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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첫 설. 결혼 이후의 첫 명절은 추석이었지만 신행인사와 겹쳐 있어서, 사실, 나는 한복 곱게 입고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이 많았더랬다. 하는 일이어봤자 설거지가 대부분이었지만, 여하튼, 그래도 부엌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로웠던 명절. 그리고 두번째 명절인, 설을 보내고 왔다.

시댁의 풍습에 따라 움직인 나의 4박5일의 일정을 다 설명하기는 너무 힘들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음식을 했고(나는 도왔고), 많은 흰떡을 썰고, 많은 그릇을 설거지했다. 명절 전날들의 일과들도 복잡다단했지만, 명절 당일에도 만만치 않다. 시댁에서 할머님과 아버님과 어머님, 아버님형제들과 숙모님들에게 세배를 하고, 큰집(아버님의 큰아버지댁)으로 가서 세배와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한 후, 다시 시댁으로 와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하니 반나절. 모두들 가시고나니 이제는 아버님과 할머님 세배 손님들을 오시기 시작한다. 말은 간단한 순서이지만, 쉰 명이 넘는 대가족들(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아버님의 작은아버지댁 식구들은 사정이 있어 함께하지 않았으니!) 의 차례상 차리기와 음복상을 차리는 일과, 세배손님들의 다과상을 차리고 치우고, 차리고 치우는 일련의 부엌 일은 말처럼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비록 단순업무일지라도 말이다.

그 과정 속에서 어머님과 작은어머님들이 오랜 세월 몸에 배인대로 명절 준비와 명절 당일 일을 치루는 모습을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참, 대단한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왜 며느리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는지, 명절이 끊나면 왜 여자들이 며칠씩 앓아야 하는지도 깨닫는다. 사실, 설거지외에는 별로 한 일도 없는 나는 그저 그분들을 바라보는 일만으로도 숙연함마저 들었던 것이다.
허례허식이 아니라, 담담히 집안의 대소를 함께 일궈가는 친척분들의 마음도 읽히고, 그 일련의 과정을 궂은 표정 하나 없이 굳건히 해내는 집안 여자들의 행동들에 나는 또 많은 것을 배운다. 비록, 가족이라는 둘레 속에서 나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더라. 그 사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감격할 지경이었으니까. (친정이 워낙에 약식으로 명절을 보냈던 까닭에, 이런 명절 풍경과 풍습은 나를 흥분시키는 것이다. 체험학습장에 떨궈진 학생같은 마음으로, 나는 또랑또랑 눈을 크게 뜨고 그렇게 그 공간속에 노여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거대한 4박5일을 치루고 온 기분. 그런데, 딸기와 우유에 대해서는 꼭 적어둬야겠다. 명절 전 날, 아버님이 과일 장을 보러 가시는데, 나는 또 철없이 딸기 많이 사오세요- 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치 내 아빠에게 응석부리듯이 말이다. 그런데 아버님, 정말 딸기를 많이 사오셨다. 차례상에 올릴 큼지막한 딸기랑, 식구들이 나눠먹을만한 조금 자잘한 딸기. 그런데 입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이제 여섯살되는 막내도련님은 딸기를 보자마자 딸기타령이고- 아무튼, 우여곡절 속에 어머님이 딸기 한 접시를 숨겨서 내 주셨다. 남편과 몰래 먹으라고. 난 또 철없이 그걸 들고 들어가 남편이랑 다박다박 다 먹어치웠다. 친척분들 다 가시고서, 아버님어머님,남편과 나 우리 식구만 남았을 때 아버님이 딸기 많이 먹었느냐고 물으신다. 워낙에 사람이 많아서 못 먹었을까봐 걱정하신 모양이다. 그러자 어머님이 또 어딘가에 숨겨놓으셨던 딸기를 한 접시 내오신다. 아무도 손도 안 대는 딸기. 며느리 먹으라고, 일부러 두 번 장을 봐 오셨다는 아버님 말씀 듣고서 난 또 감격. 남편은 옆에서 아들한테는 그런 사랑 보여준 적 없는데 며느리만 이뻐한다고 투덜거리고. 그래서 난 배가 터지도록 신나게 딸기를 먹었다. (게다 어머님 결국 또 한 접시 딸기를 싸주셨다. 올라가서 먹으라고.)

우유는 어머님과의 일화. 우유를 체질적으로 받지 못하시는데, 시댁에 가니 우유가 몇 개 있다. 선물로 받으신 모양. 딸기 우유랑 초코 우유가 있는데, 초코는 남편 주고, 난 또 딸기 우유를 한 자리에서 두 개나 마신거다. 것도 눈뜨자마자 아침에 말이다. 우유 좋아하는 며느리인줄 아시고, 어머니 일부러 장 봐오시는 길에 커다란 우유 한 통 사 놓으신다. 막내 도련님 건 줄 알았더니만, 어머님 나 먹으라고 사 오셨다는 것. 아, 감격. 그런데 그 우유를 다 먹지 못하고 왔으니, 송구스럽네. 쩝쩝.

사실, 해보지 못한 일을 하는 건 어렵다. 아직도 근육이 뭉쳐 온 몸이 저릴 정도였다. 그건 내가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워낙에 몸을 안 쓰던 사람이 아침부터 움직였기 때문에 생기는 통증. 그런데, 어머님은 이런 일을 삼십년이 넘게 해 오셨고, 게다, 아직 정리가 안 된 집안이라는 것을 아니, 내가 아픈 것도 참 죄송스럽다. 다음 명절에는 미리 몸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아무튼, 그런 명절이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느끼고, 많이 행복하기도 했던.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놀린다. 당신처럼 시댁가는 걸 좋아하는 여자도 없을 거라고. 나는 그 소리를 칭찬으로 듣는다. 물론, 앞으로 더 잘하자는 다짐도 들어 있다는 것도 안다. 수고했다는 남편의 칭찬도 역시나 나에게는 고마운 느낌으로 가득.
딸기, 우유, 작지만 아주 큰 느낌을 받을 명절의 일화,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그렇게 보낸 나의 결혼 이후의 첫번째 설,이었다고 말이다.

 

 (초등학생 버전의 일기라면, 이렇게 끝나야 할 것이다.
ㅡ 어머님과 팔짱을 끼고 장을 보러 가고, 백화점에도 갈 수 있어서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ㅡ 새해 덕담으로 아가 얘기를 가장 많이 들어 쑥스럽기도 했다. 
ㅡ 그래도 세뱃돈도 많이 받아 아주 즐거운 명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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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05-02-2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정말 마음 좋으시고..어지신 시부모님을 만나셨군요!^^
착한 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댁 식구들과 남편분을 만나신것 같아 한시름 놓입니다..^^
그리고 그많은 명절 음식 해나르는 모습에서 짜증과 곤혹스러움을 느끼기 보다는 되려 숙연함을 느꼈다는 대목에서 저또한 많은 반성을 해봅니다.
저도 처음엔 친정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보지 못했던터라 어머님이 제사음식을 차리시는 모습이 많이 신기했었고..재미가 있더니만..이젠 슬슬 꾀가 생기려 하네요..^^
그래도 저흰 식구들이 흩어져 살고 있어서인지...시댁 큰댁엔 장손 집안이지만 찾아가는 손님이 저희 식구들하고 둘째 시큰아버님댁의 아주버님들 밖에 없어요!
장손이신 큰댁엔 또 딸만 여섯인데다 시아주버님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어서 큰댁의 형님과 저 이렇게 며느리가 둘뿐이어도 한랑하네요..ㅋㅋㅋ
그래도 제가 장손 며느리가 아니어서인지? 조금 꾀가 생겨요...ㅠ.ㅠ

암튼....님의 그러한 고운 심성이 영원히 변치 않으신다면 복을 많이 받으실꺼라고 믿습니다...며느리를 위하여 장을 두번이나 봐오신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것 같아 기분 좋으네요..^^

싹틔운감자 2005-02-26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시름 놓인다,라는 표현. 참 고맙고 좋은 거 아시죠? 제가 님을 언니처럼 느끼는 이유가 바로 그런 거 같아요- ^^

그런 일이 있었어요. 결혼을 앞두고 일터 동료분과 함께 송별회 자리였어요. 아가가 있는 기혼 여성인 분과 이래저래,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충고도 받고, 격려도 받고, 축하도 받고, 뭐 그런 자리였지요. 아무튼, 그때, 제가 응석부리듯이(제가 무척 따르던 선생님이었거든요),
"글쎄, 명절때 한복을 입는대요!"
(친구들은 이 얘기에 다들 '너 고생 좀 하겠다-' 라는 말만 했거든요) 그런데, 이 선생님 왈,
"아니, 얼마나 좋아요. 선생님은 조금 힘들지 모르지만, 나중에 아가를 생각해보세요. 아가가 자기 집안과 어른들에 대해서 몸소 체득하게 되는 경험을 주는 일인데, 그게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안그래요?"
그 말에 저는 그만 아차, 했다지요.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한복을 입는 것도, 손님상을 차리고, 명절 일을 하는것도 하나도 힘들지가 않고, 즐겁고 신이 나더란 말이지요^^ (친구들은 '니가 아직 신혼이어서 그래-' 라고 비죽거리지만요;; )

저도, 꾀가 생길 때가 오겠죠. 그치만 그 전에는 이렇게 착한며느리모드로 유지하려고요^^
아무래도, 시댁부모님이 제게 이리 잘 해주시는 걸 보니, 저, 결혼 하나는 잘 한 모양입니다. 하하아- 이게 웬 팔불출;; ^^

- 그렇게 사랑 많이 주시는 시댁 부모님 생각하면, 저도 '잘 살아야지!' 라고 불끈, 주먹 쥐게 된다지요. 행복해야 하고, 건강하게 삶을 꾸려야 겠다는 생각 말이지요. ^^
 

 

     책은 어제 도착했다.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임신-출산-육아 전반의 모든 것에 무지하니까, 무지하니까 두려움과 겁만 있어서, 혹은 이래저래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들은 자꾸 들리는 시기이기도 해, 작정을 하고 읽어야 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독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권 두면, 오래오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책이니, 맘 먹고 구매를 한 것이다.

허나, 공교롭게도 오늘 나는 생리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계획 임신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던 첫번째 실패이기도 한 날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저 책이 절실하게 필요한 책이 되는 듯 싶기도 하고.
여하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낸 한달간은 조금 분주했었다. 비타민제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남편이 담배를 필 때는 멀찍히 다른 방으로 도망가 있었고, 손님이 왔던 날에는 차려놓은 술상 앞에서 맥주 대신 보리차를 대여섯 컵이나 마셨던 일도, TV에서 안 좋은 장면이 나오면 슬쩍 고개를 돌리게 하던 남편의 손길이라든지, 이 책을 주문하면서 느꼈던 감동스러운 느낌들이라든지, 하는 것들. 뭐 그런 한 달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행복하기도 했던 한 달이었으므로, 괜찮다. 그래, 괜찮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아가가 찾아오질 않았는가보다. 

뭐, 첫 한 달 시도하고서 이렇게 호들갑이라니- 그만큼 바람이 컸었나, 오히려 예상치 않은 감정 속에 휘말리는 내 스스로가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래서그랬나. 남편에게 말 하고 나니, 남편이 따스하게 안아주면서 말한다. 괜찮다고. 아프지만 말라고. 그래그래, 이제 뭐, 이제 겨우 처음 시도였는걸. 너무 우울해해서도 안 될 것 같아, 나도 괜찮다고 남편에게 방긋 웃었다.

여하튼, 이미 꽉 찬 나이, 친정과 시댁에서의 은근한 기대와 바람은 점점 표면화되고, 나는 초조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가가 어디 마음대로 찾아오는 게 아닌걸.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일이다. 삼신할매 어서 오시라고 마음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으실으실 추운데다, 생리통까지 슬슬 피어오르니, 따스한 물 한 컵을 마시고, 침대 속에 들어가야겠다. 두껍지만 이 책도 들고. 그리고 차근차근 읽어가야겠다. 책은, 그래 책은 왔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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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남편의 생일, 결혼하고서 첫 생일이다.
저녁을 먹고, 고기국물을 내고, 미역을 담그고, 푹 익힌 고기를 손으로 잘라내고, 미역을 넣고, 간을 맞추고, 해서 미역국을 끓였다. 내 생애 처음으로 끓여 본 미역국이다. 서른 평생, 엄마 생일상에도 끓여주지 못했던 미역국을 오늘, 끓였다.

친정엄마는 아침부터 전화를 걸어 미역국을 끓이는 방법을 누차 설명하셨다. 저녁에는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미역국을 끓였다고, 나이가 들면 자식 낳은 달에 아프시더라고, 몸 조심하시라는 안부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가 대신 미역국을 끓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신다. 마음이 좋다.

내 나이 설을 지나면 서른 하나, 결혼한 지 넉 달 보름이 되었고, 평생 살던 지역을 떠나 낯선 청주에 살고 있다. 
할 줄 아는 음식도 없고, 아는 이웃하나 없다. 남편과 보내는 시간,  친구들과 전화 수다, 그리고 서재에 틀어박혀 읽는 책과 인터넷이 나의 일상의 전부인 나날들. 내 평생 처음 겪는, 너무 많이 달라진 일상의 궤도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언제까지를 신혼,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일상이 불리워질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아줌마,라는 명칭이 나의 살에 착착 감기는 호칭이 될지도 나는 아직 모르겠다. 미혼과 결혼 사이에서, 신혼과 아줌마 사이에서, 어디에도 어정쩡한 자리로 서 있는 지금. 나는 어서 아줌마가 되었으면 좋겠고, 어서 아가 엄마로 불리워졌음 좋겠다. 그런 나날들. 속의 나는 이 곳에 첫 시작을 한다.

눈이 온 날, 미역국을 끓이다.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싹틔운감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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