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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썼다고 말한다.
존재감,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간 위에서 꿈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허무를 넘어서는 작가의 꿈이다. 작가의 꿈을 통해 위로받은 이들이 많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촐라체까지 가야 했을까. 영교가 크레바스에 빠졌을 때 만난 죽은 이의 피켈에는 글씨가 있다. 가족의 이름과 사랑해. 이 글을 남기고 그곳에서 죽으려고 극한의 체험을 해야 했을까. 남은 가족들의 삶은 이미 촐라체가 아니었을까. 그것을 외면한 촐라체행은 허영일 수도 있다. 그것이 다시 현실로 돌아와 치열하게 살아가려는 시도라 해도 죽은 이는 말이 없다.
극한의 체험이 아니더라도 이미 극한의 삶을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굳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촐라체가 아니어도 우리 삶이 이미 촐라체라면, 작가는 이곳에서 삶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고 외면하게 하는 세상의 크레바스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상민과 영교가 촐라체에서 구조되고, 서울로 돌아간 뒤 '나'는 아직은 서울로 갈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울은, 광기의 폭력적인 모래바람이 부는 미친 도시였다'라는 말을 붙이며.
그 말에 공감한다. 서울만 그럴까.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삶의 구조가 그렇게 변했다면 현실의 촐라차는 우리에게 그것을 어떻게 넘을까하고 묻고 있다. 작가는 여기까지 물어야 했다. 굳이 히말라야, 티베트를 헤매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세상의 크레바스로 인해 얼마나 허청거리는가.
그럼 나는 왜 이 소설을 읽는가. 현실의 크레바스를 바로보고 그것을 넘어설 힘을 얻고 싶어서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 힘을 이 소설은 주지 못한다. 단지 '히말라야에서도 살아왔는데 이까짓 세상 살지 못할까'하는 오기 수준이라면 왜 힘들여쓰고 힘들여 읽어야 할까
그래도 다행이라면 나에게는 이 시다.
눈물짓는 슬픔에 찬 세상을 떠나서
고독한 동굴을 네 아버지로 삼고
정적을 네 낙원으로 만들라
사고를 다스리는 사고가 기운찬 말이고
네 몸이 신들로 가득찬 너의 사원이니
끊임없는 헌신이 너의 최선의 약이 되게 하라
-밀레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