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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ㅣ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모모>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분류되는 것이 적당하겠고, 비룡소 걸작선은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에야 겨우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모모>를 한없이 유치한, 혹은 단순한 권선징악의 돌림노래쯤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집에서 빌려읽은 이후, <모모>는 선물목록 1위 도서가 되어버렸다.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은 세상, <모모>가 말하는 아주 기본적인 주제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 작은 책(비룡소 판은 이전에 비해 약간 두껍고 작아졌으며 갈색 활자체로 씌어져서 아주 맘에 든다)은, 분명 어떤 책과도 다른 색깔의 감동을 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가 성공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TV는 끊임없이 유명인들의 성공신화를 되풀이해 보여주고,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인 딜레마겠지만) 무언가를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무서운 세상 속에서 앞을 향해 달려가느라 미처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다. 이미 수많은 이야기들이 발전의 미친 가속도에 제동을 걸어왔고, 우리도 경쟁과 효율성 속에 어그러져 가는 어떤 소중한 가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다들 수긍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상하게도 문제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많은 지적들은 대안 제시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짐짓 딴전을 핀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잘못되었으니 고쳐라, 이 이상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다른 사람의 시간을 훔쳐서 연명하는 회색 신사는, 어쩌면 그렇게 속도로 가득찬 사회를 질타하는 수많은 비난의 화살 속에도 살고 있을지 모른다. 지루한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최악의 죄악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는 쉴새없이 무언가를 비난하는 것조차 미덕일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흙장난을 하는 대신 니키,케빈 등의 이름표를 달고 학원에서 현지인 교사와 회화를 해야 하는 요즘같은 시대에는 말이다. 우리는 대체 그렇게 저축한 시간들을 어떻게 할 셈일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영어를 배워야 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특목고에 들어가기 위한 특수반에 들어가야 하고, 요행히 대학교에 입학해도 취업 전쟁을 치러내야 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는 도태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성공신화는 매일 방송되는 시대에는. 그러나 그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에 들어오면서 정은 사라지고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와 역전되는 물질 만능주의가 나타났다고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는 가르치지만, 고작해야 100년도 안 되는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갈 자손을 남기랴 우주 곳곳으로 뻗어 나가랴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랴 문화를 발전시키랴, 인간은 늘 너무나 바쁘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모모>는 시대상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작품이 아니다.
<모모>는 너무 느리고, 너무 단순하고, 그래서 늘 유효하다. 자신이 백 몇살쯤일 거라고 생각하는 꼬마 소녀, 모모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존재치 않았고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기롤라모가 허풍을 섞어가며 들려주듯, '이야기'는 인류 역사 이래 늘 존재하지 않던가. 기롤라모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곳은 어쩌면 예전의 지구를 몽땅 옮겨놓은 아주 다른 어떤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 앞에 놓인 옛 지구의 받침대와 같은 <모모>를 보며,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글자가 있기도 전에 있었던 것들, 우리의 두뇌는 알 수 없어도 우리의 영혼은 기억하고 있을 그 우주의 노래들과 시간의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어쩌면 다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잃어버린 것들의 이름을 한 번쯤 불러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