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즐겨듣던 라디오 프로에서 '파리의 노트르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해 준 걸 기억한다.방송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파리의 노트르담' 하면 종지기 카지모도 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에 당시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클로드 신부의 숙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퍽 흥미롭게 다가왔다.이건 그야말로 숙명이 아닌가? 불구의 종지기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을 사랑했고,집시 여인은 또 다른 장교를 사랑했고,가장 잔인한 숙명은 신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에게 속세의 사랑의 감정을 품어야 한다는 그 잔인한 숙명까지...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는 쉬이 넘어 가질 않았다.그렇게 오랜 시간 '파리의 노트르담'은 내게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다시 읽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이 소설은 그저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클로드 신부의 사랑이야기가 아니였다는 것을.15세기의 파리 혹은 19세기의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역사를 파리의 노트르담이 지켜 보고 있었다는 것을.그러니까 종지기 카지모도 도 클로드 신부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였던 거였다.다만 읽는 이가 누구에게 애정을 품는가에 따라 조금 크게 부각되어지는 것이였을 뿐. 그래서일까? 나는 숙명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괴로워 한 클로드 신부에게로 시선이 갔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다룬 탓도 있지만 클로드 신부를 보면서 오래전 보았던 우리나라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신을 따른다는 것이 숙명인 자에게 속세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은 과연 숙명을 저버리게 되는 것일까? 만약이란 가정법은 무의미하지만 클로드 신부가 자신의 신부로서 숙명을 벗어 던질수 있었다면 ,숙명이란 것이 오로지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에스메랄다에 대해 그토록 무서운 집착을 갖지는 않았을 텐데...그런점에서 보면 에스메랄다 나 카지모도는 얼마나 자유로운 인물들인가? 자신을 구원해 준 이를 위해 사랑할 숙명을 기꺼이 받아 들였으니까 말이다.그래서 나는 클로드 신부가 행복에 관한 생각을 읇조릴때 마음이 스산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보바리 씨도 그랬지만, 노트르담에서도 콰지모도에 관한 이야기라 흥미롭게 읽혔다. 오래전 읽은 나의 노트르담..을 살펴봐도 '추함'에 대해 크게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망겔 선생의 시선으로 소설 속 인물과 만나는 시간은 즐거웠다. 노트르담성당의 아름다움을 위해 추한 콰지모도가 필요했다는 설정..이라니 무엇보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던져진 질문은 놀라웠다. "카지모도는 겉보기와 정반대의 내면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질항아리에 예쁜 꽃들을 담아 에스메랄다에게 보여줌으로써 세공된 크리스틸 화병에 꽂힌 시든 꽃들과 비교하게끔하는데,이처럼 자신의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으나 아무도 그걸 들여다보려고 노력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다정하고 관대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고 감사를 표할 수도 있으며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그런데 이 모든 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이 소설의 제목에 이름을 내준 건물이 그 어마어마한 아름다움으로 규정되듯,그는 괴물처럼 흉측한 외모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험한 관점으로서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등이 구부정하고 이가 들쑥날쑥하고 눈이 비뚤어진 카지모도가 실상 훌륭한 사람이라면 정교하게 세공된 석제와 스테인드클라스로 이루어진 노트르담 이면의 실상은 과연 무엇일까?"/ 202쪽  소설을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뮤지컬을 보면서..는 카지모도에게도 사랑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신부가 더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숙명'이란 화두가 그런 시선으로 보게 했던 걸까.. 아니면 내 무의식에 카지모도의 추함...이 작용한 걸까.. 오리지널 내한 팀이 다시 국내에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그때는 카지모도의 마음으로 읽어봐야 겠다.^^



"내면과 외면 또는 보이는 것과 감춰진 것 사이의 괴리는 문학에서 흔히 다뤄지는데도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괴리를 맞닥뜨리면 어김없이 속아 넘어간다. 부드러운 눈빛을 지닌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실은 클라우스 바르비(나치치하 게슈타포 책임자)였다거나, 근엄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심술궂은 입매를 한 사람의 사진이 알고 보면 테레사 수녀의 것이라거나(...)우리는 도통 깨우치지 못한다. 얼굴이 카지모도처럼 생긴 사람에게는 좋은 구석이 있을 수가 없다고 자꾸만 믿어버린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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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 관련 영화 개봉 소식도 들리더니... 신간 코너에 뭉크 책도 보이더라는.. 뭉크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있다. 그럼에도 궁금해서 차근차근..  열린책들에서 나온 <공포로의 여행>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읽었을 거라 생각했는데..당시 표지가 궁금해서 찾아보고..읽겠다고 메모만 해 놓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무튼 '생 클루의 밤' 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마침내 그 비밀이 풀렸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난 후 그려진 그림이었다. "뭉크는 "아버지는 늘 나에게 꾸중과 잔소리만 했어.난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라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그는 엄마와 누나에 이어 또 한 번의 큰 상실감을 느껴야만 했다. 뭉크는 이 상실감을 <생 클루의 밤>으로 표현했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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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책을 검색하다 마주한 <끝내주는 괴물들> 목차를 살피다,보바리부인이 아닌 보바리씨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읽고 싶어졌다. 지난해 <마담 보바리>를 다시 읽으면서..욕망의 화신이 오로지 보바리부인만이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였다. 당연히 보바리씨에 대한 생각도 이전과는 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그 역시 보바리부인을 향한 욕망..으로 가득했던 건 아닐까.그녀의 죽음 이후 그가 더 이상 살 희망을 이어가지 않았다는 것에..보바리씨를 가혹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망겔 선생은..보바리씨의 문제는 욕망보다 상상력의 부재가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문제는 샤를 보바리에게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과히 둔감한 그의 행동거지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삶의 산물이다.(..)선생님이 자기 이름을 묻든 데 대답도 못 할 만큼 어설프고 소심한 성격으로 묘사한다(...) 보바리 씨는 자기가 내려야 할 결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는 사람이다"/33쪽


열정, 상상력, 독창성, 매력.... 보바리 씨는 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보바리 씨는 아내를 사랑한다. 에마가 죽은 뒤 그는 아내를 잊지 않으려 안간 힘을 쓰지만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35쪽


"플로베르는 고인을 모욕이라도 하듯 이 불쌍한 남자에게 악의적인 클리셰를 덧입힌 셈이다"/36쪽 망겔 선생의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플로베르가 덧입힌 클리셰가 넘어간 1인일게다. 그가 에마를 사랑한 마음보다, 그녀를 가졌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샤를과 그의 어머니는 피곤했지만 저녁에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들은 지난날과 앞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용빌에 와 살면서 집안일을 해 주겠다고 했고, 다시는 모자가 서로 헤어지지 말자고 했다. 아주 오래전에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갔던 애정을 되찾은 것을 내심 기뻐하면서 그녀는 재치있고 다정하게 굴었다(...)"/ 522쪽



 

처음 읽을 때와 다른 느낌이 들거라 예상 했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은 덕분이다. 보바리 부인..에 대한 줄거리는 욕망으로 대표되는  '보바리즘'이라는 용어와 불륜에 관한 이야기라는 정도가..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그런데 플로베르..에서 언급된 보바리..는 놀라웠다. 우선 샤를이 에마를 만나기전 결혼한 이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그가 결혼하게 된 이유가,또다른 보바리 부인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는 두 명(?)의 보바리부인이 등장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 읽을 때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건...과연 에마의 욕망만이 문제였을까... 에마를 부추긴 약사 오메, 뢰뢰.그녀와 ...즐긴 남자들 모두 욕망의 화신들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샤를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에마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어쩜 그렇게 철썩 같이 믿을수 있었던 건지...."그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그녀를 무척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모든 남자가 그녀를 탐냈으리라.그러자 그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고 그녀에 대한 격렬한 욕망이 끊임없이 느껴졌다.그 욕망은 이제 실현될 수 없기에 더더욱 끝이 없었고 절망을 끓어오르게 했다"/525쪽  샤를은 자신이 소망한 거대한 욕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였을까...에마가 욕망의 전부가 아니었다면..딸을 위해 남자는 살아야 했다...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사라진 순간..그는 더이상 살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면에서..욕망이 삶에 의욕이 되는 오메와 뢰뢰 같은 사람이 차라리..나은 걸까... 싶지만 숨막히는건 마찬가지다. 처음 읽을 때는 에마의 무지에 가까운 욕망과 만족을 모르는 욕심에 숨이 막혔는데, 그런 무지를 악용하는 뢰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보바리즘이 아니라 뢰뢰리즘이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조금이라도 내것이 아닌 것에 욕망을 품는 순간 뢰뢰와 같은 인물이 따라 올 것 같은 기분... 인간의 나약함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경험해 보지 않은 이상..나는 에마처럼 살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겠지만...오메와 뢰뢰 같은 사람들은 그런 약점까지 뚫고 들어간다. 왜냐하면 그들의 욕망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타인으로 부터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에 대한 욕망이 고팠던 이들만이 불행해졌다는 것이 그 반증은 아닐까....(물론 누군가의 욕망으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굳건히 살아가는 것으로 믿고 싶게 한 이폴리트와  앞으로의 삶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어린 보바리양(베르트)의 운명이 제일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다. (라고 맺으면서, <마담 보바리>는 이제 그만 읽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보바리 씨에 대해 여전히 나는 온전히 알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정답은 없지만..플로베르가 일부러 보바리 씨..에 대한 어떤 장치를 해 둔 거라면..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으로 이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다시 읽어도 여전히 보바리 씨를 이해할 수 없다면.. 플로베르가 덧입힌 세계안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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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책이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것 같다..

가을 바람..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 나도 저절로 하이쿠가..만들어졌다.


매미소리(가)

사라진 공간으로

가을 바람(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면.. 사라진 자리에, 라고 하고 싶었다^^)



 



가을의 구름

호수에 비친 하늘을 

건너는구나 / 시키


하늘이 얼마나 파랗던지..한강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듯한 풍경을 본 건 거의 없었던 것 같아 사진에 담아 놓았는데... 하이쿠에서 가을의 구름이 가진 매력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가을과 바람은 아주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도 알았다. 내마음대로 하이쿠를 짓고 보니 더더욱 그렇게 보여서 반가웠다. 하이쿠는 잘 모르지만.. 사람의 감성을 풍요롭게 해 주는데는 아주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가을바람이여

눈에 들어오는 것

전부 하이쿠 / 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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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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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스다 미리 책 <런치의 시간>을 읽으면서 '란포튀김'이 언급되는 순간,음식 보다,<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인간 의자'가 더 궁금해졌다. 온전하게 읽은 책이 거의 없기 때문일수도 있겠고,이런 바람이 통했는지, 7월 신간 소식을 들었다.더위를 기담집과 함께 보내려던 바람은,선선한 가을 바람과 함께 시작 되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은 구석구석에서는 얼마나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99쪽




'인간 의자'는 섬뜩하면서도 기이했고,그런데 단편이 주는 매력까지 담겨 있어 놀랐다. 독자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것인가를 상상하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을 모습까지 상상되었다. 의자..를 만들어낸 남자..처럼. 글을 쓰는 작가에게 편지를 보낸 사연을 읽을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의 상상력은 아직도..많이 빈약한 모양이다. 얼굴이 추해서 사람들 앞에 나설수 없는 남자가 가진 탁월한 재능은, 의자를 잘 만든다는 거다. 얼마나 잘 만들어내면..의자 안에 자신이 숨을 공간까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거다.이것이 가능하냐고 따져 묻는 다면 문학을 읽어낼..수 없을게다. 무튼 너무도 기이하고 섬뜩해서..자신이 말한것처럼 정상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순간.. 첫 번째 반전이 드러난다.일본인 집이 언급될 때...작가의 집으로 의자가 옮겨 오게 되었을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럼에도 '기담'이 주는 매력이라면 사실을 알게 되어 싱거운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섬뜩함...이었다. 실제 이런 일이 가능할까..싶은데...누군가 나를 훔쳐본다는 과정만 해도 섬뜩함이 전해져 오지 않던가... 의자에 앉아 창작에 몰두했던 작가의 소름돋는 그 마음이 알면서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만일 이토록 염치없는 제 바람을 들어주신다면 서재 창가에 놓인 패랭이꽃 화분에 당신의 손수건을 걸어두십시오.그것을 신호로 저는 한 사람의 방문자처럼 댁의 현관을 찾아들겠습니다"/107쪽  그런데 반전은, 놀라는 순간 한 번 더 크게 찾아온다. 알고 나면 언제나 그렇듯 허무하다. 왜 거기까지 나의 상상력은 미치지 못했을까. 인간 의자..에게 철절히 농락당한 기분... 그러나 또 이런 반전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단편을 읽는 재미가 아닐까.하고 위로를..의자를 만드는 남자의 마음은 섬뜩했고, 편지를 읽고 있는 작가가 느꼈을 공포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앤딩은 차마 말할..수가 !!


<런치의 시간>에서 언급된 '란포튀김'에 대해 이제서야 궁금해져서 검색해 보니, 도쿄에는 아직도 란포가 애정했던 텐동집이 있다고 한다. 일본은 가고 싶지 않은데...백년이 훌쩍 넘긴..그곳에는 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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