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 여기가 맨 앞 ㅣ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어떤 경우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한 세상인 사람이 간다
한 세상인 아이가 갈 때
한 엄마가 운다
한 세상인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한 엄마가 걸어간다
이 시를 읽으면서 세월호로 사라진 아이와 엄마를 생각하는 내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시가 내 가슴을 친다.
세월호가 아니었으면 그냥 흘려버렸을 시에 걸려 비틀거리는 내가 있다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을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어떤 시는 이렇게 오래된 우리의 기도를 부른다
어머니가 걸어가시며 기도했듯이
정한수 떠 놓고 기도했듯이
어떤 간절한 행동과 마음이 기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간절하게 그리웠구나.
내 손을 잡기만 해도 슬펐구나
꿈에 본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구나.
하늘을 우러러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는 우리의 마음도
기도였다니.
우리의 기도가 더 깊어져야 한다.
더 깊어져야
평화에 가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봄날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을 찍으려 오토바이를 멈추는 청년은 누구를 위해 기도했을까
그 청년을 바라보는 시인은 누구를 위해 기도했을까
그 기도들이 모여 빤짝이는 저녁시간이다.
함께 계란탕을 먹는 시간도 기도의 시간이 된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개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우리는 언제 자유로울까
고독을 느낄 줄 알 때 자유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자유에 지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고독을 모르는 자유는, 고독을 모르게 때문에 이미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말.
고독한 시간을 통과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자유를 성찰하고 삶을 사는 것이다.
고독하지만 자유롭지 않은 고독은 고독에 진다.
고독에 눌리지 않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와 고독 사이에서 평형을 맞추는 삶을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
내 삶이 기도에 가까워지기를.
내 기도가 당신의 삶에 가 닿기를.
가 닿지 않아도 안달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