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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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불매운동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신장 면화'에 대한 내용.

1980년대 신장은 곡물을 자급자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토지가 면화 재배에 이용되었다. 1978년에는 5만 5천 톤의 면화를 생산했으며, 20년 후에는 수확량이 150만 톤에 이르렀다. 1990년과 1997년 사이에만 면화 재배 면적이 두 배로 늘어났다. 1990년 이래 개발프로그램 하에서 다수의 수리사업 계획이 면화재배를 위한 토지개간을 지원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또한 서부대개발 계획에서는 이전의 개간으로 인해 생겨난 환경파괴를 완화하려 함으로써 면화생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그 결과, 신장은 1990년대 초반 중국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면화 생산지가 되었으며, 2001년에 이르러서 전국 면화 재배의 25%를 차지했다. 2005년 175만 톤에 달하는 신장의 면화 수확은 농촌 소득의 40%를, 일부 지역에서는 70%의 비율을 차지했다. 면화가 신장의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 P417

2004년 시장이 소위 ‘쳔연 색상’ 면화-흰색 이외의 빛깔로 성장하도록 유전적으로 조작된 면화-의 세계 총수확량 중 16퍼센트를 생산했기 때문에 신장의 개발 구호 일흑일백 중 ‘일백(一白)’이라는 구호는 더 이상 정확하지 않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따르면, 유전자 조작 면화와 일반 면화가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함께 재배되는 지역에서는 ‘쳔연 색상’ 면화가 때때로 다른 면화와 수정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붉은 반점이 있는 흰색 면화나 다른 예기치 못한 혼색(混色)이 발생한다고 한다. - P418

신장 면화 중 약 40%는 병단의 농장에서 재배되었는데 면화 재배가 언제나 이윤을 남기는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말 국제적인 면화 공급 과잉으로 인해 신장 면화는 중국 동부의 방적회사가 해외에서 수입한 면화보다 비쌌다. 그 결과, 막대한 재고가 쌓였다. 위구르족 농부와 한족 농부 모두 손해를 보면서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고 불평했다. 청대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징발하는 면화는 오늘날 신장에서 토지 개간과 이주정책의 핵심이었으며, 경제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도 수행했다. - P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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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한, 당 청 등 과거 왕조들이 실시했던 ‘둔전 정책’을 부활시켰다. 공산당 정치국의 류샤오치가 부활시킬 것을 제안한 ‘둔전 정책’이란 국경을 따라 군대를 주둔(이른바 ‘군둔(軍屯)‘)시키고 그들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개간 등 농업도 병행한 것이다. 1949년 이후 신장 최초의 한족들은 옛 국민당 정부가 신장에 남겨 둔 8만 명의 전 국민당 주둔군을 비롯한 약 10만 3천 여명에 달하는 퇴역 군인들이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이들은 농업, 목축업, 토목공사, 산업 및 광산업에 동원되었다. 1954년 중국 정부는 이들을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產建設兵團이하 병단. 영어로 PCC(Production-Construction Military Corps.)으로 재조직했다. 병단은“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곡괭이를”이라는 표어처럼 생산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한편, 토지 개간과 상주를 촉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병단은 수십 만 명의 한족 이주민들을 흡수했으며, 죄수들을 서쪽으로 추방하는 청의 관행을 이어받아 수만 명의 수형자들이 신장으로 보내졌다. 한족 이주민들의 상당수는 상하이에서 이주해왔다. 그 이유로 상하이 인구가 과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50년 국민당 정권이 상하이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상하이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떠난 측면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간쑤-신장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제1야전군을 설득해서 간쑤-신장 경계에 있는 위먼(玉門) 유전에서 상하이로 직접 석유를 보내게 하는 등 상하이-신장 간 특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병단의 모집원들은 상하이의 기술인력들과 열정적인 젋은이들을 신장으로 가도록 설득하기 위해 지역 정부들과 협력했다. 상하이와의 특별한 관계의 일환으로 신장 역시 비교적 높은 비율의 상하이산 공산품을 구매했으며, 생산물을 중국에서 가장 크고 도회적인 상하이에 팔기 위해 노력했다.(구소영 2020: 48-49; (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1950년대~1970년대 신장에서 온 대다수의 한족 이주자들은 병단에 의해 다시 정착하고 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 유입으로 인해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병단의 인구는 20만 명에서 30만 명, 1966년에는 6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75년 보고서는 45만 명의 도시 청년들이 신장에 정착한 결과, 신장은 마오쩌둥 시기 하방(下放) 계획의 가장 큰 목적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병단에 의해 신도시인 스허쯔(石河子)가 건설되었고, 본부가 되었다(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병단은 석유 공업 등 여러 공업을 담당하는 동시에 농업에도 종사했다. 그 결과 신장의 경작지 면적도 크게 증가했다. 1910년대 양쩡신 정권은 64만 8000핵타르에서 70만 1000핵타르 정도의 농지가 있다고 등록했고, 1949년경에는 대략 100만에서 120만 헥타르에 이르는 경작지가 있었다. 하지만 병단 창설된 후인 1953년에 경작지는 7만7183헥타르에서 1961년 82만 265헥타르로 증가했다. 지도에 따르면 카슈가르의 오아시스는 1942년과 1962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다. 대부분의 새 농경지는 병단이 가장 많이 배치된 톈산 북쪽 초원에서 개척되었다. 1949년 이전에 대략 26만 9천 헥타르의 토지가 일리 구(區)에 등록되었으나, 1961년에 이르러 약 70만 1천 헥타르가 경작되었다(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이러한 중국 정부의 노력으로 1953년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구조사에서 6%에 불과하던 한족의 인구는 1964년 33%를 기록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40%, 2015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44.69%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한족 인구의 급격한 성장은 1950~1960년대 국가가 실시한 캠페인에 따라 정부 동원의 비자발적인 이주가 꾸준히 지속된 결과이다. 특히, 1960년 란저우와 하미 간 철도, 1962년에는 란저우와 우루무치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 많은 한족들이 신장에 진입하였다. 이는 신장의 산업 중심지에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신장의 중심지는 주로 남부의 카슈가르와 북서부의 일리였는데, 1949년 이후 우루무치와 스허지 등 신장 북부가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곳의 인구는 남부의 인구를 훨씬 초과했고, 증가하는 인구 압력은 물 부족과 같은 새로운 문제를 초래했다.(구소영 2020: 49-50; 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쓰고 있는 박사논문의 일부입니다. 참고로 이 신장생산건설병단은 최근에 미국 정부에 의해 신장위구르족 인권 침해 집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단 사령관 등 핵심들이 경제 재재를 당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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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 2
로만 로스돌스키 지음, 정성진 옮김 / 백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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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로스돌스키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형성2 드디어 다 읽었다.기분이 좋다.마지막 역자 후기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하다가 소련과 나치의 탄압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온 로스돌스키의 이력과 그가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된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을 지키고자 맑스 <자본론> 이전에 쓴 책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해설하는 이 책을 썼다는 내용을 보면서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를 읽는다. 서문과 1,2장을 발제해야 하니 서둘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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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오늘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에자르트 샤퍼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 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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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오늘

지난 목요일부터 지금 새벽까지 다 읽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편의상 포이어바흐로 줄임.)>.

자본론을 읽어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포이어바흐> 69쪽에 나온 구절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을 운동시키는 것은 모두 두뇌를 통과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 두뇌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취하는가 하는 것은 주로 상황에 달려 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이 일찍이 1848년에 라인지방에서 한 것처럼 단순히 기계를 파괴하지 않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적 기계공장과 화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변화된 상황에 따라 노동자 계급의 저항이 과거와 달라질 지는 몰라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갇혀있는 이상, 저항은 계속될 수 있다는 걸 암시한 것 같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가 쓴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가 있는데, 3번째 테제(86쪽)도 인상적이다.

˝사태와 교육의 변화에 관한 유물론적 학설은 사태가 인간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 학설은 사회를 두 부분-그 중 하나는 사회를 넘어서 있다.-으로 나누어야만 한다.

사태의 변경과 인간 활동의 변경 또는 자기 변화의 일치는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태를 따라가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이론을 탐구해야 그 이론이 현실성을 유지할 있는 ˝실천 철학˝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요즘 투쟁을 잘하기 위해서,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이론이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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