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인생의 영화 ㅣ 내 인생의 영화
박찬욱, 류승완, 추상미, 신경숙, 노희경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영화' 대신 무엇이 들어가도 상관은 없다. 내 인생의 책? 음악?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결국 궁극적으로 그런 타이틀을 달고 있는 글이 폼잡고 하려는 말은, 다름아닌 '내 인생'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름 석 자 들으면 대부분 알 만한 사람들, 평범한 시각으로 볼 때 제법 '번듯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 풀어놓는 인생과 영화 이야기. 솔깃하지 않을 수가 없다. <씨네21>의 이 칼럼을 때때로 읽을 때면 나는 언제나 농도 짙은 질투와, 그보다는 동경과 부러움을 더 깊게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칼럼을 묶어서 책이 나왔다고 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대개는 놓쳐버렸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들은 어떤 영화를 제일 첫 손가락에 꼽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역시나 ㄱㄴㄷ순으로 배열된 필자들의 직업은 각양각색이었고, 글로만 먹고 사는 사람부터 사실 글쓰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까지 일렬로 세워놨으니 그 글솜씨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영화 역시 그들을 닮아 있는지, <남과 여> 정도만 두 번 언급되었을까, 히치콕부터 시작하여 <영웅본색>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 '다름'과 '차이'에 주목하면서 책을 읽어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의외로 표지는 촌스런 취향의 디자인이었고(내가 보기엔), 제목을 단 글씨체 역시 복고풍이었다. 책을 엮은 사람들이 모두 과거를 음미하면서 글을 적어내려갔기 때문일까. 오래 두고 읽기엔 좀 아쉬운 모습의 책이었다. 혹시, 판을 바꿔서 다시 찍어내면서 정말 세련된 양장판으로 변신을 거듭할지도! 몇 번을 그런 경험에 시달린 나로서는 조금 슬픈 예감이다.
하지만 내가 책이 나오자마자 사들여가며 이 책을 읽으려 했던 이유, 류승완, 박찬욱의 얘기는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풀어놓는 영화 이야기는 어떨까. 류승완은 당당히 성룡의 영화를 Best of Best로 추켜세우고 있었으며 박찬욱은 역시나 제 스타일대로, 스타일리쉬하게, 죽은 친구와 자신의 영화와 아벨 페라라까지 한 편의 글에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내가 가장 여러 번 본 영화인 <봄날은 간다>가 신혼의 부부에게는 어떻게 다가갔는지 SBS 아나운서 최영아가 적어놓고 있었고, 공지영, 신경숙, 한강, 이런 여자들은 소설을 써내듯 짧은 분량 안에 자신의 문체를 되살려내었다. 아름답다, 고까지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한 나직한 말투들. 결국 그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는, 영화 이야기라기보다는 모두 사람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제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영화도, 책도, 음악도, 그 어떤 것이든 동원할 수 있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역시 '사람'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의외의 글의 출현과 그로 인한 느낌들을 다양하게 선사했지만 마치 예정된 전개인 것처럼 모두들 닮은꼴의 도형처럼 비슷한 모양이 되어 한 줄기의 감상을 남겼다. 그리고 나의 삶을 반추해보면, 나 역시 이 책의 가상의 필자가 되어 몇 번이고 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영화와, 나에 대해.
그래서 각각의 글의 완성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 ㄱㄴㄷ순으로 배열된 필자들의 삶을 잠깐 엿보았을 뿐이다. 누가 다른 사람의 삶에 평점을 매길 수 있는가. 사실 영화도 그렇다. 누가 감히, 제 모든 열정을 쏟아부은 작품에 무슨 알지도 못하는 각종 이론을 끌어댄 후 별을 몇 개 선심쓰듯 남겨주는가. 내가 봐서 좋으면, 그것이 내 인생 최고의 명작인 것을. 아주 단순하지만 그래서 자주 잊게 되는 그 진리를 이 책은 살포시 일깨워 준다. 이 책을 완성한 그들은 10년, 20년이 흐른 후의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영화가 그 후의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놨다고 고백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역설적으로 '언제나' 유효하다. 다소 유치하고 부족할지라도, 늘 미완의 상태일지라도, 오탈자가 여기저기 남아있을지라도, 1판 1쇄의 책만이 갖는 그 싱싱함. 하기야 삶은 언제나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데 영화라고 왜 안 그러겠는가. 수줍은 첫사랑의 고백처럼 이 책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가능한 매력을 지녔다.
박찬옥 감독은 평소에 그리 좋아하지 않았는데, '헐크'들이 사람 안에 어떻게 살고 있나 꿰뚫는 글로 나를 사로잡았다. 제 안의 괴물을 숨기지 못하는 자들의 자기 연민과 괴로움, 그것은 비단 박찬옥만의 쓸쓸함은 아닐 것이고 나와 박찬옥만이 공유하는 일도 아닐 것이며 그런 것을 뛰어난 예술로 승화시킨 마틴 스코시즈 감독에 감응하는 모두가 느끼는 쓸쓸함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인정옥 작가의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 "심각하고 엄숙하고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이 싫다, 제 안에서 진지하고 그래서 몸이 가벼운 사람이 좋다. " 심각함과 진지함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옥 작가가 지적해 주었다. 군데군데 묻어나는 유머가 가득한 글들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심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