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카소가 그린 멋진 부엉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미술가는 부엉이를 잡아다가 속을 채워서는 케이스 안에 집어넣어 버릴 것이다. 박제 말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부엉이는 한 인간이 부엉이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결과이다. 그쪽이 박제보다는 훨씬 흥미롭다.
모든 픽처는, 뭔가를 관찰하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카메라 렌즈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볼 필요가 없다. 인간의 두 눈과 뇌는 렌즈처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픽처의 역사를 연속적인 것으로 보기 시작하면, 각기 매우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탄생한 이미지들 사이에도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픽처의 역사는 일방통행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모든 픽처는 특정한 문제,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시간과 공간을 재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하면 붓터치나 펜 자국을 사람이나 사물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한다.

나는 세계를 관찰하는 일을 즐기며, 우리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는가,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에 언제나 관심을 갖고 있다.

픽처는 세계를 재현하는 수단,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수단이다.

픽처의 역사는 동굴에서 시작되어 (일단은) 아이패드에서 끝난다.

세켸를 2차원으로 묘사하는 일은 우리에게 영원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 서론 중에서만 옮겨 적었다. 도판이 크고 선명한 것이 보기 좋기도 하고(세부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적어두고 싶은 부분이 많아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 두었다.

예술가들이 카메라 옵스큐라나 사진을 어떻게 활용하였는가에 관한 부분은 호크니의 전작에서도 본 바 있고 약간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술술 넘어가는 흥미로운 그림의 역사였다. 호크니가 동양 미술을 간간이 언급하는 것도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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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작품은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게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나 취미, 의심이나 비판, 위화감이나 저항 등의 감정을 일단 젖혀두고, 말하자면 몰주체.몰아의 경지로 나아가 거기에 몸을 두고 크나큰 물결의 너울거림에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그너의 음악에서 감명과 도취를 얻는 최상의 방법이다. 또 그런 태도만큼 파시즘에 바람직한 것도 없으리라.
'예술과 정치는 별개다'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대와 사상을 깊이 담지 못한 범용한 예술이라면 오히려 어떤 정치체제하에서도 편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의 예술이 빼어난 것은, 그것이 이 두 가지를 완벽할 정도로 융합해놓았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서 고민도 시작된다. 71

130中 지명은 니시오지구조인가 니시다이지구조인가.
인명은 후지노 노부루 ㅡ> 후지노 노보루로 고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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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소설 미학을 몇 가지 열거해본다. 입말체 대화법, 빙산이론과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남근중심주의 미학이다. 네 가지로 나눴지만 이들은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많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헤밍웨이라는 하나의 실존에서 나온 것들이다. 네 가지로 나누어 있지만 실은, 헤밍웨이라는 한 인간의 다른 표현들이다.


헤밍웨이는 삶의 경험도 많고 어디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만큼은 단 몇 줄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단편적이고 단조로웠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클래식 클라우드 피츠제럴드를 읽고 이어 헤밍웨이. 따로 떼놓고 생각하기 어려운 두 작가. 개인적으로는 피츠제럴드 편을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위에 발췌한 부분이 그 이유 중 하나이려나. 파파는 가까이 하기엔 좀 부담스럽긴 하지..ㅡ.ㅡ; 올여름에 헤밍웨이의 쿠바 생활을 다룬 영화를 봤는데(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니 마사 겔혼 역으로 나온 배우는 겔혼 본인이랑 엄청 닮았네.. 그 영화에서도 헤밍웨이가 마사 겔혼을 대하는 태도는 정말 밥맛이었다..

'파리는 언제나 축제'는 정말 좋았지만, 장편 중에서는 '무기여 잘 있거라'만 재미있게 읽었고 나머지는..;;
올해가 가기 전에 단편을 영어로 읽고 그 문장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기는 하다. 그러려면 일단 단편집 원서 중고책을 사야지..집근처 알라딘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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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2,3
내 서재 속 고전
공포의 천사
미술, 도시를 만들다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비와 별이 내리는 밤
각본가의 죽음
읽다

죽어가는 것에 대한 분노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영국 인문 기행
현대미술의 이단자들
그림이 있어 괜찮은 하루
3부작
어쩌다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나와 작은 아씨들
캉탕
고뇌의 원근법

살다,읽다,쓰다
인문학 명강 ㅡ서양 고전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ㅡ 이정서 역(번역노트 부분만)
다시,그림이다
아웃사이더 1,2
깃털도둑
뱀이 깨어나는 마을
테세우스의 배

기억나지 않음, 형사
책꽂이 투쟁기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모든 운동은 책에 기초한다
예술이 되는 순간
희생양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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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모든 운동은  근본적으로 인간 정신의 두 가지 발명에 그 근거를 둔다. 공간적 운동은 축을 진동하며 구르는 바퀴를 발명함으로써 가능했고, 정신의 운동은 글자의 발명 덕에 그러했다.

 

시대를 초월해 불멸하고 불변하는 것인 동시에 가장 보잘것없고 변하기 쉬운 틀에 담긴 고도로 압축된 힘인 책은 기술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기술 또한 책으로부터 배워 스스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삶에서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나 책은 모든 지식과 학문의 시작을 이루는 알파와 오메가다. 그리고 책과 친밀히 지낼수록 그 사람은 삶의 총체성을 깊이있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자는 스스로의 눈만이 아니라 셀 수 없는 이들의 영혼의 눈으로, 그들의 놀라운 도움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헤쳐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야 제대로 알았지만, 동화란 원래 삶에서 두 번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어린 시절에는 활기찬 사건으로 가득한 형형색색의 세계가 진실일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순진한 믿음으로,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 후에는 그것이 허구임을 정확히 알면서도 기꺼이 속임을 당하겠다는 마음으로.

 

 

독서의 동기는 늘 자기 세계의 경계를 넘으려는, 낯선 것 안에서 길을 잃으려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책 속의 비유에서 자신을 되찾으려는 충동일 뿐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관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끝없이 이어진 단어의 사슬이 되고, 들려주는 이로부터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로 거든 전달되고, 누군가는 사슬 한 칸을 보태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고리 하나를 빼기도 하면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흙과 토지처럼, 한 민족 전체의 정신적 자산처럼, 십자가의 상징처럼, 소소한 미신처럼, 언어 자체와 독일어 낱말 하나하나처럼 전승되러 온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지상의 모든 거리를 걷고 모든 벽을 두드렸으며, 태고의 것이면서도 지금 막 피어난 듯 어리다. 동화가 꾸며 내는 그 어떤 기적도 영원을 향해 확장하는 동화 자체의 실존보다 더 놀라울 수는 없을 것이다.

 

동화는 인생 경험이 업는 이들의 모험을 향한 갈망이며, 실망한 이들을 위한 위로이며, 가난한 이들의 아편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갈망으로 무섭게 타오르고 자신을 외톨이라 여기는 아이들의 기쁨이다.

 

그(프로이트)는 근본적으로 심리학자인 자신의 과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듯하다.

 

오로지 예술 작품만이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을 뿐, 사상은 건물의 기초와 같아서 스스로 상부 구조가 될 수 없다. 예술은 기념물로 남아 홀로 영원의 지평선 앞에 우뚝 서거나 혹은 망각의 땅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세 판본은 일단 대략 비슷한 너비의 걸음을 뗀 것으로 보이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프로필레엔 판본의 환상적인 장정, 매력적인 제본, 훌륭한 인쇄, 읽기 편한 판형에 점수를 더 주고 싶다.

 

어떤 시인의 시집이 독일에서 1년 만에 7만 부가 팔렸다면, 그것은 저에게 그 시인을 감시해야 한다는 경고로 들립니다. 희석되어 묽어진 것만이 넓게 퍼져 흐르는 법 아닌가요.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관한 메모

{사용 설명서} 이 어마어마한 소설을 읽는 동안 책을 손에서 한번도 놓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든든히 기댈 자리를 찾는 게 좋겠다. 이 책은 거의 1,500쪽에 달하고, 납덩이 같은 무게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먼저 검지와 중지로 책에 끼어 있던, "금세기 가장 위대한 산문 작품", " 우리 시대의 호메로스"라고 쓰인 광고지를 세심하게 집어 들어, 너무 허황된 기대나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곧바로 이 소란스럽고 과장이 심한 광고지를 한쪽 끄트머리에서 다른 쪽 끄트머리까지 쭉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라.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앉아(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인내심과 정의감을 내면으로부터 끌어올려(화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읽기 시작하면 된다.

 

{근원} 그 뿌리에는 무언가 사악한 것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내면 어딘가에는 유년 시절의 증오와 영혼의 상처에서 비롯된 근원적인 정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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