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까레니나 하권을 읽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평 3권이 도착해서 레빈과 키티에게 안녕을 고하고 얼른 펼쳤는데. 100쪽까지도 나타샤는 나오지 않고..
(하긴 안나 까레니나에서도 안나는 100쪽을 훌쩍 넘겨서 나왔지)
(134쪽에서 나타샤 등장)

2019년의 마지막 책도 2020년의 첫 책도 전쟁과 평화.
2년에 걸쳐 마저 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ㅡ


오직 독일인만이 추상적 관념, 다시 말해 과학, 즉 완전한 진리에 대한 가상의 앎에 근거하여 자신만만해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인은 자신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리고 남자들에 대해서나 여자들에 대해서나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자신만만해한다. 영국인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잘 정비된 국가의 국민이고, 언제나 영국인으로서 행하는 모든 것이 명백하게 훌륭함을 안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만만해한다. 이탈리아인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자신과 타들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 자신만만해한다. 러시아인은 다름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점, 무언가를 충분히 안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자신만만해한다. ㅡ 전쟁과 평화 3, p.97
톨스토이의 전유럽 돌려까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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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문학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 비참한 상황을 읽는 고통이 결말의 카타르시스(가 존재하는 스토리라면)를 훨씬 능가하는지라..
피터 헬러의 <도그 스타>는 작가의 다른 책 <셀린>으로 미뤄 짐작컨대 문장이 아름다울 것이라 예상하고 읽어볼까 하고 손에 들었고 역시나 좋았던 아주 드문 케이스이고,










 

 

 

 

 

팟캐스트 등에서 여러 번 접한 매카시의 <로드>마저도 끌리긴 했지만 겁나서 보지 못했다.
문명의 종말이 온다면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은혜로운 무지 속에서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그래서 이 스테이션 일레븐도 설정은 매혹적이었지만
(문명이 끝났는데도 그 황폐한 세상에서 셰익스피어 극을 연기하며 떠돌아다니는 유랑극단이라니!)
종말문학 특유의 비참한 상황 묘사를 읽을 자신이 없어 도서관에서 자주 눈에 띄어도 집어들게 되지 않았는데..
최근에야 알고 듣기 시작한 팟캐스트 '책걸상'에 이 책이 나오는데
어찌나 책 소개를 귀가 솔깃하게 잘 하시던지(문명이 종말을 맞이하는 과정이 아주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 더 끌렸다)
읽어봐야겠다 맘먹고보니..
리디셀렉트에 있었다. ^^
얼른 다운받아 읽기 시작. 
오. 읽기 힘든 부분이 하나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참을 만하고. 밑줄도 제법 그었다. 마지막 희망적인 마무리까지..좋아좋아.  별 넷~
ㅡㅡㅡㅡㅡㅡㅡ

낮은 나뭇가지에선 이끼가 자라고,  삼나무 숲 사이로 한숨 소리같은 바람이 분다.


생각이 사라지는 별들처럼 하나둘씩 사라졌고, 걷고는 있지만 의식은 몽롱한 상태가 되어 중요한 것이라고는 혹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이 나무들과 이 길, 인간의 발자국과 말발굽의 대조적인 리듬, 달빛이 스러지며 천천히 어두워지다가 해가 떠오르는 풍경,더위 속애서 유령처럼 일렁이는 마차들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숲은 그늘에 잠겨 있지만, 아직도 하늘에는 좁은 복도처럼 빛이 길게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석양빛이 구름 사이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달빛이 유리에 반사돼 반짝일 뿐 다른 빛은 전혀 없었다. 황량하고 예상치 못했던 아름다움, 고요한 대도시, 인기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호수 위 하늘에 떠 있던 별들이 하나둘씩 구름의 장막 뒤로 숨고 있었다. 그는 공기 중에서 눈 냄새를 맡았다.
 
 
더 많은 걸 기억할수록 더 많은 걸 잃은 거라는 얘기예요.
 
 
자작나무 가지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렸고 초록 이파리들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왔다. 커스틴이 눈을 감자 눈꺼풀 밑에서 나뭇잎들의 검은 윤곽이 둥둥 떠다녔다.
 
 
그들이 뭘 보고 있든, 클라크는 차를 한 잔 마시지 않고는 그 뉴스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테러 공격이 벌어진 것일까? 그는 매점에서 얼 그레이를 한 잔 사서 천천히 우유를 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채 홍차에 우유를 섞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클라크는 지금 이 순간을 미리 그리워했다.
 
 
그는 아침을 먹으면서 소설을 즐겨 읽었다. 이제까지 클라크가 본 것 중에 가장 세련된 습관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낡아버린 주변 풍경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다. 햇빛이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진입로의 자갈 사이로 튀어 올라온 꽃들을 비췄고, 앞베란다는 이끼가 잔뜩 깔려 밝은 초록색으로 변했으며, 흰 꽃이 핀 관목에는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이 찬란한 세상, 커스틴은 갑자기 목이 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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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서늘한 봄날 늦은 오후였다.아몬드 나무들이 꽃을 활짝 피우고 크로커스들이 싹을 틔운 가운데, 북쪽 하늘은 이탈리아의 하늘 같은 색조를 띄어 대청색과 해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게는 적들보다 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쁘기까지 한 순간들, 해가 지는 광경이나 달이 떠오르는 모습, 또는 산꼭대기들에 쌓인 눈을 지켜보는 순간들도 있다.

-전자책으로 읽어 페이지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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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tted gun '매듭지어진 총' 으로도 알려져 있는 칼 프레드릭 로이터바르트의 <비폭력>.
전 세계에 에디션이 있지만 뉴욕 UN 사무국 앞의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ㅡ권이선, 모두의 미술 中 p. 62


젊은 사람들에게 차이와 다름을 폭력 없이 해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비폭력 프로젝트 파운데이션 '의 상징으로도 쓰이는 이 작품은 UN 전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으로부터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한 상징성을 지녔다는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작품이 제작된 데는 작가 자신의 개인적 사연도 크게 작용했다. 가수이자  반전 평화 운동가인 존 레논의 사망이 그 배경이다. <이매진>을 비롯해 많은 곡을 통해 비폭력과 평화를 옹호한 뮤지션 존 레논은 로이터바르트의 친구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당신은 내가 꿈꾸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랍니다.
But l am not the only one
언젠가 당신도 동참하길 바라요.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그러면 세상은 하나가 될 거예요.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ㅡ 존 레논, 이매진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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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는 자, 파시즘의 적 - 키르히너 중 

 

 

삶이 뜻대로 흐르지 않을 때, 볼 만한 그림이 나왔다. <포츠담 광장>은 키르히너가 전성기에 그린 대표작이다. ... 1914년 가을, 전쟁이 터진 직후였다. 그림도 폭발 직전이다. 붓질은 총탄처럼 내리꽂히고, 색채는 팽팽하게 보색대비를 이룬다. 건물은 붉고, 길바닥은 병든 강처럼 녹조 빛이다. 95

 

 

 

키르히너, 포츠담 광장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 두 명을 중심으로 중절모와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이 배회한다. 그들 사이에 접촉은 없다. 한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순간이다. 뒤편에는 교회, 기차역,상점이 자리를 잡고서 도시 노동자들을 길들인다. ...
광장의 중심은 여성들이 차지했다. 눈은 텅 비었고, 입술은 붉게 칠했으며, 원피스는 몸매를 드러낸다. 신발은 휘청거릴 만큼 높다. 두 여성 모두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썼고, 모자에는 가리개가 달려 있어 얼굴을 가릴 수 있다. 이 깃털 가리개 모자는 생김새 때문에 '새장'이라고 불렸다. '새장'은 원래 전쟁미망인이 쓰던 것이다. 베를린 경찰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부터 이 '새장'을 성 판매 여성이 챙겨야 할 필수품으로 규정해서, 성매매 행위를 가려내는 식별 기호로 삼았다. 성 노동자는 전쟁에서 잃은 남편 대신 새 남편을 찾는 구혼자처럼 변장되었다.

.... 경찰은 성병을 방지하고 성매매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새장' 착용 외에 여러 가지 규정을 두었다. .... 성 판매 여성에게 포츠담 광장은 금지 구역이었다. 그들은 배제당하고 구별되었는데, 19세기부터 발전한 우생학은 구별 짓기에 이상한 논리를 제공했다. 우생학은 성 노동자가 정신질환자, 장애인, 범죄자처럼 '나쁜 유전자'를 보유한 자로서 사회의 건강을 해친다고 가르쳤다.

... 키르히너에게 성 노동자는 낯설지 않았고, 자기와 구별되지 않았다. <포츠담 광장>은 도시의 풍경화이자 초상화이며, 일회용 휴지처럼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예전에 그렸던 매춘부들처럼 지금 우리 자신의 처지가 그렇군요. 한번 휙 써버리고 나면    

다음은 없어요. 그럼에도 나는 노력합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이 혼란에서 시대의 그림을 만들어내려고. 이것이야말로 나의 과제니까요." 95-99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은 한 손을 아예 그리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오른손은 잘려 나갔고, 피가 말라붙은 팔목은 창백한 녹색이다. 그는 팔목이 잘려나간 듯한 공포를 그렸다. 그림을 영영 못 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공포를 이기려면 공포 속으로 들어가보라고 했던가? 그림쟁이는 그림으로써 자기 두려움을 이겨낸다. 어깨 너머로 보이듯이, 그에게는 아직 못다 그린 그림과 탐구하고 싶은 모델이 있었다. 100-101

 

 

키르히너,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키르히너를 비롯하여 다리파 작가들은 모두 나치가 지목한 대표적인 '퇴폐미술가'였다. 1937년 6월30일 히틀러가 심복으로 삼은 괴벨스는 한 미술대학 교수에게 독일 공공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퇴폐적인' 미술품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키르히너의 작품은 639점이나 해당되었다. ...

'퇴폐미술'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매각된 작품도 많았다. 앞서 살펴본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외에도 <거리>가 그렇다. <거리>는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소장했었으나, 1937년 <퇴폐미술전>에서 <어떤 미술가 그룹>과 나란히 걸렸다가 독일을 떠나야 했다. 오늘날 소장처는 뉴욕 현대 미술관이다. 120

 

 

키르히너, 어떤 미술가 그룹 

 

 

 

 

나치가 보기에 그는 독일적이지 못한 여성상을 제시했으므로 문화 예술계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했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치는 왜 그토록 표현주의 미술가들을 적으로 내몰아야 했을까? 나치는 자기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아는 개인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키르히너처럼 표현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개인은 전체주의 체제 유지에 위험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파시즘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20-122

 

 

키르히너, 거리

 

 

 

 

 

키르히너가 남긴 마지막 유화 자화상을 보자. 한쪽 눈은 어둠에 덮여 안 보인다. 붓 쥔 손은 칼날처럼 헤집고 들어온 빛살에 붙잡혔다. 숨은그림찾기일까? 그는 벽에 걸린 양탄자에 갈고리 십자가, 즉 '하켄크로이츠'를 그려 넣었따. 그는 1930년만 하더라도 나치당 로고인 하켄크로이츠를 진보를 상징하는 마술적 기호라고 이해했다. 생명의 바퀴를 뜻하는 인도의 '스와스티카'와 비슷해 보였기 떄문이다. 키르히너는 하켄크로이츠의 숨은 뜻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생명을 짓이기는 바퀴였다.

 

 

 

키르히너, 자화상 

 

 

화면 아래에는 그가 아끼던 것들이 그려졌다. 고양이 샤키, <다리파 마크>에서 봤던 나체 여성상, 그리고 화가의 손. 콜비츠가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 보여준 손이 떠오른다. 콜비츠는 보란 듯이 의사를 전달하지만, 키르히너는 은밀하게 분노를 표현한다. 123

 

 

케테 콜비츠, 전쟁은 이제 그만!

 

 

 

 

 

 

 

 

 

 

예술가여,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 케테 콜비츠 중

 

 

나치의 블랙리스트는 키르히너와 콜비츠를 어둠으로 내몰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부각된다. 127

 

 

 

"삶에는 즐거운 일들도 있단다. 근데 왜 너는 이렇게 어두운 면만 그리니?" 콜비츠는 이와 같은 부모님의 질문을 떠올리며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나한테는 아무런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만큼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내가 처음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것은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그저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졸라나 다른 누군가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듯이. 아름다움, 그것은 추함이다." 131

 

 

콜비츠에게 예술은 사회와 분리되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거니와 단 하나의 작품에서 끝나지 않으며, 거듭 연결되는 가운데 영원히 계속된다. 132

 

 

 

어릴 적에 그는 항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노동자들을 관찰하면서 미학적인 매력을 느꼈었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본 관조적인 아름다움이었지만, 의사인 남편과 결혼한 후에 노동자들이 겪는 비루한 일상과 힘겨운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괴로워지고 불안해졌다. 콜비츠는 누구보다 자기의 답답한 마음에 숨 쉴 구멍을 만들고자 노동자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프롤레타리아 편에 선 예술가? 콜비츠는 그 맞은편에 섰던 예술가다. 맞은편에 서서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누렸던 부르주아 생활과 전혀 다른 '프롤레타리아적인 삶의 무게와 비극'은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135

 

 

 

<빈곤>은 <직조공 봉기> 연작을 시작하는 첫 장이다. 그림은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정을 보여준다. 엄마는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속수무책이고, 할머니의 품에는 손가락을 빠는 아이가 안겨 있다.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베틀은 멈췄고, 창문은 닫혔으며, 방은 좁고 낮고 어둡다. 정사각형 구도가 출구없음을 강조한다.

 

 

콜비츠, 빈곤

 

 

<빈곤>은 이례적으로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에 실렸다. 이 세걔적인 베스트셀러는 두 가지 타자를 거의 배제하다시피 했는데, 이 두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례가 곰브리치 눈에 들었으니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콜비츠는 여성인데다가, 곰브리치가 관심을 둔 '미술과 환영'이 아니라 '미술과 현실'의 관계를 보여준 미술가다. 138

 

 

 

콜비츠 이전에 누가 이토록 세심하게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형태를 부여했던가? 노동하는 남성은 콜비츠 이전에 다수 그려졌지만, 노동하는 여성은 타자 중의 타자였다. 게다가 콜비츠는 노동하는 여성 중에서도 '일하는 엄마'에 주목했다. 144

 

 

 

콜비츠에게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고, 반드시 종교적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도상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죽음과 엄마의 슬픔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 먼저 동판화로 제작된 <죽은 아이를 품은 여성>을 보자. 설명이 사족인 그림이다. 긴장과 이완이 번갈아 이어진다. 괴로움을 참는 힘이 무릎에서 시작하여 손과 팔꿈치와 발가락까지 전해진다. 아이 머리는 기운 없이 꺾였으며, 잔뜩 허리를 꺾은 엄마는 아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 그대로 절절切切하다.

 

 

콜비츠, 죽은 아이를 품은 여성

 

 

 

 

 

콜비츠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함과 동시에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그림을 낳았다. 그는 그림으로써 말한다. 예술가이려면,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그 두려움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154

 

 

 

" ...나는 지금 작은 조각을 만드는 중인데, 원래는 노인을 만들려다가 이렇게 되었다. 이제 보니 피에타처럼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앉아서 죽은 아들을 무릎 사이에 두었다.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반성이다." 158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콜비츠의 피에타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이 아니라 반성을 요청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어른들의 체제를 반성함이다. 전쟁 때문에 죽는 인간이 있고, 전쟁 덕분에 유지되는 국가가 있다. 159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는 콜비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판화다. 그림 제목은 괴테가 쓴 책에 실린 말이며, 1941년 12월 일기가 밝히듯이 콜비츠의 유언이다. 전쟁이 또 다시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그렸다. 베를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망아지 같은 아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한 여성에게 붙들려 있다. 이 나이 든 여성은 망토를 펼쳐 아이들이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양팔과 양손을 크게 벌려 힘껏 감싼다.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처럼 간절한 소망이 아니라 명령이다. 161-162

 

 

 

콜비츠,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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