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내기전까지..나 역시 몰랐다. 

울프의 책 <병듦에 대하여>는 보이지 않고 헤르베르트 플뤼게의 <아픔에 대하여> 발견^^

질병은 모든 인간 경험의 일부다.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향상시키고 자의식을 줄여준다.그것은 고해성사를 불러온다.건강할 때 감춘 것들을 말하고 진실을 털어놓게 된다/버지니아 울프 <병듦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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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을 온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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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들린 아이 캐드펠 수사 시리즈 8
엘리스 피터스 지음, 김훈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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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 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끈 건 분명하지만, 번역을 '귀신 들린 아이'로 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였을까, 독자가 냉큼 그러한 까닭으로 넘어(?)갔으니 할 말은 없지만... 너무 단순하게 '귀신 들린' 소리를 낸다고 해서 .. 원제목도 '귀신 들린 아이'는 아닐것 같은데...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아이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한 형상을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한 걸까...


시리즈 9편보다 흥미롭게 읽었다. 특별하지 않은 주제인것처럼 보이지만,아주 심오할 수 밖에 없는 주제. 가끔 나쁜짓한 유명인이 종교인으로 변신(?)하는 걸 보면서 정말일까, 거짓일까.. 삐딱한 눈으로 바라본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종교에 입문하는 모두가 선한(?)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을수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전제가 깔린 이야기. 물론 <귀신 들린 아이>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건 그런 이들을 고발하고자 함을 아닐게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메리엣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다. 스스로 신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느낌적인 느낌..은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이 던져질게다. 밤마다 그가 꿈속에서 부르짖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그래서 누군가에게는 귀신 들린 목소리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매커니즘을 통해 믿음과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동시에 아버지 레오릭의 고백 덕분에, 사과하는 마음을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배워야 하는건 아닌가 생각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그를 살인범으로 오인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를 살인범으로 몰았다"/327쪽


"그래서 아들한테 얘기했습니다. 영혼의 파멸을 무릅쓰고라도 내 손으로 시신을 처리하겠다.그렇게 네 목숨을 구할 테니 너는 세속을 떠나 영원히 속죄하라는 길을 택하라고요(..)"/328쪽


"그는 강직하고 당당한 자세로 자신의 모든 죄상을 소상히 고백했으며 라둘푸스 수도원장은(..)그죄에 걸맞은 적절한 속죄행을 명하고 모든 죄를 사해주었다"/329쪽



<귀신 들린 아이>의 드러난 줄거리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돋 사랑이 고팠고, 신뢰하지 못한 관계속에서 벌어지게 될 수 있는 참담함을 마주했다. 전혀 언급되지도 않았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으니까...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와서 레오릭의 고백..을 들으며 잘못에 대한 용서의 교과서를 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울컥 했다. 말도 안되는 사과..를 지켜본 이후 내 마음속에 내내 그것이 웅어리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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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에 대해 생각 많은 요즘이라...

절망은 치명적인 죄지만 더 고약한 건 어리석음이야!"/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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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하니 수사님이 그 늙은 폭군보다 메리엣에 대해 훨씬 잘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그 사람은 자신의 작은아들을 너무 모릅니다.불과 몇 주밖에 함께 지내지 않은 이들이 아버지보다도 그를 훨씬 더 잘 알고 훨씬 더 깊은 믿음으로 대한다는게 참...(..)"/248~249쪽 아들과 아버지가 언급되는 순간 투르게네프 소설이 생각났다. 그냥 불현듯..불쑥 그렇게 생각이 나면 새삼 궁금해진다. 그리고 세세한 줄거리까지 기억나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며... 고맙게도 리뷰로 남겨 놓았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으로 떠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종종 '오독'이란 표현을 쓰게 된 시점도 알았다.2015년 즈음부터였다는 사실을..^^


손철주선생은 그림을 본다는 건 어쩌면 오독인지도 모른다고 했다.그러니까 취향이란 말을,편협된 시선을 조금 세련되에 바꿔 놓은 표현일지도 모르겠고.최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로부터 심한 화살을 하나 맞았다.(당시에는 내가 맞았다고 생각했지만..지금 생각해 보면 서로에게 날렸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 하다.)그래서였을까.그림에만 오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독서에도 오독은 필요조건이란 생각을 했다.(아니,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며칠전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도 그랬고,장 그르니에의  '섬 을 읽으면서도 위로를 받을수 있었던 건 오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그땐 또다른 오독이 기다릴테지만.무튼 최근 나의 독서 과정은 오독의 시선임에 틀림없다.그러나 때론 편협한 시선으로 부터 받는 위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단 소설 속에서도 누누히 경계하는 것처럼 한쪽으로 치우친다거나 자신을 지치게 할 만큼의 파워플한 원칙만 세워 놓지않는다면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러시아의 정치적 격동기 시대를 살았던 투르게네프가 본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해서 나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 덜컥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은 1861년 농노 해방을 목전에 둔 러시아가 배경이라고 했다.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전통을 지키려는 세력간의 힘겨루기.그러나 투르게네프는 그 모습을 좀더 확장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소설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습이란 러시아의 농노 문제뿐만 아니라,수많은 가치관의 충돌이다. 소설에서 가장 큰 각을 세우는 인물은 아르까디의 큰아버지와 바자로프다. 자신의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같은 것이 저들에게 있다보니,바자로프는 아르까디 큰아버지의 세계의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고,큰아버지는 요즘과 다르지 않게,젊은 것들이란..식으로 바자로프를 바라본다.각자 자신이 세워둔 원칙에서 위배 되는 문제가 보이면 그럴수도 있지가 아니라,어떻게 그럴수가 있지.혹은 그러면 안되는 거지..라는 세계에 자신들을 가둬버린 것이다.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면 토론이 되겠지만,자신의 생각은 옳고,그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 지적한다면 당연히 충돌할 수 밖에.정신없이 쏟아지는 충돌 사이사이 만나는 해법은 숨은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 마저 든다.정신없이 충돌하고 싸우고,서로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과정으로 소설이 흘러갔다면 읽는 것 자체가 고문이였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옳고 그름이란 것은 애초에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듯 한 작가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념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을 터.그러니까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바로 왜 우리가 충돌을 하게 되는 그 이유라도 파헤쳐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각자의 주장을 내세우려한 저들의 입보다 충돌 자체가 더 도르라진 까닭은 앞서 말했듯,친구와 내가 서로에게 날린 화살이란 문제가 닮아있다.만약 충돌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란 없는 걸까? 작가의 생각은 의외로 심플하다.실은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배려' 나의 입장이 아닌,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다면,큰아버지와 바자로프는 결투 자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나의 입장에선 내가 오른 것 같아도 혹은 정말 옳을수 있어도,상대방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면 적어도 격한 충돌로 가기 직전 답은 나오지 않을까? 아버지와 아들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린 세대간의 갈등으로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게 된다.그러나 과연 젊음과 나이듦이란 육체적인 이유에서 갈등이 비롯되는 것이기만 할까? 궁극적으로는 '배려'의 마음이 서로에게 있지 않아서는 아니였을까? 친구에게 화가 났던 건 내가 배려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친구 역시도 같은 이유였다는 거다.그러니까 갈등의 불씨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유로 우리는 충돌을 했던 것이다.아이러니 한 점은 소설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물은 바자로프의 친구인 아르까디인데.그의 이름은 이상향을 뜻하는 아르카디아를 연상시켰다는 점이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만약 이상향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차용한 것이라면,결국 소설처럼 현실에선 충돌에 앞서 배려의 마음을 갖는 것도,이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또다른 방향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풍자였을까? 진부한 제목이라 생각되는 제목이라 쉬이 손이 가질 않았었다.읽다가 멈추기도, 꽤 여러 번 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은 건 잘한일 같다.갈등과 충돌에 대해 이보다 더 직접적인 제목이 있을까 싶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까,올 겨울 다시 <아버지와 아들>을 읽어봐야겠다. 그때와 지금 어떻게 다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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