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는 자, 파시즘의 적 - 키르히너 중 

 

 

삶이 뜻대로 흐르지 않을 때, 볼 만한 그림이 나왔다. <포츠담 광장>은 키르히너가 전성기에 그린 대표작이다. ... 1914년 가을, 전쟁이 터진 직후였다. 그림도 폭발 직전이다. 붓질은 총탄처럼 내리꽂히고, 색채는 팽팽하게 보색대비를 이룬다. 건물은 붉고, 길바닥은 병든 강처럼 녹조 빛이다. 95

 

 

 

키르히너, 포츠담 광장

 

화려하게 치장한 여성 두 명을 중심으로 중절모와 정장을 차려입은 남성들이 배회한다. 그들 사이에 접촉은 없다. 한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하는 순간이다. 뒤편에는 교회, 기차역,상점이 자리를 잡고서 도시 노동자들을 길들인다. ...
광장의 중심은 여성들이 차지했다. 눈은 텅 비었고, 입술은 붉게 칠했으며, 원피스는 몸매를 드러낸다. 신발은 휘청거릴 만큼 높다. 두 여성 모두 깃털로 장식된 모자를 썼고, 모자에는 가리개가 달려 있어 얼굴을 가릴 수 있다. 이 깃털 가리개 모자는 생김새 때문에 '새장'이라고 불렸다. '새장'은 원래 전쟁미망인이 쓰던 것이다. 베를린 경찰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부터 이 '새장'을 성 판매 여성이 챙겨야 할 필수품으로 규정해서, 성매매 행위를 가려내는 식별 기호로 삼았다. 성 노동자는 전쟁에서 잃은 남편 대신 새 남편을 찾는 구혼자처럼 변장되었다.

.... 경찰은 성병을 방지하고 성매매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새장' 착용 외에 여러 가지 규정을 두었다. .... 성 판매 여성에게 포츠담 광장은 금지 구역이었다. 그들은 배제당하고 구별되었는데, 19세기부터 발전한 우생학은 구별 짓기에 이상한 논리를 제공했다. 우생학은 성 노동자가 정신질환자, 장애인, 범죄자처럼 '나쁜 유전자'를 보유한 자로서 사회의 건강을 해친다고 가르쳤다.

... 키르히너에게 성 노동자는 낯설지 않았고, 자기와 구별되지 않았다. <포츠담 광장>은 도시의 풍경화이자 초상화이며, 일회용 휴지처럼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의 자화상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예전에 그렸던 매춘부들처럼 지금 우리 자신의 처지가 그렇군요. 한번 휙 써버리고 나면    

다음은 없어요. 그럼에도 나는 노력합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이 혼란에서 시대의 그림을 만들어내려고. 이것이야말로 나의 과제니까요." 95-99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은 한 손을 아예 그리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오른손은 잘려 나갔고, 피가 말라붙은 팔목은 창백한 녹색이다. 그는 팔목이 잘려나간 듯한 공포를 그렸다. 그림을 영영 못 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공포를 이기려면 공포 속으로 들어가보라고 했던가? 그림쟁이는 그림으로써 자기 두려움을 이겨낸다. 어깨 너머로 보이듯이, 그에게는 아직 못다 그린 그림과 탐구하고 싶은 모델이 있었다. 100-101

 

 

키르히너,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키르히너를 비롯하여 다리파 작가들은 모두 나치가 지목한 대표적인 '퇴폐미술가'였다. 1937년 6월30일 히틀러가 심복으로 삼은 괴벨스는 한 미술대학 교수에게 독일 공공 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퇴폐적인' 미술품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키르히너의 작품은 639점이나 해당되었다. ...

'퇴폐미술'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매각된 작품도 많았다. 앞서 살펴본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외에도 <거리>가 그렇다. <거리>는 베를린 국립미술관에서 소장했었으나, 1937년 <퇴폐미술전>에서 <어떤 미술가 그룹>과 나란히 걸렸다가 독일을 떠나야 했다. 오늘날 소장처는 뉴욕 현대 미술관이다. 120

 

 

키르히너, 어떤 미술가 그룹 

 

 

 

 

나치가 보기에 그는 독일적이지 못한 여성상을 제시했으므로 문화 예술계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했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나치는 왜 그토록 표현주의 미술가들을 적으로 내몰아야 했을까? 나치는 자기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표현할 줄 아는 개인들이 두려웠던 것이다. 키르히너처럼 표현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개인은 전체주의 체제 유지에 위험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파시즘의 정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120-122

 

 

키르히너, 거리

 

 

 

 

 

키르히너가 남긴 마지막 유화 자화상을 보자. 한쪽 눈은 어둠에 덮여 안 보인다. 붓 쥔 손은 칼날처럼 헤집고 들어온 빛살에 붙잡혔다. 숨은그림찾기일까? 그는 벽에 걸린 양탄자에 갈고리 십자가, 즉 '하켄크로이츠'를 그려 넣었따. 그는 1930년만 하더라도 나치당 로고인 하켄크로이츠를 진보를 상징하는 마술적 기호라고 이해했다. 생명의 바퀴를 뜻하는 인도의 '스와스티카'와 비슷해 보였기 떄문이다. 키르히너는 하켄크로이츠의 숨은 뜻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것은 생명을 짓이기는 바퀴였다.

 

 

 

키르히너, 자화상 

 

 

화면 아래에는 그가 아끼던 것들이 그려졌다. 고양이 샤키, <다리파 마크>에서 봤던 나체 여성상, 그리고 화가의 손. 콜비츠가 <전쟁은 이제 그만!>에서 보여준 손이 떠오른다. 콜비츠는 보란 듯이 의사를 전달하지만, 키르히너는 은밀하게 분노를 표현한다. 123

 

 

케테 콜비츠, 전쟁은 이제 그만!

 

 

 

 

 

 

 

 

 

 

예술가여,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 케테 콜비츠 중

 

 

나치의 블랙리스트는 키르히너와 콜비츠를 어둠으로 내몰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부각된다. 127

 

 

 

"삶에는 즐거운 일들도 있단다. 근데 왜 너는 이렇게 어두운 면만 그리니?" 콜비츠는 이와 같은 부모님의 질문을 떠올리며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나한테는 아무런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만큼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내가 처음에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한 것은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그저 아름답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졸라나 다른 누군가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듯이. 아름다움, 그것은 추함이다." 131

 

 

콜비츠에게 예술은 사회와 분리되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거니와 단 하나의 작품에서 끝나지 않으며, 거듭 연결되는 가운데 영원히 계속된다. 132

 

 

 

어릴 적에 그는 항구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노동자들을 관찰하면서 미학적인 매력을 느꼈었다. 그것은 멀리서 바라본 관조적인 아름다움이었지만, 의사인 남편과 결혼한 후에 노동자들이 겪는 비루한 일상과 힘겨운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괴로워지고 불안해졌다. 콜비츠는 누구보다 자기의 답답한 마음에 숨 쉴 구멍을 만들고자 노동자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프롤레타리아 편에 선 예술가? 콜비츠는 그 맞은편에 섰던 예술가다. 맞은편에 서서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누렸던 부르주아 생활과 전혀 다른 '프롤레타리아적인 삶의 무게와 비극'은 보이지 않았을 터이다. 135

 

 

 

<빈곤>은 <직조공 봉기> 연작을 시작하는 첫 장이다. 그림은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사정을 보여준다. 엄마는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속수무책이고, 할머니의 품에는 손가락을 빠는 아이가 안겨 있다.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베틀은 멈췄고, 창문은 닫혔으며, 방은 좁고 낮고 어둡다. 정사각형 구도가 출구없음을 강조한다.

 

 

콜비츠, 빈곤

 

 

<빈곤>은 이례적으로 곰브리치가 쓴 <서양미술사>에 실렸다. 이 세걔적인 베스트셀러는 두 가지 타자를 거의 배제하다시피 했는데, 이 두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사례가 곰브리치 눈에 들었으니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콜비츠는 여성인데다가, 곰브리치가 관심을 둔 '미술과 환영'이 아니라 '미술과 현실'의 관계를 보여준 미술가다. 138

 

 

 

콜비츠 이전에 누가 이토록 세심하게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에 형태를 부여했던가? 노동하는 남성은 콜비츠 이전에 다수 그려졌지만, 노동하는 여성은 타자 중의 타자였다. 게다가 콜비츠는 노동하는 여성 중에서도 '일하는 엄마'에 주목했다. 144

 

 

 

콜비츠에게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고, 반드시 종교적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 도상도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죽음과 엄마의 슬픔을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으로 이해했다. 먼저 동판화로 제작된 <죽은 아이를 품은 여성>을 보자. 설명이 사족인 그림이다. 긴장과 이완이 번갈아 이어진다. 괴로움을 참는 힘이 무릎에서 시작하여 손과 팔꿈치와 발가락까지 전해진다. 아이 머리는 기운 없이 꺾였으며, 잔뜩 허리를 꺾은 엄마는 아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말 그대로 절절切切하다.

 

 

콜비츠, 죽은 아이를 품은 여성

 

 

 

 

 

콜비츠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함과 동시에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그림을 낳았다. 그는 그림으로써 말한다. 예술가이려면,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그 두려움을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154

 

 

 

" ...나는 지금 작은 조각을 만드는 중인데, 원래는 노인을 만들려다가 이렇게 되었다. 이제 보니 피에타처럼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앉아서 죽은 아들을 무릎 사이에 두었다.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반성이다." 158

 

 

콜비츠,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콜비츠의 피에타는 타인의 고통에 연민이 아니라 반성을 요청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고통을 안긴 어른들의 체제를 반성함이다. 전쟁 때문에 죽는 인간이 있고, 전쟁 덕분에 유지되는 국가가 있다. 159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는 콜비츠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판화다. 그림 제목은 괴테가 쓴 책에 실린 말이며, 1941년 12월 일기가 밝히듯이 콜비츠의 유언이다. 전쟁이 또 다시 벌어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그렸다. 베를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망아지 같은 아이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애를 쓰지만, 한 여성에게 붙들려 있다. 이 나이 든 여성은 망토를 펼쳐 아이들이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양팔과 양손을 크게 벌려 힘껏 감싼다.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전쟁은 이제 그만!'처럼 간절한 소망이 아니라 명령이다. 161-162

 

 

 

콜비츠, 씨앗들이 부서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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