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반쯤 농담이었겠지만 아렌스버그는 한술 더 떠서 그 작품이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형태"라고까지 했다. 이 말은 뒤샹에게조차 놀라웠다. 나중에 뒤샹은 사람들이 그의 레디메이드, 즉 상점에서 산 변기나 병꽂이, 금속 빗, 자전거 바퀴, 눈 치우는 삽 같은 공산품을 아름답다고 칭송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난 미학이란 것에 반대한 거였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병꽂이나 변기를 그들의 얼굴에 들이대며 덤빈 건데 이제 사람들은 그걸 두고 미적으로 아름답다니 황당하지요." 78

 

 

 

뒤샹의 작품은 조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때까지 조각이란 어떤 대상을 재현한 것, 인간의 손으로 어떤 재료를 환영으로 변형시킨 것, 영적인 모험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레디메이드는 보는 그대로였다. 변기는 그냥 변기였다.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전통 조각가들의 경우처럼 차별적인 취향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뒤샹은 '차별의 예술'대신 '지정의 예술'을 들여놓은 것이다. "나는 이 눈 치우는 삽을 예술이라 선언한다."라고 뒤샹이 말하는 순간 삽은 예술이 되었다.

 

그게 예술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것인가? 같은 이유로 누군가 삽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감히 누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78

 

 

 

 

 

아름다움은 그렇게 해서 공인된 비례를 따르는 이상적인 형태와 관련지어졌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단순히 수학적 공식을 따르는 일이라면 진부해지고 말 것이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여서, 뭔가 전형에서 벗어나고 예외를 세울 때 우리는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한다. 인체를 재현하는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유일한 공식을 따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알브레헤트 뒤러의 누드는 미켈란젤로나 피카소와 다르며, 또 루카스 크라나흐의 것과도 다르다. 말하자면 이 예술가들은 모두 무언가 색다른3.

2 걸 창조하기 위해 고전적 비례를 왜곡시켰다.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말은 이를 잘 요약해 준다. "뛰어난 아름다움 중에 비례적으로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81

 

 

 

 

 

또한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질에 달려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명백하다면 깊이가 전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아서 단토는 아름다움이 그저 장식적인 것에 그치지 않으려면 예술 속에 더 깊은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예술의 본래적 의미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91-92

 

 

 

 

 

 

예술은 어떤 차원에선 이미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예술이란 우선 우리가 어느 순간 소통하는 물리적인 오브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작품을 보고 난 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억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기억은 생각이고 예술가가 심은 정신의 씨앗이다. 그리고 이는 작품을 보고 기억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게 재현된다. 예술의 힘은 변하는 기억, 만질 수 없는 개념으로서 개개인의 의식을 거치며 번성한다는 데 있다. 114

 

 

 

 

 

케이지의 조용한 혁명 후에 이어진 예술 중에는 물론 실망스러운 것도 적지 않았지만 그 밑에 깔린 생각 자체는 잊어선 안 된다. 감각을 깨워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을 들어 올려라. 예술이란 고양된 자각의 상태에 관한 것이다. 일상을, 적어도 일상의 부분 부분들을 예술 작품 대하듯 하라. 118

 

 

 

 

렘브란트 같은 작가의 작품들은 예술이고 비싸니까 당연히 수집할 가치가 잇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힉스 씨가 증명하듯 수집가들이란 미적으로나 금전적으로 가치가 있건 없건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예술에 있어 취향이 그런 것처럼 수집에 있어 가치란 수집가의 감식안에 있고 진정한 가치는 상징성이 있을 때 최대가 된다. 수집품들은 효용을 잃을 때 상징성을 띠게 된다. 133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이냐를 고민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붓 자국을 없애는 거였어요. 선명한 붓질이야말로 추상 표현주의의 핵심이었으니까요. 그게 내가 배운 거였죠. 드 쿠닝은 붓질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고 할 수 있어요. 굉장했죠.

빌렘 드 쿠닝, 무제

 

 

 

 

하지만 나(펄스타인)는 매끈하게 마감된 표면을 택했어요. 그래도 그림의 각 부분마다 고유한 질감이 있죠. 살은 살대로 트랙터는 트랙터대로. 그림이란 원래 완전히 평평할 수는 없어요.

 

 

필립 펄스타인, 두 모델과 같이 있는 무대의 꼭두각시 미키마우스, 점보제트기, 장난감 트랙터 

 

 

몬드리안의 그림도 자세히 보면 울퉁불퉁해요. 표면이 살아 있죠. 그는 고쳐 가며 오래도록 그림을 그렸는데, 선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까지 그림을 오랫동안 쳐다보고 그림을 고쳤어요. 그게 몬드리안 그림이 지닌 시간적 요소예요. 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를 뚫어져라 쳐다보곤 하는데 단지 그림 속 형태들이 통통 튀는 걸 보기 위해서예요." 223

 

 

몬드리안,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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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밥 로스에서 매튜 바니까지 예술 중독이 낳은 결실들

 

 

 

 

그러니까 이 책은 창작과 수집과 심지어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조차 매일의 걸작이 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왔다. 예술을 즐긴다고 매일 매일이 완벽해진다는 얘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시간의 대부분을 예술 감상에 보내다 보니 예술에서 얻어진 어떤 교훈으로 인해 가장 평범한 일상조차 풍부해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 교훈이란 아름다움은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 그리고 아름다움은 우리 자신이 발견하고 창조하고 또 재창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13

 

 

 

오노레 발자크는 언젠가 <알려지지 않은 걸작>이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자기가 그리고 있는 그림에 극단적으로 중독된 화가의 이야기였는데, 다른 화가들은 무시했지만 그는 자신의 그림을 부인, 애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파블로 피카소는 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파리의 그랑 오귀스탱 가에 있는 작업실로 이사를 가기까지 했다. 16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그것은 보나르의 빛나는 내면에서 나왔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대로 보나르의 작품은 섬세하고 그의 정교한 정서적 톤을 감상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피상적인 감상도 가능하긴 하다. 왜냐면 황홀할 정도로 색이 칠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지 않으면 보나르의 연약함과 엄밀한 기하학을 동시에 읽어 내기가 쉽지 않다. 그의 그림 속 모든 것은 형체가 없이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견고한 구도를 갖고 있다. 폴 세잔의 그림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걸 보려면 그림을 광학적으로, 즉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봐야 한다. 예를 들어 곁눈으로 그림을 보거나 햇볕에 눈을 찡그리고 볼 때, 또는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을 응시할 때처럼 말이다. 25-26

 

 

 

 

 

피에르 보나르, 아침 식사

 

  미술사가 로버트 로젠블럼은 보나르의 그림 표면을 트위드에 비유했다. 직물처럼 짜인 평면이 천천히 그 깊이를 드러내고 점차 창밖의 풍경, 탁자 위의 찻주전자, 의자의 모서리, 라디에이터 옆에 열려 있는 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령같이 흐릿한, 열심히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마르트의 옆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의 전체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호기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착시 현상을 통해 우리는 어던 추론 과정이 없이는 물체를 식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바로 이것이 그림의 내용이다. 즉 마르트는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 알아내려 애쓰고 있다.

  잠시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우리는 그림 속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르트의 뒤에서 그녀와 불가피하게 엮여 있는, 가냘프고 말이 없는 거울에 비친 화가의 모습이다. 그는, 컵을 보고 있는 마르트를 보고 있는 우리를 보고 있다. 26-27

 

 

 

 

마르트는 1940년대에도 1900년도의 그림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이다. 그녀는 영원한 젊음이었고 채 부서지지 않은 희망이 꾸는 심약한 꿈과도 같았다. 보나르의 후기 작품 속에서 변한 건 빛뿐이다. 보나르의 방은 갈수록 화려한 패턴같이 되었다. 탁자엔 과일이 담긴 큼직한 그릇이 놓여 있고 커다란 창문에서 여름 햇살이 오렌지와 라벤더 향기를 담은 공기와 함께 쏟아져 들어온다. 그는 집 뒤 정원에서 자라는 재스민과 미모사, 인동덩굴, 등나무를 마치 열반의 세계처럼 그렸다. 41

 

 

피에르 보나르, 정원이 보이는 식당

 

 

 

그리고 마르트가 있다. 욕조 안에서, 식탁에 앉아서, 거울 앞에 서서 그녀는 영원히 스물다섯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보나르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향료를 바른 미라처럼 그대로였다. 그녀는 주로 그림의 가장자리에 나타난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의 핑크색 격자 벽의 구석에서 또는 작은 컵을 들고 욕실에서 거실로 나가면서 살짝 모습을 비친다. 마치 우리 시야의 구석에 존재하듯 말이다.

 

"이 작품들은 보나르의 주된 정서를 보여 준다. 그건 바로 비애이다." 새라 윗필드가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그는 종종 쾌락의 화가라 불리지만 그는 쾌락의 화가가 아니다. 쾌락이 사라지는 순간, 즉 쾌락의 소멸을 그린 화가이다.

 

이 말을 들으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생각난다. 루카 삼촌이 나보코프의 교실에서 어린 시절 읽던 프랑스 동화책들을 발견한다. 몇 십 년이 흐른 후 같은 책들을 발견하게 된 나보코프는 루카 삼촌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던 장면을 떠올린다.

 

 

 

 

 

 

 

 

 

 

 

나보코프, 말하라 기억이여

 

 

"바이라의 교실이 떠오른다. 푸른 장미가 그려진 벽지와 열린 창문,"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삼촌이 앉아 있던 가죽 소파 위 타원형 거울에 그 모습이 비친다. 삼촌은 미소를 띠며 너덜너덜해진 책을 읽고 있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느낌, 여름의 따사로움이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운다. 이 견고한 현실이 바로 지금 유령처럼 존재한다. 거울은 빛으로 넘쳐 밝게 빛나고 방에 날아든 벌 한 마리가 천장에 부딪힌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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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감동을 받은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이를 설득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은 다 웃는데 나 혼자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다. 오직 내게만 섬광처럼 꽂혀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 뭔가에 찔린 상처처럼 아파 오는 것. 그것을 롤랑 바르트는 '풍크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살아온 날의 기억을 간직한 채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내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작품의 세부에 시선이 가고 흔들리고 감동하는 것. 그 감동이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에 다른 이는 공감하기 힘든 것. 그래서 그런 내 감정을 다른 누구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바르트가 말하는 '풍크툼'이다.

이렇게 작품에서 말하는 감동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게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하지만 남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20

 

 

 

 

태양 아래 그대들 신보다

더 가련한 존재를 나는 알지 못하오!

가련하게도 그대들은

희생 제물과

기도를 바치는 입김에서

그대들의 위엄의 자양분을 얻을 뿐이오.

- 괴테의 <시와 진실> 중 26

 

 

 

 

작품은 작가가 만들지만 감상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은 보는 이의 심리를 반영한다. 그녀의 작품은 아프다. 상처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35

 

아나 멘디에타. 신체적 특성

 

 

 

 

 

시간이 흐르고 해변의 가장자리에 만들어진 멘디에타의 몸 윤곽선 안으로 파도가 치면서 바닷물이 찼다가 빠져 나간다. 그에 따라 그 실루엣을 채우고 있던 핏빛 물감이 물과 함께 쓸려 나간다. 36 

 

 

아나 멘디에타, 멕시코에서의 실루엣 작업 

 

 

궁금증이 일었다. 왜 나는 그녀의 작품이 이렇게 아플까?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예술적 도구이자 개념적 언급이다. 여성의 형상을 담은 흔적이며 낸시 스페로의 표현을 따르자면 "보편적인 여성 형상의 양식화된 상징"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들이 고통받고 인내하는 여성의 전형적인 표식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객관화된 학문적 언어로 그녀의 작품을 볼 수가 없다. 42

 

 

 

 

 

 

 

 

 

 

질리언 웨어링, 사진 연작  Signs that Say What You Want Them To Say and Not Signs that Say What Someone Else Wants You To Say 중

 

이것은 작가가 길거리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 달라"고 요청한 결과물이다. .....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저 청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64

 

 

 

 

 

 

 

 

 

현대 미술은 자주 우리를 곤경에 빠뜨린다. 일상의 사물을 예술이라고 버젓이 제시하는가 하면 아무것도 걸어 놓지 않은 텅 빈 공간을 작품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어쩌라고, 하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시기를 거쳐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애를 쓰다 보면, 매번은 아니라 할지라도 가끔은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99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완벽한 연인

 

 

 

 

 

 

따지고 보면 슬픔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추상미술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119

 

 

 

 

줄리언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이렇게 쓴다.


그리고 틀림없이 슬픔을 이겨 낼 것이다. 1년이나 5년 뒤에. 그러나 기차가 굴속을 빠져나와 태양이 빛나는 초원지대를 지나 빠르게 덜컹거리며 영국 해협으로 내려가듯 그렇게 당신이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니다. 갈매기가 기름투성이 물에서 빠져나오듯 당신은 슬픔에서 빠져나온다. 당신에게는 일생 동안 온몸에 타르를 칠하고 새털을 붙여 달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아픔이 남는다.

120

 

 

 

 

 

 

 

에바 헤세, HANG UP 

 

그림틀과 틀에 연결되어 있는 관을 통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두 개의 빈 공간을 바라보게 만든다. 얼핏 차가워보이는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소외되고 가려졌던 것들의 격렬한 슬픔이 담겨 있는 듯하다. 131

 

 

 

 

 

나이 든 사람들이 아련한 표정으로 젊음을 떠올리며 향수에 젖는 것은, 실은 그들이 젊었을 적 자신의 행동과 모습의 추한 면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180

 

 

 

 

 

 

현대미술은 감정을 움직이기보다는 지적인 놀이에 열중하는 경향이 있다. 요즘에는 작품 하나 보는 데 너무 많은 철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물론 나는 개념적인 작품들을 좋아하고 기꺼이 그 지적 유희에 동참하곤 하지만 허구한 날 그런 작품들만 보라고 한다면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204

 

 

 

 

에곤 쉴레,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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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불완전함이야말로 사람들이 음악을 찾아 듣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어떤 음악은 언어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음악을 만났을 때 우리는 망연한 침묵 속에 머문다. 이 낯선 경이에 어울리는 단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언어로는 방금 다가온 감동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순간에 세계는 확장된다. 우리는 언어를 뒤늦게 발명하고 재조합해 세계의, 음악의, 감동의 뒤를 좇아야 한다.

 

그 추적은 여정의 형태를 띨 것이다. 클래식 음악의 한 곡 한 곡이 바다라면 각 곡들의 수많은 연주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각각의 해변들이다. 이 수천 개의 바다와 수만 개의 해변 중에서 '나의' 바닷가를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을 누였다가 그때 떠오른 상념을 단서 삼아 다시 다른 영토를 찾아 떠나는 것. 이는 점진적으로 세계를 넓혀가는 모험이다. 한 장의 음반은 하나의 여정이다. 16-17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분열하는 패턴이라는 둣 화려한 색조의 키치적 요소라는 둥 작가의 특징이랍시고 알아두었던 사전 지식은 그 검은 방안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거리를 두지 못하고 멱살을 붙잡힌 채 분열 운운하는 해설이 지시하려던 '야요이 쿠사마'를 향해 곧장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쿠사마 야요이 - 점에 대한 강박. 무한한 거울방

 

작품을 이해하고 분류하려는 두뇌의 오랜 욕망에 앞서 몸과 마음이 먼저 작품과 연결되는 순간은 각별한 데가 있다. 전시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인 '나'의 일부와 작가의 일부가 만나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감상을 이끈다. 일종의 공명 현상이다. 누군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작품은, 그 떼어진 삶이 가지고 있던 인식 및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이 파장은 감상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이때 작품의 파장이 관람하는 이의 삶이 갖고 있는 다양한 파장 중의 일부와 비슷한 형태를 그리면, 관람하는 이의 내면은 공명 현상을 일으키면서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출렁인다. 예상치 못했던 체험 또는 인식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간다. 44-45

 

쿠사마 야요이

 

 

 

대부분의 교양 미술 교육이 실패하는 지점이 여기다. 작품들을 범주화시키고 거기에 인덱스를 붙이고 정리가능한 데이터로 만들어 주입하는 방식은 질문이 던져질 가능성을 높이기는커녕 일축하려고 애쓴다. 이는 근대에 들어 발생한 '일반 대중'이 만들어낸 중산층-교양-지식의 부작용이다. 부르주아를 향한 계급적 열망이 투영된 '교양'은 당혹하기를 두려워한다. 미술에 대한 '당혹하기'는 교양-지식의 미달, 따라서 자격 미달의 신호로써 (숨기고 싶었던) 본래 계급의 발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시켜주고 조직시켜주고 분류시켜주는' 지식만이 당혹스러움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구원할 수 있다. 이 지식들은 작품을 대면했을 때 그것을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세계, 섭렵하고 정복한 세계 안에 구겨넣으려 애쓴다. 이때 지식은 수렵과 착취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전시 관람은 작품 앞에 '가서' 발견하고 탐험하는 모험이 아니라 작품을 이미 구획지어진 자신의 좁은 박물관 안으로 '데려와서' 수탈하는 행위로 변질된다. 45-46

 

 

 

 

 

 

 

 

 

 

 

 

 

 

 

 

 

 

 

 

<트리스탄과 이졸데>전주곡의 불온한 매력이 집요한 반음계 화음에서 온다는 점을 확인하고 온음계에 비해 반음계가 어떤 식으로 미완의 느낌을 주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고 나면 반음계 화성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교도적인 주제를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작품의 주제와 선율이 반음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은 특수상대성이론 공식 속의 에너지 변환값을 바라볼 때처럼 경이롭다. 59

 

 

 

 

 

 

 

 

 

 

 

 

 

 

 

 

 

 

 

 

각각의 예술 작품은 예술 행위의 종착지가 아니라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 놓인 촉매이며, 그 촉매에 의해 빛과 열을 뿜는 것은 작품을 만들고 감상하는 인간들 자신이다. 85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은 밀고 닫는 행위를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문의 의미를 잃고 만다. 그것은 문과 닮은 무엇이지만 문은 아니다. 문을 문답게 만드는 것은 그럴듯한 생김새나 재질이 아니라 열고 닫고 두드리는 행위들이다. 묻지 않고서 얻은 지식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과 같다. 그 지식은 답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답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문구는 아는 것에 따라 보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해서, 구하고 묻는 과정을 생략한 채 쌓은 지식들은 어떤 신비나 놀라움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설계도 없이 재료만 쌓아놓고 집이 지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아는 만큼 보인다'를 더 능동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더 잘 보기 위해 더 잘 알고 싶어하자는 것이다.

오로지 매혹만이 이러한 능동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무언가를 탐구하고자 할 때에는 언제나 그 대상에 대한 매혹을 마음속에 품어야 한다. 교양에 대한 막연한 욕구 같은 부차적인 욕망은 지식을 얻는 것 자체에 만족해버리므로 결코 대상에 대한 애정을 대신하지 못하다. 93-94

 

 

 

 

 

 

 

 

 

 

 

 

 

 

 

 

 

 

 

 

빛과 소리와 시간이 서로 엮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며 구축한 이 아름다운 구조물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월터 머치는 바흐나 젤렌카가 푸가에 대해 말했을 법한 이야기를 한다. 즉, 모른다. 영화는 다 만들어진 순간에조차 완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상영이 끝난 뒤에도 영화는 끝없이 나아가며, 그 영화를 감상한 이는 솟아올라간 영화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김으로써 우주의 어떤 지점을 바라보게 된다. 영화 속의 어떤 순간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로켓 혹은 은하철도이며, 관객들은 그 순간들에 탑승해 결국에는 우주로 향한다. 한 편의 영화는 활주로이며 비행은 영화가 끝났을 때 관객들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당도할 저 너머의 우주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129

 

 

그가 보는 것은 영원한 과정이다. 너무나도 많은 우연들과 예기치 않은 발견들,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들, 앞뒤로 이어진 쇼트들의 물결 위로 던져진 돌처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짧은 순간들.....

월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관객의 내면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즉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영화 내의 가능한 모든 요소를 효과적인 원칙을 통해 배치한 와중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태어나버린, 마치 성소처럼 남겨진 빈방. 1인실. 누군가가 그 작은 방에 들어가 각자의 문을 잠그는 순간 영화는 완성된다. 비행이 시작된다. 130

 

 

 

 

 

 

 

 

 

 

 

 

 

 

 

 

 

 

 

 

사진이 동시대에서 벗어나 노스탤지어로 진입하는 순간, 사진이 품고 있는 고발의 메시지는 '그떄는 그랬었지'라는 회고의 형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일'로 타자화된다. 이 두 가지 반응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것이다. 이 무해함은 '우리(시공간을 넘어선 희로애락의 공동체)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 가족전>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질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타성에 젖은 휴머니즘은 어떤 고발도 발견하지 못한다. 205

 

 

 

 

 

 

 

 

 

 

 

 

 

 

 

화가 밀레는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과 같은 대표작에서 노동하는 농민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다. 이 그림들 속의 노동은 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그 엄숙함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질문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노동을 노동 이상의 행위로 치환함으로써 노동과 농민의 삶에 대한 질문을 차단시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의 농민 그림들은 열렬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노동을 감동과 숭고함으로 치환하면서 불안의 그림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206

 

 

 

 

 

 

 

 

그러나 화면 전체를 장악한 피사체가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를 뿜어내는 순간, 사진이 주는 이야기는 완결되어버린다. 사진을 장악한 강력한 표정과 몸짓은 사진을 보는 이의 시야를 제한하고 질문을 던질 기회를 앗아간다. 하나의 피사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끈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작은 세계의 의미계를 장악하는 순간에 그 피사체는 사진 속의 신이 된다. 이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일거에 상쇄시키는 편리한 숭고함이다. 던져질 수도 있었던 질문과 불편함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희로애락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형질을 획득하면서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보는 이는 마음 편히 감동에 임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사진은 고발할 힘을 잃어버린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이라고 불리는 순간, 휴머니즘은 고발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동의 형태로 번역된 휴머니즘은 민중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207

 

 

 

 

 

 

 

그럼 속도는 포기하더라도 보다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쪽도 어렵다. 기초적인 행동심리학을 소개하는 10장은 위기에 직면한 인간이 판단 오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신이 믿는 것을 가장 객관적으로 좋은/옳은 것이라고 믿는 확증 편향, 그리고 불리한 상황에 처할수록 도박적인 선택에 이끌림을 증명한 전망 이론의 관찰 결과가 그 증거로 제시된다. 실제로도 적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도박하듯 정책을 결정한 경우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강경 성향의 더 큰 문제는 해당 정책이 실패했을 경우 그 원인이 정책 자체의 방향이 아니라 강경함의 부족에서 온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판돈을 잃을수록 더 큰 판돈을 걸어 만회하고 싶어지는 도박의 늪과 비슷하다. 위기 상황에서 반사적이고 즉흥적인 대응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향한다. 248

 

무엇보다도 우선 완벽한 대응책을 가지려는 불가능한 열망과 그 열망에 따른 자기최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실패를 일찍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최단시간에 자기 체계를 재조정하는 신속한 '포기'를 '얻을' 수 있다. 미리 여러 개의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이를 위한 훈련이다. 계획을 수립하는 사람이 누구건 간에 더 많은 가능성을 시야에 넣을 수 있다면, 그래서 다양한 선택지를 함께 관찰하는 버릇을 들일 수 있다면 상황은 최악의 경우에도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253

 

 

 

 

 

 

 

 

 

 

 

 

 

 

 

 

 

 

 

 

사진의 가장 강력한 힘은 사진의 이미지 바깥에서 온다. 바로 이미지를 둘러싼 욕망의 힘이다.

설명없이 주어진 한 장의 사진은 사진을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불러와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도록 이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몸담은 세계를 이해하려들기 때문이다. 세계를 작가 자신의 방식으로 변환시켜 작품 자체를 독립된 작은 세계로 완성시키는 고전적인 미술 장르에 비해, 사진은 세계를 그대로 옮겨 보여준다는 착각을 일으킴으로써 감상자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이해는 꼭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떤 기억이나 이야기에 가깝다. 사진 이미지 속 피사체들은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이므로, 즉 이 세계의 일부이므로 감상자는 사진 이미지를 자신의 실제(라고 믿는) 세계 속으로 아무 의심 없이 끌어다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 순간 사진은 감상자의 삶 속 일부가 된다. 따라서 사진으로부터 촉발되는 이야기의 구조는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이가 누구인지, 언제인지, 어떤 상황 하에서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야기는 서사일 수도 있고 묘사일 수도 있다. 감상자가 겪었던 사건이 덧씌워질 수도 있고 그가 겪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만 존재했던 꿈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다. 사진은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한 순간을 보여주면서 그 순간을 둘러싼 과거와 미래를 감상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세계는 단 한 번도 정지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보는 이는 사진 속 정지한 세계의 과거와 미래를 자신도 모르게 써내려가고 만다.

 

그러나 너무 예쁜 사진들이 있다. 보는 순간 즉각적인 감탄을 불러내는 사진들이다. 다채로운 색의 대비로 눈을 사로잡거나 고전 미술의 전통적인 구도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회화처럼 인식되는 사진들이다. 그 아름다운 구도 속에서 세상은 이미 질서를 확충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진들의 시각적 완결성은 철저히 계산적이고 합목적적(이런 인상을 주기 위한 피사체, 저런 느낌을 주기 위한 색 배치)이어서 좀처럼 질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런 사진은 익숙하고 편안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사진을 찍은 사람과 그 사진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 시각적 쾌락에 기인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고, 이 합의는 순조롭게 이행된다. 보여주려고 하는 것과 보고자 하는 것이 일치하므로 궁금할 것이 없다. 감상자는 사진 너머를 보고자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 너머는 이미 시각적 스펙터클의 텅 빈 놀라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반면에 수수께끼로 가득한 사진들이 있다. 즉각 감탄하기에는 너무 잔잔하고, 그래서 가만히 바라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사진들이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의 사진에서는 강렬한 피사체나 완벽한 구도가 시선을 압도하는 일이 없다. 사진을 보면 무엇을 찍으려고 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주요 피사체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다른 피사체들을  내리누르지 않고 평등하게 프레임 속에 머문다. 그의 사진들 속에 있는 세계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다. 거기에는 어떤 힘의 평형 상태가 존재한다. 세계는 가만히 종이 위에 내려앉아 있고, 여기에 주제와 리듬을 부여하는 것은 보는 이의 몫이다. 감상자는 어느새 깨끗하고 고요한 사진 위에 자신의 사색을 투사하게 된다. 325-327

 

 

 

 

 

 

 

 

 

 

 

 

 

소개된 책은 <한 장의 사진, 스무 날, 스무 통의 편지들>로 안목 홈페이지에서만 구입가능하다고 함.

 

 

 

침묵은 아무리 증폭시켜도 침묵이다. 침묵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고요함은 앞으로 나서는 순간 또는 어떤 단어로 규정지어지는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이다. 정적은 자신을 내보일 수 없다. 정적은 오로지 끌어들이고 수신한다.

결국 필립 퍼키스가 찍은 사진들의 주제는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진은 지시하거나 가르쳐주는 대신에 수신한다. 묻는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이 들려주는 주제는 '당신이 침묵 속에서 홀로 빛나는 세계를 마주했을 때 당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다. 질문은 답을 얻기 전까지는 완결되지 않을 것이며, 그 답도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가수 - 그의 사진을 보게 될 이들 - 의 등장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베이스 라인 같다. 완결되지 않음으로써 영영 계속될 음악의 골조와도 같은 것. 32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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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작품은  <untitled (무제)> 박제된 말, MAURIZIO CATTELAN, 2007 

 

 

 

4. 미술 상賞

 

지난 몇 년 동안 현대미술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무엇이 위대하고 훌륭하며 가능성이 있는지 역사가 결정해 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미술가의 경력은 세계 유수의 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되고 메이저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것으로 정점을 찍는다. 수상 경력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술 상이야 말로 작가의 문화적 가치를 강화시키고 명성을 부여하고 그러한 위대함이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177

 

 

"어떠한 미술 상도 그 권위가 신성불가침의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노출이 부족해 인지도가 떨어지거나, 당시에는 그 가치를 사람들이 모른다 해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한테 상이 수여되어야 상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수상의 역사가 상의 권위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187

 

 

5. 미술 잡지

 

"어떤 문명에서든 훌륭한 미술비평가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겁니다. 가장 먼저 집을 짓고, 그러고 나서 가로등, 주유소, 슈퍼마켓, 공연예술센터, 미술관이 차례로 생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게 미술비평가입니다." 셸달의 말이다. 241

 

 

6. 작가 스튜디오

 

"루이비통 회화 연작들은 훗날 중요한 작품이 될 겁니다." 포가 선언하듯 말한다. "사람들은 아직 그걸 모르고 있어요. 그들은 그 연작들을 몇품 브랜드로만 보고 신선할 게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슈퍼플랫(superflat)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 중에서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루이비통 회화들이 미술과 명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허문다(falt)는 점을, 무라카미가 만든 용어 '슈퍼플랫'으로 설명한 것이다. 280

 

 

 

 

 

 

 

 

 

 

 

 

 

 

 

 

 

 

 

 

 

 

"다카시를 경험하려면 그의 작품에 들어있는 상업적 요소를 경험해야 해요. 수집의 대상이 되는 물건들은 사치품이든 평범한 상품이든 만족감을 주기 마련이죠. 그런 만족감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어떤 한 부분을 채워 주죠. 다카시는 미술 작품이 기억되어야 하고 그 기억은 집에 가져갈 수 있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믿고 있어요." 302

 

 

 

 

 

 

 

 

 

 

"전 스튜디오에 가면 모든 걸 세밀하게 관찰해요. 그렇게 얻은 추가 정보가 중요하다는 건 두말 하면 잔소리겠죠. 작가들의 스튜디오에 대한 변치 않는 진실이 있어요. 작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작가의 작업 방식과 태도는 물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인품에 대한 것까지 거기에 내재되어 있다는 거죠... "  311

 

 

 

미술의 영역에 대중문화를 끌어들인 워홀의 후예들과 달리, 무라카미는 그것을 뒤집에서 대중문화의 영역에 다시 들어갔다. 로스코프는 "대중문화에 대한 적대감은 현대미술에서는 이미 규정된 전제입니다. 제가 학술적으로 쉽게 인정받고 싶었다면 다카시가 단지 그것을 전복시킬 목적으로 체제 내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논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체제 전복적 공모라는 개념은 점차 진부해지고 있어요. 더 중요한 점은 이 개념이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로스코프가 결론을 내렸다.

"다카시의 미술이 훌륭한 이유, 그리고 잠재적으로 두려운 이유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면서 철저하게 상업적 문화 산업들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314

 

 

 

7. 비엔날레

 

"국제적으로 모든 것이 균일화될 거라는 끔찍한 예언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은 정보를 공유하긴 하지만 그 정보를 바탕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 내고 있거든요."  337

 

 

메디나는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한탄했다. "비엔날레는 원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이는 이미 합의된 것, 검증된 것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불안정한 것을 제도권 내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위험을 회피할 게 아니라 도전적이고 모험적이어야 해요."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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