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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책 제목이 좀 거시기 하지만 책 내용은 절대 거시기하지 않다.
김정운 교수를 알게 된 것은 방송을 통해서였다.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재잘(?)대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기까지 한 분이셨고, 입담은 정말 끝내줬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게 별로 없어서 맘 내키는대로 수첩을 바꾸고, 비싼 만년필을 모으는 남자.
친구가 쓸데없이 그런 걸 왜 모으냐는 질문에 너는 평생 200원짜리 볼펜이나 쓰다가 죽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그렇지... 내가 하고 싶은 것,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나만의 물건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알게해줬다.
책은 1,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김정운 교수 본인의 이야기와 심리학자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방송에서 들었던 이야기도 있고, 눈이 번쩍 뜨일 만큼 귀한 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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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나 자신'과 싸우지 마라
새해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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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 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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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더 이상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거창하고 지키기 어려운 목표로 새해를 열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이 말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다.
살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저런 글귀 하나로도 왠지 힘이 얻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게 무서울 정도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처럼 느끼는 것을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알아냈다고 한다.
김정운 교수는 심리학자로서 기억할게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우리는 시간이 미쳤다고 하면서도 왜 미쳤는지 몰랐었는데, 단지 매일 똑같은 일상에 기억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이란다.
그럼 이 미친 시간을 잡으려면 기억할 일을 자꾸 만들면 된단다.
미술관에도 가보고, 올레길 걷는다고 돈 들여서 제주도까지 가지 말고 한강다리도 걸어서 건너보고, 현재를 구체적으로 느끼며 살면 시간이 미치지 않는단다.....
2부는 드디어 남자의 물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어령의 책상, 신영복의 벼루,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문재인의 바둑판, 안성기의 스케치북, 조영남의 안경, 김문수의 수첩, 유영구의 지도, 이왈종의 면도기,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
처음 들어본 이름도 있었지만 대부분 너무도 유명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2부의 시작은 김정운 교수와 친분이 두터운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윤광준의 모자, 그리고 자신의 만년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특히 시인 김갑수의 물건에 대한 철학은 참 독특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삶을 물건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말을 B&G(뻥&구라)로 표현했지만... 그래도 왠지 멋져 보인다.
유명인들의 사연 깊은 물건들 중에서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에 관한 글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었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활약할때 독일에서 아침 식사때 항상 사용했다는 계란 받침대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아침은 차범근의 담당이었다고 한다. 일찍 일어나 빵가게에서 빵을 사오고 끓는 물에 3분간 달걀을 삶아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던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 나라 축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그에게 그 소박한 아침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서 그 사람의 진짜 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은 불과 아버지 세대에서 누렸던 것을 많이 손해보고 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여자 입장에서는 지난 시간 동안 너무나 과분하게 누리고 살아 온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세상은 여자 보다 남자들이 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자의 물건, 그 사람의 물건에서 주인의 역사와 성격까지 알게 해 준 참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심리학자가 부럽게 느껴졌다. 심리학은 결국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가치를 잴 수 없는 재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