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예술가의 단독성을 존경합니다. 시인 김언희는 하나였습니다. 김언희라는 시는 유일했습니다. 지금은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첫 15년은 혼자였습니다. 지독히 직시하는 타입이었습니다. 진실에 도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념이나 문화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섹스와 똥오줌과 시체에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노래했습니다. 시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교성인 줄 알았는데 괴성이었습니다. 곡성인 줄 알았는데 환성이었습니다. 적나라하고 처절했습니다. 동시에 경쾌하고 번뜩였습니다. 100살 마녀처럼 지혜롭고 꼬마숙녀처럼 용감합니다. 여자 시인인데도 대단하다? 어떤 남자 시인도 이렇게 못 씁니다. 최근에 네 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제목이 <요즘 우울하십니까?>입니다. 어떤 시인을 이해하려면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견디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참아주었네, 아침에 맡는 입 냄새를, 뜻밖의 감촉을 참아주었네, 페미니즘을 참아주고, 휴머니즘을 참아주고, 불가분의 관계를 참아주었네, 나는 참아주었네 오늘의 좋은 시를,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을, 참아주었네, 미리 써놓은 십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 한밤중의 수수료 인상을, 대낮의 심야 할증을 참아주었네 나는, 금요일 철야기도 삼십년을, 금요일 철야 섹스 삼십년을, 주인 없는 개처럼 참아주었네, 뒷거래도 밑 거래도 신문지를 깔고 덮고 참아주었네, 오로지 썩는 것이 전부인 생을, 내 고기 썩는 냄새를, 나는 참아주었네, 녹슨 철근에 엉겨붙은 시멘트 덩어리를, 이 모양 이 꼴을 참아주었네, 노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면상 방뇨를 참아주었네, 참는 나를 참아주었네, 늘 새로운 거짓말로 시작되는 새로운 아침을, 봄바람에 갈라터지는 늙은 말 좆을,”(‘나는 참아주었네’ 전문)

견뎌온 것들의 목록입니다. 따져 읽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좋습니다. 말들이 춤을 춥니다. 리듬이 살아 있습니다. 이미지가 싱싱합니다. 그래도 짐작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견디는지. “아침의 입 냄새”는 남편입니까. “뜻밖의 감촉”은 성추행입니까. 한쪽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면 다른 쪽에서는 휴머니즘을 말합니다. 이 평행선이 피곤합니까. “십년치의 일기”를 미리 썼답니다. 그만큼 빤한 일상입니까. “백년치의 가계부”를 미리 썼답니다. 가정경제가 쳇바퀴입니까. “수수료”와 “심야할증”이야 말해 뭐합니까. 기도는 허망하고 섹스는 지루합니까. “뒷거래”는 위선적이고 “밑 거래”는 폭력적입니까. 그렇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을 참아왔습니다. 참으면 새 아침이 옵니까? 삶은 살 만한 것이라는, 늘 새로운 거짓말만 옵니다. 그래서 허무합니다. 인간은 고기 덩어리, 인생은 곧 썩는 과정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 내가 사랑하는 것은/ 혓바닥에 구멍을 내고야 마는 추파춥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침 새를 잡아서 발기발기 뜯고 있는 고양이//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발광하는 입술과 피를 빠는 우주//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막 방귀를 뀌려고 하는 오달리스크//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직장(直腸)에 집어넣은 탐스러운 폭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벼락 맞을 대추나무에 열린 벼락 맞을 대추// 내가 사랑하는 것은/ 금방 뱀에 물린 당신의 얼굴”(‘바셀린 심포니’ 전문. 시집 원문에는 제목과 8행이 이탤릭체로 표시돼 있다. 다른 데서 차용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적자면, 시의 제목은 다다이즘의 수장이던 트리스탄 차라의 작품 제목에서, 8행의 ‘발광하는 입술’과 ‘피를 빠는 우주’는 사사키 히로히사 감독의 영화 제목에서 온 것이다.)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입니다. 역시 따져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짐작해보겠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북두칠성의 여덟 번째 별”은 미지입니까. 미지의 것을 사랑합니다. “추파춥스”는 달콤한 고통입니까. 어떤 고통은 달콤합니다. 새를 뜯는 고양이는 어떻습니까. 우아(優雅)보다는 야생(野生)을 사랑합니다. 10년 전 영화, 미친 영화입니다. <발광하는 입술>과 <피를 빠는 우주>를 꼭 보십시오. 르누아르가 그린 오달리스크(Odalisque)의 모습을 보고 바스키아는 말했습니다. “저 여자, 곧 방귀를 뀌려는 거 같아!” 이 발상을, 이 천진함을, 그러므로 이 진정한 예술가스러움을 사랑합니다. 항문에 폭탄을 집어넣는 상상, 벼락 맞을 녀석이 벼락을 맞는 상상은 즐겁습니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본 지금 당신의 표정이 궁금합니다. 금방 뱀에 물린 사람의 표정입니까? 독자의 그런 표정을, 이 시인은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이 시인을, 저는 사랑합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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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짚고 간신히 찾아온
나 같은 사람을
너만은 반갑게 맞아다오
나는 너를 따 먹고
이 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다시 어린이로 살고 싶단다
어린이가 되어
너처럼 고운 빛깔,
고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단다.
새콤달콤 그 맛을 온 몸에 지니고
이 땅에 살고 싶단다.

--「넝쿨딸기 3」 중에서


달콤 쓸콤 버찌 맛
손은 온통 딸기물이 버찌물이 들어
찐덕찐덕
새빨갛고 보랏빛이 되고
입술이 검붉게 되어버린 것도 모르고
어린애처럼 따 먹는다


아, 이래서 나도 온갖 벌레와 짐승을 키우는
가시덤불이 되고 벚나무가 되고
바위가 되고
햇빛과 바람과 개골물과
흰 구름이 어울려 있는 산
산이 되는구나, 산이!


--「딸기와 버찌」 중에서


나는 이렇게 딸기를 따먹고
날마다 산천의 모든 기를 먹고
나도 산이 되고 싶다.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새가 되고 매미가 되고
잎이 되고 열매가 되고
노을이 되고 무지개가 되고
흙이 되고 돌이 되고 싶다.
정말로 정말로
너희들과 같이 되고 싶다.


--「산딸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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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공용물건 손상죄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다. 몇 달 전에는 익명으로 6년간 8억5000만원을 기부한 탤런트 문근영씨에 대해서 “기부천사라는 배우 문근영은 빨치산의 손녀”라는 글을 쓴 보수 논객 지만원씨를 비판하면서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린 누리꾼에 대한 모욕죄 유죄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떤 지경에 있는지 웅변해주는 판결들이다.

법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이 사건들을 기소한 검사들이나 유죄를 선고한 판사들을 위해서도 변명을 할 수 있다. 우선 공용물건 손상죄나 모욕죄가 엄연히 형법전에 존재하고, 기존의 판례에 따르면 포스터에 낙서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을 하는 것도 범죄로 볼 여지가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법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과연 이런 정도의 행동에 형벌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다른 사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풍자나 조롱에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1910년 2월7일 영국 해군의 기함인 드레드노트호에 ‘아비시니아’라는 나라의 왕자들이 방문한다는 전신이 도착한다.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이 들어간 전신이었다. 해군 장병들은 외국의 왕족들을 정중하게 맞았고 사열을 받았다. 몇몇 장교들은 아비시니아의 명예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왕자들은 “붕가! 붕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전함을 둘러본 뒤 자리를 떴다.

그러나 얼마 후 이 ‘왕자들’이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중에는 심지어 여자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였다. 울프 남매와 네 명의 친구들이 변장을 하고 장난을 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기함 선상에서 단단히 망신을 당한 대영제국의 해군은 분노했다. 군이 보기에 반전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동기부터 불순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외무부 부장관의 서명을 위조한 것이고 일종의 공무집행 방해다. 공문서 위조나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 방해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장난에 불과한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풍류시인 김삿갓은 지방 유지들과 다툰 뒤 그들의 이름을 소재로 조롱하는 시를 썼다. 각각 원씨, 문씨, 서씨,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원숭이, 모기, 쥐, 벼룩에 빗대는 내용이었다. “지만원, 지는 만원이나 냈나”라는 글이 모욕죄에 해당한다면 김삿갓의 시도 분명 범죄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김삿갓을 처벌하지 않았다. 심한 욕설도 아닌 이 정도의 조롱이 범죄에 해당한다면 서로 놀리면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은 매일같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결론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지만원 사건이나 쥐 그림 사건 판결문을 읽어보면 나름대로 유죄판결의 근거를 상세히 적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영국이나, 심지어 조선 사회에서도 처벌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볼 때 과연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지극히 의문이다. 영국 정부가 버지니아 울프를 처벌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국의 법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드레드노트호가 독일의 잠수함을 격침시켰을 때 축하 전문의 내용이 “붕가! 붕가!”였다. 장난은 이런 식으로 받아넘겨야 한다.

보도에 따르면 쥐 그림 사건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을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대한 꿈을 강탈한 조직적 범죄행위”로 규정하면서 징역 10월을 구형했다고 한다. 정말 우리 사회가 정부의 홍보 포스터에 풍자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교도소에 10개월을 갇혀 있어야 하는 사회가 된 걸까.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금태섭 변호사

http://www.youtube.com/watch?v=B0cOR6qfql0&feature=player_embed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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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우족의 구전 기도문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로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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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김수영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에
해초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투명한 움직임의 비애를 알고 있느냐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순간이 순간을 죽이는 것이 현대
현대가 현대를 죽이는 '종교'
현대의 종교는 '출발'에서 죽는 영예
그 누구의 시처럼

         그러나 여보
         비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

비가 오고 있다
움직이는 비애여

결의하는 비애
변혁하는 비애…
현대의 자살
그러나 오늘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계사 위에 울리는 곡괭이소리
동물의 교향곡
잠을 자면서 머리를 식히는 사색가
―― 모든 곳에 너무나 많은 움직임이 있다

여보
비는 움직임을 制하는 결의
움직이는 휴식

여보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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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詩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指紋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천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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