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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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사키 요시오의 “파일럿피쉬” 의 연작선상이 놓인 작품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이 “파일럿 피쉬” 였고, 두 번째로 읽는 그의 작품이 “아디안텀 블루”이니. 순서에 맞게 잘 읽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이 “아디안텀 블루” 같은 경우도 “파일럿 피쉬” 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 있다. 전작의 경우, 사소한 계기로 사랑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이 온통 다시 기억됐다면, 이번의 경우에는 사랑했던 연인을 잃은 남자가 그 기억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다.

요시오는 이 작품에서 단편적으로 남자가 과거를 정리해 나가는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기억을 통해 여자가 죽음을 준비하고,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까지 보여준다. 다시 말해 “아디안텀 블루”는 사랑했던 과거의 여성과 남성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줌과 동시에 절대적인 힘에 의한 이별과 그로 인해 느끼는 상실감, 그리고 떠나갈 사람을 위한 남겨진 자의 헌신과 남겨질 사람을 위한 떠나갈 사람의 배려까지 모두 담아내고 있다.

남자는 아주 어렸던 시절의 도둑질사건과 자살기도를 시도한 여 선배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관계없어 보이는 두 인물과 사건은 남자가 여자와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다. 여자가 찍은 사진의 주제인 물웅덩이와 소년시절 보았던 여 선배의 음부, 그리고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주었던 동창의 화려한 재기와 여자의 죽음선고. 마치 모든 일들이 남자가 여자를 만나고 이별하는 데에 꼭 거쳐야 했던 관문같이 말이다.

“아디안텀 블루”는 “파일럿 피쉬” 의 연작이어서 그런지, 또 다른 책을 읽고 있다는 기분보다는 “파일럿 피쉬” 를 읽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차분하게 서술되는 이야기, 담담하게 풀어가는 인물들의 심리와 감정들은 “파일럿 피쉬”때와 동일하다. 두 작품은 서술자는 동일하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파일럿 피쉬”때보다 무려 7살이나 젊었던 시절의 주인공남자는 7년동안 전혀 성숙하지 않았다. “파일럿 피쉬”때보다 더 젊은 시절의 그는 7년 후의 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좋게 말하면 한 작품의 이미지와 느낌을 잘 이어나가고 있는 셈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작품의 변화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읽어본 그의 작품이 공교롭게도 이 두 권밖에 없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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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소설 읽는 노인 Mr. Know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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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 세상은 혼란스러워 졌다.

거대한 기계를 통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물건을 팔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은 시야를 바다 건너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나가 물건을 팔고 돈을 벌어올 미지국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마도 식민지 개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또한 그런 개척자들 중 하나였다.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에 필적하는 길이의 이름을 가진 사랑하는 부인과 그는 밀림으로 살기위해 들어온다. 하지만 척박한 땅위에 그는 헛된 땀과 노력을 쏟아부었고, 사랑하는 부인마저 이주한지 2년 만에 말라리아에 걸려 죽게된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망가져 간다. 아무리 땅을 일구어도, 오늘 나무 뿌릴 뽑아내면 그 다음날 다른 곳에서 날아온 이름모를 씨앗이 싹을 틔우는 그런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건 그 땅에  이미 오래전부터 터를 내리고 살아온 수아르 족이었다.

 

백인들은 그들을 미개하고 신기한 구경거리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지만 사실 수아르족은 백인의 그것보다도 뛰어난 생명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총으로 쏘아 생명을  끊을줄 밖에 모르는, 반짝이는 돌덩이에 불과한 금 몇쪼가리에 환상을 품은 백인 이주인들과는 달리 자연과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 갈 줄 알았다. 노인은 지금보다 젊었던 그 시절을 수아르족과 같이 보냈다. 친구가 죽고 친구의 평온한 죽음을 지켜주지 못한 노인은 수아르 족을 떠나왔지만, 그 동안의 세월은 노인에게 그 어떤 것 보다도 값진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이 지구 어딘가에 사는 종족(혹은 민족?)은 어린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에 더 애도를 표한다고 한다. 우린 살아갈 날이 많은 아이들과 많이 살아온 노인들의 죽음중에서 살아갈 남이 많은 아이들의 죽음에 은연중에 가치를 더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종족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이보다는 오래 살아온 기간만큼의 노하우와 지혜를 가진 노인의 죽음에 더 가치를 높이 두는 것이다. 우리말에 나이는 공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도 있는 것처럼.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그 많큼 더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이된다.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살아온 날만큼의 날 동안 자연에 친화되는 방법을 배웠다. 수아르족이 아니지만 수아르족인 그 노인은 그래서 많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고 돈밖에 모르는 읍장에 어쩌다 보니 맞서서 읍장의 우둔함을 깨우치게된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일 보다도 책을 읽는게 좋았다. 허리를 곧게펴고 서서 다리가 긴 탁자 앞에 서서 책을 읽는 것이 노인의 일과였다.

 

노인이 읽는 책은 언제나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을 뜨겁게 만들고, 눈물을 왈칵 쏟아지게 만들 연애소설이었다. 처음 자신이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을 깨달은건 수아르족에서 떠나왔을 때였다. 그리고 그는 어려운 기하학 책이나 왠지 거짓말인 것같은 역사책 보다는 감정을 움직이는 연애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것은 자연과 어울려 살았던 지난 시절에 비해 사람과 부대끼며 소란스럽게 살아야 하는 개척촌에서 생활에서 노인이 살아갈 수 있게하는 힘이 었을 것이다.

 

가끔은 아끼는 의치를 꺼내어 끼고 고기를 씹기도 하고, 치과의사가 가져다준 새 소설책을 읽으며 그렇게 살고 싶어하던 노인의 삶은 머저리같은 읍장에 의해 깨어진다.  밀림안으로 들어가 마구 총을 쏘아대던 한 남자가 그 손에 새끼를 입은 암살쾡이의 습격을 받아 죽게되고, 새끼잃은 살쾡이는 분노에 미쳐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토벌대를 이끌던 읍장은 자기의 어리석은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두려워 노인에게 돈을 댓가로 살쾡이를 잡아오라고 한다. 그리고 노인은 홀로 남겨져서  총 한 자루, 실탄 몇 발과 함께 밀림을 헤맨다. 과연 살쾡이는 어디 있는 것일까.... 살쾡이를 찾아 밀림을 헤매면 헤맬수록 노인은 깨닫는다. 문명에 물든 개척자로서 살쾡이를 보던 노인의 눈은 수아르인의 눈으로 살쾡이를 보게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살쾡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노인 스스로가 가장 원하는 것을.

 

서로의 눈치를 보며 경계하던 살쾡이와 노인은 마지막 일전을 벌인다. 아슬아슬하게 노인의 손에서 방아쇠가 당겨지고, 살쾡이는 살쾡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게된다.  일을 마친 노인은 어서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가 연애소설을 읽었으면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조용히 연애소설을 읽는 것 그것이 바로 노인이 원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문명에 물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참고 기다릴 줄 모르고 무조건 나서서 먼저 폭력을 휘두루고, 자신의 눈으로 타인을 함부로 정의하고 대하는 읍장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미개하다는 의미의 이름을 가지게 됐지만 수아르 족은 오히려 그 환경안에서는 개척자들보다 뛰어난 삶의 기술을 가질 줄 알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 멍청한 개척자들 그리고 문명인들 탓에 살쾡이와 원주민은 자신의 땅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없게 됐고, 마침내는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상대에게 겁도 없이 주먹을 휘두르면 돌아오는 것은 자신이 휘두를 것 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고통일 뿐이다. 노인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정을 뒤흔드는 연애소설만 읽기를 고집하는 것도 사실은 가장 자연스런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 노인의 의지를 대변해 주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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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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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소설을 언급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작가가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인데, 오늘에서야 그의 그 유명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책을 완독했다. 휴우~
 
그다지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소설인데, 제목부터 꽤나 도발적인이 소설은 내용마저도 기발하고 도전적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90세 생일을 며칠 앞둔 노인이다. 이 노인은 어려서부터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거리끼지 않았지만 왠지 나이가 들면서 그런 일을 그만두었었다. 결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신부의 손을 잡고 식장안으로 걸어가는 것 대신 창녀들을 상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몇번의 격정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아흔이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종신직 비슷한 신문에 칼럼을 쓰는 일과 부모님대부터 살았던 집정도가 전부다.
 
마침내 아흔살이 되는 생일날 그는 자신을 위해 거창한 무언가를 준비한다. 젊은시절 똥줄빠져라 다녔을 사창가의 포주에게 연락을 해  자기의 90세 생일날 온전한 처녀아이와 밤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자신의 남은 여생은 물론이고 앞서 살아온 90년의 세월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아직 14살짜리 어린아이, 가슴은 겨우봉긋할까말까 하고 어린태를 벗지 못한, 그렇지만 노동에 지쳐 거칠어보이는 그런 아이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인은 그 아이와 육체적인 관계는 갖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델가디나라 이름붙인 그 소녀에게 온 정신과 정열을 바친다. 아흔살 노인과 14살 소녀.. 아마도 증조할아버지뻘과 소녀의 조합이 아닐까? 전자가 거의 다 꺼져가는 새벽의 모닥불이라면, 후자는 이제 밝게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여린불꽃이겠다.
 
하지만 우린 모두가 알고 있다. 어둠에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밝은 곳이라는 것을, 그리고 꺼지기 전의 모닥불이 가장 아름답고 뜨겁다는 것을.. 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녀로 인해 새로 태어난다. 사랑이란 감정보다도 욕정에 이끌려 움직였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그는 아흔살이 되서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격정적이고 활활 타오르는 그 감정에 직면을 한 것이다. 소녀에 대한 그의 사랑은 젊은 청년의 그것 못지 않다. 그는 다시 청년으로 돌아간다. 몸은 비록 늙어 약해졌고, 머리는 벗겨졌을지언정 그의 가슴속의 그 타오르는 열정만은 늙지 않고 오히려 점점 자라만 간다.
 
하지만 곧 죽을 자신의 현실을 알고 있는 노인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소녀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뒤에 남은 것을 모조리 소녀를 위해 남기려고 한다.
 
"죽어도 좋아"라는 여화가 나오기전에 우리중 누가 노인들이 성적인 욕구를 갖고 있을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오히려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고나서야 우리는 불편한 시선들로 현실을 보게됐다. 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 "죽어도 좋아"가 생각났다. 물론 난 그영활 보진 않았지만 그 영화와 이 소설의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보면서 몸은 비록 늙었지만 마음만은 청년과 다를것 없는 열정적으로 사랑에 타오르는 주인공 노인의 모습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는 그 두 노인부부가 생각이 났다. 이 세상에 사랑과 열정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와 시대를 초월한다. "재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주인공 노인처럼 인생의 어딘가에서 자신을 다해 사랑으로 타오를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뜨겁게 불타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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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바꿔줄 선택
할 어반 지음, 박정길 옮김 / 웅진윙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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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친구들과 장난식으로 주고 받는 말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역시 사람은 유치원을 잘 나와야되.."
 
뭐...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 사람을 비하하거나 차별하려는 말이 아니다. 내 인생의 지론은 우리가 살아가야할 모든 것을 어린시절 즉 유치원을 다닐 시기에 모두다 배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아라",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어야한다.", "모든 일에 감사해라" 같은 말들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엔 친구와 싸우거나 쓰레기를 바닥에 함부로 버리거나하면 내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된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이상 그런말에 연연해하지 않는 내모습을 보게됐다.
비단 나뿐아니라 대다수의 어른들이 느끼는 기분일 것이다.
내 이익을 위해선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거리끼지 않고, 조금더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남의 일에는 시선한번 주기가 쉽지 않다.
 
내가 이런 이야길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은 이유는 바로 "인생을 바꿔줄 선택"이라는 이책이 바로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겸손, 인내, 공감들을 포함한 12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내 인생을 좀더 가치있고 보람있게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작가가 내세우는 12가지의 키워드가 우리에게 낯설은 존재가 아니다. 마치 어렸을때 엄마나 아빠, 선생님으로 부터 수없이 들었을만한 그런 이야기들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배웠던 그 어린시절부터 듣고, 읽고. 익혀온 것들이다. 때문에 읽으면서 '이미 다 아는 사실이군'이란 생각이 든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잊고있거나 혹은 모른척 지나왔던 것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고, 또 그것을 기회로 다시한번 내 삶을 되돌아 볼수 있는 기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책을 읽으면서 몇몇개의 에피소드-작가가 겪거나 들은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재외하면 너무나도 설교적인 혹은 설명적인 어투로 서술되는 이야기에 약간의 지겨움을느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등을 서술하려할 때에는 좀더 사람들에게 흥미를 끄는 이야기로 주의를 끄는 것도 필요한데. 작가가 선생님 출신이라 그런가?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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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증
페트라 함메스파 지음, 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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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를 불문하고,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감정이 우선되는 것일까?
흔히들 하는 말로 사랑와 우정, 또는 감정과 이성중에서 어떤것이 먼저여야 하는 것일까?
 
페트라 함메스파라는 다소 독특한 이름의 여작가가 쓴 위증은 추리소설(혹은 스릴러)의 형식안에서 이러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레타와 테스라는 여자가 있다. 둘다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집에서 자랐다는 공통점만 빼면 그 둘은 서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예쁜 외모를 자랑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에게 빠져들게 만들지만 공상이 너무 뛰어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 테스. 그리고 항상 부시시하고 숯이 많은 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볼품없지만 노력가에 변호사로 성공한 그레타.  이렇게  다른 둘을 이어준것은 바로 테스의 활발한 성격과 거침없는 사교성덕분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그렇게나 다른 부류이면서 초등학생시절부터 성년이 될때까지 절친한 친구사이로 남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둘 사이에서 사건을 서술하는 담당자는 니클라스라는 부르주아 출신의 변호사이다. 그레타가 성년이 되고나서 자신의 노력으로 서서히 미모에 빛을 발해갈때쯤 만난 사이로 결혼까지 약속했었지만 니클라스가 테스를 보고 반해버리는 고로, 둘의 사이는 그냥 파트너 그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워낙에 생활이 억압을 받지 않았던 테스는 이름모를 남자(유부남이 확실한) 와 불륜을 하다가 맨디라는 아이를 낳는다. 그 사이 그레타는 이웃에 이사온 얀이라는 작가에게 마음을 뺏긴다. 하지만 얀은 테스와 결혼을 하게되고, 그레타는 또다시 비탄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날 테스가 죽었다.
얀을 그레타에게 전화를 걸고, 그자리에 도착한 그레타는 얀과 알리바이를 구상한다. 그동안 얀이 써온 소설들-미성년자를 강간하고 죽이는-과 니클라스가 조사한 얀의 과거 -어머니에게 학대받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살인범으로 지목되 감옥에서 자살한다-를 통해 얀에 대한 그 굳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던 그레타 였지만 그레타는 얀에게 알리바이를 만들어 바치기까지한다.
 
하지만 니클라스는 얀이 테스를 죽였다고 확신한다. 그동안 테스에게서 언뜻언뜻 감지 할 수 있었던 학대의 흔적들, 그리고 밝혀지는 얀의 과거와 그의 소설의 연관성들.. 얀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정황적 물증들이 갖추어 진 것이다. 그리고 그레타에게 현실을 일깨우려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그레타에게 어쩌한 조언이나 주장도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여기서 그레타는 촉망받는 변호사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못한다. 더불어 십수년을 친우로 지내왔던 테스보다는 이제 겨우 안지 얼마되지 않은, 그렇지만 자신의 마음을 흔들었던 얀을 더 생각한다. 그가 범임으로 의심받을까봐 사실을 밝히긴 커녕 오히려 알리바이를 조성하고, 얀의 무죄방면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니클라스마저 끌어들인다.
그렇게 자신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성공에 대해 자부감을 갖던 그레타가 단지 사랑이었다는 감정하나로 모든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정도 자신의 커리어도 상관없이.. 직업적 윤리마저 훼손해 가면서... 조금은 여자로서 상처를 받는 부분이다. 여자는 왜 항상 여러 문학에서 몇가지 부류로 밖에는 그려지지 않는 것일까?
항상 사랑이 앞서거나 혹은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나올듯한 냉혈 커리어우먼밖에는 여성 캐릭터의 설 자리는 없는 것인가.. 아쉽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복잡한 감정선을 사실적으로 나타내는 캐릭터는 얀과 니클라스, 두 남자 캐릭터이다. 학대받은 상처로 가학적이게 변하지만 천진무구한 그래서 더 무서운 얀과 부르주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그레타에게 거부당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래서 그녀가 사랑하는 얀을 미워하지만 얀의 변호를 맡는 니클라스.
전형적으로 틀에 맞춰진 여성 캐릭터들 보다 오히려 남성 캐릭터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이야기의 화자인 니클라스를 따라가다보면 여성독자라 하더라도 남성인 니클라스의 심리상태와 그 변화에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읽는 순간부터 누가 범인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테스의 체내에서 발견된 정액의 주인이 얀이 아님이 밝혀지고, 비밀에 휩싸인채 돈을 지불하고 한때는 폭력을 휘둘렀던 맨디의 생부의 정체도 드러난다.
과연 테스를 죽인것은 얀인가? 아니면 맨디의 생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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