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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나치 시대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나치는 길들여지지 않는 눈을 두려워했으며, 그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부당한 살생부는 언젠가 삶의 이야기로 다시 쓰인다. 9

 

 

 

 

서문 : 독일인과 독일인 미술가 중

 

<바닷가의 수도사>는 낭만주의 회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화가 자신이 남긴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이 깊은 생각에 잠겨서 해변을 걷는데, 갈매기가 소리를 지른다. "마치 광포한 바다에 감히 다가갈 생각을 하지 말라며 그에게 경고하려는 듯이." 15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저는 저입니다 - 파울라 모더존 베커 중

 

 

..독일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3K'가 결정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3K란 아이, 부엌, 교회를 일컫는다. 즉, 여성이 독일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하고, 아이를 돌보고 교육하기 위하여 부엌살림과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여성에게서 교육 기회를 빼앗는 명분으로 쓰였다. 26

 

브레멘은 두 가지 점에서 가볼 만하다. 그곳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 명의 여성 미술가에게 헌정된 미술관이 있으며, 이 미술관에서는 서양 미술사 최초라고 알려진 여성 미술가 자신의 누드 자화상을 볼 수 있다. 27

 

파울라가 여성 미술가로서 남긴 누드 자화상은 자기 연구를 위한 시작이요, 자기의 삶을 온몸으로 살겠다는 선언이다. 38

 

 

 

파울라 모더존 베커, 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

 

"이제 어떻게 서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더 이상 모더존이 아니고 파울라 베커도 아니니까요. 저는 저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의 모든 싸움의 최종 목표가 될 거예요." 53

 

 

 

 

 

파울라 모더존 베커, 호박 목걸이를 걸친 반신 누드 자화상 

 

 

파울라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이끌던 여성운동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누드 자화상은 여성 해방을 위한 자기 나름의 응답이요, 어떤 페미니즘보다 설득력 있는 자기주장이다. 릴케는 화답이라도 하듯 진혼곡에 이렇게 적었다.

 

"그래서 당신을 당신의 옷 속에서 끄집어내,

거울 앞에 놓고서, 당신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어요.

당신의 눈길까지 말이오, 당신의 눈길은 그 앞에 크게

머물렀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게 나야; 그게 아니라:
이거야."

 

릴케는 파울라가 왜 그리 자화상을 많이 그렸는지 알았음이 분명하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델임도 이유겠지만, 자기를 연구함이야말로 자화상을 그리는 중요한 이유이다. 자기란 누군가 지어준 옷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취하는 태도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스스로 짓는 것이다.시인이 보기에 파울라는 거울에 비친 자기를 그리면서 "이게 나야"가 아니라, "이거야"라고 말한다. 자기란 스스로 있는 몸이라고, 다른 말이 필요 없이 주어와 자동사로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55 

 

 

 

 

 

 

정확한 자세로 좌절하기 - 렘브루크 중

 

 

오늘날 독일에서 렘브루크는 '독일의 로댕'이라 불릴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독일 밖에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예술가이다. 59

 

 

 

 

 

 

 

기다란 목과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 타원형 얼굴, 각진 어깨, 어른 키를 넘는 크기, 최소한의 볼륨감. 이와 같은 요소들은 이 때부터 렘브루크 스타일로 자리 잡는다.

... 두 다리를 굽혀서 하나는 바닥에 대고 다른 하나는 세운다. 한 손은 가슴 쪽으로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으로 내리며, 고개는 살짝 기울인다. 한쪽 무릎을 꿇어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73

 

 

 

렘브루크, 무릎 꿇는 사람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이렇게 비꼬았다. 렘브루크가 지어낸 여성상은 "포유류일지언정 특별히 인간"이 아니며, "기도하는 사마귀"에서 어떻게 "시적인 우아함"을 볼 수 있는지, "기린처럼 긴 정강이뼈"가 어째서 "사랑스럽다"는 말인지 알 길이 없다고 말이다. 그는 렘브루크에게서 "예술이 아니라 병리학상의 문제"까지 봤다. 75

 

 

 

 

 

렘브루크는 인체를 본뜬 교량 건축으로 인간 사회가 몰락함을 표현했다. 가늘고 길쭉한 팔다리가 기둥이 되어서 기다란 등과 허리를 잇는다. 자칫하면 무너질 수도 있는 교량이다. 상승과 몰락 사이에서 정확하게 좌절하기. 조각은 한자를 닮았다. 꺾을 좌挫에 꺾을 절折. 팔도 꺾이고 무릎도 꺾이고 목도 꺾였다. 한 손에 쥔 칼자루도 부러졌다. 82

 

렘브루크, 몰락한 사람

 

 

 

 

 

얼굴 두 개로 지어낸 <엄마와 아이>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상이 꼭 지켜야 하는 사랑이다. 87-88

 

 

렘브루크, 엄마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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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변함없이 죄 없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저녁녘, 나에게 이런 북적거림은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내가 나그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것은 반투명의 피막으로 가로막힌 '저 건너편'의 풍경이다. 49


하지만 이런 종교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미신적인 적의가 나찌식의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전통적인 종교 공동체의 성원을 가리키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인종'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망상으로 바뀔 때, 유대인의 '절멸'이라는 프로젝트가 실행 가능하게 된 것이다. 69



예수의 처형에 '유대인'이 책임이 있다는 견해를 가톨릭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정한 것은 고작 1962년부터 1965년에 걸쳐서 열린 제2회 바띠칸공의회에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도의 수난은 당시 유대인 혹은 오늘날의 유대인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72


이 사람 저 사람 어느새 줄줄이 떠오르는 추억이 정말 두서없다. 비참하며 골계적이고, 또 놀랄 정도로 끈질기면서도 의외로 여린 내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정경은 모두 '막연한 적의와 조소의 장벽'에 갇힌 소수파만의 비굴함과 정반대의 오기 그리고 자포자기한 대소(大笑)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언제나 유랑과 고향 상실의 비애가 뒤엉켜 있다. 77



인간이 어떻게 이토록 잔혹할 수 있을까?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같은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을까? 137

 



강제수용소에서 <신곡>을 암송하는 작업은 그에게 과거와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문화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마음이 아직 기능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요컨대 자신을 재발견케 해주었던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따라서 내일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얼굴을 씻고 이를 닦는다. 자기 자신에게 규율과 질서를 부과하고 쟛기 생활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다. 때문에 노예보다 못한 신분으로 추락하더라도 '덕과 지'를 구하는 것이다. 단떼를 상기하고, 오디쎄우스처럼 끝없는 고난의 항해를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금 지옥에서 인간세상으로 생환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만한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일까. 그 대답이 여기에 있다. 155-156

 




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인간이라는 수치'에 시달려야 했을까? 수치스러움을 모르는 가해자의 수치까지도 피해자가 고스란히 받아서 시달려야 하는, 이 부조리한 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181



말할 것도 없이 에스빠냐 사람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저지른 일, 영국인이나 프랑스인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저지른 일, 식민지를 건설하러 아메리카 대륙에 갔던 백인들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 노예에게 저지른 일, 일본인이 타이완, 조선, 중국 대륙 등 아시아 각지에서 저지른 일, 그 범죄들과 비교함으로써 나찌의 대죄를 상대화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제국주의자들이 나찌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자신을 죄를 면하려는 것 또한 용서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독립선언이나 프랑스혁명 이후 거의 2백 년,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보편적인 인간관을 세계에 전파시켜온 사람들은 동시에 이 인간관을 스스로 계속 거역해왔다. 이 사람들은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를 실천해온 것이다. 189-190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2

 

 

 

 

그러나 그녀(한나 아렌트)는 여기에서 민족으로서의 '독일인'전체에 죄가 잇다는 식의 생각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냉철하기까지 한 보편적 정신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여기에서 아렌트가 주장한 바가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성원, 즉 '독일 국민'의 정치적 책임을 면책할 수 있다고 오독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아렌트는 그후에 쓴 <집단의 책임>이라는 논문에서 '죄'와 '책임'의 개념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녀는 "우리 전부에게 죄가 있다"라는 호소가 현실에서는 실제 죄를 지은 자를 무죄방면하는 데 일조할 뿐이었다고 말한다. '죄'는 법적 개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 개인과 관련된다." 그와 다르게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라면 누구나 짊어져야 할, 정치적 의미에서의 '집단적 책임'이 있다. 바꿔 말하면 '독일인'이라는 집단 중에서 '죄'를 지은 개인은 있지만 '독일인'전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독일인 전체의 죄'라는 생각은 오히려 죄를 지은 개인을 은닉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독일이라는 정치 공동체의 행위에 '집단적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집단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난민이나 망명자 등 '국가가 없는 사람들'뿐이다.  211-212

 

 

 

대다수 독일인은 알지 못했다. 그것은 알고 싶지 않았고 무지의 상태로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 눈, 귀, 입을 모두 닫고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은 공범이 아니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 나는 이 깊이 고려된 의도적인 태만이야말로 범죄행위라고 생각한다. 221

 

 

 

'저편'에서 그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금 일어날 수 있는데도, 왜 '이편'에서는 만사가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 240

 

 

 

'이편'으로 살아 돌아와보니 사람들은 오디쎄우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45

 

 

하지만 증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고 표현 가능성을 초월한 경험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해 불능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 불능의 상황을 표현하고, 전달 불능의 상념을 전달한다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부조리하게도 증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증인들은 부당한 의심과 무관심의 시선에 둘러싸여 고립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 그들과 그녀들은 그 믿기지 않는 일의 희생자다. 당신들을 믿게 할 의무를 희생자에게 부과해야 한다는 말인가?

... 증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증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편'의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테스크한 것은 '이쪽'이다. 247-248

 

 

 

 

쁘리모 레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단순 명쾌했을 것이다. 고난에 대한 인간성의 승리나 구제의 서사, 오디쎄우스의 개선에 대한 서사....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의 천박함과 나약함 때문에 그 단순 명쾌함에 매달리려고 한다. 하지만 옅은 어둠 속 공간에 몸을 던진 쁘리모 레비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돌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써 우리의 천박함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덮고 있다. '인간이라는 척도'는 파괴된 상태다. 아우슈비츠에 의해서 폭로된 '단절'을 우리는 넘어설 수 있을까.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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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이 지닌 책의 네트워크가 있다', '이런 작가들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와 같은 구조도가 살면서 차츰 생성되는 것이죠. 그게 지속적으로 책을 읽는 것일 터인데, 제 나이쯤 되니 제 삶이 다른 무엇보다 이 책들과 함께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정도의 질과 양의 책이었구나', 나아가 '내 생애도 이 정도의 일생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래 분명 이런 인생이었지' 하는 그리운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11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여러분도 중요한 책이라기에 읽기는 읽었는데, 인생에 별반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던 책이 몇 권쯤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그것이 빛을 발하게 될 때가 올 테니, 기대하고 계셨으면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13

 

 

우선 처음에는 번역서에 선을 그어가며 빈틈없이 읽습니다. 두 번째는 선을 그은 부분을 원문과 하나하나 대조하며 읽어갑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게 정말 좋은 책이고 한 달 정도 공을 들여 읽을 짬이 있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쭉 원서로 읽어봅니다. 그것이 재독의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저희 같은 외국어 비전문가들은 말이죠, 전문가가 번역한 책을 옆에 두고 읽으려는 원서도 함께 둡니다. 그리고 사전을 앞에 둡니다. 이런 식으로 원서를 읽는 것이 좋아요. 번역본을 참고하면 원서를 읽는 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괄호를 쳐 둔 부분이 나오면, 그건 이미 자기가 사전을 찾아 읽어둔 곳이니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옵니다. 이렇게 이윽고 한 권을 다 읽고나면, 분명 상쾌한 성취감이 생길 겁니다. 41-42

 

추천책 :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 (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ei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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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어슐러 르 귄 여사의 에세이. 밤의 언어때보다 훨씬 나이드신 르 귄 여사님은 여전히 날카롭고 위트넘치고 여성혐오를 혐오하고 고양이에게 한없이 약하시다. 소설도 좋아하지만 에세이도 좀 더 읽고 싶은데 돌아가셔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포스트잇을 많이 붙여 뚱뚱해진 책을 펼치고 몇 부분만 옮겨 적어놓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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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긍정적 사고의 힘을 굳게 믿는다. 긍정적 사고는 아주 좋다. 현실적인 평가와 실태를 수용한다는 전제하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한다. 현실 부정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 사고를 한다면 결과가 썩 좋지 않을 것이다. 27

 

선의를 가득 담아서 내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 선생님은 늙지 않으셨어요."

교황더러 가톨릭교가 아니라고 하는 격이다. 27

 

노년은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노년은 존재 상태이다.

... 현실 부정을 통한 격려는,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역효과가 난다.

두려움은 현명하기 어렵고 결코 친절할 수 없다. 28

 

 

 

여기 노인의 세상에서는 다소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이상함이란 출판사들을 지원하고 작가들을 독려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활주로에 윤활유를 바르느라 헌신하는 유명한 자선단체인 '아마존 닷컴'에 내가 좀 무례하게 굴었다가 <어떻게>의 저명한 셀프출판인 휴 울리에게 거짓말쟁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도 포함된다. 35

 

병원 진료와 관련된 노화의 가장 고차원적 역설 중에 의사를 자주 봐야 하는 사람일수록 병원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더 힘들다는 말이 있다. 37

 

 

 

 

나는 어떤 책 한권을 'TGAN(위대한 미국 소설)'으로 선정하거나 위대한 미국 문학 목록을 만들어 문학적으로 훌륭하다고 선언하는 방식을 꽤 오래 전부터 반대했다. 소위 작품의 우수성 범주에서 모든 글쓰기 장르가 누락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시상이든 추천 도서 목록 선정이든 그 기준이 의례적이고도 무조건적으로 미 대륙을 절반으로 나누어 동부에 사는 남성들이 쓴 작품만 선호하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속성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다 큰 이유를 말하자면 '무엇이 영속적으로 훌륭하다'는 판단은 무언가의 훌륭함이 실제 지속되기 전까지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신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102-103

 

어두운 골목길에서 누군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나타나 "죽기 싫으면 위대한 미국 문학의 이름을 대!"라고 말한다면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꽥 하고 소리칠 것이다.

"분노의 포도!" 104

 

나에게 '위대한 미국 문학'이라는 문구의 주춧돌은 미국이 아니라 위대한이다.

뛰어난 성취 혹은 독자적인 성취라는 견지에서 말할 때 위대함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특정 젠더를 내포한다. 일반적인 용법과 통상의 이해에 따르면 '위대한 미국인'은 위대한 미국 남성을 뜻하고,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남성 작가'를 의미한다. 그 단어의 젠더를 바꾸려면 '위대한 미국 여성', '위대한 여성 작가'라는 여성 명사로 수정해야 한다. 젠더를 없애려면 '위대한 미국인들/작가들, 남녀 모두.....'같은 표현을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위대함이라는 관념 속에는 위대함이 여전히 남성의 영역이라는 사고가 남아 있다. 113

 

 

 

 

나는 스토리의 가치를 높이 산다. 스토리에서 서사의 필수적 궤적을 본다. 일관성, 이야기의 진전, 여기에서 저기까지 어떻게 독자를 이끄는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내가 볼 때, 플롯이랑 이야기의 움직임이 보여줄 수 있는 변화나 복잡성이다.

스토리는 계속된다. 플롯은 진행에 정교함을 부여한다. 120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문학적 현상의 지지자와 옹호자들이 판타지 문학을 여타 문학에 비해 훨씬 많이 폄하하거나 악마화하고 묵살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체제 전복적이기 때문이다. 그 본성은 이미 압제에 저항하는 유용한 도구로서 판타지 문학이 수 세기에 걸쳐 증명해 온 바 있다. 132-133

 

우리가 마침내 시작한 '인류의 지배와 무한의 성장이라는 목표를 인류의 적응과 장기적 생존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하는 사고의 전환이 바로 양에서 음으로의 전환이다. 139

 

 

 

 

 

페미니즘은 이어지고 있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여성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과 함께 일하는 곳 어디에나 자리 잡아야 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모두 남성적 가치의 정의에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특정 성에 배타적이기를 거부하며, 상호 의존성을 지지하며, 공격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켜야 한다. 또한 항상 자유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162

 

 

 

 

 

녀석은 가만히 앉아 어둠과 고요를 황금빛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릴케가 말했던 '동물의 순결한 시선'이었다. 상대를 관통하는, 순전히 바라보는 응시. 나의 존재는 그런 순간을 맞기에 미흡하고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근사한 동물의 존재, 그 아름다움, 그 완벽한 자기 충족감은 내게 신선함이자 위안이자 평화였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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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나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삶의 사실과 대면하는 것이 바로 프로이드류 회화의 핵심이다.

...

 

그림이 모델과 흡사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가? 프로이드는 말한다. "유사함은 어떤 의미에서 핵심적인 문제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그림이 꼭 닮은 초상화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 그림의 가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정신적인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비슷합니다. 그가 모델의 실제 모습에 아주 근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3

 

 

 

프로이드 작품의 특징은 특정한 범주의 색채를 쓴다는 것이다. 연갈색, 회색, 흰색, 베이지색, 옅은 노란색, 크림색, 갈색, 검은색이 그것이다. 그는 한때 이 색들을 '생명의 색채'라 불렀는데 여기에는 색채 자체가 주목을 끌 만큼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92

 

 

 

루시안 프로이드, 존 디킨

 

 

 

프로이드의 작품이 전적으로 자연 시각, 즉 자기 고유의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그림에서 중요한 점이다. 그의 작품은 렌즈를 통해 본 것이 아니다. 또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 시대 이래로 많은 구상회화가 그래왔듯이 그리고 오늘날에는 더욱더 그러하듯이 세계에 대한 카메라 렌즈의 시각에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지도 않는다. 비록 몇몇 사진가들, 예를 들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존 디킨의 작품에 감탄하긴 하지만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는 화가인 자신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광선이 어떻게 떨어지는지에 대한 정보는 많이 주지만 그 밖에는 알려주는 것이 거의 없다고 그는 말한다. 97

 

 

 

 

"초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사람들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초상화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는 내 초상화가 사람들을 닮은 초상화가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초상화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흉내쟁이처럼 그저 유사함을 얻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처럼 그들을 묘사하기를 원합니다. 내게 물감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내게 피부처럼 작용해 주기를 바랍니다." 112

 

 

 

 

 

베이컨의 그림이 지닌 힘은 종종 그 그림이 무섭다는 사실에서 얼마간 유래한다. 그의 그림은 으르렁거리는 폭력배의 소리나 위협적인 미소로 보는 이를 맞이한다. 작품 속의 짐승과 사람은 곧 공격할 것 같은 존재를 암시하는 음산한 흐릿함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베이컨의 목표는 또 다른 생명체와 마주쳤을 때 보이는 즉각적이고도 본능적인 반응을 포착하는 데 있었다. 그의 작품 속 인물과 동물은 종종 동작상태에 있고, 갑자기 휙 뛰어오르거나 마구 움직일 것만 같다. 그는 거의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리지 않았다. 119

 

책에는 없지만 베이컨 그림..

 

 

 

 

 

호크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프로이드가 그린 그림에는 100시간 이상의 '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층과 함께 무수한 시각적 느낌과 생각이 덧붙어 있다. 146

 

 

루시안 프로이드, 데이비드 호크니

 

 

 

 

 

..그가 피카소의 작품을 존경하고 좋아하긴 하지만 피카소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려 했다고 생각한다.

보는 이를 놀라게 만들고자 하는 그림을 그는 혐오한다. 그는 피카소에게는 그 결점 외에도 허위 감정이라는 결점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 번도 피카소의 청색 시대를 뛰어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 그림들은 전적으로 허위 감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미술에서 솔직한 감정과 진실됨에 가치를 둔다는 점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147

 

 

 

 

 

얼굴이든 그 밖의 부위든 근육은 프로이드의 영원한 관심사이다. 근육은 그가 미술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하는 '형태의 세계'를 이루는 한 부분이다. ....

유화 표면의 섬세한 밀도는 얼굴을 구성하는 탄력 있는 근육과 뼈, 피부의 정교한 실타래와 유사하다. 169

 

책에는 실려있지 않지만 이를 잘 드러내는 그림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같이 올려봅니다.

루시안 프로이드, 반영(자화상), 1985

 

 

 

 

 

 

그의 작품 중 많은 수가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젊고 건강한 사람을 그린 이미지조차 살의 연약한 아름다움, 피부가 늘어지고 시들어갈 가능성에 대한 감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미지는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자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 효과는 소름 끼치지 않고 그저 진실할 뿐이다. 190

역시 책에는 실려 있지 않은 그림이지만

루시안 프로이드, HEAD OF A GIRL

 

 

 

훌륭한 작품은 암기가 불가능하다. 그 작품을 얼마나 잘 알고 있든그 작품은 다시 볼 때마다 항상 다르게 보인다. 나를 이를 프로이드뿐만 아니라 뤽 튀만, 리터드 세라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서 경험했다. 또 어떤 작품은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온다. 이와 같이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훌륭한 작품이 지닌 특징 중 하나이다. 234

 

참고 이미지 :

뤽 튀이만, 건축가

 

 

 

뤽 튀이만, EASTER 

 

 

 

 

 

 

리처드 세라, BAND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유화는 세계를 향한 긍정적이고 호기심 가득한 관찰자의 초상화이다. 반면 에칭 판화는 자기성찰과 불안, 긴장, 생각에 사로잡힌 한 사람을 담은 초상화이다. 각각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과 상이한 환경 속에서 이 두 작품은 모든 사람이 지닌 두 가지 측면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35

 

루시안 프로이드,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유화) - 머리 초상화(에칭)

 

 

 

 

 

 

+ 덤으로 몇 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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