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징어 게임〉 ─ 자본주의 게임, 절망과 희망
https://wspaper.org/m/26442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 역대 최대 흥행작이 됐다. 전 세계 수억 명이 불과 3주 만에 이 시리즈를 봤다.

대본 작업은 원래 2008년 경제 공황 중에 시작됐지만 이 드라마는 거의 10년 동안 제작사를 구하지 못했다.

〈오징어 게임〉은 생존 게임 장르의 드라마로, 자본주의와 경쟁, 계급을 다루고 있다.

부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456억 원의 상금을 노리고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다. 그런데 탈락의 대가는 죽음이고, 부자들이 게임의 진짜 주인이다.

물론, 참가자의 과반수가 원한다면 게임을 중단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나 처지가 절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실상 선택권은 없는 셈이다.

노동자 성기훈(이정재 분), 탈북민 강새벽(정호영 분), 이주노동자 압둘 알리(아누팜 트리파티 분)도 ‘오징어 게임’을 그만뒀다가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불공정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로요. 불평등이 심해지고 경쟁이 심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계의 가장자리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전 세계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이 시리즈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곤경에 어떻게든 연결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황동혁 감독)

주인공 성기훈은 극중 “드래곤 모터스” 노조의 점거파업(2009년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과 매우 닮았다)에 참가했던 노동자다. 점거파업 도중 희망퇴직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쌍용차 파업에서 그랬던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 싸운 해고자들보다 죄책감과 고립감 등 정신적 고통이 더 심했다고 한다. 자살하거나 돌연사한 쌍용차 노동자의 다수가 이들이었다. 한 아버지는 선처해 준다는 말만 믿고 아들을 설득해 점거파업을 그만두게 했는데, 나중에 희망퇴직을 한 아들을 보고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10월 12일자 〈중앙일보〉 칼럼 ‘목숨 걸고 핥은 달고나…456번 성기훈씨, 행복합니까?‘는 〈오징어 게임〉의 화제성을 이용하는 데 급급했다. 노동계급의 고통과 정서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없다. 그러면 풍자가 아니라 조롱이 된다.

아쉽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이 위대하고 가슴 아픈 노동자 투쟁과 같은, 야만에 맞선 집단적이고 계급적인 도전을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 무엇을 얻어갈지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시청자 개인의 세계관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깡패들

성기훈의 팀과 대립하는 팀은 깡패(조직 폭력배)가 주축인 팀이다.

전문가(범죄 조직원)가 거기 있고 선동하고 지휘한다. 주최측은 그걸 계산하고 리얼리티 TV쇼에서 흔히 그렇게 하듯이 이용한다(주최측 대사에도 나온다).

주최측은 갈등을 유발하고 조작한다. 반면, 성기훈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조직한다.

깡패, 범죄 조직의 폭력배는 자본주의적 존재다.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든 체제 유지에 기능한다. 역사적으로 이들은 노조와 파업을 파괴하고 운동을 공격하면서 성장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마피아, 야쿠자, 삼합회, 깡패가 전쟁 말기에 부상한 좌파와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데 동원됐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이 크고 강력하면 범죄 조직(마피아)은 감히 정면에서 그 운동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운동의 지도자를 암살해도 장례식은 곧 마피아 반대 시위로 변했다. 오히려 하층계급 출신의 일부 조직원이 운동에 가담했을 정도다.

파리대왕

생존 게임 장르의 기원은 소설 《파리대왕》(195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이 섬과 야생에서 생존 경쟁을 벌인다는 설정은 〈배틀로얄〉(2000)과 〈헝거게임〉(2012)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TV쇼도 갇힌 공간에서 진행되는데 특히 섬을 배경으로 할 때가 많다.

《파리대왕》은 금세 청소년 필독서가 되었고 후에 작가 윌리엄 골딩은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관심이 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썼고, 말했다.

“우리가 깨끗한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망쳐 놓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벌이 꿀을 생산하는 것처럼 인간은 악을 생산한다.

“나는 언제나 나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본래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의 전제는 인간이란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두면 짐승이나 야만인처럼 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거짓말과 협잡, 배신과 편 가르기, 적대감 유발하기 등을 제작진이 유도하고 조작했다는 폭로들이 나왔다.

과연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인가?

흔하고 지배적인 입장은 사실 지배자들의 입장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 본성

환경 파괴, 기후 위기, 여성 차별, 인종차별, 파시즘, 불평등, 전쟁, 학대, 범죄, 실업, 가난, 부패, 독재, 자본주의에 대한 대답은 하나다. “인간 본성이 원래 그래.”

본성이 문제면 변화의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변할 수 없어’, ‘세상도 변할 수 없어.’ 따라서 ‘우리의 통제(사실은 지배)를 받아야 해.’

세상 모든 지배계급에게 아름다운 이론 아닌가.

그러나 자본가의 공장과 조선소와 발전소는 노동자들이 협동심을 발휘하는 덕분에 돌아간다. 노동자들이 서로의 뒤를 봐주는 덕분에 죽음의 공장에서도 산재가 덜 나온다. 간호사들이 스스로를 혹사해 팬데믹에서 우리를 구한 게 그들의 이기심 때문일까? 부모가 자녀를 다 버리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자본주의가 하루라도 굴러갈 수 있을까?

1963년 이래 700여 건의 재난 현장을 연구한 결과(델라웨어대학 재난연구센터, 2006)에 따르면, 재난이 벌어질 때 살인·강도·강간 등 범죄율은 감소하고 사람들이 물품과 서비스를 분배하는 등 이타적 행동은 증가했다.

팬데믹 재난 상황에도 지난해에 거의 모든 개인 기부가 늘었다. 자선단체가 모은 기부액은 사상 최대이거나 평년보다 늘었다. 서울시가 모은 개인 기부액도 5배나 늘었다. 그에 비해 기업의 기부액은 1.4배밖에 늘지 않았다. 심지어 액수 자체도 개인 기부액이 더 증가했다.

자본주의의 일상은 이렇듯 절망과 희망이 뒤섞여 있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과 아픔, 울분과 슬픔을 갚을 길은 오직 자본주의를 끝장내는 혁명 외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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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과 불평등 ─ 왜 청년들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가?
https://wspaper.org/m/26430

이 글은 10월 14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주최 온라인 토론회 ‘청년과 불평등 — 왜 청년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가?’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보강한 것이다.

경제 위기 이전인 2007년 전 세계 청년 실업자는 6900만 명이었으나 2009년 7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 경제 위기 여파로 2011년 전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저항이 벌어졌다. 튀니지에서 가난한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시작된 튀니지 혁명이 이집트 혁명으로 이어졌고, 아랍 전역의 혁명으로 확산됐다. 미국에서도 청년들이 일자리, 교육, 의료를 요구하며 월가를 점거했고, 스페인에서도 청년들이 주축이 돼 ‘분노한 사람들’ 광장 점거 운동이 벌어졌다. 이 세계적 저항을 촉발한 중요한 불만이 바로 청년층의 실업과 빈곤이었다.

역동적으로 성장해 오던 한국 자본주의도 1997년과 2008년에 큰 위기를 겪었고, 저성장이 지속되고 있다. 1970~1980년대 한국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노동력을 빨아들이던 시절과 달리, 이제는 경제의 활력이 저하되고 일자리 창출도 줄어들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고용 감소는 생산성 증가의 결과이기도 하다. 10억 원 재화를 생산할 때 유발되는 취업자 수(취업유발계수)는 2000년 평균 26명에서 2019년에는 10명으로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런 주기적 경제 위기와 실업 확대는 자본주의에 붙박여 있는 풍토병이다. 그런데 역대 우파 정부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을 대놓고 비난하며 청년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오히려 청년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공공기관과 지방 공기업은 2020년에 신규 채용이 크게 줄었다(6000명 감소). 노동 인력이 넘쳐나서 그럴까? 전혀 아니다. 공무원들은 인력 부족으로 과로사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인천에서 보건소 공무원이 자살했는데 그는 일주일에 70시간씩 일했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은 한 달에 초과근무만 100시간씩 했다.

심화된 불평등

평범한 청년들은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특히 아무리 ‘노오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격차, 불평등 때문에 절망한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은 빠르게 악화했다.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가 내놓은 2016년 통계를 보면, 상위 10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43퍼센트를, 전체 부의 65.7퍼센트를 차지했다. 부와 특권은 상속으로 대물림된다. 최근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30대 하위 20퍼센트의 자산이 2000만 원인인데 상위 20퍼센트는 8억 원이나 됐다.

불평등은 특정 유형의 자본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결과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착취 체제 때문에 한쪽에는 부가 쌓이고 다른 한쪽에는 빈곤이 쌓인다. 이윤율 회복을 위해 취해진 위기 대응 조처들(부자 감세, 규제 완화, 복지 삭감 등)이 빈부격차를 늘린 것만 봐도 자본주의 논리가 불평등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부 언론은 MZ세대가 기존 노동조합에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단결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종종 보도한다. 얼마 전 항의 행동을 벌인 스타벅스 노동자들이 민주노총과 거리를 둔 것이 그 사례로 언급된다.

하지만 노동조합에 대한 MZ세대의 태도는 일면적이고 않고 불균등하다. 많은 청년이 박근혜 퇴진 운동 이후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일부 청년이 기존 노동조합에 대해 불신을 드러낸 일은 국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여러 번 있었다. 예컨대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서 그런 경향이 강했다.

사실 청년들의 불신은 기존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이 취한 부문주의적 태도나 배신 등에 대한 반발 성격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타협과 외면은 결국 기존 노동자들의 조건에도 하락 압박을 가하고, 청년과 노동조합 사이에 반목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둘 모두에게 해롭다.

또한, 지난 몇 년 사이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 주요 세력들이 청년층이 민감하게 여긴 쟁점들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청년들이 크게 분노한 조국 사태에서 민주노총은 침묵했다.

노동조합이 청년 문제를 중시하고 이들을 조직하려 애쓰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이냐 아니냐 같은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년들의 정당한 분노를 적극 지지하고, 이들의 저항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속에서 신임을 얻는 것이다. 청년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러 쟁점과 운동, 예컨대 기후 운동이나 여러 차별 반대 운동에도 노동조합이 자신의 조합원에게 참가를 적극 호소하는 게 필요하다.

노동조합의 부문주의적인 성격에 맞서 논쟁하고 토론하며 노동조합이 청년 문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혁명적 좌파의 몫일 것이다.

자본주의에 맞선 대안

오늘날 평범한 청년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하고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실업과 일자리 불안정, 그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 심화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이 물려받은 지구는 심각한 기후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본주의의 우선순위에 도전해야 한다. 부를 복지 확대에 쓰도록 요구하고, 군비 증강 대신 괜찮은 일자리를 마련하라고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본의 논리에 맞서는 광범한 투쟁이 필요하다. 기후 위기도 자본주의와 다른 근본적인 변화 없이 저지할 수 없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기후 운동에 나선 청년들은 급진화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이런 저항이 성공하려면 특정 세대, 특정 부문만 참여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청년과 중장년 노동계급이 단결해야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한편, 노동자주의 경향이 있는 일부 좌파는 소위 ‘상위권’ 대학 청년들의 불만과 저항을 부잣집 엘리트의 보수적 행동쯤으로 싸잡아 취급하기도 한다. 조국 사태 때 이런 문제가 얼핏 드러났다. 그러면서 ‘상위권’ 대학의 청년이 아니라 지방대 출신의 청년이 급진적 잠재력이 더 크다며 이 둘을 대립시킨다.

그러나 ‘상위권’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 모두 상층 계급 출신도 아니고, 부모의 계급이나 의식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않은 학생은 특정 계급이라고 볼 수 없고, 종종 이데올로기와 사회 부조리에 민감하다. ‘상위권’ 대학 출신 청년 중에도 급진화하고 노동계급의 규율을 받아들이면서 노동계급의 운동에 헌신하게 된 사람도 많다.

이처럼 출신 대학이나 사는 곳 등을 기준으로 청년들을 구분해 서로 대립시키는 관점은 투쟁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해롭다.

청년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려면 국가가 재원을 쏟아부어 청년 일자리와 복지를 늘리라고 주장해야 하고, 이런 개혁이 가능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저항 속에서 청년과 노동자들이 단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떤 방식의 복지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지를 충분히 늘리라고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다.

혁명적 좌파는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자본주의와 연결시키고, 그들의 반감과 저항이 반자본주의로 향하도록 애써야 한다.

청년·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청중 토론)

“저는 노동자연대TV를 애청하는 대학생입니다. 청년의 주거권에 대해서 말하고 싶습니다.

청년들의 주거가 경제 위기와 함께 매우 열악해져 왔습니다. 청년의 평균 주거 면적은 가뜩이나 비좁은데 지난 10년 동안 2평이나 줄었습니다[2008년 평균 약 11평에서 2018년 8.6평]. 청년의 전체 소득에서 임대료 비중은 지난 수년간 계속 올랐고, 최저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택에 사는 청년 가구가 전체 평균의 2배에 달합니다.

공공임대주택이 대안이 돼야겠지만, 현재 공공임대주택은 물량이 너무 적고, 면적도 코딱지 만합니다. 위치나 경쟁률 등을 따져 보면, 사실상 시장의 여느 부동산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다시 살아나는 노동자 투쟁이 공정 담론을 넘어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노란 조끼 운동은 극심한 계급적 불만이 대중 항쟁으로 얼마든지 빠르게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새롭게 투쟁에 뛰어드는 청년과 노동자들의 쟁점을 살펴서, 운동이 벌어졌을 때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 20대 대학생

“저는 얼마 전까지 중소기업 청년 노동자였다가 지금은 실업자입니다.

청년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개인의 탓이 아닙니다. 개별적 노력이나 스펙 쌓기를 통해서 일부는 좀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승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청년 실업이나, 소외,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2년 동안 일하면 1300만원 목돈을 더 얹어 주는 정부의 청년 정책인 청년내일채용공제를 했습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그간 적립된 돈을 도로 가져가서 [2년 동안] 꼼짝없이 노예처럼 일해야 했습니다. 청년내일채용공제를 빌미로 사장은 저임금을 정당화했습니다.

청년의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저는 회사에 다니면서 사장들에게 괴롭힘 당한 뒤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퇴사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안 증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인들 중에서도 직장 스트레스, 취업 준비, 주거 문제 등으로 항불안제나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상당합니다.

오죽하면 청년 노동자인 우울증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같은 부류의 책이 청년층에서 인기를 엄청 끌었겠습니까?

정부의 청년 정책에만 기댄다면 이런 상황은 되풀이될 것입니다. 청년 불평등 문제는 정규직, 비정규직, 청년, 기성세대가 단결한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 중소기업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청년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 20대 청년입니다. 청년들의 자살과 자본주의에 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최근 발표된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한국은 자살률이 높은데 그중에서도 20대 자살률 증가 폭이 높습니다. 특히, 20대 여성 자살률의 증가 폭이 매우 큽니다. 이는 코로나 이후 타격을 받은 음식숙박업, 도소매 서비스업, 교육 서비스업에 많이 종사하던 2030 여성들의 실업과 큰 연관이 있습니다.

엥겔스 말을 인용하자면, 청년들은 “어떤 도피 수단도 없는 처참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업에 돈을 쏟아붓고 있죠. 청년들의 자살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에게 지원과 복지를 늘리라고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 자체가 경제 위기를 내재하고 있고 코로나 같은 심각한 전염병을 만들면서 사람들을 빈곤과 고립으로 내몰고 있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혁명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감을 얻고 삶의 희망을 느꼈던 역사도 언급하면서 투쟁을 통해 함께 자본주의를 끝장내자고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 최근 카페에서 일하다 해고된 청년

이 밖에도 노동계급 기성세대를 옹호하며 세대가 아니라 계급적 단결이 중요하다는 의견, 이재명과 심상정의 청년 정책의 의의와 한계, 문재인 정부가 키운 교육 불평등 폭로 등 여러 발언이 있었다. 노동자연대TV 유튜브에서 생생한 청중 토론을 포함한 토론회 전체 영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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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공동대표 기고] 팬데믹과 기후 위기: 노동자들이 불평등 확대와 상시적 재난에 맞서야
https://wspaper.org/m/26444

지금까지 집회에서 코로나 집단감염이 일어난 단 한 건, 지난해 8.15 태극기 집회 560명이 유일하다. 이 집회는 사랑제일교회 확진자들이 참여했고, 마스크를 안 쓰는 등 방역수칙을 깡그리 무시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그리고 이 500여 명이 집회에서 감염된 사람들의 전부다.

민주노총의 어떤 집회에서도 감염자가 없었고 다른 어떤 집회에서도 감염자가 없었다. 태극기 집회가 유일한 사례인데 이렇게 쳐도 집회 감염자는 전체 감염자 34만여 명의 0.16퍼센트다. 그러나 정부는 모든 집회에 금지 조처를 내렸다.

설사 집회에서 코로나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치자. 1908년 뉴욕의 여성 노동자들이 왜 굶고 있는데 파업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말이 있다. “우리는 일해도 굶고, 파업을 해도 굶는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코로나에 더 위험하다. 올해 7월 가장 코로나가 가장 극심했을 때 서울 코로나 감염자의 35퍼센트가 직장 감염자였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5월 취임 4년 연설문에서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말한 바 있다. 백신 접종이 끝나면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예견된 바이러스 변이 때문에 백신의 효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60~80퍼센트까지 떨어지는 것이 밝혀졌다. 전 국민의 80퍼센트가 백신 접종을 완료해도 효율이 80퍼센트이니 64퍼센트밖에 면역이 없다. 집단면역은 불가능한 것이다. 위드 코로나의 대표격인 영국에서는 매일 100~2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지금 시기는 ‘터널의 끝’이 아니다. 처칠을 인용하자면, “끝이 아니며 ‘끝의 시작’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시작의 끝’일 뿐이다”.

인구의 70~80퍼센트가 접종을 완료하더라도 진짜 일상으로의 복귀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주기적 급증과 사망자 행렬도 계속될 것이다.

반복될 팬데믹과 기후위기

그런데 더욱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코로나 팬데믹이 마지막 팬데믹이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예상한 팬데믹 후보 목록 중 코로나19는 맨 마지막에 이름도 없는 8번째 질병(“질병 X”)이었다.

많은 질병학자들이 앞으로는 팬데믹 발생 주기가 더욱 짧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3년에 한 번씩 팬데믹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 학자도 있다.

문제는 팬데믹의 원인이다. 박쥐는 포유동물인데도 바이러스를 자신의 몸에 많이 지니고 있다. 포유동물로서 날아야 하니 신진대사율을 높여야 하고, 그래서 체온이 40도 정도로 높다. 많은 바이러스와 함께 공생할 수 있게 된 이유다.

원래 박쥐는 인간과 만날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거대 농축산기업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전 세계에서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것,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 공장식 농장을 확대시키는 것과 비례해, 박쥐와 인간이 맞닥뜨리게 될 기회가 많아졌다. 인간이 키우는 가축은 밀집·밀접·밀폐된 ‘3밀 상태’에 있고, 이 속에서 바이러스는 최적의 변이와 번식의 기회를 갖게 된다.

자본주의적 공장식 축산업은 이미 신종플루와 조류독감으로 팬데믹의 근원이 될 능력을 보여 준 바 있다.

그런데 화석연료 기업과 더불어 거대 농축산기업들이 바로 기후 위기를 불러온 또 하나의 원인이기도 하다.

상시적 재난의 시대

기후 재난이 궁극적으로 인류의 멸종을 불러온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혜성 충돌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인류가 모두 한꺼번에 사망하는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호주와 유럽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 규모가 커진 태풍과 허리케인, 심각해진 황사와 대기오염, 기후 위기로 인한 감염병 증가, 식량 위기 등 여러 기상 이변과 재난들이 늘어나고 희생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기후 위기는 자연 재난으로만 오는 것도 아니다. 팬데믹처럼 경제 위기로, 그리고 나아가 군사적 갈등 심화로 발전해 사회적 재난, 군사적 분쟁으로 찾아올 것이다.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의 팬데믹 대응이 철저히 무능했던 것처럼 앞으로의 기후 재난에 대해서도 이들은 모든 것을 해결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코로나19, 기후 재난으로 가장 고통을 당할 사람들이 바로 노동자이고 그것을 진정으로 해결할 힘을 갖고 있는 것도 노동자들이다.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전 인류를 재난에서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나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간 추천]

코로나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

마이크 데이비스,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이클 로버츠, 우석균, 장호종 외 지음, 장호종 엮음, 2020년 3월 31일, 208쪽, 12,000원, 책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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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김재원 > [마이리뷰] 미국의 이라크 전쟁

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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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이십일년 시월 십팔일 ::: 2021 10 18 :::


      아프다는 것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593

사람은 누구나 몸이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이 병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몸이 아파서 몸을 자유롭게 가눌 수 없다면 처량하다. 한때는 맘껏 걷고 달렸는데 하루아침에 그럴 수 없다면 얼마나 절망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은 사람에게 다른 시야를 열어준다. 『아픈 몸을 살다』를 쓴 아서 프랭크는 질병이 삶을 전체로서 이해할 수 있게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삶을 넓은 시각으로 조망해내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앓는 질병의 정체를 모른다면 이런 통찰은 어렵다.
아픔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병명을 부를 수 없다면 질병을 받아들일 수도, 삶을 조망하기도 어렵다. 나는 간혹 희귀한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자기 병명을 알아냈을 때 슬픔 가운데도 일종의 안도감을 보여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철학자 니체는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었다. 두통을 포함한 만성적 통증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병을 명명했다.
“나는 내 통증에 이름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개‘라고 부른다.”
통증이 충직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눈에 띄는 개의 특질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병명을 아는 것은 나름의 수확이다. 병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면 병의 노예가 된다. 하지만 내가 질병의 주인으로서 병을 명명할 수 있다면 호령할 수도 있다. 병을 내칠 힘이 날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는 <병든 바쿠스>를 그렸다. 바쿠스의 안색은 좋지 않다. 입술과 눈두덩은 푸르스름하고 볼은 창백하다. 그는 나뭇잎 화환을 머리에 두르고 포도송이를 들고 있다. 바쿠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원래 넘치는 생명력으로 쾌락을 누리는 신이어야 맞지만, 카라바조의 바쿠스는 아픈 신이다. 아프지만 그는 미소 짓고 있다. 심지어 고개를 살짝 틀어 감상자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바쿠스는 화가의 자화상이다. 고아였던 카라바조는 밀라노에서 미술을 배우고 로마에 정착했다. 스물두 살에 화가는 심각한 병이 들었다. 말라리아와 간 질환을 앓았다. 그는 극빈자 구호 병원에 입원했고 이 무렵 <병든 바쿠스>를 제작했다. 아픈 자신을 거울에 비추고 관찰하여 그렸다. 그는 병을 이겨내리라는 걸 알았을까? 다행히 병을 이겼다. 하지만 다혈질적인 기질 때문에 걸핏하면 싸움에 휘말리면서 도망자로 살게 됐다. 그런데도 재능은 특출 나서 그림 주문은 끊이지 않았다. 바로크 화가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화가는 거의 없었다.
카라바조는 훗날 자신의 무절제를 후회했지만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했다. 아깝게도 그는 3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어쩌면 그는 잠시 병을 불러 세운 뒤 죽음을 미뤘던 것일지 모른다. 결국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병의 노예로 살진 않았다. 그는 삶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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