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독일군 진격, 프스코프 함락으로부터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정부로는 큰 위험에도 빠져들었다핀란드에서는 내전도 일어났다. 모스크바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조직으로도 필요한 일이었다. 311, 소비에트 정부로는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정부 중심부였던 모스크바로 이전했다. 모스크바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졌다. 모스크바로 이전하던 날, 311, 레닌은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기고문을 작성했다. 312일 자, <진실>에 게재한 기고문으로는 강령 성격을 띠고 있었다. 레닌은 글에서 짤막하고, 압축한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모든 의의를 말했었고, 브레스트 강화 협정에서 온갖 모멸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레닌은 19171025일부터 방어론이라고 썼고, 조국 수호를 지지한다고 했다. 조국 전쟁이란 사회주의 조국 전쟁이고, 조국으로 사회주의를 위한 전쟁, 전 세계 사회주의 군대에 대한 분견대로 소비에트 공화국 전쟁이라고 봤다레닌, <우리 시대 주요 과제>라는 글에서는 분명한 목표를 제기했다. 318, 400-500여명 수병들로 이뤄진 영국 해병대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차르 정부 때 협약으로부터 만들어진 군사 시설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상륙 부대가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정부 기관들과 주요 인사들은 크레믈린에서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붉은 군대는 처음 얼마 동안이지만 보통 군대와도 매우 달랐다. 열정으로 들끓었지만 겉으로는 원시적이었다. 붉은 군대로는 정해진 복장은 없었다. 각자 자기 맞는 옷을 입었고, 엄격한 규정, 정해진 규칙도 없었다. 소비에트 권력 적들은 붉은 군대를 비웃기도 했다. 볼셰비키로는 강하고, 굳센 군대를 창설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주민들은 무슨 약탈로 생각하고는 붉은 군대를 두려워했다. 크레믈린을 지키고 있던 붉은 군대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정작 어디에서나 정해진 형태 행동이 없었던 수비대 모습을 보이고는 외국인들도 특히 놀라워했다. 7차 당대회 191836-8, 독일 평화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었다. 그러나 결정은 치열한 투쟁 끝에 채택했다독일과 강화조약 비준 문제, 중앙 위원회 저치 보고를 한꺼번에 다룬 보고처로는 레닌은 연설했고, 좌익 공산주의 모임을 대표하는 공동 보고처로는 부하린이었다. 모든 문제들은 매우 날카롭게 제기했다. 대회로는 30만 당원들을 대표해서 의결권을 가진 46명은 참석했다. 당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통일 단결은 아직은 없는 상태였다. 46명 대회 참석 가운데 30명은 브레스트 강화 협정 비준에 찬성했고, 12명은 반대했고, 4명은 기권했다. 대략 1/3 대의원들은 중앙 위원회 노선, 레닌 노선에 반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뛰어난 볼셰비키였다. 223, 6명은 소비에트 당 직위에서 물러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 안팎에서 선동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 받았다. 224,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중앙 위원회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오스트리아 독일과 강화 조약 이행 조건들과 관련한 중앙 위원회 결정에 불복종했고, 결의안에 첨부한 해명서로는 장래 당 분열은 해소되지 않을거라고 천명했다.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으로는 1918년 초, 전 러시아로부터 좌익 공산주의 조직 중앙 역할을 했다.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에 맞섰다. 혁명 미사여구에도 맞서, 열심히 연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1918221, <진실>에서도 썼다.

 

레닌도 대중은 좌익 공산주의가 아닌 레닌을 따를거라 알고 있었다. 4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비상 대회로는 강화 조약을 비준해야만 했다.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소비에트 권력을 잃을 수 있을거라 각오까지 했었다. 224일 자 성명에서도, 국제 혁명을 위해 순전히 형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 권력을 잃는 게 합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레닌은 문구를 보고 격분했다312, 모스크바 노동농민붉은군대대표소비에트에서 대중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뜨겁고, 사력을 다했다. 레닌은 2월 혁명을 앞서 언급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 혁명과 매우 다르게 이뤘다고 말했다. 314-16일까지 열린 제4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비상대회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대중 앞에 연설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이 충심으로, 진솔하게 문구 하나 무심코 대충 말하지도 않았다. 혁명가이자, 투사였던 특징이기도 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724명 찬성, 276명 반대로, 강화 조약을 비준했다. 118명은 기권했다. 4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볼셰비키만이 아니었다. 멘세비키,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평화 협정 조인을 반대했다. 대표들은 223,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평화 협정이라는 독일 쪽 조건에다 서명하기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따라서 역관계로는 724명은 찬성했고, 276명은 반대했다. 따라서 레닌 노선은 중차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독일과 조약 문제를 마무리했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 활동을 보다 폭 넓게 전개해갈 수 있도록 활용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라는 소책자 집필에도 들어갔다. 레닌은 집필할 때, 스베르들로프로는 속기사를 쓰라고도 설득했었지만, 오랫동안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미하일로비치로부터 끝끝내 설득한 끝에 훌륭한 속기사를 보냈음에도, 레닌은 같은 작업 방식을 고집했다. 먼저 두 쪽 정도 글을 쓴다. 다음, 좀 더 잘 쓸 수 있을 거리도 있는지 한참 생각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있으니 잘 되지는 않았다. 병이 이미 위중했을 때 스스로 글 쓸 수 없었던 1923년에 와서야 비로소 글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아쓰도록 허락했다. 그래도 무척이나 힘들어했다. 포치예바, 글랴세르, 마누차리얀츠, 볼로지체바 등 동지들은 글을 받아적기도 했었다. 서기국에서도 이미 오랫동안 레닌 곁에서도 일해 온 사람들이라서 꺼려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집무실에서는 당혹스러운 소리도 가끔 들려오곤 했다.

 

1918, 3월 말-4월 사이로, 레닌은 <소비에트 정부 당면 과제>를 열심히 집필했다. 글로는 428, <소식>에서도 게재했고, 뒤로는 오랜 세월 동안 볼셰비키 행동 지침이었다. 러시아 사회주의 건설로 갖는 주요한 난제에 대해 레닌은 소책자로부터 간단하고, 명백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밝힌 글은 어디에도 없었다. 러시아는 10월로는 소농민 나라였다. 수백만 농민들은 소자산가 심리로 속속들이 젖어 들었다. 모두들 자기 자신, 생계, 땅 조각만 생각학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체로 농민들은 자기 자신이나, 신의 가호만을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소자산가 심리와 해악에 대해서도 수십 차례 글을 쓴 바 있다. 제헌 의회는 해산하고 나서야 권력 문제로는 최종 결정이 났을 때, 브레스트 강화 협정이라는 일정 기간을 가질 수 있었고, 대중을 재교육하고, 새로운 심리, 집단을 중시하는 심리를 교육하도록 할 방법 문제를 전면에서 제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지주, 자본가들을 쓸어버렸고 소부르주아 세계에다 빗장을 열었다. 지주 부를 분배하면서 빼앗은 재산에 대한 투기도 벌어졌다. 소부르주아 세계를 장악하고, 대중을 재교육하고자,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를 창출하고, 행정을 조직할 수 있을지, 레닌으로는 1918, 3-4월에도 모든 관심을 쏟아냈다. 전 인민 회계, 관리를 조직하고, 노동 생산을 높이고, 일하는 법을 가르치고, 사회 활동에서 대중을 끌어들이고, 의식을 높이고, 노동과 노동 규육을 새롭게 조직할지에 대해서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로부터 레닌은 써놓았다. 소책자에서 사회주의 경쟁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경쟁도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다들 간과하곤 했다. 내전도 부분적으로 일조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경쟁은 대규모로 폭 넓게 적용할 수 있었다. 15개년 계획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던 1928년에 이르러서도, 레닌은 글 쓴 지 10년 뒤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책자로는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특수한 장도 있다. 언제나 레닌은 한 문제를 두고 모든 연관, 매개 관계 속에서 포착했고, 다른 기본 문제들과 일일이 연결해서 다루었다. 따라서 레닌은 노동 생산 향상이라는 문제도 경쟁 문제와도 연관할 수 있었다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노동 생산을 높이는 과제로는 장기적이라고 지적했다. 1936년 초, 스타하노프 운동을 체험했고, 15개년 계획, 25개년 계획으로부터 조성한 새로운 기술 기반 아래로부터 노동층에서도 노동 생산 제고를 위한 운동도 드높아졌다. 그리고 노동 생산도 매우 높았고,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라는 글도 새롭게 조명됐다. 글에서 제시한 레닌 기본 방침들도 매우 중요했다. 레닌은 노동, 농민들과 무척 많이 대화했다. 일할 능력이 결여됐음을 목격했고, 단지 일할 능력이 결여됐을 뿐만 아니라, 수 세기로 거친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생겨난 유산으로 노동을 저주스럽고, 최소해야 할 무엇으로도 대하고 있었다. 혁명 노동계급들을 늘 재촉하고, 욕하고, 주먹질을 대 해던 십장, 중간 감독들을 일소했다. 노동 계급들로는 아무도 재촉하지 않을 수 있었고, 덕분에 피곤하면 앉아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울 수 있어서 기뻐했다. 초창기 공장 조직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많은 회합을 가도록 공장에서도 쉽게 내보내줬다. 한 노동 계급은 투표를 하기도 했고, 공장에서 저녁 회합 모임, 집안일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18년 초에 일어난 일이었다. 착취 주인들, 충실한 하인들, 재촉하며 채근하던 사람들도 몰아냈다. 공장은 사회 소유였고, 사회 소유로부터 보호받았고, 노동 생산을 꼭 강화하고 높여야만 한다는 의식도 잘 없었다. 따라서 레닌은 같은 측면을 그토록 강조했다. 레닌은 진실을 직실할 줄 알았다. 노동 의식, 노동에 대한 의식 태도로부터 북돋고자 했고, 노동 전반, 삶에서도 전체를 실용해서 조직하고자 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서 특히 신랄하게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부르주아지 대표라고,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활동 전반에 대한 중요함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실용주의나 단계주의로만 취급하면서, 혁명 전쟁이나 꿈꾸는 사람, 등등이라고 규정했다. 레닌은 지도역량을 믿었던 계급으로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글은 428일자, <소식>에도 게재했고, 429,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서도 연설했다. 모스크바 노동 열심 활동가들도 소비에트 권력 당면 과제에 대한 레닌 보고를 들을 수 있도록 종합기술박물관에서도 보고를 이뤄지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로부터 혁명 특징, 승리 원인, 소부르주아 국가라는 환경에서 사회주의 건설 어려움 등과, 부르주아지 성격, 약점을 규정했고, 서구와 미국 부르주아지로부터, 트러스트를 조직한 사람들에게 생산을 조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또한 소부르주아 세계를 대표하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비난했고, 영향력에 굴복한 좌익 공산주의를 비난했고, 프롤레타리아트 역할, 소부르주아 세계 영향력, 사회주의 조직 의미,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롭게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새롭게 조직할 때만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로는 모든 노동 대중들을 규합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는, 대공장에서 규율을 익힌 프롤레타리아트와 현 시기 과제로 볼 때, 중앙 위원회로부터 노동절에 제기한 자본을 물리칠 수 있는 조직과 철도에 대한 중요함도 함께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329, 4차 소비에트 대회는 끝난 뒤 러시아 공산당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을 수반으로 한 좌익 공산주의들로는 여전히 주간지, <공산주의>를 발행하고는 자신들만의 견해를 고수하기로 결정했었다. 420, 발행한 창간호에서 좌익 공산주의들은 편집부 이름으로, <현 시국에 대한 테제>를 실었다. 429,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해한 레닌 연설은 대부분 개진한 견해에 대한 답변들이었다. 또한 레닌으로는 <좌익 공산주의라는 유치한 단계>, <소부르주아지 근성>이라는 기고문에서 그들 견해를 좀 더 자세하게 분석했다. 글들로는 191859-11일자 <진실>에다 게재했다. 기고문으로는 사회하 부분으로는 특히 흥미로웠다. 국유화 몰수라는 문제에서 결단력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위대한 결단력이더라도, 국유화와 몰수로부터 사회화로 이행하고자 충분하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시국과 국유화에서 사회화라는 이행 본질 자체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제기한 좌익 문제로는 순진하고, 어리석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 시국 핵심은 바로 단지 몰수로부터 결단력 하나가 아니라, 사회화로부터 계산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 농장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에 게재한 좌익 공산주의 자료를 분석해봐도, 신랄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몰계급적이고, 소부르주아 지식 계급 근성이 뼛속까지 물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산주의>로는 6월에 마지막 호는 나옴으로부터 겨우 네 번 나왔다. 레닌 노선에 맞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매우 투쟁했었다.

 

191852-3,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는 볼셰비키에게 스피리도노바, 카렐린을 수반으로 하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의를 실질적으로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내어주기를 요구했다. 게다가 문제를 최후통첩으로 제시했다. 레닌으로는 농업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볼셰비키, 메셰랴코프, 세레다 등과 협의했었고, 볼셰비키 분파로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당 중앙 위원회도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와 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농업 최고인민위원회 회의에 대한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영향력은 약화했다. 볼셰비키로는 농촌 계급 분화 노선을 취했었다522,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경제 문제로는 빵과 기타 식료품들을 둘러싸고는 투기가 횡행했다. 기근에 대한 원인으로는 단지 러시아 곡물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라, 부르주아지, 부유층 전체가 노동하는 사람들 지배, 노동 소비에트 권력 지배에도 맞서 매우 심각한 문제인 곡물 문제를 두고 최후 결전을 벌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 지적했다. 농촌 부자 쿨라크를 포함한 모든 부유층, 부르주아지로는 국가 곡물 분배를 파괴하고 있고, 부르주아지로는 고정 가격을 뒤흔들고 있고, 곡물을 투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1푸드, 16.38kg마다 100루블, 200루블, 또는 이상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지적했다. 곡물 독점을 파괴하고, 뇌물 매수 온갖 책동을 파괴하는 건 사회주의 시작이자, 기본이고, 또 근원 원천이자 원칙으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여, 먹지도 말라라는 원칙을 성공하고 또 실현하고 있는 노동 권력을 죽이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실제로도 모스크바에서는 곡물 투기를 도처에서 이뤄졌다. 부농이자 소자산가로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고자 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도, 부자·쿨라크·소자산가 심리, 낮은 생산, 무지, 경제 후진 따위와 싸워나가고자, , 소비에트 권력 앞에 놓인 길도 매우 험난했다. 5월 말,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혁명 조직 작업에 대해서도 썼다. 국가를 방어하고자 조직화, 발발한 내전에 대한 지도와 대처를 사회주의 건설로부터 덧붙여 엄청난 작업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산업 국유화 법령 단행, 국영 기업 노동 지침 작성, 노동 조합 대회, 전러시아인민경제최고회의, 인민경제평의회 제1차 대회 등에서 보고, 노동최고인민위원회 대회, 공장 단위 대표 회합, 공장 위원회 협의회 등에서 연설했다. 또 페테르부르크, 옐레츠 등에서 온 노동 계급과 면담, 전선으로 동원한 공산주의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계엄령 공표 직전, 매우 날카로웠던 시기로는 525, 최고인민위원회에다 사회주의사회과학아카데미에 대한 법령 초안도 제출했다. 65일로는 국제주의 교사들 앞에서 연설했다. 610일에는 체코슬라바키아 반혁명 반란에 대한 격문을 작성했고, 같은 날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기술가들을 활동으로 합류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부상 입기 이틀 전, 교육 대회에서도 연설했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대의에서 학교로부터 갖는 의의를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매주 여러 지구로 가서 연설했고, 하루에도 수 차례씩이나 연설하는 일도 잦았다. 대중 사이에서 작업, 기본 작업도 헛되지 않았고, 작업들도 승리를 돕기도 했다. 1918년 봄과 여름에도, 레닌은 모스크바에서 살면서도 말 그대로 온몸을 바치면서 일했다. 중농은 소비에트 권력에도 공감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력은 평화를 위해 싸웠고, 지주에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동들은 소비에트 권력은 안전하다고 아직 믿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농민들도 더 이상 자신들의 소자산가적인 중립을 지킬 수는 없게 됐다. 5월 중순부터 계급 투쟁은 도처에서도 불붙었다. 1918년 여름은 몹시 힘들기도 했다. 레닌으로는 부상을 입어 무엇도 쓰지 못했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힘겨운 시절이었다.

 

모든 잃어버린 부르주아지로는 외국 도움을 강구했다. 연합국에게 반란을 조직할 자금을 받아오거나, 주민들을 약탈에 내맡긴 채로 독일군 지원에다 호소했다. 그리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날뛰었다. 독일로는 핀란드 백위군을 지원하거나, 우크라이나를 점령했고, 터키로는 아제르바이잔 무사바트 민족주의들과 그루지야 멘셰비키를 지원하러 나섰다. 독일은 크림을 차지했고, 영국은 무르만을 차지했고, 연합국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시베리아를 중앙 지역으로 차단하고자 도왔다. 우크라이나, 시베리아에서는 곡물 수송을 중단했고, 수도 두 곳이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는 기근에도 시달렸다. 전선 포위망도 좁아졌다따라서 레닌은 520,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전신을 보냈다. 연이어 반혁명 반란으로는 쿨라크를 일으키고, 그들을 조직했다. 쿨라크로는 곡식을 숨겨뒀다. 기아 투쟁과 반혁명에도 맞서는 투쟁도 함께 이뤄졌다. 레닌은 빈민 위원회를 조직하자고 내세웠고, 노동 계급들로는 식량 파견대로 들어가서 농촌에서 혁명 경험을 쌓아야만 한다고 열심히 선동했다. 레닌으로는 노동 계급들에게도 현 시기 곡물 투쟁이란 사회주의 투쟁이라고도 말했었다. 선진 노동 계급이란 빈민 지도가이자, 농촌 노동 대중이라는 지도가로, 노동 국가를 건설하는 사람으로, 인민에게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고 레닌으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썼다. 투쟁 속에서도 중요한 건 단련할 수 있고, 또 노련한 노동 계급이라는 혁명 전위라고 썼다. 놀랍게도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로는 레닌 호소에도 부응했다. 곡식 투기꾼·쿨라크·조직 파괴가·뇌물 수수가 등에 맞선 십자군을 조직했다. 빈민들도 소비에트 권력 주위로 더욱 결합해갔다. 그리고 611,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빈민 위원회 조직에 대한 법령을 승인할 수 있었다. 레닌도 빈민을 배려했고, 빈민들도 레닌을 배려했다.

 

독일로는 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는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는 중단했지만, 러시아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아직 브레스트에서 협상 진행 시기에도 독일 정부로는 우크라이나 의회와 협정을 맺고는, 볼셰비키로부터 맞서는 투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말았다. 독일로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는 소비에트 군력을 전복하도록 한 뒤로, 의회를 함부로 해산하고는, 차르 장군이던 스코로바츠키를 우크라이나 통치가이자, 수장 자리로 앉혀놨다. 따라서 우크라이나로는 사실상 독일 식민지로 나떨어지고는 말았다. 곡물, 가축, 설탕, 원료 등도 우크라이나에서 독일로 대량 반출됐다. 독일 제국주의들은 갖은 수를 써내서라도, 내전 도화선을 앞당기고자 했었다. 돈스카야 지방으로 도망간 돈스카야 대장이기도 했던 크라스노프로는 독일에다 지원을 호소했었고, 독일로는 크라스노프로부터 카자크 백위군 부대들을 통합하기를 도왔었다. 독일로는 핀란드에서 백위군이 혁명을 진압하고, 핀란드 혁명가들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도록 돕기도 했다. 독일만 공격해오지도 않았다. 4월 초에는 일본, 영국은 블라지보스토크에도 상륙했다.

 

따라서 4월로는, 이미 상당 수로 반소비에트 당들은 부흥 동맹으로 연합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입헌민주당, 인민사회주의, 멘셰비키, 단결 모임 등도 들어가 있었다. 부흥 동맹은 협상국과 남몰래 협정을 체결하고는, 볼셰비키에 맞서는 협상국 군대를 러시아로 파견하기로 하고,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전복하도록 하는 반란을 조직하고자 체코 군단을 활용했다. 케렌스키 정부 때 체코 군단 수로는 42천여 명에 달했다. 러시아 검은 백인조 장군들, 장교들 상당 수도 가담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중앙 위원들, 시베리아 사회주의혁명가당 대표들도 프랑스 군사 사절과 반란 계획을 논의했다. 극동 지역으로 철수했던 체코슬라바키아 군대로는 우랄, 시베리아, 우수리 등 철도에 있던 주요 기지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5월 말, 체코 군단은 첼랴빈스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 타이가, 톰스크 등 역을 점령했고, 6월 초로는 옴스크, 사마라를 점령했다. 5월 말, 모스크바로는 자유조국수호동맹이 주도한 백위군 근위대 음모를 적발했었고, 크림에서는 반혁명을 진격했고, 발틱 함대에서 반란을 기도했다. 64, 크림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부를 수립했었고, 619일로는 이르쿠츠크에서 반혁명 반란도 일어났다. 620일에는 코즐로프, 예카체린부르크에서, 629일에는 코스트로마에서 군주주의 음모를 적발했다. 630일에는 시베리아 지역 두마에서 부르주아 정부 권력을 선포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부르주아지와 손을 맞잡았다. 68, 체코슬라바키아로는 사마라를 함락한 뒤로부터, 그곳에다 제헌 의회 위원회를 결성했었고, 619일에는 땀보프스카야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볼로다르스키 동지는 그들로부터 살해됐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역시나 반혁명 길로 나섰다.

 

624, 그들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소비에트 권력에도 반대하는 무장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627, 영국 상륙 부대로는 무르만스크로 상륙했다. 71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사절단 지도로부터 결성된 백위군 근위대를 적발해서 체포했다. 74,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를 열었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미르바흐를 살해하고,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블에서 폭동을 조직했다. 75, 이미 레닌은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에게 우유부단함, 공황 상태 조장, 사태에 대한 몰이해 등을 일일이 비판했다. 그들로는 폭동을 일으키지는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폭동도 일어났다.

 

76,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블륨킨, 안드레예프로는 제네주니 거리에 있던 독일 대사관 건물로 나타났다. 개인적으로 독일 대사였던 미르바흐 백작을 만나는 데 성공했고, 그에게 폭탄을 투척하고는 죽인 다음, 전러시아비상위원회였던 체카 분실로 몸을 숨겼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포포프는 지휘하던 곳에서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로 있었고,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 전체는 임시로 이전했던 상태였다. 살인가를 체포하고자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장 제르진스키는 체포되고 말았다. 또한 포포프로부터 자악한 분실로는 인근 거리마다 순찰병을 파견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스마도비치, 체신 최고인민위원 포드벨스키, 전러시아비상위원회 위원 라치스 등을 체포하고는, 우체국, 전화국을 장악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 중앙 위원회로는 모스크바에서 반란 소식을 러시아 전역, 체코슬로바키아 전서에다 보내고는 독일과 전쟁을 촉구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로부터 획책한 군사 행동에도 대응하고자 최고인민위원회로는 2천 명 보병, 8문 대포, 1대 장갑차를 가지고, 포포프 분실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78일 아침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를 사방으로 포위하고는 포격을 가했었다. 사회주의혁명가당으로는 크메믈린 사격에 대응하고자 크레믈린 마당에다 몇 차례 대포를 명중하고자 했다. 그러나 포포프 분실은 얼마 저항하지도 못했고, 블라지미르스코예 대로로 퇴각해서 도주했다가 곧 이내 산산이 흩어졌다. 300명 포로를 붙잡았다.

 

트료흐스뱌치젤스키 거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을 괴멸한 뒤로 레닌은 반란을 일으킨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가옥을 보고자 방문했다. 포위됐을 때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문서들을 모두 다 찢어버렸다. 78, 5차 소비에트 대회로는 67-8일 폭동에 동조했었던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를 소비에트에서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710일 대회는 소비에트 헌법을 채택했다. 그리고 활동을 종결했다. 7월도 극도로 어려웠다.

 

체코슬로바키아와 싸웠던 군대 지휘관으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였던 무라비요프였다. 10월 혁명 뒤로 소비에트 권력 쪽에 가담해서, 케렌스키, 크라스노프가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기를 맞서 싸웠고, 중부 지역 의회들에도 맞서 싸웠으며, 루마니아 전선에서도 싸웠다. 그러나 76-7일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개시하자 무라비요프로는 그들 쪽으로 이내 돌아서고는 군대를 모스크바로 돌리고자 했다. 그러나 무라비요프에게 의존했던 사람들로는 지지하지는 않았다. 무라비요프로는 심비르스크 소비에트에 의존했으나 소비에트에서도 무라비요프를 지원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무라비요프를 체포했으면 했으나, 저항하자 죽였다. 심비르스크는 곧 체코슬라바키아로부터 함락됐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니콜라이 2세를 구금했던 예카체린부르크로 접근해갔다. 716,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총살했다. 따라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니콜라이 2세를 구하지 못했다. 그들은 723일이 되어서야 예카체린부르크를 함락했다.

 

북부로는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무스만스크 철도 일부를 장악했다. 바쿠 멘셰비키로는 영국군을 불러들였다. 백위군 의용군은 치호레츠크 역, 아르마비르 역을 차지했다. 독일은 대사관을 경호하고자, 일개 보병 대대를 모스크바로 진입해주기를 요구했다. 힘겨웠지만, 그래도 레닌은 실망하지는 않았다. 심정이 묻어난 글로는, 726, 제트킨에게 쓴 핀지에도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당을 지지했고, 또 응원했다. 그러나 반혁명 반란은 계속해서 몰아쳤다. 체코슬로바키아로는 카잔을 점령했고, 영국 프랑스 군대로부터 아르한겔스크를 점령했었다. 북부 지역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반란을 조직했고, 이제프스크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 군대로는 사라풀을 점령했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치타를 포기하고 떠났고, 반혁명 부대 의용군은 예카체린부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반란도 실패하자, 사회주의혁명가당 대오로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새 전력을 갖추고자, 독일과 연합국들 간에도 전쟁이 벌어지면서부터 러시아에서도 개입할 수밖에는 없었다. 여러 국가들은 러시아에 관심을 잃었다. 116, 체코슬로바키아로는 벨라야 강에서 패배했다. 따라서 모든 무장 병력을 통합하고자 했다. 일련으로 중요한 조직 대책들을 마련했었고, 노동 조직은 곡물 징수에도 참가하고, 추수 부대, 암거래 저지 부대를 조직하고자 법령을 공표했다. 곡식 사정은 조금 개선할 수 있었고, 부르주아 신문들도 폐간해서 사람들을 도발하는 행위도 중단했다. 외국인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개입에 반대하는 선동도 강화해갔다. 89, 외교 최고인민위원회의로는 연합국 평화 협정을 제안하라고 미국 정부에다 호소했다.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로는 자신들의 기반이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부터 레닌을 비롯한 여러 볼셰비키 지도가들을 대거 암살하기로 결정했다. 830, 오전 10, 레닌그라드 비상 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우리츠키 동지는 살해됐다는 소식을 레닌도 받았다. 밤에 레닌은 모스크바 위원회 동원령과 관련해서 바스만니 지구,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에서 연설하기로 했다. 부하린도 말렸으나, 레닌은 집회로 갔다. 2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인민 교육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레닌은 자리에서 이틀 전 연설도 했었다. 집으로 갈 채비를 마치고는, 크레믈린 광장으로 지인 교사를 마중하고, 운전수로는 레닌을 미헬손 공장으로 태우고 가던 도중에, 한 사람은 레닌에게 총을 쏘아서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서둘러 병상으로 옮기고는 스베르들로프도 엄숙한 상태였다. 루나차르스키도 놀랐다고 한다. 여러 동지들도 걱정했다. 스탈린은 전선으로 나간 상태였다. 레닌 부상으로 모든 당 조직들뿐만 아니라 폭 넓은 노동 계급, 농민, 붉은 군대 대중을 동요하게 만들었다. 동요하는 모든 신문들도 용태와 상태 보고를 주시했다. 830일 저녁, 스베르들로프로부터 서명한 레닌 암살 기도에 대한 당 입장을 발표했다. 노동 계급은 지도가를 향한 암살 기도에 대해서는 더욱 큰 단결로 답하고, 모든 혁명 적들에 대해서는 맞서고자 가차 없는 대중 테러로 답하겠다고 밝혔다. 암살 기도는 노동 계급을 더욱 집결하도록 했고, 더욱 단결하고자 긴장해서 활동했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가당은 붕괴했다.

 

 

레닌은 부상을 당한 다음 날, 신문에는 사회주의혁명가당은 암살 기도와 무관하다는 당 입장을 모스크바 사무국 발표로부터 게재했다. 7월 폭동 뒤로는 사회주의혁명가당 좌파는 이미 사회주의혁명가당에서 이탈해갔다. 특히 노동 계급들은 더욱 그러했다. 콜레가예프, 피첸코, 우스치노프 등은 주도하고, 인민주의 공산주의라고 칭한 분파도 당에서 분리됐다. 브레스트 강화 조약을 무력으로 결렬하도록, 테러 행위도, 공산당과 적긎거인 투쟁도 모두 허용하지 않았다. 남은 사회주의혁명가당 당원들은 더욱 우경화되어 쿨라크 반란을 지지했으나, 영향력은 약화해갔다. 레닌 암살 기도로부터 사회주의혁명가당 붕괴 과정을 강화하도록 했고, 대중 속에서도 영향력을 더욱 지리멸렬하게 했다. 레닌은 살아남았다. 하루라도 업무로 복귀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910, 레닌 병세를 묻는 전화로부터 의사들을 번거롭게 하지는 말기를 바란다는 당부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는 <진실>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로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비록 화는 났었지만, 업무로 다시 복귀할 수 있어 기뻐했다.

 

916,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의 회의를 주재했다.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간부 회의에다 보내는 환영사를 썼다. 해당 협의회로는 영향력도 무척이나 컸었다. 그러나 해당 조직은 인민 의식 증대, 노동 계급 전진, 소비에트 국가 행정이라는 대의 종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는 별로 돕지는 못했다고 결함을 생각하기도 했다. 레닌은 협의회에다 환영사를 보냈고, 앞으로 제기하는 정치 임무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틀 정도 기간에 또 다른 기고문도 썼다. <러시아 신문들 성격에 대하여>였다. 레닌은 신문들이 주위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노동, 농민 대중으로부터 생활로 가까이, 또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봐야만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업무로도 다시 복귀하자, 식량 문제에 대한 심원한 지점도 파고들었고, 농촌 고용주들에게 현물세를 부과하는 법령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도 참가했다. 주로 소박한 집에서 지내왔고, 값 싼 방, 값 싼 해외 하숙집에 얹혀 사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라인 보트 집으로 이사갔을 때는 제일 작은 방을 골랐었고, 또한 거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여섯 해 뒤로는 레닌으로는 숨을 거둔 곳이기도 했다. 아무튼 전선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93, 카잔에서는 노동 계급들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권력, 사회주의혁명가당 우파에도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소비에트 군대로는 7월 카잔을 점령했다. 12월로는 볼스크, 심비르스크, 17일로는 흐발린스크, 20일로는 치스토폴, 107일로는 사마라를 점령했다. 99일에는 소비에트 군대로는 그로즈니, 우랄스크를 점령했다. 국면을 전환했다. 소비에트 권력 일주년을 맞이했을 때, 레닌은 연설로부터 산개했던 붉은 호위병은 강력한 붉은 군대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독일로는 무르익어 갔던 혁명 소식도 고르키로 끊임없이 들어왔다. 101, 레닌은 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조합, 기타 등등 합동 회의를 소집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도 혁명을 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주로 보급을 위한 식량 확보, 군 입대를 더욱 늘릴 수 있고, 국제 노동 혁명을 도울 수 있는, 3백만 군대도 모으고자 했다. 그리고 비록 동의를 얻지는 못했었지만. 결의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합동 회합으로는 목요일 3일이었고, 수요일 2일에, 레닌은 회합에다 보내는 편지를 썼다. 합동 회합에서는 레닌 편지를 경청했고, 바랬던 기조로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결의안으로는 모든 나라,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전역으로도 타진했다. 다음 날 <전진>에도 게재할 수 있었다. 독일 노동 계급들도 동요는 심해졌다. 이론 투쟁에서는 분명한 이론 입장에다 늘 지대한 의의를 부여했다. 한때 마르크스 학설을 대중화하고자 일련 저서를 썼던 베른슈타인과 기회주의 언명으로 반대하고 나섰던 카우츠키로는 독일 이론가로는 어떠한 권위를 누렸는지를 잘 알았고, 따라서 레닌은 카우츠키에 대해 특히 분개했다. 920일자로, <진실>에다 게재한 볼셰비키주의에 반대하는 카우츠키 기고문에서 발췌 부분을 보고는 매우 격분했다. 곧바로 스위스에서 살았고,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대표이기도 했던 보로프스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트킨, 메링, 다른 사람들도 카우츠키 독재 문재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도 아니고, 진부한 베른슈타인주의를 퍼뜨리고 있었다는 원칙적인 이론 성명을 언론에도 발표해야만 한다고 했다. 레닌은 카우츠키 수정주의 입장을 분석한 소책자, <국가와 혁명>을 조속하게 독일어로 번역해야만 한다고 썼었고, 카우츠키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출판하는 대로 보내주기를, 그리고 볼세비키주의에 대한 카우츠키 모든 기고문들을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고르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레닌은 카우츠키를 폭로하는 데 착수했다. 따라서 소책자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를 집필했다. 마지막 몇 줄은 191810월 쓰여졌다. 1018, 레닌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1023, 베를린 주재 대사에게 서한을 보냈다1023, 칼 리프크네히트는 석방됐다. 독일 노동 계급들은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1918115, 독일 정부로는 베를린 주재 소비에트 대표부는 독일 혁명 운동에도 개입했다고 비난하고는 소비에트 대사 이오페를 수반으로 한 소비에트러시아공화국 외교관들, 영사관 대표들에게도 곧바로 독일을 떠나기를 요구했었다. 119, 베를린 노동병사대표소비에트로는 대사관 직원들과 러시아로 향하던 이오페를 혁명 베를린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소비에트 권력 수립 일주년 기념식도 열었다. 10월 말, 레닌은 중앙집행위원회, 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노동 계급들에게 보낼 호소문, 초안 작성에도 참가했다. 113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혁명을 기념해서 열린 시위대 앞에서 연설했다. 10월 혁명 기념 기간 동안에는 제6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16일에 대회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념일을 맞이해서>라는 레닌 연설을 시작으로 개회했다. 같은 날,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조합평의회 승리 기념 회의,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문화교육조직협의회 저녁 모임에서도 연설했다. 7일 레닌은 10월 혁명 투사 기념 현판, 제막식에도 참석해서 연설했다. 7일에는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기념비를 제막할 수 있었고, 학설 의의에 대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선견지명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118, 9, 10, 11, 레닌도 독일 혁명에 대한 소식에 완전하게 몰두했다. 또한 쉬지 않고 연설했다. 118일에는 모스크바 지역 농촌빈민협의회에서도 연설했다. 레닌은 장기 활동에 대한 필요를 느끼기도 했다. 또한 빈농은 쿨라크와도 투쟁해야만 한다고 밝혔다. 대책으로는 토지 사회 경작, 코뮌, 협동 경작, 농민 조합 등을 내놓기도 했고, 소규모 농업 취약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쿨라크 추종가, 착취가를 비판했다. 19181116, 1차 전 러시아 여성 노동 대회를 열었다. 대회로는 여성 노동 계급들 사이에서 선전, 선동을 주제로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로부터 소집했다. 이네사, 사모일로바, 콜론타이, 스탈, 칼라니나 등 동지로는 대회 조직을 맡아 열심히 일했다. 1,147명 대표들도 대회에 참석했다. 여성 노동 대회였으므로, 여성 농민들은 참가하지 않았다. 소수 민족 사이에서 노동에 대한 문제 역시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레닌은 쏠려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많이 말하기도 했다. 농촌에 대해서였고, 여성은 예전 처지를 사회주의 아래로만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소규모 경제에서 공동 경제로, 토지 공동 경작으로도 이행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여성은 완전하게 해방할 수 있고, 또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도 말했다. 레닌으로는 빈민 위원회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을 강화할 수 있도록 호소했다. 레닌은 어느 곳에서 연설하더라도, 농민에 대해서, 또 토지 사회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리고 자주 칼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보낸 1856년 편지를 떠올리곤 했었다. 레닌은 1918, 1211, 1차 전러시아토지국 대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1919년은 치열한 내전 해였다. 콜차크, 제니킨, 유제니치와 투쟁한 해이기도 했다. 기아, 경제 붕괴로부터 벌어졌다. 공장, 제작소 가동은 중지됐다. 운송은 완전 붕괴됐다. 붉은 군대도 조직력을 갖추지 못했고, 무장 수준도 형편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권력도 예정대로 모든 곳에서 조직되지는 못했었고, 아직은 주민들과 함께 성장하지도 않았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적대적인 당, 구 권력 아래에서 호강과 호의호식하며 살던 모든 사람들, 곧 지주, 자본가, 하수인들, 쿨라크, 상인 등은 볼셰비키에도 반대하는 선정적인 선동을 벌여나갔고, 폭 넓은 농촌 대중 무지, 정보 부족을 이용해서 온갖 유언비어만 퍼뜨리고 다녔었다.

 

그러나 레닌은 지주와 자본가에도 맞섰다. 그리고 토지와 평화 쪽에 섰다. 비록 전투나 전선으로 나가지는 않았어도, 늘 노동, 농민, 붉은 군대와도, 대열로도 함께하고자 했다.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이기도 했고, 활동도 많았다. 활동은 주로 내전 문제들,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 문제들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어려운 난관들에도, 소비에트 권력은 정책으로도 올바른 길을 가고자 했다. 사회주의 건설 핵심으로는 조직에 있다고 레닌은 늘 되풀이해 말하곤 했다. 그리고 노동 계급, 조직 관록, 노동 농민과 친밀하도록 하고, 또 이전 군대, 전문가들로부터도 조직 경험에 대한 일체를 습득할 수 있도록 요구했고, 과학과 지식으로는 소비에트 국가로부터 노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봉사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19279, 1차 미국 노동 사절단 대담에서 스탈린은 전쟁에서 운명이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로는 적들이 콜차크, 제니킨에게 풍부하게 공급하는 장비들이 아니라, 올바른 정책, 수백만 국민 대중 공감, 지지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919년 소비에트 권력 정책은 주로 대중 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이었지만, 레닌은 공산주의 당을 말했고, 외적인 장애물도 종식하고자 노력하고, 구체제를 분쇄할 때,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조직 문제를 맞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7, 10월 열린 제2차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사회주의 건설 핵심은 조직에 달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17개월 뒤로는 1919, 3월에는 소비에트 권력은 이미 스스로, 발로도 설 수 있으면서, 조직 문제도 떠올랐다. 레닌은 제8차 당 대회에서도 다뤘던 모든 문제들을 조직 문제와도 긴밀하게 묶었다. 기구, 관료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문화 부재는 사회주의 건설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고, 사회주의 건설에서 폭 넓은 대중 유입은 저해할 수 있고, 과거 잔재와도 투쟁을 방해하고,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방해하고 있는지도 말했었다.

 

농촌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는 농촌 노동 계급들과, 빈민에게도 미치는 영향력, 폭 넓은 계층에서는 농민들, 노동력 착취로부터가 아닌 노동으로 살아가는 중간층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까지도 강화하고자 말했었고, 또한 농민 계급을 소비에트 권력 기둥으로 만들고자 배급 문제에 대한 봉사와 협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로부터 반면교사를 배워서, 남은 공산주의를 건설해야만 한다고도 말했었다. 공산주의 힘만이 아니라, 구 체제 전문가들과 과학, 또한 부르주아 건설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경험 일체를 활용해서 필요하기를 취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고 말했었다. 대회를 열기 이틀 전,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스베르들로프는 사망했다. 레닌도 장례식에 참석했었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도덕 권위, 타고난 조직 능력으로부터, 폭 넓은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조직가로도 잘 활용하고, 또 활동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중했다는 점을 말하기도 했었다.

 

레닌은 조직 사회주의 노동 운동과 무정부주의 사이에서 모순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5, 탐메르포르스 협의회 참석할 때, 레닌은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서도 탁월하게 무정부주의 특징을 보여줬다. 19195월 제1차 전 러시아 교회 교육 대회에서도 레닌은 대회에서 환영사를 했고, 대회로는 800명 대의원도 참석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권력 건설에서도 무정부주의 정서와 투쟁해야 한다면, 붉은 군대에게도 투쟁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무정부주의 정서로는 게릴라, 유격 활동 방식도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 내전 경험도 붉은 군대 조직에서 어려움을 잘 보여주곤 했다. 레닌은 191974,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노동농민대표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조합소비에트, 모스크바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에서도 연설하기도 했었고, 분견대를 꾸준하게 없애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도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비조직적, 게릴라식 활동 및 혼란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도 재앙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레닌은 농업 분야에서 소농 경제 특수한 분산으로부터 지닌 해악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집단 경영 형태로 이행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고, 토지 사회 경작을 담당할 수 있는 대규모 집단 조합, 농업 코뮌, 협동 조합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도시, 농촌 노동 계급들로부터 사업 주도가이자, 노동 계급들에 대한 모든 독창과 창발을 지지했다. 1918년 봄에도, 농업 협동 조합을 조직하고자, 시베리아, 세미팔라친스크로 간 오부호프, 세먀니코프 노동 계급들에 대한 독창과 창발을 많이 지지했다. 또한 토지 집단 경작 노선에서 소박한 유형이지만 여러 조치들도 모두 지지했다. 레닌에게 농촌 환상 따위는 없었다. 1919년 봄, 레닌은 거주했던 고르키 노동 계급들 앞에서 새로운 유형으로, 집단 경제를 조직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여러 농업을 연구하기도 하던 동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농업으로는 채소 협동 조합으로부터, 붉은 군대에도 납품하도록 계약을 체결했고, 품질 좋은 배추들도 재배하기도 했다. 비료, 신품종, 파종범도 시험했다. 덕분에 채소 수확량도 늘었고, 45가구에 대해서는 노동 가족은 일 년 내내 건강한 채소도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18318-23, 8차 당대회 때 중농에 대한 태도 문제를 제기했을 때도, 레닌은 검증된 중농으로부터는 강제력이 아닌 동지로부터 함께 기본 규칙, 지침들을 요구하고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1924, 1, 채택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새 헌법에서도 노동, 농민 선거권은 평등하고 나올 수 있었다. 1919330,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은 고인이던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할 중앙집행위원회 후보로는 페테르부르크 노동가이자, 트베르스카야도 농민 출신이었던, 칼리닌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안건으로부터도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교육 분야로, 레닌은 교외 교육 대회에서 대의원들도 전선으로 나가, 붉은 군대도 읽고 쓰는 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기도 했다. 소비에트 교육으로는 지식에 대한 갈망, 교육 성과는 무엇보다 주로 교외 교육으로부터 이뤄진 경우는 더 많았다. 노동 대중 교육은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교육원들이었던, 세르기에프스카야, 라고진스키도 전선을 순방했다. 그리고 수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소비에트 교외 사업국으로는 농촌용 대중 신문을 만드는 문제를 고심하기도 했고, 19181212, 이미 최고인민위원회로는 <글을 깨친 사람들에 대한 동원, 소비에트 체제 선전에서 조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 바도 있었다법령은 노동 거주 지역 조직과 농촌 법령, 신문 기사들, 소책자들을 강독할 조직도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농촌 활동을 관장하는 분과도 있어서, 8차 당대회 때 만들어졌다. 분과를 대표해서, 레닌은 보고했다. 분과로는 66명 대의원들도 들어갔다. 세레다, 루나차르스키, 미트로파노프, 밀류친, 이바노프, 파호모프, 쿠라예프, 바레이키스, 보리소바 등 테제를 기초할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레닌은 모든 당,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농촌 지역들에도 신문, , 책방들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농촌 노동, 농민, 문맹에 대한 지침으로는 사후 1928년에서야 발표한 <소비에트 기관 운영 규칙 초안>에서 기술하기도 했다. 1919년에는 80%는 문맹이었다고 보고하기도 했고, 또 문맹을 줄이고자 했다. 1919년은 도서관들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또 민원 활동 분야에서도, 소비에트 권력 선전 및 여러 법령들에 대한 선전도 실천해서 옮길 수 있었다.

 

레닌은 민원실 뿐만이 아니라, 1919412, 칼리닌, 레닌, 스탈린으로부터 서명한 국가 감독에 대한 재조직 법령을 공표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으로 있었다. 그리고 재조직 법령으로는 낡은 관료주의를 분쇄하고자 했고, 관료들에 대한 보수성, 꾸물거림, 주인 의식 결여, 해이함을 비판했고,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관료주의와 부조리에 대해서는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단호한 조치로부터 소비에트 기관에서도 근절하고자 했다. 소비에트 권력은 폭 넓은 노동, 농민도 국가 행정에도 참가할 수 있고, 또 행정 기관들을 폭 넓게 감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제도에 대한 불충분함을 해소하고, 관료주의와 부조리부터 근절해갈 수 있다고 공표했다. 191954, 국가 감독 최고인민위원회로는 산하에다 중앙 민원실도 설치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524일에도, 중앙 민원실 지방 지국들을 설치하는 법령도 발표했다. 레닌은 소비에트 기구 안에서 관료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투쟁하기를 촉구했고, 또 요구했다. 러시아로는 1860년대부터 문학 작품들에서도 관료주의에 대한 온갖 조소를 보내기도 했다. 1859년 창간해서, 1973년 폐간된 혁명 민주주의 잡지였던, <불꽃> 시인들, 첼르니셰프스키파 시인들도 그러했다. 쿠로치킨, 줄레프 등등과 같은 <불꽃> 시인들도 관료주의, 일 지체, 뇌물 수수 등에 대해서도 수도 없이 저주를 퍼부었고, 또 거부하기도 했다.

 

레닌은 보내온 편지들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으로 대했고, <레닌 저작선> 24권에 수록된 문서는, 예시로도 같은 점을 잘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수 많은 진정서들도 레닌에게 들어왔고, 직접 답장을 보내곤 했다. 레닌 연구소 문서 보관국 사례들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문서들도 많았다. 국가 기부 안에서도 온갖 관료주의를 근절하고자 노력했다. 활동가 한 사람마다 주의 깊은 태도를 보이고자 했고, 자기 부서 사람들을 잘 알고, 업무로나, 알맞은 업무 환경 조성으로나, 나서서 돕기를 요구했다. 레닌은 부서 직원들을 하대하지도 않았고, 더욱 친절하게 배려하고자 노력했고, 증거로도 짤막한 기록들도 상당수 보관됐다. 이를테면, 38, 레닌은 최고인민위원회 회의로부터 중앙 통계청 직원이던 흐랴쇼바는 먼 곳에서 살았고, 걸어서 출근해야만 했다. 그래서 통계 일이 없을 경우 흐랴쇼바에게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하거나, 바쁘면 꼭 굳이 아예 오지 않아도 된다고 비서에게 요령껏 설명해달라고 글을 써주기도 했다그리고 넉넉하지 않는 생활과 활동을 수행해야만 했던 여러 동지이자 동료들에 대한 물질적인 처우나 처지들도 특히 염려했다. 운송 최고인민위원회의 추루파, 마르코프 등 동지들은 굶주리는 생활을 했다고 드러났을 때도, 중앙집행위원회 동료 직원들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상시적으로 할동할 수 있는 수당을 꼭 지급하라고 당부하고 또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194월 말부터는 동부 전선에서도 사태는 전환됐고, 붉은 군대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백위군에게서 우핌스카야와 일련 다른 도시들도 탈환해냈다. 그러나 1919년 하반기는 상반기보다 훨씬 열악했다. 9, 10, 11월 초는 더욱 그랬다. 왜냐하면 내전도 격화했기 때문이었다. 콜차크는 패했지만, 백위군은 소비에트 권력 심장부였던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를 차지하고자 할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니킨은 우크라이나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남쪽에서부터 진격하기 시작했고, 서쪽으로는 유제니치는 움직이고자 개시하고 있었고, 이미 페테르부르크로 접근한 상태였다. 백위군 승리는 숨어 있떤 적들도 기운을 북돋도록 만들었다. 11월 말, 페트로그라드에서 유제니치와 연계했고, 협상국 지원을 받던 반혁명 조직들도 적발했다.

 

제니킨, 유제니치는 승승장구하는 동안에도 내내 레닌 앞으로는 온갖 욕설, 협박, 조롱으로 가득찬 수 많은 익명 편지들도 왔다. 지식 계급은 동요했었고, 소비에트 권력 쪽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치미랴제프를 위시한, 선진 부분뿐이었다. 사회주의혁명가 당원들에게 지원을 받은 무정부주의들도 925, 레온치예프스키 거리에 있는 러시아 공산당 볼셰비키 모스크바 위원회 건물에다 폭탄을 터뜨리고는 수 많은 동지들도 목숨을 잃었다. 기아와 빈곤도 내내 기승을 부렸다. 따라서 붉은 군대를 강화하고, 후방 노동 중심 지역들에도 식량을 공급했다. 그리고 선동과 해명 활동들도 폭 넓게 전개해야만 했다. 대체로 레닌은 집무실에서 여러 보낼 전보들을 보내거나, 사람들을 맞이하곤 했다. 주로 매우 날카롭던 문제로는 곡물 문제였다. 소규모 농민 경제는 붕괴됐고, 광적인 투기마저 횡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19117, 추루바를 식량 최고 인민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불꽃>에다 글을 쓰기도 했다. 1919729-30, 모스크바 소비에트, 모스크바 노동 조합 평의회로는 공장 위원회들, 모스크바 중앙노동협동조합, 협동조합 평의회 위임을 받은 노동 조합 대표들 등, 협의회를 소집하고는 모스크바 단일 소비 조합을 구성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협의회로는 멘셰비키, 독립 협동 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레닌으로는 730, 협의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레닌은 연설에서, 협의회로는 잘 활동하기를 바랬지만, 내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협동 조합에서 올바른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는 사회 체제로부터는 혁명으로부터 더욱 새롭게 개혁하고, 또 개선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도 강조하기도 했다.

 

경제 분야에서 레닌은 개별 경제에서, 집단 경제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기아와 착취, 다른 사람에게 얻은 부를 축적하는 일은 근절해야만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최후 결전으로는 사회주의로부터 실현할 수 있고, 또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레닌은 어떤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파괴 분자들, 노동하는 사람들로는 적들인, 지주, 자본가, 파괴 분자들, 백위군에 대해서는 소비에트 권력으로는 해악을 끼칠 수 있고, 또 가차 없는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때를 맞추어 1919, 모든 사람들은 고등교육기관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일련 법령들도 도입했고, 노동 단과 대학들도 조직했고, 노동 강좌도 개설했다. 최초 소비에트 당 학교도 1919년에 조직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810-17일까지 당 주간을 열었고, 8차 당 대회 결정에도 따라 9월 말까지 당원 재등록 기간도 지속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는 108-15일까지 당 주간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1011, 레닌은 <노동 국가와 당 주간>이라는 논설을 쓰기도 했다. 글로는 당에 대한 레닌 견해, 새로운 소비에트 기구에 대한 설명, 노동 계급들과 노동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역량을 기구에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견해를 명백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노동 계급, 농민들에게도, 전위에도 공감할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알리고자 노력했다. 정치교육국원들은 주로 제1기 소비에트 당 학교 일에도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레닌은 정치 교육원들에게도 연설하기도 했고, 곧 지침에도 도움을 줬다고 한다.

 

덕분에 소비에트 권력 2주년 기념식을 승리로 맞이할 수 있었다. 제니킨은 오룔까지 접근해 온 10월 초순에 당 중앙 위원회로는 스탈린을 혁명군사평의회 의원 자격으로 남부 전선으로 파견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진격 계획을 제출했고, 중앙 위원회는 승인했다. 레닌은 전적으로 지지했다. 남부 전선에서는 빠르게 국면도 전환됐다. 1019, 군대는 보로네슈 근방에서 슈쿠로 장군, 마몬토프 장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1020, 오룔을 탈환했고, 1021, 풀코프 전투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진격했던 유제니치도 패배했다. 10월 혁명 기념일에서 레닌은 페테르부르크 노동 계급들에게 뜨거운 축하 인사를 쓰고는, <진실>로는, <소비에트 권력, 여성 지위>를 실었고, <빈곤>에도 실을 농민을 위한 기고문, <소비에트 권력 2>을 작성했다. 117, 레닌은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모스크바 소비에트, 전러시아중앙노동조합평의회, 공장위원회 대표들 합동 회의로부터, <소비에트 권력 2>을 연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닌은 기념식에서 연설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회합 연설은 선동 성격이 아니라 단순 사무였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지난 2년 동안 소비에트 권력으로부터 이룩한 여러 중요한 성과와 업적 가운데로는 노동 권력 건설이란느 교훈, 국가와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노동 계급들은 참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1919년 노동 대표들도 차지하는 비율로는 30%-80%로 증가할 수 있었다. 당 주간 동안 모스크바에서 입당한 당원만 하더라도, 14,000명은 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 농민, 예비대를 편성함으로부터, 전반적인 행정에서도 실천 투쟁 속에서도 단련됐다. 그러나 더욱 주의를 기울이고자, 매우 중요한 수백만 농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구축하는 일, 농민들에게 폭 넓은 선전 활동들도 꼭 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레닌은 내전으로부터도 농민 사태에서 진실로 잘 볼 줄 알았다. 레닌은 늘 조용하게 말했지만, 모두들 북돋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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