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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찬찬히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을 손으로 짚어내려가다 보면 대체 이 사람은 어떤 유년기를 보냈길래 이런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든다.매우 간단한 펜선과 거의 쓰이지 않은 듯한 컬러,그러나 대책없고 사랑스러우며 시끄럽기 그지없는 그 꼬마들의 모습을 그토록 생생하게 지금 그 나이에 그려내고 있다니.(세상에, 그는 1932년 생이다.)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며 모자같이 생긴 보아뱀 그림을 불후의 명작으로 후세에 길이 길이 남긴 <어린 왕자> 의 쌩 떽쥐뻬리를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행방불명되어 자신의 영원한 캐릭터 어린 왕자와 함께 소혹성 B612로 날아가 버린 쌩 떽쥐뻬리와는 달리,장 자끄 상뻬는 지천명과 이순,그리고 옛적부터 드물며 마음 가는 대로 해도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는 나이,일흔을 넘기면서 여전히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구워내고 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유쾌하고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그의 짧은 이야기이다.아무 때나 얼굴이 빨개지고,정작 남들의 얼굴이 다 빨개지는 순간(예컨대 커닝한 것이 들킬까봐 꼬마들이 조마조마해 하는 바로 그 때)에는 얼굴색이 멀쩡한 마르슬랭 까이유.여기서 약간만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본다면 이 아이의 뿌리깊은 컴플렉스와 '다른 것'을 용납치 않는 사회의 냉랭한 시선,집단 따돌림 같은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가 튀어나올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르네 라토라는 이름의,시도때도 없이 재채기가 나오는 꼬마를 등장시켜 그 모든 갈등을 일소시켜 버린다.
게다가 '내가 여러분을 우울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이 두 친구가 자신들의 일에 떠밀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었다며,각박하고 바쁜 세상에 옛 친구를 만날 시간이 어딨겠냐며 코웃음을 칠만한 독자까지 포용하는 여유를 보인다.코흘리개 시절의 우정은 '아이러브스쿨'에서 검색만 하면 나오는 세상에,그러나 버스에서 재채기 소리로 르네를 알아보는(알아듣는) 마르슬랭의 이야기는 결국 읽는 이의 입에 미소가 떠오르게 만들고야 만다.누구나 숨기고 싶어하는 빨간 얼굴 혹은 재채기는 사실 아무 얘기 없이도 서로의 영혼을 읽을 수 있는 매개체라는 이 老작가의 혜안은 갓 구워낸 빵처럼 달콤하고 흐뭇하기 그지없기 때문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