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는 한, 당 청 등 과거 왕조들이 실시했던 ‘둔전 정책’을 부활시켰다. 공산당 정치국의 류샤오치가 부활시킬 것을 제안한 ‘둔전 정책’이란 국경을 따라 군대를 주둔(이른바 ‘군둔(軍屯)‘)시키고 그들 스스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개간 등 농업도 병행한 것이다. 1949년 이후 신장 최초의 한족들은 옛 국민당 정부가 신장에 남겨 둔 8만 명의 전 국민당 주둔군을 비롯한 약 10만 3천 여명에 달하는 퇴역 군인들이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이들은 농업, 목축업, 토목공사, 산업 및 광산업에 동원되었다. 1954년 중국 정부는 이들을 신장생산건설병단(新疆生產建設兵團이하 병단. 영어로 PCC(Production-Construction Military Corps.)으로 재조직했다. 병단은“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곡괭이를”이라는 표어처럼 생산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한편, 토지 개간과 상주를 촉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병단은 수십 만 명의 한족 이주민들을 흡수했으며, 죄수들을 서쪽으로 추방하는 청의 관행을 이어받아 수만 명의 수형자들이 신장으로 보내졌다. 한족 이주민들의 상당수는 상하이에서 이주해왔다. 그 이유로 상하이 인구가 과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950년 국민당 정권이 상하이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상하이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떠난 측면도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간쑤-신장 경계에 주둔하고 있던 제1야전군을 설득해서 간쑤-신장 경계에 있는 위먼(玉門) 유전에서 상하이로 직접 석유를 보내게 하는 등 상하이-신장 간 특수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병단의 모집원들은 상하이의 기술인력들과 열정적인 젋은이들을 신장으로 가도록 설득하기 위해 지역 정부들과 협력했다. 상하이와의 특별한 관계의 일환으로 신장 역시 비교적 높은 비율의 상하이산 공산품을 구매했으며, 생산물을 중국에서 가장 크고 도회적인 상하이에 팔기 위해 노력했다.(구소영 2020: 48-49; (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1950년대~1970년대 신장에서 온 대다수의 한족 이주자들은 병단에 의해 다시 정착하고 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구 유입으로 인해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병단의 인구는 20만 명에서 30만 명, 1966년에는 6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75년 보고서는 45만 명의 도시 청년들이 신장에 정착한 결과, 신장은 마오쩌둥 시기 하방(下放) 계획의 가장 큰 목적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병단에 의해 신도시인 스허쯔(石河子)가 건설되었고, 본부가 되었다(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병단은 석유 공업 등 여러 공업을 담당하는 동시에 농업에도 종사했다. 그 결과 신장의 경작지 면적도 크게 증가했다. 1910년대 양쩡신 정권은 64만 8000핵타르에서 70만 1000핵타르 정도의 농지가 있다고 등록했고, 1949년경에는 대략 100만에서 120만 헥타르에 이르는 경작지가 있었다. 하지만 병단 창설된 후인 1953년에 경작지는 7만7183헥타르에서 1961년 82만 265헥타르로 증가했다. 지도에 따르면 카슈가르의 오아시스는 1942년과 1962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다. 대부분의 새 농경지는 병단이 가장 많이 배치된 톈산 북쪽 초원에서 개척되었다. 1949년 이전에 대략 26만 9천 헥타르의 토지가 일리 구(區)에 등록되었으나, 1961년에 이르러 약 70만 1천 헥타르가 경작되었다(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이러한 중국 정부의 노력으로 1953년 신장위구르자치구 인구조사에서 6%에 불과하던 한족의 인구는 1964년 33%를 기록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40%, 2015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44.69%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한족 인구의 급격한 성장은 1950~1960년대 국가가 실시한 캠페인에 따라 정부 동원의 비자발적인 이주가 꾸준히 지속된 결과이다. 특히, 1960년 란저우와 하미 간 철도, 1962년에는 란저우와 우루무치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더 많은 한족들이 신장에 진입하였다. 이는 신장의 산업 중심지에 변화를 가져왔다. 역사적으로 신장의 중심지는 주로 남부의 카슈가르와 북서부의 일리였는데, 1949년 이후 우루무치와 스허지 등 신장 북부가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곳의 인구는 남부의 인구를 훨씬 초과했고, 증가하는 인구 압력은 물 부족과 같은 새로운 문제를 초래했다.(구소영 2020: 49-50; 밀워드 2013:336-397; Milward 2007:235-284)

쓰고 있는 박사논문의 일부입니다. 참고로 이 신장생산건설병단은 최근에 미국 정부에 의해 신장위구르족 인권 침해 집단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단 사령관 등 핵심들이 경제 재재를 당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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