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다녔던 잡지사에서 겪은 일이다. 월급이 한동안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사를 쓰고 인터뷰를 나가고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감은 중력과도 같았다. 어느 날 회사 경영자의 가족인 동시에 편집자이기도 했던 ‘홍길동’이 기자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일종의, 그러니까 아마도 위로였을까. “너희들 어차피 돈 벌려고 이 일 하는 거 아니잖아.” 홍길동이 탄 외제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기자들의 콧방귀를 ‘원기옥’처럼 모아 저 차에 전달한다면 기름을 넣지 않고도 평생 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론의 선정적인 제목과 기사

또 한 명 작가가 죽었다. 언론은 파편화된 팩트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취사선택해 기사의 형태로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특정 언론의 정파적 입장이 드러나기도 한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다루는 데 <한겨레>는 ‘남는 밥 좀 주오’라는 문장을 제목으로 꼽았다. 이는 매우 선정적인 데스킹의 결과였지만, 어찌되었든 큰 틀에서 사실관계를 완벽하게 어그러뜨릴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회적 모순이 죽음을 양산했다는 행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겨레>가 취사선택한 팩트 안에 ‘작가의 죽음’은 없었다. 다만 ‘굶어 죽은 작가’가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어떻게 이야기되느냐에 따라 ‘애도’될 수도 혹은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한겨레>의 선정적인, 즉 매우 파괴력이 있었던 이 기사는 후자의 수군거림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양산했다. 물론 그 선정성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죽음은 애도와 구경거리 가운데 어느 쪽에도 거론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비극적인 노릇이지만 이 또한 언론과 독자가 함께 만들어낸 현실이다.

문제는 ‘굶어 죽은 작가’라는 파괴적 행간이 논의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버렸다는 데 있다. 지금 와서 최 작가의 죽음은 그녀가 정말 굶어 죽었느냐, 혹은 굶어 죽지 않았느냐라는 층위에서 논의되는 중이다. 굶어 죽었다면, 굶어 죽지 않았다면 죽음의 본질이 달라지는가?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간에, 죽음은 결국 죽음이다. 작가가 그 자신의 재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죽었다. 약자였기 때문이다. 글 쓰는,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자기 고집에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렸던, 그래서 어쩌면 돈 못 버는 게 당연한 우리 사회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아내가 내 어머니를 잠시 만나고 왔다. 대화 중 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데,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그에 관련된 보도를 보고는 일면식도 없는 죽음 앞에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고 했다. 내 아들과 거의 같은 나이인데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는 게 안쓰러워서 울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을 향한 우리들의 연민과 걱정은 동냥과는 다른 층위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기자나 데스크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 것인지 미리 결정하고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직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최고은 작가가 2006년에 연출한 단편영화 <격정 소나타>는 피아노 콩쿠르에 응시한 여고생의 이야기다. 지난 콩쿠르에서 그 여고생은 긴장한 나머지 창피한 일을 저지른 채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잠적하다시피 했던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긴장되고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이 앞선다. 시험장 화장실에서 그녀는 자신이 작년에 저질렀던 실수를 언급하며 욕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것이 부조리하다 해도 세상의 시선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약점과 세상의 시선 모두를 떳떳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시험장에 들어간다.

<격정 소나타>는 섬세하게 감정의 결을 잡아내는 연출의 묘와, 선언과도 같은 작가로서의 소명을 드러내려는 박력이 돋보이는, 매우 특별한 데뷔작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녀의 차기작을 궁금해하며 이 데뷔작을 기억할 것이다. 서른두 살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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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죽음’을 보는 두 시선
최고은 작가가 남긴 상처가 깊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아픈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살림’과 ‘돌봄’의 문제를 고민해온 조한혜정 교수와 <시사IN> 필자 허지웅씨가 그녀의 영전에 부쳐온 두 편의 글.



그가 떠난 후 안타까운 마음에 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만일 스필버그 작품 한 편이 현대자동차 일년 수입의 몇 배를 벌어들인다며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문화예술계에서 걸출한 인재를 배출한다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면, 만일 그가 26세에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타지 않았다면, 만일 우리나라 감독들이 줄줄이 국제 영화제를 휩쓸며 최우수상을 받지 않았다면, 만일 사냥꾼의 후각을 가진 영화 제작사 사람들이 청년 작업자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 아니, 그가 남에게 피해 주기를 싫어하는, 자기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민정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내면화시키지 않았더라도 그는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하자센터 창의 허브 주민)


 


 

 

 


그가 집주인에게 마지막 보낸 쪽지에는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 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쌀과 김치. 그것은 747 공약을 한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당연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밤낮없이 시나리오를 쓴 그에게도 ‘자활 의지’가 부족하고 눈높이가 높아서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집주인과 이웃에게 쪽지를 쓰면서 미안해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분노한다. 아, 그가 왜 그렇게 미안해야 하는가?

안 그래도 나는 최근 대학가에서 ‘미안해하는’ 학생이 급격히 늘어난 것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조금만 늦어도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부모에게 감사하다 못해 죄송하기 그지없다는 학생들, 그들의 몸짓 자체가 점점 예의 바른 일본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다. 비싼 등록금과 날로 늘어가는 학원비를 대주는 부모에게 미안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이 그들이 미안해할 일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갑자기 하늘 모르고 치솟은 대학 등록금 때문이고, 취업 준비용이라면서 온갖 잡다한 상품을 만들어 불안한 청년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혼 때문이 아닌가? 딱히 책임의 양을 말하라면 그들의 잘못은 1%도 안 될 것이고 99%는 세금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국가, 청년들을 위해 새로운 직장이나 사회경제 활동의 장을 열어주지 못하는 정부, 그리고 청년들과 그 부모의 주머니에서 마지막 한 푼까지 빼내가는 시장일 것이다.

G20 개최국이며 선진국인 대한민국 국가는 이제 모든 예술가 국민을 위해 ‘쌀과 김치’를 제공하도록 하라. ‘거르는 장치만 있고 키우는 장치는 없는’ 사회는 막장 사회이다. 정말이지, 이제 미안해야 할 사람이 미안해하게 하자. 그들이 청년 작가들을 위한 해법을 내놓게 하자. 비정규직 예술인을 위한 실업급여제, 예술인 사회보험제, 예술인 최저 생활보장제 등 어떤 이름을 붙여도 좋다(공기 좋은 어딘가에 모여 살 장소를 제공한다면, 그들은 채전도 일구고 밥과 예술을 나누면서 그곳을 아름다운 마을로 만들어낼 사람들이다. 서울 도심부 이곳저곳에 국가 소유 빈집도 적지 않다. 그런 곳에 그들이 모여 살 수만 있어도 서울 도성의 르네상스 시대는 금방 도래할 것이다).

당부하건대, 그때 정부는 누가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느라 또 무수한 시간을 끌고 돈을 쓰지 말기 바란다. 사실상, ‘문화의 시대’에서 자란 지금의 청년들은 거의가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공장 노동이 아니라 창의적인 비물질 노동을 하면서 자랐다. 후기 근대적 사회와 경제를 살려나갈 청년들에게 창의적 활동의 공간과 자원을 돌려주라.

그리고 친구들이여, 홀로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근대의 명령마음속에서 지우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자. 우리 안에 퍼져 있는 미안한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응시하면서 정서적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상태에서 벗어나자. 활기 있는 삶을 위한 시공간을 우리 안에 마련할 때다. 내 친구, 내 학생, 내 선배, 내 후배, 또한 과거와 미래의 나 자신이었을 최고은 작가의 명복을 빌며 그 영전에 이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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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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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유(臥遊)

 
                                               - 안현미(1972~ )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두었다가 이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를 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 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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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의 가능성  

            - 안현미 

스물 두 살 때 나는 머리를 깍겠다고 전라도 장수에 간 적 있다. 그곳엔 아주 아름다운 여승이 있었고 니와 함께 그곳에 머물던 경상도 아가씨는 훗날 운문사 강원으로 들어갔다 나는 돌아왔다 돌아와 한동안 무참함을 앓았다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되려는 중이었는데 내겐 거울도 지도도 없었고 눈물뿐이었다 나는 나를 꺼내놓고 나를 벗고 싶었으나 끝내,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었고 새로운 인생이 막 시작하려는 중이었는데 나는 감히 요절을 생각했으니 죄업은 무거웠으나 경기장 밖 미루나무는 무심으로 푸르렀고 그 무심함을 향해 새떼들이 로켓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업은 무거웠으나 그런 날이 있었다 

 

나는 지금 어떤 삶의 가능성을 기다리고 있나. 

기다림이 없어야 지금 거울을 볼 텐데, 기다림도 불안도 다 죄가 되어 나를 잡아먹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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