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상황에서든지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면 애정이나 동정을 표시하듯 그 사람의 팔을 만질 것처럼 손을 뻗어라. 그러다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다시 팔을 굽혀라. 그러면 애정뿐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에티켓까지도 표시하는 것이다.
-레일 라운즈, <마음을 얻는 기술>, p.47
의도적인 것은 아름다울 것 같지 않은데. 하지만 약간은 서툴고 소심한 스킨십 미수(?)가 마음을 흔든다는 것에는 동감이다.
그 사람
대학교 입학했을 때, 학교의 기숙사가 모자란 탓에 얼마간은 친척댁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후 차츰 대학생활에 적응하면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집이 어디냐는, 별 뜻없이 물어보는 말들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던 것 말이다. 혼자 살게 된 후부터는 집이 어디냐는 질문이 난감하고 싫었다.
그러니 늦었으니까 데려다 준다는 말도 좋을리가 없었다. 기사도 정신에서 나온 그들의 호의는 나에겐 배려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같이 가면 안될까?"
아주 사소하지만 그는 달랐다. 늦었으니까 데려다 줄게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같이 가면 안되겠냐고....매번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서 돌아섰다. 입구에 있던 편의점....딱 거기까지만. 몇 동, 몇 호로 혼자 들어가는 모습을 낯선 남자에게 보여야 하는 난감함을 한번도 겪게한 적이 없었다.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사실은 집 앞까지 쫓아와서, 그럼 이제 됐다고 말해도, 여기까지 왔는데 너 들어가는 건 보고 가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이구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말없이 차도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이 좋아서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이 좋아서 그 모습이 좋았다.
"멍청아, 그게 뭐라고 그런 게 좋냐? 이 바보탱이야!"
그게 별건 아니지만, 또 별거였다.
연인사이가 되고 나서 그가 말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집에 데려다 줘도 마음을 몰라주냐고....그리고 우리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너무나 몰입해서 보는 나때문에 섭섭했다고....손을 잡고 싶어서 계속 텔레파시를 보냈는데, 그때 나는 화면에 빨려 들어갈 기세였단다. 그냥 확 잡아버릴까 하다가 놀랄까봐 눈치도 주고 돌려돌려 말했는데 끝까지 못알아 듣더란다. 그동안 그 사람이 늘어놓던 실없는 소리들...생뚱맞은 화제들...이해가 되려했다. 투덜투덜 그동안의 불만을 끝 없이 쏟아내던 그 사람....나는 그날 그 사람이 더 좋아졌다. 손 한번 잡아 보려 안달하면서도 함부로 잡지 못했던 그 사람....그 사람이 참 좋았다.
그 아이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렇게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텐데. 고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많이 잘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희망고문을 했고 싸늘하게 돌아섰다.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사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막역한 친구 사이. 성별의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절대 흑심 따윈 있을 수 없는. 우정은 흑심을 이길 수 있고 더 고귀한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날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그 아이를 희망고문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는 군 복무 중이었다. 제대할 때까지 편지 한 장 못써준 한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보상하겠다는 심리로 그 아이가 군대 갔을 때는 신나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오랜만에 손편지 쓰니까 기분도 색다르고 나쁘지 않았다. 휴가 나왔다고 연락하면 기꺼이 만나러 갔다. 군대에서 매일 남자만 볼텐데 얼마나 갑갑할까 싶어서. 아기자기하고 분위기 좋은데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것도 보고....여자 친구 없으니 나 아니면 그럴 기회도 없을거라며, 나같은 친구가 있다니 그 아이 참 복도 많다고 뿌듯해하며 말이다.
그 아이가 휴가 나왔다고 연락한 날, 여의도에서는 불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밥 먹고 영화 보러가자는 그 아이의 말에 멜로는 안 땡긴다며, 불꽃놀이 보러 한강가자고 제안한 건 나였다. 사람 많다고 투덜대고, 춥다고 투덜대고...투덜투덜...그만큼 그 아이가 편했다. 투덜대고 제멋대로인 내가 밉게 보일법도 한데...한창 불꽃 구경하느라 정신 없는데, 그 아이의 팔이 나의 어깨를 감싸려 했다. 당황스러웠다. 이러면 안되는데...하면서 뭐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얼마전 학교에서 실시한 성희롱 예방교육(이렇게 말하려니 미안하지만) 내용이 생각났다. 그 아이가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잘못된 신호를 보내게 된다는 점이 떠올랐다.
"하지마!"
덕만에게 손을 뻗는 비담에게 "치우거라!" 라고 말하던 덕만처럼 싸늘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 반, 화가 난 마음 반이었다.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데, 또 별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아이와는 사이가 아주 멀어져 버렸다.
레일 라운즈의 <마음을 얻는 기술>이란 책이 아주 센스 있는 시점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비즈니스북스가 나의 산타가 되어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무심코 펼친 페이지가 47쪽. 의도적인 행동이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마음이 담긴 행동이라면 수긍이 갔다. 스킨십 보다는 스킨십 미수가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는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추억은 산타가 준 선물이었을까?
2009.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