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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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름은 들어본 듯하지만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원래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책인데, 도서관 서가를 헤매던 내눈에 그의 책이 들어왔다.
"하얀성"  밋밋한 표지에 평범한 서체로 그 평범하디 평범한 제목이 써 있는 책이 말이다. 아무레도 "노벨상 효과"라고 해야하나?
사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많은 책을 봤지만, 그 상이 주는 무거운 무게감 탓에 읽기를 꺼려왔다. 왠지 어둡고 어려우며 고리타분할 것만 같은 느낌! 바로 그게 노벨상이 가져오는 어두운 부분이 아닐까?
난 아직 젊고 어리기에 무겁고 어두운 것 보다는 젋고 경쾌하며 밝은 쪽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날 서가에서 내 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없었고, 수업시간에 쫓긴 나는 파묵의 "하얀"성을 선택했다.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엔 책 두께가 너무 얇았다.

책의 서두에선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이 떠올랐다.
왜냐? "하얀성"의 서두도 앞서 언급한 두 이야기처럼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이라는 비유가 더 어울릴만한 문서저장고에서 찾아낸 이야기라는 서두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네치아인이자 기독교인인 나는 항해를 하던도중 터키 파자의 군대('나'의 입장에선 해적과 다를바없는)에 습격을 당해 터키땅으로 끌려간다.
아직술탄이 존재하고, 지금처럼 알라를 믿는 그들의 땅에서 '나'는 살아남기위해 조금 알고있던 알량한 지식들을 이용한다.
예를들면 의술이라든가, 과학적 지식들을. 그런 재주를 이용해 '나'는 포로생활이 좀 수월해지지만  그 재주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나'는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 '호자'를 만난다.
그 둘은 마치 도플갱어처럼 닯았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처럼.
'호자'는 과학에 미친 사람이며, 지식욕구에 불타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호자에게 자신이 가져온 책과 정규교육으로 배웠던 모든 것을 전수해 준다.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호자'와 '나'는 성대한 불꽃놀이를 성대하게 치뤄내 파자의 총애를 받고, 마침내는 술탄마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과학이 곧 국력'임을 외치는 '호자'에 비해 술탄은 너무 어렸다.
아직 동물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어린술탄에 관심을 끌기위해, '호자'는 과학을 점술의 도구로 이용한다.
언제쯤 전염병이 수그러 들지, 사자의 새끼가 암컷일지 수컷일지 같은 것을 알아맞춰 술탄의 관심을 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와의 대화와 '나'가 가르쳐준 지식들에서 나왔음에도 '호자'는 그런 사실을 무시한다.
'나'  또한 그런 '호자'를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그를 괴롭히는데 머리를 쓴다.

너무나 같은 두 사람이지만 둘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기 보다는 헐뜯고 상처를 주기에 바쁘다.
아마도 '나와 너무 똑같은' 존재에 대한 거부감 일 것이다.
쌍둥이도 아니고, 피가 섞인 것도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서로 절대 가까워 질 수 없는 그들의 종교처럼 두 사람은 같지만 다르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괴로워하는 상대방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
상대를 조롱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두 사람은 다시 마주앉아 서로의 과거를 젂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또 다툰다.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글을 서술하는 사람인 '나'가 '나'인지 아니면 '호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지금껏 이야기 했던 사람의 정체 자체가 모호해 지는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의 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
'호자''와 '나'가 더이상 '호자'도 아니고 '나'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하지만 여전히 '호자'이고 또 '나' 인것.

이야기는 마치 한 인간이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나'는 관조적이며 조언자적인 성격을 띈다.
또한 '호자'는 아직 어리고 성급하며 또 그런 반면에 관심거리엔 주의력이 깊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지낸 그 긴 시간은 마치 인간의 청소년기를 보는 듯하다.
마침내 사춘기가 끝나면 인간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이야기 끝에선 두사람의 감정싸움도 없고, 두 사람의 존재는 일체되어진 듯 보인다.
마치 내 안의 날뛰던 질풍노도의 감정들이 가라앉은 것 처럼 말이다.

내가 처음 읽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
얇은 두께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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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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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렸을때,

 가령 버스를 탄다거나 모르는 길 한 복판에 서 있었다거나 했을때의 그 두근거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새로운것에 대한 신기함과 그리고 혹시? 하는 불안함.

가슴을 두근박질 치게만들던 그 묘한 감정을 말이다.

 

사실 나이가 들고, 한살 한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그런 설레임과 불안함이 섞인 묘한 기분을 느껴보지 못하게 됐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그냥 무관심히 넘어가고, 때로는 그냥 모르고 지나가기도 했다.

 

 

"야시"를 읽으면서 그 어린시절의 묘한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신들과 선택된 몇몇 자들만이 다니는 고도에 서  일어난 일을 그린 "바람의 도시"와

물건을 사지않으면 끝나지 않는 야시(夜市)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야시".

이 두 이야기는 어린시절 보았던 "어메이징 스토리"를 연상케했다.

 

모든것이 신기하고, 그리고 기묘한. 그런 세상에서 다시 이쪽세상으로 건너오기위한 모험과 사건들은 나에게 다시 어린시절에 느꼈던 묘한 감정을 되살아 오르게 했다.

마치 "고도"와 "야시"가 이세상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레임도 들게 했다.

 

작가는 "바람의 도시"에서 이 것은 성장소설이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속의 주인공이든 아니면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이든,

상관없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거창한 사상의 변화까지는 아니지만,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이야기의 주인공과 독자는 한치 정도는 성장을 할 것이다.

 

이미 어린시절의 묘한 설레임과 떨림을 잃어버린 성인에게는 과거를 다시한번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게 할 것이고,

어린 사람들에겐.. 그들이 느끼는 묘한 설레임의 신세계를 더 확장시켜줄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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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
알랭 비르콩들레 지음, 호세 마르티네스 프룩투오조 자료협조, 이희정 옮김 / 이미지박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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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리저리 비죽비죽 제멋대로 뻗친 노란빛 머리.
자유롭게 휘날리는 빨간 머플러,
복숭아께까지 내려오는 파란 윗 옷.
 
생떽쥐페리하면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의 작품 <어린왕자>속 어린왕자의 모습이 어느새 나에겐 생떽쥐페리의 모습으로 각인되어버렸다.
 
사막에 추락한 비행사처럼, 그 자신도 사막 어딘가에 추락해 그후론 다시 볼 수 없어져 버린 생떽쥐페리는 전세계 모든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인물로, 영원히 죽지않을 그런 인물이 되어버렸다.
 
몇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려진 생떽쥐페리의 그 신화적 환상의 벽을 깨는 것은 거의 금기와도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셍떽쥐페리는 영원히 늙지않고, 영원히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영원의 사간을 살아가는 존재로 생각되어왔고, 어느누구도 그런 사람들의 생각에 반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래서 <생떽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한장한장 넘길때 마다 근원을 알수없는 미세한 떨림으로 내 심장이 꽉! 쥐어졌다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생떽쥐페리. 그에게 아름답고 자유로웠던, 그리고 그가 사랑을 맹세했던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고야 알았다. 영원한 어린왕자의 이미지였던 생떽쥐페리에게 아내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볼 엄두도 내보지 못했다. 그래서 책의 첫장부터 나의 환상은 깨어졌고, 책을 한장한장 넘길때마다 깨어진 환상의 조각을 주워담는것도 포기해버릴정도가 되었다.
 
이 책은 콘수엘로가 간직했던 자료와 그녀의 비서였던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때문에 생떽쥐페리의 입장이 아니라 콘수엘로의 입장으로 그 들의 모습을 보게된다.
 
영원한 동반자였지만 함께하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가 된 앙투안과 콘수엘로. 서로를 사랑스런 애칭으로 부르며, 영원한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지만 함께 있게되면  콘수엘로의 심장은 매순간 바늘이 찔리는 듯 아팠다.
 
앙투안의 가족들의 결혼반대와 무시 그리고 앙투안의 복잡한 여자관계. 모두가 콘수엘로에게는 장애였고 상처였다. 활기차고 매력적이었지만 콘수엘로 역시 평범한 여자였고,그러한 모든것에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콘수엘로는 다른 여자들처럼 앙투안에게 따지고 들기보다 한걸음 물러서 상처와 고통은 감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켜보는데 만족했다. 이건 아마도 앙투안의 사랑을 믿었기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을 통해 나는 그야말로 있기 어렵다는  "첫눈에 반한다"는 앙투안의 사랑을 보았고, 그와 그녀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서로에게 넘쳐나는 사랑과 그에 대한 갈구를 보았다. 앙투안은 자신의 고통을 숨기며 콘수엘로에게 사랑을 맹세했고, 콘수엘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의 결말은 다들 알다시피 다소 비극적이었다. 앙투안의 실종후 콘수엘로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콘수엘로를 그다지 좋은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없었던 존재처럼 되버렸고,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책의 말미에 보면...
왜 우리가 콘수엘로의 존재를 잘 몰랐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는 부분이 나온다. 생떼귀페리를 전설화 신화적존재로 만들어버린 앙투안의 주위사람들이 그 신화를 더욱 견고히 하기위해 콘수엘로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과연 콘수엘로가 아니면 앙투안의 그 주옥같은 작품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앙투안은 어린왕자였고, 콘수엘로는 그 어린왕자의 장미였다. 비록 같이 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멀리서 갈구하면 사랑을 주고받을수 밖에 없는 그런 그들이었지만 말이다. 만약 앙투안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앙투안은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돌아갔듯이 콘수엘로에게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그리고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우리가 무의식에 쌓아올린 생떽쥐페리의 신화도 그런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 밑에는 진실이 깔려있긴하지만..
생떽쥐페리는 다른시선으로 보면 난잡한 여자관계를 가지고 부인을 힘들게 했으며, 세간의 오해로부터 아내를 지켜주지도 못한 못난 남자다.
하지만 그런 못난 남자이지만 콘수엘로라는 자신의 천생연분이 있었기에 그의 현재의 신화가 이룩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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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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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 그리고 가르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고 3 수험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아침 늦게 등교해서 영화 한편보고 하교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본 영화 중에 “메멘토” 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남자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남자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그 하루의 모든 일들을 밤이 되어 잠이 들어 그 다음 날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굉장히 충격적인 반전을 가진 영화였다.



그렇게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5년이 지나서 한 일본 영화의 팜플렛을 보게 됐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영화였다. 왠지 제목부터 풍기는 필이 이과적인 냄새가 났다. 무려 박사님께서 사랑하시는 수식이라니…… 혹시 “뷰티플 마인드” 같은 영화 이려나? 하는 생각에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서 내가 가는 커뮤니티에서 이 영화를 다시 소개 받았다. 과연 어떤 영화이길래? 하는 생각에 원작이 책을 먼저 찾아 읽게 되었다.



무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제목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이 책. 그러나 뭔가 심오해 보일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은 작고 얇고 또 가벼웠다. 여기엔 메멘토의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절박해 보이는 박사가 나온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해 낼 수 잇는 과거는 젊은 시절의 일뿐이고, 현재라고는 자신이 기억해 낼 수 있는 80분이 전부인 그런 노인이다. 하루의 일과 대부분을 수학문제 푸는 것에 소일하는 박사는 극히 한정된 사람을 만나고 수학문제에 파묻혀 살아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어떤 잘나신 분이 한 말씀이 있었다. ‘수학은 언제나 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좋아. 수학은 노력한 사람을 배반하는 법이 결코 없거든? 언젠가 답은 나오게 돼있어. 수학보다 더 솔직한 학문은 없어’ 굉장히 살의를 품게 하는 말이었지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 또한 이러한 류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신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답은 나온다는 생각을 가진 그는 수학을 사랑한다.

자신이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사는 옷에 종이를 클립으로 끼워서 매일 아침마다 보며 현실을 이해해 나간다. 마치 “메멘토” 의 주인공이 잊지 않기 위해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박사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모든 것을 쓴 종이를 클립으로 끼워 옷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닌다.

걸을 때마다 옷에서는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80분 마다 현실을 다시 인식해야 하는 박사는 타인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열 번째로 그의 집을 찾게 된 가정부와 그 가정부의 아들에게만은 그렇지 않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스스로가 미혼모가 된 가정부, 그리고 미혼모의 아들인 그녀의 아들. 사랑과 사람, 그리고 관심이 부족한 그들은 박사를 이해한다. 비록 기억을 하지 못해 이미 했던 이야기를 수 십 번, 수 백 번을 다시 이야기하는 박사이지만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은 지루한 내색도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또 비록 80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할 경험이지만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준다.



사실 굉장히 유식이 철철 넘쳐나는 박사와 고등학교를 중퇴한 미혼모, 겨우 초등학생일 뿐인 그녀의 아들이 유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박사의 하나의 버릇으로 해결된다. 박사는 가정부의 아들을 루트라고 부르고, 가정부의 생일에서 완전수를 찾아낸다. 숫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가정부와 초등학생인 그녀의 아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수학을 박사의 생활에서 배우게 된다.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이 박사에게서 배운 것은 비단 수학만이 아니다. 답을 찾기 위해 정해진 방법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도대체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수학을 통해서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만의 방식을 찾아간다.



미혼모와 미혼모의 자식, 그리고 평범하지 못한 장애자. 이들은 박사와 가정부와 그의 아들이다. 사회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 받기도 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피한다. 그래서 혼자로는 세상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박사와의 만남으로 박사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통해 야구경기를 듣고, 치과에 가고, 야구장에 갔다. 세상과의 소통을 한 것이다. 가정부 또한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사랑과 사람에 굶주렸던 자신을 깨닫는다. 박사가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을 때 느끼던 그녀의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그녀의 아들 또한 별 것 아닌 자신의 상처에 자신을 들춰 매고 병원으로 뛰었던 박사를 더 이상 창피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자 책을 올리고 얼굴을 당당히 들고 박사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다.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있던 그들이 힘을 가지고 세상에 맞서는 방법을 알아가게 된 것이다.



80분만 기억한다는 설정은 이 이야기를 극적이게 만들어 주긴 하지만 현실성을 앗아갔다.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마치 로봇처럼 80분을 기록하고 지워버리고 다시 기록하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을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설정은 이야기에 신비함과 동시에 환상적인 느낌을 부여해준다. 서로에게 의지해 한 보 전진해 나가는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마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도 그들의 동지가 된 듯했다.

나는 수학을 싫어한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만 있으면 이세상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박사처럼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면, 나도 가정부처럼 그렇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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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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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대를 많이 하게 한 작품이다. 태생이 일본이라는 점이 말이다. 소년탐정 김전일, 명탐정 코난, 식탐정, 일일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탐정만화가 쏟아지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하루키나 에쿠니 가오리 정도의 작품만 읽었던 나에겐 그래서 더욱 “용의자X의 헌신”이라는 작품에 많은 기대를 품게 됐다.

우선 책을 읽어보기 전, 다양한 루트를 통해 사전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 루트라는 게 거의 신문소개 글과 출판사 서평 정도이니, 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아마도 신문광고에 난 글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정도의 정보랄까?

사건의 전모를 파헤쳐 범인을 알아내는 여타의 추리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는 범인이 누구이고, 어떤 사건이 왜 벌어졌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 진실을 숨기고 있는가 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사람과 진실을 캐내려는 사람의 지능적인 싸움이다. 사람들은 천재에게 동경과 동시에 관심을 갖는다. 사건을 캐 내는 탐정이나 형사 같은 진실의 편이 천재적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진실을 숨기려는 자도 진실을 캐내려는 자 못지않게 뛰어난 천재이다. 때문에 이러한 인물 설정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고등학교 수학선생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이시가미는 사랑 때문에 범인인 두 모녀를 돕는다. 시체를 직접처리하고, 경찰이 의심도 못할 만큼 깔끔하고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를 하기도 한다.
경찰을 속이고 그렇게 사건이 정리가 되는 가 했더니, 그의 대학동창인 유가와가 나서서 사건을 바로잡는다. 하나의 빈틈없이 치밀한 듯만 보였던 사건이었다. 이시가미가 유가와보다 뒤쳐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유가와가 진실을 알아낸 것도 아니다.

사실 이시가미의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가 계획을 세울 때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시가미 자기자신이었다. 모든 물질적 여건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시가미는 감정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 감정 때문에 틈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그의 성은 무너져버렸다.

일본식 미스터리소설은 분명 지금껏 읽어온 아가사 크리스티나 엘러리퀸의 작품과는 달랐다. 후자의 것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탐정에게 감정이입을 시키도록 만든다면, 이 작품은 제3자로서 방관자처럼 인물들이 진실을 캐내는 모습을 지켜보게 만든다. 사실 오자가 있어서 약간 걸리기는 했지만,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데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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