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몇몇 예술가들이 이런 피곤하고 눈 먼 실존에서 우리를 구해 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에 눈을 뜨도록 해 준다. 예를 들어 웨인 티보는 1960년대 초부터 그런 역할을 해 왔다. 그는 바로 그 검볼머신이 파란 윤곽선을 후광처럼 두르고 신비로운 빛에 빛나고 있는 그림이나 사탕 색깔의 풍경화, 스파게티가 꼬인 것 같은 고속도로 그림들을 그려 왔다. 우리가 보았다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지나쳤을 일상적 광경을 티보는 마치 천상의 것처럼 표현해 냈다. 284

 

 

 

 

 

 

 

 

 

 

 

 

 

 

 

 

 

 

 

 

 

 

 

 

샤르댕이 18세기에 오지그릇과 죽은 토끼로 하던 일을, 오늘날 티보는 검볼머신과 호박파이, 고기와 치즈를 파는 델리의 카운터, 립스틱, 그리고 핫도그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티보의 그림 역시 상실한 것들을 추억한다. 그림 속의 사물들은 아무 무게도 없는 듯 텅 빈 공간 속에 고립되어 있다. 이들은 너무나 특이한 방식으로 빛나고 있어서 거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데 천상의 빛이 아니면 수술실의 빛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참 보다 보면 티보의 그림은 단순한 즐거움보다는 뭔가 복잡한 걸 전해 준다는 걸 알 수 있다. 샤르댕처럼 티보의 것도 본질적으로 기억에 가까운 이미지이고 이는 언제나 복잡한 양상을 띤다. 티보의 그림에 대한 반응은 실제의 세상과 우리가 바라던 세상 사이의 틈에서 천천히 우리 머릿속에 입력된다.

언젠가 작가 애덤 고프닉이 표현했던 대로 티보는 우리에게 진짜 치즈가 아니라 플라톤적인 치즈를 제공한다. 티보의 작품에서 현실과 욕망의 차이는 어쩌면 샤르댕의 그림에서보다 강도가 높아서, 그림을 처음 보고 즐거움을 느낀 후엔 슬픔이 물려오는 걸 맛보게 된다. 티보의 작품은 완벽한 세상에 관한 그림이 아니다. 그보단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 아직도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관한 것이고, 우리는 그저 그림이 갖고 있는 가상적인 면에 잠시 기대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꿈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298-299

 

 

 

 

 

우리가 그림 속 핫도그나 립스틱을 보고 웃는 건 이들이 묘지의 비석처럼 비장하게 줄줄이 서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복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다. ....

동시에 그의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주를 우리는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파이마다 미세한 차이가 있고 이는 표현적이고 즉흥적인 손놀림을 보여 준다. 티보는 주변 세상을 감상할 때는 신중하게 분별해서 보라고 제안한다. 다 똑같은 파이지만 똑같이 그리진 않았다. 300

 

 

 

 

 

 

웨인 티보, 진열된 케이크(7개)

 

샤르댕의 그림처럼 그의 그림도 행복감을 주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그림이 그 자체로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더 나아가 그림에서 묘사되는 보잘것없는 사물과 사람에 대한 어떤 메시지이기도 하다.

 가느다란 다리가 받치고 있는 원판 위의 케이크들을 그린 그림들을 보자. 뒷줄에 있는 프로스팅 케이크의 수직선이 앞에 있는 초콜릿 케이크 안에 든 크림의 결이 그리는 수평선과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엔젤 케이크 가운데 뻥 뚫린 원형과 레몬 커스터드 파이의 노란 동그라미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케이크들의 수가 모두 일곱이라는 것과 양 옆에 세 개씩 케이크가 있는, 가운데 케이크 위엔 빨간색 아이싱으로 그려진 하트도 놓치지 말자.

맛있다.

 

 

 

 

 

 

음악은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예술이고, 그 경험 자체가 무척 강렬하면서도 긴박해서 감동을 주었던 음조차 듣는 순간 사라져 버리지요, 미술은 (비디오와 퍼포먼스를 제외하면) 물러났다가 돌아와서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을 다른 식으로 움직이게 하지요. 아니면 적어도 나는 다른 식으로 움직인다고 할까요. 317

 

 

 

눈을 뜬다는 것은 실제로 생각보다 훨씬 힘들어요. 어쩌면 우리는 자라면서 보지 못하도록 훈련되어 왔다고도 할 수 있어요. 주변에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각적으로 정지되어 있도록,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가 보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도록(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기 전에 설명을 먼저 읽는 것처럼) 훈련되어 온 거죠. 본다는 건 때로 그저 믿는 걸 뜻해요. 봐야 하는 방식대로 보는 것에 '실패'할 준비가 되어 있고 자기만의 감각으로, 자신에게 의미 있는 뭔가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대개 미술에 관한 글들은 눈을 뜨고 있으라고 권하지 않아요. 어떻게 보라고 지시할 뿐이죠. 하지만 가장 값진 교훈은 예술가들로부터 얻을 수 있어요. 그들은 그냥 보는 행위를 즐길 뿐, '옳게' 노는 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죠. 319

 

 

 

 

 

많은 동시대 미술들은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도록 고안된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 사람들이 미술을 보며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을 갖는 건 이해할 만해요. 그런 예술에 대한 글들은 아주 거만할 때가 많지요. 부와 권력과 배타적인 인상을 주는 이런 글들은 단순히 불쾌할 뿐 아니라 아주 역겨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삶에서 쉬운 건 없듯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우리 자신이 노력을 해야 해요. .... 동시대 미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회의는 건전하지만 냉소는 그렇지 않아요. 이런 정신만 있다면 누구나 동시대 미술을 즐기고 이해할 수 있어요.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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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28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레 미술작품 사진 올려주셔서 눈이 배부르고 갑니다.

slobe00 2020-01-28 18:13   좋아요 1 | URL
앗, 감사합니다~~~~~ ^^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ㅎㅎ
 

 

 

 

 

 

 

 

 

 

 

 

 

 

 

 

작년에 읽은 이택광의 <버지니아 울프 북클럽>은 좀 실망스러웠는데, 이번에 읽은 알렉산드라 해리스의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는 아주 좋았다. 짧은 분량이 아쉬울 뿐이었으니.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적인 소설과 에세이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책들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듯. 다 좋은 책들이었다.

올해에는 읽다 만 <막간>이나 <제이콥의 방>, 그리고 아직 구하지 못한 허마이오니 리의 버지니아 울프 전기를 읽고 싶다.

 

 

 

 

 

 

 

 

 

 

 

 

 

 

 

 

 

 

 

 

 

 

 

 

 

 

 

 

 

 

 

 

 

 

 

 

 

 

 

 

 

 

 

 

 

 

 

 

 

 

 

 

 

 

 

 

 

 

독창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줄거리였지만(출항), 울프는 이 흔한 소재를 가지고 모종의 아스라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뚜렷한 형태로 구체화되기를 거부하는 어떠한 의미를 가리켜보였다.

...이 침묵 속에는 여자들에게 주입되어 있는 수동성에 대한 울프의 맹렬한 비난이 깃들어 있지만, 그런 맹렬함이 터져 나올 만한 직접적 통로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테렌스는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여자들의 시각을 떠올리면서 "피가 끓지 않습니까?" 라고 묻지만, 독자의 귀에 들리는 것은 레이첼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막연한 대답과 레이첼이 겨우 꺼내놓는 양보와 타협의 몇 마디 뿐이다. 67

 

 

 

 

 

 

 

 

 

 

 

 

 

 

 

 

<밤과 낮>은 이행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소설이자 "관습적 문체"가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한 소설이자 마구 뻗어나가던 책 전체를 끝부분에서 하나의 단순하면서도 비전의 속성을 띠는 이미지로 압축하는 소설이다. 캐서린이 랠프와 함께 환한 가로등길을 걷는 장면이다.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가 풀린 느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된 느낌이었따. 우리가 혼돈과 혼란으로부터 평생을 바쳐서 다듬어내고자 하는 비뚤어짐 없는, 모자람 없는, 허술함 없는 유리구슬을 캐서린은 아주 짧은 순간 두 손에 담은 느낌이었다."

울프의 이후 소설들이 지향하는 선명한 비전을 미리 일별할 수 있는 순간이다. 77-78

 

 

 

 

 

 

 

 

 

 

 

 

 

<밤과 낮>은 울프의 전시 소설이다 (1918년 가을에 전쟁이 끝나면서 이 소설도 완성되었다). <밤과 낮>을 쓰는 동안 바람결에 실려 오는 소리들 중에는 프랑스 북부의 포탄소리도 있었다. 낮게 우르릉거리는 죽음의 소리는 약했고, 멀었고, 어떤 일상과도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

나중에 <등대로>에서 울프는 앤드류 램지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꺽쇠 괄호에 넣게 된다. 그래서 전쟁이 비현실적이고 먼 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사가 충격적인 죽음, 개죽음이라는 느낌은 그만큼 더 강해진다.

혹자는 울프가 자기 시대의 대규모 분쟁들을 직접 다루지 않은 작가라고 비판하지만, 울프의 모든 전후 소설들은 우리가 전쟁으로 무엇을 잃어버렸나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다. 79

 

 

 

울프에게 일기는 소설과 마찬가지로 삶의 덧없음에 저항하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하루하루가 기록도 없이 그냥 흘러간다는 생각이 울프에게는 상실감의 원천이었다.

"삶이라는 수돗물이 그냥 허비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울프였다.

 

버지니아가 기록하고 싶어 하는 일 중에는 외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들도 있었다. 버지니아에게 더없이 행복한 하루는 더없이 조용한 하루인 경우가 많았다. 버지니아와 레너드는 일과표를 준수함으로써 모종의 생산성을 확보하는 하루하루에서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 1922년 어느 목요일의 하루 일과를 완수한 버지니아는 그 날을 가리켜 "아름다운 서랍들을 아름답게 조립해서 만든 완벽한 캐비닛 같은" 날이었다고 했다. 버지니아에게 깊은 만족감을 안겨운 하루였다. 84

 

 

 

 

 

 

 

 

 

 

 

 

 

 

"삶이라는 수돗물"은 그렇게 울프의 일기와 편지를 채워나갔다. 87

 

 

 

 

과거와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울프의 머릿속에 문득 소설 한 편의 형태가 떠오른 것은 평소처럼 타비스톡 스퀘어를 산책하던 1925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울프의 다른 많은 소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떠오른 형태가 끝까지 유지되었다. 울프는 산책에서 돌아오자마자 노트에 "H" 모양을 그렸다. ("두 개의 직사각형이 한개의 선으로 연결된 모양")

과거, 중간 휴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이렇게 세 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등대로>의 플롯이자 요점이었다.

울프 자신도 인정했듯이 <등대로>는 가족력의 유령들을 잠재우는 작업이었다. 121

 

 

 

 

 

 

 

 

 

 

 

 

 

 

 

바로 이런 단순한 사실에 감정적 무게를 실을 수 있다는 것이 울프의 특징이자 강점이다. 울프는 어떤 면에서는 복잡미묘한 작가지만, 울프가 늘 추구하는 것은 아무 군더더기 없는 더없이 단순한 문장이다.

완성을 앞둔 릴리에게 남은 일은 화폭의 중심에 선 하나를 긋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선은 바로 그 선이어야 한다.

"계단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고 그림은 아직 어렴풋했다. 갑자기 맹렬한 기세로, 마지 그 선이 한순간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 릴리는 거기에, 중심에 한 선을 그었다."

울프는 이런 분명함의 경험들을 설명할 수 있는 모종의 철학을 마련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어렴풋했던 것들이 아주 잠시 분명해지는 충격적이거나 계시적인 순간들을 울프는 살면서 계속 경험해오고 있었다. 129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울프에게 깊은 만족의 원천이었고, 자신의 돈이 삶의 질을 높여 주는 물건들로 번역된다는 사실은 울프 자신에게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상상력의 산물들을 꽃병이나 의자로 바꾸어놓는 돈의 연금술 앞에서 울프는 항상 경이로워했다.

<댈러웨이 부인>으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서 욕실 하나와 화장실 두 개로 바뀌었고 (그 중 하나의 이름은 '댈러웨이 부인 화장실'이었다.)

<등대로>로 번 돈은 자동차로 바뀌었다. 자동차는 정신을 풍요롭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기만의 방>에서의 고급 런치와 같은 기능을 한다 (좋은 글은 정신의 풍요로움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울프 부부의 싱어 자동차 (애칭은 '등대')가 울프의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는 <올랜도>의 문장 속에서도 감지된다. 장면이 휙휙 바뀌고 세상이 활짝 열린다.

.... <올랜도>로 번 돈은 몽크스 하우스에 울프의 새 침실을 마련하는 데 들어갔다. 146-148

 

 

 

 

 

 

 

 

 

 

 

 

 

 

 

 

 

 

 

실제로 울프는 <세월> 곳곳에는 사실들에게 극도의 아름다움을 허용함으로써 자신이 일상의 것들을 미학적 쾌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세월>은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같은 작품, 정확히 포착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고, <세월>의 등장인물들은 "또 다른 삶", "또 다른 세상"에 대한 막연한 비전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세월>에서도 이면의 패턴을 찾는 일이 걔속된다는 뜻이다.

엘리노어는 이렇게 자문해보기도 한다.

"그 패턴을 만드는 건 누구일까? 그 패턴을 생각해내는 건 누구일까?" 18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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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이긴 하지만 미국의 화가 엘스워스 켈리도 1950년대 후반부터 일상적인 세계에서 발견한, 작지만 감동적인 것들을 그렸다는 면에서 피핀과 유사하다. 건물에 드리운 햇살이나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책상의 모서리, 납작하게 눌린 버터 덩어리 등 일상의 꾸밈없는 사실들에서 아주 단순한 형태를 걸러내어 현기증이 날 정도의 색들을 칠했다. 이들을 보면 그림의 원천이 된 일상의 매력들이 궁금해진다. 그의 그림들은 미묘한 시각적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캔버스 크기의 1인치 차이나 이들을 벽에 건 위치의 작은 차이조차 거의 윤리적인 선택같이 느껴진다.

 

 

 

 

 

 

 

 

 Austin church - Ellsworth Kelly's Temple for Light

 

 

 

 

 

 

 

 

 

켈리의 작품들은 우리들도 그런 미묘한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작품들은 마치 "당신은 영리하군요. 왜냐하면 단순함이 쉽지 않다는 걸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라고 말하는 듯하다. 실제로 단순함은 쉽지 않다. 켈리의 그림들은 세상이 그런 작은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 준다. 그림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민주적이다. 그것이 뭉그러진 버터 덩어리가 됐든 펄럭이는 깃발이 됐든 우리만 준비가 되면 언제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286-287

 

 

 

 

 

 

 

 

 

 

 

 

 

 

 

 

 

이것이 바로 평범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모든 위대한 예술의 공통적인 메시지다. 이들은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나 피카소 같은 영웅적인 예술가들은  신들과 영웅과 신화적인 세상을 불러내 우리를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지게 하고 감정을 격앙시켜서 좀 더 높은 영역으로 들어올린다. 하지만 에두르는 예술가들이야말로 한 박자 늦추고 마음을 가라앉혀 우리가 보지 못하던 현실을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도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화가들은 외부 세계에 대해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고 했는데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이 바로 그런 예였다. 287 

 

 

 

샤르댕은 그가 스스로 정한 영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였고 그 영역은 말할 수 없이 좁았다. 파리에서 반세기에 걸쳐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 샤르댕은 3-4피트(1미터 안팎) 안에 있는 코앞의 것들에 집중하면서 보냈다. 그는 똑같은 오지그릇, 과일, 달걀, 죽은 토끼를 그리면서 때로 하녀들이나 아이들과 섞어 그렸는데 이들은 차분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주변 정물과 잘 어울렸다. 288

 

 

 

 

 

 

 

 

 

 

 

인물들은 얀 베르메르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더 견고하고 진짜같다. 베르메르가 그린 인물들은 이 세상 사람들 같지 않아서 거의 신성해보이기까지 한다. 신비로운 대기를 채우기 위한 빛의 사물이랄까.

 샤르댕의 인물들은 하녀와 학교 선생과 주부들인데 언제나 뭔가에 열중하고 있어 우리의 존재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그들의 이런 몰입은 샤르댕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정서이다. 엄마가 보닛을 고쳐 쓰는 동안 소녀는 거울을 보고 있기도 하고, 간호사가 냄비의 기다란 손잡이를 팔로 받치고 삶은 달걀을 까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림에서 샤르댕은 짧은 순간들을 영원으로 늘이고 있다. 289

 

 

 

 

 

 

 

 

 

 

그 과정에서 그는 뭔가 사소한 것을 보았다는 느낌, 그리고 기억에 남을 뭔가 인상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을 보았다는 느낌을 동시에 전달한다. 감각적인 기억은 기억하고 있는 대상의 중요성을 한껏 높이는 신기한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어떤 냄새나 음악의 곡조, 한 줄기 바람은 즐거웠던 여행이나 어린 시절 놀던 일, 죽은 사촌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거기서 기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프루스트가 샤르댕을 그토록 좋아한 건 당연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경험을 했다. 일상생활과 정물을 보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샤르댕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로 기억을 불러내더라도 마음속에 그런 정서가 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의식은 스스로 돌이키기엔 너무 게으르고, 샤르댕이 와서 이를 붙잡아 의식 속으로 불러내기 전까지 그 기억은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온건하고 부드러운 색조의 샤르댕의 그림이 '울림 있는 강한 어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샤르댕은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단순한 현실 속의 더 깊은 진실까지 밝힌다고,  그리고 삶에서처럼 그림에서도 진실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다시 말해 색과 형태의 상호작용과 조화로운 기하학을 통해 그 밑에 깔려 있는, 세상을 이루는 기본 질서가 드러나고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 290

 

 

 

 

 

샤르댕의  다른 그림처럼 이 그림은 익숙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주면서 편안하고 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 은색 컵과 크리스털 술병, 구리 잔들은 모두 타원형이어서 화면 전체에서 서로서로 호응을 이룬다. 완벽한 평화와 균형을 이룬 그림이다.

예술은 컵에도 접시에도 거리에도 있다. 291 

 

 

 

 

오늘날의 우리는 그가 진솔했기에, 심오한 예술가이기에, 또는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예술가로서 좋아한다. 드니 디드로가 샤르댕을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건방짐도 속물근성도 섹스도 없다. 양파는 양파가 양파였다.

회화에 대한 이렇게 정숙하고 겸허한 접근 방법이 서양미술사를 통해 가장 선정적이고 화려하고 수사학적으로도 거창했던 시대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로코코는 샤르댕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수아 부셰의 탁월한 기량으로 대표되던 시대였다. 샤르댕의 예술은 대부분의 로코코 예술과 대조적으로 섹스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에서 침대보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림 속에 에로티시즘이 있다면 그건 그가 '사랑스레' 만진 물감을 볼 때이다. 고들여 칠하고 또 칠한 물감은 굉장히 관능적일 수 있다. 294

 

 

 

 

 

무슨 이유에선지 샤르댕은 음식을 그려도 신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내 생각에 그 이유는 그림의 고요함이 지니는 어떤 특별한 성격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그림들은 평범한 사물들이 지닌 존엄성에 대해, 그런 사물들을 표현할 수 있는 회화의 힘에 대해, 그리고 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는 관객이 경험할 '고양됨'에 대해 특별한 종류의 조용한 경의를 표한다.

샤르댕의 그림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림 속의 체리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쩜 이렇게 투명해 보일까를 궁금해하다가는, 체리의 수까지 세게 된다. 체리는 ㅅ다섯 알인데, 이는 복숭아 두 개와 파란 사과 하나, 갈라진 살구의 두 부분의 총합과 일치하여 그림에 완벽한 균형감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별거 아닌 관찰일지 몰라도 발견하게 되면 놀랍다. 삶에 있어 사소한 사실들이 더 큰 진실을 푸는 열쇠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사 속에서 샤르댕의 작품들은 이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의 가치를 기록하는, 작은 사실들을 집대성한 편찬물이라 할 수 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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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관에서 아우라를 내뿜는 원본 모나리자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모나리자 엽서. 나(데이미언 허스트)는 그 두 가지가 모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42

 

 

 

 

 

 

 

 

 

데이미언 허스트의 스핀 페인팅

 

 

 

 

 

 

 

 

데이미언 허스트의 도트 페인팅 

 

 

 

 

 

 

 

 

 

 

 

데이미언 허스트의 포르말린 시리즈 

 

 

 

 

 

 

 

 

 

 

 

데이미언 허스트, 실제 나비를 사용한 나비 시리즈, 그 앞에 선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의 조각 The Miraculous Journey  - 카타르, 도하 전시

 

 

 

 

 

 

 

왜 곡선에 집착하나.

- 정지해 있지 않고 열정적이니까. 마치 여체처럼. 나는 비행기, 자동차 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빠른 '움직임'을 건축에 반영하고 싶었다. 영국박물관의 '엘긴 마블스'를 본 적이 있나. 거기 방패를 든 전사들이 새겨져 있다. 그 조각에서는 방패의 '무게'가 느껴진다. 내(프랭크 게리)가 건축에 반영하고 싶은 건 그런 거다. 126

 

 

미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창의성이란 우물에 작대기를 넣어 휘휘 저었을 때, 그 끝에 걸려 나오는 어떤 아름다움" 이라고 했다. '창의성'이란 예상치 못한 어떤 '발견'이다. 건축에서의 '창의성'과 자연과학의 인간 유전자 발견 같은 건 같은 이슈라고 생각한다. 암 억제 세포와 내 작품의 모양이 신기하게도 닮았더라. 130

 

 

 

 

 

프랭크 게리, 구겐하임 빌바오

 

 

 

 

 

 

프랭크 게리, 댄싱 맨션 인 프라하

 

 

 

 

 

 

프랭크 게리, 뉴욕 레지덴셜

 

 

 

 

 

 

프랭크 게리, 메종 루이비통 인 서울

 

 

 

 

 

 

프랭크 게리, 와인 시티 인 리오하

 

 

 

 

 

 

 

 

 

 

 

 

앙리 르롤, 오르간 리허설

 

 

 

 

 

 

 

 

 

 

 

하나의 화면을 여러 개로 분할해 연관 없어 보이는 여러 이미지들을 뒤섞어 보여주는 기법으로 주목받았다. 왜 그렇게 그렸나.

- 우리의 삶이란 게 그런 식으로 움직이니까. 수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게 인생 아닌가. 그림이 '눈의 경험'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렇게 그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한 화면에 여러 사건이 펼쳐질 때, 눈은 세계의 복잡성을 경험하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179 데이비드 살리

 

 

데이비드 살리, 피에로

 

 

 

 

 

데이비드 살리, 애쉬튼

 

 

 

 

 

 

데이비드 살리, comed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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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라는 말이 처음 생긴 것은 19세기였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지적한 것처럼, 빅토리아 시대에 섹슈얼리티를 분석하고 억압하는 데 집착한 것이 오히려 이를 더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란을 방지하는 법안이 바쁘게 통과되고 있을 때 시장에는 외설물이 넘쳐 났다. 새롭게 등장한 사진과 영화가 더 발달하게 된 것도 어떤 면에서는 빅토리아 시대에 누드 사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시각적 도덕성의 다양한 정도를 즐기면서 점잖음과 음탕함의 동침을 꾀했다. 그래서 화가들은 자극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 겉으로는 진지한 그림처럼 가장해서 역사적인 주제로 꾸민 누드를 그렸다. 이를테면 혹사를 당한 듯한 젊은 처녀들이 바위나 기둥에 사슬로 묶여 있거나 천을 두르고 배에서 있거나 또는 옷을 벗은 젊은 노예들이 고대 로마의 원형 대경기장에서 사자에게 먹히기 전 영웅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이다. 욕탕에 몸을 담근 고대 로마인들 옆에서 볼이 발그레한 영국 소녀들이 요염한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자기들이 그리스인이라도 되는 양 벌거벗은 채 해변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소년들의 그림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엔 그 경계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225

 

 

 

 

 

빅토리아 시대 화가인 Ernest Normand의 그림들

 

 

 

"시각적인 진실은 기존의 교과서적인 시각이 거짓이라는 걸 알려주지요. 세잔이 옳았어요. 탁자의 가장자리 선처럼 하나의 선은 테이블보 같은 물건에 의해 끊어지는데, 그 선은 테이블보를 가로지르는 논리적 연장선상에서 벗어난 다른 위치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 같아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그게 눈이 보는 방식이고 사실주의의 본질이에요." 230-231

 

 

 

이탈리아의 위대한 정물화가인 조르조 모란디는 볼로냐에서 은둔하듯 조용히 살았다. 어머니와 세 명의 미혼 누이들과 한 집에 살면서 침실을 작업실로 사용했다. 세상의 변하는 취향에 대해선 신경 쓰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평생 동안 병과 그릇과 비스켓 통 등을 그렸다. 섬세하고 작은 것을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보라는 그의 메시지는 간단했지만 아주 풍성한 것이 되었다. 232 

 

 

 

 

 

 

 

 

조르조 모란디

 

 

 

 

 

벤야민의 예언처럼 원작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우린 뭔가 잃어버리긴 했다.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떠나는 순례 여행이 그것이다. 우리는 인터넷과 대중매체를 통해 도배된 작품 이미지에 노출되어 있고 미술관들은 작품을 여기로 보냈다가 저기로 보냈다가 한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런 문화 때문에 직접 가서 보는 '고유한' 경험이 더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다. 거기까지 가는 여행이 별로 힘들지 않더라도, 미술 작품을 보러 떠나는 순례 여행은 작품 감상에 있어 바람직하고 본질적인 요소인 '타자적' 환경을 제공해 준다. 삶에서 특별한 것을 표현하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를 되찾게 해 준다. 236-237

 

 

모든 작품은 우리가 감상하는 그 순간, 주변 환경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 장소 특정적 예술이 된다. 그게 붐비는 미술관이든, 친구의 거실이든, 또는 사람이 없는 성당이든 마찬가지인데, 특히 거기까지 간 이유가 그 작품을 보기 위해서였을 때는 더욱 그렇다. 238

 

 

 

 

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마파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었다. 육군 주둔지에 있는, 개조한 대포 격납고 두 채에 설치된 작품 촬영 때문이었다. 거대한 반원형 지붕의 격납고는 마치 쌍둥이 고딕 성당 같아 보였다. 격납고의 작품은 저드의 걸작이었다. 그는 작품이 공간을 단순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더욱 명료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납고 안에는 41*51*72인치(약 104*130*183센티미터) 크기의 가공 알루미늄 상자 100개가 배열되어 있는데 각 상자의 내부는 모두 달랐다. 격납고 측면의 문들을 개조해서 만든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은빛 금속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이를 보면 그의 조각들이 다가가기 힘들고 무겁고 기계적이고 단조롭다는 선입견이 허물어진다. 미니멀리즘이 본질적으로 역설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순례를 통한 작품 감상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또한 느끼게 된다. 작품을 찍은 사진만 봐서는 반사된 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반짝이는 금속 표면에 얼굴이 거꾸로 비치고 격납고 건물 내부도 상자 표면에 끝없이 반사된다. 마치 베네치아 궁전의 고딕 세공이 대운하 수면에 반사되는 듯하다. 집착처럼 반복되는 상자의 형태가 변하는 햇살이 만드는 우연적인 효과와 공존했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금속 상자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햇살의 파장으로 흐물거리는 것을 보는 감각적인 즐거움 또는 시각적인 놀라움 때문에 작품에 손대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잊을 수 있었다.

 저드는 여행을 하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곳에 작품을 두었고, 가서 볼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관객인 우리에게 남겨 두었다. 동시에 그는 예술의 위엄을 회복시켰는데 그것은 도덕적 주장이자 또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 즉 차근차근 참을성 있게 하자는 은유이기도 하다. 저드는 그의 추상 작품에 비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걸 꺼렸지만, 멀고도 먼 길을 가서 그의 성소를 보고 나면 그걸 간과하기 힘들다. 259-261

 

 

 

 

 

 

호레이스 피핀의 그림들은 언젠가 코넬 웨스크가 말한 것처럼 "미국 예술 속에 있는 에머슨의 풍부한 전통을 잇는 것으로, 평범하고 흔해 빠진 일상의 삶 속에 숨겨진 영화로움에 초점을 두었다." 에머슨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탈리아나 아랍, 그리스의 예술이나 프로방스의 음유시처럼 거창하고 멀리 있고 낭만적인 것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평범함을 껴안고, 발밑의 익숙한 것들, 낮게 있는 것들을 탐색한다."

 

일요일 날 아침을 먹으려고 모인 젊은 흑인 가족, 시무룩한 손자와 앉아 도미노 게임을 하는 주부(아마도 밖에는 비가 오고 있는 것 같다.), 자기 구역을 도는 우유배달부, 길거리 모퉁이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중년의 남성 4중창단,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남자가 피핀이 그린 그림들이다.

대부분 1940년대 그려진 이 그림들은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에 조용히 천착하는데, 1890년대 삶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서려 있다. 284

 

 

 

 

 

 

 

 

 

 

 

 

 

 

 

 

 

피핀은 성경에 나오는 얘기나 역사적인 장면, 풍경들도 그렸지만 아무래도 평범한 가정생활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의 그림은 순진하거나 토속적이라기보다는 진솔하고 설득력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을 애정을 갖고 꼼꼼하게 그렸고, 보석상의 진열장에서처럼 어떤 것들은 우리가 더 잘 볼 수 있도록 화면 앞쪽으로 튀어나오게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웨스트의 지당한 표현대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들을 보여 주고 있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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