 투쟁에서 사회주의 임무, 노동 계급들을 위한 국가 보험에 대한 두마 입법 초안, 청원 운동,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러시아 안에서도 활동에 대한 당 노선, 실천 활동에 대한 분명한 지도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협의회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오르조니키제, 슈바르츠만, 골로셰킨, 스판다랸, 말리노프스키를 중앙 위원으로 선출했다. 중앙 위원은 체포될 경우로 대비해서 후보들도 미리 지명해뒀다. 협의회는 끝난 직후로는 중앙위원회로는 스탈린,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 롱주모 학교 학생이기도 했던 벨로스토츠키를 보궐 선출했다. 중앙위원회는 단결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려운 시기에 활동을 수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활동으로부터 더는 분열하지 않도록 확대를 사전에 막음으로부터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수 있도록 한 공로는 협의회에도 있었다청산주의, 트로츠키는 악의 찬 말들, 플레하노프와 분트파 외교술 등등, 모든 걸 신랄하게 또 반박하고, 해명하고자 했지만, 같은 논쟁들에 대한 비중으로는 줄어들었고, 주요한 중점도 러시아에 대한 활동으로 옮겨졌다. 말리노프스키도 중앙 위원이었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고, 협의회는 끝나고 나서야 제3대 두마 의원이었던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로는 라이프치히에서 회의한 내용을 토대로 경찰마저 세세하고 알고 있었다는 일도 큰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알고 보니 슈르카노프 역시나 첩자였기 때문이었다. 첩자들은 활동가들을 교란하도록 했고, 또 조지을 약화하도록 한 분명한 사실도 있었지만, 경찰은 북돋는 노동 운동을 막을 수조차 없었고, 운동을 올바른 노선 정립으로부터도, 바른 궤도에도 들어섰고, 새로운 세력들도 점차 성장했다.

 

레닌은 자금 상환 문제를 피신탁인들과 합의하고자,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잠시 들렸다. 폴레타예프, 슈르카노프를 만났다. 쇼트만은 파리 집을 방문했고, 핀란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프라하 협의회로는 차르 체제, 3대 두마에서 핀란드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했고, 차르 체제, 반혁명 부르주아지에 맞서 투쟁하는 핀란드,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통일할 수 있는 과제를 강조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핀란드에서는 조직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했다. 핀란드에서도 봉기를 준비했고, 군대 안에서도 활동하는 비합법 조직들도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사태는 진격에 이르지도 못했다. 조직은 빠르게 무너졌고, 곧바로 대대적인 체포를 시작해서, 57명은 봉기를 도모한 혐의로 재판으로 회부됐다. 19124월 중순에 터진 레나 금광 지대 사건, 도처에서도 일어난 항의 파업을 보자면, 몇 해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도 잊지 않으면서도, 많이 성장했다. 운동은 이미 높은 단계라는 대열로도 올라섰다. 레닌은 러시아 노동 운동 앞에서 제기한 많은 과제들에 대해 생각했다. 체르니셰프스키, <인민 의지>에 이르는 많은 혁명가들도 선동을 이어받아서, 확대하고, 강화해갔다. 끝까지 유일한 혁명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수백만 농민들로부터 처음으로 공개 혁명 투쟁에 나서도록 일으켰고, 선두에도 우뚝 섰다. 로마노프 사건도 일어났고, 한 동지는 1904, 징역 12년을 선고 받기도 했다. 치타 공화국을 조직했다가, 시베리아 토벌대에게 붙잡히고는 사형을 선고 받았고, 기차로 수송됐다. 혁명가들에게 총살 장면을 보여주고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러시아에서는 <진실>도 발행하고 있었다. 레닌은 꾸준하게 고리키에게 소식을 위한 편지를 보냈다.

 

1912-1914.

 

크로코프로 갔을 때, 유대인들은 특수 지구에 살았고, 옷도 색다르게 입고 다니곤 했다. 바르샤바 위원회는 비밀 경찰과 관련됐다는 소문도 있었고, 레닌은 바르샤바 위원회 쪽에서 옹호하는 글을 썼고,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으로부터 당 중앙 행위로는 항의하는 서한을 썼다. 바르샤바 위원회로는 바르샤바 및 기타 노동 중심지들에게 대중과 강하게 연계했다. 레닌은 로즐라모프파 사태를 남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당내 투쟁이었고, 또 방관자로만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레닌은 자국 러시아로 집중했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를 재건했고, 뒤이어 북부지역사무국을 결성해서, 여러 동지들과 결합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는 청산주의로부터 맞서는 결렬한 투쟁마저 진행했다. 레닌은 <진실>에다 강력한 편지를 썼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912, 916, 일요일에, 노동 대표 선거를 예정했다. 경찰도 선거에 대비했다. 14일에는 이네사와 사파로프도 체포됐다. 그러나 경찰은 유형지에서 도망친 스탈린은 12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는 못했다. 노동 선거로는 잘 치러져서, 단 한 명 우익 후보도 당선하지 못했다. 곳곳에서는 정치 성격을 지닌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10월 내내 모든 관심을 선거로부터 집중했다. 노동 대중으로는 전통으로, 후진으로부터 모든 지역에서 여전히 선거에는 무관심했고,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폭 넓은 선동도 필요했다. 따라서 노동계급들은 어디서나 사회민주주의를 선출할 수 있었다. 대규모 공업 중심지에서 노동 선거로는 볼셰비키는 모두 승리했다. 높은 권위를 누렸던 노동 당원들도 선출했다. 두마로는 6명 볼셰비키 의원들, 7명 멘셰비키 의원들을 선출했으나, 볼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백만명 노동계급들을 대표했지만, 반면 멘셰비키 노동 의원들은 25만 명도 채 대표하지도 못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초반부터 매우 조직력과 결속력도 잘 보여줬다. 두마에서는 노동 시위, 파업들도 이어질 수 있었고, 1018일 개원했다.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는 두마에서는 함께 할동했지만, 당 안에서는 관계를 매우 악화됐다. 1월에는 볼셰비키 세력 조직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프라하 협의회를 열었다. 1912, 8월 말 비엔나, 트로츠키 적극적인 참가, 주도로부터 당 협의회를 소집했다. 청산주의 행위로부터 당 노선은 얼마나 심각하게 대치햇고, 또 전혀 멀어졌는지 생각하지도 않은 구호였다. 협의회로는 전진파도 초청했다. 중앙 위원회를 중심으로, 볼셰비키는 협의회로 참가하지 않았고, 해외에서 발행했던 플레하노프 잡지, <당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모였던 플레하노프파, 멘셰비키와 타협주의 볼셰비키 역시 참가를 거부했다. 폴란드인들도 참가하지 않았고, 전진파를 대표해서 협의회로 온 알렉신스키는 협의회 빈약한 구성을 폭로했다. 협의회 참가는 대부분 해외에서 거주하던 인물이었고, 카프카스 대표 두 명으로는 카프카스 지역 사무국 대표로 파견됐고, 모든 대표들은 매우 한정된 집단에서 선출한 사람들이었다. 협의회 결의문으로는 청산주의를 극대화했다. 선거 강령에서 민주 공화국이라는 구호도 삭제했고, 지주 토지 몰수라는 구호는 제3대 두마 농업 입법 재검토라는 구호로 대체했다. 주요한 발제자는 보리스 골드만이었다. 당은 있지도 않았고, 협의회로는 창립 회의여야만 한다고 했다. 알렉신스키조차 항의했다. 8월 블록이라 불린 협의회로는 중앙 위원회로 대립하고자 했고, 프라하 협의회로부터 결정을 갖는 권위를 실추하도록 애썼다. 사회민주주의 세력에게 통합이라는 탈을 쓰고는 볼셰비키 반대파와 통합하고자 했다.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다. 12월 말, 1월 초 사이로는 두마 의원들도 첫 회의를 열었다. 두마 회의에서는 비합법 당 활동, 긴밀한 결속을 논의했고, 바다예프는 <진실>을 전담하기로 했다. 인터내셔널사무국도 도처에서 항의 집회를 조직했다. 크라코프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크라코프 항의 집회로는 특이한 성격을 띠었다. 전쟁에 항의하는 집회라기 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대중에게 증오를 조직한 집회였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사무국으로는 1111-1112, 바젤에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비상 회의를 열었다.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카메네프도 바젤 대회로 참가했다.

 

레닌은 <신시대>에 실린 기회주의를 점철한 카우츠키 기고문을 보고는 격분했다. 글에서는 노동계급들은 전쟁에 반대하고, 무장 파업, 파업을 조직한다면 잘못했다고 말했다. 레닌은 여러 차례 1905, 혁명에서 파업에 대한 조직 역할이라는 글 썼다. 레닌은 기고문으로부터 더욱 면밀하게 문제를 조명해갔고, 노동 대중에게 모든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부터 파업에서도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바젤 대회로는 만장일치로 전쟁에도 반대하는 선언문을 채택했고, 대규모 반전 시위를 조직했다. 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로부터 얼마나 잠식당했는지는 1914년에서야 드러났다.

 

제국주의 전쟁을 발발하기 직전,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젊은 시절부터 온갖 민족 박해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종속되는 더 큰 불행이 없다고 마르크스 말을 레닌은 공감했고, 또 이해했다. 그러나 전쟁은 닥쳐왔다. 부르주아지 민족주의 정서를 고양했고, 민족 적개심으로부터 불을 질렀다. 전쟁은 닥쳐오면서부터, 약소 민족에 대한 억압, 독립에 대한 탄압도 잇따랐다. 전쟁은 반드시 봉기로 전화할 수 있고, 피억압 민족들도 독립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를 레닌은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당연한 권리이기도 했다.

 

 

1896, 런던에서 개최한 국제 사회주의 대회로는 이미 권리를 확인했다. 1912년 말-1913년 초와 같인 전쟁을 목적으로 둔 시기로부터 민족자결권을 과소평가한 데 레닌은 분노했다. 8월 블록으로는 시대 요구 문제, 첨예화하지도 않은 채로, 문화, 민족 자치권을 강령 민족 자결권 조항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결정을 승인했다. 같은 결정은 1903, 2차 당 대회에서도 이미 논란이었지만 부결했다. 따라서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을 포기했다. 문화는 정치 체제 전체로부터 수천 갈래로 얽혔다고 분명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라는 문제 하나로만, 모든 투쟁을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기회주의로 봤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문제에서 주요한 논쟁으로는 폴란드들과 벌어졌다. 룩셈부르크, 즐라모프파마저도 민족자결권은 분리권을 뜻하지 않는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폴란드인들에 대한 정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잘 알았다.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증오는 폴란드 대중 속에도 있었다. 전쟁은 닥쳐왔다. 검은 100인조 민족주의, 열강 부르주아 폐쇄주의를 고조했다. 폴란드 사회주의 당으로는 폴란드 독립을 키워나갔다. 소부르주아적 폴란드사회주의당에서는 분리주의마저 커져만 가자, 폴란드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도 생겨났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는 분리에도 반대해싿. 레닌은 폴란드사회주의당 당원들을 만났고, 당 활동가들 가운데 한 사람과도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면서 발언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폴란드인 관점으로만 민족자결권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는 제2차 당대횡서도 제기한 적 있었다. 1913-1914년 전쟁 직전에는 매우 날카로운 수준으로 번져갔다. 제국주의 전쟁은 고조되던 1916년까지도 계속됐다. 레닌은 논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분명하고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다. 당은 소비에트 국가라는 틀 안에서 민족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창건한 뒤로는 민족 사이에서 불평등이 있거나, 어떠한 민족 권리를 축소하는 일은 없도록 했다. 견딜 수 없는 박해를 받았던 민족들로는 문화로도 빠르게 성장해갔고, 공동 사회주의 건설로 통합하고 있는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연방에서 모든 민족들은 더욱 긴밀하게 결합했다.

 

크라코프에서는 레닌은 민족 문제만 치중한 게 아니라,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해 온 농민 문제와 같은 여러 문제들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레닌은 크로코프 시절, 농민 문제에 대한 40편도 넘는 글을 썼다. 두마 의원, 샤코프를 위해, <현 정부 농업 정책 문제에 대하여>를 썼고, 페트로프스키를 위해 <농업 예산 문제에 대하여>를 썼다. 레닌은 크라코프에서 미국 자료를 연구하기를 기초로부터,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이라는 방대한 글을 썼다. 미국 통계는 정확하고, 풍부한 국가로 명성을 떨쳤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논박하고자, 글을 쓰기도 했다. 레닌은 수하노프 견해를 두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업은 비자분주의적으로 전화해야만 한다는 힘머 이론으로는 본질적으로는 압도적 다수로부터 부르주아 교수들, 부르주아 민주주의 및 전 세계 노동 운동 안에서 기회주의 이론이라고 말했다. 크라코프에서 시작한 미국 농업에 대한 소책자는 1915년 마쳤고, 1917년에서야 출판할 수 있었다. 병석에 누웠던 1923년에 레닌은 혁명에 대한 수하노프 논고를 읽고, 글을 구술하기도 했다. 크라코프 시절 쓴 수 많은 글들로부터 레닌은 농민, 지주 농업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줬다여러 당에서 농업 강령을 설명하고, 국가 조치 성격을 폭로하고, 이주 문제, 농업에서 고용 노동, 아동 노동, 토지 거래, 농지 동원 등등 여러 문제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했다. 농민 요구, 농촌에 대해서도 레닌은 너무 잘 알았고, 노동계급, 농민계급들도, 잘 알았다1912년 말, 혁명 노동 운동은 북돋고 있었고, <진실>도 많은 역할을 했다. 전진파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도 알았다. 191211, 알렉신스키로는 파리에서 전진파를 대표해서 <진실>에게 협력하기를 제안했다. 알렉신스키는 <진실>에서 많은 글을 쓰기도 했고, 전진파 논문집<최근 쟁점에 대하여> 3호에서 청산주의를 투쟁하고자 볼셰비키 안에서 투쟁을 중단하고, 모든 볼셰비키 구역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글까지 썼다. <진실> 편집부는 알렉신스키가 가입된 파리 모임뿐만 아니라, 보그다노프까지도 투고하고자 명부에도 포함했다. 레닌은 원칙적인 문제를 대할 때는 철두철미 신중하면서도, 사람들을 대할 때는 매우 밝았다. 낙천주의로는 오류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대의를 위해서는 무척 유익했다. 그러나 원칙 문제에서 합일점을 찾지도 못한다면, 타협이란 있을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이미 사회주의 건설로 향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사회주의 건설 준비기였다. 레닌은 문화 문제에도 무척 많은 관심을 보였다. 12월 말, 페테르부르크에서 피트메르고등학교는 수색을 당하고는 학생들은 체포됐다. 교장과 남편은 1890년대 초창기 마르크스주의 모임에서도 적극 참가했고, 1905-1907년에는 볼셰비키를 여러 가지로 돕기도 했다. 피트메르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 정치 참가, 모임 조직 등을 금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경찰은 급습했다. 학생들은 체포됐고, 두마에서 조사를 실시했다. 카소 장관을 해명했지만, 과반 수 의원들은 해명은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레닌은 1913, <계몽>, 3, 4호에서 게재한 기고문, 10장에서, 두마로부터 피르메르 고등학교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관련해서, 카소 인민 교육부 장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문화에 대해서도 언제나 정치 및 경제 구조 관계를 강조했다. 문화, 민족 자치라는 구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1913, 2, 레닌은 <러시아인과 흑인>이라는 특수한 글을 쓰기도 했다. 1913년 여름, 레닌은 바다예프 동지로부터, <인민 교육부 정책 문제에 대하여>라는 두마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 두마 의장은 바다예프를 제지했고, 발언권을 박탈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문화는 후진했고, 인민 교육에 할당된 재원들마저 형편 없고는, 차르 정부 정책으로부터도 인구 90%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음을 드러냈다. 미국에서는 국민 11%가 문맹이고, 흑인들은 44%가 문맹이라고 말했다. 1910, 흑인들은 러시아 농민들보다도 더 계몽됐다. 왜냐하면 미국 인민으로는 반 세기 전부터 이미 미국 노예 소유를 완전하게 박설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 문명 국가를 만들고자, 러시아 인민도 자국 정부를 타도해야만 해씩 때문이었다.

 

샤코프 동지를 위해 쓴 연설문에서도, 레닌은 지주로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줄 때만 러시아는 게몽 국가일 수 있다고 적었다. <인민 교육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도 레닌은 미국 도서관 분야를 상세하게 묘사했고, 러시아에서도 마련해야만 한다고 적었다. 6월에는 <노동계급, 신맬서스주의>에서도 교육 투쟁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회주의 건설 문제에서도 실천 의의를 지닌 다른 많은 문제들을 다뤘다.

 

크라코프 시절, 레닌은 <기술에서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사회주의 아래에서 발명과 역할을 비교하기도 했다. 자본주의 발명에서는 한 줌 백만장자들만, 더욱 부유해지고, 노동 계급들에 대한 전반적인 처지로는 더욱 악화되고, 실업마저 증가한다.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램지 시스템으로부터, 수백만 광산 노동계급들은 노동에서도 해방할 수 있고, 모든 노동계급들에 대한 노동일도 곧바로 8시간에서 7시간으로, 또 아래로도 단축할 수 있다고 봤다. 모든 공장, 철도를 전기화하면, 노동 조건도 더욱 위생적이고, 수백만 명 노동계급들도 연기, 먼지, 진흙 따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더럽고 역겨운 작업장들도 깨끗하고, 밝고, 품위를 갖춘 실험실로 바꿀 수 있다고 촉진하고자 했다. 모든 집에서 전기 조명, 전기 난방을 이용한다면, 수백만 가사 노예들도, 삶을 3/4를 어두침침한 부엌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술이란 노동하는 사람들을 고용 노예 상태라는 사회 조건들이란 날로 갈수록 증대하도록 만든다고 적었다.

 

일찍 레닌은 전기화, 하루 7시간 노동, 취사 공장, 여성 해방 등에 대해 생각했다. <최신 업종 가운데 하나>라는 글에서도, 사회주의 아래에서 자동차 개발에 대한 의의를 깊이 생각했다<농업에서 철제품>에서 철을 국가 문화에서 단단한 기반이라고 말했다. <선진 자본 사상>이라는 레닌 글로는 한 미국 백만장자 사상을 분석하기도 했다. 주로 백만장자 산업가들이 자신들의 중세 특권을 푸리슈케비치라는 검은 100인조 패거리와 협작하고는, 중세 반문화주의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도록 하는 일에 대해서는 탄식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한 미국 백만장자를 두고는 전 세계 노동계급을 바보라고 믿냐고, 따져묻기도 했다. 1912, 가을, 부하린을 알았다. <진실>에서 신문 구독 명단으로는, 주로 90%는 노동계급이었다. 배포 도표로는 몰랐던 큰 공장도 나오곤 했다. 크라코프에서는 그네비치, 단스키는 발행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험 문제에서, 대중, 당 관계를 강화하도록 할거라고 생각했다.

 

19132월 중순, 중앙 위원회 회의로는 크라코프에서 열렸다. 두마 의원, 스탈린도 왔다. 레닌은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스톡홀름 협의회, 런던 대회 등으로부터 스탈린을 알았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서 스탈린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같은 문제를 분석한 사람을 만나 기뻐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비엔나에서 두 달을 지내면서, 민족 문제를 연구했다. 비엔나 동지들, 부하린, 트로야노프스키와 주로 가까운 사이였다. 스탈린으로는 222, 러시아로 돌아가자, 페테르부르크에서 체포됐다. 9월에는 중앙 위원회 회의를 열기로 했다. <진실>은 폐간당했고, <노동 진실>을 발간했으나, 압수당했다. 파업도 높이 치솟아 올라, 페테르부르크, 리가, 니콜라예프, 바쿠 등지로도 파업은 벌어졌다. 카메네프 가족은 집 이층으로 이사 왔다. 레닌은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오랫동안 주방 식탁에 앉아서, 러시아로부터 오는 소식들에 대해 논의했다.

 

여름 회의로 잘 알려진, 당 협의회를 위한 준비 작업도 진행했다. 회의로는 1913922-101일까지 포로닌에서 열렸다. 여러 파견단 의원들도 참석했고, 말리노프스키로는 <노동 진실>, 모스크바 신문, <계몽>, 파도 출판사, 협동조합 및 판매원 대회, 정례적인 다른 과제 등도 논의했다. 협의회 중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도착했다. 19129, 체포된 이래로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감옥에 수감됐고, 힘든 환경 속에서 결핵을 앓아서 건강은 많이 나빠졌다. 그러나 당 활동에 더욱 투신했다. 협의회로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22명이었다. 노동 운동 성장 배경으로는, 5차 런던 대회를 열린 이래로, 대회를 필요로 했다. 노동 운동도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으로는 파업 운동, 정치 총파업 준비, 선동 임무, 일련 대중 소책자 출판, 민주 공화제 구호 선동 축소 불허용, 지주 영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제 등 여러 문제들도 회의에서 다뤄져야만 했다. 두마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소수 노동계급들에 대한 견해만 대표할 7인조로부터 볼셰비키를 반대표를 던지기를 허용할 수 없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전적으로 레닌, 민족 문제에 대한 중요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19141, 말리노프스키로는 카르코프로 와서 레닌과 함께 파리로 갔다고 다시 브뤼셀로 갔다. 113일에 열린 제4차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 대회로 참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로 겨울에는 <진실> 지도, 두마 파견단 작업을 위해, 카메네프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신문도, 두마 파견단도 도움은 필요했따. 1914, 38, 페레트부르크에서 대중 잡지, <여성 노동> 첫 호는 나왔다. 파리에서는 이네사, 스탈, 크라코프에서는 릴리나, 크룹스카야는 <여성 노동>에도 글을 썼다. 일곱 호를 발간했다. 8호에서는 비엔나에서 열릴 여성 사회주의 회의와 관련한 기고문들을 싣기로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전쟁은 일어났다. 비엔나에서 8월로 예정한 국제 대회 기간 동안 당 대회를 열기로 했다. 일부 사람들은 합법으로 국경을 넘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6월 중순, 국제사회주의사무국으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각기 다른 경향, 11개 조직 대표들에게 브뤼셀에서 회동을 갖고, 통합을 위해 각 조직은 서로 의견을 교환하자고 했다. 그러나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분트 등은 볼셰비키 활동을 제한했고, 여러 가지 조항들로부터 활동을 구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바다예프, <국가 두마 안에서 볼셰비키>라는 책에서도 지적했지만, 1914년 여름 무렵부터, 페테르부르크에도 있던 18개 노동 조합 가운데 14개 조합 지도부로는 볼셰비키로 구성할 수 있었다. 모든 노동 조합 조직 가운데 수적으로도 매우 많고, 매우 힘 있는 조합으로는 금속 노동 조합을 비롯해서, 강력한 모든 조합들도 볼셰비키 쪽이었다. 보험 기관 노동계급들 가운데에서도 같은 비율이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와 같은 수도권 보험 기관, 노동 대표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로는 37명은 볼셰비키였고, 멘셰비키는 모두 7명이었다. 전 러시아 보험 기관에서 선출한 사람들 가운데 47명은 볼셰비키, 10명은 멘셰비키였다. 따라서 비엔나에서는 국제 대회를 위한 선거를 폭 넓게 조직해갔다. 대다수 노동 조직들도 볼셰비키에게 국제사회주의대회 위임장을 넘겨주고자 했다.

 

청산주의, 트로츠키파, 전진파, 플레하노프파, 카프카스 지역 위원회 등으로는, 브뤼셀에서 사적인 회동을 갖고는 반볼셰비키 구역을 결성하고는, 조정된 정세를 활용해서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통합을 둘러싸고는 브뤼셀에서 질질 끌린 일로부터 1914년 여름, 레닌은 또 다른 극히 중대한 사태에도 몰두했다. 바로 말리노프스키 사태였다. 내무성 장관으로 임명한 준코프스키 장군은 말리노프스키를 첩자로 활동했다고 알았고, 두마 의장, 로잔코에세 사실을 알리고는 정치 추문은 일어나지 않도록 무마하고자 했다. 58, 말리노프스키는 로잔코에게 두마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는 해외로 나가버렸다. 지역, 중앙 기관들은 말리노프스키는 무정부주의와 같고, 조직을 파괴하는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고는 당에서 제명했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를 두고 첩자라고 비난한다면, 너무도 황당했기 때문에, 중앙 위원회로는 가네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특수 위원회를 구성했고, 레닌, 지노비예프도 소속됐다. 레닌도 믿지 못했다. 위언회는 말리노프스키에게 첩자 행위를 추적하거나, 증언을 들었지만, 궤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말리노프스키로는 프로닌을 배회하다가, 정체는 2월 혁명 때 드러나고는 말았다. 10월 혁명 뒤로 제 발로 러시아로 돌아와서는 소비에트 정권으로 인계됐고, 대법원 판결로부터 총살됐다. 러시아에서는 투쟁도 격화했다. 파업 운동도 커져갔다. 바쿠 성장은 폭발했다. 노동 계급은 바쿠 파업 참가자들을 지지하는 가운데 12천 명도 모인 푸질로프 공장 집회에서 경찰은 총 쏘았다. 경찰과 충돌도 심각한 양상을 띠었고, 두마 파견단은 궐기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했다. 대규모 파업은 일상이었다. 77, 페테르부르크에서 13만 명은 파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전쟁을 준비했다. 파업은 가라앉지도 않았고, 더욱 커져만 갔다. 붉은 페테르부르크 거리로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81, 독일은 러시아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83일에는 프랑스, 84일에는 벨기에는 선전 포고를 받았다. 같은 날 영국은 독일에다 선전 포고를 했고, 86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로는 러시아에다, 811일로는 프랑스, 영국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에다 선전 포고를 했다. 세계 대전은 시작됐다. 전쟁을 북돋던 러시아 혁명 운동을 일시적으로 정지하도록 만들었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일련 위기마저 만들어 내고는 말았다. 혁명 투쟁 문제들도 더욱 새롭게 날카롭게 제기했고, 모든 노동 계급에 대한 지도가로는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은 두드러졌고, 새로운 계층들도 투쟁으로 일어섰고, 프롤레타리아트 승리는 러시아로부터 생사 문제였다.

   

 

1914-1917. 전쟁기.

 

크라코프.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 기운은 감돌았다. 막상 전쟁을 선포하자 모두들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코펜하겐 동지에게 편지를 쓰고는 스톡홀름, 연락망 구축하기와 여러 부탁을 했다. 산골 지역 주민들도 동원을 시작하자 완전 짓눌린 분위기였다. 심지어 누구와 전쟁을 하는지도, 무엇 때문에 전쟁을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떠한 각성도 없는 상태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듯 전쟁터로 갔다. 191487일에는 헌병대는 레닌을 체포하겠다고 위협까지 했다. 더군다나 전쟁 초기에는 지나가다 사람 하나 죽는 건 일도 아니었다. 치호미르노프는 올로네츠에서 유형을 마치고 돌아왔다. 유형지에서 이미 망가진 심신을 휴양하고, <진실>에도 실을 자료들을 기초로부터 러시아에서 벌어진 노동 출판물 운동 등에 대한 정리 작업을 하고는 레닌을 돕고자, <진실> 편집부로는 포로닌으로 보냈다.

 

레닌, 크룹스카야도 밤새 잠을 못 이뤘다. 너무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차르 황실 관구 촌장은 레닌은 국제 사회주의 사무국 회원이므로, 데리고 있는 사람은 생명에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한바탕 소동마저 일으켰다. 레닌은 비엔나 인터내셔널 사무국원이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당 의원 빅토르 아들러에게 편지를 썼다. 레닌도 정치적이거나, 간첩 행위를 한 증거가 없음을 변호하고자, 여러 동지들도 전보를 부쳤다. 수 많은 지역 농민들은 수감됐다. 단지 여권이 만료됐거나,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지역 정부와 분쟁을 벌였다는 이유만으로도 체포해갔다. 동지들은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레닌은 형사범 감옥 안에서도 수감자들은 잠든 상태에서도 밤마다 당은 무엇을 해야 하고, 발발한 세계대전으로부터도 프롤레타리아트, 부르주아 세계적인 충돌로부터 전화하고자 어떤 행보를 취할 수 있는지 늘 생각했다. 크룹스카야로는 전쟁에 대한 소식을 입수하면 레닌에게도 전달했다. 레닌은 풀려난다 하더라도, 포로닌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크룹스카야는 짐을 쌌고, 꼭 챙겨 가야만 하거나, 포로닌에 남겨 둬야만 하는 걸 골라냈다. 집 형편은 엉망이었다. 레닌은 체포됐지만, 크룹스카야 가족들은 전쟁에 동원된 줄로 알기도 했다. 레닌을 변호했던 비엔나, 빅토르 아들러 의원, 리보프 지아만드 의원은 압력을 행사해서 마침내 효력을 나타냈다. 레닌은 819일에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임시 거처로 정한 건물 창문으로부터 참혹한 광경을 보기도 했다. 크라스니크에서 사망자, 부상자를 실은 기차도 막 도착했다. 크라니스크 일대에서 전투에도 참가했던 사람들은 친처들도 들것 주변으로 몰려들어 두려운 눈으로 가득찬 채로 죽은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들도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부상 정도는 비교적 경미한 사람들도 목이고, 팔이고, 붕대를 칭칭 감고는 천천히 역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겨우 첫 전투에 불과했다.

 

크라코프에서는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출국할 권리를 아주 빨리 취득할 수 있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도 좀 있었다. 여러 가족들 덕분에 1917년 가운데까지도 아껴뒀던 여비 돈은 조금 남아서 일시적인 생활비로 그래도 충당할 수는 있었다. 19177, 페테르부르크에서 집을 수색 당했을 때도, 경찰은 돈 영수증을 압수해갔고, 레닌은 간첩 활동을 한 대가로부터 독일 정부로부터 돈 받았다는 증거로 삼고자 가져가기도 했다. 비엔나에서는 필요한 증명서들을 입수하거나, 돈 문제를 처리하느라, 스위스로 입국할 수 있도록 보증해 달라는 전보를 스위스로 보내느라 하루 동안 머물기도 했다. 스위스 사회민주주의당 노당 당원, 그로일리히는 레닌에게 보증을 서주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라쟈노프는 레닌을 데리고 체포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빅토르 아들러를 찾아갔다. 레닌은 차르 정부로부터 적이었다.

 

베른.

 

191495일에는 스위스에서 입국해서 베른으로 향했다. 제네바와 베른 가운데 어디에서 살지는 아직 완전하게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다. 레닌은 옛날에 살던 익숙한 곳이던 제네바로 마음은 끌려 있었다. 러시아 장서 등을 훌륭하게 갖췄던 독서회도 있었기 때문에 일하기도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다른 도시들에서도 망명가들도 몰려들어 너무나 많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베른에서 방을 구했다. 레닌은 곧바로 제네바와 연락을 취했고, 러시아와는 연락망을 구축하고자 사람들을 모았다. 러시아로 갈 수 있는 사람, 러시아 인쇄소, 전단 등을 알아보았다. 베른에 있던 볼셰비키, 여러 동지들과도 회동했다. 발발한 전쟁 성격을 두고 제국주의 약탈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쟁 채권 발행에도 찬성한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 행위를 프롤레타리아트 대위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결의안을 앞서 채택했다. 결의안 내용으로는 러시아 모든 민족 노동 계급, 노동 대중 관점에서 볼 때도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수 많은 민족들을 압박하는 차르 군주정, 군대는 패배하는 쪽이 그나마도 더 낫다고 했다. 결의안으로는 또한 사회주의 혁명, 내전, 모든 나라에서도 어김 없이 나타나는 애국주의 및 폐쇄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 등에 대한 구호도 내걸었고, 군주정에 맞서는 투쟁, 혁명 선전, 공화국 쟁취 투쟁, 대러시아인들로부터 억압받는 민족들에 대한 해방 투쟁, 지주 소유지 몰수, 하루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이라는 큰 러시아 행동 강령을 정했다.

 

베른 결의안에서 핵심으로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베른 결의안은 은밀하게 보관하고자 작정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결의안은 먼저 볼셰비키 해외 지부로부터 각각 배포했다. 다음으로는 러시아 중앙 위원회 및 두마 파견단 토의로부터 사모일로프 테제들을 가져갔다. 러시아와 통신은 두절된 상태였다. 러시아 중앙 위원회, 볼셰비키 두마 파견단은 처음부터 올바른 노선을 취했었다. 전쟁에 대한 국제 대회 결의안으로는 선진 노동계급들과 당 조직들에게 종이 조각에 불과하지도 않았고, 행동 지침이기도 했다. 동원령을 발포했을 때는 전쟁 초창기에 중앙 위원회로는 <전쟁 타도. 전쟁에는 전쟁으로>라는 호소문을 살포했다. 페테르부르크 일부 기업에서도 예비군을 동원하던 날 파업도 일어났고, 시위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은 검은 100인조 애국주의를 들끓게 하고는 군부 반동을 강화하도록 했고, 따라서 많은 일들도 실패했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은 전쟁에 대한 투쟁, 차르 권력에 대한 지속할 수 있는 투쟁이라는 노선을 굳건하게 지켜나갔다. 멘셰비키조차 감동해서는 사회민주주의 분파 전체는 공동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고, 두마 연단에도 공표했다. 사회민주주의 파견단으로는 전쟁 채권 투표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항의 표시로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신속하게 지하 깊숙하게 숨어들고는, 혁명 전쟁을 전개해나갔고, 심화하고자 전쟁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하는 전단을 발행하고자 했다. 지방에서도 반전 선전을 했다. 지역에서 온 소식들로부터 혁명 성향 노동 계급들도 같은 선전을 지지하기도 했다. 해외에 있어서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그러나 두마 파견단, 러시아 볼셰비키 조직만큼 굳건함을 견지하지는 못했었다. 왜냐하면 문제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도 못했고, 어느 쪽에서 침략자냐는 식으로만 말들만 많이 해댔기 때문이었다.

 

파리로는 대다수 모임들도 우여곡절 끝에 전쟁, 자원병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었지만, 일부 동지들은 자원병으로도 프랑스군으로 들어갔다. 멘셰비키, 일부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 등도 80명 정도 자원병들은 러시아 공화주의를 대표해서 성명을 채택하고는 프랑스 언론에다 성명을 발표했다. 파리를 떠나는 자원병을 앞에 두고 플레하노프는 환송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파리 모임은 자원병들을 비난해댔다. 그러나 다른 모임에서는 문제를 제대로 명확하게 잘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레닌은 중차대한 시기로는 온갖 미묘한 사안들에서도 의미를 초반부터 곧바로 규정한다면 불합리할 수 있기 때문에, 볼셰비키로는 사태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동지로부터 의견을 교류하고, 끝까지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례로는 제네바 지부 입장을 피력한 카르핀스키 동지로부터 보낸 편지에도 답하면서 레닌에 대한 비판과 카르핀스키에 대한 레닌, 반비판와 같이 더욱 좋은 토론 거리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편지에서도 동지 토론으로부터 더 좋은 결론으로 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때는 때이니만큼 볼셰비키라는 협소한 모임 안에서도 동지 토론이라는 틀로만 머물거나, 오래도록 묶여 있을 수는 없었다.

 

10월 초에는 파리로 돌아온 플레하노프로는 이미 제네바에서 연설하고자 강연하러 로잔으로 가고자 했다. 레닌은 마음 상했다. 플레하노프는 방어론만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는 과거 군 생활을 겪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베른에서는 두 주 정도, 늦게 도착했던 지노비예프 부부, 이네사 아르망도 살고 있었다. <레닌 연구소 회보>에서는 회고록 가운데로는 강연회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여러 곳에서 강연장으로 모여들었고, 베른에서는 지노비예프, 이네사, 슈클로프스키 등, 클라렌스 부근, 보쥐에서는 로즈미로비치, 크릴렌코, 부하린 및 로잔 동지들도 갔다.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 때문에 많은 수 볼셰비키를 들여보내 주지는 않을까 매우 불안했다. 슈투트가르트, 코펜하겐, 바젤 등지에서도 국제 대회로는 임박한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 입장을 취하고자, 이미 결정한 바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들로는 자국 폐쇄주의 위협으로 맞서 싸울 때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작된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지배 계급 사이에서 결정적인 격돌로 전환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에게는 10분이라는 시간만 주어졌고, 요점만 말해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을 반박했다. 압도적인 다수였던 멘셰비키는 플레하노프에게만 박수를 쳐댔다. 사흘 뒤로는 1014, 플레하노프로는 강연했던 바로 같은 장소에서 레닌은 강연했다. 강당은 만원을 이루었고,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레닌은 전투 분위기였다. 레닌은 전쟁을 두고 제국주의 전쟁으로 보는 견해를 충분하게 털어놨다. 레닌으로는 이미 중앙 위원회로부터 만든 반전 전단도 나왔고, 카프카스 조직, 몇몇 다른 조직들도 같은 전단을 유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레닌은 강연에서 유럽에서는 마르토프로부터 기고하고 있는 <목소리>는 매우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토프와 의견으로 심각하게 대립할수록, 사회민주주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더욱 단호하게 말하고자 했다. 마르토프는 자국 정부를 비판하고, 자국 부르주아지를 폭로하고, 자국 장관들을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마르토프도 볼셰비키 쪽으로 가담하기를 좋겠다고 여러 번 말하곤 했었다. 아무튼 레닌 강연은 매우 성공했다. 제네바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강연을 했다.

 

벨기에로는 대의원으로부터 두마 안에서 사회민주주의당 두 분파, 모두에게 전보를 보냈다. 벨기에로는 러시아 정부로는 협상국 쪽에서 독일과 결전을 수행하도록 사회민주주의 의원단도 협조해주기를 호소했다. 초기 전쟁 채권에도 투표하기를 거부했던 멘셰비키 의원들도 대다수 사회주의 정당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 알자 심하게 동요했다. 따라서 벨기에에서 보낸 답신으로부터 이미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으므로, 전쟁에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의원단으로는 전쟁을 지지하고, 차르 정부에 맞선 투쟁을 중단에 대해 일축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볼셰비키 의원단은 취했던 주요한 노선을 옳았다. 따라서 레닌은 슐라프니코프는 스톡홀름에도 남아서 두마 의원단 및 러시아와 연락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전단에 대한 내용을 두고 여러 테제를 채택했고, 선언문으로 개정하고자, 동지들과 여러 가지로 의논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신문을 중앙 기관지로 발행하고자 결정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접했다. 10월 말, 레닌은 다시 강연하고자, 몬트레, 취리히로 갔다. 취리히에서는 트로츠키도 연설했다. 누가 어떤 노선을 취하는지 분명하게 밝히고자, 모든 문제를 일부러 극히 날카롭게 제기했다. 그리고 방어론에 대한 투쟁도 전면적으로 진행했다. 진행 중인 투쟁은 당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도 아니었고, 러시아 문제로만 국한되지도 아니했고, 국제 성격에서 투쟁이었다.

 

레닌은 기회주의에 잠식된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기회주의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 번째 인터내셔널을 위해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들을 제외하고는 전쟁 채권에 투표하지 않는 나라들로는 세르비아 사회민주주의들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세르비아 의회에서도 단 두 명에만 불과했다. 독일에서 전쟁은 시작하자 모든 사람들은 전쟁 채권에다 찬성표를 던졌지만, 910일에는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제트킨 등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로부터 취한 입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했다. 성명서를 10월 말에서야 스위스 신문들에다 발표할 수 있었고, 독일에서는 정작 성명서는 신문에도 실리지를 못했다. 독일 신문들 가운데 전쟁을 시작한 순간부터 매우 좌익 입장을 취했던 신문으로는 <브레멘 시민 신문>이었다. 신문은 823, 프롤레타리아 인터내셔널은 붕괴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는 게드, 베이앙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주의당 폐쇄주의 손을 들어줬다. 당 바닥에서부터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는 매우 확산해갔다.

 

벨기에 당 성격으로는 반데르벨데 처신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맥도날드, 케어 하디로부터 하인드만 영국사회주의당 전체로부터 폐쇄주의로도 반격을 가했다. 중립국들로는 반전 분위기는 퍼졌고, 평화주의 성격은 주조를 이뤘다. <전진>을 필두로 이탈리아 사회주의당은 다른 당들보다 혁명을 추구했다. 당은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었고, 전쟁 호소로부터 숨어 있던 탐욕스러운 이면도 폭로했다. 선진 노동 계급들도 지지했따. 927일에는 루가노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사회주의 협의회를 열었다. 전쟁에 대한 테제들을 협의회에다 보냈다. 협의회로는 전쟁 성격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평화를 위해 투쟁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카우츠키는 누구보다도 해롭다고 더 말했다. 왜냐하면 인터내셔널을 그저 단순하게 재건하자는 구호만으로는 옳지 않고, 평화라는 구호도 옳지 않고,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구호여야만 했다. 전쟁을 방해하거나, 그러한 분위기에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행동이 아닌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향으로부터 대규모 선전도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불행한 벨기에, 우크라이나로부터 하는 말들 속에서, 또는 독일인들에 대한 카이사르주의에 대한 인민 증오 속에서부터 폐쇄주의는 숨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의무로는 같은 궤변들에도 맞서 투쟁한다. 보다 정확하고 분명한 노선에 따라 투쟁을 이뤄지고자, 러시아에서는 노동 대중, 노동 계급이라는 이해 관계라는 관점으로도, 러시아인들은 죄를 덜 지을 수 있도록, 전쟁에서 차르 전제 정치를 타도해야만 하고, 차르 전제 정치로는 카이사르주의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말했다. 따라서 전쟁을 방해할 게 아니라,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해야만 하고, 내전을 목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적인 단결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데 매진하고자 했다. 단지 장교들을 사살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촉구하거나, 카이사르주의로부터 협력하고 싶지 않다는 등 주장을 허용한다면 잘못됐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행동은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졌고, 카이사르주의와 협력 거부만 내세운다면 기회주의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군대로도 대규모로 아니면, 최소한 집단 진격을 준비해야만 하고, 자국 군대로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선전, 선동 활동으로도 같은 방향에서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국가 간 전쟁을 내전으로도 전환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긴 시간도 들어도, 완강하고, 체계적인 작업으로부터, 개시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레닌은 전환 시점을 무르익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러므로 레닌은 평화라는 구호는 현 시점에서도 옳지도 못하고, 성지자들이나 내거는 평범한 구호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구호로는 내전이어만 했다. 레닌은 바젤 결의안도 같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내전은 함부로 약속할 수도, 지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매우 장기적으로 활동을 수행하기를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 반만에, 레닌은 이미 분명하고, 명확한 투쟁 노선을 수립해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과제들에 대해서도 그토록 신속하고, 굳건하게 올바른 노선을 취할 수 있었다. 당 건설, 노동 계급들을 조직하고자, 이전 몇 년 동안 어렵게 활동해 온 결과이기도 했다. 국제 투쟁이라는 한가운데로 있었던 경험마저 없었더라면, 레닌은 굳건하게 러시아를 프롤레타리아트 10월로 승리를 이끄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 33호는 1914, 111일에 나왔다. 처음에는 겨우 500부만 인쇄했다가, 나중에는 1,000부를 추가 발행했다. 1114일에 레닌은 중앙 기관지로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지점 가운데 한 곳에 도착했다. 1113일에는 나인, 그라버로부터 뇌샤텔 노동 중심지였던 쇼드퐁에서 프랑스어로 간행하는 스위스 신문 <파수꾼>에 대한 선언문을 요악한 내용을 게재할 수 있었다. 선언문 번역본을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신문들에 보냈다. 레닌은 제2인터새녀설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대의에 대한 배반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고, 베른으로 도착하자마자 그라나트 백과사전에 실릴, <칼 마르크스> 항목 내용을 작성하는 데 착수했따.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논하면서부터, 마르크스 세계관 개요로는 철학 유물론, 변증법으로 글을 시작했고, 마르크스 경제 학설을 서술한 뒤로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투쟁 전술이라는 문제로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조명했다. 레닌은 마르크스 학설을 설명하면서, 철학 유물론, 변증법에 대한 장을 저술하면서, 레닌은 헤겔, 다른 철학가들을 열심히 다시 읽었다. 마르크스 관련 글을 끝낸 뒤에도 같은 공부를 멈추지는 않았다. 철학을 공부한 목적을 두고 철학을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까지 전환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도 얻어냈다. 1921,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노동 조합 문제에 대한 논쟁을 붙었을 때, 모든 현상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해야만 한다고 짤막하게 언급하기도 했고, 베른으로 도착하면서부터 마하주의들로부터 싸우던 1909-1909년 철학 연구 연속선으로도, 행했던 철학 연습은 큰 결실과 여러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닌에게 투쟁, 학습, 학술 활동은 언제나 튼튼한 매듭이었다. 얼핏 보면 평행선을 달리하듯이 보일 수 있지만, 관계로는 언제나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더욱 심도 깊었다. 그리고 1915년 초에는 해외 볼셰비키 모임으로부터 단결을 위한 활동을 꾸준하게 강화해갔다.

 

해외조직위원회라 불리우던 볼셰비키 모임에서 중앙은 전쟁 전까지 파리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을 중립국이던 스위스 베른으로 옮겨야만 했다. 중앙 기관지 편집국 역시 베른에 있었다. 전쟁에 대한 평가, 당 앞에 마주한 새로운 과제들, 과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 등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합의를 필요로 했고, 모임 활동을 구체적으로도 정할 필요는 있었다. 크릴렌코, 부하린, 로즈미로비치와 같은 보쥐파는 해외 기관지, <>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는 성급하게 일에 착수하기만 했고, 중앙 기관지와 협의하지도 않았다. 발행하는 일도 별로 합리적이지는 않았고, 중앙 기관지 발간에 필요한 돈도 없는 상태였다. 또한 견해도 많이 달랐다. 2월 말, 베른에서는 해외 모임 협의회를 소집했다. 파리 방어론 분위기를 상세하게 말해줬다.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새로운 동지마저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로 일본, 미국 등지에서 활동한 키예프 파타코프, 옐레나 표도로브, 로즈미로비치라는 보슈 남매 동지도 있던 일본파를 좋아했다. 덕분에 해외 모임에서 힘을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동지마저 절박하게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협의회로는 전쟁에 대한 분명한 결의안을 채택했고, 유럽합중국 구호에 대해 토론했고, 해외 모임들로부터 활동 성격을 정했고, 보쥐 신문을 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따. 또한 베른 사람들 가운데로는 슈클로프스키, 카스파로프, 이네사 아르망, 릴리나, 크룹스카야 등 새로운 해외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카스파로프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1913년 베를린에서 살았다. 레닌은 바쿠에서 온 예누키제, 샤우만 등으로부터 전재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도 특히 몰두했다.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다. 1913년 여름, 카스파로프는 <계몽>에다 실을 민족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한 편지를 썼다. 카스파로프에게 민족 문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일들을 맡겼다. 1914, 7,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 운동도 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어려운 과제였고, 1915, 214일에 열린 협상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사회주의 정당들도 런던 협의회를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협의회로는 영국독립노동당와 여러 국가에서 사회주의 당원들도 들어왔다. 레닌은 중앙 위원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했고, 반데르벨데, 게드, 상바 등에게 즉각 벨기에, 프랑스 부르주아 내각에서 사퇴하고, 모든 사회주의 정당은 차르 전제 정치에 맞선 러시아 노동 투쟁을 지지하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제시했다. 선언문은 독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로부터 전쟁 채권을 지지하고, 융커, 성직자, 부르주아 등과 시민 평화를 체결함으로부터, 사회주의와 인터내셔널에 대해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고, 벨기에, 프랑스 사회주의들도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노동계급들은 독일에서 칼 리프크네히트, 세르비아, 이탈리아 사회주의들, 독립노동당 영국 동지들, 영국사회주의당 일부 당원들, 그리고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체포당한 동지들 같이 행동하는 사회주의들엑게 동지로 손을 내밀었다. 사회주의 길로 나서기를 촉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대의를 파괴하는 폐쇄주의를 타도하고자 했다. 그리고 국제 사회주의를 환영한다고 선언문에다 적었다. 같은 시기로는 국제여성협의회도 준비했다. 협의회는 단지 평화주의 성격을 띠지는 말고, 명백하게 혁명 입장을 취하도록 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클라라 제트킨, 발라바노바, 콜론타이, 영국 여성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국제 연락에서 첫 가닥을 이어 갔다. 이네사 아르망, 스탈은 프랑스 동지들과 편지를 교환했었고,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했고, <전진>으로 참가했다. 이탈리아사회주의당은 매우 혁명 정서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독일에서는 방어론에도 반대하는 분위기는 퍼져갔다. 122,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전쟁 채권에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클라라 제트킨은 국제여성협의회를 소집했다. 제트킨은 국제여성사회주의사무국 서기였다.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과 함께 클라라 제트킨은 독일사회민주주의당 다수파 폐쇄주의에도 맞서 투쟁했다. 콜란타이로는 멘셰비키와 결별했다. 그리고 콜란타이와 편지로 연락해서, 볼셰비키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주로 평화 구호를 내걸었던 콜론타이로는 협의회로 오지는 못했다. 베른 국제 협의회로는 326-328일까지 개최했다. 최대 규모로 잘 조직한 대표단은 클라라 제트킨을 수반으로 한 독일 대표단이었다. 러시아 중앙위원회 대표단으로는 아르망, 릴리나, 라비치, 크룹스카야, 로즈미로비치였다. 폴란드 로즐라모프파 대표로는 돔스카야라는 카멘스카야도 있었다. 주로 중앙 위원회 대표단과 함께 움직였다. 조직 위원회를 대표하는 러시아인은 두 명 더 있었다. 발라바노바는 이탈리아 대표단이었고, 프랑스 여성으로는 루이즈 소모노로는 발라바노바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네덜란드 대표들은 완전 평화주의 분위기였다. 따라서 좌익에 속하기만 했던 롤란트 홀스트는 올 수도 없었고, 폐쇄주의 트뢸스트라파 대의원들도 왔다. 영국 대표들은 기회주의 독립노동당 소속이었다. 스위스 대표들은 역시나 평화주의로만 경도됐다. 그리고 같은 경도는 지배적이었다. 독일 대표들 대다수로는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모임에도 속했다. 이마 자국 폐쇄주의 추종자들과 갈라서서, 자국 정부로부터 맞서 싸웠다. 로자 룩셈부르크로는 이미 자국에서는 체포된 상태였다. 국제 무대에서 실제로는 전선 승전국 나라 대표단이었으므로, 최대한 양보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협의회에 대한 실패 책임을 피하고자, 클라라 제트킨은 평화주의들로부터 양보했고, 결의안에서 혁명 내용을 희석하고자 했다. 레닌은 콜론타이에게도 편지를 썼던 관점으로부터, 피상적인 단결이 아니라, 폐쇄주의로 맞선 혁명 투쟁 단결, 지배 계급에도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투쟁을 위한 단결 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독일, 영국, 네덜란드 대표들로 구성한 위원회에서 작성한 결의안에는 폐쇄주의를 비난하는 내용은 없었다. 따라서 따로 특수한 결의안을 들고 나갔고, 이네사 아르망, 폴란드 대표 카멘스카야도 지지했다.


특수 결의안에서는 분열 정책을 비난했다. 그리고 입장은 옳았다. 영국, 네덜란드와 같은 착한 평화주의로는 국제 행동을 한 걸음도 앞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전쟁 조기 종결에 대한 제 몫을 한 건, 정작 혁명 투쟁, 폐쇄주의 결별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국제 전선에서도 투쟁 세력을 모으는 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 레닌은 콜란타이뿐만 아니라, 제트킨에게도 평화주의로 경도해서도 안 되고, 모든 문제들을 날카롭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부탁했고, 또 설득하고자 했다. 417, 베른에서 또 다른 국제 협의회를 열였다. 사회주의청년협의회였다. 스위스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참전하고자 전선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던 많은 교전국 청년들도 많았다. 중립국이던 스위스로 망명했다. 청년들은 혁명 정서를 갖고 있었다. 여성협의회에 이어서 사회주의청년협의회를 열었다. 이네사, 사파로프로는 협의회에서 당 중앙 위원회를 대표해서 연설했다. 크룹스카야 어머니도 돌아가셔서, 가정생활도 힘들어지자, 집주인은 다른 방을 구해보라고 했고, 다른 방으로 이사하기도 했다. 210, 5명 두마 의원들에 대한 재판도 열었다. 페트로프스키, 무라노프, 바다예프, 사모일로프, 샤고프 등 볼셰비키 의원 전원은 유형을 선고 받았고, 카메네프에게도 유형을 선고했다. 레닌은 1915, 329일자로,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의원단에 대한 재판은 무엇을 보여주는가>를 기고했다. 그리고 무라노프 활동으로부터 러시아에서 의식 있는 노동 계급들로는 4/5는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진실>을 구매했던 노동 계급들 수로는 약 4만 명이었다.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훨씬 더 많았다. 프롤레타리아트 계층들도, 입헌민주당 당원들, 트루도비키, 플레하노프와 <우리 여명> 등에서도 보인 사회 폐쇄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사회 폐쇄주의에도 맞서 단결을 지켜내야만 했고, 단결을 따라 노동 운동을 단지 민족주의, 자유주의를 따르는 유럽 방식이 아니라, 사회 혁명이라는 방향으로까지 발전하도록 해야만 했다. 레닌은 얼마나 옳았는지도 증명했다. 레닌은 국제주의 사상을 또 선전했고, 온갖 형태로 사회 폐쇄주의를 폭로하는 일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도 않았다. 크룹스카야는 갑상샌 질환은 재발했을 때, 베른을 떠나기 전에는 보슈, 퍄따코프 동지들도 왔다. 주차대한 문제들을 상세하게 논할 수 있는 비합법적인 잡지를 해외에서도 간행할 계획을 세워 뒀다. <공산주의>라는 잡지로는 중앙 기관지 편집국에서 발간해야만 했고, 일본파는 일에서도 합류도록 합의를 봤다. 레닌은 같은 해 여름에, <공산주의>에도 실을 <2인터내셔널 붕괴>라는 장문 기고문을 썼고, 같은 기간, 국제주의협의회 준비와 관련해서, 지노비예프와 공동으로, <사회주의와 전쟁>이라는 소책자도 쓸 수 있었다. 레닌은 스위스를 좋아했다.

 

독일에서는 투쟁은 격화됐다. 4, 로자 룩셈부르크, 프란츠 메링은 <인터내셔널>을 창간했고, 발간 즉시 폐간당했다. 유니우스, <독일 사회민주주의 위기>라는 소책자도 나왔다. 칼 리프크네히트로는 <주적은 자기 나라에 있다>라는 독일 좌파 사회민주주의 호소문도 나왔다. 6월 초, 칼 리프크네히트, 둥커는 전쟁에 대한 사회민주주의당 다수 태도에도 항의하는 <사회민주주의당 중앙위원회와 제국의회 파견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작성했다. 수천 명 당 실무가들도 <공개서한>에다 서명했다. 독일사회민주주의당 중앙 위원회로는 좌파 사회민주주의들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하는 걸 보고는 반대 행동을 결정했다. 카우츠키, 하제, 베른슈타인으로부터 서명한 선언문을 발표해서는 합병을 반대하고, 당 단결을 호소했고, 다른 쪽으로는 의회 파견단 일므으로 좌파 반대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스위스로는 로베르트 그림은 좌파 국제 협의회를 준비하고자, 예비 회의를 711, 베른에서 소집했다. 회의에는 그림, 지노비예프, 악셀로트, 바르스키, 발렌츠키, 발라바노바, 모르가리, 7명은 참석했다. 예비 회의로는 지노비예프를 제외하고는 참된 좌파는 없었고, 참석가들 가운데, 좌파 협의회 소집을 진지하게 원하는 사람도 정작 아무도 없었다.

 

레닌은 참된 좌파 입지를 확보하고, 좌파들 상호 간 최대 단결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8월 중순에는 볼셰비키로는 이미 선언문, 결의안, 성명서 초안을 작성했고, 매우 좌파 동지들에게 검토하도록 했다. 10얼에는 레닌, 지노비예프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은 독일어로 번역했다. 협의회로는 95-8일까지 짐머발트에서 개최했다. 11개국 대표들, 모두 38명도 참석했다. 짐머발트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고작 9명뿐이었다. 레닌, 지노비예프, 베르진, 회글룬트, 네르만, 라데크, 보르카르트, 플라텐, 협의회 끝난 뒤로 뒤늦게 합류한 롤란트 홀스트였다. 러시아 대표 협의회로 참석한 다른 사람들로는, 트로츠키, 악셀로트, 마르토프, 나탄손,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체르노프, 분트파 한 명이었다. 트로츠키는 짐머발트 좌파에는 가담하지도 않았다. 협의회 다수파로는 좌파 초안을 거부했더고, 훨신 모호하고, 덜 전투적인 선언문을 채택했다. 따라서 좌파는 공동 선언문에다 서명했다. <첫 걸음>이라는 레닌 기고문에서도 짐머발트 협의회에 대해 평가하기도 했다. 협의회에서는 소책자, <사회주의와 전쟁> 독일어판을 배포하기도 했다. 기회주의에도 맞서 일관되지 못한 입장을 비판하고, 독일,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등 소수파와 함께하는 일보 전진을 거부한다면, 분파주의라고도 말했다. 스위스에서도 속물주의는 만연했다. 이네사 아르망은 레닌에게 활동에 대한 편지를 자세하게 썼다. 그리고 트로츠키, 메렝은 네덜란드 잡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고 알렸다. 행동위원회 회합에서는 호소문을 논의하기도 했다. 트로츠키 초안은 기각했고, 메렝 초안으로 대체했다. 여러 논쟁도 벌였다고 했다. 논쟁에서 이네사 아르망은 게드파를 옹호하기도 했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청년 활동, 전단 발행 계획, 기계공·인부들·기타 노동조합주의 접선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써주었다. 이네사 아르망은 파리 모임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처음부터 전선에도 자원했었고, 볼셰비키 견해에도 공감했다. 또한 프랑스 병사들 속에서 선전을 개시한 사포슈코프와도 만났다. 베른 활동은 주로 이론을 대했다. 1914, 111, 중앙 기관지에서도 중앙 위원회 선언으로는 폐쇄주의에 대한, 제국주의 경제적인 본질도 보다 명확해졌다. 레닌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유럽합중국은 식민지 분배 협정이나 마찬가지이고, 세계합중국도, 민족 연합, 민족 자유에 대한 국가적 형태이고, 사회주의와 연관할 수는 있으나, 독자적인 구호로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봤다. 1915년 말, 1916,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 시기, 방법 및 발전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생각을 갖고자,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 제국주의>라는 소책자를 쓰고자, 자료를 모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다시 읽고 또 읽으면서, 같은 문제를 연구했다.

취리히.

 

1916, 1, 레닌은 돛 출판사에도 낼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레닌은 취리히 도서관에서 일하러 갔다. 크룹스카야는 존 리드, <혁명가 딸>을 읽기도 했다. 존 리드로는 매춘부를 직업이나, 사랑이라는 문제 관점이 아니라, 다른 이해 관계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밑바닥 세계를 그릴 때, 생활 상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취리히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고리키, <밑바닥에서>를 상영한 예술 극장에서 보기도 했다. 일본에게도 자금 문제를 솔직하게 제기하기도 했었지만, 가진 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고, 스톡홀름에서는 생활비마저 훨씬 비쌌다고 한다. 레닌은 또 도서관에서 일하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취리히 운동으로는 당 서기관으로는, 프리츠 플라텐으로부터 지도했고, 짐머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취리히 신문, <인민 권리>도 있었다. 편집장이던 노브스도 짐버발트 좌파로 가담했다. 빌리 뮌젠베르그를 수반으로 한 청년 이주 노동가들도 취리히에서도 많았다. 매우 좌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스위스에는 강력한 노동 계급은 없었다. 휴양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부스러기나 먹고 사는 작은 나라였다. 민주주의, 민족 문제 해결만으로는 스위스는 사회주의 혁명 전원일수는 없었다. 레닌은 스위스 노동 계급들 앞에서도 강연하기도 했고, 플라텐, 노브스, 뮌젠베르그 등과 긴밀한 관계도 유지할 수 있었다. 취리히 모임 폴란드 동지들과도 함께 스위스 조직, 공동 회의를 구상하기도 했다. 취리히에서 레닌은 주로 제국주의에 대한 소책자 집필 작업에 매달렸다. 작업에 몰두해서 많은 발췌를 하기도 했다. 주된 관심으로는 식민지였다. 자료들을 엄청 모아뒀다. 아르피카 식민지에 대한 영문 자료를 번역 맡기기도 했다. 소책자는 7월 탈고할 수 있었다. 1916, 424-30일까지 제2차 짐버발트 협의회라는 킨탈 협의회를 개최했다. 1차 협의회 이래로 8개월 시간도 흘러갔고, 8개월 기간 동안, 제국주의 전쟁도 더욱 확산해갔다. 짐머발트 좌파도 늘어갔다. 짐머발트 선언문에서는 지속적인 평화 투쟁이란, 자본주의 기초가 아니라, 사회주의 실현 투쟁 속에서만 발휘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본가뿐만 아니라, 사회 폐쇄주의 추종가들, 카우츠키파 역시나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야만 했다.

 

추디비제에도 잠시 머물기도 했다. 이론 노선을 확립하고자, 로자 룩셈부르크, 라데크, 네덜란드 사람들, 부하린, 파탸코프, 그리고 콜론타이와도 견해는 달랐다. 매우 큰 견해로는 키예프스키라는 퍄타코프와 달랐다. 8, <프로레타리아트와 민족자결권>이라는 기고문을 레닌은 읽었고, 답장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 대하여>라는 소책자 한 권이었다. 1894-1901년까지 옛 경제주의들로는 자본주의는 승리했고, 정치 문제를 도외시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정치 투쟁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주의 경제주의들도, 제국주의는 승리했으므로, 따라서 정치 민주주의 문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다고 적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도 민주주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만 한다고 봤다. 그리고 러시아 경험에서도 레닌은 입증했다. 레닌은 1915-1916년 사이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깊이 사고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으로도, 191510, 파라벨룸이라는 라데크, <베른 파수꾼>11월 반박하기도 했다. 반자본주의 혁명 투쟁에서 민주주의 요구에 대한 혁명 강령, 전술과 결합하고자, 공화국, 민병대, 인민 관리 선출, 여성 평등, 민족 자결 등등도 그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로는 예외적이고, 불완전하고, 왜곡된 형태로만 실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파라벨룸을 반박하는 기고문은 1927, <마르크스주의 희화화>1924년에 나왔다. 레닌, 트로츠키와 늘 나 있던 깊었던 골은 바로 트로츠키로는 민주주의라는 참된 정신, 사회주의 건설에서 민주주의 원리, 대중 생활 양식 전체를 재조직하는 과정 등을 이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16년에는 레닌, 부하린 사이에서도 생긴 견해는 싹으로 자라 달라졌다. 레닌은 <청년 인터내셔널>에서 부하린, 8월 말, <청년 인터내셔널> 6호에서 게재한, <주목하라>라는 짧은 글에서 국가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 프롤레타리아트 역할에 대한 과소평가를 드러내고는 말았다. 레닌은 1916년 하반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특히 관심으로 뒀다. 레닌은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 엥겔스 글들을 열심히 다시 읽고, 발췌했다. 레닌은 스위스 좌파였던 빈터투르에서 온 아르투르 슈미트에게도, 1130일 전쟁에 대한 태도 문제를 놓고, <레닌 저작집> 17권에 발표한 191612월 편지에서도, 군국주의에 대한 완전한 폐지는 자본주의 폐지로부터 이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모든 사태에 대해 변증법으로 접근하는 문제에도 특히 골몰했다. 레닌은 엥겔스로부터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에다 쓴 문구를 곧바로 거머쥐웠다. 레닌은 유니우스 소책자에 대한 서평으로도, 마르크스 변증법은 각각 특수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요구한다고 썼다. 1916년 가을, 1917년 초에는 레닌은 이론 작업에 골몰했다. 레닌으로는 제2인터내셔널,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카우츠키 일파 등과 결별할 필요도 있었고, 짐머발트 좌파 세력으로는 제3인터내셔널을 세워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러시아로는 지헤이제, 스코벨레프, 조직위원회 지지가들, 트로츠키와도 즉각 결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 투쟁을 수행하고, 기회주의들을 참으로 가차 없이 폭로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기회주의들은 말과 행동마저 다른 사람들이었다. 사실상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고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대의를 저버리고, 배신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그토록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간으로는, 1916년 마지막 몇 개월, 1917년 초 몇 개월 간이었고, 정말 유일무이한 경우였기 때문이었다. 혁명은 서서히 닥쳐오고 있다고 레닌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1917-1919.


1917122, 망명지였던 취리히 인민 회관에서 열린 청년 회합을 연설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에 대해 말했다. 취리히에서는 다른 나라들, 곧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도 제국주의 저쟁에도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혁명 정서 청년들도 많았다. 레닌은 청년들에게 노동 계급들에 대한 혁명 투쟁 경험을 할 수 있다면 풍부하게 조명하고, 모스크바 봉기 중요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레닌은 다가올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고,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봤다.

 

2월 혁명.

 

브론스키로부터 혁명 소식을 접했다. 긴급 속보로 타전했다. 전보를 수 차레나 읽었다. 러시아에서도 혁명은 일어나고 말았다. 레닌은 집중해서 생각했다. 나머지 시간과 밤도 후딱 지나갔다. 파리 코뮌 기념일이던 318, 레닌은 스위스 대규모 노동 중심지인 쇼드퐁으로 다녀왔다. 파리 코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또 러시아 혁명 운동에도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318, 페테르부르크에서 <진실>을 발행했다. 또한 <먼 곳에서 온 편지들>을 썼다. <1차 혁명 첫 단계>, <새 정부와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 <어떻게 평화를 성취할건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국가 체제 건설이라는 과제>, 이렇게 모두 다섯 글이었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착하던 날에서야, 겨우 첫 번째 편지만 게재했다. 세 글은 편집국에 그대로 놓여 있었고, 다섯 번째로는 아예 <진실>에도 배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민병대에 대하여>는 레닌 사망 1924년에야 발표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대한 생각을 잘 서술해놨다. 레닌, <국가와 혁명>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싶다면, <먼 곳에서 온 편지>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글 전체는 구체적으로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인민 권리>에다 보낼 기고문으로는 <러시아 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 임무>, <스위스 노동가들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썼다. <포로가 되어 고통 받는 동지들에게>라는 편지도 썼다. 덕분에 여러 포로 동지들도 만날 수 있었다. 베른 인민 회관에서도 러시아로 가는 여러 동지들도 모두 모였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대중, 노동계급들, 병사들, 수병들도 지도가를 맞이하고자 나왔다. 친한 동지들도 맞이했고, 또 많이 있었다. 롱주모 학교 학생들도 축축한 붉은 색 넓은 띠를 어깨에 두른 채로 있었다. 얼굴은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주위로는 온통 사람들 물결로 바다를 이루었다. 붉은 깃발들, 크론슈타트 수병들로 이뤄진 의장대, 핀란드 역에서부터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길을 비춰주던 페트로파블로프스카야 요새 탐조등 불빛, 장갑차들, 길을 둘러싸고 사슬같이 이어진 노동계급들, 치헤이제, 스코벨레프는 페트로그라드 노동벼사대표소비에트 공식 대표 자격으로, 핀란드역으로 맞이했다. 동지들은 차르 접견실로 안내했고, 대위 한 명도 다가와 차렷 자세로 경례했다. 뜻 밖에 사태에 다소 당황했던 레닌도 거수경례를 했다. 덕분에 장갑차를 탈 수 있었고, 크셰신스카야 저택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수 많은 사람들도 외쳤다. 당 중앙 위원회, 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도 들어섰다. 다과회와 동지들은 환영사도 준비했으나, 레닌은 화제를 돌렸고, 전술 문제에 대해 말했다. 크셰신스카야 저택 옆에도 노동계급들, 병사들도 장사진을 이뤘다. 발코니에서 연설해야만 했다.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볼셰비키 구성원들도 회동 자리로 레닌을 데려갔다. 레닌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 견해를 몇 가지 테제로 서술했다. 멘셰비키도 회의를 열었고, 볼셰비키 회합은 나중에 전체 사회민주주의들 합동 회합에서 연설을 다시 한다고 결정했다. 레닌도 따랐다회합은 타브리다 궁전 대강당에서 열었고, 골젠베르크는 의장석에 앉았다. 1905년 혁명 때 굳건한 볼셰비키였지만, 플레하노프 뒤좇아, 방어론을 지지했다. 레닌은 연설했고, 골젠베르크는 반대 연설도 했다. 레닌은 혁명 민주주의 사이에서 내전 깃발을 높이 세웠다고 말했다. 콜론타이도 레닌 테제들을 열렬하게 옹호했다. 플레하노프로는 <단결>에서 레닌 테제들을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사흘 뒤 47, 레닌 테제들은 <진실>에도 게재했다. 레닌 테제와 거리를 둔 카메네프 기고문, <우리 견해 차이>도 등장했다. 카메네프는 <진실> 기존 입장을 고수했고, 볼셰비키로는 중앙위원회사무국 테제들을 승인했다.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도 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투쟁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시 협의회를 열었지만, 레닌 관점은 승리했다. 협의회는 414-22일까지 8일간 지속했고, 같은 기간 레닌은 옳았음을 증명한 굵직한 사건들도 이어서 나타났다. 47, 레넨 테제들도 언론에 등장한 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로는 자유 공채에도 찬성하는 표결을 했다.

 

부르주아 신문들, 방어론 신문들은 레닌, 볼셰비키를 두고 미친 듯이 공격해댔다. 아무도 카메네프 발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볼셰비키 조직 안에서 레닌 관점은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에 대한 공격으로 테제들은 빠르게 유명해지기도 했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약탈 전쟁이라고 칭했기 때문이었다. 410, 레닌으로는 이즈마일로프 연대에서도 연설했고, 15일에는 <병사 진실>도 나올 수 있었다. 16일에는 페트로그라드 병사, 수병들은 레닌, 볼셰비키에 대한 공격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할 수 있었다418일이라는 51, 러시아에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규모로 메이데이 시위도 열렸다. 러시아에서는 외무부 장관 밀류코프로부터 전쟁을 계속하고자 임시 정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무엇을 했을까. 볼셰비크는 의무를 언론으로부터 잘 설명했다. 볼셰비키로는 니콜라이 2세 정부, 차르 일당이 내린 의무를 임시 정부는 수행하고 있다고 약속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부르주아지 앞에 놓인 의무라고 고발했다. 대중들도 거리로 나왔다. 421, 대중은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임시 정부 지지가들 역시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를 벌였다. 같은 사건들로부터 볼셰비키는 단결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조직으로는 레닌 관점에 입각해서 결의안을 채택했다. 421, 22, 중앙 위원회로는 임시 정부를 폭로하고자 했다. 그리고 밝히고자 결의안을 냈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화해 전술을 비난했다. 노동 계급, 병사 대표들을 재선출하기를 촉구했고, 소비에트를 강화하자고, 더욱 촉구했다. 폭 넓은 홍보 활동을 수행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임시 정부를 즉시 전복하려는 시도는 시의적절하지는 않다고도 지적했다. 레닌 테제들로부터 공표한 뒤로 3주나 지난 뒤, 전러시아협의회는 개최될 무렵부터, 볼셰비키 사이로는 이미 단결을 이뤘다. 중앙 위원들도 찾아왔고, 레닌은 바빴다. 밤에 집 창문을 열고, 열띤 논쟁을 듣기도 했다. 병사, 이웃집 요리사, 젊은이들 너 나 할 거 없이, 밤새 열띤 논쟁을 벌였다. 여전히 정치, 집회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백야는 철야 집회였다. 중앙 위원회 서기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많은 경향 지지가들, 곧 볼세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 무정부주의들 등도 있었다. 5만 명에 달하는 젊은이들도 조직에 들어왔다. 중앙위원회 회의나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소식인지라, 학생들은 볼셰비키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교사 대회에도 참석했따. 교단은 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었다. 방어론들도 대회에서 연설했다. 알렉신스키도 연설했다. 볼셰비키, 국제주의 멘셰삐키 등 사회민주주의들로는 15-20명이었다. 별도 작은 방에도 모여, 어떤 학교를 만들지, 그리고 투쟁할지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교환했다. 회합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지역 평의회로부터 일했다. 많은 교사들은 폐쇄주의로 오염되어 있었다.

 

레닌은 메이데이집회에도 참석했다. 오흐타, 그리고 화성 광정에서 연설했다. 여러 동지들을 만났고, 424-29일까지 전 러시아 4월 협의회를 개최했다. 151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협의회로는 새로운 중앙 위원회를 선출하고, 현 시국, 전쟁, 3인터내셔널 준비, 민족 문제, 농업 문제, 당 강령 등과 같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을 토론했다. 정치 경험에 대한 중요성을 말했다. 레닌은 현 시국에 대해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과제에 대해서는 소비에트로부터 토지 사적 소유 철페를 말했다. 그리고 낡은 국가 관료제도를 비판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한 석탄 광부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책에 있는 말을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어떻게 혁명을 이뤄냈는지를 레닌에게 이야기해줬다.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가라는 따위가 아니었다. 광부들에게 문제는 광산을 장악했을 때, 생산 중단을 막고자 케이블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리고 빵 이야기를 먼저 나눴다. 그러니까 가진 빵이 없을 때, 빵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하면 마련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로 책에서 읽는 게 아닌, 참된 혁명 강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5월 초, 레닌은 당 강령 개정안을 작성했다. 크룹스카야로는 <병사 진실>에다 레닌에 대한 글을 썼고, <당 역사 한 쪽>이라고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레닌은 글 초고를 읽고는 몇 가지를 정정해주기도 했었다. 1917513일 자, <병사 진실> 21호로 게재했다레닌은 자주 지치곤 했다. 1913, 레닌은 민족 문제에 대해 샤우만과도 활발하게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145, 레닌은 모든 민족, 또는 대다수 민족 마르크스주의들로부터 민족 평등, 소수 민족 권리 보호를 위한 법률 초안을 작성해서, 두마로부터 제출할 필요는 있다고 개진했던 편지도 흥미롭다. 레닌은 초안에 따르면, 평등이라는 개념을 해석할 때는, 들어가는 모든 곧 언어, 학교, 문화 등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을 포함할 수 있어야만 하고, 모든 관계 및 상관 관계 측면으로도, 다 고려해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17, 레닌은 스체판을 만나서, 볼셰비키로부터 직면했던 날카로운 문제들을 충분하게 토의했다. 여러 연설과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도 치렀다. 대중은 혁명 분위기를 북돋았다.

 

볼셰비키로는 610, 시위를 열기로 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사흘 동안 어떠한 시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고, 시위를 금지하고자 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로부터 정한 시위는 취소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한다면,대회 결정에 불복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한다면 반대가들 손으로 무기를 쥐어 주는 격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대회로는 618일 자체 시위를 벌였다. 시위로는 약 40만 명 노동 계급, 병사들도 참가했다. 시위대는 깃발, 현수막으로는 90%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구호로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열 명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 라고 내걸었다. 나머지는 임시 정부를 지지한다는 내용 뿐이었다. 레닌은 618일을 분기점으로 규정했다. 6월 지방 평의회 선거는 끝났다. 비보르프스키 지구에서는 볼셰비키, 소수 국제주의 멘셰비키만 선출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로는 평의회 활동을 거절했다. 노동 대중들도 여러 정치, 문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발휘했다. 인민 교육 소비에트도 빠른 속도로 설립했다. 교육 위원회로는 기관총 연대 문화교육위원회와도 몇몇 문화 활동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고자 월요일에 모이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다. 기관총 연대에서는 아무도 오지는 않았다. 중앙 위원회로는 평화 구호를 내걸고자 했으나, 노동 시위대, 기관총 연대로는 이미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시위를 중단하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했지만, 임시 정부로는 사관 생도들, 카자크 병사들을 동원했다. 사도바야 거리에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해댔다사관생도들은 <진실> 편집국을 습격했다. 파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중앙 위원들을 만났다. 노동 운동은 진압됐다. 여러 동지들도 레닌에게 독일 첩자라는 둥 악의적인 비방을 퍼뜨렸고, 중상모략으로 영향력을 마비하도록 하고자 했다. 77, 임시 정부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체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크셰신스카야 저택도 정부군을 점거했다. 레닌은 피신했다. 여러 집 수색을 당하기도 했었다. 79일에는 카메네프를 체포했고, 712일에는 전선에서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렸고, 715일에는 <진실>, <참호 진실>도 폐간됐다. 전선에서는 집회 금지령도 내려졌고, 헬싱포르스에서는 볼셰비키를 체포했고, 볼셰비키 신문, <파도>마저 폐간됐다. 718일에는 핀란드 국회를 해산했고, 코르닐로프 장군은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722,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는 체포됐다.

 

7월이 지나자, 케렌스키로는 군대 내 규율을 강화하고자 여러 조치들을 궁리해냈다. 7, 기관총 연대 무장을 해체하도록 한 채로 광장으로 내몰아 모욕을 줬다. 무장해제 당한 연대는 광장으로 걸어갔지만. 증오마저 타올랐다. 기관총 연대로는 10월에 헌신해서 볼셰비키를 지원했고, 스몰니에서도 레닌을 호위하기도 했다. 볼셰비키당으로는 반헌법 상태였으나, 무척이나 컸고 또 셌다. 6차 당대회 726일 무렵에는 당원 수로는 이미 177,000명에 달했다. 3개월 전 러시아볼셰비키 4월 협의회에 비하면, 두 배는 넘었다. 825, 코르닐로프 군대는 페트로그라드 진격을 시작했다. 페레트부르크 노동계급들, 비보르스키 지구 사람들은 맨 먼저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자 달려갔다. 코르닐로프 군대 부대들, 이른바 야만 군단에 맞서고자 선동가들도 파견했다. 따라서 금방 와해할 수 있었고, 실질적인 진격마저 잘 이뤄지지도 못했다.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된 부대 지휘관이었던 크리모프 장군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레닌은 라즐리프 오두막에서 더 지내기는 어려웠으므로, 핀란드로 거쳐를 옮겼고,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다. 핀란드에서는 신문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가발을 쓰거나, 분장을 하기도 했다. 913-14,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라는 편지를 썼고, 9월 말에는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헬싱포르스에서 비보르스키로 거처를 옮겼다. 또한 <볼셰비키는 국가 권력을 잡을 수 있는가>라는 기고문에서 농민, 병사들에게 보내는 격문, 페테르부르크시협의회 비공개 회의에서 쓴 편지에서도, 볼셰비키로는 권력을 잡고자, 구체적인 조치들도 취했다.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테르부르트 위원회 등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의원들에게도 같은 내용으로도 글을 썼다레닌은 107, 비보르스키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철저한 보안을 지키고자, 몸을 숨긴 주소를 중앙 위원들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1010, 레닌은 수하노바 집에서 열린 중앙 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중앙 위원 열 명,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제르진스키, 트로츠키, 우리츠키, 콜론타이, 부브노프, 소콜니노프, 로모프는 무장 봉기에도 찬성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반대했다. 1015, 페트로그라드 조직 회의를 개최했다. 스몰니에서 열었고, 지구 대표들도 여덟 명, 참석했다. 16일에는 레스노이 대로에 있던 레스노이 지구 평의회 사무실에서 중앙 위원회 확대 회를 열였다. 중앙 위원들 외로,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군사 조직 집행 위원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대표들, 노동 조합, 공장 위원회 및 철도 노동 계급들도 회의로 참석했다. 회합에서 두 개 노선을 논의했다. 즉각적인 봉기에도 찬성한 사람들은 대다수였고, 반대했던 사람은 소수였다. 레닌 결의안은 압도적인 다수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찬성 19, 반대 2, 기권 4표였다. 결정은 났고. 중앙 위원회 비공개 회의에서 군사 혁명 중앙을 선출했다. 레닌을 만나러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1024일에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즉시 권력을 장악해야만 한다고 편지를 썼다. 비보르스키 지구로는 봉기를 준비했다. 1917, 1025일이자 117, 아침에 임시정부는 전복됐다.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를 통솔하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기구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국가 권력을 넘겨줄 수밖에는 없었다. 바로 제2차 전 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 농민 정부를 수립했고, 인민 위원회를 창설해서는 레닌을 의장으로 지명했다.

 

10월 혁명.

 

10월 권력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 당이던 볼셰비키 당으로부터 모든 면에서 연구하고, 준비했다. 7월 봉기로는 자연발생이었다. 그러나 당에서는 끝까지 진중한 사고를 견지했고, 시기상조로 봤다. 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 대중은 아직 봉기할 준비는 되지 않았다. 중앙 위원회에서는 봉기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전투로 폭발해서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자제하도록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볼셰비키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할 바를 다했다. 봉기 순간까지도 올바르게 선택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핀란드에 몸을 숨겨야만 했고, 912-14일 사이에 중앙 위원회에다 편지를 썼다. 레닌은 봉기를 성공하고자 세 가지를 제안했다.

 

1. 음모나 당에 의존할 게 아니라 보다 나아간 진보 계급에게 의존한다.

 

2. 인민 혁명으로 북돋고자 의존한다.

 

3. 봉기로는 혁명 역사에서 매우 북돋는 상태에서 진보 인민 대오로는 크게 활동하고, 적들 대오로는 유유부단해서 약하고, 어중간한 벗들 대오로는 매우 심하게 동요하거나, 그러한 분기점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반란부들에 대한 사령부를 조직하고, 역량을 배치하고, 믿을 수 있는 부대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동하도록 하고, 알렉산드린카를 포위하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점거하고, 사령부와 정부 각료를 체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장 노동계급들을 동원해서라도, 마지막 전투까지 결사로 싸우기를 촉구해야만 했다. 전신, 전화국을 일거에 점령했고, 중앙 전화국으로는 봉기 사령부를 설치해서, 모든 공장 부대, 무장 투쟁 지점들로부터 사령부와 전화로도 통신할 수 있다고 해야만 했다. 기술 하나론는 봉기에 접근하지 않고서는 현재 정세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만 충실할 수도, 혁명에만 충실할 수도 없다고 보여 주는 예시에 불과하다고 봉기에 대해서는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핀란드에 머물면서, 봉기 호기를 놓치지 않고자, 107, 페테르부르크 시협의회에다 편지를 썼고, 중앙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모스크바 소비에트, 볼셰비키 대표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오로지 봉기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무장 봉기란 정치 투쟁에서 특수한 형태이고, 주의 깊게 고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무장 봉기야말로, 전쟁과도 꼭 마찬가지로는 기술이라고 진리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냈다.

 

1. 봉기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도 안 된다.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야만 한다고 굳게 알아야만 한다.

 

2.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장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세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더 잘 준비되고, 조직된 적은 반란군을 괴멸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봉기를 시작한다면, 위대한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무조건 공세로 넘어간다.

방어는 무장 봉기에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4. 적에게 허를 찌르도록 노력한다. 또한 군대를 분산하는 순간을 잘 포착한다.

 

5. 어떠한 경우에도 도덕적 우위를 견지하면서 아주 작더라도, 도시 단위로는 매시간, 매일 성과를 올려야만 한다.

 

마르크스로는 혁명 전술에서 대가들 가운데 당통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는 대담함을 빌려 무장 봉기에 대한 모든 혁명 교훈들을 총괄하고자 했다고 적었다. 191710, 러시아에서도 적용해보자면, 안과 밖 모두에서, 노동 거주 지역과 같은, 핀란드·레벨·크론슈타트에서도 할 수 있는 한 기습할 수 있고, 빠르게 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고, 모든 함대는 공격을 단행한다. 15천 명에서 2만 명 규모로는 사관생도와 같은 부르주아 수비대, 방데 군대보다 매우 더 많은 세력들을 모으고 결집해야만 했다.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전화, 전신, 철도역, 교량을 먼저 점령해서 지켜낼 수 있도록, 3대 주요한 병력으로는 함대, 노동계급, 일부 육군을 결합하도록 한다.

 

결단력 높은 분자들로는 타격대, 청년 노동계급들, 그리고 훌륭한 수병들도, 매우 중요한 지점들을 점거하고, 도처에서, 모든 중요한 작전에도 참가할 수 있도록 하고자, 소규모 부대로 분산해서 편성해야만 한다. 작전들 예시로는, 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해서 고립하고자 한다. 함대·노동계급·육군으로는 합동 공격을 감행해서, 페테르부르크를 장악하는 등이다. 기술과 더불어 세 배 대담함을 요구하는 임무이기 때문이다.

 

전멸하더라도, 적을 보내 주지 않는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 중심부 사관학교, 전신, 전화 등등을 공격해서, 포위하고자, 소총, 폭탄을 가진 최정예 노동 부대를 구성해야만 한다. 지도가들도, 당통, 마르크스에 대한 유훈을 성공해서 적용할 수 있으리라 바란다고 했다. 2-3일 간 투쟁으로도 러시아 혁명, 세계 혁명 성공은 달려 있다고 말했다. 21이자 8, 22일이자 9, 중앙 위원회를 열어, 무장 봉기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하도록 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봉기를 보란 듯이 반대했고, 중앙 위원회 긴급 전체 회의 소집을 요구했따. 카메네프는 중앙 위원회를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레닌은 당에서 그들에게 매우 엄중한 징계를 내리도록 요구했다기회주의 경향을 분쇄해갔고, 봉기 준비도 강도 높았다. 1025일이자 12,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 위원회로는 군사 혁명 위원회 설립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29일이자 16일에는 중앙 위원회, 당 조직들 대표들은 함께 모여 확대 회의를 열었다. 바로 중앙 위원회 회의로부터,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제르진스키 등을 수반으로 한 봉기 실천 지도부로는 군사혁명본부를 구성했다. 30일이자 17일로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뿐만 아니라, 소이베트 전체로는 군사혁명위원회 조직안을 승인했다. 닷새 뒤로는 연대 위원들 회합에서,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를 페트로그라드 군 부대 지도 기관으로 인정하고,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서명 인증도 없는 사령부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115일이자 1023일로는 이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군부대에서 인민 위원이던, 코미사르들을 임명했다. 다음 날로는 116일이자, 1024일로는 임시 정부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들을 기소했고, 군부대로 임명한 인민 위원들을 체포하라는 결정을 내리고는 사관생도들을 겨울 궁전으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뒤늦은 일이었다. 군부대들도 볼셰비키 쪽이었고, 노동계급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넘기기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로는 당 중앙위원회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일했다.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몰로토프, 제르진스키, 부브노프 등 대부분 중앙 위원들도 군사혁명위원회로 들어왔다. 봉기를 개시했다.

 

116일이자, 1024일로는 레닌은 비보르프스키 변두리에 있는 당원 포파노바 집, 볼쇼이 삼프소니예프스키 거리, 세르도볼스카야 거리로부터 만나는 모퉁이 92/1번지 42호에서 은식하고 있었다. 봉기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활동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로 괴로워했다. 마르가리타로부터 봉기를 지연하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쪽지를 전달했다고도 한다. 레닌은 핀란드인 동지였던 아이노에게 스탈린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으나, 군사혁명위원회 소속이었어서, 멀어서 올 수는 없었다. 레닌은 곧장 스몰니로 몸소 바로 가기로 결정하고는 서둘렀다. 비보르프스키는 지구는 밤에 무장을 갖추었고, 봉기를 준비했다. 스몰니로는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고, 온통 열기로 가득했다. 붉은 근위대, 공장 대표들, 병사들 지시를 받고자 방방곡곡으로 모여들었다.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전화벨 울리는 소리, 한 묶은 전신들을 분류하고, 군사혁명위원회 회의도 열리고 있었다. 스몰니 앞 광장에서는 장갑차들 엔진 소리도 요란했고, 3인치 야포를 대기하도록 했고, 바리케이드를 세울 장작도 쌓여 있었다. 입구로는 기관총, 무기들도 세워졌고, 문마다 보초를 섰다.

 

1025일이자, 117. 오전 10시로는 이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로는 이름으로, <러시아 시민에게>라는 호소문을 언론에다 배포했다. 다음 내용은 이와 같다.

 

임시 정부는 점복됐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경비대 지도부이자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기관이던 군사혁명위원회로 넘겨졌다. 인민은 곧장 민주주의 평화, 지주 토지 소유 철폐, 노동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 수립이라는 대의를 쟁취하고자 싸워 왔다. 대의를 이행했다. 오후 230.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회의를 열었다. ·우체국·전신·국립은행 등도 접수했다는 보고를 맞이했다.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도 진행했다. 병사들도 놀라운 영웅심을 발휘했다. 무혈 변혁으로 이뤄졌다. 소비에트는 회의에 참석하러 온 레닌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레닌은 연설했다. 거머쥔 승리에 대한 대단한 말은 전혀 하지도 않았다. 레닌 특징이었다.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과제들, 반드시 끝까지 이행해야만 하는 과제들에 대해서만 말했다.

 

소비에트 정부로는 부르주아지 참가 없이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법령을 공포한다.

 

2. 생산에 대한 노동 계급들로부터 감독하도록 도입한다.

 

3. 사회주의 투쟁을 전개한다.

 

4. 낡은 국가 기구는 분쇄되어 파기하고, 새로운 권력, 소비에트 조직들로 권력을 수립한다.

 

대중 조직 힘으로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했다. 수도에서 승리를 거둬야만 했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자 돕고 나섰고, 이미 혁명 동요에 대한 징후마저 나타났다. 특히 연설은 페트로그라드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구성원들에게도 매우 가까웠다. 대중은일어설 수 있었고, 부르주아 권력은 무너졌다. 지주에게 땅을 몰수하고, 공장주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고, 더욱 중요하게로는 평화를 쟁취할 수 있었다. 세계 혁명도 도왔다. 레닌은 옳았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소비에트 제2차 대회로는 저녁에 열렸다. 대회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언했고, 승리를 공식적으로 승인해야만 했다. 소이베트 대표들도 모여들었고, 선동을 진행했다. 노동 권력도 농민과 함께 해야만 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농민 의견을 대변하는 당이었다. 부농, 곧 쿨라크 계급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우파를 이념 대변인으로 삼고 있었다. 소농민 이념 대변인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좌파로는 전형적인 소부르주아지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부르주아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동요하고만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수반으로는 나탄손, 스피리도노바, 캄코프 등이었다. 레닌은 첫 번째 망명 시기 때, 나탄손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페테르부르크,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중 볼셰비키 성향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볼셰비키를 우호했다. 볼셰비키로부터 모든 지주 땅을 몰수해서, 농민에게 양도하고자 열심히 투쟁하기를 보았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등한 토지 이용을 도입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업 전체를 사회주의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닌은 지금 매우 중요한 건 지주 토지 몰수이고, 개혁은 어떻게 이뤄지는 경험으로도 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레닌도 토지 법령에 대한 작성을 두고 고심하기도 했다. 포파노바 회고록 가운데로는 레닌은 <전러시아농민대표소비에트 소식>, 지난 호를 모두 구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연구용 교재였다. 레닌은 밤낮으로 일에 전념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샅샅이 연구했다. 마르가리타로는 직업은 농업학이기도 해서, 활동하면서 같은 문제들을 다룰 수 있었다.

 

1025일 밤 1045,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했다. 밤 대회로는 간부회를 구성해서 선출하고, 권한을 정했다. 670명 대표들 가운데로는 볼셰비키로는 겨우 300명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으로는 다음으로 많은 193명이었고, 멘셰비키로는 68명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 분트파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대회장을 나가 버리곤 했다. 멘셰비키 국제주의 가운데 일부도 나가버렸다.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 193명 가운데 169명을 점하고 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남아 있었다.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사람으로는 모두 50명이었다. 레닌은 25일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2차 소비에트 대회를 열린 시간에, 겨울 궁전에 대한 공격을 진행했다. 케렌스키는 병사들, 노동계급들로부터 권력을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출병을 조직하고자, 모스크바로 갔다. 키슈킨을 비롯한 나머지 각료들은 사관생도들, 여성 타격대 비호를 받고는 겨울 궁전에 숨어 있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분트파로는 겨울 궁전을 포위하기를 두고 믿지 않을만큼 신경쇠약증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에을리히는 시 평의회 일부 의원들은 궁전에 대한 사격을 중지하지 않는 까닭에, 비무장 상태로부터 겨울 궁전 광장으로 총받이로 갔다.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 위원회, 멘셰비키 분파, 사회주의혁명가당 분파도 합류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퇴장한 뒤로 정회를 선포했다. 회의를 재개한 310분에, 겨울 궁전은 함락했고, 각료들은 체포됐고, 장교와 사관생도들도 무장 해제됐고, 케렌스키로는 페트로그라드로 보낸 제3자 전거대대로부터도 혁명 인민 쪽으로 넘어왔다는 소식마저 전달 받았다. 레닌은 1026이자, 118일 저녁, 대회에서 토지에 대한 법령을 도입해야만 하는 근거를 설명하는 연설을 했다. 1026일이자, 118, 저녁 회의에서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도 승인했다. 같은 지점에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과 합의를 이뤘으나, 정부 구성 문제로는 한층 더 힘들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농민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25,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는 도중에 대회장을 나가고는 볼셰비키 모험주의, 권력 장악 등등을 비난했기 때문에 매우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지도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캄코프는 민주적인 연립 정부를 지지한다고 천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대회장을 도중에 나간 당들과, 볼셰비키 간 중재 역할을 하기를 원했다. 볼셰비키로는 협상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레닌은 같은 대화로 나올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으리라고,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1026일 대회를 열리기 두 시간쯤 전에는, 같은 문제를 두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대표들과 회동했다. 저녁 9시에 회의를 열었고, 토지에 대한 법령 근거를 설명하고자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부터 전선에도 도입했던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평화에 대한 법령, 토지에 대한 법령, 노동 감독에 대한 법령 등을 채택했고, 최고 인민위원회에서도 볼셰비키 구성원들을 확정했다.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으로는 레닌을 지명했다. 내무로는 리코프, 농업에는 밀류친, 노동에는 슐라프니코프, 육해군 위원회로는 각각 안토노프, 크릴렌코, 디벤코, 통상 및 공업에는 노긴, 인민 교육에는 루나차르스키, 재무로는 스체파노프, 외무로는 트로츠키, 법무로는 로모프, 식품으로는 테오도로비치, 체신으로는 글레보프, 민족 문제로는 스탈린 등을 지명했다. 교통 통신 최고인민위원 자리로는 공석으로 남았다. 관료주의와도 매우 멀었고, <노동과 농민 정부를 수립하기를>라는 제2차 소비에트 규정에도 잘 드러났다. 매주 약 40개 공장에서 온 대표들과 회합을 갖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여러 조치들을 어떻게 수행할지를 두고 의논했다. 그리고 결정할 수 있으면,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공장 경연진을 압박해서 자금을 확보했고, 학교 교육, 보육원 현황, 도서관 사업 형태를 토론했다. 핵심은 노동계급 창발이었다. 상당한 역량도 인민 교육국으로 결합했다. 관료주의를 매우 비판했다.

 

그러나 먼저 해야 할 일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무력으로 쓰러뜨리려는 적 시도, 내부로부터 붕괴하도록 하려는 시도로부터 권력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대오를 강화하도록 했다. 119-15일에 걸쳐 소비에트 권력 자체로부터 실현을 위한 투쟁을 며칠간 벌였다. 레닌은 파리 코뮌을 매우 주의 깊게 연구했다. 적에게 보여준 유약함에서 파멸을 찾아냈다. 10월 혁명 초기로도, 불필요한 유악함도 적지는 않았다. 케렌스키를 도망치도록 해주거나, 다른 여러 각료들을 도망가도록 해주거나, 겨울 궁전을 지키던 사관생도들을 선서만 받고 풀어주거나, 진격에나선 케렌스키 부대를 지휘한 크라스노프 장군을 가택 연금 상태로 그저 두기 등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에서도 지친 인민으로는 무열 혁명을 원했다. 적들은 전투로 내몰았다. 사회 체제 전체를 사회주의로 재건하는 문제를 무엇보다도 더 많이 고심했던 레닌으로는 혁명을 수호하는 일에 맨 먼저 매진해야만 했다. 119, 케렌스키는 가치나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포드보이스키 동지로는, 1927116, <붉은 신문>에서 <변혁 나날들 속 레닌>이라는 글에서 페트로그라드 방어 기간 동안 레닌으로부터 수행한 어마무시한 활동들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레닌은 지역 사령부에도 와서 필요한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지도를 더욱 꼼꼼하게 들여다봤고, 여러 공장이나, 소비에트 방어에도 집중하고자, 탁월한 인민 지도가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레닌은 대중을 행동하도록 만들 줄 알았고, 또 늘 앞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할 줄도 알았다.

 

1111일이자 1029, 케렌스키는 전력으로 진격하자, 선서를 하고는 겨울 궁전에서 풀려난 사관생도들도 케렌스키를 돕기로 결정하고는 반란을 일으켰다. 붉은 근위대 병사들은 사관생도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연대 대표 회의에서 연설했다. 케렌스키로는 코르닐로프로부터 실패한 8월 군사 쿠데타와 같은 가련한 모험이라고 말했다. 1114, 케렌스키 반란은 진압했고, 가치나을 탈환했다. 러시아에서는 내전으로 격화했다. 118일이자, 1026, 칼레진 장군은 돈스카야 지역에서 계엄 상태를 선포했고,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항할 카자크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119, 카자크 대장이던 두포프로는 오렌부르크를 함락하도록 했다. 모스크바에서 사태는 질질 끌려갔다. 백위군은 크레믈린을 장악했다. 전투로는 페테르부르크에서보다 더 격렬한 상태였다.

 

118일이자, 1026,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퇴장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와 다른 분파들로는 조국혁명구원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권력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주위로 결집하고자 했다. 시 중앙평의회 대표 9, 예비의회 간부회 전원, 전러시아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및 농민대표소비에트에서 집행위원회 각각 3, 사회주의혁명가당, 멘셰비키 분파, 멘셰비키통합파 대표들, 전러시아수병중앙집행위원회 대표들, 플레하노프 모임인 단결 대표 2명도 가담했다. 권력을 움켜쥔 모험주의들로부터 조국, 혁명을 구해 내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일을 이룰 수는 없었다. 평화를 위해. 토지를 위해. 라는 구호로는 대중 사이에서도 이미 너무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대중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볼셰비키를 지지했다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사회완전위원회도 페테로그라드 조국혁명구원위원로 가담했다. 기구로는 모스크바 시 평의회 발의로 창설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루드네프도 위원장이었다. 모스크바 사회안전위원회로는 공개적으로 반혁명을 지원했다.

 

모스크바에도 지원권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철도집행위원회는 취했던 입장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내전에서는 중립적인 입장만 취했었다. 어느 쪽에서도 군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는 말았다. 중립은 볼셰비키를 겨냥했고, 모스크바로 지원병을 보내기를 방해했다. 철도집행위원회 방해 공작을 깬 건, 군대 수송을 지지한 철도 노동계급들이었다. 1116일이자 3일로는 군사혁명위원회로는 페트로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모스크바에서는 백위군 저항으로는 곧 분쇄되고는 말았다.

 

페트로그라드 사관생도들 반란을 진압하고, 케렌스키는 진격해오고, 모스크바에서 투쟁도 벌어졌을 때, 중앙 위원들로는 모두 동요했었다. 상황이 절망적이라고만 보고, 양보해야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동요로는 극명하게 드러난 철도집행위원회와 협상할 때도 있었다. 119, 철도집행위원회로는 볼세비키로부터 인민사회주의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고자, 중재가로 나서겠다고 제안했다. 중앙위원회와도 협상하면서부터 철도집행위원회로는 좌파만 참석했다. 중앙위원회로는 카메네프, 스콜니코프에게 협상 전권을 위임한 상태였고,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처음에는 협상에도 개입하지는 않았으나, 케렌스키 진격, 모스크바에서 상황으로는 볼셰비키로는 궁지에 몰렸다고 여겨지고는 중앙위원회 안에서도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알아차리자, 극도로 뻔뻔스러워졌다. 철도집행위원회 회동에도 참석해서 소비에트 권력을 거부하고, 10월 변혁 주동가들도, 정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체르노프, 압크센치예프를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기를 요구했다. 카메네프를 수반으로 한 볼셰비키 대표단으로는 회합에서 퇴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부터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부터 제기한 안건도 토의했다. 1114일이자 1, 중앙 위원회를 소집했다. 레닌은 칼레진, 코르닐로프 같은 쪽에 선 철도집행위원회 협상을 즉각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당 중앙위원회로는 상응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117일이자 4, 노긴, 리코프, 밀류친, 테오도로비치 등은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한 사회주의 정보를 조직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는 최고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났다. 대다수 다른 최고인민위원들도 그들 쪽으로 가담했다. 카메네프, 리코프, 지노비예프, 노긴, 밀류친 등은 당 중앙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들 모두 10월 혁명 승리 직후로 모든 당들로 참여하는 연립 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중앙 위원회로는 그들에게 당 규율로부터 복종하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화를 내고는 전력을 다해 그들을 압박했다. 지노비예프로는 중앙 위원회 복귀를 선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레닌으로는 사회주의 체제 건설,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한 결정들을 실행하는 문제로 완전하게 몰입했다.

 

따라서 1117일이자 4,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설했고, 전선에서 온 대표들, 페트로그라드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부터 공동으로 연 회의에서도 연설했다. 케렌스키 정부에 대해 일축하고는 사회주의 정신이란, 국가 관료주의 무의식 작동과는 완전하게 다르고, 살아 있는 창조 사회주의로는 인민 대중 스스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 공작을 선동했다. 19171121, 경질된 카메네프를 대신해서, 스베르들로프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레닌은 추천했다. 뛰어난 조직가였다.

 

스탈린도 부각됐다. 최고인민위원회들도 임명했던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스탈린에게 민족 문제를 맡기기로 제안했다. 레닌은 오랜 세월 민족 해방, 민족 자결권을 위해 투쟁했다. 레닌은 열강 폐쇄주의를 지독하게 혐오했고, 소비에트 공화국으로는 약소 민족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정책과 완전하게 대비하는, 민족들에 대한 완전한 해방 정책, 동지로 배려하는 정책을 쓰기를 참으로 원했다. 그래서 민족 문제에 대한 스탈린 견해도 잘 알고 있었다. 크라코프에서 같은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스탈린으로는 과거 몇 년 동안이나 생각하고 검토해왔고, 스탈린에게는 명예로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주어져야만 했다. 과제는 복잡하고, 어려웠던 건 날카로운 게급투쟁이라는 조건 속에서 그러한 권리를 실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민족 자결권 실현이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한 투쟁, 소비에트 권력 실현을 위한 투쟁과도 결합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트 국제 투쟁 문제, 내전 문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관했다. 민족 전선 활동을 책임질 사람이라는 폭 넓은 시야, 투철한 신념, 실천으로 일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레닌은 스탈린을 그러한 업무로 추천했었다. 따라서 새롭게 활동하는 법, 자신에게도 모든 습관을 바꾸는 법, 혁명 문제를 반대했던 사람을 책임감 있고, 능력 있고 손 굵은 사회주의 체제 건설가로 바꾸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문제도 당 활동가들로는 큰 과제로 놓였다.

브레스트 강화 조약.

 

레닌은 1921115, <지금, 그리고 사회주의 완전하게 뒤로 금 중요성에 대하여>라는 기고문에서, 19171025일부터 몇 주일 동안 빠르게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했고, 제국주의 전쟁에서 벗어났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브레스트강화조약이라는 퇴보를 겪었지만, 모든 일 중심에도 서서, 레닌그라드, 스몰니에서 거주하던 기간, 3월 중순,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였다. 레닌은 모든 일 중심에도 서서 소비에트를 잘 조직하고자 했다. 물론 재정·행정·회계·계획 부분에서 상황은 엉망이었다. 일은 잘 처리했다. 식량 공급, 재정, 은행에서 부르주아지는 부문에서 방어하고자, 주요한 역량을 쏟아 붓고는 있었다. 겨울 궁전을 장악했고, 일부 사람들로는 사관생도들을 무찔렀고, 케렌스키 진격을 격퇴했으니 다 됐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구를 어떻게 수립하고, 최고인민위원회 활동을 잘 정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드물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대의를 위해 싸우기를 배웠다. 고르부노프는 회고록에서도 10월 혁명 기간에 최고인민위원회회의 노동 기구는 어떻게 만들었고, 재정 부문에서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를 풀어서 이야기해줬다. 정부 법령들, 자금을 풀라는 요구에도, 국립 은행으로는 태업했다. 재무 인민 위원으로는 국립은행장을 체포하는 등 온갖 조치들을 취했음에도 혁명에 필요한 자금을 정부에다 풀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국립은행장을 스몰니로 이송해서, 몇 시간 동안 구금했다. 레닌은 천만 루블 자금을 받아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급 직원들, 사환들과 붉은 호위대는 위협하자, 출납계원은 하는 수 없이 요구 받은 금액을 내놓았다. 은행 무장 경비는 총을 장전한 상태에서 돈을 수령했다. 은행 국유화는 스탈린 지도로부터 작전을 수행했고, 본치 브루예비치와도 상의해서 모든 일을 준비하고, 명령을 작성하고는 수송대 28개 사격대를 조직하는 등 일을 했다.

28곳 은행을 점거했고, 28명 은행장들을 체포해야만 했다. 최고인민위원들도 은행으로 파견했고, 국립 은행으로도 모든 자금, 통화를 집중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선에서 은행 업무를 했다토지 문제도 진전해갔고, 1118, 레닌은 <농민 질문에 대한 답변>, <주민들에게>라는 호소문도 작성했다. <답변>에서는 지주 소유 철폐에 대한 법령을 확인도 했다. 각 마을 위원회로부터 지주 소유 철폐에 대한 법령을 확인했다. 각 마을 위원회로는 스스로 지주 토지를 접수하라고 촉구했다. 1123, 농민대표소비에트 비상대회를 개최했다. 레닌은 대회에서 두 번 연설했고, 330명 대표들 가운데 195명은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고, 결정권을 가진 모임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65명과도 투쟁을 벌였다. 레닌은 나흘 휴가 기간 가운데 썼었던 글을 미와으로 생각해서 출간하지는 않았다. <옛 시대 붕괴에 겁 먹은 사람들과 새 시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경쟁을 어떻게 조직할까>, <소비 코뮌에 대한 법령 초안> 등은 당시로는 출간하지 않았다가, 사망한 지 다섯 해 지나서야 출판했다. 레닌을 강하게 사로잡은 문제들로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경제 생화릉ㄹ 매우 훌륭하게 조직하고, 어떻게 노동계급들에게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겪고 있던 힘든 상황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할까, 어떻게 소비 코뮌을 조직하고, 아이들에게 우유를 공급하도록 하는 문제를 조직할까, 어떻게 노동계급들을 더 나은 집으로 이주하도록 할까, 그리고 일상 회계, 관리를 조직할까, 어떻게 모든 문제들을 노동 대중들도 참가해서, 같은 방향으로 자율로 발전하도록 하고, 독창과 창발을 일깨울 수 있도록 조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등등이었다. 모든 일에 필요한 능력으로는 탁월한 조직가들로부터 노동계급들 가운데 발탁하고자 했고, 경쟁에서 조직 역할에 대해서도 썼다1918년 초 제헌 의회 문제도 이미 너무나 분명해진 상태였다. 제헌 의회로는 그저 계급 없는 사회로는 생겨나지 않기를 당으로는 10월 혁명 있기 오래 전부터 이미 이해했었다.


1917, 볼셰비키로는 제헌 의회 따위를 기다리지 않고, 10월에 권력을 잡았다. 임시 정부로는 제헌 의회를 둘러싸고, 일련 환상을 만들어 놨다. 그래서 환상을 깨고자, 제헌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로부터 혁명으로 복무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압도적인 다수 농민 표로는 사회주의 혁명가당이었고 우파, 좌파로 나뉘었다. 2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난 뒤로 사회주의혁명가당 중앙 위원회로는 대회에도 참석했던 좌파를 당에서 제명했다. 1123일이자 128, 열린 농민 대표 소비에트로는 비상대회에서 레닌을 연설했고, 비상 대회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했다. 대회로 참석한 전원으로는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었던 스몰니로 가서 회의로 합류했다. 농민 대표 소비에트 비상대회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대표들로부터 정부 참가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레닌으로는 <진실>에다 <노동, 농민과 착취 당하는 농민 동맹>이라는 기고문을 썼다. 농민 대표들 비상 대회로는, 10월 변혁, 전선에서 보내온 병사들 편지 등에 영향을 받아, 농촌 극빈층, 중간층으로부터 더욱 볼셰비키를 지지하게 됐다


소비에트 권력으로 가담했다. 농민들은 대체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을 전체에게 지지표를 던지고 있었지만, 주로 좌파 쪽으로 서 있었다. 레닌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이전에 선출한 대표들을 소환할 권리를 도입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제시했었다. 사실상 소환권이란 대표로부터 말, 행동으로부터 감독할 수 있는 권리라고 말했다. 혁명 전통에도 힘 입어 미국, 스위스 몇몇 주로는 그러한 권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소환권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승인했었고, 법령은 1917126일에 공표했따. 임시정부로는 이미 지난 8월 입헌민주당,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 구성한 제헌의회선거위원회를 승인한 바 있었다. 위원회로는 선거 준비 작업에 온갖 방법으로 제동을 걸었고, 최고인민위원회의에다 선거 진행 경과를 보고하기를 거부했다. 소환권에 대한 법령을 승인하고자, 같은 날 126, 선거위원회 활동을 지도하고자, 우리츠키 동지로부터 인민 위원으로 임명했다. 위원회로는 지도 아래 일하기를 거부해서 체포됐으나, 1210, 레닌 명령으로 석방됐다. 제헌 의회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투쟁도 벌어졌다. 레닌은 제헌 의회 파견단을 대상으로 중앙 위원회로부터 보고하고, 제헌 의회 문제에 대한 테제를 작성하기로 결정내렸다. 테제로는 제헌 의회에게 소비에트 권력을 승인하도록 하고, 평화, 토지, 노동 관리, 반혁명에 맞선 투쟁 등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취하는 혁명 노선을 승인하도록 요구하는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했따. 제헌 의회로는 1918118일이자, 5일에 개원하기로 했다. 레닌 지도 아래로부터, 당에서 치밀하게 제헌 의회를 준비하도록 소비에트 권력 강화 단계에서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형식적이기만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도 맞선 투쟁을 벌여나갔고, 노동 대중으로부터, 사회주의 체제 건설로도 모든 분야에서 지대한 혁명 활동을 폭 넓게 전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도 벌여나갔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볼셰비키와 투쟁해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그들 가운데 극우파 군사 조직을 조직해서, 11, 레닌 암살까지 도모했으나, 실패하기도 했었다. 조직은 제헌 의회로부터 개원하는 118일이자 5,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자, 활발하게 준비했었다. 118일이자, 5일로는 시위로는 대단히 국지적이 성격이었지만, 시내로는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로는 반격을 준비했다. 제헌 의회로는 타브리다 궁전에서 열리고 했었다. 군 본부를 조직해서, 스베르들로프, 포드보이스키, 프로시얀, 우리츠키, 본치 브루예비치 등도 참가했다. 시내, 스몰니 지구로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서, 노동 경비를 책임지고는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전날, <진실>에다 게재했었던, <착취당하는 노동 인민 권리 선언문>을 읽었다. 레닌은 작성했고 스탈린, 부하린으로부터 함께 교열했다<선언>에는,

 

1. 러시아는 노동병사농민대표소비에트공화국이다. 따라서 중앙 지방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속한다.

 

2.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들, 자유로운 연합에 기초해서, 소비에트 민족공화국 연방으로 설립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언>으로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한 법령들을 승인하고 있었다최고인민위원회로부터 채택한 결정들로는 제헌 의회 비준을 받도록 했다. 제헌 의회 우파로는 의회 활동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제헌 의회로부터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대다수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족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추천했었고,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스피리도노바를 추천했었다. 체르노프는 224, 스피리도노바로는 151표를 얻었었다. 볼셰비키로는 제헌 의회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할지, 아닐지에 대한 근본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스피리도노바에게 투표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도 볼셰비키와 보조를 맞췄다.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선출한 뒤로는 논쟁을 벌여나갔다. 체르노프는 토지 문제를 발언했지만, 부하린으로는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언을 맨 먼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제헌 의회로는 누구와 함께할지에 대해, 칼레진, 사관생도들, 공장주들, 상인들, 할인 은행 은행장, 아니면 회색 군복들, 노동계급들, 병사, 수병들인가, 누구인지를 먼저 결정해야만 했다. 멘셰비키를 대표한 체레첼리로는 볼셰비키를 온갖 공격했고, 내전으로 위협해서는 모든 권력을 제헌 의회로 넘기기를 제안했다.

 

많은 세월도 지났다. 독일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사회민주주의로는 똑같은 방법으로, 달콤한 사탕발림, 내전 위협, 온갖 약속들로부터 노동 계급 대의를 배반하기를 목격했다. 저 야만적인 반동주의들로부터 죽어 가는 지주 및 자본가들로부터 흉악한 지지가들, 공산주의들을 끔찍이도 두려워하고는 말로는 평화를 설파하지만, 실제로는 지주, 자본가들은 노동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착취하기를 도와주고는 새로운, 예전보다 더욱 한층 잔혹한 세계 전쟁 나락으로 몰아넣는 파시스트들에게 권력을 잡도록 도와주기를 목격했다. 레닌은 연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볼셰비키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멘셰비키에 협조하면 어디에 이르는지를 분명하게 잘 알고 있었다.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언문을 심의하자는 데로는 146명 대표들만 찬성했었고, 247명은 반대했다. 볼셰삐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휴회를 요구했다. 제헌의회 볼셰비키 분파로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해 의논하고자 회합했다. 볼셰비키로는 자리에서 회의장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볼셰비키 분파로는 또한 의회를 해산하도록 하지는 않았고, 회의를 끝날 때까지 더 기다리기도 했따. 회의는 16, 440분까지 했고, 끝나서야 대표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는 제헌 의회 해산을 결정했다. 의회는 열릴 기회조차 없었고, 열리지도 않았다. 제헌 의회 해산을 대중은 묵묵하게 받아들였다. 의회는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산됐다고 해서, 동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작업에 방해 되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제거하고, 모든 화해주의 분위기에다 쐐기마저 박았다.

   

전진을 방해하던 제헌 의회라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제거했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는나라를 파멸시키고 있었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수렁을 헤쳐 나오는 일이었다. 118, 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평화에 대한 법령을 채택했다. 소비에트 권력으로는 처음 며칠 동안이나, 진격한 케렌스키 군대 및 반란을 일으킨 사관생도들과 전투를 벌이느라, 또 당 중앙 위원회 안에서 화해주의 움직임과 투쟁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1120, 최고인민위원회로부터 최고 사령관, 두호닌 장군에게 4개국,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불가리아와 전투를 중단했고, 평화 협상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122일 직통 전화로 통화한 결과, 두호닌 장군은 최고인민위원회 명령을 거부했다. 경질됐고, 크릴렌코 동지는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렌니은 모든 연대, 사단, 군단, 군대 위원회 및 기타 위원회들, 혁명군 모든 병사들, 혁명 함대 모든 수병들에게도 무선 방송으로부터 병사, 수병들로부터 적극 사태에 개입하라고 촉구했었다. 장군들이 아니라 병사 대중으로는 레닌에게 손을 들어줬다. 레닌은 반혁명 장군들로부터 위대한 평화 대의를 망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병사 대중들에게 호소했다.

 

1121, 소비에트 정부로는 러시아 연합을 맺은 나라 대표들에게 평화 법령을 검토하기를 제안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1123,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연설했다. 평화를 위한 투쟁을 굳센 투쟁이라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과도 비밀 조약을 신문에다 발표했다. 정부는 얼마나 뻔뻔스럽게도, 대중에게 거짓말을 해댔고, 대중을 기만했는지를 적나라게 알 수 있었다.

 

1123, 소비에트 정부로는 전쟁에 대한 이해 관계를 갖고 있지도 않은 중립국들에게, 소비에트 정부로는 평화 협상에 돌입할 준비는 됐음을 공식 경로로부터 적국 정부에게도 알려주기를 제안했었다.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 평화는 위로부터만 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래로부터 평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1127, 독일 최고사령관으로부터 평화 협상에 동의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독일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식량 부족도 심각했었다. 인민은 전쟁에서도 지쳤다. 독일로는 러시아화 평화 체결로부터 프랑스와 싸움에 힘을 보태줄 수 있고, 프랑스에 승리하고 나면 뒤로는 러시아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독일 사령관 답신이 오자,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즉시 연합국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에게 121, 상대방과 평화 협상을 시작할 용의를 밝혔다. 연합국들은 답을 주는 대신 소비에트 정부를 건너뛰고, 해임된 두호닌 장군에게 단독 강화에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121, 이오페를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 전선으로 떠났다. 대표단으로는 카라한, 카메네프, 소콜니코프, 비첸코, 므스치슬라프스키로 들어갔고, 노동, 농민, 수병, 병사 대표도 각각 한 명씩 들어갔다. 최고인민위원회로는 독일 노동계급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도 배포했다.

 

123, 휴전 협상을 개시했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협상 목적으로, 민족 자결권을 보장하고, 합방, 배상 없이 포괄적인 평화를 달성하고자, 다른 모든 교전 당사국들에게 현재 협상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보내자는 내용으로 선언문을 발표했다.

 

125, 일주일 동안 군사 행동을 중단한다는 협정을 조인했다.

 

127, 외무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다시 한 번 연합국 대표들에게 평화 협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달라고 했다. 답변은 오지도 않았다.

 

1211, 보크로프스키, 파블로비치는 보강된 대표단으로 다시 브레스트로 떠났다.

 

1213, 평화 협상을 재개했고, 114일까지 휴전을 연장했다.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1225, 독일로는 강화 조약에다 모든 교전국을 가입한다면, 합방, 배상 없는 평화에 동의한다고, 네 동맹국 일므으로 천명했다. 그들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언은 네 나라는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연합국에다 떠넘기기를 원한다는 뜻을 담아냈다.

 

12월 말까지 협상은 선동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협상 성과라면 일시적인 휴전을 달성하고, 독일 군대 안에서 평화를 지지하는 선동 활동은 폭 넓게 전개했다.

 

1918년 초부터 협상 성격은 변했었다. 1월 초 군국주의 합방 정책을 지지하던 류덴도르프, 힌덴부르크로는 빌헬름 2세에게 최후 통첩을 보내고는,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단호한 합방 정책을 시행했고, 협상 지도권을 군 사령부에다 넘기라는 요구를 실현하지 않을 경우 사임하겠다고 협박했다. 평화 협상 지도권은 호프만 장군에게 넘어 갔다.

 

17, 이번에는 트로츠키로부터 이끄는 협상단은 브레스트로 다시 떠났다. 19, 평화 협상을 재개했다. 독일 대표단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120일 무렵, 독일 태도는 명백해졌다계속 전쟁을 할지, 합방에 대한 강화를 할지 택하라고 했었다.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모든 땅을 그대로 가지고는 대외적으로는 포로 유지비라는 명목으로 은폐한 약 30억 루블 배상금을 몇 년간 나누어 지불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에다 부과하고자 했었다.

 

19181월 중순, 비엔나에서 총파업을 개시했다. 기아는 극심해졌다. 평화를 갈망하는 노동계급들은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동맹국들이 보인 합방 정책에도 격분했기 때문이었다. 파업은 전국을 휩쓸었고, 노동대표소비에트 결성으로 이어졌다. 베를린에서도 파업은 개시했다. 공식 자료로는 50만 명 노동게급들도 파업을 벌였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파업은 일어났다. 파업 노동계급들로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강화를 맺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혁명은 아직도 멀었다. 모든 권력은 빌헬름 2, 힌덴부르크, 류덴도르프, 부르주아지 손에 있었다.

 

레닌은 다가오는 세계 혁명으로 크게 바랬었다. 114일에, 전선으로 떠나는 최초 사회주의 군용 열차를 전송하면서, 인민은 깨어나고 있다고 말했었다. 아직은 미래 일이었다. 레닌 특징은 현실은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스스로를 속이지는 않았고, 성공에도 취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잘 직시할 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는 건 늘 쉬운 일도 아니었다. 레닌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철저하게 계산만하는 체스 선수와는 거리도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레닌에게는 강한 의지도 있엇다. 많은 인내를 했고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레닌은 두려움 없이 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

 

과연 우리에게도 싸울 힘은 있는가라고 물었고, 전선에서 온 병사 대표들과 늘 대담을 나누었고, 전선에서 상황, 군 상태를 철저하게 연구했었고, 동원 해제에 대한 제1차 전군 회의에도 참석하기도 했었다. 레닌은 군대 대표들에게도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1). 독일은 진격하리라고 예상할 근거는 있는가.


2). 독일이 진격할 경우로는 군대가 군수품, 일부 장비와 대포를 전선에서 후방 깊숙하게 빼낼 수 있는가.

 

3). 현재 상태로 군대는 독일 진격을 저지할 수 있는가였다.

 

회동에 참석한 대다수로는 1).에서 긍정적이었지만, 2). 3). 에서는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병사들 동원 해제 분위기, 늘어가는 탈영, 불충분한 사료 공급으로부터 말 탈진 등도 이유였다.

회동으로는 약 300명 대표들도 참석했었다. 레닌은 시점으로는 독일과 싸움을 계속할 수 없다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비관주의로 빠지지는 않았다. 조국을 방어하고자, 붉은 군대를 조직하자는 강력한 운동을 벌여나갔다.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했다. 현재로는 전투를 치를 수는 없었다. 레닌은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동지들에게도 말했다. 전선으로 나가보시오. 그리고 충고도 했다. 병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고. 우랄 분위기는 전투적이었다. 노동계급들은 전투에도 뛰어들 준비를 마쳤고, 분견대와 대포를 준비했다. 3월 초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10월 혁명 뒤로 10, 11, 12월 초기 몇 개월 동안이나 반혁명, 소비에트 권력 적들에게 맞선 전선에서도 승리를 거듭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는 브레스트 협상에서 합방과 배상 없이 강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했으나, 독일 제국주의로부터 속이기만 했다. 그래서 합방으로부터 강화를 택하든가, 아니면 전쟁으로 깨지든 미리 알면서도 전쟁을 계속하든가, 양단간 즉시 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따라서 레닌은 관점을 고수했고, 두 달 내내 내부 투쟁으로부터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위원회도 레닌을 반대했다. 좌익 공산주의 분파로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일간지, <공산주의>를 발간했다.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체결하느니, 소비에트 권력을 죽이는 게 차라리 낫다는 등 헛소리를 해댔다. 역량을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혁명 투쟁만 논했었다. 그들에게는 독일 제국주의 정부와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면, 모든 혁명 입장을 포기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대의를 배신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좌익 공산주의들로 가담했다. 정작 레닌 주변은 텅 비어버린 듯 했었다.

 

처음에는 중앙 위원회 다수로는 레닌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124일이자 11, 다수 9명은 평화 협정을 체결하지 말고, 동원을 해제하자는 트로츠키 안을 찬성했다. 반대한 사람은 7명이었다. 23일이자 121,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문제로는 5명은 찬성했고, 9명은 반대했다. 217일로는 독일 평화 협정을 즉각 제안하자는 데 5명은 찬성했고, 6명은 반대했고, 218일로는 독일 평화 협상을 재개를 제안하자는 데, 6명은 찬성하고, 7명은 반대했다.

 

역관계로는 223, 독일은 조건을 통보했고, 48시간 이내로 답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진격을 단행하고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해서는 상황은 바뀌고 나서야 달라졌다. 레닌은 혁명 문구만 늘어놓는 정책을 계속한다면, 중앙 위원회, 정부에서 사임하겠다고 결정했다. 독일 조건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7명은 찬성했고, 4명은 반대했다. 그리고 4명은 기권했다. 기권 가운데로는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그토록 중요한 순간에도,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았던 트로츠키도 포함됐다. 독일 요구 조건에 기반을 둔다고 해도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로 찬성한 주요한 다섯 명, 레닌,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소콜니코프, 스밀가에 지노비예프, 사타소바도 합세했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한 사람들은 선동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독일 진군으로 매우 빠르게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7차 당대회 열릴 무렵, 레닌 관점은 압도적인 다수를 획득했다. 38, 7차 당대회로는 찬성 30, 반대 12, 기권 4, 브레스트 리도프스크에서 조인한 강화 조약을 비준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316, 모스크바에서 소집한 제4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찬성 704, 반대 285, 기권 115로 브레스트 조약을 비준했다.

 

동지들은 낙관적일 때도, 레닌은 더욱 신중했다. 7차 당대회 요지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도박꾼같이 행동할 수 있으므로, 무르 익지 않은 국제 혁명 대신, 실제로는 조성된 상황에서 무력하게만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크룹스카야에게도, 평화 협정도 체결하지 않고, 전쟁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틀렸고, 모든 논거를 거듭해서 말해 주곤 했다. 그러나 1918119일에야 독일에서 혁명을 개시했고, 19181113,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는 브레스트 조약을 파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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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헌시 


마야코프스키

 

한 방울,

두 방울씩일지라도

그대들 정신이 세상에 스며들어

자라나게 하자.

혁명이라

불리는

노동자 공훈,

축하객들은

문을 쾅 닫아버리지 않는가

그들은

공포에 질려

눈앞이 캄캄할까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믿노니

우리는 100주년,

기념일을 맞을 거다.

 


1893-1898.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피체르(삐쩨르)로는 1893년에 왔다. 무척이나 마르크스주의를 잘 따르는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볼가에서 왔다. 크룹스카야는 동지로부터 얻은 <이른바 시장 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기록물(노트)을 헤질 정도로 거듭 읽었다. 한 쪽에는 페테르부르크, 마르크스주의 공학자였던, 게르만 크라신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으며,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적어 놓은 사상에 대해서, 다른 쪽에는 레닌은 견해, 반박을 고이 적었고, 수정한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초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에서 시장 문제, 관심사는 컸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마르크스주의 모임으로부터 이미 특정한 경향도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사회 발전에 대한 과정을 기계적, 도식적인 무언가로만 여겼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오늘날 기계론에 대한 관점을 배격할 줄 알았지만, 당시에는 심하게 동요했었다. 왜냐하면 실력이 무척이나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알지는 못했으며, <공산주의 선언>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단지 기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모순이라고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처음 레닌을 본 건, 새햇날이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오흐따), 기술자였던 크라신으로부터 볼가에서 온 새로운 사람과 회동하기로 했다. 크라신, 코롭코, 세레브로프스키, 라첸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포트레소프, 스트루베도 오기로 했으나, 안 왔다. 셰블랴긴도 있었으며, 모임에서는 주로 기초적인 문맹퇴치활동에 대한 교육 활동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민 의지당이나, 노동해방단은 전제주의와도 싸우면서부터, 자유로운 협회에 대해서라면 무엇이든 공감하다가, 와해된 뒤로는 이내 마르크스주의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레닌은 크룹스카야에게, 체포된 형에 대해서도 말해줬으며, 지인들마저 가족들에게는 등 돌렸으며, 발길마저 끊겨서 아무도 방문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레닌, 어머니는 수감된 형을 보고자, 페테르부르크로 가고자, 시즈란(씨즈란)까지 마차를 타기도 했다. 레닌은 주로 동행할 사람에 대한 심부름을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가고자 하지는 않았다. 레닌은 협회로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는 쓰라린 아픔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네바 강을 걸으면서 돌아가는 길에, 크룹스카야는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 사건(1887)에 가담했던, 인민 의지당 조직원으로는 성년도 채 되지 못한 차르, 구실아치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레닌, 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레닌은 형을 무척이나 따랐으며, 주로 자연과학에 대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이라 관심사는 비슷했다. 그러나 레닌에게 형은 혁명가인 줄,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형이라면 깊은 영향마저 끼쳤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레닌은 <인민이라는 벗>(1894, 가을)이라는 노란 수첩에다 적은 글을 모임에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모임에서는 투쟁에 대한 목적을 쉽게 제기했다. 저자 서명은 없었으나, 여러 손을 거쳤다. 봉건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젊은 사람들도, 많이도 읽었다. 사민주의 활동가, 루만체프도 <인민이라는 벗>을 두고는 훌륭하다고 평했다. 1894년부터 1895년 겨울 사이에, 레닌으로부터 가까워진 뒤로부터, 크룹스카야는 여러 지구에서 야학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바부슈킨, 브로프코프, 그리바킨, 보드로프 형제들(아르세니, 필립), 주코프, 등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특히 스몰렌스크 학교는 600명이 다닌 매우 큰, 주로 밤에 배우는 노동 학교였다. 그러나 경찰은 학교를 단속하기도 했으며, 각종 질병을 가진 환자들도 읽거나, 쓰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야간 기술반에서는 목재를 다루기도 했다. 레닌도 학교를 방문하거나, 현장으로 들어가서, 노동계급들에 대한 관습, 생활, 사소한 삶들을 세세하고도, 깊게 보고자 했다. 그러나 지식계급들은 노동계급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따라서 주로 모임에서 강의를 했다. 이를테면, 대체로는 엥겔스, <가족, 사적 소유, 국가 기원>을 러시아로 번역한 필사본이나 훑어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러시아 판으로 된 마르크스, <자본>을 직접 읽고는, 사람들에게 노동 조건에 대해서도 물어보거나, 노동계급들에 대한 삶, 사회 구조와는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방법, 현존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일러주기도 했다. 레닌은 이론과 실천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모임에서도 구성원들에게, 기존과는 다른 접근법을 적용해서, <선동에 대하여>라는 책자를 발간했으며, 파업으로 부흥하던 프랑스 노동조합을 보며, 단지 정치투쟁만이 아니라, 경제투쟁도 필요하다고 내세웠다. 경제주의에 대해서도, 레닌은 <공장, 작업장에서 노동계급들에게 징수하는 벌금법에 대한 해설>(1895),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레닌은 정치투쟁과 함께, 한 걸음씩 접근할 수 있도록 방법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많은 지식인인들은 소책자를 지루했지만, 매우 쉽게 쓰여졌다. 그리고, <파업에 대하여>, <공업, 재판소에 대하여> 등에서도 연구에 대한 흔적도 드러났다. 레닌은 셀로(차르스코예)와 같은 여러 마을에서도 혁명 활동에서 적임할 사람들을 도처에서 찾아내서 치밀하게 연락망도 구축했다. 그리고 인민 의지당 조직원들과 압수되기도 했던 불법 소책자들에 대한 인쇄를 돕거나, 대량 문건들도 돌리기도록 지시했다. <벌금에 대하여>, <차르, 굶주림> 등에 대한 글들도 있었다. 조직원이었던, 미하일로브나도 고인이 됐지만, 여전히 공산당원으로 남고자 했다. 교사들도 있었고, 이를테면 스투르베, 선생이었던 자스티바도 있었다. <불꽃>에서 조직을 끝까지 도왔으며, 훗날까지 스트로베 파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초기에는, 자술리치도 미하일로브나를 만나거나, 노동해방단을 돕기도 했으며, <경제 발전에 대한 특징을 보여주는 자료들>에 대한 저술집을 공동으로 출판했다.

 

레닌도 도왔지만,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불태워졌다. 레닌은 공장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나눠 줄 첫 전단도 작성했었고, 여러 손을 거치면서부터, <노동 대의>를 발간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합법적 인쇄소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검수원들도 당국에게 적발되어 추방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동 대의>는 정작 세간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르, 검열관으로부터 레닌마저 체포되어 수감 생활 도중에도,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을 준비했다. 수감 중 알맞은 편지에다, 필요한 자료, 통게집들을 보내 달라고 적었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책 구하기도 어렵다고 불평마저 표했다. 심지어는 우유로 글쓰기를 하거나, 들키지 않고자, 레닌은 빵을 자그마한 우유 잉크병으로 만들어서, 감시관들이 드나들면, 입에다 넣곤 했다. 레닌은 수감된 가운데에서도, 절제력은 강했으며, 틀에서도 잘 적응했다. 전단을 배포하고 선전(선동)을 했으며, 덕분에 노동 운동들도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6, 여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3만명 운집한 노동계급들로부터 주도한 파업도 일어났으며, 사민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크게 받고는, 뒤흔들어 놓았다. 1897-1898년까지는 주로 스트루베와 자주 연락했으며, 조언을 구했다.

 

여러 지역에 걸쳐, 연락원들과 주고 받으면서, 폴란드에서는 무산계급 사건(1885)도 일어났다. 징역형을 선고 받거나, 감옥과 유형지를 드나들며, 많은 고초를 겪었던 폴란드, 동지였던 펠릭스 야코블레치 곤 동지들도 알았다. 비타협적이고, 나이 든 혁명가였기 때문에 여러 호감을 두루 받았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셴스코예 지역 인근 마을에서 레닌은 수감 생활을 마치고 오두막 생활을 하면서, 사냥을 나가곤 했었다. 노동계급들도 있었지만, 얼마 못가 폴란드로 돌아가는 길에도 질병에는 쉽게 걸리거나 일찍 사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인근 지역 노동자들, 가난한 농민들과도, <공산당 선언>, <자본>을 같이 읽었다. 레닌은 시베리아 농촌 생활도 연구했으며, 소자산자들에 대한 잔혹함과 무고한 일꾼들에 대한 살인 사건들로부터도 무자비한 착취를 말해줬다. 마을 식구들도 늘어났으며, 스트루베로부터 받은 <영국 노동조합주의, 이론과 실천>을 번역해서 옮기기도 했다. 또한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박했던, <베른슈타인, 사민주의 강령, 반비판>을 포트레소프라는 동지로부터 받았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왔을 때는 문학을 읽기도 했는데,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건가> 등을 읽은 정도가 아니라, 몇 번 씩이나 또 읽었으며, 고전들도 매우 잘 알고 좋아했다. 훗날 레닌은 국가출판국에서, 고전을 저렴하게 재출간하라는 업무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특히나, 체르니셰프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서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체스도 곧잘 뒀으며, 업무에도 지장을 받을 정도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라틴어 연구도 병행한 적도 있어서, 러시아 문학잡지였던 <레프>에서도 레닌에 대한 문체와 구조를 분석하거나, 연설 방식도 연구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인쇄소가 잘 없었으며, 분트로부터 출판사도 세우고자 했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크레도><노동과 사상>, 같은 아류 이념까지도 받아들인 잡지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닌은 구체적인 조직안을 구상했을 때는, <불꽃>에서, <무엇을 할 건가>,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처음에는 마르토프, 포트레소프에게도 편지를 써서 같이 해외로 나가기로 합의를 보면서, 레닌은 유형 기간도 끝난 1900, 2, 처음으로 러시아를 떠났다. 동지였던 오스카 알렉산드로비치도 왔으며 칼 마르크스라고 쓰여진 치렛감(브로치)을 선물하기도 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도 크룹스카야는 노동계급들에 속하는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한 지역 노동자 가운데로는 옥살이를 해서 결국 감옥에서 미치고 만 사람도 있었다.

 


1901-1903.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는 해외로 나갔지만, 뮌헨에서는 동지 집에 묵으면서, 위조 여권, 가명을 사용하거나, 러시아인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냈다. 자술리치도 뮌헨에 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는 스위스 한 곳에서, <불꽃>이라는 신문 말고도, <여명>을 또 발행하고자 했다. 레닌은 노동해방전선(노동해방단)에도 각별한 마음도 있었다. 레닌은,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노동해방전선에는 <불꽃>과 매우 가까웁던 베라 이바노브나도 있었다. 따라서 자국, 러시아에서도 노동 운동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동기였기 때문에, 막상 자국, 러시아와는 단절된 막막한 반동기를 거쳤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해외에서 지낼 수밖에는 없었다. 조직원들은 경찰 조직으로부터 미행을 받거나, 모든 조직원들은 외로운 생활도 이어나갔다. 이를테면 베라 이바노브나는 타고난 살림 솜씨를 가졌음에도, 정작 아무 옷이나 입고는 담배를 피워대거나, 어지러운 방마저 잘 치우지는 않았으며, 밥 먹기도 괴팍했다고 한다. 이성이 그리워질 때는 글을 쓰거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진한 블랙커피만 마시면서 지냈다. 왜냐하면 러시아를 지독하게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1905, 베라 이바노브나는 러시아로 가서 남았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에는 반대했다. 플레하노프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현실로부터 단절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에서 세운 공로는 매우 위대했다. 여러 정당 대표들, 작가, 학생, 개별 노동자들까지도 만나 봤지만, 정작 러시아 노동 대중들은 잘 알지는 못했으며, 활동하지도 못했었다. 와중에, 레닌, 마르토프, 베라 이바노브나는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을 거듭 읽었다. 그러나 제2차 당대회 뒤로, 레닌은 플레하노프와 러시아에서 오는 통신들에 대해서 불신 찬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 크룹스카야는 화도 났으나, 멀리 러시아에서 떠났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플레하노프는 1900년대가 시작되자, 러시아를 체감할 수 없게 됐으므로, 1905년에는 러시아로 다시 가지 도 않았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악셀로트는 플레하노프, 자술리치에 비하면 훨씬 수준 높은 조직가였다. 그러나 필체는 엉망이었다. <불꽃>을 운반할 대는, 운송 수단이 없어서, 이중 바닥으로 된 여행 가방에다 넣어서 지정된 비밀 장소로 빼돌렸다. 이를테면 포스코프 지역에서, 레페신스키 동지, 집도 비밀 장소였으며,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있었다. 따라서 여행 가방에다 문건을 꺼내서 조직에다 전달했다. 라트비아 출신 롤라우와 스쿠비트로부터 생각한 방법이었다. <불꽃>, 관계인들로는, 베를린, 파리, 스위스, 벨기에 등에서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01, 10월에는 <러시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연맹>이라는 연락 조직도 만들었다. 특히 페테르부르크 노동자였던 바부슈킨은 <불꽃>에서 매우 적극적인 통신원이었다. 오레호보주예보, 블라지미르, 구시흐루스탈니, 이바노보보조네센스크, 코흐마, 키네슈마 같은 지역에서도 방대한 통신들을 보내왔으며, 레닌은 지속적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관계를 강화해 나갔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우랄, 남부 지역에서는 편지들도 왔다. 북부 사민주의 조직 연합체였던 북부동맹와도 편지를 교환했다. 뮌헨에서는 스트루베도 와 있었으나, 레닌은 거절했다. 당시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 쓸 때는 대개 방 안을 빠르게 오가며, 쓰려는 내용을 중얼거리는 버릇도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익숙했다. 글 쓸 때는 아무런 말도 걸지는 않았으며, 무엇도 묻지 않았다. 한적한 장소를 찾아서 산책을 할 때는 어떤 생각을 하거나, 무엇을 쓰는지를 크룹스카야에게 말해주곤 했었다. 레닌에게는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마르토프도 오고 다른 동지들도 찾아와 편집 회의도 이뤄졌으며, 쉴 새 없이 말했는데, 늘 여러 주제로 왔다, 갔다 하는 버릇도 있었다. 책도 ㅁ낳이 읽었어서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를 사람이나 일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한 보따리씩이나 갖고 왔다. 레닌은 마르토프를 보며 전형적인 기자라고 하면서, 재능도 출중하고, 판단력은 뛰어나며, 감성마저 풍부하지만, 가볍게 대하는 경향은 있다고 말했었다. 마르토프는 <불꽃>에서는 알맞고도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매일 5-6시간 대화로 인해 몹시 지쳤으며, 토론도 끝나면 앓아눕기도 했으며, 능률도 떨어졌다. 마르토프는 대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레닌은 뮌헨 독일 사회민주주의 동지였던 베라 이바노브나, 짐까, 루멘펠트와 함께 카페로 나가서 죽치고 앉아만 있기도 했다. 10월에는 <노동 대의>를 통합하고자 뮌헨에서 취리히로 갔다. 통합은 이뤄지지는 않았다. <노동 대의>에 속했던 아키모프, 크리쳅스키, 다른 사람들도 엉뚱한 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레닌과 잘 지내지는 못하던 플레하노프마저 통합할 수 없다고 결정했으며, 마르토프, 레닌도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일화로는, 인근 카페 옆에는 체육관도 있었다. 가짜 칼을 휘두르며 펜싱 연습 중이었는데, 플레하노프는 미래 체제에서는 저런 식으로 싸운다고 말하자, 악셀로트는 미래 체제는 투쟁이 없을 테니 지겨워 죽겠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취리히에서 돌아 온 레닌은 <무엇을 할 건가>를 마무리했다. 멘셰비키는 그대로 공격했지만, 모든 활동가들과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모든 러시아 조직에 대한 뜨거운 호소였기 때문이다. <무얼 할 건가>에서는 전 국민적인 무장봉기를 준비해서, 시기를 정하고, 봉기를 수행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할 준비를 늘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은 새로운 과제를 맞이했지만, <무엇을 할 건가>는 여전히 혁명에 대한 감격을 준다고 크룹스카야는 평가했다. <인민에게 벗이란 무엇인가>는 혁명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면, <무얼 할 건가>는 혁명 운동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고, 명확한 과제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불꽃>도 전력을 다해 일했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도 와서 맹렬한 토론을 했으며, 힘겨운 회의였다. 뮌헨 시절에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자술리치 등 사이에는 심각한 불화는 크게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신문 건설이라는 목표로부터, <불꽃>으로 전력을 집중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리에즈에서는 거대한 소요 사태도 일어났다.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군대는 총을 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도 동요하고 있었다. 인민회관을 보러 갔으며, 당 상층부가 모이지 못하도록, 모든 노동계급 거주 지역에서 집회를 열기로 했다. 벨기에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한 쪽은 군중을 쏘거나, 한 쪽은 군중을 달래는 변명이나 해댔기 때문이다19024, 둘은 런던에 도착했다. 큰 런던을 보고 놀랐다. 맞이했던 첫 동지는 알렉세예프였다. 해외 생활에 익숙해서 런던에서도, 영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크룹스카야는 감옥에서 영어를 독학으로 배웠지만, 실전 영어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레닌도 열심히 영어 학습에 전념했다. 주로 하이드파크를 들렸으며, 연사들은 아일랜드 발음과 섞인 영어로 말했어서, 좀 더 알아듣기는 쉬웠고, 둘은 영어를 배우고자, 즐겨 듣곤 했었다.

 

레닌은 런던을 연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박물관에 구경하러 드나들지는 않았다레닌도 대영박물관에 자주 들렸다. 그러나 박물을 보려던게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서고, 연구 작업을 하기에도 편리한 시설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 안 고대박물관에서 10분이 지나면 레닌도 완전히 지쳐버렸기 때문에 황급히 뛰쳐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딱 하나, 파리, 1848년 혁명 박물관에는 꼭 들려서, 물건 하나라도, 그림 하나라도, 꼼꼼하게 들여다봤었다. 레닌은 산 런던을 연구했었다. 사람들 무리에서, 이층 버스 위 칸에도 앉아 시내를 한참 돌아다니기도 좋아했었다. 글나 부랑자, 지저분한 룸펜, 런던 노동자들, 헤진 옷을 걸친 취한 여성들도 섞인 골목길, 런던을 보고는, ‘두 개의 국가라고 되뇌곤 했었다. 런던에서도 레닌은 언제나 시끌벅적한 노동하는 사람들 무리로 들어가거나, 노동 군중들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었다. 당시 런던에서도 독서실도 많았는데, 한 짜리 방이었고, 들어가서 신문을 있거나, 독서대도 있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에서도 독서실을 만들기를 바라기도 했었다대중식당, 교회에도 갔었는데, 영국 교회에서는 예배가 끝나면, 짤막한 강연, 토론도 이뤄졌고, 평범한 노동자들은 토론에 나서곤 해서 토론을 특히 즐겨 듣곤 했었다. 그리고 일반 노동계급들도 모여서 토론하는 노동계급 모임에도 찾아가곤 했었다. 레닌은 평범한 영국 노동계급에게 기대했었으며, 부르주아화로 된 노동귀족계급에 대한 상층부를 연구했었다. 그리고 영국 혁명에 대한 원동력도 찾아내고자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사회민주주의 교회에서 방문해서 목회자를 만나고는 설교를 듣거나, 발언자로부터 자치제 사회주의는 기회주의 정수라는 말을 듣고는, 이내 영국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어서, 영국인은 폐쇄적인 민족이라고 봤다. 또한 한 영국 사회주의를 따르던 사람은 망명 생활을 하던 러시아인들을 순진하고도, 놀라운 시선으로 보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갔다왔다는 걸 놀라워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찌들어진 소시민주의를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레이몬드는 여러 유럽 지역을 돌아다녀봤었지만, 정작 화이트채플에서 열린 러시아 유대인들 거주 지역에는 한 번도 가본적도 없어서, 다른 삶을 보고는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레닌, 크룹스카야는 런던에서 프라임로즈힐을 자주 다녔다. 왜냐하면 당시 6펜스면,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었으며, 안개 자욱한, 거대한 런던 전경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묻혀 있는 묘지는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둘도 자주 걸어가곤 했었다런던에서는 페테르부르크 모임에서 야쿠보바를 만났다. 매우 활동적인 노동가였다. 크룹스카야와는 자스타바 지구에서 일요야간 학교에서도 함께 일했었다. 되도록 이전에, <노동 사상>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마르토프, 자술리치도 도착했으며, 알렉세예프와 생활했다. 레닌은 대영박물관에서 자리를 잡고는 작업을 했다. <불꽃> 조직원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면서도, 해외에서는 <불꽃>, <여명>, 여러 소책자들과 문건들을 다시 인쇄해서, 여러 위원회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으며, 모든 비합법적인 활동으로부터 통신문을 공급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일로 바빴다. <불꽃>에 관련된 모든 편지를 레닌은 죄다 읽곤 했다. 그래서 어떤 조직원들은 무엇을 하는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모든 활동을 논의했다. 연락이 단절되면, 이어서, 여러 소식들을 알려 줬다. 니나라고도 불린 <불꽃>, 인쇄소는 아제르바이잔, 바꾸에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절박한 상태에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답했다. 엄격한 보안 속에서 계획하고, 활동할 수 있는 조직들도 필요하다고 모두들 절실하게 느꼈다. 1902, 6, 벨로스토크에서 분트로부터 조직한 회의도 열렸다. 페테르부르크 조직에서는 마냐라는 노동 위원회, 바냐라는 지식인 위원회로 나뉘었다. 노동 위원회에서는 경제 투쟁을 주로 벌였고, 지식인 위원회에서는 정티를 담당해야만 했다. 그러나 혁명 정치보다는 주로 자유주의 정치 쪽이었다. 경제주의도 마찬가지로, 원론적이었고, 지역에서도 공고했다. <불꽃>은 정당한 평가를 내렸다. 레닌도 조직에서 구조를 올바르게 세우고자 올바른 투쟁을 지도했다따라서 <노동자 대의>에서 내세웠던 노동가, 지식인 벽을 무너뜨렸다. 1902-1903년에는 겨울에는 노선 투쟁도 벌어졌고, <불꽃>파는 입지를 늘려갔다.

 

레닌은 여러 경향들과 싸워나갔고, <불꽃>파에서 투쟁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노동자 대의>파에서 경제주의들은 영향력을 앗아갈까봐 두려운 나머지, 해외파 지령에도 분개했다. 플레하노프와도 페테르부르크 조직과 구조에 대한 같은 문제를 많이 나누었다. 19029월 초예카체리노슬라프 감옥에서 탈출한 바부슈킨도 동지들과 혁명가로 단련됐다. 런던에는 플레하노프도 방문했다. 바부슈킨과도 만나서 러시아 문제들을 같이 다뤘다. 바부슈킨은 러시아로 돌아갔고, 1906, 시베리아에서 무기를 수송하더 붙잡히고는 다른 동지들과 노상 묘지에서 총살당했다. 여러 <불꽃파> 동지들도 런던으로 왔다.

 

19028월 중순, 대중적인 비합법 노동 기관지이자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조직 기관지였던 <남부 노동자>에서 편지도 왔다. 남부는 침탈당했고, 편집부로는 <불꽃> <여명> 조직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자 견해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불꽃>과 자유주의 간 논쟁에서 불만을 표했다190210월 초, 트로츠키도 런던을 방문했다. 트로츠키는 <불꽃>파였다. <불꽃>을 돕고자 파리에서 주로 자리를 잡았다. <인민 의지> 조직원이었던, 올레크마에서 유형을 살던, 예카체리나 미하일로브나, 알렉산드로바 자크도 왔다. 여러 노장 혁명가들도 만났고, <인민 의지> 조직원들도 존중했다. 레닌은 조직원들에게 친절했다. 보리스 골드만도 있다. 페체르부르크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동지였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는 투쟁 동맹에서 알게 된 사이였다. 훗날 미치고 말아서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비합법 생활이란 고달팠고 힘겨웠기 때문에 쉽게 버틸 수는 없었다. 결국 치열했던 보리스 골드만도 이겨내지는 못했다.

 

대회 준비 작업은 강도 높았고, 190211, 조직 위원회를 구성했다. 분트는 위원회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여러 지역들에서 대회를 연계하고, 조직 위원회와도 연결하는 작업은 늘 레닌 몫이었다. 도왔던 포트레소프도 몸은 아팠다. 마르토프마저 런던 도시라는 숨 막히는 생활을 견디지는 못하다가 파리에서 머물었다. 플레하노프와 악셀로트마저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파리로 떠났다. 자술리치는 런던에는 머물렀으나, 정작 러시아와 연락을 취할 줄은 몰랐으므로, 모두 레닌 몫이었다. 러시아 편지 교환에서도 신경을 곤두 세울 수밖에는 없었다. 몇 주, 몇 달이나 답장을 기다리다가, 잘못된 일이나, 알 수 없는 상태에만 늘 놓였다.

 

레닌은 당을 창건하기를 바랬었고, 분트는 분트 투쟁에서도 <노동자 대의> 관점에만 여전히 머무르고만 있었다. 분트는 민족에 대한 자치권을 두고는 당과도 보조를 맞출 수 있다고 봤으나, 정작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독립하기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분투로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는 독립해서 정치적인 당만 내세웠고, 연대 원칙으로만 당에서 가담하고자 동의했다. 그러나 전술로는 유대계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는 살인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단독으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어울릴 때만 비로소 세력일 수 있었다. 분트파는 알지 못했고, <불꽃>은 분트와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레닌은 분트파를 매우 열심히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를테면, 노동해방모임에서는 제네바로 이전하고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레닌만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짐을 꾸렸을 때는 등과 가슴으로부터 염증마저 생기는 신경 질환을 앓았고, 신경은 쇠약해졌다. 발진도 나타났다. ‘복행진이라는 피부병이었다. 요오드를 발랐을 때, 매우 아파했다. 진료비를 1기나 내야만 했고, 영국 의사에게 쉽게 부탁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료비가 비쌌고, 영국 노동자들은 민간 처방으로만 치료해야 했고, 제네바로 가는 길에도 레닌은 매우 뒤척이고는 괴로워하다가, 몸져눕고는 두 주일을 지내기도 했다.

 

그동안에도, 레닌은 <빈농에게>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1902, 농민 봉기를 보고는 쉽게 쓰여진 소책자를 쓰고자 했고, 노동가를 위한 당이란 무엇을 원하는지를 설명하고자, 빈농은 왜 노동가와 함께 가야만 하는지를 풀어썼다. 레닌은 농민에게 호소한 맨 처음 쓴 소책자였다.



1903-1905.

 

제네바.

 

19034, 제네바로 이주했다. 노동 마을 셴부제리로 자리를 잡았다. 여러 대의원들도 방문했다. 제멘치예프 부부는 레닌도 극찬한 운송 전문가였고, 라첸코, 마르토프 등 지역 대표들도 강령, 분트 문제를 논의했다. <남부 노동자>, <불꽃> 편집부 입장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자주 의견 충돌도 일어났다. 따라서 두 진영으로 나뉘었고 한 쪽에는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자술리치, 다른 쪽으로는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도 있었다. 편집 위원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레닌은 삼두 체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같은 구성으로는 <불꽃> 편집부로도 이전과 같은 일을 처리해내기란 벅찼다.

 

2차 대회로는 브뤼셀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대회에 대한 보안 수준은 철저했다. 비밀 회담 장소로는 밀가루 창고에서 개최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의결권으로는 43명 대의원, 심의권으로는 14명 대의원이 참석했다. 18981차 대회 때는, 겨우 9명만 참석했다. 레닌도 첫 당 대회였다. 그리고 당 강령, 전술 문제들을 전 당원들이 함께 논의하고자 몇 년이나 기다렸다. 비합법 대회를 소집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밀가루 창고에서 플레하노프로부터 개회한 당 대회는 창립 대회였다. 여태껏 당 강령마저 없었다.

 

분트를 둘러싼 문제를 주로 다뤘다. 분트로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노동당과 연대 관계만을 유지했고, 독립만을 강화하고자 내세웠다. 이면으로는, 분트는 유대인 지역 수공업자들 정서를 반영하고, 정치 투쟁보다는 경제 투쟁에 더 관심을 보였으므로, 경제주의를 더 중시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는 국제적인 단결을 옹호했다. 분트는 민족 간 우호적인 협약만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대회 구성 문제를 두고도 토론했다. 조직 위원회는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을 지지하는 해외 거주 문필가 투쟁 모임과 대의원들에게 특수한 규율만 부여하고자 했고, 대회 자체가 아니라 모임으로 축소하고자 했다. 레닌은 격분했다. 조직 위원회는 해산했다. 그러나 <불꽃> 편집부, 조직 위원회, 지역 대의원들도 분트 문제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분트는 실패했다. 대회는 모두 37번 열렀다. 여러 중앙 위원, 후보들도 선출했다. 마르토프, 자술리치, 스타로베르, 악셀로트 등은 레닌, 플레하노프 감독을 두려워했다. 주로 삼두 체제로 구성했다.

 

긴장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에서도 잘 드러난다. 분트에 대한 당 안에서 지위, 강령, <불꽃> 노선에 대한 승인 문제 등도 압도적으로 다수 대의원들은 의견 분열마저 보였다. 견해는 달라서 플레하노프, 레닌에 대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던 파블로비치, 자술리치, 악셀로트, 트로츠키도 있었다. 그리고 선거 투쟁으로는 대의원들에 대한 도덕적인 결함도 지적했다대회는 막을 내렸고, 의결권을 가진 44명 가운데, 20명은 기권했다. 중앙 위원으로는 글레보프, 클레르, 구르츠, 3명을 선출했고, 중앙 기관지 편집부로는 플레하노프, 레닌, 마르토프를 선출했다. 그러나 마르토프는 정작 편집부를 거부했다자금, 비밀 회동 장소 등을 지원하던 사람들은 멘셰비키 선동으로 넘어가서는 지원을 중단하고는 말았다. 레닌은 중앙 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고는 편집부와 협력하기를 지원했다. 그러나 멘세비키 쪽에서는 거부했다. 마르토프와 같은 일로는 논의하고자 했지만, 일부 노선마저 달라갈라지고는 말아서, 멘셰비키와 투쟁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볼셰비키들은 정기적으로 모였다. 레닌은 연맹 대회를 너무나 생각하다가, 자전가를 타고 가다가 그만 전차와 부딪치고는 안구마저 파열할 뻔했다. 붕대를 감고, 창백한 얼굴로 연맹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연맹 대회에서 멘셰비키로는 볼셰비키보다도 숫적으로는 우세했다. 플레하노프는 <불꽃> 편집부와 타협했다. 플레하노프는 멘셰비키에게 자리를 내주고자, 한 중앙 위원에게 협의회 사퇴를 요구했고, 레닌은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마르토프는 <포위 상태>라는 소책자에서 온갖 비난을 가했고, 트로츠키도 마르토프와 같은 태도로는, 플레하노프를 레닌 손바닥 안에 있다고 보고는,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라는 소책자를 냈었다. 따라서 레닌은 다시 반박하고자,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소책자를 집필했다.

 

볼셰비키 대의원들과 지역 조직들은 멘셰비키에 대한 입장을 훨씬 이해할 수 없다고 봤다. 지역 조직들도 대회 결정에 대한 결의안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역 위원회들도 볼셰비키 쪽으로 옮겨지고, 가담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주로 겉만 화려한 계획, 보고서에 대한 실상을 짚어냈다. 보그다노프도 나왔다. 비상 연락망이었다. 플레하노프와는 완전하게 결별할 무렵이었다. <인민 권리> 소속이었던 여러 나탄손과 같은 여러 혁명 조직가들도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중앙 위원회는 이중적이고, 기만적인 타협 정치를 내세웠다면, 위원회들은 볼셰비키 쪽에서 지지했다. 결국 중앙 위원회는 <7월 선언>에서 레닌에게 연락 제공을 박탈하고는 말았고, 중앙 위원회를 탈퇴했다. 따라서 22인으로 이뤄진 볼셰비키 모임들은 제3차 당대회를 소집하고자 결의안을 채택했다.

 

레닌은 호텔보다는 주로 대중 식당에서 밥 먹기를 즐거워했다. 크룹스카야와 유럽에서는 배낭 여행을 했을 때는 무거운 프랑스어 사전도 들어있었다. 활기를 되찾은 레닌은 보그다노프 집에서 만났고, 제네바로 돌아올 때는 외곽 근교에서 도서관과 여러 발간하는 신문, 잡지들도 많이 구독했던 독서회로부터 연구를 전념했다. 같은 시기로는 러일 전쟁도 일어났고, 차르 전제 정치에 대한 모든 부패마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일본 전쟁에서도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멘셰비키, 자유주의마저도 패배했다. 아래로부터는 인민 분노는 물결로부터 치솟아올랐다. 노동 운동도 경찰과 대치하는 대규모 인민 집회와 경찰과 노동자들 간 직접 충돌 소식들도 들려왔다. 따라서 모두들 페체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등에서부터 성장하는 노동 운동에 대해서도 많은 책임을 느꼈다. 자유주의,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도 본모습을 드러냈고, 멘셰비키도 똑같았다.

 

그러나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본능, 창조하는 힘, 역사 사명에 대한 깊은 믿음을 지녔다. 갑자기 생겨난 믿음이 아닌, 마르크스 계급 투쟁에서 이론을 배우고, 깊이 생각했던 시절, 러시아 현실을 거듭 연구하고, 노장 혁명가들로부터 세계관과 투쟁하면서, 투사 개인에 대한 영웅주의를 계급 투쟁이라는 힘이라는 영웅 정신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단지 불가사의한 힘에 눈먼 믿음이 아니라, 깊은 신념과 사태에 대한 더욱 깊은 지식과 현실에 대한 성실한 연구로부터 입각한 신념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활동한 경험으로도, 노동 계급에 대한 역량과 믿음은 더욱 살아 숨 쉬었다190312월 말, 볼셰비키 기관지, <전진>을 발간했다. 덕분에 러시아로는 혁명 운동들도 성장해갔고, 편지 교류도 늘어났다. 한 달에는 300통 가까이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레닌은 노동가들은 편지를 보내왔고, 농민들과 주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혁명도 무르익었고, 피 묻은 일요일로 잘 알려진 1905, 19일 사건 소식은 제네바로도 알려졌다. 마침 레닌은 도서관으로 가던 도중이었다. 루나차르스키 부부를 만나서 소식을 전달 받았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큰 일도 일어났다고 보고 받았다. 레닌은 모든 생각을 러시아로 집중했다. 사건을 알고자, 제네바 지역 신문이나, 영국, <타임즈>를 구독했다. 레닌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모든 전망에 대해서는 더욱 명료하게 파악해갔다. 운동도 커가고, 혁명 인민들도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자, 노동 계급들은 모두 전제 정치와 싸우고자 돌진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승리하고자 할 수 있는 한 완벽하게 무장했다. 그러나 멘셰비키는 혁명을 구속해야 한다고 봤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들에게 실마리를 얻고는 말았다. 1905년 혁명에서 노동 계급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투쟁에 대한 준비는 꺾이지는 않았음에도, 노선을 두고는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만 했다는 말 밖에 할 줄 몰랐던 사람들도 있었다. 노동 계급 전위로는 당에서 투쟁하고, 조직하고, 대중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끊임없이 촉구했다. 그리고 레닌은 <전진>에서도 같은 점을 잘 써놓았다.

 

레닌은 19052월 초, <우리가 혁명을 조직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기고문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수 많은 혁명 잠재력, 사회민주주의 조직에서도 결함을 190519일 드러내고는 말았다고 적었다.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로부터 기록한 혁명, 봉기에 대한 모든 글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고, 매우 치밀하게 글을 또 연구하고, 심사숙고했다. 전쟁술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책들을 읽었고, 무장 봉기, 봉기를 조직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모든 면으로도, 거듭 생각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여기로 할애했고, 유견전도 벌어질 때는, 공격조로는 5인조, 10인조에 대한 말들도, 깊이를 가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제네바 독서회 직원에 따르면, 레닌은 작업할 때는 바리케이드 전투, 공격 기술에 대한 책을 주로 읽으면서, 사전을 꺼내고는 용어를 찾고자 움직이다가, 깨알 같은 글씨로 쪽지에다, 무언가를 빠르게, 집중해서 쓰곤 했다고 한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로 무기를 보내고자 모든 수단을 강구했으나, 페테르부르크 안에서 전투 위원회는 정작 매우 느렸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로도 적지 않은 일들도 해냈다. 매순간마다 목숨마저 걸 수 있었고, 영웅적인 실천들도 잘 보여줬다. 어리석었던 가폰 신부로부터 노동가들에게 무기를 조달하는 임무, 비합법 운송 일을 맡기도록 했다. 덕분에 레닌은 불법 여권, 연락망을 가지고, 페테르부르크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은밀하게 무기를 조달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가폰 신부 같은 사람은 아니었고, 보다 혁명 열정에 불타오른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온갖 희생을 감수할 준비를 마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었다.

 

레닌은 또 다른 구호로는 농민들에 대한 토지 투쟁 지원이었다. 같은 지원으로부터 노동 계급들은 투쟁에서도 농민들과도 함께할 수 있었다. 2차 대회에서 당 강령으로는, 1861년 농노 개혁 때 지주들에 대한 절취지를 모두 반환하라는 구호를 제기했고, 또 강력하게 요구했다그리고 구체적인 요구로는, 뜨거울 찻물, 노동 시간 단축, 임금 지불 준수 투쟁으로 선동했다농민들 안에서도 폭 넓은 혁명 운동은 일어났다. 탐페레에서 열린 12월 협의회로는 레닌은 절취지에 대한 항목을 강력에서 모두 삭제해야만 한다고 제안했고. 지주 영지, 국유지, 교회령, 왕실령 등에 대한 완전한 몰수로부터 농민에게 혁명 방안들을 지원한다는 항목을 도입했다. 반면 카우츠키는 <신시대>에서, 도시 혁명 운동에서 농민과 지주에 대한 관계 문제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노동 대의를 배신했지만, 처음에는 혁명적인 사회민주주의자였다. 베른슈타인은 1890년대 말 마르크스주의와 투쟁하자는 깃발을 내걸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재검토하거나, 사회주의는 목표도 아니고, 운동만이 전부라고 내세웠을 때,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반대하고는 마르크스 학설을 더 옹호했었다. 같은 카우츠키 주장에도, 레닌은 농민에 의거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카우츠키 주장을 들었을 때,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한 마르크스 학설을 더욱 올바르게 검토하고자 했다. 따라서 레닌은 1848, 미국 농민 운동에서 마르크스 입장, 1885, 헨리 조지에 대한 엥겔스 입장을 경험에서 입각해서 연구했다. 19954, <미국판 흑토재분재에 대한 마르크스 견해>라는 기고문도 내놓았다. 그리고 레닌은 낡은 봉건 제도와 전제주의 노예 제도를 무너뜨릴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투쟁과 새로운 공화국 창설을 지지했다.

 

제네바는 볼셰비키들에게는 중앙이었고, <전진> 편집부, 배송부, 볼셰비키 식당도 있었다. 여러 동지들도 거주했다. 볼셰비키는 란돌트 카페에도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거나, 러시아에서도 일어난 삭너들을 논의하고, 계획을 수립하곤 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제3차 당대회를 위한 선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수파 위원국도 구성했다. 멘셰비키도 있었지만, 중앙 위원회는 타협적인 입장만 취하고는 제3차 대회 소집에 대해서는 자주 제동을 걸었다. 대회는 런던에서 개최했다. 여러 대의원들과 당원들은 1905, 혁명 시기 크라신 전투원들을 무장하도록 하고자, 전투조 훈련을 지도하고, 비밀리에 막중한 대대적인 활동을 수행했다. 여러 러시아 대의원들도 대회에도 참석했고, 러시아에서 노동 운동도 고조했다. 무장 봉기, 임시혁명정부, 정부가 벌일 전술에 대한 태도,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에서 공개 행동에 대한 문제, 농민 운동에 대한 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 사회민주주의 민족 조직들에 대한 태도, 선전과 선동, 당에서 분리파 등등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했다.

 

레닌은 주로 농업 문제에 대해 보고했고, 절취지 항목에 따라 지주, 황실, 교회 등에서 소유한 토지 몰수 문제를 전면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노동가, 지식 계급 사이에서 관계 문제도 다뤘다. 2차 대회로는 많은 문필가들이나, 노동 활동가들은 결속력이 매우 약했지만, 3차 대회에서는 조직들도 이미 골격을 갖췄다. 그러나 조직들은 비합법 조직이었고, 어려운 보안 조건에서 활동했다. 레닌은 노동자들도 위원회로 가입해야만 한다고 열렬하게 내세웠다. 여러 새로운 문제들도 제기했찌만, 그러한 문제들은 정작 비합법 조직 틀 안으로는 해결하기란 어려웠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일간지를 발행하고, 폭 넓게 합법으로도 출판물을 낼 때만 그러한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출판 자유를 쟁취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비합법 신문을 출판하고, 대중 신문 문제를 전담할 문필가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3차 대회는 올바른 투쟁 노선을 선정했고,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이라는 두 가지 전술>에 대한 소책자를 집필했다.

 

출판 자유에 대한 조짐들도 여럿 보였다. 해외에서도, 중앙 위원회에서도 비합법 소책자들을 합법으로 출판해주겠다고, 여러 출판사들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중앙 위원회는 자체 출판사를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중앙 위원회에다 플레하노프가 아닌 국제 사무국 대표로 다수파, 오를롭스키를 지명하고자 부탁했고 1905, 플레하노프는 러시아로 가지 않았다.

 

레닌은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늘 기다리는 처지였다. 경찰 끄나풀도 뒤를 쫓기도 했다. 독일어를 쓰는 핀란드 행동당원과도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닌은 남의 집에서 지내기를 매우 불편해했다. 따라서 일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빈 집을 둘러보던 가운데 문지기와도 대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체류를 위한 신분증을 발급받고자 애썼다. 러시아에서는 <신생활>도 발행했다. 여러 볼셰비키 모임들도 가담했다. 해당 일간 신문은 두마 회의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기도 했다. 레닌은 선전가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선동하는 일보다는 노동계급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를 더 바랬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라는 기고문도 당에서는 명확한 구호를 제시한 지침서였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민과 함께 토지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및 농업 노동계급과 함께 사회주의를 위해서도 투쟁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도 볼셰비키 대표와 같은 관점을 표명했다. 노동대표소비에트는 레닌은 해외에 머물고 있을 때, 1905, 1113일에 생겨난 프롤레타리아트 전투 기관이었다. 자유경제연구회에서도 레닌은 농업 문제에 대해서 보고했고, 또 연설하기도 했다. 그리고 임시혁명정부는 혁명 운동이라는 불길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었고, 다른 쪽으로는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노동대표소비에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이윽고 서기국을 구성했고, 전투 조직을 꾸려서 주로 서기국과 관리가 아닌 기억에 의존해서 직접 실천해서 활동했다. 정부와 결전도 가까워졌으므로, 레닌은 군대는 중립적일 수 없다는 글을 <신생활>에서도 공개적으로 썼고, 전 인민에게 무장 봉기에 대한 글도 썼다. 19051126, 트로츠키는 체포된 동지에 대한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1905, 12월 중순에는 탐페레 회의를 개최했다. 볼셰비키는 비공식으로는 탐페레 회의에서 무장 봉기를 준비했고, 고조된 분위기에서, 휴식 시간에는 사격 연습을 했다. 그리고 무장 봉기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핀란드 대중 횃불 집회에도 참석하기도 했다. 몇 사람은 침울한 상태에 빠지고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할 수 있는가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노동계급들마저 차르 전제 정치로부터 지쳐있는 상태였고, 결전을 수행하고자 빈약하게 무장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봉기는 투쟁으로 몸소 보였다.



1905-1907.

 

12월 봉기를 진압했고, 정부는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을 참혹하게 대했다. 레닌도 모스크바 패배를 받아들였다. 노동 무장도 빈약했고, 조직도 허약했고,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연대마저도 엉망이었다. 레닌은 1906년 봄, 농민에게 배웠고, 파업 투쟁으로 소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힘을 비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계급 당에서 임무를 보다 명확하게 제기하고, 입헌적인 환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력을 모으자고 일축했다. 따라서 전제 정부로부터 지하 투쟁을 잠입해서 감행했다. 러시아 각지에서도 동지들은 모였다. 여러 수행할 활동 노선을 합의해나갔다. 주선으로부터 여러 비밀 장소도 마련했다. 장소로는 서점, , 병원, 등이었고, 주로 비합법 선전물을 발행하거나, 보관할 수 있는 곳들이었다. 레닌에게 미행이 붙은 적도 있었다. 미행을 피해서 레닌은 19064, <입헌 민주주의 당에서 승리, 노동당에서 임무>라는 소책자를 썼다. 또한 통합 대회를 위한 여러 결의안들도 작성했다. 페레트부르크에서 토론을 부치고는 고등학교로 사용하던 한 가족 집이나, 교실들 가운데 한 곳에서 토론을 했다. 볼셰비키는 매우 높은 결속력을 유지했다. 일시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꾸준한 신념으로 잘 뭉쳤다. 레닌은 페테르크부르크 노동계급들에 대한 한 보고서에서는, 대회는 농민에게 혁명 진격을 지원하고, 작은 부르주아 유토피아를 비판해야함을 물론이고, 대회는 어디서는 선거를 참가할 수 있고, 또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 행동은 통일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해당 보고서는 같은 해, 5, <전진> 출판사에서 나왔다. 레닌은 1906, 59, 파니나 인민 회관에서 열린 경찰 없는 노동 강당에서 가명으로 러시아에서도 공개적으로 연설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레닌을 알아보았고,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모든 사람들도 끝을 보고야 말 다가오는 투쟁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붉은 옷을 찢고, 혁명가를 부르고 다들 지역으로 흩어졌다. 집회를 마치고 레닌은 레첸코 집에서 밤을 지냈지만, 혁명 기간 동안 레닌은 다시 대규모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연설하지는 못했다.

 

1906524, <물결>은 폐간됐다. 그러나 이틀 뒤로, 1906526, <전진>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행했다. <전진>1906, 615일까지 있었다. 1906, 622, 볼셰비키 새로운 기관지 신문, <메아리>를 출판할 수 있었다. <메아리>1906, 77일까지 있었다.

78일에는 두마는 해산했다.

 

1906, 6월 말에는 막 바르샤바 감옥에서 출옥한 룩셈부르크도 페테르부르크로 왔다. 레닌, 볼셰비키 지도부에서는 룩셈부르크를 만나기도 했다. 파파 로제라는 노인으로부터 주선했고,

딸도 교사였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큰 빈 집을 만남 장소로 빌려줬다. 레닌은 1906, 5월에는 주로 두마에 대한 글로 꽉 채웠다. 당 문제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로 강연하기도 했고, 그러나 정작 교사 모임에서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아닌, 사회혁명당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레닌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었다. 토지 문제에서 사회혁명당원들은 정작 관료, 자유주의 단결로 밝혀졌고, 동요하던 근로파는 노동계급 쪽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정부는 두마를 믿지 못했고, 평화 시위를 탄압하거나, 집회를 열던 건물을 불태우고는, 유대인을 괴멸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190678, 두마는 해산했고, 여러 사회민주주의 신문들도 폐간됐고,

각종 탄압, 체포를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스베아보르크에서 봉기도 일어났다. 볼셰비키 조직원들도 가담했다. 침탈도 일어나서 봉기 전보를 기다려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비합법 신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를 다시 발간했고, 멘셰비키는 또 뒷걸음질치고는 부르주아 언론에게 또 글이나 썼고, 무소속 노동 대회라는 뜬구름이나 잡는 구호나 내걸었다. 그러므로 당 청산을 뜻했다. 볼셰비키는 비상 당 대회를 요구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망명했다. 볼셰비키였던 한 가족에게 부탁해서 집 한 쪽 구석방을 빌렸고, 기고문, 소책자들을 썼다. 중앙 위원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들, 지방에서 찾아온 사람들 모두 집으로 레닌을 보러 왔다. 러시아 경찰은 핀란드까지 오지는 않았다. 여러 자료, 신문, 편지 등을 담당하는 사람은 매일 레닌에게로 왔다. 레닌은 보내온 모든 걸 검토해보고는 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글을 쓰거나, 가지고 온 사람 쪽으로 도로 보내주곤 했다. 레닌도 페테르부르크로 달려가고자 늘 열망했고, 늘 최대한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음에도, 보그다노프와 카드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가을부터,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비보르크에서 발간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신문에다 많은 시간, 정성을 쏟았다. 연락은 주로 슐리흐체르 동지로부터 이뤄졌다. 비합법 신문, <프롤레타리아>는 페테르부르크로 반입해서 각 지방으로 배포했다. 지역 주민들은 모두 유능한 조수들이었고, 보안도 잘 지켰고, 운반과 배송을 잘 조직해서 는 문건을 전달할 주소를 미리 확보해뒀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호기심을 함부로 품지는 않았고, 무엇도 잘 묻지는 않았다.

 

1907220, 두 번째로 두마를 소집했다. 11월 협의회에서 레닌을 수장으로 두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대의원들을 포함한 14명 대의원들은 두마 선거에서 찬성 입장을 표명했다. 입헌민주당과 멘셰비키로는 어떠한 연합도 하지 않았다. 같은 구호 아래로 두마 선거와 관련해서 볼셰비키 활동도 진행했다. 따라서 입헌민주당 당원들은 의석은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고는 말아서 패배했다. 선거는 거듭 지연됐다. 그러나 혁명 물결은 솟아올랐다.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의원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두마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볼셰비키 분파는 모두 늦은 밤까지 조성한 정세에 대해서 밤새워 논의했다. 레닌도 대회나 여러 일들로 늦게 돌아온 날이면, 극도로 지치거나, 신경마저 날카로워지고는 무엇도 먹지를 못하곤 했다. 레닌은 쉽게 지쳤고 또 쉬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를 듣거나 바닷가를 보러갔다.

 

동지들은 레닌을 핀란드 오지로 거처를 옮겼다. 레닌은 그간 겪은 경험을 세세하게 되새김질하고는 종일 농업 문제에서 <사회민주주의 농업 강령>에 대한 글을 썼다. 러시아 경찰은 레닌을 찾느라고, 핀란드 전역을 다 뒤지고 다녔다. 반동도 계속됐기 때문에, 다시금 스위스로 가야만 했다. 또한 핀란드에서도 <프롤레타리아>를 발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이든, 당원들도 등등 가릴 거 없이, 모두 러시아 사람들은 해외로 옮겼다. 1907, 베를린에 잠깐 들리기도 했다. 룩셈부르크를 만났고, 레닌은 전쟁 문제로 잠시 연대했었던, 슈투트가르트 대회 뒤로 매우 친해졌다. 대회에서 전쟁 반대 투쟁은 그저 평화를 위한 투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완전하게 대체해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따라서 전쟁으로부터 촉발한 위기로는 반드시 부르주아지 타도를 촉진해야만 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굵직한 여러 문제들도 다뤘고, 국제 사회민주주의에서 기회주의 진영, 혁명 진영들은 서로 어떻게 대립하는가를 두고 혁명 마르크스주의 정신으로부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와 레닌도 함께였다. 레닌은 19071225-190817일 사이로 잠시 앓아누웠던 동안에는, 제네바로 몸을 옮기기도 했다. 레닌은 고리키에게 감기를 앓았다고 편지를 보냈다.



1907-1910.

 

반동기.

 

레닌도 크게 세 차례나 망명 시기를 거쳤다. 1908-1911, 반동기로는, 차르 정부는 혁명가들을 가혹하게 대했다. 감옥은 차고 넘쳤고, 극도로 견디기 힘든 징역살이로부터 상습적인 구타를 가했고, 사형 선고도 줄을 이었다. 따라서 비합법 조직들도 지하 깊숙하게 잠적해야만 했다. 그러나 잘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 구성원도 많이 바뀌었다. 차르 정부는 첩자들을 조직하는 데 돈을 많이 들였다. 당 중앙 기관들까지 요원들은 고안되어 들이닥치곤 했다. 정부 정보 수준도 모범이 될 만큼이었다. 모든 합법 단체들, 노동 조합, 언론 등 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도 진행했다. 정부로는 노동 대중들로부터 쟁취한 집회 권리, 토론 권리, 스스로를 조직할 권리 등을 빼앗는 데 더욱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동 계급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같은 해로는 사회민주주의로는 극심한 이념적인 붕괴를 겪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매우 근본적인 내용에 대한 재검토도 생겨났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전체를 둔 유물론 세계관마저도 뒤흔들려는 철학적인 경향들도 생겨났다. 암울한 현실이었다. 종교로부터 해결책을 찾고자 했고, 종교로부터 부여하고자 철학적인 근거들도 생겨났다. 학파 수장으로는 보그다노프였으니, 온갖 구신론이니, 창신론이니에 따라 문호를 개방했다.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등도 같은 진영으로 합류했따. 마르크스는 철학으로부터, 또 관념론 투쟁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로 도달했다. 플레하노프는 유물론 세계관에 대한 기반을 닦고자 열중하기도 했다. 레닌은 여러 저작들을 학습했고,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으로 수정하려는 여러 함의나, 반동기로부터 갖는 비중을 매우 심각하게 여겼다. 그래서 레닌은 보그다노프와 학파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철학 전선만이 아니라, 주위로는 소환주의, 최후통첩파를 끌어모았다. 소환주의들로는 두마를 반동화했고,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을 두마로부터 소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최후통첩파는 주마를 제명하도록 만들 연설로부터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에게 두마 연단에서 할 수 있도록 최후통첩을 밝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본질로 보자면, 소환주의, 최후통첩파 사이로는 무엇도 다르지 않았다. 최후통첩파로는 알렌신스키, 마르트도 있었다. 그들은 볼셰비키로는 무조건 노동 조합이나, 합법 단체로부터 참여하기마저 반대했다. 단지 타협해서도 안 되고, 볼셰비키는 늘 굽히지도 말아야만 하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레닌은 같은 관점을 오류라고 봤다. 모든 실천 활동, 대중으로부터, 현실에서도 조직에 대해서 더욱 멀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로는 1905, 혁명 전 시기로도 모든 합법으로부터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활용할 줄 알았고, 힘겨운 조건에서도 대중들도 늘 끌어들일 줄 잘 알았다. 단지 차 마실 뜨거울 물을 확보하고자 벌인 투쟁, 환풍기 설치를 위한 투쟁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씩 차근차근 대중을 전 인민 무장 봉기로 이끌어냈다. 어려운 정세에서도 적응하면서도, 원칙으로는 일관성을 지키고, 혁명 입장을 양보하지도 않았다. 바로 레닌주의 전통이기도 했다. 소환주의들로는 볼셰비키 전통과도 결별했다. 소환주의에 대해서 벌인 투쟁이란 시련으로부터 단련한 볼셰비키, 레닌 전술을 지키고자 벌인 투쟁이었다.

 

따라서 1908, 1911년까지 몇 해 동안이나, 당을 지키고자, 당에서 비합법 조직을 지키고자 격렬한 투쟁 기간도 있었다. 반동기로 접어들어, 쇠락한 분위기를 드러낸 조직으로는 멘셰비키 활동가들이었고, 늘 여러 경향에 따라서만 휩쓸려 다녔고, 혁명 구호를 축소하고자 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긴밀한 관계를 늘 유지했다. 따라서 쇠락하는 분위기로는 폭 넓은 층으로부터도 멘셰비키는 당을 청산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청산주의들에게 비합법 당이란 탄압으로부터 괴멸만을 초래할 뿐이었고, 노동 운동 범위를 축소하도록 만든다고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합법 당을 청산한다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독립적인 정치를 포기하라는 말이었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에서도 혁명 정서를 폄하하도록 만들거나, 프롤레타리아트 조직, 행동에 대한 통일을 가로막고, 약화하도록 했다. 플레하노프도 한때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기회주의 투쟁에서도 많은 일을 했었으며, 멘셰비키로는 청산주의 정서를 가진 채로 반동에 대한 일체를 모를 일도 없었고, 당 청산이라는 설교로는 마르크스주의 기초 자체로부터도 청산으로부터 발전해서는 무슨 일이든 자신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만 하거나, 자신들에게 이로운 모임, 곧 멘셰비키 당 유지파 모임을 이루고자 했다.

 

당을 지키고자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수 많은 조직 문제들도 분명하게 밝혔고, 폭 넓은 수로 당원들도 당 역할, 당원 의무에 대해서도 보다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했다. 유물론 세계관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 대중과 접촉을 위한 투쟁, 레닌 전술을 위한 투쟁, 당을 지키고자 위한 투쟁은 망명으로부터 엄혹한 조건에서 벌어졌다. 차르 정부로부터 탄압을 피해서 사람들도 끊임없이 해외로 도망쳤으므로, 따라서 망명가 수도 무섭게 늘어났다. 심신마저 쇠약해졌고, 전망도, 한 푼돈도, 러시아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어떠한 도움이나 손길마저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투쟁을 더욱 힘겹게만 만들었다. 그래서 논쟁, 욕설마저 난무했다.

 

레닌 노선은 옳았음을 삶에서도 더욱 확실하도록 입증해 준 현재로는 투쟁에도 별 관심마저 없는 사람들도 많겠다. 그러나 투쟁은 없었더라면, 당은 신속하게 활동을 전개할 수조차 없었고, 승리를 향한 길 역시나 힘겹기만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레닌 성격, 신랄한 태도, 괴팍한 성격 따위만 모든 사태 핵심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투쟁이란 당 존속, 흔들림 없는 노선, 올바른 당 전술 등을 위해서였다. 논쟁에서도 늘 날카로운 양상을 보이는 이유로도 여러 문제들도 혼란스럽게 얽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닌은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지조차 않으면, 문제에서 본질 자체마저 묻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8-1911년으로 이르는 몇 년은 단순하게 해외에서 그저 체류만 하던 시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전선으로는 사상 투쟁이라는 전선으로부터 긴장된 투쟁도 벌어졌던 시기였다.

 

1911-1914, 망명 기간으로는, 파업 투쟁을 성장하도록 했고, 노동 계급들도 단결해서는 1912, 4, 시베리아 레나 금광 사건, 노동 언론에 대한 발전, 두마 선거, 두마 안 사회민주주의 의원들 활동 등, 당 활동도 새로운 형태로 전개했다. 규모도 새로웠고, 노동 당원 수도 빠르게도 늘어났다. 당은 대중에게도 가까웠다. 러시아와 관계도 빠르게 강화했고, 러시아 활동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다. 19121, 프라하 당 협의히에서 청산주의들을 제명했고, 비합법 당 조직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볼셰비키와 함께하지는 않았다.

 

1912, 크라코프로 자리를 옮기고는, 당을 지키고, 당을 더욱 강화하고자 벌인 투쟁으로는 해외 모임 안에서만 진행할 수는 없었다. 크라코프 시절로는, 러시아에서 레닌 전술은 옳았다고 입증한 시기이기도 했다. 레닌은 대중당에서 실천 활동이라는 문제로도 전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노동 운동은 더 폭 넓게 전개했다. 때를 같이해서 국제 전선으로는 전쟁 냄새마저 더욱 짙어지기만 했다. 레닌은 전쟁은 발발해서, 내전으로 전화할 경우로는, 많은 민족들 사이에서 정립해야 할 상호 관계라는 문제를 새롭게 생각했다. 레닌은 폴란드 사회민주주의들로부터 민족 문제에 대한 관점을 가깝게 접하기도 했다. 또한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줄기차게 싸웠고, 더욱 정확하고, 명료하게,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정식화했다. 따라서 덕분에 볼셰비키로는 매우 중요한 속뜻을 지닌 여러 결의안들도 채택할 수 있었다1914-1917, 망명 기간으로는 전쟁기를 아울렀고, 망명 생활 전반으로도 빠르게 바뀐 시기였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문제들은 결정하기로도 중요했고, 러시아 문제들도 오로지 국제 운동 관점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러시아 문제들은 이전과는 다른 토대로부터, 훨씬 더 폭 넓고, 국제 토대로부터 다뤄졌다. 중립국이었던 러시아로는 제국주의 전쟁에도 맞서는 투쟁을 선전하고,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도록 선전할 수 있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에 대한 기반을 다지고자, 레닌도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주위로부터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서도 영향을 받았고, 하나로는 새로운 생각을 했다. 제국주의, 전쟁 성격,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승리한 직후로부터 이뤄질, 새로운 형태 국가 권력, 노동 계급 정책, 전술로부터 적용할 변증법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싶어했다. 취리히에서는 일을 하기로는 매우 적합했고, 베른에서 취리히로도 거처를 자주 옮겼다. 덕분에 레닌은 집필에만 완전하게 몰두할 수 있었고, 마침 2월 혁명 소식도 와서는 러시아로 돌아갈 채비를 할 때까지는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1908, 제네바로 도착한 날에는 알렉신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두마 볼셰비키 의원이었고. 다른 볼셰비키 의원들과 함께 징역형을 선고받고는 해외로 망명해서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다. 그리고 이틀 뒤로는 고리키에게 답장했다. 고리키는 레닌에게 이탈리아, 카프리로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카프리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당 비합법 중앙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를 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중앙 기관지 제작은 체계적인 지도로부터 신속하게 확립하고자, 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닌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고리키와 나누고자 했었지만, 미룰 수밖에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를 제네바에서 발간할지를 두고는 미정했고, 다른 장소에서도 발간할 수 있을지도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아들러, 유제프 제르진스키에게도 편지를 썼다. 신문을 인쇄하는 쪽은 수송보다 더 쉬웠다. 1908, 2월에는 <프롤레타리아>를 만들고자 여러 동지들과 제네바로 모였다. 편집부 삼두 편성으로는 레닌, 보그다노프, 인노켄치였다. 비엔나에 있던 트로츠키에게도 편지를 보내고는 <프롤레타리아>로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거절했다. 볼셰비키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었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았고, 바쁘다는 핑계만 댔다. <프롤레타리아> 수송 체계를 갖추고자 조치를 취했다. 여러 선원들, 노동가들로부터 오데사로 문건을 수송하는 방법에 대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19077, 치플리스, 에리반 광장에서 강탈을 감행했다. 볼셰비키는 전제주의 전선과도 싸웠고, 차르 국고를 강탈하고자 수탈해갔다. 그리고 치플리스 강탈 사건으로부터 얻은 돈으로는 볼셰비키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모두 큰돈으로는 500루블짜리 지폐였고, 일련 번호를 갖고 있었으므로, 러시아에서는 환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해외로 가서 환전할 수밖에는 없었다. 동지들은 해외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500루블짜리 지쳬를 환전했다. 한 사람은 경찰에게 밀고해서는 동지를 체포하기도 했다. 차르 정부로부터 혹사당하는 혁명가들을 위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도록 해야만 했고, 운동을 위해서는 비합법 인쇄소마저 세워야 하는 등 할 일도 많았다.

 

스위스 당도 너무나 기회주의 분위기는 널려 있었으므로. 환전을 두고는 스위스 주민들은 러시아 강도들이라고 봤고, 매우 민주적인 나라에서 최고로 공정한 재판을 이뤄지기 때문에 자국 영토 안에서 재산에 대한 범죄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는 체포한 사람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도 일에 개입할 태세였다. 멘셰비키로는 1905, 모스크 봉기를 비난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걸 반대했다. 혁명은 패배했을 때조차도, 부르주아 지식 계급은 혁명에서 발 뺀 건, 계급 본성 때문이 아니라, 볼셰비키 투쟁 방법으로부터 위협했기 때문이라고만 해석했다. 혁명 투쟁마저 고양할 때, 혁명 목적으로부터 수탈자에 대한 수탈을 할 수 있다는 볼셰비키 주장마저 신랄하게 비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맨셰비키 견해로는 볼셰비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셰비키와 투쟁은 피할 수 없다고 봤다. 그리고 볼셰비키와 투쟁에서 모든 수단을 다 쓰고자 허락까지 했다.

 

악셀로트는 1908226, 플레하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외국인들 눈 앞에서 볼셰비키 위신을 실추하도록 할 방법에 대한 계획을 설명해 놓고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사건 전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해서는 독일 당 지도부, 카우츠키, 아들러, 런던 국제사회주의사무국 등에다 보내기를 제안까지 했다. 1925년 출간한 악셀로트 편지에서도, 볼셰비키, 멘셰비키에게 길마저 서로 얼마나 멀었는지를 더할 수 없이 잘 보여준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체포된 세마슈코에게 러시아사회민주주의노동당 대표로부터 국제사회주의 사무국에다 공식 성명서를 보냈다. 고리키에게도 편지를 썼고, 스위스 언론에다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그리고 세마슈코는 석방됐다. 레닌은 종일 도서관에서만 지냈다. 그러나 셋방은 저녁에 춥고 삭막했으므로, 주로 밖으로 나와 날마다 극장이나, 공연장으로 다니곤 했었다. 비록 끝까지 자리를 있지는 못했고, 중간쯤 일어나 나와서는 아무 곳이나, 주로 호숫가를 쏘다니곤 했다. 마침내 19082월에는 제네바에서 발간한 <프롤레타리아>, 21호는 나올 수 있었다같은 기고문에서 레닌은 혁명 부대 공격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당을 만들 수 있었고,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도 얽어매지 않으면서도 사회주의로 곧장 나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은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약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레닌은 한 동지에게 190510월에 대해서는, 노동 무장, 전투부대 조직, 봉기 조직, 권력 획득이라는 문제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에 대해 상세하게 회고록을 써보라고 조언해주기도 했다왜냐하면 레닌은 혁명 경험은 훗날 몫을 다할 수 있다고 봤고, 또 치밀하고도, 주의 깊게 연구해야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투쟁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파악했고, 오랜 시간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닌에게 노동 계급에게 주어진 과제로는 지식 계급, 소시민이 내팽개치고만 혁명 투쟁이라는 전통을 지키고, 같은 전통을 발전하도록 하고, 강화할 수 있도록, 폭 넓은 인민 대중이라는 의식 속에서 전통을 심어주고, 다음에 올 필연적인 민주화 운동 약진으로부터도 틀림 없이 굳게 지지할 수 있다고 봤다. 1905년이라는 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모범을 바로 보여줬다. 지식 계급, 소시민에게는 미친 해였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모범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로는 혁명 경험을 연구하고, 몸소 비판할 수 있도록 투쟁 방법을 더욱 성공하고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10월 파업 투쟁, 12월 무장 투쟁도 더욱 폭 넓고, 더욱 집중하고, 계급 의식으로까지 만들기 위함이었다. 레닌은 다가올 몇 해를 두고는 새로운 진격을 위해 준비하기도 했다. 레닌은 반동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투쟁 노선을 정립해야만 했다. 당 활동을 지하로까지 옮겨 가면서도, 합법 공간을 쓰고자 두마 연단으로부터 폭 넓은 노동 계급, 대중에게도 말할 수 있는 방법을 깊이 따져봤다. 레닌은 반동에서 활동 전개에서 어렵다고 도망치는 소환주의를 두고는 좌파 청산주의로 평가했다. 알렉신스키와 같은 분트파만이 아니라 볼셰비키 분파로는 보그다노프를 주축으로 이뤄진 보그다노프, 루나차르스키, 바자로프, 수보로프, 베르만, 유슈케비치, 겔폰트 등 기고문들로 이뤄진, <마르크스주의 철학 논고>라는 책을 발간했고, <논고>는 유물론 세계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마저 수정하고자 했다그리고 신비주의에게 문을 열어주고는 수정주의라는 반동으로부터 얼룩덜룩한 색채로 전개해갔고, 지식 계급 사이에서도 쇠락하는 분위기를 여러 모로 부추겼다. 따라서 레닌은 선을 그을 수밖에는 없었다. 레닌은 늘 철학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유형지에서도 철학을 열심히 배웠고, 헤겔, 포이어바흐, 칸트 등을 연구했다. 심지어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 때도 레닌은 칸트로부터 경도된 동지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고, 같은 문제로는 <신시대>에도 실린 글들을 주시해서 읽었다. 그러므로 레닌은 충분하게 깊이마저 있는 철학 소양을 갖출 수 있었다.

 

레닌은 1908, 225-310, 편지에서도, 레닌은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보그다노프, <자연에 대한 역사관 기초>를 읽었다. 레닌은 1903, 플레하노프는 보그다노프 철학 언명들을 여러 차례 비난하기도 했다. 1904, 보그다노프, <경험일원론>은 출간하자,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직설적이고, 플레하노프는 옳은 견해였고, 보그다노프는 아니라고 말했다. 보그다노프는 1906년 초, 감옥에서 <경험일원론> 저술을 끝마쳤다. 레닌은 격분했고, 고리키에게 <프롤레타리아>, 1호는 1908223, 해외에서 발간했을 때 레닌, 보그다노프 관계는 최악이었다. 볼셰비키 분파도 분열하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조직들도 파괴되어만 갔다. 경찰들은 첩자 제보로부터 매우 뛰어난 활동가들도 적발했다. 대규모 집회, 회의를 열 수도 없었다. 레닌은 철학 책을 집필하다가 지침면 침대에 누워서 프랑스어 문법 책들, 프랑스어사 책들, 프랑스어 회화 특성을 연구한 책자들 등을 몇 시간이나 읽었고, 철학 논쟁 때문에 녹초 된 신경을 진정하곤 했다. 제네바에서 부르주아 학교라는 국민 학교 모습으로는 고상한 창문, 멋들어진 건물에서 노동 계급 아이들을 유순한 노예로만 길들였다. 교사는 아이들을 머리를 쥐어박고는 정작 부잣집 아이들은 그냥 냅두었다. 아이들에게 온갖 독자적인 생각들을 억누르고는 주입식으로 채워 넣고는 단계마다 아이들에게 권력, 부에 굴종하라고 가르쳤다. 민주 국가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 망명 기간 동안 레닌은 매우 흥미를 보인 노동 운동, 노동 집회, 노동 시위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0, 러시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05년 혁명 뒤로는 러시아에서도 노둥 운동은 늘어났고, 여러 당들도 투쟁을 겪었으며, 두마를 겪고, 노동대표소비에트 출범을 겪고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에 대한 실태와 속에서도 노동 대중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노동 계급들에게 영향력은 얼마나 있고, 다른 당들에 대한 영향력도 얼마나 있는지, 등등 더 큰 문제에도 특수하게 다뤘다.

 

민주공화국을 위한 투쟁은 당 강령에서 한 항목이었다. 레닌은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이란 차르 전제 정치보다 훨씬 더 다듬어졌지만, 노동 대중을 노예화하는 도구임은 분명하다고 명확하게 알았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모든 사회 생활에서도 부르주아 정신을 베어들도록 정치 조직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레닌은 1905년 혁명을 겪지 않았다면, 그리고 망명 기간이 없었더라면, <국가와 혁명>이라는 책을 결코 쓸 수는 없었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서둘러 출판해야만 했다. 제네바에서는 없는 자료들을 구해야만 했으므로 소소한 다툼마저 잦은 망명 기간에 대한 분위기로는 많은 방해만 됐다. 그래서 레닌은 런던으로 가서 대영 박물관에서 배우면서 집필을 마무리해갔다. 레닌은 1908824,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었다. 당 협의회를 조직하고자 인노켄치는 러시아로 갔고, 같은 무렵 러시아에서는 청산주의 노선을 이미 모습을 드러내서 폭 넓은 멘셰비키 층을 확보해갔다. 청산주의로는 당, 당에서 비합법 조직에게는 체포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반동으로부터 모든 혁명 활동을 포기하고, 지도를 거부하는 모든 입장으로 양보했다. 볼셰비키 대오에서 최후통첩파, 소환주의들로는 극단으로, 두마뿐만 아니라, 문화 및 교육 단체들, 모임, 학교, 합법 노동조합, 노동 상호 부금 등에 참여하기를 반대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중 속에서 폭 넓게 활동하기를 떨어져나갔고, 대중 지도를 포기하고는 말았다. 따라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95월이 되어서야 출간할 수 있었다.

 

반동기에는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고, 러시아인 망명 생활 중심지에서도 당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다. 따라서 중심지를 파리로 정했고, 매우 혹독한 망명 생활을 겪었다. 레닌은 협의회를 골몰했고, 당 노선을 정비하고자 했다. 따라서 청산주의로부터 일격을 가했다. 파리에서는 살림도 정신 없었고, 또 일도 정신 없었다. 1908년 협의회 논쟁으로는 공동 노선을 모색해나갔고, <사회민주주의>로는 공동 당 기관지였다. 협의회 뒤로는 열린 전체 회의로부터도,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마르토프, 마르흘레프스키로부터 구성한 <사회민주주의> 새 편집부를 선출했다. 같은 해로 <사회민주주의>는 모두 아홉 호를 발간했다. 마르토프는 편집부에서 고립해갔고, 멘셰비키를 잊곤 했다. 레닌은 마르토프와 일해서 즐겁다고 잠깐 드물게는 능력 있는 기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볼셰비키 분파 사정으로는 소환주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3년 간은 보그다노프, 추종자들과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동 투쟁만으로는 사람들을 가깝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분파 안에서 격화된 투쟁에서 레닌은 소환주의와 치열하게 논쟁했다.

 

파리는 연구를 수행하기로는 매우 불편했다. 국립 도서관도 너무 멀었다. 레닌은 늘 긴장을 품었고,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갔다. 점심 시간이면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필요한 책을 신청해도 관료주의에 따른 지연 처리를 뒤따라서 책을 신청하고는 하루, 이틀 지나서야만 필요한 책을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파리 국립 도서관에다 불평을 쏟아 내고는 파리도 욕하고 말았다. 다른 도서관들도 둘러보았으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자전가마저 도둑 맞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에도 치일 뻔했다.

 

레닌과 솔비체고츠크에서 탈출한 이노크와 플레하노프는 청산주의와 단호하게 거리를 뒀다는 사실을 듣고는 축하했다. 플레하노프로는 190812, 청산주의로부터 주도권을 잡았던 <사회민주주의 목소리>에서 편집 위원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었고, 청산주의 관계마저 계속 악화했고, 1909,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기를 부인한 포트레소프 기고문도 실린 멘셰비키 저작집 1,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 운동>도 나오자플레하노프로는 1909525, 마침내 <목소리> 편집부에서도 완전하게 물러났다. 레닌, 이노크도 플레하노프와 함께 활동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플레하노프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철학 전선 투쟁에서 레닌, 이노크는 큰 흥미를 보였다. 철학이란 투쟁 도구였고, 모든 현상을 변증법 유물론이라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문제, 모든 노선에서 실천 투쟁 문제와도 유기적이었다. 레닌은 누나였던 안나 일리니치나에게 책 출판을 서둘러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소환주의들과 최종 결별을 예상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를 소집했다.

 

19095,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도 나올 수 있었다. 모든 논쟁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레닌에게 철학 문제는 곧 종교 투쟁이라는 문제와도 같았다. 따라서 19095월에는, <종교와 노동당>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고, <프롤레타리아> 45호에는, <종교에 대한 노동당 입장>이라는 기고문, <사회민주주의> 6호로는, <종교와 교회에 대한 입장에서 본 계급과 당>을 썼다. <프롤레타리아>에 실린 글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큰 속뜻을 지닌다. 같은 글로는 종교에서 지닌 계급 성격을 강조했고, 부르주아지 수중에 있는 종교도 대중에게 계급 투쟁을 격리하도록 만들고, 의식을 마비하도록 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종교에서 뿌리를 파헤치고, 복잡한 사회로부터 온갖 문제를 제대로 끌어내야만 했다.

 

레닌은 종교에 대한 해악을 15살 소년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십자가를 벗어던지고는 교회에 다니기를 중단했다. 당시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닌은 눈 앞으로 던져진 많은 부조리들을 정제하고는, 노예 형식을 외관상으로도 제거한 세련된 종교야말로, 매우 해롭다고 봤다. 또한 세련된 종교로는 더욱 강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레닌에게 창신론도 바로 그러한 세련된 종교였다. 19096,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부터 참가할 대의원들도 모였다. 확대 회의로는 볼셰비키 중앙이었고, 전진파도 들어왔다. 여러 동지들과,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편집위원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보그다노프 등과 지역 볼셰비키 조직들 대표로는 페테르부르크: 톰스키, 모스크바: 슐라치코프, 우랄: 나코랴코프 등과

중앙 위원으로는 인노켄치, 리코프, 골젠베르크 타라투타, 샨체르 등도 참석했다. 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로는 스크리프니크, 류비모프, 폴레타예프, 다비도프 골룹코프 등도 있었다.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621일부터 30일까지 열렸다.

 

소환주의 최후통첩파에 대한 결의안, 당 단결을 위한 껼의안, 특수 볼셰비키 대회에 반대하는 결의안 등도 채택했다. 카프리 학교 문제를 제기했다. 보그다노프는 볼셰비키 분파로는 분열을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사전에 미리 분파를 모으고는 조직했다. 보그다노프, 알렉신스키, 고리키, 루나차르스키는 노동계급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민주주의 고급 선전 학교를 조직했다. 노동계급들은 논리적인 훈련에 대한 필요도 절감했다. 노동계급들은 배움을 위해 카프리 학교로 갔지만, 경험 있는 당 활동가라면, 카프리 학교란 새로운 분파를 이루고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에서는 새로운 분파 조직을 두고 비판했다. 보그다노프는 회의 결정을 잘 따르지 않았으므로, 볼셰비키 분파에서도 제명됐다. 크라신은 보그다노프를 옹호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분파는 해체됐다.

 

가을에는 카프리 학교, 학생들은 레닌에게 강연을 부탁했지만, 레닌은 학교에 대한 분파적인 성격을 파악하고는 거절했다. 대신 파리로 오라고 했다. 카프리 학교 안에서도 분파 투쟁은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190911월 초에는 학교 조직가였던 빌로노프를 포함한 카프리 학교 열두 명 학생들 가운데 다섯 명은 확고한 레닌주의를 따랐고, 곧 학교에서 제명됐다. 카프리 학교에 대한 분파 성격을 지적한 레닌은 옳았다. 제명된 학생들은 파리로 왔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 동지를 만나고는 고리키에게 편지를 썼다. 헤겔 말이 옳았고, 삶이란 모순으로부터 발전하고, 사람 머리로만 가리거나 잴 수 있기보다 훨신 더 많고, 매우 뜻 깊다고 적었다. 레닌은 카프리 학교를 새 분파에서 중심지로 생각했지만 완전하지도 않고, 전체적인 진리를 가르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봤다. 따라서 노동 계급들에게는 잡다하고, 많은 요소들을 재료로 당에서 훈련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편지에도 적어놨다. 노동계급 힘에 대한 믿음도 숨쉬었다. 파리로는 카프리 학교에 반감을 가진 미하일과 함께 카자네츠, 루슈빈, 코지레프, 우스치노프, 로마노프도 있었다. 레닌은 매우 열심히 이들에게 강의했다. 미하일은 결핵을 얻었고, 니콜라예프 부대 수용 도중에 모진 학댈를 당하다 병을 얻고는 말았다. 190151, 숨을 거두었다. 주로 시사적인 주제들이었고, 부유한 농민 쪽에 선 스톨리핀 개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선도적인 역할, 두마 의원 모임 등에 대해 말해줬다. 학생들 가운데로는 두마에 대한 활동을 두고는 군대 안에서 선동보다 더 중요하게만 여긴다고 비난하고자 애썼다. 레닌은 방긋 웃음을 짓고는 두마 활동은 중요하다는 점을 말했다. 군대 안에서 활동도 느슨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은 조금도 없었지만, 할 수 있다면 비밀리에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일이란 말 없이 행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머릿 속으로는 러시아에서 살았으나, 프랑스 노동 운동도 주의 깊게 연구했다.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당으로는 뼛속까지 기회주의 태도를 보였다. 1909년 봄, 우편 노동계급들도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다. 도시 전체는 소요 상태에 빠져있을 때도, 당은 한 쪽으로만 물러섰다. 노동 조합 일이지, 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만 발뺌하기만 했다. 정치 현안들을 둘러싼 토론마저 잘 이뤄지지도 않았다. 유세장들만 흥미로웠을 뿐이었다. 프랑스 선거 유세장도 민주공화국에서 선거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만 보여줬다. 일리치는 파리 도시 외곽, 극장을 다니면서 무리 지어 있는 노동계급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1909년에는 모르코 침략에 항의하고자 약 10만 명은 참가한 시위를 1909년 열었다. 붉은 목도리를 두른 사회주의당 당원들도 시위를 주도했다. 노동계급들은 험악한 분위기였지만, 부자들 거주 지역을 통과할 때는 주먹을 휘두르고는 위협했다. 황급히 창문에서 덧문을 내리기는 했었지만, 시위는 너무나 평화적으로만 끝났다. 조금도 항의 시위같지도 않았다.

레닌은 샤를 라포포르로부터, 마르크스 사위였던 라파르크와도 인연을 맺었다. 폴 라파르그는 노련한 투사였고, 레닌은 라파르그 의견을 소중하게 여겼다. 레닌은 라파르그 아내이자, 마르크스 딸이기도 했던 라우라와 함께 파리에서 20-25베르스타 거리에 있는 드라베이에서 살았다. 이미 직접적인 활동에서는 손은 뗐다. 한번은 레닌, 크룹스카야는 자전거를 타고 라파르그를 찾아갔다. 라파르그 부부는 무척이나 친절하게 맞이 했다. 레닌은 라파르그와 자신에 대한 철학 책 이야기를 나누었고, 크룹스카야는 라우라를 따라 공원을 산책했다. 크룹스카야는 마르크스 딸도 바로 내 눈 앞에 있따는 사실에 무척이나 흥분한 상태였다. 라우라 얼굴을 너무나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나도 모르게 속에서 마르크스 모습을 찾고는 말았다. 크룹스카야는 당황한 나머지 러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혁명 운동에서 여성은 참가하는 문제를 두고는 아는대로 횡성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라우라는 대답해주곤 했지만 대화 다운 대화는 잘 이뤄지지는 않았다.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라파르그와 레닌은 철학을 논했다. 라파르그는 레닌을 두고는 스스로에 대한 철학 신념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곧 증명할 거라고, 라우라는 라파르그를 보며 말했다. 묘한 웃음을 짓고는 서로를 쳐다봤다. 말과 눈빛은 무슨 뜻인지를 훗날 알게 됐다무신론으로는 동반 자살했다. 늙어가는데, 투쟁에서 필요한 힘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910년은 중앙 위원회 전체 확대 회의를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 편집부 확대 회의로는 당 단결을 위한 결의안, 볼셰비키 특별 대회 소집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동지들 모임으로는 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도 동일한 노선을 내세웠다. 반동기로는, 비록 지하 활동이더라도, 모든 진실을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당은 있어야만 한다는 건 매우 중요했다. 반동은 당을 파괴하고 있던 때이자, 기회주의 세력으로부터 당을 뒤흔들고 있던 때였고, 어떻게 해서든 당이라는 깃발을 움켜잡고자 했다. 청산주의들로는 러시아에서 자신들에게 보다 합법적이고, 강력한 기회주의 중앙을 가져갔다. 그러한 중앙에 맞서고자, 당은 꼭 필요했다. 카프리 학교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당시 노동계급들에게도 분파란 얼마나 상대적이고, 이상한가를 알게 됐다. 사회민주주의를 따르는 노동 대중을 모두 뭉치게할 수 있는 통일할 수 있는 당 중앙은 있어야만 했다. 1910년에는 당 존립 자체를 지키고자 벌인 투쟁, 당으로부터 노동 대중에게 영햐을 미치고자 투쟁도 이뤄졌다. 레닌은 당 안에서 볼셰비키는 다수파일 수 있고, 당은 볼셰비키 노선을 따르리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분파가 아니라 당이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 파리 근교로는 당 학교를 세웠다. 전진파, 멘셰비키 당원들까지도 참여했을 때도, 레닌은 같은 노선을 견지했다. 1912, 프라하 당 협의회에서도 잘 유지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 노선을 수행하는 분파가 아닌 당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에서는 청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다. 당은 투쟁하고자 여러 세력들도 모았다. 당 결정을 따르지 않을거라 미리 결심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마저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동지로는 당을 위한 투쟁을 타협하기를 넓히기만 하고는, 통합 목표마저 잃어버리고는 말았고,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조차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기만 하려는 방탕하기만 하듯이 갈피마저 잡지도 못했다. 레닌 관점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인노켄치조차도, 근본적으로는 멘셰비키 당원들, 플레하노프주의와 통합한다고 생각한 결과로부터, 당 통합을 이루려는 열망만 강했고, 타협파 관점으로만 기울어졌다. 레닌은 바로 잡았다.

 

결의안들은 전반적으로는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레닌은 단지 타협주의들에게 찬성표를 던지고는 자신 입장을 양보했다고 생각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전체 회의는 3주간 지속했다. 레닌은 본질 입장마저 물러서지도 않았고, 조직 문제로는 최대한 양보해야만 한다고 봤다. 볼셰비키 분파 기관지로는 <프롤레타리아>는 폐간됐다. 남아 있던 500루블짜리 지폐들도 소각했다. 볼셰비키 분파 자금줄로는 이른바 피신탁인이라고 불리는 독일 동지 세 명, 카우츠키, 메링, 제트킨에게 전달했다. 돈은 당 전체를 위해 사용할 때만 지급하도록 했다. 분열은 일어날 경우로는, 남아 있는 돈은 모두 볼셰비키에게로 반환했다. 카메네프는 비엔나로 파견해서, 트로츠키 신문, <진실>에서 볼셰비키 대표를 맡기로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상황은 엉망이었다. 전진파로는 조직화만 계속했다. 사회민주주의당에서 위험한 일탈을 제거하고, 청산주의, 소환주의를 제거하고, 당은 굳건하게 앞으로 나아갔고, 통합이라는 틀 안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멀리 전진했다고, 고리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1081, 포르니크에 왔고, 826일에는 이미 코펜하겐으로 먼저 갔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회의, 인터내셔널 대회에도 참석하고자, 대회 활동을 설명하면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수정주의들로부터 견해는 달랐지만, 수정주의들로는 독자적인 강령을 내거는 단계까지 나가지는 못했다. 수정주의와 투쟁은 미뤄졌고투쟁은 필연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으로는 스무 명으로 매우 대규모였다. 열 명은 사회민주주의였고, 일곱 명은 사회주주의 혁명가당 당원, 세 명으로는 노동 조합 대표들이었다. 사회민주주의 모임으로는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플레하노프, 바르스키, 마르토프, 마르티노프 등 모든 정파 대표들도 포함됐다.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콜론타이로는 심의권만 가졌다. 많은 손님들도 대회를 찾았다. 대회 기간 동안에는 레닌, 플레하노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제3대 두마 의원으로는 폴레타예프, 보크롭스키도 참석한 협의회를 열었다. 협의회로는 해외에서 대중 신문, <노동자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플레하노프는 외교관 역할을 했을 뿐임에도, 신문 첫 호로는 <우리 입장>이라는 기고문을 썼다파리 대회에서 알게 된 루나차르스키는 <인민>에다 <우리 당 전술 경향>이라는 글을 실었고, 모든 문제들을 소환주의 관점으로 조명하는 글이었다. 레닌은 같은 글을 일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는 글로 응수했다. 대회에도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글을 각자 논평했다. 인텨내셔널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전진>에서 익명으로 글을 실었고, 볼셰비키를 매번 공격했고, 비엔나 <진실>을 칭찬했다. 대회 대표로 참석했던, 플레하노프, 레닌, 바르스키는 <전진>에 글을 게재한 데 항의를 표했다. 플레하노프는 제2차 당대회도 있기 전, 트로츠키는 처음으로 해외에도 등장했던, 1903년부터 플레하노프에게 적대적이었다. 2차 당 대회를 앞두고는 대중 신문 문제를 놓고는 격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코펜하겐 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트로츠키 연설을 반대한다는 아무런 단서 없이 서명했고,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발행하기 시작한 <노동 신문>을 두고는 편협한 당파 기관지로 단언했고,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비엔나 모임에서도 같은 주제로 강연했다. 따라서 1월 전체 회의 뒤로는 <진실>에서 파견한 카메네프는 항의 표시로 편집부를 사퇴했다. 트로츠키 영향력 아래 있던 마크로부터 이끈 파리 타협주의 역시 파벌주의를 경계한다면서, <노동 신문> 반대 운동을 벌였다. 레닌은 투쟁을 고양한 시점에서 스스로 위치를 포기하는 무원칙한 타협주의, 누가 되든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과 타협하는 분위기를 확산하는 걸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10, <신시대> 50호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발전 경향>이라는 트로츠키 기고문을 실렸고, 51호에는 <프러시아 논쟁과 러시아 경험>이라는 마르토프 기고문도 실렸다. 레닌은 <러시아 당내 투쟁이 갖는 역사 의의>라는 글로 답하고자 했으나, <신시대> 편집자였던 카우츠키 부름으로부터, 레닌 기고를 거부했다. 카르스키는 레닌과 사전 조율한 뒤로 트로츠키, 마르토프에게 답했다. 1910년에는 이네사 아르망도 브뤼셀에서 파리로 왔고, 그녀는 파리 모임에서도 적극적인 활동가이자 한 사람이었다. 세마슈코, 카자코프와 함께 간부 모임으로 들어가서 다른 해외 모임들과도 폭 넓게 서신을 교류했다. 딸 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았다. 매우 열성적인 볼셰비키였고, 그녀를 둘러싸고 파리 사람들도 빠르게 모여들 수 있었다.

 

파리 모임은 전반적으로 조금씩 강화해갔다. 이념 결속도 다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끔찍한 가난에 시달렸다. 노동계급들은 어떻게든 그럭저럭 자리르 잡았지만, 지식계급들은 상황은 매우 지독하게 힘겨웠다. 노동계급은 늘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명 기금으로 살아간다는 건, 망명 식당에서 외상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다는 건 매우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험난했던 일들도 많았다. 한 동지는 칠장이였지만, 기술을 가지지 못해서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다른 동지도 사기 그릇 색칠하는 일을 구했지만, 푼돈 밖에는 벌 수 없어서, 굶주림으로 주름살도 늘어나보였다. 매우 슬픈 경우로는 모스크바 봉기에 참가했던 프리가라 동지였다. 교외 노동 계급 밀집 지역에서 살았고, 동지들은 아는 바도 거의 없었다. 미치고는 말아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해댔다. 굶주렸기 때문이었다. 정신과 의사는 환자를 만나고는 기아로부터 정신 착란이었고, 피해 망상으로 발전하면 자살할 수도 있으므로 주시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소조차 알지 못했고,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나섰지만 달아나고 말았다. 사람마저 실종됐으니 가시방석이었다. 시체는 센강에서 목과 다리에 돌로 묶여 있는 채로 발견됐다. 자살하고는 말았다.

 

소소한 다툼은 끊이질 않는 망명 생활이라는 분위기 속에서도 두 해 정도 더 살았더라면, 심신마저 다 지쳐 버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동기는 끝날 수 있었다. 톨스토이 죽음을 계기로부터 시위도 시작했고, <> 창간호도 발갱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볼셰비키, <사상>도 발행했다. 레닌은 기운을 되찾았고, 19101231일에 나온, <시위 시작>이라는 글로도 동지들에게 활동으로 나서자고, 모든 곳에서 조직을 건설하고, 사회민주주의당 노동계급 세포 조직도 만들어서, 강화하고, 정치 선동, 경제 선동을 발전하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러시아에서 최초 혁명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트로는 자유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고, 따라서 두 번째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을 승리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대중에게 가르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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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의미가 있는 결론

 

결론으로 들어가서, 십중팔구 여러 명 독자가 이미 품어봤을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건 의미가 있다. 왜 저런 신사 양반들과 긴 지면을 할애해서 논쟁했단 말인가. 그들이 기꺼이 반론이라 부르는 자유주의적인, 검열을 통과한 추잡한 주장들에 대한 나열에 진지하게 응답하는 게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 또는 교양 있는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러한 맹공격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격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 전체를 이뤄, 하나로 녹아들어갔던, 국내 사회 발전 시기가 아직은 되살아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지고,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다. 국내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상적으로도, 심오한 질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오늘날 일부 국내 사회주의자로부터 여전히 고수되면서,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 가장 해로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런 생각에는 전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는 넓은 간극이 존재하며, 그래서 지금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야 할 때, 민주주의자들의 사상과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결별이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할 때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사상이 태동했던 시절에, 실제로 국내 민주주의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비교를 위한 충분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관련된 독일에서 한 출판물, 중앙 사회 정책 신문,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에 관하여, 1893. 10. 2에서 니콜라이 온 선생의 공상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폈었던, 스트루베 선생을 크리벤코 선생이 공격하고 나선 점은 아주 흥미롭다. 크리벤코 주장에 따르면,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로 분류했다는 이유로 들어, 스트루베에게 공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그러한 끔찍한 비난에 얼마나 격분했던지, 훌륭한 크리벤코는 다음과 같이 고함을 질렀다.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한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농민들을 위해 규제를 만들고, 공동체와 농민의 경제적인 독립을 개혁 기초로 삼은 사람들 아니던가. 역사 연구자들과 같은 시대 삶을 연구하던 사람들, 그리고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들 거의 대부분이 그런 원칙들을 지지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가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망상의 피해자들이란 말인가.'

 

인민의 벗은 사회주의와 연관 지은 지독한 비판에 겁먹은 나머지, 스트루베의 '하찮은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지도 않았다. 실제로 마을 공동체와 분여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주의와 연관됐다고, 비난하는 행위는 실로 부당한 일이다. 도대체 거기에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알다시피, 사회주의란 노동 인민 착취에 맞선 저항과 투쟁, 착취에 따른 완전한 철폐를 위한 투쟁에 붙여진 이름이다. 반면에, 분여지를 옹호한다는 건, 한때 농민들이 마음대로 이용했었던 모든 토지에 대해 이제 상환금을 지불해야 하는 상태를 지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토지 대금 상환이 아니라, 개혁 이전에 농민들이 보유했던 토지의 무상 보유를 지지할지라도, 러시아에서처럼, 서구 전역에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가 됐던 게 다름 아닌, 봉건 시기에 차츰 진화했던, 농민 토지 소유권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마을 공동체를 옹호한다는 건, 곧 토지를 분배하는 관례적인 방식들에, 경찰이 개입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나선다는 점 역시도, 공동체 내에서는, 노동 인민의 착취가 충분히 존재할 수 있고, 또 발생한다는 걸 누구나 아는 상황에서는, 사회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다른 의미로까지 확대 과장했음에 불과하며, 그게 옳다면, 포베도노스체프 선생 또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스트루베는 그런 지독하고, 부당한 처사에는 잘못이 없다.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국민적인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스트루베가 인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플레하노프, 견해 차이를 언급했다는 점으로부터 스트루베는 인민주의자들을 어떻게 분류했는지를 알 수 있다. 플레하노프는 분명 사회주의자들, 다시 말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크리벤코는 인민주의자들을 겨냥한 비판을 자신에게 가해진 비판으로 여길만한 이유가 없다. 하지만 크리벤코가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사조에 대한 스트루베의 견해를 알고 싶어 안달이라면, 스트루베의 글에 나온 아래 단락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걸러시아 부에다 번역해서 옮기지 않은 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해갈수록, 방금 서술한 인민주의 철학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오랫동안 조짐이 목격된 타협할 수 잇고, 또 그걸 추구하는 무색무취 개혁적인 사조로 퇴조하든지, 실질적인 발전의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그 뒤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이론과 실질적인 결론에 도달하든지, 달리 말해, 더 이상 공상주의에 빠져 있지 않게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된다.'

 

크리벤코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타협할 수 있는 사조의 시작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면, 러시아 부의 이론적인 견해들을 흘끗 들여다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해당 잡지는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관한 인식을 인민주의 교리 조각들로 짜맞추려는 한심한 시도를 대표하며, 정치 구상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해서 소생산자들의 살림살이를 개선하고, 회복시키는 걸 목표로 삼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특징적이고, 의미심장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는, 대략적으로, 인민주의가 소부르주아 기회주의로 타락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부가 품은 구상에서 실체인 이민 규제, 토지 임차, 값싼 신용, 박물관, 창고, 기술 개선, 집단 농장, 공동 토지 경작, 나머지 모든 걸로부터, 봉건 지주들의 기관지도 아니고, 어용 신문에 속하지도 않는, 진지하고, 존경받는 자유주의 언론 진영 전반에서, 그런 견해가 참으로 널리 유통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또한 그런 모든 조치들이 필요하고, 절실하고, 시급하며, 심지어 무해하다는 생각은 지식 계급 전체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고, 또 아주 널리 퍼져 있다. 모든 지방 정부의 연구와 보고서들에서 나온 서술과 신문 등에서 그런 견해를 마주하게 된다. 이걸 인민주의라고 간주한다면, 그 성공은 의심할 나위 없이 실로 엄청나고, 명백하다.

 

물론 과거 관례적인 의미에서, 인민주의가 전혀 아니지만, 성공과 엄청난 파급 효과에는 자유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했던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를 한껏 고양된 기회주의로 변형시키고, 자유주의와 통합시켜서, 오로지 소부르주아 이익만을 대변하도록 하면서, 인민주의 품격을 더욱 떨어뜨리는 결과로 얻어진다. 이런 점을 확인하고자, 앞서제시된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분화라는 모습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결코 따로 떨어져 있거나, 새로운 사실들을 보여주는 게 아니며, 단지 반대자들조차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던, 농촌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 무리를 정치경제학적인 측면에서 표현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인민주의적인 조치들이 소부르주아를 강화시켜주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외 다른 조치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그들 무리 자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도, 보잘 것 없는 임시 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이 유럽 전역에서도 아주 친절하게 일궈놓았던, 그런 유형에서 비참한 실험으로 그치게 될 운명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예르몰로프, 비테와 같은 제정 정부에 소속된 자들조차 그런 유의 발전에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지지를 보낸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이 혁명적인 활동에서 손을 떼고, 계급 적대를 무마시키고자 화해와 통합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만 한다면, 그러한 실험들을 위한 자금을 기꺼이 대준다. 그렇다면 인민주의를 타락으로 이끈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민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이론은 아주 탄탄했다. 인민의 삶에서 특수한 방식에 대한 관점에서 출발한 건, 공동체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을 믿었고, 그 이유로, 농민을 타고난 사회주의 전사로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내 생활 현실에 대한 정교환 이론과 확인 작업이 부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특질이라 여겨지는 걸 기초로 한 정치적 구상을 적용시키는 경험도 짧았다. 그래서 이론 발전은 이론적인, 실천적인 두 가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론적인 작업에서는 주로 토지 소유 형태를 연구하는 작업으로 집중됐는데, 인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공산주의에 따른 기초적인 모습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작업에서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방대한 사실 자료들을 생산해냈다. 그러나 주로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와 관련된 그 자료들은 연구자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농촌 경제 상태를 완전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우선 생산 관계들을 추려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요한 믿을만한 사회 과학 상 방법 이론이 부족했고, 다음으로는 수집된 사실 자료들이 농민 경제에 암울한 영향을 미치는 당면한 어려움들과 농민들에 따른 당면 요구가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연구자들의 관심은 토지 빈곤, 높은 소작료, 권리 부족, 억압받고 짓밟힌 농민들의 상황 같은 어려움들을 연구하는 데 집중됐다. 모든 풍부한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고, 연구되고, 설명되어, 한 국가가 계급 국가가 아니라면, 정책이 지배 계급로부터 이해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인민 요구에 대한 공정한 토론으로부터 결정된다면, 당연히 그런 어려움들을 제거할 필요성이 수천 번도 더 납득된다. 사회와 국가를 설득시킬 수 있다는 걸 믿었던 순진무구한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구체적인 사실들에 완전히 매몰된 나머지, 당면한 어려움들로부터,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여 있던 경제의 주된 배경과 농촌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는 잊고 말았다. 자연스럽게도, 그 결과는 자신들의 손에 경제를 틀어쥔 계급, 주어진 경제 제도와 공동체 내 사회적·경제적 관계에서 유일하게 버틸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급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게, 곧 토지 빈곤 등으로부터 궤멸된 경제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거라는 결론이었다.

 

착취를 폐지하기 위한 토대와 버팀목이 되어 줄 제도를 연구할 방향으로 시작됐던, 이론 작업은 그러한 착취 제도로부터 의존하고 있는 바로 그 소부르주아 계급 이익을 대변해 줄 계획을 고안해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동시에, 실천적인 혁명 활동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농민에 따른 공산주의적인 본능에 대한 믿음은 당연하게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정치를 외면하고, 인민 속으로 들어가기를 요구했다. 수 많은 원기 왕성하고, 재능 있는 인물들은 같은 과정을 이행하는 데 착수했지만,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농민의 본성이 공산주의적이라는 발상이 얼마나 단순한 생각이었는지만 깨닫도록 했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은 농민이 아니라, 정부를 변화시켜야만 한다고 결정하게 됐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활동은 정부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됐고, 그 투쟁은 지식인들로부터만 진행됐다. 때때로 거기에 노동자들이 가담했을 뿐이었다. 처음에 투쟁은 사회주의 이름 아래 전개됐으며, 인민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고, 오로지 권력을 쟁취함으로부터만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혁명까지도 가져올 수 있다는 이론을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이론은 분명 완전히 신뢰를 잃어갔고, 정부에 맞선 '인민의 의지'의 투쟁은 정치적 자유를 위한 급진주의자들의 투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그 활동 또한 출발점과는 정반대 결과들로 이어졌다. 경우에 있어서도, 급진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이해 관계만을 대변하는 강령이 나타났다. 엄밀하게 말해서, 과정은 아직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명확한 한계가 정해졌다. 인민주의가 이렇게 전개된 과정은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그 강령이 순전히 농민 경제가 특수한 공동체적인 제도라는 그 신념은 사라져버렸고, 농민 사회주의는 소부르주아 농민의 급진적·민주적 표현으로 변해갔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자들의 진화 과정에 대한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크리벤코는,

 

'어렴풋이, 무르익어가는 순수 국내산 해파리처럼, 훌륭한 정서들로만 가득 찬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희생이나, 삶에서 지속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인간만이 생겨났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런 훈계는 뛰어났지만, 어디에 적용되는지를 잘 살펴보자.

 

'지속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의 경우, 짜증나는 사례를 알고 있다. 러시아 남부에 형제에 대한 사랑과 선의로 똘똘 뭉친, 몇몇 젊은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에게 지대한 관심과 존경을 보여줬고, 농민들을 귀한 손님처럼 여겨서, 과고와 과자를 가져다주고, 그들과 똑같은 접시에 음식을 나눠 먹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대가를 지불했으며, 돈을 빌려주거나, 사례금을 주거나,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돈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편 같은 지역에서는 슈미트라는 젊은 독일인도 살고 있었다. 토지 관리인이라고는 하나 그냥 정원사에 더 가까웠던 그 남자는 어떤 인문주의적인 사상도 지니지 않은 전형적인 쩨쩨한 독일인이었다. 3, 4년이 흐른 뒤, 그들은 갈라져서, 각자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또 20년이 지난 뒤, 그 지역을 다시 찾은 필자는 슈미트 씨가 농민들에게 포도 키우는 법을 가르쳐준 덕분에, 농민들은 연간 75-100루블에 이르는 어느 정도 소득을 거두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유지하게 됐고, 반면에, 농민에게 친절한 감정만 갖고 있었을 뿐, 실제로는 무엇도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 젊은이들은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계산해보면, 앞에서 서술한 사례는 대략 1869-1870년으로, 곧 국내 인민주의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이 유럽 제도들 가운데 가장 선진적이고, 중요한 '인터내셔널'이라는 걸, 국내에 도입하려고 시도할 무렵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확실히 크리벤코 설명은 다소 너무 지나치다는 인상을 심어줬고, 그래서인지, 크리벤코는 서둘러 유보적인 단서를 달아놓는다.

 

'물론 슈미트가 그 청년들보다 더 나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슈미트가 지역과 주민들에게 좀 더 오래도록, 지속적인 인상을 남겨준 이유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는 점이다. 슈미트가 중요한 무언가를 했다는 말도 아니다. 반대로, 슈미트의 행동은 아주 변변찮고,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 없는 우연적인 행동에 불과했지만, 모두에게 확실히 필수적이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보다시피, 이런 유보적인 설명은 아주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핵심은 모호하다는 게 아니라, 필자가 그 두 활동 유형 사이에서 근본적인 성향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한쪽의 성과 없는 활동을 다른 쪽의 성공과 대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시대 민주주의자 외관을 규정하는 데 있어 아주 특징적으로 되게끔 해주는 중요한 핵심이다. 농민들에게 유럽 제도와 노동자 연대체에 대한 말을 들려줬던 젊은이들은 분명 농민들에게 사회적인 삶의 틀을 바꾸고자 하는 염원을 불어넣기를 바랬다. 그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휘저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생기도록 같은 시대 사회에 맞서 농민들이 사회 혁명 대열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반면에, 슈미트는 전문가로 그저 타인 일처리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목적이 정반대인 두 가지 활동 유형을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건물을 무너뜨리려다, 실패한 사람을 그 건물을 보강하려는 한 사람을 비교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제대로 이치에 맞는 비교를 하려면, 인민 속으로 들어가 농민에게 혁명 기운을 북돋우려던 젊은 남녀들의 노력이 왜 그다지 성곡적이지 못했는지를 들여다봐야만 했다. 농민층이 정말로 노동 인민과 착취 받는 주민들을 대표한다고 믿었던 게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농민층이 단일한 계급을 이루고 있지 않고, 내부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형성되고 있어서였는지를 조사해야만 했다. 한 마디로, 과거 사회주의 이론들과 그 이론들ㅇ 데해나 사회민주주의적인 비판을 검토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슈미트 노력이 확실히 필수적이었다고, 입증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인민의 벗에게 열린 자세를 거듭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뭐겠는가. 누구든 의심을 품어보라는 거 아니던가. 포도밭에 투자해서 연간 75-100루블의 소득을 올리는 거 보다, 더 필수적인 게 뭘까.

 

크리벤코는 한 명의 농민이 포도밭에다 투자한다면, 고립된 활동에 불과하지만, 어려 명이 투자한다면 공동의 확산된 활동이고, 작은 일거리를 실질적이고, 적합한 노력으로 변화시키려는 활동이라는 걸 계속해서 설명한다. A.N. 엥겔하르트가 자신의 사유지에 인산 비료를 사용한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게 만들었듯이, 이런 민주주의자, 정말로 멋지지 않은가. 하나 더 들어보자. 농민 개혁에 대한 의견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분리되지도 않았던 시대에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체르니셰프스키는 농민 개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렇지만, 체르니셰프스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대해 우회적인 표현을 한 바 있다.

 

'내가 여러분의 저녁 식사를 위한 식량을 보호하려는 조치들에 관심을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여러분을 향한 내 친절한 마음 덕분에 내가 그런 조치를 취한다면, 그런 내 열의는 식량이 여러분, 거고 그렇게 준비된 저녁 식사는 여러분에게 유익하고, 이롭다는 가정을 토대로 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식량이 여러분들 소유가 아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식사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초를 겪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 매겨졌다는 점을 내가 알게 됐을 때, 내 기분이 어떨지 상상해보시라. 내가 그런 불편한 사실들을 알게 됐을 때, 머릿 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효용성을 보장해줄 조건들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도, 문제에 골머리를 썩인다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일부 사람들이 유리한 조거능로, 소유권을 받게 됐을 되는 상황에서, 먼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그들의 소유권 보유에 신경을 쓰겠는가. 식량이 내가 아끼는 친구에게 피해만 줄 거라면, 식량을 전부 잃어버리는 게 훨씬 더 낫다. 그게 여러분을 몰락으로 이끌 뿐이라면, 일 전체를 그만두는 쪽이 훨씬 더 낫다.'

 

체르니셰프스키가 시대의 현실을 얼마나 깊이 있고, 훌륭하게 이해했고, 농민들이 지불해야 할 상환금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국내 사회 계급들 간 적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단락들을 별도로 강조했다. 검열에 노출된 언론에서 그런 순수하게, 혁명적인 생각들을 자세하게 설명할 줄 아는 능력에서도 역시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불법화된 저술들에서는 똑같은 내용으로, 글을 에두른 표현 없이 쓴 적이 있다. 특히서문을 위한 서문에서 볼긴 말을 빌려 말했다.

 

'지주들의 정당 손에 농민의 해방을 맡기시오. 그다지 별 차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주들의 정당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할당해주기를 반대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차이가 엄청날 거라는 상대방의 언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답했다.

 

'아니. 차이는 별로 크지도 않고, 무의미할 정도이다.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도, 토지를 확보할 수 있다면, 차이는 엄청나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가져가는 거와 그의 수중에 그대로 둔다는 건 분명 차이가 있지만, 물건을 가져가면서 그 사람에게 대금을 치른다면 완전히 똑같은 셈이다. 지주 정당과 혁신주의자들의 구상 간 유일한 차이로는 지주 정당이 더 단순하고, 시간이 짧게 걸릴 뿐이다. 차라리 그 쪽이 훨씬 더 나은 이유도 있다. 불필요한 양식 행위가 줄어든다면, 대부분 농민들의 부담을 덜한다. 돈을 가진 농민들은 땅을 사고, 돈이 없는 농민들에게는 땅을 사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땅을 사라고 강요한다는 건, 농민들을 몰락시킬 뿐이다. 토지 상환금을 내라는 건, 사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농민 개혁이 막 도입되고 있던 시대에, 부르주아적인 본질을 이렇게도 명확하게 꿰뚫어본다는 건, 체르니셰프스키 같은 사람의 비범한 재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당시로는, 이미 국내 사회와 국가가 노동 인민과는 화해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이었던, 사회 계급들로부터 지배되며, 통치되고 있다는 점과 농민층 몰락과 강탈은 사회 계급들로부터 명백하게 미리 결정됐다는 점을 이해하기에도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체르니셰프스키는 사회적적인 적대 관계를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는 정부 존재가 노동 인민 조건을 훨씬 더 악화시키는 끔찍한 악마라는 점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긴은 계속해서,

 

'사실대로 말하자면, 농민들은 토지 없이 해방되는 쪽이 더 나을 거며,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지주들이 농민들을 해방시켜줄 거냐 하는 건 말할 거도 없고, 농민들이 해방됐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도 신이 나서 흥분할 만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내생각에는 그건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차라리 지주들이 솔직해지면 더 좋겠다.'

 

그리고 여기 '수신인 없는 편지'에서 가져온 단락도 있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라고 말한다. 그럴 만한 힘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힘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럴 만한 힘이 부족할 때, 일에 달려드는 건 소용없다. 그러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뻔히 보인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해방시키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글쎄.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에 달려들 때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스스로 판다해보기 바란다. 그저 일을 그르치고, 결과는 끔찍하다.'

 

체르니셰프스키는 국내 봉건 관료제 국가가 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점, 곧 봉건적인 농노 소유주들을 타도할 수 없다는 점과 끔찍한 무언가로부터, 다시 말해, 자유주의자들과 지주들의 이해 관계 사이에서 보잘것없는 타협만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협을 위해서는 안위와 자유라는 환상을 동원해서, 농민들을 기만하는 게 필요하며, 실제로는 농민들을 몰락으로 이끌어 지주들에게 완전히 팔아먹을 거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체르니셰프스키는 개혁에 저항하고, 맹렬하게 비난해댔고, 그게 실패하기를 바랬다. 그리고 정부가 자유주의자들과 지주 사이에서 줄타기에 꽁꽁 묶여 추락하면서부터 국내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길로 올라서기를 바랬다. 그러나 체르니셰프스키의 훌륭한 예언이 현실화되고, 지난 30년 간 역사가 모든 경제적·정치적 환상들을 가차 없이 드러내 보여준 오늘날에도, 현재 우리 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인민 생산에 대한 허가로부터 여기며, 거기에서 노동 인민에 적대적인 사회 계급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방안들을 찾을 수 있는 증거를 끌어낼 궁리를 한다. 되풀이하지만, 농민 개혁을 향한 민주주의자들의 태도는 민주주의자들이 얼마나 뼛속 깊이 부르주아로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증거이다.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너무나 많은 걸 잊어버렸다. 대목에서 비교를 위해, 1872,조국 연보를 들어볼까 한다. 앞서 이미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이 있은 뒤, 10년 간 국내 사히가 이룩한 자유주의에 있어,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를 감춘 성공을 다룬,금권 정치와 토대의 몇몇 구절들을 인용한 바 있다.

 

같은 글에서 크리벤코는 예전에는 개혁에 관해서 징징거리고, 좋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사람들을 가끔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고 쓴 적이 있었다. 모두가 새로운 질서에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거다. 그리고 필자는 계속해서 어떻게 문학 자체가 금권 정치의 기관이 되어, 민주주의를 빙자해서, 금권 정치의 이해 관계와 열망을 옹호하게 되는지를 보여줬다. 같은 주장을 조금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도록 하자. 크리벤코는 개혁이 가져다준 새로운 질서에 모두가 기뻐한다는 점과 새로운 질서의 명백히 적대적인 부르주아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행복해하며, 만족해한다는 점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중은 자유주의가 단지 노동 인민 대중의 불리한 희생을 당연하게 대가로부터 한 취득의 자유를 가려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벤코는 반대하고 나섰다. 크리벤코의 주장에서 가치가 있는 건, 사회주의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반대한다'는 점 그 자체였다. 금권 정치가 민주주의로부터 가려진 데에 대한 반대가, 해당 잡지에서도 전반적인 논리와 모순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 개혁 안에 부르주아적인 특성들과 요소, 이해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과 국내 지식 계급 및 국가의 계급적인 성격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민주의자들은 국내 자본주의를 위한 토대가 존재한다는 점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집단의 존재를 느끼고, 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국내 사회 내의 적대를 감지한조국 연보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인민주의자들은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했던 대의명분 아래에서 투쟁을 벌인 셈이었다.

 

선구적인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적대적인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적대적인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걸 만들어낸 사회 구조 자체와 싸우기를 바랬다. 그래서조국 연보는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시각에서 볼 때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를 망각해버렸고, 한 국가 신성 국내 순혈 부르주아들이 민주주의라는 외피 아래로 몸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 대한 모든 지각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오늘날 인민의 벗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관계에서도 반동적인 이유이다. 인민의 벗들은 적대 관계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갈 뿐만 아니라, 투쟁이 아닌 유화적인 고양 활동만을 말한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 1860년대, 민주주의자로 금권 정치를 대표했던 말끔한 눈썹으로, 국내 자유주의자가 1890년대로 접어들어, 자신의 눈썹이 시민들의 근심으로 뒤덮였다는 이유만으로도,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가이기를 그만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 현재 사회적·경제적 관계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대규모 획득의 자유, 곧 거대한 신용과 거대한 자본, 거대한 기술 개선을 획득할 자유가 단지 소규모 신용과 소규모 자본, 소규모 기술 개선을 취득할 자유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유주의적, 다시 말해, 부르주아적이기를 멈추었던가.

 

거듭 말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은 한 국가 질서에서 급진적인 변화나, 급진적인 시각 변화의 영향에 따라, 자신들의 견해를 바꾼 게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저 잊어버렸을 뿐이다.

한때는 자유주의자들의 선배들을 불건전하고, 순진무구한 이론, 현실에 대한 공상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으로 만들었던 유일한 특성마저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모든 시간 동안 배운 게 무엇도 없다. 국내 현실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분석은 차치하고서라도, 지난 30년 간, 국내 정치 역사는 그들에게 많은 걸 가르쳤어야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1860년대, 당시에 봉건 지주들의 권력은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봉건 지주들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주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고, 그래서 슬그머니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고개를 쳐들었다. 발전, 과학, 우수성, 불의에 맞선 투쟁, 인민의 이익, 인민의 양심, 인민의 힘, 등등에 관해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들이 오늘날 특수한 불황의 시기에도 급진적인 불평불만꾼들과, 자유주의 입담꾼들이 사교 살롱과 기념일 만찬, 잡지와 신문에서 토해내고, 여기저기 넘쳐대는 미사여구가 바로 그렇다. 자유주의자들은 전적으로, 그렇지는 아니하더라도, 타당한 기준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는 걸 입증했다. 당시에도, 국내에서 공개적인 게급 투쟁에 따른 밝은 빛이 비춘 건 아니었으나, 빛은 조금보다는 더 밝아졌고, 그래서 계급 투쟁이라는 개념은 조금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독한 현실을 해명하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쪽을 택했던 노동 인민의 관념론자들조차도, 자유주의는 금권 정치가 두른 외피일 뿐이며, 새로운 질서는 곧 부르주아 질서라는 점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봉건 지주들이 무대에서 제거된 덕분에 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당시에도, 여전한 단순 폐해들로 관심을 분산시키지 않았고, 비교적 순수한 형태에서 새로운 질서가 목격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대 민주주의자들은 금권주의적인 자유주의를 비난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걸 이해하고,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자본주의적인 사회·경제 구조 아래에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과거 봉토 제도와 비교해볼 때도, 새로운 삶의 체계가 갖는 발전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 체제가 만들어낸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인 역할 역시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와 사람됨의 체제에 코웃음을 치는 데 그쳤을 뿐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우연이라고 상상했으며, 다른 어떤 종류의 사회적인 관계가 인민적인 제도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 기대했다. 그 뒤로, 역사는 민주주의들에게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을 보여줬다. 개혁으로부터 터무니 없는 이익이 손상됐을 뿐 완전히 궤멸되지 않은 봉건 지주들은 한동안 되살아나, 부르주아적인 사회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줬고, 민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순진무구한 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진전시키고, 변형시키는 대신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허우적대다가 자유주의자들로 퇴보한 다음, 이제는 칭얼거리는 자신들로부터, 곧 자유주의자들의 이론과 강령들이 진지하고, 존경받는 언론 전체로부터 공유된다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점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분별하고, 악랄한 반동 형태로 보여줬다. 사람들에게도 아주 인상적인 교훈을 남겼고, 인민의 특수한 삶의 양식과 인민의 사회주의적인 본능,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의 우연적인 성격에 대한 옛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은 너무나 명백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 앞에서 펼쳐진 현실들을 똑바로 쳐다본 뒤, 국내에서는 부르주아와 소멸 직전의 봉건적인 관계 말고는 다른 어떤 사회 경제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고, 따라서 노동 계급 운동을 거치지 말고는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은 거기에서 무엇도 배우지 못했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순진한 환상은 소부르주아 발전으로 실질적인 온건한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오늘날에도, 노동 인민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처하고 나선,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은 분명 반동적이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현재 국내 사회적·경제적인 적대 관계를 모호하게 하고, 향상, 개량 등으로부터 모든 걸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치들로부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만, 그래서 화해와 통합을 이뤄낼 수 있듯이 주장한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이론들은 국가를 초계급적이고, 착취 받는 인민에게도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그러히게 적합한 존재로 묘사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마지막으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 이론들은 단순히 투쟁의 필요성과 곧 해방을 위한 노동 인민 스스로 절박한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반동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신들의 모든 걸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고만 생각하는 듯하다. 노동자들은 걱정할 필요도 없다.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기술자 한 사람이 거기에서,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기 위한 계획을 거의 완벽하게 구상했나 보다.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소부르주아 사상 및 이론들과 단호하고, 완전하게 결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회주의 투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주요하고도, 쓸모 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부르주아 사상과 단절을 주장했지, 인민의 벗들이나, 인민의 벗의 사상과는 단절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어떠한 연관성도 없는 무언가와는 더욱이나 아예 단절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사상들, 낡은 국내 농민 사회주의 사상들과 전체적으로 단절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낡은 사상의 대리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성장에 겁먹은 나머지, 시작한 반마르크스주의 운동이 농민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 사상들을 유달리 풍부하고, 선명하게 표명하도록 유도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사상들을 동시대 사회주의 및 국내 실상과 비교해보면, 사상들이 얼마나 시대에 뒤처졌고, 그리고 완전한 이론적 토대의 흔적을 모조리 상실한 채로, 한심한 절충주의와 가장 평범한 기회주의적인 고양 강령 단계로까지 전락했는지를 놀랄 만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물론 그게 낡은 사회주의 사상 전반의 과실이 아니라, 누구도 사회주의자로 분류해주지 않는 문제의 신사 양반들의 잘못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상당히 불합리하다. 그런 낡은 이론들은 퇴화되는 게 불가피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써왔다. 특히 그런 신사 양반들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최대한으로 줄이고, 낡은 국내 사회주의의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신조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공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런 신조들을 부정확하다거나, 부적절하게 규정한다든지 말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이 있다는 걸, 사회주의자들이 알아낸다면, 아주 겸손한 요청으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신사 양반들, 부디 여러분이 직접 밝히고, 제대로 충분히 설명해주시오."

 

정말이지 사회주의자들과 논쟁할 기회를 갖는 건, 사회민주주의자들만큼 반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신사 양반들이 직접적으로, 끈질기며, 단호한 도전을 해오지 않는데도, 그들의 논박에 답하는 걸 기꺼워할 리가 있는가. 그렇다구 신물 나는 진부한 자유주의적인 미사여구와 속물적인 훈계들을 읽고, 또 읽어, 억지로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게 불필요하다고 봐야 할까. 확실히 오늘날 그런 사상들이 옳다는 걸 입증하고, 자세하게 설명할 임무가 오로지 신사 양반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이 우리 책임은 아니다. 또한 사회주의와 관련된 소부르주아 사상들과 단절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데에도 여러분이 주목해주기를 부탁드린다. 검토한 소부르주아 이론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한 무조건 반동적이다. 그러나 실제로 속에는 사회주의적인 부분도 전혀 없다는 걸, 곧 이론들은 모두 노동 인민 착취를 해명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버렸고, 따라서 노동 인민의 해방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도 없으며, 사실상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해 관계를 반영할 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향한 우리 태도는 달라야만 하고, 그래서 소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지들의 구상에 대한 노동 계급 태도는 어떠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해당 질문은 소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적인 성격이 고려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보통의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을 내세우는 한, 다시 말해, 중세 시대와 농노제 존속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 있어서 발전적이다. 반면에, 또 소부르주아 계급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싸우고, 한 국가의 전반적인 발전으로부터, 부르주아 노선에 따라 지연시키고, 되돌리려 애쓴다는 점에서 가히 반동적이다. 농민들을 감독하고자, 여타 수 많은 기획들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분여지 양도 불가 같은 식으로, 반동적인 요구들은 노동 인민을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대개 가려졌지만, 실제로는 물론 노동 인민들의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며, 해방을 향한 노동 인민 투쟁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소부르주아적인 구상의 두 가지 측면들은 서로 엄격한 구분이 이뤄져야만 하며, 소부르주아 이론들이 어쨌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고, 반동적인 측면과 맞서 싸워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이론들이 가지는 민주적인 측면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부르주아 이론들을 절대적으로 거부하긴 하지만, 소부르주아들로 하여금 소부르주아의 구상 속에 민주주의를 포함시키기까지 막아서는 건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민주주의를 훨씬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앞서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이론적인 상투적 요소들을 언제나 형성해온 세가지 주요한 논지들, 곧 토지 빈곤, 높은 지불금, 당국 폭정을 언급한 바 있다.

 

 

같은 악행들의 폐지 요구에는 사회주의적인 측면마저 전혀 없다. 그건 강탈과 착취를 조금도 해명해주지 못하며, 그런 악행들의 제거는 자본으로부터 노동 억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억압을 더욱 가중시키는 중세 찌꺼기를 없애주며, 자본을 상대로 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투쟁을 촉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인해, 민주적인 요구로부터 노동자들의 가장 활발한 지지를 얻게 된다. 일반적으로, 지불금과 세금 문제는 소부르주아만이 특별한 중요도를 부여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농민들이 내는 지불금은 많은 측면에서 볼 때, 농노제 유물일 뿐이다. 토지 상환금은 즉시 무조건적으로 폐지되어야만 한다. 농민들과 소도시 사람들만이 지불하고, 상류층에게는 면제되는 세금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경제적·정치적인 침체를 야기하는 중세적인 관계에서 유물들을 폐지하라는 요구에 언제나 지지를 보낸다. 토지 빈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이 적용될 수 있고 말이다. 관련해서, 그런 불평의 목소리를 가진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농민 개혁에 따른 토지 절취 허용은 분명 지주들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을 강탈하도록 하면서부터 엄청난 반동 세력인 지주들에게 직접적인 농민에게서 땅을 탈취하고, 간접적으로 분여지를 구분하는 영리한 방식으로 이바지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서 빼앗아간 토지를 농민들에게 즉각 되돌려주고, 봉건 제도 및 전통 보루인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를 아주 필사적으로 주장한다. 토지 국유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토지 소유권에 따른 완전한 폐지는 이미 한 국가에서도 형성된 자본주의 농업 관계를 더욱 급속하고, 풍부하게 번창시킬 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사회주의적인 측면을 전혀 담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토지 귀족 힘을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조치로는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이 수탈되고, 착취 받는 원인으로는 농민들의 부족한 권리를 지목할 수 있는 건, 유자코프와 V.V. 보론초프를 따르는 자들만이 유일하다. 당국으로부터 농민 억압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며, 단순한 억압 이상이다. 농민들을 토지 귀족에게 복종하는 게 마땅한 천한 무리로 취급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시민으로 일반적인 권리는 토지 귀족에게 이주와 같은 특별한 호의로만 베풀어질 뿐이며, 농민들이 노역장 수용자들이라도 되는 양, 하급 관리조차 거드름을 피우며, 농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의 시민적인 권리에 따른 완전한 회복과 모든 귀족 특권으로부터 완전한 폐지, 농민에 대한 관리 감독 철폐, 스스로 일을 직접 알아서 할 수 있는 농민들의 권리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지지한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사회민주주의라고 불러야만 하며, 자신들의 활동에서 민주주의의 거대한 중요도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국내에서 중세적이고, 절반은 봉건제적인 유물들은 서구 유럽과도 비교해봤을 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민들을 억압하는 멍에가 되어, 모든 계급의 정치 사상에 따른 성장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봉건제도들과 절대 왕정, 사회적인 신분제, 관료 체제에 맞서는 투쟁이 노동자들에게도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제도들이 얼마나 반동적인지, 자본으로부터 노동 탄압을 어떻게 강화하는지, 노동 인민들에게 어떤 모멸적인 압력을 행사하는지, 어떻게 자본을 중세적인 형태로 계속 머무르게 만드는지, 노동 착취에 대한 한 현대 산업 형태에는 못 미치지만, 해방 투쟁에 지독한 난관을 심어놓는지를 노동자들에게도 최대한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반동의 기둥들을 쓰러뜨리지 않고서는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성공적인 투쟁을 벌일 수는 아예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부르주아 계급들이 존재하는 한, 국내 농촌 프롤레타리아는 언제까지나 짓밟히고, 주눅 든 존재로 영리하고, 끈기 있는 저항 대신에, 자포자기식으로 볼멘소리밖에 할 줄 모르는 상태로 남아, 노동 계급의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지지는 영원히 까마득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절대 왕정과 반동적인 사회 신분 및 제도들에 맞서 급진적인 민주주의자들과 나란히 싸우는 게 노동 계급의 직접적인 의무인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그런 의무를 명심시켜줘야만 하며, 그런 제도들 모두에 맞서 싸우는 게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한 투쟁을 촉진할 수단으로 꼭 필요하다는 점을 노동 계급들에게 인식시키는 작업을 한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또한 노동 인민들의 주적, 곧 태생적으로는 순수하게 민주적이었으나, 특히 국내에서는 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한편, 노동자들을 억누르고자, 반동들과 손 잡고, 노동 계급 운동 출현을 더욱 한층 방해하는 경향이 있는 자본을 상대로 한 승리 길을 열어주는 전면적인 민주적인 요구들의 성취가 노동자들에게 필요하다는 인식도 심어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말로한 내용들로부터, 절대 왕정과 정치적인 자유를 향한, 그리고 더욱 더 강력해지고 있는 정치적인 자유를 얻고자 모든 혁명 집단들의 연합과 동맹을 지향하는 경향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태도를 충분하게 정의내렸다. 경향은 다소 독특하고, 특징적이다. 여기서 독특하다는 건, 여러 점에서 일치하는 명확한 계획을 지닌 하나의 집단이나, 여러 집단들로부터 동맹을 위한 제안이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동맹 문제가 각각 따로 떨어진 경우에 맞게 연합한 집단들의 대표들로부터 해결되는 구체적인 문제가 됐고, 특수하게 연합하려는 경향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실제로 존재하고, 과거로부터 표류해서 아직 새로운 곳에 정박하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 절대주의 체제에 맞선 전사들이 여태껏 토대로 삼아왔던 이론은 명백히 무너져내렸고, 투쟁에 필수적인 연대와 조직ㅇ르 위한 조건들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합 세력과 동맹 지지자들은 그런 이론을 창조해내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요구로 축소시키면서, 사회주의적인 문제와 비사회주의적인 문제를 포함한 다른 모든 문제들을 얼버무려 넘기는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통합을 향한 첫 시도에서, 그런 순진한 오류는 필시 밑바닥부터 뒤집히게 된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특징적인 점은 연합의 경향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인민주의가 정치적으로 봤을 때, 급진 민주주의로 전화하는 과정, 앞에서 개괄하려고 했던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들 가운데 하나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된 기치 아래 모인 모든 비사회주의적인 혁명 집단들의 연합은 오직 국내 예외주의라는 낡은 편견을 끝장내고자 민주적인 요구들을 담은 지속할 수 있는 강령이 마련됐을 때만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런 민주적인 정당을 설립하는 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유용한 발걸음이 될 거라는 걸 믿는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인민주의 활동은 더욱 발전시켜, 모든 편견과 신화를 뿌리째 뽑고, 사회주의자들을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묶어내어 다른 집단들로부터 민주적인 정당 설립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노동자들에 따른 독자적인 조직화로부터 별도 노동 정당을 세우는 게 필수적이라 여기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물론 그런 정당화 연합할 수는 없겠지만, 노동자들은 반동적인 제도들에 맞선 민주주의자들의 그 어떤 투쟁도 아주 강력하게 지지한다. 인민주의가 가장 평범한 소부르주아 급진 이론으로 타락한 인민의 벗들이 아주 두드러진 증거이다. 사실은 사회적 관계의 적대적인 성격과 전체 노동 인구 해방을 위한 전사로부터 국내 노동자의 역사적인 임무를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해명하지도 않고, 절대주의 체제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고만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시킨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 관념론자들까지 정치적인 자유에 호의적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덕분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마르크스 경제 이론을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그러나 국냉서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회적인 경제의 부르주아적인 구상으로부터 설명되지도 않고, 토지 빈곤, 상환금, 또는 당국 폭정으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설명된다면, 가치 형태와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적 역할을 노동자들에게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이론이 완전히 자리 잡은 공장 노동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인민 대중은 말할 거도 없고, 노동자와 교옹주 관계조차 설명해줄 수 없다면, 계급 투쟁 이론을 노동자에게 설명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국가 인민들이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매개체로부터 공산주의에 다다를 방법을 찾고자 한다면, 마르크스 경제 이론과 당연한 귀결인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를 열어젖히는 사람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분명 그런 조건에서 노동자에게 정치적인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하는 발전적인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불구덩이에서 밤톨을 끄집어내라고 요구하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정치적인 자유가 주되게는 부르주아 계급 이익에 기여할 뿐, 노동자들 처지를 개선시켜주지 않을 거라는 점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해서, 노동자 투쟁을 벌이기 위한 조건을 용이하게 해준다. 자신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혁명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경험적으로 확신하게 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 내에서 계속해서 소요를 일으키는 데 대한 반대 수준에서도 일러둔다. 그들 사회주의자들의 이론은 실천과도 모순되며, 사회주의 노동 정당을 조직할 과업으로부터 노동자들을 흩어놓는 아주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 계급 적대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않았고, 농노제로부터 억제된 시점에서도, 농노제가 지식 계급 전체 일치된 반대 투쟁을 불러오면서부터 지식 계급 내에서도 특수한 민주적인 측면이 있고,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사이에서 간극은 전혀 깊지 않다는 환상을 빚어내는 시점에 떨쳐 일어난 건 당연히 잘못이었다. 이제 경제 발전이 상당히 진행된데다, 에전에는 국내 자본주의 토대를 부정했던 사람들조차도,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 발전 경로에 진입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런 환상조차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지식 계급의 구성은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접어든 사회 구성만큼이나 아주 뚜렷한 윤곽을 취한다. 오늘날 사회는 자본가가 지배하고, 다스리는 반면에, 지식 계급 사이에서는 급속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는 출세주의자들과 부르주아 심부름꾼 무리가 방식을 정하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지식인 은 그저 자족하면서, 받아들일 뿐이다. 이런 점들을 부인할 수 없었던 급진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그걸 강하게 강조하고, 부도덕하다는 걸 입증하고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비난을 가하고, 틀렸다는 걸 입증한 뒤에, 부숴 없애려고 애쓴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자신이 부르주아적인 걸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순진한 노력은,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인민의 몰락과 빈곤, 실업, 대중 기아가 머지않았다는 말로부터, 부르주아들을 겁먹게 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어리석다.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이론가들의 같은 시도는 강물에 내던져진 형벌에 처한 물고기를 떠올리게 한다. 마찬가지로, 도를 넘기 시작한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지식 계급은 발전이니, 과학이니, 진실이니, 인민이니, 하는 무수한 표현들을 쏟아냈고, 불협 화음, 우울, 낙담, 무관심이란 찾아볼 수 없이, 민주주의로 온 심장이 불타올랐던 1860년대가 지나가기를 비통해 한다.

 

그들의 단순한 특징이 된, 신사 양반들은 1860년대만 하더라도, 의견 일치가 지배적이었던 이유가, 당시에는 존재하다가, 이제는 사라져 되돌아올 수 없게 된 물질적인 조건 때문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때는 농노제가 모두를 똑같이 억눌렀고, 약간의 돈을 모아 편안하게 살기를 바랐던 농노 관리인이 있었으며, 지대를 받아내고, 일일이 간섭하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지주를 증오했던 기업형 농민이 있었다. 무산화한 장원 농노와 빈곤에 빠진 농민은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갔으며, 상인 제조업자와 노동자, 수공업자와 하청인에게 고통을 가져다줬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관련한 유일한 끈은 농노제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이었다. 와중에도 그러한 의견 일치 너머로 가장 날카로운 경제적인 적대가 시작됐다. 그 적대가 너무나 거대하게 발전한 오늘날에서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려면, 달콤한 환상에 얼마나 흠뻑 젖어 있어야만 하는 걸까. 상황이 투쟁을 요구하는 시대에도 의견 일치가 존재하던 지난 날로 돌아가고 싶어 눈물 흘리는 대신에, 기꺼이 또는 마지못해 부르주아 계급의 신하가 되는 걸 원치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롤레타리아트 쪽에 서도록 요구되는 시점이다. 여러분이 인민 이익에 대해 그럴듯하게, 치장된 말을 믿기를 거부하고,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본다면, 다양하고, 순수한 발전적인 조치들로부터 인민들의 경제를 개선하고, 지원하고, 회복시키려는 꿈을 꾸는 철저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 사람들은 지배적인 생산 관계 아래에서 그런 발전적인 조치들이 끼칠 수 있는 유일한 효과로는 대중 무산화를 더 한층 심화시킬뿐이라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식인들의 계급적인 성격을 드러내주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부터 한 국가 소생산자들 역시 소부르주아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공고하게 해준 데 대해 인민의 벗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의 벗들은 오랫동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낡은 환상과 신화들의 소멸을 불가피하게 재촉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이 이론들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히고, 남용하고, 더럽힌 나머지, 그걸 간직해온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의 벗들을 수정하거나, 모두 포기하든지 아니면 신사 양반들이 독점해서 사용하게 내버려두든지, 선택해야 하는 가혹한 궁지에 처해 있다. 인민의 벗들은 부유한 농민들이 개선된 농기구를 구입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고, 근엄하게 전 세계에 선포하고, 카드 놀이에 싫증난 사람들을 따듯하게 맞아줘야 한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확언한다. 그리고 같은 어조로부터, 인민 제도와 지식 게급을 말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잘난 체하는 과장된 표현들로부터 드넓은 이상과 삶의 문제들에 따른 이상적인 치유를 입에 올린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환상을 포기하고, 희망으로 바라는 국내 발전이 아닌 실질적인 발전, 그리고 있음직한 사회 경제적인 관계가 아닌, 현실적인 관계 지지를 추구하기 시작할 때에만 내실 있는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의 이론적인 활동은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서 경제적인 적대와 연관되고, 연속적인 발전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로 향해야만 한다. 사회주의적인 지식 계급들은 정치 역사와 법률 제도의 특성, 또는 기존에 확립된 이론적인 편견으로부터 언제나 감춰졌던 적대를 드러내주어야만 하며,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 현실을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나타내주고, 현 체제에서는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과 경제 발전으로 표현되는 현 체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내 역사와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에 기초해서, 같은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 요구에 걸맞는 해답을 제공해주어야만 하며, 그게 과학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저항적인 사고가 깨어날 때마다, 반드시 사회민주주의 바다로 인도하게 된다. 같은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어, 더 큰 진전이 이뤄질수록 사회민주주의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현 체제에서 가장 교활한 수호자들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 사상에서 각성을 막을 수는 없다. 현 체제 자체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게 생산자들의 가장 극심한 강탈과 프롤레타리아 및 예비군의 끊임없는 성장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인 부에 따른 진척과 생산력에 따른 거대한 발달,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와 나란하게 병행된다. 해당 이론을 정교하게 다듬기까지 아무리 할 일이 많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자들은 그걸 해내고야 만다. 모든 계획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과정에 따른 엄밀한 공식화를 요구하는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유물론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확산되고, 유물론 사상들을 채택한 사회민주주의자가 성공을 거두고 있는 현실을 보장한다. 사회민주주의 성공은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을 마구 휘저어놓아, 어떤 마르크스주의자가 말했듯이, 그들이 펴내는 월간지들도 더 이상 따분하지가 않을 정도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인 활동이 필요하고, 중요하면서도, 방대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사회민주주의 활동이 실천적인 활동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결코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회민주주의 이론들이 완성될 때까지 사회민주주의 활동을 연기해야 할 이유는 많지도 않다. 사회학의 주관적인 방법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공상적인 사회주의 추종자들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임무가 한 국가를 위해 현재 발전 경로와는 다른 경로를 추구한다고 여긴다면, 당연히 천재적인 철학자들이 그 다른 경로를 알아내고, 갈리킬 때에만 실천 활동을 할 수 있고, 거꾸로 말하면, 경로가 포착되고, 표시되기만 하면, 실천 활동은 그냥 끝을 맺는다. 그때부터는 새롭게 알아낸 다른 경로를 따라 조국을 안내할 사람들의 역할이 시작될 테니 말이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발전에서 실질적인 길을 가로막고서는 실질적이고, 진정한 적들에 맞서, 현실 투쟁을 벌이는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이념적인 지도부 역할이라고 할 때는,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상태에서 이론 활동과 실천 활동은, 독일 연륜 있는 사회민주주의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로부터 적절하게 표현한 말로 수렴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앞서 말한대로, 이론적인 활동 없이는 사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듯이, 이론 활동을 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결과를 확산시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돕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라는 과업 제시는 사회주의자 집단들이 아주 흔히 겪는 교조주의와 종파주의로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최고 이론이자, 유일한 기준이 실제적인 사회적·경제적 발전 과정과 일치하는 곳에서는 교조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있을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조직화를 촉진하는 건, 임무가 되고, 따라서 지식 계급 내부에서 특정한 지도자들을 내오기를 불필요해질 때, 역시 종파주의가 생겨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많은 이론적인 문제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 활동 방식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집단이 생겨난 이래로 변함없이 유지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인 활동은 국내에서 노동 계급 운동 조직화와 발전을 촉진하고, 운동을 현재와 같이 지도 사상도 없이 간헐적으로, 시위, 봉기, 파업을 벌이는 수준에서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국내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투쟁과 착취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되찾아오는 활동, 노동 인민 억압에 기초한 사회 체제를 폐지하려는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또한 같은 활동의 근간을 이루는 건, 국내 피착취 노동 인민의 유일하고도, 자연스러운 대표는 국내 노동자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통된 확신으로부터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건, 소멸 직전에 있는 농노 경제에 따른 자투리들을 무시한다면, 국내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가 사실상 어디에서나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생산 대중에 대한 착취는 소규모로 흩어졌고, 덜 발달됐지만,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대규모이며, 사회화됐고, 집중됐다. 생산자들이 받는 착취는 여전히 중세적인 형태와 많은 다양한 정치적·법적·관습적인 덫, 술수, 장치들에 얽혀있기 때문에, 노동 인민과 노동 인민의 사상가들이 노동 인민을 억압하는 체제 본질을 파악하기를 방해하고, 체제에서 벗어날 방안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를 알 수 없도록 한다. 반대로,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착취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전혀 혼동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순수한 형태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완전히 발전해 있는 상태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억압 당하며,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직접적인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물질적인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요구하고,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계급에 맞선 전쟁, 공장에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짓밟는 계급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 될 수밖에는 없다. 바로 공장 노동자가 착취받는 인민 대표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인민 대표가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서 자신의 임무를 계속해서 수행하고자, 관점들로부터 인민 대표를 열광시킬 필요는 전혀 없다. 단지 필요한 건, 인민 대표에게 자신의 위치를 이해시키고, 인민 대표를 억압하는 체제에 따른 정치경제적인 구조와 억압하는 체제에서는 계급 적대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점을 이해시킬 뿐이다. 자본주의적인 관계에서 일반적인 체제서 공장 노동자의 같은 지위로는 공장 노동자를 노동 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한 전사로 만든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에 따른 높은 발전 단계인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 계급 해방 투쟁에 필요한 물질적인 조건과 사회 세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형태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고, 물질적인 조건이 부재한 다른 모든 부문에서는, 생산이 수천 개 조그마한 사업장들로 산재됐고, 대부분 착취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조그마한 사업장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착취받는 사람들이 맞서 싸워야 할 바로 그 부르주아 체제에 묶여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회 세력이 발전하는 걸 지연시키고, 방해한다. 흩어졌고, 개별적이며, 사소한 착취는 노동 인민을 하나의 지역에 묶어놓은 채로, 노동 인민을 분리시키고, 노동 인민들이 계급적인 연대에도 눈을 뜨는 걸 막으며, 억압이 몇몇 특정 개인이 아닌, 전체 경제 체제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깨달으면서 이뤄지는 노동 인민의 단결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반대로, 대규모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과거 사회와 특정 지역 및 특정 착취자와 모든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슬 고리를 끊어놓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며, 노동자들을 사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조직화된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이도록 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관ㅅ미과 활동을 집중시켜야 할 대상은 바로 노동 계급이다. 노동 계급에 따른 선진적인 대표자들이 과학적인 사회주의와 국내 노동자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에 통달할 때, 같은 사상들이 널리 확산될 때, 그리고 현재 드문드문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경제 전투를,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전화시키도록 안정적인 조직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형성될 때, 바로 그때 모든 민주주의적인 분파들로부터 최선두에 선 국내 노동자들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열려 있는 정치 투쟁이라는 곧은 길을 따라, 만국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하게 국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산주의 혁명으로부터 승리로 이끌게 된다.

 

1894, 전반기

 

부록

 

추가 도표는 본문에서 언급한 24곳 농가 예산에 관한 통계를 담고 있다.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전형적인 농가 24곳 구성과 예산 요약

 

표에 대한 설명

 

1. 첫 번째 21개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22번 세로줄은 호밀, , 귀리와 보리, 기장과 메밀, 기타 곡물, 감자, 채소, 건초에 관한통계 초록에 세로줄들을 합했다.

매조밋 겨와 짚을 제외한 곡물로 벌어들인 수입이 어떻게 산출됐는지는 본문에서 설명한 바 있다. 24번 세로줄은 말, , , 돼지, 가금류, 가죽과 양털, 등 지방과 고기, 유제품, 버터(우락)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25-29번 세로줄은통계 초록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30-34번 세로줄은 호밀, , 기장과 메밀, 감자, 채소, 소금, 버터, 지방과 고기, 생선, 유제품, 보드카(화주)와 차에 지출된 비용에 관한통계 초록세로줄을 합했다. 35번 세로줄은 비누, 등유, 양초, , 식기에 지출된 비용을 제시한통계 초록세로줄들을 합했다.

 

2. 8번 세로줄은 임차 토지와 분여지에서 경지 규모를 데샤티나로 합산해서 얻었다.

 

3. 수입원과 지출 분포에 관한 세로줄에서 맨 아래 줄 수치는 수입과 지출에 따른 금전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25번에서 28번 세로줄, 그리고 37번에서 42번 세로줄에서는 소득 또는 지출이 완전히 화폐로 환산됐다. 금전적인 부분은 총소득에서 가구 별로 소비한 금액을 제하는 방식으로 산출됐다.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내 정치경제학자들에게 완전히 낯설다는 논지를 니콜라이 온에 대한 비판 기초로 삼았다. 아주 올바랐다. 크리벤코와 같이 한 편의 글을 스트루베의 사고 체계 판단 토대로 삼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는 않아서, 스트루베가 내놓은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며, 따라서 스트루베 글 전체가 아닌 일부 진술들만 지지할 수밖에는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부분은 어쨌든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니콜라이 온의 근본적인 오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오류를 수정한다는 건, 니콜라이 온의 이론적인 명제와 연구들로부터도 반드시 사회민주주의적인 결론을 충분하게 도출해낼 수 있도록 한다. 계급 투쟁을 간과한다는 건, 실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드러내며, 아주 열심히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신봉자 행세를 해왔다는 점에서, 니콜라이 온은 더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계급 투쟁 원칙이 니콜라이 온 사고 체계 전체에서도 중심축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니콜라이 온이 국내 역사와 현실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부분만을 예외로 한 채, 마르크스 이론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이 한 국가 체제를 설명해준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이론을 수정해서, 적대적인 관계와 계급 투쟁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별개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생각해내야만 하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론과 자본주의는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어쨌든 니콜라이 온은 마르크스주의에서 A만 받아들이고, B는 거부하려면, 명확한 단서와 함께 그 이유를 설명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은 그런 시도를 전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투쟁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사실로 인해, 사회에서 사회적·정치적 삶의 모든 실제 내용들을 무시하며, 자신이 원하는 걸 성취하려 할 때마다, 실현되기 힘든 소망들의 영역에서, 불가피하게 맴도는 신세가 될 수밖에는 없다. 따라서 스트루베는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 니콜라이 온을 가리켜서, 공상주의자라고 결론내린 건, 지극히 옳았다. 또한 사회와 국가, 곧 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정치인들에게 호소한다는 건, 사회주의자들에게 혼란만 안겨주어, 그들로 하여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최대 적들을 자신들의 동맹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해방을 위한 노동 투쟁을 강화하고, 명확하게 해서, 조직화하도록 돕기보다는 오로지 방해만 할 뿐이다. 따라서 계급 투쟁을 이해하지 못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이기도 했다.

 

스트루베 글을 언급했으므로,러시아 부, 6에 실린 니콜라이 온 답변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가 인구보다 느리게 증가하고 있다는 자료를 인용하면서, 다음을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임무의 달성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 서구 유럽이 따랐고, 또 여전히 따르고 있는 거와는 구별되는 조국 발전 경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천 배 더 올바른 이유이다.' 그리고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역사적인 임무가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마을 공동체에 적대적인 경제 동향인 곧 자본주의가 통합의 의미가 아주 특징적인 서구 유럽이나, 특별한 영향력을 지니며 나타나기 시작한, 북아메리카와는 조금도 달리 드러나지 않은 채, 존재 기반 자체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여기서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저 유명한 V.V. 보론초프로부터 고안해낸,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에서 아주 표준적인 형태였다. 인민의 삶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문제를 국가적인 사안으로 인식했던 정부 관리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그 임무를 달성하려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치라는 거다. 영리한 주장이 지닌 다른 모든 미덕들은 제쳐놓고서라도, V.V. 보론초프는 자본주의로부터 바로 그 임무를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 되는 거짓되고, 편협한 방식으로 이해했고, 니콜라이 온은 분명 지금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신사 양반들은 이번에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편협한 이해로부터, 합법적인 언로가 봉쇄된 죽은 사람처럼 중상모략에 시달리고만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지켜본 바와 같이,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은 노동을 사회화하는 같은 때에, 바로 그 과정이라는 기제로부터 노동 계급을 규율하고, 단련시키고, 조직화해냈다는 점에 있다. 곧 자본주의에 따른 작동은 투쟁을 위해서도 노동 계급을 훈련시키고, 노동 계급의 반란을 조직화냈고, 노동 계급을 단련시켜 빼앗은 자들로부터, 빼앗긴 걸 도로 되찾아오고, 정치 권력을 장악하며, 소수 강탈자들로부터 생산 수단을 빼내와 사회에 되돌려줄 수 있도록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공식화한 방식은 바로 이랬다. 물론 여기서 공장 노동자들 숫자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 집중과 노동 사회화만을 말했고, 그런 기준들은 공장 노동자들 숫자와는 아무런 일맥상통하는 지점도 없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예외적으로 해석한 자들은 잘못 해석해서는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공장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하는 걸 가리키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도 그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곧 공장 노동자들의 수에 따라 측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공장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발전적인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고, 감소한다면, 자신의 역사적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식 계급이 조국을 위한 다른 발전 경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내 지식 계급은 그렇게 다른 경로를 추구하는 작업에 나섰다. 지식 계급은 수십 년 동안 그걸 찾아 헤매며, 자본주의는 실업과 위기로 이어질 뿐이기에, 잘못된 발전 노선이 라는 걸 입증하려 전력을 다해왔다. 지식 계급은 1880년에 위기를 맞이했고, 1893년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으며, 만사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상 그 경로를 벗어날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크릴로프, 고양이와 요리사우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들은 체 만체 계속 먹기만 한다.' 물론 만사가 잘못 돌아가면 더 이상 엄청난 이윤을 거둘 수가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의 노래를 똑같이 따라 부르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 자본에 힘입어 새로운 철도 건설에 정력적으로 매달린다. 반면에, '우리에게' 만사가 잘못 돌아가는 이유는, 예전의 위치에 있을 때, 우리가 이미 인민들을 감쪽같이 골라냈고, 이제는 상인 자본만큼 부유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할 산업 자본 영역으로 진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백 퍼센트의 이윤을 생산해내는 본원적인 축적을 여전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농민들 가운데 부르주아로부터 분화가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유럽 러시아 동부와 북부 국경 지대로 달려가게 된다. 지식 계급은 모두를 감지하고, 우리가 다시 추락으로 향하고 있다며 끊임없이 협박한다. 그리고 새로운 추락이 실제로 우리를 덮친다. 무수히 많은 소자본가들이 대자본가들로부터 짓밟히고, 무수히 많은 농민들이 더욱 부르주아 계급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는 농업 바깥으로 내몰린다. 빈곤과 실업, 굶주림이라는 바다는 엄청나게 커져가고, 떳떳한 양심을 지닌 지식 계급은 자신들의 예언을 들먹이며, 해외 시장 부재를 자본주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증거로 들이대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국내 부르주아 계급은 '들은 체 만체 계속해서 먹기만 한다.' 지식 계급이 새로운 경로를 찾아나서는 동안,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식민지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을 위한 거대한 계획들을 벌이고, 그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스스로 시장을 창출해, 부르주아 체제 매력을 신생국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이례적인 속도로 산업과 농업 부르주아 계급을 형성해내며, 생산자 대중들을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실업자 대열로 내동댕이친다. 사회주의자들은 잘못된 경로에 대해 불만을 늘어놓고, 공장 노동자들 수가 느리게 증가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불안정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쓰는 데 스스로를 계속 가둬놓는건가. 유치한 생각에 대해 논하기 앞서, 니콜라이 온이 비판한 스트루베 글 가운데 일부 단락을 몹시 부정확하게 인용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니콜라이 온은 인구 직업 구성에 있어 러시아와 미국 차이를 지적했을 때, 러시아 경우 유급으로 고용된 인구 전체 80%가 농업에 관계된 일을 한다고 여겨지지만, 미국에서는 그 비율이 44%에 불과하다. 니콜라이 온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이 80%44% 사이 차이를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거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게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적인 임무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임무라는 단어는 아주 부적절하다. 그러나 스트루베 생각은 명확하다. 곧 국내 자본주의 발전이 농촌 인구를 감소시키겠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일반 법칙이라는 점을 니콜라이 온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같은 이론에 반박하려면, 니콜라이 온은 첫째로, 자신이 자본주의의 그런 경향을 간과하지 않았다거나, 둘째로, 자본주의가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대신에 니콜라이 온의 추산에 따른 1%의 한 국가에서 공장 노동자 수에 관한 통계를 분석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스트루베는 언제 공장 노동자를 말했었나. 그럼 국내 인구 20%와 미국 인구 56%가 공장 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인가. 공장 노동자란 단어와 농업에 관계되지 않은 인구란 단어가 동일한 의미인가. 농업과 관련된 인구 비율이 국내에서도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를 지적하는 이유로는, 크리벤코가 이미 해당 잡지에서 그 단락을 왜곡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 게 더더욱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의 '자본주의가 그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로 옮겨가보도록 하자.

 

첫째로, N.F. 다니엘손, 개혁 이후 사회 경제에 관한 개요, 1893에서 그랬듯이, 공장 노동자들 수를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대규모 기계 공업을 자본주의 첫 출발로 삼은 국내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그리고 심지어 심화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상인들로부터 통상적인 임금을 받으면서, 상인들의 재료를 가지고, 상인들을 위해 노동하는 수백만 명 국내 수공업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이 아니란 말인가. 고정적인 농장 노동자들과 농업 분야에서 일용직 노동자들도 자신의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고, 초과 가치를 고용주에게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건축 산업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착취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기타 등등도. 둘째로, 공장 노동자들의 숫자, 140만 명을 전체 인구와 비교하고, 비율을 백분율로 표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신체 건강한 인구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사람들을 '자유로운 전문직' 종사자들과 비교하는 등과 같이 그저 비교할 수 없는 대상들을 비교하는 데 불과하다.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일정 숫자에 따른 가족 구성원들을 각각 부양하고 있지 않은가. 공장 노동자들과 상인 무리들은 제외하더라도, 수 많은 군인과 공무언, 그리고 비슷한 상류층들을 부양하고 있음에도, 어떻게 당신네는 잡탕들을 공장 노동자와 대비시켜 농촌 인구에 포함시키고 있는 건가. 도대체 국내에서는 어업 같은 산업들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산업들을 공장 산업과 대비시켜, 농업과 결부시키는 건 얼마나 불합리한 짓인가. 당신들이 국내 인구에 따른 직업 구성을 알고자 한다면, 맨 먼저 물질적인 가치에 따른 생산에 관계된 인구, 비노동 인구와 군인, 공무원, 성직자 등을 제외한 인구를 특수한 집단으로 분류해낸 다음, 물질적인 가치 생산에 관계된 인구들을 국가 수준 노동에 따른 많은 분야 별로 나누려로는 시도를 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통계를 손에 넣을 수 없었다면, 인구 1%가 공장 산업에 관계됐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기보다는, 그런 식의 계산 자체를 자제했어야만 했다. 셋째로, 바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을 가장 주되게, 그리고 터무니 없이 왜곡한 대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이라는 의미가 오직 공장 노동자들을 결속시켰다는 측면에서만 드러난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당신들도 한 지붕 아래서 노동하는 걸, 그걸로 동일시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니콜라이 온을 비난할 수는 없을 듯한데, 왜냐하면 니콜라이 온이 러시아 부, 6에 기고한 자신의 글에서, 자본으로부터 노동 사회하에 따른 두 가지 특징,

 

1. 사회 전체를 위해 노동한다.

 

2. 공동 노동에 따른 산물을 취득하고자 개별 노동자들 결합

 

두 가지 측면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임무를 공장 노동자 수에 따라 판단하는 이유는 뭔가. 전체적인 임무가 자본주의 발전과 노동 사회화, 프롤레타리아의 전반적인 형성과 그 가운데에서도 공장 노동자들의 선봉적인 역할로부터 완수되는 시점에 이르러서 말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혁명 운동은 노동자들 수와 그 집중, 발전 정도 등에 달려 있다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모든 건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를 공장 노동자들 수와 동일시할 권리를 부여하는 건 전혀 아니다. 그런 행동은 마르크스 사상마저 극단적으로 좁히는 결과만 생기도록 만들 뿐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주택 문제에 대하여란 소책자에서 독일 산업을 언급했다. 땅뙈기나 텃밭을 소유한 임금 노동자들이 많이 존재하는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엥겔스는 서구 유럽만을 거론한다고 말한다.

 

'텃밭이나 농업과 함께 이뤄지는 시골 가내 공업은 독일 신흥 대규모 공업에 따른 폭 넓은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가내 공업은 독일 소농들에 따른 가중되면서부터 국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점점 늘어났으나, 공업과 농업 결합은 가내 생산자인 수공업자의 안녕이 아니라 정반대로, 한층 더한 억압 토대로 작용한다. 자신이 사는 지역에도 묶여 있는 수공업자들은 어떤 가격이라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가내 대량 생산 체제가 폭 넓게 발달했던 국내와 마찬가지로,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까지도 자본주의자들에게 고스란히 내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문제의 한 측면인 동시에, 반대 측면도 지니고 있다. 가내 공업이 확대되면서부터 소농 지역은 오늘날 산업 지형으로 차례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독일 산업 혁명이 영국과 프랑스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토에 걸쳐서 확산된 건 바로 가내 공업으로부터 시골 지역에 따른 변혁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혁명적인 노동 계급 운동이 도시 중심지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지역에 걸쳐 엄청나게 확산된 이유와, 운동이 차분하면서도 조금씩 억누를 수 없는 전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독일 수도와 다른 대도시들에서 봉기가 성공하려면, 대다수 소도시들과 시골 지역 상당 수에서 혁명적인 변화 기운도 무르익었을 때에만 할 수 있다는 점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자본주의에 따른 통합 의미와 더불어 노동 계급 운동에 따른 성공 역시 공장 노동자들 숫자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들의 숫자에도 의존하고 있음은 분명해진다. 그러나 국내 수공업 절대 다수가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는 예외론자들은 일종의 인민 산업으로부터 자본주의와 대비시키고, 공장 노동자들 숫자로부터 자본주의에 따른 직접적인 처분에 맡겨진 인구 비율로만 판단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모든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했으나, 전체 1억 인민들 가운데 백만 명에 불과했고, 사회에서 작은 한 귀퉁이만 차지할 뿐인 공장 노동자들에게 전념하는 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국한시키는 거와 마찬가지라던, 크리벤코 주장을 떠올리도록 한다. 공장과 제조소들이 부동산이나, 자선 기관 같이 사회에 따른 작은 한 귀퉁이에 불과하다니, 크리벤코 선생, 당신은 정말 대단한 천재인 것 같소. 정말로 부동산 기관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재화를 생산한다고. 그럼 부동산 기관들의 상태를 들여다보면 틀림없이 노동 인민 착취와 강탈이 해명되겠군요. 노동 계급 해방에 따른 깃발을 들어올릴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 대표들도 분명 그곳에서 찾아야만 할 테고 말이오.

 

이류 부르주아 철학자들의 입방아에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온의 글에서, 그런 식의 주장을 읽어야 한다는 건 유감이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도 잉글랜드 인구 구성에 대한 수치들을 인용한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는 총 2천만 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1605,440명은 주요 공장 산업 부문에 종사했었다. 뿐만 아니라, 하인 계급 구성원들은 1208,648명으로, 2판 각주에서 마르크스는 하인 계급의 아주 급속한 성장을 거론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통합 의미를 판단하고자, 160만 명을 2천만 명으로 나눈,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영국에 존재한다고 생각해보라. 결과는 1/12에 못 미치는 8%이다. 과연 인구 1/12조차 통합시키지 못하고, 더군다나 영국인들이 잘못된 경로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가 수준 노동의 순손실을 나타내는 가사 노예 계급이 더 빠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본주의 임무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 경우에도, 조국을 위한 다른 비자본주의적인 발전 경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확실하지 않는가.

 

그러나 니콜라이 온 주장에는 또 다른 핵심이 존재한다. 니콜라이 온이 한 국가 자본주의는 서구 유럽에서 아주 특징적이고, 북아메리카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갖고 나타나기 시작한 통합적인 역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말할 때는, 분명 노동 계급 운동을 거론했다. 말하자면, 한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노동 계급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경로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주장은, 미하일로프스키의 기대였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고,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이렇게 꾸짖었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미하일로프스키에게 빈곤에서는 오직 빈곤밖에는 보지 못한다고 비판했을 때, 미하일로프스키 대답은 이랬다.

 

'이 언급은 늘 그렇듯이, 마르크스 말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그러나 철학의 빈곤에 나오는 단락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빈곤은 말 그대로 빈곤에 불과하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철학의 빈곤에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빈곤에서 과거 사회를 전복할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을 보지 못한 채로 그저 빈곤 자체만을 바라봤던 고루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분명 미하일로프스키는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로 노동 계급 운동이 발현할 징후가 전혀 없다는 걸 들고 있다. 같은 주장에 대해서, 먼저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이미 형성된 상태에서 작업을 진행했다는 식의 사고에는 현실을 아주 피상적으로만 들여다봤을 때,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마르크스에 따른 공산주의 강령이 작성된 건, 1848년 이전 일이다. 그럼 당시 독일 노동 계급 운동이 존재하고 있었던가. 정치적 자유조차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비밀 단체로만 한정됐다. 자본주의에 따른 혁명적이고, 통합적인 역할을 모두에게 아주 분명하게 각인시켰던 사회민주주의 노동 운동이 시작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명확한 모양새를 갖추고, 대규모 공업이 보다 널리 확산되는 한편, 노동 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전파할 재능이 있고, 원기 왕성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 건, 20년 뒤 일이다. 역사적인 사실들을 잘못 전달하고, 노동 계급 운동에 의식과 조직화를 제공한 사회주의자들에 따른 방대한 활동을 망각한 데 더해, 철학자들은 가장 분별 없는 숙명론적인 관점을 마르크스에게 억지로 떠안겼다. 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견해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사회화는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목격하면서도, 노동 계급 운동은 보지 못한다면, 그건 자본주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노동자들 내에서 조직화와 선전을 여전히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확언한다. 예외론적인 철학자들의 소부르주아적인 술수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고, 만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든 활동과 마르크스주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행하는 모든 공개 연설로부터 잘못이 입증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카우츠키가 아주 타당하게 지적했었지만, 노동 계급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결합이다.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과업이 한 국가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고자, 사회주의자들은 최대한 정력을 다해 활동에 나서야만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국내 역사와 현재 위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개념을 보다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국내에서 특히나 복잡하게 감춰진 모든 형태 계급 투쟁과 착취를 더욱 구체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중화하고, 노동자에게 알려나가야만 하며,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하고, 노동자들을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결합시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흡수하고, 조건에 가장 적합한 조직화 형식을 강구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동 계급 사상가로 같은 역할을 이미 완수하고, 이행했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들은 단지 막 시작에 불과할 뿐이며, 지속적인 무언가를 창조해내고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는 점을 언제나 강조해왔다. 또한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불충분하고, 터무니 없이 편협한 개념 외에도 한 국가 자본주의에서 발전적인 역할이 부족하다는 통상적인 반대 의견은 인민 제도라는 가공의 어리석은 사고로부터 기초한다. 악명 높은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빈민과 부자, 프롤레타리아 대표와 자본 대표로 쪼개질 때, 반대 의견을 가진 인민주의자들은 초기 형태에서 중세 자본주의라는 점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시골 정치경제적인 구조를 애써 외면했다.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면서,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의 순수한 부르주아적인 분화가 평등한 마을 공동체 내에서 한창 진행 중에 있지 않은 듯이 농민 토지 소유권의 형식 상 변화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정작 경제 조직 형태와 혼동하는 용납할 수 없는 태도를 보였다.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좁은 형태 중세 마을 자본주의를 탈피하고, 토지에 따른 봉건적인 힘을 박살내는 동시에, 오랫동안 발가벗겨지고, 굶주려왔던 농민으로 하여금 기세등등한 부농들이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도록, 토지를 공동체에 넘겨주고, 고향을 떠나 한동안 일자리도 없이 국내 전역을 떠돌아다니다가, 오늘은 지주, 내일은 철도업자, 다음 날은 도시 인부나 부유한 농민의 농장 노동자로 노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기에도 말이다. 오늘날 주인을 바꿔가며, 국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농민은 어디를 가든, 자신이 가장 추잡스럽게, 약탈 당하고 있으며, 다른 빈민들도 똑같은 처지라는 점을, 자신을 강탈하는 게 반드시 주인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돈주고 살 수 있는 자신의 농민 형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농민은 정부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도 지키려는 시도에서 벌인 농민 봉기를 번번이 진압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농민의 주인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며, 노동은 갈수록 더욱 힘들어지고, 부와 사치는 급속도로 증가하는 반면에, 국내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꾸준하게 악화되고, 강탈은 더욱 심해지며, 실업이 일상화되는 현실을 목격한다.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고, 바로 같은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공장 노동자들 수가 얼마나 천천히 증가하는지를 들여다보며,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할을 인정할지, 말아야 할지, 자본주의를 거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역사적인 임무를 아주 잘못 완수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경로를 걷고 있다고 판단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와 같은 심오한 문제를 숙고하는 데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으니, 참으로 고귀하고도, 자비로운 일 아니던가. 노동 인민에 있어 자본주의적인 착취가 국내 방방곡곡에도 존재하는 시점에서,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건, 곧 현실에서 도피해서 낙원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걸 의미한다고 말하는 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또 얼마나 편협하고, 교조적이며, 사악하단 말인가.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임무를 잘못 완수하고 있는 건, 자본주의가 아니라, 차츰 희미해지는 국내 사회에서 적대적인 계급들 간 케케묵은 경제적인 투쟁을 꿈꾸는 건, 고골, 죽은 혼에 나오는 마닐로프주의와 같이 타락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투쟁에 있어 조직화와 암묵적인 합의를 보태고자, 사회민주주의적인 활동에 착수해야만 한다는 점을 깨닫기를 끝내 거부하는 국내 사회주의자들이라는 점을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끝으로, 러시아 부, 6에서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에게 가한 또 다른 공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니콜라이 온은,

 

'스트루베의 논쟁 방식에서 드러나는 어떤 특이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독일 잡지에 독일 대중들을 위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스트루베가 동원한 방식들은 완전히 부적절해 보인다. 독일뿐 아니라, 러시아 대중들, 역시도 이미 성숙기에 도달해서 스트로베 글에서 넘쳐나는 모든 근심거리들에 감탄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모든 시평에서 마추지게 되는 '유토피아 낙원', '반동적 구상' 같은 끔찍한 단어들은 오늘날, 스트루베는 분명 확신하는 효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콜라이 온과 스트루베 간 논쟁에서 과연 부적절한 방식이 동원됐는지, 그게 사실이라면, 누구로부터였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스트루베는 한 진지한 글에서,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에 대중들의 감탄을 자아내려 했다는 이유로, 부적절한 방식들을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통 근심거리들과 끔찍한 단어들을 동원했다는 의미는 상대방이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고, 단순히 누군가를 욕하고, 나무라기 위한 욕망을 표현하고자, 심하게 반대하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자신의 심한 반감을 근심거리들로 바꾸어 표현하는 데는 그런 특징이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슬로님스키는 니콜라이 온에게 심한 말도 퍼부었지만, 현 질서의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평범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아주 뚜렷하고,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슬로님스키는 누구를 마음대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부적절한 방식들로 인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경탄스러운 주장을 아주 명시적으로 내놓았던 인물이었다. 니콜라이 온도 슬로님스키를 교화하고, 가르치는 수준에서 마르크스 말들을 인용하며, 슬로님스키가 원하던 소규모 수공업과 소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방어가 얼마나 반동적이고, 공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슬로님스키에게 심한 말을 퍼붓고는, 슬로님스키를 가리켜 편협하고, 단순하다는 따위 비난을 가한 적이 있었다. 스트루베 글 못지않은 욕설들이 넘쳐나는 니콜라이 온의 글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러나 부적절한 방식을 거론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개별적인 주장마다, 다 이유를 가지고 있고, 틀렸다고 하더라도, 글쓴이의 명확한 관점과 견해 체계에 따랐으며, 받아들여진다면, 필시 상대방이 단순하고, 편협하며, 반동적인 이상주의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문제 제기가 스트루베 글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살펴보자. 니콜라이 온을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구상과 단순한 이상주의자라 비난하면서, 이유들을 명확하게 제시했었는데, 첫째로는, 니콜라이 온이 '생산 사회화'를 염원하면서, 사회와 국가에 호소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계급 투쟁과 국가에 대해 마르크스 이론이 국내 정치경제학자인 니콜라이 온에게는 완전히 생소하다는 점을 입증해주며, 국가는 지배 계급을 대표할 뿐이라는 점이었다. 둘째로는, 단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꼭 생겨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공 경제 체제를 현실 사회주의와 대비시킨다면, 다시 말해, 자본주의 없는 생산 사회화를 원한다면, 순진한 인식을 보여주는 증거에 불과하고, 역사와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본주의 발전과 자연 경제 제거, 그리고 농촌 인구 감소와 더불어, 여전히 둘러싸고 있는 국내 가부장제 시대라는 땅거미 사이로 현대 국가가 등장해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 성큼 나아가고, 생산 사회화를 위해 다른 힘과 요인들을 찾아나서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나마 뚜렷하고, 정확한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니콜라이 온 사고에 대해 스트루베의 구체적인 언급에 담긴 진실을 누가 반박할 수 있을까. 니콜라이 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재된 계급 투쟁을 정말로 감안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니콜라이 온은 사회와 국가를 말하고, 계급 투쟁을 망간한 채로, 도외시했다.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을 사회화하는 대신에, 자본주의를 지원했다고만 말한다. 분명 니콜라이 온은 국가가 이래저래 행동할 수 있고, 따라서 계급 위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근심거리들에 의지한다고, 스트루베를 비난하는 건 그저 부당하다고 울부짖는 데 불과하다는 게 명확하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계급 국가라고 믿는 사람이 노동을 사회화하고자, 곧 지배 계급들을 없애고자, 국가에다 호소하는 사람을 순진하고, 반동적인 이상주의자가 아니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란 게 확실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누군가 상대방을 근심거리들에 의존한다고 비난하면서도, 명확히 밝힌 견해들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더군다나 검열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에, 견해가 실릴 수도 없는 잡지에다 대고 그 사람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완전히 부적절한 방식이라고 평가해야만 하는 건 아닐까.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보자. 스트루베 두 번째 주장은 명확히 공식화된 대목이다. 자본주의와 동떨어진 마을 공동체로부터 노동 사회화가 가공 체제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실은 니콜라이 온, 자신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었다. 1861년 이전에는 생산 단위가 가족과 마을 공동체로 구성됐고, 작고 흩어진, 자급자족형 생산은 상당한 수준으로까지는 발전할 수가 없어서, 아주 일상적인 본질과 낮은 생산성이 일반적이었고, 뒤이은 변화로는 노동에 따른 사회적 분업이 점점 더 깊어졌다는 걸 의미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가 예전 좁은 생산 단위 경계를 탈피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을 사회화했다는 점을 뜻한다. 곧 니콜라이 온, 선생 역시 자본주의로부터 노동 사회화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 노동을 사회화해온 자본주의가 아니라, 붕괴로부터 최초로 사회 전반적인 노동 사회화를 불러왔던 마을 공동체에 노동 사회화 근거를 두고자 했던, 니콜라이 온은 반동적인 몽상가에 다름 아니었다. 바로 스트루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진실이냐, 거짓이냐 문제로 인식할지 모르나, 니콜라이 온에 대한 스트루베의 신랄한 논평이 같은 견해로부터 출발해서 논리적인 필연성을 따르고 있으며, 따라서 그걸 가리켜 근심거리들이라 말하는 건 전혀 적절치 않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스트루베는 자신은 노동 사회화를 바라고, 자본주의로부터 이뤄지기를 원했으며, 따라서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표면적인 모습으로 드러낼 세력들에 스스로 기반을 두기를 염원한다고 명확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기기를 바란다고 탓하면서 논쟁을 마무리한, 니콜라인 온 태도는 진실과 정반대된다고 부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스트루베는 검열 때문에, 입에 재갈이 물린 상태라 공개적인 계급 투쟁이라는 밝은 빛으로부터 앞으로 나선 세력들에 대한 말을 해당 잡지에서 꺼낼 수조차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니콜라이 온 논쟁 방식이 전적으로 부적절했다는 점은 거의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거론한 건, 마르크스주의자 자신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출판물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마르크스주의는 아주 터무니 없이 편협하고, 왜곡됐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설명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혁명적인 이론이 검열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 강도의 침대에 걸맞게 마구 훼손된 꼴이라니. 평론가들은 참으로 속 편하게도, 그런 활동을 수행해나간다. 평론가들의 설명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소유주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사유 재산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지와 정반대로 변화해서 사회화되는지에 대한 원리로 사실상 축소됐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사회학적인 방법론에 따른 모든 구체적인 특성들은 무시한 채로, 전체적인 알맹이가 계급 투쟁 원리와 연구에 따른 직접적인 목적, 곧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부터 폐지하도록 돕는 등 계획에 있다고 사뭇 진지한 태도로 추정한다. 따라서 너무나 하찮고, 제한적이라서 급진주의자들이 가련한 국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애도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국내 절대주의와 반동 체제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완전하고, 정확하고, 완성된 설명을 제시하고, 거리낌 없이 반론을 내놓을 수 있다면, 맨 처음부터 절대주의와 반동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한 국가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은 검열 당한 언론에서 왜곡한 사실을 부끄러워했을 테고 말이다. 어떤 한 이론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들을 빼먹고 넘어간 데 대해 마음으로는 거리낌이라도 가져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그 중에서는 극히 일부만 해명하고 난 뒤, 원리가 편협하다고 아우성치는 이유는 도대체 뭔가.

 

참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계급 투쟁도, 자본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적대도, 적대에 따른 성장도 모르는, 오로지 국내에서만 할 수 있다는 그런 불합리한 상황으로 그렇게 설명될 수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 따른 혁명적인 역할이라는 개념도 없고, 심지어 화폐 경제나, 필연성 같은 표현들을 담고 있는 한, 순전히 부르주아 기획일 수밖에는 없는 걸 내놓는, 그들이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되려면, 미하일로프스키 같은 지적으로 심오함이 요구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지닌 총체적인 가치는, 본질적으로 비판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점에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혁명적이라는 특성은 마르크스주의에 참으로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내재됐다. 마르크스 이론은 현대 사회에도 존재하는 모든 형태에 따른 적대와 착취를 폭로하고, 진화를 추적하며, 일시적인 성격과도 다른 형태로 변화에 따른 불가피함을 실증하는 한편으로, 따라서 모든 착취를 할 수 있는 한 빠르고, 쉽게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무산 계급에게 종사한다는 임무를 스스로 직접적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국가에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당기는 마르크스 이론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은 엄밀하고도, 비할 데 없이 과학적인 특성, 사회 과학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으로, 혁명적인 특성과 결합시키고 있으면서도, 결코 우연에 따름이 아니라는 점에 정확히 근거한다. 근거는 다름 아닌 원리 창시자가 개인적으로는 과학자이자, 혁명가로 자질을 겸비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두 가지 특질이 본질적이고, 불가분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이론 역할이나, 과학 목적이란 게 현실에서도 경제 투쟁에서 억압받는 계급을 지원하는 게 아니었던가 말이다. 마르크스는 루게에게 쓴 편지, 1843, 9에서 밝힌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투쟁을 멈춰라, 당신들의 투쟁은 전부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할 일은 진정한 투쟁 구호를 세상에 제시하는 게 전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과학에서 직접적인 임무는 진정한 투쟁 구호를 제시하며, 다시 말해 지금 투쟁을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에 따른 산물로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당면한 투쟁에서 불가피함과 내용, 발전 경로 및 조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모든 분리된 형태에 따른 투쟁을 세밀하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매 단계 투쟁이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이행되는 과정을 추적해 어떤 특정한 순간에서라도, 투쟁에 따른 일반적인 속성과 모든 착취 및 억압에 따른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철폐라는 총체적인 목표를 놓치지 않고, 상태를 제대로 규정해내지 못한다면, 투쟁 구호를 제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의 비판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뒤, 씨름했었던 따분하고, 쓰레기 같은 이론과 마르크스에게 있어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이론을 한 번 비교해보시라. 분명 스스로를 노동 인민 사상가라 여기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필수적인 부분들은 죄다 흔적을 지워 없애 버리면서, 이론을 '닳은 동전'으로 변형시키는 데 머무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노동 인민의 이념적인 대변자가 되고픈 소망에서 비롯된, 전체적으로는 경제 제도와 구체적으로는 농민들의 현 상태와 역사에 주력한 인민주의 문헌을 마르크스 이론 요구들과도 한 번 대조해보시라. 분명 고통을 연구하고, 묘사하며, 설교를 들어놓는 데 그친 이론에 만족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거기서 농노제는 여러 착취와 여러 적대적인 계급들과 특정한 정치적·법적인 체계 따위를 생기도록 만드는 명확한 형태에서 경제 구조가 아닌, 그저 지주들로부터 학대와 농민들에 대한 불의로만 그려진다. 농민 개혁 또한 뚜렷한 경제 형태들과 계급들 간 충돌이 아니라, 최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잘못된 경로를 선택한 정부 당국이 취한 조치로만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개혁 이후 국내는 특정한 발전에 따른 명확한 적대적인 생산 관계 체계로부터가 아닌, 노동 인민 고통을 동반한 진정한 경로로부터 일탈로만 묘사된다. 하지만 인민주의 이론이 전혀 신뢰도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회주의자들이 현재 지식 수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하고는 어떤 혁명 이론도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더 빠르게 깨달을수록,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국내에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적용하고자 모든 노력을 더 빠르게 쏟아붓는다. 보다 더 확실하고, 빠른 움직임은 혁명 과업 성공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실질적이고, 제대로 된 산업을 창출해내고자, 인민들을 상대로 문화적인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등과 같은 지식 계급에 대한 인민의 벗들의 요구가 오늘날 빈약한 국내 사상 풍토를 얼마나 크게 변질시켰는지를 드러내줄 생생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일단 확연하게 구별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인민의 의지'의 견해를 인용해볼 필요가 있다. 인민권리당이시급한 쟁점, 1894이라는 소책자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폭 넓은 자유를 누리는 조건 아래에서조차 국내는 생산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노동 인민에게 보장해주는 경제 구조와 작별을 고해서는 안 된다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치 개혁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경제 개혁이라고 말하는 부류의 인민주의자들을 멋지게 반박한 뒤, 나로드프랍치,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은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수호자가 아니요, 부르주아 계급의 이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지방 감독관들의 보호 아래에서 부르주아 계급 침범으로부터 계획적인 정치 개혁을 열심히 지켜내게 하느냐, 아니면 정치 정당에 기초한 부르주아 계급 자체 보호 아래에서, 다시 말해, 인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조직적으로 방어하는 걸, 보장하는 상황 아래에서 경제 개혁이냐를 놓고 선택하라는 얄궃은 운명이 인민들에게 주어진다면, 인민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하는 게 더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 인민들에게서 거짓된 독립 경제 구조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정치 개혁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거라고는, 누구든 어디에서나 익숙하게 불리는 부르주아 정책만이 존재할 뿐이며, 인민 노동에 대한 가장 철저한 착취로도 표현된다. 폭 넓은 자유는커녕 좁은 의미에서 자유도 없으며, 입헌 국가들의 농경민과 자본가들은 더 이상 꿈도 꾸지 않는 계급에 따른 이익의 보호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부르주아 의회 제도란 게 없으며, 행정 기구에 따른 포탄 사정거리 안에서는 사회도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만리장성을 세워야만 한다고 요구하는 나이데노프, 모로조프, 카지, 비엘로프 같은 신사 양반들이 있으며, 그들 옆에는 1데샤티나 당 거금 100루블씩 자신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주기를 요구하기에 이르기까지 이른 충성스러운 귀족 대표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위원회 일원으로 초대되어, 공손하게 경청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말을 꺼내고, 한 국가 경제 생활에 영향을 끼칠 중차대한 사안들에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갖는다. 그러나 인민의 이익을 지키고자 내세운 사람들이 과연 누구였던가. 지방 감독관 아니었던가. 농업 근로대가 기획된 건, 인민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비단, 뿐만 아니라 인민들에게 분여지를 부여했던 유일한 이유는 볼로그다 주지사는 자신의 회람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민들로부터 세금을 납부하고, 부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자, 거의 빈정거릴 정도로 가깝게 솔직히 막 공표되지는 않았나. 주지사는 전제 군주국, 아니 보다 정확히는 관료주의적인 절대주의 체제가 숙명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정책을 단지 공식화하고, 소리 높여 표현했을 뿐이다.'

 

비록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싶어하는 대상인 인민과 노동 이해 관계를 보호해줄 믿을 만한 기관이라고 계속해서 여겨온 사회에 대한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의 개념이 모호하다고는 하나, 인민권리당의 창설이 조국을 위한 다른 경로에 대한 착각과 몽상을 완전히 버리고, 진정한 경로를 두려움 없이 인정하며, 혁명 투쟁을 위한 요소들의 기반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한 걸음 더 나아간 거라는 점만큼은 누군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민주적인 정당을 건설하고자 분투를 뚜렷이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분투'일 수밖에 없는 건, 불행하게도 민주 지식인 비밀 조직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논지를 일관되게 실행에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주의자들과 융합과 동맹을 말하고, 노동자들을 한낱 정치적인 급진주의로 끌어들이는 건, 지식 노동자들을 노동 대중으로부터 단졀시키는 걸 의미할 뿐임을 깨닫기를 거부하며, 노동 계급 운동에 무기력하다는 선고를 내린다. 노동 계급 운동은 전적으로 노동 계급 이익을 보호하고, 자본에 맞선 경제 투쟁을 벌일 때만 강해질 수 있으며, 경제 투쟁은 자본 하수인들에 맞선 정치 투쟁과도 불가분하게 묶여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혁명 분파들의 '융합'이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따른 독립된 조직과 특정한 사례들로부터 두 정당의 공동 행동으로부터 훨씬 더 잘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당을인민권리당 선언문, 1894, 219일자사회혁명당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짖고 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정치 개혁에만 국한시키고 '지긋지긋한' 사회주의적인 사안들은 아주 주도면밀하게 회피해버린다. 실로 착각에 맞선 투쟁을 열렬하게 촉구하는 정당이 타인에게 착각을 조장해서는 안 되는 법임에도, 그들은 선언문의 맨 첫 부분에서부터, 그런 잘못을 저질렀으며,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단지 입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그들이 '인민의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민의 권리'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인민의 권리'들은 오로지 정치 강령에 근거한, 사회주의와는 관계도 없이, 정치 투쟁만을 염두에 두면서 '인민의 의지'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진정으로 '인민의 권리'의 성공을 바라며, 그들의 정당이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그래서 현재 경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를 편들고 마는, 따라서 반드시 그 체제를 거부하고, 맞서는 가차없는 투쟁을 벌이지도 않는 민주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일상의 이해 관계가 묶여 있는 사회 분파들과도 긴밀한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관료 체제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면서, 정치 투쟁에 따른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뿐더러, 노동 인민이 억압 받는 원인과 현재 벌어지는 계급 투쟁 성격을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인민의 벗들이 타협적이고, 비겁하고, 감상적이고, 공상적인 인민주의는 정치적인 급진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 양쪽으로부터 공격 당할 경우, 결코 오래 버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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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전쟁에 돌입한 또 다른 인민의 벗인 크레벤코 선생을 만나보자.

 

하지만 미하일로프스키나 유자코프 글과는 다른 방식으로 크레벤코, 우리 문화 용병들, 1893, 12, 여행 중에 보낸 편지, 1894, 1를 검토한다. 글들을 완전히 분석하는 건 첫째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대한 그들의 반론과, 둘째로는 그들의 정치 경제 이론에서 실체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인민의 벗들의 사고를 완전히 이해하고자, 그들의 전술, 실질적인 목표, 정치 강령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들의 이론적인 견해를 밝힐 때,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그 강령을 일관성 있고, 완전하게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명 기고자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정도로, 의견 일치를 보인 한 잡지에서 많은 글들을 참조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크리벤코 글들을 우선적으로 살펴본다. 그 이유로는 크리벤코 글들에 많은 자료가 담겨 있는데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사회주의자고, 유자코프는 경제학자이듯이, 크리벤코는 해당 잡지에서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실용적인 인물이자,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강령으로 넘어가기 전에, 정말 필수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여겨지는 이론적인 핵심이 한 가지 더 있다. 유자코프 선생은 인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인민들의 토지 임차에 대해 의미 없는 문구들을 늘어놓는 걸, 자신이 농민들의 경제적인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감추고자, 의미 없는 문구들로 문제들을 눙치는 걸 지켜봐왔다. 유자코프는 수공업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았고, 대규모 공장 산업 발달에 관한 자료를 다루는 걸로만 국한시켰다. 그래 놓고는 수공업에 대해 정확히 똑같은 문구들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 유자코프는 '인민들의 산업', 곧 수공업을 자본주의적인 산업에 똑같이 대비시키면서, 인민들의 생산은 대부분의 경우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반면에, 자본주의적인 산업은 흔히 인위적으로 창출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단락에서도 유자코프는 '소규모 인민 산업'을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과 대비시키면서, '여러분이 눈에 띄는 인민들의 산업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규모가 작고, 노동 도구들이 생산자와 결합된다는' 대답만 듣게 된다. 그러나 경제 구조를 정의내리는 일과는 확실히 거리가 먼데다, 전혀 사실도 아니다. 크리벤코 선생은 소규모 인민 산업은 대규모 자본주의적인 산업보다 총생산량도 훨씬 많고, 더 많은 노동력을 고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크리벤코는 수공업자들의 숫자가 400만 명에 달한다는 통계를 거론했었는데, 또 다른 자료에서는 7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공업을 지배하는 경제 형태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대부분 수공업자들은 생산에서 전혀 독립적이지 않고, 완전히 종속됐다는 점, 그들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원료를 가공하는 게 아니라, 상인들이 대준 원료를 가공하고, 그 대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같은 형태가 지배적이라는 통계는 합법적인 출판물에서도 인용됐다.

 

유명한 통계학자인 S. 카리조메노프 글들 가운데,법률 통신, 1883, 11, 12에 실린 뛰어난 글을 인용해보자. 수공업이 가장 고도로 발달된 중부 지방 주들에서 수공업에 관한 기존에 발표된 통계를 요약하면서, 카리조메노프는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에서 절대적인 우위, 곧 의문의 여지 없이 자본주의 형태에 따른 산업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카리조메노프는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경제적인 역할을 규정할 때, 다음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스크바 주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86.5%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로부터 발생했고,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으로부터는 13.5%에 불과하다. 블라디미르 주에서 알렉산드로프와 포크로브 군에서는 연간 수공업 매출액에서 96%는 대규모 가내 생산과 제조업 체계 몫에 해당했고, 4%만이 소규모 독립적인 산업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이런 점을 반박하려 하지 않았고,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점들을 무시한 채로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산업을 자본주의와 구분되는 인민 산업이라 부를 수 있고, 진정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사실 관계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딱 한 가지 설명만이 할 수 있다. 곧 국내 자유주의자들이 다 그렇듯이, 인민의 벗들 역시도 모두를 단지 평범한 결함들이라 치부하면서부터 국내 노동 인민 착취와 계급 적대를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으로는, 크리벤코는 파블로보 날붙이 사업을 절반은 장인 성격의 사업이라 부른 데서 드러난 바와 같이, 같은 주제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너무나 깊은 데서 비롯된다. 이렇듯이 인민의 벗들이 도달한 왜곡 깊이는 가히 놀랍다는 말밖에는 덧붙일 말이 없다. 같은 대목에서 어떻게 파블로보 칼 장수들이 장인의 성격을 띠고 있따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크리벤코는 상인이 수공업자로부터 물건을 주문해서 니지니 노브고로드 장터로 보내는 체계를 장인 산업이라 여기는 건 아닐까. 너무나 우습게도 그렇다. 실제로 칼 제조는 외관 상 생산자들이 독립성을 지닌 소규모 수공업 형태로부터 파블로보의 다른 산업들과 비교해볼 때, 가장 동떨어져 있다. N.F. 안넨스키는 '요리용과 공업용 칼 생산은 이미 대부분 공장에 접근하고 있다거나, 더 정확히는 공장제 수공업 형태에 도달한다.' 말한다. 니지니 노브고로드 주에서 요리용 칼 제조에 종사하는 396명 수공업자들 가운데 단 62, 16%만이 시장을 위해 일하고, 273, 69%은 주인을 위해 일하며, 61, 15%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고용주에게 직접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은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칼 산업에서 다른 부문에 대해 같은 필자는 '주머니칼과 자물쇠 중간 위치를 차지한다. 같은 부문에서 수공업자들 대부분은 주인을 위해 노동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시장과 관계를 맺는 수 많은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여전히 아주 많다'고 말한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는 이런 종류의 칼을 생산하는 수공업자들이 총 2,552명 있었는데, 그 중 1,236, 48%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1,058, 42%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258, 10%는 임금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독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장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 또한 단지 겉으로만 독립적으로 보일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구매자 자본에 덜 예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21,983명 노동 인민, 곧 노동하는 사람의 전체 84.5%가 공업에 종사하고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 고르바토프 군 전체 산업 통계를 불러온다면, 금속, 가죽 제품, 마구류, 털천, 삼 방적 등 산업에 종사하는 10,808명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산업 경제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곧 수공업자들의 35.6%는 시장을 위해 노동하고, 46.7%는 주인을 위해 노동하며, 17.7%는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도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우위에 있고, 노동이 자본에 예속되어 있는 관계가 지배적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토록 자유롭게 이런 종류의 사실들을 무시한 또 다른 이유로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자본가라는 거대한 기계 회사를 운영하고, 고용주라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생각을 뛰어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용어에서 과학적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거부한다. 앞 장에서 유자코프 선생은 자본주의 시작점을 정확히 기계 공업에서 시작하면서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을 생략했다는 점을 알게 된다. 널리 만연하는 실수로, 부수적으로는 한 국가의 수공업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성이 무시된 결과를 생기도록 만들었다.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가 자본주읮거인 산업 형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이미 높은 발전 수준에 도달한 상품 경제, 생산 수단이 개인들의 손에 집중되는 현상, 수중에 생산 수단을 지니고 있지 못해서, 자신의 노동을 타인 소유의 생산 수단으로 적용시키며 스스로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 노동하는 노동자 대중 착취라는 모든 특징들이 담긴다. 분명 그러한 구성에 있어 수공업은 순전히 자본주의적이며, 주로 터무니 없이 낮은 임금 때문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져 있으며, 노동자들은 여전히 소규모 농지를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춰볼 때, 대규모 기계 공업과는 다르다. 소규모 농지에 있어 상황은 특히 인민의 벗들을 헷갈리도록 만들었는데, 그들은 진정한 형이상학자들이라는 성격에 걸맞게 노골적이고, 정반대로 사고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맞아. 아니, 아니, 악마에게서는 그게 뭐든 간에 이보다 더한 게 생겨나는 법이야.'

 

노동자들에게 토지가 없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토지가 있다면, 그건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며, 경제의 전반적인 사회적 구조를 보지도 않은 채, 그런 철학을 위안 삼아 자기 자신을 그 속에 가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뻔뻔한 농민 토지 소유주들로부터 강탈 당한 끔찍한 가난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점마저 망각해버린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여전히 비교적 낮은 발전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디에서도 노동자를 토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 마르크스는 서구 유럽에서부터 오직 대규모 기계 공업만이 노동자를 영원히 착취한다는 법칙을 확립했다. 따라서 인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투적인 논법은 완전히 쓸모없다는 게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단순 협업과 공장제 수공업에 따른 자본주의는 노동자 토지로부터 완전한 분리와 어디에도 결부된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자본주의이기를 멈춘 적도 없기 때문이다. 국내 대규모 기계 산업 형태는 산업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을 떠맡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삶의 모든 구체적인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어느 서구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토지와 사슬 고리를 계속해서 유지하는 걸 절대로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말이 나온 김에, 같은 점은 데멘티예프로부터 엄밀한 통계로 입증된 바 있으며, 데멘티예프는 마르크스와는 아주 별개로, 기계를 이용한 생산이 노동자에 따른 완전한 토지로부터 분리와 불가분으로 관련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같은 연구에서는 러시아도 자본주의 국가이며, 국내 노동자들에 따른 토지와 연관에 있어 아주 미약하고, 실재하지도 않는데다, 자산 소유자인 화폐 소유자, 구매자, 부농, 공장제 수공업자 등의 권력은 아주 굳건하게 확립됐고, 기술적인 진전이 한 차례 더 일어나게 되면, 오랫동안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왔던 농민은 그야말로 노동자로 변모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그러나 한 나라 수공업에서 경제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인민의 벗들의 잘못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노동은 주인을 위해서 행하지 않는 산업들에 대해서조차 그들의 생각은 경작자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어쨌든 그들이 아는 거라고는 세상에는 노동하는 인민과 결합될 수 있는 생산 수단 같은 게 존재하고, 그게 아주 좋다는 반면에, 그들과 분리될 수도 있는 생산 수단은 아주 나쁜 거라는 점 말고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제넘게도 정치 경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한 의견이나 늘어놓는 신사양반들의 생각이 피상적이라는 점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화되는 산업과 그렇지 않은 소규모 생산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산업에 대해 말하면서, 크리벤코는 한 쪽으로 특정 분야들에서 기본적인 생산 비용이 얼마 안 되며, 따라서 소규모 생산을 할 수 있다고만 말한다. 크리벤코는 벽돌 산업을 거론하는데, 거기서는 비용이 벽돌 공장 연간 매출액에서 1/15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필자가 사실 관계를 언급한 거의 유일한 부분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민의 벗들이 현실에 대해 어떤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해주고자 한다.

 

모스크바 젬스트보 경제 통계 보고서에 대한 서술을 볼 수 있다. 해당 산업에서는 주로 보고로즈코예 군 세 개 읍에 집중됐는데, 233개 시설에서 1,402명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이 중에서 41%를 차지하는 567명은 가족 노동자들이다. 가족 노동자는 고용된 노동자가 아니라, 주인 가족 가운데 노동에 참가하는 구성원을 뜻한다. 357천 루블 가치에 해당하는 연간 총 생산량을 보유했다. 해당 산업은 오래된 산업이지만, 철도 건설로부터 판매가 대폭 촉진된 덕분에 지난 15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철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가족 생산 형태가 지배적이었으나, 현재는 임금 노동자 착취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또한 해당 산업은 판매를 위해 소규모 업자들이 대규모 업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금 부족 때문에 소규모 업자는 대규모 업자에게 아주 형편없는 가격에다 그 자리에서 벽돌이나 미가공품을 내다 판다. 하지만 그러한 의존도와는 별개로 논문에 첨부된 노동자들 수와 각 시설 당 연간 총 생산량이 표시된 수공업자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해당 산업 구조 역시도 익히 알 수 있었다.

 

상품 경제가 곧 자본주의 경제라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르면, 상품 경제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된다는 법칙이 해당 산업에서도 적용되는지를 확인하고자, 시설들의 규모를 비교해봐야만 한다. 문제는 정확히 생산량에서 역할과 임금 노동 착취에 따른 소규모와 대규모 시설들 사이에서 관계다. 노동자들의 숫자를 기초로 해서, 수공업자 시설들을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 1-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2. 6-1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3. 10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시설,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다. 시설들의 규모, 노동자들의 전체 수, 각 집단 별 생산량에 따른 가치를 검토한 결과, 다음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수치들을 살펴보면, 부르주아 또는 그와 동일하고,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구조를 인식할 수 있다. 시설이 클수록 중간 집단은 예외지만, 노동 생산성은 더 높아지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더 심해지며, 생산 집중도 역시 더 커진다. 거의 전적으로 임금 노동에 기초한 세 번째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 수에서 10%를 차지하지만, 총 생산량은 44%에 달한다. 소수 손에 생산 수단이 이렇게 집중되는 현상, 다수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착취와 관련된 현상은 대규모 경영주들은 사실상 원청이기 때문에, 소생산자들에 따른 원청에 대한 의존과 해당 산업에서 노동 억압을 설명해준다. 따라서 노동 계급에 대한 강탈과 착취 원인이 생산 관계 자체에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알다시피 국내 인민주의 경향 사회주의자들은 그와 반대되는 견해를 지녔었고, 수공업에서 노동 억압 원인이 생산 관계에서 그들은 생산 관계가 착취할 수 없도록 만드는 원칙에 기초한다고 선언했었지만, 거기에 있지도 않고, 다른 무언가, 곧 농업과 재정 정책 등에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런 견해를 굽히지도 않고, 이제 거의 편견에 따른 철옹성을 구축하게 된 근본 토대는 무엇이었으며, 또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수공업에서 생산 관계에 대한 개념이 달라서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단지 사실 관계, 곧 경제 구조에 따른 실제 형태들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묘사하려는 시도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지속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회 과학에 따른 유일한 과학적인 방법론, 곧 유물론적인 방법론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나이든 사회주의자들의 사고 경과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수공업에 관해서는, 그들은 착취 원인을 생산 관계 외부로 그 책임을 돌린다. 반면에, 대규모 공장 자본주의에 관해서는, 그들은 거기에서 착취 원인이 정확히 생산 관계에 있다는 걸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화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화였다. 수공업적인 생산 관계에서는 자본주의적인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규모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비롯된 지를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수공업과 자본주의적인 산업 사이에서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수공업에서는 인민 공업으로, 자본주의적으로는 인위적인 산업으로 대비시켰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발상이다. 같은 사고는 아주 폭 넓게 퍼져 있고, 니콜라이 온 선생에 따른 수정과 개선을 거쳐, 국내 대중들에게도 제시된 바 있다. 가히 경탄스러울 정도로 비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타성적으로 지속된다. 니콜라이 온에 따르면 공장 자본주의는 실제 현실에 기초해서 판단되는 반면에, 수공업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기초해서 판단이 이뤄진다. 자본주의는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기초해서 판단되지만, 수공업에서는 생산 관계를 따로 검토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판단되며, 그러한 문제는 곧장 정치 영역으로 옮겨간다. 생산 관계에 따른 분석에 시선을 돌리기만 한다면, 인민 제도들이 아직 개발되지도 않고, 맹아적인 상태이기는 하나, 지극히 동일한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모든 수공업자들이 동등하다는 안일한 편견을 거부하고, 그들 사이에서 차이들을 정확히 제시하자면, 공장 자본가와 수공업자 사이에서 차이가 수공업자 서로 간 차이보다 작다는 게 때때로 증명된다는 점에서도, 그리고 자본주의는 인민 제도와 모순되는 게 아니라, 뒤를 잇는 직접적이고, 당면한 연속이자, 발전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인용한 바가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주어진 바에서 임금 노동자들에 따른 비율이 대체로 너무 높다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중요한 건 절대적인 수치가 아니라, 수공업자들이 드러내는 관계, 곧 자본주의 생산 관계로는 본질적으로 부르우자적이고, 그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든, 약하게 드러나든 간에 그런 상태가 중단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약한 걸 골라볼 텐데, 모스크바 주 산업에 관한 이사예프에 따르면, 도자기 공업은 순수한 가내 공업이고, 당연히 소규모 농민 공업에서 대표 주자로 여겨진다. 기술이 지극히 단순하고, 장비는 아주 작으며, 생산된 물건들이 보편적이고, 필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세부 사항들을 제시하는 도자기 장인들에 대한 가구 별 통계 조사 덕분에 경제 구조도 연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따. 도자기 공업에서는 수 많은 국내 소규모 인민 공업으로 아주 전형적이기 때문이다. 수공업자들을,

 

1. 가족 노동자와 고용 노동자를 모두 포함해서, 1-3 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2. 4-5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3. 5명이 넘는 노동자를 고용한 수공업자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눈 다음 동일한 계산을 실시한다. 명백하게도, 해당 공업 역시도 비슷한 사례들이 무수히 인용된다. 부르주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품 경제로부터 발생하는 동일한 분리, 특히 자본주의적인 분리가 발견되고, 맨 위 집단에서는 이미 주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임금 노동 착취로 이어진다. 맨 위 집단에서는 전체 시설들에서 1/8을 차지하고, 전체 노동자에서 30%가 총 생산량에서 약 1/3을 생산하며, 노동 생산성은 평균보다 상당히 위에 있다. 생산 관계만으로도 원청 등장과 권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규모가 더 크고, 이윤이 더 많이 나는 시설들을 소유하고, 타인 노동으로부터 순이익을 얻는 맨 위 도공 집단에서는 사실상 평균 5.5명 임금 노동자들이 노동하며, 소수가 어떻게 절약된 돈을 축적하고, 왜 다수는 몰락하고 심지어 소장인들은 생계조자 이을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게 예속되는 건 확실한 사실이며, 필연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어진 생산 관계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그렇다. 같은 관계들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 수중으로 넘어가서, 그들의 손에서 노동 인민을 억압하고, 노예화하는 수단, 대중 착취로부터 개인적인 부를 쌓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관계다. 그리고 같은 종류에서 관계가 여전히 덜 발달됐기 때문에, 생산자들에 따른 몰락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자본 축적이 무시해도 될 정도이기 때문에, 착취와 억압이 보다 덜 뚜렷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오로지 노예의 형태를 띤 보다 더 조악한 착취로 이끌 뿐이다. 곧 아직은 노동자 노동력을 가치 그대로 구입하기에는 노동자를 직접적으로 종속시킬 수 없었던 자본이 노동자를 고리대금으로부터 착취에 따른 진정한 그물에 얽어넣고, 악랄한 방법으로 묶어놓으면서부터 초과 가치뿐만이 아니라, 임금에 따른 상당 부분을 강탈해가고, 더 나아가 노동자로 하여금 주인을 바꾸지 못하게 하면서부터 고통을 가하고, 자본이 노동자에게 일거리를 준다는 점을 혜택으로 강요하면서부터 노동자를 모욕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진정한 인민 산업이 존재한다면, 단 한 명의 노동자도 국내에서 독립적인 수공업자로서 지위를 그런 지위와 맞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국내 급진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치들은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와 자본에 대한 노예화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여전히 고립된 실험에만 머무르거나, 노동 인민에 따른 상태를 더욱 더 악화시키고, 주어진 자본주의적인 관계를 세련되게, 다듬고 발전시키며, 강화시킬 뿐이라는 점도 명백하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전체적인 비참한 상태와 상대적으로 작은 시설, 극도로 낮은 노동 생산성, 원시적인 기술과 소수 임금 노동자들에도 불구하고, 농민 산업이 자본주의적이라는 점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인민들 사이에서 특정한 관계이고, 그러한 관계는 비교 대상 범주가 더 높은 수준에 있건, 더 낮은 발전 수준에 있건 간에 똑같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도 그걸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언제나 자본에서 그런 정의에 반대했다. 그래서 본인은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시버의 책에 대한 글을러시아 부에서 기고하면서, '자본은 관계다.'라는 정의를 인용하며, 분개한 마음에 그 뒤에다 느낌표를 달아놓았다. 부르주아 체제에서 범주를 영원하고, 당연하다고 간주한다는 건, 부르주아 철학자들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자본에 대해서도 그들은 추가 생산을 위해 쓸모가 있는 축적된 노동이라는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들은 자본을 인간 사회에서 영원한 범주로 묘사하고, 그런 행위에서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축적된 노동이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타인 노동의 착취를 위해 기여하는 역사적으로 명확하고, 특정한 경제 구성체에 따른 본질을 흐린다. 그리고 생산 관계에 따른 명확한 체계에 대한 분석과 연구 대신에, 그들이 어떤 체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일련의 시시한 말 따위를 제시하고, 소부르주아 도덕에서 감상적인 어린애 장난 같이 뒤섞는다. 인민의 벗들은 해당 산업을 인민 공업이라 부르고, 자본주의 산업과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신사 양반들이 소부르주아 이념가들이며, 소생산자들이 상품경제 체제 아래에서 살고 활동하면서, 그들과 시장과 관계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그들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놓는다는 점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이런 현실 구조를 연구하려 하지 않는가. 그랬더라면, 인민 산업들이 초래할지도 모르는 결과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대신에,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조직되지 않고, 어쨌든 발전을 이룬 수공업 분야가 국내에서도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수로부터 생산 수단 독점, 다수로부터 소외, 임금 노동에 따른 착취에서,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본질은 상품 경제로부터 조직된 사회적인 노동 산물이 개인으로부터 점유되는 개념에 필연적이고, 적당한 특징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자신의 역사를 제시해주기 바란다. 실제로 인민 수공업 구조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전체적인 역사에 있어 훌륭한 실례를 제공해준다. 분명히 단순 협업 형태에서, 도자기 공업에서 맨 위 집단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기원과 시작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상품 경제 덕분에 개별 개인들의 수중에 축적된 저축이 어떻게 자본이 되는지, 그래서 저축 소유자들만이 대규모 처분에 필요한 자금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차적으로 판매를 독점하고, 그들로 하여금 멀리 떨어진 시장에서 상품들이 팔려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하는지, 상인 자본이 생산자 대중을 어떻게 노예화하고, 자본주의 기계제 수공업, 곧 대규모 생산에 따른 자본주의 가내 체계를 조직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장 확대와 늘어나는 경쟁이 어떻게 개선된 기술로 이어지고, 상인 자본이 산업 자본이 되며, 대규모 기계제 생산을 조직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그래서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수백만 노동 인민과 지역 전체를 노예화한 자본이 공공연하고, 뻔뻔하게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부를 자신의 하인으로 변모시키는 순간, 천재적인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 이식과 인위적인 생성에 대해 비명을 질러댄다. 실로 적절한 발견이다.

 

그러므로 크리벤코 선생은 '인민의', '현실적인', '적합한' 따위에서 산업에 대해 말했을 때, 크리벤코는 단지 수공업이 많은 발전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일 뿐이라는 점을 감추려고 애쓴다. 이미 유자코프 선생에게도 같은 식의 수법들을 익히 보았다. 유자코프는 농민 개혁을 연구하는 대신에 1861219, 농노제 폐지 선언에 따른 기념비적인 선언에서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공허한 문구들을 사용했었고, 토지 지대를 연구하는 대신에 인민 지대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국내 시장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위해 형성되는지를 연구하는 대신에, 시장 부족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붕괴된다는 등 철학적인 말을 늘어놓은 바 있다. 같은 대목에서 인민의 벗 선생들이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 가지를 더 검토해본다. 주관적인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가장 정확한 언급 가운데 하나로, 곧 크리벤코 선생이 보로네시 농민들의 예산에 대해 1894, 1호에서 언급했었던 부분을 무시하는 건, 불공평하다며 드물게 자세를 낮춰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이 선택한 통계를 기초로 삼아보면, 국내 급진주의자들과 인민의 벗들의 사고와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따른 사고 가운데 현실에서 어떤 생각이 더 정확한지를 확실히 할 수 있다.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학자인, 시체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군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 대해 서술하면서, 전형적인 농가 24곳 예산 항목들을 덧붙이며, 본문에서도 분석했다. 크리벤코는 같은 분석을 재현하면서도, 방법론이 소농들의 경제를 알기 위한 목적에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지 못하거나, 보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24곳의 예산은 크리벤코, 자신이 지적했듯이, 완전히 서로 다른 잘살거나, 중간이거나, 가난한 가구들을 묘사한다. 그러나 시체르비나도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유형에서 가구들을 한 덩이로 묶어, 평균 수치들을 활용했고, 그렇게 해서 그들 간 차이를 완전히 숨겼다. 그러나 소규모 생산자들 내부 분화는 아주 일반적이고, 주요한 사실이라서, 크리벤코가 선택한 빈약한 통계로부터 아주 뚜렷하게 감지된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농민들의 농업을 다룰 때, 그들을 농장 규모와 농업 유형에 따른 범주로 나누는 대신에, 시체르비나 선생이 그랬듯이 그들을 법적인 범주, 곧 과거 국유지 농민과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으로 구분하고, 자신의 모든 관심을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과 비교했을 때, 과거 국유지 농민의 번영에 돌리면서 같은 범주 내 농민들 간 차이가 범주 간 차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놓치고 만다. 이를 증명하고자, 24명 농민들을 세 개 집단으로 나눠,

 

a. 6, 잘사는 농민들

 

b. 11, 평균적인 농민들

 

c. 7, 가난한 농민들

 

크리벤코 선생은 과거 국유지 농민의 농가 당 지출이 541.3루블이고, 예전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 지출은 417.7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농민들의 지출이 동등하다는 점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 가운데 지출이 84.7루블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설령 1,456.2루블을 지출하는 독일 이주민을 제외하더라도, 또 다른 사람은 열 배에 해당하는 887.4루블이었다. 이를 한데 묶어놓는다면, 과연 평균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제시하는 범주들로 분류할 경우, 잘사는 농민 농가 당 평균 지출은 855.86루블이고, 중간층 농민은 471.61루블, 가난한 농민은 223.78루블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비율은 대략 4:2:1이다. 계속 이어가서, 시체르비나 발자취를 따라 크리벤코는 많은 법적인 범주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필요에 따른 경비를 제시한다. 과거 국유지 농민들이 연간 채소 음식에 지출하는 일인 당 경비는 13.4루블이고,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은 12.2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7루블

 

b). 14.5루블

 

c). 13.1루블

 

과거 지주들 밑에 있던 농민들이 일인 당 고기와 유제품에 지출하는 경비는 5.2루블이고, 과거 국유지 농민들은 7.7루블이었다. 반면에,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각각 11.7루블, 5.8루블, 3.6루블이다. 따라서 법적인 범주에 따른 계산은 이러한 큰 차이를 덮어버리는 데 불과하다는 점이 명백하다. 정녕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소득이 예전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 소득보다 53.7%, 더 크다고 말한다. 24명 농민에서 전체적 평균은 539루블이고, 두 범주로 나누면, 각각 600루블 이상과 약 400루블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면, 소득은,

 

a). 1,053.2루블

 

b). 473.8루블

 

c). 202.4루블

 

최대 10:2 비율일 뿐, 3:2가 아니었다. 또한 크리벤코는 과거 국유지 농민들 농가 당 자본 가치는 1,060루블이고, 과거 지주 밑에 있던 농민들은 635루블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범주에 따라, 구분할 경우, 수치는,

 

a). 1,737.91루블

 

b). 786.42루블

 

c). 363,38루블

 

다시 최대 비율은 10:2이지, 3:2가 아니었다. 이렇게 농민을 법적인 범주로 구분하면서부터 이와 같은 농민 경제에 대한 정확한 판단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버렸다. 경제적 능력에 따른 많은 유형에서 농가들을 검토한다면, 잘사는 농가는 평균 1,053.2루블 소득을 올리고, 855.86루블 경비를 지출해, 197.34루블 순수익을 얻는다는 점을 발견한다. 그에 비해 중간층 가구는 473.8루블 소득을 올리고, 471.46루블 경비를 지출해서, 농가 당 2.19루블 순수익을 거둔다. 신용 부채와 체납금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분명 생계를 잇기에는 부족한 금액으로, 농가 11곳 가운데 5곳이 적자였다. 반면에, 최하층 가난한 집단은 직접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소득이 202.4루블, 경비는 223.78루블로, 21.38루블 적자를 기록했다. 농가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전체적인 평균 순수익 44.11루블을 낸다면, 실제 그림은 명백하게 완전히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순수익을 확보한 6명의 잘사는 농민들이 8명의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의 농업 성격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순수익을 거둬들여, 산업에 의존할 필요성을 사실상 덜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농들은 모두 합쳐 자신들 예산에서 6.5%만 산업으로 충당한다. 6,319.5루블 가운데 412루블로, 게다가 해당 산업들은 시체르비나가 언제나 말했듯이, 운반이나 심지어 양치기와 같은 유형으로, 의존과는 거리가 멀고 타인 착취를 미리 전제로 한다. 바로 축적된 저축은 상인 자본으로 전환된다. 농민들은 4개 산업 시설들을 소유하고, 거기서 320루블 소득, 전체 5%를 거둬들이고 있었다.

 

중간층 농민들의 경제는 유형이 달랐다. 그들은 거의 생계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중산층 농민들이 농사만으로는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울 수 없어, 소득 19%를 이른바 산업으로부터 충당했다. 과연 어떤 종류 산업인지는 시체르비나 글에서 알 수 있는데, 7명 농민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독립적인 산업, 양복업과 숯 제조에 종사하고, 나머지 5명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있었다. 이들은 이미 반만 농민이고, 반은 노동자이다. 부업을 하면서 농사를 등한시할 수밖에는 없고, 따라서 자신의 농사가 약화된다. 가난한 농민들은 순전히 손해를 보면서 농사를 짓는다. 가계 예산에서는 산업의 중요성이 소득의 24%로 훨씬 더 컸고, 산업이란 거의 전적으로 농민 한 명만 제외하고, 노동력 판매였다. 빈농 가운데 2명은 산업에서 농장 노동으로부터 얻는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3/2를 차지했다. 소생자들에 따른 완전한 분화 과정이라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 소생자들 가운데 상위 집단은 부르주아로 변모했고, 하위 집단은 프롤레타리아가 됐다. 전체적인 평균을 택한다면, 당연히 거기에서는 무엇도 알 수 없고, 시골 지역에서 경제 상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크리벤코 방법론을 채택할 수 있도록 만든 건, 오로지 그러한 허구 평균을 갖고 작업 했기 때문이다. 해당 군 전체에서 농민 농업에서 전형적인 농가들에 따른 지위를 측정하고자, 시체르비나 선생은 농민들을 분여지 크기에 따른 집단으로 나눴더니, 선택된 농가 24곳에서 전반적인 평균 번영 수준이 군 내 평균보다 약 3/1 가량 더 높다고 드러났다. 하지만 계산법에서는 불반족스러웠다. 왜냐하면 24명 농민들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존재하고, 분여지 크기에 따른 분류는 농민층 분화를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여지가 번영에서 주요한 원인'이라는 크리벤코 이론은 완전히 틀렸다. 마을 공동체 내 토지를 '동등하게' 분배한다고 해서 말을 소유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토지를 포기한 채, 일자리를 찾아 떠나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걸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 또는 다수 말을 소유한 구성원들이 거대한 땅을 임차해서, 또한 이윤이 발생하는 큰 농장을 운영하기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 농가 24곳 예산을 가지고 따져보면, 6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한 명 부농이 758.5루블의 총소득을 거둬들였고, 7.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중간층 농민은 391.5루블, 6.9데샤니타 분여지를 보유한 빈농은 109.5루블을 거둬들인다는 점을 알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집단 간 소득 비율로는 4:2:1인 반면에, 분여지 비율은 2.6:1:0.8:1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주 당연하게도, 가구 당 22.1데샤티나 분여지를 보유한 부농들은 각각 8.8데샤티나를 추가로 더 빌리는 반면에, 분여지를 더 적게 보유한 9.2데샤티나 가운데 중간층 농민들은 더 적은 규모에서 분여지 7.7데샤티나를 빌렸고, 훨씬 더 적은 분여지 8.4데샤티나를 보유한 빈농들은 불과 2.8데샤티나만 추가로 임차한다는 점이 발견됐다. 크리벤코는 '불행하게도 시체르비나 선생이 제시한 통계에서 주 단위는 말할 거도 없고, 군 단위에서조차 전체적인 상황을 정확히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전체적인 평균으로 계산하는 잘못된 방법론에 의존하는 당신의 행동도 측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밖에는 없다. 일반적으로 시체르비나 통계는 아주 포괄적이고, 귀중해서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줬고, 크리벤코 선생이 그러지 못했다면 비난받을 대상은 시체르비나 선생이 아니다. 시체르비나는 농사용 가축에 따른 농민들 분류를 제시했을 뿐, 분여지에 따른 분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곧 법적인 부분이 아니라, 경제적인 구분에 따른 분류이다. 그리고 선택된 전형적인 24곳 농가에 따른 다양한 범주들 사이에서 비율이 해당 군을 통틀어 다양한 경제적 집단들 사이에서 비율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앞에서 볼 때, 전형적인 24곳 농가에서 전체적인 평균이 해당 군 농가보다 전반적으로 운영 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허구 평균 대신에 경제적 범주를 택해보면, 제대로 된 비교를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농가들에서 노동하는 농장 노동자들이 농사용 가축을 갖고 있지 못한 농민들보다 다소 아래에 위치했지만, 농민들에게 매우 근접해간다는 점을 발견한게 된다. 그리고 빈농들은 농사용 가축을 한 마리 보유한 농민들에 아주 가깝게 다가선다. 중간층 농민은 농사용 가축을 두세 마리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위에 위치해 있다. 반면에, 부유한 농민들은 농사용 가축을 네 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보다 약간 아래에 위치한 상태에서, 네마리 이상 보유한 농민들에게 근접해간다. 따라서 군 전체에서 이윤이 나는 농사에 규칙적으로 종사하면서, 외부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농민들이 1/10을 넘어선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들의 소득은 화폐로 표기되고, 따라서 상업적인 성격에 따른 농업을 전제로 한다. 대체로 농민들은 고용된 노동자들의 일손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 전체 가구에서 1/4 이상이 정규 농업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일시저으로 일용직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가구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에, 군 내 농민에서 절반 이상은 가난하고, 무마 농민 26% + 일마 농민 31.3% = 57.3%, 60%에 가깝게, 순전히 적자 상태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차 없는 강탈에 꾸준하게 시달린 끝에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는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는 없고, 농민들의 약 1/4는 이미 농업보다는 임금 노동에 더 많이 생계를 의존한다. 나머지 중간층 농민들은 어쨌든 정기적인 손실을 보면서 농사를 짓는데, 외부 수입으로 보충하기 때문에, 따라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

 

크리벤코가 제시한 그림이 실제 상태를 얼마나 왜곡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통계를 아주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살펴봤다. 당연하게도 허구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거짓이었다. 전형적인 24가구 예산 가운데, 한 명의 잘사는 농민의 총소득 +197.34루블이 가난한 아홉 농가에서 적자를 메워주고, -21.38×9=192.42, 그래서 해당 군 내 10% 부농들이 57% 빈농들의 적자를 상쇄해줄 뿐만이 아니라, 일정한 정도 잉여를 산출해낸다는 점이다. 24곳 농가에서 평균 예산으로부터 44.14루블 잉여를 이끌어내고, 또는 신용 부채와 체납금 15.97루블을 차감한 크리벤코는 그저 중산층과 중하층 농민들의 쇠퇴를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간층 농민들을 언급할 때만, 쇠퇴를 말할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농민 대중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수탈, 곧 상대적으로 크고, 튼튼하게 자리 잡은 농장을 소유한 소수 손에서 생산 수단이 집중된 결과로 인한 강탈을 목격한다. 직접적인 수탈을 무시했기 때문에 크리벤코는 농가 예산들에 따른 또 다른 아주 흥미로운 특징, 농민층 분화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는 점을 마찬가지로 증명해준다는 걸 관찰하는 데 실패했다. 최상위에서 밑바닥까지 훑어보면, 산업, 곧 주로 노동력 판매로부터 얻는 소득의 중요성은 점점 커진다.

 

1. 부유한 농민: 6.5%

 

2. 중간층 농민: 18.8%

 

3. 가난한 농민: 23.6%

 

다른 한편으로, 맨 밑바닥에서 최상위 순서로 훑어보면, 농업에서 상품적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증가하고, 처분되는 농산품 비율이 늘어난다. 각 범주 별로 농업에서 거둬들이는 총 소득은

 

a. 3,861.7/1,774.4

 

b. 3,163.8/899.9

 

c. 689.9/175.24

 

분모는 소득 화폐 부문을 가리키며, 최상위 범주에서 맨 밑바닥으로 가면서, 각각 45.9%, 28.3%, 25.4%를 차지한다. 다시금 강탈 당한 농민들로부터 가져간 생산 수단이 어떻게 자본으로 변화하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크리벤코가 활용된 자료로부터 정확한 결론을 분명하게 이끌어낼 수는 없다. 철도와 같이 여행하는 그 지역 한 농민으로부터 들은 걸 기초로, 노브고로드 주 농민 농업에서 화폐적인 성격을 묘사한 뒤에야, 크리벤코에게는 저렴하게 풀을 베고, 좋은 가격에 팔고자, 특별한 능력들을 배양하고, 한 가지에 몰두하도록 만드는 환경, 곧 상품 경제라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상품 경제는 상업적인 재능을 일깨우고 세련되게 만드는 학교로 기능한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 소설 속 자본주의 고리대금업자 인물인, 콜파예프와 데루노프와 같이 그 외 다른 유형에서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이 되는 반면에, 우직하고, 둔한 사람들은 뒤처지고, 퇴화해서, 궁핍해진 끝에 농장 노동자 대열로 들어섰다.

 

전혀 다른 조건들이 지배적인 주 농업이 주 산업인 주, 보로네시 통계에서도 도달한 결론은 정확히 같았다. 이를 본 사람들은 상품 경제 체제가 국가 전반에서 경제 생활에 따른 주된 배경이자, 특히 공동체 농민층에서 가장 큰 바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이 아주 명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상품 경제만으로도 인민들과 농민층이 몰락해서 농장 노동자 대열에 들어선 프롤레타리아와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인 부르주아지로 분화됐다는, 곧 자본주의 경제로부터 전환된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현실을 직시하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감히 말하지도 못한다. 크리벤코는,

 

'일부 사람들은 같은 상태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없는 임무라 여긴다. 문제를 다소 다르게 바라본다. 앞서 지적한대로, 자본주의는 의심할 나위 없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 역할이 모두를 아우르는데다,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그 외 다른 어떤 요인도 국민 경제에서 발생하는 변화에는 책임이 없고, 미래에 다른 어떤 해결책도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다.'

 

현재 체계에 대한 정확하고, 직설적인 묘사 대신에, 농민층이 왜 착취자들과 농장 노동자들로 갈라지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에, 크리벤코는 자본주의 역할이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알맹이 없는 문장으로 문제를 일축시켜버렸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이다.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려면 크리벤코는 다른 요인들이 결정적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지적한 외에, 곧 착취자들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에 따른 계급 투쟁 외에 다른 어떤 해결책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무엇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다음 문장을 두고 자신이 보여줬다고 여기는 걸까. 우스울지 몰라도, 인민의 벗들로부터 뭘 더 기대하겠는가.

 

'알다시피 맨 먼저 쇠락한 사람들은 토지가 빈약한 취약 농가들이다. 5데샤티나 미만 분여지를 보유한 농가들을 말한다. 그러나 15.7데샤티나 분여지를 확보한 전형적인 국유지 농민 농장들은 안정성 면에서도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그 정도 소득인 80루블 순수익을 확보하고자, 농가에서는 추가로 5데샤티나를 임차하지만, 그건 그저 농가들이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악명 높은 토지 빈곤을 자본주의와 결부시키는 그런 '수정주의 사고'는 과연 무엇에 해당하는가. 조금밖에 못 가진 사람들은 그마저도 잃어버리는 반면에, 각각 15.7데샤티나씩으로 많이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얻게 된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몰락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유해진다는 말을 아무 의미 없이 바꿔 말한 데 불과하다. 무엇도 해명해주지 못하는 토지 빈곤에 대한 의미 없는 말과 결별해야 할 가장 좋은 시점이 다가왔다. 단지 과정만을 묘사해줄 뿐이며, 더군다나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토지만을 가지고 말할 게 아니라, 생산 수단 전반에 대해 말해야만 하며, 농민들이 토지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다고 말할 게 아니라, 토지로부터 분리됐고, 날로 발전하는 자본주의로부터 수탈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자신의 철학적인 담론을 마무리 지으며, 농업이 어떠한 상황 아래에서도 자연 발생성을 유지하며 제조업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말할 의도는 없다고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건, 인위적으로 분리된 산업을 창출하는 게 비이성적이고, 노동자를 토지와 생산 도굴부터 분리시키는 건 자본주의로부터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증진시키는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게 전부다.'

 

여기서 크리벤코는 다시, 노동자가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착취자 손아귀로 넘어간다면, 노동자가 가난하기 때문이며, 착취자가 토지가 더 많기 때문이라는 심오한 사상을 높게 염두에 뒀다. 그리고 같은 부류의 철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결정적 요인으로 '편협하게' 간주해서 드러낸다고 비난을 해댄다. 농민과 수공업자 분화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한 번 더 고찰해봤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문제를 어떻게 묘사하고, 설명하는지를 분명하게 해둘 필요는 있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사회학자가 보기에 농민들은 가난해지는 반면에, 돈을 좇는 사람들과 착취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윤을 이끌어낸다는 걸 의미하는 사실 관계들이, 유물론자들에게 있어서는 상품 생산 자체의 필요에 따른 상품 생산자들의 부르주아적인 분화를 의미한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자산 계급과 무산 계급 사이에서 투쟁이 공장에서 뿐만 아니라, 머나먼 오지 마을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논지, 모든 곳에서 같은 투쟁은 상품 경제 결과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 투쟁이라는 논지 근거로 작용하는 사실 관계들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젬스트보 통계가 제공한 자료 덕분에 정확히 서술될 수 있었던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에 따른 해체와 탈농민화는 국내 현실을 바라보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인식, 다시 말해 농민과 수공업자가 그러한 단어에서 '단정적인' 의미에서 소생산자, 곧 소부르주아라는 인식에 따른 정확성에서 실질적인 증거를 제공해준다. 같은 논지는 소생산자들이 살아가는 상품 경제 환경이나 그러한 환경 때문에 소생산자들이 자본주의적으로 분화되는 걸 이해하지 못한 옛 농민 사회주의에 맞서는 노동 계급 사회주의 이론에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를 진지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에 자신의 주장을 여기에 집중시켜야 했을 뿐더러, 정치경제학 시각에서도 국내 상품 경제 체제가 아니며, 그래서 농민층 해체가 상품 경제 체제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닐 뿐 아니라, 인민 대중에 따른 강탈과 노동 인민에 다른 착취는 농민을 포함한 한 국가 사회 경제에서 자본주의적인 구조인 부르주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설명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어야만 했다.

 

,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게나, 신사 양반들.

 

사회민주주의 이론에서 실증적인 증거로 택하기를 선호한 건 농민과 수공업 경제에 대한 통계인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인민의 벗들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고를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대조하는 데 그쳤더라면, 그건 유물론적인 방법론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기에 덧붙여 인민주의적인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한 국가에서 현재 사회적·경제적인 현실에서 인민주의자들의 물질적인 토대를 증명해야만 한다. 한 국가에서 농민과 수공업자 경제 대한 예증과 사례들은 농민의 신망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인민의 벗들이 농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농촌 경제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해주고, 따라서 인민의 벗들을 소부르주아에 따른 이념가들로 분류하는 게 적합하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인민의 벗들은 한 국가에서 급진주의자들의 사상과 계획들이 소부르주아들의 이해 관계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도 드러내준다. 인민의 벗들의 계획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면, 훨씬 더 분명해지는 연관 관계는 도대체 급진적인 사상들이 왜 그토록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인민의 벗들의 정치적인 노예 근성과 기꺼이 타협할 준비가 된 태도 역시도 훌륭하게 설명해준다.

 

마막으로, 자본주의가 아직 채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그와 같은 경제학적인 측면들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고찰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인민주의자들은 보통 자신들의 이론을 위한 자료를 끌어오곤 하는 그런 경제학에 대한 연구와 서술은 사회민주주의 경향에 대해 이곳 인민들 사이에 아주 만연한 반발 의식에 실질적으로 대답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자본주의가 인민 제도와 모순된다는 일반적인 생각으로부터 더 나아가, 대규모 자본주의를 발전적으로 간주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강도 같은 현 체제에 맞서 싸우는 토대로 삼곳 피어하는 건, 다름 아닌 대규모 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한 국가의 급진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농민 대중의 이익을 무시한 채로 '모든 농민을 공장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바란다는' 등의 비난을 가한다. 모든 주장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실제 있는 그대로 판단하면서도, 시골 지역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는 놀라운만큼 비논리적이고, 이상한 과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에게는 실제 농촌과 그곳의 실제 경제 상태를 보여주기보다 더 좋은 답변을 있을 수 없다. 농촌에 따른 경제 환경을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내 농촌이 따로 떨어진 작은 지역들에서 사회적·경제적인 생활을 규정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 또는 중앙 시장에서 작은 부문들의 체계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각각의 지역에서 시장이 규제하는 사회적·경제적 구조에 대체로 특징적인 모든 현상을 찾을 수 있다. 한때 동등하고, 가부장적이었던 직접 생산자들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로 분화되는 걸 알아내며, 노동 인민 주위에 그물을 치고, 생명소를 빨아가는 자본, 특히 상인 자본에 따른 부상을 알게 된다. 급진주의자들이 제시한 농민 경제에 관한 묘사를 농촌에 따른 경제 생활에 대한 정확한 일차 자료와 대비해보면, 그들의 비판적 사고 체계에서는 각 지역 시장에서 떼 지어 모여 있는 장사치들과 행상, 흥정꾼들, 시장을 장악한 채 노동 인민들을 가차 없이 억압하는 소착취자 무리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대개 '더 이상 농민들은 없고, 장사치만 있다.'는 언급 정도만으로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다.

 

'그래, 그 말은 아주 옳다.'

 

'더 이상 농민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상인들 모두를 뚜렷하게 구별되는 집단, 곧 정확한 정치경제학 용어로 말하자면, 영리 기업에 종사하고, 그 정도가 어떻든 간에 타인 노동을 점취하는 사람들과 취급하려고 시도해보기를 바란다. 해당 집단에서 경제적인 힘과 지역 전체에 따른 경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정확히 수치로 표기하려고 노력해보라. 그런 다음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노동하기 때문에 더 이상 농민이 아니게 된 사람들을 정반대 집단으로 설정해보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진지한 조사를 위한 기초적인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켜나가려 애쓰다 보면, 부르주아적인 분화라는 아주 생생한 그림을 얻게 될 테고, 더 이상 인민 제도라는 신화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될테니 말이다. 소규모 시골 작취자들 무리는 끔찍한 세력을 대표한다. 특히 고립된 채 혼자 일하는 임금 노동자를 억압하고, 자신들에게 얽어매어 일말의 구제받을 희망조차 앗아가기 때문에 끔찍하다. 앞서 묘사된 체계의 특징인 낮은 노동 생산성과 의사 소통 수단에 따른 부재에서 기인한 시골에 따른 야만적인 환경으로 비춰볼 때도, 그들로부터 착취는 노동 강탈일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인간 존엄에 따른 아시아적인 침해에도 해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실제 시골을 자본주의와 비교해본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 국가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역할을 발전적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작고, 흩어진 시장들을 전국적인 수준에서 단일 시장으로 한데 끌어모으고, 선의를 가진 소규모 착취자 무리를 대신해서, 한 줌 커다란 '조국의 대들보들'을 창조해내며, 노동을 사회화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한편, 지역 착취자들로부터 노동 인민에 따른 예속을 박살내고, 대규모 자본에 종속시킨다. 여기서 종속은 노동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야만성, 신체를 손상당한 여성과 아이들 등 모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과거 예속과 비교해볼 때 발전적이다. 그 이유는 노동 계급 의식을 각성시키고, 침묵하거나 일관성 없는 불만을 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키며, 뿔뿔이 흩어진 채 벌어지던 사소하고, 무분별한 반란을 모든 노동 인민 해방을 위한 조직화된 계급 투쟁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같은 투쟁은 대규모 자본주의에 따른 존재라는 바로 그러한 조건 자체로부터 동력이 생겨나며, 따라서 의심할 나위 없이 일정한 성공을 확신한다.

 

농민 대중을 무시한다는 비난에 대한 응답으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에 따른 다음과 같은 말들로부터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비판은 사슬을 장식하고 있던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렸는데, 인간의 상상 속 장식물이 벗겨진 족쇄를 그대로 차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사슬을 벗어던져버리고,

살아있는 꽃을 향해 손을 뻗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촌을 장식한 가공의 꽃들을 뽑아버리고, 이상화와 환상에 맞서 싸우며, 그걸 파괴하고자 작업을 수행해낸다. 농민 대중을 현재 억압과 점진적인 소멸, 노예화 상태에 머무리지 않도록 하고, 어디서나 노동 인민을 속박하는 사슬 정체가 무엇이며, 사슬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프롤레타리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그래서 떨쳐일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현실의 꽃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도록 한다.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그토록 극도로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처한 위치 덕분에 스스로 계급 의식을 획득하고, 계급 투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노동 인민 대표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사상을 펼쳐놓는 순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농민들을 공장의 용광로로 밀어넣기를 원한다는 비난에 처한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하는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정부와 사회, 곧 도처에서 노동 인민을 속박해온 부르주아 기관들에, 노동 인민의 해방을 향한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고도 줏대 없는 인종들은 건방지게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상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등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

 

인민의 벗들의 이론적인 견해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 인민의 벗들의 정치 강령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슨 수로 자신들이 불을 끄겠다고 나서는 걸까. 인민의 벗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제안 대신에 어떤 화롤를 제시하고 있을까. 유자코프 선생은 농업부, 러시아 부, 10에서,

 

 

'농민 은행 개편, 식민화 부서 설립, 인민 농업을 위한 국유지 토지 임대차 규제, 토지 임대에 따른 연구와 규제 등이 인민 농업을 회복시키고, 막 생겨나는 금권 정치에 따른 경제적 폭력으로부터 인민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

 

이라고 말한다. 경제 발전에 따른 문제점이란 글에서는 '인민 농업 회복'을 위한 해당 계획들이 뒤이은 '최초로, 그러나 필수적인 조치들'로부터 보완된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마을 공동체에 당장 지장을 주는 모든 규제 제거, 보호 감독에 따른 면제, 농업의 사회화에 따른 공동 경작의 채택, 땅에서 얻는 원료 공동체 가공 개발' 같은 조치들이다. 크리벤코 선생과 카리셰프 선생은 여기에다 '저금리 신용, 집단 농장 형태 농업, 보장된 시장, 고용주 이윤을 없앨 가망성', '값싼 엔진 기관을 비롯한 기술 혁신 창안', '박물관, 창고, 대리점'을 덧붙인다. 해당 강령을 검토해보면, 신사 양반들은 현대 사회 입장을 무의식적인 자본주의 체제 입장으로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고치고, 끼워맞춰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인민의 벗들이 내놓은 모든 발전적인 조치들, 저금리 신용, 기계 개량, 은행 등은 부르주아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점을 알아낼 수 있다. 물론 현재 체계에서는 어떠한 개혁도 쓸모가 없고, 신용, 이민, 세금 개혁, 모든 토지에 따른 농민에게로 이전은 무엇 하나 눈에 띄게 바꾸지도 못하며, 오히려 반대로 과도하 보고 감독과 봉건적이 부과금 존속, 농민 토지 예속 등으로부터 지체된 자본주의 경제를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갈 거라던 니콜라이 온 말은 가장 귀중한 이론들 가운데 하나로, 인민의 벗들은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건 지극히 옳았다. 니콜라이 온에게 인민의 벗은, 바실치코프 왕자같이 신용 확대, 발전을 소망하는 경제학자들로 부르주아 같은 자유주의적인 걸 바라면서, 자본주의 관계에 따른 발전과 강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민의 벗들은 농민층 내 생산 관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대를 공개적인 장으로 끌어내려 애쓰거나, 적대로부터 예속화된 사람들 쪽에 합류해서, 투쟁에 나서는 걸 도우려 하기보다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조치들로부터 투쟁을 멈추게 하면서부터 화해와 통합을 이루기를 꿈꾼다. 같은 모든 조치들에 다른 결과물은 당연히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을 수밖에는 없다. 모든 종류의 신용, 개량, 은행, 비슷한 '발전적인' 조치들이 오로지 적절히 운영되고, 틀이 잡힌 농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확실한 저축을 보유한 사람들, 곧 극소수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에게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하면서, 앞서 제시된 분화를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농민 은행과 유사 기관들을 아무리 개편하더라도, 그동안 빼앗겨왔고, 또 계속해서 빼앗기는 인민 대중 입장에서는 적절한 농업 수단은 물론이고, 생계를 이을 수단조차 부족하다는,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점을 조금도 바꿔놓지 못한다.

 

집단 농장과 공동 경작도 마찬가지다. 유자코프는 공동 경작을 가리켜, '농업에 따른 사회화'라고 불렀다. 매우 웃기는 말로, 사회화는 단일 마을 경제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생산이 조직되는 걸 요구하고, 생산 수단을 독점해서 현재 국내에서 사회 경제를 주도하는 착취자들에 따른 재산 몰수를 필요로 한다. 시시한 속물적인 훈계가 아닌, 거듭되는 투쟁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조치들이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반쪽짜리 조치들로 변모해서는, 인정 많고 관대한 부르주아에게 근근이 연명해가는 동안에, 피착취자들로부터 투쟁보다는 몇몇 개인들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개량 조치로부터 이득을 얻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훨씬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신사 양반들은 러시아인 삶에서도 적대를 숨기고자, 얼마나 터무니 없는 시도를 하는지는 물론 현재 투쟁을 끝내려는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그럴 텐데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닦는 거나 다름 없다. 그리벤코 주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식층이 공장주들의 기업을 지휘하자, 지식층은 대중 산업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지식층의 철학 전체는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만, 만약 착취자들이 없다면 투쟁과 착취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징징댄다. 과연 크리벤코는 쓸데없는 문구로 무슨 뜻을 전달하려던 걸까. 해를 거듭할수록, 국내 대학과 기타 교육 기관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먹여 살려줄 누군가를 찾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는 '지식인'이라는 상표를 찍어내고 있다는 말을 부인할 수 있을까. 오늘날 국내에서 '지식인'을 지탱할 수단을 소유한 건, 오직 소수 부르주아뿐이라는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인민의 벗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에, 국내 부르주아 지식계급이 사라지게 된다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 '만약' 부르주아 지식 게급이 아니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만약' 부르주아 지식 계급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국내에도 부르주아 계급도, 자본주의도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만약''그리고'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일생을 보내는 데 만족한다. 더군다나 신사 양반들은 자본주의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보태는 걸 거부할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잘못된 무언가를 들여다보기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일정한 결함들이 제거되면, 인민의 벗들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게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아니하다. 그렇다면 크리벤코의 다음 발언은 어떨까.

 

'자본주의 생산과 산업에 따른 자본주의화는 공장제 수공업이 인민들로부터 오로지 결별만 하는 출구가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인민들의 삶으로 들어와 농업과 원료 산업으로 더 가깝게 접근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성사될 수 있고, 그런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

 

크리벤코는 미하일로프스키 선생과 비교해봤을 때는 솔직하고, 단도직입적인 면 같은 수 많은 장점들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주제를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고, 꼼지락대기만 하다가, 부드럽고, 미려한 문장들로 지면을 채운다면, 사업가 개성으로 실용적인 인물인 크리벤코는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자신의 터무니없는 견해 일체를 거리낌도 없이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자본주의는 인민의 삶으로 들어올 수 없다.'

 

노동 인민이 생산 수단과 결별하지 않고서도 자본주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에 드는 상황이다. 적어도 인민의 벗들은 무엇을 원하는지가 아주 명확해졌으니까 말이다. 인민의 벗들은 자본주의가 없는 상품 경제, 강탈도, 착취도 없이 인간적인 지주와 자유주의적인 관료들의 팔 아래서 평화롭게 무위도식하는 소부르주아 계급만이 있는 자본주의를 원한다. 국내에 혜택을 줄 의도를 지닌 부서 관료들의 진지한 태도에 힘입은 인민의 벗들은 늑대가 욕심을 감추고 양이 가죽을 감추듯이, 자신들의 속셈을 어떻게 감출지 궁리한다. 그래서 속셈의 성격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우리의 문화 용병들글로 눈을 돌려야 한다.크리벤코는 집단 농장과 국유 형태에 따른 산업은 현 상황에서도 그다지 품어볼 만한 상상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크리벤코에게는 구상은 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경제 문제들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인상만 느껴진다. 크리벤코는 100루블이 넘지 않는 소액의 지분으로 한 합자 회사로부터 돈 강 지역을 기술 개발할 계획을 가지고,러시아 부사무실을 방문한 어느 기술자의 말을 꺼낸다. 크리벤코는 기술자에게 권유를 받는다.

 

"지분은 사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 소유가 됩니다. 회사에 고용된 마을 주민 일부는 통상적인 임금을 받고, 마을 공동체는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보장을 해줍니다."

 

정말로 경영의 귀재가 아닌가. 인민의 삶에 자본주의가 존경스럽도록 단순하고, 쉽게 도입되고, 파멸적인 특성들이 모두 제거되는 셈이니 말이다. 단지 요구되는 거라곤, 시골 부자들이 공동체로부터 지분을 사들이고, 기업으로부터 배당금을 받는 게 전부이며, 그 속에서 공동체 주민 일부는 일자리를 얻고, 토지와 유대 관계를 보장받는다. 그런 유대 관계는 토지로부터 생계를 유지받기에는 불충분하지만, 주민들을 지역에 묶어둔 채, 지역 자본주의 기업에 따른 노예로 만들고, 주민들을 주인도 바꾸지 못하기에는 충분하다. 여기서 주인이란, 곧 자본가를 말하며,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사람을 달리 부를 방도가 없기 때문에, 아주 타당한 표기이다. 독자들은 일고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없는 헛소리에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한 본인에게 짜증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헛소리라고 하더라도, 연구할 가치와 필요는 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적·경제적 관계들을 나타내고 있고, 따라서 한 국가에서도 아주 널리 퍼져 있는 사회 통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앞으로 오랫동안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핵심은 국내에서 봉건적인 생산 양식으로부터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 전환이 토지로부터 생계를 꾸려나가지도 못하고, 지주에게 소작료를 지불할 수 없게 된 바로 이 순간까지도 농민은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으며, 농민으로 하여금 예전에 좋았던 시절에는 독립적인 형태를 띠었거나, 수레꾼 같은 독립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런 유형에 따른 고용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덕분에 상대적으로는 좋은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노동이라 여겨졌던 외부 고용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했고, 또 계속해서 초래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농민들은 오늘날과 비교해볼 때도, 일정 정도 안녕을 보장받았었다. 십만 명에 달하는 귀족 경찰들과 국내 토지를 끌어모으던 초창기 부르주아들의 보호 아래에서 평온하고도,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농노로서 안녕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그러한 체계의 그늘을 간단히 무시한 채로, 이상화하고, 환상을 품는다. 여기서 환상이라고 표현한 건, 그 체계가 오래전에 작동을 멈춰버렸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 따른 대규모 재산 강탈을 불러온, 과거 고용을 족쇄에서 풀려난 일손들에 대한 착취로 변화시킨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오래전에 파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과 토지와 연결 고리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그러한 연결 고리를 단독으로 보장해주는 농노제를 원하지는 않는다. 농노제는 그 연결 고리를 걸 수 없도록 만드는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로부터 이미 붕괴됐다.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농민을 토지로부터 멀리 내쫓지 않은 외부 고용, 노동이 시장을 위해 이뤄지는 반면에, 경쟁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자본을 창출하지 않으며 인민 대중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지 않는 외부 고용을 바란다. 사회학에서 주관적인 방법론에나 들어맞을 법한 같은 주장에 대해, 소부르주아 기사들은 여기저기서 좋은 것만 취하고 싶어한다. 물론 실제로는 유치한 바람은 오직 현실을 무시하는 반동적인 환상, 새로운 체계로부터 정말로 발전적이고, 혁명적인 측면들을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절반은 농노, 절반은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과거 훌륭한 체계, 곧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공포로 가득차고 벗어날 수 없는 체계를 영속화하려는 조치들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질 뿐이다. 반동들 사이에서 인민의 벗들을 구분해주는 같은 설명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증명하고자, 두 가지를 인용해보자.

 

모스크바 젬스트보 통계에서 포돌스크 군에 사는 K 여사라는 사람의 농장에 대한 묘사를 읽을 수 있다. 묘사 자체가 아니라 농장이 모스크바 통계학자들과, V.V. 보론초프 선생 모두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V. 오를로프 선생은 유명한 K 여사 농장에 대해 '농업이 건강한 상태에 있고, 개인 토지 소유주들에 따른 농장들도 더 잘 운영되고 있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논지에서 확실한 실제 확인 사례로 여겨졌다. 여인의 농장에 대한 오를로프 주장에 비춰볼 때, 그녀는 겨울에 밀가루를 꿔주는 대가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는 지역 농민들의 노동으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인은 농민들에게 특히나 친절하게 굴며, 도움을 줬고, 그래서 농민들은 읍에서 가장 잘사는 축에 속할 뿐 아니라, 거의 새로운 추수철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의문은 바로 해당 대목에서 고개를 든다. N. 카블루코프와 오를로프가 생각하듯이, 그런 방식이 농민과 지주 간 적대적인 이해 관계를 할 수 없도록 만들까.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K 여사는 농민들의 노동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착취는 전혀 사라지지도 않았다. K 여사는 착취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친절함 뒤에 감춰진 착취를 보지 못한 데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인 오를로프는 그렇지 않았다. 오를로프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보이는 친절함에 황홀해 하면서 공장 소유주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잡화점과 주거 등을 제공해주는 사례들을 열광적으로 들려주는 서구 박애주의자들과 정확히 같은 입장을 취한다. 적대적인 이해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사실들의 존재로부터, 결론을 끌어온다는 건,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 바로 첫 핵심이다.

 

둘째 핵심은 오를로프 선생의 설명으로부터 K 여사의 농민들이 뛰어난 수확량 덕분에 가축을 확보했고, 유복한 농장을 소유하게 됐다는 점을 알게 됐다. 유복한 농민들은 '거의'가 아니라, '완전히' 번창하게 됐고, '다수'가 아닌 '유복한 농민들' 모두가 새로운 추수가 거의 되돌아올 때까지가 아니라, 정확히 그 시기까지 충분한 곡식을 보유하게 됐다고 추정해보자. 농민들은 충분한 토지와 '목장 및 목초지'를 소유하고 있다고도 추정해보자.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농민들은 K 여사에게 토지를 임차한 뒤, 노동으로 그 대가를 지급한다. 그럴 경우에, 곧 농민 농업이 정말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을 경우, 오를로프는 정말로 농민들이 스스로 동의해서, 지금 하고 있듯이 K 여사의 사유지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철저히,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수행할 거라고 믿는 걸까. 또는 어쩌면 어머니 같은 보살핌으로, 농민들에게서 피땀을 뽑아내는 친절한 여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결국 목초지와 목장을 처분할 수밖에 없는 농민들의 절망적인 현재 상태보다 더 강력한 도기 부여가 된다고 믿는 걸까.

 

분명 인민의 벗들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진정한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로 착취를 없애기보다는 완화시키기를 바라고, 결속보다는 회유를 원한다. 편협한 사회민주주의들을 맹렬하게 비판하는 관점에서부터 시작된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에는 지주와 자본가들이 공정하게 대해주기만 한다면, '번영을 구가하는' 농민들이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거라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하나 더 들어보자. 유자코프는러시아 인민의 토지 소유 할당량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글에서, 인민들의 토지 소유, 곧 자유주의자들의 용어로는, 자본주의와 착취를 배제하는 토지 소유에 따른 규모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상세하게 설명했었다. 크리벤코에 따른 탁월한 설명이 있는 뒤, 역시나 자본주의를 인민의 삶에 도입하는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지주의 신분으로, 크리벤코는 분여지로부터 '식량과 지불금'을 충당하는 반면에, 나머지 일자리로부터 얻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크리벤코는 농민이 토지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부터, 한쪽으로는 분여지에서 지주로부터, 다른 쪽으로는 일자리에서 자본가로부터 중복된 착취에 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단지 운명이라고 체념해버리고 만다. 중복된 착취에 시달리는 소생산자들에 따른 같은 상태와 생활 조건은 더군다나 필연적으로 주눅 들고 짓밟힌 심리를 생기도록 만들어, 피억압 계급에 따른 승리는 고사하고, 투쟁에 대한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절반만 중세적인 상황은 인민의 벗들의 전망과 이상의 극치이다. 그래서 국내 개혁 이후로,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한 자본주의가 옛날 국내를 떠받치던 기두으로, 가부장적인 절반 농노 상태에 따른 농민층을 뿌리째 뽑아, 절반 농노 상태에 농민층들을 중세와 절반은 봉건적인 상황에서 끌어내고, 현대 순수한 자본주의적인 환경에 가져다놓고는 농민층으로 하여금 자신의 오랜 고향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아, 국내 곳곳을 헤매다 노예 사슬을 끊고, 지역 일자리 제공자에게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들면서, 전체적인 계급 착취에 따른 토대가 독사 같이 특정 인물의 약탈과는 거리가 먼 계급 착취라는 점을 드러내고, 자본주의가 가축 수준으로 주눅들고, 굴복한 나머지 농민 인구를 한꺼번에 점점 더 복잡한 사회적·정치적인 삶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자, 소부르주아 기사님들은 옛 기둥들의 몰락과 파괴에 대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지금은 눈이 멀어, 새로운 삶에 대한 양식에서 혁명적인 측면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전 착취 체제에 전혀 묶여 있지도 않으면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위치에 있는 새로운 사회 세력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창출해내는지를 전혀 보지 못함에도, 예전의 좋았던 시절에 대해 울부짖는 모습을 여전히 계속해서 보여주고 만다.

 

하지만 인민의 벗들은 현 체제에서도 어떠한 급진적인 변화도 바라는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인민의 벗들은 현존하는 토대에서부터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에 전적으로 만족했으며, 실제로 크리벤코는 그런 조치들을 고안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는 토착 하급 관리 같은 행정 능력들을 과시했다. 크리벤코는,

 

'대체로 인민 사업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와 급진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문제는 특별한 조사와 산업을 인민의 삶에 적용할 수 있거나, 적용 과정에서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칠 수 있다는 걸, 나누는 게 요구된다.'

 

크리벤코는 많은 산업들을 자본주의화되지 않거나, 이미 자본주의화가 발생하고, 대규모 산업과 생존을 놓고 경쟁할 수 있도록 나누면서, 그런 분할에 따른 사례를 직접 제시한다. 또한 이 행정가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경우에 소생산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변동으로 인해, 소생산자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갈라지는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역 시장에 따른 팽창과 보다 더 큰 시장으로 합병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술 발전으로부터도 그럴 수 있을까. 또는 기술 발전에 따라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일 필요는 없는 걸까. 마지막으로, 크리벤코는 대규모 생산 조직도 요구한다. 명백히 여기서 필요한 건, 대규모 생산 조직이고, 고정 자본과 유동 자본, 기계 등이나 또는 같은 조건과 균형을 맞출 다른 무언가, 곧 값싼 신용, 불필요한 중간 상인들의 제거, 집단 농장 형태에 따른 농업과 고용주들의 이윤을 처분할 여지, 시장 확보, 값싼 엔진 기관 개발, 그 외 기술적인 개선, 또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에 따른 일부 삭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종류의 논리는 말로는 드넓은 이상을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틀에 박힌 자유주의를 드러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주 특징적이다. 앞서 철학자는 고용주들에 따른 이윤을 처분할 여지와 대규모 농업에 따른 조직화를 다름 아닌 출발점으로 삼는다. 아주 훌륭하다.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바라기도 하니까.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어떻게 달성하기를 원하는가. 고용주 없이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고자, 우선 사회적인 경제에 따른 상품 구조를 철폐하고, 공동체, 공산주의 구조로 대체하는 게 필요하다. 그 아래에서는 현재와 같이 생산이 시장으로부터 규율되는 게 아니라, 생산자 자신, 노동자 조직 자체로부터 규율되고, 생산 수단은 사적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로부터 소유된다. 사적 전유로부터, 공동체적인 전유로 변화는 명백히 우선 생산 형태에 따른 변화를 필요로 하고, 소생산자들과 분리되어 있고, 규모가 작으며, 고립된 생산 과정이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합쳐지는 게 필요로 해진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창출해낸 바로 그 물질적인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스스로 자본주의를 토대로 삼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인민의 벗들은 어떤 행동을 제안하는가. 인민의 벗들은 침묵한다. 인민의 벗들은 상품 경제에 따른 철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분명히 인민의 벗들의 드넓은 이상은 사회적 생산 체계에 따른 경계를 절대 넘어설 수도 없다. 더구나 고용주에 따른 이윤을 철페하고자,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윤을 획득하는 고용주들에게 이윤을 빼앗아 오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을 떠받치는 기둥들을 빼앗아 오고자, 부르주아 체제에 맞선 대중적인 혁명 운동이 필요하다. 해당 체제와는 전혀 유대 관계가 없는 프롤레타리아 노동 계급만이 할 수 있는 운동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머릿 속에 투쟁을 전혀 그리고 있지도 않고, 고용주들 스스로 관리 기관들 말고도 다른 유형에서 공적인 인물들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점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분명 인민의 벗들은 고용주 이윤에 맞선 어떠한 진지한 조치들을 취할 의향을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다. 크리벤코는 단지 자신의 혀가 자신을 압도하는 걸 허락했을 뿐이다. 그리고서 크리벤코는 곧장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고용주 이윤을 처분할 여지' 같은 다른 무언가, 곧 신용과 조직된 홍보, 기술적인 개선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는 거다. 따라서 모든 건 아주 만족스럽게 정리된다. 이윤을 얻을 신성한 권리를 철폐하는 대신에, 다시 말해 고용주 양반들을 아주 화나게 할 절차 대신에, 자본주의에 싸움을 위한 더 나은 무기를 제공하고, 인민의 소부르주아들을 강화하고, 굳건히 하며, 발전시킬 뿐인 아주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조치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소부르주아만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의심을 전혀 남기지 않고자, 크리벤코는 인상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고용주 이윤 철폐는 임금의 삭감으로부터 균형이 맞춰질 수 있다.'

 

얼핏 듣기에는 완전히 횡설수설처럼 드린다. 그러나 아니다. 소부르주아 사상을 일관되게 적용한 표현이다. 크리벤코는 거대 자본과 소자본 사이에서 투쟁 같은 사실을 관찰하며, 진정한 인민의 벗으로 당연히 소자본가 쪽에 선다.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소자본가에 따른 가장 강력한 무기 가운데 하나가 임금 삭감이라는 점을 들은 바 있었다. 노동일 연장과 함께, 국내 수 많은 산업들에서 아주 정확하게 보여지고, 확인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소자본가들을 구하기를 바랐던 크리벤코는 다른 혜택들로부터 보상받는다는 전제 아래에서 임금 일부 삭감을 제안한다. 고용주 양반들은 자신들의 이윤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말이 들려온다. 고용주 양반들은 고용주들에 맞서 임금 삭감 투쟁을 계획하는 훌륭한 행정가를 기꺼이 재무 장관 자리에 앉히려 든다. 순수한 혈통에 따른 부르주아들이 실질적인 문제를 다뤄야 하는 바로 그 순간에,러시아 부의 자비롭고, 자유주의적인 행정가들을 슬쩍 쳐다보는 사례 말고도, 더 있다. 러시아 부, 12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독점 문제를 다룬 글이다. 글에서 크리벤코는 독점과 '신디케이트' 같은 발전된 산업 이상'이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해당 제도들이 자본가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국내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 놀랍다고 표현했다.

 

'설탕이나, 석유 산업은 아직까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설탕과 등유 소비는 여전히 사실상 태동기에 머무르고 있고,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볼 때, 해당 상품들에 따른 일인 당 소비는 미미하다고 판단된다. 해당 산업 분야들은 발전할 여지가 여전히 아주 크고, 상당한 액수에서 자본을 흡수한다고 보인다.'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는 순간,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 위축에 대해러시아 부가 가장 선호하는 발상이 뭐였는지를 잊어버렸다는 점은 특징적이다. 크리벤코는 국내 시장이 여전히 상당한 발전 전망을 갖고 있고, 위축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크리벤코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소비 규모가 더 큰 서구와 비교했다. 이유는 뭘까. 서구 문화 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서로 간 더욱 빈번한 교류로도 이끌고, 개별적인 지역들이 중세식으로 고립되어 있던 상황을 무너뜨린 자본주의 기술 발전, 상품 경제와 교환 발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면 해당 문화에 따른 물질적인 토대는 무엇일까. 절반인 중세적인 농민층에서는 아직 여전히 농촌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쪼개져 있지 않았던 대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 문화는 러시아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크리벤코는 국내 생활상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했더라면, 크리벤코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지역에서 농민 인구가 필요로 하는 수준들이 순수한 농업 지역보다 훨씬 더 높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의 삶 전체에서 산업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까지 발전한 국내 수공업을 연구했던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거론하는 부분이다. 인민의 벗들은 그런 '하찮은 것'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인민의 벗들에게 있어 해명이란 단지 문화나 전반적인 삶이 점점 복잡해진다든지 하는 일뿐이며, 해당 문화와 복잡한 물질적 토대에 대해서는 연구조차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이 적어도 농촌 경제 상태를 검토라도 해봤더라면,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게 바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농민층 분화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인민의 벗들에게는 시장 발달이 결코 부르주아 계급 발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틀림없이 생각했다. 앞서국내 문제 연대기라는 글에서도, 계속해서 전반적으로 생산 발전 수준이 낮고, 진취성과 자발성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독점은 국강 경쟁력 발전을 훨씬 더 지연시킨다고 주장했다. 이에 담배 독점을 거론하면서, 인민 유통 가운데 15,400만 루블을 앗아간다고 추산했다. 경제 체제에 따른 토대가 상품 경제이고, 선도하는 세력은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듯이,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점을 완전히 망각해버렸다. 크리벤코는 글에서도 부르주아 계급이 독점 방해를 받고 있다는 말하는 대신에, '국가'를 거론하고, 상품과 부르주아 유통을 말하는 대신에, '인민' 유통을 들먹인다. 부르주아라면, 두 용어 사이에서 큰 차이를 결코 알아차릴 수 없다. 그 차이란 정말로 얼마나 극명한지를 보여주고자, 인민의 벗들의 시각에서 권위 있는 잡지인,조국 연보에 실린,금권 정치와 그 토대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마를로에 따르면, 금권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유주의적인 정부 형태에 대한 사랑, 아니면 취득의 자유라는 원칙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런 특징을 받아들여서, 8년 또는 10년 전 입장이 어땠는지를 돌이켜보면, 자유주의 측면에 있어서 엄청난 발걸음을 내디뎌왔다는 점을 발견한다. 어떤 신문이나, 잡지를 봐도, 그들 모두 일정 정도 민주주의 원칙을 대표한다고 느껴지고, 인민의 이익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적인 견해들과 나란히, 심지어 '의존해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간에, 누누이 금권 정치적인 야망들이 추구된다.'

 

여기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상인들이 재무 장관에게 했던 인사말을 인용하면서, 상인들은 금융에 관한 국내 입장을 사기업에 따른 아주 폭넓은 확대 여지에다 바탕을 두면서부터 좋은 결실을

맺게 된 데 대해 국내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장 신망 있는 조직이 보내는 감사를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린다.

 

'금권주의 요소들과 성향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

 

위대한 해방을 위한 개혁의 감동들이 여전히 생생하고, 머나먼 과거에서 여러분 선조들은 자신의 금권 정치, 곧 국내 사기업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진취성과 자발성'의 발달헤 힘입은 인민 유통과 국가 경쟁력 발전을 말하면서도, 왜 그러한 발전에 따른 적대적인 성격, 진취성과 자발성에 따른 착취적인 성격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물론 독점이나 그와 비슷한 제도들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의심할 나위 없이 노동 인민에 대한 상태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 인민은 모든 중세적인 속박 위에서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현대 부르주아적인 속박으로부터 족쇄가 채워졌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점에 따른 폐지가 전체 인민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경제가 국가의 경제적인 삶의 토대가 된 상황에서 중세적인 제도에 따른 생존은 자본주의에 따른 비참한 현실에다 훨씬 더 가혹한 중세적인 고통을 더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히 폐지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더 빠르고, 더 급진적일수록 좋다는 건 분명하다. 부르주아 사회가 물려받은 절반은 봉건적인 속박들을 제거하면서부터 노동 계급의 손발을 풀어주고, 부르주아 계급에게 대항하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말이다. 사실을 숨김 없이 말하려면, 바로 이런 말을 꺼냈어야만 했다. 부르주아 체제에 맞서는 노동 계급 투쟁을 촉진하고자 독점과 그 밖에 모든 종류로 중세적인 제약들을 폐지하는 건, 절대적으로 필수적라고 말이다. 딱 거기까지다. 부르주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중세와 봉건 제도에 맞서 전체 인민들에 따른 이해 관계가 서로 연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품을 수 없었고, 인민들 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에서 깊고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망각할 수 없었다.

 

인민의 벗들이 곤혹스러워 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인민의 벗들은 농촌 요구에 대해 말을 끄집어냈는데, 특히 크리벤코는,

 

'몇 년 전 몇몇 신문들이 시골에서 필요로 하는 직업들과 지식인들 유형을 논하는 과정에서 목록이 아주 길고 다양하며, 남녀 의사들과, 보조 의사들, 변호사, 교사, 도서관 사서, 서점 주인, 농경 경제학자,

삼림 전문가, 농업 전문가, 아주 다양한 분야 기술자들, 신용 기관 모집인과 관리자, 창고지기 등 거의 모든 직업군을 포괄한다는 게 증명됐다.'

 

여기서 말을 멈추고, 활동이 경제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지식인들과 삼림 및 농업 전문가, 기술자 등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농촌에서는 그들을 어떤 식으로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농촌이란 과연 어떤 농촌을 말하는가. 저축한 돈이 있어서, 크리벤코는 기꺼이 지식인들이라 부르는 전문가들 모두에게 각자 기여한 대가를 지부할 수 있는 지주들과 기업형 농민들에게 농촌을 말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농촌이란 실제로는 오랫동안 전문가들과 신용, 창고에 목말랐고, 한 국가에서 모든 경제 문헌에서도 그걸 증언해준다. 그러나 훨씬 더 방대한 또 다른 농촌이 존재하고, 그런 사실을 좀 더 자주 떠올려보는 인민의 벗들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농촌이란, 몰락하고, 갈취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농민들의 농촌이다. 저축한 돈이라고는 전혀 없어 지식인들의 노동에 대가를 지불할 수 없을 뿐더러, 굶어죽지 않을 만큼 빵조차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당신들이 창고를 지어서, 돕고자 하는 농촌은 바로 그런 곳이다. 말도 없고, 있어도 고작 한 마리뿐인 농민들이 거기에다 뭘 보관한다는 말인가. 과거 1891년에, 당신들에게는 빈농들이 인간미 넘치고, 자유주의적인 처방을 완수할 무렵, 집이나 여관, 가게에다 일상적인 창고를 설치했던 시골과 도시 부농들에게 말을 몽땅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이제 빈농들에게 남은 건 자신의 노동력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상품을 보관할 창고는 아직까지 국내 관료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진부한지에 대해서는, 농민층 내 기술적인 발전에 대한 감상적인 사고와 바로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착취에 눈을 감는 행위보다 더 두드러진 증거를 찾아보기란 어렵다.러시아 부, 2에서 백치 자유주의자 열정을 지닌 카리셰프는 '아메리카' 귀리, 호밀, 말먹이 귀리 등 개량종 씨앗이 농장에서 확산된, 농민 농업에서 완벽하고, 개선을 이룬 사례들로 말한다. 이어서 일부 지역에서 농민들은 종자를 키울 특수한 땅을 별도로 떼어놓고, 조심스럽게 간 뒤, 거기에다 미리 선별한 곡물 표본들을 손으로 심는다. 그리고 경운기, 가벼운 쟁기, 탈곡기, 키질 기계, 종자 분류기 같은 개량 농기구와 기계 영역에서 많고 다양한 혁신들이 관찰된다. 카리셰프는 인산 비료, 아교 반죽, 비둘기 배설물 같은 '아주 다양한 종류의 비료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카리셰프는 지방 주재원들이 인산 비료 판매를 위해 마을에 젬스트보 상점들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V.V. 보론초프의농민 농업에서 발전적 경향에서 자료를 인용한, 카리셰프 글은 모든 감동적인 발전에 감화받은 나머지, 거의 열정 수준으로 치닫고 말았다.

 

'간략하게만 제시할 수 있었던 이런 보고서들은 용기를 주는 동시에 애처롭다고 느껴진다. 용기를 준다는 건, 사람들이 비록 가난하고, 빚에 시달리며, 상당 수는 말 한 마리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하고, 절망에 굴하지 않으며, 자신의 직업을 바꾸지 않은 채 여전히 땅에 대한 진정성을 잃지 않고, 적절히 일구는 일에 자신들의 미래와 힘과 부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열정적으로 탐구하고, 경작과 씨 뿌리기, 농기구, 비료 등에 있어 새로운 방식들을 연구하며, 자신들을 먹여 살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조만간 백 배 보상을 안겨줄, 모든 방안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리고 애처롭다는 건, 각성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문학, 박물관, 창고, 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우리들이 농업을 개선하고자, 분투하는 농민에게 과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 농민이 마음대로 할용할 수 있는 게 과연 있을까. 물론 아주 초보적인 형태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 발달은 몹시 느리다. 농민은 모범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가 실험용으로 조성한 밭과 모범 농장들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농민은 활자로 된 지식을 갈구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한 우리 농경 문헌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농민은 비료와 농기구, 종자를 얻으려고 애쓰지만, 도매로 구입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야 할 우리 젬스트보 상점들은 어디에 있는가. 실무진들과 개인, 젬스트보, 당신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서서 일을 하라, 오랫동안 무르익어왔던 그 시기가 다가왔다.'

 

인민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가,

당신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질지니.

 

이렇듯, 인민의 소부르주아 계급 벗들은 소부르주아 식 진보 잔치를 즐기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농촌 경제에 대한 분석과 완전히 동떨어진, 오늘날 경제학 역사에서 이토록 놀라운 사실,

곧 농민층의 엄청난 강탈과 농민 농업에서 전반적인 진보가 나란히 병행할 수 있다는 점을 목격하는 동시에, 농민층을 조화롭고, 동질적인 하나의 전체로 묘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든 발전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납득하게 된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러나 인민의 벗들은 여전히 모든 귀를 닫고 있다. 옛 국내에서도 사회 혁명적인 인민주의에 따른 훌륭한 장점들을 잃어버린 인민의 벗들은 인민주의의 커다란 실수 가운데 하나로, 곧 농민층 내 계급 적대를 이해하지 못한 실수를 절대 바로잡지 않고 있다. 호르비치는 1870년대, 인민주의자인 농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내 자연스레 존재하는 계급 적대를 몰랐기에, 착취자, 쿨라크 또는 기생자와 그 희생자인 공산주의 정신에 물든 농민 적대로만 국한해서 파악했다고 적절하게 말했다. 글레브 우스펜스키만이 회의주의적인 입장에서 역설적인 미소로, 보편적인 환상을 거부했다. 농민층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현상 본질 그 자체를 꿰뚫는 비범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우스펜스키는판박이라는 글에서, 개인주의가 고리대금업자와 채무자 사이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농민들 사이에서도 경제적인 관계에서 기초가 됐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농촌 경제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자료가 아주 부족했고, 농민층 분화가 아직 그렇게까지 뚜렷하지 않았던, 1860년대와 1870년대에 그러한 환상에 굴복한 건 용서할 수 있고, 당연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분화를 모른 체하려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아야만 한다. 농민층 몰락이 정점에 달했고, 사방에서는 농민 농업에서 발전적인 경향에 대한 수 많은 말이 들려오는 최근에도 특히 더 그렇다. V.V. 보론초프도 전적으로 그 주제만을 다루는 책 한 권을 썼었는데, 사실 관계에 따른 부정확성에 관해서는 그다지 비난거리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적인 측면, 농경법적인 측면에서, 농민층 발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농민층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인민의 벗들은 농민이 스스로 먹여 살려줄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새로운 경작법을 간절하게, 찾아 헤맸다는 사실에 자신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전의 이면으로, 곧 바로 그 농민이 땅으로부터 심하게 분리됐다는 점은 보지 못한 채로 말이다. 농민으로부터 분리된 토지가 자본으로 전환되고, 국내 시장이 창출되는 과정 같은 눈 앞의 사실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다 머리를 묻는다.

 

한 국가 공동체 농민들 사이에서 실재하는 양 갈래에서 정반대 과정들을 부정하고, 우리 사회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 말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해보려고 애쓰더라도, 분명 쉽지는 않다.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인도주의적이고, 자비로운 문구들을 연호하는 건, 그들의 과학이자, 그들의 정치 활동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게다가 현질서에서 가장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땜질식 처방을 정규 철학으로까지 끌어올린다. 크리벤코는 심오한 어조를 띤 채로 이렇게 말한다.

 

'사소하지만 진심 어린 활동을 한다는 건, 크게 일을 벌여놓고, 행동하지 않기보다는 훨씬 낫다.'

 

얼마나 참신하고, 영리한가. 더 나아가 크리벤코는 사소한 활동이라는 게, 결코 목적이 사소하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라고 말을 잇는다. 그리고 사소한 활동이, 적절하고, 훌륭한 결과로 이어진 활동의 확장에 따른 사례로, 어느 부인이 학교를 세운 일, 농민들 사이에서 협잡꾼들을 몰아내는가 하면, 피고에 자문을 해주고자 지방 순회 법원에 동행하기로 한 변호사 일화에서도, 앞서 젬스트보 노력과 결합되어 가장 번화한 중심징에서, 수공업자들의 창고를 설립한 경우들을 든다. 물론 모두 아주 숭고하고, 인간적이며, 자유주의적이다. 여기서 자유주의적이란, 부르주아 경제 체제를 모든 중세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고, 따라서 노동자가 그런 조치들로부터 손상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 체제 자체와 맞서 싸우기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국내 자유주의 출판물들로부터, 모든 주장들을 접해왔다. 러시아 부신사 양반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 않았더라면, 반대할 가치조차 없는 주장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선 자유주의의 온건한 출발을 알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선조들의 이상을 비난했따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나무랐다.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그런 온건하고, 세심한 자유주의적이고, 곧 부르주아에게 봉사하는 활동을 먼저 제안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에 기꺼이 호응했다. 선조들과 그들의 이상에 관한 말이 나왔으니, 자유주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은 그릇되며, 유토피아적인 낙원이었지만, 어쨌든 옛 국내 인민주의자들은 그러한 자유주의에서 온건한 출발을 절대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하도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인지라, 인민의 벗들은 그런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인민의 벗들은 정치 제도에 대한 유물론적인 비판은 사라지고, 현대 국가에 있어 계급적인 성격이 이해되지 않는 순간, 유일하게 남은 수순은 정치적인 급진주의에서 기회주의로 옮겨갈 뿐이라는 점을 자신들의 전술로부터 분명히 입증했다. 여기에 그런 기회주의 몇 가지가 있다.

 

유자코프는 러시아 부, 10에서, 국유재산부를 농업부로 전환하는 조치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관리들의 자리를 바꾸는 데 불과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결국 모든 건 요청 받는 존재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다. 인민의 벗들이냐, 아니면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이냐가 문제지, 이해 관계 그 자체를 건드릴 필요는 없다. 같은 글에서,유자코프는 게속해서 경제적 강자로부터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건, 국가 개입에서 첫 본연의 임무라고 말한다. 러시아 부, 12에 실린 국내 문제 연대기또한 같은 표현을 사용해서, 유자코프 주장을 지원했다. 유자코프는 박애주의적인 헛소리에 대한 설명이 유자코프의 훌륭한 동료들인 서구 유럽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과 똑같다는 점에서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고자, 덧붙인다.

 

'영국 글랜드스톤 토지 법안들, 독일 비스마르크 노동자 보험과 공장 감독, 러시아 농민 은행 발상과 이주 조직화와 쿨라크 이익에 반하는 조치들, 모두는 동일하게 경제적인 약자를 보호하고자, 국가 개입이라는 원칙을 적용한 시도들이다.'

 

그래도 솔직한 말이라는 미덕은 지녔다. 국내 문제 연대기의 필자는 글래드스톤과 비스마르크와 같이 자신도 현재 사회적 관계를 고수하기를 원하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부르주아 사회를 수습하고, 봉합하기를 바랄 뿐, 맞서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고 직설적으로 밝힌다. 그들의 근본적인 이론적인 신념은 현재 사회에 기초해서, 지배 계급 이익을 보호해주는 기구, 곧 국가를 개혁 도구로 여긴다는 점과 완변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 우선하는 전지전능한 국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국가가 노동 계급을 지원해줄 뿐만 아니라, 크리벤코도 말했듯이, 현실적이고,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낼 거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골수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에게 기대할 건 무엇도 없다. 생산 조건 자체로부터 해체되고, 고립됐으며, 한정된 공간과 착취자에게 묶여 잇는 소생산자들은 간혹 프롤레타리아만큼이나 고통을 겪는 자신들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계급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 바로, 소부르주아 계급의 근본적이고,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반동적인 계급으로 만드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국가 역시도 계급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위대한 인민의 벗들이여, 그렇다면 왜 정부가 지금까지도 해방적인 개혁 이래로 특히 정력적으로,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만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또 창출했겠는가. 한 국가 안 살림살이가, 상품 경제와 상업, 공업 발전으로 특징짓는 역사적인 시기에, 절대적이고 이른바 초계급적인 정부가 그런 볼성사나운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국가 안 살림살이에서 그러한 변화들이 워낙 사회 깊숙하게 정착되어, 정부는 그걸 인식조차 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무수한 장애물을 가져다 놓았다는 점, 바로 절대적인 정부가 내부적인 삶의 다른 조건에서는 또 다른 계급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창출해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그러한 변화들을 정부 정책이 불러온 효과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민의 벗들은 그런 질문들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는다. 보다시피 모든 건, 유물론, 변증법, 헤겔주의, 신비주의, 형이상학이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게 친절해지라고, 겸손해지라고 간청만하면, 모든 게 정상적으로 바로잡힐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뿐이다. 겸손하다는 말이 나왔으니, 러시아 부를 인정해주어야 마땅하다. 실로 이 매체는 독립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국내 자유주의 언론들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인다고 하겠다. 여러분이 직접 판단해보시라.

 

유자코프는 염세와 인두세 폐지, 토지 상환금에 따른 감축은 인민 농업에 상당한 위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염시를 폐지하는 대신에, 수 많은 간접세들을 새롭게 부과하고, 기존 세금들을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나. 인두세 폐지와 함께 예전 국유지 농민들을 회복시켜준다는 명분으로, 지급하는 대금을 인상시킨 건 어쩔텐가. 익히 알려진 상환금, 정부는 환수 활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지도 않았고, 감축이 이뤄진 뒤에 지불 대금과 토지로부터 얻는 수입 사이에서 불균형, 곧 봉건적인 면역 지대가 직접적으로 부활한 건 지금도 유효하지 않는가.

 

"그래도 괜찮아. 중요한 건, 첫걸음과 원칙이니까. 나머지는 나중에 간청하기만 하면 될 거야."

 

하지만 꽃에 불과할 뿐, 이제 과실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1880년대는 인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인민들이 철저히 몰락하지 않도록 구해줬다.'

 

부끄러울 줄 모르는 노예 근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고전적인 문구로, 앞서 여전히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미하일로프스키 주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국내 자유주의에 따른 진화에 대한 시체드린의 예리한 묘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도 없다. 자유주의자인 시체드린은 정부 당국에게 가급적 개혁을 해달라고, 간청하도록 시작해서, 다음에는 적어도 뭐라도 달라고 구걸만 하다가, 아무리 보잘 것 없더라도, 아무거나 달라고 애원하는 지겹도록,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면서 마무리한다. 그래서 인민의 벗들은 지겹도록,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받아들였다는 점 말고는 달리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는 기근이 수백만 명 인민들을 막 덮쳤던 시기로, 정부 태도가 장사꾼 인색으로 시작해서, 소심하게 옮겨간 걸 알고도, 인민의 벗들은 정부가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줬다는 주장을 버젓이 활자로 옮겨 담을 수 있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농민층에 대한 강탈이 훨씬 더 가속화되고, 정부는 농업부를 창설한 데 이어, 한 두 가지 직접세를 폐지하는 대신에, 간접세 대 여섯 가지를 새롭게 부과하며, 그러면 기근은 4천 만 인민에게 영향을 끼칠 테고, 신사 양반들은 똑같이 낡은 방식으로 글을 써댄다. 굶주린 인구가 5천 만 명이 아니라, 4천 만 명에 불과한데, 정부가 인민 부담을 덜어주고,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덕분이라고, 정부가 인민의 벗들의 말을 경청하고, 농업부를 창설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 부, 2에서 러시아가 '다행히도' 후진국이며, 자신의 경제 제도를 연대 원칙에 기초할 수 있게끔 해준 요소들을 유지해왔다고 주장한,국내 문제 연대기필자는, 따라서 국내에서 국제 문제 있어서 경제적인 결속 주창자로 행동할 수 있고, 국내에서도 주어진 이런 기회는 부인할 수 없는 정치적인 힘으로부터 강화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반동적인 행위에 대한 변치 않는 가장 확실한 방어벽이 바로 유럽 경찰관인 러시아였다. 국내 정부는 억압받는 인민들로 하여금 서구 인민들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종사하는 치욕스러운 입장에 서도록 했다. 경제적 결속에 따른 주창자로 묘사된 경찰관의 본모습이다. 따라서 앞 주장은 실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다. 인민의 벗인 선생들은 어떤 자유주의자도 능가한다.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 간청하고, 정부를 칭송하고, 엄청난 존경과 열정을 다해 기도를 바친다. 머리를 조아리며, 판석 위에 이마를 찧는 소리는 지나가던 사람조차 으스스한 기분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여러분은 속물에 대한 독일식 정의를 기억하는가.

 

속물이란 무엇인가.

텅 빈 속을,

두려움과 신의 자비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 채운 자여.

 

- 괴테

 

같은 식의 정의는 실정과는 맞지도 않다. 신은 부차적인 존재다. 그러나 정부 당국은 다른 문제다. 위 정의에서 신이란 단어를, 정부 당국으로 대체한다면, 인간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내 인민의 벗들의 이념적인 상투성과 도덕 수준, 시민으로 용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셈이 된다.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토록 터무니 없는 인민의 벗들은 이른바 지식층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크리벤코는 이렇게 적는다.

 

'문학은 현상들을 사회적인 의미에 따라 평가하고, 모든 능동적인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도록 장려해야만 한다. 문학은 교사와 의사, 전문가가 부족하고, 인민들은 가난과 병마와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발언해왔고, 발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탁자에 앉아 카드 놀이를 하거나, 연극 공연을 보러 다니거나, 귀족 대표가 주최한 모임에서 철갑 상어를 뜯는 게 지겨워진 사람들이 보기 드문 자기 희생 정신을 갖추고, 수 많은 장벽을 뚫으며, 앞으로 선뜻 나설 때, 문학은 그들을 환영해야만 한다.'

 

그리고 두 장을 넘어가서, 경험으로 지혜를 얻게 된 왕년 운동가는 짐짓 사무적인 어조를 띠며, 지방 감독관, 시장, 젬스트보 의장과 의원 같은 직위를 새로운 규정에 따라 받아들이냐, 마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해서, 망설이는 사람들을 나무란다.

 

'시민들의 요구와 의무에 관한 의식이 발전된 사회에서 그런 망설이는 태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에서는 어떠한 필수적인 측면을 가진 개혁이라면, 완전히 소화해서, 그에 맞는 개혁의 측면들을 활용하고, 발전시키고,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들이 있다면, 사문화시키며, 개혁에 필수적인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기구는 완전히 소외된 상태로 남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도대체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얼마나 한심하고, 하찮은 기회주의이자, 자화자찬에 빠진 소리란 말인가.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용 촌평거리들을 죄다 수집하고,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해준 데 대해 정부에게 굽실거리며, 카드 놀이에 지겨워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지방 감독관 같은 자리를 꺼리지 말라고, 대중을 가르치는 게 문학의 임무라는 거다. 지금 주간지, 새로운 시대를 읽고 있는 건가. 이건 선진적인 국내 민주주의자들의 기관지러시아 부인데,

 

그러고도 신사 양반들은 선조들의 이상을 말하고,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쏟아붓자, 국내에서 사상을 흡수해 헤르첸과 체르니셰프스키 이론과 가르침을 생산해낼 당시 전통을 오직 자신들만이 수호하듯이 주장한다. 철저한 망신이며, 명백한 언어도단이자, 모욕이다. 비록러시아 부가별로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같은 유형의 잡지 시평에서 그런 식의 발언들이 큰 웃음이나 그 밖의 어떤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 실로 당신들은 그 이상들을 더럽히고 있다. 최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이상이 실제로 어떤 건지를 카우츠키가 했던 발언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묘사된다.

 

'그 시대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국내 공동체적인 생활 체계라는 특수한 사회 질서에 대한 믿음, 그로 인해 이어진 농민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믿음은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정부에 맞서는 영웅적인 투쟁 대열에 서도록 만들었다. 당신들은 그 시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엄청난 역사적인 헌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고, 그들의 기억을 충심으로 존경하지 않았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묻는다. 그때의 믿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모두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V.V. 보론초프는 작년 마을 공동체가 인민들에게 공동 노력을 연마시키고, 이타적인 감정의 중심이 된다는 등의 주장을 펼 당시에, 심지어 미하일로프스키는 양심에 찔리 나머지, 겸연쩍게 V.V. 보론초프를 훈계하며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어떤 연구도 마을 공동체와 이타주의 사이에서 관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굳이 연구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신념을, 무조건적인 신념을 지녔던 시대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 무슨 근거로.

 

'모든 사회주의자는 시인이었고, 모든 시인은 사회주의자였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농촌이 분화되면서부터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인민을 자기네 발치 아래 두는 한 줌 쿨라크로 형성됐다는 데 모든 양심적이 연구자들이 동의한다고 덧붙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이번에도 옳았다. 농촌은 실제로도 분화되고 있었다. 농촌이 완전히 쪼개 진 건 아주 오래 전 일이었다. 그리고 옛날 국내 농민 사회주의자도 그와 함께 쪼개지면서, 한편으로는 노동 사회주의에 자리를 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물 소부르주아 급진주의로 타락하고 말았다. 같은 변화는 타락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농민 삶은 특수한 사회 질서이며, 우리나라는 예외적인 발전 경로를 밟아왔다는 이론으로부터 희석된 절충주의도 등장했다. 절충주의는 상품 경제가 경제 발전 토대가 되고, 자본주의로 발전했다는 점은 더 이상 부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모든 생산 관계에서 부르주아적인 성격이 있고, 그 체제에서는 필연적으로 계급 투쟁이 일어난다는 점은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더불어 근대 사회 토대에 맞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농민들을 각성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정치 강령으로부터 근대 사회 토대를 보존하면서 농민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수습하기를 목적으로 하는 강령도 등장했다.

 

엄밀하게, 모두 이미 러시아 부의 신사 양반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무너뜨리는 데 착수하는 순간 예상됐던 종류로 비판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들은 국내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구상을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설명하거나, 그 본질에 반대되는 주장을 편다든지, 거기에서 끌어온 실질적인 결론들에 대한 정확도에 반론을 제기하려는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에 신사 양반들은 추상적인 도식과 그 도식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국가가 그와 같은 국면을 거쳐야 한다는 확신을 담은 가장 공허한 문구들과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충분하게 접한 바 있는 허튼소리에 스스로를 가두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종종 철저하게 왜곡된 말을 듣게 된다. 크리벤코에게 마르크스는,

 

'만약 우리가 소망하고, 또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자본주의 부침을 피해 더 편리한 다른 경로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기사님께서 그런 허튼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떤 건, 의도적인 왜곡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마르크스 편지, 법률 통신, 1888, 10에서 러시아가 자보눚의 체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체르니셰프스키는 칼 마르크스를 높이 평가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크리벤코는 마르크스 실제 발언을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이 이런 견해들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 존경할 만한 비평가는 적어도 내가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를 존경한다는 이유로 내가 문제에 대해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고 추론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 러시아 문인과 범슬라브주의자에 대한 내 비판으로부터도 내가 그 견해들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미하일로프스키가 자신을 러시아 특수한 발전 노선이라는 사고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여길 권리가 없고, 자신 또한 그런 사고를 지닌 사람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크리벤코는 마르크스가 그런 특수한 발전 노선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그걸 잘못 해석했다. 그야말로 새빨간 왜곡이었다. 방금 마르크스 발언에는 크리벤코가 문제를 다음과 같이 피해 넘겼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하일로프스키는 두 가지 모순된 주장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곧 미하일로프스키는 러시아 전반적인 정세에 관한 내 견해들 가운데 하나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바탕이 전혀 안됐다.'

 

이런 발언들이 잘못 해석될 여지를 없애고자, 마르크스는 같은 편지에서 자신의 이론이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답변에 대한 질문에 있어 대답 자체와 그 질문의 답을 결정할 수도 있는 러시아 통계 검토를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답했다.

 

'러시아가 서구 유럽 국가들을 모범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도 수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던 최근으로 보인다면, 우선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성공하기 힘들다.'

 

해당 대목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 질문에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국가가 되려는 경향을 보이는가. 농민들의 몰락이 자본주의 체제, 곧 자본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 과정인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정이지만, '만약' 러시아가 그런 경향을 보인다면, 농민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될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말한다. 달리 말해, 마르크스 이론은 특정 국가들에 따른 경제 체제의 진화를 연구하고, 또 설명했으며, 러시아에서 이론을 적용하는 건 오로지 유물론적인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에 따라 확립된 선례들을 활용해서, 러시아에 따른 생산 관계와 그 진화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방법론과 정치경제학 이론의 정교한 완성은 사회 과학에서도 큰 발전이자, 사회주의를 향한 엄청난 진전이었다. 자본이 등장한 직후로, '국내 자본주의 운명'은 국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주요한 이론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문제를 둘러싸고, 엄청나게 열띤 논쟁들이 펼쳐졌고, 강령 상 핵심 지점들도 따라서 결정됐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년 전, 국내 자본주의로 진화했는지를 놓고도, 어느 개별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이 국내 경제 현실에 대한 통계를 토대로,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을 때는, 거기에 대한 직접적이고, 명확한 비판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똑같은 방법론적·이론적인 일반 원칙들을 받아들인 가운데서 통계에 대해 다르게 설명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맞서 진정한 성전으로 돌입한 인민의 벗들 역시나, 사실 관계에 따른 검토로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내놓는 법이 없었다. 첫 글에서 본 바와 같이, 인민의 벗들은 여러 미사여구로, 문제를 처리한다. 게다가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합의나, 의견 일치 부족에 대해서도 자신의 재치를 드러낼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런 뒤에, 저명한 미하일로프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는 말장난을 하고는,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완전한 일치가 지배적이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로 미하일로프스키는 사실을 잘못 전달했고, 둘째로, 현실은 국내 사회민주주의의 약점이 아닌, 강점과 생명력을 증명했다. 최근 시기, 특히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경로로부터, 사회민주주의적인 관점들에 도달했으며, 그러한 까닭에 국내 봉토 제도로부터 발달한 부르주아 사회이고, 그 정치 형태는 계급 국가이며, 노동 인민에 따른 착취를 끝장낼 유일한 방안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이라는 기본적이고, 주요한 논지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논쟁 방법과 국내 삶에서 여러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서도, 특정한 수 많은 문제들을 놓고 의견을 달리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논지 한계 내에서, 농민 개혁이나, 농업과 수공업에 따른 경제적인 상태, 토지 임차 등 피상적인 어조로만 다뤄졌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부터 미리 미하일로프스키를 기쁘게 할 수도 있었다. 농민 개혁이란, 국내에도 올바른 발전을 위해 순탄한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는, 자본가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민의 벗들에게 국가 부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을 공동체가 농업과 제조업을 사회화해서, 수공업자로부터 대량 생산으로 발전할지도 모른다는, 인민 토지 임차가 인민 농업을 떠받치고 있다는 등, '숭고한 진리'들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도 감동적이고, 마음을 움직이는 합의에는, 국내에서 실제로 현재 경제 구조를 명확한 생산 관계 체계로 해명하고, 실제로 경제적 발전이나, 정치를 비롯해서, 여타 모든 유형에서 상부 구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사람들 내 견해 차이로 대체됐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여서, 공동에 따른 정치적 행동으로 확실하게 관련되고, 따라서 그러한 공통된 입장을 받아들이는 모두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를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게 되는 한편으로, 많은 해결책들이 열려 있는 수 많은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폭 넓은 의견 차이에 대한 여지들도 여전히 남겨놓는다면, 당연하게도, 국내 사회민주주의 힘과 생명력을 입증해주는 데 불과하다. 더군다나 같은 노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이뤄진다. 그 많은 측면들을 통합해줄 기관도 없거나, 있을 수도 없고, 오늘날에도 만연한 경찰 감시 상황에서도 볼 때, 개인적인 교류도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적절한 토론을 할 수도, 구체적인 합의에 도달할 수도 없고, 따라서 서로 의견이 상충된다는 건, 당연할 수밖에는 없다.

 

정말로 재미있지 않은가.

 

사회민주주의자들,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을 상대로도 한 반론에서, 크리벤코가 언급한 내용에는 일정 정도 당혹스럽다. 일부 독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서 분열과 비슷한 무언가가 일어났고, 신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거 사회민주주의자들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런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를 공개적으로 방어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도 국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이론과 정책을 비판하거나, 다른 어떤 종류로 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한 적도 없다. 진실은 크리벤코와 미하일로프스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응접실에서나 나눌 법한 촌평들에 귀를 기울여왔고, 자신들의 지각 없는 자유주의적인 언행을 감추고자, 마르크스주의를 들먹이는 여러 많은 자유주의자들을 주시했으며, 전매특허인 영리함을 갖춘 전술로부터 동원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작업에 착수해왔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같은 비판이 일련의 일상적인, 부조리와 추잡한 공격들로 이뤄졌다는 점은 전혀 놀랍지도 않다. 크리벤코는 일관되게, 자본주의 산업 발전에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을 제시해야만 하며, 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이거나, 상점과 선술집을 여는 걸 꺼려서는 안 된다. 수 많은 여관 주인들은 국내 의회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이는 걸 기뻐하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업자들은 농민 곡식을 사들이는 걸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재미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인민의 벗에게 국내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 인민에 대한 착취는 본질 상 자본주의적이며, 기업형 농민들과 유통업자들은 같은 정치·경제적인 특징들 때문에,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야만 하고, 그런 현실이 농민 분화에 따른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증명한다는 점을 일러두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비명을 지르며, 그건 서구 유럽 공식과 추상적인 방안들을 무차별적으로 빌려오는 행위이자, 터무니 없는 이단이라고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러나 '사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색이 입혀져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고귀한 과학과 순수한 이상은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농민 곡식과 땅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단순히 타인 물건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본주의 대표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다. 또한 국내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생산 수단을 집중시키면서부터 이미 모든 영역에서, 인민 노동을 지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게 압력을 가해 부르주아적인 성격에 따른 정책을 입안하고, 강요하며, 결정짓는다는 점을 저 인민의 벗에게 입증해서 보여주자. 그러면 인민의 벗은 버럭 화를 내며, 우리 정부의 전지전능함을 외치고는, 인민의 벗들이 아닌, 자본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들을 끌어들이는 행위가 치명적인 착오이자, 불행이라고, 인공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짓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속으로 인민의 벗들은 국내 의회 내에서 여관 주인들이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점. 곧 이른바 계급 꼭대기에 올라선 바로 정부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결국 인정할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신사 양반들, 국내 자본주의 이익이 오직 의회에서만, 그리고 여관 주인들로부터만 대표된다고 생각하시나.

 

추잡한 공격들과 관련해서는 이미 미하일로프스키로부터 사례들도 충분히 지켜봤고, 눈꼴 시린 사회민주주의를 전멸시키기 위한 열망 속에서

 

'일부는 자본주의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게 유일한 목적이라 주장하며, 물론 전문가나 사무직 노동자 같은 한직을 얻을 수 있는 경우에도 공장으로 들어간다.'

 

라고 주장한 크리벤코에게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명백히 품위를 상실하고 만 발언들에 대해서는 매번 답변할 필요는 없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이고, 그만 여기서 마침표를 찍는다. 아무튼 신사 양반들, 그런 정신 상태를 용감하게 계속해서 유지하시길. 당신들이 말한 대로, 이미 여러 조치들로부터 아무리 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민들을 철저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해줬던 황실 정부는 앞으로도 아무런 결함 없이, 그렇게 해나가며, 그래서 당신들의 진부한 무지가 드러나는 걸 막아줄테니 말이다. 여태까지 그래왔듯이, 교양 넘치는 상류 사회는 막간을 이용해서도,철갑 상어와 카드 놀이를 즐기면서, 기꺼이 형제를 들먹이고, 형제의 상태를 개선시키고자 자비로운 사업들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그 형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지방 감독관 같은 농민들의 주머니를 감독하는 자리들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시민적인 요구와 의무들에 대한 발달된 의식을 자랑할 수 있다는 점을 당신네로부터 알게 되어 아주 기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을 아무렴 계속해서 이어가시길. 절대 방해받지 않을 뿐 아니라, 지지와 칭찬까지 받게 될 지도 모르니. 물론 부레닌과 그 지지자들의 입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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