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 -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결심 이용규 저서 시리즈
이용규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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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모래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었고, 그 발자국은 모래속 깊숙히 나 있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이 발자국을 내려다 보던 한 사람이 말했죠. "저건 내 발자국이야..그런데 옆에 있던 발자국은 뭘까? 분명히 나는 혼자 걸어 왔는데.. " 예수님이 옆으로 다가와 말씀하셨답니다. "그건 바로 나란다" 그 사람은 말했어요. "아니예요. 내가 힘들 때 난 언제나 혼자였는걸요." 다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야. 난 항상 너의 곁에서 너와 함께 있었어. 너의 짐을 덜어 주려고 했지만, 넌 늘 거절했지." 다시 그사람.."그래도 나중엔 저를 떠나셨잖아요. 저기 한사람의 발자국만 있을때 말이예요."
조용히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 너는 너의 짐을 결코 내려 놓으려 하지 않았지. 나는 그런 너를 등에 업고 저 길을 걸어왔단다. 그래서 발자국도 한사람것 뿐인거야.." 

이 책도 같은 얘기를 들려주는것 같았습니다. 저자는,
내려놓는 삶이 온유함을 이루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온유함은 결코 미약하거나 온순하여 우둔한게 아니랍니다

마음의 욕심을 떨쳐야만 가능한 나눔의 마음입니다. ’온유’의 그리스 원어는 ’통제된 힘’이라는 함의를 가집니다. 온유함은 결코 연약함이 아닌것이죠. 저의 그릇된 기도생활을 꼬집는듯한 이 말에 웃음이 났습니다.

"
하나님, 일단 말씀해보세요. 들어보고 좋으면 그대로 하고요. 
제 생각이 더 나으면 그때 봐서 절충하지요" 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말..

이렇게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비슷한 이기심의 기도를 일삼았던것 같군요. 저자는 권면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백지 수표에 서명해서 그것을 주님께 넘겨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우리는 지식적으로 압니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것을..그러나 내려놓거나 비우지 않고 더 채우려고만 합니다. 늘 가진것에 더 얹어달라고 구하죠. 선교사역을 통해 얻은 이용규작가의 행복한 결심을 읽어 나가며, 나의 종교적 역량을 키우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깨닫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를 배우며 내게도 행복한 결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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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구달 - 침팬지와 함께한 나의 인생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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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이란 무얼 말하는 걸까?  
예전 우리때는 역사를 창업한 명장이나, 한글 창제하신 세종대왕, 오지에서 의술을 펼친 슈바이처 박사, 인류문명에 이바지한 발명왕 에디슨 같은 사람을 당연한 위인으로 알고 자랐다. 그런데 요즘은 위인에 대한 개념이 포괄적으로 반영되면서, 빌 게이츠나 월트 디즈니, 백남준 등 다양한 인물이 위인 반열에 합류했다.  변모하는 세상에 맞춰 위인에 대한 개념도 달라진 때문이다. 제인 구달 또한 그러하다. 

동물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로 아이들의 사랑을 받는 원숭이류... 우리가 재미로, 구경거리로만 관심을 가졌던 그들에게 다른 시각으로 그들을 이해하려 애쓴 제인 구달. 다큐멘타리에서 그녀가 침팬지와 함께한 저 한장의 사진을  보았을 때만 해도 난, 그녀의 침팬지에 대한 열정이 그리 오래 가리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하던 스물 여섯 살의 그녀를 보았을 때는...

그녀가 침팬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찾아 읽지만, 대부분 실험실에 있거나 사람들의 집에 사는 침팬지에 대한 글로 국한되어 있었고, 단 한 사람의 야생 상태의 침팬지 관찰도 겨우 두달만에 끝이 난 것이라 침팬지에 대한 그녀의 알고자 하는 욕망을 더해만 간다. 그리고 아프리카로 향한 그녀의 침팬지 사랑은 30여년의 연구로 이어지게 만든다. 지금 그녀는 한 발 더 나아가 국제적인 환경 교육 운동에 많은 힘을 집중하고 있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을 귀중하게 여기며, 그들 자신이 이 지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인식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이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힘을 합쳐 나갈 것을 강조한다.


우리 주위에는 애완견을 비롯해서 애완동물을 기르는 집들이 많아졌다. 가족처럼 사랑해 주고 보살펴 준다. 그러나 얼마 전 뉴스에서 병들었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싫증을 낸다는 이유로, 경제가 어려워지니 뒤치닥거리가 골치아프다는 이유로 버려진 애완동물들을 접했을 때 많이 속상했었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을 왜 시작했냐 말이지.."사람들이 미워요. 왜 날 버리셨나요" 라고 걔네들이 말하는 것 같아 그들의 눈을 더이상 바라 볼 수 없었다. 인간을 위한 공헌을 한 위대한 인물들 못지않게, 인간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침팬지를 비롯한 모든 생물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으로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 꾸는 제인 구달을 사랑하며, 그녀의 열정에 응원을 보낸다. 
  

   
  지구상에 있는 생명 중 그 어떤 생명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란 없으며 아름다운 지구와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 한 명, 한 명이 일상 속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에 옮겨진다면 세상을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제인구달이 보내는 희망의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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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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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통해 투영되는 사회 전반이 왜곡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왜곡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와 일치되는 점에서만 용인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즉, 제시된 문제성의 옳고 그름에만 주안하고 격양되어 문학 본질에서 벗어난 소모적 토론은 무의미하다. 이 소설이 대기업 비리, "금기와 성역의 경계를 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가장 날선 붓칼"임의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슬픈 비겁으로 몸짓하는 허수아비의 춤을 읽어야 한다. 

경제 발전의 무한 사명아래 지난 날 우리의 이상은 현실앞에 매번 무릎을 꿇어왔다. 그렇게 성장한 강기준과 박재우같은 평범한 지식인들이, 세상이 비리라고 지탄하는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들만의 잘못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잠이 고프면 자고, 부富에 허덕이면 그것을 쫓는 것이 인간임을 아는데야 어떡하겠는가. 이상理想의 고픔이 덜했다고만 이해하고 싶다. 그들의 축적된 지식이 사회의 그늘에서 만연함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의 비겁에는 동질의 고통이 전해진다. 윤성훈과 박재우가 이미 탐닉한 부富는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상류사회로 안착시켰다. 내려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키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족에게는 절대 자신이 하는 일을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들 또한 부끄러움을 알기에...  허수아비춤을 추어야만  하는 그들, 웃음 가면을 쓰고 춤추는 어릿광대의 몸짓처럼 구슬프다. 나는 아닐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개 한 마리가 무자비한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몽둥이를 내려칠 때마다 목이 감긴 개는 발버둥을 치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러댔고, 그때마다 우리에 갇힌 개들은 반대쪽 구석으로 쏠리며 서로 머리를 감추려고 다투었다.    p.381

 
   

 

온 몸에서 단 하나의 소름도 빠짐없이 돋는다. 전직 검사에서 밀려난 전인욱은, 자신을 찾아와 보신탕을 먹으러 가자는 허민 교수에게 이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죽은 개가 몸에 보신이 될리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함인데, 나의 소름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전인욱, 허민과 같은 사람들이 "서로 머리를 감추려고 다투는" 애처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분명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작가가 허수아비들의 음모를 귀뜸해 주지 않았다해도 어둡게 드리워진 그들 스스로의 그늘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다쳤고, 다치는 것을 본 누군가가 있다. 모두는 다시 다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세계적인 기업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세계적인 국민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며 살았던 기성 세대는 그 믿음으로 자식을 키웠다 . "그래, 어서 자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다오.", 라고 얼를줄만 알았지 매를 댈 줄 몰랐다. 이미 부모보다 더 커버린 아들은 더이상 부모의 노여움에 두려워 할 줄 모르게 됐다. 하늘에서 뚝 떨어져 스스로 큰 양, 부모의 훈계를 조롱한다. 뭇매는 애꿎은 자식이 맞았다. 한 연예인이 학력 진위 문제로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을 당했다. 진실을 요구하던 수십만 누리꾼들과 이를 방관하던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그런데 정작 대기업 비리와 관련해서 그들은, 나는 침묵한다. 침묵은 타협이다. 비겁한 자들의 소리없는 변명이다. 갑갑한 심정에 사로잡힌 채,무언가를 해야 할 것같은 숙제를 남기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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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 살림과 육아, 맞벌이 때문에 덮어둔 나의 꿈을 되살리는 가슴 뛰는 메시지
김미경 지음 / 명진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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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채우기 위해서도 서정성에 동화되어서도 아닌데 계발서를 읽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 경우는 주기적으로 도전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자극제로 적당량 투여한다건망증이 남보다 탁월한 나는 꿈마저 잊고 있었던게 아닌가싶다. 김미경, 그녀가 잠자는 나의 꿈을 건드렸다내가 무얼하고 싶어 했었지?  


스스로 꿈을 만들어 나가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니는 것은 남.녀 불문하고 소중한 가치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리만치 고단하다쉽게 말해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란 얘기다. 그렇다고 그만그만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여지도 공평하다는 말이기도하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한술 더 떠 며느리로서의 몫까지 완벽하게 해 낸다는건 신사임당 이후로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최선을 다할뿐 기대에 못 미친다고 스스로 자학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그래서 "그냥 나쁜 여자로 찍히는 게 낫다."는게 저자와의 생각과 합쳐진다내가 하고 싶은 일에 협조를 구하고 동반자로서의 가족 구성원들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내 꿈과를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의 상실은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절망으로 나를 덮칠테니까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나로서 현실감있는 적당한 조언을 찾았다. "스스로 피곤하게 만드는 살림 콤플렉스를 극복하라"는 것이다직장에서 돌아와서 집안이 어수선할 꼴을 스스로 못 보는 나는 쓸고 닦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다. 이런 내가 피곤하면서도 마치 해야할 일을 해놓지 않은것 같은 찜찜함에 몸을 혹사한다. ~ 이래서 삶이 더 고달픈거였구나...피곤하니 자꾸 짜증만 늘었던것 같다. 적당히 깔끔 떨면서 조금은 털털하게 여유를 부리고 싶다. 자기네 집이 친구네 집에 비해 너무 지저분해서 엄마한테 집안 좀 치우며 살자고 했던 가수 이적에게 어머니 왈, "먼지에게 시간을 줘라." 센스있는 여유로움이 가슴에 콱 박힌 말 이었다


지금의 생활을 확 엎는건 아니다. 내 꿈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릴지 몰라도 지금의 시간을 쪼개서 하고싶은 일을...아주 조금씩이라도 쉬지 않으려 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하고싶다. 진부한지 몰라도 나의 꿈은, 행복한 내 가정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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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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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럴 리가..." 
와타나베의 짧은 중얼거림, 그거였다. 나쓰미란 존재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내 입에서도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슌스케 옆에 어떻게 그녀가 있을수 있는지 말이다. 슌스케에게 "제대로 사죄하고 싶다면 죽어", 라고 외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사랑은 어떤 가정이나 명백한 근거에도 결코 유린되어지지 않는 지독한 무엇인가보다. 강간, 슌스케는 죄인이고 나쓰미는 피해자인데 세상은 그런 명백함을 멋대로 헤집어버린다. 나쓰미는 끊임없이 세상속에서 벗겨지고 우롱당하며 몰려가는데 정작 슌스케에 대해 세상은 너무도 관대했다. 



"만약에  아드님이 강간 사건 같은 걸 일으킨다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그런 바보 같은 일로 아들의 일생을 망친다고 생각하면 엄청 실망하겠지. 부모로서는."
"실망한다....으음, 그럼 만약 따님이라면?"
"딸? 딸이 강간당한다고?  그런 놈은 때려죽여야지."


난 그렇게 말하는  너를 때려주고 싶다. 왜냐구, 왜 그렇게 달라야 하는건데!! 암튼,
이렇게 때려죽이고 싶은 세상의 한 가운데서 홀로 견뎌야하는 나쓰미는 오히려 강한 여자였다. 슌스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확하게 말해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아픈 기억을 쑤시며 그날의 사건이 그녀의 잘못인양 몰아부쳐도, 그녀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연애가 더럽혀질까봐 멀리하는 친구들의 시선에도, 그녀의 과거를 아는 순간 돌변하는 그녀의 남자들에게조차도 그녀는 꺽이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다. 그러나 슌스케가 그녀앞에 무릎 꿇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사랑을 예감하고 이별을 확신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순스케를 통해 상처를 치유받기엔 나쓰미,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함께 불행해지기로 약속"한 것이 깨어질 것같은, 행복해 질것 같은 예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는 ’안녕’을 말하고 떠난다. 그러나 아직 슬프지 않다. 슬픔을 준비하고 싶지 않다. 오자키는 분명히 그녀를 찾아낼거야, 라는 생각때문에. 바램때문에. "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던 인생과 가나코씨를 만난 인생 중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 , 라고 와타나베가 물었기때문에. 오자키의 눈동자가 하는 대답을 들었기때문에. 
 

이야기 소재 자체가 워낙 돌발적이고 무거워서 자칫하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얘기로 흐를수 있었는데도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사회적 문제에 대한  요시다 슈이치의 진중한 고찰에서 비롯한 것이라 여겨진다. 역경, 시련, 불행이란 단어로도 비견되지 않을만큼 지독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한 여자와 그녀의 불행의 시작이었으면서, 그녀를 보둠으려는 한 남자의 또 다른 지독스러움,  지독한 뙤악볕 아래서도 역하지 않은 땀냄새를 풍기는 사랑으로 남게 한 사랑, 그래...이건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랑 얘기이며, 요시다 슈이치만이 쓸 수 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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