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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설마 그럴 리가..."
와타나베의 짧은 중얼거림, 그거였다. 나쓰미란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내 입에서도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슌스케 옆에 어떻게 그녀가 있을수 있는지 말이다. 슌스케에게 "제대로 사죄하고 싶다면 죽어", 라고 외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사랑은 어떤 가정이나 명백한 근거에도 결코 유린되어지지 않는 지독한 무엇인가보다. 강간, 슌스케는 죄인이고 나쓰미는 피해자인데 세상은 그런 명백함을 멋대로 헤집어버린다. 나쓰미는 끊임없이 세상속에서 벗겨지고 우롱당하며 몰려가는데 정작 슌스케에 대해 세상은 너무도 관대했다.
"만약에 아드님이 강간 사건 같은 걸 일으킨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런 바보 같은 일로 아들의 일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면 엄청 실망하겠지. 부모로서는."
"실망한다....으음, 그럼 만약 따님이라면?"
"딸? 딸이 강간당한다고? 그런 놈은 때려죽여야지."
난 그렇게 말하는 너를 때려주고 싶다. 왜냐구, 왜 그렇게 달라야 하는건데!! 암튼,
이렇게 때려죽이고 싶은 세상의 한 가운데서 홀로 견뎌야하는 나쓰미는 오히려 강한 여자였다. 슌스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확하게 말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아픈 기억을 쑤시며 그날의 사건이 그녀의 잘못인양 몰아부쳐도,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연애가 더럽혀질까봐 멀리하는 친구들의 시선에도, 그녀의 과거를 아는 순간 돌변하는 그녀의 남자들에게조차도 그녀는 꺽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나 슌스케가 그녀앞에 무릎 꿇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사랑을 예감하고 이별을 확신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순스케를 통해 상처를 치유받기엔 나쓰미,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함께 불행해지기로 약속"한 것이 깨어질 것같은, 행복해 질것 같은 예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안녕’을 말하고 떠난다. 그러나 아직 슬프지 않다. 슬픔을 준비하고 싶지 않다. 오자키는 분명히 그녀를 찾아낼거야, 라는 생각때문에. 바램때문에. "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던 인생과 가나코씨를 만난 인생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 , 라고 와타나베가 물었기때문에. 오자키의 눈동자가 하는 대답을 들었기때문에.
이야기 소재 자체가 워낙 돌발적이고 무거워서 자칫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얘기로 흐를수 있었는데도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요시다 슈이치의 진중한 고찰에서 비롯한 것이라 여겨진다. 역경, 시련, 불행이란 단어로도 비견되지 않을만큼 지독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한 여자와 그녀의 불행의 시작이었으면서, 그녀를 보둠으려는 한 남자의 또 다른 지독스러움, 지독한 뙤악볕 아래서도 역하지 않은 땀냄새를 풍기는 사랑으로 남게 한 사랑, 그래...이건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 얘기이며, 요시다 슈이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