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안 반스 미술책을 읽고 서경식의 '영국인문기행'을 읽었는데
줄리안 반스가 영국인이다 보니 겹치는 지점이 있었다.
영국인문기행을 읽고 마틴 게이퍼드의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을 읽는데 런던의 미술가들을 다루고 있어 그런가 이 또한 반스의 책과도 서경식의 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서경식 책을 먼저 읽지 않았다면 벤저민 브리튼은 의미없는 이름이었을 것이고, 반스 책을 읽지 않고 게이퍼드를 읽었다면 하워드 호지킨은 처음 들어보는 화가였겠지. 반스만 읽고 게이퍼드를 안 읽었다면 루치안 프로이트 이야기가 이만큼 층을 더하지 않았을 테고, 게이퍼드가 프로이트만 다룬 다른 책을 읽으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도 비호감 화가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몇달 전에 읽은 앨리 스미스의 '가을'에 폴린 보티 얘기가 나오는데
그 때 찾아보지 않았던 보티의 콜라쥬를 '현대미술의 이단자들'에서 만났다.
딱히 의도적으로 연달아 읽은 것이 아닌데 이렇게 꼬꼬물이 생기면 기분이 좋아진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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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1-25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난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항상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야. 빅터 프랭클을 봐. 그리고 누군가 이런 말도 했지. '세상 모든 것에는 틈이 있기 마련이고, 바로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기도 해."

나는 그의 책을 가리켰다.

"비트겐슈타인?"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너드 코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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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유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무릇 이렇다"라고 말하는 반면, 팡탱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실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모네는 세잔을 "그림의 플로베르"라고 불렀다.

플로베르는 문학을 하는 친구가 결혼을 하면 그것을 플로베르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예술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보나르는 야외 생활을 그릴 때조차 실내 생활의 화가다.

보나르는 마르트의 초상을 그렸다기보다는, 마르트가 거기 있다는 사실과 그 분위기를 그렸다. 가장자리에 그녀의 일부만 등장하는 그림이 많은데, 이는 화가가 의식 또는 무의식에서 그녀를 무시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정반대, 그녀의 내재성에 대한 증거다. 그뿐 아니라, 팔꿈치나 뒤통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가정생활의 풍요 속에 직관으로 엿보이는 무상함을 그렇게 강렬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물론 대답은 양쪽 다일 수 있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보자마자 바로 내 톱 10 리스트에 등재되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 리스트에 몇 개가 포함되는지는 아직 세어보지 않았다. 아마 100개도 넘지 않았을까.)

화가가 "형태와 색에 매혹"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관객을 불안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고 당황하게 만드는 형상들. 마그리트가 데 키리코에 관해 썼듯이 "관객에게 자신의 고립을 인지하게 하고 세상의 침묵을 듣게 하는" 그림들.

팝아트를 할 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거창한 의미를 적재하는 것이니까.

미학의 제1규범은 흥미라고, 위대한 소설가 존 치버는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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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어떤 분명한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소설을 읽은 사람으로 변할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의 세계가 '바벨의 도서관'이며 우주라는 것, 보르헤스의 저 유명한 단편의 제목처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됩니다.

사실 독자로 산다는 것에 현실적 보상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우리의 짧은 생물학적 생애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에 접속할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독서의 가장 큰 보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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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힘으로, 그것은 해저의 암류와 같고 기교나 사상, 신앙 등은 해수면의 파도와 같습니다.

우리는 감정의 깊이를 원하지, 공허한 이념적 깊이를 추구하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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