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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럿 피쉬
오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기억이란게 그렇다.
그 순간이 지나면 잊고 지내다가 어떤 사소한 계기로 심연 저 밑으로 가라 앉았던 기억이 불쑥 표면으로 올라온다.
책상정리를 하다가 찾아낸 쪽지 하나로 학창시절의 추억이 생각나기도 하고,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그와 비슷한 사람때문에 첫사랑이 문득 생각나기도 한다.
『파일럿 피쉬』에 나오는 야마자키 또한 우리와 다를 게 없다.
그 또한 새벽에 걸려온 유키코의 뜬금없는 전화 한통으로
그녀와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친근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19년간의 긴 공백동안 잊고 지냈던, 그냥 무덤덤하게 살아왔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그 까짓 전화한통이 뭐길래...
야마자키는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녀와의 만남과 그녀와 사귀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 그리고 그녀와의 이별까지.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아팠으며, 얼마나 슬펐는가 같은 감정 따위의 것은 느껴지지 않는...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야마자키의 회상에서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의 그의 느낌과 감정들을 더 확실이 체감할 수 있다.
이미 근 20년이 가깝게 지나버린 세월 동안 두사람은 연인에서 각자로 돌아섰고,
다른 삶을 살아왔다.
때문에 어쩌면 더 쉽게 그렇게 유키코를 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년동안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월간"발기"의 편집일.
유키코의 대담하리만치 엉뚱한 발상이 만들어낸 일이 계기가 된 그의 생업이
야마자키가 별거 아닌 전화한 통으로 그 시절을 통채로 다시 꺼내어 살피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나는 『파일럿 피쉬』의 홍보문구를 보면서 이 책이 애절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 일것이라고 믿었다.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은가?
그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류의 그런 소설.
영화 『러브스토리』같이 죽음과 맞닿은 사랑이야기.
하지만 『파일럿 피쉬』는 야마자키와 유키코의 전(前) 사랑이 얼마나 처절하게 아름다웠던 것인지에 관한 소설이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야마자키가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과거 자신을 거쳐간, 혹은 자신이 거쳐온 타인들에 대해 추억하게 하는 전제일 뿐이다.
『파일럿 피쉬』를 읽으면 나뿐 아니라 그 누구락도 어느 다른 누군가에게 한때는 중요한 존재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파일럿 피쉬같은 존재가 됐었을지...
혹시 앞으로 되어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파일럿 피쉬같은 존재가 될수 있다면, 생에서 그보다 중요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읽은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